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글에서 나는 새로운 것을 낳는다는 문제를 생각했다. 읽고, 생각하고, 흔들리고, 오래 품은 끝에 새로운 생각이 태어난다면, 그것을 낳은 나 역시 이전의 나와 같을 수 없다고 썼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상한 질문 하나가 생긴다. 그렇다면 그 모든 변화 뒤에는 변하지 않는 ‘진짜 나’가 따로 존재할까? 우리는 흔히 그렇게 생각한다. 사회생활을 하는 나, 직장에서의 나, 가족 앞에서의 나, 혼자 있을 때의 나는 서로 조금씩 다르지만, 그 모든 가면을 하나씩 벗겨내면 결국 어딘가에 ‘본래의 나’가 있을 것이라고. 마치 양파 껍질을 계속 벗기다 보면 마지막에 핵심이 나올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니체를 읽다 보면 이 익숙한 생각이 흔들린다.

 

여성의 표면은 정말 얕은 것일까

 

「늙은 여인들과 젊은 여인들」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여성의 마음을 표면에, 남성의 마음을 깊이에 비유한다. 처음 읽으면 역시 불편하다.

여성은 얕고 남성은 깊다는 식의 낡은 성별 이미지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문장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읽는다. 표면이 정말 깊이보다 낮은 것인가? 우리는 늘 표면 아래에 진짜 본질이 숨어 있다고 생각한다. 자연현상 뒤에는 법칙이 있고, 행동 뒤에는 동기가 있으며, 가면 뒤에는 진짜 얼굴이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끊임없이 묻는다. “진짜 이유가 뭐야?” “속마음은 뭐야?” “본질은 무엇이야?” 하지만 니체에게서는 이 질문 자체를 다시 의심하게 된다. 어쩌면 표면 뒤에 본질이 숨어 있는 것이 아니라, 표면에서 이미 모든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가면을 벗기면 무엇이 나올까

 

나는 사람을 볼 때도 가끔 ‘진짜 모습’을 찾으려 한다. 직장에서 보이는 모습은 사회적인 가면이고, 공식적인 자리에서 하는 말은 역할에 따른 말이며, 정말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는 사적인 순간을 봐야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면 이상하다. 직장에서의 나도 나다. 팀장으로서 판단하는 나도 나이고, 가족과 있을 때의 나도 나이며, 혼자 책을 읽으며 생각하는 나도 나다. 어느 하나가 가짜이고 어느 하나만 진짜라고 말할 수 있을까. 오히려 사람은 상황마다 서로 다른 얼굴을 만들어내면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닐까. 그렇다면 가면을 벗긴다고 맨얼굴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또 하나의 가면이 나오는 것인지 모른다. 그리고 그 가면도 거짓이라고 할 수 없다. 그것 역시 내가 살아온 방식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진짜 나’를 찾는 것과 ‘나를 만드는 것’

 

이 지점에서 이전 글의  생성 문제가 다시 돌아온다. 만약 내 안 어딘가에 완성된 ‘진짜 나’가 이미 존재한다면, 삶의 과제는 그것을 발견하는 일이 될 것이다. 껍질을 벗기고, 타인의 기대를 걷어내고, 사회적 역할을 내려놓고, 마지막에 남는 본래의 나를 찾아내는 것이다. 하지만 니체의 관점에서는 방향이 조금 달라지는 것 같다. 나를 찾는 것보다 나를 만드는 것. 이미 있는 본질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며 계속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도 달라진다. “내 안에 숨어 있는 진짜 나는 누구인가?”가 아니라, “나는 지금 어떤 나를 만들어가고 있는가?” 가 된다. 이 차이는 작지 않다.

 

니체에게도 하나의 얼굴만 있었을까

 

우리는 사상가를 읽을 때도 하나의 ‘진짜 니체’를 찾으려 한다. 젊은 니체와 성숙한 니체 가운데 어느 쪽이 진짜인가. 바그너를 사랑했던 니체와 바그너를 공격했던 니체 가운데 어느 니체가 본질인가. 차라투스트라의 니체인가, 디오니소스의 니체인가. 하지만 어쩌면 이런 질문 자체가 니체와 맞지 않을지 모른다. 니체는 계속 변했다. 가까이했던 사람과 결별했고, 자신이 한때 믿었던 것을 비판했으며, 이전의 자신까지 공격했다. 그렇다면 그의 여러 얼굴 가운데 하나를 골라 ‘이것이 진짜 니체다’라고 말하는 순간, 오히려 니체의 생성 자체를 놓치는 것이 아닐까. 한 사람의 역량은 하나의 얼굴을 끝까지 지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많은 얼굴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에 있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나에게도 조금 불편한 생각이다. 나는 일관성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제 했던 말과 오늘 하는 말이 다르면 스스로도 불편하다. 하지만 정말 살아 있는 생각이라면 변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지 않을까. 생각이 달라졌는데도 과거의 말을 지키기 위해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이 더 정직한 것일까.

 

작은 진리는 왜 소리를 지를까

 

이 에피소드의 마지막에서 늙은 여인은 차라투스트라에게 ‘작은 진리’를 건넨다. 나는 이 표현이 재미있다. 우리는 진리라고 하면 대개 거대한 것을 떠올린다. 하나뿐이어야 하고, 보편적이어야 하며, 누구에게나 적용되어야 하고, 엄숙해야 한다. 하지만 여기서는 ‘작은 진리’가 등장한다. 나는 이것을 곧바로 “진리는 사람마다 다르다”는 식으로 읽고 싶지는 않다. 그보다 먼저 떠오르는 것은 이런 것이다. 내가 실제로 살아가면서 발견하는 진리는 대부분 작다. 인생 전체를 설명하지 못한다. 모든 사람에게 적용할 수도 없다. 다만 지금의 나에게는 분명히 작동한다. 책 한 권을 읽다가 발견한 문장 하나, 누군가와의 관계에서 뒤늦게 깨달은 한 가지, 실패하고 나서야 알게 된 습관 하나. 그것들은 대문자 ‘진리’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작다. 하지만 내 삶의 방향을 조금 바꾸어놓는다. 어쩌면 내가 앞으로 가져야 할 것은 거대한 하나의 진리가 아니라, 살아가면서 계속 발견하고 수정하는 작은 진리들인지도 모르겠다.

 

작은 진리는 오래가지 않을 수도 있다

 

여기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오늘 발견한 진리가 내일도 반드시 같은 모습으로 남아 있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다. 몇 년 전의 나는 어떤 생각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지금 보면 지나치게 단순했다고 느끼는 것도 있다. 그렇다고 그때의 생각이 전부 잘못된 것이었을까.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 생각은 그때의 나에게 필요했고, 그 단계에서 나를 움직였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그것을 지나 다른 생각에 도달했다. 그렇다면 어떤 진리는 틀렸기 때문에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그 역할을 다했기 때문에 떠나보내는 것일 수도 있다. 이것은 앞서 살펴본 자기극복과도 닿아 있다. 자기극복은 내가 틀렸음을 끊임없이 증명하는 일이 아니라, 한때의 나에게 필요했던 것을 영원한 진리로 만들지 않는 일인지 모른다.

 

가면은 숨기기 위한 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나는 그동안 가면이라는 말을 부정적으로 생각했다. 자신을 숨기거나 꾸미는 것. 진짜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것. 하지만 이제는 조금 다르게 보인다. 가면은 어떤 모습을 감추기도 하지만, 동시에 아직 없던 나를 만들어내는 방법일 수도 있다. 새로운 역할을 맡으면 처음에는 어색하다. 마치 나와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 같다. 그러다 그 역할을 계속 수행하면서 실제로 이전에는 없었던 능력이 생긴다. 처음에는 가면이었던 것이 어느 순간 내 일부가 된다. 그렇다면 삶이란 진짜 얼굴을 찾기 위해 모든 가면을 벗어던지는 과정만은 아닐 것이다. 때로는 새로운 가면을 써보고, 그 가면을 통해 새로운 삶을 연습하고, 그 과정에서 또 다른 내가 만들어지는 일일 수도 있다.

 

나는 지금 진짜 나를 찾고 있는가

 

결국 질문은 다시 나에게 돌아온다. 나는 오랫동안 ‘나답게 산다’는 말을 좋아했다. 하지만 ‘나다움’이 이미 완성된 어떤 본질을 의미한다면 조금 답답해진다. 평생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할 것 같기 때문이다. 오히려 지금은 이렇게 생각하고 싶다. 나다움은 변하지 않는 핵심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살아온 변화 전체를 감당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한때 무엇을 믿었던 나도, 그것을 의심한 나도, 다른 길로 돌아선 나도, 지금 다시 새롭게 생각하는 나도 모두 나다. 가면 뒤에 마지막 하나의 얼굴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수많은 얼굴을 만들어온 과정 자체가 나일 수 있다. 그러고 보면 니체가 표면과 가면을 통해 흔드는 것은 단순히 진리의 문제가 아니다. 삶을 대하는 방식의 문제다. 완성된 본질을 찾아내려는 삶과, 계속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가는 삶. 나는 어느 쪽을 살고 있는가. 그리고 어쩌면 더 중요한 질문은 이것인지도 모른다. 가면을 모두 벗긴 뒤에 남는 ‘진짜 나’를 찾는 대신, 나는 앞으로 어떤 얼굴을 새롭게 만들어볼 것인가.

 

앞선 글에서 나는 계속 ‘새로운 가치를 만든다’는 말을 사용했다. 낙타는 주어진 가치를 짊어지고, 사자는 그것에 ‘아니오’라고 말하며, 어린아이는 새로운 놀이를 시작한다. 니체가 말하는 자기극복도 결국 지금의 나를 넘어 아직 존재하지 않는 나를 만들어가는 과정으로 읽었다. 그런데 여기까지 읽고 나니 한 가지 질문이 남는다. 새로운 것을 만든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일일까? 『차라투스트라』의 「늙은 여인들과 젊은 여인들」에서 뜻밖의 이미지가 등장한다. 여성, 임신, 그리고 출산이다.

 

왜 하필 임신과 출산일까

 

차라투스트라는 말한다. “여인에게 있어 모든 것이 하나의 해결책을 갖고 있으니, 임신이 바로 그것이다.” 처음 읽으면 불편하다. 여성의 존재를 임신과 출산으로 규정하는 말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지금의 관점에서 여성을 출산능력으로 정의한다면 받아들이기 어려운 주장이다.

그래서 나는 이 문장을 곧바로 ‘니체가 생각하는 여성의 본질’이라고 읽고 싶지는 않다. 오히려 질문을 바꾸어본다. 니체는 왜 새로운 가치의 창조를 설명하면서 임신이라는 신체적 사건에 주목했을까? 임신에는 아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자기 안에 품는 시간이 있다. 오늘 생각했다고 내일 바로 새로운 인간이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오랫동안 품어야 하고, 몸이 변해야 하며, 때가 되면 고통을 겪으며 밖으로 내놓아야 한다. 그렇다면 임신은 단순한 생물학적 현상을 넘어 꽤 강력한 창조의 이미지가 된다. 아직 없는 것을 품고, 그것 때문에 내가 변하고, 마침내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을 세상에 내놓는 것. 이것이야말로 니체가 말해온 가치창조와 닮아 있다.

 

창조는 머리에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었다

 

나는 그동안 ‘새로운 가치를 만든다’는 말을 꽤 쉽게 사용했다. 하지만 새로운 생각 하나도 그렇게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매일 글을 쓰다 보면 알게 된다. 처음부터 문장이 완성되어 나오는 경우는 거의 없다. 책에서 읽은 한 문장, 출근길에 떠오른 생각, 오래전 경험, 다른 사람과 나눈 대화가 서로 상관없는 것처럼 쌓여 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것들이 연결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무엇을 쓰려는지도 분명하지 않다. 생각이 머릿속 어딘가에 머물고 있을 뿐이다. 며칠 뒤 다시 보면 전혀 다른 의미가 나타나기도 한다. 한동안 묵혀두었다가 어느 날 갑자기 하나의 글이 되기도 한다. 돌이켜보면 이것도 일종의 잉태가 아닐까. 글을 쓴다는 것은 이미 존재하는 생각을 옮겨 적는 일이 아니라, 나도 아직 알지 못하는 생각을 한동안 품고 있는 일인지 모른다. 그 생각이 나를 통과하는 동안 나 역시 조금씩 달라진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나는 그것을 밖으로 내놓는다.

 

새로운 것을 낳으려면 나도 달라져야 한다

 

여기서 임신이라는 이미지가 더 중요해진다. 무엇인가를 임신한 몸은 이전과 똑같은 몸으로 남아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한다는 것도 마찬가지 아닐까. 새로운 생각은 단순히 내 지식 목록에 한 줄 추가되는 것이 아니다. 정말 새로운 생각을 받아들였다면 내가 세상을 보는 방식도 달라져야 한다. 니체를 읽으며 ‘신의 죽음’을 이해했다고 말하면서 여전히 누군가가 정해준 정답만을 찾는다면 무엇이 달라졌을까. ‘자기극복’을 이야기하면서도 어제의 나를 끝까지 보존하려 한다면 무엇을 극복했다는 것일까.새로운 가치를 낳는다는 것은 결국 내 안에 새로운 것을 추가하는 일이 아니라, 그것을 낳을 수 있도록 나 자신까지 변화시키는 일인지 모른다. 그래서 『차라투스트라』에는 임신뿐 아니라 해산의 고통이라는 표현도 반복된다. 새로운 나는 편안하게 추가되지 않는다. 옛 생각과 헤어져야 하고, 익숙한 가치가 흔들려야 하며, 때로는 지금까지 ‘나’라고 생각했던 무엇인가가 무너져야 한다. 창조에는 고통이 따른다는 말이 조금 이해된다.

 

여성과 어린아이는 어디에서 만나는가

 

이렇게 보니 앞서 읽었던 어린아이의 정신과 이번의 여성 이미지가 연결된다. 여성의 임신이 생성의 잠재성이라면 어린아이의 놀이는 생성의 현실화다. 하나는 아직 없는 것을 품는다. 다른 하나는 그것을 새로운 놀이로 시작한다. 임신하고, 낳고, 놀기 시작한다. 니체의 창조는 이 전체 운동에 가까운 것 아닐까.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실제 남성이냐 여성이냐가 아니다. 한 인간 안에도 임신하는 힘과 어린아이의 힘이 필요하다. 아직 없는 가능성을 품을 수 있는 힘. 충분히 기다릴 수 있는 힘. 때가 되었을 때 그것을 밖으로 내놓을 수 있는 힘. 그리고 이미 만들어진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그것과 놀 수 있는 힘. 그런 의미에서 ‘여성적 생성’은 여성에게만 해당하는 능력이 아니다. 모든 창조자에게 필요한 능력이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임신하고 있는가

 

여기서 질문은 다시 나에게 돌아온다. 나는 요즘 무엇을 품고 있는가. 매일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고 책을 읽지만, 그것들이 단지 머릿속에 쌓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니체의 말을 이해하고 정리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닐까. 읽은 것이 정말 내 안에서 변형되고 있다면, 언젠가는 니체에게 없는 무엇인가가 나에게서 나와야 한다. 니체를 더 정확히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니체를 통과한 뒤 내가 이전과 다르게 보고, 다르게 쓰고, 다르게 살아가는 무엇인가가 생겨야 한다. 그것이 독서가 하나의 임신이 되는 순간일 것이다. 그래서 이제 ‘창조’라는 말을 조금 조심해서 사용하고 싶다. 창조는 특별한 천재가 어느 날 무에서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사건이 아니다. 어쩌면 창조는 아주 오랫동안 시작된다읽고, 보고, 생각하고, 흔들리고, 품고, 기다린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이전에는 없었던 무엇인가를 내놓는다. 그 과정에서 그것을 낳은 나 역시 이전의 내가 아니게 된다. 새로운 것을 낳는다는 것은 결국 새로운 나를 낳는 일이기도 하다. 니체가 여성의 임신과 출산에서 발견한 것이 바로 이런 생성의 모습이 아니었을까.그렇다면 지금 내가 던져야 할 질문도 달라진다. 나는 무엇을 알고 있는가가 아니라, 나는 지금 무엇을 품고 있으며, 그것으로부터 어떤 나를 낳으려 하고 있는가.

 

니체는 자유로운 사람에게 묻는다.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운가? 그것이 차라투스트라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너의 눈은 분명히 말해야 한다. 무엇을 향한 자유인가?” 이 문장을 읽고 잠시 멈췄다. 지금까지 나는 자유를 주로 무엇에서 벗어나는 일로 생각했던 것 같다. 남들의 평가에서 벗어나는 것. 승진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 물건을 계속 사고 싶은 욕망에서 벗어나는 것. 조직이 정해놓은 성공의 기준에서 조금 떨어지는 것.

 

이번에 쓴 글들도 대부분 그런 과정이었다. 아무도 박수치지 않아도 할 수 있는가. 지금 이해받지 못해도 견딜 수 있는가. 시장의 소란에서 조금 떨어져 있을 수 있는가. 내 이름이 남지 않아도 괜찮은가. 욕망을 없애지 않으면서도 끌려가지 않을 수 있는가. 친구와 가까우면서도 서로의 거리를 지킬 수 있는가. 내가 중요하다고 믿는 것이 정말 내 가치인지 물을 수 있는가. 타인을 돕는다는 이름으로 나 자신에게서 달아나고 있지는 않은가. 그런데 니체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 모든 것에서 벗어났다면 묻는다. 그래서 이제 어디로 갈 것인가.

 

벗어났다고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생각해보면 이상하다. 오랫동안 힘들게 바라던 것에서 벗어났는데 오히려 허전해지는 경우가 있다. 목표 하나를 이루고 나서도 그렇다. 승진 전에는 승진이 분명한 방향이었다. 해야 할 일이 있었고, 도달해야 할 자리가 있었다. 그런데 막상 그 자리에 오르고 나면 이상한 빈 공간이 생긴다. 다음 승진을 준비하면 다시 익숙한 게임을 시작할 수 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질문이 생긴다. 계속 위로 올라가는 것이 정말 내가 원하는 삶인가. 이 질문을 던지는 순간 이전의 목표는 약해지지만, 그렇다고 새로운 목표가 저절로 생기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사이에 공백이 생긴다. 니체가 왜 ‘~로부터의 자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했는지 조금 이해된다. 멍에를 벗어던졌다고 해서 어디로 가야 하는지까지 알게 되는 것은 아니다.

 

사자는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다

 

앞에서 읽었던 세 가지 변화가 다시 떠오른다. 낙타는 말한다. “나는 해야 한다.” 사자는 말한다. “나는 원한다.” 사자는 기존의 가치 앞에서

강하게 ‘아니오’라고 말한다. 이것은 중요하다. 누군가는 한 번도 ‘아니오’라고 말하지 못한 채 평생 남이 정한 길을 따라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자의 자유에는 한계가 있다. 계속 반대하고 있다는 것은 여전히 내가 반대하는 대상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는 저렇게 살지 않겠다.” 라는 말만으로는 “그러면 어떻게 살 것인가.”에 답할 수 없다. 부수는 힘과 만드는 힘은 다르다.

 

그래서 어린아이가 필요하다

 

니체는 사자 다음에 어린아이를 놓았다. 어린아이는 싸우지 않는다. 새롭게 시작한다. 놀이하고, 자기 힘으로 바퀴를 돌리며, “그렇다.” 라고 말한다. 예전에는 이 세 변신을 이해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야 그 차이가 조금 더 실제적으로 느껴진다. 내가 더 이상 승진만을 목표로 삼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과 승진과 상관없이 어떤 리더로 일하고 싶은지 정하는 것은 다르다. 장비 소비를 줄이겠다고 결심하는 것과 그 시간과 돈을 어디에 쓰고 싶은지 정하는 것 도 다르다.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는 압박에서 벗어나는 것과 한 권의 책을 어떻게 읽고 내 삶에 연결할지 선택하는 것도 다르다. ‘하지 않는 것’ 다음에는 반드시 ‘무엇을 할 것인가’가 와야 한다.

 

무엇을 향한 자유인가

 

그래서 니체의 질문은 꽤 무겁다. 너는 무엇을 향해 자유로운가. 나는 이 질문에 아직 한 문장으로 답하기 어렵다. 회사에서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읽고 싶은지, 어떤 사진을 찍고 싶은지는 어느 정도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어떤 삶을 만들고 싶은가.” 라고 물으면

답이 쉽게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답이 없다는 것이 실패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오히려 그 질문을 계속 들고 있는 것이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자유는 방향을 갖는다

 

예전에는 자유를 구속이 없는 상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완전히 구속이 없는 삶은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가족이 있고, 직장이 있고, 책임이 있고, 몸의 한계가 있고, 경제적인 조건도 있다. 그렇다면 자유는 모든 조건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조건 안에서 내가 어느 방향으로 힘을 쓸 것인지 정하는 능력에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 회사에 다니면서도 어떤 방식으로 일할 것인지 선택할 수 있다. 가족의 책임을 지면서도 어떤 관계를 만들 것인지 선택할 수 있다. 카메라를 가지고도 계속 장비를 비교할지 밖으로 나가 한 장면을 기다릴지 선택할 수 있다. 주어진 조건은 완전히 바뀌지 않아도 그 안에서 힘의 방향은 달라질 수 있다.

 

자기입법이라는 어려운 말

 

「창조자의 길」에서 니체는 묻는다. 너는 너 자신에게 선과 악을 부여할 수 있는가. 너의 의지를 법처럼 너 자신 위에 걸어둘 수 있는가. 처음에는 ‘자기입법’이라는 말이 하고 싶은 대로 살라는 뜻처럼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오히려 반대인 것 같다. 남이 만든 규칙을 따르는 것보다

내가 만든 기준을 지키는 일이 더 어려울 수 있다. 누가 보지 않아도 해야 하고, 핑계를 댈 사람도 없으며, 실패했을 때 책임도 내가 져야 한다.

 

내가 나에게 한 약속

 

생각해보면 내게도 작은 자기입법들이 있다. 매일 몇 줄이라도 써보는 것. 책을 빨리 끝내는 것보다 질문이 생기면 멈춰보는 것. 카메라를 들었다면 많이 찍는 것보다 한 장면을 조금 더 오래 기다려보는 것. 무언가를 살 때 ‘할 수 있는 것’보다 ‘실제로 사용할 것’을 생각해보는 것. 회사에서도 문제가 생긴 뒤 해결하는 것뿐 아니라 문제가 생기기 전에 위험을 찾아보려는 것. 누가 시켜서 하는 일도 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나는 이렇게 하고 싶다.” 라고 내가 나에게 정한 것들이 생긴다. 그것들이 거창한 철학은 아니다. 하지만 아마 삶의 방향은 이런 작은 규칙들이 반복되면서 생기는 것인지도 모른다.

 

제 힘으로 돌아가는 바퀴

 

이번 책을 읽으며  자꾸 마음에 남는 이미지가 있다. 제 힘으로 돌아가는 바퀴. 외부에서 밀어주지 않아도 돌아가는 것. 칭찬받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이 좋아서 하는 것. 누군가 알아주어서 쓰는 것이 아니라 쓰는 동안 내 생각이 달라지기 때문에 쓰는 것. 좋은 장비를 가졌다는 만족 때문에 사진을 찍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조금 더 오래 바라보게 되기 때문에 사진을 찍는 것. 이런 상태가 완전히 가능할지는 모르겠다.

나는 여전히 인정받으면 기쁘고, 좋은 평가를 원하고, 사람들의 반응에 흔들린다. 그래도 바퀴의 힘이 조금씩 외부에서 내부로 옮겨갈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런데 자기 길은 왜 고독한가

 

니체는 이 대목에서 갑자기 경고한다.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길은 낭만적인 여행이 아니다. 자기 법의 판관과 수호자로 혼자 남는 일은 끔찍할 수 있다고 말한다. 왜 그럴까. 남이 만든 기준을 따르면 적어도 내가 맞는지 확인하기 쉽다. 사람들이 많이 가는 길이면 안심할 수 있다. 그러나 내 기준을 만들기 시작하면 어느 순간 묻게 된다. 내가 잘못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 혼자구나”

 

회사에서도 새로운 방식을 제안할 때 비슷한 감정을 느낄 때가 있다. 모두가 동의하면 마음이 편하다. 하지만 기존 방식과 조금 다른 판단을 해야 할 때는 결국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 내 생각이 옳다는 보장도 없다. 책을 읽고 삶의 방향을 고민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남들이 중요하다고 하는 것을 덜 중요하게 생각하기 시작하면 “혹시 내가 괜히 복잡하게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라는 의심이 생긴다. 니체가 말하는 고독은 주변에 사람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나의 판단을 최종적으로 대신 책임져줄 사람이 없는 상태인지도 모른다.

 

가장 위험한 적은 나 자신

 

그리고 니체는 더 불편한 말을 한다. “네가 마주칠 수 있는 적 가운데 가장 고약한 적은 언제나 너 자신이다.” 처음에는 사회의 가치에서 벗어나면 자유로워질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사회의 가치가 이미 내 안에 들어와 있다. 남들이 말하지 않아도 내가 나에게 말한다. 이 나이에 그래도 될까. 지금까지 해온 것이 있는데. 남들은 앞으로 가는데 나는 뒤처지는 것 아닐까. 조금만 더 가지 왜 여기서 멈추나. 시장터를 떠나도

시장터의 목소리가 내 안에서 계속 들린다. 그래서 자기극복이 어려운 것 같다. 싸워야 할 상대가 외부에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과거의 나에게 이단자가 된다는 것

 

니체는 창조자가 자기 자신에게 이단자와 마녀, 바보와 악한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 표현이 인상적이었다. 새로운 내가 되려면

한때 내가 옳다고 믿었던 것을 의심해야 할 순간이 온다는 뜻처럼 들린다. 과거의 나는 승진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많이 소유하면 가능성이 늘어난다고 생각했고, 많이 읽는 것이 좋은 독서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때의 내가 틀렸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 가치들은

그 시기의 나에게 필요했다. 하지만 지금의 내가 계속 그것을 따라야 할 이유도 없다. 과거의 나에게 충실한 것과 현재의 나에게 정직한 것은 때로 충돌한다.

 

먼저 재가 되어야 한다는 말

 

차라투스트라는 말한다. 먼저 재가 되지 않고 어떻게 새롭게 되기를 바라는가. 예전에는 이 말이 너무 극단적으로 들렸다. 왜 새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 나를 태워버려야 할까. 지금은 조금 다르게 읽힌다. 새로운 것을 시작하려면 무언가는 끝나야 한다. 새로운 관심이 들어오려면

기존의 관심 일부는 줄어야 하고, 새로운 가치가 중요해지려면 예전의 가치 일부는 내려와야 한다. 모든 것을 그대로 가지고 새로운 것까지 더할 수는 없다. 나는 새로운 삶을 원하면서도 예전의 나를 하나도 잃고 싶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자기 사랑과 자기 경멸

 

여기서 니체는 다시 이상한 말을 한다. 사랑하는 자는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을 경멸한다. 자기사랑과 자기경멸은 서로 반대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제 조금 이해된다. 내가 나 자신에게 아무런 기대가 없다면 현재의 모습에 굳이 불만을 가질 이유도 없다. “이 정도면 됐지.” 하고 끝낼 수 있다. 그런데 내 안에 조금 더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면 현재의 한계가 보인다. 그래서 불편해진다.

 

자기혐오와는 다르다

 

여기서 조심해야 한다. “나는 형편없는 사람이다.” 라는 생각은 나를 움직이지 못하게 한다. 하지만 “나는 여기에 머물 사람은 아닌 것 같다.”

는 생각은 조금 다르다. 전자는 존재 전체를 부정하지만, 후자는 현재의 모습을 하나의 과정으로 본다. 나는 이 차이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니체의 자기경멸은 자신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능성 때문에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에 가깝지 않을까.

 

나는 무엇을 창조하려는가

 

이제 가장 어려운 질문에 도착한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만들고 싶은가. 위대한 작품을 만들겠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새로운 철학을 만들 능력도 없다. 다만 내 삶의 형식은 조금씩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어떤 리더로 일할 것인가. 어떤 남편과 아버지로 살아갈 것인가. 무엇을 소유하고 무엇을 놓을 것인가. 책을 어떤 속도로 읽을 것인가. 무엇을 사진으로 남길 것인가. 퇴근 후의 시간을 어디에 쓸 것인가. 나이가 들어갈수록 무엇을 더하고 무엇을 덜어낼 것인가.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이 쌓여 결국 한 사람의 삶의 스타일이 되는 것은 아닐까.

 

창조는 거창하지 않을 수 있다

 

이전 글에서 클리나멘을 생각했다. 아주 조금 비껴가는 것. 지금도 그 이미지가 좋다. 창조자의 길이라고 해서 내 삶을 한 번에 뒤집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퇴근 후 한 시간을 다르게 쓰는 것. 새로운 물건 하나를 사지 않고 이미 가진 카메라를 들고 밖으로 나가는 것. 책을 한 권 더 사기보다 지금 읽는 책의 문장 하나를 오래 생각하는 것. 팀원의 질문에 바로 답을 주는 대신 한 번 더 생각해보도록 기다리는 것. 이 작은 차이들이 기존의 궤도에서 나를 조금씩 비껴가게 한다. 그리고 몇 년 뒤에는 그 작은 편향의 합이 꽤 다른 방향을 만들 수도 있다.

 

이제 자유를 다르게 생각한다

 

이전 글에서 나는 물었다. 아무도 박수치지 않아도 나는 이것을 할 것인가. 이후  질문이 조금 달라졌다. 이제는 단지 박수에서 자유롭고 싶은 것이 아니다. 소비에서 자유롭고, 승진욕에서 자유롭고,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운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자유를 어디에 쓸 것인지가 더 중요하다. 아마 니체가 묻는 것도 그것일 것이다.

 

너는 자유를 무엇에 사용할 것인가. 나는 앞으로도 완전히 자유롭지 않을 것이다. 조직의 평가에 흔들릴 것이고, 좋은 장비를 보면 갖고 싶을 것이고, 글의 반응이 궁금할 것이고,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면 기쁠 것이다. 그것들을 모두 없애는 것이 내 목표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다만 그 힘들이 내 삶의 방향을 전부 결정하게 두지는 않고 싶다. 그 사이에서 내가 한 번 더 묻는 것. 나는 무엇을 향해 가고 싶은가. 그리고 답이 완전히 분명하지 않아도 오늘의 작은 선택 하나를 그 방향으로 놓아보는 것. 어쩌면 자기입법이란 한 번에 삶의 법전을 완성하는 일이 아니라 이렇게 자신의 삶을 조금씩 수정해나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나는 자유란 무엇을 내려놓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내려놓는 것은 공간을 만드는 일이다. 그리고 자유는 그 빈 공간에 무엇을 놓을지를 선택하는 일이다. 박수를 내려놓은 자리에 무엇을 놓을 것인가. 승진이라는 목표가 작아진 자리에 무엇을 놓을 것인가. 소유에 쓰던 관심과 시간을 어디에 놓을 것인가. 나를 필요로 해주는 사람들에게서 한 걸음 물러났을 때 그 빈자리에서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이 아마 앞으로 내가 만들어야 할 삶일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자유를 이렇게 적어두고 싶다. 자유란 아무것에도 매이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내 힘을 어디에 쓸 것인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상태다. 그리고 창조자의 길이란 어디에도 없는 완성된 나를 찾아가는 길이 아니라, 그 선택을 반복하면서 아직 존재하지 않는 나를 조금씩 만들어가는 길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이제 나는 “무엇에서 벗어날 것인가.” 보다 조금 더 오래, “나는 무엇을 향해 자유롭고 싶은가." 를 묻고 싶다.

 

 

니체는 이웃사랑을 이야기하면서 뜻밖의 의심을 던진다. 우리는 이웃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웃에게 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에 이웃에게 달아나는 것은 아닐까. 처음에는 지나치게 냉정한 말처럼 들렸다. 타인을 돕는 것, 가까운 사람을 챙기는 것, 어려운 사람에게 마음을 쓰는 것까지 의심해야 할까. 사람은 혼자 살아갈 수 없다. 가족을 돌보고, 동료와 함께 일하고, 누군가 힘들 때 도와주는 것은 분명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니체의 말을 오래 붙들고 있으니 그가 타인을 사랑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한 번 더 들여다보라는 말처럼 느껴졌다.

 

남을 돕는 나는 좋은 사람인가

 

누군가 나에게 도움을 청한다. 나는 시간을 내어 해결해준다. 상대는 고맙다고 말한다. 기분이 좋다. 이 장면에는 별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런데 조금 더 생각해보면 내 마음에는 여러 가지가 섞여 있을 수 있다. 정말 상대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만족감도 있고, ‘나는 도움이 되는 사람이다’라는 느낌도 있다. 그 가운데 어느 것이 진짜인지를 굳이 하나만 골라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사람의 마음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다만 내가 조금 경계하고 싶은 순간은 있다. 누군가 나를 필요로 해야 내가 쓸모 있는 사람처럼 느껴질 때다. 그때 도움은 조금 다른 의미를 갖는다. 나는 상대를 돕는 동시에 상대를 통해 나 자신을 확인하고 있을 수도 있다.

 

인정받고 싶은 것과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은 조금 다르다

 

이전 글에서 타인의 박수를 이야기했다. 잘했다는 말을 듣고 싶고, 내가 한 일이 인정받기를 원하는 마음. 이번에는 조금 다른 종류의 욕망이다. 박수가 없어도 괜찮다. 다만 “저 사람에게는 내가 필요하다.” 는 느낌을 놓기 어려운 것이다. 필요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꽤 강한 만족을 준다. 회사에서도 그렇다. 중요한 문제가 생겼을 때 사람들이 나를 찾는다. 판단이 필요할 때 의견을 묻는다. 내가 해결하고 나면 일이 정리된다. 책임 있는 자리에 있다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상황이 반복되다 보면 아주 미세한 유혹이 생긴다. 사람들이 계속 나를 필요로 해주었으면 하는 마음. 나 없이는 잘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이 내 능력의 증거처럼 느껴질 수 있다.

 

좋은 리더는 계속 필요한 사람일까

 

앞에서도 이 문제를 여러 번 생각했다. 모든 것을 직접 판단하고 해결하면 일은 빠르게 진행될 수 있다. 그리고 나 역시 필요한 사람이 된다.반대로 구성원이 스스로 판단하도록 기다리고, 때로는 시행착오를 허용하고, 내가 없어도 일이 돌아가게 만들면 시간이 지나면서 나를 찾는 횟수는 줄어들 것이다. 그렇다면 어느 쪽이 더 좋은 리더일까. 예전에는 “내가 있어야 일이 잘된다.” 는 것이 능력의 증거처럼 느껴졌던 것 같다. 지금은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내가 없어도 일이 돌아가고, 사람들이 자기 판단으로 더 나은 방식을 만들어간다면 오히려 그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을 잘한 결과 아닐까.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면 한 가지를 놓아야 한다. 계속 필요한 사람이고 싶은 욕망.

 

사랑에도 붙잡음이 숨어 있을 수 있다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에게도 비슷한 일이 있을 수 있다. 누군가를 걱정한다. 잘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조언하고, 도와주고, 필요한 것을 미리 챙긴다. 그 마음에는 분명 사랑이 있다. 하지만 사랑이 깊다고 해서 언제나 상대의 삶을 대신 판단해도 되는 것은 아니다. 걱정이라는 이름으로 통제하고, 도움이라는 이름으로 상대가 실패할 기회를 없애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내 방식대로 살기를 요구할 수도 있다. 그 순간 나는 상대를 사랑한다기보다 ‘내가 사랑하는 방식에 상대가 머물기를 바라는 것’ 일지도 모른다. 사랑과 소유는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다.

 

왜 타인을 향하면 마음이 편해질까

 

니체의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본다. 왜 우리는 자신에게서 달아나 이웃에게 가는가. 타인을 향하고 있을 때는 나 자신을 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남의 문제를 해결하는 동안 내 문제를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누군가를 걱정하는 동안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묻지 않아도 된다. 일에 몰두하는 동안 “나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가.” 라는 질문을 잠시 미룰 수 있다. 바쁘다는 것은 때때로 편하다. 해야 할 일이 끊임없이 있으면 삶의 방향을 물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나에게도 바쁨은 오래 좋은 가치였다

 

성실하게 일하는 것, 책임을 다하는 것, 문제가 있으면 해결하는 것. 이런 태도는 나를 여기까지 데려온 중요한 힘이었다. 지금도 버리고 싶은 가치가 아니다. 그런데 요즘 가끔은 이런 질문이 생긴다. 나는 일을 하는 것인가, 아니면 일을 통해 나를 피하고 있는가. 해야 할 일이 많다는 이유로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을 계속 뒤로 미루고 있지는 않은가. 책을 읽고 싶다면서 업무를 하나 더 확인하고, 사진을 찍고 싶다면서

주말에도 일을 생각하고, 가족과 시간을 보내면서도 마음 한쪽에서는 다음 주 일을 정리한다. 책임감과 도피는 겉으로는 아주 비슷하게 보일 수도 있다. 그래서 더 구별하기 어렵다.

 

혼자 있을 때 무엇을 하는가

 

니체는 이웃사랑의 반대편에 자꾸 고독을 놓는다. 예전에는 고독이라는 말을 혼자 있는 시간 정도로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다르게 느껴진다. 고독은 단순히 주변에 사람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아무도 내 가치를 확인해주지 않는 상태에서 나 자신과 함께 있는 시간인지도 모른다. 직책도 잠시 내려놓고, 누군가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역할도 없고, 내가 유용하다는 증거도 없는 시간. 그때 나는 무엇을 할까. 이 질문이 의외로 어렵다.

 

혼자서도 잘 지낸다는 것과 자신을 견딘다는 것은 다르다

 

나는 혼자 책을 읽을 수도 있고, 사진을 찍으러 갈 수도 있고, 커피를 마시며 시간을 보낼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 내가 나 자신과 잘 지낸다고 말할 수 있을까. 혼자 있는 동안에도 계속 새로운 정보를 보고, 무언가를 검색하고, 다음 할 일을 생각한다면 나는 물리적으로만 혼자인 것인지도 모른다. 자신과 함께 있다는 것은 무언가로 빈틈을 계속 채우지 않는 것과도 관련 있을 것 같다. 아무것도 해결하지 않아도 되고,쓸모 있는 결과를 만들지 않아도 되고, 잠시 그냥 내가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를 보는 시간. 나는 그런 시간을 생각보다 잘 견디지 못하는지도 모르겠다.

 

타인의 문제는 선명하고 내 문제는 흐릿하다

 

회사에서는 문제를 정의하는 일이 중요하다. 장애가 있으면 원인을 찾고, 대책을 정하고, 일정을 세운다. 문제가 구체적일수록 해결하기 쉽다. 그런데 내 삶의 문제는 그렇게 선명하지 않다. 앞으로 무엇을 더 중요하게 살아야 하는가. 일과 가족, 독서와 사진을 어떻게 배치할 것인가. 내가 가진 것 가운데 무엇을 줄이고 무엇을 남길 것인가.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이 질문들은 조치계획을 세운다고 바로 해결되지 않는다. 그래서 오히려 남의 문제를 해결하는 쪽이 쉽다. 내 문제가 흐릿할수록 나는 더 선명한 타인의 문제로 달아날 수도 있다.

 

좋은 사람이라는 자기 이미지

 

또 하나 생각하게 되는 것이 있다.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이라고 믿고 싶은가. 책임감 있는 사람. 성실한 사람. 주변을 잘 챙기는 사람.

도움을 주는 사람. 좋은 이미지들이다. 그런데 이런 이미지도 너무 단단해지면 나를 가둘 수 있다. 누군가의 요청을 거절하면 좋은 사람이 아닌 것 같고, 내 시간을 먼저 챙기면 이기적인 사람처럼 느껴지고, 힘들다고 말하면 책임감 없는 사람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나는 사람들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좋은 나’라는 이미지를 지키기 위해 사람들에게 헌신하게 된다. 이것이 니체가 말하는 이타적 자기상실의 한 모습일지도 모른다.

 

자기사랑이 먼저라는 말

 

차라투스트라는 말한다.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말에 앞서 먼저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고. 나는 이 말을 ‘나를 먼저 챙겨라’ 정도로 읽고 싶지는 않다. 더 어려운 말인 것 같다. 타인의 인정이나 필요 없이도 나 자신의 존재를 견딜 수 있는가. 성과가 없는 날에도.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 날에도. 무언가 대단한 일을 하지 않은 날에도. 그날의 나에게 “오늘은 쓸모가 없었다.” 라고 말하지 않을 수 있는가. 어쩌면 자기사랑은 자기 자신을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증명하지 않아도 자신과 함께 있을 수 있는 능력인지도 모른다.

 

그러면 타인을 덜 사랑하게 되는가

 

오히려 반대일 수도 있겠다. 내가 나 자신의 가치를 타인에게서 계속 확인받지 않아도 된다면 상대를 조금 더 자유롭게 둘 수 있다. 상대가 나를 필요로 하지 않아도 괜찮고, 내 조언을 따르지 않아도 괜찮고, 나보다 잘하게 되어도 괜찮다. 내가 도왔다는 사실을 잊어도 괜찮다. 이전 글에서  생각했던 ‘싸구려 여관’처럼. 누군가 잠시 쉬었다가 나를 잊고 자기 길을 갈 수 있게 하는 것. 그것은 자기 자신이 어느 정도 충만한 사람에게 더 가능한 사랑일지도 모른다.

 

이웃보다 벗

 

그래서 니체는 이웃보다 벗을 말하는 것 같다. 이웃은 단지 가까이 있다는 이유로 나와 관계를 맺는 사람일 수 있다. 반면 니체의 벗은

내가 지금의 나를 넘어가게 하는 사람이다. 내 외로움을 메우기 위해 붙잡는 사람이 아니라, 각자의 고독을 지키면서도 서로를 더 멀리 가게 만드는 사람. 이전 글에서  생각했듯 좋은 친구는 나를 편안하게만 해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제 한 가지를 더 알 것 같다. 좋은 친구가 되려면 상대에게 내가 계속 필요하기를 바라지 않아야 한다.

 

먼 곳에 있는 것을 사랑한다는 것

 

니체는 이웃보다 더 먼 곳에 있는 사람과 미래의 사람을 사랑하라고 말한다. 이 표현도 이제 조금 이해된다. 가까운 사람의 즉각적인 반응보다 아직 오지 않은 가능성을 생각하는 것. 오늘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으로 보이는 것보다 그 사람이 나중에 혼자 설 수 있도록 돕는 것. 지금의 편안함보다 미래의 성장을 택하는 것. 그리고 나 자신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현재의 내가 편안한 선택보다 미래의 내가 조금 더 넓어질 선택을 하는 것. 그 미래의 나 역시 지금의 나에게는 일종의 ‘먼 사람’이다.

 

나는 누구를 위해 이렇게 바쁜가

 

요즘 하루를 돌아볼 때 이 질문도 적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 나는 누구를 위해 바빴는가. 가족을 위해서였는가. 회사를 위해서였는가.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였는가. 아니면 내가 필요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는가. 아마 하나의 답만 나오지는 않을 것이다. 여러 마음이 섞여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사실을 정직하게 보는 것 같다. 나는 앞으로도 사람을 도울 것이다. 가족을 챙길 것이고,

팀원들의 문제에 함께 고민할 것이고, 필요한 곳에서는 책임을 질 것이다. 니체를 읽는다고 그 모든 관계에서 물러나고 싶지는 않다.

 

다만 한 가지는 조금 달라지고 싶다. 타인을 사랑하는 일과 타인을 통해 나를 증명하는 일을 구별하는 것. 누군가를 돕되 그 사람이 계속 나를 필요로 하기를 바라지 않는 것. 곁에 있되 상대의 삶을 내 방식으로 채우지 않는 것. 그리고 사람들에게 향하기 전에 가끔은 나 자신에게도 돌아오는 것.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이 두려운지, 어떤 삶을 살아가고 싶은지. 그 질문을 타인의 문제로 덮지 않는 것. 어쩌면 니체가 말하는 자기사랑은 이기심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오히려 자신을 잃지 않아야 타인도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도록 둘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 이웃사랑을 생각하며 나는 이렇게 묻고 싶다. 나는 이 사람을 사랑하고 있는가. 그리고 조금 더 불편하게, 아니면 이 사람을 통해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있는가. 그 둘을 구별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타인에게서 도망치듯 나 자신에게 돌아올 수 있을 것 같다(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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