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숲길에 들어서면 발밑에서 흙과 낙엽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해가 더 짧아지기 전에 산에 오르기 위해 발걸음을 조금 서두릅니다. 회사에서 정시 퇴근해 집으로 돌아오면 아내와 마주 앉아 저녁을 먹습니다. 그리고 가벼운 옷차림으로 동네 산에 오르거나 산자락 둘레길을 걷습니다. 요즘은 해가 짧아져 정상까지 오르기보다는 둘레길을 걷는 날이 많아졌습니다. 저녁을 함께 먹고 걷는 이 시간이 어느새 우리 부부에게 새로 생긴 작은 리추얼이 되었습니다.

 

둘레길을 한 바퀴 돌 때마다 길에 떨어진 나뭇잎 하나를 주워 한곳에 놓습니다. 보통 다섯 바퀴를 도니 걷기를 마치고 나면 나뭇잎도 다섯 장이 됩니다. 어떤 날은 모두 노랗고, 어떤 날은 아직 초록빛을 간직한 잎이 섞여 있습니다. 크기도 모양도 제각각입니다. 가지런히 놓인 다섯 장의 나뭇잎을 보고 있으면 오늘 우리가 걸었던 시간이 눈앞에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한 바퀴에 한 장.

다섯 바퀴에 다섯 장.

 

걷고 지나가면 사라질 시간이지만, 그날의 나뭇잎은 잠시 그 시간을 붙잡아 줍니다. 여름의 끝자락이라 조금만 걸어도 등줄기로 땀이 흘러내립니다. 그래도 이따금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과 이름 모를 꽃향기 덕분에 발걸음은 가볍습니다. 나란히 보폭을 맞추며 자연스레 이야기를 꺼냅니다. 지나간 날들의 아련한 기억, 어느새 훌쩍 자란 아이들의 모습, 서로에게 상처를 주었던 시간들, 그리고 지금 우리 앞에 놓인 소소한 일상까지.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 보면 한 시간이 금세 지나갑니다. 젊은 날에는 모두가 가는 방향을 따라 정신없이 달렸습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늘 곁에 있는 것들의 소중함을 잘 모르고 지냈습니다. 그때도 이런 시간이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 때도 있습니다.하지만 지나간 시간을 아쉬워하기보다 지금이라도 함께 땀 흘리며 같은 길을 걸을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몸과 마음이 건강해야 누릴 수 있는 시간이기에 지금의 저녁이 더욱 귀하게 다가옵니다.

 

둘레길을 걷다 보면 가끔 나만의 알아차림 명상에 빠져듭니다. 발바닥이 지면에 닿았다 떨어질 때의 미세한 압력을 느껴보고, 앞뒤로 흔들리는 팔의 움직임과 바람을 가르는 손끝의 감각에 집중합니다. 불안이나 잡념을 억지로 밀어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몸의 정직한 움직임을 하나씩 알아차리고 있으면 어느 순간 생각들이 조금씩 멀어집니다. 몸의 감각을 깨워 뇌에게 조용히 알려주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는 안전하고 평화롭다고.

 

때로는 동료들이 퇴근 후 테니스를 치자고 권하면 마음이 솔깃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요즘 나는 라켓 대신 아내와 함께 걷는 이 시간을 선택합니다. 이 숲길을 걷는 동안 아내의 마음을 짓누르던 커다란 불안도 잠시 조용해지고, 내 어깨 위에 얹혀 있던 회사 일과 중압감도 흘린 땀과 함께 조금씩 씻겨 내려갑니다. 걷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시원한 물로 샤워를 하고 나면 하루가 가지런히 정돈된 듯한 개운함이 밀려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저녁이면 우리는 다시 같은 길을 걷습니다.

 

한 바퀴를 돌고 나뭇잎 하나를 내려놓고, 다시 한 바퀴를 돌고 또 하나를 내려놓습니다. 그렇게 다섯 장의 나뭇잎이 모이면 오늘 하루도 잘 지나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일 저녁에도 우리는 다시 이 길을 걸으며 우리의 평온한 일상을 조금씩 가꾸어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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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세 번째 책읽기 – 관계와 거리 두기 입니다.  스트레스와 행동을 이해하는 책들을 읽다 보니, 다음 질문이 자연스럽게 따라 왔습니다. 
결국 문제는 관계 였습니다. 관계를 이해하고 나와 타인 사이의 적당한 거리를 고민하여 집에 있는 책 중에서 3권의 책을 골랐습니다. 
문요한의 『관계를 읽는 시간』, 클리포드 나스·코리나 옌의 『관계의 본심』, 롤프 젤린의 『나는 단호해지기로 결심했다』 입니다. 앞서 읽고 있는 새폴스키의 『스트레스』와 『행동』이 사람의 몸과 뇌, 행동의 메커니즘을 이해하려는 시도였다면, 이번 세 권은 그 이해를 관계 속 거리 두기로 옮겨놓는 작업에 가깝습니다. 결국  “어떻게 하면  상처받으면서도, 너무 냉소적이지 않게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있을까"를 함께 묻는 시간입니다. 벽돌책에 비해 쉽게 읽힙니다. 

 

1. 『관계를 읽는 시간』 – 나의 바운더리를 다시 그리는 일

저자는 건강한 관계란 서로 완전히 붙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함께 있으면서도 각자의 경계를 존중하는 상태라고 말합니다.  가까워질수록 상대를 나의 일부처럼 느끼고, 결국 타자성을 지워 버리려는 우리의 습관을 짚어 주는 부분이 특히 마음에 남습니다. '적당한 거리’라는 말이  어렵습니다.  적당한 나의 울타리의 어느정도 인지 지속적으로 고민해야할 문제 입니다. 

 

2. 『관계의 본심』 – 실험으로 드러난 관계의 얼굴들

스탠퍼드 교수들이 27가지 실험으로 인간관계의 숨은 얼굴을 보여주는 사회심리학 책입니다. 우리가 왜 비슷한 성격의 사람에게 더 호감을 느끼는지, 집단 안에서 왜 쉽게 눈치를 보게 되는지, 집단사고가 어떻게 엉뚱한 결정을 만들어 내는지를 실험과 사례로 설명합니다.  책을 읽다 보면 “나만 이상한 게 아니었구나” 싶은 장면들이 많습니다. 호감·소속감·결속력 같은 단어 뒤에, 누군가는 늘 소외될 수 있다는 불편한 진실도 함께 드러납니다. 

 

3. 『나는 단호해지기로 결심했다』 – 나를 지키는 거리 두기 연습

마지막 책 『나는 단호해지기로 결심했다』는  “타인에게 휘둘리지 않고 나를 지키는 한계 설정의 기술”에 관한 책입니다.  지나치게 간섭하는 가족, 친하다고 선을 넘는 친구, 직급을 내세워 함부로 대하는 직장 상사 때문에 지쳐 있는 사람들에게, 단호하게 거절하고 최소한의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이기적인 행동이 아님을 강조합니다.  저자는 “싫어도 좋은 척”하는 습관이 결국 관계를 병들게 만든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현실속에서는 쉽지 않습니다.  “아니오”라고 말할 수 없으면 그 관계는 오래 가기 어렵고, 적당한 거리를 두고서야 비로소 서로의 감정과 욕구를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최근 들어 사람과의 관계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부쩍 늘었습니다.  어떤 말과 행동은 유난히 상처가 되고, 어떤 상황에서는 별일 아닌 일에도 과하게 반응하는지 스스로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오래전에 사 두었던 로버트 새폴스키의 『스트레스』를 다시 꺼내 들었습니다.  마침 그의 또 다른 책 『행동(BEHAVE)』을 읽는 독서 모임이 생겨 두 권을 동시에 읽게 되었습니다. 벽돌책이라 혼자서 끝까지 읽어내기가 쉽지 않은데, 함께 읽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됩니다.

 

『스트레스』가 몸과 마음이 어떻게 지쳐 가는지를 보여 준다면, 『행동』은 그 상태에서 우리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그 배후의 맥락을 끝까지 추적합니다. 사람 때문에 힘들었던 때 내 몸 상태와 감정을 떠올리며  그 사람의 입장과 맥락 이해가 늘어나는 것 같습니다. 현재는 두 권 모두 절반 정도까지 진도가 나간 상태입니다. 사람에 대한 스트레스와 그 스트레스가 불러오는 행동을 이해함으로써, 언젠가는 “사람으로부터 오는 스트레스”에서 조금은 더 자유로워지기를 바라며 페이지를 넘기고 있습니다. 최근 로버트 새폴스키의 다른 책이 출간 되어 있다고 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1.  『스트레스』 – 몸과 마음을 잠식하는 반응의 메커니즘

『스트레스』는 왜 우리의 몸과 마음이 스트레스에 그렇게 취약한지를 신경과학·내분비학·심리학을 가로질러 설명하는 책입니다.  급박한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진화한 스트레스 반응이, 현대 사회에서는 끝없이 이어지는 업무·관계·경제적 불안과 만나면서 만성적인 긴장과 병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다양한 연구와 사례로 보여 준다.  읽다 보면 “지금 느끼는 이 불편함이 나만의 문제는 아니구나”라는 안도와 함께  무엇이 나를 특히 더 예민하게 만드는지,  어떤 상황에서 내 몸이 자동으로 ‘비상 모드’로 바뀌는지,  스트레스의 고리를 어디에서 끊을 수 있을지
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2 .  『행동』 – 한 행동 뒤에 겹겹이 쌓인 맥락들

『행동』은  인간의 어떤 행동 하나를 두고, 그 직전의 뇌 활동부터 몇 분 전 호르몬 상태, 유년기의 경험, 유전자와 진화, 그리고 문화와 역사까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며 설명합니다.  폭력과 공격성, 편견 같은 어두운 행동뿐 아니라, 공감·이타성·협력 같은 장면까지, 한 인간의 행동이 “단일 원인”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하나의 주장을 위해 여러 실험과 근거로 설득 합니다. 생소한 뇌 관련 용어에 익숙하다면 보면 진도가 더 빨라 집니다. 나를 힘들게 하는 어떤 사람의 행동을 그 사람의 성격 한 줄로 단순화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사람의 뇌와 호르몬, 자라온 환경과 지금의 스트레스 수준, 속해 있는 조직 문화까지 겹겹이 쌓인 결과라는 것을 알게 되면, 화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더라도 거리를 두고 볼 수 있는 여지가 조금은 생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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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초 읽은 책은 두 권입니다.  박소령의 『실패를 통과하는 일』과 최혜진의 『에디토리얼 씽킹』 입니다.  독서 모임에서 나눈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그날의 대화와 내 일을 겹쳐 보며 천천히 정리하는 중입니다.  정리가 어느 정도 모이면 각각 독서록으로 따로 남길 생각입니다. 

 

1. 실패를 ‘통과하는’ 경험에 대하여

『실패를 통과하는 일』은 콘텐츠 스타트업 퍼블리를 창업해 10년간 이끌고, 회사를 매각하면서 대표 자리에서 물러나기까지의 시간을 기록한 책입니다.  성공담이나 극적인 엑시트 스토리가 아니라, 그 사이에 있었던 잘못된 의사 결정과 후회, 버티기와 정리의 과정을 “사업 일지”처럼 솔직하게 풀어낸다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책을 읽다 보면 실패가 더 이상 “극복해야 할 사건”이라기보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조금씩 알아가는 과정에 가깝게 느껴집니다. 나라는 이해하는 메타인지 과정입니다.  대표로서 직원을 바라보는 시선, 투자와 자금, 회사를 끝까지 함께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속에서, 조직 안에서 사람을 어떻게 바라보고 결정해 왔는지를 보여 줍니다. 

 

2. 흩어진 것을 편집해 의미를 만드는 일

『에디토리얼 씽킹』은 “모든 것이 다 있는 시대에, 나만의 콘텐츠와 창작물을 어떻게 만들어낼 것인가”에 대한 생각법을 다룬 책입니다.  무수한 정보와 잡음 속에서 특정한 것에 주목하고, 그것들 사이의 관계와 맥락을 엮어 하나의 메시지와 구조를 만드는 과정을 “에디토리얼 씽킹”이라 부릅니다. 책의 목차가 바로 그 과정, 자료를 수집하고, 연상하고, 범주화하고, 관계를 묶고,  컨셉과 프레임을 세우는 순서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도 흥미롭습니다. 

독일의 사회학자 니클라스 루만의 젠텔카스텐 메모 기법처럼, 작은 메모들을 서로 연결하며 점점 더 큰 생각의 덩어리로 키워 가는 방식과도 닮아 있습니다. 옵시디언 같은 메모 앱을 사용해 생각을 모으고, 그것을 글이나 콘텐츠로 만들어 가는 사람에게 특히 도움이 되는 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3. 블로그를 편집 연습의 장으로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결국 내가 하는 일도 이 책에서 말하는 “에디토리얼 씽킹”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합니다.  흩어져 있는 하루의 장면, 읽은 문장, 찍어 둔 사진들을 다시 꺼내어 한 편의 글, 혹은 한 장의 사진으로 편집하는 일. 『실패를 통과하는 일』이 일과 삶의 실패를 통과하는 태도를 묻는다면, 『에디토리얼 씽킹』은 그 실패와 일상의 조각들을 어떤 구조와 목소리로 편집해 낼 것인가를 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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