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았는데 고마우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던 적이 있다. 분명 나를 위해 해준 일이다. 고맙다고 해야 하고, 실제로도 고맙다. 그런데 이상하게 빨리 그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가 있다. “괜찮습니다. 제가 할게요.” 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도움을 거절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계속 도움을 받아야 하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지 않은 마음에 가깝다.

 

이 감정을 생각하다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동정하는 자들에 대하여」에서 조금 불편한 문장을 만났다. 니체는 동정이 도움받는 사람에게 수치심을 줄 수 있다고 말한다. 처음에는 선뜻 이해되지 않았다. 힘든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도와주는 것이 왜 그 사람을 부끄럽게 만든다는 것일까. 이전 글에서 동정의 감정과 돕는 행동이 같은 것은 아닐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상대와 얼마나 함께 아파했는지는 나에게 일어난 일이고, 실제로 상대에게 무엇이 도움이 되었는지는 별개의 문제일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니체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간다. 그 도움을 받는 사람은 나의 동정을 어떻게 느끼는가. 자료에서는 이 문제를 아주 직접적으로 다룬다. 남을 불쌍히 여기는 동정은 때로 상대의 자존과 존엄을 건드릴 수 있다. 고통받는 사람은 단순히 고통만 느끼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처지를 다른 사람에게 드러내야 한다는 수치심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고귀한 사람이라면 상대에게 수치심을 주지 않으려고 해야 하고, 오히려 타인의 고통 앞에서 자기 자신이 부끄러움을 느껴야 한다고 말한다. 이 말을 곰곰이 생각해보니 ‘불쌍하다’는 말에는 미묘한 높낮이가 들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괜찮은 곳에 있고, 당신은 힘든 곳에 있다. 나는 줄 수 있고, 당신은 받아야 한다. 나는 당신의 어려움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고  당신은 내가 바라보는 사람이 된다.

 

물론 모든 도움에 이런 우월감이 들어 있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선한 마음에서 출발했더라도 도움을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사이에 이런 높낮이가 생길 가능성은 있다. 예전에 아도르노의 『미니마 모랄리아』를 읽고 매일글쓰기에 선물과 자선에 관한 내용을 적어둔 적이 있다. 그 글에서 마음에 남았던 것은 선물의 크기보다 받는 사람을 얼마나 생각했는가가 중요하다는 부분이었다. 좋은 선물을 하려면 내가 주고 싶은 것을 고르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받는 사람이 무엇을 좋아할지 상상해야 한다. 그 사람의 취향과 생활을 생각하고, 때로는 시간을 들여 골라야 한다.

 

그러려면 잠시 나의 자리에서 나와야 한다. 이것은 도움에도 그대로 적용될 것 같다. 도움을 주는 사람에게 가장 쉬운 질문은 이것이다.

“내가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좋은 질문이다. 하지만 이 질문의 중심에는 여전히 내가 있다. 내 능력, 내 경험, 내가 줄 수 있는 것.

질문을 조금 바꿔보면 다르게 보인다. “이 사람에게 지금 무엇이 필요할까?” 이때 중심은 상대에게로 이동한다.

 

둘은 비슷한 질문 같지만 결과는 상당히 다를 수 있다. 나는 조언을 잘할 수 있지만 상대는 조언을 원하지 않을 수 있다. 내가 직접 일을 대신 처리할 수도 있지만 상대는 한번 스스로 해보고 싶을 수도 있다. 돈을 주는 것이 가장 빠른 도움일 수도 있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돈보다 다시 자기 힘으로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감각이 더 중요할 수도 있다.

 

도움의 기준을 내가 할 수 있는 것에서 상대에게 필요한 것으로 옮기는 순간, 상대는 다시 한 사람의 주체가 된다. 이 차이가 중요한 것 같다.

우리는 사람을 상황으로 부르기 쉽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 힘든 사람. 아픈 사람. 실패한 사람. 가난한 사람. 그러나 사람은 자신에게 닥친 한 가지 상황보다 훨씬 큰 존재다. 지금 도움이 필요하다고 해서 언제나 도움받아야 하는 사람은 아니다. 어떤 일에 실패했다고 해서 실패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다. 경험이 부족하다고 해서 능력이 없는 사람도 아니다. 그런데 동정은 이 차이를 쉽게 지워버릴 수 있다.

 

‘지금 힘든 일을 겪고 있는 사람’을 ‘불쌍한 사람’으로 만들어버린다. 바로 이 순간 도움이 오히려 상대의 얼굴을 지울 수 있다. 회사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다. 후배가 일을 어려워한다. 경험이 많은 사람에게는 답이 보인다. 그래서 도와준다. 처음에는 방법을 알려주고, 다음에는 자료를 고쳐주고, 문제가 생기면 대신 해결한다. 선의에서 시작된 일이다. 그런데 이것이 반복되면 어느 순간 관계가 고정될 수 있다. 나는 도와주는 사람. 상대는 도움받는 사람. 나는 판단하는 사람. 상대는 물어보는 사람. 그러고 나면 이런 말이 나오기 쉽다. “아직 혼자서는 어려운 것 같아.”

 

하지만 이전 글  『무지한 스승』을 읽으며 생각했던 것처럼 반대로 물어볼 수도 있다. 계속 도와주었기 때문에 혼자 판단할 기회를 빼앗은 것은 아닐까. 상대가 약해서 도움을 계속 받은 것인지, 도움을 계속 받다 보니 자신의 힘을 사용할 기회가 줄어든 것인지 생각보다 구분하기 어렵다.

 

그래서 요즘은 좋은 리더십에 대해서도 조금 다른 질문을 하게 된다. ‘내가 얼마나 많이 도와주었는가’보다 ‘내 도움 이후 그 사람이 무엇을 혼자 할 수 있게 되었는가.’ 이 질문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도움의 목적이 나를 계속 필요로 하게 만드는 것이어서는 이상하다. 좋은 도움이라면 언젠가는 도움이 필요 없어지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도움에는 작은 퇴장이 포함되어 있어야 할지도 모른다.

 

내가 한 발 물러서고, 상대가 다시 자기 삶의 중심으로 돌아오는 것. 생각해보면 도움을 주고 나서 자꾸 기억하고 싶은 마음도 있다. 내가 누구를 도왔다. 내가 어려울 때 챙겨주었다. 내가 기회를 주었다. 실제로 귀한 일이다. 문제는 그 기억이 관계 속에서 계속 사용될 때다. “내가 너한테 얼마나 해줬는데.” 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도움은 다른 성격을 갖기 시작한다. 도움을 준 사람은 채권자가 되고, 도움을 받은 사람은 빚진 사람이 된다. 선물이 거래가 된다. 그리고 상대는 다시 수치심을 느낄 수 있다.

 

내가 힘들었던 순간이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도움을 준 사람이 계속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도움을 가능한 한 드러내지 않으려는 태도를 보이는지도 모른다. 자료에서도 차라투스트라는 도움을 베풀면서 상대가 자신을 의식하여 수치심을 느끼지 않도록, 가능하다면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 한다고 설명한다. 이것을 무조건 ‘남몰래 선행하라’는 교훈으로 읽고 싶지는 않다. 선행을 공개하는 것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누군가의 행동이 알려져 더 많은 사람이 참여할 수도 있고, 공적인 지원이라면 과정이 투명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공개와 비공개가 아니라 도움의 주인공이 누구인가일 것이다. 도움을 주는 나를 보여주기 위해 상대가 등장하는가. 아니면 상대가 다시 자기 힘을 찾도록 내가 잠시 등장하는가. 사진을 찍고, 내가 한 일을 설명하고, 감사의 말을 기대하고, 상대가 나를 오래 기억해주기를 바란다면 어느 순간 내가 주인공이 된다. 반대로 상대가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가 내가 필요 없어져도 괜찮다면 도움의 중심은 그 사람에게 남아 있다.

 

가족 사이에서도 비슷하다. 부모가 자녀에게 해주는 일은 헤아리기 어렵다. 그런데 부모가 그것을 모두 기억해두었다가 “우리가 너를 위해 얼마나 했는데.” 라고 말하기 시작하면 자녀의 삶은 쉽게 빚이 된다.  부부 사이에서도 그렇다. 내가 참아준 것, 내가 희생한 것, 내가 챙겨준 것을 계산하기 시작하면 사랑했던 일이 채권처럼 남는다. 회사에서도 “내가 그 사람을 키워줬다.” 라는 말을 가끔 듣는다. 정말 많은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사람이 성장한 결과까지 모두 내 몫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이전글에서 이야기했던 ‘돌 속의 형상’ 문제로 다시 돌아가게 된다. 사람은 내가 만든 작품이 아니다. 내가 조금 도울 수는 있지만, 그 사람의 힘은 결국 그 사람의 것이다. 그래서 ‘내가 키웠다’보다

‘그 사람이 성장하는 시간에 내가 잠시 함께 있었다’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생각하면 도움은 생각보다 섬세한 일이 된다. 무엇을 줄 것인지뿐 아니라, 어떻게 주어야 하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언제 물러나야 하는지도 알아야 한다. 무엇보다 상대가 원하지 않을 때 거절할 수 있어야 한다. 거절할 수 없는 도움은 정말 도움일까. 이 질문이 마음에 남는다. 내가 좋은 뜻으로 해주겠다고 하는데 상대가 싫다고 하면 서운할 수 있다. ‘널 위해서 그러는 건데.’ 라는 말도 나온다.

 

하지만 상대가 거절할 권리가 없다면 그 도움의 주인은 이미 상대가 아니다. 선의라는 이유로 상대의 선택권까지 가져와버린 셈이다. 어쩌면 수치심을 주지 않는 도움은 거창하지 않을 것이다. 도움을 주면서도 상대가 자기 선택을 할 수 있게 하는 것. 감사를 강요하지 않는 것. 내가 해준 일을 오래 빚처럼 남겨두지 않는 것. 상대를 ‘내가 도와준 사람’으로 기억하지 않는 것. 그리고 도움의 끝에서 다시 그 사람을 나와 같은 높이에 세워두는 것. 니체가 동정을 불편하게 만드는 이유는 아마 이런 데 있을 것이다.

 

선의를 버리라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선의를 더 까다롭게 들여다보게 한다. 나는 정말 상대를 위해 돕고 있는가. 아니면 나의 좋은 마음을 확인하기 위해 상대의 불행을 필요로 하는가. 이 질문 앞에서는 ‘나는 좋은 뜻이었다’는 말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이글을 쓰면서 나는 도움을 판단하는 기준 하나를 새롭게 생각하게 된다. 얼마나 많이 주었는가가 아니라, 도움을 받은 뒤에도 그 사람이 자기 삶의 주인으로 남아 있는가.

좋은 도움은 상대를 더 작게 만들지 않아야 할 것 같다.

 

도움을 받았다는 이유로 고개를 숙이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다시 고개를 들 수 있게 해야 한다. 나에게 오래 의존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다시 자기 힘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전 글에서 이런 질문을 남겼다. 나는 이 사람과 함께 아파하고 싶은 것일까. 아니면 이 사람이 자기 힘을 다시 찾는 데 정말 도움이 되고 싶은 것일까. 이제 한 문장을 더 붙이고 싶다. 그 사람의 힘을 되찾게 하겠다는 나의 도움조차, 그 사람을 ‘약한 사람’으로 만들고 있지는 않은가. 그리고 결국 질문은 다시 나에게 돌아온다. 나는 상대를 보고 있는가. 아니면 상대를 돕고 있는 나 자신의 좋은 모습을 보고 있는가.

 

 

이전 글에서  창조에 대해 생각했다. 새로운 것이 생기려면 무엇인가를 더하기만 해서는 안 되고, 때로는 오래된 나의 일부가 깨지고 사라져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2부는 여기서 갑자기 시선을 다른 사람에게 돌린다. 내가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의 문제에서, 고통받는 다른 사람을 나는 어떻게 대할 것인가의 문제로 넘어간다. 「동정하는 자들에 대하여」라는 장이다. 제목만 보면 조금 불편하다. 우리는 보통 동정을 좋은 감정에 가깝게 생각한다. 누군가 힘들어하면 같이 마음 아파하고, 어려운 사람을 보면 도와주고 싶어지는 마음. 그런 마음이 없다면 오히려 너무 냉정한 사람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니체는 동정을 쉽게 칭찬하지 않는다. 자료에서도 이 장을 ‘동정의 심리학, 동정의 기술’로 설명하면서 단순히 “동정은 좋다, 나쁘다”라고 판단하지 않는다. 누군가를 불쌍히 여기는 감정이 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왜 나는 그를 돕고 싶어 하는지, 고통받는 사람에게 실제로 무엇이 필요한지를 차례로 묻는다.

 

읽으면서 예전에 함께 일했던 동료에게 전화가 왔던 일이 떠올랐다. 오랫동안 같이 일했던 사람이었다. 한동안 연락이 뜸했는데 어느 날 전화를 걸어왔다. 회사 일이 힘든 모양이었다. 조직이 어떻게 바뀔지 불확실했고, 함께 일하는 사람과도 관계가 좋지 않았다. 팀 안에서 감정이 상한 일도 있었던 것 같다. 처음에는 무슨 업무 때문에 전화했나 생각했다. 그런데 이야기는 계속 길어졌다. 한 가지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전화한 것이 아니었다. 답을 듣고 싶은 것도 아닌 듯했다. 그저 지금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을 누군가에게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같다. 나는 대부분 들었다.

 

중간중간 내 생각을 말하기도 했지만 뾰족한 해결책은 없었다. 내가 그의 조직을 바꿀 수도 없었고, 갈등하는 사람을 대신 만나줄 수도 없었으며,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려줄 수도 없었다. 전화가 끝난 뒤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못했다. 그런데도 한편으로는 전화를 받은 것만으로 어느 정도 할 일을 한 것 같았다. 아마 그때 처음 이런 생각을 조금 진지하게 했던 것 같다. 사람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은 반드시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일까. 때로는 그 사람이 자기 이야기를 끝까지 할 수 있도록 옆에 있는 것도 도움이 아닐까.

 

나는 원래 누군가 고민을 이야기하면 해결방법부터 생각하는 편이다. 특히 회사 일이라면 더 그렇다. 무슨 문제가 생겼는지 듣고, 원인이 무엇인지 정리하고, 어떤 선택지가 있는지 생각한다. “그러면 이렇게 해보는 게 어때요?” 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업무에서는 꽤 익숙한 방식이다.

 

문제가 생겼는데 감정만 이야기하고 있어서는 해결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팀장이라는 역할도 어느 정도 그런 판단을 요구한다. 그래서 누군가 힘들다고 이야기할 때도 나도 모르게 해결해야 할 문제처럼 듣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사람의 어려움은 보고서의 현안과 조금 다르다.

상대가 원하는 것이 항상 해결책은 아니다. 이미 해결방법을 알고 있는데 마음이 따라가지 않을 수도 있고, 어떤 답이 없는 문제일 수도 있다.

때로는 누군가가 자신의 말을 끊지 않고 들어주는 것이 먼저 필요한 순간도 있다.

 

그렇다면 공감이 중요하다는 결론을 내리면 될까. 나도 한동안 그렇게 생각했다. 논리적인 설명보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공감이라고. 실제로 예전에 발표를 보면서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말을 유창하게 잘하고 논리를 촘촘히 구성한 사람보다 자신의 실제 경험을 조심스럽게 이야기한 사람의 발표가 더 오래 기억에 남은 적이 있었다. 정보를 많이 얻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이 무엇을 느꼈는지가 조금 전해졌기 때문이다.

 

사람과 이야기할 때도 그렇다. “그럴 수도 있지.” 라고 바로 판단하는 것과 “그때 정말 힘들었겠구나.” 라고 한 번 머물러주는 것은 다르다.

그래서 나는 공감이 소통에서 꽤 중요하다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니체의 동정 이야기를 읽다 보니 여기에서도 질문 하나가 더 생긴다. 내가 상대의 고통을 함께 느꼈다는 사실이 정말 그 사람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뜻일까. 둘은 같지 않을 수도 있다. 상대가 힘들다고 말한다. 나도 마음이 아프다. 같이 화를 낸다. 상대를 힘들게 한 사람을 비난한다. “네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알 것 같다.” 라고 말한다. 분명 따뜻한 반응이다.

 

그런데 그 뒤에 상대는 어떻게 되는가. 조금 편안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반드시 문제가 나아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함께 분노하면서 상대의 분노를 더 크게 만들 수도 있다. 내가 너무 빨리 “그 마음 알아”라고 말하면 실제로는 내가 알지 못하는 고통을 안다고 단정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같이 슬퍼하는 데 집중하다 보면 상대가 이제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는 놓칠 수도 있다. 그래서 같이 아파하는 것과 잘 돕는 것은 반드시 같은 일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부분에서 니체의 질문이 흥미로워진다. 「동정하는 자들」에서 그는 고통받는 사람을 외면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차라투스트라 자신도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여러 일을 했다고 말한다. 다만 자신이 더 기뻐할 줄 알게 되면서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더 좋은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자료에서는 이를 자신을 미워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도 고통을 줄 수 있는 반면, 자기 삶을 사랑하고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이 타인에게도 더 좋은 힘을 줄 수 있다는 문제로 읽는다.

 

이 대목은 내가 생각했던 동정과 조금 다르다. 나는 그동안 다른 사람의 고통에 얼마나 깊이 함께 아파할 수 있느냐가 좋은 사람의 기준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니체는 오히려 묻는다. 상대의 고통 속으로 같이 가라앉는 것이 정말 최선인가. 두 사람이 함께 물속으로 빠지는 것과, 한 사람은 물 밖에서 손을 내미는 것 가운데 어느 쪽이 더 도움이 되는가.

 

물론 이것을 “남의 고통에 감정을 이입하지 말라”는 말로 읽고 싶지는 않다. 그렇게 읽으면 너무 쉬워진다.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는 냉정함을 니체의 이름으로 정당화할 수도 있다. 회사에서도 흔히 비슷한 말을 한다. “감정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객관적으로 보자.”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 말이 때로는 상대의 고통을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는 뜻으로 사용될 수도 있다. 누군가 어려움을 이야기하는데 “회사생활이 원래 그런 거야.” “다들 힘들어.” “감정적으로 생각하지 마.” 라고 말한다면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그냥 귀찮아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두 극단 사이를 생각하게 된다. 상대의 고통 속으로 완전히 들어가 함께 무너지는 것과, 상대의 감정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해결책만 던지는 것. 둘 사이 어딘가에 다른 방식이 있지 않을까. 느끼되 휩쓸리지 않는 것. 거리를 두되 외면하지 않는 것. 이 표현들이 마음에 남는다.

 

예전에 그 동료의 전화를 받았을 때 내가 잘했던 것이 있다면 문제를 해결해준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오랫동안 이야기를 들어준 것 정도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것조차 조금 다르게 보인다. 나는 그의 마음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같은 회사에서 일한다고 해도 그가 있는 자리와 내가 있는 자리는 다르고, 그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도 다르며, 그동안 쌓인 감정도 내가 알 수 없다. “나도 비슷한 경험이 있으니 당신 마음을 안다.” 라고 쉽게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어쩌면 공감은 상대와 같은 감정을 느끼는 능력이라기보다, 내가 그 사람의 감정을 전부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계속 듣는 태도에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듣는다는 말의 의미도 달라진다. 상대가 이야기하는 동안 내 경험을 꺼내 비교하지 않는 것. ‘나도 그런 적 있어’라고 너무 빨리 말하지 않는 것. 해결방법을 생각하느라 그 사람의 다음 말을 놓치지 않는 것. 상대가 느끼는 감정을 내가 옳다거나 틀렸다고 판단하지 않는 것.

그리고 필요한 순간에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 감정과 행동을 구분하면 오히려 도움이 조금 분명해진다.

 

내가 마음이 아프다고 상대에게 반드시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내가 상대만큼 아프지 않다고 해서 도울 수 없는 것도 아니다.

어떤 재난을 직접 겪지 않은 사람도 구조활동을 할 수 있다. 같은 상실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도 곁에 있을 수 있다. 같은 직장 문제를 겪지 않은 사람도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얼마나 비슷한 감정을 느꼈는지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사람에게 어떤 행동이 필요한지를 보는 것일 수도 있다.

 

회사에서 구성원이 어려움을 이야기할 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그냥 들어주는 것이 먼저다. 어떤 경우에는 내가 직접 나서야 한다. 어떤 경우에는 해결책을 함께 찾아야 하고, 어떤 경우에는 스스로 해결할 시간을 주어야 한다. 같은 ‘힘들다’는 말이라도 필요한 것은 다를 수 있다.

 

그래서 도움에는 기술이 필요한 것 같다. 선한 마음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때가 있다. 이전 글에서 나는 과거의 나를 놓아주는 일에 대해 썼다. 그 글을 쓰면서도 내가 오래 가지고 있던 ‘좋은 사람’의 이미지 하나를 발견한다. 좋은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이 힘들어할 때 같이 마음 아파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물론 그런 마음은 귀하다. 그것이 없으면 우리는 너무 쉽게 타인의 고통을 지나칠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서 한 걸음 더 가야 할지도 모른다. 내가 같이 아파했다는 사실에서 만족하지 않는 것. “나는 충분히 공감해주었다”고 생각하며 역할을 끝내지 않는 것.

오히려 묻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상대에게 무엇이 필요한가. 때로는 말일 것이다. 때로는 침묵일 것이다. 때로는 실제적인 도움이 필요할 것이고, 때로는 내가 끼어들지 않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 그리고 아주 가끔은 상대가 듣고 싶어 하지 않는 이야기를 해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그 지점부터 니체의 동정 이야기는 더 불편해진다. 고통받는 사람에게 위로만 주는 것이 정말 사랑인지, 상대가 자신의 힘을 다시 찾도록 돕는 것은 무엇인지 묻게 되기 때문이다. 그 문제는 다음에 조금 더 생각해보고 싶다.

 

지금은 한 가지 구분만 기억하려 한다. 동정의 감정과 돕는 행동은 같은 것이 아니다. 내 마음이 얼마나 아픈가는 나에게 일어난 일이다.

상대에게 무엇이 도움이 되는가는 그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이다. 둘은 만날 수 있지만 언제나 일치하지는 않는다. 이 차이를 모르고 있으면 상대를 돕는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나의 감정만 확인하고 있을 수도 있다. 반대로 이 차이를 알면 조금 다른 도움도 가능할 것 같다. 상대와 똑같이 느끼지 못하더라도 곁에 있을 수 있고, 상대의 고통에 함께 빠지지 않으면서도 손을 내밀 수 있다.

 

생각해보면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려면 한 사람은 물 위에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물 밖에 있는 사람이 덜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거리가 누군가를 끌어올릴 힘이 되기도 한다. 그러니 이제 누군가 힘들다고 말할 때 조금 천천히 묻고 싶다. ‘나도 아프다’고 말하기 전에,

‘내가 해결해주겠다’고 나서기 전에, 먼저 그 사람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보는 것이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도 묻는다. 나는 지금 이 사람과 함께 아파하고 싶은 것일까. 아니면 이 사람이 자기 힘을 다시 찾는 데 정말 도움이 되고 싶은 것일까. 두 마음은 비슷해 보인다. 하지만 어쩌면 그 사이에 동정과 사랑을 가르는 작은 거리가 있는지도 모른다.

 

 

 

이전 글에서  돌과 망치 이야기를 했다. 차라투스트라가 말하는 창조는 조각가가 자기 머릿속에 있는 모양을 돌에 새기는 일이 아니었다.

단단하고 보기 흉한 돌 안에 이미 어떤 형상이 잠들어 있고, 망치는 그 형상을 가두고 있는 것을 깨뜨린다. 그런데 여기에는 내가 조금 지나쳤던 장면이 있다. 돌 안의 형상이 밖으로 나오려면 돌의 일부는 깨져야 한다. 그대로인 채 새로운 형상이 나타날 수는 없다.그렇다면 사람도 마찬가지일까.

 

새로운 내가 생겨나기 위해서는 지금의 무엇인가가 사라져야 하는 것일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행복의 섬에서」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창조를 꽤 불편한 말과 연결한다. 고통, 죽음, 해산. 이것은 생물학적인 죽음이 아니라, 한 사람의 삶 안에서 낡은 자아가 소멸하고 다른 자아가 태어나는 ‘사건적인 죽음’이다.  창조하는 사람의 삶에는 ‘쓰디쓴 죽음’이 여러 번 있어야 하며, 다시 태어날 아이가 되기 위해서는 산모가 되어 해산의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달라지는 일을 굳이 죽음이라고까지 해야 할까. 하지만 오래전에 쓴 매일글쓰기 한 편을 다시 읽다가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제목은 ‘부끄러움’이었다. 과거의 나를 떠올리다가 쓴 글이었다. 젊었을 때의 나는 지금보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훨씬 많이 의식했다.

분위기에 따라 움직였고,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먼저 살폈다.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을 따라 하기도 했고, 그때의 분위기에서는 별로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행동도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한참 지나 그 모습을 떠올리면 어떤 장면들은 부끄럽다. 이상한 점은 그때는 별로 부끄럽지 않았다는 것이다. 같은 일을 두고 과거의 나는 아무렇지 않았는데 지금의 나는 얼굴이 조금 화끈거린다. 왜 그럴까.

 

처음에는 단순하게 생각했다. 나이가 들었기 때문이라고. 조금 더 철이 들었고, 옳고 그름을 더 잘 알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그런데 글을 쓰면서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것 자체가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 사이에 거리가 생겼다는 증거일 수도 있겠구나.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내가 완전히 같다면 굳이 부끄러울 이유도 없을 것이다. 그때의 판단이 여전히 옳고, 그때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 지금도 똑같이 중요하며, 그때의 행동을 지금도 똑같이 할 것이라면 과거의 모습을 낯설게 바라볼 수 없다.

 

그런데 어느 순간 과거의 내가 낯설어진다. ‘나는 왜 저랬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조금 불편하지만 그 안에는 작은 변화가 들어 있다. 이전에는 당연했던 것이 더 이상 당연하지 않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부끄러움은 반드시 나쁜 감정만은 아닐 수도 있다. 과거의 나를 미워하라는 뜻도 아니다. 오히려 내가 그 사람에게서 조금 멀어졌다는 표시일 수 있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한 생을 살면서 여러 번 그렇게 달라진다. 예전에는 성공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더 이상 성공이라고 생각하지 않기도 한다.

그토록 가지고 싶었던 것이 어느 날 별로 중요하지 않게 되기도 한다.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기준이 달라지고, 일을 잘한다는 생각도 달라진다. 젊었을 때는 남들보다 앞서는 것이 중요했다면 어느 시기에는 오래 버티는 것이 더 중요해질 수도 있다. 예전에는 인정받는 것이 중요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오래 하는 쪽이 더 중요해질 수도 있다.

 

바뀌는 것은 생각만이 아니다. 그 생각에 맞추어 살던 사람도 함께 사라진다. 인정을 받아야 안심했던 사람. 남보다 뒤처지면 불안했던 사람.

다른 사람의 기대에 맞추어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사람. 그 사람의 일부가 약해져야 다른 방식으로 사는 사람이 나타날 수 있다. 아마 차라투스트라가 말하는 ‘죽음’도 이런 것이 아닐까. 다시 생겨나려면 소멸하기를 원해야 하고, 하나의 삶 안에서 수많은 변신이 일어나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죽여야 한다’가 아니라 ‘그대로 유지할 수 없다’는 쪽에 있는 것 같다. 새로운 것을 원하면서 기존의 것은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변하고 싶지만 지금 가지고 있는 안정은 잃고 싶지 않다. 새로운 일을 하고 싶지만 지금의 지위는 그대로 가지고 싶다.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살고 싶지만 다른 사람들의 인정도 그대로 받고 싶다.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지만 누구도 서운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새로운 내가 되고 싶지만 이전의 나는 하나도 포기하고 싶지 않다.

 

가능하다면 가장 좋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 삶에서는 잘 되지 않는다. 무엇인가를 선택하면 무엇인가를 놓쳐야 한다. 시간을 새로운 곳에 쓰면 이전에 하던 일에 쓸 시간은 줄어든다. 한 기준을 중요하게 여기기 시작하면 다른 기준은 이전만큼 중요하지 않게 된다. 다른 사람의 기대에서 조금 벗어나려면 때로는 누군가의 실망도 감수해야 한다. 새로운 관계를 만들려면 오래된 관계의 방식도 달라져야 한다. 그래서 변화는 생각보다 불편하다.

 

새로운 것이 생기는 기쁨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익숙한 것을 잃는 아쉬움이 같이 온다. 차라투스트라가 창조와 해산의 고통을 함께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새로운 것을 낳는 일은 무엇인가를 더하는 일만이 아니다. 이미 나를 이루고 있던 것과 헤어지는 일이기도 하다.

이 점에서 ‘자기계발’이라는 말과 ‘자기극복’이라는 말도 조금 다르게 들린다. 자기계발을 생각하면 나는 지금의 나에게 무엇인가를 더하는 모습을 떠올린다. 새로운 지식을 배우고, 새로운 기술을 익히고, 더 나은 습관을 만들고, 능력을 하나 더 갖는다. 기존의 나는 그대로 있고 그 위에 좋은 것을 계속 쌓는다.

 

하지만 자기극복은 조금 다르다. 무엇인가를 더 얻는 동안 이전의 나는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없다. 예전의 판단 방식이 깨질 수도 있고,

오랫동안 믿어온 가치가 흔들릴 수도 있고, 내가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모습이 오히려 낯설게 보일 수도 있다. 그래서 자기극복에는 약간의 상실이 따라온다. 이전 글에서 좋은 리더가 사람을 자기 방식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안의 가능성이 나올 수 있도록 돕는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썼다.

 

그런데 이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구성원이 자기 방식으로 판단하기 시작하면 팀장의 방식과 달라질 수 있다. 내가 가르쳐준 방법보다 다른 방법을 더 좋다고 할 수도 있다. 언젠가는 내 조언을 필요로 하지 않을 수도 있다. 어쩌면 나보다 더 잘할 수도 있다. 그 순간 사라져야 하는 것은 상대 안에 있는 무언가만이 아니다. ‘내가 필요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리더의 모습도 함께 사라져야 한다. 아이를 키우는 일도 그렇지 않을까. 잘 키운다는 것은 결국 나를 덜 필요로 하는 사람으로 성장시키는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아이가 자랄 때 아이만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부모 역시 계속 달라져야 한다. 손을 잡아주던 부모는 어느 순간 손을 놓아야 하고, 대신 결정해주던 부모는 기다려야 한다. 아이의 성장과 함께 이전의 부모도 조금씩 사라진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도 그런 것인지 모른다. 관계가 오래 지속되려면 처음의 관계를 계속 유지할 수 없다. 서로 변하고, 거리도 변하고, 필요로 하는 것도 달라진다. 예전 방식만 붙잡으면 관계가 오히려 멈춘다. 생각해보니 죽음이라는 표현이 조금 덜 과장되어 보인다.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에도 수없이 작은 죽음을 겪는다. 한때 중요했던 꿈이 사라지고, 믿었던 생각이 무너지고, 소중하게 여기던 물건을 놓아주고, 오랫동안 자신을 설명하던 이름이나 역할에서 멀어진다.

 

문제는 그것들이 사라지는 것 자체보다, 사라지지 않도록 붙잡으려 할 때 생기는지도 모른다. 나는 회사 생활을 하면서도 여러 번 비슷한 경험을 했다. 어떤 자리에 가고 싶었다가 그 자리에 가면 또 다음 자리를 생각했다. 평가를 잘 받고 싶었고, 인정받고 싶었고, 내가 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확인을 받고 싶었다. 그것이 잘못이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때의 나에게는 필요했던 욕망이었을 것이다. 그 욕망 덕분에 더 열심히 일하기도 했고 많은 것을 배우기도 했다.

 

하지만 한때 나를 움직였던 힘이 평생 나를 움직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어느 시기에는 도움이 되었던 욕망이 다른 시기에는 나를 붙잡을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는 쉽게 놓지 못한다. 오랫동안 그것으로 나 자신을 설명해왔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사람이다.’ 라는 문장은 편안하다.

하지만 편안한 만큼 위험할 수도 있다. 그 문장이 너무 단단해지면 새로운 내가 들어올 자리가 없어진다. 이전 글에서 언급한 돌처럼 단단한 껍질이 된다.

 

예전부터 글을 쓰면서 과거의 메모를 자주 다시 읽는다. 몇 년 전의 글에는 지금과 다른 내가 있다. 어떤 글은 여전히 공감된다. 어떤 글은 생각보다 괜찮다. 그런데 어떤 글은 낯설고, 어떤 문장은 조금 부끄럽다. 예전에는 그런 글을 지우고 싶을 때도 있었다. 지금은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그 글을 쓴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있는 것 아닌가. 그때의 나는 그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생각했을 것이다. 지금의 내가 그 사람보다 반드시 더 훌륭하다고 말할 수도 없다.

 

다만 달라졌다. 그래서 이제는 과거의 나를 없애고 싶다기보다 그 사람을 지나왔다고 생각해보려 한다. 이 차이는 중요하다. 과거의 나를 미워하면 과거에 계속 묶인다. ‘나는 왜 그랬을까.’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하지만 과거의 나를 지나왔다고 생각하면 그 사람도 내 삶의 한 과정이 된다. 그 사람의 욕망도, 실수도, 부끄러움도 지금의 나를 만드는 재료가 된다.

 

창조에 필요한 죽음은 과거를 지워버리는 죽음이 아니라 이런 것인지도 모른다. 과거의 나에게 더 이상 현재를 지배할 권리를 주지 않는 것.

당시의 가치가 지금의 나를 계속 평가하지 못하게 하는 것. 예전의 성공 기준이 지금의 삶까지 결정하지 못하게 하는 것. 그리고 필요하다면 새로운 기준으로 다시 살아보는 것. 물론 말처럼 간단하지 않다.

 

익숙한 나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평가를 의식하지 않겠다고 해놓고도 평가 결과가 나오면 마음이 움직인다. 소유가 행복의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새로운 물건을 보면 갖고 싶어진다. 나만의 시간을 중요하게 생각하면서도 사람들의 기대를 거절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낡은 나는 죽었다고 선언한다고 죽지 않는다.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한 번의 죽음이 아니라 삶 속에 ‘허다한’ 죽음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조금씩 알아차리고, 조금씩 놓아주고, 또다시 붙잡는 자신을 발견하고, 다시 놓아주는 일. 변신은 한 번의 결심이라기보다 이런 반복에 가까울 것이다. 생각하면 조금 안심도 된다. 나는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될 필요가 없다. 오늘 모든 것을 버릴 필요도 없다. 다만 새로운 것을 만들고 싶다면 오래된 것 가운데 무엇을 놓아야 하는지는 물어야 한다. 새로운 시간을 만들고 싶다면 무엇에 쓰던 시간을 줄여야 하는지. 새로운 관계를 만들고 싶다면 오래된 관계 방식 가운데 무엇을 바꿔야 하는지. 다른 방식으로 일하고 싶다면 무엇을 통제하려는 습관에서 물러나야 하는지. 다른 나로 살아보고 싶다면 어떤 자기설명을 이제 그만 반복해야 하는지.

 

창조는 빈 공간에서 시작되지 않는 것 같다. 이미 너무 많은 것으로 가득 차 있는 나 안에 빈자리를 만드는 데서 시작한다. 그래서 무엇인가를 만드는 일과 무엇인가를 떠나보내는 일은 어쩌면 같은 일인지도 모른다. 새싹이 나오려면 씨앗의 껍질이 갈라진다. 돌 속의 형상이 나오려면 돌이 깨진다. 아이가 태어나려면 이전에는 없던 고통과 변화가 생긴다.

 

그리고 사람이 달라지려면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다’라고 말하던 오래된 나도 조금씩 힘을 잃어야 한다. 몇 년 전 과거의 나를 떠올리며 느꼈던 부끄러움을 지금은 조금 다르게 바라본다. 부끄러움은 지워버리고 싶은 과거의 증거만은 아니었다. 어쩌면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 사이에 이미 작은 틈이 생겼다는 신호였다. 그 틈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과거의 나를 바라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거리가 있었기 때문에 또 다른 내가 생길 가능성도 생겼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변화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새로운 것이 생기는 순간에는 무엇인가가 조금 깨지고, 조금 낯설어지고, 조금 아플 것이다. 그것을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어쩌면 그것이 창조가 시작되고 있다는 표시일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이제 질문을 조금 바꾸어본다. 나는 앞으로 무엇이 되고 싶은가. 그 질문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것 같다. 그보다 먼저 물어야 할 것이 있다. 그 새로운 내가 나오기 위해 지금의 나는 무엇을 놓아주어야 하는가. 그리고 더 어려운 질문 하나가 남는다. 나는 새롭게 태어나기를 원하는 만큼, 이전의 내가 사라지는 것도 받아들일 수 있는가.

 

 

이전 글에서  ‘행복의 섬’을 이야기했다.  세상을 떠나버리는 무인도가 아니라, 세상 안에 있으면서도 세상의 가치에 완전히 휩쓸리지 않고 무엇인가를 만들어볼 수 있는 작은 작업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시간도 그런 섬이고, 카메라를 들고 혼자 걷는 시간도 그런 섬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무엇인가를 만든다’고 쓰고 나니 또 질문이 생겼다. 창조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없던 것을 새로 만들어내는 일일까. 아니면 이미 존재하고 있었지만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 것을 밖으로 나오게 하는 일일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2부 「행복의 섬에서」에는 돌과 망치가 등장한다. 차라투스트라는 단단하고 보기 흉한 돌 안에 ‘형상 가운데 으뜸가는 형상’이 잠들어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의 망치로 그 형상을 가두고 있는 감옥을 부수려고 한다. 강의자료에서는 이 장면을 위버멘쉬의 잠재성과 연결한다. 중요한 것은 조각가가 자기 머릿속의 형상을 돌에 새기는 것이 아니라, 돌 안에 이미 잠들어 있는 형상이 드러나도록 돌을 깨뜨린다는 해석이다.

 

처음 읽을 때는 별 차이가 없어 보였다. 어차피 망치로 돌을 두드리고 결국 형상이 나타나는 것 아닌가. 하지만 두 방식은 상당히 다르다.

첫 번째 조각가에게 형상은 이미 자기 머릿속에 있다. 돌은 재료다. 조각가는 자신이 원하는 모습을 알고 있고, 돌에서 필요 없는 부분을 깎아내면서 그 모습을 만들어낸다.

 

두 번째 방식에서는 다르다. 형상이 조각가의 머릿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돌 안에 있다. 망치를 든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모양을 강요하는 사람이 아니라, 형상이 나오지 못하도록 가두고 있는 것을 걷어내는 사람에 가까워진다.  앞의 방식은 ‘계몽주의적 교육자’, 뒤의 방식을 잠재성을 현실화하도록 유혹하는 차라투스트라와 연결할 수 있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몇 년 전 읽었던 책 한 권이 떠올랐다. 자크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이다. 2019년 독서모임 책으로 읽었다. 당시 나는 책 전체를 다 읽지는 못했고, 독서모임에서 들은 내용과 인상 깊었던 부분을 매일글쓰기에 길게 옮겨놓았다. 책에 등장하는 조제프 자코토라는 교사는 특이한 상황을 만난다.

 

그는 프랑스어를 가르쳐야 했지만 학생들은 프랑스어를 몰랐고, 자신은 학생들의 언어인 네덜란드어를 몰랐다. 보통이라면 가르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자코토는 프랑스어와 네덜란드어가 함께 적힌 책 한 권을 학생들에게 주고 스스로 비교하면서 배우게 했다. 놀랍게도 학생들은 선생의 자세한 설명 없이도 프랑스어를 익혀갔다. 이 경험이 자코토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스승의 설명은 무엇을 위해 필요한가. 우리는 보통 가르친다는 것을 설명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아는 사람이 모르는 사람에게 지식을 전달한다. 쉬운 것부터 어려운 것으로 순서를 정해준다. 상대가 이해했는지 확인하고, 모르면 다시 설명한다. 아주 자연스러운 방식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이전 글에서 썼던 학교 강의도 그랬다. 학생들에게 무선통신과 직무에 대해 알려주고 싶어서 50장이 넘는 자료를 만들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잘 정리해서 설명하면 학생들도 더 많이 알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회사에서도 비슷하다. 경험이 많은 사람이 경험이 적은 사람에게 알려준다. 팀장은 방향을 정하고 구성원에게 설명한다. 문제가 생기면 해결방법을 알려준다.

 

그런데 『무지한 스승』은 조금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설명하는 사람은 설명을 시작하기 전에 이미 하나의 가정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상대는 혼자서는 이것을 이해하기 어렵다. 그래서 내가 설명해주어야 한다. 설명은 도움처럼 보이지만, 반복되면 묘한 관계를 만들 수 있다.

나는 설명하는 사람이고, 상대는 설명을 들어야 하는 사람이 된다. 나는 알고 있고, 상대는 모르고 있다. 내가 가르치고, 상대는 배운다. 이 관계가 오래 반복되면 상대는 자신도 모르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 ‘나는 혼자서는 잘 모른다.’ ‘누군가 알려줘야 한다.’ ‘내 판단보다는 경험 많은 사람의 판단이 더 정확하다.’ 도움을 주었는데 오히려 혼자 할 수 없다는 믿음을 키워준다면 이상한 일이다.

 

2019년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특히 한 대목을 오래 적어두었다. 설명자가 무능한 사람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설명하는 관계 자체가 상대를 무능한 사람으로 만들 수도 있다는 문제였다.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계속 설명한다는 것은,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너는 혼자 힘으로는 이것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메시지를 함께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교육의 문제로 읽었다. 지금 다시 읽으니 조직의 문제로 보인다.

팀장이 되고 나면 이상한 유혹이 생긴다. 알려주고 싶다. 일을 오래 했기 때문에 비슷한 상황을 이미 경험한 적이 많다. 어떤 방향으로 가면 문제가 생길지 조금 빨리 보이기도 한다. 구성원이 고민하고 있으면 답을 알려주고 싶어진다. 내가 설명해주는 것이 더 빠르다. 내가 결정하는 것이 더 안전해 보인다. 때로는 실제로 그렇다. 시간이 없거나 위험한 상황에서는 경험 있는 사람이 빠르게 판단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이 반복되면 다른 문제가 생긴다. 구성원은 점점 더 많이 묻는다. 처음에는 작은 것을 물어보고, 나중에는 판단 자체를 물어본다.

“이렇게 하면 될까요?” “어느 쪽으로 할까요?” “팀장님 생각은 어떠세요?” 질문을 많이 받으면 처음에는 내가 필요한 사람처럼 느껴진다.

일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느낌도 든다. 어쩌면 약간의 만족감도 있을 것이다. 내가 없으면 일이 잘 돌아가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끔은 반대로 생각해본다. 내가 없으면 움직이지 못하는 팀을 만들었다면, 그것이 정말 내가 일을 잘한 결과일까. 내가 모든 것을 알고 있어야 하고, 내가 모든 판단을 해야 하고, 모두가 내 대답을 기다린다면 나는 유능한 팀장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의 능력이 드러날 공간을 너무 많이 차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니체의 돌과 망치 비유가 여기서 다시 떠오른다. 내가 구성원을 바라보면서 이미 머릿속에 완성된 형상을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

‘좋은 직원은 이래야 한다.’ ‘후배라면 이 정도는 해야 한다.’ ‘팀장이 되려면 이런 성격이어야 한다.’ ‘보고서는 이런 식으로 써야 한다.’

그러면 나는 조각가가 된다.

 

상대라는 돌에서 내가 원하는 형상과 맞지 않는 부분을 계속 깎아낸다. 말투를 고치고, 일하는 방식을 고치고, 보고하는 순서를 고치고,

판단하는 방식까지 고친다. 결국 내가 보기 좋은 형상에 가까워진다. 그런데 그것은 누구의 형상일까. 상대의 것일까. 아니면 내 머릿속의 것일까. 이 질문은 조금 불편하다. 관리와 교육에는 어느 정도 기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회사라면 더욱 그렇다. 모든 사람에게 아무 방식으로나 일하라고 할 수는 없다. 업무에는 절차가 있고, 책임이 있고, 일정이 있고, 요구되는 품질이 있다. 그래서 “각자의 가능성을 믿자”는 말만으로 조직을 운영할 수는 없다. 『무지한 스승』의 이야기를 조직에 그대로 가져오는 것도 무리일 것이다.

 

니체의 망치 역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리라는 뜻으로 읽히지는 않는다. 망치는 여전히 돌을 친다. 강한 힘이 필요하다. 다만 목적이 다르다. 내가 원하는 모양을 만들기 위해 치는 것인지, 상대 안에 있는 힘이 움직일 공간을 만들기 위해 치는 것인지가 다르다. 이 차이는 겉으로 보면 아주 작을 수 있다. 답을 알려주는 대신 먼저 묻는 것. “당신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문제가 생겼을 때 해결방법부터 말하지 않고,

“어떤 방법들이 있을까요?”라고 기다리는 것. 결과가 조금 마음에 들지 않아도 곧바로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고치지 않고 왜 그렇게 판단했는지 들어보는 것. 내가 하면 더 빠르다는 이유만으로 일을 가져오지 않는 것. 실패할 가능성이 조금 있더라도 감당할 수 있는 범위라면 직접 해볼 수 있도록 두는 것.

 

말로 쓰면 쉬운데 실제로는 어렵다. 기다리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내가 직접 하면 십 분이면 끝날 일이 다른 사람이 하면 한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 그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 답답하다. 결국 손을 대고 싶어진다. 아마 교육도 비슷할 것이고,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도 비슷할 것이다.

 

도와주고 싶은 마음과 대신 해주고 싶은 마음은 아주 가까이에 있다. 상대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내가 원하는 결과를 빨리 보고 싶은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사람을 믿는다는 말은 생각보다 어려운 말 같다. 칭찬하고 격려한다는 뜻만은 아니다. 상대가 내가 생각한 방식과 다르게 성장할 가능성까지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기대했던 모습과 전혀 다른 모습이 나올 수도 있다. 내가 가르치지 않은 방법을 발견할 수도 있다.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은 것을 중요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때도 그것을 가능성이라고 인정할 수 있을까.

여기에서 니체의 돌 속 형상은 조금 더 흥미로워진다.

 

돌 속의 형상을 위버멘쉬의 잠재성으로 읽는다. 형상은 밖에서 가져와 돌 속에 집어넣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 돌의 가능성에 속해 있다.

이 해석대로라면 위버멘쉬도 누군가가 만들어주는 완성품은 아니다. 스승이 만들어주는 인간도 아니고, 좋은 부모가 만들어주는 자녀도 아니며, 좋은 팀장이 만들어주는 직원도 아니다.

 

자기 안의 힘을 스스로 현실화해가는 과정에 더 가까워진다. 그렇다면 스승이나 리더가 할 수 있는 일도 달라진다. 사람을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자기 힘을 사용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을 함께 걷어내는 것. 실패를 지나치게 두려워하게 만드는 것을 줄이고, 모든 답을 윗사람에게서 찾는 습관을 줄이고, 자신의 판단을 믿지 못하게 만드는 경험에서 조금씩 벗어나게 하는 것. 그 뒤의 모습까지 내가 결정하려고 하지 않는 것.

 

생각해보면 나 자신에게도 똑같은 문제가 있다. 나는 나를 어떤 형상으로 만들려고 해왔을까. 회사에서는 좋은 평가를 받는 사람, 가정에서는 좋은 남편과 아버지, 사회에서는 무난하고 괜찮은 사람. 머릿속에 모범답안 같은 형상을 만들어놓고 거기에 맞지 않는 부분을 계속 깎아낸 것은 아닐까.

 

이전 글에서 나는 평가와 인정이라는 거울에 대해 썼다. 그 거울에서 잠시 눈을 떼고 다른 가능성을 만들어볼 섬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면 그 섬에서 해야 할 일은 완벽한 새로운 나를 설계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이제부터 나는 이런 사람이 되겠다’며 또 하나의 형상을 정해놓으면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번에는 회사나 사회가 만든 형상 대신 내가 만든 형상에 나를 맞추게 될 뿐이다.

 

차라투스트라의 망치가 흥미로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돌 위에 형상을 새겨 넣지 않는다. 돌 안에 무엇이 있는지 보려고 한다. 나도 나를 조금 그렇게 바라볼 수 있을까. 무엇을 잘해야 인정받을지를 먼저 묻기보다, 나는 무엇을 오래 할 수 있는지. 무엇을 할 때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드는지. 무엇을 자꾸 보고 싶어 하는지. 어떤 질문을 여러 해가 지나도 반복해서 붙잡고 있는지. 그런 것들을 살펴보는 것이다.

 

최근 카메라를 들고 다니면서 생긴 변화도 어쩌면 그런 것인지 모르겠다. 누가 시켜서 시작한 일이 아니다. 사진으로 무엇을 이루겠다고 계획한 것도 아니다. 그저 카메라를 가지고 다니자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을 보게 되었다. 전철의 유리에 비친 사람을 보고, 광고판 앞에서 사람이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출근길의 빛을 살피게 되었다. 카메라가 나를 새로운 사람으로 만든 것이라기보다, 원래 내 안에 있었지만 잘 사용하지 않았던 어떤 감각을 깨운 것일 수도 있다.

 

글쓰기도 그렇다. 몇 년 동안 매일글쓰기를 하고, 기록을 모아 옵시디언에 넣고, 오래전의 글을 다시 읽으며 지금의 생각과 연결한다. 처음부터 이런 체계를 만들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하나씩 해보다 보니 내가 기록하고 연결하고 다시 생각하는 일을 꽤 오래 좋아해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돌 안의 형상이 조금씩 드러난 셈이다.

 

그래서 요즘 좋은 교육과 좋은 리더십을 생각하면 예전과 조금 다른 기준이 생긴다. 내가 얼마나 많이 알려주었는가보다, 내가 없어도 그 사람이 판단할 수 있게 되었는가. 내 말을 얼마나 잘 따르는가보다, 자신의 생각을 말할 수 있게 되었는가. 내가 만든 방식과 비슷해졌는가보다,

자기 방식으로 더 잘할 수 있게 되었는가.

 

어쩌면 좋은 스승은 자신의 모습을 복제하는 사람이 아닐 것이다. 좋은 팀장도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을 만드는 사람이 아닐 것이다. 상대가 자신과 다른 사람이 되어가는 것을 견딜 수 있는 사람에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 물론 여기에도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 “네 안에 가능성이 있다”는 말 역시 때로는 무책임해질 수 있다.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고, 아무 도움도 주지 않고, 알아서 성장하라고 말하면서 그것을 자율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그것은 잠재성을 믿는 것이 아니라 방치일 것이다.

 

망치를 든 사람에게도 기술이 필요하다. 어디를 두드려야 할지, 어디까지 두드려야 할지, 언제 멈춰야 할지를 알아야 한다. 너무 약하게 치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고, 너무 세게 치면 안의 형상까지 깨뜨릴 수 있다. 그래서 교육과 리더십은 어쩌면 ‘만드는 기술’보다 물러나는 기술에 더 가까운지도 모르겠다.

 

언제 설명하고, 언제 묻고, 언제 도와주고, 언제 기다릴 것인가. 그리고 언젠가는 내가 없어도 되는 순간을 받아들이는 것.  『무지한 스승』을 읽었을 때 나는 교육의 문제를 생각했다. 지금 다시 그 글을 읽으면서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한다. 좋은 스승이란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 좋은 리더란 모든 답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아닐 수 있다. 자신의 답을 상대에게 집어넣는 대신, 상대가 자기 힘으로 답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는 사람. 그리고 그 믿음 때문에 필요할 때는 망치를 들지만, 자신이 원하는 형상을 새기지는 않는 사람. 그런 사람이 아닐까.

 

돌 속에 어떤 형상이 있는지는 처음부터 알 수 없다. 어쩌면 그래서 더 기다려야 하는지도 모른다. 나 자신에게도, 다른 사람에게도. 나는 지금 사람을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만들고 있는가. 아니면 그 사람 안에 있는, 아직 나도 알지 못하는 형상이 나올 수 있도록 돕고 있는가.

그리고 마지막에는 이 질문이 결국 나 자신에게 돌아온다. 나는 지금 내가 되어가고 있는가. 아니면 여전히 다른 사람이 그려놓은 형상대로 나를 깎아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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