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았는데 고마우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던 적이 있다. 분명 나를 위해 해준 일이다. 고맙다고 해야 하고, 실제로도 고맙다. 그런데 이상하게 빨리 그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가 있다. “괜찮습니다. 제가 할게요.” 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도움을 거절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계속 도움을 받아야 하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지 않은 마음에 가깝다.
이 감정을 생각하다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동정하는 자들에 대하여」에서 조금 불편한 문장을 만났다. 니체는 동정이 도움받는 사람에게 수치심을 줄 수 있다고 말한다. 처음에는 선뜻 이해되지 않았다. 힘든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도와주는 것이 왜 그 사람을 부끄럽게 만든다는 것일까. 이전 글에서 동정의 감정과 돕는 행동이 같은 것은 아닐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상대와 얼마나 함께 아파했는지는 나에게 일어난 일이고, 실제로 상대에게 무엇이 도움이 되었는지는 별개의 문제일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니체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간다. 그 도움을 받는 사람은 나의 동정을 어떻게 느끼는가. 자료에서는 이 문제를 아주 직접적으로 다룬다. 남을 불쌍히 여기는 동정은 때로 상대의 자존과 존엄을 건드릴 수 있다. 고통받는 사람은 단순히 고통만 느끼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처지를 다른 사람에게 드러내야 한다는 수치심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고귀한 사람이라면 상대에게 수치심을 주지 않으려고 해야 하고, 오히려 타인의 고통 앞에서 자기 자신이 부끄러움을 느껴야 한다고 말한다. 이 말을 곰곰이 생각해보니 ‘불쌍하다’는 말에는 미묘한 높낮이가 들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괜찮은 곳에 있고, 당신은 힘든 곳에 있다. 나는 줄 수 있고, 당신은 받아야 한다. 나는 당신의 어려움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고 당신은 내가 바라보는 사람이 된다.
물론 모든 도움에 이런 우월감이 들어 있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선한 마음에서 출발했더라도 도움을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사이에 이런 높낮이가 생길 가능성은 있다. 예전에 아도르노의 『미니마 모랄리아』를 읽고 매일글쓰기에 선물과 자선에 관한 내용을 적어둔 적이 있다. 그 글에서 마음에 남았던 것은 선물의 크기보다 받는 사람을 얼마나 생각했는가가 중요하다는 부분이었다. 좋은 선물을 하려면 내가 주고 싶은 것을 고르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받는 사람이 무엇을 좋아할지 상상해야 한다. 그 사람의 취향과 생활을 생각하고, 때로는 시간을 들여 골라야 한다.
그러려면 잠시 나의 자리에서 나와야 한다. 이것은 도움에도 그대로 적용될 것 같다. 도움을 주는 사람에게 가장 쉬운 질문은 이것이다.
“내가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좋은 질문이다. 하지만 이 질문의 중심에는 여전히 내가 있다. 내 능력, 내 경험, 내가 줄 수 있는 것.
질문을 조금 바꿔보면 다르게 보인다. “이 사람에게 지금 무엇이 필요할까?” 이때 중심은 상대에게로 이동한다.
둘은 비슷한 질문 같지만 결과는 상당히 다를 수 있다. 나는 조언을 잘할 수 있지만 상대는 조언을 원하지 않을 수 있다. 내가 직접 일을 대신 처리할 수도 있지만 상대는 한번 스스로 해보고 싶을 수도 있다. 돈을 주는 것이 가장 빠른 도움일 수도 있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돈보다 다시 자기 힘으로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감각이 더 중요할 수도 있다.
도움의 기준을 내가 할 수 있는 것에서 상대에게 필요한 것으로 옮기는 순간, 상대는 다시 한 사람의 주체가 된다. 이 차이가 중요한 것 같다.
우리는 사람을 상황으로 부르기 쉽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 힘든 사람. 아픈 사람. 실패한 사람. 가난한 사람. 그러나 사람은 자신에게 닥친 한 가지 상황보다 훨씬 큰 존재다. 지금 도움이 필요하다고 해서 언제나 도움받아야 하는 사람은 아니다. 어떤 일에 실패했다고 해서 실패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다. 경험이 부족하다고 해서 능력이 없는 사람도 아니다. 그런데 동정은 이 차이를 쉽게 지워버릴 수 있다.
‘지금 힘든 일을 겪고 있는 사람’을 ‘불쌍한 사람’으로 만들어버린다. 바로 이 순간 도움이 오히려 상대의 얼굴을 지울 수 있다. 회사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다. 후배가 일을 어려워한다. 경험이 많은 사람에게는 답이 보인다. 그래서 도와준다. 처음에는 방법을 알려주고, 다음에는 자료를 고쳐주고, 문제가 생기면 대신 해결한다. 선의에서 시작된 일이다. 그런데 이것이 반복되면 어느 순간 관계가 고정될 수 있다. 나는 도와주는 사람. 상대는 도움받는 사람. 나는 판단하는 사람. 상대는 물어보는 사람. 그러고 나면 이런 말이 나오기 쉽다. “아직 혼자서는 어려운 것 같아.”
하지만 이전 글 『무지한 스승』을 읽으며 생각했던 것처럼 반대로 물어볼 수도 있다. 계속 도와주었기 때문에 혼자 판단할 기회를 빼앗은 것은 아닐까. 상대가 약해서 도움을 계속 받은 것인지, 도움을 계속 받다 보니 자신의 힘을 사용할 기회가 줄어든 것인지 생각보다 구분하기 어렵다.
그래서 요즘은 좋은 리더십에 대해서도 조금 다른 질문을 하게 된다. ‘내가 얼마나 많이 도와주었는가’보다 ‘내 도움 이후 그 사람이 무엇을 혼자 할 수 있게 되었는가.’ 이 질문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도움의 목적이 나를 계속 필요로 하게 만드는 것이어서는 이상하다. 좋은 도움이라면 언젠가는 도움이 필요 없어지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도움에는 작은 퇴장이 포함되어 있어야 할지도 모른다.
내가 한 발 물러서고, 상대가 다시 자기 삶의 중심으로 돌아오는 것. 생각해보면 도움을 주고 나서 자꾸 기억하고 싶은 마음도 있다. 내가 누구를 도왔다. 내가 어려울 때 챙겨주었다. 내가 기회를 주었다. 실제로 귀한 일이다. 문제는 그 기억이 관계 속에서 계속 사용될 때다. “내가 너한테 얼마나 해줬는데.” 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도움은 다른 성격을 갖기 시작한다. 도움을 준 사람은 채권자가 되고, 도움을 받은 사람은 빚진 사람이 된다. 선물이 거래가 된다. 그리고 상대는 다시 수치심을 느낄 수 있다.
내가 힘들었던 순간이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도움을 준 사람이 계속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도움을 가능한 한 드러내지 않으려는 태도를 보이는지도 모른다. 자료에서도 차라투스트라는 도움을 베풀면서 상대가 자신을 의식하여 수치심을 느끼지 않도록, 가능하다면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 한다고 설명한다. 이것을 무조건 ‘남몰래 선행하라’는 교훈으로 읽고 싶지는 않다. 선행을 공개하는 것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누군가의 행동이 알려져 더 많은 사람이 참여할 수도 있고, 공적인 지원이라면 과정이 투명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공개와 비공개가 아니라 도움의 주인공이 누구인가일 것이다. 도움을 주는 나를 보여주기 위해 상대가 등장하는가. 아니면 상대가 다시 자기 힘을 찾도록 내가 잠시 등장하는가. 사진을 찍고, 내가 한 일을 설명하고, 감사의 말을 기대하고, 상대가 나를 오래 기억해주기를 바란다면 어느 순간 내가 주인공이 된다. 반대로 상대가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가 내가 필요 없어져도 괜찮다면 도움의 중심은 그 사람에게 남아 있다.
가족 사이에서도 비슷하다. 부모가 자녀에게 해주는 일은 헤아리기 어렵다. 그런데 부모가 그것을 모두 기억해두었다가 “우리가 너를 위해 얼마나 했는데.” 라고 말하기 시작하면 자녀의 삶은 쉽게 빚이 된다. 부부 사이에서도 그렇다. 내가 참아준 것, 내가 희생한 것, 내가 챙겨준 것을 계산하기 시작하면 사랑했던 일이 채권처럼 남는다. 회사에서도 “내가 그 사람을 키워줬다.” 라는 말을 가끔 듣는다. 정말 많은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사람이 성장한 결과까지 모두 내 몫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이전글에서 이야기했던 ‘돌 속의 형상’ 문제로 다시 돌아가게 된다. 사람은 내가 만든 작품이 아니다. 내가 조금 도울 수는 있지만, 그 사람의 힘은 결국 그 사람의 것이다. 그래서 ‘내가 키웠다’보다
‘그 사람이 성장하는 시간에 내가 잠시 함께 있었다’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생각하면 도움은 생각보다 섬세한 일이 된다. 무엇을 줄 것인지뿐 아니라, 어떻게 주어야 하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언제 물러나야 하는지도 알아야 한다. 무엇보다 상대가 원하지 않을 때 거절할 수 있어야 한다. 거절할 수 없는 도움은 정말 도움일까. 이 질문이 마음에 남는다. 내가 좋은 뜻으로 해주겠다고 하는데 상대가 싫다고 하면 서운할 수 있다. ‘널 위해서 그러는 건데.’ 라는 말도 나온다.
하지만 상대가 거절할 권리가 없다면 그 도움의 주인은 이미 상대가 아니다. 선의라는 이유로 상대의 선택권까지 가져와버린 셈이다. 어쩌면 수치심을 주지 않는 도움은 거창하지 않을 것이다. 도움을 주면서도 상대가 자기 선택을 할 수 있게 하는 것. 감사를 강요하지 않는 것. 내가 해준 일을 오래 빚처럼 남겨두지 않는 것. 상대를 ‘내가 도와준 사람’으로 기억하지 않는 것. 그리고 도움의 끝에서 다시 그 사람을 나와 같은 높이에 세워두는 것. 니체가 동정을 불편하게 만드는 이유는 아마 이런 데 있을 것이다.
선의를 버리라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선의를 더 까다롭게 들여다보게 한다. 나는 정말 상대를 위해 돕고 있는가. 아니면 나의 좋은 마음을 확인하기 위해 상대의 불행을 필요로 하는가. 이 질문 앞에서는 ‘나는 좋은 뜻이었다’는 말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이글을 쓰면서 나는 도움을 판단하는 기준 하나를 새롭게 생각하게 된다. 얼마나 많이 주었는가가 아니라, 도움을 받은 뒤에도 그 사람이 자기 삶의 주인으로 남아 있는가.
좋은 도움은 상대를 더 작게 만들지 않아야 할 것 같다.
도움을 받았다는 이유로 고개를 숙이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다시 고개를 들 수 있게 해야 한다. 나에게 오래 의존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다시 자기 힘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전 글에서 이런 질문을 남겼다. 나는 이 사람과 함께 아파하고 싶은 것일까. 아니면 이 사람이 자기 힘을 다시 찾는 데 정말 도움이 되고 싶은 것일까. 이제 한 문장을 더 붙이고 싶다. 그 사람의 힘을 되찾게 하겠다는 나의 도움조차, 그 사람을 ‘약한 사람’으로 만들고 있지는 않은가. 그리고 결국 질문은 다시 나에게 돌아온다. 나는 상대를 보고 있는가. 아니면 상대를 돕고 있는 나 자신의 좋은 모습을 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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