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스의 철학』을 읽으며 센스에 대한 생각이 조금씩 확장되고 있다. 처음에는 센스를 감각이라고 생각했다. 이후에는 재현에서 벗어난 작은 어긋남 속에서 중요한 무엇인가를 포착하는 능력이라고 생각했고, 리듬에 관한 부분을 읽으면서는 반복과 예측, 그리고 예측오차 사이에서 적절하게 흔들리는 것이 센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우연성에 관한 부분에서는 모든 부족함을 채우고 모든 어긋남을 수정하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이번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즐거움과 향락, 그리고 생명의 자유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즐거움의 본질은 그저 안심하고 안정된 상태가 아니다. 즐겁다는 것은 어딘가에 문제가 있다는 뜻이다.

 

처음에는 ‘문제’라는 표현이 이상하게 들렸다.  우리는 보통 문제가 없는 상태를 좋은 상태라고 생각한다. 예상대로 일이 진행되고, 걱정할 것이 없으며, 아무런 불편도 없는 상태를 원한다. 하지만 정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모든 것이 예상대로 흘러간다면 그것을 계속 즐겁다고 할 수 있을까. 리듬에 대해 생각했던 것을 다시 떠올렸다.

 

반복 → 예측 → 예측오차 → 다시 예측

 

완전히 똑같은 반복만 계속된다면 안정적이기는 하지만 변화가 없다. 다음 박자가 조금 늦어지거나 예상하지 못한 음이 들어올 때 리듬이 살아난다. 즐거움도 비슷한 것 같다.

 

안정 → 작은 어긋남 → 긴장 → 반응 → 다시 안정

 

어쩌면 즐거움은 문제가 없는 상태가 아니라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작은 문제가 계속 생겨나는 상태인지도 모른다. 게임의 결과가 처음부터 정해져 있다면 재미가 없다. 여행도 모든 순간을 미리 알고 있다면 설렘이 줄어든다. 사진을 찍으러 나갔을 때도 예상했던 장면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보다 생각하지 못했던 빛이나 사람을 만났을 때 더 즐거울 때가 있다.

 

우연성이 들어오는 순간이다. 즐거움과 불안 사이에는 ‘정도’가 있다. 그렇다면 어긋남이 클수록 더 즐거운 것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예측에서 아주 조금 벗어나면 변주가 되고 즐거움이 될 수 있지만,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크게 벗어나면 불안과 공포가 될 수도 있다. 내 나름대로 연결하면 이렇다.

 

예측과 일치 → 안정

작은 어긋남 → 변주와 즐거움

의미 있는 어긋남 → 발견

기존 리듬을 바꾸는 어긋남 → 사건

감당하기 어려운 어긋남 → 불안

 

결국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정도’다.  센스는 어긋남이 없는 상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의 어긋남을 받아들이고 즐길 수 있는지를 감각하는 것과 관계있는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왜 고통스러운 것까지 반복할까

여기에서 책의 이야기는 조금 더 낯선 곳으로 간다. 생물이라면 기본적으로 고통을 피하고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려고 할 것 같다. 그런데 인간의 행동을 보면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때로는 불편하고 힘든 것을 알면서도 반복한다. 조금 더 강한 자극을 원하고, 그 결과 후회할 것을 알면서도 다시 같은 행동을 하기도 한다.

 

이 지점에서 책에 등장하는 향락과 죽음 충동이라는 개념을 생각하게 되었다. 여기서 죽음 충동을 문자 그대로 죽음을 욕망하기 보다는 생물로서 안정과 자기 보존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반복과 이탈의 힘으로 이해 했다. 쾌락과 향락도 조금 다르게 느껴진다. 쾌락이 불편함을 줄이고 편안한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라면, 향락에는 오히려 불편함과 고통이 섞여 있다. 그런데도 계속 끌린다.

 

“오늘은 괜찮아”라는 말

일상에서도 비슷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힘든 하루를 보낸 뒤 평소보다 많이 먹거나, 꼭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사거나, 술을 평소보다 많이 마시는 경우가 있다. 그 순간 이런 말을 하기도 한다.  “오늘 정도는 괜찮아.” 생각해보면 이 말은 단순한 변명이 아니라 평소 자신이 지키던 규칙을 잠시 해제하는 허가처럼 작동할 수 있다.  평소에는 절제해야 한다. 아껴야 한다. 적당히 해야 한다. 라는 자기 리듬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오늘은 괜찮아”라고 말하는 순간 그 리듬에서 잠시 벗어난다. 그리고 그 일탈 자체에서 해방감을 느낀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과식은 불편함을 남기고, 불필요한 소비는 후회를 남기며, 과음은 다음 날의 힘겨움을 남길 수 있다. 그러면 이상한 순환이 만들어진다.   부정성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다른 부정성으로 바뀌었고, 그 사이에 강한 쾌감이 들어간 것이다. 리듬을 깨는 행동이 또 다른 리듬이 된다. 더 흥미로운 것은 이런 행동이 반복될 때다. 처음에는 일상적인 리듬에서 잠시 벗어나는 일탈이었지만 반복되면 그 일탈 자체가 하나의 패턴이 된다.

 

리듬을 깨기 위해 했던 행동이 어느 순간 또 다른 리듬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향락이라는 개념이 조금 이해된다. 평소의 리듬을 벗어나는 강한 자극에서 쾌감을 얻고, 그 자극을 반복하면서 점점 더 강한 자극을 원하게 되는 것. 그 강도가 자신을 조절하던 기존의 리듬을 넘어설 때 자기 파괴적인 방향으로 갈 수도 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욕망이나 충동을 완전히 없애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느 지점에서 내 리듬을 잃기 시작하는지를 알아차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여기서 한기자 의문이 생긴다. 우리는 왜 안정으로 돌아가는데 만족하지 않고 일부러 리듬을 깨뜨리려 할까. 단순히 자극을 좋아해서 일까. 아니면 반복된 상태와 다른 방향으로 움질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생명에게  중요한 것은 아닐까

 

당구공에는 센스가 필요하지 않다.  

책에서 물리와 생명의 차이에 관한 이야기를 만났다. 당구공 두 개가 부딪친다고 생각해본다. 공의 속도와 방향, 충돌 각도와 마찰 같은 조건이 정해져 있다면 결과도 물리 법칙에 따라 결정된다. 같은 조건인데 공이 그날 기분에 따라 전혀 다른 방향으로 굴러간다면 당구라는 게임 자체가 성립하기 어려울 것이다. 물리는 그렇게 자유롭지 않다.

 

그런데 생명은 이상하다. 생명 역시 물질로 이루어져 있고 물리 법칙을 벗어나지 못하지만, 생명의 행동은 당구공처럼 하나의 결과로만 결정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같은 상황에서도 어떤 사람은 A를 선택하고, 어떤 사람은 B를 선택한다. 심지어 같은 사람도 어제와 오늘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

 

자극 A → 반응 B 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자극 A → 여러 가능성 → 선택 → 결과 가 가능해진다.

물론 인간의 행동 역시 신체적 조건, 환경, 경험 등 수많은 원인의 영향을 받는다. 여기서 말하는 자유를 물리 법칙에서 벗어나는 자유라고 이해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내게 흥미로운 것은 생명에는 과거의 반복을 그대로 재현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생명의 자유는 어긋날 수 있는 자유인지도 모른다

 

여기에서 처음 센스에 대해 생각했던 ‘어긋남’이 다시 돌아온다. 당구공에게 어긋남은 오차다. 하지만 생명에게 어긋남은 반드시 오류만은 아닐 수 있다. 매일 같은 길을 걷다가 어느 날 다른 길로 갈 수 있다. 오랫동안 해왔던 방법 대신 다른 방법을 시도할 수도 있다. 늘 지나치던 풍경 앞에서 어느 날 갑자기 멈춰 카메라를 들 수도 있다. 그 작은 어긋남에서 새로운 일이 시작된다.

 

반복 → 예측 → 어긋남 → 선택 → 새로운 리듬

 

이렇게 보면 생명의 자유는 아무런 규칙도 없는 무질서한 자유가 아니라 자신의 리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때때로 그 리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유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서 우연성도 의미를 갖는다. 우연한 만남이나 사건이 일어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것을 받아들여 이전과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을 때 우연은 내 삶의 일부가 된다. 결국 다시 센스로 돌아온다. 자신의 리듬을 가지면서도 때때로 그 리듬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 어쪄면 그것이 생명에게 주어진 작은 자유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에는 양면성이 있다. 어긋남은 즐거움과 발견을 만들지만 지나치면 불안이 될 수 있다. 일탈은 해방감을 주지만 반복되면 또 다른 리듬이 되어 나를 지배할 수도 있다. 안정만 추구하면 삶은 경직될 수 있지만 강한 자극만 추구하면 자신의 리듬 자체를 잃을 수도 있다. 결국 센스는 다시 ‘정도’의 문제가 된다.

 

언제 반복할 것인가. 언제 벗어날 것인가. 어떤 어긋남을 즐길 것인가. 어떤 충동에서는 멈출 것인가. 그리고 어떤 우연 앞에서는 지금까지의 나와 다른 선택을 해볼 것인가. 당구공에는 이런 고민이 필요 없다. 하지만 생명은 다르다. 어쩌면 센스가 필요한 이유는 우리가 당구공처럼 정해진 궤도만을 따라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센스의 철학』을 읽으며 센스를 감각에서 시작해 리듬까지 생각해보았다. 처음에는 센스를 무엇인가를 잘 느끼는 능력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책을 읽어나가면서 센스는 수많은 가능성 가운데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 정해진 모델을 그대로 재현하지 않으면서도 중요한 무엇인가를 포착하는 능력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리듬에 관한 부분에서는 또 하나의 생각이 이어졌다. 우리는 반복을 통해 다음을 예상하고, 그 예상과 실제 사이의 작은 어긋남을 경험한다. 그 어긋남이 리듬을 만든다. 그런데 책을 조금 더 읽다 보니 이번에는 ‘우연성’이라는 말이 눈에 들어왔다. 센스와 우연성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우리는 삶을 자꾸 완성하려고 한다.

무언가 부족하다고 느끼면 그것을 채우려고 한다. 업무에서도 그렇다. 목표가 100인데 현재가 80이라면 자연스럽게 부족한 20을 찾는다.   목표 → 현재 상태 → 부족함 발견 → 보완 → 목표 달성. 이 방식은 매우 익숙하고 효과적이다.

 

업무에서는 부족한 부분을 찾아내고 개선하는 능력이 중요하다. 계획에서 빠진 것을 찾고, 위험요소를 발견하고, 목표와 실적의 차이를 줄이는 것은 일을 잘하기 위한 기본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러한 방식이 삶 전체를 바라보는 방식이 될 때 생기는 것 같다. 100을 목표로 하는 순간 80은 ‘80을 이루었다’가 아니라 ‘20이 부족하다’가 된다.

 

그리고 부족한 20을 채우면 또 다른 목표가 생긴다. 부족함 → 노력 → 성취 → 새로운 부족함 → 다시 노력 끝없이 이어진다.

 

부족함을 모두 채우면 우연이 들어올 자리가 없어진다. 

책에서 흥미롭게 느껴진 부분은 부족함을 반드시 제거해야 할 것으로만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처음에는 조금 낯설었다. 부족하면 채우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그런데 생각해보면 무엇인가를 완벽하게 계획하고 빈틈없이 채워놓을수록 예상하지 못한 것이 들어올 여지는 줄어든다. 모든 시간을 계획하고, 모든 결과를 목표에 맞추고, 모든 어긋남을 수정하고, 모든 부족함을 보완한다면, 그 삶은 효율적일 수 있지만 처음부터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 나타날 가능성은 줄어들 것이다. 여기서 저자가 말하는 우연성을 생각하게 된다. 우연은 계획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통제의 관점에서는 방해가 될 수 있지만, 다른 관점에서는 새로운 것이 시작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어긋남을 모두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앞서 센스에 대해 생각하면서 ‘헤타우마’라는 개념이 인상적이었다. 대상을 정확하게 재현하지 못했다고 해서 반드시 실패한 것은 아니다. 실제 대상과 조금 어긋났는데 그 어긋남 속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매력이 나타날 수도 있다. 여기에서도 같은 구조가 보인다.

목표 → 결과 → 차이가 생겼을 때 우리는 보통 그 차이를 오류로 생각한다. 하지만 모든 차이가 제거해야 할 오류일까. 어떤 차이는 실수일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차이는 처음부터 계획하지 않았던 새로운 가능성일 수도 있다. 그래서 결과가 예상과 다를 때 두 가지 질문이 가능하다.

 

“무엇이 부족했는가?”

그리고 

“예상하지 못했던 무엇이 생겨났는가?”

 

첫 번째 질문은 개선을 위한 질문이다. 두 번째 질문은 발견을 위한 질문이다. 센스에는 어쩌면 두 번째 질문을 할 수 있는 능력도 포함되는 것 같다.

 

개선 능력이 너무 강하면 발견 능력이 약해질 수도 있다

업무를 하다 보면 부족한 부분을 빨리 발견하는 사람이 있다. 문제가 보이고, 누락된 것이 보이고, 개선해야 할 부분이 보인다.

분명 중요한 능력이다. 하지만 모든 것을 개선의 관점에서만 보면 예상과 다른 것은 자연스럽게 수정해야 할 대상이 된다.

그러면 우연히 나타난 좋은 결과도 제거할 수 있다. 원래 계획과 다르지만 더 나은 방법, 실수에서 시작했지만 새로운 가능성이 된 결과, 목표에는 조금 부족하지만 그 사람만의 특징이 나타난 결과. 이런 것들이 있을 수 있다. 그래서 한 가지 역설을 생각하게 된다.

개선 능력이 너무 강하면 발견 능력이 약해질 수도 있다.

 

늘 부족한 부분을 찾다 보면 이미 존재하는 좋은 것보다 없는 것이 먼저 보이기 때문이다.

 

우연성은 ‘아무렇게나 한다’는 뜻이 아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우연성을 긍정한다는 것이 계획이나 노력을 포기한다는 뜻은 아니라는 점이다. 우연에 맡긴다는 것과 우연이 들어올 공간을 남긴다는 것은 다르다.

 

계획은 필요하다. 목표도 필요하다. 반복하고 연습하는 것도 필요하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완벽하게 통제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내가 생각한 것은 이 정도다. 계획을 세우되 계획 밖의 것을 볼 수 있는 것. 목표를 가지되 목표와 다른 결과를 곧바로 실패라고 하지 않는 것. 노력하되 모든 부족함을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 그 빈틈 속에서 우연한 무엇인가가 나타날 수 있다.

 

자신의 우연성을 남긴다는 것

책의 표현 중 특히 흥미로운 것은 ‘자신만의 고유한 우연성을 남긴다’는 생각이었다. 우리는 흔히 자신다움을 명확한 정체성이나 일관된 취향에서 찾는다.

“나는 이런 사람이다.”

“나는 이것을 좋아한다.”

“나는 이런 방식으로 일한다.”

그런데 자신다움에는 그렇게 의식적으로 선택한 것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앞서 이야기했던 신체성처럼 나도 모르게 반복하는 행동이 있고, 우연히 만난 사람이나 책, 장소 때문에 생긴 취향도 있다. 처음부터 계획하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나를 구성하고 있는 것들이 있다. 어쩌면 ‘나다움’은 완벽하게 설계된 결과가 아니라 수많은 우연이 쌓인 흔적인지도 모른다.

 

사진에서도 우연은 중요하다.

사진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좋은 사진을 찍겠다고 완벽하게 계획할 수는 없다. 어느 시간에 어느 장소로 가고 어떤 렌즈를 사용할지는 결정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순간 빛이 어떻게 들어올지, 누가 지나갈지, 어떤 표정을 마주칠지,
내가 왜 어느 순간 갑자기 멈추게 될지는 모두 계획할 수 없다.

 

사진가가 할 수 있는 것은 모든 것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우연히 나타난 것을 알아볼 준비를 하는 것에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

그래서 센스 있는 사진은 모든 것이 계획된 사진이라기보다,

계획 속으로 들어온 우연을 놓치지 않은 사진

 

이라고 표현해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리듬과 우연성. 앞선 글에서 리듬에 대해 생각했다. 반복이 있어야 예측이 생기고, 예측이 있어야 어긋남도 느낄 수 있다.

그렇다면 우연성도 완전히 무질서한 상태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어느 정도의 반복과 리듬이 있을 때 그 반복에서 벗어난 것이 눈에 들어온다. 반복 → 예측 → 어긋남 → 발견.  자기 리듬이 있기 때문에 예상하지 못했던 것을 감각할 수 있다.

 

문제는 그 리듬을 너무 완벽하게 유지하려고 할 때다. 어긋남이 나타날 때마다 원래대로 되돌린다면 우연은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다. 그래서 자기 리듬을 가진다는 것은 우연성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연을 발견할 수 있는 기준을 갖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무엇을 채우고 무엇을 남겨둘 것인가.

결국 센스에 대한 생각은 다시 ‘정도’의 문제로 돌아온다. 모든 부족함을 그대로 두는 것도 아니다. 모든 부족함을 채우는 것도 아니다. 모든 우연을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다. 모든 우연을 제거하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채울 것인가. 무엇을 남겨둘 것인가. 어떤 어긋남을 수정할 것인가. 어떤 어긋남을 조금 더 바라볼 것인가. 를 감각하는 것이다.앞서 센스를 ‘어긋남 속에서도 중요한 무엇인가를 포착하는 능력’이라고 생각했다. 리듬을 읽으면서는 ‘자기 리듬을 가지면서도 그 리듬을 깨뜨리는 세계의 신호를 감각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우연성을 생각하면서 한 가지를 더 보태고 싶다.

센스란 모든 것을 계획대로 완성하는 능력이 아니라, 계획 밖에서 찾아온 우연이 무엇을 가져왔는지 알아볼 수 있는 능력인지도 모른다.

 

부족함을 모두 채우지 않는 것. 어긋남을 모두 수정하지 않는 것.

삶의 한쪽에 조금의 빈 공간을 남겨두는 것. 그곳으로 들어온 예상 밖의 것을 알아보고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  어쩌면 자신만의 스타일도, 새로운 생각도, 삶의 중요한 변곡점도 그렇게 생겨나는 것이 아닐까.

 

 

 

지바 마사야의 『센스의 철학』을 읽으며 처음에는 센스를 ‘감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책을 읽어나가면서 센스는 단순히 잘 느끼는 능력이라기보다, 수많은 감각 가운데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생략할 것인지, 그리고 정답이나 모델에서 조금 벗어나더라도 중요한 무엇인가를 포착하는 능력에 가깝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생각을 정리해 앞선 글에 남겼다.

 

책을 조금 더 읽으면서 이번에는 ‘리듬’이라는 개념이 눈에 들어왔다.  센스와 리듬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리듬은 반복이 아니라 반복과 차이의 경험이다. 처음에는 리듬을 단순한 반복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완전히 동일한 것만 반복된다면 우리는 오히려 리듬을 의식하지 못할 수도 있다. 반복을 경험하면서 다음에 무엇이 올지 예상하고, 실제로 일어난 것이 그 예상과 조금씩 달라질 때 리듬을 느낀다.

이를 내 방식으로 표현하면, 반복 → 예측 → 예측오차 → 다시 예측  이라는 구조가 된다.

 

음악을 들을 때 다음 박자를 예상하지만 실제 연주에서는 조금 늦어지기도 하고 빨라지기도 한다. 그 작은 어긋남 때문에 음악은 기계적인 반복이 아니라 살아 있는 리듬이 된다. 그렇다면 센스도 어쩌면 예측과 어긋남 사이를 다루는 능력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관계에도 리듬이 있다. 이 리듬이라는 개념을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도 적용해 보았다.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람과의 관계에는 반복이 있다. 말하는 방식, 연락하는 간격, 서로에게 기대하는 행동이 어느 정도 예상된다. 하지만 사람은 매번 똑같지 않다. 평소 말이 많던 사람이 오늘은 조용할 수도 있고, 늘 괜찮다고 하던 사람이 어느 날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이때 상대를 내가 알고 있는 모습 그대로만 대한다면 그 작은 변화를 발견하지 못한다. 관계에서의 센스는 바로 반복 속에서 작은 변화를 감지하고 그 변화에 맞추어 자신의 행동을 조절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말할 때와 침묵할 때, 다가갈 때와 물러설 때, 물어볼 때와 기다릴 때.

센스 있는 관계란 상대에게 무조건 나를 맞추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의 변화에 반응하면서 둘 사이의 리듬을 만들어가는 관계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측오차가 커지면 ‘사건’이 된다. 여기서 또 하나의 생각이 이어졌다. 작은 예측오차는 기존의 리듬 안에서 받아들일 수 있다. 음악에서 박자가 조금 늦어져도 우리는 그것을 실수라고 생각하지 않고 변주로 받아들인다. 그런데 예상과 실제의 차이가 점점 커져 기존의 패턴으로는 설명할 수 없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반복 → 작은 어긋남 → 변주 → 큰 어긋남 → 사건  이라는 흐름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단순히 예측오차가 크다고 해서 모두 사건이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어긋남이 이후의 나를 변화시키는가이다.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발생했을 때 그것을 기존 상태에서 벗어난 오류라고 생각하면 ‘사고’가 된다. 사고라면 원인을 찾고 원래 상태로 복구해야 한다. 반대로 그 일을 계기로 이전과는 다른 방향을 바라보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하나의 ‘사건’이 될 수 있다.

 

예측오차 → 기존 질서로 판단 → 사고 → 복구 또는 예측오차 → 기존 질서를 다시 바라봄 → 사건 → 새로운 리듬

 

같은 일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단순히 원래 자리로 돌아가야 할 사고가 될 수도 있고, 이전과 이후를 나누는 새로운 변곡점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사건이란 단순히 ‘큰일’이 아니라 기존의 예측 방식 자체를 바꾸어 놓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예기불안은 아직 오지 않은 예측오차를 미리 경험하는 것일까. 예측과 예측오차를 생각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불안이라는 감정도 떠올랐다.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우리는 앞으로 예상과 다른 일이 생길 가능성을 생각하며 불안해한다. 이를 조금 다르게 표현하면 예기불안은 미래에 발생할지도 모르는 예측오차를 현재로 끌어와 미리 경험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모든 예측오차를 제거하려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다. 세상은 원래 내가 예상한 대로만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어느 정도의 어긋남을 견디고 그것을 실패가 아닌 변주로 받아들이는 능력이 필요하다.

 

놀이와 게임, 픽션은 불확실성을 연습하는 공간

책에서 놀이와 게임, 픽션의 감상이 세계의 불확정성을 길들이기 위한 습관과 비슷하다는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게임에서는 실패하고 다시 시작한다. 소설에서는 예상하지 못한 사건이 벌어지지만 우리는 책을 덮지 않고 다음 페이지를 넘긴다. 놀이에서는 일정한 규칙이 있지만 그 안에서 매번 다른 일이 벌어진다.공통점은 불확실성을 제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예측 → 어긋남 → 받아들임 → 다시 예측을 반복한다.

 

그렇다면 놀이와 게임, 픽션을 경험한다는 것은 불확실한 세계를 통제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라기보다 불확실성과 함께 움직이는 자기만의 리듬을 연습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세계를 길들이면 감각이 무뎌지는 것은 아닐까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세계의 불확실성을 계속 길들이다 보면 오히려 외부의 변화에 감응하는 정도가 낮아지는 것은 아닐까. 처음에는 놀라웠던 것도 반복되면 익숙해진다. 예상 밖의 일이 일어나도

 

‘원래 그런 거야.’ 라고 생각하며 모두 기존의 패턴 안으로 집어넣는다면 더 이상 변화에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그것은 안정적일 수 있지만 동시에 새로운 것을 감각하지 못하는 상태일 수도 있다. 그래서 불확실성을 길들이는 것에는 두 방향이 있는 것 같다.

 

감응의 조절은 변화에 휘둘리지 않으면서도 차이를 느끼는 것이다. 반면 감응의 둔화는 모든 변화를 익숙한 것으로 처리하면서 차이를 더 이상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이 차이가 중요해 보인다.

 

자기 리듬을 가지면서도 흔들릴 수 있는 것  결국 다시 센스로 돌아온다. 자기 리듬이 전혀 없다면 세계에서 일어나는 작은 변화에도 계속 흔들릴 수 있다. 모든 예측오차가 하나의 사건이 되어버린다. 반대로 자기 리듬이 너무 강하면 어떤 변화도 사건이 되지 못한다.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는 방식으로 해석해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센스란 흔들리지 않는 능력이 아니라 어느 정도 흔들릴 것인지를 조절하는 능력인지도 모르겠다.

 

지금까지의 생각을 하나의 흐름으로 정리하면 이렇다.

 

반복

예측

예측오차

작은 어긋남은 변주로 받아들인다

큰 어긋남은 기존 리듬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때로는 그것이 사건이 되어 새로운 리듬을 만든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자기만의 리듬을 갖는다’는 말도 조금 다르게 들린다.

 

자기 리듬을 갖는다는 것은 세상의 변화에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불확실한 세계 속에서도 자신을 유지하면서 필요한 순간에는 기꺼이 흔들릴 수 있는 상태인지도 모른다.

 

첫 번째 글을 쓰면서 나는 센스를 ‘어긋남 속에서도 중요한 무엇인가를 포착하는 능력’이라고 생각했다. 조금 더 읽은 지금은 여기에 한 가지를 덧붙이고 싶다. 센스란 자기만의 리듬을 가지면서도, 그 리듬을 깨뜨리는 세계의 신호를 감각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긋남을 모두 오류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그렇다고 모든 어긋남을 무심하게 흘려보내지도 않는 것. 어떤 것은 변주로 받아들이고, 어떤 것은 나를 변화시키는 사건으로 받아들이는 것. 어쩌면 그 ‘정도’를 감각하는 것이 센스가 아닐까.

 

 



지바 마사야의 『센스의 철학』을 읽고 있다.  책 제목에 있는 ‘센스’라는 말을 처음에는 ‘감각’ 정도로 생각했다. 우리는 흔히 옷을 잘 입는 사람에게 패션 센스가 있다고 하고, 사진이나 음악을 잘 선택하는 사람에게 감각이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책을 읽어갈수록 저자가 말하는 센스는 단순히 무엇을 잘 느끼는 능력과는 조금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센스란 많은 것을 감각하는 능력이 아니라, 감각한 것 가운데 무엇을 선택하고 어떻게 다룰 것인가를 판단하는 능력에 가까운지도 모르겠다.

 

너무 많은 것을 보는 인간

 

책에서 흥미로웠던 표현 가운데 하나가 인간은 ‘인지가 남아도는 동물’이라는 말이었다. 인간은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보고 듣고 생각한다. 길을 걷는 데 필요한 것은 앞에 장애물이 있는지, 자동차가 오는지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길가의 나무를 보고, 사람들의 표정을 보고, 오래된 건물에 비치는 오후의 빛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것에 의미를 붙인다. 너무 많은 것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오히려 무엇인가를 선택하고 나머지는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사진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카메라 앞에는 언제나 수많은 것이 존재하지만 사진가는 그 모든 것을 담을 수 없다. 어디에 서고, 무엇을 바라보고, 어디까지 프레임 안에 넣을 것인가를 결정한다.

 

세상 전체 → 감각 → 주목 → 선택 → 프레임

 

사진의 프레임은 어쩌면 우리가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과 닮아 있다. 센스는 이 과정에서 무엇을 더 많이 보는 능력이라기보다 무엇을 보고 무엇을 보지 않을 것인지 선택하는 감각적 판단력인지도 모르겠다.

 

잘 그리는 것과 무언가를 포착하는 것

 

책에서는 ‘헤타우마’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서툴지만 이상하게 좋은 것, 잘 그렸다고 말하기 어려운데 묘하게 매력적인 것을 가리킨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재현의 정확성과 포착의 정확성이 반드시 같지는 않다는 점이다. 대상을 똑같이 그리려고 했는데 닮지 않았다면 재현에 실패한 것이다. 하지만 실제 모습과는 조금 다른데도 그 사람의 표정이나 움직임, 분위기를 놀랍도록 잘 잡아낸 그림이 있다.

 

재현성은 낮지만 포착의 정확성은 높을 수 있다. 사진도 그렇다. 초점과 노출이 정확하고 수평과 수직이 완벽한 사진이 반드시 좋은 사진은 아니다. 때로는 조금 흔들리고, 프레임이 기울고, 사람이 화면 밖으로 잘려나갔는데도 이상하게 그 순간이 살아 있는 사진이 있다. 물론 흔들렸다고 모두 좋은 사진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단순한 실패와 매력적인 어긋남 사이에는 ‘무언가를 포착했는가’라는 차이가 있다. 센스는 어쩌면 그 차이를 알아보는 능력일 것이다.

 

명령대로 하는 것과 센스 있게 움직이는 것

이 부분을 읽으며 회사에서의 일도 떠올랐다. 어떤 명령이나 규칙이 있을 때 그대로 수행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A를 하라는 지시를 받고 A를 정확하게 수행한다면 규칙을 잘 따른 것이다. A를 하려고 했는데 제대로 하지 못했다면 실패다. 그런데 때로는 A라는 지시의 의도를 이해한 뒤, 상황을 보고 B가 더 적절하다고 판단해야 할 때가 있다.

 

A를 그대로 한다 — 재현, A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 — 실패, A의 의도를 이해하고 B로 변형한다 — 센스

 

물론 규칙에서 벗어난다고 모두 센스가 있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왜 벗어났는가, 그리고 그 변화가 상황의 중요한 무엇인가를 제대로 포착하고 있는가이다. 그래서 센스란 정답을 정확하게 복제하는 능력보다는 정답에서 벗어날 수 있으면서도 중요한 것을 놓치지 않는 능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하기 전에 몸이 먼저 움직이는 것

책을 읽으면서 또 하나 흥미로웠던 것은 ‘신체성’이었다. 그림을 그릴 때 모든 선을 머리로 결정하고 손을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손의 속도와 힘, 선이 휘어지는 습관처럼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움직임이 그림에 나타난다. 글씨도 그렇다. 같은 글자를 보고 따라 써도 사람마다 글씨가 다른 것은 ‘다르게 써야겠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다. 몸이 이미 그렇게 움직이기 때문이다.

 

사진을 찍을 때도 비슷하다. 길을 걷다가 어떤 장면에서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춘다. 카메라를 들고 프레임을 만들고 셔터를 누른다. 나중에 사진을 보면서야 내가 왜 그 장면에 끌렸는지 생각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생각 → 행동이 아니라 때로는 감각 → 몸의 반응 → 행동 → 나중의 이해 순서가 된다.

 

오랫동안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이 몸 안에 쌓이고, 어느 순간 의식적인 판단보다 먼저 움직인다. 센스에는 이런 ‘자각하지 못한 채 나오는 신체성’도 포함되어 있는 것 같다.

 

의미를 덜어내는 추상화

재현에 관한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추상화로 이어졌다. 나는 이전까지 추상화를 ‘복잡한 것에서 핵심을 뽑아내는 것’ 정도로 생각했다.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조금 다른 방향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추상화는 대상에 붙어 있는 구체적인 의미를 덜어내는 것이기도 하다.

 

나무를 본다. 처음에는 나무를 나무답게 그린다. 하지만 나무의 구체적인 모습을 재현하는 것을 멈추면 가지는 선이 되고, 선은 방향과 반복이 되고, 결국 리듬이 될 수 있다. 나무 → 가지 → 선 → 방향과 반복 → 리듬

‘나무’라는 의미가 조금씩 빠져나가면서 이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형태와 관계가 보이기 시작한다.

 

사진에서도 사람을 ‘누구인가’라는 대상으로만 보지 않으면 실루엣이 보이고, 빛과 그림자가 보이고, 사람과 건물 사이의 형태와 리듬이 보인다. 추상화는 세상에서 의미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이미 붙어 있는 의미에서 잠시 자유로워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배운다는 것은 어쩌면 잊어가는 것

가장 오래 생각하게 만든 것은 학습에 관한 부분이었다. 우리는 보통 공부란 어떤 모델을 더 정확하게 이해하고 더 많이 기억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저자는 교양을 쌓는 것을 인풋을 그대로 재현하여 응용하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

처음에는 좋은 것을 보고 따라 한다. 이해하고, 모방하고, 반복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구체적인 내용은 조금씩 잊는다. 어떤 것은 생략되고 어떤 것은 변형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인풋 → 반복과 경험 → 망각과 생략 → 흔적 → 자기 방식의 표현

 

좋아하는 사진가의 사진을 공부한다고 생각해보자. 처음에는 그의 구도와 빛, 거리와 색을 분석하고 따라 해볼 수 있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서도 똑같은 구도를 반복한다면 아직 그의 사진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오히려 구체적인 기법은 잊어버렸는데 그에게서 배운 어떤 거리감이나 시선이 내 사진 속에서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면, 그것이 더 깊은 배움일지도 모른다. 배운 것을 잊었는데 몸에는 남아 있는 것이다.

 

결국 센스란

 

재현 먼저 좋은 모델을 보고 따라 한다.

반복과 경험 보고 듣고 따라 하며 충분히 받아들인다.

망각과 생략 모든 것을 기억하지 않는다.

추상화. 대상에 붙어 있던 의미와 규칙에서 조금씩 자유로워진다.

신체화 남은 것이 몸과 습관에 스며든다.

변형과 어긋남  배운 것과 조금 다른 자기 방식이 나타난다.

센스. 그 어긋남 속에서도 중요한 무엇인가를 포착한다.

 

처음 책을 펼쳤을 때는 센스 = 감각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조금 달라졌다. 센스는 단순히 잘 보고 잘 느끼는 능력만은 아닌 것 같다. 너무 많은 것 가운데 무엇을 볼 것인지 선택하고, 배운 것을 그대로 반복하지 않으며, 때로는 규칙에서 벗어나고, 그렇게 생긴 어긋남 속에서도 중요한 것을 놓치지 않는 감각. 그리고 그 감각은 머리로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수없이 보고, 경험하고, 따라 하고, 잊어버리는 시간 속에서 조금씩 몸에 남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직 책을 다 읽지는 않았다.  책을 읽는 중간에 잠시 멈춰 지금까지 내가 이해한 ‘센스’가 무엇인지 적어둔 독서 메모에 가깝다. 책을 더 읽고 나면 이 생각도 조금 달라져 있을 것이다.  그 변화 역시 책을 읽는 재미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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