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성, 혹은 되기의 철학적 문제 

서양의 형이상학은 모든 (존재자) 원천이자 근거가 되는 본질적이고 불변적인 실체에 대해 사유하고 그것을 규명하고자 했다.  요약하면 근거에 대한 추구였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시도를 존재들의 근거인 존재   존재자들을 존재하게  존재에 대한 탐구라고 하였다.   존재란 무엇인가 ?  존재는 근거라는 본질양식속에서 나타난다. 그러므로 사유의 사태,  근거로서의 존재는  근거가 최초의 근거로서  프로테 아르케로서 표상될 경우에만 근본적으로 사유된다.  근거라는 의미에서  존재자의 존재는 근본적으로는 오직 자기원인으로서만 표상 된다.  하이데거는 존재를 포착하려면  하나의 특성으로 동일성을 전제하는 그런 근본명제의 형식에서 근본적인 비약이 필요하다고 한다. 이러한 도약은 존재를 존재자의 근거로서 간주하려는 태도를 버리고 심연 속으로 뛰어들어가는 행위라고 한다. 존재에 대한 질문을 통해 그는 근거가 아닌 심연을 발견한 것이다.. 이러한 심연은   무나 어두운 혼란이 아니라 일어남(사건)이다. 심연에서 나오는 존재의일어남을 보고 존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자 한다. 신이나 부동의 동자   다른 존재자에게 사로잡혀존재의 목소리를 잊은 형이상학들을 해체함으로서  안에 잊혀진  새겨진 존재의 흔적을 읽어낼  있으리라고 한다.  이것이 데리다가 말하는 해체와 다르지 않다. 

 

크다-작다:  사물의 상태=현재 상태가 갖는 동일성/정체성을 명시하며,  커진다(크게-되다) 작아진다(작게-되다): ‘되기 어느 하나의 정해진 ,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며 이동하는 것이다. 들뢰즈는  사물의 상태를 표시하는   구별하고  아닌  차원에서 의미의 논리를 사유하고  존재와 존재자의 차이라는 근본적인 차이보다는 개체들의 접속에 의해 생성되는 차이 사유 했다.  하나의존재에서 다른 존재로 되는 변화를 주목하고, 그러한 변화의 내재성을 주목하며 그것을 통해 끊임없이 탈영토화되고 변이하는 삶을 촉발하는 ,  모두가 바로 되기라는 개념을 둘러싸고 진행되기 때문이다.  관성이나 중력에서 벗어나는 편위(클리나멘) 강조하는 것은 이러한 입장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

 

 그럼에도  되기에서는 개개의 사물이나 존재자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되기를 강조하는 경우에도 있다/이다라는 동사를 사용하지 않을  없고, 되기를 통해 도달한 어떤 상태에 대해 말하지 않을  없기 때문이다. 이는 생성의 철학이란 관점에서 사물(존재자)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 하는 문제라고도   있다. 이에 대해  가지 차원에서 접근할  있다. 하나는 그것의 질을 규정하는 의지 내지욕망 차원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내지 강밀도의 차원이다. 첫째  사물이 무엇인가  연관된 다른 것들과의 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관계란 상이한 사물들을 하나로 계열화 하려는 의지 내지 욕망 결부되어 있다.  둘째 하나의 양태에서 다른 양태로 되기 위해선 그에 필요한  갖고 있어야 한다. 새로운 양태가 되기 위한 문턱 넘는 힘을 가져야 하며,    문턱으로 인해 되기의 연속적 과정속에서도 각각의 양태는 일정한 규정성 갖는다. 하나의 사물(양태)에서 다른 사물로, 하나의 신체(양태)에서 다른 신체로 변용되기 위해선, 그렇게 변용되려는 의지가 있어야 하고, 또한 그에 필요한 강밀도의 변화가 수반되어야 한다. 

 

강밀도의 문턱은 사물의 상태를 하나의 양태로 정의하게  주지만, 그것이 연속적인 변화를 통해서 넘나들 있는 것이란 점에서, 그런 사물의 정의는 되기의 구도 위에서 사물이 정의되고 변용되어 다른 사물이 되는 것을 파악할  있게  준다. 따라서 그것은 사물을 하나의 상태로, 규정성을 갖는 것으로 정의하면서도, ‘되기 과정에 열려 있는 것으로 보게 해준다.이는 사물의 상태를 이다 차원에서 포착하여 분류하는 관념과는 다르다.  따라서 다른 것이 된다는 것은 욕망이나 의지를 바꾸는 것인 동시에 그와 결부하여 힘과 속도를 바꾸고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처럼 이들이 말하는 강밀도와 스피노자가 말하는 양태,  변용, 감응 등의 개념은 아주 긴밀하게 결부되어있다. 스피노자는 양태를 이미  자체로 하나의 촉발이요 변용이라고 본다. 하나의 양태로서 존재한다는 것은 관련된 다른 양태들에 촉발되어 강밀도의 분포를 다르게 만듦으로써 다른 종류의 양태로 만들어버린다는점에서 이미 변용이다. 역으로 그렇게 변용된 양태와의 관련 속에서만  양태로서 존재할  있는 것이란점에서 자신을 둘러싼 다른 모든 양태들의 관계를 스스로 내부에 함축한다. 그렇기에 자신을 둘러싼 양태들의 관계가 변하는 순간  자신 역시 다른 양태로 변용된다.  강밀도라는 개념을 통해 사물의 상태와 변이를포착함으로써 사물의 상태를 변이 안에서, ‘되기의 구도 안에서 연속적이고 내재적인 과정으로 다룰  있게  된다.  

 

되기와 기억들

기억이라는 주제는 베르그송이나 프루스트 같은 사람들에 의해서 중요하게 다루어  졌다.  그러나 여기서저자들은 기억에 대해  비판적이다. 기억은 되기와 대립되는 것으로 간주 한다.  되기란 -기억(contre-memoire) 이다 것이다.  되기란 기억에 대항하여 이루어지는 것디다.  애니메이션 <메모리스> 세개의중편으로 구성된 작품으로 기억의 세가지 시제를 다룬다.    마그네틱 로즈 과거의  순간에 대한 집착, 그것은 생성의 중단을 의미하고, 새로운 것이 되지 못하는 생성의 중단이란 결국 죽음 검은 구멍이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둘째 영화인 악취탄 비밀 서류를 본사로 가져오라는 명령의 기억이  거대한 사건에도 지워지지 않은 기억이 되어 죽음의 악취가스를 목적지까지  실어 나르게 된다.    포대 도시에서는아이가 꿈꾸는 미래  또한 과거와 현재의  구성이 하나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지워지지 않은 기억의 다른 형식이 된다.  -기억 내지 대항-기억이란 이처럼 현재를 과거에 사로잡는 기억에 대항하여 기억을 지우며 다른것이되고 새로운 삶을 구성하는 그런 능력으로서 망각능력을 뜻한다. 다만 주의할 것은 망각능력이란 가령 상처와도 같은 과거를, 혹은 영광스럽고 행복했던 과거조차 지우며 넘어서는 적극적 능력이지, 건망증처럼 기억해야  것을 잊는 무능력 아니란 점이다.  

 

무엇이 다른 것이 되기 위해서는 현재 가지고 있는 것을 이용하고 변형시킬수 있어야 한다. 기억이 없다면 언제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되기의 문제는 기억과 망각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기억 자체의 내부에 있으며, 기억의 형태로 존재하는 것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갖고 있는가,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이용하는가하는데 있다. 기억에는 이미 호오(好惡) 선별이 내장되어 있다. 그것은 선별의 기준과 전제가 되는 가치를포함한다. 우리는 모든 것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하고 싶은 것만을 그리고 지우고 싶어도 잊혀지지 않는 상처 같은 것만을 기억한다. 다수적인 가치 척도에서 벗어나는 것은 사소한 것으로 잊혀지거나, 아니면기억 한쪽 구석에 쳐박혀 버려지게 마련이다. 다수적 척도에 따라 좋고 나쁨의 판단으로 분별된 기억이고, 그에 따라 집착하거나 떨쳐버리고 싶은 상처같은 기억이며, 그런 기준에 따른 소망과 욕망에 따라 선별되어 재구성된 기억이다. 이런 점에서 기억은 이미 영광과 상처를 분할하는 척도에 따라 재영토화 되어 있음을의미한다. 

 

새로운 배치 안에서 기억된 것들을 이용하는 것은 이처럼 주어진 기억의 재영토화된 지대에서 벗어나 새로운 배치로 탈영토화함으로써 가능하다.  그것은 통상적인 몰적인 선분을 벗어난 새로운 무엇(어린이) 개념을 형성하고 그것을 통해 무엇(어린이)-되기를 수행한다. 물론 분자적인 기억도 있을  있겠지만, 그것은몰적이거나 다수적인 체계로 통합되는 요인으로서다. 기억은 언제나 재영토화의 기능을 갖고 있다.  분자적구성 요소들을 함께 묶어세우는 것은 바로 탈영토화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어린이-되기를 어린 시절의기억에 대립 시킨다.  들뢰즈와 카타리는 어린시절의 기억과 대립하여 어린시절의 블록이란 개념을 사용한다.  어린이-되기란  어떤 사람  어린이가 되는 것이면서 동시에 어린시절 자체가 다른 것이 되는 어떤 변형을 수반하는 것이란 점에서,  어떤 사람  어린시절  다른 어떤 것이 된다. 그래서 양자가 모두 변하는 이중적 과정이 된다.   반면 어린시절의 기억은, 어린시절은 기억대로 그대로    시절로 돌아가는 것이란 점에서 어린시절의 블록이나 어린이-되기와 다르다.  어린이-되기를 통상적인 어법대로 어린시절로돌아가는 이라고 표현한다면,  어린시절 나의 어린시절, 나의 기억 속에 있는 어린시절이 아니라 '어떤 분자적인 어린시절, 소수적인 어린시절이며,  사실은 부재하는 어린 시절이다. 

 

사람의 -되기는 곰의 다른- 되기를 포함하며 화가의 어린이-되기는 어린이의 다른--되기를 포함한다.  되기란 이처럼 되기의  항이 모두 변한다는 점에서 되기의 블록이란 개념을 사용할  있다. 들뢰즈와카타리가 마법사의 기억이니 스피노자주의자의 기억이니 하는기억 개념을 사용했지만, 그것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것이 되기였다고  , 그것은 이처럼 블록의  항이 모두 변하는 그런 되기로서 기억을 말한다. 기억을 다수적이고 몰적인 집합에서 끄집어내 소수-화하려는 것이라고   있다.  가령 베르그송주의자의 기억, 스피노자주의자의 기억 등과 같은 철학자들의 기억인 경우에도 그것은 단지 베르그송이나 스피노자의 이론을 상기하게 하거나, 그들 본래의 입론으로 회귀하는 (스피노자로 돌아감, 베르그송으로돌아감) 아니라  그것  내용을, 그것의 기억을 변형시키는 방식으로 돌아가는 그런 되기의 블록을 작동시키는 것이다. 인용을 한다는 것은  사람이 되는 것이면서 동시에  사람을 변형시키는 것이다. 

 

동물되기 

동물 되기란  동물을 흉내내는 것이 아나라  동물의 신체적 감응을 만들어낼  있는 속도와 힘을  신체에부여하는 것이다.  어떤 동물이 되는 방식으로 자신의 신체적 힘과 에너지의 분포를 바꾸고 새로운 분포를 만들어내  동물의 감응을 생산하는 것이다. 이는 부합하는 요소들의 새로운 계열화를 통해 동물-되기의 배치를 형성함으로써 이루어진다.  하나가 강밀도의 분포라는 힘과 관련된 성분이라면 다른 하나는  배치라는 관계적 성분으로 배치를 선택하거나 배치를 바꾸는 욕망이나 의지와 결부된 성분이라고   있다.  되기는 진화도 퇴화나 역행도 아닙니다. 함입(involution)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함입이란 이질적인 어떤 짝과의 결연으로 엉뚱한 되기의 블록 속으로  말려들어가는  이다. 

 

 

 

 

우다이푸르 전체 모습을 보기 위해 조금은 불안한 케이블카를 타고 정상으로 올라 갔다. 인도 사람들은 사진 찍기를 좋아한다. 여기서도 가족이 사진을 찍어달라고 요청하여 사진을 찍었다. 하지만 사진을 보내줄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메일 주소도 모른다.     

 

 

 

 

 

 

 

 

 

 

 

 

 

 

 

 

 

 

 

 

 

 

 

 

 

 

 

 

선분성과 권력중심 

분자적인 것의 흐름은 어던 끝을 갖는 것들이 연쇄적으로 연결되고 전염되며 증식하지만,  이웃한 분자들 간의 경계는 모호해지며, 흐름은 대중 그렇듯 모호한 입자들이 하나로 이어진 연속체가 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선분이나 선이란 개념은 몰적인 것에 국한하고, 분자적인 것에 대해서는 양자라는 개념을 사용하자고 제안한다.  양자화된 흐름 이란 양자란 말로 개개의 분자의 입자적 구별을 표시하면서도, 선분적인 벽을 터널링하는 흐름을, 탈주선을 그리는 흐름을 함축하는 개념이다.  

 

선분화된 선과 양자화된 흐름, 그리고  경계에 있는 권력의 중심이란 개념을 설병하기 위해 화폐 대중의 흐름과 화폐적인 선분들을 살펴 본다. 화폐 대중의 흐름은 포착할  없는 미시적 흐름인  반해, ‘통화량 ‘money supply’로서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본원통화와 은행에서 신용차조등의 방법으로 발생하는파생통화의 합으로 계산되는 거시적 지표일 뿐이다.  화폐대중의 흐름이  선분적인 지표들에 쉽사리 포착되지 않기 때문에  통화량을 계산하는 지표들은 다르게 정의하여 사용한다.  하지만 화폐대중의 흐름은 자체로 양자적인 흐름으로서 정확하게 측정할  없다.  통화지표 표시되는 통화량을 측정하고 그것을바탕으로 화폐대중의 흐름을 통제 가능한 화폐적 선분들로 변화시키려고 한다. 하지만 화폐대중의 흐름은어느새 부분적으로 그선분을  터널링해 빠져나가기 때문에 다시 새로운 선분화를 시도해야 한다. 이권력은항상 흐름의 양자를 포획하지만 어느새 벗어난 흐름이 발생한다.  이런 의미에서  끊임없이 실패하는 권력이다. 양자화된 흐름의 탈주선, 그것을 따라가며 선분화하는 권력,  결과 만들어지는 선분 그리고 거기서 다시벗어나는 양자화된 흐름의 순환이 일어난다. 

 

뒤르켐과 타르드의 이론차이는 표상체계라는 거대한 몰적인 것과 믿음과 욕망의 흐름이라는 분자적인 흐름의 차이와 상응한다.  여기서 표상체계는 하나의 단어나 사물을 다른 것들과 연결하여 다시-나타나게 하는문화적인 조건을 말한다.   뒤르켐은 개인이란 범위를 넘어선 사회적 사실에 속하고 몰적인 집합성을 갖는거대한 대상으로 한다고 본다. 가령자살과 같은 개인적인 행위조차도 사회적인 조건 속에 결정되는 것으로보았다. 반면 타르드는 분자적인 믿음의 흐름, 욕망의 흐름, 심리의 전염과 전파 등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가를 파악하고자 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타르드가 사용했던 접속과 결속을 다시 정의한다. 접속은 탈코드화되고 탈영토화된 흐름이 서로를 활성화 하고 그들 공통의 탈주를 자극하며  양자를 추가하고 가속하는 방식을 표시한다. 반면 결속은 오히려 그것들의 상대적인 정체를 뜻하고, 탈주선을 봉인하고 틀어막으며 일반적 재영토화를 작동시키며 다른 것들을 초코드화할  있는 것들 가운데 어느 하나의 지배 아래 흐름을 밀어넣는다. 사회적 장은 상이한 속도와 추세로 대중에게 영향을 미치는 모든 종류의 탈코드화와 탈영토화 운동들에 의해 끊임없이 활기를 얻는다. 이는 모순이 아니라 탈주다. 권력이란 바로 대중의 문제로 이런 대중의흐름을 포착하여 그것을 선분화하는 능력에 의해 정의 된다. 

 

초코드화는 선은 다른 선분들에 대한  선부의 우위를 확보하고서만 그려질 뿐이며, 다른 선분과 관련된 상대적인 공명의 권력을 그러한 중심에 부여하면서 그려질 뿐이고,  자신이 통과하는 지배적인 선분을 강조하면서 그려질 뿐이다.  집중화는 언제나 위계적이지만 위계는 언제나 선분적이다.   권력의 중심은 확산되고분산되고 감소되고 축소된 것으로 존재할 분이며, 끊임없이 치환되고, 미세한 선분화에 의해 활동하며 세부적인  안에서 작동한다.  푸코가 <감시와 처벌>에서  제시했던 범죄의 흐름과 그것의 선분화로서 처벌이나감금의 양상에 대해 이야기 하며 재편과 축적,  도피와 탈주가 상충하며 역전을  야기하는 불안정한 초점들 미시적인 권력의 중심들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학교에서 교장이라는 중심의 형태를 취하지 않은  양자적인 흐름을 선분화하는 권력의 중심이 있다. 반장, 감시자, 우등생과 열등생, 수위 등등 그것이다. 분자적인 양상의 파시즘을 보여 준다. 이러한 미시적 중심들은 역으로  거대한 국가적 권력이 도대체 어떻게 일상적 삶의  미시적 요소들까지 촉수를 뻗치고 그것을통제할 수있는지를 보여 준다. 권력 중심은 가능한  흐름의 양자를 선의 선분들로 변환시키는 것을  존재 이유로 한다. 위대한 정치가란  무능력의 지대에 속하는흐름을 따라가면서 그것을 바탕으로 삼아 흐름의 양자를 선분적인 선으로 변형시키고 초코드화할  있는능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한다.  

    

 가지 선과  가지 위험  

추상기계에 대해 먼저 살펴 본다.  추상기계에는 초코드화 추상기계와 변이의 추상기계가 있다. 초코드화 추상기계는경직된 선분성,거시적 선분성을 정의하는 추상기계이다.  초코드화란 하나의 코드 아래 모든 것을 통합하고 통일하는 것이다. 중앙권력이라는 위로부터 덮쳐오는 코드화가아니라 일차적으로 시장 내지 교환에서 오는 것이란 점에서 차라리 옆에서 혹은 발딛고   밑에서 덮쳐오는 코드화라고 해야 한다. 초코드화는  코드를  덧씌우는 것이 아니라  이전의 모든 코드들을 제거한다는의미에서 변형 내지 추상을 이야기 하지만 하나의 단일한 코드로 통합하기 위함이다.  프란체스코 파가 탈코드화되고 탈영토화된 신항의 흐름을 예수라는 이름으로 교황청 아래 다시 통합 했을때 흐름의 초코드화가진행되었던 것이다 . 이는 지층 안에서 진행된 변환이요. 다수의 지층을 하나의 지층안으로 통합하고 포획하는 추상이다. 

 

변이의 추상기계는 선분화된 것을 흐름의 양자로 변환시키고, 양자적 흐름이 선분적 벽을 터널링하면서누수하고 범람하게 하는 변환과 상응하는 변이요 추상이다. 흐름의 창조 접속을 보장하며 새로운 양자를 방사한다.   자체로 탈주의 상태로 자신의 선위에 전쟁기계를 설치한다. 탈주선을 그리는 배치를 전쟁기게라고 한다. 경직된 선불들 사이로 흐르게 하고 다른 방향으로 분자 이하적인 것으로 흐르게 한다. 일관성으로이어지는 추상기계 이다. 

 

밀접하게 뒤섞여 있는 세가지 종류의 선이, 부족과 제국 및 전쟁기계가 공존하는 공간이었다.  이 세가지선은  첫째 서로 얽힌 코드와 영토성의 상대적으로 유연한 . 이것이 영토  혈통의 선분화가 사회적 공간을 이루는 이른바 원시적 영토성에서 시작한 이유이다. 둘째 선분들의 이원적 조직으로 공명하는 원들의 동심성으로 일반화된 초코드화로 나아가는 경직된 선이다. 셋째 탈주선들로 양자에 의해 표시되며 탈코드화와 탈영토화에 의해 정의된다.  탈주선이야말로 가장 일차적이며,  탈주선의 자유로운 흐름을 선분화하는권력이 있고 그것을 절단하고 채취하는 몰적 선분성의 선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푸코와의 차이를 요약하면서 추상기계는 탈주선을 가지며, 이것이 일차적이다. 이는 하나의 배치 안에서 저항이나 반박이라는 현상이아니라 창조의 첨점 내지 탈영토화의 첨점이다.  배치는 권력의 배치가 아니라 무엇보다 우선 욕망의 배치라고 하는 것이 이와 결부된 명제이다. 

 

마지막으로 세가지 선과 관련된 네가지 위험에 대해 이야기 한다. 첫째 위험은 공포이다.  공포는 모든 상실에 대한 공포요 두려움이다.  우리는  반대편의 안전을 욕망한다. 몰적 선분안에서 획득한 것을 계속하여 소유하고 지속하게 하고자 한다. 욕망은 지속하려는 힘을 작동시키는 권력이기도 하다.  권력은 억압과 통제 이전에 욕망을 유인하는 검은 구멍이고, 욕망의 흐름을 절단하여 포획하는 거대한 칼날이며,  욕망의 흐름에 하나의 공정점을 부여하는 닻이다.  경직된 선분안에 안주하는 것이고 몰적 동일성/정체성 안에서 평안해하는것이다.  다른 모든 경직된 선분들을 자신의 삶으로 수용하고 받아 들이게 하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울리히 백의 위험사회는 상실에 대한 공포를 자그갛여 안전성으로, 안전한 사회로 다시 - 돌아가고 싶다는 반성을 요구하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보수적 입장이다. 

 

둘째 위험은 명확성이다. 분자적 선분성의 선에 고유한 위험이다. 명확성은 분자적인 유연한 움직임과 균열의 선을 명확하게 들여다 보려는 욕망을 의미한다. 욕망이 움직이는 미세한 양상을 포착하여 그것을 긍정하거나 그것을 자극하는   혹은 그것을 따라 가는 것이다. ‘욕망의 본령 성욕에 빠져드는 것이 예이다. 가족적 제한을 넘어서 욕망의 대상을 끊임 없이 대체하며 따라가는 (끝없이 바람을 피우는 ’)    예이다. 이는 유연한 선분성이 경직된 것의 감정과 가식을 소규모 형태로 재생산할 위험을 감수해야하기 때문이다 . 모든 사람들에게 나름대로 판사나 집행관, 경찰관 등의 사명을 부여하는 맹목적 빛이다. 

 

세번째 위험은 권력이다.  양자화된 흐름을 선분적인 것으로 바꾸려는 시도의 위험, 대개는 우리 자신이 양자화된 흐름에 대해 불안해 하거나 못마땅해하면서 그것에 안정성을 부여하려고 하는 경우에 발견되는 그런위험이다. 무능력의 지대를 최소화 하려는 최소화하려는 시도 그리하여 탈주선을 멈추게하련느 시도이다.  당이나 노동조합이 전혀 손을   없는 무능력의 지대에서 발생한 학생 혁명을 프티 부르주아의 난동이라면서 원래 자리로 복귀할 것을 요구했던 68 5 혁명이 사례의 하나이다. 

 

마지막 혐오 혹은 멸망의 정염의 위험이다. 탈주선은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생성하는첨점이며 다른 삶으로 인도하는 선이다. 하지만 이러한 창조적 변이능력을 상실한 경우에도 탈주를 꿈꾸었던 욕망은 선분적인 벽으로 가득  세계에 대한 혐오의 정염을 상실하진 않는다.  차라리 더욱더 강해지기도한다. 기존의 세계에 대한 비판과 비난이 없이는 새로운 삶의 흐름을 창출하고 촉발할  없다. 죽음의 선이그려진다. 

 

 

9장에서는 앞장에서 서술했던  세가지 선과 이어지며, 경직된 선분성의 선과 유연한 선분성의 선, 혹은 몰적인 선분성과 분자적 선분성이라는 두가지 유형의 선분성과 선분성 사이를 가로지르는 양자적 흐름에 대해서 논의를 한다. 탈영토화된 흐름을 포획하여 선분적인 동일성을 부여하는 것은 선분마다 작용하는 권력의 문제라는 것을 분명히 한다. 미시정치학을  다루며 대중이라는 개념에 주목한다. 계급이 몰적인 선분성의 선과 관련되어 있다면, 대중은 분자적인 선분성의  내지 분자적 흐름과 결부된다. 맑스주의 혁명이론에서 대중이란 중요한 개념이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대중의 자발성이란 개념을 통해 당이나 조합과 같은 거시적 조직(몰적 조직) 환원 불가능한 대중의 흐름을 포착하고자 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대중이라는 개념을 확장해 피억압 대중 뿐만아니라 영주 대중, 부르주아 대중처럼 착취계급 뿐만 아니라  화폐처럼 흐름의 양상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에 사용될  있다고 정의 한다.   지점에서 정치학의 중심문제는 욕망내지 믿음의  흐름과  흐름을 포획하는 선분성과 권력의 문제로 변환된다.

  

선분성의 양상들

선분성의 양상은 우리는 삶의 모든 ,  모든 방향에서  발견할  있다. 거주, 왕래, 노동, 놀이, 체험은 공간적으로, 사회적으로 선분화 되어 있다. 예컨대, 집의 , 도시의 , 공장의 작업은 모두 목적에 따라 도시의 질성에 따라, 노동과 작업의 성질에 따라 선분화되어 있다. 여기서 주의해야할 점은, ‘선분 시작과 끝이 명확히 분할되어 있다는 점이다.  명확한 절단에 의해 작동하는 선분성 거기에 행동을 일치시키려는 명령어와 권력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서 미시정치학과 연관된다.

  

이러한 선분성을 세가지 형태로 구분할 수 있다.  첫번째 이항적 선분성이다. 거대한 이원적 대립에 따른 선분화로 남자와 여자, 어른과 아이, 선생과 학생 등이 여기에 해당 된다. 두번째  원환적 선분성이다. 선분들이 원환을 이루는 경우로, 하나가 다른 하나를 포함하는 방식으로 구분되는 관계이다. 우리 가족, 내가 사는 , , , 나라 처럼 영토적 개념과 나를 둘러싼 학년, 학교  동심원적 원환이 중간에서 분기하며 교차한다. 세번째 선형적(직선적) 선분성이다.  선분들이 절차를 표시하며 차례대로 배열되어 있는 선분화의 양상이다. 가족에서 학교로, 군대로, 직장으로하나의 절차를 끝내자 마자 다른 절차를 시작한다. 

  

선분성의  유형

선분성을  형태적이 차이와 작동하는 양상에 따라 두 유형으로 구분 한다. 하나는  원시적인 유연한 유형이고 다른 하나는 근대적이고 경직된 유형이다. 이항적 선분성의 경우 원시 사회에서 차별의 강도, 분절의 강도가 휠씬   강할  있다. 가령  원시 사회의 남녀의 이항적선분성은 세개 이상의 선분을 통해 존속할  있는 이항적이지 않은 배치의 산물이다. 레비 스트로스는 원시사회에서 각자가 자신의 배우자를 다른 부족을 구해야 한다는 혼인규칙을 위해선 셋 이상의 집단이 존재 한다는 것을 전제 한다. 반면 근대사회에서는 이항적 선분성이 일대일 대응관계  계속적인 이항적 선택과  자체로 기능하는 이항적기계에 의해 작동한다. 3항성이나  이상의 항들을 이항성이 만들어 낸다. 근대적인 혼인규칙은  사람이 사랑해서 결혼한다는 낭만적 사랑 된다. 하지만 동성애의 경우에도 이항적 선분을 통해 누가 남성 역할’ 이고 여성 역할인가를 따진다. 이항적 선분성이  이상의 분할을 규정하는 계급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맑스주의 계급이론에서 계급은 본질적으로 둘이지만  이상으로 분할을 규정할 있다. 즉 두항사이에 존재하는 중간층이나 중간계급으로 3분할 된다. 하지만 중간층 역시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로 환원 가능하다. 

  

원환적 선분성의 경우  원시적인 유형은 원환적 중심이 하나가 아니라 다수이며,  중심을 둘러싼 원환적인 선분들도 복수로 존재한다. 예를 들어, 북아메리카의 원주민은 하나의 부족이 각자가 토템 동물을 갖는 여러 씨족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 사이에는 모든 중심들이 종속되어야  특권적인 중심이 없다공명의 중심들이 분산되어 복수로 존재하기에 하나의 중심을 갖는 국가적 통일성이나 국가적 공명과는 다르다.  이와는 달리, 근대의 경직된 원환적 선분성은 단일한 중심을 갖는 동심원을 그린다. 봉건영주들이 나누어 가졌던 무력을 절대주의 이래로 국가가 독점하게 되듯이 말이다.   근대 사회내지 국가에서는 동심원적인 것이 되며, 명확하게 수목화된다.  선분성은경직되고, 모든 중심적 얼굴은 국가적 중심이라는 단일한 중심을 잉여성으로 갖게 된다. 

  

 원시사회에서도 선형적 선분성이 있었지만 식사나 놀이의 선분, 사냥의 선분, 성인식이나 혼인식같은 제의의 선분들 이었다. 사냥의 선분이 놀이로 이어지거나 그것과 뒤섞이는 유연한 선분성이다.  하지만 근대적 유형은 경직되어 있다. 수업시간에 지켜야  원칙이 있고 그로부터 벗어나와경우 교정의 대상이 된다 나름의 요건에 따라 교정하고 동질화하는 권력이 작동한다. 선분성을 강조하고 교정하며 동질화하는 메커니즘으로 인해 선분들 사이에 등가성과 번영가능성이 있다 공장의 규율에 훈련된 노동자는 조직활동의 규율에도  따른다. 하나의 선분성이 등가적인 양상으로 번역되기 위해서 공통의 척도를 가져야 한다. 공통의 척도로  기하학을 대비한다.  원시적인기하학이 금내지 줄이고 동그라미라면 근대적인 기학은 엄격하게 정의된 , 선분, , 도형 등을다루는 국가적 기하학이 된다. 이런 기하학은 하나의 척도, 혹은 한두개의 공리에 의해 모든 경우를 엄격하게 규정하고 정리하는 것이란 점에서 일종의  초코드화라고   있다. 

 

거시정치와 미시정치

유연한 선분성과 경직된 선분성을  원시사회와  근대사회로 나누어 표현했지만 유연한 선분성이원시인들에게만 할당하는게 아니라 경직된 선분성과는   없는 완전히 현재적인 기능이다. 이런점에서 모든 사회뿐만 아니라 모든 개인들은 몰적인 것과 분자적인 것이라는 두가지 선분성을 동시에 가로질러지고 있다. 몰적인 선분성을 통해 작동하는 것을 거시장치라고 하고, 분자적인선분성의 선을 통해 작동하는 것을 거시정치라고 한다. 모든 것은 정치적이지만, 모든 정치는 거시정치인 동시에 미시정치다. 

  

첫 번째 거대한 이항적 선분으로 성을 다룬다. 남성과 여성이라는 오직 두개의 성과, 이성 간의 사랑이라는 단순한 선분성만으로 사람들의 실제 관계를 포착한다는 것은 매우 거칠고 단순화된 결과로 귀착될  있다. 남성적인 여자나 여성적인 남자가 존재하고, 남자가 다른  남자를 좋아하는 것을 오직  동성애라는 사랑관계로만 포착   없다.  거대한 이항적 집합인 성은 그것과 전혀다른 배치를 갖는 분자적 배치에 따라 수천의 작은    N개의 성으로 말할  있다. 이런관점에서 본다면 남성 안에 있는 여성적인 것과 같이 이항성을 중첩시키는 것조차 부적절 하다. 수천의 성들을 또다시 남녀의 거대한 이항성으로 쪼개는 것이기 때문이다. 

 

 번째 계급과 대중에 관한 것이다. 계급이란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라는 거대한 몰적 이항성을 갖는 경직된 선분이다.  또한 사회적 계급들은  자체가 동일한 운동도 분할선도 동일한목적도 동일한 투쟁방식도 갖지 않는 대중으로 귀착된다.   대중을 부루주아 대중과 프롤레타리아 대중으로 절단한다. 대중이란 활동이나 힘의 흐름이고, 조건에 따라 각이한 방향으로 흘러가는분자적인 움직임과 결부된 것이다.  맑스는 분자적 흐름에 하나의 일관된 방향을 부여하고 지배와착취를 전복할  있는 세력을 형성하고자  대중들을  프롤레타리아트라는 하나의 계급으로 통합하려 했다. 이런 의미에서 몰적인 선분성은 나쁘고 분자적 성분성은 모두 좋다는 오해이다. 68혁명을 평가하면서  분자적인 탈주와 운동은 몰적인 조직으로 되돌아 오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몰적인 것과 분자적인 것이 교차되고 섞이는 양상을 정확하게 포착하여 분자적 욕망에 기초한 몰적 정치를 가동시키는 것이다.  

  

 번째 관료제 이다. 우리는  관료제를 연상하면  경직된 선분성을 떠올리지만 그렇지만은 않다.   예로 20세기 건축에서 가장  영향력을 미쳤던 건축가  코르뷔지에의 경우 이다. 그는 독일의 경직된 관련들에 의해 고생을 하다 프랑스로 건더 간다.  프랑스의 관료들은  법적인 규제의 선들을 유연하게  하여  그로하여금 프랑스 인디 되게 만들었다. 

 

 번째 파시즘과 전체주의다. 통상적인 생각과는 달리 들뢰즈와 가타리는 양자를  전혀 다른 것으로 본다.  전체주의가 사람들을 몰적 전체로 통일하고 통합하는  거시정치학적 개념이라면  파시즘은 분자적인 흐름이 밀려가면서 형성되는 미시정치학적 개념으로 정의한다.  전자가 국가적 차원혹은 몰적 전체성의 차원에서 공명을 만들어 내고자 하며,  후자는 국가가 제시하고 요구하는 것에공명하기 이전에 대중들 자신이 상호작용과 전염에 의해 번식되는 정치적 흐름이다. 유럽에 외국인에 대한 파시스트들의 증오와 테러는 자발적으로 형성되고 확산되고 있다는 점에서 파시즘을보여준다.    

 

미시정치학은 분자적 욕망과 결부된 정치학이고대중이라고 불리는 흐름의 정치학이며  유연한선분성의  위에 이루어지는 정치에 대한 이론이다. 이와 과련하여 유연한 선분성에 오류들을  제시한다.  첫째  약간의 유연성이 사태를 좀더 낫게 하는데 충분하리라는 믿음 이다.  파시즘의경우처럼 섬세한 선분화는 가장 경직된 선분만큼이나 해로울 수도 있다는 점에서 경직된 것이 나쁘고 유연한 것이 좋다는 생각을 버릴 필요가 있다. 둘째  분자적인 것을 상상력의 영역에 관한 것으로 생각하여, 그것을 다만 개인적인 혹은 -개인적인 것으로 돌려버리는  이다.  분자들끼리서로 소통하고 상호작용하면서 움직이고 흘러가는 양상을 표현하기 위해 분자적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개개의 분자로 흩어 진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분자적인 것은 개별적인  아니라 집합적인 것이다.  셋째  몰적인 것과 분자적인 것의 구별을 크기 상의 구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작음의 성질이 아니라 (mass, 대중!) 성질에 의해 특정 지어진다.     선의 질적 차이를 보면서 양자의 상호성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미시정치와 거시정치가 대상을 달리하기에 서로 독립적이라는 생각은 오류이다. 이는 히틀러의 경우에 파시즘의 대중운동이 국가라는 거시정치적 장치를 장악한 것이나, 당이라는 몰적인 조직이 대중운동을 야기하는 경우를 보면   있다. 

 

분자적인 운동은 완결되지 않으며, 오히려 거대한 세계적 조직에 반하거나 그것을 헤치고 빠져나간다. 이러한 경우가 1968 5 혁명이다. 이는 분자적 상호작용에 의해 뜻밖의 방향으로 사태가진전되고 경찰과 대치한 상황에서 대중들의 토론과 소통으로 흘러갈 방향을 정했다. 이호 인해 대중적 흐름은 심지어 좌파 조직들의 벽에 의해 방해 받았다.  분자적 미시적 운동은 유연한 만큼 불안정하기에  새로운 출발을 위한 지반으로 응고시키는 능력이 취약하며, 혁명이 쟁취한 성과를 새로운 선분들로 굳히지 않고는 어느새 다시 뺏기고 원점으로 돌아가고  나쁜 지점으로 밀려갈 가능성도 있다. 분자적인 탈주와 운동은 몰적인 조직으로 되돌아오지 않는다면, , 계급, 당의 이항적인 분포로,  선분들로 되돌아오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대중의 분자적 욕망에  기초하여 계급적 운동과 계급혁명을 재정의하는 , 그리고 대중의 욕망을 억합하는 것이 아니라대중의 욕망에 기초하여 당이나 당적 운동을 재정의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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