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노다디즘  세미나에서  전쟁기계와  포획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세미나 정리 내용을 옮겼다.  유목민에게는 역사가 없다 라는 유목민의 역사에 대한 관점에 대해 먼저 논의 하였다. 유목민에게는  역사서나 거의 남아 있지 않다고 합니다. 이는 유목민의 고유한 시간관념 때문이다.  유목민에게 시간이란 하나의선을 이루며 연속성을 갖는 무언가가 아니다.  그들에게 시간은 어떤 고정점을 갖지 않고 그저 흘러가는 것이다.  반면 제국의 연대기적 역사는 사실들을 직선적인 시간관에 따라 기록해 보존하려고 한다. 

 

기억은  개인의 정체성이다.  기억이  개인의 역사라면 조직의 기억은 역사기록이 아닐까 ?  역사가 없는집단은 무엇으로 규정할  있을까 ?  제국적인 역사관념에서 벗어나 역사를 유목적인 방식으로 새롭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는 유목민들이 그러했듯이 역사를 아예 버리자는 주장은 아니다.  오히려 역사를 다르게다루는 방법을 유목민들로부터 배우자는 것이다. 이는 무엇보다도 역사에 얽매여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지못하게 되는 상황을 경계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과거의 기억에 벗어나는  니체의  망각하는 것을 배우라 충고가 언급 되어 있다.  역사적 사실이나 과거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그로부터 벗어나서 자유롭게떠날  있는 유목적인 감각이 필요하다.

 

다음으로 야금술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야금술사는 질료적 흐름을 따르는 자라고 한다. 이들은 국가장치에 속하지도, 전쟁기계에 속하지도 않는다.  국가장치에 속해서 일하다가도 유목민에게 옮겨 가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야금술사는 이주민 또는 순회자라고   있다. 야금술사는  국가장치나 유목민의 전쟁기계와는 다른 고유한 배치를 가진다고 보아야 한다.  바로 구멍 뚫린 공간입니다.  구멍 뚫린 공간 혹은 다공공간은 국가장치의  패인 공간과도 다르고, 유목민의 매끄러운 공간과도 다른 야금술사의 고유한 공간이다.

 

야금술사는 고유한 공간을 가지지만,  야금술이 유목주의와  친연성을 갖는다고 한다. 야금술이 질료적 흐름을 따르기 때문이다.  야금술은 물질의  흐름 자체에 대한 사유라는 점에서 흐름의 사유를 따르는 유목민의삶의 방식과 공통성을 갖는다.  야금술이 먹고살기 위해서 국가장치에  합류할지 몰라도,  유목민과는 먹고살기 위해 연대하지 않는다. 유목민은 스톡을 축적하지 않는 만큼, 국가장치와 같이 야금술사가 먹고 살수 있게 해주기 어려울 것이다. 야금술사가 필연적으로 유목민과 합류하는 이유는 삶의 방식이 공통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스톡은 직접적인 효용이 없음에도 버려지지 않고 비축되는 것이다. 교환과 스톡 축적의 차이를 알아본다.  교환은 교환 당사자들의 한계효용에 따라 이루어지며 한계 효용이 감소해 사라지는 지점에서 중단된다. 반면 스톡의 비축은 소비의 효용이나 교환의 이득이 없음에도 이루어진다. 직접적인 이득이 없는데도 스톡이 비축되는 것은 다른 방식의 이득 가능성 혹은 다른 종류의 욕망 가능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교환과 스톡의 차이를 보여주는  가지 예시로 맑스가 구분한  가지 상이한 교환,  상품-화폐-상품(C-M-C′) 화폐-상품-화폐(M-C-M′) 차이를 생각해   있다.  C-M-C′  C′이라는 상품의 효용을 얻기 위해 이루어지는 상품 교환이다.  교환을 매개하는 중간의 화폐(M) 그러한 효용을 얻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 M-C-M′ 목적은 화폐의 증식,  화폐라는 스톡의 비축이다.  상품으로부터의 어떤 효용을 기대하고 이루어지는 교환이 아니다. 소비와는 다른 종류의 욕망이 작동하고 있다.  따라서 M-C-M′이라는 자본의 배치는 교환의 형태를 가지지만 교환의 배치보다는 스톡의 배치에 가깝다.

 

이렇게  스톡이 비축되는 배치가 바로 포획이다. 포획에는  가지 양식이 있는데, 지대, 이윤, 세금이다. 이것들은 각각 토지, 연장, 화폐라는 스톡과 연관된 포획입니다.   포획들은 각각 지주, 자본가, 조세  물가통제권자라는 권력과 결부되어 있다. 이렇게 포획의  양식을 식별함으로써 맑스주의 정치경제학에서 주장하는 착취 개념을 극복할  있다. 기존의 맑스주의에서는 노동가치론에 입각해서 생산 지점에서 착취된 잉여가치가 지대, 이윤, 세금 등으로 나누어진다고 한다.  이는 수탈의 다양한 양상을 생산에서의 착취로 환원하는 사고방식인데, 이런 생각은 정치적 실천에서는 산업프롤레타리아 중심의 혁명이라는 관념으로 이어진다.  스톡과 포획 개념을 통해 우리는 생산 이외의 지점에서 발생하는 수탈의 고유한 차원을 다룰  있다.

 

이러한 포획의 메커니즘을 포획장치라고 한다. 이는 직접적 비교와 독점적 영유에 의해 작동하는데, 들뢰즈와 가타리는  작동방식 중에 직접적 비교가 논리적으로 앞선다고 한다.  포획의 논리는 일차적으로 직접적비교에 의해 설명된다. 따라서 포획은 불공정한 강탈이 아니라 공정한 대칭적 과정으로 나타나는 마술성을얻게 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도 비교가 독점에 앞서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현실적으로는 독점적 영유에 의한 포획이 먼저 있어야만 그에 따른 비교가 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포획장치는 폭력을 통해 수립된다고 말할 있습니다. 포획을 위해서는 우선 다른 사람들의 소유권을 배제하고 독점적인 영유를 확보하는 폭력적인과정이 필요하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맑스가 산업자본주의와 관련해 언급한 본원적 축적 개념을 일반화해모든 포획장치는 본원적 축적을 필요로 한다고 말한다.  이런 이유에서 국가장치가 포획장치에 선행한다.  포획이 이루어지려면 우선 국가장치의 폭력을 동반한 본원적 축적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1. 국가와  극들

  1) 마법사-황제와 판관-사제

국가의 정치적 주권은  가지 양상으로 작동한다. 마법사-황제의 극은 폭력과 기호를 통한 포획의 방식으로표현적 지층에 해당하고, 판관-사제의 극은 법과 계약에 따른 지배의 방식으로 내용적 지층에 해당한다. 국가장치는 생산자가 포획장치 안에서 노동하게 하기위해, 자립적-자율적 노동할 조건을 제거해 버린다. 

 

  2) 국가는 전쟁기계를 어떻게 포획하는가

국가에 의한 전쟁기계의 포획은  가지 방식을 모두 필요로 한다. 황제와 제국의 극에 의해 이루어진 포섭은법과 계약의 형식에 의해 자연적으로 정당한 것으로 나타난다.  결과 포획은 어떤 원인을 갖지 않고 자연적인 사태처럼 보이는 마술적인 것이 된다. 국가의 원인으로 흔히 지적되는 폭력이나 전쟁, 공적 기능, 사유재산, 화폐 등은 국가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국가의 원인이   없다. 따라서 처음부터 존재하는 것으로서의국가인 원국가를 상정할 필요가 있다.

 

2. 어느 것이 일차적인가?

잉여와 스톡,  농촌과 도시,  원시사회와 국가중에 어느것이 일차 적인가 

 

  1) 극한과 문턱

배치의  문턱은  다른 배치로 들어가게 하는 경계점이다. 문턱을 넘지 않은 직전은 극한이라고 정의 한다.  문턱은 최종적인 것으로  변화를 표시하며극한은 끝에서  번째로 재시작을 포함한다.  원국가란 권력의 집중이 극한을 향해 나아가지만 아직 문턱을 넘지 못한 국가이다.

 

  2) 잉여와 스톡

잉여가 먼저인가, 스톡이 먼저인가 ?  경제학에서 스톡이란 플로우의 대개념으로 어떤 시점에서 소유한 자산의 의미이다.  여기서 사용하는 스톡은 소비나 단순한 교환에 사용되지 않고 비축되는 재화를 지칭한다. 스톡은 잉여가 이미 존해해야 있을  있다. 잉여가 존재하고 그것이 스톡이 되고 재산이 되며 사적 소유를 낳는다.  씨앗으로 사용할 곡물의 스톡이 없다면 농작물의 경작은 불가능할 것이다.  윈시 사회에서   잉여를 생산하지 않은 것은 잉여가 무의미하고 불가능한 배치와 결부되어 있다.  농경은 스톡이 존재하는 배치를 이미 전제한다.  농업을 창조하는 것은 국가다. 국가가 농경적 생산을 하나의 양식으로 만든다.  잉여보다는 스톡이농업보다는 도시가 생산 양식보다는 국가가 먼저이다. 이는 원국가의 가설을 지지한다. 

 

  3) 예견-방지 메커니즘

원국가는 극한을 향해 나아가지만 아직 문턱을 넘지 못한 국가이다. 원국가는  언제나 이미 존재했다.  국가없는 자급자족적 원시사회는 존재하는 않았으며,  원시사회는 국가가 문턱을 넘지 않도록 만드는  예견-방지메커니즘이 있었다.  윈시사회들은 국가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벡터 그것을 격퇴하는 메커니즘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었다.  

 

  4)  개의 문턱

국가와 결부된 문턱에는 도시와 국가라는  가지 상이한 유형이 있다. 국가란 브로텔이 영토적 국가라고 했던 것으로 국민국가 형태로 일반화 했던 국가를 지칭한다.  스톡의 생산과 유통, 순환이 도시를 하나의 포획장치로 구성하는 요인이다.  도시가 들어오고 나감에 의해 정의 되는 길의 상관물이라는 것은 이런 의미이다. 따라서 도시를 특징짓는 것은  -일관성과  수평적인 연결과 순환의 망이다.  반면 국가는 국가 내부의 다양한 영역과 지대들을 통합하는 -일관성을 통해 작동한다.  공명에 의존하는 내적 순환이며 네트워크의 나머지로 부터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회귀의 지대다. 

 

  5) 자본주의와 예견-방지 메커니즘

국가의 예견-방지 메커니즘은 자본주의에도 적용될  있다. 도시는 자신들의 독점적인 이윤을 위해 도시를넘어 자본주의가 확대되는 것을 막았다는 점에서 도시는 자본주의의 예견-방지 메커니즘으로 작동했다고  있다.  자본주의는  영토적 국가가 자본주의의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수행했다.  리카도는 자본주의는이윤율 저하에 의한 종말을 추론 했지만 대량 생산에 의한 가변자본이 줄어드는 이윤율 저하의 상쇄 요인이발생한다.   이윤이 아니라 사회화된 다른 목적에 의해 생산이 이루어진다. 이윤율 저하경향이 새로운 배치의문턱을 격퇴하는 방식으로 예견하는 자본주의의 극한을 표시하는 법칙이라고   있다.  

 

3. 포획

  1) 포획이란

교환에서 아무런  추가적인 이득을 얻을  없음에도 버리지 않고 비축할 ,  비축되는 것을 스톡이라고한다.  비축되는 물건이 교환과는 다른 이런 종류의 배치를 포획이라고 한다. 

 

  2) 교환과 스톡

한계주의에 따르면 교환은 한계효용을 얻기 위해 행해진다.  내가 주려는 물건의 한계효용보다 교환해서 받을 물건의 한계 효용이  크다면 교환이 이루어진다. 교환은 마지막 구매물의 최종적 효용이 마지막 판매물의 효용보다  때까지 지속되며, 그때까지 그것들은 교환의 배치 안에 있다. 하지만  이상 교환이 이득이되지 않게 되면, 교환과는 다른 배치로 들어가면서 스톡의 비축이 시작된다. 스톡의 비축은 교환이나 직접적인 소비 이외의 이득을 획득하기 위해 이루어진다. 스톡으로부터의 이득은 스톡을 소유한 자에게 귀속될 텐데, 이것이 바로 포획이다. 스톡이 되는 것은 다른 방식의 이득 가능성, 다른 종류의 욕망 가능성을 담지하고있을 때이다. 

 

  3) 포획장치

포획장치는 직접적 비교 독점적 영유라는  가지 방식으로 작동한다.  포획의 논리를 설명하는데 일차적인 기능을 하는 것이 직접적 비교이고,  포획개념의  독창성을 구성한다.  비교로서 포획은  비대칭적이고불공정한 강탈이 아닌 공정한 대칭적 과정으로 나타난다. 스톡은 토지, 연장, 화폐라는  측면을 갖으며, 여기에는 지대, 이윤, 과세라는 포획의  양식이 상응한다. 또한 각각의 포획에는 지주, 자본가, 조세  물가통제권자라는 권력의  측면이 존재한다.

 

 4) 지대의 포획

재대는 토지라는 스톡을 소유함으로써 영유하는 것이다. 차액지대는 토지 상호  산출량의 직접적 비교를통해서 성립한다. 보다 산출량이 많은 토지의 소유자는 그만큼의 추가적인 산출량만큼을 차액지대로서 포획한다. 그렇다고 해서 최열등지의 소유자가 지대를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최열등지의 소유자는 토지를 독점적으로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에 근거해 절대지대를 포획한다. 그렇게 지주는 절대지대와 차액지대를 더한만큼을 지대로써 포획한다. 비교에 의한 이득과 독점적 소유에 의한 이득의 여유가 두가지 포획의 양태이다. 

 

  5) 이윤의 포획

포획의 대상은 노동이다. 활동과 대비되는 노동이 스톡으로 비축된 노동이다.  노동과 관련한 비교 메커니즘의 수립을 통해  가치를 생산하는 생산적 활동과 가치를 생산하지 않는 비생산적 활동을 구분하는 척도가 확립된다. 노동이란 개념 자체에 가치라는 개념과 비교라는 행위가 전제되어 있다.  척도에 따라 노동을 비교하여 지대의 경우와 같이 이윤을 포획한다. 그런데 노동의 포획은 잉여가치의 착취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노동을 하나의 척도에 포섭해 가치화함으로써 노동의 포획은 노동 자체에 대해서 이루어진다. 그래서 잉여가치만이 아니라 노동 자체도 항상 이미 포획이다. 잉여노동이 노동의 현실적 필요조건이고 노동의 현실적전제이다. 잉여 노동 없는 노동은 없으며, 노동은 항상 이미 잉여노동을 전제하고 있다. 

 

  6) 세금의 포획

화폐라는 스톡을 통한 세금의 포획이다. 화폐는 국가에 의해 발행되고 국가에 의해 유통되는 것이다. 시장에서 자연 발생적으로 발생한 것이아니다. 자국 내부에서 통용되는 화폐의 발행은 경제에 대한 통제권을 장악하려는 국가의 필요에서 비롯되었다.  국가가 세금을 부과하고 그것을 화폐로 받아 화폐로 하여금 교환수단과 지급수단으로서의  일반성을 획득할  있게 해주었다.  이런 점에서 세금이 상이한 노동과 상이한  들간의 등가성을 확립하게 해주었다.  국가는 나아가 시장에서 상품화하려는 시도 자체에 세금을 징수함으로써 포획을 한다. 은행의 경우는 화폐의 독점적 영유에 기초해 이자라는 세금을 포획한다. 뿐만 아니라 국가는화폐 발행을 통한 물가 상승을 통해서도 포획을 행한다.

 

  7) 포획장치의 추상기계

화폐 발행을 통한 포획의 경우, 포획은 화폐를 사용할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화폐를 발행하거나 창조하는순간에 발생한다.  화폐를 추가로 발행하자마자 무물가가 상승하지 않지만 이때 포획이 이루어 진다. 물가 상승으로 인해 실질임금이 감소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독점적 영유화와 직접적 비교라는 두가지 포획방식은 복합되어 작용하며 누구도 포획당하지 않은 것처럼 공정성 규칙에 알맞게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포획의 마술성을 보여준다. 생산자는 자신이 가지지 못한 , 획득할 기회가 없는 것을 상실 했기 때문이다. 

 

  8) 포획장치와 폭력

빼앗기는 줄도 모르는  빼앗기는 , 그게 바로 포획의 마술적 성격이다.  폭력이 행사되지만 폭력인  모르는 국가적 폭력의 마술적 성격이다. 맑스가 발한 자본주의를 가능하게 했던  본원적 축적도  국가를 통해자본주의에 선행하는 폭력 이었다.  포획장치가 수립될 때마다 본원적 축적이 존재한다.  포획이란 일종의 국가적인 폭력을 통해서 어떤 것들을 스톡으로 전환시키고, 포획 장치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포획이 발생해서국가장치가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포획장치를 구성하는 국가장치가 항상 선행했다고   있다.

 

 

 

 

 

 

 

 

 

 

 

배치란 사람과 사물, 동물 등 이질적인 것들이 결합된 다양체 입니다. 역으로 어떤 다양체의 특이성을 표현해주는 특지점들의 분포를 뜻하기도 합니다. 배치는 일단 기계와 인접한 개념으로 시작됩니다. 가타리는 구조화된 질서로부터의 절단으로 기계를 정의한 바 있습니다. 이는 유기체적 구조로부터 절단 된 것으로서의 부분 대상이나, 라캉이 말하는 대상 a와 가까이 있습니다. 물론 가타리는 구조화된 장안에 주체와 반대로 구조에서 벗어날 수 있는 탈열토화의 지점임을 강조합니다. 다른 한편 들뢰즈는 구조주의의 중요한 기여로 계열적 사고를 강조하며 수용하지만 구조적 동영성을 벗어나는 지점으로 밀고 갑니다. 이러한 사고가 만나는 지점에서 탄생한게 안티 오이디푸스의 기계 개념이죠.

기계는 이웃항과의 계열화 양상에 따라 특정한 규정성을 갖게 되지만 동시에 다른 이웃항과 계열화 되면 그 규정성에서 이탈하여 다른 규정성을 갖게 됩니다. 다른 기계가 된다는 말이죠. 이는 그때마다 그렇게 접속된 기계들의 복합체가 있음을 뜻합니다. 이것이 배치입니다. 가령 종이는 문자, 관료, 돈과 접속하여 세금을 기록하는 서류 기계로 작동합니다. 또 그것은 문자, 시인, 독자와 접속하여 시를 기록하는 기계로 작동합니다. 기록하는 기능을 한다는 점에서 비슷해 보이지만 전자에서 기록은 세금이라는 사물의 이름을 야기한다면 후자 에서 기록은 시정이라는 감응에 이름을 야기합니다. 이때 종이, 문자, 관료, 돈이 서로 접속된 복합체가 조세의 배치를 구성한다면 종이, 문자, 저자, 독자의 복합체는 문학의 배치를 구성합니다.

배치란 이처럼 복수의 기계들이 접속하여 만들어지는 다양체를 뜻합니다. 여기서 배치는 구조라고 부르는 것과 어쩌면 유사한 이론적 기능을 합니다. 그것은 상이하게 반복되는 특이성을 표현 하기 때문이죠. 문학이 배치 안에서라면 종이에 기록된 것은 숫자 나 그림 조차 작품이 됩니다. 그것이 과연 훌륭한 것인지는 별개 이지만 말입니다. 구조 개념과 다른게 있다면 배치란 구조와 달리 쉽게 다른 배치로 이행한다는 것입니다. 가령 문학의 배치에 돈을 하나 추가한다면 얼마나 팔리느냐가 기록되는 것을 규정하는 아주 다른 배치로 넘어갑니다.

또 하나의 다른점은 구조라는 개념은 계열화 되는 항들을 동질화 하는데 반해서 배치는 이질적인 것 그대로 계열화 한다는 것입니다. 가령 한 언어의 구조를 말하려면 소리는 음소라는 동질적 대상으로 환원해야 하고 문장의 의미는 형태소나 통사 같은 동질적 성분으로 환원해야 합니다. 반면 배치 개념은 단어와 표정, 손가락, 어조 같은 아주 이질적인 것들을 그대로 계열화하여 낭독의 배치, 욕설의 배치, 강의의 배치 등 상이한 배치들을 구별하고 해명할 수 있습니다.

기계와 배치 개념의 이러한 인접성 때문에 안티오이디프스에서 배치는 기계적 배치로 한정되어 사용됩니다. 즉 안티 오이디푸스에서는 언표 행위의 배치란 개념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대신 언표 행위의 집합적 대행자라는 개념이 사용될 뿐입니다. 반면 그 이후에 쓴 카프카 나 천의 고원등에서는 배치는 기계적 배치와 언표 행위의 배치로 구별되고 양자에 대해 모두 등가적인 의미로 사용되죠. 나아가 기계적, 언표 행위와 같은 관형어 없이 그 자체만으로 사용됩니다. 카프카의 마지막 장 제목의 배치란 무엇인가 ? 라는 점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 줍니다.

천의 고원은 한마디로 말해 배치에 대한 책입니다. 먼저 이 책의 각각의 고원은 언어와 기호, 유기체, 얼굴, 사회와 정치, 국가, 예술 등에서 발견되는 다양한 배치에 대한 분석입니다. 또한 그러한 영역에서 삶의 양상을 형성하는 욕망과 권력의 배치에 대한 분석이며 각각의 배치에서 영토화와 탈영토화의 선이 그려지는 양상에 대한 분석입니다. 혹은 그런양상 들을 형성하는 다양체로서의 무의식에 대한 분석이 고 하나의 배치에서 다른 배치로 이행하는 강도적 변이에 대한 분석입니다.

약간 각도를 바꾸어 보면 천의고원은 배치라는 중간을 통해 지층화 된 것을 영토화 하고 탈영토화 하는 운동에 대한 책이며 지층들로부터 탈 영토화 의 선을 밀고 나가 추상 기계와 일관성의 구도에 이르는 길을 찾는 책입니다. 개념에 대한 사전 인양 서술된 이 책의 결론에서 우리는 이러한 사회의 흐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구체적 규칙과 추상적인 기계들 라는 부제의 결론은 지층, 지층화에서 시작하여 배치로 이어집니다. 그 다음에 그 배치의 양상을 서술하는 리좀이란 개념을 통과한 뒤 일관성의 구도, 기관 없는 신체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거기에 탈영토화와 추상 기계가 부가 되면 끝나죠. 지층이 구체적 규칙의 가장 완고한 극 이라면 그 규칙이 추상화 되어 이루게 되는 강도 영의 순수 잠재성이 그 반대 극입니다. 추상기계가 그리고 절대적 탈영통화를 통해 도달하는 일관성이 구도가 거기에 있지요. 이러한 사유의 흐름은 대부분 고원이 지층화된 것들의 배치에서 시작하여 일관성의 구도로 마무리 된다는 사실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배치는 지층 들 사이에 있다는 점에서 간지층이 라는 말은 이런 의미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천의 고원에서 모든 배차가 4가성을 갖는다고 합니다. 먼저 기계적 배치와 언표 행위의 배치는 하나의 배치가 갖는 두성분 혹은 두 가지 속성을 표시합니다. 달리 말하면 이는 내용과 표현 이라는 성분인데 전자가 신체적인 것에 속한다면 후자는 비신체적인 것에 속합니다. 실체의 두 속성에 대한 스피노자의 개념과 대응하는 구별이죠. 다른 한편 모든 배치는 그에 속한 요소들을 결합하여 안정화하는 재영토화힘을 갖는 동시에 그로부터 이탈하여 다른 배치로 이행하는 탈 영토화의 첨점을 같습니다. 예컨대 내용과 표현 혹은 기계적 배치와 언표 행위의 배치라는 두 성분과 그 각각의 포함된 재영토화 하는 힘과 탈영토화에 첨점이 모든 배치의 포함된 4가성을 표현합니다.

예를 들어 학교는 강의실이 라는 분할된 공간, 교탁과 책걸상, 나이에 따라 동질화된 학생들 교과서 등이 결합된 기계적 배치로 구성 되죠. 또한 교사나 학생들의 언행을 규제하는 규칙들 교육에 대한 지식들 지위에 따른 발언권의 분배, 발언의 내용과 방식을 규정하는 규칙들 등으로 구성되는 언표 행위의 배치가 거기에 동시에 있습니다. 언표 행위의 배치는 신체적 기계적 성분들이 서로 부딪히고 조절 되는 양상을 규정하며, 기계적 배치는 그러한 언표 행위들이 물리적 유연성을 갖게 하는 조건이 됩니다. 다른 한편 교육의 중요성이나 교육방법, 시험이나 처벌의 유용성 같은 것은 상이한 기원을 갖는 이질적인 것들을 하나로 묶어 재영토화 합니다. 반면 교사, 학생 관계 만큼이나 학교에 중요한 요소인 학생과 학생의 관계는 가르치고 배우는 학교의 배치로부터 이탈할 수 있는 가능 지대를 형성합니다. 시험으로 환원되지 않는 관심이나 능력, 교육의 기능을 초과하는 처벌 등 도 그렇습니다. 이러한 요소들이 학교의 배치 안에 존재하는 탈영토화할 첨점이라고 하겠습니다. 여기에서 작동하는 탈영토화의 힘이 재영토화하는 힘을 초과할 때 학교의 배치는 다른 끝으로 이행하게 됩니다.

들뢰즈는 배치야 말로 현실적 최소 단위라고 말합니다. 최소한의 현실적 단위는 단어도 관념도 개념도 시니피앙도 아닌 배치입니다. 이는 문학과 관련해 한 말이므로 언표 행위의 배치에 직접 해당 되는 말이지만 기계적 배치도 다르지 않습니다. 요컨대 현실에서 활동하는 최소 단위는 주체도 개인도 사람도 생물도 아닌 배치입니다. 가령 학교에서 건물이나 책상이 독자적인 활동 단위가 아닌 것처럼 교사나 학생 교장 또한 독자적 활동 단위가 아닙니다. 사실 사람을 언제나 주체라고 보고 다른 요소들을 그의 도구라고 보는 인간 중심적 관념으로는 뭔 소리야 라고 할 얘기지요. 하지만 하나의 배치안에서 함께 작동하던 이웃 기계들 없이 집이나 카페 같은 곳에서 개인이 교사의 언행을 하게 된다면 또라이 아니면 꼰대가 됩니다. 현실에 존재하는 최소 단위가 배치 라고 한다는 것은 이러한 뜻입니다.

그럼 배치 안에서 사람이나 사물 등 각각의 기계는 대체 무엇이고 그들의 행동은 무엇이냐 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그 배치가 요구하는 바를 실행하면 대행자 입니다. 여기서 배치 라는 말이 프랑스어 앙자스망의 번역어 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장쓰는 대행사무소 나 중개소를 뜻 합니다. 누군가로 부터 부여받은 과제를 수행하는 대행자와 직결된 말이죠. 들뢰즈는 말년에 저작 다이얼로그에서 아장쓰 라는 동사 또한 이와 연결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는 영역본에서는 어셈블링 이라고 되어 있어서 에이전트와 결부된 의미가 살아나지 않습니다. 뭐뭐를 위해 말하거나 뭐뭐를 대신해 말하는 것이 대행 이지요. 혹은 과제를 부여한 누군가와 함께 말하고 함께 쓰는게 대행입니다. 연예인 에이전씨가 표방하는 게 이런 말이죠. 무역상 이나 대리점도 그렇습니다. 누군가를 위해 그가 부여한 과제를 위해 그를 대신해 일하지요. 그런 점에서 대행이란 중간에 있는 것이고 상이한 두 세계가 만나는 선 위에 있는 것입니다.

학교의 배치 안에서 교사나 교장은 모두 그 배치의 대행자 입니다. 책상이나 시험 시간표도 그렇죠. 학생을 위하여 교육을 위하여 그 배치가 부여한 과제를 나름대로 실행하는 대행자 입니다. 대행은 한 배치 안의 기계 사이에서도 일어 납니다. 글을 쓰려는 욕망을 위해 타자기를 다룰 때 타자기는 글을 쓰려는 작가의 의지를 대행합니다. 역으로 타자를 잘 다루려면 타자기에 자신의 손과 눈을 길들여야 합니다. 즉 타자기의 기계적 의지를 신체가 대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랬을 때 자신들이 타자기 같은 기계를 다른 작동자이지만 동시에 그 기계가 선택하여 다루는 재료 라고 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학교의 배치 안에서 교사는 교과서나, 시간표에 내장된 욕망을 대행하며 그런 방식으로 학생들을 위해 행동하는 대행자입니다. 학생들 또한 강의실이 나 시간표가 요구하는 바를 실행하는 충실한 대행자가 되길 요구 받습니다. 강의실이 나 시간표는 역으로 또한 학생들을 가르치려는 교사의 의지를 대행합니다.

이처럼 어떤 배치 안에서 각각의 기계는 이웃한 기계들의 대행자 입니다. 조금 더 강하게 말해 배치들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모두 그 배치의 부품이자 톱니바퀴 입니다. 하나의 톱니바퀴는 이웃한 톱니바퀴 의지를 다른 톱니바퀴에 전달하는 대행자입니다. 물론 대행이 항상 정확하게 이루어 지지 않습니다. 모든 기계는 고장 나면서 작동 하죠. 그렇게 삐걱 되면서 하나의 배치는 하나의 다양체 로써 작동합니다.

권력이란 이처럼 주어진 배치 안에서 이웃한 톱니 바퀴에게 대행을 요구하는 욕망이고 그에 따라 작동하는 복종을 통해 실현되는 의지 입니다. 그렇게 권력과 욕망은 다른 것이아닙니다. 권력에 대한 욕망은 없다 . 권력이 욕망이다. 배치안에서 각자는 이웃한 기계들에게 복종하는 대행자이고 노예입니다. 동시에 자신은 이웃한 기계들에게 대행을 즉 복종을 요구하는 주인입니다. 이처럼 이웃한 톱니, 선분의 작용의 맞추어 움직이도록 하는게 권력이란 점에서 권력은 선분적 이라고 합니다. 각각의 선분은 권력이다. 그것은 욕망의 형상인 동시에 하나의 권력이다. 각각의 선분은 기계 내지 기계의 부품이다.

이는 권력과 욕망에 대한 새로운 사유를 함축한다. 안티 오이디푸스에서는 기계적 배치를 통해 욕망을 다루긴 했지만 억압에 대한 욕망과 혁명적 욕망, 억압하려는 욕망과 억압 받으려는 욕망이라는 대립이 확실하게 있었습니다. 대중은 왜 자신에 대한 억압을 욕망 하는가? 라는 물음 자체가 이를 보여줍니다. 반면 권력이 선분적으로 작동한다는 말은 각 부품이 이웃 부품에 대해 특정 욕망을 대행하기를 요구하는 동시에 다른 이웃 부품의 욕망을 대행함을, 그의 명령을 따라 작동함을 뜻합니다. 모든 부품은 이웃 기계에게 명령하는 주인이면서 다른 기계의 명령을 실행하는 노예입니다. 어느 위치에 있는가에 따라 다른 기능을 할 뿐입니다. 억압은 억압하는자에게나 억압 받는 자에게나 욕망 권력의 이러저러한 배치, 기계들의 이러저러한 상태에서 연연한다. 억압이 기계에 의존하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이로써 욕망과 권력이 서로 내재적인 관계에 물려 들어가 있음이 분명해 집니다. 배치란 욕망과 권력의 내재적 장입니다. 그러나 욕망과 권력이 내재적 이란 말은 양자가 동일함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배치안에서 위상만이 아니라 작동하는 방식도 다릅니다. 권력은 하나의 배치 안에서 자신의 욕망을 다른 부품에게 대행하고 그것이 제대로 실행 되었나를 확인하는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이때 시작과 끝이 중요합니다. 선분 이란 두 끝점이 뚜렷한 선 이지요. 두끝점이 권력이 작동하는 지점입니다. 지금은 점심시간 이 아니라 수업시간이야. 이런 식으로 권력은 시작점에서 작동합니다. 시험이나 평가는 끝점에서 작동하는 권력을 가동시키는 데 끝에서 만이 아니라 중간으로서 소급 되며 작동 하죠. 아니 시험 어떻게 보려고 그래. 권력은 이로써 배치안 에서 재영토화하는 힘을 가동 시킵니다.

그러나 기계는 고장나며 작동 하죠. 충실한 부품이길 정지하고 명령의 수행 을 거부하며 심지어 그 배치에서 이탈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권력은 정지되고 권력에서 이탈한 욕망이 탈주선을 그리게 됩니다. 이것이 탈 영토화의 첨점에서 벌어지는 일입니다. 이 욕망은 다른 배치로 이행 하거나 새로운 배치를 창안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구성된 배치 또한 재영토화의 힘을 가동 시켜야 합니다. 즉 권력의 배치로써 작동하게 됩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욕망은 선분화된 권력을 흘러 넘치 외부로 흘러 간다는 사실입니다. 즉 새로운 배치를 창안 하는 것은 욕망이며 권력은 만들어진 배치 안에서만작동합니다. 배치는 권력의 배치이기 이전에 욕망의 배치 라는 명제, 권력보다 탈주선이 선행 한다는 명제는 이런 말입니다. 주어진 배치를 벗어나 새로운 배치를 만드는 것은 욕망이며 권력은 욕망이 만든 배치 안에서 그것을 유지하는 방식으로만 작동한다는 것입니다.

기계가 대행자 라는 개념도 이런 양면성이 있습니다. 배치는 이질적인 부품들이 결합되어 구성되고 작동합니다. 그렇기에 배치가 하나의 다양체로 작동하려면 이 이질적인 것들이 서로 협동하여 하나의 집합체로 작동하도록 해야 합니다. 배치는 공기능이고 공감이 며 공생입니다. 물론 이때 공감은 신체와 신체가 부딪침이고, 그 사이에서 발생하 갈등과 투쟁을 함축합니다. 따라서 대행한다면 요구되는 바를 그대로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대행자는 중간 입니다. 훌륭한 대행자는 주인의 욕망을 그대로 재현하는 대변자가 아니라 두부품 사이, 상이한 두 세계의 중간에서 간극이나 마찰을 조정하는 자이고 중간에서 주인의 요구 자체를 바꾸는 자입니다. 가령 광인을 대신 쓴다 함은 광인을 대변하며 쓰는게 아니라 차라리 광인으로부터 광끼 를 구해 내며 쓰는 것입니다. 광인의 입장을 수용하며 쓰는게 아니라 광인과 정상인의 중간에서 삶을 위해 긍정적인 어떤 것을 찾아내며 쓰는 것입니다. 요컨데 대행자는 이웃한 권력의 요구를 충실히 실행하는 자이지만 훌륭한 대행자란 이질적 부품들을 공감하고 공생하게 하는 자 이면서, 새로운 배치를 향한 이행의 성분을 동시에 가동하는 자라고 해야 합니다. 기계란 언제나 하나의 배치, 하나의 영토를 개방 하거나 폐쇄하는 특이한 열쇠라고 하는데, 이는 배치 안에서 대행자의 두극에 대한 문장 이기도 합니다.

 

 

 

7.  전쟁기계와 : 전쟁기계의 수적 측면 

 

1) 조직의  유형

모든 인간 조직을  혈통적 조직, 영토적 조직, 수적 조직으로 나눌 수 있다. 혈통적 조직은 가족, 씨족, 가문과 같이 동일한 조상을 갖는다. 부족처럼 영토적 형식과 중첩되기도 하며   대조,  대손이라는 방식으로 숫자가 관여 하기도 하지만 혈통적 요인이 일차적이다.  영토적 조직은 영토를 필수 요소로 갖는다. 이러한 영토는 소유와 긴밀한 관련을 갖고 있다. 여기서 소유란 인류와 대지 사이의 탈영토화된 관계로서 자연적인 기능과는 상관이 없다.  영토적 조직에서 인구조사, 조세 등과 관련된 숫자나 계산이 국가의 시공간적 , 영토적  안에 소재를 복속시키는 기능을 한다. 수적 조직에서는 유목이라는 삶의 방식과 긴밀히 결부된 조직이다. 가장 기본적이고 자연 발생적인 단위의 가족 내지 가구를 묶어서 번호를 붙여 조직하고 관리한다. 칭키스칸의 10호대, 100호대, 1000호대 조직이 그예이다. 이동을 하든 멈추든 관계의 일정한 지속성을 유지하기 쉽다. 이러한 번호적 조직은 군대에서   있다. 

 

2)유목민과 

서양의 수학이 기하학을 모태로 하며,  동양의 수학은 산술을 기반으로 한다. 서양 사람은 0과 음수를 이해하기 어려웠고, 동양사람은 파이와 같은 무리수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영토를 소유하고 구획하는 정착민과 유목민들의  점과 선, 공간 개념이 근본적으로  달랐으며,  숫자를사용하는 방식 또한 달랐다. 유목민의 번호적 조직은 동양의 산술과 연결 시킬  있다.유목조직에 붙인 10호대 100호대  각각에 붙인 번호는 이름에 불과 하다. 축구 선수의 등번호와 같은 의미이다. 여기서 숫자의 크기를 비교하고 계산하는 것은 의미가 없으며,  숫자가  계산이나 측정의 수단이 아니라 운동의 수단이다. 매끄러운 공간을 움직이는 것은 숫자 그 자체다. 이런 점에서  패인 공간의 부동적인 기하학과 대립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런 수를 세는 라고 부른다. 반면 어떤 척도로서 비교되고 계산되는 , 측량에서 사용되는 수는 하나의 척도에 정확한 비례관계를 갖는 수는 세어진이다. 요컨대 유목민의 수는 암호화된 , 리듬적/방향적/자율적 이동적인 이다. 반면 국가장치에서 사용하는 수는 사람이나 영토에 부착된 영토적인 수고 그것을 통계적으로 계산하기 위한 수며, 사람들의 삶이나 움직임을 포착하고 통제하기 위해 코드화 기능을 수행하는 수다. 

 

3)  세는  특징 

 세는 수는 복합성과 산수적 복제 내지 이중화라는 두가지 특징이 있다. 세는 수는 언제나 수들의 복합체라는 점에서 복합적이고 복잡하다. 가령 주민 조직을 표시하는 10이나 100이란 수에 전투원의 비율, 예비와 저장의 역할, 사람/물건/동물의 보존을 표현하는 산수적 관계 등이 포함되어 있다. 다른 예로  유목민의 전투단위 인간-- 은  1x1x1=1 이라고 쓸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산수의 기본 단위는 배치의 단위 이다. 다음으로 산수적 복제 내지 이중화이다.  유목민의 조직에는 상이한 종류의 불균등하고 비대칭적인 두 개의 계열이 있다. 칭키스칸의 예에서 10 100 1000호등 각각의 수적 조직에는 지휘자가 있다. 10호장, 100호장, 100호장이 그들이다. 1000호장 이상이면 귀족으로 간주되었다. 이들을 '노얀'이라고 불렀다. 이와는 전혀다른 조직이 있었으며 일종의 친위대 내지 별동대 인데 개개인이 1000호장 보다 지위가 높았다. 노얀과 별동대의 긴장과 투쟁이 그들의 조직을 혈통적인 국가조직으로도, 제국적 관료제국가로도 만들지 않았다. 칭키스칸은 혈통적 조직에서 별동대의 병사나 간부들을 뽑기도 했지만 능력이 있다고 보이면 노예, 외국인, 투항자 등을 과감하게 별동대 병사로 등용했다. 탈영토화된 사람들로 자신을 재구성하는 한편 거꾸로 그렇게 탈영토화된 인물들을 적극 이용하여, 제국적인 법령, 문자들을 전혀 다른 배치, 전쟁기계의 배치 안에서 이용할  있었다. 

 

4)유목민과 역사 

유목민에게는 역사가 없다. 그들에게는 다만 자리가 있을 뿐이다. 몽골인 뿐만 아니라 북아메리카 인디언들도 역사가 없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들의 연대기는 가무의식 속에 놀아 들어 있다. 우리들의 역사는 책이 아니라 살아 있는사람들의 기억속에 기록되어 있다는 점에서 백인들의 역사와 달랐다.” 인디언은 역사가 정말 중요한 것들을 하나라도 드러내 보일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역사는 제국적 국가와 더불어 발생하며 자신이 이룩한 사건들을 결코 무화될  없는 어떤 것으로 만들고자 한다. 그것을 통해 위대함을 상기시키고 그 위대함에 다른 사람을 복속 시키고자 한다역사가 그저 순환적이고, 모든 것이 일정시간 이후 제자리로 되돌아 온다는 것을 뜻하면 무화되고 만다역사를 만든다는 것은 순환의 형식으로 무화되지 않는 시간 개념을 직선적인 시간 개념을 만드는 것이다. 새로운 삶의 방식을 구성하기 위하여 이전의 것을 내려놓고 떠나야 한다. 역사라는 이름의 관성에서벗어나 새로운 클리나멘을 그리는 것을 의미한다.  

 

 

8. 전쟁기계와 무기: 전쟁기계의 감응적 측면 

명제 7 “유목민의 실존은 정쟁기계의 무기를  감응으로 갖고 있다.”  감응(affect)이란 말은 스피노자의 <에티카>에서 사용했던 개념인데 정동 혹은 정서로  번역된다. 어떤 양태가 다른 양태의 촉발/변용에 응하여 갖게 되는 감정/정서이다 이런 감응에는 어떤 움직임이나 움직임을 야기하는 힘이 포함되어 있다. 감응으로 무기와 도구를 구분하고자 한다. 

 

1) 무기와 도구

무기와 도구의 차이를 다섯가지로 구분한다. 밖으로 던지는 것인가 안으로 던지는 것인가(방향), 속도인가중력인가(벡터), 자유행동을 모델로 하는가 노동을 모델로 하는가(모델), 보석인가 기호인가(표현), 감응인가 감정인가(정염 내지 욕망의 ) 이다.  

 

첫째 투척과 투입이다무기란 밖으로 던져지는 것으로 투척과 특권적 관계를 맺는다반면 도구는 안으로 던져지는 것이며 내향적이고 투입적이다. 던져지면 무기가 되고, 칼이나 창도 쥐고 사용하면 도구가   있다무기는 던져지는 것이 야기하는 감응과 결부 되어 있다. 도구는 정복하고 이용해야  저항에 맞부딪치는 반면 무기는 적을 공격하거나 반격하기 위한 것이다. 

 

둘째 속도와 중력이다무기와 도구는 각각 속도와 중력에 관련 되어 있다. 도구는 저항을 이겨야 하듯이 중력을 견디고 이겨야 내야 하는 노동이며 고통을 요구 한다. 무기는 속도를 발명한다속도가 관통하는 힘을 만들어 낸다. 만약 무기를 천천히 건네준다면 그건 운송이지 속도를 가진 무기도 아니고 전쟁 기계의 일부가 아니다. 하지만 매복 같이 속도에 반하는   현상도 전쟁에 포함 된다멈추고 움직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강밀한 속도를 응축하는 것이다. 중력이 운동을  방향(중력의 중심)으로 끌어들인다면 속도는 거기서 벗어나는 선을 그리는 클리나멘을 갖는 것이다중력에서 자유로운 힘과 방향을 갖는 (벡터)  갖는다. 

 

셋째 자유행동과 노동이다무기는 자유행동 모델에, 도구는 노동 모델에 연결되어 있다. 한점에서 다른 점으로의 선형적 치환은 도구의 상대적 운동(노동) 구성하고, 무기의 절대적 운동(자유행동) 구성하는 것은 소용돌이 꼴의 공간 점유다자유행동과 노동을 결정하는 것은 배치이다생존의 중력을 이기기 위한 공부는 노동이지만  자신이 좋아서 하는 공부는 중력의 저항과 고통의 성분이 없는 자유행동이다.  노동력이 화폐로 구매되고, 그 화폐를 통해서 생산 수단과 결합하는 그런 종류의 배치가 노동을 만들고 어떤 사물을 도구로 만드는 것이다. 

 

넷째 감응과 감정이다감응과 감정이 무기와 도구에, 전쟁기계의 배치와 노동기계의 배치에 상응한다. 감응은 움직이는 신체, 요소들 간의 속도와 속도의 조성에만 관계 된다정서의 급속한 방출, 반격인 반면에  감정은 항상 치환되고, 지체되며, 저항하는 정서다. 감응은 느끼는 사람보다는 느낌을 야기하는 것에 일차적으로 속한다. 감정은 감응을 가리고 보지 못하게 한다. 

 

다섯째 기호와 보석이다.  가지 상이한 배치에는 각기 상이한 표현의 체제가 있다. 노동의 체제나 도구에 상응하는 것이 기호라면, 전쟁기계나 무기에 상응하는 것은 보석이다. 노동이 있는 곳에는 국가장치에 의한 포획과 문자에 의한 행동의 기호화가 있다. 무기는 보석류와 본질적 관계를 갖는다. 이러한  보석이나 장식은 무기의 감응을 표시하는 표현적 특질을 갖는다. 

 

2)무기와 노동의 동맹

무기와 도구의 구별은 배치에 따른다. 무기와 도구가 새로운 배치들 속에 싸여 있다면 다른 동맹 관계에 돌입하게 된다. 전쟁기계를 재발명하는 것은 산업 또는 농업노동자들에게서  자주 일어난다. 배치를 달리함에따라 도구가 무기가 되거나   반대가 가능하다. 도구가 노동으로부터 자유행동으로 나아가는 분열적 취향, 무기가 평화의 수단으로, 평화 획득의 수단으로 전환되는 분열적 취향이 존재한다. 전쟁기계 개념 자체가 새로운 차원에서 국가장치의 외부를 발명하는 문제로 변형된다.  포연없는 전쟁 새로운 형식과 그에 상응하는 새로운 배치의 창안, 그리고  통신망 등에 의해 만들어진 새로운 공간에 달라붙어 그것을 매끄러운 공간으로 만드는 새로운 유목주의의 창안 등이 그것이다.  <우리의 말이 우리의 무기입니다>에서 치아파스의 사파티스타의 투쟁은 새로운 전쟁기계이다.  노동과 자유행동 사이에서 빌려온 것들은 항상 양방향으로 흐르며 투쟁은 더욱더 다양해진다.

 

9. 전쟁기계와 야금술 

1) 무기와 기계적 계통 

"유목민은 어떻게 자신의 무기를 발명하거나 찾아내는가 ?" 무기를 다루고 만드는 야금술사와 유목민의 관계에 대한  질문이다. 여기에서 제시하는 답이 바로 명제8이다.  명제8. 야금술은 본질적으로 유목주의와 필연적으로 합류하는 흐름을 구성한다. 이 부분에서 말하는 것은 크게 세가지이다. 첫째,  무기의 발명, 이용  배치와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기계적 계통'이라는 개념이 나온다. 둘째, 무기의 발명에 실질적인 주역을 담당하는 존재로서 야금술사의 고유성에 대한 것이다. 셋째, 야금술이 유목주의와 합류하는 흐름을 형성하는 것이다.

 

 유목민은 대포나 화기로 인해 패배했는가 ?   그것의 발명과 이용에 나설  없었는가 ? 그건 오직 국가장치만이    있는 경제적 투자를 함축하기 때문이다전쟁기계는 정의상 국가 장치의 외부고 부의 국가적인 포획과 집중화에 반하는 메커니즘이었다. 대규모 부의 포획과 집중은 전쟁기계라는 배치 안에서는 형성할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목민이 화기 이전에 사용했던  무기들은 어떻게 그들의 손에서 탁월하게 만들어지고 사용되었던가 ? 기병도는 진과 한의 제국에서 발명된 것이지만 유목민이 그것을 이해하고 재발명할 능력이 있었다. 말을 타고 사용하는 유목민의 배치에 더욱 적합하게 계열화   있었고, 이런 유에서 유목민에 의해 가장 탁월하고효과적으로 이용 되었다.  이런의미에서 유목적인 계통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계통이란 말은 전통적인 분류학에서  , , , , , , 계에서  표시하는 낱말이지만 여기서는 배치에 의해 구별되고 계열화되는 기계적 요소의 분류를 위한 개념이다. 형태의 동일성과 차이가 아니라 배치에 따른 감응들의 계열화에 의한 것이다. 퀴비에의 분류학은 생명의 기관들로 비교 분류하지만 여기서는 배치의 기계적 접속에 의해 이루어지며 그것에 따라 달라진다. 배치가 달라지면 얼마든지 다른 것과 연결되고갈라지고 합쳐지는 리좀적인 계통도 그리게 된다. 모든 계통을 하나로 묶는 것으로  단일한 기계적 계통 다양한 기계들에 공통된 물질성,  질료적 흐름의 공통성을 표시하는 일종의 일관성이다.

 

 기계적 계통이란 배치들의 분류적 계통이라기보다는 배치에 속한 요소의 분류적 계통이라는 점에서 일정한  계열화의 선을 따라 상이한 배치들을 넘나들면서  상이한 배치들에 속하게 되는 어던 특이성을, 기계적 요소의 질료적 흐름 말한다. 형태를 넘어서 획득되는 질료적 흐름의 단일성이다.  극한에서 만들어지는 기계적 계통을 금속이라는 물질성이라고 말한다.  사물성과 대비해서 물질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금속성의 질료적 흐름 때문이다. 각각의 기계적 계통도 고유한 질료적 결을 갖는다.  유물론의 물질개념과 구별되지만 동시에 어떤 고유한 결을 갖기에 의식이나 정신, 주관 같은 것으로 환원될  없는 외부성을 표시하는 것으로 이해   있다.  야금술사란 질료적 흐름을 따르는 자고 기계적 계통을 다르는 , 질료적 결을 따르 자라는 점에서 이동하는 내지 순회자라고 부른다. 

 

2) 야금술과 구멍 뚫린 공간

 야금술사의 고유성에 관한 것이다. 그들은 유목민과는 어떤 관계를 맺는가? 그들은 국가장치에 속하는 국가인도 아니고 전쟁기계에 속하는 유목민도 아니다. 국가 장치와 그것의 외부인 전쟁기계라는  가지 배치에대해서 말해왔고  양자의 이항적 대립을 지속해왔다. 야금술사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며 고유한 배치를 갖고 있다. 매끄러운 공간과  패인 공간과 구별되는 구멍 뚫린 공간, 많은 구멍이 있는 다공공간이다.  이런 의미에서 야금술사를 이주민이라고 부른다. 야금술은 변형의 기술이고, 물질성을 통해 어떤 형식화된재료의 문턱을 넘는 기술이며, 근본적으로 물질성의 흐름 자체에 대한 사유라고  수있다.  이러한 사유가유목적 과학의 특징이며  다른 공간을 갖고 다른 본성의 삶을 살고 있는 야금술사와 유목민의 합류지점이라고    있다.  야금술사가 국가장치에 포섭되는 것은 그들의 식량이나 국가장치의 농업적 스톡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포섭을 근거로 야금술사의 삶의 방식이나 사유 방식이  국가장치와 어떤 동형성을 갖는다고 가정할  없다. 야금술사는 흐름의 사유, 변형의 사유, 비유기적인 삶의 방식의 공통성이라는 측면에서야금술과 유목주의는 합류하는 흐름을 형성한다. 

 

10. 전쟁기계와 전쟁 

명제 9 (일정한 조건 아래서) 전쟁과 전투가 필연적으로 야기될  있다고 하더라도, 전쟁이 반드시 전투를 자신의 목표로 하지는 않으며,  전쟁기계 또한 반드시 전쟁을 자신의 목표로 하지 않는다.  저자들은 크게  질문을 던진다. “전투는 전쟁의 목표인가? 전쟁은 전쟁기계의 목표인가? 어느 정도까지 전쟁기계는 국가장치의 목표 되는가?”

 

1) 전투와 전쟁 

 전투와 전쟁의 관계에 있어서 전투를 하려는 것이 반드시 공격적인 것은 아니며, 전투를 피하려는 것이  항상 방어적인 것은 아니다.  전투는 전쟁과 동일한 것이 아니며  전투가 전재의 목표는 결코  아니다.  병력의이동이나  배치의 변경만으로도 공격과 동일한 효과를 가지기도 한다. -전투도 전투만큼이나 공격일  있다는 것이다. 전투와 비전투 모두가 전쟁의 목표라는 것이고, 이는 공격적인 것과 방어적인 , 혹은 본래적인 전쟁과 게릴라전이라는 개념과 일치 하지 않는다. 

 

2) 전쟁과 전쟁기계

 전쟁이 적의 무력을 절멸시키거나 굴복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전쟁기계는 그런 종류의 전쟁을 반드시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전쟁기계란 매끄러운 공간의 구성적 요소고  공간의 점유며  공간안에서 자리는 바꾸는 것이고, 그에 대응하는 민중의 구성때문이다. 이를 노모스라고 명명합니다. 이러한 목적만으로는 전쟁이 발생한 이유도, 전투가 발생할 이유도 전혀 없습니다.  전쟁기계의 목표가  가로 막히고 홈을 파려는 국가 장치와 충돌하기 때문에  전쟁으로 귀결된다. 

 

 <수호지>에서  '양산박'은 전국 각지에서 국가인의 핍박과 억압에 쫓겨 탈영토화의 선을 그리는 호걸들이 모여들어 강력한 전쟁기계를 형성하지만 이들 또한 전쟁을 목표로 하지는 않는다. 이들의  목적은 국가인의 핍박과 억압이 통하지 않는 공간을 만들고 거기서 자유롭게 사는 것이다. '전쟁'은 가능한 한 피해야  것이다. 국가장치의 억압과 출동을  피하지 않으며 기꺼이 그것과 싸우려 하지 않는다면 전쟁기계로서 존립할 수 없다.  전쟁기계가 전쟁이 되는 것은  지점에서다”.  결국 전쟁기계에게 전쟁은 목표가 아니지만 필연적인 것이다. 전쟁은 전쟁기계의 바깥(국가장치와의 관계)에서 추가된 것이고,  그런 만큼 전쟁기계에 대해 외적인 것이고 그것의 과잉이지만 전쟁기계의 불가피한 기능을 추가하는 보충이고,  자신을 통해 전쟁기계를 표상하게 하는 기능을 한다. 

 

3) 전쟁기계의 국가적 영유 

국가 장치는 어떤 식으로 전쟁기계를 목표 하는가?  국가는 어떻게 전쟁기계를 영유할 것인가,   어떻게그것의 규모, 지배, 목적을 자기 자신을 위해 구성할 것인가?  그리고 어떤 위험을 감수할 것인가 ?이 문제에 접근하기 위해  전쟁기계가 변성되는 세가지 계기를 명확히 한다.  첫째, 전쟁기계는 유목민의 발명품이고,  자체로는 전쟁을 목표로 삼지 않는다. 둘째, 국가가 전쟁기계를 영유하면 전쟁기계의 본성과 기능이 완전히 달라진다.  셋째, 국가장치는 전쟁기계를 내적인 요소로 하지 않는다. 국가장치가 전쟁기계를 영유한다면 전쟁기계에 부과할 목표는  일차적 목표가 아니라  그대로 전쟁이 된다. 

 

전쟁기계는 국가장치를 영유할 수있는가 ?  국가들을 정복한 유목민은 절멸시켜 매끄러운 공간으로 되돌려 놓을 것인가?  국가장치를 존속시켜 직접 창취할 것인가 하는  망설임에 직면하게 된다. 하지만 칭기스칸 대법령은 몽골인들에게 정착적인 생활방식을 택하거나 도시에 거주하는것을 금 지하였다.  "정착민 지역의 행정에 개입하지 말것, 특별히 지정된 경우를 제외하고는 세금을 징수하지  , 일정한 목축 이동로를 따라 옮겨 다니며 초원과 산간지에 살지, 결코 가축을 데리고 경작지를 짓밟지  " 결정했다. 이는 절멸노선에 대비 온건 노선이지만 국가 장치와 정착에 대한 확고한 선을그으려는 것이다. 정착민의 생활방식과의 공존을 생각하면서 한편으로 독립성을 지속하려고 했다. 특히 세금을징수하지 말라는 규정을 통해  정착민의 세계에 깊이 관여하지 않고 그들 스스로 포획장치라는 새로운 배치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으려고 했다. 이런 식으로 수많은 국가 장치를지배하고 영유 하는 거대한 제국을 이루면서도 새로운 정치적 국가장치를 구성하지 않고 전쟁기계로 계속해서 남을  있었다. 이런 조치는 정착민 제국의 일부가 되어 버린 쿠빌라이와 대비 된다. 

 

4)전쟁기계외 전쟁의 양상 변화 

전쟁이 실제로 나타나는 것은 오직 전쟁기계가 국가 형태와 대립하는 가운데이다. 국가 편에서는 전쟁기계를 영유하고  전쟁기계에 전쟁을 목표로 하게 만들 기회를 노린다.  국가에 의해 영유됨으로써 전쟁을  분석적 목표로 하게  전쟁기계가, 국가의 정치적 목적마저 자신의 목표아래  종속시킴으로써 오직 전쟁 자체만을 목적으로 하는 무제한적 과정을 야기한다.  이러한 사례를 나치나, 파시즘의 경우메 발견한다.  

 

계통과의 관계속에서 일관성의 구도, 창조적인 탈주선, 치환의 매끄러운 공간을 그려내는 한에서는 이데올로기적’,  과학적 혹은 예술적 운동은 전쟁기계 일수 있다. 겔릴라전, 소수자전쟁, 혁명전쟁  본질에 부합하다면 대리/보충 위해 전쟁을 더욱  필요한 목표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오직 자신들이  다른 무언가를 동시에 창조하는 조건에서만 전쟁을 벌일  있다는 대리/보층 관계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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