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글에서 나는 역겨움이라는 불편한 감정을 생각했다. 싫어하는 것을 계속 미워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나는 저렇게 살고 싶지 않다.”라는 방향으로 바꿀 수 있다면, 싫음도 다른 삶을 향해 움직이는 힘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니체를 조금 더 따라가면 더 불편한 말이 나온다. 평등. 내게 평등은 의심해야 할 가치라기보다 지켜야 할 가치에 가까웠다. 사람을 출신이나 성별, 재산, 지위에 따라 차별해서는 안 된다. 같은 일을 한다면 정당하게 평가받아야 하고, 누구에게나 가능한 한 공정한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이런 생각은 너무 당연해 보였다. 그래서 『차라투스트라』의 「타란툴라들에 대하여」에서 차라투스트라가 평등을 설교하는 사람들을 비판하고, 심지어 사람은 평등하지 않으며 더 많은 불평등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대목을 읽으면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나도 처음에는 이렇게 생각했다. ‘이건 너무 나간 것 아닌가.’
하지만 니체가 왜 이런 도발적인 말을 하는지를 조금 더 따라가보기로 했다. 그가 가장 먼저 묻는 것은 “평등이 옳은가.”가 아니었다. 오히려 이런 질문에 가까웠다. “평등을 말하고 있는 너는 무엇을 원하는가.” 이 질문이 조금 무섭다. 좋은 가치라고 생각했던 말 뒤에서도 다른 욕망이 움직일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자료에서는 「타란툴라들에 대하여」의 평등 설교자들을 원한과 복수에 사로잡힌 사람들로 설명한다. 그들은 평등과 정의를 말한다. 하지만 차라투스트라는 그 말 뒤에서 상처받은 자부심, 억눌린 질투, 복수하고 싶은 욕망을 본다. 쉽게 말하면 이런 것이다. “나도 저 사람처럼 되고 싶다.” 그런데 그렇게 될 수 없다. 처음에는 부럽다. 그 다음에는 억울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이렇게 생각한다. “저 사람도 나와 같아져야 한다.” 여기까지 가면 평등은 나를 더 성장시키려는 요구가 아니라 상대를 끌어내리고 싶은 욕망의 이름이 될 수도 있다.
이 설명을 읽다가 2020년에 옮겨 적었던 글 하나가 떠올랐다. 제목은 「우리는 서로를 시기하면서 더 나은 사람이 되는지도 모르겠다」였다. 살리에리와 모차르트 이야기에서 시작하는 글이었다. 살리에리는 모차르트의 재능을 알아보았다. 그래서 더 괴로웠다. 자신이 얼마나 노력해도 모차르트처럼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당시 글에서는 시기심이 나타나는 세 가지 모습을 소개했다. 누군가 나보다 뛰어나다는 사실을 보고 자신의 부족함 때문에 우울해지는 사람. 그 사람처럼 되고 싶어 더 노력하는 사람. 그리고 상대의 성공이 정당하지 않다고 생각하며 그 사람을 깎아내리는 사람. 나는 그 부분을 읽으며 여러 번 뜨끔했다고 적었다. 나 역시 누군가를 시기한 적이 있었고, 상대가 실패하기를 마음속으로 바란 적도 있었다. 시기심을 드러내는 것이 부끄러워 마음 깊숙이 숨겨두었다고 썼다.
지금 니체를 읽으며 그 기록을 다시 보면 평등의 문제와 묘하게 연결된다. 누군가 나보다 잘한다. 여기까지는 사실이다. 그 다음부터 여러 길이 갈린다. ‘나도 저만큼 해보고 싶다.’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 사람에게 배우고 내 힘을 더 사용해볼 수도 있다. 반대로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저 사람은 운이 좋았어.’ ‘누군가 밀어준 거겠지.’ ‘사실 별것도 아닌데 과대평가받는 거야.’ 때로는 이것도 사실일 수 있다. 성공에는 운과 구조와 관계가 작용한다. 하지만 사실 여부와 별개로 내 마음속에서 이런 설명이 상대의 높이를 낮추기 위한 용도로만 사용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는 물어볼 수 있다. 니체가 보고 싶었던 것은 아마 이 부분이었을 것이다. 평등이라는 말 자체보다 그 말을 필요로 하는 힘.
나는 이 질문을 회사생활에서도 꽤 쉽게 만난다. 누군가 좋은 기회를 얻는다. 승진한다. 좋은 평가를 받는다. 중요한 업무를 맡는다. 그러면 먼저 묻게 된다. ‘왜 저 사람이지.’ 이 질문은 충분히 정당하다. 조직의 평가와 기회 배분은 공정해야 한다. 명확한 기준이 필요하다. 그런데 같은 질문 속에서도 서로 다른 욕망이 있을 수 있다. “기준이 공정해야 한다.”는 요구와 “저 사람이 저 자리에 있는 것이 싫다.”는 감정은 같지 않다. 둘은 쉽게 섞인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공정성을 요구하면서 실제로는 다른 사람의 몫이 줄어들기를 바랄 수도 있다. 이것을 인정하기는 불편하다. 하지만 나는 그런 마음에서 완전히 자유롭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니체의 비판이 모두 맞는 것일까. 여기서는 멈춰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현실에는 실제 불평등과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2021년 나는 「임금격차의 공정성」이라는 글을 쓴적이 있다. 비슷한 일을 하는데도 대기업과 중소기업 노동자의 임금이 크게 다르고, 같은 사업장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대우가 다르며, 성별에 따라서도 임금 격차가 나타나는 이유를 생각한 글이었다. 처음에는 경제학의 수요와 공급, 생산성, 협상력이라는 설명을 따라갔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시장에는 독점력이 있고, 사람마다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이 다르며, 가정환경이나 교육 기회도 다르다. 같은 출발선에서 뛰었다고 말하기 어려운데 결과만 보고 “능력의 차이입니다.”라고 말하는 것도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당시 나는 능력주의에 대해서도 의심했다. 개인이 노력해서 얻은 결과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가족과 환경과 사회가 제공한 자원이 서로 다르다. 그 차이를 보지 않고 결과를 전부 개인의 능력으로 돌리면 기존의 불평등이 정당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지금 다시 읽어도 이 문제의식은 버리고 싶지 않다. 그러니 니체를 읽었다고 해서 “평등은 약자의 가치이니 불평등이 좋다.”라고 말할 생각은 없다. 그렇게 읽으면 오히려 너무 쉬워진다. 나는 두 질문을 동시에 가지고 가고 싶다. 첫 번째는 사회를 향한 질문이다. 사람들은 공정한 기회를 가지고 있는가. 부당한 차별을 받고 있지는 않은가. 권력이나 재산 때문에 누군가의 가능성이 처음부터 막혀 있지는 않은가. 이것은 중요한 질문이다. 그런데 니체는 여기에 두 번째 질문을 붙인다. 나는 왜 평등을 원하는가. 부당한 차별을 없애기 위해서인가. 사람이 각자의 가능성을 더 많이 펼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나보다 앞선 사람을 끌어내리고 싶기 때문인가. 첫 번째 질문만 하면 내 안의 질투와 원한을 보지 못할 수 있다. 두 번째 질문만 하면 현실의 구조적인 차별을 개인 심리의 문제로 축소할 위험이 있다. 그래서 둘 다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니체가 내게 유용한 것은 평등을 포기하라고 해서가 아니라 좋은 가치의 이름 뒤에 숨을 수 있는 내 욕망까지 의심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자료가 설명하는 ‘불평등’도 조금 다르게 보인다. 니체가 원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같은 기준에 맞춰지는 세계가 아니다. 각자가 다른 가치를 만들고, 다른 방식으로 살고, 그 차이가 서로 경쟁하면서 새로운 것이 생기는 세계에 가깝다. 자료에서는 ‘모든 사람은 각각 특이하다는 점에서 평등하다’는 식으로 이 문제를 설명한다. 나는 이 표현이 니체의 불평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예를 들어 글쓰기를 생각해본다. 모든 사람이 같은 글을 쓴다면 누가 더 잘 썼는지를 비교하기는 쉬울 것이다. 같은 형식, 같은 주제, 같은 기준으로 점수를 매길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글만 있는 세상은 재미없다. 어떤 사람은 짧고 건조하게 쓰고, 어떤 사람은 길고 느리게 쓰며, 누군가는 경험에서 시작하고, 누군가는 개념에서 시작한다. 차이가 있기 때문에 새로운 스타일이 나온다. 사진도 비슷하다. 모든 사람이 같은 장소에서 같은 구도와 같은 색으로 찍는다면 비교는 쉬울 것이다. 하지만 사진이 재미있는 이유는 같은 거리를 보고도 서로 다른 것을 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니체가 경계한 평등을 차이를 없애는 평준화라는 의미로 읽어볼 수 있다. 모두에게 같은 존엄이 있다는 것과 모두가 같아져야 한다는 것은 다른 이야기다. 같은 권리를 갖는 것과 같은 욕망을 가져야 하는 것도 다르다.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는 것과 차이가 없어야 한다는 것도 다르다. 나는 이 구분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부당한 차별은 줄여야 한다. 하지만 차이까지 없앨 이유는 없다. 오히려 차이가 있어야 다른 것을 배우고, 비교하고, 경쟁하고,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다.
문제는 다시 경쟁이다. 경쟁이라는 말도 불편하다. 경쟁은 사람을 비교하게 만들고 서열을 만들며 누군가를 탈락시킨다. 실제로 그런 경쟁이 많다. 하지만 모든 경쟁이 누군가를 밀어내는 방식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시기심은 나를 괴롭게 할 수도 있지만 내가 더 해보게 만드는 자극이 될 수도 있다. 문제는 상대가 나보다 앞서 있다는 사실이 아니다. 그 차이를 내가 어떻게 사용하는가다. 상대의 높이를 낮추고 싶은가. 아니면 그 차이 때문에 나도 내 힘을 조금 더 써보고 싶은가. 두 욕망은 전혀 다른 곳으로 간다.
나는 이 차이를 실제 생활에서도 자주 본다. 잘하는 사람을 만나면 마음이 불편할 때가 있다. 내가 부족한 것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 순간 가장 쉬운 길은 상대를 평가하는 것이다. 단점을 찾는다. “그래도 저 사람은 이런 부분이 부족하지.” 그렇게 생각하면 잠깐 마음이 편해진다. 차이가 줄어든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실제 내 능력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상대만 머릿속에서 낮아졌을 뿐이다. 반대로 ‘저 부분은 정말 잘하네.’라고 인정하고 내가 배울 것을 하나 가져오면 차이는 그대로 남아 있지만 내 힘은 조금 달라진다. 니체라면 아마 후자 쪽을 더 강한 힘이라고 말할 것 같다.
이렇게 보면 평등에 대한 그의 의심은 평등한 권리를 없애자는 정치적 주장으로만 읽기보다 내 안의 비교 심리를 들여다보는 질문으로 사용할 수 있다. 누군가 나보다 많이 가지고 있을 때. 나보다 잘할 때. 나보다 인정받을 때. 그때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나도 더 나아가고 싶은가. 아니면 저 사람이 내려오기를 원하는가. 이 질문은 생각보다 정직한 답을 요구한다. 나는 후자의 마음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 누군가 잘되는 것을 보며 마음 한쪽이 불편했던 적도 있고, 상대의 단점을 찾으면서 마음을 달랜 적도 있다. 그래서 시기심을 완전히 없애려고 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앞선 글에서 역겨움을 없애기보다 방향을 바꾸어보았듯이 시기심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 “저 사람이 가진 것을 빼앗고 싶다.”에서 “저 사람을 보니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겠다.”로 바뀔 수 있다면 시기심은 다른 힘이 된다. 문제는 비교 자체가 아니라 비교가 나를 어디로 움직이는가일지도 모른다.
이제 평등이라는 말을 들을 때 나는 두 가지를 함께 생각하고 싶다. 하나는 사회적 조건이다. 출발선이 지나치게 기울어져 있지 않은가. 누군가의 성별이나 출신, 경제적 조건 때문에 가능성이 막혀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평등과 공정의 요구가 필요하다. 다른 하나는 내 마음이다. 공정을 말하면서 나는 정말 더 많은 사람이 자기 힘을 펼치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내가 불편해하는 사람의 힘이 줄어들기를 바라는가. 이 질문을 빼놓으면 정의라는 말도 때로 복수의 가면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니체의 경고인 것 같다. 그 경고를 받아들이면서도 나는 평등을 버리고 싶지는 않다. 오히려 이렇게 말하고 싶다. 사람은 동등하게 존중받아야 하지만, 똑같아질 필요는 없다. 차별받지 않아야 하지만 서로 다른 힘과 삶의 방식을 가질 수 있다. 모두에게 기회가 열려 있어야 하지만 그 기회를 사용해 만들어내는 삶까지 같을 필요는 없다. 평등은 차이를 없애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쩌면 차이가 자유롭게 나타날 수 있는 바닥이어야 하지 않을까. 이것이 지금 내가 니체의 불편한 말을 읽으며 얻은 생각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다시 평등 자체가 아니라 평등을 말하는 나의 힘이다. 누군가를 일으켜 세우고 싶은가. 아니면 누군가를 끌어내리고 싶은가. 다른 가능성이 나타날 공간을 만들고 싶은가. 아니면 나를 불편하게 하는 차이를 없애고 싶은가. 겉으로는 모두 ‘공정’과 ‘정의’를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말 아래의 욕망은 다를 수 있다. 그리고 니체는 바로 그곳을 보라고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더 어려운 문제가 남는다. 상대가 잘못했다고 느낄 때 나는 단지 평등을 요구하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때로는 그 사람이 대가를 치르기를 원한다. “잘못했으니 벌을 받아야지.” “그 정도는 당해봐야 해.” “그래야 공정하지.” 그 순간 정의와 복수의 경계는 어디에 있을까. 내가 원하는 것은 잘못을 바로잡는 것일까. 아니면 상대가 고통받는 것을 보는 것일까. 다음 질문은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향한다. 복수는 왜 그렇게 자주 정의의 얼굴을 하고 나타나는가(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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