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르넬로는 차이와 반복에서 들뢰즈가 제시한 반복의 개념과 바로크 음악에서 사용되던 음악적 반복의 형식이 만나며 탄생한 개념입니다. 흔히 후렴이라고 번역되지만 이는 개념적 내용을 표현하기에 불충분하며 오해의 여지도 있기에 리토르넬로라고 그대로 음역하는게 더 적절합니다. 이유는 이 개념이 리듬적 반복에서 시작하지만 상이한 부분의 배치를 포함하여 휠씬 포괄적인 의미를 갖기 때문입니다. 일단 리토르넬로를 시에서 사용하는 라임이나 음악에서 사용되는 후렴 같은 것으로 간주하면 그 개념을 크게 오해하게 됩니다. 리토르넬로는 반복될때마다 다르게 반복되는 리듬이나 선율입니다. 그렇기에 동일하게 반복되는 노래의 후렴과는 거리가 멉니다. 음악을 두고 말하자면 그것은 후렴보다는 오히려 대위법이나 소나타 형식에서 변주되며 반복되는 주제와 더 가깝습니다. 프랑스어에도 후렴을 뜻하는 리프레인(refrain) 말이 있지만 그말을 쓰지 않고 리토르넬로라고 썼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이하에서는 인용될 때에도 리프레인을 리토르넬로라고 수정하겠습니다. 

리토르넬로는 좁게는 리듬적 반복을 지칭하지만 박자와 대비 됩니다. 박자란 음악을 시간적으로 분절하는 형식인데 음가와 강약에 의해 리듬의 규칙적인 통일성을 부여하는 척도이지요. 우리에게 익숙한 서양 음악은 2박자 내지 3박자 계열이 대부분인데 2박자와 4박자의 차이는 강약의 박이 다르다는 점이지요. 2박자가 한마디안에서 강약을, 4박자는 강약 중간 약을 동일하게 반복합니다. 박자가 차이 없는 반복이라면 리듬은 차이의 반복이라고 대비할 수 있겠습니다.  가령 군대의 행진에 박자는 있지만 그것만큼 리듬이 없는 것은 없다 하지요. 리듬은 주어진 박자안에서 음가와 강도를 변화시켜가며 차이화 됩니다. 이런 강도적 차이화는 박자 안에서 조차 박자를 교란하고 초과하기도 합니다.  가령 봄의 제전에서 스트라빈스키는 악센트를 바꾸는 것만으도 박자라는 형식을 와해시킬 수 있음을 보여준 바 있습니다. 

음악적 기원을 언급하지 않으면 리토르넬로는 바로크 시대의 협주곡이나 합주 협주곡에서 사용하던 형식을 지칭합니다. 거기서는 T-a T'-b  T"-… T 와 같은 형식으로 총주 투티(tutti)와 솔로가 번갈아 연주되는데 여기서 반복되는 총주 T, T', T'' ... 이런 것들을 리토르넬로라고 하며 그사이에 솔로로 연주되는 부분을 에피소드라고 합니다.  또 이렇게 리토르넬로와 에피소드가 번갈아 연주되는 형식을 리토르넬로 형식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리토르넬로란 반복구를 뜻하기도 하고, 그런 반복구를 이용한 구성형식을 뜻하기도 한다 하겠습니다. 이때 총주 T는 반복될때 마다 조를 바꾸어 연주됩니다. 나중에 고전주의 시대에 자주 사용되는 론도 형식은 이로부터 나온 것인데 반복되는 주제 론도가 동일한 조로 연주된다는 점이 다릅니다. 

들뢰즈 가타리의 개념인 리토르넬로란 동작, 색채, 음향 등을 재료로 만들어 주는 반복구나 형식을 뜻하지만 음향적인 성분이 주도하는 배치를 뜻하기도 합니다. 게다가 배치의 개념으로 사용할 경우에도 리토르넬로는 단지 음향이 주도하는 배치로 국한 되지는 않습니다. 즉 리토르넬로는 음향이나 다른 반복구들이 영토화와 탈영토화를 주도하는 배치 전반을 포괄합니다. 반복되는 요소가 무엇인가에 따라 음향적 리토르넬로, 색채적 리토르넬로, 동작적 리토르넬로 등이 있고 그 기능이 무엇인가에 따라 영토표시 리토르넬로, 구애의 리토르넬로, 경고성 리토르넬로, 사교의 리토르넬로 등이 있는 겁니다.

리토르넬로는 이런 복합적인 개념을 다루기 위해 들뢰즈 가타리는 리토르넬로의 세가지 성분을 구별합니다. 방향적/영토적 성분, 차원적 성분, 이행적 성분이 그것입니다. 리토르넬로의 방향적 성분은 카오스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 어디로 갈 것인지를 찾기 위한 리듬적 반복입니다. 어둠속에서 노래하며 안정을 찾는 아이처럼 반복적 성분을 통해 어디로 갈지 방향을 찾습니다. 이 리듬적 반복을 통해 카오스는 생존 가능한 환경이 되지요. 대개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성분은 여기가 누구의 영토인지를 표시하는 일종의 깃발이자 벽입니다. 예술조차 우선 포스터요 플래카드란 말이 그것입니다. 여기는 나의 집이라는 영토를 표시하는 새들의 노래가 그렇습니다. 물론 노래만은 아닙니다. 반복되는 냄새, 반복되는 동작, 반복되는 가시적 흔적이 모두 그렇습니다. 

베를리오즈나 바그너가 특정 인물의 등장을 표시하기 위해 사용되는 고정 악성이나 라이트모티브도 포스터나 말뚝으로서 동일하게 기능 합니다. 이처럼 주기적 반복의 코드화가 환경을 구성하는 방법입니다. 이 방향적 성분은 모든 배치의 토대가 되는 일차적 성분이란 점에서 하부 배치라고도 합니다. 이는 자신을 둘러싼 무상한 조건을 자신의 환경으로 구성하는 것이란 점에서 카오스에 대한 환경의 응수입니다. 이로써 무상하게 변하는 카오스의 우주는 카오스 모스가 됩니다. 역으로 카오스란 모든 환경이 탄생되는 조건이란 점에서 모든 환경들의 환경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박자가 동일성의 반복이라면 리듬은 차이의 반복이고 반복되는 모든 주제는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 되며 반복됩니다. 뿐만 아니라 대위적인 선율을 동반하여 다른 표정을 갖습니다. 영토적 배치 안에서 이처럼 표현적 차이를 만드는 성분이 리토르넬로의 두번째 성분인데 이를 들뢰즈 가타리는 차원적 성분이라고 합니다. 이로써 영토를 표시하는 방향적 성분의 코드화된 반복의 표현적 스타일을 만드는 차이가 섞여 들어갑니다. 가령 모방 대위법은 하나의 주제를 반복해서 사용하는데 동시에 이와 대응하는 대위적 선율들이 그 주제와 섞여 들어갑니다. 그렇지 않으면 반복되는 선율은 아무리 아름다운 것이어도 금방 지겨워지지요. 포스터나 플랭카드가 예술 작품이 되기 어려운것이 이때문 이지요. 푸가(fugue)는 물론 카논(canon)이나 파스칼리아(passacaglia)처럼 주제가 고집스레 반복되는 곡 조차 이 대위적 선율들로 인해 아름다운 텍스쳐를 갖게 됩니다. 

단순화하여 말하자면 반복되는 주제의 선율 자체는 수평적 방향을 따라 진행된다는 의미에서 1차원적이라면 대위적 선율은 수직 방향으로 음을 덧붙여 텍스쳐를 2차원으로 확장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두번째 성분을 방향적 성분과 대비해 차원적 성분이라고 하는 것은 이러한 의미 입니다. 물론 선율 자체도 고저를 달리하는 음들로 구성되며 강약이라는 성분 또한 갖기에 1차원이라는 말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대위적 성분들이 추가됨에 따라 차원수가 늘어난다는 사실은 틀림 없습니다. 그러니 차원적 성분이란 이처럼 차원수를 늘리는 성분이라는 말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겁니다. 차원적 성분이 추가됨에 따라 이제 애초에 주제나 리듬은 포스터나 깃발에서 벗어나고 영토적 모티브는 표현적 스타일이 됩니다. 이처럼 하나의 배치 안에 섞여 들며 영토적 표현성을 직조해내는 성분이란 점에서 차원적 성분은 내부 배치라고 합니다. 

영화를 두고 말한다면 반복되는 리듬이 여러 장면에 등장하는 공통된 인물과 상응한다면 하나의 장면을 다른 장면과 풍경으로 만들어 주는 것은 다른 선율들이지요. 리토르넬로의 두성분을 리듬적 인물과 선율적 풍경이라는 개념으로 변주하는 것은 이때문입니다. 이는 리토르넬로가 단지 음향적 배치에 국한된 개념이 아님을 잘 보여 줍니다. 리듬적 인물과 선율적 풍경은 단순한 이항 대립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대위법이나 소나타 형식에서 주제가 그러하듯 선율도 반복되면 리듬적 인물이 됩니다. 그 곡의 얼굴이 되는 것이죠. 또한 리듬도 달라지면 다른 풍경을 만듭니다. 역으로 풍경이 달라지면 그 안에서 인물들의 표정도 달라지게 됩니다. 리듬적 인물은 자신을 둘러싼 것이 달라지면 표정을 달리하며 다르게 행동하게 됩니다. 조건이나 상황에 따라 새들의 노랫소리는 달라지고 고정 악상이나 라이트모티브(leitmotif) 또한 변주됩니다. 그때마다 다른 풍경 속에서 다른 표정을 갖게 되는 것이지요. 반대로 풍경이 반복되며 방향적 성분이 되고 달라지는 인물의 언행이 표현적 풍경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여기서도 보이듯 리듬적 인물과 선율적 풍경의 개념은 천의 고원에서 리토르넬로의 고원과 얼굴성의 고원이 연결되는 교차로 입니다. 

이는 흔히 작품에서 표현과 대응하는 내용의 개념을 이해하는 데 중요 합니다. 가령 렘브란트의 자화상들은 한 인물을 그린 그림들이지만 다른 풍경의 얼굴들을 갖고 있습니다. 초상화를 보고 누구를 그린 것인지만을 본다면 그건 작품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사건이 묘사된 그림도 그렇지요. 작품의 재현된 대상이나 묘사된 주제는 그 작품의 내용이 아닙니다. 포스터와 깃발이지요. 얼굴을 그린 그림이 작품이 될 수 있는 것은 그 얼굴이 어떤 감응을 응결시킨 풍경이 될 때 입니다. 작품의 내용이란 작품에 재현된 인물이나 사건이 아니라 그 풍경에  응결된 감응입니다.  이때 풍경은 그 인물이나 그가 겪었을 어떤 사건에 특이한 감응을 표현하지만 종종 그 감응은 그 인물을 벗어나기도 합니다. 

이게 정말 렘브란트야 하게 하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사건도 그렇지요. 이는 탈영토화하는 이행적 성분이 강력할때 발생하는 일입니다. 이행적 성분이란 반복으로써의 리토르넬로를 차이화하는 또 하나의 성분입니다. 방향적 성분과 차원적 성분이 표현적인 스타일로 영토화하는 성분이라면 이행적 성분은 하나의 배치로부터 탈영토화하는 성분입니다. 물론 새로운 배치로의 재 영토화하가 다시 거기 이어지지만 말입니다. 가령 굴뚝새는 둥지를 짓고 노래를 하여 자신의 영토를 표시하는 배치를 구성하는 데 침입자가 다가오는 기색이 있으면 그 노래를 바꾸어 경고성 리토르넬로를 생성합니다. 암컷이 다가오면 날개를 휘저으며 노래의 강도를 낮추고 단순한 트릴로 바꾸어 구애의 리토르넬로를 만듭니다. 

이렇게 노래나 몸짓 혹은 물리적 성분을 추가하거나 변화시킴으로써 영토적 경계의 배치로 혹은 구애의 배치로 이행하게 됩니다. 영토를 바꾸지 않은채 다른 배치로 이행하는 것이지요.  이처럼 하나의 배치에서 다른 배치로 이행하게 하는 성분이 바로 리토르넬로의 이행적 성분입니다. 이행적 성분은 상이한 배치 사이에 있다는 점에서 사이 배치라고 합니다. 카오스의 우주를 자신의 생존을 위한 집으로 만드는 영토적 모티브가 방향적 성분이고 그 집을 멋지게 꾸며 표현적 스타일을 부여하는게 차원적 성분이라면 문이나 창문으로 외부를 불러들이는 것이 이행적 성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불러들인다 했지만 그건 외부적인 것에서 집의 내부를 여는 것입니다. 집 내부를 집 바깥의 우주와 연결하는 것이지요. 이는 작은 변화만으로도 가능합니다. 

인간의 집을 예로 들자면 인간에게 집이란 통상 거주를 위한 환경이고 나의 영토로서 거주의 배치에 속합니다. 하지만 창과 문을 닫고 조명을 바꾸면 성애의 배치로 바뀌고 음식을 준비하여 친구들을 불러들이면 사교의 배치로 바뀌지요. 과거의 장인이나 작가는 집을 작업장의 배치로 만들어 사용했고 최근에 히키코모리는 집을 유폐의 배치로 바꿉니다. 

우주적 탈영토화라는 말을 이해하는 데 더 좋은 예는 음악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서양음악은 1도에서 5도로 갔다가 다시 1도로 되돌아 오는 조성이라는 구조를 갖고 있었습니다. 화성적 탈영토화와 재영토화가 만드는 소리의 배치인 셈입니다. 하지만 이 구조는 3가지 화성적 코드에서 벗어난 반음계의 사용을 허용합니다. 그런데 허용된 반음계가 다시 그로부터 반음계를 낳으며 탈영토화와 운동이 증식될때 조성적 배치는 와해 됩니다. 이러한 탈영토화 운동은 무조음악이나 음열주의 전자음악을 거치며 모든 주파수로 열린 음향적 우주로 나아가게 됩니다. 파동의 우주 혹은 음향적 입자들의 우주이지요. 모든 분절이나 형식에서 벗어난 음향적 진료들의 우주입니다. 형식 실체관계에서 독립된 일관성을 취하는 표현의 진료, 그 진료의 흐름으로 일어나는 우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들뢰즈 가타리가 음악사에서 모던이라고 명명하는 배치는 이처럼 우주로 탈영토화된 음악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간단히 덧 붙이자면 이렇게 리토르넬로의 이행적 성분은 절대적 탈영토화의 선을 그리며 일관성의 구도와 이어지게 됩니다. 

이는 이후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구성의 구도라는 개념으로 변환되어 그들의 예술 이론을 이끄는 탈 영토화의 선을 그리게 됩니다. 우주라고 했지만 이는 우리에게 주어진 즉자적 카오스로서의 우주가 아니라 영토를 갖지 않지만 동시에 모든 영토와 이어져 있는 전체를 뜻합니다. 즉 이행적 성분이 여는 우주란 가령 모든 모든 소리를 구성할 수 있는 비형식화된 진료의 흐름이고 모든 배치로 열린 잠재성의 장 전체를 뜻하지요. 방향적 성분이 카오스의 우주로부터 환경을 구성하고 벽을 세워 영토를 만든다면 이행적 성분은 절대적 탈영토화의 우주를 향해 배치를 개방합니다. 리토르넬로를 통해 우리는 카오스의 우주로부터 영토적 배치로 나아가지만 또한 그것을 통해 우주로 향한 탈영토화의 선을 그리는 겁니다 

생명이란 이처럼 어떤 것을 기존의 지층이나 영토에서 떼어내 다른 배치로 구성하여 이득을 얻는 능력입니다. 생명의 자리란 일관성의 이득이나 탈 지층화의 잉여 가치라고 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 입니다. 요컨데 리토르넬로의 세 성분은 인물과 풍경을 만들며 작동합니다. 영토적 모티브는 반복을 통해 리듬적 인물을 만들고 영토적 대위법은 그 인물을 둘러싼 것들을 풍경화 하며 이행적 성분은 인물과 풍경을 우주로 개방합니다. 이 가운데 주도적인 성분이 무엇인가에 따라 리토르넬로는 다시 상이한 배치로 구별됩니다. 

가령 그들은 유럽 음악사에서 등장하는 양식 내지 시대 개념을 고전, 낭만, 모던이라는 세가지 배치로 재정의 합니다. 고전은 바로크와 고전주의 모두를 포함하는데 카오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방향적 성분이 주도하는 배치의 이름입니다. 이는 대비법에서 주제와 대선율 소나타 형식에서 대립되는 두 주제들처럼 하나를 둘로 나누는 방식으로 구성됩니다. 낭만은 대지적 영토화가 주도하는 배치이고 모던은 우주적 탈 영토화를 여는 이행적 성분이 주도하는 배치 입니다. 

리토르넬로는 리듬적 반복이 작동하는 배치 모두와 관련되지만 들뢰즈 가타리는 동작이나 색채등과 대비해 음향이 주도하는 배치를 리토르넬로라고 규정하기도 합니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우리가 리토르넬로라고 부르는 모든 표현 진료의 집합은 하나의 영토를 그리며 영토적 모티브와 영토적 풍경을 통해 전개된다. 좁은 의미에서 우리가 리토르넬로라고 부르는 것은 배치가 음향적일때 혹은 그것이 소리에 의해 지배될때를 지칭한다. 

이처럼 시각적인 것에 대비해 음향적 성격을 강조하는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 입니다. 두성분의 탈 영토화 계수와 능력이 그것 입니다. 첫째는 소리가 시각적 성분에 비해 탈영토화 계수가 크다는 점 때문입니다. 소리는 탈영토화되면서 점점 더 정련되고 특정화 되며 자율적인 것이 된다. 반면에 색채는 우선 대상이 아니라 영토성에 집착한다. 그것은 탈영토화될 때 해체되어 다른 성분으로 인도 되는 경향이 있다. 둘째는 도래할 민중과 관련된 능력 때문입니다. 그들에 따르면 예술에서 본질적이지만 여전히 결여된 것이 민중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예술가의 문제는 민중의 모던한 탈 군집화가 열린 대지로 나아가는 것이고 탈 군집화로부터 우주적 민중을 만드는 것 탈영토화로 부터  우주적 대지를 만드는 것입니다. 여기서 탈 군집화란 몰적 집단인 개체적 군중으로부터 벗어나는 분자적 이탈의 선을 그리는 것이고 우주적 민중을 만든다 함은 일관성의 구도로 이어지는 긍정적 탈주선을 그리는 것입니다. 소리가 중요한 것은 이때문입니다. 색깔로는 민중을 움직이지 못한다. 깃발은 트럼펫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며 레이저는 소리로 조절된다. 리토르넬로는 무엇보다 우선 음향적이다. 물론 이런 능력은 역으로 파시즘적 방향으로 인도하는 힘이 강력할 수 있음을 뜻하기도 하지만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리트르넬로와 시간에 대한 중요한 명제를 하나 추가하는게 좋겠습니다. 칸트가 명시한바 있지만 칸트주의자가 아니어도 시간은 음악을 비롯한 모든 경험에 선험적 형식이라고 믿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공허한 형식이자 척도인 그런 시간은 따로 없습니다. 스피노노자식으로 말하자면 상이한 부분들이 리듬을 맞추어 하나처럼 움직일때 크로노스가 즉 시간이 만들어 집니다. 가령 우리 신체의 각 부분이 하나의 신체로 작동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그것 입니다. 농부의 시간이란 자연의 리듬과 자신의 활동을 그처럼 동기화하는 형식 입니다. 리듬적 반복으로서의 리토르넬로가 시간을 만드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라는 겁니다.  선험적 형식으로서의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리토르넬로는 시간의 선험적 형식이며 언제나 상이한 시간들을 만들어 낸다는 말이 뜻하는 것은 바로 이것 입니다. 

소수성과 소수 문학, 소수자 되기 


니체는 도덕이나 종교 감각이나 예술 등 모든 문제를 삶의 광학으로 보고자 했습니다.  스피노자 도 그랬지요. 들뢰즈 가타리도 모든 문제를 삶의 문제로 다루고자 합니다. 창안과 실험 속에서 다른 삶을 만들어 낸 것이 그것입니다.  차이나 생성 존재 내재성 같은 그렇게 추상적인 철학적 개념들을 다룰 때 조차 이는 다르지 않습니다.  정치에 관한 개념 또한 그렇습니다.  안정화 되는 만큼 고형화 되는 삶의 변이와 생성의 선을 끌어 들일길 반복합니다. 이를 위해 고형화 된 틀에 가두는 모든 성분과 대결하는 것 그것이 바로 정치 입니다.  그 대결이 국가 장치나 제도 등과 맞서게 될때 때 거시정치가 작동하게 되고 그것이 나 라고 불리는 유기체나 의미화 주체화하는 기호들 사이를 통과하게 될 때 미시 정치가 작동하게 됩니다.  피할 수 없는 몰적 선분성의 선을 빠져나가는 분자적 선분성의 선을 따라 가며 창조적 탈출선을 그린 것,  이것이 그들의 정치적 사유를 방향 짓고 있습니다 다.다시 말해 정치란 신체와 사유를 횡단하며 작동하는 일종의 추상 기계를 가동시키는 것이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따라서 좋은 삶을 생산하기 위한 윤라학과 생성의 정치학은 하나의 평면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소수자나 소수성의 개념은 흔히들 현실적 문제라고 생각하는 구체적 사람들과 이러한 정치적 사유가 만나는
접점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른바 소수자 정치 내지 소수성의 정치학이 거기서 출연합니다. 소수성이란 개념이 처음 나타난 것은 소수문학 연구를 위하여 라는 부제를 달고 출판된 카프카에서 입니다.  카프카의 문학과 언어에 대한 연구가 소수성 개념이 탄생한 곳이라는 겁니다. 그 뒤에 출간된 책 천의 고원에서 소슈성 개념이 중요하게 사용되는 곳은 언어학의 공준, 되기 그리고 자본과 국가의 문제를 다루는 포획 장치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약간 단순화하여 말하자면 언어나 소수자 되기가 미지적  정치 영역에 가깝다면 자본의 공리계와 국가 장치 안에서 소수자 운동을 다루는 포획 장치 부분은 거시 정치 영역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소수자 정치는 각각의 개인적인 문제를 직접적으로 정책인 것으로 연결하는 소수자의 생존 조건을 모태로 합니다. 이러한 조건은 모든 것이 집합적인 가치를 갖도록 만듭니다. 들뢰즈 가타리가 카프카의 얘기를 인용하며 문학은 민중의 문제다 라고 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이는 소수 문학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소수자 개념이 미시 정치와 거시 정치의  모두의 교점에 있는 것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소수성 개념이 뜻하는 바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카프카와 소수 문학을 경유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소수성을 다수성의 결여나 다수성의 거부로 오해하는 경우가 적지 않게 하는 말입니다. 소수성은 이런 부정적 개념이 아니라 생성 이라는 긍정적 개념이 강조되어야 합니다.

알다시피 카프카는 프라하의 유대인 이었죠. 그는 글을 쓰는 것이 삶 자체였던 작가였지만 체코어 나 히브리어 이디비시(Yiddish)어 가 아니라 독일어로 글을 썼습니다. 하지만 괴테처럼 풍부하고 아름다운 독일어로 글을 쓰지 않고 반대로 빈곤하고 간결한 독일어로 글을 썼습니다. 그건 틀렸다고 는 할 수 없지만 뭔가 이상한 독일어 였읍니다. 프라하라는 변방 거기서도 유대인이라는 소수자의 낯선 독일어로 쓴 것이지요. 그가 괴테적 전범을 따라 아름다운 독일어로 쓰고자 했다면 잘 해도 독일어 충실하게 복종하게 되었을 겁니다. 아마도 자신의 독일어의 빈약함을 한탄 하게 되었을 가능성이 크죠.  반면 체코어 나 히브리어 이디시어로 썼다면 그는 민족 문학 작가가 되었겠지만 자신을 포위한 채 복종을 강요하는 독일어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을 겁니다. 독일어의 충실하게 쓸 수도 없고 그걸 안 쓸수도 없는 궁지 그것이 바로 카프카로 하여금 새로운 출구를 찾도록 만든 조건이었습니다.  그 언어의 빈곤함 이란 표현 능력의 결여가 아니라 생략의 빈틈이고 탈영토화를 위한 빈틈 입니다.  

이런 조건에서 문학은 일종의 대결이 되고 전투가 됩니다 이런 전투적 대결의 멘탈을 잘 보여주는 것은 카프카 처럼 식민지 제국의 소수자 로써 그들의 언어로 문학을 했던 재일 시인 김시종 입니다. 그는 모국어인 조선어로 쓰는 민족 문학을 거절하고 식민지 언어인 일본어로 작품을 씁니다. 이유는 그 일본에 대해서 복수하기 위해서 라고 합니다.  자신의 정서를 형성하고 자기 삶을 대기 처럼 포기하고 있는게 일본어 이기에 모국어로 작품을 쓰게 되면 고부의 방식으로 회피하며 고립의 길로 가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는 그에 반하여 그 친숙한 일본어와 대결하며 일본어에  없는 것을 그 안에 밀어 넣는 길을 택합니다. 까찰 까칠하고 낯설지만 매력적이게 제거할 수 없는 일본어를 만들어 그곳에 돌려주는 것 그것이 바로 일본어에 대한 자신의 복수 라는 겁니다. 복수 마저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것으로 만드는 놀라운 발상이죠.  

카프카도 자신의 글쓰기가 이런 대결이라고 말합니다.  프라하의 유대인으로 하여금 글을 쓰는 것을 가로막는 궁지에서 지배적 다수적 언어 안에서 새로운 언어를 창안하며 진행되는 문학적 전투 그것이 카프카 문학 입니다 추종도 아니고 거부도 아닌 이상한 독일어로 결코 던져버릴 수 없도록 매력적인 작품들을 쓴 거죠. 그 매력에 힘으로 점거한 영토를 통해 파고 들며 독일어를 더듬 거리게 하는 낯선 독일어 그것이 카프카 독일어 입니다. 그처럼 다수적 언어 안에서 그로부터 탈 영토와 된 이상한 언어를 통해 다수적 척도와 대결하는 문학 그것이 소수 문학 입니다. 

소수적 언어도 이런 방식으로 이해 해야 합니다.  소수어는 사용자 수가 적어서 소수언어가 아닙니다.  근대 국가는 어디나 표준어를 정하고 그와 다른 언어를 방언으로 규정합니다. 가령 한국에서는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사용하는 현대 서울말을 표준어 라고 합니다. 표준어는 여러 말들 가운데 척도가 되는 말입니다. 이는 다수 적 언어지만 다수가 사용하는 말이었던건  아닙니다. 서울에 교양있는 사람이 많아요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표준어로 정하면 문서나 신문방송 등에서 사용하고 학교에서 가르치기에 다수가 사용하게 되기는 합니다.  다수여서 척도가 되는게 아니라 척도가 되었기에 다수가 되는 겁니다. 따라서 다수란 말은 주류란 말과 유사합니다. 주류에 속한 자들은 지배적이지만 수가 많지는 않죠. 가령 자본주의 사회의 다수자는 자본가들이고 가부장제 사회의 다수자는 남성이지만 이는 그들 수가 많아서 그런게 아닙니다. 척도를 장악한게 주류이고 다수자 입니다. 다수 소수의 문제는 수의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소수어는 방언이 아니라 언어 안에서 생성되는 새로운 언어이고 모어 아닌 외국어 입니다.  다수어의  지배로부터 지키고 보호해야 하는 언어가 아니라 그것과 대결 하며 그것을 더듬 거리게 하는 언어이고 새로운 것을 창안 하는 언어입니다. 척도 표준과 대결하는 언어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척도로부터의 거리가 아니라 척도를 바꾸는 변이 능력에 의해 정의 됩니다.  방언이 소수어가 되도록 해주는 것 또한 다수어를 변이 시킬 수 있는 능력입니다.  카프카 같은 문학적 언어만 소수어는 아닙니다.  은어나 속어를 끌어들이고 축약과 생략, 중의성과 치환 등을 이용해 영어를 아주 다른 것으로 바꿔 버린 흑인 영어도 그런 경우 이죠. 소수어와 마찬가지로 소수자 또한 수가 적은 집단을 뜻하지 않습니다. 지배적 척도나 가치 로부터 멀리 떨어진 자, 소위 주변이나 소외된자 들입니다. 가령 가난한 이들은 돈이 없다는 점에서 자본주의의 척도와 거리가 멀지만 돈 벌 생각에 사로 접했을 뿐이라면 소수자라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돈이라는 척도를 벗어난 게 아니라 자신이 척도로 삼는 것을 결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변인 입니다.  자기 피부를 원망하며 수세미로 문지른 흑인도 남성들과 동일한 권력을 갖는게 해방이라 믿는 여성도 다르지 않습니다. 자신이 결여하고 있는 다수성을 추종한다는 점에서 음의 부호가 붙은 다수자입니다. 소수자는 또 그저 지배적 속도를 거부하며 그것과 분리만을 고수하는 자들도 아닙니다. 분리된 집단성을 고집하고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척도를 바꾸는 어떤 것을 창안하여 다수적 세계 속에 밀어 넣는 자입니다. 이를 위해 다양한 동맹자를 찾아내는 자입니다.  

이때 동맹자는 단지 어떤  인간들만 뜻하지 않습니다. 동물이나 식물 사물이나 언어 분자나 파동 등도 그 동맹자에 포함되죠 따라서 소수자는 현재의 어떤 상태를 표시하는 말이 아니라 현재 상태를 바꾸는 생성 되기에 의해 정의 됩니다.  소수자는 언제나 소수자 되기를 통해 구성됩니다. 가령 토니 모리슨의 파라다이스에서  잘 보여주듯 흑인이 가는 어떤 특성을 지배적 속도를 대신하는 본성으로 고수하게 되면 흑인성을 척도로 혼혈을 차별하는 대칭적 억압이 나타납니다. 여성이 어떤 특징을 남성과 대결하기 위한 본성적 척도로 삼게 되면 그런 특징 이 결여된 여성이나 트랜스젠더 동성애자 등이 차별과 배제의 대상이 됩니다. 중요한 것은 백인과 흑인, 남성성과 여성성 사이를 횡단하며 새로운 삶의 방식과 척도를 창안 하는 것입니다. 흑인도 흑인 되기를 해야하고 여성도 여성 되기를 해야 한다 함은 이러한 이유에서입니다. 반복하지만 다수성과 소수성은 수에 의해 정의 되지 않습니다. 사실 다수와 소수의 관계는 복잡하고 역설적 입니다. 먼저 어떤 특성이나 상태의해 다수자를 정하면 다수자는 대단히 적은 수만이 있다고 해야 합니다. 가령 미국에서 백인은 다수자이지만 그 가운데 다른 인종과 피가 섞이지 않은 이들은 많지 않을 겁니다. 피부는 희지만 혼혈의 과거가 전혀 없는 순수 백인은 정말 희소 할 겁니다.

반대로 소수자는 셀 수 없이 많습니다.  피부가 희지 않아도 과거에 다른 피가 섞인 이들은 모두 소수자라 해야 하니까요. 그래서 들뢰즈 가타리는 무한 집함 논의 개념을 이용해 다수자는 많아도 가산 집합인 반면 소수자 는 비가산 집합이라고 합니다. 가산 집합 이란 자연수를 차례대로 대응 시킬 수 있는 수입니다.  비가산 집합이란  그럴수  없는 수, 즉 셀 수 없이 많은 수를 뜻합니다. 소수자는 이처럼 접속이나 혼성에 의해 구성 되기에 단일한 성원으로 구성될 때 조차 비가산적인 능력을 행사합니다. 접속과 혼합은 그 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생성의 잠재성을 뜻하는 것입니다. 비가산적인 것이 중요한 것은 사실 수가 많다는 것보다는 이것 때문입니다. 다른 한편 다수자는 수적 다수가 될 수 있습니다. 척도와 표준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척도나 표준은 누구든 따라야 할 가치라고 간주되기 에 다수자에 속하지 않은 이들도 의당 따르기 쉽습니다.  그렇게 척도와 표준을 공유하면 다수자에 속하지 않은 이들도 다수자와 동일한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돈버는 생각에 사로잡힌 노동자, 남성보다 더 남성적인 여성들이 그렇죠. 지배적인 척도를 따른 이들이 바로 다수자인 겁니다. 이와 다른 이유에서 들뢰즈 가타리가 말하는 의미의 소수자는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적습니다.

흑인, 여성, 식민지인, 선주민 등 어떤 특징을 공유하는 범주에 속한 이르게 아니라 새로운 삶의 방식 새로운 표현 기계 새로운 척도를 만들어내는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소수자 되기가 소수자를 정의하는 겁니다. 하지만 방언이 소수어는 아니지만 소수어가 될 능력이 크 듯이 상태로서의 소수자는 소수자 되기로 나아갈 잠재성이 크다고 하겠습니다. 다수적 권력에 의해 포위된 삶을 매순간 살아야 하기에 소수자들을 삶은 개인적인 것 조차 정치적이기 마련이고 그것이 현행의 삶의 조건을 바꾸려는 욕망을 촉발하기 때문이죠. 소수적 조건이 소수자 되기 후자 운동의 긍정적 삶을 향한 잠재성을 함축하고 있는 것입니다. 소수자 되기란 그처럼 그런 잠재성을 다른 감수성이나 다른 의식으로 밀고 나가 새로운 동맹, 새로운 공동체를 구성하는 것입니다.  소수자는 이질적이고  혼동적이며 접속과 변이에 의해 증식 합니다. 이질적인 것이 섞여 들며 만들어지는 동맹이나 공동체가 소수자를 만들어 냅니다.  셀수없이 많은 그런 접속과 혼종은  자본의 공리계로 제한되지 않는 생성능력을 같습니다. 소수 자의 혁명성은 이로부터 나옵니다.  공유계를 벗어나 결정 불가능한 명제나 주장을 착안 하는 것 바로 그것이 혁명적 결정의 싹과 장소라고 들뢰즈 가타리는 말합니다.  물론 자본의 공리계는 그렇게 창안된 명제나 요구를 다시 공리로 추가하여 포섭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괴델의 정리는 그렇게 포섭해도 결정 불가능한 명제가 새로이 생성될 수 있음을 함축합니다. 더는 공리를 추가할 수 없는 절대적 포화는 없습니다. 포화란 상대적일 뿐 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어떤 공리적 포섭도 새로운 결정 불가능한 명제의 생성을 막을 수 없습니다. 결정 불가능한 것에 포섭 또 생성도 끝이 없는 겁니다. 결정 불가능한 것의 창안과 포섭 그리고 재창안이 반복되는 내재적 과정 민이 있는 거죠. 막스라면 영구 혁명 이라 했을 이러한 과정을 니체라면 영원 회귀 라고 했을 겁니다. 이러한 소수성 개념은 욕망과 권력의 관계에서 정치가 길을 찾는 데 중요합니다 소수성 개념이 등장한 책 카프카는 욕망과 권력의 대립 대신 양자의 내재적 관계를 명시하는 명제가 등장한 책이기도 합니다. 권력이 욕망이다 라는 명제가 그것입니다. 이로써 욕망과 권력은 별개의 대립적 개념이 아니라 하나가 다른 하나를 만들어 내는 상호 내재적인 것이 됩니다. 어떤 하나는 좋고 다른 것 나쁘다는 식의 말을 할 수 없게 되죠. 그렇다면 권력에 대한 비판과 저항은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물음이 제기되고 됩니다. 욕망과 권력의 대한 가치평가도 그에 따른 선별도 방향을 잃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권력은 생산 한다 라며 권력의 긍정성을 강조함으로써 푸코가 빠지게 된 이론적 궁지와 유사합니다. 

알다시피 푸코는 저항의 지점을 찾기 위해 권력을 연구했죠. 권력이 있는 곳에 저항이 있다 그런데 그또한 욕망과 권력의 내재성에 도달합니다. 욕망있는 곳에 이미 권력 관계가 있다. 그러니 나중에 나타나는 억압을 보고 권력을 비난하는 것은 환상이며 권력의 바깥에서 욕망을 추구하려 나서는 것 역시 허망한 일이다. 권력은 생산적이고 아래로부터 작동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그에 대해 저항할 이유가 사라지고 맙니다. 천의 고원에서 들뢰즈 가타리는 권력이란 욕망이 지층화 된 것이고 탈주선이 일차적 이라는 명제를 통해 그 내재성안에 가치 평가의 거점을 마련합니다. 그런데 하나가 다른 하나가 되는 욕망과 권력 사이에서 침로를 찾기 위해선 개념적 위상의 일차성만으로 불충분 합니다. 상충되는 권력 사이에서 다수성과 소수성을 식별하는 것이 중요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욕망 권력의 경직된 몰적 선분성과 유연한 분자적 선분성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게 아니라 양자 사이에서 소수적인 긍정적 탈주선을 그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소수자 되기 이고 소수 성의 정치학 입니다 .

 

 

카프카

 

동물 되기,  강밀 하게 되기, 지각 불가능하게 되기, 생성이란 흔히 없던 것이 생겨나는것이라고 이해하지만 있던 것이 없어지는 것 또한 의미합니다. 두경우 모두 시간에 따른 변화라는 의미를 함축하지만 사실 생성 이란 어떤 것이 다른 것으로 달라지는 공시적 변화를 뜻하기도 합니다. 요컨대 모든 종류의 변화를 뜻합니다. 

들뢰즈 이전에 생성, 되기란 말은 독립적으로 사용 되었습니다. 이는 종종 존재와 대립되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는데 존재라는 말이 지금 어떤 상태에 있음을 지칭한다고 간주되기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지금 그대로 있다고 보일때조차 그 내부에서는 무언가가 생겨나고 사라지는 미시적 변화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모든 존재자는 생성속에 있습니다. 즉 존재란 생성을 뜻합니다. 하이데거는 존재를 존재자와 구별해야 함을 강조한 바 있습니다. 존재론을 존재에 대한 사유라 한다면 존재론적 명제는 오직 하나 밖에 없었다고 들뢰즈는 말합니다. 존재는 일의적이다 라는 명제가 그것이라고, 존재의 일의성이란 존재란 오직 하나의 목소리를 가짐을 뜻합니다. 존재가 생성을 뜻한다 함은 그 오직 하나의 목소리가 바로 생성이란 말입니다.

존재하다란 어떤 존재자도 사용할수 있는 술어 입니다. 그것은 모든 존재자에게서 반복되는 생성을 뜻합니다. 존재는 생성 이지만 생성의 양상은 단 한번도 같을리 없습니다. 모든 물방울에 대해 똑같은 하나의 바다가 있지만 그 바다는 역으로 각각의 물방울들이 달라질 수 있음을, 모든 차이의 열려 있음을 뜻합니다. 물방울 들이 합쳐지고,  변형되고 갈라지고 하며 무수한 형상을 취할 수있는 건 그게 모두 하나의 바다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개방성은 일의성의 본질적 특징이라고 하겠습니다.  

존재는 생성이라는 말은 맞지만 그것만이라면 그 말은 모든 존재자가 입을 수 있는 아주 크고 헐렁한 옷이 되고 맙니다. 생성을 제대로 사유하려면 역으로 존재자들의 차이를 통해 생성을 사유해야 합니다. 존재 자체를 차이를 통해 사유해야 합니다. 들뢰즈가 스피노자주의에 대해 실체로 하여금 양태들 주위를 돌게 만든 것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고 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이게 바로 그가 차이의 철학을 통해 하려는 것입니다. 차이의 존재론이란 존재와 존재자 간의 차이가 아니라 존재 자체를 차이로써 사유 하려는 문제 설정입니다. 존재자를 존재하게 해주는 차이, 존재자를 만들고 변화시키는 차이, 그게 바로 들뢰즈의 존재론을 하이데거의 그것과 다르게 해주는 차이 개념입니다.

존재자 네지 양태의 층위에서 생성을 사유하는 것은 어쩌면 존재 자체를 생성으로 사용하는 것보다 더 어렵습니다. 존재자는 존재와 달리 뚜렷한 경계를 갖는 명확한 대상으로 포착 되기때문입니다.  그 명확함과 뚜렷함으로 인해 생성이 오히려 보이지 않는 겁니다. 우리가 감지하고 생각하며 말하는 것은 규정된 대상으로서의 존재자 입니다. 우리는 그 규정성안에서 존재자를 보고 그 규정성을 통해 그것에 대해 말합니다. 너는 여자고 저건 개고 이때 그 존재자를 지속적으로 관통하고 있는 변화는 그 규정성에 가려 지워집니다.

여자, 개 등 익숙한 가시적 형태나 그걸 지칭하는 언어는 대부분의 사람들로 하여금 비슷한 방식으로 보고 행동하게 한다는 점에서 아무리 작아도 물적인 구성물 입니다. 이는 어떤 것에 대해 쉽고 빠르게 보도록 해 주지요. 바로 그렇기에 잘 보이지 않으니 미시적 변화를 보지 못하게 하고 감지 되었을 때조차 사소한 것으로 간주하게 합니다. 언어와 감각의 격자와 대응하는 물적 구성물에 가려 분자적인 미시적 차이가 생성을 반복하고 있음을 놓치게 됩니다. 감각의 격자 안에 있기에 물리적으로 지각 되기 어렵고,  언어의 격자 안에 있기에 지각 되어도 말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들뢰즈 가타리는 홀로 고립되어 변화 일반을 지칭하던 생성 되기란 말을 하이픈으로 다른 단어와  결합하여 사용하는 새로운 개념으로 재발명합니다. 동물-되기, 여성-되기, 강밀하게-되기, 분자-되기, 지각불가능하게-되기 등등이 그것입니다. 이는 단지 존재자의 층위에서 발생하는 변화를 포착하기 위한 개념일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그 변화를 만들어가기 위한 전략적 개념이기도 합니다. 즉 되기는 하이픈으로 연결되는 존재자를 통해 기존의 익숙한 감각이나 사유의 격자에서 벗어나기 위한 적극적 전략을 표현합니다. 가령 동물-되기나 흑인-되기는 동물, 흑인 같은 소수적인 몰적 구성물을 통해 다수적인 몰적 구성물로부터 벗어나는 창조적 탈주 선을 그리는 것입니다. 지각 불가능한 것을 위한 통로나 지각 가능한 표지를 만드는 물적 성분을 동반하지 않고 선 어떤 흐름, 어떤 분자 되기도 몰적 구성 물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 이로써 우리는 능동적 생성의 장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예를 들어 동물 되기는 인간이 동물적이라고 보이는 어떤 것을 통해 자신의 현재 상태 즉 인간의 통상적 상태를 벗어나는 것입니다. 말타는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인간이 말을 타는 데는 두 가지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속도로 말의 속도를 맞추는 겁니다. 말을 길들여 말의 움직임을 인간화하는거지요. 말을 타려면 둘다 변화가 필요하지만 사실 이 경우에는 인간도 말도 본질적으로 어떤 변환의 문턱을 넘지 않습니다. 인간에  맞추어 말의 속도를 줄이는것이니 인간은 기존의 문턱 안에 머물러 있습니다. 말에게도 그 속도는 이미 기존 문턱 안에 있는 것이니 애써 달라질 게 없습니다. 인간화라고 하지만 이는 사실 어떤 문턱을 넘지 않기에 무언가 다른것이 되는 게 아닙니다. 

다른 하나는 말의 속도와 움직임에 말 타는 사람을 맞추는 겁니다. 말에 맞추어 인간이 말의 일부가 되는것이니 말 되기라 할 수 있겠지요. 말의 속도를 통해 인간의 속도에서 벗어나는 겁니다. 그러려면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속도의 문턱을 넘어야 합니다. 통상의 인간과는 다른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몽골 기병들의 놀라운 속도는 이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하죠.  모비딕에서 에이허브는 모비딕을 쫓아가기 위해 미쳤느냐는 항해사의 비난을 묵살하고 태풍에 돛을 올려 항해를 계속합니다. 모비딕에 홀려 인간으로서는 감당하지 못할 어떤 강도의 문턱을 넘는 겁니다. 고래-되기 혹은 모비딕-되기 라고 할수 있겠습니다.

되기는 하이픈으로 연결되는 것과 동맹을 맺는 겁니다. 몽골인들은 말을 부하나 도구로 부리는게 아니라 말을 따라 달리며 말과의 동맹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에이 허브와 피커드 호의 선원들은 모비딕을 따라가며 모비딕과 동맹을 맺는 겁니다. 이는 공통의 목적도 없고 계약이나 동의도 없으며 심지어 적대의 감정마저 동반하는 동맹 입니다. 정치인들이 흔히 하듯 협정문에 서명하거나 나란히 서서 악수하며 사진을 찍는게 훌륭한 동맹의 징표는 아니지요. 반대로 펭귄의 대한 인간의 일방적 동맹도 있고 에이허브처럼 경쟁이나 적대마저 새로운 힘의 자원으로 삼는 동맹도있습니다. 적마저 동지로 삼는 동맹 입니다. 정치의 문제는 적과 동지를 가르는 문제라는 칼슈미트의  정의가 놓치고 있는 치명적인 지점이 바로 이것이지요. 

누군가를 감당할 수 없는 속도로 향해 나아가게 하는 것은 지금 있는 곳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것은 강력한 매혹의 힘입니다. 모비딕에 홀려, 말의 속도에 매혹되어 인간의 문턱을 넘게 되는 겁니다. 그렇기에 되기 동맹은 감염에 의해 이루어지는 셈입니다. 마치 흡혈귀에 물려 인간을 등지고 흡혈귀가 되는 사람 처럼 말입니다. 1730년부터 1735 년까지 사람들이 듣는 것은 모두 흡혈귀에 대한 이야기 뿐 이었다. 따라서 동물 농장처럼 인간들의 행태를 풍자하기 위해 동물들을 동원하는 알레고리나 아감벤 처럼 인간의 삶인 바이오스가 동물적 생명인 조애(zoe)로 전락했음을 비판하기 위해 생명 정치를 말하는 것은 동물 되기와 정 반대편에 있다 하겠습니다.

되기는 자기에게 없는 어떤 힘을 얻기 위해 자기와 이질적인 어떤 것과 동맹 하는 것입니다. 분자적인 감염에 의해 이질적인 것에 말려 들어가는 동맹입니다. 그렇기에 이것은 혈연 관계의 선을 따라 펼쳐지는 진화가 아니며 신화적 형태를 동반 할 때 조차 신화적 원형으로 후퇴하는 퇴행도 아닙니다. 시베리아 부족들에게는 피로 이어진 가족을 떠나 곰이나 호랑이와 결연 동맹을 맺는 신화가 많습니다. 그들은 대게 이를 근거로 그 동물이 자신들의 시조라고생각합니다. 이는 그 동물과 유사성이나 그 동물에 대한 원형적 상상력의 산물이 아니라 그 동물에게서 감지했던 어떤 힘에 매료되어 그 힘과 동맹 하려는 욕망, 그 동물의 힘을 통해 자신의 힘을 표현하려는 욕망의 산물입니다. 이는 유사한 것에 대한 공감이 아니라 차라리 이질적인 것에 매혹되어 본성에 반하는 참여에 말려 들어가는 겁니다. 되기는 혈연이나 종을 가로지르는 횡단적인 선을 따라 낯선 것의 생성 속으로 말려 들어가는 동맹 입니다. 이질적인 것과의 접속을 통해 혈연적 선을 꺾으며 새로운 이탈의 선을 그리는 리좀적 동맹 입니다. 

동물 되기는 동물의 행동을 모방하는게 아닙니다. 몽골인은 말의 흉내를 내거나 말의 동작을 모방 하는게 아니라 말을 타고 달리는 겁니다. 동물 되기는 동물을 따로 만들어 내는 것도 아닙니다. 되기는 자기 자신 이외의 어떤 것도 생산 하지 않는다. 에이허브의 고래 되기에는 고래가 보이지 않습니다. 고래를 쫓는 선원들 만 있을 뿐입니다. 모두들 동물과 함께 자신을 다른 무언가로 생산하는 것입니다. 또한 동물 되기는 꿈이나 상상, 환상이 아니며 그것은 전적으로 현실적입니다.  몽골인의 기마술은 상상이나 환상이 아닙니다. 모비딕이나 에이허브는 문학적 상상속의  존재자이지만 모비딕의 속도를 따라가기 위해 배를 가속하는 것은 분명 현실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현실에서 물리적이고 신체적인 강도를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되기는 강밀하게 되기 이고 강도적인 힘의 생산 입니다. 상상이나 환상이 등장할 때 조차 그것은 현실에서 어떤 강도를 생산하기 위해 이용되는 겁니다. 하지만 강밀하게 되기가 단지 속도나 강도를 올리는 것만은 아닙니다. 공중에 멈춰선 매는 속도가 없는게 아니라 대단히 강밀한 속도를 갖습니다. 학춤을 추는 사람에겐 팽팽한 부드러움을 위해 오히려 속도를 감속하는 게 중요합니다. 거기서 문제는 속도의 고저가 아니라 학의 감응이고 그 감응을 만드는 강도 입니다. 속도든 움직임이든 동물 되기를 한다는 것은 그 동물의 감응을 산출하는 어떤 강도들의 흐름을 만들어내는 겁니다. 

동물의 감응을 통해 새로운 강도적 분포를 만들고 이를 통해 우리의 신체와 행동을 바꾸는 것입니다. 다른 되기 들도 그렇습니다. 제니스 조플린(Janis Joplin)은 흑인의 목소리를 통해 백인의 성대가 만들어 내던 통상적 음색을 바꾸어 버립니다. 카운터테너나 카스트라토는 여성들의 목소리를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바꾸죠. 여기서 흑인이나 여성은 도달해야 할목표가 아닙니다. 되기는 그것을 향해 가지만 도달하는 곳은 그곳이 아니라 중간의 어딘가 입니다. 출발지와 목적지의 중간에서 새로운 다양체를 창안하는 겁니다. 도달한 그 중간이 목적지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입니다. 목적지 없이 도달한 중간이 여성이나 흑인 같은 몰적 구성물의 이름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심지어 도달점이 언제나 중간 이기에 흑인 목소리라는 목적지가 있었던 경우임에도 다른 것으로 간주되기도 합니다. 예전에 조플린의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 저는 흑인 가수라고 생각했는데 한참을 지난 후에야 그게 아님을 알고 크게 놀란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노래를 듣고서 제 어머니가 했던 반응은 동물의 소리지 사람의 소리냐라는 것이었습니다. 똑같은 소리가 누구에겐 흑인의 목소리로 다른 누구에겐 동물의 소리로 들렸던 겁니다. 

모든 되기는 이중적입니다. 작곡가 올리비에 메시앙(Olivier Messiaen)은 새를 통해 새로운 음악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탁월하게 새 되기를 했던 사람입니다. 조류 학자라 할 만큼 새에 대해 관찰하고 연구했던 그는 새들의 노래는 물론 새들의 행동 등을 통해서 새로운 음악적 소리를 만들었습니다. 역으로 그의 작품 집인 조류 도감은 음악적 소리를 통해 다양한 새들의 감응을 산출합니다. 그 소리는 새들의 리듬이나 선율을 이용할 때 조차 새들이 노래하는 것을 모방하지 않습니다. 종달새의 노래 같은 것을 기대 했다면 아주 당황할 음악을 들려줍니다. 여기서 메시앙의 새 되기는 새의 음악되기를 통해 진행됩니다. 이중의 되기라 함은 이런 의미에서 입니다. 새들은 그대로 둔 채 새들에게 다가가는 게 아니라 새 자체 또한 다른 것이 되게 하는 겁니다. 새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새마저 다른 어떤 것이 되게 하는 겁니다. 이중적으로 진행되는 되기와 관련해 들뢰즈 가타리는 되기의 블록 이라는 개념을 제안합니다.

즉, 메시앙의 새 되기,  새의 음악 되기라는 두개의 되기가 하나의 블록을 이루고 있다는 겁니다. 에이허브의 고래 되기는 모비딕에 속도 되기를 동반하고 제니스 조플린의 흑인 되기는 흑인의 음악 되기를 동반합니다. 이중의  되기는 이중의  탈 영토화를 통해 이루어 집니다. 메시앙이라는 인간이 탈 영토화 되어 새가 되는 것이고 새는 탈영토화 되어 음악이 되는 것입니다.  이 이중의 탈영토화를 끌고 가는 것은 새의 음악 되기 입니다. 새를 탈영토화는 음악 되기의 선을 따라 메시앙의 탈영토화가 이루어 집니다. 탈영토화를 끌고 가는 힘은 상대적으로 표현의 역할을 하고 그것에 의해 탈 영토화 되는 힘은 상대적으로 내용의 역할을 합니다. 즉 새의 음악 되기가 표현의 역할을 한다면 그 표현에 의해 발생하는 메시앙이 새 되기는 내용의 역할을 한다는 겁니다.  쉽게 말하면 어떤 음악을 들으며 이건 새 소리야 이건 동물의 소리야 하는 느낌을 갖게 될 때 그 음악적 소리가 표현이 라면 새니 늑대니 하는 느낌은 내용 이라는 겁니다. 새의 감응을 음악으로 표현하며 매시앙은 새 되기를 합니다. 그는 새를 대상으로 묘사하거나 재현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새가 되어 음악을 하는 겁니다. 동물원에 갖힌 원숭이의 세계를 글로 쓰며 카프카는 동물 되기를 합니다. 카프카 역시 그 원숭이에 대해 글을 쓰는 게 아니라 원숭이가 되어 글을 쓰는 겁니다.  

새가 되어 익숙한 음악에서 벗어나는 창조적 탈주선을 그리는 것이고 원숭이가 되어 인간 세계로 부터 벗어나는 탈주선을 그리는 겁니다. 그렇게 글을 쓰며 카프카는 원숭이의 분자를 방사하는 것이고 그렇게 음악을 쓰며 메시아앙은 새의 파동을 만들어 내는 겁니다. 인간들의 격자로 부터 벗어나는 어떤 새로운 생성의 흐름을 창안하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모든 되기는 분자 되기 이고,  파동 되기 입니다. 몽골 가수 노르부 반자드(Namjilyn Norovbanzad)가 노래할때 그는 시원하게 펼쳐진 광대한 초원의 파동들을 방사 합니다. 우리는 그의 초원 되기에서 음향화된 초원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게 어째서 초원이냐고 물으면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통상적 지각을 벗어나있는 소리이기 때문입니다. 지각 되지만 지각될 뿐 그게 무언지 말할 수 없는 지각, 그저 초원 같다는 모호한 감응만  남기는 지각 입니다. 지각 불가능한 지각 입니다. 이는 사실 다른 모든 되기도 그렇습니다. 그렇기에  모든 되기는 엄밀하게 말하면 지각의 격자를 벗어나는 지각 불가능하게 되기 입니다. 초험적 경험입니다. 그 극한에는 모든 몰 쪽 구성물에서 분자적으로 이탈하는 입자들의 강도적 흐름이 있습니다. 일관성의 평면이 거기에 있습니다. 모든 되기 들은 자신의 출구를 발견하게 될 이 최후의 문인 일관성의 평면 위에 쓰여 진다. 일관성의 평면 위에서 모든 것은 지각 불가능하게 되고 모든 것은 지각 불가능하게 되기 이다.  그러나 바로 그 위에서 지각 불가능 한것은 보이고 들린다.

 

 

미시 권력이나 미시 정치학 이라는 말은 감시와 처벌에서 푸코가 사용한 이래 널리 사용되는 개념이 되었습니다. 들뢰즈와 가타리 또한 미시 정치학 이란 말을 자신들의 문제 설정을 요약하는 개념으로 사용합니다. 특히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 안티오이디푸스에게 진 빚을 명시한 바 있고, 안티 오이디푸스 영역판의 서문을 써 주기도 했습니다. 들뢰즈 가타리의 카프카는 푸코의 영향이 크게 드러나는 책입니다.  천의 고원에서 미시 정치학과 선분성을 다루는 부분은 이를 다시 확인해 줍니다. 이는 기존 정치학의 권력 개념을 근본에서 뒤흔들며 새로운 정치분석의 장을 열었습니다. 동시에 이는 들뢰즈 가타리와 푸코의 차이가 가장 분명히 드러나는 곳이기도 합니다. 

권력이 있는 곳에 저항이 있다. 이 명제가 보여주듯 푸코는 권력과 저항이라는 개념을 근간으로 사유합니다. 반면 들뢰즈 가타리는 욕망과 권력이라는 개념에서 시작합니다. 푸코는 욕망이란 개념이 결여나 억압과 뗄수 없다고 거부하지만 들뢰즈 가타리는 배치란  권력의 배치가 아니라 욕망의 배치이고 권력이란 배치가 지층화된 차원이라며, 자신의 입장을 그와 대비합니다. 푸코는 욕망보다는 쾌락이 더 낫다며 후일 성의 역사2에  쾌락의 활용 이란 부제를 붙이지만 들뢰즈 가타리는 쾌락은 욕망의 내재적 과정을 중단시키는 방종이자 재영토화라며 비판 합니다. 들뢰즈 가타리의 미시 정치학이욕망이란 개념에서 시작되어야 하는 이유는 이로써 분명해집니다

들뢰즈 가타리에에게 욕망이란 니체의 말로 바꾸면 '의지'  더 정확히는 '힘에의 의지'입니다. 니체는 우리의 의지가 단일 하지 않으며 항상 이미 복수적임을 강조합니다. 음식을 하나 먹으려 할 때도 허기를 채우려는 욕망과 맛에  끌리는 욕망, 늘어나는 살을 저지하려는 욕망이 동시에 공존하며 맛에 대한 욕망 또한 여러 가지 다른 맛을 향하여 분열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들뢰즈 가타리 는 의지 즉 욕망은 그 자체로 다양체라고 합니다. 동시에 여러 방향으로 향해 있기에 분열자 라고 명명합니다. 마치 평평한 면 위에 물처럼 모든 방향으로 열려있는 흐름 그것이 욕망입니다.  

약간 통상적인 어법 이지만 모든 방향으로 열려있는 흐름을 통제하여 질서를 부여하고 할 때 권력이 출연합니다. 권력이란 욕망의 흐름을 분절하고 지칭화하여 통제 가능한 질서를 부여하는 성분입니다. 역으로 말하면 욕망이란 권력의 통제 이전의 흐름,  권력의 통제를 벗어난 흐름입니다.  만약 욕망이 혁명적이라고 한다면 이는 욕망이 혁명을 욕망 한다는 말이 아니라 권력의 통제 이전에 그 통제와 무관하게 모든 방향으로 열린 흐름 이란 말입니다.

그러나 욕망과 권력은 그저 대립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특정한 형태로 지층화 되고 고체적 안정성에 갇힌 욕망이 바로 권력이기 때문입니다.  맛에 대한 욕망은 애초에 모든 방향으로 열려 있지만 자신이 속한 음식 문화의 코드에 따라 지층화 됩니다. 지층화 된 맛으 세계 안에서 익숙한 음식과 좋아하는 맛 안에서 벗어날 줄 모르게 된다면 맛에 대한 욕망은 권력이 됩니다. 내 신체를 내 취향을 선 규정하여 정해진 틀 안에서만 먹게 하는 권력이 되죠.  외국 여행을 가서도 항상 먹던 음식만 찾는 것은 선호와 욕망의 형태로 작동하는 이 권력의 작용입니다. 물론 푸코의 지적처럼 이는 그저 부정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지층화된 맛 안에서 미각을 지배하는 권력은 좀 더 나은 맛, 좀 더 맛있는 음식을 생산하게 하니까요.  공부하도록 훈육된 신체가 학습 능력이나 집중력을 생산 하듯이 그러나 그 때 조차 지금의 감각 지금 만든 음식에서 벗어나 좀 더 나은 것을 만들려는 욕망이 없으면 불모적인 반복에 갇히고 맙니다. 

욕망은 지층화되어 권력이 되지만 그 권력에서 다시 누수하고 그것을 범람하는 것 또한 욕망입니다. 늘 만들던 음식의 다른 무언가를 섞어 새로운 방식으로 조리해 보려는 욕망 낯설지만 뭔가 끌리는 새로운 맛에 대한 호기심이 익숙한 맛에 길든 혀의 틈새로 파고들지요. 그것은 다시 지층화 되며 권력이 되겠지만 욕망은 그 안에서 다시 탈 주 선을 그리게 될 것입니다.  혁명과 보수라는 본성을 가진 욕망과 권력이 따로 있는게 아니라 이처럼 탈영토화와 와 재영토화가 반복되는 내재성의 장이 있을 뿐입니다. 혁명과 권력도 그렇습니다.  혁명은 의무감이 아니라 하고 싶다는 욕망을 바탕으로 해야만 가능합니다. 그러나 욕망은 혁명적인 때조차 혁명만 욕망 하진 않습니다. 혁명이 성공하면 혁명을 생산한 욕망은 자신이 생산한 체제 안에서 지층화 됩니다. 혁명의 욕망이 그 혁명을 만든 체제를 유지하려는 권력이 되는 건 차라리 자연스럽다 하겠습니다. 그러니 혁명 이후 혁명은 다시 시작되어야 합니다.  혁명과 권력 역시 영구 혁명을 함축하는 내재성의 장안에 있는 겁니다. 

욕망의 흐름을 통제하는 데는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홈을 파서 욕망의 흐름을 통제하고 이용하는 겁니다. 수로를 파서 물에 흐름을 고체적 틀에 따라 흐르게 하여 그것을 경작에 이용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동시에 모든 방향으로 열린 공간이 매끄러운 공간이라면 이처럼 특정한 홈을 따라 흐르도록 하는 공간을 홈 페인 공간이라고 합니다. 가령 경찰은 이동하려는 욕망에 따라 흘러가는 교통의 흐름을 홈페인 도로 따라 흘러 가게 하고 신뢰하는 대중의 흐름은 폴리스라인 안에 가두려고 하지요.

또 하나의 방법은 선분화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것의 흐름을 선으로 표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때 선이란 곡선 입니다. 직선이란 곡선의 아주 제한된 경우 일 뿐이지요. 선분이란 끝점으로 절단 된 선을 말합니다. 선분화는 욕망의 흐름을 그와 상응하는 활동의 흐름, 행동의 흐름, 사고의 흐름 그리고 대중의 흐름을 뚜렷하게 구별되는 경계에 의해 절단 하는 작용입니다. 일하는 건지 쉬는 건지,  사랑인지 우정 인지,  남자인지 여자인지를 확실히 하라는 말이 바로 선분적으로 절단하는 권력의 명령어입니다. 이렇게 둘로 나누는 이항적 선분만 있는건 아닙니다.  분업은 노동의 흐름을  절단해  선분화하는 방법입니다. 학교의 시간표는 하루의 시간을 일련의 선분들로 분할하여 학생들의 활동을  통제합니다.  이처럼 어떤 흐름을 순차적인 선분들로 절단한 것은 선형적 성분이라고 합니다. 방사상의 선을 따라 절단되는 원형적 선분도 있습니다. 나,  내가 속한 지역,  도시,  국가,  세계, 우주로 확대되는 것이 그것입니다.  

선분이란 개념에서 중요한 건 양끝의  경계를 뚜렷하게 절단 하는 것입니다.이를 선분 성이라고 합니다.  권력은 그렇게 구별하고 확인하며 절단 하는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분업화 된 라인에서 내 작업을 제대로 완수하라고 요구하는 작업 반장이나 바로 옆에 동료를 통해 선분적 권력은 작동합니다. 특히 권력이 가장 결정적으로 작동하는 것은 흐름이 선분화 되기 시작하는 것과 끝나는 곳입니다. 학기, 학점이란 선분의 끝점에도 권력은 작동하지만 학교의 권력이 가장 강력하게 작동하는 곳은 입학과 졸업이라는 두개의 끝이죠. 그래서 어떤 흐름이 선분화되는 양끝점을 권력 중심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선분성은 단지 일차원의 선분에만 속하는 것은 아닙니다.  두개 끝점을 갖는 선분을 2차원으로 확장하면
선분성을 갖는 면이 되지요. 원환을 그리는 면은 그 선분의 한 끝을 고정한 채 회전시켜 얻어진 겁니다. 이를 3차원으로 확장하면 선분적인 입체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를 굳이 선분적인 선으로 다루는 건 면이나 입체는 흐름을 표현하기 어렵고 또한 절단의 중요성을 드러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선은 흐름과 절단을 다이어그램 적으로 사고하는데 가장 적합합니다.  들뢰즈 가타리의 분열분석이 겨냥하는 것은 개인들 만큼이나 집단들을 가로지르는 선의 배치라고 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실천은 선들을 그리는데 능동적으로 관여하며 그 선들과 동일한 위험 내지의 변이에 부딪힌다. 분열 분석은 선들을 풀어주며 이 선들은 또한 그만큼 삶의 선들 문학 내지 예술작품의 선등 한 사회의 선들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앞서 이항적, 원환적, 선형적 이라는 3가지 형태의 선분의 대해 말했는데 이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들 모두를 관통하는 상이한 유형의 선분성입니다. 하나는 유연한 분자적 선분성의 선이고 다른 하나는 경직된 물적 선분성의 선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또 다른 유형의 선이 하나 더 해집니다. 탈주선이 그것입니다.  

경직된 선분성은 뚜렷하게 분할되고 계산과 예측이 가능한 양상으로 작동합니다. 국민,  계급 같은 거대 집단 뿐 아니라 집단의 원소가 되는 개인이나 관계 감정도 이런식으로 선 분화되어 있습니다. 소속된 원소 모두에게 동일하게 작용하기에 모드를 동일화 시키는 힘이 강력한 선분성입니다. 이 몰적인 성분에서 빠져나가는 유연한 양자적 그림이 있습니다.  대학이나 취업이 요구하는 걸 하지 않고 무언가 이해할 수 없는 짓을 하는 학생들, 남자인 것 같은데 여성복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  겉으로는 멀쩡하지만 비밀스러운 지하 활동을 하는 잠행자들 물론 이들도 모호 하지만 나름의 경계를 같기에 선분화되어 있다 해야 합니다. 그러나 절단의 경계가 모호하고 절단 방식이 유연하다는 점에서 유연한 선분성을 갖고 있습니다.

경직된 선분성은 절단의 기준이나 방법을 소속된 모두에게 동일하게 작동시키기에 물적 선분성이라고 합니다. 너는 사내 자식이 왜 이딴 일로 우는 거야,  여기는 학교니 시험 보기 싫으면 나가,  몰적이라는 말은 기체 역학에서 나온 말인데  6.02 곱하기 10의 23승계의 분자들을 하나로 묶은 단위를 표시합니다. 분자 하나씩 다루어선 기체 상태를 서술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수만큼의 분자들이 동질적이며 동일하게 움직인다고 가정하여 그 전체가 하나인 것처럼 서술하는 겁니다. 개개 분자의 특이한 성질이나 운동은 물적 동일성을 표시하는 통계적 평균속의 작은 편차 중 하나가 되고 맙니다. 

브라운 운동처럼 물적 평균으로 서술할 수 없는 특이한 분자적 운동이 있습니다.  물적 선분성에서 벗어난 움직임에 감염되어 함께 움직이는 이웃이 나타날 때 편차로 환원될 수 없는 분자적 운동이 시작됩니다. 이웃한 것에서 다시 이웃한 것으로 감염되며 확산되는 분자적 선들이 그려지게 됩니다. 물론 이런 분자적 선들 또한 선분성을 같습니다. 드래그 퀸과 드래그 킹, 팸과 부치 같은 선분들이 그런 경우이지요.  엄격한 지하 조직이나 비밀 조직은 유연한 분자적 선분성의 선이 다시 물적인 선분성의 선으로 경화된 경우입니다.  

분자적 선이 기존의 물적 선분성의 선에서 이탈하여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 내기 시작할 때 창조적 탈주선이 그려집니다. 가령 시험이 싫다고 거부하던 이들이 증식 되면서 새로운 교육의 장을 착안 하게 될 때가 그런 경우 겠죠. 그런데 물적인 권력으로 인해 실패하게 될 때 혹은 새로운 걸 창조하는 구성적 능력이 소진될 때 이 다른 욕망은 기존 세계에 대한 분노나 혐오에 정념이 되기 쉽습니다. 이런 정념이 절망과 저주의 정념으로 이어질 때 탈주선을 그리던 분자적선은 파괴와 죽음의 선을 그리게 됩니다. 들뢰즈 가타리는 나치즘이 그런 경우라고 합니다. 그것은 현행화된 니힐리즘이고 전쟁만을 목적으로 하는 전쟁 기계 이며,  죽음 이어 만세를 외치는 자살적 국가였다고 합니다.  물적 전체주의와 구별되는 이런 분자 적인 파시즘은 나치 나 네오 나치 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혐오의 정념이 확산되며 증식되는 대중 운동들도 이러한 경우에 속합니다.  현행의 세계에 대한 극히 정당한 분노에서 시작된 운동조차 창조적 구성 능력을 잃고 혐오의 정념 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면 이런 길을 가게 됩니다.

선분성과  관련해 가장 흔한 오해는 물적인 것은 집단적인 것이고 분자적인 것은 개인적 이라는 생각입니다.
물적 동일성을 가진 개인들이 많지요. 흔히 말하는 개성은 대게 물적인 선분안에 있습니다. 분자적인 것은 개인 이하이거나 개인 이상입니다. 돈과 교환이 지배하는 세상이지만 연대의 욕망들이 있고 증여의 작은 행동들이 있습니다. 일시적 이거나 부분적 이라는 점에서 개인 이하인 그런 것의 흐름을 따라갈 때 개인은 물적 성분에서 이탈하게 됩니다 또 개인의 분자적 이탈은 그의 감염되는 이웃이 생겨나 개인 이상으로 증식 되게 될 때 물적 선분안의 편차를 넘어서 분자적인 운동이 됩니다. 

분자적인 것은 경직된 물적 격자 들을 빠져나가는 누수와 범람의 흐름과 관련된 것이지 개별적인 이탈의 편차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게 분자적인 것은 개인이 아니라 오히려 대중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계급은 생산관계상 의 지위나 기능에 의해 규정된 몰적 집단 이지만 대중은 자신이 소속된 곳에서 벗어난 이들이 모여 들며 형성된 분자적 집단입니다. 즉 대중이란 이웃한 것들과 상호 작용하며 조건에 따라 상이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미시적 요소들의 흐름입니다.  이는 정치적 대중으로 한정되지 않습니다.  은행이나 기업의 회계 단위 같은 경제적 선분을 통과하며 흘러가는 화폐 대중,  도로를 따라 흘러가는 자동차 들로 이루어진 교통 대중 등등이 있죠.

물적인 것이 것이 거시적이라면 분자적인 것은 미시적 입니다. 거시 정치와 미시 정치의 구별은 이와 상응합니다. 그러나 미시 정치는 가정이나 연인 등 일상의 작은 영역에서 작동하는 정치가 아니며 미시적 이라는 말은 단지 규모나 크기가 작음을 뜻하지 않습니다. 미시 정치란 분자적 감염의 양상으로 형성되는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정치 입니다. 대중은 규모나 크기가 작지 않고 큽니다. 그런데도 미시적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것이 거시 정치가 계급이나 국민 등 거대 집단의 이해관계 같은 규정성을 통해 정치를 사고 한다면 미시정치는 하나하나를 보면 작다고 할 수 있는 분자적 원소들의 운동 양상을 통해 정치를 사고 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작동 방식입니다. 국가나 계급 같은 몰적인 집단은 하나의 중심에서 방사되는 명령어나 기준에  공명하며 하나의 구성체로 움직인다면 대중이라는 분자적 집단은 수평적이고 분자적인 감염에 의해 흐름을 형성하며 움직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들뢰즈 가타리는 전체주의와 파시즘을 구별합니다. 스탈린주의 같은 전체주의 는 국가 장치에  상응해 개인들이 공명하거나 복종하며 작동한다는 점에서 물 적입니다.  파시즘은  분자적 감염에 의해 집단적 의지가 형성되고 증식된 다는 점에서 분자적 입니다. 그렇기에 스탈린주의적 전체주의의는 대중 운동이 없습니다.  반면 파시즘은 일차적으로 대중 운동 입니다. 나치즘만이 아니라 수평적으로 감염되며 파괴와 죽음의 검은 구멍을 향해 흘러가는 운동은 모두 미시 파시즘 입니다.  

따라서 몰 적인 것은 나쁘고 분자적인 것은 좋다고 할 수 없습니다.  분자적인 것이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방식으로 작동할 때에는 대중 전체가 부정적 권력을 행사하게 되기에 더욱 더 참혹해지기 쉽습니다. 약간의 유연성이 사태를 좀 더 낫게 하는데 충분하리라는 믿음이야 말로 미시 정치학이 경계해야 할 첫번째 오류 라고 하면 이 때문입니다. 파시즘 처럼 죽음의 선을 그리는 분자적 운동은 시작하지 않은 것보다 못한게 되고 맙니다. 다른 한편 분자적 탈주와 운동은 물적 조직으로 되돌아 가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대중의 흐름은 흘러가 버리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으며 결국 낡은 권력과 과거의 물적 선분들이 재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분자적 탈주선을 새로운 물적 선분 성 으로 변환시키는 입니다. 분자적 이탈이 다시 시작 되더라도 말입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라도 권력 중심은 자신의 손 밖에 있는 분자적 흐름을 따라갈 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무능력 지대로 부터 능력을 끄집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위대한 정치가 란 이런 흐름과 접속하는 사람들 일 뿐이며 파괴의 검은 구멍을 뛰어넘는 양자를 방사하는 사람들일 뿐이라는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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