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과 머리를 구별하는 것에서 얼굴에 대한 개념은 시작합니다.  머리는 신체의 일부이지만 얼굴은 신체가 아니라 그 표면이고 그 표면에 세겨진 표정입니다. 신체의 상태를 표현하기도 하지만 그 이상으로 얼굴과 마주한 누군가를 향해 무언가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기호입니다. 그런 점에서 얼굴은 신체로 부터 탈 영토화 되어 비신체적 표현기계가 될 때 탄생합니다. 얼굴은 그 자체로 기호이지만 또한 입에서 나가는 말들 손으로 쓰는 문자가 실질적으로 요구하는 것을 표시하는 기호이기도 합니다. 기호에 실려가는 잉여성으로서의 명령어를 표시하는 기계, 그것이 얼굴이라는 표현기계입니다. 언어적 기호처럼 그 자체로 의미가 없는 자의적 기표들은 얼굴을 통해 얼굴에 재영토화 됨으로써 비로서 의미화 됩니다.  또한 얼굴은 마주한 얼굴에게 공감 내지 공명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부르고 답하는 주체화가 얼굴을 통해 이루어지는 겁니다. 

얼굴은 정치다. 얼굴성에 대한 들뢰즈 가타리의 생각을 요약해주는 것이 될 이 명제는 얼굴에 대한 우리의 통념을 깨는 단적인 문장일 겁니다. 동시에 얼굴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들은 곰곰히 생각해보면 쉽게 수긍할 수 있는 문장이기도 합니다. 의미화나 주체화를 요구하는 이런 저런 명령어를 발송하는 게 얼굴이니까요. 환한 얼굴이나, 찌푸린 얼굴, 슬픈 얼굴 서운한 얼굴, 모두 다 내게 특정한 감응을 요구하는 얼굴이지요.  사실 우리는 상대방이 무얼 원하는지를 알기 위해 눈치를 보기도 합니다.  주변의 얼굴들을 보면서 표정관리를 하기도 하죠. 노동자와 대면한 고용주 얼굴, 학생과 대면한 교사의 얼굴, 유권자와 대면한 정치인의 얼굴은 그 에 부합하는 얼굴을 요구합니다. 이렇게 얼굴들 사이에는 명령어들이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 나의 시선을 잡아주는  얼굴도 그렇습니다. 공명을 요구하고 응답을 요구하는 얼굴이죠. 얼굴을 통해 권력이 작동하고 있는 겁니다. 여기서 들뢰즈 가타리는 두 유형의 얼굴을 구별합니다. 앞 얼굴과 옆 얼굴이 그것입니다. 앞 얼굴은 이마와 볼이라는 여백을 갖는 둥그런 얼굴이고 눈과 입 눈썹 등으로 의미화하는 기호를 방사하는 얼굴입니다. 옆 얼굴은 다른 얼굴과 마주보며 부르고 답하는 얼굴 입니다. 주체와 상응하는 얼굴이죠. 물론 서로 외면하며 반대 방향으로 향한 옆 얼굴도 있습니다.  이  두유형의 얼굴이 섞이면서 의미화와 주체화의 양상이 표현됩니다. 얼굴은 의미와 주체화가 교차되는 지점에 있는 특수한 장치라는 말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입니다. 

머리는 신체를 움직이는 코드에 의해 작동하지만 얼굴은 신체의 의한 코드화가 정지되고 머리가 표정이라 불리는 어떤 것을  초코드화 될때 탄생합니다. 머리가 이처럼 얼굴이 되고 표현적 기호를 갖게 되면 이제 다른 신체 부위도 얼굴화 됩니다.  힘차게 치켜든 주먹, 가운데 손가락을 세운 손은 도구와 짝인 신체가 아니라 얼굴과 짝인 기호 입니다. 어깨가 구부러지도록 숙인 고개도,  두팔을 치켜든 상체도,  무릎 꿇은 다리도 그렇습니다. 얼굴이 머리를 넘어 신체 전체를 뒤덮은 겁니다. 

또한 얼굴은 신체를 덮은 옷으로 확장됩니다.  주머니와 단추, 어깨에 심은 뽕과 페인 허리성, 띠와 브로치는 신체적 기능을 보완하던 옷을 표정을 갖는 의상으로 바꿉니다. 머리에서 시작된 표면의 정복은 이제 모든 것의 신체의 표면으로 확장됩니다. 주전자나 자동차 집이나 건물 도시등 크고 작은 사물이 나름의 표정을 갖고 얼굴화 됩니다. 

사물의 얼굴화는 신체적 생존의 조건인 환경을 풍경으로 변화시킵니다. 즉 풍경이란 환경의 얼굴 혹은 얼굴화된 환경입니다. 역으로 미술이나 영화는 이제 얼굴을 풍경으로 다루게 됩니다. 탁월한 초상화는 그 인물의 얼굴을 그가 산 세계로 풍경화 합니다. 영화의 클로즈업은 얼굴의 풍경 그 자체가 되도록 함으로써 어떤 사건에 대한 그의 감응이나 감정을 장면화 합니다. 이런점에서 도구가 손의 상관자라면 풍경은 얼굴에 대한 상관자 자라고 하겠습니다. 다양한 신체의 얼굴화나 얼굴의 풍경화를 통해 확인 할 수 있는 것은 얼굴이 단지 인간의 얼굴로 제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건물이나 도시 혹은 사물의 표정을 인간적인 방식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들이 빈번하지만 인간의 얼굴은 결코 일반적인 지위를 갖지 않습니다. 인간의 얼굴은 수많은 얼굴의 한 부류 일 뿐입니다. 가령 자동차의 헤드라이트와  라디에이터 그릴에서 인간의 얼굴을 상기하기 쉽지만 그 것이 꼭 인간의 얼굴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유선형으로 늘씬하게 뻗은 차체는 인간아닌 새나 돌고레 신체를 참조하는 경우가 많고 권위적인 관료는 로봇을 연상하게 합니다. 

그런 참조나 연상을 이용할때 조차 실은 그것으로써 늘씬함이나 빠름 경쾌한 딱딱함 등의 감응을 표현하려는 것일 겁니다. 얼굴에는 심지어 절대적인 비인간적인 어떤 것이 있다 함은 이런 뜻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얼굴만 있는게 아니라 수많은 얼굴들이 있는 겁니다. 그렇게 상이한 얼굴들을 만들어 내는 추상기계가 있습니다. 

얼굴은 기호들의 잉여성이 명령어가 등록되는 흰벽과 주체화의 정념을 끌어 당기는 검은 구멍을 통해 작동합니다. 이마와 볼사이에 흰 벽위에 세겨지는 이런저런 표정은 입에서 나간 말의 실질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다시말해 원하는게 무엇인지를 표시합니다. 보는 이의 시선을 잡아 끄는 두개의 검은 구멍은 그 흰벽에 세겨지는  기호를 만들뿐 아니라 공감 하거나 공명하는 정념을 잡아 당깁니다. 

이렇게 흰벽과 검은 구멍의 조합을 통해 다양한 표정을 만들어 내지요. 그래서 그들은 구체적인 표정의 다양한 얼굴을 만들어 내는 흰 벽과 검은 구멍에 체계를 얼굴 성의 추상 기계라고 명령합니다. 얼굴성의 추상기계는 흰벽과 검은 구멍이 체결하고 있지만 이때  흰벽이란 기호가 세겨지는 일종의 서판  같은 것을 뜻합니다. 희다는 것은 비어 있음을 즉 기호가 세겨지기에 적절한 빈 여백을 뜻합니다. 이 서판의 색깔이 반드시 흰색일 이유는 없습니다. 사람의 얼굴이 모두 흰 것은 아니며 건물이나 옷, 사물의 흰벽 또한 모두 희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마치 그것이 기호를 세기는데 최선의 방책인양 흰색을 특권하게 될 때 희다라는 말은 특정 색을 지칭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특정한 색깔이 그런 세계에 대한 선호가 마치 얼굴 자체의 척도라도 되는 양 간주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흰벽의 정도가 좋은 얼굴에 정도를 표시하는 것으로 간주되면서 얼굴 색깔의 위계가 만들어 지게 됩니다. 얼굴성의 추상기계가 넓은 흰 뺨과 눈에 검은 구멍을 가진 백인 그 자체가 된것은 이 때문입니다.

여기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은 바로 예수의 얼굴입니다. 알다시피 신이나 성인의 얼굴은 어디서나 그 성인을 떠받드는 사람들,  자신의 모습을 바탕으로 만들어 집니다. 가령 흑인들의 신이나 성인이 흰 얼굴을 하고 있을리 없습니다. 직접보고 그린 당대의 조각이나 초상조차 없기에 누구도 알리 없는 예수의 얼굴이 지금의 형태로 그려진 건 르네상스 시대였습니다. 그것은 그걸 그린 당시의 유럽의 백인 남성들의 평균적인 얼굴을 통해 발명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예수의 얼굴이 됨에 따라 이제 그렇게 생긴 얼굴이 성인의 얼굴, 본 받아야할 얼굴 한마디로 좋은 얼굴이 되게 됩니다. 척도적인 얼굴의 자리를 차지하는 겁니다. 그 얼굴을 척도로 하여 그로 부터 멀어지는 정도에 따라 차별의 정도가 작동하는 위계화된 인종주의가 이로부터 탄생합니다. 피부색뿐만아니라 눈과 코의 모양 등이 선호와 차별의 대상이 됩니다. 

인종주의는 백인 남자의 얼굴을 기준으로 이탈의 편차를 결정함으로써 작동한다고 하는 이런 의미에서 입니다. 즉 인종주의는 백인 자신의 얼굴에 보편성을 부여하는 이러한 선별적 척도의 산물이란 것입니다. 흰뺨을 모델로 하는 이 척도적 얼굴의 자의성은 사실 검은 구멍의 눈에서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검은 구멍에 검다도 실은 특정 색깔이 아니라 정념이나 시선을 잡아 당기는 어트렉터를 뜻하죠. 그러나 이 역시 흰벽처럼 특정 색깔의 눈을 지칭할 수 있죠. 하지만 희지 않은 뺨이 흰정도에 따라 위계화되는 것과 달리 검지 않은 눈은 검은색의 정도에 따라 위계가 되지 않습니다. 유럽인 자신의 눈이 검지 않기 때문이죠.

요컨데 유럽의 백인 남성들이 자기 얼굴로 예수의 얼굴을 만들고  예수의 그 얼굴을 좋은 얼굴의 척도로 삼는 자기 민족 중심적인 순환론이 거기에 있습니다. 백인 남자 얼굴에 보편적인 척도의 지위를 부여하고 그것을 통해 모든 얼굴에 선별과 등급화를 가동 시키는 겁니다. 이로써 흰벽과 검은 구멍의 체계인 얼굴성의 추상기계가 흰색을 특권화하는 인종주의적 추상기계가 되고 맙니다. 

앞서 우리는 명령어를 방사하는 얼굴에서 권력을 보았지만 척도가 되어 선별과 위계가 차별의 힘을 행사하는 이 얼굴에서 우리는 얼굴의 또 다른 권력, 얼굴성의 추상기계가 행사하는 또 다른 권력을 보게 됩니다.  얼굴은 정치다라는 명제는 이 또한 함축되어 있다 하겠습니다. 얼굴성의 추상기계는 두가지 방식으로 얼굴성의 권력을 가동시킵니다. 하나는 원소적 얼굴,  다른 하나는 선별 입니다. 먼저 원소적 얼굴이란 특정한 관계내지 배치안에서 준거가 되는 얼굴입니다. 아버지와 자식의 얼굴, 사장과 노동자의 얼굴, 경찰과 용의자의 얼굴, 어른과 아이의 얼굴 등  얼굴의 양식을 형성하는 표준적인 얼굴입니다. 이를 척도로 삼아 좋은 얼굴과 나쁜 얼굴, 허용되는 얼굴과 그렇지 않은 얼굴이 구별되고 선별됩니다. 아니 아버지 앞에서 어떻게 그런 얼굴을, 아니 아이 얼굴을 이따위로 그릴 수 있지, 당신은 경찰 같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네요. 

물론 인간의 얼굴, 아시아인의 얼굴 등도 마찬가지 입니다. 표준에서 벗어나는 정도에 따라 좋고 나쁨의 정도가 배열됩니다. 피부 색의 정도에 따라 인간의 얼굴에서 몇 번째 얼굴인지,양순한 표정의 정도에 따라 뻔뻔함의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가 정해집니다. 그 정도에 따라 가능한 얼굴의 범위가 증식됩니다.

물론 가운데 있는 척도적 얼굴을 향해 얼굴을 동일화 시키려는 권력의 벡터가 그와 반대 방향으로 작동합니다. 얼굴성의 추상기계의 작동 양상을 보여주는 추상기계의 변형들을 들뢰즈 가타리는 극한적 얼굴로 정의합니다. 이는 원소적 얼굴과 선별을 통해 구성되는 혼성적인 얼굴들입니다. 이는 상이한 배치들을 넘나 들며 작동하는 기계 입니다. 먼저 의미화가 주도하는 앞 얼굴에 추상기계들이 있습니다. 일단 흰벽과 검은 구멍만으로 이루어진 단순한 추상기계가 있습니다. 다음으로 편차를 통해 그어지는 경계선들로 확장되는 다중적 경계를 갖는 추상기기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장과 노동자 교사와 학생처럼 짝을 갖는 얼굴이라면 의미화와 주체화가 동시에 작동하겠지요. 이는 기호를 방사하는 두눈과 그의 공명하는 두눈의 짝으로 이루어집니다. 한쌍의 앞 얼굴이 마주보며 공명하는 얼굴기계인데 그 두 얼굴 간 적절한 표정의 정도에 따라 복수의 경계선들이 만들어 집니다. 네 개의 눈을 갖는 기계가 그겁니다. 학교, 집, 회사, 경찰서 등 구체적인 조건에 따라 척도에 부합하는 얼굴들이 이 추상기계를 통해 생산됩니다. 서로 연관된 얼굴이 늘어나면 더 많은 눈들이 그에 따라 늘어나게 되겠지요. 들뢰즈 가타리는 대조와도 같은 흰벽에 기호를 기입하는 이런 추상기계들을 대지의 기표적 전제적 얼굴들이라고 명명합니다. 

다른 한편 주체화의 옆 얼굴은 되게 마주보는 두 얼굴을 짝으로 갖지요. 트리스탄 이졸데 처럼 서로 부르고 답하며 검은 구멍으로 끌려들어가는 커플 기계는 검은 구멍을 향한 하나이자 둘인 선을 따라 작동합니다.  주체화 체제와 상응하는 옆 얼굴이 검은 구멍에 끌려가는 양상을 표현하는 추상기계 또한 공명하는 인물들의 수에 따라 공명을 위로하는 성분들의 수에 따라 증식됩니다. 공명을 촉발하는 음악 풍경 얼굴 의식 회화 등이 더해짐에 따라 그 선들은 증식되고 중첩되며 작동합니다. 

하지만 코키토의 주체화 즉 생각하는 나는 존재하는 나 라는 등식을 통해 작동하는 주체화는 그 처럼 마주보는 짝을 갖지 않습니다. 짝없이 고립된 하나의 얼굴이란 점에서 독신자 기계라 명명되는 주체화의 추상기계는 하나의 옆 얼굴이 나라는 자아내면의 검은 구멍에 빨려 들어가는 양상으로 작동합니다.  

얼굴에 대한 사유를 앞서 제시했던 것은 사르트르의 현상학이었습니다. 그는 눈과 구별되는 응시, 지향성이 담긴 시선인 응시를 통해 어떤 즉자적 존재가 나에 대한 존재가 됨을 지적합니다. 그때 그의 머리에서 나는 그의 얼굴을 보게 됩니다. 응시와 지향성이 얼굴을 만들어 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들뢰즈 가타리는 응시는 응시하지 않은 눈과의 관계에서 즉 얼굴성의 검은 구멍과의 관계에서 이차적일 뿐이라고 비판합니다. 

응시하지 않으려고 해도 무심고 지나쳤다 해도 누군가 소리치며 시선을 잡아 당길때 검은 구멍이 응시보다 일차적임을 확인할 수 있죠. 눈군가를 꽃이라고 부르며 달려가지만 내가 부여한 그 의미를 거부하고 스토커라고 밀쳐내며 현상학적 지향성 바깥으로 도망가는 얼굴도 있습니다. 다른 한편 라깡은 거울상을 통해 부분 대상들을 하나의 유기체로 통합하는 상상적 동일시를 강조하지만 우리는 동일시를 명령하는 얼굴에 권력이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동일시란 흰벽에 쓰여진 명령어를 받아들이는 행위의 반복을 통해 습속이 된 주체화의 결과일 뿐입니다. 거울은 얼굴성의 흰벽과의 관계에서 이차적일 뿐이라는 말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입니다. 덧붙이자면 레비나스는 고통받는 얼굴이야말로 주체의 생각이나 감각 바깥에 존재하는 타자라고 하지만 고통받는 얼굴만이 타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차라리 찡그린 얼굴, 화난 얼굴,  엄격한 얼굴이 그보다 더 빈번하고 일상적인 타자라고 해야 합니다. 아니 실은 고통받는 얼굴 또한 연민과 공명을 요구하는 얼굴입니다. 

의미화와 주체화의 명령어를 방사하는 얼굴이죠. 타자를 향해 주체 자신을 초월하는 윤리학은 내의지 바깥에서 오는 명령하는 권력, 연민이나 동일 시 마저 명령하는 권력의 작용이  있다 하겠습니다.  얼굴의 문제가 도덕이나 윤리학이 아닌 정치학의 대상이 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 입니다. 머리와 얼굴 사이에 생물학적 진화나 도덕적 우열 같은 것은 없습니다. 얼굴은 자의적 기표들로 발송되는 명령어의 전달과 상관적인 특정한 배치의 산물입니다. 의미화와 주체화를 강요하는 것은 특정한 권력의 배치이고 그런 배치를 갖는 특정한 사회 구성체 만이 얼굴과 풍경을 필요로 한다는 겁니다. 따라서 배치가 달라지고 사회구성체가 다른 종류의 사회구성체로 이해한다면 얼굴은 명령어를 방사하는 권력 장치의 길을 중지할 수 있습니다. 들뢰즈 가타리는 진정한 탈 얼굴화를 가동 시키면서 탐사적 머리를 해방시켜 의미화의 벽을 돌파하고 주체성의 구멍에서 솟구쳐 오르며 풍경을 통해 지층들을 해체하고 진정한 리좀을 위해 나무를 잘라 버리며 긍정적 탈 영토화 내지 창조적 탈주선을 그리자고 제안합니다. 이 제안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가는 사실 애매합니다. 그것은 차라리 얼굴의 정치학을 통해서 얼굴과 머리에 대한 새로운 사유를 가동시키기위한 물음이라고 하겠습니다.  

 

 

 

 


흐름 자체는 우리의 포착을 언제나 넘어선다는 점에서 카오스 입니다. 카오스 속에서 살기에 우리는 모든 것을 지층화 합니다. 지층은 흐름의 분절에 의해 구성됩니다. 우리의 삶과 관련해 들로즈 가타리는 세가지 중요한 지층이 있다고 합니다. 의미화, 주체화, 유기체화의 지층이 그것입니다. 천의 고원 에서 언어학의 공준들이 의미화와 관련되어 있다면 어떻게 기관없는 신체를 만들 것인가는 유기체화와 그리고 몇 가지 기호체제들과 의미화 및 주체화와 관련된 고원이라 하겠습니다. 이 세지층들은 그것 없이는 삶이 가능하지 않다는 점에서 삶의 지반이 되는 지층이지만 지층의 고유한 분절 방식대로 살게 한다는 점에서 삶을 보유한 지층입니다. 따라서 다른 삶을 만들고자 한다면 이 세지층에서 탈 지층화 운동을 시도해야 합니다. 비록 그것이 또다른 지층으로 이행하는 것이 될지라도 말입니다. 여기에 모든 지층에는 지층화된 분절에서 이탈하는 방향의 추상 기계가 작동할 수 있음을 덧붙여야 합니다. 

기호계는 라캉의 상징계라는 말을 겨냥한 개념인데 기호체제와 거의 동일한 말로 사용됩니다. 기호체제는 체제라는 말 그대로 기호들이 권력이 작동하는 체제로 조직되어 있음을 명시 하려는 개념입니다. 언어학적 전이 이후에 이론적 통념에 따르면 우리는 언어로 항상 이미  질서화된 의미 체계안에서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우리의 생각은 언어를 통해 이루어지고 언어를 사용하려면 이미 조직된 언어들의 질서 기표들의 의미와 규칙에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해 라는 말이 상투적이라 피하고 싶어서 마미추라고 말해봥야 못 알아 듣기에 서로 아는 기호 기존의 의무화 규칙에 따라야 합니다.라캉은 이를 기표의 물질성이라 합니다 . 기표들은 우리의 사고와 행동을 제약하고 강제하는 물질적 힘을 갖는다는 말입니다. 강하게 말해 언어의 감옥에 갖혀 있는 거죠. 기호들이 하나의 체제를 이루고 있다함은 그것이 이처럼 강제력을 행사하는 체계임을 표현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기호체제 개념이 언어학적 패러다임이나 라캉의 상징계 개념과 유사한 점은 여기까지 입니다. 먼저 랑그의 단일성이나 오이디푸스적 관계의 보편성을 상징하는 라캉의 상징계와 달리 기호체제는 단일하지도 않고 보편적이지도 않습니다. 여러가지 유형의 기호체제들이 있고 한 유형안에도 복수의 아니 수많은 기호체제들이 있습니다. 나아가 하나의 언어가 아니라 수많은 언어들이 있다는게 들뢰즈 가타리의 생각입니다. 다음으로 기호들의 의미화는 단지 기표들만으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비신체적 기호들은 상관적인 신체와 함께 작동합니다. 어조라는 음성적 성분 표정이나 몸짓 리듬과 춤같은 신체적 성분 법정 이나 감옥들의 기계적 성분 국가나 도시 수렵민의 숲이나 유목민의 초원들이 그것입니다. 따라서 의미화를 다룰때 조차 기표의 형식이나 체제에 유난스러운 특권을 부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세번째 다시보겠지만 주체가 되는 것도 단지 상상적 동일시를 통해서만은 아닙니다. 트리스탄 이졸데 트리스탄 이졸데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서로에게 말려들어가는 커플들은 정념에 끌려 주체화 됩니다. 

천의 고원에서 들뢰즈 가타리는 네가지 유형의 기호체제에 대해 언급합니다. 1) 의미화하는 기표들에 의해 주도되는 기표적 체제, 2) 몸짓,  춤, 리듬 등 '자연적' 기호들이 음석적 기호들과 공존하며 경쟁하는 전기표적 체제, 3) 의미 없는 기호를 사용하거나 기호의 의미를 지워버린 기호들을 통해 작동하는 반기표적 체제, 4) 그리고 의미화하는 중심적 기호들을 배신하며 시작되는 탈기표적 체제가 그것입니다. 

기표적 체제는 하나의 일반 공식을 갖는다고 합니다. 기호는 다른 기호로 소급되며, 무한히 소급될 뿐이다가 그것입니다. 소쉬르는 언어라는  기호가 지시체와 무관하다는 점에서 자의적이라고 강조한바 있습니다. 가령 귀가 아주 긴 저 동물을 토끼라고 해야할 이유는 없으며 '두라',  '밀론'이라 해도 괜찮습니다. 다만  일단 토끼라고 하기 시작하면 토끼라고 해야만 알아 듣습니다. 기호가 자의적 이기에 더 그렇습니다. 그래서 기호는 사회적 규약이 되고  강제성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만약 한국어를 잘 모르는 이가 토끼가 뭐냐고 물으면 귀가 아주 길고 뒷다리로 땅을 차며 뛰는 동물 이라는 식으로 말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다시 묻게 될 겁니다. 귀가 뭐냐고  길고 그리고 뒷다리가 뭐냐고  그럼 다시 다른 기호로 설명해야 합니다. 그건 또다시 다른 기호로 이는 무한히 이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한 기호에서 다른 기호로의 무한 소급이 발생하는 거죠 기표는 기호로 넘쳐 흐르는 기호란 말은 이런 의미 입니다. 하나의 기표가 다른 기표로 이어지는 기호의 사슬들이 존재한다 하겠습니다.  

그런데 기표적인 기호들은 하나의 랑그에 머물지 않습니다. 어떤 기호 사슬에 속해 있는가에 따라 어떤 기호로 소급되는 가에 따라 동일한 기호도 다른 의미를 갖게 됩니다. 토끼라는 기호가 거북이 경쟁 등과 같은 기호로 소급될때 의미는 제약회사 피부 민감성 실험 등과 같은 기호로 소급될때와 달라질 겁니다  민족이란 단어도 생물학 인종 진화 등의 기호로 소급될때 의미와 제국주의 식민지 침략 해방 등의 기호로 소급 될때 의미는 달라지지요.  다른 기호를 통해 기호를 의미화 하는 체제이니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기호들을 통해 기호들을 의미화할때 의미와 전체를 방향짓고 연결된 기호들의 사슬들  전반에 의미를 규정하는 특권적 기호가 있기 마련입니다. 가령 민족주의와 결부된 말들이라면 민족이,  정신분석과 관련된 이야기라면 남근이, 생물학이나 생택학적 담론이라면 생명 같은 것이 그것이겠지요 

관련된 다른 기호들은 모두 이 기호에 탯줄을 되고 있으며 그 기호들의 의미는 이 기호로 수렴됩니다. 달라 보이지만 실은 유사한 기호의 사슬들이 이 기호를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고 있습니다.  들뢰즈 가타리는 이처럼 의미화의 중심에 있는 이 특권적 기호를 대문자 기표, 지고한 기표라 하는데  전제 군주의 얼굴 혹은 신의 얼굴과 상응한다고 합니다.  한 기호가 다른 기호로 소급된다고 했지만  그러한 소급은 결국 전제 군주의 기표로 언제나 귀착 되기 마련 입니다. 가령 정신 분석에서 이러 저런 증상들은 트라우마를 거쳐 아버지 어머니 오이디프스로 결국은 남근으로 소급됩니다. 혹은 어머니를 거쳐 결여 그 결여를 메우는 욕망의 대표인 남근으로 귀착 됩니다. 라캉처럼 큰 타자를 말하고 타자의 욕망을 말해도 결국은 동일한 지점으로 귀착됩니다. 역으로 큰 타자든  결여든 오이디푸스든 무얼 말해도 그 기호의 의미는 결국 하나아고 모두 남근의 등과물입니다.  민족을 중심에 두고 있는 기호들의 원환도 그렇습니다. 민족이든  역사든 침략이든 사명이든 억압이든 해방이든 모든 기호는 민족이란 말에 등가물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기표적 기호체제는 모든 기호가 오직 하나의 기호로 귀착된다는 점에서 편집증적이고 전제군주적 기호체제라고 합니다. 물론 상황에 따라 새로운 기호를 추가하거나 다른 기호들의 사슬로 바꾸기도 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는 되게 중심에 자리잡은 특권적 기표를 새로운 기호로 해석해주는 일에 불과 합니다. 이런 해석의 사제들은 전제군주 기표의 관리들이죠. 아주 달라 보이는 기호들이 사실상 하나의 기호의 대체물이란 점에서 이체제는 속임수의 체제입니다 계속  추가된  해석이란 속임수의 제안에서 의미화의 동심원들을 추가하는 것에 불과 합니다. 그 자체로는 의미없는 이 기호들이 겹겹의 사슬을 이루며 의미화를 작동하게 하는 실체는 전제 군주의 얼굴입니다.  얼굴에 의해 기표들은 의미화 됩니다. 반면 이러한 의미화에서 벗어나는 자는 전제 군주의 얼굴을 외면하는 자입니다. 기표적 체제는 이런 자들에게 사형수 내지 속죄양이라는 부정적 가치를 부여합니다. 얼굴을 돌린자를 얼굴이 지워진 자로 만드는 겁니다.  

전 기표적 체제의 기호들은 몸짓이나 리듬 감탄사나 비명소리 그림문자 등 자연적 코드에 따른 것이기에 되게는 별다른 설명없이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다른 기표들로 소급되며 의미화 되는 기표적 체제와 대비 됩니다. 보고 들으면 즉각적으로 알아들을 가능성이 크지만 이 역시 문화적으로 구성된 것이기에 그저 자연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또 웃음이나 눈물 손을 지켜드는 것은 의미가 명확해 보이지만 실은 상황이나 성격에 따라 적잖이 다른 의미를 갖습니다. 또 분노를 표현하는 몸짓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지요. 일부 야만인들의 시기는 상징적 의미를 갖는 행위이니 전기표적 기호로 할 수 있겠는데 그기호의 의미는 부족에 따라 크게 다릅니다. 그래서 전기표적 기호는 다의성과 이질성을 갖습니다. 이는 기표에 의한 권력의 장악을 피하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달라보이는 기호도 사실은 하나인 기표적 체제와 달리 비슷해 보이는 것도 다를 수 있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반기표적 기효체제에서 가장 흔히 사용하는 것은 번호적 기호 입니다. 이때 번호는 수지만 순서와 단위 원을  갖는 계산 가능한 수가 아닙니다. 흔히 명목수라고 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축구 선수의 등번호 또는 8사단 6대대 같은 군대의 번호가 그런 경우이지요 군대의 이러한 기호는 십호대 백호대 천호대 등으로 조직화하여 이름을 붙이는 유목민의 번호적 조직을 국가 장치가 영유한 것입니다. 이 번호적 기호는 계산되는 수는 아니지만 전혀 그런 것만도 아닙니다. 십호대 열개면 백호대 하나가 되고 8개 중대 2개 사단 등 처럼 수를 세고 크기도 비교할 수 있으니까요 단위원을 갖기에 정확하게 비교되고 계산되는 수가 세어지는 수라면 이러한 수는 세는 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는 수가 전쟁기계의 번호적 조직과 상응 한다면 세어지는 수는 국가 장치의 조세 기술에서 기원합니다. 설현 문자들으로 남아 있는 초기의 문자들이 조세와 관련된 문서라는 게 이를 시사합니다. 세는 수의 숫자는 자의적 기호라는 점에서 기표 지만 다른 기표로 소급되지 않거나 그러길 거부하는 기표란 점에서 반기표 입니다.이를 잘 보여주는 것은 암호 입니다.  암호는 의미화를 의도적으로 중단 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기호이지요 암호를 코드화하고 탈코드화는 데  중요한 것 역시 숫자입니다. 더하고 빼는게 무의미한 숫자들이죠.  

탈 기표적 체제는 기표적 체제에서 벗어나는 사건이 발생한 지점에서 작동합니다. 해석의 사제들이 만들어 내는 의미화의 동심원사이를 오가길 중단하고 그 중심에 있는 전제 군주의 얼굴로 부터 얼굴을 돌리는 겁니다. 탈주선을 그리며 기표적 체제 밖으로 나아가는 겁니다.  이러한 이탈은 추방과 방황으로 이어지지만 탈주자는 새로운 의미를 제공하는 기표들을 붙잡기 마련 입니다. 주체화가 발생합니다. 탈기표적 체제가 주체화라는 절차를 통해 정의된 다 함은 이런 의미에서 입니다. 여기서 들뢰즈 가타리는 알튀세르의 호명이라는 개념을 끌어들이지만 중요한 차이가 있음을 유의해야 합니다. 알튀세르는 자신을 부르는 신의 호명에 답함으로써 히브리인의 해방자라는 주체가 되지만 이는 동시에 신이라는 큰 주에의 시민이 된서을 뜻한다고 합니다. 주체와 예속의 동시성을 강조하는 이러한 개념에는 상징계가 할당한 자리를 자기자리라고 상상적으로 동일시하는 라캉의 주체개념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주체화가  탈주화 포섭의 반복적 궤적을 그린다고 할때 들뢰즈 가타리도 이런 양의성을 받아들인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라캉이나 알튀세르의 주체화 절체에는 탈추선이 없습니다. 큰 주체 내지 큰 타자가 할당하는 자리를  받아 들이는 것일 뿐이니 거기서 주체화란 일종의 오인 내지 속임수라 하겠습니다. 반면 들뢰즈 가타리의 주체화는 의미화 하는 체제를 이탈하는 탈주선에서 시작합니다. 그렇기에 주체화는 단지 오인이나 속임수 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속임수와 대비되는 배신에서 시작합니다.  또 하나 들뢰즈 가타리는 주체화에서 정념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배신이나 탈주의 일차적인 이유는 정념입니다. 가령 자기 주군의  왕비가 될 사람을 모시러 갔던 트리스탄이 주군을 배신하고 이졸대와의 사랑에 빠져들어가는 것은 정념때문입니다. 처음 보는 이를 사랑하게 한다는 묘약이 등장하지만 사실 모든 미친 사랑이란 처음 보는 이에게 매혹되어 휘말려 들어가는 정념으로 시작하니 묘약이란 그 정념의 표현인 셈이죠 이렇게 정념적 탈주로 시작되는 주체화는 다시 다른 주체의 물음에 대답하며 예속적 주체화의 길로 넘어 갑니다. 사랑의 주체란 사랑의 노예를 뜻하자나요 모세도 그렇습니다. 자신이 이집트인이 아님을 알게 된 곳에는 히브리적 정념으로 이집트인을 죽이고 파라오를 등지게 됩니다. 그가 신의 호명에 답하게 된 것은 이처럼 정념에 이끌려 사고를 치고 왕을 배신하고 도망치던 와중에 일어난 일이죠. 

이러한 이유에서 들뢰즈 가타리는 기표적 체제가 수많은 기표나 해석으로 그중심에 있는 전제군주를 가리는 속임수의 체제라면 탈기표적 체제는 전제군주에게서 얼굴을 돌리며 시작하는 배신의 체제라고 대비합니다.  주체란 배신이란 말이죠 그러나 이 배신은 자신을 부르는 다른 주체와 공명하며 주체가 됩니다. 누군가의 부름에 예속되는 거지요 그렇기에 기표적 체제가 흰벽에 의미화하는 목소리에 주파수를 세기는 방식으로 작동한다면 탈 기표적 체제는 주파수간 공명을 야기하는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객관적 주파수와 주관적 공명이 두가자의 기호체제에 대응하는 두가지 잉여성이라 함은 이런 뜻입니다. 

이러한 주관적 공명의 최대치는 생각하는 나는 존재한다라는 등식을 통해 보게 되는 코기토적 이중체 입니다.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장애물과 주저함이 있지만 서로를 부르며 서로 끌려들어가는 커플의 이중체 입니다 부르고 답하는 호명의 주체화는 서로를 향해 끌려들어가는 상이한 강도의 공명을 통해 진행됩니다. 이러한 공명의 최대치는 다른 모든 것을 등지고 오직 서로를 향해 끌려 들어가는 공명입니다. 커플의 검은 구멍이 생겨나는 거죠. 이는 예속화의 극단을 이루기에 탈주하지 않은 것만 못하게 되기 쉽습니다.

네 유형의 기호 체제에 대해 말 했지만 현실의 기호체제는 이 상이한 기호체제가 뒤섞여 작용하는 혼성적 체제입니다. 그리고 하나의 기호체제는 그와 대응 되는 다른 기호체제로 변환되기도 합니다. 어떤 기호계가 전기표적 기호계로 변환되는 것은 유비적 변환, 기표적 기호계로 변환되는 것은 '상징적 변환', 반기표적 기호계로 변환되는 것은 '전략적 내지 논쟁적 변환'  탈기표적 기호계로 변환되는 것은 '의태적 내지 의식적 변환'  이라 합니다. 한지층에서 다른 지층으로 이행하는 것인데 이와 달리 탈지층화하는 변환도 있습니다. 다이어그램적 변환이 그것입니다. 더 이상 형식화 하지 않는... 비형식적 기호-입자를 추출하기 위해 기호체제나 표현형식을 포착하는 것 입니다. 

 

 

 

명령어는 천의 고원에서 제시되는 들뢰즈 가타리 언어이론의 중심 개념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모든 언어는 본질적으로 명령어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입니다.  '더워요' 라는 말은 냉방기를 켜달라는 명령어를 담고 있고,  '커피한잔 하실래요' 라는 말은 '저와 사귀어 주세요' 라는 명령어를 담고 있지요. 물론  명령어는 직설적으로 말해지지 않습니다. 일종의 간접화법으로 말해집니다. 그런데 누군가의 말에서 정작 알아 들어야  것은 간접적으로 말해지는  명령어 입니다. 이를 못알아 들으면 문장을 이해 했어도 실은 못알아 들은 겁니다. 커피 한잔 하자는 말에 '저는 커피를 못마셔요'라고 답하거나 '더워요' 라는 말에 '나도 더워'라고 응수 한다면  말을 못알아 들은 거지요.  알아 듣고  말일 수도 있겠네요. 이 경우에 대답은 거절의 명령어가 실려 되돌아 가는 겁니다. 

 

이러한 언어 개념은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나 소통을 위한다는 것이라는 통상적인 명제에 반합니다.  '언어란 상대에게 정보나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행동을 하도록 하려고 하는 것이다' 라고 말하는 거죠.  정보나 소통은 그처럼 원하는 행동을 하도록 전달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심지어 1+2 = 3이라는 것을 가르치려는 교사의  조차 수학적 지식을 그저 전달하거나 알려 주는 것이 아니라 1+2 얼마냐고 묻거든 3이라고 대답하라는 명령어를 실어 나름니다. 그래서 그걸 가르치는 학교에서는 명령어를 제대로 실행하는  확인하기위해 시험을 보지요.  수학 교재에 지식을 알려주는 증명의 종류 보다 차라리 그것을 사용하여 풀어야할 수많은 연습문제들이  중요한 것은 이때문입니다.  군인들에게 훈련이 그렇듯이 명령어를 제대로 실행하도록 다양한 상황 속에서 훈련을 하게 하려는 겁니다. 

 

 들뢰즈 가타리가 직접 인용하지 않지만 언어에 대한 이런 생각을 앞서 제안한 사람이 있지요. 비트겐슈타인이  사람입니다. 초기의 저작인 논리 철학 논고에서 그는 사실  그림이라는 개념으로 단어와 명제의 의미를 규정했지만 말년의 저작에서 입장을 크게 바꿉니다단어의 의미는 지시체가 아니라 용법이고 언어가 가르치는 것은 설명이 아니라 훈육이며, 언어란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이러저런 영향을 주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입장을 언어학에서는 보통 화용론이라고 하는데요. 들뢰즈 가타리 또한 화용론이야 말로 언어의 본질을 정확히 표현하는 이론이라고 봅니다. 언어의 조건  언어적 요소의 용법이 어떻게 실행되는가를 정의 해주는 화용론이 없다면 언어학은 아무것도 아니다. 나아가 '리좀학= 분열분석 = 지층분석= 화용론 = 미시정치학' 이라는 등식을 통해 화용론 이전에 자신의 기획 전반을 표현하는 분열 분석과 같은 위상을 부여합니다. 

 

언어의 화용론이 미시정치학이라는 말이 보여주는 것은 언어라는 신체적인 것이 신체적인 것과 관련되어 있을 때입니다. 명령어는 프랑스어 무디어흐드를 번역한 말인데 지령이나 행동지침, 슬로건을 뜻하는 말입니다그들은 이 단어를 '슬로건에 대하여' 라는 레닌의 글에서 따왔음을 명시합니다. 슬로건이란 물리적 힘들에 의해 조성된 사회적 상황과 관련된 명령문입니다 슬로건은 주어진 상황안에서 어떤 것을 실행 하라는 명령이지만 이는 대게 신체적인 변환을 동반합니다. '모두 손들어' 라는 비행기 납치범의 명령어는 비행기 신체를 감옥 신체로 바꿉니다. 같은 신체적 조건의 변화가 언표 행위의 의미를  바꾸기도 합니다. '솔직하게 말해'라는 말도 카페에서 친구가 말할 때와 경찰서에서 형사가 말할때 아주 다른 의미를 갖게 됩니다. 

 

명령어란  자체적으로 비신체적인 것이지만 신체적인 상태의 변환을 겨냥한 언표 입니다. 예컨데 “만국의 프롤레타리아  단결하라  막스의 슬로건은 그 자체로는 비신체적인 언표이지만 프롤레타리아트라는 새로운 계급 유형을 발명했다는 점에서 신체적 변환을 야기한 언표의 탁월한 사례라고 합니다. 막스가 새로운 계급을 발명했다는 말이냐고 반문하시겠죠. 맞습니다그 이전에는 노동자들은 있었지만 다른 계급과 구별 되는 독자적 계급으로서 노동자 계급  프롤레타리아트라는 계급은 없었습니다. 막스의  슬로건은 프랑스 혁명 이후 '상 퀼로트(Sans-culottes)'라고 불리는 대중들로 부터 노동자를 하나의 계급으로  불러낸 겁니다. 단결하여 다른 계급이나 대중과 분리되어 행동해야  별개의 계급을 창안한 거죠. 

 

정보 전달이나 소통을 위한 일반적 수단이 언어라는 관점은 오랫 동안 언어 이론을 지배해왔습니다. 이는소통이론이나 정보 이론으로 확장 되기도 합니다. 고전 적인 소통이론은 발신자가 수신자를 향해 어떤 매체에 담아 메시지를  발송하고 수신자는 그것을 수신하여 정해진 코드에 따라 해독한다는 것을 기본프레임으로 합니다발송한 메시지가 전달과정에서 소음에 의해 지워지거나 망실   있는데  경우에도 알아 들을 있도록 잉여적인 정보를 추가 한다고 하죠. 가령 수신된 문장이 '날도 추운데  __ 먹었어' 라고 합시다.  빈칸은 소음으로 지워진 부분 입니다. 그런데  빈칸에 들어갈 말은 을이라는 말을 통해 목적어라는 것을 알수가 있고, 먹었어라는 말을 통해 먹는 음식임을   있지요앞에 추운데라는 말은 의미상 추위를 더해 주는 것임을 알려주는 말입니다그래서 우리는 소음에 의해 지워진 빈칸에 찬밥과 비슷한 말이 있었으리라고 추측   있습니다. 이 처럼 정보가 소음으로 지워져도   있게 해주는 잉여적인 정보를 정보 이론에서 잉여성이라고 합니다. 

 

들뢰즈 가타리는 메시지의 교환을 근간으로 하는 이런 입장을  명시적으로 비판합니다. 잉여성이라는 개념을 아주 다른 개념으로 바꾸어 버리죠. 남아 도는 여분의 정보가 아니라 말해지는 문장의 간접화법으로 실려가는 명령어가 바로 잉영성이라는 것입니다. 직접적인 말이나 정보에 추가된 것이라는 점에서 잉여적이지만 사실은  말을 통해 바로 전하려는 것이 그것이란 점에서 없어서는 안될 핵심이 잉여성이라는 것입니다누군가에게 말을 한다는 것은 잉여성의 형태로 간접적으로 실려 가는 명령어를 발송하는 것입니다. 

 

정보나 의미는 원하는 행위가 무엇인지를 알려주기 위한 것입니다정보나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문법이나 랑그 단어도 기표도 아니라 말하는 어조 입니다. 때로 우리는 한마디 유의미한 단어없이 그저 ' !' 하고 소리칠때 우리의 의사를 전달하는 것은 바로 어조 입니다. 연출가 스타니슬랍스키(Stanislavski) 오디션을 할때 오늘밤 이라는 말하나로 30가지의 의미를 표현해보라고 요구했다고 합니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  맞습니다. 어조와 표정을 이용하는 겁니다. 어떤 어조로 말하는 가에 따라 오늘 밤이라는 동일한 말은 아주 다른 의미를 갖게 됩니다.  

 

음향학에서 음고나 음색은 주파수라는 형식으로 표현됩니다. 단순하게 말하면  주파수가 높은 소리는 음고가 높고 낮은 소리는 음고가  낮습니다. 어조는 음고를 포함하여 음색으로 표현됩니다. 음색은 배음 관계에 있는 여러 사인파들이 섞여 만들어지는 합성 함수의 그래프로 표시됩니다. 미디어 플레이어에서 보신적이 있죠. 요컨데 모든 음색의 어조는 주파수라는 형식으로 표현됩니다. 어조를 바꾼다 함은 주파수를 변조하는 겁니다. 음성적 주파수가 말의 의미를 결정하는 거죠. 이는 문법이나 랑그의 보편성을 강조하면서 개별적인 파롤은 과학의 대상이 아니라는 전통적인 언어학과 반대로 말할때 마다 다른 주파수를 갖는 파롤이 언어에서 본질적이라고 보는 관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전달 받은 명령어를 제대로 실행하려면 그것이 자신이 해야할일하고 싶은 일로 받아 들여야합니다의미는 알아 들었지만 '흥' 하고 무시할 수도 있고,  '싫어 !' 라고 거부할 수도 있으니까요. 대개 전달된 의미를 받아 들인다는 것은 내가 알아 들은 명령에 따르겠다는 말이고 나를 호명하는 말에 대답한다는 말입니다. '모세야 !' 하는 신의 호명에 대답한다 함은 그의 명령에 따르겠다는 말이고 신이 요구하는 주체, 명령에 자기 의지를 갖고 실행하는 주체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주체화라고 하지요이렇게 주체화 된다는 말은 자신에게 발송된 말의 주파수에 공명한다는 말로 바꾸어   수 있습니다. 소리 굽쇠 옆에 있는 소리 굽쇠가 같은 주파수로 진동하는 현상을 공명이라고 하죠. 주체화란 내게 의미를 전달하는 주파수에 내가 공명하는겁니다그래서 의미화가 주파수와 대응된다면 그걸 전달된 의미로 받아들인다면 주체화는 공명하는 작용과 대응된다고   있습니다. 

 

이처럼 어조의 음색에 언어의 본질을 연결하는 입장을 그들은 반음계적 언어학 내지 일반화된 반음계주의라고 명명합니다이는 음악에서  개념입니다장조, 단조같은 온음계는 , ,    보통 정해진 7개의 음을 사용하는데요.  음들 사이의 반음을 화성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이 반음계주의 입니다. 가령 파샵이나 솔샵같은 소리를 사용하는 것이 그것이죠. 이렇게 반음을 사용하면  조의 화성에 없는 소리가 나면서 음악의 색조가 크게 달라집니다바그너 이후 후기 낭만주의자들은 통상적인 조성적 작곡법에서는 제한적으로만 사용되던 이런 반음계 주의를  계속 확장하여 아주 음색을 다채롭게 하면서 해체하는 지점까지 밀고 나갑니다들뢰즈 가타리는 음색의 다양성을 이용는 이런 방법을 자신들의 언어 이론으로 끌어 들입니다.  음색의 효과를 통해 기호를 의미화 하고 그것을 이용해 기호의 의미를 바꾼다는 자신의 언어학을  반음계적 언어학 내지 일반화된 반음계주의라고 명명합니다.  

 

요약하면 언어는 명령어를 본질로 하고 명령어는 말에 간접적으로 실려 오는 잉여성입니다 잉여성은 의미화와 주체화를 통해 행위로 이어집니다.  의미화가 어조의 음색을 표시하는 주파수와 대응한다면 주체화는  주파수에 동조되는 공명과 대응 합니다잉여성은 주파수와 공명이라는 두형식을 갖는데 전자는 정보의 의미화와 관려되고 후자는 소통의 주체화와 관련 된다. 

 

 여기에 하나더 추가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의미화하고 주체화하는 것은 말의 음색인 어조 이지만 좀더 확실히 전하기 위해 표정이 더해 집니다. 가령 오늘밤이라는 말로  다른 의미, 다른 상황을 표현하려는 배우는 어조만으로 부족하기 때문에 얼굴과 신체로 표현하게 됩니다. 배우의 연기란 어조와 표정 동작으로 이루어지죠. 전화로 하는 말이 종종 오해를 낳는 것은 얼굴을 보지 못한체 말을 주고 받기 때문입니다. 의미가 충분히전달히 안되는 거죠. 눈치를 본다는 말은 그가 하는 말이 정말 뜻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표정을 읽는것입니다. 어조 만큼이나 얼굴 또한 명령어를 전달하는 잉여성이라 하겠습니다얼굴은  자체로 잉여성이다그것은 의미화 내지 주파수의 잉여성과 더불어 또한 공명 내지 주체화의 잉여성과 더불어 잉여성을 이룬다. 같은 말을 하면서도 확실하게 명령어를 전달하려면 엄하고 무거운 표정을 짓게 되죠. 그래서 들뢰즈 가타리는 기호는 얼굴로 재영토화 된다고 합니다연기할때 처럼 의미를 표현하는 신체의 동작은 이런 얼굴 표정의 연장이기에 신체의 얼굴화라고 합니다.  얼굴은이런점에서 의미화와 주체화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하는 표현기계 입니다.

 

 언어는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집합적인  입니다언어를 사용할때 우리는 특정한 규칙에 따라 의미화하고 주체화합니다. 더구나  언어활동이란 본질적으로 명령어를 주고 받는 과정이기에 권력이 작동하는 과정입니다. 명령하고 응답하는 패턴화된 양상이고 그것을 제대로 실행하도록 강제하는 배치가 있습니다부모와 자식, 교사와 학생, 고용주와 피고용자, 여자와 남자 등의 관계 속에서 우리는 그때마다 지배적인 패턴에 따라 말하고 행동합니다지배적인 의미 작용에서 독립적인 의미화는 없으며, 기존의 예속화의 질서에서 독립적인 주체화는 없다. 양자는 모두 주어진 사회적  장에서 명령어의 본성과 전달에 의존한다. 

 

그러나 언어가 사회적이고 집합적이라 해도 하나의 보편적인 규칙, 보편적인 언어는 없습니다. 사회나 집단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규칙이나 언어들이 있을 뿐이죠사회적인 규칙들은 보편성의 형태로 강제될때 조차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끊임 없이 달라지는 가변적인 것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이라면 상황이나 생활 형태에 따라 달라지는 상이한 규칙들, 상이한 언어 게임들이 있다고 말했을 겁니다물론 이규칙은 하나의 집단안에서도 다른 유형의 언어 게임을 창안하고, 실행함으로써 달라질  있습니다. 가령 인터넷에서 새로운 말과  언어 게임이 만들어지고 이것들이 오프라인 세계에 끼어들면서 디시 새로운 언어 게임이 만들어지죠. 이를 통해 새로운 언어의 용법과 규칙이 발명 됩니다어느 사회든 하나의 언어가 아니라 수많은 언어들이 있습니다. 미국 영어와 영국 영어가 다르고 미국 안에서조차 수많은 영어들이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우리가 아는 문법 조차 사실 특정 시기마다 사람들의 지지를 받는 문체가 확장되며 출현한 것임을   있습니다. 

 

화용론이 미시정치학이라는 말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있습니다언어란 본질적으로 명령어이고 그것을 사용할때 따라야  집합적 규칙이 있다함은 언어가 권력의 장임을 뜻합니다그러나 우리는 다양한 어조로  같은 단어 조차  다르게 사용할  있고, 비슷한 말을 사용하여 슬그머니 의미와 주체화의 장에서 빠져 나갈  있습니다. 지배적인 의미가 더는 작동하기 힘든 새로운 언어 게임을 발명함으로써 권력의 작동에서 벗어날  있습니다. 학교에서 온라인에서 새로운 언어게임, 새로운 언어들이 빠르게 발명되고 아주 빠르게 변화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죠. 지배적인 권력에  저항하거나  권력을  무력화하려는 시도들이 거기에 있는 겁니다이처럼 언어는 권력이 작용하는 장이면서 동시에 그에 저항하고 그것과 대결하는 장이라는 점에서 미시정치의 장입니다화용론이란 명령어를 통해 의미화 하고 주체화하려는 권력에 대해 잉여성을 이용하여 새로운언어 게임, 새로운 규칙의 언어를 창안하려는 것이라는 점에서 분명 미시정치학이라 하겠습니다.  

 

 

 

세미나에서는 매끄러운 공간과 패인 공간을 중심으로 논의를 하였다.  데카르트적 좌표계와 국소좌표계를 가각 패인 공간과 매끄러운 공간에 상응하여 설명하였다. 여기서 국소좌표계와 리만 계량 또한 패인 공간에 해당하지 않느냐는 질문이 있었다  국소좌표계도 공간을 수학적으로 표현하므로 매끄러운 공간에 홈을 파는 것으로 이해할 있기때문이다. 하지만 국소좌표계는 데카르트적 좌표계와는 달리 공간을 동질화하지 않는다. 데카르트적 좌표계가 공간을 동질화하는 방식으로 표현한다면, 국소좌표계는 동질화하지 않으면서 이질성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공간을 표현한다.이런 맥락에서 국소좌표계가 데카르트 좌표계보다 매끄러운 공간에 가깝다고  있다.

 

패인 공간과 매끄러운 공간이라는 기준으로 자본주의를 분석하는 내용도 있었다. 오늘날 자본주의에서는 가변 자본과 불변 자본의 구별이 점차 불분명 해진다. 과학자나 기술자가 발명한 신기술의 가치를 기술을 창안하는데 투입하는 시간으로 환원한다는 이치에 맞지않다. 음악이나 영화와 같은 문화산업의 생산물들에 대해서도노동시간 가지고 가치를 매겨 가격을 붙인다는 생각은 이해하기 어렵다.

 

자본주의가 패인 공간을 부정하고 매끄러운 공간을 창출하는 식으로 작동 방식을 바꾸었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오히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가 패임의 극한에서 매끄러운 공간을 낳는다는 사실이다. 자본주의가 초국가적으로 변화해가면서 매끄러운 공간을 만든다. 한편으로는 현재에도초국가적자본이 얼마나 국민국가를 필요로 하는가를 생각 해본다. 초국가적 자본이 발전해온 과정은 발전도상국의 무역 장벽과 금융 장벽을 철폐하기 위해 미국이라는 강력한 국가를 필요로 했다. 뿐만 아니라 2008년의 금융위기의 사례에서 나타나듯이, 초국적 금융자본은 자신들의 목숨이 걸린 위기에 봉착했을 국가의 힘을 빌려 살아남을 있었다.

 

군사기구들이 위도와 경도를 가지고 바다에 홈을 패놓은 이후 그들은 전략잠수함이나 항공모함, 나아가 인공위성이나 미사일을 통해 어디든 공격할 있게 됨으로써매끄러운 공간 구성해냈다. 이처럼 패인 공간과 매끄러운 공간은 현실에서 이분법적으로 구분되어 작동하지 않고 서로를 넘나든다.

 

노마디즘 저자와의 질의응답에는 우선 야금술과 관련된 내용이 있었다.  야금술사란 질료적 흐름을 따르는자다. 목공을 할때 나무의 결을 읽고 그것을 따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무를 다룰 없다.  악기를 연주할 때도 비슷하다. 같은 피아노라도 피아노에 따라 다른데, 이를 적절히 읽어내고 다룰 알아야 좋은 연주를 있다. 연주회 때마다 자신의 피아노를 비행기로 실어 날라야 했던 피아니스트는 피아노의 결과 관련이 있다. 야금술사처럼 결을 읽는다는 것은 비단 사물과의 관계에 그치지 않고 어떤 사람 혹은 사람들 사이의 분위기를 읽는 또한 결을 읽는 문제라고 있다. 

 

감정과 감응을 구별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노마디즘 10장에서 되기 개념을 이야기할   되기란 감응을 생산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감응이 무엇이며 감정과는 어떻게 다른지를 물었다. 감정은 재현의 대상으로서 슬픔, 분노, 기쁨, 즐거움 단순한 형태를 가진다. 이때 머릿속에 있는 감정을 정확하게 표현해 상대방에게 동일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관건이다. 반면에 감응은 감정과는 달리 미묘한 성격을 갖는다. 감정처럼 정확하게 표현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사람에 따라 다른 감응을 느끼게 된다.  슬픔의 감응을 담은 음악을 듣고 누군가는 분노가 담긴 슬픔을, 누군가는 후회가 담긴 슬픔을, 누군가는 슬픔 속에 담긴 고통을 강하게 느낄 있다.  감응을 표현하는 것은 감정을 표현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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