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까지 오면서 나는 차라투스트라의 말을 꽤 오래 따라왔다. 신의 죽음에서 시작해 위버멘쉬를 만났고, 낙타와 사자와 어린아이를 지나왔으며, 덕과 몸, 전쟁과 벗, 이웃사랑과 고독, 창조와 죽음, 사랑과 베품을 생각했다. 처음에는 니체가 무엇을 말하는지 이해하려고 했다. 조금 지나서는 그 말을 내 삶에 가져와보았다. 그리고 이제 『차라투스트라』 1부의 마지막에 도착했는데, 차라투스트라는 뜻밖의 말을 한다.

“나를 떠나라. 그리고 너희 자신을 찾도록 하라.” 이상하다. 그토록 많은 것을 가르쳐놓고 마지막에는 자신을 버리라고 한다. 스승이라면 자신을 더 잘 이해하고, 더 오래 기억하고, 자기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는 제자를 원하지 않을까. 그런데 차라투스트라는 정반대의 것을 요구한다. 나를 믿지 말라. 나를 숭배하지 말라. 나를 떠나라. 어쩌면 이 말이야말로 1부 전체에서 가장 니체다운 가르침인지도 모르겠다.

 

새로운 가치를 가르친 사람이 새로운 우상이 된다면 차라투스트라는 계속 기존의 가치를 의심하라고 말했다. 남들이 좋다고 하는 것을 그대로 좋다고 하지 말고, “너는 해야 한다”는 명령에 복종하지 말며, 자기 삶의 가치를 스스로 만들어가라고 했다. 그런데 제자들이 이제 이렇게 말하기 시작하면 어떻게 될까. “차라투스트라가 그렇게 말했다.” “니체에 따르면 이것이 옳다.” 순간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신의 자리에서 신을 끌어내렸는데, 그 자리에 차라투스트라가 올라간다. 기독교의 계명을 버렸는데, 이번에는 니체의 문장이 계명이 된다. “너는 해야 한다”를 넘어가라고 가르친 사람이 새로운 “너는 해야 한다”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니체를 가장 충실하게 따르는 방법은 역설적으로 어느 순간 니체를 따르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이 생각이 재미있으면서도 조금 불편하다. 영원히 제자로 남는 것이 정말 좋은 제자일까 차라투스트라는 말한다. “영원히 제자로만 머문다면 그것은 선생에 대한 도리가 아니다.” 보통 우리는 좋은 제자를 스승의 뜻을 잘 이어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스승의 말을 정확히 기억하고, 그 가르침을 잘 설명하고, 다른 사람에게 다시 전달하는 사람. 물론 배움에는 그런 시간이 필요하다. 처음에는 따라가야 한다.이해하지 못한 것을 배우고, 개념을 익히고, 스승이 보았던 것을 스승의 눈으로 한번 볼 필요도 있다. 하지만 거기에서 멈추면 어떻게 될까. 나는 스승이 본 것을 더 정확하게 설명하는 사람이 될 수는 있지만, 내가 무엇을 보는 사람인지는 끝내 알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서 배움에는 어느 순간 이상한 전환이 필요한 것 같다. “선생은 무엇을 말했는가?” 에서 “그 말을 지나 나는 무엇을 보게 되었는가?” 로 넘어가는 순간이다.

 

이 글들을 쓰면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처음 니체에 관한 글을 쓸 때는 내용을 놓치지 않으려고 했다. 니체가 무엇을 말했는지, 어떤 구절이 어떤 의미인지, 앞뒤의 개념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정리하려 했다. 그런데 글이 쌓이면서 조금씩 질문이 달라졌다. 인정받으려는 마음을 생각했고, 물건과 나의 관계를 생각했고, 책을 읽고 글을 남기는 일이 나를 어떻게 바꾸는지 생각했다. 카메라를 들고 전철 안을 다르게 보고, 사람이 지나오기를 기다리고, 이전에는 그냥 흘려보냈을 시간을 조금 더 오래 바라보게 된 것도 글 속으로 들어왔다.

 

니체의 문장을 정리하는 것에서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니체가 내 일상을 다시 보게 하는 질문이 되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걸음 더 가야 하는 것 아닐까. 계속 “니체라면 어떻게 생각했을까?” 를 묻는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에는 “나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를 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니체를 읽으며 자기 자신을 찾으려고 했지만, 결국 니체라는 새로운 권위 뒤에 숨어버릴 수도 있다. “나를 부인하고 나서야 다시 돌아오겠다” 차라투스트라의 말 가운데 특히 마음에 남는 부분이 있다.

 

제자들이 자신을 모두 부인하고 난 뒤에야 다시 그들에게 돌아오겠다고 한다. 처음에는 왜 굳이 자신을 부인하라고 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알 것 같다. 스승의 말을 한번 자기 것으로 만들려면, 그 말을 그대로 보존해서는 안 된다. 의심해봐야 한다. 내 경험에 대입해봐야 한다. 틀렸다고 느끼면 밀어내기도 해야 한다. 어떤 부분은 버리고, 어떤 부분은 다른 의미로 바꾸어야 한다.

 

그 과정이 끝난 뒤 다시 니체를 읽으면, 처음 읽었던 니체와는 다른 니체가 보일 것이다. 책은 같은데 읽는 사람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부인한 뒤 다시 돌아온다’는 것은 관계의 단절이 아니라, 스승과 제자가 다른 관계로 다시 만나는 것일 수 있다. 제자가 아니라 벗으로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제자들이 언젠가 벗이 되기를 바란다.

 

이것은 앞에서 읽었던 「벗」과 연결된다. 벗은 나를 그대로 인정해주는 사람만은 아니었다. 나에게 더 높은 가능성을 보여주는 존재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벗은 주인과 종의 관계가 아니다. 서로 다른 자기 길을 가진 사람들이 만나는 관계다. 그렇다면 스승이 제자를 벗으로 만든다는 것은 제자를 자기 아래에 오래 붙들어두는 것이 아니라, 자기와 대등하게 서게 만드는 것 아닐까. 좋은 스승의 성공은 제자가 얼마나 오래 자신을 따르는가로 측정되지 않는다. 오히려 어느 순간 “이제 제 생각은 다릅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는가로 판단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순간 스승은 한 사람의 추종자를 잃지만, 한 사람의 벗을 얻는다.

 

그리고 ‘희망의 자녀’가 된다. 차라투스트라는 제자들을 ‘희망의 자녀’라고도 부른다. 이 표현은 「아이와 혼인」에서 생각했던 아이를 떠올리게 한다. 아이는 부모를 복제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부모보다 더 멀리 가야 하는 존재였다. 그렇다면 좋은 제자와 좋은 아이는 비슷하다. 둘 다 나를 닮는 사람이 아니라 나를 넘어가는 사람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1부에서 서로 떨어져 있던 여러 이야기가 한곳에서 만난다. 벗은 나를 넘어가게 한다. 혼인은 자신을 넘어서는 것을 낳으려 한다. 자유로운 죽음은 다음 것을 위해 물러나는 법을 가르친다. 베푸는 덕은 자기 존재가 흘러넘치는 방식을 말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이 한 말을 자기 자신에게 적용한다. 자신의 제자들을 붙잡지 않는다. 자신이 없어도 갈 수 있도록 놓아준다. 어쩌면 이것이 차라투스트라 자신의 베품 가운데 가장 큰 베품인지도 모르겠다. 베품의 마지막은 독립시키는 것이 아닐까.

 

이전 글에서 나는 존재 자체가 선물이 될 수 있는지 생각했다. 자기 삶을 충만하게 살아, 그 삶을 본 사람이 자신도 무언가를 시작하고 싶어지게 만드는 것. 그런데 「베푸는 덕」의 마지막까지 오니 베품에는 한 단계가 더 있는 것 같다. 잘 주는 것만으로는 끝나지 않는다.  받은 사람이 더 이상 나에게서 받을 필요가 없게 만드는 것.

 

이것은 생각보다 어렵다. 누군가가 나를 필요로 하면 내가 중요한 사람처럼 느껴진다. 내 조언을 구하고, 내 판단을 기다리고, 내가 알려준 방식대로 하는 사람을 보면 내 역할이 분명해진다. 그래서 도움을 준다는 이름으로 상대가 계속 나를 필요로 하게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정말 잘 베풀었다면 어느 순간 이런 말이 가능해야 할 것이다. 이제는 네가 알아서 해도 된다. 그리고 더 나아가, 내 방식대로 하지 않아도 된다. 이것이 부모에게도, 스승에게도, 리더에게도 가장 어려운 베품 아닐까.

 

몰락한다는 것은 실패하는 것이 아니었다. 1부를 처음 읽을 때부터 ‘몰락’이라는 말이 계속 나왔다. 처음에는 아래로 떨어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실패와 소멸의 이미지였다. 하지만 여기까지 오면서 의미가 달라졌다. 몰락은 다음 존재를 위해 자기 자리를 내어주는 것일 수 있다. 태양이 저녁에 지기 때문에 새로운 아침이 온다. 부모가 뒤로 물러나야 아이가 자기 삶을 살 수 있다. 스승이 우상에서 내려와야 제자가 자기 생각을 시작할 수 있다. 과거의 내가 죽어야 새로운 내가 태어난다. 그렇다면 몰락은 패배가 아니다. 오히려 생성의 한 부분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이 목적지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자신 역시 하나의 다리다. 누군가가 자신을 건너 더 멀리 가야 한다. 그래서 몰락하는 자는 자신이 동시에 건너가는 자임을 깨닫고 스스로를 축복한다.

 

위대한 정오는 무엇일까  1부 마지막에는 ‘위대한 정오’라는 이미지가 등장한다. 정오는 하루의 끝이 아니다. 아침과 저녁 사이의 한가운데다. 니체에게 인간 역시 그런 중간에 있다. 짐승에서 위버멘쉬로 가는 길 위에 있다. 나는 이 표현이 이제 조금 다르게 들린다. 위대한 정오는 어느 날 완성된 위버멘쉬가 등장하는 역사적 시간이 아닐지도 모른다. 적어도 내 삶에서는, 지금의 내가 최종적인 내가 아니라는 사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순간 이라고 읽고 싶다. 나는 완성품이 아니다. 지금 가진 생각도, 지금의 성공도, 지금의 역할도, 지금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도 언젠가 넘어가야 할 수 있다. 그 사실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다음 아침의 가능성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때가 나에게 작은 ‘정오’가 되는 것은 아닐까.

 

“모든 신은 죽었다” 그리고 1부는 다시 큰 문장으로 돌아간다. “모든 신은 죽었다. 이제 위버멘쉬가 등장하기를 우리는 바란다.”

이 말을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신의 죽음’에 시선을 빼앗겼다. 기독교 신의 죽음, 절대가치의 붕괴, 니힐리즘의 문제. 하지만 1부를 끝까지 읽고 나니 뒤쪽이 더 중요하게 느껴진다. 신이 죽었다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는다. 낡은 가치를 무너뜨리는 것은 사자의 일이다.

그 다음에는 어린아이가 와야 한다. 새로운 것을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위버멘쉬 자체를 새로운 신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니체가 위버멘쉬가 되라고 했다.”

라는 순간 위버멘쉬는 또 하나의 ‘너는 해야 한다’가 된다. 내가 이해한 위버멘쉬는 특정한 인간형의 이름이라기보다, 계속 지금의 자기를 넘어가려는 방향에 더 가깝다. 그 방향마저 고정된 정답으로 만들지 않는 것. 이것이 1부 마지막에서 차라투스트라가 자기 자신까지 버리라고 하는 이유와 연결되는 것 같다.

 

결국 나는 무엇을 배웠을까  돌아보니 기억에 남는 것은 니체의 정답보다 니체가 던진 질문들이다. 네가 원하는 것은 정말 네가 원하는 것인가. 너의 사랑은 사랑인가, 도피인가. 너의 베품은 충만함에서 나오는가,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서 나오는가. 너의 분노는 정의인가, 원한인가.

너는 무엇을 새롭게 만들고 있는가. 무엇을 이제 놓아주어야 하는가. 그리고 마지막에는 이런 질문까지 남는다. 너는 왜 아직도 나에게 묻고 있는가. 이 질문 앞에서는 조금 웃음이 난다. 니체를 읽으면서 계속 니체에게 답을 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니체에게서 무엇을 가져갈 것인가 그렇다고 이제 니체를 읽지 말자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다시 읽을 것이다. 하지만 조금 다른 방식으로 읽고 싶다. 정답을 찾기 위해 읽기보다, 내 생각을 흔드는 사람으로 만나고 싶다. 동의할 때도 있고, 불편할 때도 있고, 틀렸다고 느낄 때도 있으며, 내 경험과 전혀 다르게 느껴질 때도 있을 것이다. 그 모든 순간이 가능해야 비로소 니체는 우상이 아니라 벗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벗은 언제나 같은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때로는 나와 싸우고, 때로는 멀어졌다가, 다시 만났을 때 이전과 다른 말을 나누게 되는 사람이다. 1부를 떠나며 처음에는 차라투스트라를 따라 산에서 내려왔다. 그가 무엇을 보여주는지 궁금했다. 1부 마지막 글을  쓰고 있는 지금, 그는 이제 돌아가라고 말한다. 나를 따라오지 말고, 내가 보여준 길도 그대로 걷지 말고, 네 길을 찾아가라고. 아마 이것이 1부에서 차라투스트라가 내게 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일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 돌아갈 자유. 그래서 1부를 마치며 어떤 결론을 적기보다 하나의 질문을 남기는 편이 좋을 것 같다. 나는 앞으로도 니체를 읽을 것이다. 하지만 니체가 무엇이라고 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만 읽지는 않을 것이다. 그의 문장을 지나, 내가 보고, 내가 경험하고, 내가 생각한 것을 조금씩 만들어가고 싶다. 언젠가는 니체의 문장이 없어도 내가 묻고 싶은 질문을 스스로 만들 수 있기를 바란다. 그때 나는 니체에게서 멀어진 것일까. 어쩌면 그 반대일 것이다.

 

차라투스트라가 원하는 제자는 끝까지 그 뒤를 걷는 사람이 아니라, 어느 순간 다른 길로 사라지는 사람일 테니까. 그러므로 1부의 마지막에서 나는 차라투스트라에게 이렇게 답하고 싶다. 이제 당신의 말을 외우는 대신, 당신이 내게 가르쳐준 방식으로 당신에게도 질문하겠습니다.

그리고 나에게도 묻는다. 니체를 따라 여기까지 온 나는, 이제 어디로 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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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글에서  나는 ‘제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했다. 과거에 붙잡히거나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미리 사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 삶이 요구하는 시간을 알아차리는 것. 그렇게 자기 삶에 조금 더 충실해지는 이야기를 쓰고 나니, 다시 타인의 문제가 찾아온다.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게 산다는 것은 결국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가는 것 아닐까. 나를 먼저 생각하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고, 내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데 힘을 쓴다면, 그것은 이기적인 삶이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차라투스트라』 1부 마지막 장인 「베푸는 덕」에서 니체는 뜻밖에도 이기심을 두 종류로 나눈다. 하나는 병든 이기심이고, 다른 하나는 베푸는 이기심이다. 처음에는 이 말 자체가 모순처럼 들렸다. 이기적인데 어떻게 베풀 수 있을까.

 

금은 무엇을 베풀고 있는가

 

차라투스트라는 금을 최고의 덕의 상징으로 이야기한다. 자료에서 금이 특별한 용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옷은 입고, 음식은 먹고, 집은 거주하는 데 쓴다.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가 비교적 분명하다. 하지만 금은 그런 쓸모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희귀하고, 빛나고, 그 자체로 가치를 상징한다. 강의에서는 이를 이렇게 표현했다. 금은 자기 자신을 베푼다. 나는 처음에는 이 표현이 추상적으로 느껴졌다. 도대체 존재 자체를 베푼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하지만 태양을 떠올리면 조금 이해된다. 태양은 누군가를 돕기 위해 빛나는 것이 아니다. 꽃에게 도움을 주겠다고 결심해서 빛을 비추는 것도 아니다. 그저 태양이기 때문에 빛난다. 그런데 그 빛 때문에 꽃이 피고 생명이 자란다. 그렇다면 니체가 말하는 가장 높은 베품은 ‘내가 너를 위해 무엇을 해주겠다’는 행위 이전에, 내가 충분히 나 자신이 되는 것 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사회봉사나 기부가 낮은 것일까 여기서 조심할 부분이 있다. 자료에서는 용도를 가진 베품과 존재 자체의 베품을 대비하면서 사회봉사나 불우이웃돕기를 앞쪽에 놓았다.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면 “기부나 봉사는 낮은 수준의 베품이고, 자기답게 사는 것이 더 고귀하다.”

는 이상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나는 그렇게 읽고 싶지는 않다. 누군가에게 필요한 것을 주고, 어려운 사람을 돕고, 사회적인 책임을 나누는 것은 그 자체로 중요한 일이다. 니체가 묻는 것은 행위의 종류보다 그 행위가 어디에서 나오고 있는가에 더 가까운 것 같다. 내가 인정받고 싶어서 베푸는가. 좋은 사람이라는 자기상을 유지하기 위해 베푸는가. 죄책감을 덜기 위해 베푸는가. 아니면 내게 충분한 것이 있어서 자연스럽게 나누는가. 같은 기부라도 힘의 상태는 다를 수 있다. 그러므로 문제는 기부인가 존재인가가 아니라, 결핍에서 주는가, 충만함에서 주는가라고 생각한다.

 

병든 이기심은 무엇을 가져와도 부족하다

차라투스트라는 또 다른 이기심을 이야기한다. 병든 이기심이다. 이 이기심은 끊임없이 주변을 살핀다. 누가 더 가지고 있는지, 무엇을 빼앗을 수 있는지, 내게 부족한 것을 어디에서 채울 수 있는지 찾는다. 무언가를 얻으면 잠시 만족하지만 곧 다시 부족해진다. 그래서 계속 가져온다. 이 모습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이기적인 사람과 비슷하다. 그런데 니체의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많이 가지느냐가 아닌 것 같다. 아무리 가져도 자기 안에서 무엇인가 만들어지지 않는 상태. 이것이 병든 이기심 아닐까.

 

책을 많이 가지고 있지만 읽지 않고, 사진 장비를 계속 사지만 무엇을 보고 싶은지는 알지 못하고, 정보를 계속 모으지만 자기 생각으로 만들어내지 못하고, 사람들의 인정은 많이 받지만 그것 없이는 자기 가치를 확인할 수 없는 상태. 계속 밖에서 가져오는데 안에서는 아무것도 생성되지 않는다. 그러니 더 필요하다. 부족해서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가져온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없기 때문에 계속 부족한 것인지도 모른다.

 

베푸는 이기심은 먼저 많이 받아들인다

 

그런데 ‘베푸는 이기심’ 역시 세상에서 많은 것을 가져온다. 차라투스트라는 오히려 모든 것이 자기 안으로 흘러들어오기를 원한다고 말한다.

처음에는 이것도 탐욕처럼 보인다.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자기 안으로 들어온 것이 그대로 쌓여 있지 않는다. 변형되어 다시 밖으로 흘러나간다. 강의에서 이 구조를 설명하며 예술가를 예로 들었다. 예술가는 세상으로부터 끊임없이 가져온다. 빛을 보고, 사람을 보고, 거리의 소리를 듣고, 누군가의 표정을 기억하고, 자기의 슬픔과 기쁨까지 재료로 삼는다. 어찌 보면 상당히 탐욕스럽다. 모든 것이 작품의 재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그대로 소유하지 않는다. 자기 안을 통과시켜 사진과 음악과 문장과 그림으로 다시 세상에 돌려준다. 그렇다면 베푸는 이기심의 구조는 이런 것 아닐까. 받아들인다. 내 안에서 변형한다. 새로운 것을 만든다. 다시 내놓는다. 이 순환이 계속된다.

 

요즘 사진을 찍는 일도 조금 그렇게 느껴진다

 

최근 카메라를 들고 다니면서 이전보다 주변을 더 오래 보게 되었다. 전철 안의 유리, 광고판 앞을 지나가는 사람, 시장 안에서 물건을 건네고 받는 손, 아침 빛이 건물에 닿는 모습. 이전에도 모두 그곳에 있었다. 내가 만든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세상이 보여주는 것을 받아들였을 뿐이다. 그런데 카메라를 들고 보면 그것들이 내 안으로 조금 다르게 들어온다. 어디에 설 것인지, 얼마나 기다릴 것인지, 무엇을 프레임 안에 두고 무엇을 버릴 것인지 결정한다. 그리고 셔터를 누른다. 결과물은 현실 그대로도 아니고, 완전히 내가 만든 것도 아니다. 세상이 내게 들어와 나를 한번 통과한 뒤 다시 밖으로 나온 것에 가깝다.

 

글도 비슷하다. 니체가 내게 들어오고, 강의가 들어오고, 내 경험이 들어온다. 나는 그것들을 그대로 옮기지 않는다. 며칠 동안 생각하고, 내 삶과 부딪쳐보고, 이해되지 않는 부분을 붙들어본 뒤 문장으로 내놓는다. 그렇다면 읽고 사진을 찍고 글을 쓰는 것도 일종의 베푸는 이기심일 수 있을까. 세상을 많이 받아들이되, 그것을 그대로 움켜쥐지 않고, 나를 통과시켜 다시 내놓는 것. 그래서 ‘나를 풍요롭게 하는 일’이 꼭 이기적인 것만은 아니다 예전에는 자기 자신을 위해 시간과 돈을 사용하는 일에 약간의 변명이 필요할 때가 있었다.

 

책을 사고, 사진을 찍고, 혼자 걷고, 글을 쓰는 시간. 직접적으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일은 아니다. 그래서 생산적이지 않거나 자기만족적인 일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니체의 베푸는 덕을 따라가면 질문이 조금 달라진다. 그 시간이 나를 어떻게 만들고 있는가. 내가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생각하고, 조금 더 풍부한 사람이 되고 있다면, 그 변화가 정말 나에게서만 끝날까.

 

내가 사람을 대하는 방식에 나타날 수도 있고, 내가 하는 일의 판단에 나타날 수도 있으며, 내가 쓰는 글과 찍는 사진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전달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나 자신을 풍요롭게 하는 것과 타인에게 베푸는 것은 반드시 반대가 아니다. 오히려 제대로 베풀기 위해서는 먼저 내 안에 흘러나올 것이 있어야 한다.

 

빈 우물에서 계속 물을 퍼낼 수는 없다 이렇게 생각하니 앞에서 살펴본 베품의 문제도 다시 보인다. 누군가를 계속 돕고, 책임지고, 가르치고, 돌보면서 정작 자기 자신은 계속 메말라간다면 어떻게 될까. 처음에는 좋은 마음으로 시작했어도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이 생길 수 있다. 왜 나만 해야 하지. 왜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 왜 저 사람은 내가 해준 것을 모를까. 그리고 베품에서 원망이 태어난다.

 

앞서 「밤의 노래」에서 차라투스트라 자신도 이 문제를 겪었다. 계속 주기만 하던 그는 어느 순간 허기를 느끼고, 자신이 준 것을 다시 빼앗고 싶어 한다. 그렇다면 문제는 베풀지 않은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고갈되는데도 계속 베푸는 사람으로 남으려 한 것인지도 모른다. 빈 우물에서 계속 물을 퍼낼 수는 없다. 먼저 다시 채워져야 한다.

 

힘에의 의지는 지배하는 힘만을 뜻할까

 

자료에서는 이 부분을 힘에의 의지와 연결했다. 힘이라고 하면 나는 먼저 상대를 움직이는 능력을 떠올린다. 명령하고, 이기고, 자기 뜻대로 만드는 것. 하지만 지금까지 니체를 따라오면서 힘의 모습은 점점 다르게 느껴졌다. 살무사의 독을 다른 의미로 바꾸는 힘. 복수하지 않아도 될 만큼 견디는 힘. 옛 자신을 제때 끝낼 수 있는 힘. 그리고 이번에는 세계로부터 많은 것을 받아들여 자기 안에서 새로운 것으로 바꿀 수 있는 힘. 이런 힘이라면 ‘힘에의 의지’를 단순히 타인을 지배하려는 욕망으로 읽기 어렵다.

 

오히려 내가 얼마나 많은 세계를 받아들일 수 있으며, 그것 때문에 무너지지 않고, 그것을 얼마나 풍요로운 형태로 다시 만들어낼 수 있는가의 문제처럼 보인다. 강한 사람은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많이 받아들여도 자기 것을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의사여, 너 자신을 돌보라” 「베푸는 덕」에서 내가 특히 마음에 두고 싶은 말이 있다. “의사여, 너 자신을 돌보라.” 처음에는 자기 관리에 관한 말처럼 들린다. 하지만 이어지는 뜻은 더 흥미롭다. 환자에게 가장 좋은 도움은 자기 자신을 치유한 사람을 직접 보게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앞에서 본 ‘계몽가’와 ‘유혹자’의 차이를 다시 떠올리게 한다. “너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 라고 말하는 대신, 먼저 내가 내 삶을 조금 더 건강하게 살아보는 것. 백 번 충고하기보다, 저렇게 사는 방법도 있구나 하고 상대가 직접 보게 하는 것. 그렇게 생각하면 베품이 달라진다. 내가 상대를 직접 변화시키려 하지 않아도 된다. 내 삶을 건강하게 만드는 일 자체가 누군가에게 하나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일이 될 수 있다.

 

존재 자체가 선물이라는 말

 

이제 ‘존재 자체로서 베푼다’는 말을 처음보다 조금은 이해할 것 같다. 대단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누구에게나 감동을 주는 존재가 되라는 뜻도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삶을 자기 방식으로 충실하게 살아내는 것. 자기에게 들어온 것을 자기답게 변형하고, 그 결과를 자연스럽게 밖으로 흘려보내는 것.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때때로 나도 무언가를 해보고 싶어진다.

 

책을 많이 읽으라고 말하지 않았는데 책을 읽고 싶게 만드는 사람. 사진을 찍으라고 권하지 않았는데 주변을 한번 자세히 보고 싶게 만드는 사람. 삶을 바꾸라고 설교하지 않았는데 자신의 삶을 조금 달리 살아보고 싶게 만드는 사람. 그렇다면 존재가 선물이 된다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닐까. 나를 따르라고 요구하지 않으면서도, 상대 안에 무엇인가 시작되게 하는 것.

 

나는 무엇을 쌓고 있는가

 

결국 질문은 다시 나에게 돌아온다. 나는 계속 많은 것을 받아들이고 있다. 책을 사고, 글을 읽고, 사진을 찍고, 사람들과 만나고, 새로운 경험을 한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내 안에서 무엇이 되고 있을까. 단순히 가지고 있는 것의 목록만 길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책은 책장에, 사진은 저장장치에, 경험은 기억에 쌓여 있기만 한다면, 나는 많이 가지고 있지만 여전히 가난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이 모았느냐가 아니라 그것들이 나를 통과하면서 무엇으로 변했느냐일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가 다시 밖으로 흘러가고 있는가.

 

이기심을 다시 생각한다. 그래서 이제 이기심이라는 말을 조금 다르게 생각해보고 싶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자기 시간을 지키고, 좋아하는 것을 배우고, 자기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런 시간이 충분해야 타인에게도 줄 것이 생긴다. 문제는 모든 것을 자기에게로 끌어오는 데 있지 않다. 끌어온 것이 자기에게서 끝나는가, 다시 흘러나가는가. 병든 이기심은 계속 받지만 더 가난해진다. 베푸는 이기심은 많이 받을수록 더 많이 만들어내고, 그만큼 더 많이 내놓을 수 있다. 그렇다면 건강한 이기심은 “나만을 위해 산다.” 는 뜻이 아니라, “먼저 내가 충분히 살아서, 내 삶에서 넘쳐나는 것이 생기게 한다.” 는 뜻에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

 

앞선 글들에서 나는 자꾸 나를 넘어서는 법을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조금 다른 질문을 남기고 싶다. 나를 넘어가기 전에, 나는 먼저 충분히 나 자신이 되어 있는가. 내 안에는 흘러나올 것이 있는가. 그리고 내가 세상에서 받아들인 것들은 지금 무엇으로 바뀌어 다시 세상으로 나가고 있는가. 어쩌면 니체가 말한 베푸는 덕은 희생의 기술이 아니라, 자기 삶을 너무 풍요롭게 만들어 결국 그것이 자기 안에만 머물 수 없게 하는 기술인지도 모르겠다.(67)

 

 

이전 글에서  나는 ‘제때 죽는다는 것’을 생각했다. 새로운 내가 태어나기 위해서는 이미 역할을 다한 나를 끝낼 수 있어야 한다고 썼다. 그런데 차라투스트라는 죽음에 관한 이야기 한가운데서 뜻밖의 말을 한다. “결코 제때에 살지 못하는 자가, 어떻게 제때에 죽을 수가 있겠는가?”

처음에는 죽음에 관한 문장이라고 생각했는데, 오래 붙들고 있으니 오히려 삶에 관한 질문처럼 들린다. 나는 지금 제때 살고 있는가. 제때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지금을 산다는 말은 너무 익숙하다

 

“현재에 충실하라.” “지금을 살아라.” 너무 많이 들은 말이다. 그래서 이제는 별로 새롭게 느껴지지도 않는다. 하지만 실제로 나는 지금을 얼마나 살고 있을까. 몸은 지금 여기에 있지만 생각은 자주 다른 시간에 있다. 지나간 일을 다시 꺼내보고, 앞으로 벌어질 일을 예상하고, 아직 오지도 않은 문제를 미리 걱정한다. 현재에 앉아 있으면서 과거와 미래를 오간다. 그러고 보면 ‘지금 여기’에 있다는 것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이를 단순한 예로 설명하면  수학 시간에 영어 공부를 하지 않는 것. 해야 할 일이 있을 때 다른 일을 하면서 불안해하지 않는 것. 처음에는 너무 단순한 설명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의외로 정확하다. 지금 해야 할 일에 지금의 내가 실제로 와 있는가. 이것이 ‘제때 산다’는 말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과거는 끝났는데 나는 아직 그곳에 있을 때

 

이전 글에서  상처와 원한을 생각했다. 사건은 이미 지나갔는데 내가 계속 그 사건 안에서 살아갈 수 있다고 썼다. 그렇다면 이것도 ‘제때 살지 못하는’ 한 방식 아닐까. 시간은 앞으로 갔는데 나는 과거에 머물러 있다. 그때 왜 그렇게 했을까. 그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 사람은 왜 나에게 그렇게 했을까. 조금만 달랐으면 결과가 바뀌었을 텐데. 이런 생각을 반복하는 동안 현재는 조용히 지나간다. 과거를 돌아보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기억은 필요하고, 반성도 필요하다.

 

하지만 과거를 이해하는 것과 과거를 계속 다시 사는 것은 다르다. 이미 끝난 사건에서 무언가를 배우는 것은 현재의 일이다. 반면 끝난 장면을 계속 반복하며 다른 결말을 상상하는 것은 아직 그 시간에서 나오지 못한 것일 수 있다. 이전 글에서  ‘끝나야 할 것을 끝낼 수 있는가’를 물었다면, 이제는 이렇게 묻게 된다. 끝난 시간에서 나는 정말 나왔는가.

 

미래를 준비하는 것과 미래에 사는 것도 다르다

 

나는 미래를 생각하는 일이 비교적 익숙하다.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계획하고, 문제가 생기기 전에 점검하고, 가능한 위험을 미리 생각한다. 일을 하면서 이런 태도는 분명 필요하다. 오히려 책임을 맡은 사람에게는 중요한 능력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준비와 불안의 경계가 흐려질 때가 있다.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문제를 미리 살아버리는 것이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머릿속에서 몇 번씩 경험한다.

이 문제가 생기면 어떡하지. 결과가 좋지 않으면 어떡하지. 내가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생기면 어떡하지. 그런데 실제로 그 미래가 오면 상황은 예상과 다를 때가 많다. 결국 나는 존재하지 않았던 미래를 미리 살면서 현재의 시간을 사용한 셈이 된다. 미래를 준비하는 것은 현재의 행위다. 하지만 미래를 걱정하며 현재를 놓치는 것은 다른 문제다. 계획은 지금 하지만, 삶은 지금보다 앞서갈 수 없다.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조금 달라진 시간

 

최근 카메라를 들고 다니면서 내가 달라진 점을 생각한 적이 있다. 전철을 기다리는 시간이 예전처럼 단순한 대기시간이 아니게 되었다.

광고판을 보고, 사람이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유리에 비친 모습을 보고, 거리와 위치를 조금씩 바꿔본다. 이전에는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의 시간이었는데, 카메라를 들고 나니 그 시간이 그 자체로 하나의 시간이 되었다. 나는 이 변화가 흥미롭다. 무엇이 특별히 일어난 것은 아니다.

전철은 똑같이 오고, 사람들은 똑같이 지나간다. 달라진 것은 내가 그 시간에 조금 더 와 있었다는 점이다. 목적지에 빨리 도착하기 위해 버리는 시간이 아니라, 지금 눈앞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는 시간이 되었다. 어쩌면 ‘제때 산다’는 것은 거창한 철학적 태도라기보다 이런 변화에서 시작되는 것 아닐까. 내가 있는 시간에 내가 실제로 있는 것.

 

그런데 현재에 충실하다는 것도 또 하나의 의무가 되지 않을까

 

여기서 나는 조금 경계하고 싶어진다. “지금에 충실해야 한다.” 라는 문장도 쉽게 새로운 ‘너는 해야 한다’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를 생각하지 말아야 하고, 미래를 걱정하지 말아야 하고, 매 순간 의미 있게 살아야 한다고 자신을 몰아붙이기 시작하면, 현재에 충실하라는 말마저 하나의 압박이 된다. 니체를 읽으면서 내가 경계하게 된 것이 바로 이런 순간이다. 어떤 좋은 가치도 절대적 명령이 되는 순간 삶을 짓누를 수 있다.

 

그러므로 제때 산다는 것을 “모든 순간을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한다.” 라고 이해하고 싶지는 않다. 때로는 멍하니 있을 수도 있고,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도 있고, 과거를 오래 생각할 수도 있다. 그것 역시 지금의 나에게 필요한 시간이라면 현재의 삶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효율이나 생산성이 아니라,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가에 더 가까운 것 같다.

 

제때 산다는 것은 자기 시간에 사는 것 아닐까

 

생각을 조금 더 밀어가니 ‘제때’라는 말 자체가 흥미롭게 느껴진다. 누구의 때일까. 사회가 정한 때가 있다. 이 나이에는 이 정도는 되어야 하고, 이 시기에는 승진해야 하고, 이때쯤에는 집을 마련해야 하고, 어떤 시기에는 무엇을 포기해야 한다는 식의 시간표다. 그 시간표에 맞으면 제때 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니체가 말하는 ‘제때’가 그런 의미일까. 오히려 반대에 가까울 것이다. 니체에게 중요한 것은 시대가 요구하는 시간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힘과 가치에 맞는 삶을 만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제때 산다는 것은 남들이 정한 시기에 맞춰 사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나에게 필요한 시간을 알아차리는 것 일 수도 있다.

 

빨리 가야 할 때가 있고, 멈춰야 할 때가 있고, 오래 품어야 할 때가 있고, 이제 놓아주어야 할 때가 있다. 이전 글에서 임신을 이야기하며 기다리는 시간의 중요성을 생각했다. 또한  끝나야 할 것을 제때 끝내는 문제를 생각했다. 둘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 자기 시간의 리듬을 알아차리는 것. 빠른 것이 언제나 제때인 것은 아니다 나는 가끔 빨리 결정하는 것이 좋은 판단이라고 생각할 때가 있다. 일을 오래 끌지 않고, 정리할 것은 정리하고, 다음으로 넘어가는 것.

 

하지만 모든 것이 빠를수록 좋은 것은 아니다. 어떤 생각은 오래 품어야 하고, 어떤 관계는 충분히 겪어봐야 하며, 어떤 질문은 답을 내리지 않은 채 한동안 가지고 있어야 한다. 반대로 오래 붙잡는 것이 깊이인 것도 아니다. 이미 충분히 알았는데도 결정을 미루고, 끝났는데도 미련 때문에 놓지 못하고, 변해야 할 때 익숙함 때문에 머무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제때 산다는 것은 속도의 문제가 아니다. 무엇이 아직 익어가고 있는지, 무엇이 이미 끝났는지를 구분하는 감각에 가깝다. 이 감각은 매뉴얼처럼 배울 수 있는 것 같지 않다. 살아가며 자기 자신을 자주 들여다봐야 조금씩 알게 되는 것 같다.

 

글을 쓰면서 내가 시간을 알아가는 방식

 

매일 글을 쓰는 일도 이런 감각을 조금 만들어주는 것 같다. 어떤 생각은 오늘 바로 글이 된다. 어떤 생각은 며칠 동안 머릿속에만 있다. 억지로 쓰면 설명은 되지만 내 글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다 어느 날 다른 경험 하나와 만나면서 갑자기 문장이 된다. 반대로 처음에는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주제가 며칠 지나면 더 이상 쓰고 싶지 않을 때도 있다. 예전 같으면 끝까지 글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 역시 하나의 신호라고 생각한다. 아직 때가 아니거나, 이미 때가 지나버린 것일 수 있다. 글을 쓴다는 것도 결국 자기 안의 시간을 듣는 일인지 모른다.

 

제때 죽기 위해서는 제때 살아야 한다

 

이제 차라투스트라의 문장이 조금 다르게 들린다. “제때 살지 못하는 자가 어떻게 제때 죽을 수 있겠는가?” 끝을 잘 맞이하는 것은 마지막 순간의 기술이 아니다. 계속 미뤄온 사람은 끝도 미룰 것이다. 현재를 살지 못한 사람은 지나간 것에 계속 매달리거나 오지 않은 것을 기다릴 것이다. 반대로 매 순간 지금의 자기 삶이 어디에 와 있는지 살피며 살아온 사람은, 무엇인가가 끝날 때도 그것을 조금 더 잘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시작할 때인지, 견딜 때인지, 기다릴 때인지, 떠날 때인지. 그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제때 사는 능력 아닐까.

 

나는 지금 어디에 와 있는가

 

결국 질문은 단순해진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몸이 있는 장소를 묻는 것이 아니다. 내 마음과 생각이 지금의 삶에 와 있는지를 묻는 것이다. 지나간 성공 속에 머물러 있는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미리 걱정하고 있는가. 사회가 정해놓은 시간표를 따라가느라 내 시간을 놓치고 있는가. 아니면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과 일과 사물을 실제로 보고 있는가. 나는 ‘현재를 살아라’는 말을 이제 조금 다르게 이해하고 싶다.

현재만 중요하다는 뜻이 아니라, 과거도 미래도 결국 지금의 내가 다루어야 한다는 것. 과거는 지금 해석하고, 미래는 지금 준비한다. 그리고 실제로 살 수 있는 것은 지금뿐이다. 그래서 제때 산다는 것은 매 순간 대단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삶이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놓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늘은 기다려야 하는지, 결정해야 하는지, 놓아주어야 하는지, 시작해야 하는지. 그 시간을 다른 누군가의 기준이 아니라 내 삶 속에서 알아차리는 것. 이전 글에서 나는 물었다. “내 안에서 이제 제때 죽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오늘은 그보다 먼저 묻고 싶다. 나는 아직 오지 않은 삶을 기다리느라,  지금 이미 와 있는 삶을 놓치고 있지는 않은가.(66)

 

 

이전 글에서 나는 사랑을 나를 완성해주는 관계가 아니라, 지금의 나를 넘어서는 관계로 생각해보았다. 두 사람이 만나 서로의 결핍을 채우는 데 머물지 않고, 둘 사이에서 아직 존재하지 않았던 무엇인가를 만들어낼 수 있는가. 그런데 새로운 것이 태어난다는 말을 계속 따라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반대편의 질문을 만나게 된다. 무엇인가 새롭게 태어나려면, 무엇이 끝나야 할까.

 

『차라투스트라』 1부의 「아이와 혼인」 바로 다음에 「자유로운 죽음」이 놓여 있는 것이 우연처럼 보이지 않는다. 앞에서는 아이를 낳으라고 했다. 이번에는 죽으라고 한다. 탄생 다음에 죽음이라니 순서가 이상해 보인다. 하지만 니체의 자기극복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오히려 정확한 순서인지도 모른다. 새로운 것이 태어났다면, 이전의 것은 제때 물러나야 하기 때문이다. “제때에 죽어라” 차라투스트라는 말한다. 많은 사람은 너무 늦게 죽고, 어떤 사람은 너무 일찍 죽는다고. 그리고 낯선 가르침을 던진다. “제때에 죽도록 하라.” 처음에는 상당히 거칠게 들린다.

죽음을 어떻게 제때 선택한다는 것일까. 하지만 이 장을 단순히 생물학적 죽음에 대한 이야기로만 읽으면 앞에서 이어져온 생성과 자기극복의 흐름이 끊긴다. 자료에서는 죽음의 의미를 확장했다. 육체가 죽는 한 번의 죽음만이 아니라, 한 사람의 삶 안에서도 여러 번 일어나는 ‘사건으로서의 죽음’을 생각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생각은 마음에 오래 남았다.

 

나는 살아오면서 몇 번 죽었을까

 

돌아보면 나는 하나의 나로 계속 살아온 것 같지만 정말 그럴까. 어떤 시기에는 꼭 필요하다고 믿었던 목표가 있었다. 그 목표를 이루고 나니 생각만큼 삶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던 적도 있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물건이 어느 순간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기도 한다. 오랫동안 옳다고 생각했던 생각을 책 한 권이나 경험 하나 때문에 다시 보게 되기도 한다. 그때 무엇인가가 끝난다. 몸은 그대로지만, 이전의 나는 더 이상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세상을 보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생물학적으로는 한 번 죽지만, 살아 있는 동안에는 여러 번 죽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전에 ‘나’라고 불렀던 누군가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조금 다른 내가 태어난다. ‘비인칭적 죽음’이라는 표현을 나는 이런 의미로 받아들이고 싶다.

 

자기극복에는 죽음이 포함되어 있었다

 

지금까지 자기극복이라는 말을 여러 번 사용했다. 처음에는 그것을 주로 성장의 이미지로 생각했다. 지금보다 더 나아지는 것. 더 넓게 생각하고, 더 강해지고, 새로운 가치를 만드는 것. 하지만 이제 보니 성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것 같다. 새로운 내가 계속 더해지기만 한다면 과거의 나는 어디로 갈까. 오래된 믿음도, 낡은 욕망도, 이미 역할을 다한 목표도, 계속 붙잡고 있다면 새로운 것이 들어올 자리는 점점 좁아진다. 그래서 자기극복에는 반드시 어떤 상실이 포함된다. 새로운 생각을 받아들이기 위해 기존의 확신 하나를 버려야 할 수도 있고,

새로운 삶으로 가기 위해 오래된 자기이미지를 놓아야 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자기극복은 더 많이 갖는 것만이 아니라, 제때 무엇인가를 끝내는 능력이기도 하다.

 

매일 글을 쓰면서 만나는 작은 죽음

 

매일 글을 쓰다 보면 비슷한 경험을 한다. 어제 꽤 괜찮다고 생각했던 문장을 오늘 다시 보면 마음에 들지 않을 때가 있다. 한 달 전에는 확신했던 생각이 지금은 너무 단순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예전에는 그런 변화가 조금 불편했다. 생각이 자꾸 바뀌면 내가 일관성이 없는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니체를 읽으며 조금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 어제의 생각을 오늘도 지켜야 한다는 이유만으로 붙잡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은 아닐까. 책을 읽고, 경험하고, 생각했다면, 내 생각 역시 달라지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매일 쓰는 글은 그날의 나를 보존하는 기록인 동시에, 이전의 나와 조금씩 작별하는 기록일 수도 있다. 오늘의 글이 어제의 나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어제의 생각이 있었기에 오늘의 생각에 도달했다. 다만 이제 그 생각이 자기 역할을 다했다면 보내줄 수 있어야 한다.

 

역할을 다한 것을 붙잡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질문은 생각보다 많은 곳에 적용된다. 물건을 정리할 때도 그렇다. 한때 필요했고, 한때 좋아했고, 실제로 나에게 많은 것을 주었던 물건이 있다. 그래서 지금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쉽게 놓지 못한다. 과거의 의미까지 함께 버리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책도 비슷하다. 언젠가 읽을 것이라는 이유보다, 이 책을 가진 사람이 나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놓지 못할 수도 있다. 역할도 그렇다. 어떤 자리에서 오래 인정받았다면 그 역할이 사라지는 것이 단순히 일을 하나 그만두는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그 일을 하던 나’도 함께 사라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우리는 때가 지났는데도 붙잡는다.  물건을, 관계를, 직함을, 생각을, 과거의 성공을. 어쩌면 니체가 말하는 ‘너무 늦게 죽는 것’은 이런 상태와도 닮아 있는 것은 아닐까. 이미 끝난 것이 끝났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왜 우리는 끝난 것을 계속 붙잡는가 답은 어느 정도 알고 있다. 두렵기 때문이다. 익숙한 것을 버리고 나면 그 다음의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기존의 목표를 버리면 무엇을 원하는 사람인지 다시 물어야 한다.

 

오래된 생각을 포기하면 한동안 아무 답도 없는 상태에 머물러야 한다. 그래서 죽음보다 어쩌면 빈자리가 더 두렵다.

하지만 새로운 것은 바로 그 빈자리에서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이전 글에서 임신을 생각하며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을 오래 품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썼다. 그렇다면 그 새로운 것을 품기 위해서도 먼저 자리가 필요하다. 새로운 것을 낳는 능력과 오래된 것을 죽게 하는 능력은 사실 하나의 생성 과정의 앞뒤인지도 모른다.

 

죽음이 어떻게 축제가 될 수 있을까

 

차라투스트라는 죽음이 ‘축제’가 될 수도 있다고 말한다. 죽음과 축제는 쉽게 연결되지 않는다. 하지만 여기서 죽음을 하나의 삶의 형식이 끝나는 사건으로 읽으면 조금 이해할 수 있다. 어떤 것이 충분히 자기 역할을 다했다. 그리고 그 끝에서 다음 사람이나 다음 삶으로 무엇인가가 이어진다. 그렇다면 끝은 실패만은 아니다. 오히려 “여기까지 잘 왔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순간이 된다. 이것이  ‘완성을 가져오는 죽음’의 의미처럼 느껴진다. 끝까지 붙잡다가 낡고 말라버리는 것이 아니라, 가장 좋은 순간에 다음으로 넘겨주는 것.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공을 던졌다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공을 영원히 자기 손에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가 받아서 더 멀리 던지는 것이다. 죽는다는 것은 사라지는 것만은 아니다. 이 대목에서 앞선 「아이와 혼인」과 다시 연결된다.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나를 똑같이 복제하는 일이 아니었다. 나보다 더 멀리 갈 존재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 아이가 정말 나를 넘어가기 위해서는 어느 순간 내가 비켜나야 한다. 내가 끝까지 기준으로 남아 있으면 아이는 나를 넘어설 수 없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도 그렇고, 부모와 자식의 관계도 그렇고, 내가 만든 생각과 다음 생각 사이에서도 그렇다. 새로운 것이 정말 새로운 것이 되려면 이전의 것은 자기 중심의 자리를 내놓아야 한다. 그래서 죽음과 출산은 반대가 아니다. 둘은 하나의 움직임이다. 무엇인가 물러나기 때문에 무엇인가 태어난다.

 

몰락이라는 말을 다시 생각한다

 

『차라투스트라』를 읽기 시작했을 때 ‘몰락’이라는 말은 어둡게 들렸다. 무너지는 것. 실패하는 것. 사라지는 것.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다르게 들린다. 몰락은 꼭 패배가 아니다. 내가 다음으로 건너가기 위해 지금의 나를 내려놓는 것. 차라투스트라는 인간을 짐승과 위버멘쉬 사이에 놓인 밧줄이라고 했다. 밧줄의 의미는 그 위에 영원히 머무르는 데 있지 않다. 건너가는 데 있다. 그렇다면 몰락은 사라짐이 아니라 건너감의 조건일 수도 있다. 어린아이가 새로운 시작이라면, 그 어린아이가 태어나기 전에는 언제나 이전의 무엇인가가 끝나야 한다.

 

나는 무엇을 너무 오래 붙잡고 있는가

 

결국 이 질문도 나에게 돌아온다. 내가 지금 새롭게 되고 싶다고 말하면서도,실제로는 과거의 어떤 나를 끝까지 지키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한때 인정받았던 모습. 한때 중요했던 목표. 한때 옳다고 믿었던 생각. 이미 충분히 사용했지만 버리지 못하는 물건. 이미 끝났지만 마음속에서 계속 반복하는 관계와 사건. 그것들을 붙잡으면서 동시에 새로운 나를 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새로운 시작에 앞서 물어야 할 것이 있다. 나는 무엇을 더 얻어야 하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이제 그만 놓아주어야 하는가. 이 질문은 생각보다 어렵다. 무엇인가를 시작하는 데에는 기대가 있지만, 무엇인가를 끝내는 데에는 상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끝낼 수 없다면 시작 역시 진짜 시작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새로운 나는 옛 나의 죽음 위에서 태어난다

 

니체의 ‘자유로운 죽음’을 나는 죽음을 선택하라는 말보다, 끝나야 할 것을 제때 끝낼 수 있는 자유에 관한 말로 읽고 싶다. 이미 역할을 다한 나를 붙잡지 않는 것. 어제의 진리를 오늘의 절대적 진리로 만들지 않는 것. 과거의 성공을 오늘의 삶에 강요하지 않는 것. 그리고 다음에 올 것을 위해 자리를 내주는 것. 그렇게 보면 한 생 안에서도 우리는 여러 번 태어나고 여러 번 죽는다. 새로운 것을 배울 때, 오래된 믿음을 버릴 때, 하나의 관계에서 다른 관계로 넘어갈 때, 새로운 역할을 맡을 때, 이전의 나를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어질 때. 그 작은 죽음들이 모여 한 사람의 생성을 만든다. 그래서 이제 자기극복을 이렇게 생각해보고 싶다. 자기극복은 지금의 나를 더 크게 만드는 일만이 아니다. 때가 된 나를 끝낼 수 있는 능력이기도 하다. 그리고 나는 다시 나에게 묻는다. 새로운 내가 되고 싶다면, 지금 무엇을 더 시작할 것인가보다 먼저,

내 안에서 이제 제때 죽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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