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본문을 읽기 시작했다. 첫 장면은 의외로 조용하다. 차라투스트라는 서른 살에 고향을 떠나 산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10년 동안 고독 속에서 자신의 정신과 삶을 즐긴다. 그러다 마흔이 되던 어느 날 변화가 찾아온다. 혼자 간직하기에는 자신의 지혜가 너무 많아졌다. 그래서 그는 인간들에게 내려가기로 한다. 차라투스트라는 태양을 바라보며 말한다. 자신도 태양처럼 몰락하겠다고. 그리고 니체는 이렇게 쓴다.  “이렇게 하여 차라투스트라의 몰락은 시작되었다.” 처음 이 문장을 읽으면 자연스럽게 부정적인 느낌이 든다.

 

몰락, 무너짐, 추락, 실패. 우리가 살아가면서 가능하면 피하고 싶은 단어들이다. 그런데 니체는 이 몰락을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한다. "태양은 왜 몰락하는가"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을 태양에 비유한다. 태양은 하루 종일 빛을 내뿜다가 저녁이면 지평선 아래로 사라진다. 우리의 눈에는 태양이 ‘떨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몰락이다. 하지만 태양의 입장에서 보면 어떨까. 태양이 사라졌다고 해서 빛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있는 곳에서는 저물지만 다른 곳에서는 다시 빛을 비춘다. 그리고 다음 날 다시 떠오른다. 태양에게 몰락과 생성은 서로 반대되는 사건이 아니다. 하나의 과정이다.

 

몰락하면서 생성하고, 생성하면서 다시 몰락한다. 차라투스트라가 “나는 태양처럼 몰락하겠다”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산 위의 고독한 철학자로 머무르는 자신을 내려놓고 인간들의 세계로 내려가려는 것이다. 이때 몰락은 실패가 아니다. 오히려 새로운 존재가 되기 위한 움직임이다.

 

새로운 것은 무엇인가의 무너짐에서 시작된다. 생각해 보면 우리 삶에서도 새로운 것은 종종 무너짐 이후에 나타난다. 오랫동안 믿어왔던 생각이 더 이상 맞지 않다는 것을 깨닫기도 한다. 예전에는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어느 순간 의미를 잃기도 한다. 익숙한 관계가 끝나기도 하고, 계획했던 일이 실패하기도 한다. 그 순간에는 그것이 단순한 상실처럼 보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 무너짐이 없었다면 새로운 방향도 생기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을. 니체는 이런 가능성을 몰락이라는 단어 안에서 바라보는 것 같다. 몰락 자체를 미화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실패가 좋은 것도 아니고, 모든 고통이 사람을 성장시키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다음이다. 그 무너짐 위에서 무엇이 생성되는가. 몰락을 견디는 힘.  그래서 니체에게 중요한 질문은 아마 이런 것이 아닐까.

“어떻게 하면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수 있을까.” 가 아니라, “무너진 뒤 무엇을 다시 만들어낼 수 있는가.” 같은 사건도 사람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어떤 사람에게 실패는 자기 삶의 끝이 될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는 이전의 자신을 넘어서는 출발점이 될 수도 있다.

 

이 차이는 사건 자체보다 그 사건을 받아들이고 전환할 수 있는 힘에서 생기는 것 같다. 이런 의미에서 니체가 말하는 강함은 단순히 견디는 힘과도 조금 다르다. 무너지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무너짐을 새로운 생성으로 바꿀 수 있는 사람. 그것이 자기극복과 연결되는 힘일지도 모르겠다.

 

태양처럼 베푼다는 것. 「머리말 1」에는 몰락과 함께 또 하나의 중요한 주제가 등장한다. 베품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지혜가 너무 많아졌다고 말한다. 너무 많은 꿀을 모은 꿀벌처럼 이제는 나누어주고 싶다고 한다. 그래서 인간들에게 내려간다. 여기에서도 태양이 등장한다.

태양은 자신의 빛이 넘쳐서 세상을 비춘다. 누군가에게 인정받기 위해 비추는 것도 아니고, 베풀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달라고 요구하지도 않는다. 자신에게 빛이 넘치기 때문에 그냥 비춘다. 이를 ‘과잉’ 또는 ‘넘쳐흐름’의 베품이라고 설명했다. 이 설명이 흥미로웠다.

 

우리는 보통 베품을 선한 행위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니체식으로 생각하면 베품에도 서로 다른 힘이 숨어 있을 수 있다. 정말 넘쳐서 주는 것인지,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서 주는 것인지, 상대방이 계속 나를 필요로 하기를 바라며 주는 것인지, 혹은 내가 우월한 위치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주는 것인지. 행동은 같아 보여도 그 안의 힘은 다를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도 아직 태양은 아니다. 흥미로운 것은 차라투스트라도 아직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태양처럼 베풀고 싶다고 말한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지혜를 받아줄 사람들이 필요하다고도 말한다. 태양은 자신이 베푼다고 의식하지 않지만, 차라투스트라는 아직 ‘베푸는 나’를 의식하고 있다. 나는 지혜를 가진 사람이고,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받아야 할 사람이다. 여기에는 미묘한 위계가 남아 있다.이 대목이 중요하게 느껴졌다. 차라투스트라는 완성된 위버멘쉬가 아니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자기극복을 가르치지만 자신 역시 계속 변해야 하는 존재다.

 

무너짐은 항상 나쁜 것일까. 우리는 성공과 안정에는 긍정적인 가치를 붙이고, 실패와 몰락에는 부정적인 가치를 붙인다. 하지만 니체는 이런 언어의 습관부터 흔드는 것 같다. 몰락, 고통, 파괴,  질병,  경멸. 이런 단어들은 언제나 나쁜 것인가. 반대로 성공, 행복, 안정, 정의, 선함 같은 단어들은 언제나 좋은 것인가.  니체는 하나의 단어에 하나의 고정된 가치만 붙이는 것을 경계한다. 같은 몰락도 무엇을 만들어내느냐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같은 베품도 어떤 힘에서 나오는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같은 경멸도 타인을 깎아내리는 경멸과 자기 자신을 넘어가기 위한 경멸은 다를 수 있다.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를 읽을 때는 단어의 뜻을 빨리 결정하지 않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 이 단어가 지금 어떤 힘과 어떤 맥락에서 사용되고 있는가. 그것을 먼저 봐야 한다.

 

나에게 남는 질문

「머리말」을 읽으면서 가장 오래 남은 질문은 이것이다. 나는 무엇이 무너지는 것을 지나치게 두려워하고 있는가. 지금의 나,  내가 가진 것, 익숙한 관계,  내가 옳다고 믿어온 생각, 다른 사람이 나를 바라보는 방식. 이런 것들을 지키는 데 너무 많은 힘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물론 모든 것을 일부러 무너뜨릴 필요는 없다. 하지만 어떤 것은 무너져야 다음 것이 시작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무너짐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무너짐에서 무엇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일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질문이 남는다. 나는 무엇인가를 줄 때 정말 넘쳐서 주고 있는가. 혹은 ‘주는 사람’이라는 자기 이미지를 필요로 하고 있는가. 차라투스트라는 태양처럼 되고 싶어 인간들에게 내려간다. 하지만 그 자신도 아직 완전히 태양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이 여정을 따라갈 이유가 생기는 것 같다. 완성된 존재의 가르침이 아니라, 자신의 한계를 안고 계속 변해가는 존재의 이야기. 『차라투스트라』의 첫 장은 그렇게 시작된다. “이렇게 하여 차라투스트라의 몰락은 시작되었다.”. 이제부터는 이 몰락이 무엇을 만들어내는지 지켜보려고 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본문에 들어가기 전, 강의 자료를 따라가며 몇 가지 배경을 먼저 살펴보았다. 왜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를 주인공으로 선택했는가. 왜 “신은 죽었다”라고 선언했는가. 신의 죽음 이후 인간은 왜 니힐리즘에 빠지는가. 왜 『차라투스트라』는 성서를 패러디하는가. 그리고 이 책은 어떤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가. 이제 다음 글부터는 본격적으로 『차라투스트라』의 본문을 읽게 될 것 같다. 그래서 이번에는 지금까지의 내용을 하나의 지도처럼 정리해두려 한다. 각 개념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한 정리라기보다는, 앞으로 본문을 읽다가 길을 잃었을 때 다시 돌아와 전체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독서 지도다.

 

왜 차라투스트라인가

 

니체는 왜 자신의 사상을 전달할 인물로 차라투스트라를 선택했을까. 자료에서는  차라투스트라를 ‘도덕을 만든 자이면서 동시에 도덕을 넘어서는 자’라는 관점에서 설명했다. 역사적 차라투스트라는 선과 악의 도덕적 구분을 만든 인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렇다면 니체에게 가장 적합한 인물은 바로 그 도덕을 만든 당사자가 다시 나타나 자신이 만든 도덕을 넘어서는 인물일 수 있다. 여기에서 니체의 중요한 주제인 자기극복이 등장한다. 자기극복은 단순히 남보다 강해지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옳다고 믿었던 것, 자신이 만들어낸 가치, 자신이 의지했던 기준까지 다시 넘어서는 과정이다. 차라투스트라는 그래서 단순한 현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 넘어가야 하는 인물이다.

 

신은 죽었다

 

니체의 가장 유명한 문장은 아마 이것일 것이다. “신은 죽었다.” 하지만 이것을 단순히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신론적 선언으로 읽는 것은 충분하지 않은 것 같다. 니체가 말하는 신의 죽음은 인간에게 의미와 가치의 기준을 제공하던 절대적 중심이 무너진 사건이다.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무엇이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지. 오랫동안 이런 질문에 답을 제공하던 절대적 기준이 더 이상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작동하지 않게 된 것이다. 니체는 이를 ‘태양으로부터 풀려난 지구’에 비유한다. 태양이라는 중심에서 벗어난 지구는 자유로워졌지만 동시에 방향을 잃는다. 신의 죽음 역시 인간에게 자유를 주지만, 동시에 허무를 가져온다. 이것이 니힐리즘의 문제다.

 

신이 죽은 뒤 우리는 무엇에 기대는가

 

여기에서 나는 한 가지 의문을 갖게 되었다. 신은 정말 모두에게 죽었는가. 슈마허의 『당혹한 이들을 위한 안내서』와 이어령의 『지성에서 영성으로』를 읽으며 나는 인간에게 초월과 영성이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는 생각을 했다. 현실에서도 많은 사람에게 신은 단순한 철학적 관념이 아니다. 삶의 의미이고, 고통과 불안을 견디게 하는 힘이며, 자신을 넘어서는 존재다. 그래서 니체의 “신의 죽음”은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서 신이 사라졌다는 뜻이라기보다, 신이 더 이상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가치의 기준으로 작동하기 어려워졌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편이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리고 또 하나의 문제가 생긴다. 신이 사라졌다고 해서 인간이 정말 아무것에도 의지하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니다. 돈, 성공, 국가, 권력, 이념, 명예와 같은 것이 새로운 신이 될 수도 있다. 결국 중요한 질문은 신의 존재 여부만이 아니다. 나는 무엇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며 살아가고 있는가.

 

위버멘쉬와 가치창조

 

신이 사라진 세계에서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니체가 제시하는 방향이 위버멘쉬다. 위버멘쉬는 흔히 ‘초인’이라고 번역되지만, 단순히 강하고 뛰어난 인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더 중요한 것은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가는 인간이라는 점이다. 기존의 가치에 단순히 복종하지 않고, 그렇다고 허무에 빠지지도 않으며, 자신의 삶을 통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존재.

 

여기에서도 자기극복이 중요하다. 다만 나는 아직 한 가지 질문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정말 스스로 자신의 모든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우리는 사회와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언어와 문화의 영향을 받으며, 자신의 의지로 통제할 수 없는 고통과 죽음도 경험한다. 그런 인간이 완전히 자신만을 근거로 살아갈 수 있는가. 이 질문은 앞으로 『차라투스트라』를 읽으면서 계속 가져가고 싶다.

 

왜 성서를 패러디했을까

 

『차라투스트라』의 형식은 매우 독특하다. 차라투스트라는 서른 살에 고향을 떠나 산으로 들어가고, 오랜 고독 뒤에 다시 인간들에게 내려온다.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전하고 제자들을 만나며, 산과 호수, 뱀과 독수리, 낙타와 사자 같은 수많은 상징이 등장한다.

 

성서와 예수의 삶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 많다. 이것은 의도적인 패러디다. 니체는 성서의 형식을 빌려 그 안에 정반대의 가치를 넣는다. 초월적인 세계보다 대지를 말하고, 신체를 부정하기보다 생명을 긍정하며, 기존 가치에 복종하기보다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라고 한다. 즉 『차라투스트라』의 패러디는 단순한 조롱이 아니다. 기존의 권위 있는 형식을 빌려 그 안에서 그 권위를 뒤집는 방식이다.

 

여기에서 또 하나의 역설도 생긴다. 기독교의 절대가치를 해체하려는 니체가 자신의 책을 ‘제5의 복음서’ 혹은 ‘미래의 성서’처럼 말한다. 기존의 복음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복음을 만드는 것은 아닌가. 신을 없애고 또 다른 신을 만드는 것은 아닌가. 이 질문도 아직 남아 있다.

 

『차라투스트라』의 전체 구조

 

형식적으로 『차라투스트라』는 4개의 부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자료에서는 이 책을 조금 다르게 읽을 것을 제안한다. 전체를 이끄는 두 개의 서문이 있다는 것이다.

 

첫째는 「차라투스트라의 머리말」 이다. 이 부분은 차라투스트라가 어떤 인물들을 만나고 어떤 사건을 겪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서사의 출발점이다. 자료에서는 이를 서사의 씨줄이라고 표현했다.

 

둘째는 「세 가지 변신에 대하여」 다. 이 부분은 낙타, 사자, 아이의 변신을 통해 『차라투스트라』 전체를 관통하는 자기극복의 구조를 보여준다. 이는 이념의 날줄이다.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단순히 1부부터 4부까지 이어지는 책이라기보다, 서사의 씨줄과 철학적 이념의 날줄이 교차하는 구조로 읽을 수 있다.

 

세 가지 변신

 

앞으로 본문에서 자세히 만나겠지만, 낙타·사자·아이라는 세 단계는 『차라투스트라』 전체를 이해하는 중요한 지도처럼 보인다. 낙타는 짐을 진다. 기존의 가치와 의무를 받아들이고 감당한다. 사자는 거부한다. “너는 해야 한다”라는 명령에 맞서 “나는 원한다”라고 말한다. 기존의 가치를 파괴하고 자유를 얻는다. 그러나 파괴만으로는 새로운 삶을 만들 수 없다. 그래서 마지막에 아이가 등장한다. 아이는 새로운 시작이고 놀이이며 창조다. 이를 아주 단순하게 줄이면, 수용 → 거부 → 창조 또는 짐을 짊어짐 → 해방 → 새로운 가치의 창조 라는 흐름이 된다.  『차라투스트라』 전체를 이 ‘세 가지 변신’에 대한 긴 주석처럼 읽을 수도 있다고 했다. 앞으로 실제 본문을 읽으면서 이 주장이 얼마나 설득력 있는지 확인해보고 싶다.

 

4 개의 부를 읽는 질문

 

 각 부의 핵심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1부는 신의 죽음과 낡은 가치의 파괴,  2부는 힘에의 의지와 새로운 가치의 창조,  3부는 영원회귀와 몰락,  4부는 위버멘쉬와 동정의 극복이다.  각 부를 하나의 질문으로 바꾸어 가지고 가려고 한다.

 

1부 나는 무엇에 복종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2부 기존의 가치를 버린 뒤 나는 무엇을 창조할 수 있는가.

3부 나는 지금의 삶 전체를 다시 반복해도 좋다고 말할 수 있는가.

4부 끝까지 나를 붙잡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차라투스트라도 완성된 인간은 아니다

 

차라투스트라는 단순히 위버멘쉬를 가르치는 교사가 아니다. 그 자신도 위버멘쉬가 되어가는 수행자다.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극복을 이야기하지만, 정작 자신 역시 끊임없이 실패하고 흔들리고 다시 넘어가야 한다. 그래서 앞으로는 차라투스트라가 무슨 말을 하는지만 읽지 않으려고 한다. 그의 말과 행동이 어떻게 다른지. 자신이 가르친 것을 스스로 실천하고 있는지. 무엇 앞에서 주저하고 무엇 때문에 다시 산으로 돌아가는지. 이런 장면들도 함께 보려고 한다.어쩌면 『차라투스트라』의 진짜 이야기는 그의 가르침보다 그가 자신을 변화시키는 과정에 있을지도 모른다. 다음 글부터는 본격적으로 본문을 읽게 된다. 앞으로 각 장을 읽을 때 다음 질문들을 함께 기록하려 한다.

 

1. 이 장에서 차라투스트라는 무엇을 비판하는가

종교인가. 도덕인가. 국가인가. 학자인가. 대중인가. 아니면 자기 자신인가. 단순히 ‘무엇을 싫어한다’가 아니라, 그 가치가 왜 인간의 생명과 힘을 약화시킨다고 보는지를 확인한다.

 

2. 무엇을 넘어가라고 하는가

니체의 비판은 대부분 자기극복과 연결된다. 그 장에서 인간이 넘어야 하는 대상이 무엇인지 찾아본다. 기존의 가치일 수도 있고, 타인의 평가일 수도 있고, 자기 자신의 두려움일 수도 있다.

 

3. 무엇을 새롭게 만들라고 하는가

니체의 철학은 파괴에서 끝나지 않는다. 기존의 가치를 무너뜨린 자리에 어떤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는지 본다. 비판보다 창조가 어디에서 나타나는지를 확인한다.

 

4. 낙타·사자·아이 가운데 어디에 해당하는가

그 장의 인간은 짐을 지고 있는가. 기존의 가치를 거부하고 있는가. 아니면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있는가. 세 가지 변신의 어느 단계와 연결되는지 생각해본다.

 

5. 차라투스트라 자신은 이 가르침을 살아내고 있는가

이 질문은 특히 중요하게 기록하려고 한다. 차라투스트라는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요구하는가. 그리고 자신은 그 요구를 충족시키고 있는가. 말과 삶 사이의 간격을 본다.

 

6. 신체와 삶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니체는 반복해서 신체와 생명, 힘, 욕망을 이야기한다. 그 장에서는 신체가 긍정되는지, 부정되는지. 삶을 강화하는 힘과 약화시키는 힘을 어떻게 구분하는지를 본다.

 

7. 웃음·춤·가벼움은 어디에서 등장하는가

『차라투스트라』를 너무 무겁게만 읽지 않으려고 한다. 니체에게 웃음과 춤은 단순한 장식이 아닐 수 있다. 기존의 가치와 중력을 벗어나는 방식으로 등장하는지 살펴본다.

 

8. 지금의 나에게 불편하게 다가오는 문장은 무엇인가

공감하는 문장보다 불편한 문장을 기록하려 한다. 왜 불편한지. 내가 지키고 싶은 가치와 충돌해서인지. 내가 당연하게 여기던 것을 건드려서인지. 그 이유를 함께 적어본다.

 

9. 나는 여기에 동의하는가

니체의 말을 정답처럼 받아들이지 않는다. 동의하는 부분과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을 구분한다. 슈마허, 이어령을 비롯해 지금까지 읽어온 다른 책들과도 비교해본다.

 

10. 이 장이 내 삶에 던지는 질문은 무엇인가

가장 마지막에는 철학적 내용을 다시 내 삶으로 가져온다. ‘니체가 무엇을 말했는가’에서 끝내지 않고, 그래서 나는 무엇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는가. 를 한 문장이라도 남기려고 한다.

 

이제 안내지도를 접고, 본문으로 들어가 본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본격적으로 읽기 전에 참고 자료를 읽고 있다. 이번에는 니체가 왜 『차라투스트라』를 썼는지, 그리고 왜 이 책이 성서를 의도적으로 패러디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그 중심에는 너무도 유명한 문장이 있다. “신은 죽었다.” 니체에게 신의 죽음은 단순히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선언이 아니다. 인간에게 삶의 의미와 가치의 기준을 제공하던 절대적인 중심이 무너졌다는 선언에 가깝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신이 사라진 자리에 무엇을 놓을 것인가.  

 

태양으로부터 풀려난 지구 『즐거운 학문』에서 니체는 신이 사라진 인간의 상황을 ‘태양으로부터 풀려난 지구’에. 비유한다. 태양을 중심으로 돌던 지구가 갑자기 그 중심에서 풀려난다면 어디로 가야 할까. 위와 아래는 어디인가. 앞으로 가는 것인가, 추락하고 있는 것인가. 신은 오랫동안 인간에게 그런 중심이었다.

 

무엇이 선인지, 무엇이 악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죽음 이후에는 무엇이 있는지에 대한 답을 제공했다. 그 중심이 사라지면 인간에게 자유가 생긴다. 그러나 자유와 함께 방향 상실도 찾아온다. 니체가 우려했던 것이 바로 니힐리즘이다. 모든 것을 판단하던 기준이 사라졌을 때 찾아오는 허무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신은 정말 죽었는가. 누구에게는 죽었지만, 누구에게는 살아 있는 신, 니체의 말을 읽다 보면 마치 근대 이후 신이 인간의 삶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슈마허의 『당혹한 이들을 위한 안내서』를 읽을 때도 그랬고, 이어령의 『지성에서 영성으로』를 읽으면서도 인간에게 초월적인 존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하게 되었다.누군가에게 신은 관념이 아니다. 삶의 의미이고, 절망 속에서 자신을 붙잡아 주는 존재다. 심한 고통과 불안 속에서 종교와 신앙에 의지하며 삶을 견디는 사람들도 있다. 신앙 공동체와 기도, 자신보다 더 큰 존재에 대한 믿음이 사람을 다시 살아가게 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누구에게는 신이 죽었지만, 누구에게는 여전히 살아 있다. 여기에서 니체의 ‘신의 죽음’을 조금 다르게 이해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니체가 말한 것은 모든 개인의 마음속에서 신이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라, 신이 더 이상 모든 사람에게 공통으로 인정되는 절대적인 가치의 근거가 되기 어려워졌다는 의미에 가까울 것이다.

 

개인에게 살아 있는 신과 사회 전체의 절대적 기준으로서의 신은 다른 문제다. 신이 죽었다고 해서 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니체의 문제의식은 여기에서 더 흥미로워진다.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고 신을 믿지 않게 되었다고 해서 정말 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일까. 니체는 그렇지 않다고 보았다. 신이 사라진 자리에 인간은 또 다른 절대자를 세운다. 돈이 될 수도 있고, 성공일 수도 있고, 국가와 권력, 이념, 명예일 수도 있다. 신은 죽었는데 우리는 여전히 무엇인가를 신처럼 섬긴다. 이것이 니체가 경계한 ‘새로운 우상’일 것이다.

 

생각해 보면 현대인의 삶에도 이런 우상은 많다. 돈이 많으면 행복할 것이라고 믿고, 좋은 직장과 높은 지위가 삶의 가치를 증명한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의 인정과 평가가 나 자신의 가치를 결정하도록 내버려 두기도 한다. 신을 믿지 않는다고 말하면서도 우리는 끊임없이 다른 절대적인 기준을 찾아 헤매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더 어려운 질문이 생긴다.

 

인간은 아무것에도 기대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존재인가. 신이 사라진 자리에서 스스로 가치를 만든다는 것. 니체는 신의 죽음을 단순한 재앙으로만 바라보지 않았다. 절대적인 가치가 사라졌다는 것은 인간이 기존의 가치에 복종하지 않고 스스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갈 가능성이 열렸다는 뜻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위버멘쉬가 등장한다. 위버멘쉬는 흔히 ‘초인’이라고 번역되지만, 힘이 세거나 남보다 뛰어난 인간이라는 뜻으로 읽어서는 곤란할 것 같다. 중요한 것은 자기극복이다. 이미 주어진 가치에 기대지 않고 자신의 삶을 통해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가는 인간. 그러나 나는 여기에서도 다시 멈추게 된다.

 

과연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모든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우리는 태어나면서 언어와 문화, 가족과 사회의 영향을 받는다.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무엇보다 고통과 죽음처럼 자신의 의지만으로 넘어설 수 없는 것들도 존재한다. 그런 인간이 완전히 자기 자신만을 근거로 살아갈 수 있을까.니체를 반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니체의 질문을 끝까지 따라가 보기 위해 생기는 의문이다.

 

그런데 니체는 왜 성서처럼 썼을까. 흥미로운 것은 니체가 이런 새로운 가치를 이야기하면서 『차라투스트라』를 성서와 매우 비슷한 형식으로 썼다는 점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서른 살이 되어 고향을 떠난다. 산으로 들어가 오랫동안 고독한 시간을 보낸 뒤 다시 인간들에게 내려온다. 사람들에게 자신의 가르침을 전하고 제자들을 만난다. 산과 호수, 뱀과 독수리, 낙타와 사자 같은 상징들이 반복된다. 예수의 삶과 복음서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한다.

 

우연이 아니다. 니체는 의도적으로 성서를 패러디했다. 성서의 형식을 흉내 내면서 그 안에 정반대의 메시지를 집어넣는다. 신에게 복종하라고 말하는 대신 자신의 삶을 스스로 창조하라고 한다. 저편의 세계를 바라보는 대신 대지에 충실하라고 한다. 신체를 낮게 보고 영혼을 높이는 가치에 맞서 신체와 생명 자체를 긍정한다. 이것이 니체의 독특한 전략이다.

 

흉내 내면서 뒤집는 것. 분노보다 웃음으로  특히 재미있었던 것은 니체에게 ‘웃음’이 갖는 의미였다. 기존의 가치를 논리적으로 공격하면 또 다른 논리가 나타난다. 분노로 공격하면 상대방도 분노한다. 그러나 그것을 웃음거리로 만들어버리면 예전과 같은 권위를 유지하기 어렵다.

그래서 『차라투스트라』에는 진지한 철학적 이야기와 함께 웃음, 춤, 풍자가 반복해서 등장한다. 신체를 경멸하는 사람에게 차라투스트라는 말한다.

 

정말 신체를 그렇게 경멸한다면 자신의 신체와 작별하고 입을 다물라고. 웃기는 이야기이지만 그 안에는 날카로운 공격이 들어 있다. 니체에게 패러디는 단순한 농담이 아니다. 기존 가치의 권위를 무너뜨리는 방법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또 하나의 역설을 만난다. 니체는 기독교라는 절대적 가치의 권위를 무너뜨리려 한다.

 

그런데 정작 자신은 『차라투스트라』를 ‘제5의 복음서’, ‘미래의 성서’와 같은 책으로 이야기한다. 여기에서 나는 묘한 역설을 느낀다. 기존의 복음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복음을 만드는 것은 아닐까. 신을 없앤 뒤 위버멘쉬나 자기극복을 새로운 절대적 가치로 세운다면, 결국 또 다른 신을 만드는 것은 아닐까.

 

니체 자신도 이러한 위험을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자신의 철학조차 교리가 되지 않도록 웃음과 춤과 패러디를 집어넣은 것은 아닐까. 아직 책을 본격적으로 읽기 전이라 답은 모르겠다. 오히려 지금은 답을 서둘러 결정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다.

 

신이 죽은 뒤 인간은 무엇에 기대는가 지금까지 자료를 참조하면서 『차라투스트라』를 읽기 위한 질문 하나가 조금씩 선명해지고 있다. 인간은 무엇에 기대어 살아가는가.

 

신에게 기대는 삶을 니체는 비판한다. 그러나 신을 버린 인간은 돈과 성공과 권력과 이념에 기대기도 한다. 그리고 니체는 그 모든 의존을 넘어 스스로 가치를 창조하는 인간을 제안한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묻고 싶다.

 

인간은 정말 아무런 초월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존재일까. 아니면 우리에게는 자신보다 더 큰 무엇인가를 바라보는 마음이 본래부터 필요한 것일까. 슈마허와 이어령을 읽을 때는 후자의 가능성을 생각했다. 니체를 읽으면서는 전자의 가능성을 시험하게 된다. 둘 중 하나를 서둘러 선택하고 싶지는 않다. 오히려 『차라투스트라』를 읽으며 이 긴장을 오래 가져가고 싶다. 신은 죽었는가. 아니면 우리가 신이라고 부르던 것의 형태만 바뀌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신이 사라진 자리에서 나는 무엇을 신처럼 섬기고 있는가. 아마 이번 『차라투스트라』 읽기는 그 질문에서 시작될 것 같다.

 

 

앞선 글에서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어떤 독자를 기다리는 책인지 살펴보았다. 니체가 기대한 독자는 그의 생각에 쉽게 동의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낯선 생각을 두려워하지 않고, 이해되지 않는 상태를 견디며, 자기 시대의 가치와 일정한 거리를 만들 수 있는 사람. 그리고 결국에는 니체를 그대로 따르기보다 니체를 통과해 자기 질문을 만들어가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제 책 안으로 조금 더 들어가면 새로운 질문이 생긴다.

 

왜 하필 주인공이 ‘차라투스트라’일까.

 

니체는 왜 소크라테스도, 디오니소스도, 자기 자신도 아닌 고대 페르시아의 종교적 인물 차라투스트라를 불러냈을까.  이 질문의 답을 하나의 말로 정리할 수 있었다. 자기극복. 니체에게 차라투스트라는 완성된 현자가 아니라, 자신이 만들었던 가치마저 넘어설 수 있는 존재다.

 

도덕을 만든 사람이 도덕을 넘어선다

 

니체가 말하는 차라투스트라를 이해하려면 먼저 역사적 차라투스트라와 니체가 새롭게 만든 차라투스트라를 구분해야 한다. 역사적 차라투스트라는  선과 악이라는 도덕적 구분을 만들어낸 인물이다.  반면 니체의 『차라투스트라』에 등장하는 차라투스트라는 바로 그 도덕의 절대성을 넘어서는 사람이다. 구조만 놓고 보면 극적인 반전이다.

 

도덕의 창조자

→ 도덕의 오류를 인식하는 사람

→ 자신이 만든 도덕을 넘어서는 사람

 

니체에게 중요한 것은 차라투스트라가 처음부터 옳았다는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자신이 만들었던 가치가 오류일 수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할 수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니체의 자기극복이라는 철학적 기획에 잘 어울리는 인물이 된다. 자기극복이란 적을 물리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과거의 자기 자신을 넘어서는 일이기 때문이다.

 

자기극복은 정직함에서 시작된다

 

차라투스트라의 자기극복을 정직성과 연결한다. 처음에는 조금 의외였다. 자기극복이라고 하면 강한 의지나 용기, 훈련을 먼저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자기 자신을 넘어가려면 먼저 현재의 자신을 정확하게 볼 수 있어야 한다. 특히 자신이 가장 옳다고 믿었던 것까지 의심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틀렸을 수도 있다.” 이 말을 할 수 없다면 자기극복은 시작되기 어렵다. 내가 만든 가치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한다면 결국 그 가치의 수호자로 남게 된다. 그래서 니체가 차라투스트라에게 요구하는 정직함은 단순히 거짓말을 하지 않는 도덕적 성품 이상의 것으로 보인다.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진실을 외면하지 않는 힘. 자기 신념을 지키는 것보다 자신의 오류를 바라보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태도다. 이 점에서 차라투스트라의 자기극복은 니체 자신의 삶과도 겹쳐 보인다. 니체 역시 한때 쇼펜하우어와 바그너에게 깊이 의존했지만, 결국 그들을 비판했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두 사람과 결별하는 일이 아니라 그들을 필요로 했던 과거의 니체와도 결별하는 과정이었다.

 

자기극복은 다른 사람을 이기는 일이 아니다

 

우리는 '극복'이라는 말을 경쟁의 언어로 이해하기 쉽다. 누군가보다 강해지는 것, 약점을 제거하는 것, 현재보다 더 높은 위치로 올라가는 것. 그러나 니체의 자기극복을 그런 식으로만 이해하면 위버멘쉬 역시 힘센 초인이나 우월한 인간으로 오해하기 쉽다. 니체의 자기극복은 조금 다르다.  지금의 나를 최종적인 나라고 여기지 않는 것. 어떤 모습의 나를 만들어낸 뒤 거기에서 멈추지 않는 것. 그래서 자기극복은 한 번의 성공으로 끝나지 않는다.

 

"지금의 나 → 다른 나 → 다시 그 나를 넘어서는 또 다른 나" 라는 움직임이 계속된다. 그런 의미에서 위버멘쉬는 완성된 목표물이라기보다 계속되는 실천의 과정으로 이해하는 편이 좋다. 위버멘쉬라는 명사보다 위버멘쉬-되기 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이유다.

 

차라투스트라도 처음부터 차라투스트라는 아니었다

 

흥미로운 것은 『차라투스트라』 안에서 차라투스트라 자신도 자신의 과거를 고백한다는 점이다. 그 역시 한때 저편 세계를 믿었다. 학자들과 함께 있었고, 자신도 시인이면서 시인들의 거짓말을 이야기한다. 이 대목을 따라가면 차라투스트라는 처음부터 완성된 스승이 아니었다. 그 역시 어떤 세계를 믿었고, 그 세계를 통과했으며, 결국 그것으로부터 벗어났다.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를 단순히 위대한 현자가 사람들에게 진리를 가르치는 책 으로 읽는 것은 충분하지 않은 것 같다.

 

오히려 차라투스트라라는 한 존재가 계속 자기 자신을 넘어가는 과정 으로 읽을 수 있다. 그가 산에서 내려왔다가 다시 올라가고, 사람들에게 말을 건넸다가 고독으로 돌아가고, 자신의 가장 어려운 생각을 받아들이기 위해 고통스러워하는 이유도 그렇게 보면 조금 다르게 보인다.

차라투스트라 역시 계속 만들어지고 있다.

 

자기극복은 외부의 구원을 기다리지 않는다

 

자기극복을 외부나 초월자와 대비해서 설명한다. 어떤 어려움이 생겼을 때 외부의 절대적 존재가 나를 구해준다면 문제는 해결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존재에 대한 의존은 더 강해진다. 니체가 말하는 자기극복은 다른 방향으로 간다. 외부의 구원자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 안에 있는 힘과 조건을 통해 현재의 한계를 넘어가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의지만 강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는 식의 정신론이 아니다. 니체는 오히려 신체와 환경, 본능과 관계, 힘의 배치를 중요하게 본다. 따라서 자기극복은 의식만으로 자신을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나를 만들어낸 조건을 살펴보고, 그 관계들을 다르게 구성하는 일 에 가까울 것이다.

 

차라투스트라에게 필요한 ‘위대한 건강’

 

차라투스트라의 또 다른 특징으로 위대한 건강을 가져온다. 이 말은 처음 들으면 매우 건강한 몸을 떠올리게 한다. 병에 걸리지 않고 항상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는 신체 말이다. 그런데 니체가 말하는 위대한 건강은 그런 의미가 아니다. 일반적인 건강관에서는 건강 = 좋은 상태, 질병 = 나쁜 상태 라고 생각한다. 건강의 목표는 좋은 상태를 오래 유지하고 나쁜 상태를 제거하는 것이다. 하지만 위대한 건강은 오히려 건강과 질병이라는 대립 자체를 넘어선다. 병들지 않는 몸이 아니라, 병과 건강을 비롯한 다양한 상태를 통과하면서 그것을 자기 변화의 재료로 활용할 수 있는 몸이다.

 

질병마저 사유의 재료가 될 수 있는가

 

이 지점에서 앞서 살펴보았던 니체 자신의 질병 경험이 다시 떠오른다. 니체에게 질병은 분명 고통이었다. 일상생활과 독서, 교수생활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렇다고 니체의 철학을 “병에 걸렸더니 위대한 철학자가 되었다.”고 낭만적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다. 질병 자체가 좋은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니체가 이미 일어난 질병과 어떤 관계를 맺었는가이다.

 

"질병 → 기존 삶의 균형이 무너짐 → 익숙한 습관과 가치에서 거리 발생 → 새로운 관점의 가능성 → 다른 사유" 라는 이동이 일어난다. 그래서 위대한 건강은 병을 피하는 능력보다 병과 건강의 여러 상태를 통과하면서 계속 자신을 새롭게 구성하는 능력에 더 가까워 보인다.

 

수백 개의 건강을 횡단한다는 것

 

니체는 위대한 건강을 한 번 얻으면 계속 소유할 수 있는 상태로 보지 않는다.  인상적이었던 표현은 ‘수백 개의 건강을 횡단한다’는 것이다.

하나의 건강을 획득한다. 그러나 거기에 정착하지 않는다. 그 건강 역시 언젠가는 버려지고 다른 건강으로 넘어간다. 이것은 가치창조와 비슷하다. 새로운 가치를 만들었다고 해서 그것을 다시 영원한 절대 가치로 만들면 니체의 자기극복은 멈춰버린다. 새로운 가치 역시 언젠가는 다시 검토되고 넘어설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니까 하나의 건강에 머무르지 않는 신체 와 하나의 가치에 머무르지 않는 정신 은 서로 닮아 있다.

이런 의미에서 위대한 건강은 단순한 건강 개념이 아니라 자기극복을 가능하게 하는 신체적 역량이라고 볼 수 있다.

 

몸이 달라지면 철학도 달라진다

 

여러 건강상태를 통과하는 철학자는 그만큼 여러 철학을 통과하며, 자신의 건강상태를 정신적인 형식으로 옮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말은 지금까지 살펴본 니체의 문체와도 연결된다. 몸이 변한다.→ 세계가 다르게 느껴진다.→ 세계가 다르게 느껴지면 가치판단이 달라진다. →가치판단이 달라지면 사유가 달라진다. → 사유가 달라지면 표현방식도 달라진다. 그렇다면 철학은 단순히 머릿속에서 만들어지는 논리의 체계가 아니다. 삶과 몸에서 겪은 변화를 사유의 형식으로 변형하는 기술일 수도 있다. 앞서 니체의 문체가 논리 → 아포리즘 → 시 로 변화했던 것도 이런 관점에서 다시 볼 수 있다. 문체는 생각을 포장하는 옷이 아니라 변화한 삶과 신체가 만들어낸 또 다른 사유의 형태다.

 

차라투스트라와 디오니소스

 

차라투스트라를 디오니소스적 존재와 연결한다. 디오니소스의 신화에는 죽음과 탄생, 해체와 재생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고, 찢겨나간 뒤 다시 하나의 존재가 된다.  이 신화를 자기극복의 이미지로 읽는다. 해체 → 죽음 → 재생 기존의 존재가 무너지는 것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존재의 조건이 된다. 이렇게 보면 디오니소스는 단순히 술과 축제의 신이 아니라, 니체에게 계속 무너지고 다시 생성되는 삶의 상징이 된다. 차라투스트라도 마찬가지다. 그는 고정된 하나의 자아를 유지하려 하지 않는다. 이전의 자신을 넘어가고, 새로운 자신이 되고, 그 자신 역시 다시 넘어선다.

 

대립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통과하는 것

 

디오니소스적인 자기극복에서 특히 흥미로운 것은 대립적인 것을 대하는 방식이다. 보통 우리는 좋은 것은 유지하고 나쁜 것은 없애려고 한다. 건강은 유지하고 질병은 제거한다. 기쁨은 원하고 고통은 피한다. 성공은 긍정하고 실패는 부정한다. 그러나 니체의 관점에서는 이렇게 깔끔하게 나눌 수 없는 순간들이 있다.

 

질병이 새로운 사유를 가능하게 하기도 하고, 실패가 기존의 자신을 돌아보게 하기도 하며, 파괴가 새로운 창조의 자리를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고통이나 질병 자체를 좋은 것으로 바꾸어 부르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부정적인 것으로만 보이던 것을 새로운 생성의 조건으로 다시 사용할 수 있는가.' 이다. 이것이  대립을 넘어서는 자기극복으로 보인다.

 

 몰락이 왜 긍정이 되는가

 

여기서 『차라투스트라』에서 반복되는 몰락이라는 말도 다시 보게 된다. 일반적으로 몰락은 실패다. 무너지고 사라지는 것이다. 그런데 니체에게는 몰락과 생성이 반드시 대립하는 것은 아니다. 기존의 내가 무너지지 않는다면 다른 내가 만들어질 공간도 없다. 낡은 가치가 사라지지 않는다면 새로운 가치가 들어올 자리도 없다. 따라서 몰락 → 생성 이라는 관계가 만들어진다. 이것이 디오니소스적인 긍정과 영원회귀가 만나는 지점이다. 삶의 긍정은 좋은 일만을 선택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몰락과 생성이 함께 있는 삶의 운동 전체와 관계 맺는 것 으로 확장된다.

 

가장 많이 부정하는 사람이 어떻게 긍정의 철학자가 되는가

 

니체를 읽다 보면 한 가지 역설이 생긴다. 니체는 너무 많은 것을 부정한다. 도덕을 비판하고, 종교를 비판하며, 당대의 문화와 철학을 끊임없이 공격한다. 그렇다면 니체는 부정의 철학자가 아닐까. 그런데 니체 자신은 오히려 강한 긍정을 이야기한다. 이 역설을 생성을 위한 부정으로 해석한다. 차라투스트라는 기존 가치를 단지 미워해서 파괴하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가치를 만들기 위해 낡은 가치를 무너뜨린다.

즉, “아니오”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그 뒤의 “예”를 가능하게 하기 위한 아니오 이다. 이것은 세 가지 변신과도 정확히 연결된다. 사자는 “나는 더 이상 이것에 복종하지 않겠다.” 고 말한다. 어린아이는 그다음에“그러면 나는 무엇을 만들 것인가.” 를 묻는다. 차라투스트라 안에는 이 두 움직임이 함께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니체의 대변인이 아니다

 

여기까지 오면서 차라투스트라라는 인물에 대한 생각도 조금 달라졌다. 처음에는 차라투스트라를 니체의 사상을 대신 말해주는 대변인처럼 생각하기 쉬웠다. 니체가 직접 말하기 어려운 것을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빌려 말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그런 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보인다. 차라투스트라는 니체 철학의 개념을 설명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철학의 운동을 직접 보여주는 사람에 더 가깝다. 자기극복하고, 병과 건강을 통과하고, 고독과 관계를 오가며, 몰락하고 다시 올라오고, 자신의 가장 무거운 생각과 싸운다.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개념의 해설자가 아니라 자기극복이 하나의 삶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를 보여주는 유형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왜 하필 차라투스트라인가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본다. 왜 하필 차라투스트라인가. 지금 나는 이렇게 답하고 싶다. 도덕을 창조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도덕을 넘어서는 일이 가장 극적인 자기극복이 되기 때문이다. 자기가 만들지 않은 것을 비판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쉽다. 남의 가치가 틀렸다고 말하기도 쉽다. 하지만 내가 만들었고, 내가 믿었고, 나를 지금의 나로 만들어준 가치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훨씬 어렵다. 그것을 인정하고 다시 시작하는 사람이 니체가 새롭게 발명한 차라투스트라다.

 

자기극복은 더 강한 내가 되는 일이 아니라,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것까지 필요하다면 넘어설 수 있는 능력이다. 그리고 위대한 건강은 그 과정에서 계속 변할 수 있는 신체의 힘이며, 디오니소스적인 긍정은 그 변화에 필요한 몰락과 생성까지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태도다.

 

나를 만든 것을 넘어설 수 있을까 차라투스트라의 이야기를 읽으며 결국 다시 내 삶의 질문으로 돌아온다. 지금의 나를 만든 가치에는 무엇이 있을까. 한때는 그것이 필요했을 것이다. 나를 성장시키고, 어떤 선택을 가능하게 하고, 여기까지 오는 힘이 되어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앞으로도 계속 나를 규정해야 할까.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라는 인물을 통해 던지는 질문은 어쩌면 이것인지도 모른다. 나를 만든 것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가. 과거를 없었던 일로 만들 필요는 없다. 그것을 짊어졌던 낙타도 나였고, 그것에 저항했던 사자도 나이며, 그 자리에서 다른 것을 만들어가는 어린아이도 나다.

 

그렇게 보면 자기극복은 과거의 나를 없애는 일이 아니다. 과거의 나까지 포함해서 계속 다른 나로 변해가는 일이다.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완성된 인간의 이야기가 아니라, 계속 자신을 넘어가야 하는 존재의 이야기로 읽힌다. 그리고 차라투스트라 역시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도 계속 차라투스트라가 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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