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선 글에서 니체가 바그너와 결별하고 질병과 고독을 지나면서 어떻게 자기 자신의 사유로 돌아오기 시작했는지를 살펴보았다. 청년 니체에게 바그너와 쇼펜하우어는 자신이 짊어져야 할 거대한 세계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 니체는 그 세계와 결별한다. 그 뒤에는 곧바로 새로운 세계가 나타나지 않았다. 오히려 길을 잃었다.
질병과 건강 사이를 오갔고, 교수직을 떠났으며, 이전까지 자신을 지탱하던 가치와 생활 방식도 무너졌다. 그러나 바로 그 공백 속에서 니체는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기 시작한다. 타인의 철학을 통해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 대신 자기 몸과 경험, 자기 감각을 통해 사유하기 시작한다.
낙타가 사자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사자는 어떻게 어린아이가 되었을까.기존의 가치를 비판하는 데서 벗어나, 니체는 언제부터 자기 자신의 가치를 만들기 시작했을까. 그 결정적인 계기를 영원회귀의 발견에서 찾는다.
1881년, 하나의 생각이 찾아오다
1881년 여름 니체는 스위스 실스마리아에 머물고 있었다. 니체가 실바플라나 호수 주변을 걷다가 어느 거대한 바위 근처에서 문득 영원회귀의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이 사건을 단순히 새로운 개념 하나를 발견한 순간으로 보기에는 부족한 것 같다. 영원회귀는 니체가 기존 철학을 비판하는 사람에서 자기만의 철학을 만들어가는 사람으로 변하는 전환점이기 때문이다. 그전까지 니체는 끊임없이 의심했다. 도덕을 의심하고, 종교를 의심하고, 진리를 의심하고, 자유의지를 의심하고,자신이 한때 따랐던 바그너와 쇼펜하우어까지 의심했다.
사자는 잘 싸웠다. 하지만 싸움만으로는 새로운 세계가 만들어지지 않는다.언젠가는 질문이 달라져야 한다.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에서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긍정할 것인가?” 로. 영원회귀는 바로 이 두 질문 사이에 놓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즐거운 학문』, 새로운 문제들이 시작되는 곳
영원회귀의 영감을 얻은 다음 해인 1882년에 『즐거운 학문』이 나온다. 이 책을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중요한 전 단계로 읽는다. 그 이유를 알고 나니 흥미롭다. 『즐거운 학문』에는 이후 『차라투스트라』에서 본격적으로 전개될 문제들이 이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신의 죽음. 영원회귀. 새로운 긍정. 그리고 지금까지의 인간을 넘어서는 새로운 삶의 가능성. 『차라투스트라』의 머리말 첫 부분이 『즐거운 학문』 4부 마지막 부분과 이어진다는 점도 강조한다.
이렇게 보면 『즐거운 학문』과 『차라투스트라』 사이에는 단절보다 연속성이 있다. 나는 이를 이렇게 이해하고 싶다. 『즐거운 학문』은 질문이 생겨나는 책이고, 『차라투스트라』는 그 질문이 하나의 삶과 서사가 되는 책이다.
왜 철학자는 차라투스트라라는 인물을 필요로 했을까
니체는 영원회귀를 논문이나 철학적 체계로 설명하는 대신 차라투스트라라는 인물을 만들어낸다. 이 점이 새삼 흥미롭다. 왜 직접 말하지 않았을까. 왜 철학적 논증보다 이야기와 시, 비유와 상징을 택했을까.
산과 동굴, 태양, 독수리와 뱀, 낙타와 사자와 어린아이, 춤과 심연. 『차라투스트라』에는 철학책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많은 이미지가 등장한다. 아마 니체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개념을 설명하는 것만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사상을 살아내는 인물이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차라투스트라는 처음부터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완성된 현자가 아니다.
사람들을 찾아가고, 실패하고, 고독해지고, 다시 산으로 돌아간다. 자기가 전한 말을 다른 사람들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험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도 자신의 가장 무거운 생각을 받아들이기 위해 변해간다.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니체 철학의 단순한 대변인이라기보다, 니체의 철학이 하나의 인물 안에서 시험되고 변형되는 장소 처럼 보인다.
영원회귀는 왜 그렇게 무거운 생각인가
영원회귀를 처음 접하면 단순한 질문처럼 보인다. “지금 이 삶이 그대로 영원히 반복된다면?” 하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상당히 무겁다. 좋았던 일만 반복되는 것이 아니다. 실패와 후회, 고통과 우연, 헤어짐과 상실까지도 모두 반복된다. 그럼에도 “그래도 나는 이 삶을 다시 원한다.” 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이렇게 읽으면 영원회귀는 단순한 우주론이라기보다 삶을 향한 극단적인 질문이 된다. 삶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만 삭제할 수 없다.
내가 되고 싶은 나만 선택할 수도 없다. 바로 이 삶 전체를 다시 원할 수 있는가. 그 질문 앞에서 니체의 다른 개념들이 다시 연결된다.
위버멘쉬는 지금의 인간을 넘어서는 존재이고, 힘에의 의지는 새로운 가치와 삶을 생성하는 힘이며, 영원회귀는 그렇게 살아가는 삶을 끝까지 긍정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 그리고 마지막에 아모르파티가 온다.
동일한 것이 돌아오는가, 차이가 돌아오는가
흥미로웠던 부분은 영원회귀를 차이와 생성의 관점에서 읽는 해석이었다. 보통 영원회귀라고 하면 A → A → A → A 처럼 똑같은 것이 반복되는 모습을 떠올린다. 하지만 강의에서는 반복 속에서 기존의 자아가 해체되고 계속 다른 자아가 생성되는 것으로도 읽는다. 즉, A → B → C → D 의 과정이다. 이때 반복되는 것은 똑같은 결과가 아니라 생성하고 변화하는 힘 자체다. 이 해석에는 들뢰즈의 영향이 강하게 들어 있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 니체를 읽으면서 이 둘을 구분해 보려고 한다.
하나는 “이 삶이 그대로 돌아와도 다시 원할 수 있는가?” 라는 니체의 실존적 질문. 다른 하나는 “동일한 나를 붙잡지 않고 계속 차이를 생성할 수 있는가?”라는 들뢰즈적 해석. 당장은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기보다 두 질문을 함께 가지고 가는 것이 더 흥미로울 것 같다.
니체 자신이 된다는 것
성숙기의 니체를 단순히 ‘후기 니체’라고 부르지 않고 ‘니체 자신’의 시대라고 한다. 처음에는 조금 과장된 표현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흐름을 따라가 보면 이해된다. 청년 니체는 바그너와 쇼펜하우어를 통해 말했다. 이행기의 니체는 그들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싸웠다.
그리고 성숙기의 니체는 마침내 자기만의 질문과 언어를 만들어낸다.
이때 등장하는 것이 위버멘쉬, 힘에의 의지, 영원회귀, 아모르파티다. 니체가 처음부터 니체였던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의 철학을 통과하고,
그 철학과 싸우고, 길을 잃고, 자기 몸이 무너지는 시간을 겪고, 그 뒤에야 자기만의 철학적 질문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성숙기의 니체를 ‘어린아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조금씩 이해된다.
어린아이는 아무것도 모르는 존재가 아니다
『차라투스트라』의 세 가지 변신에서 마지막은 어린아이다. 처음에는 이상했다. 낙타에서 사자가 되었는데, 왜 더 강한 존재가 아니라 어린아이로 변하는가. 하지만 이제는 조금 다르게 보인다. 어린아이는 처음의 어린아이가 아니다. 이미 무거운 짐을 짊어져 보았고, 그 짐과 싸워보았으며, 기존의 세계가 무너지는 것도 경험한 뒤의 어린아이다. 그래서 나는 이것을 두 번째 순진함이라고 부르고 싶다.
아무것도 몰라서 가벼운 것이 아니라, 충분히 알고, 충분히 짊어지고, 충분히 부정한 뒤에 다시 가벼워진 상태. 사자는 여전히 적과 싸운다.
그러나 어린아이는 더 이상 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자기가 살아갈 놀이를 만들면 된다. 그래서 사자는 자유를 얻고, 어린아이는 자유를 사용한다. 라고 표현해도 좋을 것 같다.
『차라투스트라』를 중심으로 니체의 책들을 다시 보게 되다
니체의 저작들을 『차라투스트라』를 중심으로 재배치한다. 그 틀은 상당히 인상적이다. 『차라투스트라』 이전의 책들은 『차라투스트라』를 준비하는 과정이고, 『차라투스트라』 이후의 책들은 그 안에서 제기된 문제들을 다시 해석하고 전개하는 과정으로 보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흐름은 대략 이렇다.
『즐거운 학문』 → 문제의 발견,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문제를 서사와 비유, 상징으로 표현, 『선악의 저편』·『도덕의 계보』
→ 그 문제를 좀 더 산문적이고 분석적인 방식으로 전개 한다. 물론 『선악의 저편』이나 『도덕의 계보』를 단순히 『차라투스트라』의 해설서라고만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각각 독립적인 문제와 논증을 가진 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니체의 사상 전체를 처음 읽는 입장에서는 이 재구성이 꽤 유용하다. 흩어져 있던 책들이 하나의 흐름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 이전과 이후
이렇게 보면 니체의 철학적 생애도 하나의 긴 변신처럼 보인다. 『비극의 탄생』의 니체 → 아직 바그너와 쇼펜하우어의 영향 속에서 말한다.,『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아침놀』의 니체 → 기존 가치로부터 거리를 만들고 비판한다. 『즐거운 학문』의 니체 → 새로운 문제를 발견하기 시작한다. 『차라투스트라』의 니체 → 자기 고유의 철학적 세계를 창조한다. 『선악의 저편』·『도덕의 계보』의 니체 → 그 세계를 다른 언어로 다시 분석하고 전개한다. 그러니 『차라투스트라』가 니체 철학의 가운데 놓이는 이유는 단지 유명한 대표작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 책을 전후로 니체의 질문 방식 자체가 달라진다. 비판하는 철학자가 창조하는 철학자로 변한다.
마지막 해의 니체
1888년을 니체 철학의 마지막 폭발처럼 설명한다. 니체는 오랫동안 구상했던 『힘에의 의지』라는 대규모 저작 계획을 포기하고, 짧은 기간 동안 여러 후기 저작을 집중적으로 써낸다. 『우상의 황혼』, 『안티크리스트』, 『바그너의 경우』, 『니체 대 바그너』, 『이 사람을 보라』 등이다. 젊은 니체는 바그너라는 거대한 예술적 프로젝트 속에서 자기 사상을 찾으려 했다. 그러나 마지막의 니체는 하나의 거대한 철학 체계를 완성하기보다 여러 형식과 문체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쏟아낸다. 정교한 하나의 체계보다 끊임없이 다른 방식으로 말하는 철학이다. 이것 역시 ‘어린아이의 생성’이라는 이미지와 묘하게 겹친다.
니체를 읽으면서 생긴 하나의 질문
니체의 생애를 낙타, 사자, 어린아이로 따라오면서 나에게 가장 오래 남은 것은 특정 개념보다 하나의 질문이다. 나는 남이 만들어놓은 질문에 답하면서 살고 있는가, 아니면 내 질문을 만들어가고 있는가. 낙타에게는 이미 질문이 주어져 있다. “이 짐을 잘 짊어질 수 있는가.” 사자는 그 질문을 거부한다. “나는 왜 이 짐을 져야 하는가.” 하지만 어린아이는 질문 자체를 바꾼다. “나는 여기서 무엇을 만들어볼까.”
이 차이가 큰 것 같다. 우리는 오랫동안 사회가 만들어준 질문에 답하면서 산다. 좋은 학교에 갈 수 있는가. 좋은 직장을 얻을 수 있는가.
더 많이 가질 수 있는가.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가. 물론 이런 질문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물어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질문 자체가 정말 나의 질문인가. 니체가 자기 철학을 만들었다는 것은 어쩌면 자기만의 답을 만든 것 이전에 자기만의 질문을 발견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차라투스트라』를 읽기 시작한 이유
처음에는 니체의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고 싶어서 『차라투스트라』를 읽기 시작했다. 신의 죽음, 위버멘쉬, 힘에의 의지, 영원회귀, 아모르파티. 읽어 가면서 관심이 조금 달라졌다. 니체가 무엇을 주장했는가 못지않게,그가 어떻게 자기 생각에 도달했는가 흥미로워졌다.
니체도 처음부터 자기 철학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누군가에게 깊이 영향을 받았고, 그 영향에서 벗어나기 위해 싸웠고, 그 과정에서 길을 잃었으며, 질병과 고독 속에서 자기 자신의 감각과 생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마침내 자기만의 문제를 만들어냈다. 그 과정 자체가 『차라투스트라』가 말하는 자기극복과 닮아 있다.
어쩌면 우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처음에는 다른 사람에게 배운 가치로 살아간다. 그것을 충분히 짊어지고, 어느 순간에는 의심하고,
필요하면 그것과 결별하고, 그 과정에서 잠시 길을 잃기도 한다. 그리고 아주 조금씩 자기 질문과 자기 삶의 방식을 만들어간다.
그러니 자기극복은 더 강한 사람이 되는 일만은 아닐 것이다. 한때의 나를 완성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지금의 나를 최종적인 나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그것이 니체를 읽으며 내가 이해하게 된 자기극복에 가장 가까운 말인지도 모르겠다.
『차라투스트라』의 어린아이는 사막을 없애지 않는다. 사막에서 놀기 시작한다. 삶의 모든 조건을 내 마음대로 바꿀 수는 없더라도, 그 조건과 다른 관계를 만들고 그 안에서 새로운 것을 시작할 수는 있다. 그래서 이 연작의 마지막에는 니체의 답보다 하나의 질문을 남겨두고 싶다.
나는 지금 무엇을 짊어지고 있는가.
무엇으로부터 벗어나려 하는가.
그리고 그 자유로 무엇을 만들어가고 싶은가.
아마 『차라투스트라』를 읽는 동안 이 질문은 계속 조금씩 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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