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몇 달 사이 여러 대의 기기가 제 책상을 거쳐 갔습니다. 레이저 블레이드 18을 구입했고, 오래전부터 한번 사용해보고 싶었던 ThinkPad도 들였습니다. 최신 AI 기능이 궁금해 iPad도 구입했습니다. 각각을 살 때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습니다.
레이저 블레이드는 로컬 LLM을 직접 구현해보고 싶었고, ThinkPad로는 아이들 영상을 정리하고 비주얼 씽킹 도구로 활용해보고 싶었습니다. iPad에서는 새로운 AI 기능을 경험해 보고 싶었습니다. 가격도 알아봤고, 용도도 생각했습니다. 필요하지 않으면 다시 판매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충동구매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세 물건을 사고, 사용하고, 다시 판매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조금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충동구매는 아무 생각 없이 물건을 사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사고 싶은 마음에 충분히 좋은 이유를 만들어준 뒤 스스로 허락을 내리는 것. 그것도 충동구매의 한 모습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호기심과 구매 사이
저는 새로운 기계를 직접 사용해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스펙표를 읽는 것과 직접 사용하는 것은 다릅니다. 레이저 블레이드에서 게임을 실행해보면서 GPU의 성능만큼 전력과 열관리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400W 전원 어댑터가 왜 필요한지도 직접 사용하면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GPU를 알아보다 AI의 병렬처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거기에서 제가 오랫동안 접해온 통신기술인 OFDM을 떠올리기도 했습니다.ThinkPad를 사용하면서는 Inkscape나 draw.io 같은 새로운 도구를 알게 되었습니다. iPad를 사용하면서는 AI의 성능 못지않게 내가 실제로 사용하는 데이터와의 연결이 중요하다는 것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새로운 물건을 접하면 새로운 것을 배우게 됩니다.
이것이 제가 기계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문제는 호기심과 구매 사이의 거리가 너무 짧아질 때 생기는 것 같습니다. 궁금합니다. 그리고 곧바로 다음 생각이 이어집니다. ‘가격도 괜찮은데 한번 사볼까.’ 직접 사용해보면 가장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시 팔면 됩니다. 좋은 가격에 샀다면 큰 손해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하나는 모두 합리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논리가 반복되면 물건은 계속 들어옵니다.
우리는 가능성도 산다
세 물건을 사용하면서 공통적으로 발견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물건의 현재 용도만 보고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물건으로 할 수 있는 가능성도 함께 삽니다. 레이저 블레이드를 사면 로컬 LLM을 구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영상 편집도 할 수 있습니다. 고성능 게임도 할 수 있습니다. ThinkPad를 사면 아이들 영상을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비주얼 씽킹도 공부하고, Visio와 그래픽 프로그램도 더 잘 활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iPad를 사면 새로운 AI 기능을 활용해 지금과 다른 방식으로 일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가능성은 물건을 살 때 아주 좋은 이유가 됩니다. 특히 미래의 가능성은 더 그렇습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무엇이든 상상할 수 있습니다. ‘언젠가 필요할 것이다.’ ‘나중에는 이것으로 이런 일을 할 것이다.’ 그렇게 미래의 용도를 하나씩 더하다 보면 물건을 사야 할 이유는 점점 많아집니다.
ThinkPad를 사용하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어쩌면 창고에 쌓여 있는 것은 물건이 아니라 아직 실행하지 않은 미래의 계획들인지도 모릅니다. 언젠가 읽을 책. 언젠가 사용할 장비. 취미를 위해 언젠가 준비한 물건. 모두 미래의 나에게 맡겨놓은 계획들입니다.
물건 하나가 작은 프로젝트 하나를 데리고 온다
예전에는 물건을 살 때 주로 가격을 생각했습니다. 얼마에 사는가. 중고로 다시 팔면 얼마를 받을 수 있는가. 좋은 가격에 구입했다가 비슷한 가격에 판매하면 비용이 거의 들지 않고 새로운 기기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구입한 가격보다 조금 더 받고 판매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꽤 괜찮은 취미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번에 여러 기기를 사고팔면서 가격표에 나오지 않는 비용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시간과 관심입니다.
물건을 사기 전에는 검색합니다. 제품을 비교하고 가격을 알아봅니다. 구입하면 초기 설정을 합니다. 프로그램을 설치하고 사용법을 알아봅니다. 사용하다 새로운 기능을 발견하면 다시 찾아봅니다. 그 기능을 사용하려면 또 다른 프로그램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프로그램을 설치하면 그것을 배우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사용하지 않는다고 판단해 판매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러면 끝날 것 같지만 다시 일이 시작됩니다. 제품 상태를 확인하고 사진을 찍습니다. 흠집이 발견 되면 보완을 우해 추가 부품을 구매 하기도 합니다. 중고 가격을 알아보고 판매글을 작성합니다. 판매 글을 올리면서 부터 관심은 판매 플랫폼으로 향합니다. 관심은 몇개가 들었는데 경쟁 판매자는 얼마에 올렸는지, 시간이 생길때 마다 판매 상황을 확인합니다. 판매가 늦어지면 더 많이 깍아서 손해가 늘어날까봐 불안 합니다. 문의가 오면 답변합니다. 답변하는 과정에서 내 물건에 대해 새로운 정보도 알게 됩니다. 무상 AS언제 까지 이고 사용시간은 언제 인지도 알게 됩니다. 상태를 묻고, 가격을 조정해달라고 하고, 약속을 잡습니다.거래가 끝날 때까지 관심을 계속 두어야 합니다. 그제야 물건 하나와의 관계가 끝납니다.
생각해보면 물건 하나가 작은 프로젝트 하나를 데리고 들어오는 셈입니다. 구입 가격은 다시 판매해서 어느 정도 회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물건에 사용한 시간과 관심은 돌려받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경험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여기까지 생각하면 결론은 간단해 보입니다. 사지 않으면 됩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레이저 블레이드를 구입하지 않았다면 고성능 노트북의 GPU와 열관리, 전력의 관계를 직접 경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ThinkPad를 사용하지 않았다면 오래전 기억 속에 있던 빨간 트랙포인트를 다시 만져보는 즐거움도 없었을 것이고, 새로운 그래픽 도구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iPad를 사용하지 않았다면 AI에서는 모델과 기기의 성능뿐 아니라 실제 데이터와의 연결이 중요하다는 것을 그렇게 직접적으로 생각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무엇보다 그 경험들을 이렇게 글로 남기지 못했을 것입니다.
물건은 떠나도 경험은 남습니다. 기록하면 그 경험은 생각으로 남습니다. 그래서 저는 새로운 기계를 좋아하는 마음이나 직접 경험해보고 싶은 호기심을 없애고 싶지는 않습니다. 대신 호기심을 느끼는 것과 물건을 사는 것 사이에 조금 더 거리를 두고 싶습니다. 궁금하다고 바로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알고 싶은 것과 소유하고 싶은 것도 조금 다른 일입니다.
사지 않는 사람보다 잘 끝내는 사람
이번에 세 물건을 경험하면서 저에게 맞는 방법도 조금씩 알게 되었습니다. 궁금한 물건이 있다면 직접 경험해볼 수 있습니다. 대신 무엇이 궁금해서 샀는지 기억하려고 합니다. 그 궁금증이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면 경험을 글이나 사진으로 남깁니다. 그리고 지금의 나에게 필요하지 않다면 다시 보내줍니다.
경험하고, 기록하고, 정리하고, 보내주는 것.
지금은 이것이 저에게 맞는 방식인 것 같습니다. 물론 더 좋은 방법은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처음부터 사지 않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앞으로 물건을 사고 싶을 때 몇 가지 질문을 해보려고 합니다.
이것은 지금 필요한 것인가, 미래에 필요할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인가.
이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나는 실제로 무엇을 할 것인가.
그리고 한 가지를 더 물어보려고 합니다.
이 물건의 가격은 얼마인가가 아니라, 이 물건을 위해 나는 얼마나 많은 시간과 관심을 쓰게 될 것인가.
덕후와 충동구매 사이
나는 정말 좋아하는 것을 깊이 파고드는 덕후일까. 아니면 사고 싶은 마음에 이유를 붙이며 계속 물건을 들이는 충동구매자일까. 아마 둘 중 하나만은 아닐 것 같습니다. 새로운 기계를 알아가는 과정이 즐겁고, 직접 경험해야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동시에 좋은 가격, 미래의 활용 가능성, 다시 팔 수 있다는 생각을 구매의 이유로 너무 쉽게 사용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아마 앞으로도 그 경계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다만 이제는 물건 하나를 바라볼 때 그 뒤에 따라오는 것들도 함께 보려고 합니다. 설정해야 할 것. 배워야 할 것. 관리해야 할 것. 그리고 언젠가 정리해야 할 것.
물건을 하나 산다는 것은 물건 하나만 집으로 들이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 물건과 함께 사용할 시간과 관심, 그리고 하나의 작은 프로젝트까지 들이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조금 더 천천히 사고 싶습니다. 충분히 궁금해하고, 그래도 필요하다면 경험하고, 경험했다면 기록하고, 끝낼 때가 되었다면 잘 보내주려고 합니다. 사지 않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무엇을 왜 들이는지 알고 잘 끝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덕후와 충동구매 사이에서 지금 제가 찾은 답은 그 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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