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글에서 젊은 날의 상처와 무덤을 생각했다. 과거의 상처가 사라지지 않아도 다시 시작하게 만드는 힘이 있고, 오래된 꿈의 형태는 사라져도 그 꿈을 만들었던 힘은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차라투스트라의 젊은 날을 죽인 것은 특정한 사람만이 아니었다.
가족이 있고, 학교가 있으며, 조직과 사회가 있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이미 어떤 세계 안으로 들어온다. 그 세계에는 무엇이 좋은 삶인지, 무엇을 이루어야 하는지, 어떤 사람이 인정받는지에 대한 기준이 있다. 니체 강의에서는 이것을 ‘시대의 중력장’이라고 표현한다. 중력이라는 비유가 재미있다. 우리는 중력 속에서 살면서 매 순간 중력을 의식하지 않는다. 컵이 바닥에 놓여 있는 것도, 내가 의자에 앉아 있는 것도 당연하게 느낀다.
시대의 가치도 비슷하다는 것이다. 너무 오랫동안 그 안에서 살기 때문에 그것이 하나의 선택이라는 사실조차 잊는다. 좋은 학교에 가는 것. 안정적인 직업을 갖는 것. 회사에서 인정받는 것. 승진하는 것. 집을 마련하는 것. 경제적으로 여유를 갖는 것. 자녀가 잘되는 것. 이런 것들은 모두 실제로 중요한 가치일 수 있다. 문제는 그것들이 나쁘다는 데 있지 않다. 내가 선택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선택해본 적조차 없을 수 있다는 데 있다.
이 전 글에서도 비슷한 질문을 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일까.’ 그때는 사회와 조직이 내 욕망에 어떤 먹이를 주는지를 생각했다. 조금 다른 질문을 해보고 싶다. 시대의 영향을 받지 않고 살 수 없다면, 시대 안에 있으면서도 시대와 거리를 만드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회사를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오랫동안 조직생활을 하다 보면 조직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나도 중요하게 여기게 된다. 평가가 중요하다. 직책이 중요하다. 어떤 일을 맡는지가 중요하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지도 중요하다. 나 역시 이런 것들과 무관하게 살아온 사람은 아니다. 매일글쓰기 1,247편을 분류했을 때도 회사와 조직, 인정과 평가가 오랫동안 반복되는 큰 주제였다. 당시에는 그것이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회사원이 회사 일을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러 해의 글을 한꺼번에 보고 나니 조금 다른 질문이 생겼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 가운데 얼마만큼이 회사 안에서만 중요했던 것일까. 회사에서는 매우 큰일이 시간이 지나면 별것 아닌 일이 되기도 한다. 그해의 평가. 누가 어떤 자리에 갔는가. 누가 어떤 업무를 맡았는가. 당시에는 상당히 신경 쓰였지만 몇 년 지나면 기억조차 희미한 일이 많다.
반대로 당시에는 큰 성과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 오랫동안 남기도 한다. 꾸준히 쓴 글. 읽었던 책. 가족과의 시간. 새롭게 배운 것. 어떤 일을 하면서 갖게 된 질문. 회사라는 세계의 시간과 내 삶 전체의 시간은 같은 속도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 차이를 보기 시작하면 작은 거리가 생긴다. 회사에서 중요하다고 해서 내 삶 전체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닐 수 있다. 그렇다고 회사 일을 대충 하겠다는 뜻도 아니다. 오히려
회사라는 하나의 세계 안에서 최선을 다하면서도 그 세계의 평가표가 내 존재 전체의 평가표가 되지는 않게 하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거리’라는 말의 한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강의자료에서 니체의 ‘거리의 파토스’는 처음 읽으면 조금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다. 강자와 약자. 높음과 낮음. 거리. 이런 표현은 사람을 우열로 나누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앞서 81편에서도 생각했듯 니체의 강자와 약자는 단순히 사회적으로 힘 있는 사람과 힘없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강의자료가 강조하는 핵심은 다수적인 가치와 다른 감각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에 있다.
그러니 거리를 둔다는 것은 사람을 무시하는 일이 아니다. ‘나는 저 사람들과 달라.’라고 우월감을 가지는 일도 아니다. 모두가 당연하다고 느끼는 것을 나도 반드시 당연하게 느껴야 하는가를 묻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최근 사진을 찍으며 경험한 변화가 떠오른다. 출퇴근길 전철은 늘 같은 곳이었다. 사람들은 스마트폰을 보고, 누군가는 졸고, 누군가는 역에서 내린다. 예전에는 나도 그 공간을 목적지까지 이동하기 위한 시간으로 주로 사용했다. 그런데 카메라를 가지고 다니면서 같은 장소가 조금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전철 맨 앞 칸으로 가본다. 유리창에 비친 사람을 본다. 광고판 앞을 사람이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자리 하나를 옮겨보고, 거리와 각도를 생각한다.
세상은 그대로인데 보는 감각이 달라졌다. 강의자료에 나오는 ‘다르게 보는 자’라는 표현이 이 경험과 잘 맞는다고 느꼈다. 거리의 파토스는 반드시 거대한 사회적 반항으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닐 수 있다. 평소 보지 않던 것을 보기 시작하는 것도 기존 감각과 거리를 만드는 일이다. 다른 책을 읽는 것. 다른 길로 걸어보는 것. 모두가 빨리 지나가는 곳에서 잠깐 멈추는 것.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을 한번 질문해보는 것. 이런 작은 변화에서도 거리는 생긴다.
그래서 ‘남들과 다르게 살아야 한다’고 결심하는 것은 오히려 조금 이상하다.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목표로 삼는 순간 여전히 기준은 ‘남들’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오른쪽으로 가니 나는 왼쪽으로 간다. 모두가 좋아하니 나는 싫어한다. 유행하니 일부러 피한다. 이것도 결국 다른 사람에게 반응하는 삶이다. 89편에서 역겨움에 머물지 않고 ‘그렇다면 나는 어디로 갈 것인가’를 물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싫어하는 대상이 계속 내 방향을 정한다면 나는 그 대상으로부터 아직 자유롭지 않다.
강의자료가 거리의 파토스를 최종 단계로 보지 않는 이유도 비슷하다. 시대에 순응하는 사람은 시대에 의해 결정된다. 그런데 시대에 반대하는 사람도 여전히 시대에 의해 결정될 수 있다. ‘나는 저들과 다르다.’라는 정체성도 ‘저들’이 사라지면 함께 힘을 잃을 수 있다. 그래서 니체는 한 단계 더 나아간다. 시대와 다른 사람이 되는 것에서, 이전의 나와 다른 사람이 되는 것으로. 강의자료에서는 이것을 거리의 파토스에서 ‘비극의 파토스’로의 이동이라고 설명한다. 거리의 파토스가 나와 시대 사이에 차이를 만든다면, 비극의 파토스는 현재의 나와 앞으로의 나 사이에 새로운 거리를 만든다.
이 구분이 나에게는 상당히 중요하게 느껴진다. 우리는 흔히 성장한다는 것을 다른 사람보다 앞서는 것으로 생각한다. 더 좋은 평가를 받는다. 더 높은 자리에 간다. 더 많이 안다. 더 좋은 결과를 낸다. 그러면 비교 대상은 언제나 바깥에 있다. 하지만 비극의 파토스에서는 비교 대상이 달라진다. 어제의 나와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가. 이것은 조금 더 어려운 문제다. 남보다 앞서는 것은 한 가지 능력을 계속 강화해도 가능하다. 하지만 자신과 달라지려면 내가 잘해왔던 방식까지 때로는 버려야 한다. 익숙한 것을 놓아야 한다.
오랫동안 나를 성공하게 해준 습관이 다음 단계에서는 오히려 나를 붙잡을 수도 있다. 직장에서도 그런 순간이 생긴다. 실무자일 때 일을 잘하는 방법과 팀장이 되어 일을 잘하는 방법은 같지 않다. 실무자로서 모든 것을 직접 확인하고 세세하게 챙기는 능력이 큰 장점이었다고 해도, 책임지는 범위가 넓어진 뒤에도 모든 일을 직접 하려고 하면 오히려 조직의 힘을 떨어뜨릴 수 있다. 예전의 강점이 지금의 한계가 된다.
그러면 자기극복은 약점을 고치는 일만이 아니다. 한때 나를 여기까지 데려온 강점을 놓아줄 수 있는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전 글에서 ‘주는 사람’으로만 있으려는 습관을 생각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해결하는 사람. 답을 아는 사람. 도와주는 사람. 책임지는 사람. 이런 모습은 분명 좋은 힘이다. 하지만 그 정체성이 너무 강해지면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고 도움받는 능력을 잃을 수 있다. 자기극복은 무능한 내가 유능한 내가 되는 과정만은 아니다. 때로는 유능하다고 생각하는 나까지 넘어서는 일이다.
강의자료에서 ‘비극’이라는 말이 붙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새로운 내가 나타나려면 이전의 내가 어느 정도는 사라져야 한다. 낙타에서 사자로, 사자에서 어린아이로 가는 세 변신처럼 새로운 상태는 이전 상태를 그대로 유지한 채 하나를 더 얹는 방식으로만 만들어지지 않는다. 무엇인가 끝나야 한다. 그래서 자기극복에는 상실이 있다.
나는 이것을 요즘 책을 정리하면서도 조금 느꼈다. 책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이 한때는 나에게 꽤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관심 있는 작가라면 여러 권을 모으고, 언젠가 읽을 생각으로 책을 사두었다. 그 행동에는 독서에 대한 욕망이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질문이 달라졌다. 얼마나 많은 책을 가지고 있는가보다 지금 무엇을 읽고 있는가, 읽은 것이 내 생각과 어떻게 연결되는가가 더 중요해졌다. 그러면 과거의 방식과 거리를 만들어야 한다. 한때 소중했던 책을 내보내기도 해야 한다.
그 순간 약간의 아쉬움이 생긴다. 그 아쉬움은 단순히 물건을 버리는 데서만 오는 것이 아니다. 그 물건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예전의 나와도 조금 헤어지는 감정일 수 있다. 비극의 파토스라는 말을 이런 일상의 변화에서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다. 거창하게 새로운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오랫동안 ‘나답다’고 생각했던 것을 필요하면 다시 묻는 것.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라고 굳히지 않는 것. 그리고 이전의 나와 조금 다른 삶을 허용하는 것이다.
매일글쓰기를 몇 년 동안 이어오면서도 그런 변화가 보인다. 2018~2019년의 글과 2020년의 글이 다르고, 2021년에는 욕망과 철학, 돈과 가치에 대한 질문이 더 많이 나타났다. 이후에는 메모와 개인지식관리, 독서와 글쓰기를 다시 연결하는 방식에 관심이 커졌다. 한 사람이 쓴 글인데 관심의 중심이 움직였다. 나는 이 변화가 흥미롭다.
만약 몇 년 동안 계속 같은 질문만 하고 같은 답만 반복했다면 그것을 일관성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변하지 않았다는 뜻일 수도 있다. 생각이 달라진다는 것은 과거의 내가 틀렸다는 뜻만은 아니다. 그때의 나에게 필요했던 질문을 충분히 살았기 때문에 다음 질문으로 이동한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오래된 글을 읽을 때 과거의 나를 심판하고 싶지는 않다. “그때는 왜 저렇게 생각했을까.”라고 비웃을 필요도 없다. 그때의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질문이 생겼다. 다만 지금도 그 답을 계속 가지고 있어야 할 이유는 없다. 과거의 나에게 충실하다는 것은 과거의 생각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처럼 지금도 살아 있는 질문을 계속하는 것일 수 있다.
이 지점에서 ‘비극의 파토스’가 104편의 「무덤의 노래」와도 연결된다. 이전 글에서는 꿈의 형태는 사라져도 꿈을 만들던 힘은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힘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가 조금 더 보인다. 살아남은 힘은 과거의 형태를 복원하는 데만 사용되지 않는다. 새로운 형태를 만드는 데 쓰인다. 글쓰기는 계속하지만 쓰는 내용이 달라진다. 독서는 계속하지만 책을 소유하는 방식이 달라진다. 회사생활은 계속하지만 평가와 직책을 바라보는 거리가 달라질 수 있다. 사진을 찍기 시작하면서 출퇴근이라는 익숙한 시간이 다른 활동이 되기도 한다. 같은 삶 안에서도 새로운 세계가 생긴다.
자료에서는 거리의 파토스와 비극의 파토스를 구분하면서 중요한 차이를 하나 더 말한다. ‘~으로부터의 자유’와 ‘~을 향한 자유’다. 싫은 것에서 벗어나는 자유는 필요하다. 부당한 관계에서 벗어나고, 타인의 지나친 평가에서 거리를 두고, 나를 소모시키는 습관을 끊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벗어나는 것만으로는 방향이 생기지 않는다. 무엇을 싫어하는지는 알지만 무엇을 좋아하는지는 모를 수 있다. 무엇에 반대하는지는 알지만 어떤 삶을 만들고 싶은지는 모를 수 있다. 그래서 ‘~으로부터의 자유’ 다음에는 반드시 질문이 온다. 나는 무엇을 향해 갈 것인가.
이 질문이 없으면 반대하던 대상이 사라졌을 때 내 힘도 함께 사라질 수 있다. 회사 평가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다고 하자.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평가가 덜 중요해졌을 때 그 자리에 무엇을 둘 것인가. 일의 완성도인가. 함께 일하는 사람의 성장인가. 내가 배우는 것인가. 삶의 균형인가. 다른 질문이 필요하다. 소비욕망에서도 마찬가지다. 물건을 덜 사겠다는 결심만으로는 오래가기 어렵다. 사지 않고 남긴 시간과 돈과 공간을 무엇에 사용할 것인가가 있어야 한다. 독서인가. 여행인가. 가족과의 시간인가. 사진인가. 아무것도 아닌 여백인가. 비우는 것보다 그 빈자리에 무엇을 생성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이 점에서 비극의 파토스는 ‘반대’보다 ‘창조’에 가깝다. 현재의 시대와 싸우는 것만으로는 새로운 시대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내가 싫어하는 사람과 달라지는 것만으로 새로운 내가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다. 새로운 가치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가치는 처음부터 거대한 철학적 선언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내가 중요하게 여기고 실제로 시간을 쓰는 것이 곧 가치가 되기 때문이다. 매일 글을 쓴다면 글쓰기가 하나의 가치가 된다. 책을 읽고 생각을 연결하는 데 시간을 쓴다면 그것도 가치다. 가족과 걷는 시간을 지키면 그것 역시 가치다. 출퇴근길을 무의미한 이동시간으로만 두지 않고 사진을 찍으며 관찰하는 시간으로 바꾸면, 삶의 시간을 바라보는 새로운 기준 하나가 생긴다. 가치는 말보다 반복해서 사용하는 시간에서 더 선명하게 드러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매일글쓰기는 내게 시대와 약간의 거리를 만들어준 공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회사에서는 회사의 언어를 쓴다. 성과, 일정, 목표, 문제, 대책, 평가. 필요한 언어다. 하지만 퇴근한 뒤 글을 쓰면 다른 질문을 할 수 있었다. 나는 왜 이렇게 신경 쓰는가.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책의 문장이 왜 마음에 걸리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회사에서는 당장 답을 내야 하지만 글에서는 답이 없어도 질문을 남길 수 있다. 이 차이가 작은 거리였다. 회사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회사만이 세계의 전부가 아니게 만드는 거리였다.
최근 사진도 비슷한 역할을 하는 것 같다. 카메라를 들고 있다고 더 특별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남들과 다른 취향을 가졌다는 것을 증명할 필요도 없다. 그보다는 평소 지나치던 것을 다르게 보게 한다. 나는 이런 ‘다른 감각’이 거리의 파토스에서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이 못 보는 것을 보겠다는 경쟁이 아니다. 어제의 내가 보지 못했던 것을 오늘의 내가 하나 더 보는 것.
여기에서 거리의 파토스와 비극의 파토스가 만난다. 처음에는 시대와 다른 감각을 만들기 위해 거리를 둔다. 그런데 어느 순간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일 자체를 넘어간다. 이제 중요한 것은 남들과 얼마나 다른가가 아니다. 내 안에 새로운 거리가 생겼는가. 몇 년 전의 내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과 지금의 내가 다르게 생각하는가. 예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을 볼 수 있게 되었는가. 한때 나를 강하게 만들었던 방식에서 필요하면 벗어날 수 있는가. 그렇다면 나는 조금 변한 것이다.
이런 변화라면 나는 ‘일관되지 않다’는 말을 너무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사람은 변한다. 오히려 살아 있기 때문에 변한다. 니체가 말하는 자기극복은 어쩌면 매번 새로운 사람이 되라는 강박이 아니라 현재의 나를 최종본으로 만들지 않는 태도인지도 모른다. 나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지금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도 언젠가 달라질 수 있다. 지금 좋아하는 것도 바뀔 수 있다. 지금의 강점도 언젠가는 놓아야 할 수 있다. 그러면 삶은 조금 열려 있게 된다.
시대와 거리를 둔다는 말을 이렇게 정리하고 싶다. 첫째, 시대의 가치가 나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유일한 가치라고 믿지 않는 것. 둘째, 남들과 달라지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다른 감각과 다른 삶의 가능성을 만들어보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어려운 거리. 현재의 나에게서도 거리를 둘 수 있는 것.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다.’ ‘나는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왔다.’ ‘내가 잘하는 방식은 이것이다.’ 이 문장들에 너무 오래 머물지 않는 것. 시대와의 거리는 어느 순간 자기 자신과의 거리로 바뀌어야 한다. 그래야 반대에서 창조로 갈 수 있다. 강의자료가 말하는 비극의 파토스는 바로 그 지점에 있다. 낡은 내가 조금 사라지고 새로운 내가 나타나는 과정. 그래서 비극이다. 그러나 끝이 소멸이 아니라 생성이기 때문에 긍정의 파토스다.
이제 다음 장 「자기극복」과 「고매한 자들」로 넘어갈 준비가 된 것 같다. 그런데 자기극복이라는 말을 들으면 쉽게 이런 모습을 떠올린다. 더 노력하는 사람. 더 강해지는 사람. 약점을 이겨낸 사람. 자기 자신에게 엄격한 사람. 하지만 니체가 말하는 자기극복이 정말 그런 것뿐일까. 지금까지 열심히 노력해 강한 사람이 되었다고 해도 거기에서 멈추면 어떻게 될까. 자신의 강함에 만족하고, 자신이 세운 기준을 지키며, 높은 곳에 올라간 뒤 더 이상 변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정말 자신을 극복한 것일까. 다음에는 차라투스트라가 ‘고매한 자’를 비판하는 이유를 따라가보고 싶다. 강해진 사람은 왜 다시 자신을 넘어야 하는가(1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