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성, 혹은 되기의 철학적 문제
서양의 형이상학은 모든 것(존재자)의 원천이자 근거가 되는 본질적이고 불변적인 실체에 대해 사유하고 그것을 규명하고자 했다. 요약하면 근거에 대한 추구였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시도를 존재들의 근거인 존재 즉 존재자들을 존재하게 한 존재에 대한 탐구라고 하였다. 이 존재란 무엇인가 ? 존재는 근거라는 본질양식속에서 나타난다. 그러므로 사유의 사태, 즉 근거로서의 존재는 그 근거가 최초의 근거로서 즉 프로테 아르케로서 표상될 경우에만 근본적으로 사유된다. 근거라는 의미에서 존재자의 존재는 근본적으로는 오직 자기원인으로서만 표상 된다. 하이데거는 존재를 포착하려면 “하나의 특성으로 동일성을 전제하는 그런 근본명제의 형식에서 근본적인 비약이 필요하다고 한다. 이러한 도약은 존재를 존재자의 근거로서 간주하려는 태도를 버리고 심연 속으로 뛰어들어가는 행위라고 한다. 존재에 대한 질문을 통해 그는 근거가 아닌 심연을 발견한 것이다.. 이러한 심연은 텅 빈 무나 어두운 혼란이 아니라 일어남(사건)이다. 심연에서 나오는 존재의일어남을 보고 존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자 한다. 신이나 부동의 동자 등 또 다른 존재자에게 사로잡혀존재의 목소리를 잊은 형이상학들을 해체함으로서 그 안에 잊혀진 채 새겨진 존재의 흔적을 읽어낼 수 있으리라고 한다. 이것이 데리다가 말하는 해체와 다르지 않다.
크다-작다: 사물의 상태=현재 상태가 갖는 동일성/정체성을 명시하며, 커진다(크게-되다) 작아진다(작게-되다): ‘되기’는 어느 하나의 정해진 점,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며 이동하는 것이다. 들뢰즈는 사물의 상태를 표시하는 ‘임’과 ‘됨’을 구별하고 ‘임’이 아닌 ‘됨’의 차원에서 의미의 논리를 사유하고 존재와 존재자의 차이라는 ‘근본적인’ 차이보다는 개체들의 접속에 의해 생성되는 ‘차이’를 사유 했다. 하나의존재에서 다른 존재로 ‘되는’ 변화를 주목하고, 그러한 변화의 내재성을 주목하며 그것을 통해 끊임없이 탈영토화되고 변이하는 삶을 촉발하는 것, 이 모두가 바로 ‘되기’라는 개념을 둘러싸고 진행되기 때문이다. 관성이나 중력에서 벗어나는 편위(클리나멘)를 강조하는 것은 이러한 입장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
그럼에도 ‘되기’에서는 개개의 사물이나 ‘존재자’를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되기를 강조하는 경우에도 ‘있다/이다’라는 동사를 사용하지 않을 순 없고, 되기를 통해 도달한 어떤 상태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생성의 철학이란 관점에서 사물(존재자)을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 하는 문제라고도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두 가지 차원에서 접근할 수 있다. 하나는 그것의 질을 규정하는 ‘의지’ 내지‘욕망’의 차원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힘’ 내지 강밀도의 차원이다. 첫째 ‘사물이 무엇인가’는 연관된 다른 것들과의 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관계란 상이한 사물들을 하나로 계열화 하려는 ‘의지’ 내지 ‘욕망’과 결부되어 있다. 둘째 하나의 양태에서 다른 양태로 되기 위해선 그에 필요한 ‘힘’을 갖고 있어야 한다. 새로운 양태가 되기 위한 ‘문턱’을 넘는 힘을 가져야 하며, 그 문턱으로 인해 되기의 연속적 과정속에서도 각각의 양태는 일정한 ‘규정성’을 갖는다. 하나의 사물(양태)에서 다른 사물로, 하나의 신체(양태)에서 다른 신체로 변용되기 위해선, 그렇게 변용되려는 의지가 있어야 하고, 또한 그에 필요한 강밀도의 변화가 수반되어야 한다.
강밀도의 문턱은 사물의 상태를 하나의 양태로 정의하게 해 주지만, 그것이 연속적인 변화를 통해서 넘나들수 있는 것이란 점에서, 그런 사물의 정의는 ‘되기의 구도’ 위에서 사물이 정의되고 변용되어 다른 사물이 되는 것을 파악할 수 있게 해 준다. 따라서 그것은 사물을 하나의 상태로, 규정성을 갖는 것으로 정의하면서도, ‘되기’의 과정에 열려 있는 것으로 보게 해준다.이는 사물의 상태를 ‘이다’의 차원에서 포착하여 분류하는 관념과는 다르다. 따라서 다른 것이 된다는 것은 욕망이나 의지를 바꾸는 것인 동시에 그와 결부하여 힘과 속도를 바꾸고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처럼 이들이 말하는 강밀도와 스피노자가 말하는 양태, 변용, 감응 등의 개념은 아주 긴밀하게 결부되어있다. 스피노자는 양태를 이미 그 자체로 하나의 촉발이요 변용이라고 본다. 하나의 양태로서 존재한다는 것은 관련된 다른 양태들에 촉발되어 강밀도의 분포를 다르게 만듦으로써 다른 종류의 양태로 만들어버린다는점에서 이미 변용이다. 역으로 그렇게 변용된 양태와의 관련 속에서만 ‘그’ 양태로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란점에서 자신을 둘러싼 다른 모든 양태들의 관계를 스스로 내부에 함축한다. 그렇기에 자신을 둘러싼 양태들의 관계가 변하는 순간 그 자신 역시 다른 양태로 변용된다. 강밀도라는 개념을 통해 사물의 상태와 변이를포착함으로써 사물의 상태를 변이 안에서, ‘되기의 구도’ 안에서 연속적이고 내재적인 과정으로 다룰 수 있게 된다.
되기와 기억들
‘기억’이라는 주제는 베르그송이나 프루스트 같은 사람들에 의해서 중요하게 다루어 졌다. 그러나 여기서저자들은 기억에 대해 비판적이다. 기억은 되기와 대립되는 것으로 간주 한다. “되기란 반-기억(contre-memoire) 이다”는 것이다. 되기란 기억에 대항하여 이루어지는 것디다. 애니메이션 <메모리스> 세개의중편으로 구성된 작품으로 기억의 세가지 시제를 다룬다. 첫 편 ‘마그네틱 로즈’가 과거의 한 순간에 대한 집착, 그것은 생성의 중단을 의미하고, 새로운 것이 되지 못하는 생성의 중단이란 결국 ‘죽음’의 검은 구멍이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둘째 영화인 ‘악취탄’은 비밀 서류를 본사로 가져오라는 명령의 기억이 거대한 사건에도 지워지지 않은 기억이 되어 죽음의 악취가스를 목적지까지 실어 나르게 된다. 셋 째 ‘포대 도시’에서는아이가 꿈꾸는 미래 또한 과거와 현재의 구성이 하나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지워지지 않은 기억의 다른 형식이 된다. 반-기억 내지 대항-기억이란 이처럼 현재를 과거에 사로잡는 기억에 대항하여 기억을 지우며 다른것이‘되고’ 새로운 삶을 구성하는 그런 능력으로서 망각능력을 뜻한다. 다만 주의할 것은 ‘망각능력’이란 가령 상처와도 같은 과거를, 혹은 영광스럽고 행복했던 과거조차 지우며 넘어서는 적극적 능력이지, 건망증처럼 기억해야 할 것을 잊는 ‘무능력’이 아니란 점이다.
무엇이 다른 것이 되기 위해서는 현재 가지고 있는 것을 이용하고 변형시킬수 있어야 한다. 기억이 없다면 언제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되기의 문제는 기억과 망각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기억 자체의 내부에 있으며, 기억의 형태로 존재하는 것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갖고 있는가,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이용하는가하는데 있다. 기억에는 이미 호오(好惡)와 선별이 내장되어 있다. 그것은 선별의 기준과 전제가 되는 가치를포함한다. 우리는 모든 것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하고 싶은 것만을 그리고 지우고 싶어도 잊혀지지 않는 상처 같은 것만을 기억한다. 다수적인 가치 척도에서 벗어나는 것은 사소한 것으로 잊혀지거나, 아니면‘기억’의 한쪽 구석에 쳐박혀 버려지게 마련이다. 다수적 척도에 따라 좋고 나쁨의 판단으로 분별된 기억이고, 그에 따라 집착하거나 떨쳐버리고 싶은 상처같은 기억이며, 그런 기준에 따른 소망과 욕망에 따라 선별되어 재구성된 기억이다. 이런 점에서 기억은 이미 영광과 상처를 분할하는 척도에 따라 재영토화 되어 있음을의미한다.
새로운 배치 안에서 기억된 것들을 이용하는 것은 이처럼 주어진 기억의 재영토화된 지대에서 벗어나 새로운 배치로 탈영토화함으로써 가능하다. 그것은 통상적인 몰적인 선분을 벗어난 새로운 무엇(어린이)의 개념을 형성하고 그것을 통해 무엇(어린이)-되기를 수행한다. 물론 분자적인 기억도 있을 수 있겠지만, 그것은몰적이거나 다수적인 체계로 통합되는 요인으로서다. 기억은 언제나 재영토화의 기능을 갖고 있다. 분자적구성 요소들을 함께 묶어세우는 것은 바로 탈영토화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어린이-되기를 어린 시절의기억에 대립 시킨다. 들뢰즈와 카타리는 어린시절의 기억과 대립하여 ‘어린시절의 블록’이란 개념을 사용한다. 어린이-되기란 ‘어떤 사람’ 이 어린이가 되는 것이면서 동시에 어린시절 자체가 다른 것이 되는 어떤 변형을 수반하는 것이란 점에서, ‘어떤 사람’ 과 ‘어린시절’ 이 다른 어떤 것이 된다. 그래서 양자가 모두 변하는 이중적 과정이 된다. 반면 어린시절의 기억은, 어린시절은 기억대로 그대로 둔 채 그 시절로 돌아가는 것이란 점에서 어린시절의 블록이나 어린이-되기와 다르다. 어린이-되기를 통상적인 어법대로 ‘어린시절로돌아가는 것’이라고 표현한다면, 그 ‘어린시절’은 나의 어린시절, 나의 기억 속에 있는 어린시절이 아니라 '어떤‘ 분자적인 어린시절, 소수적인 어린시절이며, 사실은 부재하는 어린 시절이다.
사람의 곰-되기는 곰의 다른-것 되기를 포함하며 화가의 어린이-되기는 어린이의 다른-것-되기를 포함한다. 되기란 이처럼 되기의 두 항이 모두 변한다는 점에서 되기의 블록이란 개념을 사용할 수 있다. 들뢰즈와카타리가 ‘마법사의 기억’이니 ‘스피노자주의자의 기억’이니 하는‘기억’ 개념을 사용했지만, 그것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것이 ‘되기’였다고 할 때, 그것은 이처럼 블록의 두 항이 모두 변하는 그런 ‘되기’로서 기억을 말한다. 기억을 다수적이고 몰적인 집합에서 끄집어내 소수-화하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가령 베르그송주의자의 기억, 스피노자주의자의 기억 등과 같은 철학자들의 기억인 경우에도 그것은 단지 베르그송이나 스피노자의 이론을 상기하게 하거나, 그들 ‘본래의’ 입론으로 회귀하는 것(스피노자로 돌아감, 베르그송으로돌아감)이 아니라 ‘그것’ 의 내용을, 그것의 기억을 변형시키는 방식으로 돌아가는 그런 되기의 블록을 작동시키는 것이다. 인용을 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되는 것이면서 동시에 그 사람을 변형시키는 것이다.
동물되기
동물 되기란 동물을 흉내내는 것이 아나라 동물의 신체적 감응을 만들어낼 수 있는 속도와 힘을 내 신체에부여하는 것이다. 어떤 동물이 되는 방식으로 자신의 신체적 힘과 에너지의 분포를 바꾸고 새로운 분포를 만들어내 그 동물의 감응을 생산하는 것이다. 이는 부합하는 요소들의 새로운 계열화를 통해 동물-되기의 배치를 형성함으로써 이루어진다. 하나가 강밀도의 분포라는 힘과 관련된 성분이라면 다른 하나는 ‘배치’라는 관계적 성분으로 배치를 선택하거나 배치를 바꾸는 욕망이나 의지와 결부된 성분이라고 할 수 있다. 되기는 진화도 퇴화나 역행도 아닙니다. 함입(involution)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함입이란 이질적인 어떤 짝과의 결연으로 엉뚱한 되기의 블록 속으로 ‘말려들어가는 것’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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