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의 저작을 읽다 보면 내용만큼이나 문체가 눈에 들어온다. 어떤 책에서는 비교적 논리적으로 논의를 전개하다가, 어떤 책에서는 짧은 문장들이 파편처럼 이어진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이르면 철학책이라기보다 시나 문학 작품을 읽는 듯한 느낌까지 든다.

 

처음에는 이것을 단순히 니체 특유의 글쓰기 취향이라고 생각했다. 니체를 읽다 보니 조금 다르게 보였다. 니체에게 문체는 생각을 담는 그릇이 아니라, 철학적 과제를 수행하는 방법 그 자체였다. 무엇을 생각하는지가 달라지면, 그것을 어떻게 말할 것인가도 달라져야 했다.그래서 니체의 철학적 변화는 내용의 변화이면서 동시에 문체의 변화였다.

 

문체에도 의지가 있다

 

보통 우리는 철학의 내용을 먼저 생각한다. 어떤 철학자가 무엇을 주장했는가, 어떤 개념을 만들었는가, 어떤 논리로 그것을 설명했는가를 본다. 문체는 그다음 문제처럼 여긴다. 같은 생각을 딱딱하게 쓸 수도 있고 쉽게 쓸 수도 있으며, 그것은 표현의 차이일 뿐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니체에게는 내용과 표현이 그렇게 쉽게 분리되지 않는다. 이를 “문체에도 의지가 있다”고 표현한다.

 

어떤 문체를 선택한다는 것은 단순히 글을 예쁘게 쓰는 문제가 아니다. 그 문체를 통해 무엇을 유지하고, 무엇을 흔들며, 무엇을 새롭게 만들어낼 것인가가 이미 결정되기 때문이다. 니체의 철학적 연대와 문체를 연결하면 흥미로운 구조가 나타난다.  청년 니체 — 논리적 문체, 이행기 니체 — 아포리즘, 성숙기 니체 — 시와 산문시 이것은 앞서 살펴본 낙타, 사자, 어린아이의 변신과도 겹친다.

 

낙타의 문체 — 논리적으로 말하다

 

청년 니체의 대표적인 저작은 『비극의 탄생』과 『반시대적 고찰』이다.  이 시기의 니체를 기존 철학과 가치에 아직 깊이 의존하고 있는 낙타의 시대로 본다. 청년 니체는 쇼펜하우어와 바그너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었고, 그들의 철학과 예술을 통해 자신의 문제를 표현했다. 그래서 표현 방식 역시 비교적 기존 철학의 형식을 따른다. 하나의 주제를 중심으로 논의를 집중시키고, 일정한 결론을 향해 나아가는 방식이다.

 

말하자면 기존 철학의 언어 안에서 기존 철학의 문제를 다루는 시기 였던 셈이다. 물론 『비극의 탄생』이 단순히 전통적인 논문 형식이라고 할 수는 없다. 니체의 문체는 이때부터 이미 독특하다.  중요한 것은 상대적인 차이다. 이후의 니체와 비교하면 아직 하나의 논지를 중심으로 독자를 이끌어가는 방식이 강하게 남아 있다. 낙타가 짐을 짊어지듯, 청년 니체는 기존 철학의 내용뿐 아니라 그 표현 형식도 상당 부분 짊어진다.

 

사자의 문체 — 아포리즘으로 흔들다

 

바그너와 결별하고 기존 가치에 의문을 던지기 시작하면서 니체의 문체도 달라진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아침놀』, 『즐거운 학문』에서 두드러지는 것이 아포리즘이다. 아포리즘은 짧고 압축된 문장이다. 하나의 장대한 논증을 따라가기보다, 짧은 생각들이 파편처럼 놓인다. 이를 프래그먼트식 서술이라고 한다. 이 방식의 중요한 특징은 각 문장이 하나의 결론으로 수렴하기보다 여러 방향으로 의미를 발산한다는 것이다. 왜 하필 이 시기에 아포리즘이 필요했을까.

 

니체의 철학적 과제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이행기의 니체에게 중요한 것은 아직 자기만의 완성된 가치를 선언하는 일이 아니었다. 먼저 해야 할 일은 지금까지 절대적이라고 여겨졌던 가치에 의문을 던지는 것이었다.

 

“왜 이것이 진리인가.”

“왜 이것이 선인가.”

“왜 우리는 이것을 당연하다고 믿는가.”

 

기존 가치의 고정성을 흔드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렇다면 하나의 전제에서 하나의 결론으로 나아가는 안정된 논리적 형식보다, 짧은 문장들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독자를 밀어내는 아포리즘이 더 적합했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아포리즘은 단순히 짧게 쓰는 기술이 아니다. 아포리즘은 가치의 고정성을 해체하는 철학적 기술이다.

 

산봉우리 사이를 건너는 독자

 

니체는 아포리즘을 산봉우리에 비유한다. 산맥에서 가장 짧은 길은 봉우리와 봉우리를 잇는 길이다. 하지만 그 길을 건너려면 긴 다리가 필요하다. 이 비유를 생각하면 니체의 글이 왜 어렵게 느껴지는지도 조금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친절하게 모든 중간 과정을 설명하지 않는다. 하나의 봉우리를 보여주고, 조금 떨어진 곳에 다른 봉우리를 놓는다. 그 사이를 잇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보통 논리적인 글은 전제 → 설명 → 논증 → 결론 의 길을 만들어준다. 하지만 아포리즘은 문장 → 간격 → 또 다른 문장을 보여준다. 그 간격 안에서 독자가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니체의 아포리즘은 단순히 이해해야 할 문장이 아니라 사유를 시작하게 만드는 문장에 가깝다.

 

해독이 아니라 해석

 

니체는 『도덕의 계보』 서문에서 아포리즘은 단순히 해독되는 것이 아니며, 그때부터 비로소 해석이 시작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역시 니체 독서에서 중요한 차이를 만든다. 해독에는 보통 하나의 정답이 있다. 암호를 제대로 풀면 원래의 의미가 나온다. 그러나 해석은 다르다. 같은 문장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는가에 따라 다른 의미가 열릴 수 있다.

 

예를 들어 『차라투스트라』의 유명한 문장, "춤추는 별 하나를 탄생시키기 위해 사람은 자신 속에 혼돈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를 읽는다고 해보자.  “혼돈이 창조의 조건이다.” 고 정리하면 문장의 기본적인 의미는 잡을 수 있다. 하지만 거기서 끝나면 니체의 문장을 너무 빨리 닫아버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왜 별인가 ? 왜 별은 춤추는가 ?  왜 창조 이전에 혼돈이 필요한가 ? 내가 삶에서 없애려고 했던 불안정성 가운데 일부는 오히려 새로운 것을 만드는 조건일 수 있는가 ?  이 질문들이 시작되는 순간 아포리즘은 설명의 대상에서 사유의 출발점으로 바뀐다.

 

 그렇다면 아무렇게나 해석해도 되는가

 

여기에서 최상욱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메타포로 읽기』가 도움이 된다. 이 책은 니체의 글쓰기에서 아포리즘뿐 아니라 메타포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를 보여준다. 『차라투스트라』에는 태양, 동굴, 독수리와 뱀, 바다, 사막, 다리, 밧줄, 춤 같은 이미지가 끊임없이 등장한다. 이것들은 단순히 어려운 개념을 쉽게 설명하기 위한 장식이 아니다. 메타포 자체가 니체가 생각하는 방식과 관계되어 있다.

 

한 가지 개념으로 세계를 고정하지 않고, 하나의 대상을 여러 이미지와 관계 속에서 바라보게 한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여러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과 아무 해석이나 가능하다는 것은 다르다는 점이다. 내가 어떤 메타포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했다면, 그것이 작품 전체의 다른 장면들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다시 확인할 필요가 있다. 태양이라는 이미지가 한 번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 곳곳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사막과 산과 동굴이 어떤 관계를 맺는지 살펴봐야 한다. 그러므로 창조적 해석에는 자유와 함께 텍스트로 되돌아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어린아이의 문체 — 시로 새로운 가치를 만들다

 

성숙기의 니체에게 이르면 문체는 다시 달라진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와 『디오니소스 송가』에서 니체는 본격적으로 시적 언어를 사용한다. 왜 아포리즘에서 시로 이동했을까. 철학적 과제의 변화와 연결한다. 이행기의 니체에게 중요한 것이 기존 가치의 해체였다면, 성숙기의 니체에게 중요한 것은 새로운 가치의 생성이었다. 사자는 “아니오”라고 말한다. 어린아이는 그다음 질문을 던진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만들 것인가.” 새로운 가치의 창조를 말하면서 표현 방식은 그대로 기존 철학의 언어만을 따를 수 있었을까. 니체에게는 새로운 철학을 위해 새로운 언어와 새로운 리듬이 필요했던 것 같다.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논문이 되지 않았다. 산문시가 되었다.

 

왜 하필 시였을까

 

시는 논리적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지 않는다. 하나의 단어가 여러 이미지를 불러오고, 문장의 리듬이 뜻만큼 중요한 역할을 한다. 어떤 문장은 이해하기 전에 먼저 몸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차라투스트라』에서 니체는 끊임없이 춤과 노래, 태양과 심연, 높음과 낮음, 가벼움과 무거움을 이야기한다.

 

만약 이것을 모두 철학적 정의와 논증으로 바꾼다면 같은 책이 될까. 아마 상당히 다른 책이 될 것이다.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존재다.” 라는 명제와 “인간은 짐승과 위버멘쉬 사이에 매어진 하나의 밧줄이다.” 라는 문장은 같은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후자의 문장을 읽으면 단순히 개념을 이해하는 것 이상으로 불안정함과 위험, 이동과 가능성의 이미지가 한꺼번에 들어온다. 철학적 생각이 이미지와 결합하면서 독자에게 다른 종류의 경험을 만들어낸다. 바로 이 지점에서 시는 새로운 가치창조의 철학과 만난다.

 

니체에게 메타포는 장식이 아니라 사유다

 

『메타포로 읽기』를 함께 보면서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메타포를 단순히 개념을 설명하기 위한 비유로 볼 필요가 없다는 점이었다. 우리는 보통 먼저 개념이 있고, 그것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 비유가 따라온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차라투스트라』에서는 순서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낙타와 사자와 어린아이를 먼저 만나고 나서 우리는 정신의 변신을 생각한다. 다리와 밧줄을 만나면서 인간이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건너가는 존재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춤을 보면서 가벼움과 긍정을 생각하게 된다. 즉 메타포가 이미 생각을 만들어낸다. 메타포는 이미 만들어진 생각을 꾸미는 장식이 아니라, 새로운 생각이 발생하는 장소가 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니체의 문체와 철학은 더욱 분리하기 어려워진다.

 

문체 자체가 사유한다

 

“문체는 단지 사유의 표현이 아니라, 문체 자체가 사유한다.” 니체의 철학적 변신을 따라가 보면 이 말의 의미가 조금 보인다. 기존 철학에 기대고 있을 때는 비교적 논리적으로 말한다. 기존 가치의 절대성을 흔들 때는 파편적인 아포리즘을 사용한다. 그리고 새로운 가치를 만들려 할 때는 시와 메타포를 통해 새로운 감각과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그래서 세 시기의 관계를 이렇게 정리해볼 수 있을 것 같다. 낙타 — 수용 — 논리, 사자 — 해체 — 아포리즘, 어린아이 — 생성 — 시.  물론 실제 니체의 저작들이 이 세 가지 문체로 완벽하게 나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한 시기에도 여러 표현 방식이 함께 나타난다. 중요한 것은 이런 구분을 정확한 문학사적 분류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니체의 철학적 과제와 글쓰기 방식이 어떻게 서로 영향을 주었는지를 이해하는 틀로 사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

 

이제 『차라투스트라』를 읽으면서 질문을 하나 더 붙여보려고 한다. 예전에는 주로 이렇게 물었다. “이 문장은 무슨 뜻인가.” 앞으로는 그 뒤에 하나를 더 묻고 싶다. “왜 니체는 이 생각을 하필 이런 식으로 말했을까.” 왜 낙타이고 사자인가 ?  왜 어린아이인가 ? 왜 다리인가 ? 왜 춤이고, 왜 태양이며, 왜 심연인가 ?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시 묻는다. “이 표현을 다른 말로 바꾸었을 때 사라지는 것은 무엇인가.” 아마 그 사라지는 것 안에 니체의 문체가 가진 철학적 힘이 있을 것이다.

 

내용이 바뀌면 표현도 바뀌어야 하는가

 

니체의 문체 변화를 살펴보다 보니 철학을 넘어 글쓰기 자체에 대한 질문도 생긴다. 새로운 생각을 한다면서 늘 익숙한 표현만 사용한다면 정말 새로운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반대로 표현 방식이 달라지면 생각하는 방식도 달라질 수 있을까. 니체에게는 아마 둘을 분리하기 어려웠던 것 같다. 그는 기존 가치를 흔들기 위해 글의 구조를 흔들었고, 새로운 가치를 만들기 위해 철학과 시의 경계까지 흔들었다. 그래서 나는 니체의 문체를 이렇게 이해하게 되었다.

 

니체에게 문체는 철학의 포장이 아니라 철학의 실행이다. 논리는 생각을 집중시키고, 아포리즘은 고정된 가치를 흔들며, 시와 메타포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차라투스트라』가 유난히 어렵게 느껴지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다. 그 책은 우리에게 이미 정리된 생각을 전달하려는 책이 아니라, 독자 안에서 새로운 생각이 일어나기를 요구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앞선 글에서 니체가 바그너와 결별하고 질병과 고독을 지나면서 어떻게 자기 자신의 사유로 돌아오기 시작했는지를 살펴보았다. 청년 니체에게 바그너와 쇼펜하우어는 자신이 짊어져야 할 거대한 세계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 니체는 그 세계와 결별한다. 그 뒤에는 곧바로 새로운 세계가 나타나지 않았다. 오히려 길을 잃었다.

 

질병과 건강 사이를 오갔고, 교수직을 떠났으며, 이전까지 자신을 지탱하던 가치와 생활 방식도 무너졌다. 그러나 바로 그 공백 속에서 니체는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기 시작한다. 타인의 철학을 통해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 대신 자기 몸과 경험, 자기 감각을 통해 사유하기 시작한다.

낙타가 사자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사자는 어떻게 어린아이가 되었을까.기존의 가치를 비판하는 데서 벗어나, 니체는 언제부터 자기 자신의 가치를 만들기 시작했을까. 그 결정적인 계기를 영원회귀의 발견에서 찾는다.

 

1881년, 하나의 생각이 찾아오다

 

1881년 여름 니체는 스위스 실스마리아에 머물고 있었다.  니체가 실바플라나 호수 주변을 걷다가 어느 거대한 바위 근처에서 문득 영원회귀의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이 사건을 단순히 새로운 개념 하나를 발견한 순간으로 보기에는 부족한 것 같다.  영원회귀는 니체가 기존 철학을 비판하는 사람에서 자기만의 철학을 만들어가는 사람으로 변하는 전환점이기 때문이다. 그전까지 니체는 끊임없이 의심했다. 도덕을 의심하고, 종교를 의심하고, 진리를 의심하고, 자유의지를 의심하고,자신이 한때 따랐던 바그너와 쇼펜하우어까지 의심했다.

 

사자는 잘 싸웠다. 하지만 싸움만으로는 새로운 세계가 만들어지지 않는다.언젠가는 질문이 달라져야 한다.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에서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긍정할 것인가?” 로. 영원회귀는 바로 이 두 질문 사이에 놓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즐거운 학문』, 새로운 문제들이 시작되는 곳

 

영원회귀의 영감을 얻은 다음 해인 1882년에 『즐거운 학문』이 나온다.  이 책을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중요한 전 단계로 읽는다. 그 이유를 알고 나니 흥미롭다. 『즐거운 학문』에는 이후 『차라투스트라』에서 본격적으로 전개될 문제들이 이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신의 죽음. 영원회귀. 새로운 긍정. 그리고 지금까지의 인간을 넘어서는 새로운 삶의 가능성.  『차라투스트라』의 머리말 첫 부분이 『즐거운 학문』 4부 마지막 부분과 이어진다는 점도 강조한다.

 

이렇게 보면 『즐거운 학문』과 『차라투스트라』 사이에는 단절보다 연속성이 있다. 나는 이를 이렇게 이해하고 싶다. 『즐거운 학문』은 질문이 생겨나는 책이고, 『차라투스트라』는 그 질문이 하나의 삶과 서사가 되는 책이다.

 

왜 철학자는 차라투스트라라는 인물을 필요로 했을까

 

니체는 영원회귀를 논문이나 철학적 체계로 설명하는 대신 차라투스트라라는 인물을 만들어낸다. 이 점이 새삼 흥미롭다. 왜 직접 말하지 않았을까. 왜 철학적 논증보다 이야기와 시, 비유와 상징을 택했을까.

 

산과 동굴, 태양, 독수리와 뱀, 낙타와 사자와 어린아이, 춤과 심연. 『차라투스트라』에는 철학책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많은 이미지가 등장한다. 아마 니체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개념을 설명하는 것만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사상을 살아내는 인물이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차라투스트라는 처음부터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완성된 현자가 아니다.

 

사람들을 찾아가고, 실패하고, 고독해지고, 다시 산으로 돌아간다. 자기가 전한 말을 다른 사람들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험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도 자신의 가장 무거운 생각을 받아들이기 위해 변해간다.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니체 철학의 단순한 대변인이라기보다, 니체의 철학이 하나의 인물 안에서 시험되고 변형되는 장소 처럼 보인다.

 

영원회귀는 왜 그렇게 무거운 생각인가

 

영원회귀를 처음 접하면 단순한 질문처럼 보인다. “지금 이 삶이 그대로 영원히 반복된다면?” 하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상당히 무겁다. 좋았던 일만 반복되는 것이 아니다. 실패와 후회, 고통과 우연, 헤어짐과 상실까지도 모두 반복된다. 그럼에도 “그래도 나는 이 삶을 다시 원한다.” 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이렇게 읽으면 영원회귀는 단순한 우주론이라기보다 삶을 향한 극단적인 질문이 된다. 삶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만 삭제할 수 없다.

내가 되고 싶은 나만 선택할 수도 없다. 바로 이 삶 전체를 다시 원할 수 있는가. 그 질문 앞에서 니체의 다른 개념들이 다시 연결된다.

 

위버멘쉬는 지금의 인간을 넘어서는 존재이고, 힘에의 의지는 새로운 가치와 삶을 생성하는 힘이며, 영원회귀는 그렇게 살아가는 삶을 끝까지 긍정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 그리고 마지막에 아모르파티가  온다.

 

동일한 것이 돌아오는가, 차이가 돌아오는가

 

흥미로웠던 부분은 영원회귀를 차이와 생성의 관점에서 읽는 해석이었다. 보통 영원회귀라고 하면 A → A → A → A 처럼 똑같은 것이 반복되는 모습을 떠올린다. 하지만 강의에서는 반복 속에서 기존의 자아가 해체되고 계속 다른 자아가 생성되는 것으로도 읽는다. 즉, A → B → C → D 의 과정이다.  이때 반복되는 것은 똑같은 결과가 아니라 생성하고 변화하는 힘 자체다. 이 해석에는 들뢰즈의 영향이 강하게 들어 있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 니체를 읽으면서 이 둘을 구분해 보려고 한다.

 

하나는 “이 삶이 그대로 돌아와도 다시 원할 수 있는가?” 라는 니체의 실존적 질문. 다른 하나는 “동일한 나를 붙잡지 않고 계속 차이를 생성할 수 있는가?”라는 들뢰즈적 해석. 당장은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기보다 두 질문을 함께 가지고 가는 것이 더 흥미로울 것 같다.

 

니체 자신이 된다는 것

 

성숙기의 니체를 단순히 ‘후기 니체’라고 부르지 않고 ‘니체 자신’의 시대라고 한다. 처음에는 조금 과장된 표현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흐름을 따라가 보면 이해된다. 청년 니체는 바그너와 쇼펜하우어를 통해 말했다. 이행기의 니체는 그들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싸웠다.

그리고 성숙기의 니체는 마침내 자기만의 질문과 언어를 만들어낸다.

 

이때 등장하는 것이 위버멘쉬, 힘에의 의지, 영원회귀, 아모르파티다. 니체가 처음부터 니체였던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의 철학을 통과하고,

그 철학과 싸우고, 길을 잃고, 자기 몸이 무너지는 시간을 겪고, 그 뒤에야 자기만의 철학적 질문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성숙기의 니체를 ‘어린아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조금씩 이해된다.

 

어린아이는 아무것도 모르는 존재가 아니다

 

『차라투스트라』의 세 가지 변신에서 마지막은 어린아이다. 처음에는 이상했다. 낙타에서 사자가 되었는데, 왜 더 강한 존재가 아니라 어린아이로 변하는가. 하지만 이제는 조금 다르게 보인다.  어린아이는 처음의 어린아이가 아니다. 이미 무거운 짐을 짊어져 보았고, 그 짐과 싸워보았으며, 기존의 세계가 무너지는 것도 경험한 뒤의 어린아이다. 그래서 나는 이것을 두 번째 순진함이라고 부르고 싶다.

 

아무것도 몰라서 가벼운 것이 아니라, 충분히 알고, 충분히 짊어지고, 충분히 부정한 뒤에 다시 가벼워진 상태. 사자는 여전히 적과 싸운다.

그러나 어린아이는 더 이상 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자기가 살아갈 놀이를 만들면 된다. 그래서 사자는 자유를 얻고, 어린아이는 자유를 사용한다. 라고 표현해도 좋을 것 같다.

 

『차라투스트라』를 중심으로 니체의 책들을 다시 보게 되다

 

니체의 저작들을 『차라투스트라』를 중심으로 재배치한다. 그 틀은 상당히 인상적이다. 『차라투스트라』 이전의 책들은 『차라투스트라』를 준비하는 과정이고, 『차라투스트라』 이후의 책들은 그 안에서 제기된 문제들을 다시 해석하고 전개하는 과정으로 보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흐름은 대략 이렇다.

 

『즐거운 학문』 → 문제의 발견,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문제를 서사와 비유, 상징으로 표현,  『선악의 저편』·『도덕의 계보』

→ 그 문제를 좀 더 산문적이고 분석적인 방식으로 전개 한다.  물론 『선악의 저편』이나 『도덕의 계보』를 단순히 『차라투스트라』의 해설서라고만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각각 독립적인 문제와 논증을 가진 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니체의 사상 전체를 처음 읽는 입장에서는 이 재구성이 꽤 유용하다. 흩어져 있던 책들이 하나의 흐름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 이전과 이후

 

이렇게 보면 니체의 철학적 생애도 하나의 긴 변신처럼 보인다. 『비극의 탄생』의 니체 → 아직 바그너와 쇼펜하우어의 영향 속에서 말한다.,『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아침놀』의 니체 → 기존 가치로부터 거리를 만들고 비판한다. 『즐거운 학문』의 니체 → 새로운 문제를 발견하기 시작한다. 『차라투스트라』의 니체 → 자기 고유의 철학적 세계를 창조한다. 『선악의 저편』·『도덕의 계보』의 니체 → 그 세계를 다른 언어로 다시 분석하고 전개한다. 그러니 『차라투스트라』가 니체 철학의 가운데 놓이는 이유는 단지 유명한 대표작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 책을 전후로 니체의 질문 방식 자체가 달라진다. 비판하는 철학자가 창조하는 철학자로 변한다.

 

마지막 해의 니체

 

1888년을 니체 철학의 마지막 폭발처럼 설명한다. 니체는 오랫동안 구상했던 『힘에의 의지』라는 대규모 저작 계획을 포기하고, 짧은 기간 동안 여러 후기 저작을 집중적으로 써낸다. 『우상의 황혼』, 『안티크리스트』, 『바그너의 경우』, 『니체 대 바그너』, 『이 사람을 보라』 등이다. 젊은 니체는 바그너라는 거대한 예술적 프로젝트 속에서 자기 사상을 찾으려 했다. 그러나 마지막의 니체는 하나의 거대한 철학 체계를 완성하기보다 여러 형식과 문체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쏟아낸다. 정교한 하나의 체계보다 끊임없이 다른 방식으로 말하는 철학이다. 이것 역시 ‘어린아이의 생성’이라는 이미지와 묘하게 겹친다.

 

니체를 읽으면서 생긴 하나의 질문

 

니체의 생애를 낙타, 사자, 어린아이로 따라오면서 나에게 가장 오래 남은 것은 특정 개념보다 하나의 질문이다. 나는 남이 만들어놓은 질문에 답하면서 살고 있는가, 아니면 내 질문을 만들어가고 있는가. 낙타에게는 이미 질문이 주어져 있다. “이 짐을 잘 짊어질 수 있는가.” 사자는 그 질문을 거부한다. “나는 왜 이 짐을 져야 하는가.” 하지만 어린아이는 질문 자체를 바꾼다. “나는 여기서 무엇을 만들어볼까.”

 

이 차이가 큰 것 같다. 우리는 오랫동안 사회가 만들어준 질문에 답하면서 산다. 좋은 학교에 갈 수 있는가. 좋은 직장을 얻을 수 있는가.

더 많이 가질 수 있는가.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가. 물론 이런 질문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물어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질문 자체가 정말 나의 질문인가. 니체가 자기 철학을 만들었다는 것은 어쩌면 자기만의 답을 만든 것 이전에 자기만의 질문을 발견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차라투스트라』를 읽기 시작한 이유

 

처음에는 니체의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고 싶어서 『차라투스트라』를 읽기 시작했다. 신의 죽음, 위버멘쉬, 힘에의 의지, 영원회귀, 아모르파티. 읽어 가면서  관심이 조금 달라졌다. 니체가 무엇을 주장했는가 못지않게,그가 어떻게 자기 생각에 도달했는가  흥미로워졌다.

 

니체도 처음부터 자기 철학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누군가에게 깊이 영향을 받았고, 그 영향에서 벗어나기 위해 싸웠고, 그 과정에서 길을 잃었으며, 질병과 고독 속에서 자기 자신의 감각과 생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마침내 자기만의 문제를 만들어냈다. 그 과정 자체가 『차라투스트라』가 말하는 자기극복과 닮아 있다.

 

어쩌면 우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처음에는 다른 사람에게 배운 가치로 살아간다. 그것을 충분히 짊어지고, 어느 순간에는 의심하고,

필요하면 그것과 결별하고, 그 과정에서 잠시 길을 잃기도 한다. 그리고 아주 조금씩 자기 질문과 자기 삶의 방식을 만들어간다.

그러니 자기극복은 더 강한 사람이 되는 일만은 아닐 것이다. 한때의 나를 완성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지금의 나를 최종적인 나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그것이 니체를 읽으며 내가 이해하게 된 자기극복에 가장 가까운 말인지도 모르겠다.

『차라투스트라』의 어린아이는 사막을 없애지 않는다. 사막에서 놀기 시작한다. 삶의 모든 조건을 내 마음대로 바꿀 수는 없더라도, 그 조건과 다른 관계를 만들고 그 안에서 새로운 것을 시작할 수는 있다. 그래서 이 연작의 마지막에는 니체의 답보다 하나의 질문을 남겨두고 싶다.

 

나는 지금 무엇을 짊어지고 있는가.

무엇으로부터 벗어나려 하는가.

그리고 그 자유로 무엇을 만들어가고 싶은가.

 

아마 『차라투스트라』를 읽는 동안 이 질문은 계속 조금씩 달라질 것이다.

 

 

길을 잃은 뒤에야 자기 길이 시작되었다 앞선 글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세 가지 변신을 따라가 보았다.

 

낙타는 짊어지고,사자는 거부하며, 어린아이는 창조한다.  그리고 이 변신을 니체 자신의 철학적 생애와 겹쳐 보았다.청년 니체는 쇼펜하우어와 바그너를 짊어진 낙타였고, 이행기의 니체는 자신이 의존했던 가치와 대결하는 사자가 되었으며, 성숙기의 니체는 마침내 자기 철학을 창조하는 어린아이가 된다. 그런데 이 변화는  개념을 바꾸는 식으로 일어나지 않았다. 니체에게 첫 번째 큰 변신은 바그너와의 결별, 그리고 그 뒤를 따라온 질병과 길 잃음을 통과하며 일어났다. 니체는 자신을 지탱하던 것이 무너진 뒤에야 비로소 자기 자신에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청년 니체에게 바그너는 단순한 음악가가 아니었다

 

25세의 니체는 바젤대학 문헌학 교수가 된다. 그리고 리하르트 바그너를 만난다. 당시 니체는 바그너의 음악을 좋아했고, 두 사람 모두 쇼펜하우어 철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강의에서는 30년 가까운 나이 차이가 있었던 두 사람의 관계를 사상적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넘어 상당히 가까운 관계로 설명한다.

 

청년 니체에게 바그너는 단순히 좋아하는 음악가가 아니었다.바그너의 예술 안에서 당대의 낡은 문화를 넘어설 새로운 가능성을 본 것이다.『비극의 탄생』에서 니체는 예술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예술은 삶의 장식이 아니라, 삶을 견디고 긍정하게 만드는 중요한 힘이었다. 그리고 니체는 바그너의 음악에서 그 가능성이 현실화될 수 있다고 기대했다.그래서 당시 니체에게는 대략 이런 구도가 있었던 것 같다.

 

쇼펜하우어의 철학 + 바그너의 예술 → 근대 문화를 넘어설 새로운 삶의 가능성

니체는 『비극의 탄생』을 바그너에게 헌정했고, 바그너의 문화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말하자면 자신의 문제를 바그너라는 거대한 인물을 통해 표현하고 있었다.

 

그러나 해방자가 새로운 우상이 되었다

 

문제는 시간이 흐르면서 생긴다.니체가 바그너에게 기대했던 것은 기존의 가치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는 새로운 예술이었다. 그런데  이후 바그너의 예술과 문화운동이 개인숭배, 기독교적 낭만주의, 독일 민족주의 쪽으로 기울었다. 니체가 기존의 우상을 무너뜨릴 존재로 기대했던 바그너가 어느 순간 새로운 우상처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이 구조가 흥미롭다.

 

훗날 『차라투스트라』에서 니체가 계속 문제 삼는 것도 비슷하기 때문이다. 낡은 신을 무너뜨렸다고 자유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신이 사라진 자리에 또 다른 신을 세울 수 있다. 국가가 될 수도 있고, 돈과 성공이 될 수도 있고, 어떤 인물이나 사상이 될 수도 있다. 청년 니체에게는 바그너가 그런 위치에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바그너와의 결별은 단순히“바그너가 변했기 때문에 헤어졌다.” 라고만 보기에는 부족하다. 니체 자신도 변하고 있었다.

 

바그너와 헤어진 것이 아니라, 바그너를 필요로 했던 자신과 헤어지는 것

 

이 지점에서 한 가지 질문이 생긴다. 왜 니체는 처음에 바그너를 그토록 필요로 했을까. 바그너가 잘못되었다는 판단보다 이 질문이 더 중요하게 느껴진다. 청년 니체에게 바그너는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게 해주는 거대한 언어였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 언어가 자신을 대신해서 말하고 있다는 사실도 느꼈을지 모른다.

 

그러면 자기극복의 문제는 달라진다. 바그너라는 사람과 결별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바그너를 통해서만 자신을 설명할 수 있었던 ‘과거의 니체’와도 헤어져야 한다. 이렇게 보면 바그너와의 결별은 낙타가 사자가 되는 중요한 순간이 된다. 지금까지 짊어졌던 가치에 “아니오” 라고 말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이다.무엇인가를 버리면 그 자리가 저절로 새로운 것으로 채워지는 것은 아니다.

 

하나의 세계가 무너진 뒤

 

바그너와의 결별보다 더 결정적인 사건을 이렇게 표현한다. “총체적으로 길을 잃었다”. 나는 이 표현이 인상 깊었다. 우리는 보통 무엇인가에서 해방되면 곧바로 자유로워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 삶에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오랫동안 믿어왔던 가치나 관계에서 벗어났을 때 가장 먼저 찾아오는 것은 자유보다 공백과 혼란일 수 있다. 그동안 나를 규정하던 것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니체에게도 그런 시간이 찾아온다. 1877년부터 1881년까지 니체가 심한 질병과 치유를 반복했다고 설명한다. 1879년에는 건강 악화로 바젤대 교수직도 내려놓는다. 즉 니체에게 이 시기는 단순히 철학적 전환만 일어난 시기가 아니었다. 사상적 세계가 무너지고, 직업적 삶이 바뀌고, 신체까지 흔들렸다. 기존의 니체를 지탱하던 여러 조건이 동시에 사라지고 있었다.

 

“병은 내 모든 습관을 바꿀 권리를 주었다”

 

그런데 니체는 훗날 이 질병의 시간을 단순한 불행으로만 회상하지 않는다. 병은 내 모든 습관을 바꿀 권리를 나에게 부여했다. 내 병은 망각을 허락했고, 망각하라고 명령했다.

 

질병은 고통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동안 너무 자연스러워서 바꿀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삶의 방식에서 강제로 떨어져 나오게 했다. 읽고, 가르치고, 사람을 만나고, 기존의 방식으로 생각하는 일까지 어려워졌다. 심한 두통과 눈의 통증으로 독서가 어려워진 상황조차 니체의 사유 변화와 연결한다. 책을 읽기 어려워지자 그는 이전처럼 다른 사람의 사상을 계속 받아들이는 대신 자기 자신의 사유에 더 의존해야 했다는 것이다.

 

이를 단순화하면 이런 움직임이다. 타인의 생각을 읽는다 → 그것을 통해 세계를 해석한다 에서 자신의 신체와 경험을 관찰한다 → 자기 자신의 언어로 생각한다 로 이동한 것이다.

 

질병이 니체를 구원한 것은 아니다

 

여기서 조심할 부분도 있다. “니체는 병에 걸렸기 때문에 위대한 철학자가 되었다.” 라고 말하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하다. 질병 자체를 미화할 필요도 없다. 고통이 자동으로 사람을 성장시키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질병 그 자체가 아니라 니체가 질병과 어떤 관계를 맺었는가일 것이다.

 

같은 사건도 사람을 무너뜨릴 수 있고, 다른 삶을 시작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니체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없었던 것으로 만들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을 자기 삶에서 무엇으로 만들지는 달라질 수 있었다. 이 점은 앞서 읽은 아모르파티와도 이어진다. 운명을 사랑한다는 것이 모든 불행을 좋았던 일이라고 포장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이미 일어난 이것으로 나는 무엇을 만들어갈 것인가?” 라는 질문에 더 가깝다. 그렇다면 니체의 질병 역시 ‘좋은 사건’이어서 긍정되는 것이 아니다. 질병과 맺는 관계를 바꾸면서 다른 자신을 만들어냈기 때문에 새로운 의미를 얻는다.

 

 ‘나로의 귀환’

 

 이 시기를 ‘나로의 귀환’이라고 표현한다. 니체 자신도 가장 밑바닥의 자아가 다시 말을 하기 시작했다고 회고한다. 이 표현 역시 흥미롭다.

보통 ‘나 자신으로 돌아간다’고 하면 원래부터 존재하던 진짜 자아를 발견하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지금까지 니체를 읽은 흐름에서는 조금 다르게 보인다. 과거에 숨겨져 있던 진정한 나를 찾아내는 것이라기보다,

 

타인의 가치와 익숙한 습관이 걷힌 자리에서 새로운 자신을 만들어가기 시작하는 것 에 가깝다. 그러니까 ‘나로의 귀환’은 과거의 나에게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직 존재하지 않았던 나에게 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이것은 묘한 역설이다. 길을 잃었는데 자기 길이 시작된다. 무엇을 따라야 할지 몰라졌는데 자기 생각이 시작된다. 혼자가 되었는데 비로소 자기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위대한 건강 — 아프지 않은 상태가 아니라

 

이 시기의 경험에서 니체의 ‘위대한 건강’이라는 생각도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건강과 질병을 흔히 대립시킨다. 건강은 좋은 상태이고, 질병은 제거해야 할 나쁜 상태다. 하지만  니체의 건강은 조금 다르다.

 

건강 ↔ 질병 이라는 고정된 이분법을 넘어, 병들고 회복하고 다시 변하면서 새로운 자신을 만들어낼 수 있는 힘을 중요하게 본다. 그렇게 보면 위대한 건강은 한 번도 무너지지 않는 상태 가 아니라 무너진 뒤에도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구성할 수 있는 능력 에 가까워진다. 완벽하게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에 따라 자기 삶의 형태를 다시 만들 수 있는 힘.  이 개념은 꽤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같은 세계가 다르게 보이는 경험

 

질병과 회복을 반복하면서 니체는 같은 세계를 서로 다른 상태에서 경험한다. 몸이 극도로 좋지 않을 때 바라본 세계와 회복된 상태에서 바라본 세계는 다르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가능해진다. 어느 쪽이 진짜 세계일까. 니체에게 점점 중요한 것은 하나의 절대적인 시선보다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는가가 된다. 이것을 퍼스펙티비즘과 연결한다.

 

진실과 오류를 단순히 나누기보다, 어떤 신체, 어떤 상태, 어떤 위치에서 이 세계를 바라보고 있는가 를 묻는 것이다. 앞서 생각했던 ‘감응’과도 연결된다. 몸이 달라지면 감응이 달라지고, 감응이 달라지면 세계의 의미가 달라지고, 그에 따라 가치 판단도 달라질 수 있다. 그러면 철학은 머리로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니체에게는 어떤 몸으로 세계를 경험하는가도 철학의 일부가 된다.

 

 한때 나를 키운 것이 나를 가둘 때

 

니체와 바그너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자꾸 우리 삶을 생각하게 된다. 우리에게도 그런 것이 있을 수 있다. 한때 나를 성장시킨 스승,

한때 필요했던 조직의 가치,  부모에게 배운 삶의 방식,  성공에 대한 기준, 어떤 책이나 사상, 심지어 예전에 내가 스스로 세운 원칙까지.

 

처음에는 그것들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것 덕분에 배우고 성장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한때 나를 앞으로 움직이게 했던 가치가 오히려 나를 붙잡는 가치가 될 수도 있다. 그때 문제는 과거의 선택이 잘못되었다고 선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렇게 묻는 것이 아닐까. 나를 여기까지 데려온 이것을 인정하면서도, 이제 이것 없이 걸을 수 있는가. 이 질문이 낙타에서 사자로 넘어가는 질문처럼 느껴진다.

 

벗어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하지만 사자는 아직 어린아이가 아니다. 바그너와 결별했다고 해서 니체 자신의 철학이 즉시 완성된 것은 아니었다. 니체에게는 몇 년의 방황과 질병, 해체의 시간이 필요했다.

 

이 점도 중요하다. 우리는 어떤 것을 버리는 순간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 사이에 공백의 시간이 있을 수 있다. 과거의 가치는 더 이상 믿을 수 없고, 새로운 가치는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상태. 니체의 이행기는 바로 그 사이에 있었다. 그래서 이행기의 니체는 ‘길을 찾은 니체’라기보다 길을 잃는 방법을 배운 니체인지도 모른다. 기존의 길을 잃을 수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길을 만들 수 있었다.

 

사자의 자유에서 어린아이의 자유로

 

앞선 글에서 사자의 자유와 어린아이의 자유가 다르다고 썼다. 사자는 말한다. “나는 더 이상 이것에 복종하지 않겠다.” 어린아이는 말한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만들 것인가.” 니체의 이행기는 첫 번째 자유를 획득하는 시간이었다. 바그너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쇼펜하우어로부터 거리를 두고, 기존의 도덕과 형이상학을 의심한다. 하지만 진짜 어려운 일은 그다음이다.

자유로워진 뒤 무엇을 할 것인가. 이 질문 앞에서 성숙기의 니체가 시작된다.

 

나를 잃어야 나에게 돌아올 수 있는가 니체의 이 시기를 읽으며 한 문장이 오래 남는다. “총체적인 길 잃음이 내 정신으로 돌아오기에 절호의 기회였다.” 길을 잃는 것이 언제나 좋은 것은 아니다. 질병 역시 그렇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면서 때로는 계획하지 않았던 단절을 만난다.관계가 끝나거나, 일이 바뀌거나, 내가 믿던 것이 더 이상 믿어지지 않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때 우리는 예전으로 돌아가려고 애쓸 수도 있다.

 

하지만 니체의 삶은 다른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전의 자신으로 돌아가는 대신, 아직 없었던 자신을 만들어갈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니체의 이행기를 이렇게 기억하고 싶다. 바그너와의 결별은 한 세계의 붕괴였고, 질병은 익숙한 삶을 중단시켰다. 그러나 그 공백 속에서 니체는 타인의 언어가 아닌 자기 자신의 감각과 사유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질병이 그를 구원한 것이 아니라, 무너진 삶과 새롭게 관계를 맺으면서 그는 다른 니체가 되었다.

 

그리고 나에게는 이런 질문이 남는다. 지금 나를 지탱하고 있는 것 가운데 한때는 필요했지만 이제는 놓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더 어려운 질문. 그것을 놓은 뒤, 나는 무엇을 만들어갈 것인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부는 유명한 ‘세 가지 변신’으로 시작한다. 정신은 어떻게 낙타가 되고, 낙타는 사자가 되며, 사자는 마침내 어린아이가 되는가. 처음 읽을 때는 이것을 인간의 성장 단계나 성격 유형처럼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설명 내용을 읽다 보니 이 세 가지 변신은 단순한 인간 유형이 아니라 니체 자신의 철학적 변화와도 겹쳐 읽을 수 있는 구조라는 점이 흥미로웠다.

 

낙타는 짐을 짊어진다. 사자는 그 짐에 저항한다. 어린아이는 새로운 놀이와 규칙을 만든다. 이를 니체의 삶과 저작에 겹쳐 보면 대략 이런 흐름이 된다. 수용 → 비판 → 창조. 니체는 처음부터 자기 고유의 철학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먼저 많은 것을 짊어졌고, 그다음 그것과 싸웠으며, 마지막에야 자신의 언어와 가치를 만들어냈다.

 

 

낙타 — 먼저 짊어지는 시기

 

낙타는 무거운 짐을 견딘다. 『차라투스트라』의 세 가지 변신에서 낙타는 흔히 주어진 가치와 명령을 짊어지는 정신으로 설명된다. 하지만 낙타를 단순히 수동적이고 복종적인 존재로만 보면 조금 부족하다. 낙타에게는 짐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이 있다. 그래서 낙타의 시기는 단순한 미숙함이 아니라, 이후의 변신을 가능하게 하는 축적과 수련의 단계로 볼 수 있다.

 

청년 니체를 이 낙타의 시기에 대응시켜 볼 수 있다.  청년 니체는 바그너와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특히 『비극의 탄생』에서 그는 바그너의 음악과 예술을 높이 평가하고, 예술이 삶을 구원할 수 있다는 기대를 품는다. 이 시기의 니체는 아직 자기 고유의 철학만으로 말하지 않는다. 기존의 철학과 예술을 통해 자신의 문제를 말하고, 그들을 통해 근대 문화를 비판한다. 그래서 청년 니체는 기성의 가치를 짊어진 철학자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잘못된 단계였다는 뜻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니체는 먼저 충분히 영향을 받고, 충분히 배우고, 충분히 짊어진다.  그리고 바로 그 축적이 이후의 결별을 가능하게 한다.

 

 

사자 — “아니오”라고 말하는 시기

 

낙타는 어느 순간 사자가 된다. 사자는 짐을 더 잘 짊어지는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그 짐과 싸운다. “왜 내가 이것을 해야 하지?”

“누가 이 기준을 정했지?” 라고 묻는다. 니체의 이행기를 바로 이 사자의 시기로 본다. 바그너와의 결별은 단순한 인간관계의 단절이 아니었다. 니체는 바그너와의 결별을 통해 자신이 이전까지 의지하던 하나의 세계를 잃는다. 이후 그는 질병과 치유를 반복하고, 교수직도 그만둔다. 몸이 무너지고, 생활의 리듬이 무너지고, 이전까지 자신을 지탱하던 사상적 기반도 흔들린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바로 이 시기에 니체는 자기만의 사유 방식으로 이동하기 시작한다. 이 시기의 니체를 단순히 아픈 철학자가 아니라, 질병과 건강 사이를 오가며 자신의 관점을 바꾸는 방법을 배운 철학자로 읽는다. 니체에게 질병은 이전의 습관과 가치에서 강제로 거리를 두게 한 계기가 된다. 그는 더 이상 바그너나 쇼펜하우어의 언어만으로 생각할 수 없게 된다. 이제는 자기 자신의 감각과 경험으로 생각해야 한다.

 

그 변화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아침놀』, 『즐거운 학문』 같은 저작으로 이어진다. 이 시기의 핵심은 비판이다. 도덕을 의심하고, 종교를 의심하고, 진리를 의심하고, 자유의지를 의심한다. 즉, “기존의 가치가 왜 당연하다고 여겨졌는가?” 를 묻기 시작한다. 그래서 사자의 정신은 필요하다. 하지만 사자는 아직 최종 단계가 아니다. 사자는 무너뜨릴 수는 있지만, 아직 새로운 가치를 충분히 만들지는 못한다.

 

 

어린아이 — 창조하는 시기

 

사자가 마지막으로 어린아이가 된다. 이 변화가 가장 흥미롭다. 보통 사자가 어린아이보다 강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니체는 오히려 어린아이를 더 높은 변신의 단계로 둔다.  왜일까.  사자는 아직 싸우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여전히 자신이 부정하는 대상과 관계를 맺고 있다.

“나는 이것을 거부한다.” 라고 말하는 동안, 그가 거부하는 대상은 여전히 그의 사고와 행동을 규정한다. 반면 어린아이는 더 이상 반대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새로운 놀이를 시작하고, 새로운 규칙을 만든다. 그래서 어린아이의 핵심은 창조다. 성숙기 니체를 이 어린아이의 시기에 대응시킨다. 1881년 영원회귀의 영감을 받은 이후,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를 중심으로 자기 고유의 사상 세계를 본격적으로 만들어가기 시작한다. 위버멘쉬, 힘에의 의지, 영원회귀, 아모르파티. 이제 니체는 단순히 기존 철학을 비판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철학의 개념과 언어를 만들어내는 사람이 된다. 그래서 이 시기는  “니체 자신”이라고 부른다. 이 표현이 인상 깊었다. 니체가 더 이상 다른 사람의 언어를 빌려 자신을 표현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니체는 처음부터 니체가 아니었다

 

이 세 단계를 보면 니체의 철학적 생애가 하나의 자기극복 과정처럼 보인다. 청년 니체→ 기존 사상과 인물을 짊어진다. 이행기 니체 → 자신이 의존했던 가치와 싸운다.  성숙기 니체 →자기만의 가치를 창조한다. 그러니까 니체는 처음부터 자기 철학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먼저 타인의 철학을 충분히 받아들였고, 그다음 그것과 싸웠으며, 마지막에야 자기 철학을 만들어냈다.

 

이 점에서 니체의 자기극복은 단지 철학의 내용이 아니라 그의 철학적 생애 자체에도 들어 있다. 니체 자신도 한 번 완성된 철학자로 머문 것이 아니라, 계속 다른 니체가 되어간 셈이다.

 

낙타를 너무 빨리 부정할 필요는 없다

 

이 세 가지 변신을 삶의 기술로 가져오면 한 가지 생각이 든다. 우리는 쉽게 사자나 어린아이를 좋아하고 낙타를 싫어한다. 복종보다 저항이 좋아 보이고, 저항보다 창조가 더 멋져 보인다. 하지만 낙타의 단계가 없다면 사자도, 어린아이도 나오기 어렵다. 먼저 무엇인가를 깊이 배우고, 충분히 영향을 받고, 충분히 짊어져야 한다.

 

그 다음에야 “이것이 정말 내 것인가?” 라고 물을 수 있다. 즉 자기극복은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무엇인가를 깊이 받아들이는 일에서 시작될 수도 있다.

 

 

사자의 단계에 너무 오래 머물 수도 있다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사자의 한계다. 사자는 기존 가치에 “아니오”라고 말한다. 그런데 계속 반대만 하다 보면 자신이 반대하는 대상에 오히려 더 묶일 수 있다. 어떤 사람이나 가치가 싫어서 계속 그것을 의식한다면, 그 대상은 여전히 내 삶의 중심에 있다. 그래서 니체에게 진정한 자유는 단순한 반항이 아니다.  자유정신의 성취를 “시대적 가치로부터의 자유에서 새로운 가치를 향한 자유로” 나아가는 것이다. 무엇으로부터 벗어났는가보다, 그 자유로 무엇을 만들어낼 것인가 가 더 중요해진다. 능력이 요구 된다.  그래서 사자는 결국 어린아이가 되어야 한다.

 

 

어린아이의 가벼움

 

어린아이를 생각하면 ‘가벼움’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하지만 그것은 아무것도 몰라서 가벼운 것이 아니다. 니체의 어린아이는 낙타와 사자를 모두 통과한 뒤의 가벼움이다. 많이 짊어졌고, 많이 싸웠고, 많이 부정한 뒤에 다시 놀 수 있게 된 사람. 그래서 이것은 두 번째 순진함에 가까워 보인다. 어린아이는 사막을 없애지 않는다. 사막에서 새로운 놀이를 시작한다. 이 표현이 좋다. 환경을 모두 바꾸고 나서야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같은 환경에서도 이전과 다른 관계를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세 가지 변신을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내  삶을 돌아보게 된다. 나는 지금 무엇을 짊어지고 있는가. 내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성공, 인정, 역할, 의무 가운데 정말 내 것이 아닌 것은 무엇인가. 나는 지금 무엇에 “아니오”라고 말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 부정이 단순한 반항에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마지막으로, 나는 무엇을 새롭게 만들고 싶은가. 아마 이 질문이 가장 어렵다. 무엇이 싫은지는 쉽게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만들고 싶은지는 훨씬 어렵다. 그래서 어린아이의 단계가 마지막에 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자기극복은 단순히 강해지는 일이 아니라, 나를 여기까지 데려온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더 이상 나를 규정하지 못하게 하고, 그 자리에서 다른 나를 만들어가는 과정 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지금의 나에게 남는 질문은 이것이다.

 

나는 아직 무엇을 짊어지고 있는가.

무엇과 싸우고 있는가.

그리고 이제 무엇을 만들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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