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부의 마지막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제자들에게 뜻밖의 말을 했다.“나를 떠나라. 그리고 너희 자신을 찾도록 하라.” 나는 이 말을 따라 1부를 마쳤다. 스승에게서 배웠다면 언젠가는 스승에게서도 벗어나야 한다. 니체에게서 배운 것조차 하나의 정답으로 붙들어서는 안 되고, 이제는 내가 보고 느끼고 살아낸 것으로 다시 생각해야 한다고 이해했다.

 

그런데 2부를 펼치자 조금 이상한 장면이 나온다. 제자들에게 자신을 떠나라고 했던 차라투스트라가 다시 산을 내려가려고 한다. 그는 1부의 가르침을 마친 뒤 다시 산속 동굴로 돌아가 사람들에게서 떨어져 지냈다. 자신이 뿌린 씨앗이 자라기를 기다리는 농부처럼 때를 기다렸다. 그런데 어느 날 꿈속에서 한 아이가 거울을 들고 나타난다. 거울을 들여다보니 자신의 얼굴이 아니라 악마의 험상궂은 얼굴이 비쳤다.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가르침이 위기에 처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자신이 뿌린 밀 사이에서 잡초가 자라 밀의 행세를 하고 있었다. 그의 적들은 가르침을 다른 뜻으로 바꾸어놓았고, 벗들조차 그가 준 것을 부끄러워하게 되었다.

 

이 장면을 읽다가 오래전에 했던 한 번의 강의가 떠올랐다. 2018년, 학교 후배의 부탁을 받아 경기도의 한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한 시간 정도 강의를 한 적이 있다. 주제는 무선통신 기술과 직무였다. 오랜만에 학생들 앞에 서는 것이기도 했고, 귀한 시간을 내준 만큼 무엇인가 제대로 알려주고 싶었다. 자료를 꽤 열심히 만들었다. 학생들이 무엇을 궁금해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어 기본 개념부터 차근차근 정리했다. 그러다 보니 파워포인트 자료가 50장을 넘었다. 지금 생각하면 조금 우습다. 한 시간 동안 50장이 넘는 자료라니. 아는 것을 가능하면 많이 알려주고 싶었던 것 같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상대도 알게 되면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강의를 시작했는데 예상과 달랐다. 서너 명 정도만 눈을 맞추며 듣고 있었고, 컴퓨터를 바라보는 학생도 있었고 조는 학생도 보였다. ‘내용이 재미없는 건가?’ ‘내가 방향을 잘못 잡았나?’ 강의를 하면서도 여러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나는 내 나름대로 이유를 만들었다. 학생들이 요청한 수업도 아니고 지금 당장 필요한 내용도 아니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준비해온 것이 있으니 설명을 계속했다. 그러다가 마지막 10분 정도를 남겨놓고 기술 이야기를 멈췄다. 학생들 가운데 무선통신 분야로 갈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고, 지금까지 준비한 기술 이야기가 이들에게 얼마나 필요한지도 알 수 없었다. 대신 인생 선배로서 그 나이의 나에게 누군가 이야기해주었으면 좋았을 법한 이야기를 해보기로 했다.

 

현재 자신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생각만 바꾸려고 하지 말고 행동을 바꾸고 만나는 사람을 바꿔보라고 했다. 책이나 다른 사람의 평가만 듣고 어떤 것을 결정하지 말고 가능하면 직접 경험해보라고 했다. 그리고 자신이 경험하고 생각한 것을 기록해두라고 말했다. 그런 기록이 쌓이면 언젠가는 자신의 자산이 될 것이라고도 했다.

 

말을 하고 있는데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학생들에게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나에게 하는 이야기 같았다. 강의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는 이런 생각까지 했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보다 먼저 살아본 사람은 나에게 무슨 이야기를 해주고 싶을까.’ 그래서 집에 돌아와 책장을 뒤졌다. 이전에 읽었던 인생에 관한 책들을 다시 펼쳤다. 이미 읽은 책인데 처음 읽는 것처럼 낯선 문장도 있었다.

 

당시에는 그 경험을 ‘내가 알고 있는 것을 후배에게 알려주는 일’ 정도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지금 차라투스트라의 두 번째 하산을 읽으면서 조금 다르게 보인다. 나는 그날 정말 학생들에게 필요한 것을 가르친 것일까. 아니면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학생들도 중요하게 생각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일까.

 

50장이 넘는 자료에는 학생들의 질문보다 내가 가진 지식이 더 많이 들어 있었다. 학생들이 무엇을 알고 싶어 하는지를 충분히 묻지 않았고, 내가 무엇을 알려주고 싶은지를 먼저 생각했다. 그렇다고 그 강의가 잘못됐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내가 열심히 준비했느냐보다, 내가 건넨 것이 상대에게서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말은 입을 떠나는 순간 더 이상 말한 사람의 것이 아니게 된다. 내가 좋은 뜻으로 한 말도 상대에게는 부담이 될 수 있다. 내가 충분히 설명했다고 생각한 것도 상대에게는 전혀 다른 뜻으로 남을 수 있다. 내가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 건넨 조언이 누군가에게는 그저 ‘꼰대의 말’일 수도 있다.

 

차라투스트라가 본 거울 속 악마도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자신이 악마로 변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자신이 가르친 것이 세상으로 나가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돌아온 것이다. 그는 씨를 뿌렸지만 씨앗이 무엇이 되었는지를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다시 내려간다.

 

이번 하산은 1부 처음의 하산과 조금 달라 보인다. 처음에는 너무 많이 가지고 있어서 나누어주기 위해 내려왔다면, 이번에는 자신이 나누어준 것이 어떤 모습이 되었는지를 다시 만나기 위해 내려간다. 강의자료 역시 두 번째 하산을 ‘벗과 적을 다시 찾아가는 새로운 서사의 시작’으로 설명하면서, 자족적인 호수에 머물던 차라투스트라의 사랑이 다시 벗과 적의 바다를 향해 흘러간다고 읽는다.  여기서 ‘적을 찾아간다’는 말도 흥미롭다.

 

나를 잘 이해해주는 사람만 만난다면 내 생각이 무엇인지 확인하기 어렵다. 내 말을 오해한 사람, 반대하는 사람,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인 사람을 만나야 비로소 내가 무엇을 말했고 무엇을 빠뜨렸는지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가르친다는 것은 그래서 일방향의 일이 아닌 것 같다. 나는 말하고 상대는 듣는다. 내가 알고 상대는 배운다. 이렇게 끝나는 일이 아니다. 말을 건네고, 그 말이 나에게서 떠나고, 상대에게서 전혀 다른 것이 되고, 그것을 다시 보면서 나 또한 달라지는 일이다. 

 

생각해보면 회사에서도 비슷하다. 팀장이 되어 이야기를 하고 지시를 한다. 설명했다고 생각하고, 구성원들도 충분히 이해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때로는 좋은 뜻으로 조언도 한다. 그런데 내가 설명한 것과 상대가 들은 것은 정말 같을까. 내가 ‘자율적으로 하라’고 말했는데 상대는 ‘알아서 책임지라’고 들었을 수도 있다. 내가 ‘잘되기를 바란다’며 한 조언이 상대에게는 평가나 간섭으로 들렸을 수도 있다. 

 

내가 무슨 뜻으로 말했는지만 확인해서는 알 수 없다. 상대에게 가서 물어야 한다. 그래서 차라투스트라가 다시 산을 내려가는 장면이 이제 조금 다르게 읽힌다. 가르침이 끝났기 때문에 내려가는 것이 아니다. 가르침은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내려간다. 

 

1부의 마지막에서 그는 제자들에게 자신을 떠나라고 했다. 그런데 떠난 제자들을 붙잡으러 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이 자신에게서 받은 것을 가지고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만나러 가는 것에 가까워 보인다. 그리고 그 만남 속에서 차라투스트라 자신도 다시 바뀌게 될 것이다.

 

그는 선언한다. “나는 새로운 길을 간다.” 2부의 시작을 알리는 이 문장이 마음에 남는다.  나도 오래도록 무엇인가를 배우면 먼저 제대로 이해하려고 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이해했다고 생각하면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려 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다음 과정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이해한 것을 세상에 가지고 나가보는 것. 다른 사람의 반응 속에서 그것이 내가 생각했던 것과 얼마나 다른지 보는 것.

 

그리고 필요하다면 다시 고쳐 생각하는 것. 어쩌면 배움은 산 위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책을 읽고 생각을 정리하고 혼자 글을 쓰는 시간이 산 위의 시간이라면, 다시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그 생각이 부딪치고 흔들리고 때로는 오해받는 시간도 필요하다.

 

2018년 그날, 나는 학생들에게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알려주려고 학교에 갔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알게 된 것은 오히려 다른 것이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하는 말 가운데는 아직 내가 충분히 살아내지 못한 말도 있다는 것. 그래서 가르치고 돌아오는 길에 다시 배우게 된다.

 

차라투스트라가 다시 산을 내려간 이유도 어쩌면 거기에 있지 않을까. 내가 옳다는 것을 다시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옳다고 믿었던 것이 세상 속에서 어떤 모습이 되었는지를 보기 위해서. 그리고 그 거울 앞에서 자신도 다시 변하기 위해서. 2부는 그렇게 시작된다. 산 정상에서 더 높은 진리를 찾아서가 아니라, 다시 사람들 속으로 내려가면서. 내가 건넨 말은 상대에게서 어떤 모습이 되었을까. 그리고 그 모습을 다시 만난 나는 이전과 같은 사람일 수 있을까.

 

1부

1. 니체를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삶의 기술로 『차라투스트라』 읽기

2. 신의 죽음에서 아모르파티까지 - 『차라투스트라』를 관통하는 다섯 개념

3. 니체도 처음부터 니체는 아니었다 - 낙타·사자·어린아이의 세 가지 변신

4. 바그너와 질병을 지나 ‘니체 자신’이 되기까지

5. 영원회귀의 발견과 『차라투스트라』의 탄생 - 비판하는 사자에서 창조하는 어린아이로

6. 니체는 왜 아포리즘과 시로 썼을까 -철학의 내용이 바뀌면 문체도 바뀐다

7. 『차라투스트라』는 왜 설명하지 않고 체험하게 하는가 - 파토스, 감응 그리고 니체를 읽는 법

8. 모든 사람을 위한, 그러나 그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차라투스트라』는 어떤 독자를 기다리는가

9. 왜 하필 차라투스트라인가 - 자신이 만든 가치까지 넘어서는 사람

10. 신이 죽은 뒤 인간은 무엇에 기대는가 - 차라투스트라를 읽기 위한 질문

11. 『차라투스트라』를 읽기 위한 지도 - 이제 지도를 들고 본문으로 들어간다

12. 차라투스트라의 몰락 - 무너짐에서 무엇이 시작되는가

13. 아직 도착하지 않은 소식 - 사건과 의미사이에는 시간이 있다

14. 인간은 건너가는 존재다 - 사람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15. 인간은 목적이 아니라 다리다 - 나는 무엇을 향해 건너가고 있는가

16. 최후의 인간 - 행복한 것인가 멈춘 것인가

17. 목자가 아니라 유혹자 - 차라투스트라는 누구인가

18. 누구를 넘어서는가 - 경쟁과 자기극복 사이

19. 정신의 세가지 변신 - 나는 무엇을 짊어지고 무엇을 거부하고 무엇을 만들고 있는가

20. 낙타의 시간 - 나는 왜 이것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21. 군중에서 길동무로 - 가르치는 관계에서 함께 만드는 관계로

22. 정오, 독수리와 뱀 - 용기와 지혜는 함께 갈 수 있는가

23. 사자의 시간 - 아니오 이후에 무엇이 남는가

24. 어린아이의 시간 -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

25. 시대의 중력장 - 나는 어떤 힘에 이끌려 움직이는가

26. 신 없이 살아간다는 것 - 신의 죽음 이후 누가 가치의 책임을 질 것인가

27. 신의 그림자 - 신이 사라진 자리를 우리는 무엇으로 채우는가

28. 바람직한 인간이라는 우상 - 나는 사람을 보고 있는가 내가 만든 기준을 보고 있는가

29. 분노보다 강한 웃음 - 더이상 그것이 내 삶의 주인공이 아닐때

30. 자기 삶의 리듬으로 춤춘다는 것 - 배우고 벗어나고 자기 움직임을 만드는 삶

31. 잘살기 위해 쉬는가 쉬기 위해 사는가 - 차라투스트라가 ‘잠의 덕’을 비웃은 이유

32. 삶은 ‘언젠가’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 나는 미래를 향해 가는가, 미래로 도망가능가

33. 생각하는 나, 살아가는 나 - 작은 이성과 신체의 커다란 이성

34. 욕망을 없애지 않고 변형한다는 것 - 내 안의 힘은 어떻게 나의 덕이 되는가

35. 잘못은 나의 전부인가 - 행위에 대한 책임과 존재에 대한 판결

36. 나는 하나의 사람인가 - 고정된 자아에서 계속 생성되는 나로

37. 높아질수록 깊어지는 것들 - 산비탈의 나무, 자기만의 높이늘 찾아가는 일

38. 오늘은 삶이 대기실이 아니다 - 삶을 미래로 미루는 방식

39. 자유는 스스로에게 복종할 수 있는 힘인가 - 자기 삶의 법을 만드는 사람

40. 내가 만든 것이 나를 지배할 때 - 수단과 목적이 뒤바뀌는 순간

41. 위버멘쉬는 완성된 인간이 아니다 - 더 나은 나를 넘어 계속 다른 나로

42. 내가 원하는 것은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인가 - 시대의 욕망과 나의 선택

43. 무거운 짐보다 중요한 것은 방향 - 잘 견디는 것과 잘 살아가는 것은 같은가

44. 나는 나를 살고 있는가 나의 이미지를 살고 있는가 - 타인의 시선속에서 만들어진 나

45. ‘아니오’라고 말하면 자유로운가 - 거부하는 힘과 새로운 삶을 만드는 힘 사이에서

46. 반대편에 서는 것과 넘어 서는 것은 다르다 - 반시대적 저항에서 시대적 창조로

47. 시대를 넘어서는 일은 내 안에서 시작된다 - 자기 극복에서 시대 극복으로

48. 자기 극복의 끝에서 다시 ‘놀이’를 만나다 - 잘하는 것보다 다시 재미있어지는 것

49. 자유는 미래에 오는 것이 아니다 - 오늘부터 자유를 연습하는 삶

50. 박수가 멈춘 뒤에도 나는 계속 할 수 있을까 - 인정 욕망과 자기 자신의 박수

51. 이해받지 못한다는 것을 견딜 수 있을까 - 현재의 평가가 최종 판결은 아니다

52. 세상은 비둘기 걸음으로 변한다 - 소란보다 오래 남는 편향

53. 내가 사라져도 남는 것 - 이름을 남기는 영원에서 흘러가는 영원으로

54. 욕망과 나 사이의 거리 - 욕망을 없애는 것이 자유일까

55. 나를 넘어가게 하는 친구 - 친구 안의 ‘최상의 적’

56. 무엇을 좋다고 부를 것인가 - 평가하는 것이 곧 창조하는 것이다

57. 나는 무엇을 다시 선택할 것인가 - 물려받은 가치와 나의 가치

58. 나는 왜 이웃에게 가는가 - 사랑과 필요한 사람이고 싶은 마음 사이

59. 무엇을 향한 자유인가 - 벗어난 뒤 나는 어디에 힘을 쓸 것인가

60. 나는 무엇을 품고 있는가 - 창조는 기다림 속에서도 일어난다

61. 가면 뒤에 진짜 나는 있는가 - 본질을 찾는 나에서, 만들어가는 나로

62. 상처의 마지막 의미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 살무사의 기습

63. 되갚지 않아도 될 만큼 강해진다는 것 - 복수할 힘과 복수가 필요하지 않는 힘

64. 사랑은 서로를 완성하는 일일까 - 함께 있기 때문에 더 멀리 갈 수 있는 관계

65. 새로운 내가 태어나려면 - 제때 끝낼 수 있는 것도 자기극복이다

66. 제때 산다는 것 - 나는 지금, 내가 있는 시간에 와 있는가

67. 베푸는 덕 - 내 안에는 흘러나올 것이 있는가

68. 스승을 떠나는 제자 - 니체를 따라온 나는 이제 어디로 갈 것인가

여기까지 오면서 나는 차라투스트라의 말을 꽤 오래 따라왔다. 신의 죽음에서 시작해 위버멘쉬를 만났고, 낙타와 사자와 어린아이를 지나왔으며, 덕과 몸, 전쟁과 벗, 이웃사랑과 고독, 창조와 죽음, 사랑과 베품을 생각했다. 처음에는 니체가 무엇을 말하는지 이해하려고 했다. 조금 지나서는 그 말을 내 삶에 가져와보았다. 그리고 이제 『차라투스트라』 1부의 마지막에 도착했는데, 차라투스트라는 뜻밖의 말을 한다.

“나를 떠나라. 그리고 너희 자신을 찾도록 하라.” 이상하다. 그토록 많은 것을 가르쳐놓고 마지막에는 자신을 버리라고 한다. 스승이라면 자신을 더 잘 이해하고, 더 오래 기억하고, 자기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는 제자를 원하지 않을까. 그런데 차라투스트라는 정반대의 것을 요구한다. 나를 믿지 말라. 나를 숭배하지 말라. 나를 떠나라. 어쩌면 이 말이야말로 1부 전체에서 가장 니체다운 가르침인지도 모르겠다.

 

새로운 가치를 가르친 사람이 새로운 우상이 된다면 차라투스트라는 계속 기존의 가치를 의심하라고 말했다. 남들이 좋다고 하는 것을 그대로 좋다고 하지 말고, “너는 해야 한다”는 명령에 복종하지 말며, 자기 삶의 가치를 스스로 만들어가라고 했다. 그런데 제자들이 이제 이렇게 말하기 시작하면 어떻게 될까. “차라투스트라가 그렇게 말했다.” “니체에 따르면 이것이 옳다.” 순간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신의 자리에서 신을 끌어내렸는데, 그 자리에 차라투스트라가 올라간다. 기독교의 계명을 버렸는데, 이번에는 니체의 문장이 계명이 된다. “너는 해야 한다”를 넘어가라고 가르친 사람이 새로운 “너는 해야 한다”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니체를 가장 충실하게 따르는 방법은 역설적으로 어느 순간 니체를 따르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이 생각이 재미있으면서도 조금 불편하다. 영원히 제자로 남는 것이 정말 좋은 제자일까 차라투스트라는 말한다. “영원히 제자로만 머문다면 그것은 선생에 대한 도리가 아니다.” 보통 우리는 좋은 제자를 스승의 뜻을 잘 이어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스승의 말을 정확히 기억하고, 그 가르침을 잘 설명하고, 다른 사람에게 다시 전달하는 사람. 물론 배움에는 그런 시간이 필요하다. 처음에는 따라가야 한다.이해하지 못한 것을 배우고, 개념을 익히고, 스승이 보았던 것을 스승의 눈으로 한번 볼 필요도 있다. 하지만 거기에서 멈추면 어떻게 될까. 나는 스승이 본 것을 더 정확하게 설명하는 사람이 될 수는 있지만, 내가 무엇을 보는 사람인지는 끝내 알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서 배움에는 어느 순간 이상한 전환이 필요한 것 같다. “선생은 무엇을 말했는가?” 에서 “그 말을 지나 나는 무엇을 보게 되었는가?” 로 넘어가는 순간이다.

 

이 글들을 쓰면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처음 니체에 관한 글을 쓸 때는 내용을 놓치지 않으려고 했다. 니체가 무엇을 말했는지, 어떤 구절이 어떤 의미인지, 앞뒤의 개념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정리하려 했다. 그런데 글이 쌓이면서 조금씩 질문이 달라졌다. 인정받으려는 마음을 생각했고, 물건과 나의 관계를 생각했고, 책을 읽고 글을 남기는 일이 나를 어떻게 바꾸는지 생각했다. 카메라를 들고 전철 안을 다르게 보고, 사람이 지나오기를 기다리고, 이전에는 그냥 흘려보냈을 시간을 조금 더 오래 바라보게 된 것도 글 속으로 들어왔다.

 

니체의 문장을 정리하는 것에서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니체가 내 일상을 다시 보게 하는 질문이 되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걸음 더 가야 하는 것 아닐까. 계속 “니체라면 어떻게 생각했을까?” 를 묻는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에는 “나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를 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니체를 읽으며 자기 자신을 찾으려고 했지만, 결국 니체라는 새로운 권위 뒤에 숨어버릴 수도 있다. “나를 부인하고 나서야 다시 돌아오겠다” 차라투스트라의 말 가운데 특히 마음에 남는 부분이 있다.

 

제자들이 자신을 모두 부인하고 난 뒤에야 다시 그들에게 돌아오겠다고 한다. 처음에는 왜 굳이 자신을 부인하라고 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알 것 같다. 스승의 말을 한번 자기 것으로 만들려면, 그 말을 그대로 보존해서는 안 된다. 의심해봐야 한다. 내 경험에 대입해봐야 한다. 틀렸다고 느끼면 밀어내기도 해야 한다. 어떤 부분은 버리고, 어떤 부분은 다른 의미로 바꾸어야 한다.

 

그 과정이 끝난 뒤 다시 니체를 읽으면, 처음 읽었던 니체와는 다른 니체가 보일 것이다. 책은 같은데 읽는 사람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부인한 뒤 다시 돌아온다’는 것은 관계의 단절이 아니라, 스승과 제자가 다른 관계로 다시 만나는 것일 수 있다. 제자가 아니라 벗으로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제자들이 언젠가 벗이 되기를 바란다.

 

이것은 앞에서 읽었던 「벗」과 연결된다. 벗은 나를 그대로 인정해주는 사람만은 아니었다. 나에게 더 높은 가능성을 보여주는 존재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벗은 주인과 종의 관계가 아니다. 서로 다른 자기 길을 가진 사람들이 만나는 관계다. 그렇다면 스승이 제자를 벗으로 만든다는 것은 제자를 자기 아래에 오래 붙들어두는 것이 아니라, 자기와 대등하게 서게 만드는 것 아닐까. 좋은 스승의 성공은 제자가 얼마나 오래 자신을 따르는가로 측정되지 않는다. 오히려 어느 순간 “이제 제 생각은 다릅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는가로 판단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순간 스승은 한 사람의 추종자를 잃지만, 한 사람의 벗을 얻는다.

 

그리고 ‘희망의 자녀’가 된다. 차라투스트라는 제자들을 ‘희망의 자녀’라고도 부른다. 이 표현은 「아이와 혼인」에서 생각했던 아이를 떠올리게 한다. 아이는 부모를 복제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부모보다 더 멀리 가야 하는 존재였다. 그렇다면 좋은 제자와 좋은 아이는 비슷하다. 둘 다 나를 닮는 사람이 아니라 나를 넘어가는 사람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1부에서 서로 떨어져 있던 여러 이야기가 한곳에서 만난다. 벗은 나를 넘어가게 한다. 혼인은 자신을 넘어서는 것을 낳으려 한다. 자유로운 죽음은 다음 것을 위해 물러나는 법을 가르친다. 베푸는 덕은 자기 존재가 흘러넘치는 방식을 말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이 한 말을 자기 자신에게 적용한다. 자신의 제자들을 붙잡지 않는다. 자신이 없어도 갈 수 있도록 놓아준다. 어쩌면 이것이 차라투스트라 자신의 베품 가운데 가장 큰 베품인지도 모르겠다. 베품의 마지막은 독립시키는 것이 아닐까.

 

이전 글에서 나는 존재 자체가 선물이 될 수 있는지 생각했다. 자기 삶을 충만하게 살아, 그 삶을 본 사람이 자신도 무언가를 시작하고 싶어지게 만드는 것. 그런데 「베푸는 덕」의 마지막까지 오니 베품에는 한 단계가 더 있는 것 같다. 잘 주는 것만으로는 끝나지 않는다.  받은 사람이 더 이상 나에게서 받을 필요가 없게 만드는 것.

 

이것은 생각보다 어렵다. 누군가가 나를 필요로 하면 내가 중요한 사람처럼 느껴진다. 내 조언을 구하고, 내 판단을 기다리고, 내가 알려준 방식대로 하는 사람을 보면 내 역할이 분명해진다. 그래서 도움을 준다는 이름으로 상대가 계속 나를 필요로 하게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정말 잘 베풀었다면 어느 순간 이런 말이 가능해야 할 것이다. 이제는 네가 알아서 해도 된다. 그리고 더 나아가, 내 방식대로 하지 않아도 된다. 이것이 부모에게도, 스승에게도, 리더에게도 가장 어려운 베품 아닐까.

 

몰락한다는 것은 실패하는 것이 아니었다. 1부를 처음 읽을 때부터 ‘몰락’이라는 말이 계속 나왔다. 처음에는 아래로 떨어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실패와 소멸의 이미지였다. 하지만 여기까지 오면서 의미가 달라졌다. 몰락은 다음 존재를 위해 자기 자리를 내어주는 것일 수 있다. 태양이 저녁에 지기 때문에 새로운 아침이 온다. 부모가 뒤로 물러나야 아이가 자기 삶을 살 수 있다. 스승이 우상에서 내려와야 제자가 자기 생각을 시작할 수 있다. 과거의 내가 죽어야 새로운 내가 태어난다. 그렇다면 몰락은 패배가 아니다. 오히려 생성의 한 부분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이 목적지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자신 역시 하나의 다리다. 누군가가 자신을 건너 더 멀리 가야 한다. 그래서 몰락하는 자는 자신이 동시에 건너가는 자임을 깨닫고 스스로를 축복한다.

 

위대한 정오는 무엇일까  1부 마지막에는 ‘위대한 정오’라는 이미지가 등장한다. 정오는 하루의 끝이 아니다. 아침과 저녁 사이의 한가운데다. 니체에게 인간 역시 그런 중간에 있다. 짐승에서 위버멘쉬로 가는 길 위에 있다. 나는 이 표현이 이제 조금 다르게 들린다. 위대한 정오는 어느 날 완성된 위버멘쉬가 등장하는 역사적 시간이 아닐지도 모른다. 적어도 내 삶에서는, 지금의 내가 최종적인 내가 아니라는 사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순간 이라고 읽고 싶다. 나는 완성품이 아니다. 지금 가진 생각도, 지금의 성공도, 지금의 역할도, 지금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도 언젠가 넘어가야 할 수 있다. 그 사실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다음 아침의 가능성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때가 나에게 작은 ‘정오’가 되는 것은 아닐까.

 

“모든 신은 죽었다” 그리고 1부는 다시 큰 문장으로 돌아간다. “모든 신은 죽었다. 이제 위버멘쉬가 등장하기를 우리는 바란다.”

이 말을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신의 죽음’에 시선을 빼앗겼다. 기독교 신의 죽음, 절대가치의 붕괴, 니힐리즘의 문제. 하지만 1부를 끝까지 읽고 나니 뒤쪽이 더 중요하게 느껴진다. 신이 죽었다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는다. 낡은 가치를 무너뜨리는 것은 사자의 일이다.

그 다음에는 어린아이가 와야 한다. 새로운 것을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위버멘쉬 자체를 새로운 신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니체가 위버멘쉬가 되라고 했다.”

라는 순간 위버멘쉬는 또 하나의 ‘너는 해야 한다’가 된다. 내가 이해한 위버멘쉬는 특정한 인간형의 이름이라기보다, 계속 지금의 자기를 넘어가려는 방향에 더 가깝다. 그 방향마저 고정된 정답으로 만들지 않는 것. 이것이 1부 마지막에서 차라투스트라가 자기 자신까지 버리라고 하는 이유와 연결되는 것 같다.

 

결국 나는 무엇을 배웠을까  돌아보니 기억에 남는 것은 니체의 정답보다 니체가 던진 질문들이다. 네가 원하는 것은 정말 네가 원하는 것인가. 너의 사랑은 사랑인가, 도피인가. 너의 베품은 충만함에서 나오는가,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서 나오는가. 너의 분노는 정의인가, 원한인가.

너는 무엇을 새롭게 만들고 있는가. 무엇을 이제 놓아주어야 하는가. 그리고 마지막에는 이런 질문까지 남는다. 너는 왜 아직도 나에게 묻고 있는가. 이 질문 앞에서는 조금 웃음이 난다. 니체를 읽으면서 계속 니체에게 답을 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니체에게서 무엇을 가져갈 것인가 그렇다고 이제 니체를 읽지 말자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다시 읽을 것이다. 하지만 조금 다른 방식으로 읽고 싶다. 정답을 찾기 위해 읽기보다, 내 생각을 흔드는 사람으로 만나고 싶다. 동의할 때도 있고, 불편할 때도 있고, 틀렸다고 느낄 때도 있으며, 내 경험과 전혀 다르게 느껴질 때도 있을 것이다. 그 모든 순간이 가능해야 비로소 니체는 우상이 아니라 벗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벗은 언제나 같은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때로는 나와 싸우고, 때로는 멀어졌다가, 다시 만났을 때 이전과 다른 말을 나누게 되는 사람이다. 1부를 떠나며 처음에는 차라투스트라를 따라 산에서 내려왔다. 그가 무엇을 보여주는지 궁금했다. 1부 마지막 글을  쓰고 있는 지금, 그는 이제 돌아가라고 말한다. 나를 따라오지 말고, 내가 보여준 길도 그대로 걷지 말고, 네 길을 찾아가라고. 아마 이것이 1부에서 차라투스트라가 내게 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일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 돌아갈 자유. 그래서 1부를 마치며 어떤 결론을 적기보다 하나의 질문을 남기는 편이 좋을 것 같다. 나는 앞으로도 니체를 읽을 것이다. 하지만 니체가 무엇이라고 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만 읽지는 않을 것이다. 그의 문장을 지나, 내가 보고, 내가 경험하고, 내가 생각한 것을 조금씩 만들어가고 싶다. 언젠가는 니체의 문장이 없어도 내가 묻고 싶은 질문을 스스로 만들 수 있기를 바란다. 그때 나는 니체에게서 멀어진 것일까. 어쩌면 그 반대일 것이다.

 

차라투스트라가 원하는 제자는 끝까지 그 뒤를 걷는 사람이 아니라, 어느 순간 다른 길로 사라지는 사람일 테니까. 그러므로 1부의 마지막에서 나는 차라투스트라에게 이렇게 답하고 싶다. 이제 당신의 말을 외우는 대신, 당신이 내게 가르쳐준 방식으로 당신에게도 질문하겠습니다.

그리고 나에게도 묻는다. 니체를 따라 여기까지 온 나는, 이제 어디로 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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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글에서  나는 ‘제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했다. 과거에 붙잡히거나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미리 사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 삶이 요구하는 시간을 알아차리는 것. 그렇게 자기 삶에 조금 더 충실해지는 이야기를 쓰고 나니, 다시 타인의 문제가 찾아온다.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게 산다는 것은 결국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가는 것 아닐까. 나를 먼저 생각하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고, 내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데 힘을 쓴다면, 그것은 이기적인 삶이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차라투스트라』 1부 마지막 장인 「베푸는 덕」에서 니체는 뜻밖에도 이기심을 두 종류로 나눈다. 하나는 병든 이기심이고, 다른 하나는 베푸는 이기심이다. 처음에는 이 말 자체가 모순처럼 들렸다. 이기적인데 어떻게 베풀 수 있을까.

 

금은 무엇을 베풀고 있는가

 

차라투스트라는 금을 최고의 덕의 상징으로 이야기한다. 자료에서 금이 특별한 용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옷은 입고, 음식은 먹고, 집은 거주하는 데 쓴다.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가 비교적 분명하다. 하지만 금은 그런 쓸모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희귀하고, 빛나고, 그 자체로 가치를 상징한다. 강의에서는 이를 이렇게 표현했다. 금은 자기 자신을 베푼다. 나는 처음에는 이 표현이 추상적으로 느껴졌다. 도대체 존재 자체를 베푼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하지만 태양을 떠올리면 조금 이해된다. 태양은 누군가를 돕기 위해 빛나는 것이 아니다. 꽃에게 도움을 주겠다고 결심해서 빛을 비추는 것도 아니다. 그저 태양이기 때문에 빛난다. 그런데 그 빛 때문에 꽃이 피고 생명이 자란다. 그렇다면 니체가 말하는 가장 높은 베품은 ‘내가 너를 위해 무엇을 해주겠다’는 행위 이전에, 내가 충분히 나 자신이 되는 것 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사회봉사나 기부가 낮은 것일까 여기서 조심할 부분이 있다. 자료에서는 용도를 가진 베품과 존재 자체의 베품을 대비하면서 사회봉사나 불우이웃돕기를 앞쪽에 놓았다.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면 “기부나 봉사는 낮은 수준의 베품이고, 자기답게 사는 것이 더 고귀하다.”

는 이상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나는 그렇게 읽고 싶지는 않다. 누군가에게 필요한 것을 주고, 어려운 사람을 돕고, 사회적인 책임을 나누는 것은 그 자체로 중요한 일이다. 니체가 묻는 것은 행위의 종류보다 그 행위가 어디에서 나오고 있는가에 더 가까운 것 같다. 내가 인정받고 싶어서 베푸는가. 좋은 사람이라는 자기상을 유지하기 위해 베푸는가. 죄책감을 덜기 위해 베푸는가. 아니면 내게 충분한 것이 있어서 자연스럽게 나누는가. 같은 기부라도 힘의 상태는 다를 수 있다. 그러므로 문제는 기부인가 존재인가가 아니라, 결핍에서 주는가, 충만함에서 주는가라고 생각한다.

 

병든 이기심은 무엇을 가져와도 부족하다

차라투스트라는 또 다른 이기심을 이야기한다. 병든 이기심이다. 이 이기심은 끊임없이 주변을 살핀다. 누가 더 가지고 있는지, 무엇을 빼앗을 수 있는지, 내게 부족한 것을 어디에서 채울 수 있는지 찾는다. 무언가를 얻으면 잠시 만족하지만 곧 다시 부족해진다. 그래서 계속 가져온다. 이 모습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이기적인 사람과 비슷하다. 그런데 니체의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많이 가지느냐가 아닌 것 같다. 아무리 가져도 자기 안에서 무엇인가 만들어지지 않는 상태. 이것이 병든 이기심 아닐까.

 

책을 많이 가지고 있지만 읽지 않고, 사진 장비를 계속 사지만 무엇을 보고 싶은지는 알지 못하고, 정보를 계속 모으지만 자기 생각으로 만들어내지 못하고, 사람들의 인정은 많이 받지만 그것 없이는 자기 가치를 확인할 수 없는 상태. 계속 밖에서 가져오는데 안에서는 아무것도 생성되지 않는다. 그러니 더 필요하다. 부족해서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가져온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없기 때문에 계속 부족한 것인지도 모른다.

 

베푸는 이기심은 먼저 많이 받아들인다

 

그런데 ‘베푸는 이기심’ 역시 세상에서 많은 것을 가져온다. 차라투스트라는 오히려 모든 것이 자기 안으로 흘러들어오기를 원한다고 말한다.

처음에는 이것도 탐욕처럼 보인다.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자기 안으로 들어온 것이 그대로 쌓여 있지 않는다. 변형되어 다시 밖으로 흘러나간다. 강의에서 이 구조를 설명하며 예술가를 예로 들었다. 예술가는 세상으로부터 끊임없이 가져온다. 빛을 보고, 사람을 보고, 거리의 소리를 듣고, 누군가의 표정을 기억하고, 자기의 슬픔과 기쁨까지 재료로 삼는다. 어찌 보면 상당히 탐욕스럽다. 모든 것이 작품의 재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그대로 소유하지 않는다. 자기 안을 통과시켜 사진과 음악과 문장과 그림으로 다시 세상에 돌려준다. 그렇다면 베푸는 이기심의 구조는 이런 것 아닐까. 받아들인다. 내 안에서 변형한다. 새로운 것을 만든다. 다시 내놓는다. 이 순환이 계속된다.

 

요즘 사진을 찍는 일도 조금 그렇게 느껴진다

 

최근 카메라를 들고 다니면서 이전보다 주변을 더 오래 보게 되었다. 전철 안의 유리, 광고판 앞을 지나가는 사람, 시장 안에서 물건을 건네고 받는 손, 아침 빛이 건물에 닿는 모습. 이전에도 모두 그곳에 있었다. 내가 만든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세상이 보여주는 것을 받아들였을 뿐이다. 그런데 카메라를 들고 보면 그것들이 내 안으로 조금 다르게 들어온다. 어디에 설 것인지, 얼마나 기다릴 것인지, 무엇을 프레임 안에 두고 무엇을 버릴 것인지 결정한다. 그리고 셔터를 누른다. 결과물은 현실 그대로도 아니고, 완전히 내가 만든 것도 아니다. 세상이 내게 들어와 나를 한번 통과한 뒤 다시 밖으로 나온 것에 가깝다.

 

글도 비슷하다. 니체가 내게 들어오고, 강의가 들어오고, 내 경험이 들어온다. 나는 그것들을 그대로 옮기지 않는다. 며칠 동안 생각하고, 내 삶과 부딪쳐보고, 이해되지 않는 부분을 붙들어본 뒤 문장으로 내놓는다. 그렇다면 읽고 사진을 찍고 글을 쓰는 것도 일종의 베푸는 이기심일 수 있을까. 세상을 많이 받아들이되, 그것을 그대로 움켜쥐지 않고, 나를 통과시켜 다시 내놓는 것. 그래서 ‘나를 풍요롭게 하는 일’이 꼭 이기적인 것만은 아니다 예전에는 자기 자신을 위해 시간과 돈을 사용하는 일에 약간의 변명이 필요할 때가 있었다.

 

책을 사고, 사진을 찍고, 혼자 걷고, 글을 쓰는 시간. 직접적으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일은 아니다. 그래서 생산적이지 않거나 자기만족적인 일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니체의 베푸는 덕을 따라가면 질문이 조금 달라진다. 그 시간이 나를 어떻게 만들고 있는가. 내가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생각하고, 조금 더 풍부한 사람이 되고 있다면, 그 변화가 정말 나에게서만 끝날까.

 

내가 사람을 대하는 방식에 나타날 수도 있고, 내가 하는 일의 판단에 나타날 수도 있으며, 내가 쓰는 글과 찍는 사진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전달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나 자신을 풍요롭게 하는 것과 타인에게 베푸는 것은 반드시 반대가 아니다. 오히려 제대로 베풀기 위해서는 먼저 내 안에 흘러나올 것이 있어야 한다.

 

빈 우물에서 계속 물을 퍼낼 수는 없다 이렇게 생각하니 앞에서 살펴본 베품의 문제도 다시 보인다. 누군가를 계속 돕고, 책임지고, 가르치고, 돌보면서 정작 자기 자신은 계속 메말라간다면 어떻게 될까. 처음에는 좋은 마음으로 시작했어도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이 생길 수 있다. 왜 나만 해야 하지. 왜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 왜 저 사람은 내가 해준 것을 모를까. 그리고 베품에서 원망이 태어난다.

 

앞서 「밤의 노래」에서 차라투스트라 자신도 이 문제를 겪었다. 계속 주기만 하던 그는 어느 순간 허기를 느끼고, 자신이 준 것을 다시 빼앗고 싶어 한다. 그렇다면 문제는 베풀지 않은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고갈되는데도 계속 베푸는 사람으로 남으려 한 것인지도 모른다. 빈 우물에서 계속 물을 퍼낼 수는 없다. 먼저 다시 채워져야 한다.

 

힘에의 의지는 지배하는 힘만을 뜻할까

 

자료에서는 이 부분을 힘에의 의지와 연결했다. 힘이라고 하면 나는 먼저 상대를 움직이는 능력을 떠올린다. 명령하고, 이기고, 자기 뜻대로 만드는 것. 하지만 지금까지 니체를 따라오면서 힘의 모습은 점점 다르게 느껴졌다. 살무사의 독을 다른 의미로 바꾸는 힘. 복수하지 않아도 될 만큼 견디는 힘. 옛 자신을 제때 끝낼 수 있는 힘. 그리고 이번에는 세계로부터 많은 것을 받아들여 자기 안에서 새로운 것으로 바꿀 수 있는 힘. 이런 힘이라면 ‘힘에의 의지’를 단순히 타인을 지배하려는 욕망으로 읽기 어렵다.

 

오히려 내가 얼마나 많은 세계를 받아들일 수 있으며, 그것 때문에 무너지지 않고, 그것을 얼마나 풍요로운 형태로 다시 만들어낼 수 있는가의 문제처럼 보인다. 강한 사람은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많이 받아들여도 자기 것을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의사여, 너 자신을 돌보라” 「베푸는 덕」에서 내가 특히 마음에 두고 싶은 말이 있다. “의사여, 너 자신을 돌보라.” 처음에는 자기 관리에 관한 말처럼 들린다. 하지만 이어지는 뜻은 더 흥미롭다. 환자에게 가장 좋은 도움은 자기 자신을 치유한 사람을 직접 보게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앞에서 본 ‘계몽가’와 ‘유혹자’의 차이를 다시 떠올리게 한다. “너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 라고 말하는 대신, 먼저 내가 내 삶을 조금 더 건강하게 살아보는 것. 백 번 충고하기보다, 저렇게 사는 방법도 있구나 하고 상대가 직접 보게 하는 것. 그렇게 생각하면 베품이 달라진다. 내가 상대를 직접 변화시키려 하지 않아도 된다. 내 삶을 건강하게 만드는 일 자체가 누군가에게 하나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일이 될 수 있다.

 

존재 자체가 선물이라는 말

 

이제 ‘존재 자체로서 베푼다’는 말을 처음보다 조금은 이해할 것 같다. 대단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누구에게나 감동을 주는 존재가 되라는 뜻도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삶을 자기 방식으로 충실하게 살아내는 것. 자기에게 들어온 것을 자기답게 변형하고, 그 결과를 자연스럽게 밖으로 흘려보내는 것.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때때로 나도 무언가를 해보고 싶어진다.

 

책을 많이 읽으라고 말하지 않았는데 책을 읽고 싶게 만드는 사람. 사진을 찍으라고 권하지 않았는데 주변을 한번 자세히 보고 싶게 만드는 사람. 삶을 바꾸라고 설교하지 않았는데 자신의 삶을 조금 달리 살아보고 싶게 만드는 사람. 그렇다면 존재가 선물이 된다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닐까. 나를 따르라고 요구하지 않으면서도, 상대 안에 무엇인가 시작되게 하는 것.

 

나는 무엇을 쌓고 있는가

 

결국 질문은 다시 나에게 돌아온다. 나는 계속 많은 것을 받아들이고 있다. 책을 사고, 글을 읽고, 사진을 찍고, 사람들과 만나고, 새로운 경험을 한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내 안에서 무엇이 되고 있을까. 단순히 가지고 있는 것의 목록만 길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책은 책장에, 사진은 저장장치에, 경험은 기억에 쌓여 있기만 한다면, 나는 많이 가지고 있지만 여전히 가난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이 모았느냐가 아니라 그것들이 나를 통과하면서 무엇으로 변했느냐일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가 다시 밖으로 흘러가고 있는가.

 

이기심을 다시 생각한다. 그래서 이제 이기심이라는 말을 조금 다르게 생각해보고 싶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자기 시간을 지키고, 좋아하는 것을 배우고, 자기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런 시간이 충분해야 타인에게도 줄 것이 생긴다. 문제는 모든 것을 자기에게로 끌어오는 데 있지 않다. 끌어온 것이 자기에게서 끝나는가, 다시 흘러나가는가. 병든 이기심은 계속 받지만 더 가난해진다. 베푸는 이기심은 많이 받을수록 더 많이 만들어내고, 그만큼 더 많이 내놓을 수 있다. 그렇다면 건강한 이기심은 “나만을 위해 산다.” 는 뜻이 아니라, “먼저 내가 충분히 살아서, 내 삶에서 넘쳐나는 것이 생기게 한다.” 는 뜻에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

 

앞선 글들에서 나는 자꾸 나를 넘어서는 법을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조금 다른 질문을 남기고 싶다. 나를 넘어가기 전에, 나는 먼저 충분히 나 자신이 되어 있는가. 내 안에는 흘러나올 것이 있는가. 그리고 내가 세상에서 받아들인 것들은 지금 무엇으로 바뀌어 다시 세상으로 나가고 있는가. 어쩌면 니체가 말한 베푸는 덕은 희생의 기술이 아니라, 자기 삶을 너무 풍요롭게 만들어 결국 그것이 자기 안에만 머물 수 없게 하는 기술인지도 모르겠다.(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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