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에서 신의 죽음보다 더 어려운 것은 신 없이 살아가는 일일지도 모른다고 썼다. 외부에서 삶의 방향을 알려주는 절대적인 기준이 사라졌다면 이제 우리는 스스로 선택해야 한다. 그런데 인간은 그 빈자리를 오래 견디지 못하는 것 같다. 하나의 정답이 사라지면 곧 다른 정답을 찾는다. 신은 죽었지만 신의 자리는 남아 있는 것이다.
니체가 말한 ‘신의 그림자’도 이런 의미로 읽힌다. 신에 대한 믿음은 약해졌지만 절대적인 무엇인가를 필요로 하는 습관은 사라지지 않는다. 무엇이 옳은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어떤 삶이 성공한 삶인지 확실하게 알려줄 무엇인가를 다시 찾는다. 그렇다면 새로운 신은 반드시 종교적인 모습을 하고 나타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너무 익숙해서 신처럼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
돈, 성공, 좋은 직장, 집, 안정된 노후, 사회적 인정, 과학적 진리, 도덕적으로 올바른 사람이라는 자기 이미지. 이것들은 모두 삶에 필요한 가치일 수 있다. 나 역시 돈 없이 살아갈 수 없고, 안정된 생활을 원하며, 내가 하는 일이 인정받으면 기쁘다. 그러니 니체를 읽는다고 해서 이런 것을 버려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다. 문제는 조금 다른 곳에 있는 것 같다.
하나의 가치가 다른 모든 가치를 판단하는 최종 기준이 되는 순간이다.
돈은 삶을 살아가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돈을 많이 버는 삶은 성공이고 적게 버는 삶은 실패라고 생각하기 시작한다면, 돈은 단순한 수단을 넘어선다. 삶 자체를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 그때 돈은 신의 자리에 가까워진다. 좋은 직장도 마찬가지다. 내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고 안정적인 생활을 가능하게 해주는 좋은 조건일 수 있다. 하지만 이름난 회사에 다니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성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당연하게 생각하기 시작한다면 직장은 하나의 사회적 표지가 아니라 인간의 가치를 판단하는 척도가 된다.
우상은 어쩌면 특별한 모습을 하고 있지 않는지도 모른다. 오히려 “그게 당연한 거 아니야?”라고 말하는 순간 가장 강한 우상이 되는 것 같다. 『꽃들에게 희망을』에 나오는 애벌레 기둥이 떠오른다. 수많은 애벌레들이 서로를 밀치며 위로 올라간다. 새로 도착한 애벌레가 묻는다. 저 위에는 무엇이 있는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모두가 올라가고 있으니 틀림없이 좋은 것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장면을 처음 읽었을 때는 단순한 경쟁사회의 우화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니체를 읽으며 다시 생각하니 더 흥미롭게 보인다. 애벌레들의 문제는 경쟁 자체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왜 올라가는지를 아무도 묻지 않는다는 데 있다.
모두가 올라가기 때문에 올라간다. 위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면서도 위가 아래보다 좋은 곳이라고 믿는다. 그 믿음이 너무 강해서 질문할 시간조차 없다.나는 이 장면에서 우리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좋은 직장을 얻고, 승진하고, 집을 사고, 자산을 늘리고, 노후를 준비한다. 이런 삶의 과정에는 분명 현실적인 이유가 있다. 나 역시 그 많은 것들의 필요성을 부정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어느 순간 질문은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어디로 올라가고 있는가.
그 꼭대기에는 무엇이 있는가.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이 있는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올라가기 때문에 나도 서둘러 올라가고 있는가. 지난 글에서 이야기한 ‘시대의 중력장’도 여기에서 다시 나타난다. 사회적 중력은 반드시 우리를 아래로 끌어내리는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모두를 같은 방향의 ‘위’로 끌고 갈 수도 있다. 더 많이, 더 높이, 더 빨리, 더 좋은 것으로. 그런데 위라는 방향 자체를 누가 정했는지는 묻지 않는다.
모두가 올라가고 있다는 사실은 내가 올라가야 할 이유가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기둥에서 당장 내려와야 한다는 뜻도 아니다. 꼭대기에 내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올라가도 된다. 중요한 것은 다른 애벌레들이 올라가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왜 올라가는지를 알고 있는가 하는 문제다. 니체가 돈에 대해 이야기한 대목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는다.
문제는 단순히 돈을 원하는 욕망이 아니다. 충분히 가지고 있는데도 더 빨리 쌓이지 않으면 초조해지는 상태다.
이 부분은 요즘의 삶과도 닮아 있다. 얼마를 가지고 있는가만큼 얼마나 빠르게 늘어나고 있는가가 중요하다. 자산이 증가하지 않으면 뒤처지는 것 같고, 다른 사람의 수익률이 나보다 높으면 불안해진다. 돈이 필요한 정도를 넘어 돈이 늘어나는 속도 자체가 삶의 안정감을 결정하기 시작한다. 이런 상태에서는 돈을 내가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돈의 리듬이 나를 움직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여기서 나는 물건을 사는 욕망도 떠올리게 된다. 더 좋은 카메라와 렌즈가 생기면 더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을 것 같고, 더 좋은 장비가 있으면 새로운 가능성이 열릴 것처럼 느껴진다. 물론 실제로 장비는 가능성을 넓혀준다. 하지만 어느 순간 장비를 사용하는 즐거움보다 다음 장비를 생각하는 시간이 더 많아진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필요해서 물건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소유 자체가 계속 새로운 욕망을 생산하기 시작한다. 그러면 물건은 단순히 물건으로 끝나지 않는다. 관심과 시간과 에너지까지 함께 요구한다. 무엇을 소유하느냐보다 무엇이 나의 관심을 소유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하는 순간이 생긴다.
과학도 비슷한 질문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과학은 종교적 설명을 무너뜨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관찰하고 검증하며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을 바꾸었다. 그런데 니체의 질문은 거기에서 한 번 더 나아간다. 왜 우리는 ‘진리’를 반드시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하는가. 이 질문은 과학이 틀렸다는 뜻이 아니다. 과학적 방법을 종교와 같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과학 역시 절대화될 때는 하나의 새로운 정답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는 문제다. “과학적으로 설명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측정할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라고 생각한다면 과학은 세계를 이해하는 강력한 방법에서 세계를 판단하는 유일한 기준으로 바뀐다.
문제는 과학이 아니라 과학주의다. 어떤 가치든 그것만이 유일한 정답이라고 선언하는 순간, 다시 용의 목소리가 들린다. “가치는 이미 모두 만들어졌다.” “정답은 여기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신의 죽음은 한 번으로 끝나는 사건이 아닌 것 같다. 기존의 신을 죽였더라도 새로운 신이 등장하면 다시 그 절대성을 의심해야 한다.
니체가 신의 그림자를 계속 정복해야 한다고 말한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가장 어려운 우상은 무엇일까. 나는 오히려 선하고 좋은 모습으로 나타나는 우상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성공해야 한다. 좋은 부모가 되어야 한다. 올바른 사람이 되어야 한다. 꾸준히 성장해야 한다. 자기다운 삶을 살아야 한다. 이 말들은 대부분 좋은 말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이런 말도 나를 판단하는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있다.
특히 ‘자기다운 삶’이라는 말조차 그렇다. 남들과 달라야 하고, 나만의 스타일이 있어야 하고, 계속 새로운 것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얼마 전까지 자유를 의미했던 가치가 새로운 의무가 된다. “너는 자기답게 살아야 한다.” 용은 생각보다 쉽게 모습을 바꾼다. 그래서 니체를 읽는 것 자체도 하나의 우상이 될 수 있다. “니체라면 어떻게 생각했을까.” “니체가 말한 위버멘쉬처럼 살아야 하지 않을까.” 이런 질문이 도움이 될 때도 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니체의 말을 새로운 정답처럼 사용한다면 이상한 일이 된다.
신의 죽음을 말했던 철학자를 새로운 신으로 만드는 셈이다. 그렇다면 니체를 제대로 읽는 방법은 그의 말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의 문장이 나에게 질문을 만들도록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니체의 답보다 내 질문이 살아 있어야 한다. 나는 무엇을 당연하다고 믿고 있는가. 그 믿음은 어디에서 왔는가. 그것 없이도 살아볼 수 있는가.
이 질문을 던지다 보면 한 가지 구분이 중요해진다. 가치를 갖는 것과 가치를 절대화하는 것은 다르다. 나는 돈을 중요하게 생각할 수 있다.
가족을 중요하게 생각할 수 있다. 일의 성취와 사회적 인정도 중요하게 생각할 수 있다. 문제는 그것들 가운데 하나가 삶 전체를 평가하는 유일한 척도가 되는 것이다. 가치가 여러 개 존재하고 서로 긴장할 수 있다면 나는 선택해야 한다.하지만 하나의 가치가 모든 것을 지배하면 선택할 필요가 없다. 그것이 나 대신 판단해준다.
어쩌면 바로 그 편리함 때문에 인간은 계속 신을 만드는지도 모른다. 절대적인 기준이 있으면 덜 불안하다.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실패했을 때도 “나는 기준대로 살았다”고 말할 수 있다. 반대로 정답이 없는 세계에서는 내가 선택해야 하고, 그 선택의 책임도 내가 져야 한다. 그래서 새로운 우상을 만드는 것은 인간의 나약함이라기보다 불확실성을 견디기 어려워하는 아주 인간적인 욕망일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위버멘쉬의 강함도 모든 가치에서 자유로운 상태는 아닐 것이다. 아무것도 믿지 않는 사람도 아니다. 오히려 어떤 가치를 선택하면서도 그것을 영원한 진리로 만들지 않을 수 있는 힘. 필요하면 자신이 만든 가치까지 다시 질문할 수 있는 힘. 그것이 더 어려운 것 같다.
이번 글을 쓰면서 결국 질문은 이것으로 돌아온다. 나는 신을 버린 뒤 무엇을 신처럼 떠받들고 있는가. 돈일 수도 있고, 안정일 수도 있고, 성공일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의 인정일 수도 있다. ‘좋은 사람이어야 한다’는 자기 이미지일 수도 있고, 끊임없이 성장해야 한다는 자기계발의 명령일 수도 있다.그리고 더 중요한 질문이 하나 남는다.
그것이 더 이상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라면, 나는 여전히 그것을 선택할 것인가. 돈이 성공의 증명이 아니어도 나는 지금의 일을 할 것인가.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글을 쓸 것인가. 좋은 사진이라는 기준이 없어도 계속 사진을 찍을 것인가. 다른 사람보다 앞설 필요가 없어도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가. 이런 질문 앞에서 남는 것들이 있다면, 그것은 조금 더 내 삶에 가까운 가치일지도 모르겠다.
신은 죽었다. 그러나 신을 죽이는 일보다 어려운 것은 그 빈자리를 너무 빨리 다른 것으로 채우지 않는 일인지도 모른다. 잠시 비어 있는 자리를 견디는 것. 정답이 없는 상태를 견디는 것. 그리고 그 자리에서 “남들은 무엇을 믿는가”가 아니라 “나는 무엇을 가치 있게 만들 것인가”
를 다시 묻는 것. 아마 가치창조는 그 빈자리에서부터 시작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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