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 세 가지 변신」에서 니체가 가장 먼저 등장시키는 동물은 낙타다. 낙타는 무거운 짐을 짊어진다. 그리고 더 무거운 것이 무엇인지 묻는다. “무엇이 가장 무거운가.” 그것을 자신에게 지워달라고 한다. 처음 읽을 때는 조금 이상했다. 왜 니체는 새로운 인간을 이야기하면서 시작부터 무거운 짐을 지는 낙타를 등장시켰을까. 그냥 짐을 내려놓으면 되는 것 아닌가.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낙타는 단순히 나약한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강하다. 무거운 것을 견딜 수 있고, 배울 수 있고, 훈련할 수 있고, 오랫동안 반복할 수 있다. 그래서 낙타의 문제는 힘이 없다는 데 있지 않다.

 

그 힘을 누구의 가치에 사용하고 있는가에 있다. 낙타는 약해서 복종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흔히 복종하는 사람을 약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실은 꼭 그렇지 않다. 오히려 성실한 사람, 책임감 있는 사람, 참을성이 강한 사람이 더 많은 짐을 짊어진다. 해야 할 일을 잘하고,

맡은 역할을 수행하며, 주변의 기대에도 잘 부응한다. 사회는 이런 사람을 좋은 사람이라고 평가한다.그런데 바로 여기서 질문이 생긴다. 나는 잘하고 있는가보다, 무엇을 잘하고 있는가. 그리고 더 어려운 질문. 그것은 정말 내가 원하는 일인가. 낙타는 많은 것을 해낼 수 있다. 하지만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스스로 결정하지 않는다. 무거운 짐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과, 그 짐을 선택하는 능력은 다른 것 같다. 용은 명령하지 않아도 명령한다 사막에서 낙타는 사자가 되고, 사자는 거대한 용을 만난다.

 

용의 이름은 “너는 마땅히 해야 한다.” 이다. 나는 이 용이 흥미롭다. 그는 항상 누군가의 입을 빌려 명령하는 것이 아니다. 부모가 말하지 않아도, 상사가 말하지 않아도, 사회가 직접 강요하지 않아도 이미 내 안에서 말한다. 이 나이라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 좋은 직장이라면 이 정도여야 한다. 부모라면 이렇게 해야 한다. 성공한 사람이라면 이런 집과 이런 자산이 있어야 한다. 사진이라면 이런 사진이 좋은 사진이다.

글이라면 이런 방식으로 써야 한다. 누가 강요했는지 찾기 어렵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당연하다. 이런 것이 용의 힘 아닐까. 명령자가 보이지 않는데도 우리는 명령을 따른다.

 

가장 강한 가치는 질문하지 않는 가치다

억압적인 규칙은 오히려 알아차리기 쉽다. 싫으면 반항할 수 있다. 하지만 너무 자연스러운 가치는 알아차리기 어렵다. “원래 그런 거지.” 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장 강한 용은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지 않을 것 같다. 상식의 얼굴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더 크다. 좋은 삶, 정상적인 삶, 안정적인 삶, 성공한 삶. 이 말들은 모두 필요하다. 문제는 하나의 삶의 방식이 ‘가능한 삶 가운데 하나’에서 ‘반드시 살아야 하는 삶’ 으로 바뀔 때다. 그 순간 선택은 의무가 된다.

 

우리는 언제부터 그렇게 살고 싶어 했을까

이 질문을 내 삶에 가져오면 조금 불편해진다.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선택하며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내가 원하는 것들을 하나씩 들여다보면, 그 욕망이 언제 시작됐는지 잘 모를 때가 있다. 좋은 직장, 안정적인 수입, 집, 사회적 인정,  더 나은 장비, 더 좋은 결과물.

 

이것들은 정말 내가 처음부터 원했던 것일까. 아니면 사람들이 원하기 때문에 나도 원하게 된 것일까. 그렇다고 이런 욕망들이 가짜라는 뜻은 아니다.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이상 다른 사람의 영향을 받지 않는 순수한 욕망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질문을 조금 바꾸는 편이 낫겠다. 이 욕망은 어디에서 왔든, 지금도 내가 원하는가. 이 질문은 내가 주어진 욕망을 그대로 살아갈 것인지, 다시 선택할 것인지를 묻게 한다.

 

시대의 중력장

‘시대의 가치’를 중력장에 비유한 표현이 기억에 남는다. 중력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언제나 작동한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완전히 자유로운 공간에서 선택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돈, 성공, 안정, 인정, 효율 같은 가치의 중력장 안에서 움직인다. 중력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중력이 없으면 우리는 서 있을 수도 없다. 문제는 그것을 자연법칙처럼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회적 중력은 물리법칙과 다르다. 바뀔 수 있고, 다르게 살 수도 있다. 그런데 오랫동안 그 안에 있으면 그것을 자연스럽다고 느낀다.

 

그래서 니체를 읽으며 중요한 것은 중력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보다 먼저, 내가 어떤 중력장 안에 있는지를 알아차리는 것 인지도 모르겠다.

다른 애벌레들이 올라가고 있으니까 『꽃들에게 희망을』의 줄무늬 애벌레가 떠오른다. 수많은 애벌레들이 하나의 기둥을 이루며 위로 올라간다. 꼭대기에 무엇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모두가 올라가고 있으니 틀림없이 좋은 것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다시 올라간다. 이 장면이 불편한 이유는 너무 익숙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향해 계속 올라간다. 더 좋은 학교, 더 좋은 직장, 더 높은 위치, 더 많은 자산, 더 나은 평가. 하지만 어느 순간 질문할 필요가 있다. 저 꼭대기에 무엇이 있는가. 그리고 더 중요한 질문. 나는 정말 저곳에 가고 싶은가. 남들이 모두 올라가고 있다는 사실은 내가 올라가야 할 이유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그것을 충분한 이유로 받아들인다.

 

‘해야 한다’와 책임은 어떻게 다른가

그렇다고 모든 ‘해야 한다’를 버릴 수는 없다. 여기에서 나는 니체를 읽으며 또 하나의 어려움을 느낀다. 사회에는 책임이 있다. 가족에 대한 책임, 일에 대한 책임,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 책임. 내가 하기 싫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의무를 거부한다면 그것은 자유라기보다 무책임에 가까울 수 있다. 그래서 ‘너는 해야 한다’를 모두 나쁜 것으로 이해하고 싶지는 않다. 오히려 구분해야 할 것 같다. 내가 선택하고 감당하는 책임인가. 아니면 질문하지 않은 채 짊어진 의무인가. 둘은 겉으로 보면 같은 행동일 수도 있다. 하지만 힘의 방향은 다르다. 스스로 선택한 책임은 내 삶의 일부가 될 수 있지만, 이유도 모른 채 지고 있는 의무는 언젠가 나를 짓누르는 짐이 될 수 있다.

 

낙타의 시간은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낙타를 부정적으로만 보고 싶지 않다. 새로운 분야를 배우려면 먼저 낙타가 되어야 한다. 책을 읽고, 기본을 배우고, 반복하고, 다른 사람의 생각을 충분히 짊어져야 한다. 사진도 그렇고 글쓰기도 그렇다. 좋은 사진을 충분히 보지 않고 자기 스타일을 말하기 어렵다. 다른 사람의 글을 읽지 않고 자기 문체를 만든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지금 니체를 읽는 과정도 비슷하다. 니체의 문장을 읽고, 자료를 참조하고, 여러 해석을 따라간다. 이것도 일종의 낙타의 시간일 것이다. 문제는 낙타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낙타로 끝나는 것이다.

 

스승의 말을 잘 이해하는 것과 내 생각을 갖는 것

공부를 하다 보면 묘한 순간이 온다.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개념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 즐겁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책에서는  이렇게 설명했다.” 라는 말만 남을 수도 있다. 그러면 많이 배웠지만 내 질문은 사라진다. 용은 이런 모습으로도 등장할 수 있다. 존경하는 스승, 좋은 책, 정교한 해석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더 이상 질문할 수 없는 최종 답이 될 때다.

 

그래서 공부의 목적도 결국 정답을 더 많이 갖는 것보다, 내 질문을 만들 수 있게 되는 것 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짊어진 것들을 한번 내려놓아 본다면 낙타는 짐을 잘 나른다. 하지만 어떤 짐을 너무 오래 지고 있으면 그것이 자기 몸의 일부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래서 가끔은 상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것을 내려놓으면 어떻게 될까. 직함이 없다면. 남의 평가가 없다면. 돈이라는 기준이 조금 약해진다면. 좋은 사진에 대한 기존 기준을 잠시 잊는다면. 내가 오랫동안 지켜온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는 생각까지 내려놓는다면. 무엇이 남을까. 불안할 수도 있다.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 같을 수도 있다. 어쩌면 그것이 사막일 것이다. 하지만 니체에게 사막은 끝이 아니다.그곳에서 비로소 사자가 등장한다.

 

나에게 남는 질문

이번 장을 읽으면서 가장 오래 남는 질문은 단순하다. 나는 왜 이것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누가 내게 그렇게 말했는가. 언제부터 그렇게 믿었는가. 그 이유는 아직도 유효한가. 그리고 더 어려운 질문. 아무도 나에게 그것을 요구하지 않는다면, 그래도 나는 그것을 할 것인가. 그렇다고 모든 짐을 당장 버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어떤 짐은 내가 사랑하기 때문에 계속 질 수도 있다. 어떤 책임은 오히려 내가 선택했기 때문에 더 무겁게 감당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짐의 무게가 아니라,그 짐과 내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인지도 모른다. 낙타는 무거운 짐을 진다. 하지만 언젠가는 자신이 무엇을 짊어지고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 그래야 다음 질문을 할 수 있다. 나는 계속 이 짐을 지고 싶은가. 그리고 그 질문을 할 수 있을 때, 멀리서 사자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는 것 같다. “나는 하고자 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긴 머리말이 끝났다. 차라투스트라는 산에서 내려왔고, 사람들에게 위버멘쉬를 가르치려 했다. 하지만 군중은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줄타는 광대는 추락했고, 차라투스트라는 그의 시신을 짊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사람에게 말하는 대신 함께 창조할 길동무를 찾기로 했다. 머리말이 차라투스트라가 앞으로 걸어갈 길을 보여주는 서사의 씨줄이었다면, 이제 「정신의 세 가지 변신에 대하여」는 그 길을 어떻게 걸어갈 것인지 보여주는 철학의 날줄이다.

 

니체는 정신이 세 번 변한다고 말한다. 낙타가 되고, 낙타가 사자가 되고, 마침내 사자가 어린아이가 된다. 처음 읽었을 때는 이것이 인간이 성장하는 세 단계처럼 보였다. 하지만 계속 읽다 보니 조금 다르게 느껴진다. 낙타와 사자와 아이는 서로 다른 세 종류의 사람이 아니라, 내 안에서 계속 바뀌는 세 가지 힘의 상태에 가까운 것은 아닐까.

 

낙타 — 나는 무엇을 짊어지고 있는가

낙타는 무거운 짐을 진다. 그리고 더 무거운 것이 무엇인지 묻는다. 자신에게 그것을 지워달라고 한다. 처음에는 이것이 단순한 복종처럼 보였다. 하지만 낙타는 약한 동물이 아니다. 무거운 짐을 감당할 힘이 있기 때문에 짐을 진다. 배우고, 참고, 훈련하고, 오랫동안 반복한다. 그런 의미에서 낙타의 정신은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 같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먼저 읽어야 하고, 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카메라를 익혀야 하며, 무언가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이 만들어놓은 방법을 배워야 한다. 아무것도 배우지 않고 곧바로 자기 스타일을 만들 수는 없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내가 짊어진 짐이 정말 내가 선택한 것인가.

좋은 학교. 좋은 직장. 안정적인 삶. 돈. 사회적 인정. 좋은 부모나 좋은 배우자라면 이래야 한다는 생각. 이런 것들은 처음에는 내가 선택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가만히 돌아보면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세상에 존재하던 가치인 경우가 많다. 누군가 내게 직접 명령하지 않아도,

나는 그것을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때 어디선가 이런 목소리가 들린다. “너는 마땅히 해야 한다.”

 

용 — 내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

니체는 사막에서 거대한 용을 등장시킨다. 용의 비늘에는 수천 년 동안 만들어진 가치들이 반짝이고 있다. 그리고 용은 말한다. “가치는 이미 모두 창조되어 있다.” 이 표현이 무섭게 느껴진다. 우리를 지배하는 가치가 항상 억압적인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너무 당연해서 질문조차 하지 않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성공이란 이런 것이다. 행복한 삶이란 이런 것이다. 좋은 사람이라면 이렇게 해야 한다. 남들이 모두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으니 나도 그 방향으로 가야 한다. 용은 밖에 있는 괴물이 아니라, 내가 너무 오래 당연하다고 믿어온 생각 속에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니체를 읽으면서 내가 찾아야 할 용도 분명해진다. 내가 더 이상 질문하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사자 — 나는 하고자 한다

낙타는 사막에서 사자가 된다. 그리고 용에게 말한다. “나는 하고자 한다.” 이 장면에서 처음으로 자유가 등장한다. “해야 한다”에서 “하고 싶다”로 이동하는 것이다. 사자는 기존 가치에 ‘아니오’라고 말한다. 하지만 단순한 반항은 아니다. 니체는 이것을 신성한 아니오라고 부른다. 새로운 것을 만들기 위한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필요한 부정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대목이 중요하게 느껴진다. 우리는 흔히 긍정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때로는 제대로 된 긍정을 위해 먼저 거절해야 한다. 하지 않겠다고 말해야 하고, 남들이 정해놓은 길에서 내려와야 하고, 오랫동안 당연하다고 믿었던 것을 의심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아니오’도 창조의 일부다. 하지만 사자만으로 충분할까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사자는 자유를 얻을 수 있지만 새로운 가치를 만들지는 못한다. 이 부분에서 나는 사자의 한계를 생각하게 된다. 무언가를 싫어하는 것은 쉽다. 다른 사람의 방식이 잘못됐다고 말하는 것도 쉽다. 기존 질서를 비판하고, 유행을 거부하고, 남들과 다르게 살겠다고 선언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내 삶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평생 반대하는 대상에 붙잡혀 살 수도 있다. “나는 저 사람처럼 살지 않겠다.” “나는 저런 사진을 찍지 않겠다." “나는 저런 글을 쓰지 않겠다.” 처음에는 자유의 선언처럼 보인다. 하지만 계속 그렇게 말하고 있다면 여전히 ‘저 사람’과 ‘저 방식’이 내 기준인 셈이다. 부정도 상대를 필요로 한다. 그래서 사자는 결국 아이가 되어야 한다.

 

아이 — 새로운 시작

니체는 아이를 이렇게 표현한다. 순진무구, 망각, 새로운 시작,  놀이,  제 힘으로 돌아가는 바퀴,  최초의 운동.  그리고 신성한 긍정. 왜 가장 강해 보이는 사자 다음에 연약한 아이가 등장할까. 아이는 사자처럼 싸우지 않는다. 용을 쓰러뜨릴 필요도 없다. 자신의 놀이를 시작하면 된다. 이 부분에서 어린아이의 힘이 조금 이해된다. 아이는 남들이 만든 놀이를 부수는 데 온 힘을 쓰지 않는다. 새로운 놀이를 만들어버린다. 규칙도 만들고, 하다가 재미없으면 바꾸고, 다시 시작한다. 그래서 아이의 질문은 사자와 다르다. 사자는 묻는다. “무엇을 거부해야 하는가.” 아이는 묻는다. “이제 무엇을 만들 것인가.”

 

낙타의 ‘예’와 아이의 ‘예’

낙타와 아이는 둘 다 ‘예’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의미는 다르다. 낙타는 말한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이도 말한다. “예.” 하지만 이때의 예는 “이것을 해도 되는가?” 라는 허락의 대답이 아니라, “나는 이것을 해보겠다.” 라는 창조의 긍정에 가깝다. 하나는 주어진 가치에 대한 긍정이고, 다른 하나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만들어내는 긍정이다. 그래서 니체에게 마지막에 필요한 것은 더 강한 부정이 아니라, 다시 ‘예’라고 말할 수 있는 힘인 것 같다.

 

사진을 찍는 일도 비슷하지 않을까

이 세 가지 변신을 생각하다 보니 사진을 찍는 일도 떠오른다. 처음에는 좋은 사진을 배운다. 구도를 배우고, 빛을 배우고, 좋은 사진가들의 작품을 본다. 그들을 따라 해보기도 한다. 낙타의 시간이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답답해진다. 왜 꼭 이렇게 찍어야 하지. 왜 좋은 사진은 이래야 하지. 기존의 방식을 벗어나고 싶어진다. 사자의 시간이 온다. 하지만 유행하는 사진을 일부러 피하는 것만으로 내 사진이 되는 것은 아니다. 유행을 따라가는 것도, 유행을 의식적으로 거부하는 것도 여전히 유행을 기준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 그런 것들을 덜 의식하면서 “나는 이렇게 보고 싶다.” 라는 나만의 리듬이 생긴다면, 그때 조금 아이의 시간에 가까워지는 것은 아닐까. 글쓰기도 비슷할 것이다. 많이 읽고, 좋은 문장을 배우고, 다른 사람의 글을 따라가다가, 언젠가는 “나는 이렇게 읽었다.” 라고 말해야 한다.

 

세 가지 변신은 한 번만 일어나는가

처음에는 낙타에서 사자로, 사자에서 아이로 가면 끝나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 삶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은 것 같다. 어떤 일에서는 나는 아이처럼 자유롭게 만들 수 있다. 그런데 다른 일에서는 여전히 낙타처럼 주어진 기준을 짊어진다. 어제 아이였던 사람이 오늘 다시 낙타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새로운 분야를 배우려면 다시 낙타가 되는 것도 필요하다. 그렇다면 세 가지 변신은 졸업해야 할 단계라기보다, 삶에서 계속 반복되는 리듬인지도 모른다. 배우고, 의심하고, 벗어나고, 만들고, 다시 배우는 것. 낙타에서 사자로, 사자에서 아이로, 그리고 또 다른 낙타로. 이렇게 생각하니 세 가지 변신이 훨씬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자기극복은 자기부정과 다르다

여기서 한 가지는 분명히 해두고 싶다. 자기극복을 계속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명령으로 받아들이면 니체는 다시 하나의 용이 될 수 있다. “나는 끊임없이 성장해야 한다.” “어제의 나보다 반드시 나아져야 한다.” “멈추면 안 된다.” 이런 문장 역시 어느 순간 또 다른 “너는 마땅히 해야 한다”가 된다. 그렇다면 자기극복의 이름으로 다시 낙타가 되는 셈이다. 니체가 말하는 자기극복을 나는 아직 이렇게 이해하고 싶다. 지금의 나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나를 최종적인 모습으로 만들지 않는 것. 현재의 나를 출발점으로 인정하면서도, 필요하다면 지금까지의 나와 다른 삶을 만들어볼 수 있는 힘. 그것이 자기극복에 조금 더 가까워 보인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정신의 세 가지 변신」을 읽고 나니 이제 질문은 니체가 아니라 나에게 돌아온다. 나는 지금 무엇을 짊어지고 있는가. 그 짐은 정말 내가 선택한 것인가. 내 안에서 “너는 해야 한다”고 말하는 용은 무엇인가. 나는 무엇에 ‘아니오’라고 말해야 하는가. 그리고 그 부정 뒤에, 나는 무엇을 만들고 싶은가. 이 질문들 가운데 마지막 질문이 가장 어렵다. 비판은 비교적 쉽다. 싫은 것을 찾는 것도 쉽다. 하지만 “그래서 너는 어떻게 살고 싶은가.” 라고 물으면 답하기가 쉽지 않다. 아마 그래서 니체는 사자보다 아이를 뒤에 놓았을 것이다. 기존의 세계를 부수는 것보다, 자신의 세계를 만드는 일이 더 어렵기 때문에.

 

나에게 남는 질문

앞으로 『차라투스트라』를 읽으면서 세 가지 질문을 계속 가지고 가려고 한다. 나는 무엇에 복종하고 있는가. 나는 무엇에 저항하고 있는가.

나는 무엇을 창조하고 있는가. 그리고 하나를 더 붙이고 싶다. 내가 만든 것도 언젠가 다시 나를 지배하는 용이 되고 있지는 않은가. 낙타에서 사자로, 사자에서 아이로. 그 변신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삶은 계속해서 짐을 짊어지고, 그 짐을 내려놓고, 그 빈자리에서 다시 놀이를 시작하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머리말 6」에서는 앞에서 비유로 등장했던 ‘밧줄’이 실제 사건으로 펼쳐진다. 사람은 짐승과 위버멘쉬 사이를 잇는 밧줄이라고 했던 니체의 말이, 이제 줄타는 광대의 몸을 통해 눈앞에 나타난다. 줄타는 광대는 실제로 밧줄 위를 걷는다. 아래에는 심연이 있다. 건너가는 일 자체가 위험하다. 그리고 그는 결국 추락한다. 그런데 니체는 이 장면을 단순한 실패로 다루지 않는다. 오히려 줄타는 광대와 그를 뛰어넘는 어릿광대를 대비시키면서, ‘넘어선다’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묻게 한다. 줄타는 광대는 건너가려는 사람이다  줄타는 광대는 밧줄 위를 걷는다. 그가 어디에 도착할지는 보장되지 않는다.

 

실패할 수도 있고, 추락할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건너가기를 시도한다. 이 점에서 줄타는 광대는 앞에서 본 인간의 모습과 겹친다. 인간은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다리이고, 중요한 것은 지금의 자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저편으로 건너가려는 움직임이다.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죽어가는 줄타는 광대에게 말한다.

 

“너는 위험을 너의 천직으로 삼아왔다.” 이 말이 오래 남는다. 니체에게 가치 있는 사람은 반드시 성공한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위험을 감수하며 건너가려 한 사람일 수 있다. 성공 여부보다 먼저 중요한 것은 시도다. 어릿광대도 넘어간다.  흥미로운 것은 어릿광대 역시 ‘넘어간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의 넘어감은 줄타는 광대와 완전히 다르다. 어릿광대는 줄타는 광대에게 소리친다. 네가 느리다. 내 길을 막고 있다. 너보다 내가 더 뛰어나다. 그리고 실제로 그를 훌쩍 뛰어넘는다.겉으로만 보면 어릿광대가 더 강해 보인다. 더 빠르고, 더 과감하고, 실제로 앞서 나간다. 하지만 그의 행동은 자기극복이 아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넘어선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뛰어넘은 것에 불과하다. 이 차이가 중요하다. 자기극복과 경쟁은 다르다

 

위버멘쉬를 처음 접하면 ‘더 뛰어난 인간’을 떠올리기 쉽다. 남보다 강하고, 남보다 빠르고, 남보다 성공하고, 남보다 우월한 사람. 하지만 「머리말 6」은 이런 해석을 경계하게 만든다. 니체가 말하는 넘어섬은 타인을 앞서는 일이 아니다. 지금의 나를 넘어서는 일이다. 어릿광대는 타인을 기준으로 자신을 확인한다. 내가 저 사람보다 빠른가. 내가 저 사람보다 높은가. 내가 저 사람보다 강한가. 반면 줄타는 광대는 자기 앞의 밧줄을 건넌다.

 

그가 싸우는 대상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심연과 자신의 두려움이다. 이 차이를 한 문장으로 줄이면 이렇다. 경쟁은 남보다 앞서려는 것이고, 자기극복은 어제의 나를 넘어가려는 것이다. 위버멘쉬는 우월한 인간이 아니다 이 장면 때문에 위버멘쉬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위버멘쉬를 단순히 ‘우월한 인간’으로 이해하면 쉽게 경쟁의 논리로 흘러간다.

 

더 높은 지위, 더 많은 능력, 더 큰 성취. 그러나 그런 기준으로 보면 어릿광대가 더 위버멘쉬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니체가 중요하게 보는 것은 우월함보다 생성이다.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 지금까지의 자신을 반복하지 않는 것. 자기 안의 익숙한 가치와 한계를 넘는 것. 그래서 위버멘쉬는 ‘남보다 위에 있는 인간’이라기보다, 계속 자신을 넘어가는 존재에 가깝다.

 

줄타는 광대는 실패했는가. 줄타는 광대는 결국 추락한다. 그렇다면 그의 시도는 실패한 것일까. 결과만 보면 그렇다.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했고, 죽음을 맞는다. 하지만 차라투스트라는 그를 경멸하지 않는다. 오히려 직접 묻어주겠다고 한다. 왜일까. 그는 위험을 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있던 자리에 안전하게 머물지 않았다. 불확실한 밧줄 위에 올라섰다. 이 장면은 앞에서 읽은 ‘몰락’과도 이어진다. 니체에게 몰락은 반드시 실패를 뜻하지 않는다. 몰락은 자기극복의 과정에서 감수해야 할 위험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실패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실패할 가능성이 있음에도 건너가려 했는가 하는 점이다. 실패를 어떻게 볼 것인가. 우리는 보통 성공한 시도만 의미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결과가 좋으면 도전이고, 결과가 나쁘면 무모함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게 보면 새로운 시도는 항상 결과가 나온 뒤에야 평가할 수 있다.

 

실험은 본래 성공을 보장하지 않는다. 새로운 길을 걷는다는 것은 실패 가능성을 포함한다. 그렇다면 실패했다고 해서 처음의 시도까지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줄타는 광대는 이 점을 보여준다. 그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안전한 자리에서 구경만 하던 사람과는 다르다. 그는 실제로 밧줄 위에 올라갔다.

 

차라투스트라는 왜 그의 시신을 짊어지는가. 줄타는 광대가 죽은 뒤 차라투스트라는 그의 시신을 직접 짊어진다. 이 장면은 묘하게 인상적이다. 시장터의 군중은 흩어진다. 어릿광대는 사라진다. 하지만 차라투스트라는 죽은 광대를 버리지 않는다. 이것을 단순한 연민으로만 보기는 어렵다. 차라투스트라는 줄타는 광대에게서 자신과 닮은 무엇을 본 것 같다.

 

둘 다 위험을 감수한다. 둘 다 건너가려 한다. 둘 다 몰락을 피하지 않는다. 그래서 줄타는 광대는 실패한 사람이 아니라, 차라투스트라와 같은 방향을 바라본 사람에 가깝다. 어쩌면 차라투스트라가 처음 만난 진짜 길동무는 살아 있는 제자가 아니라, 실패한 줄타는 광대였는지도 모른다.

 

남을 뛰어넘는 사람은 어디로 가는가

어릿광대는 더 빠르다. 그는 실제로 줄타는 광대를 뛰어넘는다. 하지만 그에게는 저편이 없다. 그의 목표는 단지 앞선 사람을 제치는 것이다.

그래서 경쟁의 끝은 또 다른 경쟁일 수밖에 없다. 한 사람을 앞지르면 다음 사람이 나타난다. 더 높은 자리, 더 많은 성취, 더 큰 인정. 계속 기준은 바깥에 있다. 이런 삶에서는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보다 누가 앞에 있는지가 더 중요해진다. 니체가 말하는 자기극복은 그 반대다. 중요한 것은 타인의 위치가 아니라, 내가 어떤 존재가 되어가고 있는가다.

 

나에게 남는 질문

「머리말 6」을 읽고 나니 이런 질문이 남는다. 나는 지금 나를 넘으려 하는가, 아니면 다른 사람을 앞서려 하는가. 둘은 비슷해 보인다. 더 많이 배우고, 더 잘하고, 더 높은 곳으로 가려 한다는 점에서는 같다. 하지만 기준이 다르다. 비교가 기준이면 늘 누군가가 필요하다. 그 사람보다 앞섰는지, 뒤처졌는지 확인해야 한다. 반면 자기극복의 기준은 안쪽에 있다. 나는 이전의 나보다 달라졌는가. 내가 익숙하게 믿던 것을 다시 물을 수 있는가.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는가. 실패해도 다시 건너갈 수 있는가. 그 차이가 중요해 보인다.

 

넘어선다는 것은 반드시 남을 앞서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남과의 비교에서 조금씩 벗어나, 지금의 나를 하나의 출발점으로 받아들이는 일일 수 있다. 줄타는 광대는 끝내 반대편에 도착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밧줄 위에 올라갔다. 니체에게 인간이 다리라면, 어쩌면 인간의 의미는 안전하게 도착하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 건너가려는 시도 자체에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머리말을 따라가다 보면 한 가지 질문이 계속 남는다.

 

차라투스트라는 누구인가.

그는 철학자인가. 예언자인가. 교사인가. 종교의 창시자인가. 사람들을 이끄는 지도자인가. 머리말의 여러 장면을 이어서 보면, 차라투스트라는 이 모든 모습과 닮아 있으면서도 조금씩 다르다. 그는 위버멘쉬를 가르친다. 아직 오지 않은 인간을 예고한다. 잠든 사람을 깨우려 한다. 하지만 사람들을 한 방향으로 이끄는 지도자가 되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무리에서 빠져나오도록 사람들을 유혹하는 자에 가깝다.

 

몰락하려는 사람. 차라투스트라를 가장 먼저 설명하는 말은 ‘몰락’이다. 10년 동안 산속에서 고독하게 지낸 뒤 그는 인간들에게 내려오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말한다. “나는 태양처럼 몰락하겠다.” 여기서 몰락은 실패가 아니다. 산 위의 자신을 내려놓고 다른 존재가 되어가는 과정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을 보존하려는 사람이 아니라 끊임없이 이전의 자신을 넘어가려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가 위버멘쉬를 이야기할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 같다. 그는 완성된 존재이기 때문에 자기극복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자신도 몰락하면서 자기극복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말한다.

 

위버멘쉬의 교사

시장터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선언한다. “나 너희에게 위버멘쉬를 가르치노라.” 사람은 극복되어야 할 존재이고, 위버멘쉬는 대지의 뜻이라고 말한다. 이 장면만 보면 차라투스트라는 분명 교사처럼 보인다. 그에게는 전하고 싶은 말이 있고,그 말을 아직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그의 첫 강연은 실패한다. 사람들은 위버멘쉬에 관심이 없다. 그들이 기다리는 것은 줄타는 광대다. 차라투스트라가 최후의 인간을 경고하자 사람들은 오히려 그 최후의 인간을 달라고 외친다. 좋은 것을 알려주면 사람들이 받아들일 것이라는 기대는 무너진다. 여기에서 차라투스트라는 단순한 교사일 수 없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위버멘쉬를 예고하는 사람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을 번개를 예고하는 빗방울에 비유한다. 번개는 위버멘쉬다. 자신은 그 번개가 올 것임을 알리는 존재다. 이 표현도 흥미롭다. 그는 자신이 위버멘쉬라고 말하지 않는다. 위버멘쉬를 가르치고 예고한다. 즉 차라투스트라는 목적지가 아니라 다시 하나의 과정이다.

그는 사람들에게 인간이 최종적인 존재가 아니라고 말하면서, 자기 자신 또한 최종적인 존재라고 주장하지 않는다.그 역시 건너가고 있는 사람이다.이 점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앞에서 읽었던 ‘다리’라는 인간의 이미지와 닮아 있다.

 

재를 들고 올라갔다가 불을 들고 내려오는 자

머리말 2에서 숲속의 성자는 차라투스트라를 알아본다. 과거에는 재를 들고 산으로 올라갔는데, 이제는 불덩이를 들고 골짜기로 내려온다고 한다. 나는 이 장면이 차라투스트라를 아주 잘 보여준다고 느꼈다. 그는 먼저 자기 자신을 태웠다. 그리고 그 재에서 새로운 불을 만들었다. 그 뒤 그 불을 인간들의 세계로 가져간다.

 

그래서 성자는 그를 “불지르고 다니는 자”라고 부른다. 처음에는 위험한 표현처럼 들린다. 하지만 여기서 불을 지른다는 것은 사람에게 해를 입힌다는 뜻이 아니다. 기존의 가치가 너무 단단하게 굳어진 곳에 불을 붙이는 것이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에 질문을 던지는 것. 익숙한 삶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 지금의 자신이 최종적인 모습이 아닐 수도 있음을 깨닫게 하는 것. 차라투스트라가 가지고 내려온 불은 그런 불에 가깝다.

 

잠든 자를 깨우는 사람

성자는 차라투스트라를 보며 또 말한다. 그는 잠에서 깨어난 사람이라고. 그리고 이제 잠들어 있는 사람들에게 내려가려 한다고. 이 표현 역시 계몽과 비슷해 보인다. 하지만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정답을 주려고 하는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지금까지 정답이라고 믿었던 것을 흔든다.

 

신, 도덕, 행복, 정의, 연민, 국가, 지식. 앞으로 『차라투스트라』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우리가 당연히 좋은 가치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계속 문제 삼는다. 그렇다면 잠에서 깨어난다는 것은 새로운 답 하나를 배우는 일이 아니라, 당연하다고 믿어온 가치에 다시 질문할 수 있게 되는 것 일지도 모르겠다.

 

목자가 아니라 유혹자

 특히 흥미로웠던 설명은 차라투스트라가 ‘목자’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목자는 무리를 돌본다. 무리가 흩어지지 않도록 지킨다.  어디로 갈지 알려주고,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도록 이끈다. 정치가나 종교지도자, 계몽가도 어떤 의미에서는 이런 역할을 할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그와 반대다. 그는 말한다. “나는 가축의 무리로부터 많은 가축을 꾀어내기 위해 왔다.” 무리를 잘 유지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무리 속에서 누군가가 빠져나와 자기 길을 찾도록 만드는 것이 목적이다. 그래서 그는 목자가 아니라 도둑이라고 불리기를 원한다. 무리에서 사람을 훔쳐내는 도둑. 시대의 가치에 순응하던 사람을 다른 삶으로 유혹하는 사람. 이 이미지가 인상적이다. 지도자는 답을 주지만 유혹자는 움직이게 한다. 지도자는 대개 방향을 알려준다 “이쪽으로 가라.” “이것이 옳다.” “이렇게 살아라.” 유혹자는 조금 다르다. 그는 꼭 정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지금의 자리에 계속 머물 수 없게 만든다.

 

“정말 그렇게 살아야 하는가.” “그것이 정말 네가 원하는 삶인가.” “다른 방식은 없는가.” 질문을 던진다. 그 질문 때문에 지금까지 편안했던 자리가 불편해진다. 그리고 결국 스스로 움직이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차라투스트라가 원하는 것은 추종자가 아니라 자기 길을 찾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군중을 버리지도 않고 섬기지도 않는다

 

이 점에서 차라투스트라와 숲속의 성자의 차이가 보인다. 성자는 인간에게 실망해 숲으로 물러났다. 사람을 떠나 신을 사랑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사람에게 실망하지만 인간의 세계를 완전히 떠나지는 않는다. 반대로 군중의 인정에 맞춰 자신의 말을 바꾸지도 않는다. 그는 군중을 섬기지 않는다. 그렇다고 완전히 외면하지도 않는다. 그들 사이를 지나간다. 이 태도는 앞으로 차라투스트라의 중요한 긴장이 될 것 같다. 사람들 속에 있으면서도 무리에 속하지 않는 것, 소통하면서도 인정에 의존하지 않는 것, 베풀면서도 받는 사람의 반응을 요구하지 않는 것,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베품의 문제도 다시 돌아온다

머리말 1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지혜를 베풀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머리말 5에 이르면 사람들은 그의 말을 이해하지 않는다. 차라투스트라는 속으로 한탄한다. 자신의 입은 그들의 귀에 맞는 입이 아닌 것 같다고. 여기에는 아직 미련이 남아 있다. 나는 좋은 것을 주었는데, 왜 사람들은 그것을 알아주지 않을까. 그렇다면 아직 차라투스트라는 군중의 인정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은 셈이다. 태양은 자신이 비추어준 존재가 자신을 이해해주기를 바라지 않는다. 하지만 차라투스트라는 아직 이해받기를 바란다. 이것이 그가 앞으로 넘어야 할 한계일 것이다.그래서 그의 여정은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는 이야기인 동시에,

 

베푸는 자 차라투스트라 자신이 변화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강자는 남을 지배하는 사람일까 여기에서 ‘강자’라는 말도 다시 생각하게 된다.

니체가 말하는 강자를 권력을 가진 사람으로 이해하면 이상해진다. 높은 지위에 있고, 사람을 많이 거느리고,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의지를 강요할 수 있는 사람. 이런 사람이 반드시 니체의 강자는 아니다. 오히려 권력을 얻기 위해 군중의 인정을 끊임없이 필요로 한다면 그는 군중에게 의존하고 있는 사람일 수도 있다. 지금까지 읽은 흐름에서 니체의 강함은 남을 지배하는 능력보다 자기 자신을 넘어설 수 있는 능력에 더 가까워 보인다. 다른 사람이 인정하지 않아도 자기 길을 갈 수 있는가. 익숙한 가치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자기 자신이 만든 가치까지 다시 넘어설 수 있는가. 강함은 이런 질문과 연결된다.

 

나에게 남는 질문

머리말을 읽으며 차라투스트라는 조금씩 다른 인물로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위대한 진리를 가지고 산에서 내려온 현자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는 실패한다. 군중에게 이해받지 못하고, 자신의 베품에 문제가 있음을 드러내며, 자신 역시 계속 변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흥미롭다.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계속 자신을 넘어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이런 질문이 남는다.

 

좋은 가르침이란 무엇일까. 사람을 내가 생각하는 좋은 방향으로 이끄는 것일까. 올바른 답을 전달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 사람이 지금의 자리에서 스스로 움직이고 싶게 만드는 것일까. 나는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알려주려 할 때, 그 사람을 내 쪽으로 끌어오려 하는가. 아니면 그 사람이 자기 길을 발견할 수 있도록 불씨 하나를 건네는가. 차라투스트라는 지도자가 아니라 유혹자가 되려 한다. 사람들을 자신에게 복종시키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자신으로부터 이탈하도록 유혹하는 사람. 그런 의미에서 그의 말은 명령이라기보다 불씨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불씨가 어디에 붙고, 어떤 불이 될지는, 이제 듣는 사람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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