탈영토화와 재영토화라는 개념은 안티오이디푸스에서 처음 등장하는데요. 이후 들뢰즈 가타리가 가장 빈번하게 사용하는 개념 중 하나가 됩니다. 영토, 영토성, 영토화라는 개념이 여기에 추가되어야 합니다. 언어적 형태를 보면 영토라는 말이 일차적 이지만 이 개념을 가동시킨 문제 설정에서 가장 중요하고 일차적인 것은 탈영토화 운동 입니다. 몇 개의 핵심개념에 대해 요약하듯이 서술하는 천의 고원 결론에서 그들이 탈영토화를 표제로 뽑은 것은 이 때문입니다.

 

짐작하시겠지만 영토, 영토성이란 개념은 원래 동물 행동학에서 나온 것입니다. 거주하고 먹이를 얻고 짝짓기를 하는 특정한 구역이 영토이고, 그 영토를 형성하고 방어하며 영토에서 영토로 이동하려는 상향이 영토성 이지요. 개나, 늑대, 새들이 영토를 표시하기 위해 분변을 배설 하거나 소리 또는 시각적 표지를 이용하는 것은 이미 잘 잘 알려진 일 입니다. 인간은 좀 더 강력해서 영토에 대해 배타적 처분권을 보장하는 법적 권리를 사용하고 울타리를 치거나 담장을 세워 침범을 저지하며 관문을 만들어 드나드는 사람들을 선별합니다. 그 안에 있는 이들에게 돈을 뜯어 내기도 하고요. 끔찍할 만큼 영토성이 강한 동물이죠. 

 

영토화란 원래 자신에게 속하지 않았던 것을 자신의 영토로 만드는 것이고 탈영토화는 자신이 영토로 삼고 있던 곳을 떠나는 것입니다. 탈주선의 작동 입니다. 재영토화란 영토가 아닌 곳을 새로운 영토로 삼는 것입니다. 영토를 찾아 나설때조차 떠나는 운동 없이는 영토란 있을 수 없기에 역설적이지만 가장 일차적인 것은 탈영토화 입니다. 고향을 떠나 본 적이 없는 사람에겐 고향이란 관념이 없듯이, 떠나고 이동하는 운동 없이는 영토란 관념도 없지요. 말하자면 영토란 영토화의 산물이고 영토화란 영토 아닌것을 영토화 하는 것입니다. 즉 영토화는 언제나 재영토화 입니다. 이는 주어져 있는 것을 떠나는 운동 즉 탈영토화 운동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탈영토화와 운동이 영토나 영토화 보다 일차적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운동의 양상이나 강도는 상이한 삶의 방식과 연결되어 있는데요. 예를 들면 사냥하는 동물이 그러하듯 수렵민은 자신이 사냥하는 영토를 같습니다. 채취 생활인 또한 영토를 갖겠지요. 영토의 범위는 사냥이나 채취를 위해 자신이 거주하는 곳에서 얼마나 멀리 이동 하는가가 결정합니다. 즉 탈영토화 운동이 영토의 크기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수렵하고 채취하는 사람들에게는 영토 자체가 욕망이나 생산의 직접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영토의 범위는 유연하고 가변적 입니다. 치명적인 재난 같은 특별한 상황이 아니라면 영토를 둘러싼 충돌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동물들이 그러하듯 통상적 상황이라면 서로 영토에 대해 존중하며 살아 갑니다. 목축을 하는 유목민도 그렇습니다. 계절이나 조건에 따라 이동을 하며 살기에 영토를 확보해 둘 이유가 없습니다. 이동을 위해 머물 뿐이니 재영토화 조차 탈영토화 운동의 일부라고 하겠습니다.

 

영토성이 급격하게 증가하게 된 것은 농경 생활과 더불어서 입니다. 토지가 노동의 직접적인 대상이자 생산물의 원천 이기에 생존 조건을 확보 한다고 하는 것은 곧 영토를 확보하는 것과 같은 말이 되기에 그렇습니다. 농경이 시작되면서 대지는 노동이 가해지는 대상이 되고 투입되는 생산요소가 등록될 뿐 아니라 그 자체가 생산물을 산출 하는 핵심적인 자산이 됩니다. 영유하거나 이용하는 대상이자 소유 대상으로의 토지가 이처럼 대지와 구별되게 되면서 영토는 인간들이 생산과 욕망이 집중되는 중요한 대상이 됩니다. 영토를 확보하고 영토를 지키는 것이 중요한 일이 되고 이를 위해 무장력을 조직하고 관리하는 사회기계가 출연합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를 영토기계 라고 명명 합니다. 이 영토기계는 사회의 첫 번째 형식이고 원시적 기계 형태이며 사회적 장을 덮는 거대한 기계입니다. 기관 없는 신체로서의 대지라는 표면에 탈 영토화와 재 영토화의 선을 따라 욕망하는 기계들이 복합체인 사회 기계가 세워지는 겁니다. 

 

사실 지구의 표면인 대지는 원래 그 누구의 영토도 아닙니다. 대지는 환경의 모태이고 누군가의 생존 조건이 될 잠재성을 뜻하지요. 주어진 환경을 떠나지 않는 한 대지는 없습니다. 그저 자신의 환경만 있을 뿐입니다. 대지란 어떤 다른 환경이 될 능력으로서 발견 되는데요. 따라서 자신의 환경을 떠나 어디론가 가려는 자들의 눈에만 대지는 대지로서 드러납니다. 탈영토화가 대지를 대지로 만드는 거지요. 그렇게 떠난 자들이 대지의 일부를 영토화 함으로써 영토가 탄생합니다. 즉 대지는 영토화의 장이자 전제 조건입니다. 

 

하지만 도시의 대지는 지진, 홍수 등을 통해서 영토화 된 생산의 장을 지우고 지구의 표면으로 되돌리기도 하는데요. 안티 오이디프스식으로 말하면 생산의 전제이자 생산하는 기계들을 지우는 반생산의 장이라는 점에서 기관 없는 신체라고 하겠습니다. 들뢰즈 가타리는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대지란 욕망과 생산의 원시적이고 야만적인 통일체이다. 왜냐하면 대지는 노동의 복수적이고 분할된 대상일 뿐 아니라 분할할 수 없는 단일한 실체로서 생산력을 향해 반격하여 그것을 자연적 내지 신적인 존재로 영유하는 충만한 신체이기 때문이다 라고 말입니다.

 

인간도 다른 생명체도 모두 대지라는 기관 없는 신체의 표면에서 생존하는 겁니다. 특히 인간은 그 생존 조건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대지의 표면에 금을 긋고 생산요소를 등록하며 소유권이라는 고체적 형식으로 분할하여 영토화 합니다. 하지만 종종 그 모두를 지우는 반생산이 발생하는 거지요. 최근 기후 위기는 인간이 생산능력을 무력화 하며,  지구의 표면으로 되돌리려는 반 생산이란 말을 실감하게 합니다. 

 

동물 행동학에서 기원한 탈영토와 개념은  행동이나 습속에 관한 좀더 일반적인 개념으로 확장됩니다. 단지 대지 위에서 벌어지는 글자 그대로 영토만이 아니라 어떤 크기와 방향을 갖고 진행되는 다양한 운동이나 흐름을 분석하고 서술하는 개념이 되는 것인데요. 예를 들면 인간이나 원숭이처럼 직립하는 동물의 앞다리는 대지로부터 탈영토와 되요. 도구로 재 영토와 될 때 손이 됩니다. 막대기에서 망치로 젓가락으로 펜으로,  손의  짝이 달라질 때마다 탈영토화와 재영토화의 운동이 발생합니다. 이런 저런 대상들을 향하지만 결국은 남근을 향해 움직이는 성욕의 운동, 신분적 코드에서 벗어났기에 무엇이든 해도 좋지만 결국은 돈을 향해 움직이는 자본주의적 욕망의 흐름은 결국은 일자로 귀착되는 탈영토화 운동을 보여줍니다. 대상을 한없이 바꾸는 욕망의 환유도, 자유라고 명명되는 개인의 선택도,  실은 새로운 초월자로 재영토화 되는 그저 바쁜 탈영토와 운동이 옆으로 간 것입니다. 

 

손과 도구에 대해서 언급 했습니다만 얼굴은 이와 약간 다른 유형의 탈영토화와 관련이 됩니다. 얼굴은 머리의 표면이란 점에서 애초에는 신체의 일부 였지만 그 표면에서 발생하는 표정이 표현 능력을 갖게 되면서 얼굴은 신체로부터 탈 영토화 됩니다. 머리로부터 얼굴이 탈영토화 되는 것과 대응하여 환경으로부터 탈영토화된 풍경이 탄생합니다. 환경이 생존의 신체적 조건인 반면 풍경은 환경을 표면에서 표정을 읽어낼 때 발생합니다. 풍경이란 환경이 얼굴화 된 것입니다. 

 

역으로 영화에서의 클로즈 업은 얼굴을 풍경화 하지요. 얼굴은 풍경이라는 상관 자를 갖는다는 말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입니다. 얼굴이 탈영토화 됨에 따라 손이나 발,  손가락 또한 표현 기계가 되지요.  손가락을 세워 욕을 할 때 손가락은 신체로부터 탈영토화 되어 표현 기계가 됩니다.  옷도 그렇습니다.  추위나 물리적 접촉으로부터 신체를 보호하는 것이 옷이지만 옷이 단추와 주머니 칼라 등을 이용해 표정을 갖게 될 때 의상이 됩니다.

 

손의 탈영통화는 언제나 그것에 의해 탈 영토와 되는 대상을 짝으로 갖는데요. 손이 앞 발이기를 그치고 나뭇가지를 들어 바나나를 딸 때, 나뭇가지는 나무의 일부 위기를 그치고 막대기가 됩니다. 나무로 부터 탈 영토화 되어서 도구로 재영토화 되는 것이죠. 이처럼 탈영토화는 언제나 이중적 입니다. 물론 이는 반대편에서 보면 이중적인 재영토화이기도 합니다. 나뭇가지는 막대기가 되면서 도구로 재영토화 되는 것이고 손 역시 막대기를 사용하면서 도구로 재영토화 되는 것이니까요. 그 막대기로 땅바닥에 글씨를 쓸 때에도 마찬가지로 이중적인 탈영토화와 재영토와 운동이 발생합니다.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포괄적 내지, 국제적 재영토화를 동반하지 않는 분열적 욕망의 탈영토화는 없다. 하나는 다른 하나의 이면이다" 라고했습니다. 이처럼 재영토화 되는 짝을 갖는 탈영토화를 상대적 탈영토화라고 합니다. 

 

손의 이러한 탈영토화는 신체 내지는 유기체의 지층 안에서 발생합니다. 반면 얼굴의 이탈 정도는 스피노자식으로 말하면 머리라는 신체로부터 기호라는 비신체적인 것으로 넘어가는 변용이고,  천의 고원식으로 말하면 유기체의 지층으로부터 의미화 내지 주체화의 지층으로 넘어가는 탈영토화 입니다. 즉 상이한 속성, 상이한 지층을 횡단하는 탈영토화 입니다. 이는 하나의 지층 안에서 진행되는 것보다 훨씬 감도가 높은 탈영토화 이지요. 이는 자신이 속해있던 지층 안에서는 어떠한 재영토화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절대적 탈영토화 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 세운 손가락도 의상도 그렇습니다. 

 

여기서 신체와 비신체 머리와 얼굴을 구별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머리를 통제하는 것이 자신의 신체라면 표정에 대한 통제는 위 아래를 따지고 예의를 요구하는 권력이란 점에서 양자는 아주 다르지요. 감시와 처벌에서 푸코가 제시한 신체의 정치학은 사실 신체 보다는 그로부터 탈영토화 된 표면의 통제를 겨냥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신체에 작용하는 권력은 신체적 능력을 생산하기에 생산적 이지만 신체 표면에 작용하는 권력은 명령에 길들인 표현 기계를 생산하기에 생산적 이라 하기 어려워 보입니다. 동일한 목표를 겨냥한 하나의 권력으로 보이지만 다른 목표를 겨냥한 다른 종류의 권력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탈영토화와 재영토화의 개념이 중요한 것은 이처럼 신체적인 것과 비신체적인 것 혹은 상이한 치층 사이를 횡단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속성을 달리하거나 지층을 달리하는 것으로 황단하며 하나의 배치로 묶어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무대와 좌석대 그리고 악기와 같이 신체 적인 것과 연주자나 가수들이 몸짓이나 표정, 선율이나 음색 같은 비 신체적인 것이 하나로 묶이며 공연의 배치가 만들어집니다. 물리적 기계와 표현 기계를 하나로 묶어 자신의 영토적 색채를 확연하게 만들어낼 때 탁월한 연주자가 출연합니다. 상이한 연속성을 갖는 성분들을 하나로 묶는 것이 영토화인데 이는 각 성분을 고집스러운 신체성이나 물리적인 소리로부터 탈영토화하여 자신의 소리로 재영토화 하는 것이지요. 요컨대 상이한 지층에 속하는 것을 하나의 배치로 묶어주는 것이 바로 탈영토화와 재영토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얼굴의 탈영토화는 하나의 지층 안에서는 절대적 탈영토화지만 재영토화를 동반하지 않는 탈영토화는 분명 아닙니다. 하나의 지층에서 다른지 층으로 횡단하는 탈영토화 이고, 다른 지층에서 재영토화 되는 탈영토화이죠. 그렇기에 절대적이란 말은 제한된 의미를 가질 뿐이고, 어쩌면 절대적이란 말에 대한 일종의 반어적 표현이라 해야 합니다. 사실 얼굴의 탈영토화는 탈영토화의 정도가 낮은 것들을 재영화화한 영토가 됩니다. 얼굴이 풍경화 된 표현기계가 됨에 따라 손이나 발 엉덩이 목덜미도 표정을 갖게 되고 자동차도 주전자도 얼굴화 됩니다.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들뢰즈 가타리가 말하는 가장 탈영토화 되지 않은 것이 가장 탈영토화 된 것 위에서 재 영토화 된다 는 말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있겠습니다.

 

두 가지 탈 영토화를 혼동 해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들뢰즈 가타리는 이렇게 씁니다. 이런 상대적 운동들을 절대적인 탈 영토와 절대적인 탈 주선 절대적인 표류의 가능성과 결코 혼동해서는 안된다. 상대적 운동들은 지층 내적 이거나 지층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인 반면 절대적 운동들은 일관성의 구도와 그 탈지층 화 에 관련된 것이다 라고 말입니다.이에 따르면 얼굴의 탈영토화는 지층 사이에서 발생하니 탈영토화 정도가 크다고 해도 상대적 운동에 속합니다. 

 

탈영토화는 어떠한 영토도 갖지 않는 탈영토화 운동입니다. 어떤 영토도 갖지 않지만 모든 영토로 열린 순수 잠재성을 향한 운동이고 모든 형식을 추상하여 일관성의 구도에 이르는 운동입니다. 강도 제로의 순수 잠재성의 수많은 규정 가능성으로 충만한 긍정적 기관 없는 신체에 이르는 운동 말이죠. 이는 현실에 없는 이상이나 이념이 아니라 언제나 실제하는 운동임을 그들은 강조합니다. 절대적 탈영토화는 애초부터 존재하며 일관상의 구도는 도처에 존재하고 항상 근원적 이며 항상 내재적이다. 기관 없는 신체가 일차적 이며 모든 기계를 근저에 항상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탈영화 된 것으로서 이 대지야 말로 절대적 촬영 토 하의 엄밀한 상관자이고 탈영토화 야말로 대지의창조자 라는 말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앞서 앞서 인용한 안티오디디푸스에서 대지와 영토에 대한 서술에서 그렇듯이 바립니다.

 

 

 

 

데카르트의 정의에 따르면 “실체란 그 자체 이외에 다른 어느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독자적인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을 가리킨다.“ 즉 실체는 다른 존재를 끌어 들여 이해할 필요 없이 그 자체로 이해가 가능하다. 그래서 그는 신, 정신, 물체의 세 가지를 실체로 보았다. 정신은 사유의 속성을 가진 실체이고, 신체와 물체는 연장의 속성을 가진 보았다. 그런데 그는 신=창조자의 관념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정신, 신체, 물체의 실체적 속성을 부인하는 모순을 빚었다. 피조물인 정신, 신체, 물체는 서로 연관될 수밖에 없으므로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게다가 인식의 주체인 정신과 인식의 대상인 물체를 동등한 실체로 파악한 탓에 데카르트는 양자의 올바른 관계를 설명하지 못하고 결국 이원론의 수렁에 빠져들고 말았다.

스피노자는 데카르트가 정의한 실체의 개념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데카르트는 실체가 아닌 것을 실체로 규정했기 때문에 딜레마에 빠졌고 그 ‘실체’들의 관계를 설정하는 데 실패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스피노자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실체와 양태의 개념을 구분한다. 그에 따르면 데카르트가 실체라고 간주한 정신, 신체, 물체는 실상 실체가 아니라 모두 양태에 불과하다. 양태란 실체의 변용이다. 우리는 실체 자체를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실체의 속성을 인식한다. 다시 말해 속성이란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실체의 측면이며, 양태와 마찬가지로 속성도 하나의 실체에서 여럿이 나올 수 있다. 이렇듯 양태와 속성은 다수로 존재하지만 스피노자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실체는 오직 하나뿐이라고 말한다. 만약 같은 속성을 가진 두 개 이상의 실체가 존재한다면 그것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 제약을 가할 것이기 때문에 실체라는 개념에 위배된다. 스피노자는 유일하게 존재하는 실체가 바로 신이라고 말한다. 세계속에서 유일하게 무한하고 자족적인 방식으로 존재한다. 개별자는 실체가 아니라 양태일 뿐이다. 세계속에 많은 등가적 실체들이 빼곡히 존재한다면 운동과 변화가 불가능해진다. 고대 그리스의 파르메니데스가 겪었던 자가당착-운동은 불가능하다-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실체를 최소화시키고 실체 대신 양태의 개념을 도입해 운동과 변화를 설명하려는 것이다. 실체적 사고를 버리고 관계적 사고로 이행하려는 시도다. “세상 만물의 근본적인 요소는 무엇인가?” “삶의 궁극적 목적은 무엇인가?” “ 세상 만물의 보편자는 실재하는가” 모두 실체 혹은 실체적 진리를 찾고자 하는 시도 였다.

실체의 측면에서 자연은 처음도 끝도 없이 그저 무한하게 존재할 따름이지만 양태의 측면에서는 전혀 다른 약동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자연에는 온갖 변화와 운동이 가득하다. “무한한 종류의 사물들이 무한한 모습을 띠고 생겨난다” 실체로서 자연은 필연성 이외에 우연성을 전혀 허용하지 않지만, 양태로서 자연은 숱한 사물들이 다양한 규칙과 법칙을 따라 인과적인 연속성과 우연적 상호 의존성을 무수하게 맺어가는 관계를 보여 준다. 이런 자연의 이중적인 존재 방식을 스피노자는 ‘생산하는 자연’과 ‘생산된 자연’ 즉 능산적 자연과 소산적 자연으로 구분했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전자가 후자를 규정하고 대상화하는 관계라고 본 데카르트와 달리 스피노자의 자연은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포함한다. 스피노자에게서 신은 곧 자연이므로 인간은 신의 일부이기도 하다. 모든 유한자는 유일한 무한자인 신=자연 안에 잠재하는 가능성이 발현된 결과로 생겨난 존재들이다. 하나의 실체는 여러가지 양태를 가질 수 있다. 따라서 사유와 연장은 같은 실체를 말하는 두 가지 양태일 뿐이다. 사유는 정신적인 속성이고 연장은 물체적인 속성이다. 이 속성이 같은 실체에 내재한다고 보는 것은 곧 외부의 사물과 내부의 관념 간에 차이를 두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우리는 실체를 사유의 관점에서 인식할 수도 있고 연장의 관점에서 인식할 수도 있다.

(혼자 공부하는 이들을 위한 최소한의 지식: 철학, 남경태 저)

 

 

심신병행론(처음 시작하는 철학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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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산책하면서 발견하였던 장미 꽃을 출근길에 다시 보았다. 겨울을 나기위해 짚으로 보온을  하였다. 따듯했는지 꽃을 피웠다. 12월의 장미 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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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체는 그리스어로 ‘우시아’이다. 직역하면 ‘존재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내린 실체의 정의는 이렇다. 서술어로 쓰이지 않고 주어로만 쓰여서 다른 것이 그것에 관해 서술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사람은 이성적 동물이다. 동물은 생장하며 이동가능한 실체다. 여기서 ‘사람’이나 ‘동물’은 주어로도 술어로도 쓰인다. 주어로만 쓰이는 단어가 실체라고 한다. 다른 술어를 가져와서 소크라테스에 대해 설명할 수는 있지만 소크라테르가 술어가 되는 법은 없다. 주어로만 쓰이려면 범위가 가장 작아야 한다. 이런 건 개별적인 사람이나 개별적인 사룸이라야 한다. 소크크라테스가 말하는 실체는 눈에 보이는 하나하나의 사물들, 즉 개별자이다. 더 부연 설명하면 실체는 이것 저것 이렇게 지시가 가능해야 한다. 그러려면 눈에 보이고 시공간 상에 존재재야 한다. 두번째로 실체 끼리는 분리 가능하고 독립적으로 존재 한다.

꽃은 실체이다. 그런데 이 꽃이 갖는 여러 특성이 있다. 분홍색이고 향기롭고 송기가 크다. 이런 특징들이 있다. 이런한 특징들도 존재하지만 실체가 존재하는 방식과는 조금 다르다. 실체는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존재하지만 이런 특징들은 실체에 의존해서만 존재 한다. 실체에 속하는 특성으로만 존재한다. 이런 의미에서 이 특징들을 ‘속성’이라고 부른다. 속성이 실체에 의존해서만 존재한다는 건 아리스토텔레스 특유의 생각이다. 플라톤이라면 분홍색의 꽃은 분홍의 이데아에 참여함으로써 존재한다고 할 것이다. 분홍색을 떠받쳐주는 게 꽃이 아니라 이데아라고 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본질적 속성과 우연적 속성을 구분한다. 본질적 속성은 공통으로 가지는 속성 즉 사람이라면 사람이기 위해서 반드시 가져야 하는 속성이다. 이와는 달리 우연적 속성은 말 그대로 우연히 가지게 된 특징을 말한다. 피부색이 흰지 검은지, 키가 큰지 작은지 등이다. 본질과는 상관없는 속성이다.

실체에 대한 설명하는 주요 이론은 질료-형상설, 4원인설, 가능태-현실태 등이 있다. 질료-형상설은 모든 실체는 질료와 형상이 결합된 복합체라고 본다. 어떤 재료에 특정한 모양을 부여해서 사물이 생겨났다고 본다. 이를 질료-형상설이라고 한다. 형상은 플라톤에서 이데아랑 같은 말이었는데 아리스토텔레스에서는 사물의 기능적 형태로 본다. 반면에 이데아는 공통되는 보편적인 특성이므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은 이데아와는 다르다. 질료-형상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사물을 어떤 수준에서 보느냐에 따라 질료와 형상이 달라진다. 가령 신체의 기관을 실체로 보면 그 질료는 물, 불, 흙, 공기같은 4원소이고 형상은 그것들이 결합하는 방식이다. 몸전체로 보면 질료는 기관들이고 형상은 기관들이 유기적으로 결합하는 방식이다. 거기서 좀더 나아가 사람 자체를 실체로 보면 그 질료는 몸이고 형상은 영혼, 즉 몸을 움직이게 하는 원리인 영혼이다.

다음은 4원인설이다. 모든 변화에는 원인이 있다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한 원인은 개념이 조금 다르다. 그는 왜 라는 물음에 대해 대답으로 제시할 수 있는 걸 원이라고 본다. 왜 걷는지를 다양한 관점에서 따져 볼 수 있는데 그걸 설명하는 답변들이 모두 원인이라고 본다. 이러한 원인으로 여러가지가 있지만 4가지 유형으로 분류한다. 질료인, 형상인, 작용인, 목적인이다. 질표인은 사물을 구성하는 질료의 특징으로 인한 원인이다. 형상인은 사물의 형태적 특성으로 인한 원인이다. 작용인은 외부에서 그 사물에 끼친 여향이다. 목적인 말그대로 지향하는 목적을 말한다. 소크라테스는 체력단련을 한다. 왜냐하면 그는 건강을 유지하려 하기 때문이다. 목적인의 예이다.

세번째 실체를 설명하는 개념은 가능태와 현실태이다. 실체들은 끊임 없이 변화한다. 생성하고 소멸하고 운동을 한다. 변화를 설명하려면 ‘있다’와’있지 않다’ 사이의 이분법적인 대립을 넘어서야 했다. 이를 위해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내 놓은 해결책은 바로 가능태와 현실태라는 개념이다.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능력과 그것을 현실화하는 작용이 결합하여 변화가 일어난다고 본다. 가능태란 변화의 능력이 있는 상태, 다시 말해 아직 X가 아니지만, X가 될 수 있는 능력이 내재한 상태이다. 현실태는 그런 능력이 발휘되어 이제 현실화된 상태이다.

여기서 질문하나 해본다. 변화는 왜 일어나는 걸까 ? 가능태가 변화의 능력이긴 한데, 능력이 있다고 무조건 발휘되는 건 아니다. 그렇다면 변화를 촉발하는 것, 변화의 능력을 실현하도록 이끄는 것, 그건 뭘까 ?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게 현실태라고 답했다. 가능태인 씨앗이 꽃이 되고 싶어서 스스로 변화를 일으킨다는 거다. 4원인설의 목적인에 해당한다. 건강을 이루기 위해 식사조절도 하고 적절한 운동도 한다. 건강자체가 우리에게 그렇게 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목적이 되는 것이다. 변화를 촉발하는 건 목적에 대한 욕구라고 한다. 씨앗도 꽃이 되고자 하는 욕구 때문에 싹을 틔우고 변화하기 시작한다는 거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세계의 모든 것이 목적을 향해 움직인다고 생각 했다. 목적을 향한 이 변화가 단 한번으로 끝나는 것도 아니다. 씨앗이 나무가 되고 나무가 집이 된다. 씨앗의 목적은 나무이고 나무의 목적은 집이고 집의 목적은 사람사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목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바로 이러한 목적이 사물에 존재 의미를 부여한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삶의 의미를 자주 묻곤 하는데 이는 이런 목적론적 세계관을 받아 들이기 때문이다 .

아리스토텔레스는 세상이 있는 모든 운동이 지향하는 단 하나의 궁극적인 목적이 있다고 본다. 그게 바로 “신”이다. 신은 세상 모든 변화의 궁극 목적이면서 동시에 최초의 원인인 것이다. 신은 최초의 원인이라서 자신을 변화하게끔 하는 다른 원인이 없다. 신 자신은 움직이지 않으면서 다른 것을 움직이게 한다. 이런 의미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신을 ‘부동의 원동자’라고 한다. 세상의 모든 변화와 운동이 이 부동의 우너동자에서 비롯한다고 보았다. 신은 순수한 현실태로만 존재한다고 덧붙였다. 변하지 않으니 가능태를 함축하지 않으며 신은 질료가 없고 물질적인 존재가 아니다. 신이 순수현실태라는 말은 신이 어떤 종류의 활동을 한다는 말이다. 그리스인들이 신의 본성에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한 활동은 ‘사유’이다. 사유는 비신체적이고 가장 지성적인 활동이기 때문이다. (철학사 수업, 김주연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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