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에 관한 정의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그러한 정보를 전달하는 의사소통 매체의 특성에 기인한다는 사실이다. 이제 매체가 어떻게(진실에 관한 정의를 받아 들이는) 우리의 인식론에 결부되는지 검토하도록 하자. ‘인식론으로서의 매체’라는 이장의 제목이 지닌 의미를 단순화하기 위해 ‘공명’이라는 원리의 쓰임새를 창안한 노스럽프라이의 말을 차용하는 것이 도움이 될 듯하다. 프라이는 “공명을 통해 특정한 상황속에서 특정한 진술이 보편적인 의미를 획득한다”고 했다. 프라이는 첫 사례로 “분노의 포도”1) 라는 어구를 거론했는데, 이 말은 성경의 이사야서 중 장래에 있을 에돔족속의 살육을 찬양하는 정황2)에서 처음 나타난다. 그러나 이 어구는 프라이에 따르면 “이미 오래 전에 그러한 맥락을 벗어나 단순하고 고집스러운 신앙을 반영하는 대신, 인간의 처한 상황에 대한 존엄성을 나타내는 의미로 자리잡았다.” 이렇게 말하면서 프라이는 공명의 개념을 어구와 문장 이상으로 확장시킨다. .. 프라이는 공명의 원천에 대한 물음에 답하면서, 바로 메타포가 추진력(사람들이 겪는 다양한 태도나 경험을 일체화하여 의미를 부여하는 단어나 책, 인물, 역사 등이 반향하는 힘)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래서 아테나 사람은 지적으로 탁월한 사람의 메타포가, 햄릿은 생각만 하는 우유부단함의 매타포가, 앨리스의 호기심은 의미상 말도 안되는 세계에서질서 찾기의 메타포가 되었음을. 세계 어디서든지 확인할 수 있다. (p.38)

1) 존 스타인벡은 이스라엘인들이 홍해를 탈출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는 성경의 줄거리를 차용하여, 인간이 처한 상황에 대한 존엄성을 드러낸 동명의 소설 '분노의 포도'를 집필했다.

2)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으로 가는 도중에 에돔족속이 이들을 괴롭혔으며, 이때문에 성경의 예언서에는 에돔족속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곳곳에 언급되어 있다. 본 내용은 이사야서 34장의 내용으로 하나님이 장래에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애돔족을 심판할 것을 찬양하는 예언서이다.

“당신은 어떤 생각이 전달되는 형식이 그 생각의 진위 여부와 관계가 없다고 착각하는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학계에서는 간행물에 실린 글은 말보다 훨씬 높은 신뢰성과 확실성을 지닙니다. 또한 사람들은 글보다 말이 더 우발적이라는 전제를 갖고 있습니다. 기록된 글은 저자가 숙고하고 수정해 왔으며, 권위자나 편집자가 검토해 왔다고 여깁니다. 기록된 글은 입증하거나 논박하기 용이하며, 개인적이지 않고 객관적인 성격을 지녔다고 여기는데 이게 바로 당신이 논문에서 자신을 지칭할때 이름 석자 대신 당연히 ‘연구자’로 언급한 이유가 됩니다. 말하자면 기록된 글은 본질적으로 개개인이 아닌 세계를 대상으로 발표하는 셈입니다. ..기록된 문서는 ‘진실’을 나타내겠지만, 구두 합의는 단지 풍문에 불과할 것입니다.” (p.43)

당시 280명의 배심원 중 상당수는 수사법이 진실을 좌우한다고 인식하고 있었기에 수사법을 쓰지 않는 소크라테스의 태도야말로 진실을 드러내는 형식과 일치하지 않았기에 유죄평결을 내렸다고 추측할 수 있다. ..진실의 개념은 이를 표현하는 형식이 지닌 편향성에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점이다. 진실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고 그런 적도 없다. 진실은 반드시 적절한 옷을 입고 나타나며 그렇지 않으면 인정받지 못하는데, 이는 ‘진실’은 일종의 문화적 편격이라고 말하는 셈이다. 각 문화는 어떤 상징적 형태중에서 가장 믿을 만하게 표현된 것을(다른 문화에서 하찮게 여기거나 부절적하게 취급할지라도) 진실이라고 여긴다.(p.45)

내가 당신을 설득시키고 싶은 것은, 활자기반 인식론의 쇠퇴와 맞물려 텔레비전 지배 인식론이 부상하면서 사람들이 시시각각으로 멍청해지며 공공생활에 심상치 않은 결과가 도래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바로 이점이, 진실-말하기의 형식이 무엇이건 간에 그 형식에 대한(활용) 비중이 결국 의사소통 매체의 영향력을 결정한다는 요점을 부각시키고자 애써야 했던 이유다. “보면 믿는다”는 말은 인식록전 논리에 있어서 늘 독보적 지위를 누려왔으나 “말하면 믿는다” “읽으면 믿는다” “세어보면 믿는다” “추론해 보면 믿는다” 그리고 “느끼면 믿는다” 및 그 밖의 다른 논리는, 문화가 매체적 변화를 겪을 때마다 그 중요성이 부침을 겪어 왔다. (p.48)

첫째로, 나는 어디에서도 매체의 변화가 사람들의 정신구조나 인지능력의 변화를 초래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중장을 했거나 근접한 사람이 있기는 하다(예를 들면 제롬 브루너, 잭 구다, 월터 옹, 마샬 맥루한, 줄리언 제인스, 에릭 하블로크 같은 사람들이다). .. 나는 어느 정도 피아제적 관점에서 볼때 구어시대 사람들이 문자시대 사람들보다 지적으로 덜 발달했다거나 또는 텔레비전 시대 사람들이 덜 발달 했다는 가능성을 두고 논쟁하는 부담은 지지 않을 생각이다. ..

두번째 요점은 인식론적 전환이 모든 사람과 모든 것들에 다 해당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일부 오래된 매체는 그러했으나 사실상 당시의 관습과 인지적 습관과 함께 사라져버린 반면, 말하기나 쓰기와 같은 의사소통 형식은 계속 살아남을 것이다. 그러므로 텔레비전과 같은 새로운 형식의 인식론도 아무런 도전없이 영향력을 지속할 수는 없다. ..

세번째 요점은 텔레비전을 바탕으로 하는 인식론이 공공의사소통과 그 주변 여건을 오염시켰다는 뜻이지 모든 것을 다 오염시켰다는 의미는 아니다. 노인이나 몸이 약한사람, 그리고 모텔 방에서 홀로 외로움을 느끼는 모든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안락함을 선사하는 텔레비전의 가치를 늘 떠올린다. ..텔레비전은 이성적 담론을 약화시키는 능력만큼 감성적 영향력이 엄청나기 때문에 베트남 전쟁이나 가혹한 인종차별 형태에 대해 감정적 반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 매체는 때때로 파괴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인쇄술은 개체성에 대한 근대적 관점을 촉진시켰지만, 공동체와 융화라는 중세적 감각을 파괴했다. 인쇄술은 산문양식을 만들어 냈지만, 시를 유별나고 배타적인 표현양식으로 밀어내버렸다. 또한 인쇄술로 인해 현대과학의 발전이 가능했으나 종교적 감수성을 단순한 미신적 행위로 변질시켰다. 인쇄술은 국가와 지역의 성장에 이바지 했으나 그렇게 함으로써 애국심을(파괴적인 수준은 아닐지라도) 비열한 감정으로 만들어 버렸다. (p.54)

텔레비전이 그중심부를 장악하면서 공공담론의 진지함, 명료함, 무엇보다도 그 가치를 위험할 정도로 저하시킨다는 점을 드러내고자 애쓸 것이다.(p.55)

 

 

 

라스베이거스라는 도시를 주목해야 한다.  이도시는 20세기  미국의 특징과 열망을 상징하는 메타포와 같기 때문이다. 라스베이거스는 오락과 유흥 외에는  어떤 것도 생각할  없는 도시이기에, 공공담론조차 하찮은 오락거리로 변질시키는 방식으로 사람들의 문화의식을 물들인다미국의 정치, 종교, 뉴스, 스포츠, 교육과 상거래는 별다른 저항이나 소리소문 없이 쇼비즈니스와 유사한 부속물로 변질되었다.  결과 우리들은 죽도록 즐기기 일보 직전에 있다.(p.17)

미국인들보다  뛰어난 자동차를 만든다는 소리를 듣는 일본인들도 경제란 과학이라기보다는 공연 예술에가깝다고 하는데, 도요타자동차의 연간 광고비를 보면 수긍이 간다.(p.19)

나는 의사소통이란 용어를 포괄적 은유로 사용하는데, 담화뿐 아니라 특정문화권의 사람들이 서로 메시지를교환할  있는 모든 방법과 기술체계를 뜻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모든 문화자체가 의사소통 행위이며, 조금  명확하게는 상징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의사소통이 얽히고 설킨 관계인 셈이다. 이제 여기서 공공담론을 표현하는 형식이 어떻게  형식 자체로 인해 드러나는 내용을 규제하고 심지어 지시까지 하는지주목해 보도록 하자. 예로, 원시적인 연기 신호 체계를 생각해보자. 철학을 논하기 위해 연기 신호를 이용할수는 없다. 이처럼 의사소통 형식자체가 전달되는 내용을 제한한다.(p.22)

하루의 뉴스는 우리의 기술적 상상력이 빚어낸 허구다. 조금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이는 미디어가 주관하는 이벤트에 불과하다. 요사이 우리는 세계 도처에서 단편적인 뉴스를 접하는데, 이는 우리가 이용하는 여러가지 매체가 의사소통 과정을 무의미한 조각정보로 파편화시키는 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빛과 같이 빠른 매체가 없는 문화(이를테면 연기신호가 공간지배 도구로서 가장 유용한 문화)에는 오늘의 뉴스가 없다. 뉴스의 형식을 만들어 내는 매체가 없으면, 오늘의 뉴스도 존재하지 않는다(p.24)

마샬 맥루한의 경구(미디어는 메시지다) 처럼 수상쩍게 들린다면,  연관성을 부인하지 않겠다. 나는 30전에 맥루한을 만났는데, 당시 나는 대학원생이었고 그는 알려지지 않은 영문과 교수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나는 맥루한이 오웰과 헉슬리의전통을 따라서 예언자처럼 말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문화를꿰뚫어보는 가장 명확한 방법으로 의사소통 수단을 살펴야 한다는 그의 가르침을 여전히 나의 발판으로 삼고 있다.(p.25)

 문화에서 접할  있는 의사소통 매체가  문화의 지적 사회적 선입관 형성에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추측하는 것은현명할 뿐만 아니라 심히 타당하리라 확신한다. 말하기는 당연히 근본적이고 필수불가결한 매체다. 말로 이해 인간다울  있고인간으로 살아갈  있을 뿐만 아니라, 사실상 말하는 행위가 인간 존재를 규정한다...우리는 언어구조의 다양성이 이른바 '세계관' 차이를 낳는다고 이해할 만큼 언어에 대해서 충분히 알고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의 문법적 특성은 시간과 공간을 인지하고, 사물과 과정을 인식하는 사고방식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 따라서, 모든 사람들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한마음 한뜻으로이해하리라고는 감히 추측할 수도 없다. 

 문화가 다를  세계관의 차이는 얼마나  클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왜냐하면 문화가 (하기) 소산이기는 하지만, 문화는 모든 종류의 의사소통 매체(그림에서부터 상형문자와 알파벳을 거쳐 텔레비전까지) 의해 다른 방법으로 재창조되기 때문이다.

언어와 마찬가지로 각각의 매체는 생각하고 표현하고 느끼는  있어서 새로운 방향감각을 제시하기 때문에독특한 담론형식을만들어낸다. 이는 물론 맥루한이 매체는 메세지라고 말하면서 의미했던 바이다. 그러나맥루한의 경구 그대로는 메시지와 메타포를 혼동할  있기에 개선할 필요가 있다.(p.26~27)

*메타포: 행동, 개념, 물체 등이 지닌 특성을 그것과는 다르거나 상관없는 말로 대체하여, 간접적이며 암시적으로 나타내는일(네이버사전)

 

우리가 말을 통하든 아니면 문자나 텔레비전 카메라를 통해 세계를 이해하든지 간에, 우리가 접하는 매체가방출하는 메타포는세계를 분류하고 계열화하고  지우고 확대하고 축소하고 채색하여 세계가 어떻게 생겼는지 나름대로의 인식론을 편다.(p.27)

 그런데 특이하게도 사람들은 매체가 개입함으로써 우리가 보거나 알게  것을 지정하는 역할에 대해서는별로 주의를 기울이지않는다. 책을 읽거나 텔레비전을 보거나 시계를 힐끗 쳐다볼  사람들은 그러한 행위가 자신의 정신세계를 어떻게 체계화하고통제하는지 대체적으로 관심이 없으며 , 텔레비전 또는 시계가어떠한 세계관을 제시하는지에 대해선 더더욱 둔감하다.(p.28)

  중에서도 20세기 말에 이러한 사실을 알아챈 사람들이 있다.  위대한 관찰자 중의  사람이 루이스 멈포드였다. 그는 단순히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시계를 보는 부류의 사람이 아니었다. 시시각각 모든 사람들의신경을 잡아끄는 시계의 역할보다는, 시계가 어떻게 '순간'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내는지에 훨씬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시계의 철학,  메타포로서의 시계에 주목했는데, 이는 당시 시계제작자는 물론 지성계에서조차 드물었던 관점이었다.

 멈포드는 "시계는 분과 초라는 '생산품' 만들어내는 강력한 기계장치와 같다" 단정지었다. 어떤 제품을생산할  시계는 인간활동을 시간과 분리시키는 효과를 내기 때문에, 이로 인해 수학적으로 측정 가능한 일련의 독립세계가 있다는 믿음을 조장한다. 시계가 만들어내는 순간순간은 자연에서도 신에게서도 비롯된 개념이 아니다. 이는 자신이 만들어낸 기계장치를 통해 자기자신과 대화하는 인간이 만들어낸 개념일 뿐이다.(p.29)

 음성표기로 인해 지식에 대한 새로운 개념뿐 아니라 정보, 청중, 미래세대에 대한 새로운 감각이 형성되었음이 분명한데, 이는문자발전 초기단계에 플라톤이 이미 모두 알아챈  있는 사실이다.

 철학은 비평 없이는 존재할  없는데, 글쓰기를 통해 생각하는 바를 지속적이며 집중적으로 파고들  있으며 편리하기까지 하다. 글쓰기는 말하기를 동결시키고, 그렇게 함으로써 문법학자, 논리학자, 수사학자, 역사학자를 낳았다. 이들은 모두 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디에 오류가 있는지, 지향점이 어디인지 파악하기위해 눈앞에서 언어를 놓치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매달려야하는 부류들이다.(p.30)

 플라톤은  모두를  알고 있었는데, 이는 글쓰기를 통해 인간의 언어처리기관이 귀에서 눈으로 이동하는지각혁명이 도래할것임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실제로 플라톤은, 그러한 인지 전환을 촉진시키기 위해 학생들이 자신의 학파에 들어오기 전에 기하학을 익히도록 요구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만약 사실이라면 이는옳은 판단이었는데, 위대한 문학비평가 노스럽 프라이가 했던말에서  이유를 발견할  있다. "기록된 글은 단순한 기억보다 훨씬 강력하다. 기록은 과거를 현재에 재창조하고, 익히 알고 있는 사실뿐 아니라 환상을불러일으킬 정도로 눈부신 긴장감을 선사한다." 

 노스럽 프라이가 시사했듯이, 인류학자들은 기록된 글이 그저 반복되는 말소리가 아님을 알았다. 이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소리로, 마법사의 일급 속임수와 같다. 글을 발명한 사람에게도 이같이 보였음이 확실한데, 티무스 왕에게 글을 발명해 소개했다는 이집트의  토토가 마법의 신이기도 했다는 사실은 그리 놀랄 일도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와 같은 사람들은 글쓰기에서 놀랄 만한것을 찾아낼  없겠지만, 인류학자들은 순전히 구어만을 쓰는 사람들에게  쓰는 행위(아무와도 이야기하지 않으면서 모든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 얼마나 기이하게 보였는지  알고 있었다.(p.31)

우리는 자연이나 지성이나 인간욕구나 사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언어로 드러나는  대로만 본다. 따라서언어는 우리가 이용하는 매체이고, 언어라는 매체는 우리의 메타포가 되며, 이메타포가 문화의 내용을 형성한다. (p.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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