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과 머리를 구별하는 것에서 얼굴에 대한 개념은 시작합니다. 머리는 신체의 일부이지만 얼굴은 신체가 아니라 그 표면이고 그 표면에 세겨진 표정입니다. 신체의 상태를 표현하기도 하지만 그 이상으로 얼굴과 마주한 누군가를 향해 무언가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기호입니다. 그런 점에서 얼굴은 신체로 부터 탈 영토화 되어 비신체적 표현기계가 될 때 탄생합니다. 얼굴은 그 자체로 기호이지만 또한 입에서 나가는 말들 손으로 쓰는 문자가 실질적으로 요구하는 것을 표시하는 기호이기도 합니다. 기호에 실려가는 잉여성으로서의 명령어를 표시하는 기계, 그것이 얼굴이라는 표현기계입니다. 언어적 기호처럼 그 자체로 의미가 없는 자의적 기표들은 얼굴을 통해 얼굴에 재영토화 됨으로써 비로서 의미화 됩니다. 또한 얼굴은 마주한 얼굴에게 공감 내지 공명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부르고 답하는 주체화가 얼굴을 통해 이루어지는 겁니다.
얼굴은 정치다. 얼굴성에 대한 들뢰즈 가타리의 생각을 요약해주는 것이 될 이 명제는 얼굴에 대한 우리의 통념을 깨는 단적인 문장일 겁니다. 동시에 얼굴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들은 곰곰히 생각해보면 쉽게 수긍할 수 있는 문장이기도 합니다. 의미화나 주체화를 요구하는 이런 저런 명령어를 발송하는 게 얼굴이니까요. 환한 얼굴이나, 찌푸린 얼굴, 슬픈 얼굴 서운한 얼굴, 모두 다 내게 특정한 감응을 요구하는 얼굴이지요. 사실 우리는 상대방이 무얼 원하는지를 알기 위해 눈치를 보기도 합니다. 주변의 얼굴들을 보면서 표정관리를 하기도 하죠. 노동자와 대면한 고용주 얼굴, 학생과 대면한 교사의 얼굴, 유권자와 대면한 정치인의 얼굴은 그 에 부합하는 얼굴을 요구합니다. 이렇게 얼굴들 사이에는 명령어들이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 나의 시선을 잡아주는 얼굴도 그렇습니다. 공명을 요구하고 응답을 요구하는 얼굴이죠. 얼굴을 통해 권력이 작동하고 있는 겁니다. 여기서 들뢰즈 가타리는 두 유형의 얼굴을 구별합니다. 앞 얼굴과 옆 얼굴이 그것입니다. 앞 얼굴은 이마와 볼이라는 여백을 갖는 둥그런 얼굴이고 눈과 입 눈썹 등으로 의미화하는 기호를 방사하는 얼굴입니다. 옆 얼굴은 다른 얼굴과 마주보며 부르고 답하는 얼굴 입니다. 주체와 상응하는 얼굴이죠. 물론 서로 외면하며 반대 방향으로 향한 옆 얼굴도 있습니다. 이 두유형의 얼굴이 섞이면서 의미화와 주체화의 양상이 표현됩니다. 얼굴은 의미와 주체화가 교차되는 지점에 있는 특수한 장치라는 말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입니다.
머리는 신체를 움직이는 코드에 의해 작동하지만 얼굴은 신체의 의한 코드화가 정지되고 머리가 표정이라 불리는 어떤 것을 초코드화 될때 탄생합니다. 머리가 이처럼 얼굴이 되고 표현적 기호를 갖게 되면 이제 다른 신체 부위도 얼굴화 됩니다. 힘차게 치켜든 주먹, 가운데 손가락을 세운 손은 도구와 짝인 신체가 아니라 얼굴과 짝인 기호 입니다. 어깨가 구부러지도록 숙인 고개도, 두팔을 치켜든 상체도, 무릎 꿇은 다리도 그렇습니다. 얼굴이 머리를 넘어 신체 전체를 뒤덮은 겁니다.
또한 얼굴은 신체를 덮은 옷으로 확장됩니다. 주머니와 단추, 어깨에 심은 뽕과 페인 허리성, 띠와 브로치는 신체적 기능을 보완하던 옷을 표정을 갖는 의상으로 바꿉니다. 머리에서 시작된 표면의 정복은 이제 모든 것의 신체의 표면으로 확장됩니다. 주전자나 자동차 집이나 건물 도시등 크고 작은 사물이 나름의 표정을 갖고 얼굴화 됩니다.
사물의 얼굴화는 신체적 생존의 조건인 환경을 풍경으로 변화시킵니다. 즉 풍경이란 환경의 얼굴 혹은 얼굴화된 환경입니다. 역으로 미술이나 영화는 이제 얼굴을 풍경으로 다루게 됩니다. 탁월한 초상화는 그 인물의 얼굴을 그가 산 세계로 풍경화 합니다. 영화의 클로즈업은 얼굴의 풍경 그 자체가 되도록 함으로써 어떤 사건에 대한 그의 감응이나 감정을 장면화 합니다. 이런점에서 도구가 손의 상관자라면 풍경은 얼굴에 대한 상관자 자라고 하겠습니다. 다양한 신체의 얼굴화나 얼굴의 풍경화를 통해 확인 할 수 있는 것은 얼굴이 단지 인간의 얼굴로 제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건물이나 도시 혹은 사물의 표정을 인간적인 방식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들이 빈번하지만 인간의 얼굴은 결코 일반적인 지위를 갖지 않습니다. 인간의 얼굴은 수많은 얼굴의 한 부류 일 뿐입니다. 가령 자동차의 헤드라이트와 라디에이터 그릴에서 인간의 얼굴을 상기하기 쉽지만 그 것이 꼭 인간의 얼굴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유선형으로 늘씬하게 뻗은 차체는 인간아닌 새나 돌고레 신체를 참조하는 경우가 많고 권위적인 관료는 로봇을 연상하게 합니다.
그런 참조나 연상을 이용할때 조차 실은 그것으로써 늘씬함이나 빠름 경쾌한 딱딱함 등의 감응을 표현하려는 것일 겁니다. 얼굴에는 심지어 절대적인 비인간적인 어떤 것이 있다 함은 이런 뜻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얼굴만 있는게 아니라 수많은 얼굴들이 있는 겁니다. 그렇게 상이한 얼굴들을 만들어 내는 추상기계가 있습니다.
얼굴은 기호들의 잉여성이 명령어가 등록되는 흰벽과 주체화의 정념을 끌어 당기는 검은 구멍을 통해 작동합니다. 이마와 볼사이에 흰 벽위에 세겨지는 이런저런 표정은 입에서 나간 말의 실질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다시말해 원하는게 무엇인지를 표시합니다. 보는 이의 시선을 잡아 끄는 두개의 검은 구멍은 그 흰벽에 세겨지는 기호를 만들뿐 아니라 공감 하거나 공명하는 정념을 잡아 당깁니다.
이렇게 흰벽과 검은 구멍의 조합을 통해 다양한 표정을 만들어 내지요. 그래서 그들은 구체적인 표정의 다양한 얼굴을 만들어 내는 흰 벽과 검은 구멍에 체계를 얼굴 성의 추상 기계라고 명령합니다. 얼굴성의 추상기계는 흰벽과 검은 구멍이 체결하고 있지만 이때 흰벽이란 기호가 세겨지는 일종의 서판 같은 것을 뜻합니다. 희다는 것은 비어 있음을 즉 기호가 세겨지기에 적절한 빈 여백을 뜻합니다. 이 서판의 색깔이 반드시 흰색일 이유는 없습니다. 사람의 얼굴이 모두 흰 것은 아니며 건물이나 옷, 사물의 흰벽 또한 모두 희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마치 그것이 기호를 세기는데 최선의 방책인양 흰색을 특권하게 될 때 희다라는 말은 특정 색을 지칭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특정한 색깔이 그런 세계에 대한 선호가 마치 얼굴 자체의 척도라도 되는 양 간주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흰벽의 정도가 좋은 얼굴에 정도를 표시하는 것으로 간주되면서 얼굴 색깔의 위계가 만들어 지게 됩니다. 얼굴성의 추상기계가 넓은 흰 뺨과 눈에 검은 구멍을 가진 백인 그 자체가 된것은 이 때문입니다.
여기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은 바로 예수의 얼굴입니다. 알다시피 신이나 성인의 얼굴은 어디서나 그 성인을 떠받드는 사람들, 자신의 모습을 바탕으로 만들어 집니다. 가령 흑인들의 신이나 성인이 흰 얼굴을 하고 있을리 없습니다. 직접보고 그린 당대의 조각이나 초상조차 없기에 누구도 알리 없는 예수의 얼굴이 지금의 형태로 그려진 건 르네상스 시대였습니다. 그것은 그걸 그린 당시의 유럽의 백인 남성들의 평균적인 얼굴을 통해 발명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예수의 얼굴이 됨에 따라 이제 그렇게 생긴 얼굴이 성인의 얼굴, 본 받아야할 얼굴 한마디로 좋은 얼굴이 되게 됩니다. 척도적인 얼굴의 자리를 차지하는 겁니다. 그 얼굴을 척도로 하여 그로 부터 멀어지는 정도에 따라 차별의 정도가 작동하는 위계화된 인종주의가 이로부터 탄생합니다. 피부색뿐만아니라 눈과 코의 모양 등이 선호와 차별의 대상이 됩니다.
인종주의는 백인 남자의 얼굴을 기준으로 이탈의 편차를 결정함으로써 작동한다고 하는 이런 의미에서 입니다. 즉 인종주의는 백인 자신의 얼굴에 보편성을 부여하는 이러한 선별적 척도의 산물이란 것입니다. 흰뺨을 모델로 하는 이 척도적 얼굴의 자의성은 사실 검은 구멍의 눈에서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검은 구멍에 검다도 실은 특정 색깔이 아니라 정념이나 시선을 잡아 당기는 어트렉터를 뜻하죠. 그러나 이 역시 흰벽처럼 특정 색깔의 눈을 지칭할 수 있죠. 하지만 희지 않은 뺨이 흰정도에 따라 위계화되는 것과 달리 검지 않은 눈은 검은색의 정도에 따라 위계가 되지 않습니다. 유럽인 자신의 눈이 검지 않기 때문이죠.
요컨데 유럽의 백인 남성들이 자기 얼굴로 예수의 얼굴을 만들고 예수의 그 얼굴을 좋은 얼굴의 척도로 삼는 자기 민족 중심적인 순환론이 거기에 있습니다. 백인 남자 얼굴에 보편적인 척도의 지위를 부여하고 그것을 통해 모든 얼굴에 선별과 등급화를 가동 시키는 겁니다. 이로써 흰벽과 검은 구멍의 체계인 얼굴성의 추상기계가 흰색을 특권화하는 인종주의적 추상기계가 되고 맙니다.
앞서 우리는 명령어를 방사하는 얼굴에서 권력을 보았지만 척도가 되어 선별과 위계가 차별의 힘을 행사하는 이 얼굴에서 우리는 얼굴의 또 다른 권력, 얼굴성의 추상기계가 행사하는 또 다른 권력을 보게 됩니다. 얼굴은 정치다라는 명제는 이 또한 함축되어 있다 하겠습니다. 얼굴성의 추상기계는 두가지 방식으로 얼굴성의 권력을 가동시킵니다. 하나는 원소적 얼굴, 다른 하나는 선별 입니다. 먼저 원소적 얼굴이란 특정한 관계내지 배치안에서 준거가 되는 얼굴입니다. 아버지와 자식의 얼굴, 사장과 노동자의 얼굴, 경찰과 용의자의 얼굴, 어른과 아이의 얼굴 등 얼굴의 양식을 형성하는 표준적인 얼굴입니다. 이를 척도로 삼아 좋은 얼굴과 나쁜 얼굴, 허용되는 얼굴과 그렇지 않은 얼굴이 구별되고 선별됩니다. 아니 아버지 앞에서 어떻게 그런 얼굴을, 아니 아이 얼굴을 이따위로 그릴 수 있지, 당신은 경찰 같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네요.
물론 인간의 얼굴, 아시아인의 얼굴 등도 마찬가지 입니다. 표준에서 벗어나는 정도에 따라 좋고 나쁨의 정도가 배열됩니다. 피부 색의 정도에 따라 인간의 얼굴에서 몇 번째 얼굴인지,양순한 표정의 정도에 따라 뻔뻔함의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가 정해집니다. 그 정도에 따라 가능한 얼굴의 범위가 증식됩니다.
물론 가운데 있는 척도적 얼굴을 향해 얼굴을 동일화 시키려는 권력의 벡터가 그와 반대 방향으로 작동합니다. 얼굴성의 추상기계의 작동 양상을 보여주는 추상기계의 변형들을 들뢰즈 가타리는 극한적 얼굴로 정의합니다. 이는 원소적 얼굴과 선별을 통해 구성되는 혼성적인 얼굴들입니다. 이는 상이한 배치들을 넘나 들며 작동하는 기계 입니다. 먼저 의미화가 주도하는 앞 얼굴에 추상기계들이 있습니다. 일단 흰벽과 검은 구멍만으로 이루어진 단순한 추상기계가 있습니다. 다음으로 편차를 통해 그어지는 경계선들로 확장되는 다중적 경계를 갖는 추상기기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장과 노동자 교사와 학생처럼 짝을 갖는 얼굴이라면 의미화와 주체화가 동시에 작동하겠지요. 이는 기호를 방사하는 두눈과 그의 공명하는 두눈의 짝으로 이루어집니다. 한쌍의 앞 얼굴이 마주보며 공명하는 얼굴기계인데 그 두 얼굴 간 적절한 표정의 정도에 따라 복수의 경계선들이 만들어 집니다. 네 개의 눈을 갖는 기계가 그겁니다. 학교, 집, 회사, 경찰서 등 구체적인 조건에 따라 척도에 부합하는 얼굴들이 이 추상기계를 통해 생산됩니다. 서로 연관된 얼굴이 늘어나면 더 많은 눈들이 그에 따라 늘어나게 되겠지요. 들뢰즈 가타리는 대조와도 같은 흰벽에 기호를 기입하는 이런 추상기계들을 대지의 기표적 전제적 얼굴들이라고 명명합니다.
다른 한편 주체화의 옆 얼굴은 되게 마주보는 두 얼굴을 짝으로 갖지요. 트리스탄 이졸데 처럼 서로 부르고 답하며 검은 구멍으로 끌려들어가는 커플 기계는 검은 구멍을 향한 하나이자 둘인 선을 따라 작동합니다. 주체화 체제와 상응하는 옆 얼굴이 검은 구멍에 끌려가는 양상을 표현하는 추상기계 또한 공명하는 인물들의 수에 따라 공명을 위로하는 성분들의 수에 따라 증식됩니다. 공명을 촉발하는 음악 풍경 얼굴 의식 회화 등이 더해짐에 따라 그 선들은 증식되고 중첩되며 작동합니다.
하지만 코키토의 주체화 즉 생각하는 나는 존재하는 나 라는 등식을 통해 작동하는 주체화는 그 처럼 마주보는 짝을 갖지 않습니다. 짝없이 고립된 하나의 얼굴이란 점에서 독신자 기계라 명명되는 주체화의 추상기계는 하나의 옆 얼굴이 나라는 자아내면의 검은 구멍에 빨려 들어가는 양상으로 작동합니다.
얼굴에 대한 사유를 앞서 제시했던 것은 사르트르의 현상학이었습니다. 그는 눈과 구별되는 응시, 지향성이 담긴 시선인 응시를 통해 어떤 즉자적 존재가 나에 대한 존재가 됨을 지적합니다. 그때 그의 머리에서 나는 그의 얼굴을 보게 됩니다. 응시와 지향성이 얼굴을 만들어 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들뢰즈 가타리는 응시는 응시하지 않은 눈과의 관계에서 즉 얼굴성의 검은 구멍과의 관계에서 이차적일 뿐이라고 비판합니다.
응시하지 않으려고 해도 무심고 지나쳤다 해도 누군가 소리치며 시선을 잡아 당길때 검은 구멍이 응시보다 일차적임을 확인할 수 있죠. 눈군가를 꽃이라고 부르며 달려가지만 내가 부여한 그 의미를 거부하고 스토커라고 밀쳐내며 현상학적 지향성 바깥으로 도망가는 얼굴도 있습니다. 다른 한편 라깡은 거울상을 통해 부분 대상들을 하나의 유기체로 통합하는 상상적 동일시를 강조하지만 우리는 동일시를 명령하는 얼굴에 권력이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동일시란 흰벽에 쓰여진 명령어를 받아들이는 행위의 반복을 통해 습속이 된 주체화의 결과일 뿐입니다. 거울은 얼굴성의 흰벽과의 관계에서 이차적일 뿐이라는 말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입니다. 덧붙이자면 레비나스는 고통받는 얼굴이야말로 주체의 생각이나 감각 바깥에 존재하는 타자라고 하지만 고통받는 얼굴만이 타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차라리 찡그린 얼굴, 화난 얼굴, 엄격한 얼굴이 그보다 더 빈번하고 일상적인 타자라고 해야 합니다. 아니 실은 고통받는 얼굴 또한 연민과 공명을 요구하는 얼굴입니다.
의미화와 주체화의 명령어를 방사하는 얼굴이죠. 타자를 향해 주체 자신을 초월하는 윤리학은 내의지 바깥에서 오는 명령하는 권력, 연민이나 동일 시 마저 명령하는 권력의 작용이 있다 하겠습니다. 얼굴의 문제가 도덕이나 윤리학이 아닌 정치학의 대상이 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 입니다. 머리와 얼굴 사이에 생물학적 진화나 도덕적 우열 같은 것은 없습니다. 얼굴은 자의적 기표들로 발송되는 명령어의 전달과 상관적인 특정한 배치의 산물입니다. 의미화와 주체화를 강요하는 것은 특정한 권력의 배치이고 그런 배치를 갖는 특정한 사회 구성체 만이 얼굴과 풍경을 필요로 한다는 겁니다. 따라서 배치가 달라지고 사회구성체가 다른 종류의 사회구성체로 이해한다면 얼굴은 명령어를 방사하는 권력 장치의 길을 중지할 수 있습니다. 들뢰즈 가타리는 진정한 탈 얼굴화를 가동 시키면서 탐사적 머리를 해방시켜 의미화의 벽을 돌파하고 주체성의 구멍에서 솟구쳐 오르며 풍경을 통해 지층들을 해체하고 진정한 리좀을 위해 나무를 잘라 버리며 긍정적 탈 영토화 내지 창조적 탈주선을 그리자고 제안합니다. 이 제안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가는 사실 애매합니다. 그것은 차라리 얼굴의 정치학을 통해서 얼굴과 머리에 대한 새로운 사유를 가동시키기위한 물음이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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