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자유를 오랫동안 이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누가 시키지 않는 것. 간섭받지 않는 것.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내가 결정하는 것. 그래서 복종은 자유의 반대라고 생각했다. 명령하는 사람은 자유롭고, 명령받는 사람은 자유롭지 못하다고. 그런데 니체는 「전쟁과 전사」에서 이상한 말을 한다. 노예에게는 반항이 고상하지만, 전사에게는 복종이 고상하다고. 더 이상한 것은 이 말이다. 전사에게는 “나는 하고자 한다”보다 “너는 해야 한다”가 더 듣기 좋다고. 처음에는 이해하기 어려웠다.니체는 자유정신을 말하면서 왜 갑자기 복종을 칭찬하는 것일까.

 

이 문장을 이해하려면 먼저 ‘누구에게 복종하는가’를 물어야 할 것 같다. 타인에게 복종하는 것과 자신에게 복종하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니다. 회사에서 누군가 시킨 일을 하는 것. 사회가 좋다고 정한 기준을 따라가는 것. 남들이 성공이라고 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  이것이 외부의 명령에 대한 복종이라면,니체가 전사에게 요구하는 복종은 조금 다르다.

 

스스로 정한 것을 스스로 지키는 것. 아무도 보지 않아도 내가 나에게 한 약속을 수행하는 것. 누가 칭찬하지 않아도 내가 선택한 가치를 포기하지 않는 것. 그렇다면 전사의 복종은 복종이라기보다 자기명령에 대한 충실함에 가깝다.

 

이렇게 생각하니 자유에 대한 내 생각도 조금 달라진다. 자유는 하고 싶은 것을 하는 능력일까. 하고 싶지 않은 것은 하지 않는 능력일까. 물론 그것도 자유의 일부일 것이다. 하지만 하고 싶은 것만 따라가는 사람은 정말 자유로운가. 오늘은 쓰고 싶어서 쓰고, 내일은 귀찮아서 쓰지 않고, 오늘은 운동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내일은 피곤하다는 이유로 미루고, 오늘은 소비를 줄여야겠다고 결심하고, 며칠 뒤에는 다시 욕망에 끌려간다면, 그 사람은 자신의 욕망을 따르는 것일까.

 

아니면 그때그때 가장 강하게 올라오는 충동에 끌려다니는 것일까. 이 질문 앞에서는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과 자유가 꼭 같은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니체가 말하는 전사는 싸움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여기서 말하는 전쟁을 실제 전쟁이라기보다 가치와 가치 사이에서 벌어지는 싸움으로 읽고 싶다. 내가 정말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과 사회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 사이의 싸움. 지금 당장 편한 것과 오래 지키고 싶은 것 사이의 싸움. 남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과 내가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 사이의 싸움. 그렇다면 전장은 멀리 있지 않다. 대부분의 전쟁은 내 안에서 벌어진다. 그리고 그 전쟁에서 가장 어려운 상대 역시 타인이 아니라 나 자신일 수 있다.

 

자료에서는 노동과 전투를 대비한다. 처음에는 조금 거슬렸다. 노동은 나쁘고 전투는 좋다는 말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금 다르게 읽으면 의미가 달라진다. 문제는 노동 자체가 아니라 누구의 가치에 따라 움직이는 노동인가이다. 다른 사람이 만든 목표를 성실하게 수행하는 것도 필요하다. 조직에서 일하려면 그것을 피할 수 없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것이 삶 전체가 되면 문제가 생긴다. 왜 이 일을 하는지 묻지 않고, 누가 정한 방향인지 묻지 않고, 그저 더 잘 수행하는 것만 남게 되면, 나는 성실한 사람은 될 수 있어도 내 삶의 방향을 정하는 사람은 아닐 수 있다. 이때 노동은 단순히 일을 많이 하는 문제가 아니라 자기 방향을 잃어버린 상태가 된다.

 

이 지점에서 이전글에서  생각했던 ‘바쁨’이 다시 떠오른다. 바쁘게 살아가는 것이 언제나 삶을 긍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일을 많이 하는 것이 나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나를 잊기 위한 방법이 될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

 

나는 왜 바쁜가. 누구의 명령을 수행하느라 바쁜가. 나는 지금 내 삶에서 무엇을 지키기 위해 움직이는가. 이 질문을 하지 않은 채 열심히만 사는 것은 어쩌면 타인의 전쟁을 대신 치르는 일인지도 모른다.

 

니체는 적에 대해서도 이상한 말을 한다. 경멸할 만한 적이 아니라 증오할 가치가 있는 적을 가지라고 한다. 처음에는 과격하게 들리지만, 여기에도 중요한 뜻이 있는 것 같다. 좋은 적은 나를 소모시키는 적이 아니라 나를 더 높은 곳으로 끌어올리는 적이다. 그 적은 꼭 사람일 필요도 없다. 나에게 가장 큰 적은 어쩌면 게으름일 수도 있고, 남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습관일 수도 있고, 성과로만 나를 판단하는 기준일 수도 있고, 한번 결정한 것을 쉽게 포기하는 나 자신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적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적과 싸우는 과정에서 내가 어떤 사람이 되는가이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적을 잘못 고를 때가 많다. 나보다 잘하는 사람. 나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 내 의견과 다른 사람. 그들을 적으로 만들면 싸움은 쉽게 외부로 향한다. 하지만 그런 싸움은 끝이 없다. 한 사람을 이기면 또 다른 사람이 나타난다. 비교를 기준으로 살아가는 한 항상 새로운 경쟁자가 생긴다.

 

반면 내가 싸워야 할 적을 내 안에서 찾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어제의 나보다 조금 더 자기 기준을 지키는 것. 쉽게 흔들리던 부분에서 한번 더 버티는 것. 남의 평가 때문에 선택을 바꾸려는 순간, 왜 처음 그 선택을 했는지 다시 묻는 것. 그런 싸움은 누군가를 이겨야 끝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싸울수록 내가 조금씩 달라진다.

 

그래서 니체가 말하는 전사는 결국 자기입법자에 가까운 것 같다. 자기입법자. 말 그대로 자기 삶의 법을 스스로 만드는 사람. 처음에는 이 표현도 거창하게 들렸다. 하지만 꼭 대단한 철학적 원칙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스스로 정하는 것. 그 기준을 쉽게 남에게 넘겨주지 않는 것. 그리고 한번 정한 기준을 나 자신에게도 적용하는 것.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마지막이다. 우리는 타인에게는 기준을 쉽게 적용하면서 자신에게는 예외를 만들 때가 많다.  “오늘은 특별하니까.”  “이번만은 괜찮으니까.” “상황이 이러니까.” 그 순간 자기입법은 무너진다. 자기 자신에게 법을 만들 수는 있어도, 그 법에 복종하지 못하면 그것은 아직 내 법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니체가 말하는 “너는 해야 한다”는 외부에서 들려오는 명령이 아니라 내가 나에게 내리는 명령일 수 있다. “나는 하고 싶다.” 이 말에는 욕망이 있다. 하지만 욕망은 쉽게 변한다. 오늘의 나는 원하지만 내일의 나는 원하지 않을 수 있다.

 

반면 “너는 해야 한다.” 이 말에는 약속이 있다. 내가 어제 선택한 가치를 오늘의 기분 때문에 버리지 않겠다는 약속. 그래서 전사의 복종은 자유의 반대가 아니라 어쩌면 더 어려운 자유의 형태인지도 모른다. 자유는 아무것에도 복종하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내가 선택한 가치에 스스로 복종할 수 있는 힘. 하지만 여기에도 위험이 있다. 자신에게 명령한다고 해서 모든 명령이 좋은 것은 아니다.

 

“더 열심히 해야 한다.” “더 잘해야 한다.” “실수해서는 안 된다.” “항상 강해야 한다.” 이런 말도 자기명령처럼 보인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사회와 조직, 타인의 기대를 내면화한 것일 수 있다. 그래서 더 중요한 질문이 필요하다. 이 명령은 정말 내가 만든 것인가. 니체가 말하는 자기입법은 단순히 자기통제를 강화하는 일이 아닐 것이다. 오히려 내가 따르고 있는 법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계속 묻는 일이다.

 

회사에서 배운 것인지, 가족에게서 배운 것인지, 사회가 성공이라고 말해서 받아들인 것인지, 아니면 내가 살아보며 정말 중요하다고 느낀 것인지. 그 질문을 통과하지 않은 자기명령은 사실 타인의 명령을 내가 대신 말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반항도 충분하지 않다. 이 부분이 가장 흥미롭다. 나는 오랫동안 자유로운 사람은 “싫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것도 중요하다. 남들이 모두 같은 방향으로 갈 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니체에게 반항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아니오”라고 말한 다음 무엇을 할 것인가. 기존의 가치를 부정한 다음 무엇을 새롭게 긍정할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하면 우리는 계속 반대하는 대상에 묶여 있다. 내 삶의 기준이 여전히 상대방에게 있기 때문이다. 사자가 “아니오”라고 말해 기존의 가치를 부수는 존재라면, 그다음에는 아이처럼 자신의 새로운 “예”를 만들어야 한다.

 

내가 하나의 고정된 사람이 아닐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남의 높이가 아니라 나의 높이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미래를 위해 현재의 삶을 계속 미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결국 여기까지 온다.

 

그 삶의 방향을 누가 정할 것인가.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말만으로는 부족하다. 어떤 삶을 살 것인지 선택해야 하고, 그 선택을 반복해야 하고, 때로는 오늘의 나를 어제의 내가 세운 약속에 복종시켜야 한다. 그것이 생각보다 어렵다. 남의 명령에 저항하는 것보다 자신의 명령을 끝까지 책임지는 일이 더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제 자유를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자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가 아니다. 아무에게도 간섭받지 않는 상태만도 아니다. 자유는 내가 무엇을 할 것인지 결정하고, 그 결정의 결과까지 내가 떠맡는 능력에 더 가까운 것 같다. 그리고 그 힘은 거창한 곳에서 생기지 않는다. 아무도 보지 않을 때 내가 한 약속을 지키는 것. 외부의 보상이 없어도 중요하다고 생각한 일을 계속하는 것. 남의 기준이 아니라 내가 세운 기준으로 하루를 살아보는 것. 그런 작은 복종들이 쌓여 비로소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니체가 전사를 말할 때 나는 이제 칼이나 전쟁을 떠올리지 않는다. 오히려 혼자 있는 사람을 떠올린다.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스스로 선택한 것을 묵묵히 지키는 사람. 다른 사람을 이기는 데 힘을 쓰기보다 자기 힘을 자기에게 돌려주는 사람. 그리고 필요하다면 자신의 오래된 가치와도 싸울 수 있는 사람. 나는 그런 사람이 얼마나 자유로운지 아직 잘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는 조금 알 것 같다. 반항하는 것만으로는 자유로울 수 없다. 남의 명령에서 벗어난 다음에는 내가 나에게 어떤 명령을 내릴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그리고 어쩌면 진짜 어려운 전쟁은 그때부터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삶은 견디기 힘들다.” 이 말은 틀렸다고 하기 어렵다. 살다 보면 힘든 일이 생기고, 어떤 시기는 정말 견뎌야만 지나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처음 『차라투스트라』의 「죽음의 설교자들」을 읽었을 때 조금 불편했다. 삶이 힘들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니체는 왜 그렇게까지 몰아붙이는 것일까. 고통을 말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는 뜻일까. 그런데 조금 더 읽어보니 니체가 문제 삼는 것은 고통 자체가 아닌 것 같다.

 

문제는 이런 식의 결론이다. 삶은 고통스럽다. 그러므로 삶은 가치가 없다. 여기에서 한 단계 더 나가면, 내 삶은 힘들다. 그러므로 삶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너도 기대하지 마라 세상은 원래 그런 곳이다. 개인의 피로가 세계에 대한 판결이 된다.니체가 말하는 ‘죽음의 설교’는 어쩌면 여기에서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죽음의 설교자는 반드시 죽음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일상 속에서 훨씬 익숙한 얼굴을 하고 나타날 수 있다. “사는 게 다 그렇지.” “기대해봐야 실망만 한다.” “나이가 들면 다 똑같아.” “그냥 현실을 받아들여.”

 

겉으로 보면 현실적인 말이다. 경험에서 나온 충고처럼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말은 현실을 설명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가능성 자체를 닫아버린다. 그 말을 듣고 나면 삶을 다르게 살아볼 이유가 줄어든다. 무엇인가를 시도하려던 마음이 작아지고, 지금보다 다른 삶을 상상하는 것이 철없는 일이 된다. 니체가 비판하는 것은 어쩌면 이런 말이 아닐까. 자신이 삶에서 잃어버린 힘을 다른 사람에게도 포기하라고 권하는 말.

 

그런데 이 장을 읽다 보니 남의 말보다 먼저 내 삶을 돌아보게 된다. 나는 죽음을 설교한 적이 없는가. 누군가에게가 아니라, 나 자신에게. 조금 다른 형태로. “이 일만 끝나면.” “조금만 더 자리 잡으면.” “이것만 이루고 나면.” “나중에 시간이 생기면.” 이런 말을 나는 얼마나 자주 했을까. 지금은 바쁘니까 참는다. 지금은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미룬다.지금은 여유가 없으니 나중에 한다.그렇게 삶을 미래로 조금씩 옮겨놓는다. 예전에는 이것을 성실함이라고 생각했다. 현재의 욕망을 조금 미루고 미래의 더 나은 삶을 준비하는 것. 물론 살아가는 데에는 이런 유예가 필요하다. 모든 욕망을 지금 당장 실현할 수는 없다.

 

문제는 어느 순간부터 준비가 삶 전체가 되어버릴 때다. 더 좋은 미래를 위해 지금을 견딘다. 그 미래가 오면 또 다른 미래를 준비한다. 그러다 보면 삶은 언제나 아직 오지 않은 곳에 있다. 나는 지금 살고 있는데, 삶은 늘 나중에 시작될 예정이다. 이것도 저편세계의 한 형태가 아닐까.  이전 글에서 나는 인간이 지금의 세계를 견디지 못해 다른 세계를 만들어내는 문제를 생각했다.  천국, 영원한 세계, 참된 세계. 그런데 반드시 종교적인 저편세계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현대인에게는 훨씬 가까운 저편세계가 있다. ‘조금 더 나아진 미래의 나.’

 

승진하면. 경제적으로 조금 더 여유가 생기면. 퇴직하면. 아이들이 자리를 잡으면. 시간이 많아지면. 그때는 정말 하고 싶은 것을 하겠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어느 순간에는 어떤 위치에 도달하면 삶이 꽤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도달해보면 삶은 생각보다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잠깐 기쁘고, 곧 그것은 일상이 된다. 그리고 다시 다음 목표가 나타난다.

 

그 경험을 떠올리면 이런 질문이 생긴다. 나는 목표를 향해 살아온 것인가, 목표 뒤로 삶을 미뤄온 것인가. 둘은 겉으로 보면 아주 비슷하다. 둘 다 열심히 일하고, 계획하고, 참고, 앞으로 나아간다. 하지만 안쪽에서는 전혀 다를 수 있다. 하나는 현재의 삶에서 무언가를 만들어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현재를 단지 미래를 위한 비용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죽음의 설교자들」에서 니체가 ‘근면’을 의심하는 것도 그래서 흥미롭다. 우리는 흔히 열심히 일하는 것을 삶에 대한 적극적인 태도로 생각한다. 하지만 니체는 반대로 묻는다. 너무 바쁘게 살아가는 것이 혹시 자신을 만나지 않기 위한 방법은 아닌가.

 

일이 많아야 안심하고, 일정이 비면 불안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견디기 어려운 것. 그러면 바쁨은 삶의 충만함이 아니라 자기망각의 수단이 될 수도 있다. 이 질문은 조금 아프다. 나 역시 일이 많을 때는 할 일이 많아서 힘들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일이 잠시 줄어들면 이상하게 허전할 때가 있다.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고, 시간을 그냥 보내면 손해를 보는 것 같은 느낌도 든다. 그렇다면 나는 일을 하는 것일까. 아니면 일이 나를 붙잡아주기를 바라는 것일까.

 

삶을 부정한다는 것은 반드시 삶이 싫다고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삶을 아주 열심히 살면서도 삶을 부정할 수 있다. 현재를 계속 수단으로만 사용하는 것. 지금의 시간을 다음 성취를 위한 준비기간으로만 바라보는 것. 오늘의 나에게는 아직 충분한 가치가 없고, 미래의 내가 되어야 비로소 제대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런 태도도 삶을 미루는 방식이다. 나는 이것이 니체가 말하는 ‘죽음의 설교’를 오늘의 삶에서 읽을 수 있는 한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이 삶에는 아직 충분한 가치가 없다고 말하는 것. 그것은 아주 조용한 삶의 부정이다.

 

그렇다면 삶을 긍정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언제나 즐거워해야 한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힘든 일을 억지로 좋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닐 것이다. 니체는 고통이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삶에는 고통과 불안, 실패와 상실이 있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삶을 긍정한다.

 

이 점이 중요하다. 삶이 고통스럽다는 사실과 삶이 가치 없다는 판단 사이에는 큰 거리가 있다. 고통은 사실이지만, 가치 없음은 해석이다. 그래서 나는 「죽음의 설교자들」을 읽으면서 이런 문장을 만들어본다. 삶의 고통이 삶을 반박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 삶을 반박하고 있을 수 있다.

 

얼마 전 「읽기와 쓰기」에서 한 문장이 마음에 남았다. 우리가 삶을 사랑하는 것은 삶에 익숙하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에 익숙하기 때문이라는 말. 삶이 편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할 만한 이유가 충분해서 사랑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사랑이 먼저일 수 있다.

 

생각해보면 내가 좋아하는 것들도 그렇다. 사진을 찍는 일도 언제나 만족스럽지는 않다. 책을 읽는다고 늘 이해되는 것도 아니다. 글을 쓴다고 매번 좋은 글이 나오는 것도 아니다. 때로는 귀찮고, 지루하고, 내가 왜 이것을 하고 있나 싶다. 그런데도 다시 한다. 아마 삶에 대한 긍정도 이런 모습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완벽해서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함까지 포함해서 다시 해보고 싶은 것.

 

그래서 요즘은 미래를 계획하는 것과 삶을 미래로 미루는 것을 구분해보려 한다. 미래를 준비하는 것은 필요하다. 하지만 미래가 현재의 삶을 먹어버리기 시작하면 문제가 된다. “이것만 끝나면”이라는 말을 반복하다 보면 끝나는 것은 일이 아니라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삶을 긍정한다는 것은 거창한 선언보다 작은 데서 시작될 수 있다.

 

오늘 읽을 책을 오늘 읽는 것. 걷고 싶으면 걷는 것. 사진을 찍고 싶으면 카메라를 드는 것. 가족과 함께 있는 시간을 다른 목적을 위한 공백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 그리고 지금 내가 하는 일을 단지 미래의 나를 위한 희생으로만 생각하지 않는 것. 현재의 삶을 현재의 것으로 돌려놓는 일이다.

 

이전 글에서  나는 높이 올라가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했다. 남보다 높은 곳이 아니라 자기만의 높이를 갖는 것. 그런데 이번에는 한 가지가 더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자기만의 높이를 향한다고 해서 현재의 삶을 희생해서는 안 된다는 것. 정상에 도착해야만 삶이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산비탈에서도 삶은 계속된다. 오히려 대부분의 시간은 정상보다 산비탈에서 보낼 것이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얼마나 빨리 정상에 가느냐가 아니라, 오르는 동안에도 살아 있는가인지 모른다. 나는 아직도 자주 미래를 생각한다. 앞으로 무엇을 할지 계획하고, 무엇을 더 읽을지 정하고,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생각한다. 그것을 버리고 싶지는 않다. 다만 그 미래 때문에 오늘이 초라해지지는 않았으면 한다.

 

오늘은 미래를 위한 대기실이 아니다.지금의 나도 아직 완성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임시적인 존재는 아니다. 그래서 이제는 스스로에게 조금 다른 질문을 해보려고 한다. “언제가 되면 제대로 살 수 있을까?”가 아니라, “나는 오늘의 삶을 얼마나 살아내고 있는가.” 어쩌면 죽음의 설교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 일이 아니라, 계속 뒤로 밀어두었던 삶을  다시 오늘로 가져오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높이 올라가면 마음이 편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무언가를 더 알게 되고, 더 잘하게 되고, 조금 더 인정받게 되면 지금보다 확신이 생길 것 같았다. 그런데 실제 삶은 꼭 그렇지 않았다. 어떤 목표에 가까워질수록 오히려 내가 부족한 것이 더 잘 보였다.  조금 알게 되면 모르는 것이 더 많아졌고, 한 단계 올라가면 다음 높이가 보였다. 이상한 일이다. 높이는 왜 사람을 안정시키기보다 불안하게 만드는 것일까. 『차라투스트라』의 「산비탈의 나무」를 읽으면서 이 질문이 오래 남았다.

 

차라투스트라는 산속에서 한 젊은이를 만난다. 젊은이는 높은 곳을 향하고 있지만 지쳐 있다. 그는 위로 올라가고 싶어 하지만, 올라갈수록 자신을 믿지 못한다. 다른 사람들도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느낀다. 높은 곳에 오르면 혼자가 되고, 자신보다 더 높이 날아가는 존재를 보면 질투한다. 높아지고 싶어서 출발했는데, 정작 높아질수록 자신을 더 경멸하게 된다. 차라투스트라는 그 젊은이를 산비탈의 나무에 비유한다. 나무는 빛을 향해 높이 뻗는다. 그런데 나무가 높아질수록 뿌리는 반대 방향으로 뻗는다. 더 아래로. 더 어두운 곳으로. 더 깊은 곳으로. 이 비유가 묘하게 마음에 걸렸다.

 

우리는 보통 성장한다는 것을 위쪽으로만 생각한다. 더 나은 사람, 더 높은 위치, 더 많은 지식. 마치 위로 올라갈수록 어둠에서 멀어질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니체의 나무는 정반대다. 높아지기 위해서는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가야 한다. 처음에는 이 말을 흔한 자기계발의 표현처럼 읽었다. 큰 사람이 되려면 고난도 견뎌야 한다는 말. 높은 성취를 얻으려면 깊은 뿌리를 내려야 한다는 말. 하지만 니체가 말하는 심연은 그렇게 단순한 것 같지 않다. 높이 올라가면서 만나게 되는 것은 고난만이 아니다. 자기불신이다. 고독이다. 질투다. 자기경멸이다. 내가 보고 싶지 않았던 나 자신이다. 어쩌면 성장한다는 것은 좋은 것이 더 많아지는 과정이 아니라, 내 안에 숨어 있던 불편한 것들까지 더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하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책을 읽을 때도 비슷하다. 아무것도 모를 때는 오히려 단순하다. 한두 문장을 이해하면 이해한 것 같고, 어떤 개념을 알게 되면 그 철학자를 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조금 더 읽으면 상황이 달라진다. 앞에서 이해했다고 생각했던 말이 뒤에서 다시 흔들린다. 같은 단어가 다른 의미로 나타난다. 내가 정리한 생각과 맞지 않는 문장이 계속 나온다. 처음에는 니체를 이해하기 위해 읽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내가 이해한 니체가 맞는지 의심하게 된다. 모르는 것이 줄어들기보다 오히려 더 많아진다.

 

그렇다면 이해가 깊어진다는 것은 확신이 많아지는 것일까. 오히려 쉽게 확신하지 못하게 되는 것에 가까운 것은 아닐까. 높이 올라갔기 때문에 더 멀리 보이고, 더 멀리 보이기 때문에 내가 보지 못하는 영역도 더 크게 느껴지는 것처럼 말이다.

 

산비탈의 젊은이가 힘들어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 같다. 그는 아직 정상에 도착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예전의 낮은 곳으로 편하게 돌아갈 수도 없다. 이미 다른 높이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산비탈에 있다. 이곳은 불안정하다. 예전의 가치에는 더 이상 완전히 속하지 못하지만,  자기만의 가치를 만들지도 못한 장소다. 아래에서는 이상한 사람처럼 보이고, 위를 보면 아직 너무 멀다.

 

나는 이 산비탈이라는 이미지가 마음에 든다. 우리는 삶에서 생각보다 자주 이런 곳에 서는 것 같다. 어떤 생각을 의심하기 시작했지만 새로운 생각을 만들지는 못했을 때. 예전의 삶의 방식이 더 이상 만족스럽지 않지만 무엇으로 바꿔야 할지 모를 때.내가 중요하다고 믿었던 것이 예전만큼 중요하지 않아졌지만, 새로운 기준도 아직 분명하지 않을 때. 그때 우리는 정상도 아니고 평지도 아니다. 산비탈에 서 있다.

 

문제는 이때 다른 사람을 바라보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젊은이는 차라투스트라를 바라본다. 그리고 차라투스트라처럼 되고 싶어 한다. 처음에는 동경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동경은 쉽게 비교로 바뀐다. 비교는 열등감이 되고, 결국 질투가 된다. 이 장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다. 높은 곳으로 가려던 사람이 왜 다른 높은 사람을 미워하게 되는가.

 

생각해보면 자연스럽다. 내 높이를 아직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높이를 하나의 공통된 척도로 생각하면, 누군가는 항상 나보다 위에 있다. 더 많이 아는 사람. 더 좋은 글을 쓰는 사람. 더 좋은 사진을 찍는 사람. 더 성공한 사람. 더 많이 인정받는 사람. 그들을 바라보는 순간 나의 길은 쉽게 순위가 된다.

 

나는 몇 번째인가. 나는 얼마나 뒤처져 있는가. 언제 저곳에 도달할 수 있는가. 그러면 높이는 더 이상 내 높이가 아니다. 타인이 만든 산을 오르고 있는 셈이다. 차라투스트라가 젊은이에게 말하는 ‘높이’는 그런 높이가 아닌 것 같다. 누군가보다 높은 곳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높이다. 이 말을 처음에는 추상적으로 느꼈다. 그러나 삶에 대입하면 조금 이해된다. 직급은 서로 비교할 수 있다. 성과도 어느 정도 비교할 수 있다. 재산이나 숫자로 표현되는 결과도 비교가 가능하다. 하지만 내가 어떤 질문을 품고 사는지, 무엇을 좋아하게 되었는지, 어떤 삶을 더 중요하게 여기 되었는지는 쉽게 순위를 매길 수 없다. 그곳에서부터 내 높이가 생기는 것이 아닐까. 누군가를 이기는 높이가 아니라, 예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는 높이.

 

그래서 높이 오른다는 말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나는 오랫동안 높이를 결과로 생각했다. 어떤 위치에 도달하는 것. 무언가를 성취하는 것. 그러나 니체가 말하는 높이는 어쩌면 위치라기보다 퍼스펙티브의 변화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같은 삶을 다른 곳에서 바라보는 것.전에는 당연했던 것을 더 이상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다른 사람들이 모두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을 나도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지 묻는 것. 그리고 그 질문 끝에서 내 기준을 만들어가는 것. 그렇다면 높아졌다는 것은 남보다 앞섰다는 뜻이 아니라,  이전의 나와 같은 방식으로 세상을 볼 수 없게 되었다는 뜻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고독이 따라온다. 젊은이는 높은 곳에서 자신에게 말을 건네는 사람이 없다고 말한다. 처음 읽었을 때는 외로운 천재에 대한 이야기처럼 느껴져 조금 거부감도 있었다. 하지만 꼭 대단한 사람의 고독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달라지면, 자연스럽게 이전과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없는 순간이 생긴다. 누군가가 틀렸기 때문이 아니다. 서 있는 위치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때 우리는 쉽게 불안해진다.

 

혹시 내가 잘못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다른 사람들이 관심을 두지 않는 것에 왜 나는 시간을 쓰고 있을까. 다시 익숙한 곳으로 내려가야 하는 것은 아닐까.아마 자유정신을 향하는 과정에서 가장 힘든 것은 다른 사람의 반대보다 이런 자기 의심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젊은이에게 더 높은 곳만 바라보라고 하지 않는다. 나무의 뿌리를 이야기한다. 빛을 향해 가려면 어둠도 깊어진다고 말한다. 나는 이것을 이렇게 읽고 싶다. 자기만의 높이를 가지려면 자기 안의 어둠도 감당해야 한다. 질투를 느끼는 나. 인정받고 싶은 나. 다른 사람보다 잘하고 싶은 나. 잘못 선택했을까 두려워하는 나. 혼자가 되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나. 그런 모습을 없다고 생각하면서 높아질 수는 없다. 오히려 그것들을 인정해야 한다. 뿌리가 어둠 속으로 내려가지 않은 채 가지들만 하늘로 뻗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나는 하나의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내 안에는 여러 힘과 여러 가능성이 있고, 그 가운데 어떤 것이 앞으로 나오느냐에 따라 다른 내가 될 수 있다고. 그렇다면 이번에는 한 가지가 더 보인다. 다른 내가 된다는 것은 언제나 기분 좋은 변화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새로운 내가 나오기 위해서는 지금의 나를 지탱하던 익숙한 기준이 흔들려야 한다. 그 과정에서 불안해지고, 외로워지고, 때로는 이전의 자신을 그리워할 수도 있다. 생성은 언제나 밝은 방향으로만 일어나지 않는다. 높아지는 것과 깊어지는 것은 함께 일어난다.

 

나는 요즘 니체를 읽고 글을 쓰면서 종종 내가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의심한다. 처음보다 더 많이 읽었지만, 오히려 예전처럼 쉽게 말하기 어려워졌다. 예전에는 한 문장으로 정리했던 개념이 이제는 여러 갈래로 갈라진다. 처음에는 이것이 이해가 부족해서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어쩌면 그 반대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조금 더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에 함부로 단정하기 어려워진 것. 그것도 하나의 높이라면 높이일 것이다. 아직 정상은 아니다.어쩌면 정상 같은 것은 없을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 산비탈 어딘가에 있다.

 

그렇다면 이제 질문은 달라진다. 얼마나 높은 곳까지 갈 수 있는가가 아니라, 나는 누구의 높이를 바라보고 있는가. 남들이 높은 곳이라고 부르는 곳인가. 내가 정말 보고 싶은 풍경이 있는 곳인가. 그리고 그곳으로 가기 위해 내 안의 어느 깊이까지 내려갈 수 있는가. 니체의 산비탈의 나무를 보며 이제 높이를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높은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위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만의 높이를 갖기 위해 자기 안의 깊이까지 내려가 본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오랫동안 ‘나’라는 사람이 하나라고 생각했다.성격이 있고, 취향이 있고, 가치관이 있고,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변하더라도 그 중심에는 변하지 않는 어떤 내가 있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나는 어떤 사람인가”라는 질문도 자연스러웠다.

 

나는 책임감이 강한 사람인가. 나는 욕심이 많은 사람인가. 나는 조용한 사람인가. 나는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인가. 나는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사람인가. 그런데 니체를 읽다 보면 이 질문 자체가 흔들린다. 정말 내 안에는 하나의 ‘나’가 있는 것일까. 니체는 『차라투스트라』에서 신체를 “커다란 이성”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보통 ‘나’라고 부르는 정신과 의식은 그보다 작은 이성에 불과하다. 앞선 글에서 이 말을 정신보다 육체가 중요하다는 뜻으로만 읽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니체가 말하는 신체는 단순한 육체가 아니다.

 

신체는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욕망과 감정, 기억, 습관과 충동, 수많은 힘들이 뒤엉켜 있는 더 큰 장이다. 그렇다면 내가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고 말할 때, 그 생각은 정말 내가 처음부터 결정한 것일까.혹은 내 안에서 수많은 힘들이 다투다가 어느 하나가 잠시 우위를 차지한 결과를 나는 뒤늦게 ‘내 생각’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질문을 따라가다 보면 ‘나’라는 존재가 조금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내 안에는 서로 다른 내가 있다. 일을 할 때의 나와 집에 있을 때의 나는 다르다. 사진을 찍을 때의 나와 책을 읽을 때의 나도 다르다. 무언가를 사고 싶어 하는 나와 더 이상 물건을 늘리고 싶지 않은 나도 동시에 존재한다. 조용히 쉬고 싶은 내가 있는가 하면, 무엇인가 계속 배우고 기록하고 싶은 나도 있다. 예전에는 이런 서로 다른 욕망이 충돌하면 어느 쪽이 ‘진짜 나’인지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니체의 관점에서 보면 질문이 달라진다. 어느 하나가 진짜이고 나머지가 가짜인 것이 아니라, 그 모두가 나를 구성하는 힘들일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그 가운데 하나가 잠시 앞에 나와 있는 모습인지도 모른다.

 

이 지점에서 영화 『아임 낫 데어』가 떠오른다. 영화는 밥 딜런을 한 명의 배우로 재현하지 않는다. 서로 다른 이름과 성격을 가진 여러 인물이 밥 딜런을 연기한다. 포크가수, 시인, 배우, 음악적으로 변신하며 비난받는 뮤지션, 종교적으로 회심한 인물까지. 처음에는 이상하게 느껴진다. 그렇다면 진짜 밥 딜런은 누구인가. 하지만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오히려 반대에 가까운 것 같다. 왜 밥 딜런은 한 사람이어야 하는가.

 

사람들은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해 그를 하나의 말로 규정하려 한다. “저 사람은 이런 사람이야.” 그렇게 규정하는 순간 마음은 편해진다. 하지만 그 사람은 이미 다른 곳으로 움직이고 있을 수 있다. 밥 딜런의 말처럼, “나는 당신이 알고 있는 그 누구도 아니다. ”어쩌면 『아임 낫 데어』라는 제목은 이런 뜻인지도 모른다. 당신이 나라고 생각한 바로 그곳에, 이미 나는 없다.

 

자료에서는 이를 ‘잠재적인 신체’와 ‘현행적인 자아’로 설명한다. 처음 들었을 때는 다소 어려운 표현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하니 조금 이해가 된다. 내 안에는 아직 나타나지 않은 여러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그중 일부가 지금의 삶에서 현실화된다. 그 현실화된 모습을 나는 ‘나’라고 부른다.하지만 그것이 나의 전부는 아니다. 오늘의 내가 나라고 해서 내일도 반드시 같은 나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변화한다는 것은 지금의 나에게 무엇인가를 조금 더 덧붙이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전혀 다른 힘이 앞으로 나오는 것일 수도 있다. 니체에게 생성은 이런 것이 아닐까. 더 나은 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아직 없었던 내가 되어보는 것.

 

이 차이는 생각보다 크다. 우리는 보통 성장을 ‘더 나은 나’가 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더 높은 자리, 더 많은 지식, 더 좋은 성과, 더 좋은 사진. 여기에는 이미 무엇이 좋은지에 대한 기준이 있다. 그래서 그 기준을 따라 위로 올라간다. 나 역시 오랫동안 그런 방식으로 성장해왔던 것 같다.

 

한 단계 올라가면 그 다음 단계가 보이고, 그곳에 도달하면 삶이 조금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실제로 어떤 위치에 도달하고 나면 이상할 정도로 나는 여전히 나였다. 기대했던 만큼 다른 사람이 되어 있지는 않았다. 그때는 목표가 충분히 크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질문을 해본다. 혹시 나는 새로운 내가 되려고 한 것이 아니라, 기존의 나를 더 성공적으로 만들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요즘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시간을 생각하면 조금 다르게 느껴진다. 이 일은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뚜렷한 보상이 있는 것도 아니다. 블로그에 글 한 편을 더 쓴다고 직급이 올라가는 것도 아니고, 돈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글을 쓰다 보면 이전에는 생각하지 않았던 질문을 하게 된다. 자료를 그냥 읽을 때는 지나갔던 문장이, 글을 쓰면서 다시 보이면 다르게 읽힌다.

 

그리고 내가 쓴 글을 다시 읽은 뒤 자료를 보면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연결이 나타난다. 그 과정에서 내가 조금씩 달라지는 것 같다. 무엇을 더 많이 알게 되어서라기보다,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것이 생성이라면, 생성은 거창한 변신이 아닐 수도 있다. 내 안에서 오랫동안 뒤에 있던 힘 하나가 앞으로 나오는 것. 그 힘이 새로운 질문을 만들고, 새로운 습관을 만들고, 이전과 다른 삶의 리듬을 만드는 것. 그러면서 어느 순간 나는 이전과 조금 다른 사람이 되어 있는 것.

 

그렇다면 나는 지금 몇 명의 나와 함께 살고 있는 것일까. 일하는 나. 가족과 함께 있는 나. 사진을 찍는 나. 물건을 사고 싶어 하는 나. 물건을 줄이고 싶어 하는 나. 책을 읽는 나. 글을 쓰는 나.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싶은 나. 이 가운데 어느 것이 진짜 나인가. 예전 같으면 하나를 선택하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굳이 그럴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중요한 것은 진짜 나를 찾는 일이 아니라, 내 안의 어떤 힘을 앞으로 불러낼 것인가를 선택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니체는 평생 한 모습으로 머물지 않았다. 바그너를 사랑했던 니체가 있었고, 그에게서 떠난 니체가 있었다. 쇼펜하우어에게 영향을 받은 니체가 있었고, 그 철학에서도 벗어난 니체가 있었다. 그는 이전의 자신을 부정하면서도, 그 과거를 완전히 지우지는 않았다. 과거의 자신까지도 다음 자신을 만들어내는 재료로 사용했다. 

 

그래서 이런 문장이 마음에 남는다. 나는 항상 나로 머물러 있지만, 항상 다른 내가 되는 방식으로 그랬다. 변화한다는 것이 과거의 나를 버리는 일만은 아닐 것이다. 과거의 나 역시 지금의 나를 만든 힘 가운데 하나다. 다만 그것을 영원한 정체성으로 붙잡지 않는 것.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라는 말로 앞으로 나타날 수 있는 다른 나를 막지 않는 것. 그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은 여전히 중요하다. 하지만 니체를 읽으며 조금 다른 질문을 덧붙여본다. 나는 무엇이 될 수 있는가. 그리고 그보다 더 어려운 질문도 있다. 지금의 나를 얼마나 기꺼이 놓아줄 수 있는가. 새로운 내가 되려면 지금의 나 가운데 일부는 뒤로 물러나야 한다.익숙했던 가치와 습관, 성공의 기준도 내려놓아야 할지 모른다. 그래서 생성에는 기대와 함께 불안이 따라온다.

 

하지만 고정된 나를 지키는 것만이 삶이라면, 그 삶은 점점 좁아질 것이다. 아직 나타나지 않은 내가 내 안에 있다면. 그 사람을 한 번쯤 만나보고 싶다. 어쩌면 니체가 말하는 자기극복은더 훌륭한 사람이 되는 일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나에게서 조금씩 벗어나  아직 알지 못하는 나를 만들어가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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