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글에서 나는 역겨움이라는 불편한 감정을 생각했다. 싫어하는 것을 계속 미워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나는 저렇게 살고 싶지 않다.”라는 방향으로 바꿀 수 있다면, 싫음도 다른 삶을 향해 움직이는 힘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니체를 조금 더 따라가면 더 불편한 말이 나온다. 평등. 내게 평등은 의심해야 할 가치라기보다 지켜야 할 가치에 가까웠다. 사람을 출신이나 성별, 재산, 지위에 따라 차별해서는 안 된다. 같은 일을 한다면 정당하게 평가받아야 하고, 누구에게나 가능한 한 공정한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이런 생각은 너무 당연해 보였다. 그래서 『차라투스트라』의 「타란툴라들에 대하여」에서 차라투스트라가 평등을 설교하는 사람들을 비판하고, 심지어 사람은 평등하지 않으며 더 많은 불평등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대목을 읽으면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나도 처음에는 이렇게 생각했다. ‘이건 너무 나간 것 아닌가.’

 

하지만 니체가 왜 이런 도발적인 말을 하는지를 조금 더 따라가보기로 했다. 그가 가장 먼저 묻는 것은 “평등이 옳은가.”가 아니었다. 오히려 이런 질문에 가까웠다. “평등을 말하고 있는 너는 무엇을 원하는가.” 이 질문이 조금 무섭다. 좋은 가치라고 생각했던 말 뒤에서도 다른 욕망이 움직일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자료에서는 「타란툴라들에 대하여」의 평등 설교자들을 원한과 복수에 사로잡힌 사람들로 설명한다. 그들은 평등과 정의를 말한다. 하지만 차라투스트라는 그 말 뒤에서 상처받은 자부심, 억눌린 질투, 복수하고 싶은 욕망을 본다. 쉽게 말하면 이런 것이다. “나도 저 사람처럼 되고 싶다.” 그런데 그렇게 될 수 없다. 처음에는 부럽다. 그 다음에는 억울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이렇게 생각한다. “저 사람도 나와 같아져야 한다.” 여기까지 가면 평등은 나를 더 성장시키려는 요구가 아니라 상대를 끌어내리고 싶은 욕망의 이름이 될 수도 있다.

 

이 설명을 읽다가 2020년에 옮겨 적었던 글 하나가 떠올랐다. 제목은 「우리는 서로를 시기하면서 더 나은 사람이 되는지도 모르겠다」였다. 살리에리와 모차르트 이야기에서 시작하는 글이었다. 살리에리는 모차르트의 재능을 알아보았다. 그래서 더 괴로웠다. 자신이 얼마나 노력해도 모차르트처럼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당시 글에서는 시기심이 나타나는 세 가지 모습을 소개했다. 누군가 나보다 뛰어나다는 사실을 보고 자신의 부족함 때문에 우울해지는 사람. 그 사람처럼 되고 싶어 더 노력하는 사람. 그리고 상대의 성공이 정당하지 않다고 생각하며 그 사람을 깎아내리는 사람. 나는 그 부분을 읽으며 여러 번 뜨끔했다고 적었다. 나 역시 누군가를 시기한 적이 있었고, 상대가 실패하기를 마음속으로 바란 적도 있었다. 시기심을 드러내는 것이 부끄러워 마음 깊숙이 숨겨두었다고 썼다.

 

지금 니체를 읽으며 그 기록을 다시 보면 평등의 문제와 묘하게 연결된다. 누군가 나보다 잘한다. 여기까지는 사실이다. 그 다음부터 여러 길이 갈린다. ‘나도 저만큼 해보고 싶다.’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 사람에게 배우고 내 힘을 더 사용해볼 수도 있다. 반대로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저 사람은 운이 좋았어.’ ‘누군가 밀어준 거겠지.’ ‘사실 별것도 아닌데 과대평가받는 거야.’ 때로는 이것도 사실일 수 있다. 성공에는 운과 구조와 관계가 작용한다. 하지만 사실 여부와 별개로 내 마음속에서 이런 설명이 상대의 높이를 낮추기 위한 용도로만 사용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는 물어볼 수 있다. 니체가 보고 싶었던 것은 아마 이 부분이었을 것이다. 평등이라는 말 자체보다 그 말을 필요로 하는 힘.

 

나는 이 질문을 회사생활에서도 꽤 쉽게 만난다. 누군가 좋은 기회를 얻는다. 승진한다. 좋은 평가를 받는다. 중요한 업무를 맡는다. 그러면 먼저 묻게 된다. ‘왜 저 사람이지.’ 이 질문은 충분히 정당하다. 조직의 평가와 기회 배분은 공정해야 한다. 명확한 기준이 필요하다. 그런데 같은 질문 속에서도 서로 다른 욕망이 있을 수 있다. “기준이 공정해야 한다.”는 요구와 “저 사람이 저 자리에 있는 것이 싫다.”는 감정은 같지 않다. 둘은 쉽게 섞인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공정성을 요구하면서 실제로는 다른 사람의 몫이 줄어들기를 바랄 수도 있다. 이것을 인정하기는 불편하다. 하지만 나는 그런 마음에서 완전히 자유롭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니체의 비판이 모두 맞는 것일까. 여기서는 멈춰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현실에는 실제 불평등과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2021년 나는  「임금격차의 공정성」이라는 글을 쓴적이 있다. 비슷한 일을 하는데도 대기업과 중소기업 노동자의 임금이 크게 다르고, 같은 사업장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대우가 다르며, 성별에 따라서도 임금 격차가 나타나는 이유를 생각한 글이었다. 처음에는 경제학의 수요와 공급, 생산성, 협상력이라는 설명을 따라갔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시장에는 독점력이 있고, 사람마다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이 다르며, 가정환경이나 교육 기회도 다르다. 같은 출발선에서 뛰었다고 말하기 어려운데 결과만 보고 “능력의 차이입니다.”라고 말하는 것도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당시 나는 능력주의에 대해서도 의심했다. 개인이 노력해서 얻은 결과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가족과 환경과 사회가 제공한 자원이 서로 다르다. 그 차이를 보지 않고 결과를 전부 개인의 능력으로 돌리면 기존의 불평등이 정당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지금 다시 읽어도 이 문제의식은 버리고 싶지 않다. 그러니 니체를 읽었다고 해서 “평등은 약자의 가치이니 불평등이 좋다.”라고 말할 생각은 없다. 그렇게 읽으면 오히려 너무 쉬워진다. 나는 두 질문을 동시에 가지고 가고 싶다. 첫 번째는 사회를 향한 질문이다. 사람들은 공정한 기회를 가지고 있는가. 부당한 차별을 받고 있지는 않은가. 권력이나 재산 때문에 누군가의 가능성이 처음부터 막혀 있지는 않은가. 이것은 중요한 질문이다. 그런데 니체는 여기에 두 번째 질문을 붙인다. 나는 왜 평등을 원하는가. 부당한 차별을 없애기 위해서인가. 사람이 각자의 가능성을 더 많이 펼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나보다 앞선 사람을 끌어내리고 싶기 때문인가. 첫 번째 질문만 하면 내 안의 질투와 원한을 보지 못할 수 있다. 두 번째 질문만 하면 현실의 구조적인 차별을 개인 심리의 문제로 축소할 위험이 있다. 그래서 둘 다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니체가 내게 유용한 것은 평등을 포기하라고 해서가 아니라 좋은 가치의 이름 뒤에 숨을 수 있는 내 욕망까지 의심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자료가 설명하는 ‘불평등’도 조금 다르게 보인다. 니체가 원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같은 기준에 맞춰지는 세계가 아니다. 각자가 다른 가치를 만들고, 다른 방식으로 살고, 그 차이가 서로 경쟁하면서 새로운 것이 생기는 세계에 가깝다. 자료에서는 ‘모든 사람은 각각 특이하다는 점에서 평등하다’는 식으로 이 문제를 설명한다. 나는 이 표현이 니체의 불평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예를 들어 글쓰기를 생각해본다. 모든 사람이 같은 글을 쓴다면 누가 더 잘 썼는지를 비교하기는 쉬울 것이다. 같은 형식, 같은 주제, 같은 기준으로 점수를 매길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글만 있는 세상은 재미없다. 어떤 사람은 짧고 건조하게 쓰고, 어떤 사람은 길고 느리게 쓰며, 누군가는 경험에서 시작하고, 누군가는 개념에서 시작한다. 차이가 있기 때문에 새로운 스타일이 나온다. 사진도 비슷하다. 모든 사람이 같은 장소에서 같은 구도와 같은 색으로 찍는다면 비교는 쉬울 것이다. 하지만 사진이 재미있는 이유는 같은 거리를 보고도 서로 다른 것을 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니체가 경계한 평등을 차이를 없애는 평준화라는 의미로 읽어볼 수 있다. 모두에게 같은 존엄이 있다는 것과 모두가 같아져야 한다는 것은 다른 이야기다. 같은 권리를 갖는 것과 같은 욕망을 가져야 하는 것도 다르다.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는 것과 차이가 없어야 한다는 것도 다르다. 나는 이 구분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부당한 차별은 줄여야 한다. 하지만 차이까지 없앨 이유는 없다. 오히려 차이가 있어야 다른 것을 배우고, 비교하고, 경쟁하고,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다.

 

문제는 다시 경쟁이다. 경쟁이라는 말도 불편하다. 경쟁은 사람을 비교하게 만들고 서열을 만들며 누군가를 탈락시킨다. 실제로 그런 경쟁이 많다. 하지만 모든 경쟁이 누군가를 밀어내는 방식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시기심은 나를 괴롭게 할 수도 있지만 내가 더 해보게 만드는 자극이 될 수도 있다. 문제는 상대가 나보다 앞서 있다는 사실이 아니다. 그 차이를 내가 어떻게 사용하는가다. 상대의 높이를 낮추고 싶은가. 아니면 그 차이 때문에 나도 내 힘을 조금 더 써보고 싶은가. 두 욕망은 전혀 다른 곳으로 간다.

 

나는 이 차이를 실제 생활에서도 자주 본다. 잘하는 사람을 만나면 마음이 불편할 때가 있다. 내가 부족한 것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 순간 가장 쉬운 길은 상대를 평가하는 것이다. 단점을 찾는다. “그래도 저 사람은 이런 부분이 부족하지.” 그렇게 생각하면 잠깐 마음이 편해진다. 차이가 줄어든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실제 내 능력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상대만 머릿속에서 낮아졌을 뿐이다. 반대로 ‘저 부분은 정말 잘하네.’라고 인정하고 내가 배울 것을 하나 가져오면 차이는 그대로 남아 있지만 내 힘은 조금 달라진다. 니체라면 아마 후자 쪽을 더 강한 힘이라고 말할 것 같다.

 

이렇게 보면 평등에 대한 그의 의심은 평등한 권리를 없애자는 정치적 주장으로만 읽기보다 내 안의 비교 심리를 들여다보는 질문으로 사용할 수 있다. 누군가 나보다 많이 가지고 있을 때. 나보다 잘할 때. 나보다 인정받을 때. 그때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나도 더 나아가고 싶은가. 아니면 저 사람이 내려오기를 원하는가. 이 질문은 생각보다 정직한 답을 요구한다. 나는 후자의 마음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 누군가 잘되는 것을 보며 마음 한쪽이 불편했던 적도 있고, 상대의 단점을 찾으면서 마음을 달랜 적도 있다. 그래서 시기심을 완전히 없애려고 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앞선 글에서 역겨움을 없애기보다 방향을 바꾸어보았듯이 시기심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 “저 사람이 가진 것을 빼앗고 싶다.”에서 “저 사람을 보니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겠다.”로 바뀔 수 있다면 시기심은 다른 힘이 된다. 문제는 비교 자체가 아니라 비교가 나를 어디로 움직이는가일지도 모른다.

 

이제 평등이라는 말을 들을 때 나는 두 가지를 함께 생각하고 싶다. 하나는 사회적 조건이다. 출발선이 지나치게 기울어져 있지 않은가. 누군가의 성별이나 출신, 경제적 조건 때문에 가능성이 막혀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평등과 공정의 요구가 필요하다. 다른 하나는 내 마음이다. 공정을 말하면서 나는 정말 더 많은 사람이 자기 힘을 펼치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내가 불편해하는 사람의 힘이 줄어들기를 바라는가. 이 질문을 빼놓으면 정의라는 말도 때로 복수의 가면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니체의 경고인 것 같다. 그 경고를 받아들이면서도 나는 평등을 버리고 싶지는 않다. 오히려 이렇게 말하고 싶다. 사람은 동등하게 존중받아야 하지만, 똑같아질 필요는 없다. 차별받지 않아야 하지만 서로 다른 힘과 삶의 방식을 가질 수 있다. 모두에게 기회가 열려 있어야 하지만 그 기회를 사용해 만들어내는 삶까지 같을 필요는 없다. 평등은 차이를 없애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쩌면 차이가 자유롭게 나타날 수 있는 바닥이어야 하지 않을까. 이것이 지금 내가 니체의 불편한 말을 읽으며 얻은 생각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다시 평등 자체가 아니라 평등을 말하는 나의 힘이다. 누군가를 일으켜 세우고 싶은가. 아니면 누군가를 끌어내리고 싶은가. 다른 가능성이 나타날 공간을 만들고 싶은가. 아니면 나를 불편하게 하는 차이를 없애고 싶은가. 겉으로는 모두 ‘공정’과 ‘정의’를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말 아래의 욕망은 다를 수 있다. 그리고 니체는 바로 그곳을 보라고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더 어려운 문제가 남는다. 상대가 잘못했다고 느낄 때 나는 단지 평등을 요구하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때로는 그 사람이 대가를 치르기를 원한다. “잘못했으니 벌을 받아야지.” “그 정도는 당해봐야 해.” “그래야 공정하지.” 그 순간 정의와 복수의 경계는 어디에 있을까. 내가 원하는 것은 잘못을 바로잡는 것일까. 아니면 상대가 고통받는 것을 보는 것일까. 다음 질문은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향한다. 복수는 왜 그렇게 자주 정의의 얼굴을 하고 나타나는가(90)

 

이전 글에서  나는 싫은 사람과 계속 싸우는 대신 거리를 만들 수 있는지 생각했다. 모든 갈등을 해결할 필요는 없었다. 모든 사람을 이해시킬 수도 없고, 나를 싫어하는 사람에게 계속 좋은 사람으로 보이려고 애쓸 필요도 없다. 때로는 상대를 바꾸려는 노력을 멈추고 내 힘을 다른 곳으로 가져오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일 수 있다.

 

그런데 거리를 만들려고 할 때 먼저 나타나는 감정이 있다. 싫음. 불편함. 거부감. 조금 더 강하면 역겨움이다. 우리는 보통 이런 감정을 좋은 감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가능하면 느끼지 않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특히 사람에게 역겨움을 느낀다고 말하면 꽤 위험하게 들린다. 그 감정은 쉽게 경멸이 되고, 혐오가 되고, ‘저 사람은 나보다 못하다’는 우월감으로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차라투스트라』 2부의 「잡것들에 대하여」를 읽을 때 조금 불편했다. 제목부터 그렇다. 누군가를 ‘잡것’이라고 부르는 철학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지는 않았다. 사람을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 깨끗한 사람과 더러운 사람으로 나누기 시작하면 니체의 ‘거리’는 아주 쉽게 사람을 멸시하는 철학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자료를 따라 조금 더 읽다 보니 내가 주목하고 싶은 부분은 다른 곳에 있었다.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이 ‘잡것들’ 때문에 느낀 감정을 증오보다 역겨움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처음에는 그 역겨움 때문에 삶의 즐거움까지 잃는다. 우물이 오염된 것처럼 느끼고, 사람들을 보지 않으려고 하고, 듣지 않으려고 하고, 혼자 멀어진다. 역겨워하는 대상 때문에 자신의 삶까지 좁아진 것이다. 여기까지라면 역겨움은 아무 힘도 만들지 못한다. 오히려 싫어하는 대상이 내 삶을 차지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 차라투스트라는 다른 질문을 한다. 자신을 괴롭히던 그 역겨움이 오히려 어디에 즐거움의 샘이 있는지를 알려준 것은 아닐까. 그 역겨움 때문에 더 높은 곳을 찾게 되었고, 결국 그 감정이 자신에게 날개를 달아주었다고 생각한다. 이 장면이 흥미로웠다. 역겨움을 없앤 것이 아니다. 싫었던 것이 갑자기 좋아진 것도 아니다. 상대를 설득해서 바꾼 것도 아니다. 싫음의 방향을 바꾼 것이다. ‘저것이 싫다.’에서 멈추지 않고 ‘그렇다면 나는 어디로 갈 것인가.’로 넘어갔다.

 

나는 이 차이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싫어하는 것이 있다는 것과 싫어하는 것에 붙잡혀 사는 것은 다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의 말투가 싫다. 계속 그 사람의 말투를 비난하면 나는 하루 종일 그 사람을 생각하게 된다. 반대로 ‘나는 사람에게 저렇게 말하지 말아야겠다.’라고 생각하고 내 말투를 바꾼다면 싫음은 다른 힘이 된다. 누군가 권력을 이용해 다른 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모습이 싫다. 그 사람을 욕하는 데만 머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위치가 달라져도 사람을 그렇게 대하지 말아야겠다.’라고 내 행동의 기준을 만들 수도 있다. 둘 다 같은 불편함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하나는 상대에게 묶이고, 다른 하나는 나를 다른 곳으로 움직인다. 역겨움이 날개가 된다는 것은 아마 이런 뜻 아닐까.

 

최근 내 생활을 돌아보면서 비슷한 감정을 느낀 적이 있다. 휴대폰을 너무 자주 보는 습관이다. 특별히 볼 것이 있어서 켠 것도 아니다. 잠깐 시간이 생긴다. 휴대폰을 든다. 무언가를 확인한다. 다른 것을 누른다. 몇 분이 지나간다. 책을 읽다가도 손이 간다. 글을 쓰다 잠시 막히면 확인한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짧은 시간에도 화면을 본다. 누가 강제로 시킨 것도 아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런 모습의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휴대폰이라는 물건이 싫었던 것은 아니다. 필요하고 편리하다. 문제는 주의가 너무 쉽게 끊기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내 모습이었다. 읽고 있는 문장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생각 하나를 끝까지 따라가지 못하고, 조금 지루해지기만 하면 다른 자극을 찾는 모습.

 

나는 이것을 고쳐야 할 ‘나쁜 습관’이라고만 생각했다. 의지가 약해서 그런가. 자기통제가 부족한가. 그러다 몰입에 관한 이야기를 찾아보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질문이 조금 바뀌었다. ‘휴대폰을 보지 말아야 한다.’보다 ‘나는 어떤 시간에 더 오래 머물고 싶은가.’ 이 질문이었다. 두 질문은 비슷해 보이지만 방향이 다르다. 첫 번째 질문의 중심에는 휴대폰이 있다. 보지 말아야 하고, 참아야 하고, 억제해야 한다. 계속 휴대폰과 싸운다. 두 번째 질문에서는 내가 원하는 삶이 중심이 된다. 책 한 페이지를 끝까지 읽는 시간. 한 가지 생각을 오래 따라가는 시간. 한 편의 글을 쓰며 다른 것을 잊는 시간. 사람과 이야기하면서 화면을 확인하지 않는 시간. 산책하면서 그냥 걷는 시간. 내가 원하는 것은 휴대폰 없는 삶이 아니라 주의가 한곳에 오래 머물 수 있는 삶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면 싫음이 조금 다른 일을 한다. ‘왜 나는 또 휴대폰을 봤지.’라고 자신을 미워하는 대신 내가 원하는 시간을 조금 더 만들어보게 한다. 역겨움이 날개가 되는 순간은 이런 것이 아닐까. 싫은 것을 계속 바라보게 만드는 감정이 아니라 내가 더 좋아하는 곳을 찾게 만드는 감정.

 

매일글쓰기를 오래 해온 기록을 돌아봐도 비슷한 흐름이 반복된다. 나는 무엇이 좋은지보다 무엇이 불편한지를 먼저 쓴 적이 많았다. 회사에서 겪은 일을 쓰고, 관계에서 마음에 걸린 말을 쓰고, 평가를 받고 흔들렸던 마음을 쓰고, 내 소비 습관을 돌아보고, 시간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 날을 적었다. 처음에는 불평처럼 시작한 글도 있었다. 그런데 쓰다 보면 어느 순간 질문이 달라졌다. ‘왜 저 사람은 저렇게 하지.’에서 ‘나는 왜 저 행동에 이렇게 반응하지.’로 옮겨가고, 그 다음에는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살고 싶은가.’라는 질문이 나왔다. 글을 쓰지 않았다면 불편함은 그냥 불편함으로 끝났을 수도 있다. 몇 번 욕하고, 잊고, 다음에 또 같은 상황에서 화를 냈을 것이다. 하지만 기록하면 조금 달라진다. 불편한 감정을 밖에 꺼내놓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감정이 가리키는 방향을 물어볼 수 있다. 내가 싫어하는 것은 무엇이며, 그 반대편에서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은 꽤 쓸모가 있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의 눈치를 지나치게 보는 내 모습이 싫었다면 그 싫음은 ‘그 누구의 시선도 신경 쓰지 않겠다.’라는 선언으로 가는 것보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기준을 조금 더 가져야겠다.’라는 방향으로 갈 수 있다. 일 때문에 내 시간을 모두 써버리는 방식이 싫다면 회사를 미워하는 것으로 끝낼 필요는 없다. 하루에 아주 작은 시간이라도 읽고 쓰고 걷는 시간을 남겨놓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 물건을 계속 사는 내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소비 자체를 죄악으로 만들 필요도 없다. 어떤 물건이 내 삶에서 실제로 사용되는지 살펴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역겨움은 일종의 경계선처럼 느껴진다. “여기까지는 내가 가고 싶지 않다.”라고 몸이 알려주는 신호다. 그런데 경계선만 있어서는 방향이 생기지 않는다. ‘가지 않을 곳’을 아는 것과 ‘갈 곳’을 아는 것은 다르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니체를 조심해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싫어하는 것만 분명한 사람은 생각보다 자유롭지 않다. 그가 싫어하는 대상이 계속 그의 삶의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나는 저 사람과 다르다.” “나는 저런 사람은 싫다.” “나는 절대 저렇게 살지 않겠다.” 처음에는 독립적인 선언처럼 보인다. 하지만 계속 ‘저 사람’을 기준으로 삼고 있다. 저 사람이 바뀌면 나의 위치도 흔들린다. 이것은 이전 글에서 생각했던 반동적인 힘과 닮았다. 내 행동의 출발점이 계속 상대에게 있다.

 

그래서 역겨움이 날개가 되려면 어느 순간 싫어하는 대상을 잊을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날개가 생겼다면 계속 땅에 있는 것을 내려다보며 욕할 이유가 없다. 날아가야 한다. 거리를 만든 뒤에는 다른 풍경을 보아야 한다. 이 표현이 마음에 든다. 우리는 싫어하는 것과 거리를 만든 뒤에도 계속 뒤돌아보는 경우가 많다. 그 사람을 만나지 않으면서도 그 사람 이야기를 계속한다. 그 조직을 떠났는데도 몇 년 동안 그 조직에 대한 분노를 반복한다. 어떤 가치에 반대한다고 하면서 평생 그 가치에 대한 비판만 한다. 몸은 떠났지만 생각은 떠나지 못한 것이다. 그러면 높이는 생기지 않는다. 거리만 생겼다.

 

니체가 말하는 날개를 나는 단순히 멀어지는 능력보다 새로운 곳으로 이동하는 능력으로 읽고 싶다. 그렇다면 ‘높은 곳’이라는 말도 조심해야 한다. 높다는 말을 사람의 등급으로 읽으면 곧바로 문제가 생긴다. 내가 높은 사람이고 저 사람은 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역겨움은 우월감으로 변한다. 그런 높이를 말하고 싶지 않다. 높이는 ‘내가 저 사람보다 우월하다’는 위치가 아니라 같은 싸움과 반응에서 조금 더 멀리 볼 수 있는 거리에 가깝다고 생각하고 싶다. 어제는 누군가의 말 한마디 때문에 힘든 하루를 보냈다. 오늘은 같은 말을 들어도 내 일을 계속할 수 있다. 그 정도의 높이. 예전에는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가 하루의 기준이었다. 지금은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한 가지 더 볼 수 있다. 그 정도의 높이. 예전에는 싫은 것을 없애는 데 힘을 썼다. 지금은 내가 좋아하는 것을 만드는 데 조금 더 힘을 쓸 수 있다.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그래서 요즘은 불편한 감정이 생겼을 때 무조건 없애려고 하기보다 한번 물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감정은 나에게 무엇을 알려주고 있는가. 누군가의 허세가 유난히 싫다. 왜 싫을까. 나는 무엇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가. 과장하지 않고 자기 일을 하는 사람을 좋아하는가. 그렇다면 내가 그렇게 살아가면 된다. 누군가 끊임없이 다른 사람의 평가를 이야기하는 모습이 불편하다. 왜 그럴까. 나 역시 평가에 지나치게 흔들렸던 경험이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을 비난하기보다 내 삶에서 평가가 차지하는 자리를 줄이는 쪽으로 움직일 수 있다. 시간을 허비한 날의 내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는 왜 이렇게 게으르지’라고 끝낼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떤 시간에는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는지 찾아볼 수 있다. 역겨움이 가리키는 반대편에는 종종 내가 원하는 가치가 숨어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주의해야 한다. 모든 싫음을 진리처럼 믿어서는 안 된다. 내가 싫다고 해서 그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익숙하지 않아서 싫을 수도 있다. 나와 다르기 때문에 불편할 수도 있다. 내가 가진 편견 때문에 거부감이 생길 수도 있다. 특히 사람을 향한 역겨움에는 더 조심해야 한다. ‘나는 저런 삶을 선택하지 않겠다’와 ‘저 사람은 가치가 낮다’는 전혀 다른 말이다. 첫 번째는 내 삶의 선택이고, 두 번째는 타인의 존재에 대한 판정이다. 니체의 표현을 따라가다가 이 둘을 섞으면 위험하다. 그래서 나는 「잡것들」을 실제 사람을 ‘잡것’으로 분류하는 이야기로 읽기보다 내 삶을 흐리게 만드는 방식과 가치들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읽는 편이 좋다.

 

그 ‘잡것’은 밖에만 있지 않다. 내 안에도 있다. 다른 사람의 평가를 자꾸 확인하는 나. 별 의미 없이 화면을 넘기는 나. 내가 옳다는 것을 끝까지 증명하고 싶어 하는 나. 상대가 바뀌어야 내 마음이 편해지는 나. 해야 할 것을 미루면서 이유를 만들어내는 나. 누군가에게서 그런 모습을 보면 싫어하면서 나 자신도 똑같이 행동할 때가 있다. 그렇다면 역겨움의 대상은 ‘나쁜 사람들’이 아니다. 내 안에서도 반복되는 더 이상 키우고 싶지 않은 힘일 수 있다. 이렇게 읽으면 역겨움이 조금 덜 공격적인 감정이 된다. 누군가에게 돌을 던지는 힘이 아니라 내 삶의 방향을 조정하는 감각이 된다. “나는 이것이 싫다.”라는 말 뒤에 한 문장을 더 붙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더 좋아하며 살 것인가.”

 

휴대폰을 계속 들여다보는 삶이 싫다면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조금 더 만든다. 타인의 시선에 따라 흔들리는 모습이 싫다면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을 하나 더 해본다. 권력을 가진 사람이 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모습이 싫다면 내가 누군가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때 다른 태도를 선택한다. 말만 많고 실제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모습이 싫다면 작은 행동 하나를 시작한다. 그러면 싫음이 내 삶의 연료가 된다. 다만 그 연료는 오래 쓰지 않아도 된다. 비행기가 이륙하고 나면 활주로를 계속 바라볼 필요가 없는 것처럼. 어느 순간에는 ‘싫어서’ 하는 일을 넘어 ‘좋아서’ 하는 일로 바뀌어야 한다.

 

나는 이것이 역겨움과 혐오의 경계라고 생각한다. 혐오는 싫어하는 대상을 계속 필요로 한다. 그 대상이 있어야 화를 낼 수 있고, 자신이 옳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반면 날개가 된 역겨움은 결국 그 대상을 필요로 하지 않게 한다. 더 좋은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책 한 권에 깊이 들어가는 시간이 좋아지면 휴대폰을 참는 일이 중심이 아니게 된다. 내 기준으로 한 일을 해내는 기쁨을 알게 되면 남의 평가를 무시하려 애쓰는 일이 조금 덜 중요해진다. 좋은 관계의 모습을 경험하면 싫은 관계를 계속 분석할 이유도 줄어든다. 내가 좋아하는 삶이 조금씩 커질수록 싫어하는 것의 비중은 작아진다.

 

앞선 글에서  싫은 사람과 싸우는 대신 거리를 만들 수 있는지 물었다. 이제는 거리를 만든 다음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거리를 두고도 계속 미워한다면 나는 아직 그 사람에게 묶여 있다. 반면 싫음이 내게 다른 방향을 알려주고 그 방향으로 움직이게 만든다면 역겨움도 하나의 힘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앞으로 어떤 것이 몹시 싫어질 때 두 가지를 묻고 싶다. 나는 지금 이것을 미워하는 데 힘을 쓰고 있는가. 그리고 이 싫음을 이용해 어디로 움직이고 싶은가. 첫 번째 질문에만 머물면 혐오가 커진다. 두 번째 질문으로 넘어갈 수 있다면 조금 다른 삶이 시작될 수도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역겨움 때문에 더 높은 곳으로 날아올라 다시 즐거움의 샘을 찾는다. 나는 그 장면을 누군가보다 높은 사람이 되라는 말로 읽고 싶지 않다. 오히려 이런 말로 읽고 싶다. 싫어하는 것보다 더 오래 바라볼 수 있는 것을 찾아라. 없애고 싶은 것보다 만들고 싶은 것을 가져라. 그리고 반대하는 것에 의해 정의되지 않는 삶을 만들어라. 그것이 역겨움에서 돋아난 날개가 갈 수 있는 방향 아닐까.

 

그런데 니체가 이렇게 거리와 차이를 강조하는 것을 읽다 보면 불편한 질문 하나를 피할 수 없다. 사람 사이의 차이를 강조하고, 평준화를 경계하며, ‘거리’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니체는 평등 자체를 반대한 철학자였을까. 혹은 그가 의심했던 것은 평등이라는 가치 그 자체보다 평등을 요구하는 마음속에 숨어 있는 어떤 힘이었을까. 다음에는 이 불편한 문제를 조금 더 조심스럽게 들여다봐야 할 것 같다(89)

 

 

앞 선 글에서  마지막에서 이런 질문을 남겼다. 어떤 사람과 함께 있으면 내 힘이 계속 줄어드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 사람의 말이 자꾸 마음에 걸리고, 만나고 돌아오면 기분이 나쁘고, 혼자 있을 때도 그 사람이 했던 말을 다시 떠올린다. 그렇다면 계속 싸우는 것이 답일까. 아니면 때로는 거리를 만드는 것이 더 강한 행동일 수도 있을까.

 

사람과 거리를 둔다는 말을 들으면 먼저 부정적인 느낌이 든다. 관계를 피한다. 사람을 싫어한다.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도망친다. 서로 이해하려는 노력을 포기한다. 나 역시 오랫동안 관계에서는 가능하면 좋게 지내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같은 조직에 있다면 더 그렇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어도 함께 일해야 한다. 의견이 달라도 대화해야 한다. 팀을 이끄는 위치라면 내가 싫다고 사람을 피할 수도 없다. 그래서 갈등이 생기면 문제를 풀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해가 있으면 설명하고, 의견이 다르면 설득하고, 잘못된 것이 보이면 고치려고 했다.

 

그런데 모든 관계가 설명과 설득으로 좋아지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설명을 더 많이 하면 할수록 상대도 자기 입장을 더 길게 설명한다. 나는 상대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상대는 내가 자기 이야기를 듣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조금 전까지 업무에 대한 의견 차이였는데 어느 순간 서로의 태도와 성격을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왜 항상 그런 식으로 생각합니까.” “전에 그때도 그랬잖아요.” 문제보다 사람이 앞에 나온다. 그리고 회의가 끝난 뒤에도 대화는 끝나지 않는다. 혼자 머릿속에서 계속 이어진다. ‘그때 이렇게 말했어야 했는데.’ ‘왜 저 사람은 저렇게 생각하지.’ ‘다음에는 분명하게 얘기해야겠다.’

 

상대는 이미 내 앞에 없는데 내 머릿속에서는 여전히 그 사람과 싸우고 있다. 이럴 때 누가 누구를 지배하고 있는 것일까. 겉으로는 내가 상대에게 화가 나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상대가 내 시간과 생각을 계속 가져가고 있다. 앞선 글에서 반동적인 힘을 생각했을 때 보았던 모습과 닮았다. 상대가 한 말이 내 다음 생각을 만들고, 내 다음 행동을 만들고, 때로는 다음 날 기분까지 결정한다. 싫어하는 사람에게 너무 많은 관심을 주는 순간, 나는 그 사람에게서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가까이 붙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료에서 ‘거리의 파토스’라는 말을 만났다. 파토스라는 말은 조금 어렵지만, 여기서는 우선 어떤 것과 나 사이에 차이를 만들어내는 힘의 감정 정도로 이해해보고 싶다. 흥미로운 것은 니체가 거리를 ‘대립’과 구분한다는 점이다. 상대와 계속 대립한다는 것은 서로 반대편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같은 문제 안에 계속 머무르는 일일 수 있다. 상대가 움직이면 나도 움직이고, 상대가 말하면 나도 반박한다. 둘은 서로를 싫어하지만 계속 서로에게 묶여 있다.

 

반면 거리는 다르다. 상대를 반드시 이겨야 할 이유가 없다. 내 생각을 이해시키지 않아도 된다. 상대를 내가 원하는 사람으로 바꾸지 않아도 된다. 그 사람이 그 사람으로 존재하도록 두고 나는 내가 가려던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다. 최근 ‘내버려 두라’는 말을 들었을 때도 비슷한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왜 내 기대와 다르게 하는지를 계속 통제하려고 하면 내가 사용할 수 있는 힘의 상당 부분이 그 사람에게 향한다. 상대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렇게 생각하게 둔다. 나를 오해한다면 모든 오해를 다 풀려고 하지 않는다. 내 방식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좋아하도록 설득하는 데 모든 힘을 쓰지 않는다.

 

처음에는 이것이 체념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런데 조금 다르게 보면 내가 바꿀 수 없는 것에서 내 힘을 회수하는 일이다. 이 말을 떠올리며 이전에  쓴 「1미터 개인의 간격」이라는 글을 다시 생각했다. 당시에는 가까운 관계에서도 어느 정도의 개인적 공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적었다. 너무 가까워지면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게 되고, 관계가 오래가려면 적당한 간격이 필요하다는 생각이었다. 그 글은 이전 글 ‘행복의 섬’을 생각할 때도 한번 꺼냈다. 그때는 나만의 공간을 만드는 거리로 읽었다. 지금은 조금 다르게 보인다. 거리는 단순히 편안함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서로를 바꾸려는 욕망을 줄이는 공간일 수도 있다.

 

너는 왜 나처럼 생각하지 않는가. 왜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너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가. 왜 내가 기대하는 방식으로 행동하지 않는가. 가까운 관계일수록 이런 질문이 많아진다. 상대를 잘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잘 안다는 생각은 쉽게 ‘그러니 저 사람은 이렇게 해야 한다’로 변한다. 거리가 생기면 조금 달라진다. 상대의 삶은 상대의 삶이고 내 삶은 내 삶이라는 사실이 다시 보인다. 이것은 무관심과는 다르다. 관심이 있어도 통제하지 않을 수 있다. 사랑하면서도 다르게 살도록 둘 수 있다. 함께 일하면서도 모든 생각에 동의하지 않을 수 있다.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모든 갈등을 끝까지 해결할 필요는 없다. 회사에서 이런 거리는 특히 미묘하다. 싫은 사람이 있다고 해서 만나지 않을 수는 없다. 같은 회의에 들어갈 수도 있고, 함께 일을 해야 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물리적인 거리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관계의 밀도를 조절하는 것은 가능하다. 필요한 이야기는 한다. 업무에 필요한 협의도 한다. 하지만 상대의 모든 말에 반응하지 않는다. 내가 동의하지 않는 생각을 들었다고 해서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상대가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지를 계속 확인하지 않는다. 업무 문제와 사람에 대한 호불호도 가능한 한 분리한다. 이것 역시 거리일 수 있다.

 

예전의 나는 갈등이 생기면 가능하면 끝까지 설명해서 서로 이해하는 것이 좋은 관계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지금은 조금 다르다. 모든 사람과 서로 이해해야만 함께 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이해보다 경계가 더 필요하다. “우리는 이 문제에서는 생각이 다릅니다.”라고 두고 다음 일을 할 수도 있다. 이 문장은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나에게는 꽤 어려운 태도다. 상대가 나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설명하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내가 틀린 사람으로 남는 것도 불편하다. 그래서 말을 더한다. 그런데 설명이 길어질수록 관계가 좋아지기는커녕 서로 자기 입장을 더 강하게 붙잡을 때도 있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은 더 좋은 논리가 아니라 그 문제에서 잠시 내려오는 것일 수도 있다. “저 사람은 저렇게 생각한다.” 그것으로 끝내는 것. 이것은 지는 것도 아니고, 동의하는 것도 아니다. 그 문제에 더 이상 내 힘을 주지 않는 것이다.

 

자료에서는 부정적인 것에 대처하는 방법을 하나로 만들지 않는다. 어떤 것은 거리를 두라고 한다. 어떤 것은 맞서 싸워야 한다. 어떤 것은 이미 내 삶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에 다른 의미로 바꾸어야 한다. 이 구분이 중요하다고 느껴진다. ‘싫은 것은 모두 피하라’는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직장에서 부당한 일을 당했는데 “거리를 두면 되지.”라고 말할 수는 없다. 누군가 지속적으로 피해를 주고 있다면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내가 책임져야 할 문제를 상대가 싫다는 이유로 피하는 것도 거리두기가 아니다. 불공정한 제도나 차별을 보고 “나는 내 삶만 살겠다.”며 돌아서는 것도 언제나 강한 행동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떤 문제는 대결해야 한다. 하지만 모든 문제를 대결의 대상으로 만들 필요도 없다. 이 구분이 어려운 것 같다. 그래서 나는 거리두기 전에 한 가지를 물어보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내가 반드시 다뤄야 할 문제인가. 내 책임과 관련된가. 누군가에게 실제 피해가 발생하고 있는가. 내가 지키고 싶은 중요한 가치와 연결되어 있는가. 그렇다면 불편해도 이야기해야 할 수 있다. 반대로 그 사람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 내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 내 방식과 다르게 산다는 것이라면 굳이 바꾸려고 하지 않아도 될 수 있다.

 

모든 차이가 해결해야 할 문제는 아니다. 생각해보면 나는 사람 때문에 힘들었던 순간들 가운데 상당 부분에서 실제 문제보다 상대가 나와 다르다는 사실과 싸웠던 것 같기도 하다. 왜 저 사람은 저렇게 말할까. 왜 저런 방식으로 일할까. 왜 저렇게 행동할까. 그 질문 안에는 은근히 하나의 답이 들어 있다. ‘내 방식이 더 낫다.’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모든 사람을 내 방식으로 바꿀 수는 없다. 그리고 꼭 그래야 할 이유도 없다.

 

이 생각은 앞선 글에서  ‘좋은 도움의 끝에는 나의 퇴장이 있어야 할지도 모른다’고 했던 것과도 조금 연결된다. 누군가를 바꾸는 것이 내 역할이라고 생각하면 나는 계속 그 사람에게 개입해야 한다. 반면 그 사람이 자기 방식으로 판단할 수 있다고 인정하면 조금 떨어질 수 있다. 거리는 상대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에게도 자기 삶을 돌려주는 것일 수 있다. 나 자신에게도 마찬가지다. 나는 다른 사람과의 갈등이 생기면 상대의 문제점을 오래 생각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할수록 이상하게 상대의 비중이 더 커졌다. 싫은 사람을 생각하는 데 좋아하는 사람보다 더 많은 시간을 쓰는 역설이 생긴다. 좋아하지 않는 방식에 반대하느라 내가 원하는 방식은 정작 만들지 못한다.

 

앞선 글에서 ‘어떤 힘이 이것을 만들었는가’라고 물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싫어하는 사람과 계속 싸우는 행동의 뒤에는 무엇이 있을까. 정의를 지키려는 힘일 수도 있다. 책임감일 수도 있다. 하지만 때로는 내가 옳다는 것을 인정받고 싶은 힘, 상대를 반드시 바꾸고 싶은 힘, 마지막 말을 내가 해야 마음이 놓이는 힘이 있을 수도 있다. 그 힘을 알아차리면 싸움이 꼭 필요한지 다시 볼 수 있다. 상대를 이기지 않아도 내가 원하는 삶을 계속 살 수 있다면, 그 싸움은 정말 필요한가. 이 질문은 생각보다 많은 갈등을 작게 만든다.

 

최근에는 사람뿐 아니라 정보와도 거리가 필요하다고 느낀다. 휴대폰을 열면 동의할 수 없는 주장, 화나게 하는 뉴스, 이해되지 않는 댓글이 끝없이 나온다. 하나를 읽고 화가 난다. 다른 글을 찾는다. 반박 댓글을 읽는다. 시간이 지나면 내가 왜 휴대폰을 열었는지도 잊는다. 이 역시 부정적인 것과 지나치게 가까워지는 방식일 수 있다. 세상에 잘못된 일이 많다는 사실과 내가 모든 잘못된 것에 반응해야 한다는 것은 다른 문제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힘은 한정되어 있다. 무엇에 시간을 줄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그래서 ‘눈길을 돌린다’는 말이 무책임하게만 들리지 않는다. 때로는 눈길을 돌려야 내가 정말 보고 싶은 것을 볼 수 있다. 부정적인 것에 쓰지 않은 힘으로 좋아하는 책을 읽고, 가족과 산책하고, 글을 쓰고, 사진을 찍고,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할 수 있다.

 

이것이 자료에서 말한 ‘긍정을 행함으로써 부정을 내버려두는 것’과 연결되는 것 같다. 싫어하는 것을 없애는 데 삶을 쓰는 것이 아니라 좋아하는 것을 더 많이 살아내면서 싫어하는 것의 비중을 줄이는 것. 이 차이가 크다. 나는 예전에는 자유를 싫은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싫은 사람과 거리를 두었는데도 계속 그 사람을 생각한다면 아직 멀어진 것이 아니다. 회사를 떠났는데도 몇 년 동안 그 회사에 대한 분노만 이야기한다면 몸은 떠났어도 마음은 여전히 그곳에 있을 수 있다. 진짜 거리는 물리적인 거리가 아니라 그 대상이 내 삶을 결정하는 힘을 줄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거리두기의 목표는 상대를 미워하지 않게 되는 것도 아닐 것이다. 싫으면 싫을 수 있다. 모든 사람을 좋아해야 할 이유는 없다. 다만 싫다는 감정이 내 하루의 방향까지 결정하게 만들지 않는 것. 그 사람을 피하기 위해 내 삶을 바꾸고, 그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해 무엇인가를 하고, 그 사람을 이기기 위해 시간을 쓰는 순간 아직 내 삶의 중심에는 그 사람이 있다. 그럴 때 거리는 충분하지 않다. 내가 다시 내 삶의 중심으로 돌아와야 한다.

 

이전  ‘1미터의 간격’을 생각했을 때는 서로에게 숨 쉴 공간을 주는 문제를 생각했다. 지금은 거기에 하나를 더 붙이고 싶다. 거리는 내 힘이 어디로 흘러갈지를 선택하는 공간이다. 가까이 있는 모든 것에 반응하지 않을 수 있는 공간. 다른 사람의 기대와 내 욕망을 구별할 수 있는 공간. 싫은 사람의 말보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다시 볼 수 있는 공간. 그렇다면 거리를 둔다는 것은 관계의 실패가 아닐 수도 있다. 오히려 어떤 관계를 더 이상 전쟁으로 만들지 않는 기술일 수 있다.

 

물론 나는 여전히 쉽게 반응할 것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말을 들으면 화가 날 것이고, 내가 옳다고 생각하면 설명하고 싶을 것이다. 싫은 사람의 행동이 자꾸 눈에 들어올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제 그때 한 가지는 물어볼 수 있을 것 같다. 이 사람과 싸우는 데 내 힘을 얼마나 쓰고 싶은가. 그리고 그 힘을 다른 곳에 쓴다면 나는 무엇을 만들 수 있을까.

 

모든 싸움에서 이길 필요는 없다. 어떤 싸움은 하지 않는 것이 이기는 것일 수도 있다. 정확히는 이긴다기보다 그 싸움이 더 이상 내 삶의 중심이 되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 사람은 그대로 있을 수 있다. 그 사람의 생각도 그대로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다른 곳으로 움직일 수 있다. 이것이 내가 지금 이해하는 거리의 힘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감정이 남는다. 거리를 만들게 하는 첫 신호는 종종 불편함이다. 싫음, 거부감, 때로는 역겨움이다. 우리는 이런 감정을 좋지 않은 것으로 생각한다. 없애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무엇인가가 너무 싫다는 감정이 ‘나는 저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방향을 알려줄 수도 있지 않을까. 싫음에 붙잡혀 미움만 키우는 대신 그 감정을 이용해 다른 곳으로 움직일 수 있다면 어떨까. 다음 질문은 그곳에서 시작된다. 역겨움도 나를 더 높은 곳으로 움직이게 하는 날개가 될 수 있을까(88)

 

 

앞 선 글에서 나는 힘을 조금 다르게 생각하게 되었다. 혼자 할 수 있는 능력만이 힘은 아니었다. 책을 읽고,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새로운 도구를 배우고, 바깥의 것을 받아들여 내 방식으로 사용할 수 있는 능력도 힘이었다. 그러면서 마지막에 한 가지 질문이 남았다. 같은 행동도 전혀 다른 힘에서 나올 수 있다면 행동의 겉모습만 보고 옳고 그름을 판단해도 되는 것일까.

 

누군가 침묵한다. 우리는 말한다. 소극적인 사람이라고. 그런데 정말 그럴까. 두려워서 말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고, 지금은 말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것일 수도 있다. 누군가 부탁을 거절한다. 우리는 이기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의 한계를 알고 책임질 수 있는 만큼만 맡은 것일 수도 있다. 누군가는 다른 사람을 돕는다. 선한 행동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전 글에서 생각했던 것처럼 그 도움을 통해 자신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을 수도 있다. 행동 하나만 보면 알 수 없는 것이 너무 많다.

 

그래서 힘의 유형학을 배우면서 가장 오래 남는 질문은 의외로 단순했다. 무엇을 했는가보다 어떤 힘이 그 행동을 만들었는가. 이 질문은 평소 내가 하던 판단의 순서를 바꾼다. 나는 어떤 일을 보면 먼저 좋다거나 나쁘다고 생각한다. 옳다거나 틀렸다고 판단한다. 성실하다. 게으르다. 이기적이다. 책임감이 있다. 욕심이 많다. 좋은 사람이다. 나쁜 사람이다. 그런데 니체는 그 판단보다 한 걸음 뒤로 물러나게 한다. 잠깐. 그 행동은 어디에서 나왔는가. 무엇에 반응한 것인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 그 행동을 반복하면 어떤 힘이 커지는가.

 

이 질문을 최근 아주 사소한 일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책장을 줄이고 있다. 오랫동안 관심 있는 작가가 생기면 그 사람의 책을 여러 권 샀다. 한 권을 재미있게 읽으면 다른 책도 사고, 작가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전작을 읽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책을 모으기도 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책장이 점점 채워졌다. 문제는 모든 책을 읽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강신주 작가 책을 정리했고, 김정운 작가 책도 정리했다. 얼마 전에는 유시민 작가의 책 여섯 권이 팔렸다. 그중 실제로 읽은 것은 두 권 정도였던 것 같다.

 

택배를 보내려고 책을 꺼내는데 묘한 마음이 들었다. 아쉬웠다. 언젠가 읽으려고 샀던 책이었다. 은퇴하고 시간이 많아지면 읽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한때는 관심을 가지고 모았던 작가의 책이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조금 가벼워졌다. 책장에 공간이 생겼다. 읽지 않은 책을 볼 때마다 느끼던 작은 부담도 줄어들었다. 두 감정이 동시에 있었다. 아쉬움과 가벼움. 처음에는 단순히 생각했다. 책을 정리하는 것이 지금 내게 필요한 일이구나.

 

하지만 힘의 유형학을 읽고 나니 질문이 조금 달라졌다. 나는 왜 이 책들을 정리하고 있는가. 같은 책을 판매하는 행동도 전혀 다른 힘에서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왜 이렇게 읽지도 않을 책을 많이 샀을까.’라고 과거의 소비를 부끄러워하며 처분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정리는 과거의 나를 부정하는 행동이 될 수 있다. ‘이제 책을 줄여야 한다.’라는 새로운 규칙을 만들어 책이 많다는 사실 자체를 견디지 못해서 버릴 수도 있다. 이 경우에는 미니멀리즘이라는 새로운 기준에 나를 맞추고 있을지도 모른다. 반대로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동안 이 책들은 내 관심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보여주었다. 읽은 책도 있고, 읽지 못한 책도 있다. 그 시기의 나에게는 필요한 욕망이었다. 하지만 지금 관심은 조금 달라졌다. 그러니 과거의 관심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지금 읽고 싶은 책과 생각할 것에 공간을 내주는 것이다.

 

겉으로 보면 모두 똑같다. 책을 판다. 하지만 그 행동을 만드는 힘은 다르다. 과거의 나를 지우기 위해 정리하는 것과, 지금의 나에게 공간을 만들기 위해 정리하는 것은 같은 행동이 아니다. 이 차이가 마음에 남았다. 우리는 행동에 이름을 붙이는 데 익숙하다. 책을 버리면 미니멀리즘. 계속 가지고 있으면 집착. 회사에 오래 남아 있으면 성실함. 정시에 퇴근하면 워라밸. 다른 사람의 부탁을 들어주면 배려. 거절하면 이기심. 하지만 이렇게 행동만 분류하면 중요한 것이 빠진다. 왜 그렇게 하는가. 어떤 힘이 그것을 하고 있는가.

 

같은 야근도 다를 수 있다. 해야 할 일이 있고 내가 끝까지 책임지고 싶어서 조금 더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반대로 다른 사람이 퇴근하지 않기 때문에 먼저 가면 눈치가 보여 앉아 있는 사람도 있다. 두 사람 모두 늦게 퇴근한다. 출퇴근 기록만 보면 똑같다. 하지만 그 시간을 움직인 힘은 다르다. 반대로 같은 정시퇴근도 다르다. 자기 시간을 지키고 내일 다시 일할 힘을 남겨두기 위해 퇴근할 수도 있다. 맡은 일을 외면하고 다른 사람이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아서 갈 수도 있다. 행동만으로는 그 사람을 다 알 수 없다.

 

이렇게 생각하면 ‘착한 행동’이라는 말도 다시 어려워진다. 이전 글에서 여러 번 다뤘던 도움도 그렇다. 같은 도움인데 상대가 다시 자기 힘으로 일어서기를 바라며 도울 수 있다. 반대로 상대가 계속 나를 필요로 하기를 바라며 도울 수도 있다. 밖에서 보면 두 사람 모두 친절하다. 그러나 그 관계가 오래 지속된 뒤 나타나는 모습은 다를 것이다. 한쪽에서는 상대의 힘이 커지고, 다른 쪽에서는 의존이 커질 수 있다. 그래서 이제는 행동의 이름보다 그 행동 뒤에서 무엇이 커지고 있는가를 보고 싶어진다.

 

이 질문은 다른 사람보다 나 자신에게 더 어렵다. 다른 사람의 행동에는 쉽게 이유를 붙이면서 내 행동에는 그럴듯한 이유를 붙이기 쉽기 때문이다. 나는 책임감이 있어서 그랬다. 가족을 위해서 그랬다. 조직을 위해서 그랬다. 상대를 도우려고 그랬다.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그랬다. 모두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지는 알 수 없다. 책임감과 함께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수도 있다. 가족을 생각하는 마음과 함께 내 방식대로 움직였으면 하는 욕망이 있었을 수도 있다. 도우려는 마음과 함께 내 조언이 옳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을 수도 있다.

 

앞 선 글에서 내 안에는 하나의 힘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행동 하나에도 여러 힘이 섞여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좋은 마음으로 했다.”가 아니라 “그 행동에는 어떤 마음들이 함께 있었을까.” 이 질문은 조금 덜 편하다. 하지만 사람을 선하거나 악한 존재로 간단하게 분류하지 않게 한다. 나 자신도 마찬가지다. 나는 착한 사람인가. 이기적인 사람인가. 용기 있는 사람인가. 소심한 사람인가. 그렇게 나를 하나의 성격으로 규정하기보다 어떤 상황에서 어떤 힘이 나오는지를 볼 수 있다.

 

이런 시선은 내가 몇 년 동안 글쓰기를 해온 방식과도 조금 닮아 있다. 처음에는 그날 있었던 일을 적는 경우가 많았다. 누군가와 무슨 일이 있었고, 기분이 어땠고, 그 일이 좋았는지 나빴는지를 썼다. 그런데 오래 쓰다 보니 사건 자체보다 그 사건에 내가 왜 그렇게 반응했는지가 더 궁금해졌다. 왜 그 말이 유독 마음에 걸렸을까. 왜 인정받지 못했다고 느꼈을까. 왜 거절하기가 어려웠을까. 왜 물건 하나를 그렇게 갖고 싶었을까. 왜 별것 아닌 평가 하나가 하루 전체의 기분을 바꾸었을까. 처음에는 바깥의 사건을 적었다. 그 다음에는 내 감정을 적었다. 그리고 조금씩 감정과 행동을 만들어낸 힘을 묻게 되었다.

 

글쓰기에서 반복해서 등장한 인정, 평가, 욕망, 조직, 관계, 자유 같은 주제들도 결국 비슷한 질문이었던 것 같다. 겉으로는 서로 다른 사건인데 몇 년이 지나 다시 보면 같은 힘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다른 사람의 평가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힘.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힘. 맡은 일을 잘 끝내고 싶은 힘. 혼자 있고 싶은 힘. 새로운 것을 배우고 싶은 힘. 무언가를 기록하고 연결하고 싶은 힘. 일상의 사건들은 달랐지만 그 뒤에서 움직이는 힘은 반복되었다. 그래서 매일글쓰기는 내가 무슨 일을 했는지 기록하는 일인 동시에 내 안에서 어떤 힘이 자주 등장하는지 관찰하는 일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니체를 읽고 나니 그 기록을 보는 방법이 조금 달라졌다. 예전에는 ‘이 행동은 옳았나.’ ‘내가 잘못했나.’라고 물었다면 이제는 질문 하나를 먼저 넣어볼 수 있다. 그때 어떤 힘이 나를 움직였을까. 이것은 옳고 그름을 포기하자는 뜻은 아니다. 잘못된 행동은 책임져야 한다.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었다면 ‘내 안의 힘이 그렇게 작동했을 뿐’이라고 말하며 넘어갈 수는 없다. 행동의 결과와 책임은 그대로 남는다. 오히려 힘을 묻는 것은 같은 행동을 다시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필요하다. 화를 내고 나서 “화내면 안 됐어.”라고 반성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할 수 있다. 다음에도 비슷한 상황이 오면 다시 화를 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보다 더 필요한 질문은 왜 그 말이 나를 그렇게 자극했는지 보는 것이다. 무시당했다고 느꼈는가. 내가 옳다는 것을 인정받고 싶었는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두려웠는가. 내 책임이 될까 불안했는가. 그 힘을 보아야 다음에는 다른 행동이 나올 가능성도 생긴다.

 

도덕적인 판단은 행동을 멈추게 할 수 있다. 하지만 힘에 대한 질문은 행동이 만들어지는 곳까지 내려가려고 한다. 이 차이가 니체 철학에서 흥미로운 부분이다. 무엇이 선인가. 무엇이 악인가.라고 곧바로 묻기 전에 왜 우리는 이것을 선이라고 부르게 되었는가. 누가 이 가치를 필요로 하는가. 그 가치를 믿을 때 어떤 인간이 만들어지는가. 어떤 힘은 커지고 어떤 힘은 약해지는가. 이런 질문을 던진다. 그러면 ‘좋은 가치’라고 생각했던 것도 다시 보게 된다. 겸손은 좋은 가치다. 하지만 자신을 지나치게 낮추면서 다른 사람의 평가에 의존하게 만드는 겸손이라면 어떨까. 인내는 좋은 가치다. 하지만 부당한 상황에서도 아무 말 하지 못하게 만드는 인내라면 어떨까. 성실함도 좋은 가치다. 하지만 쉬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게 하고 자신을 계속 소진시키는 성실함이라면 어떨까.

 

반대로 흔히 좋지 않게 보는 행동도 다시 볼 수 있다. 거절. 거리두기. 경쟁. 분노. 욕망. 이것들이 언제나 좋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는 자신의 경계를 지키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고, 부당한 것을 바꾸고, 지금과 다른 삶을 만들게 하는 힘으로 작동할 수도 있다. 그러니 힘의 유형학은 좋은 행동과 나쁜 행동의 목록을 하나 더 만드는 철학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목록을 의심하게 한다. 같은 행동도 어떤 힘에서 나왔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삶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을 사람을 평가할 때도 기억하고 싶다. 회사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사람을 빠르게 파악하는 습관이 생긴다. 저 사람은 적극적이다. 저 사람은 소극적이다. 욕심이 많다. 책임감이 강하다. 협조적이다. 일이 느리다. 경험이 쌓이면 이런 판단이 빨라진다. 때로는 그 판단이 맞다. 하지만 빠른 판단에는 위험도 있다. 한번 붙인 이름표가 다음 행동까지 해석해버리기 때문이다. ‘소극적인 사람’이 말하지 않으면 역시 소극적이라고 생각한다. ‘욕심 많은 사람’이 새로운 일을 맡겠다고 하면 또 욕심을 낸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나는 더 이상 그 행동을 보지 않는다.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을 볼 뿐이다.

 

힘의 관점에서 보면 질문을 조금 바꿀 수 있다. 왜 지금은 말하지 않을까. 어떤 조건에서는 말할까. 왜 이 일을 맡고 싶어 할까. 무엇이 이 사람을 움직이고 있을까. 사람의 마음을 완전히 알 수는 없다. 잘못 추측할 수도 있다. 그래도 ‘저 사람은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 끝내는 것보다 조금 더 많은 가능성을 남긴다. 무엇보다 이 질문은 나 자신에게도 같은 여지를 준다. 나는 원래 남의 눈치를 많이 보는 사람이다. 나는 원래 걱정이 많다. 나는 원래 욕심이 있다. 나는 원래 거절을 잘 못한다. 이런 설명은 편하지만 앞으로도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되기 쉽다. 하지만 힘으로 보면 달라진다. 지금 이 상황에서는 이 힘이 나를 크게 움직이고 있다. 그렇다면 다른 힘이 움직일 조건을 만들 수도 있다. 사람의 본질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힘의 관계를 바꾸는 문제가 된다.

 

앞선 글에서 힘에의 의지는 권력욕만을 뜻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약자와 강자를 사람에게 붙이는 이름표에서 떼어냈다. 이어 내가 시작하는지 반응하는지를 보았고, 그 힘이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늘리는지 줄이는지를 물었다.  내 안에 하나가 아니라 여러 힘이 있다는 것을 보았다. 가진 힘이 실제로 사용될 때 삶이 된다고 생각했고, 바깥의 것을 받아들여 내 힘으로 만드는 수용력까지 살펴보았다. 그 흐름을 지나 하나의 질문만 남겨두고 싶다. 무엇이 옳은가를 묻기 전에, 어떤 힘이 이것을 만들었는가.

 

물론 언제나 답할 수 있는 질문은 아니다. 사람의 행동에는 여러 이유가 섞여 있고, 나 자신의 욕망조차 정확히 알기 어렵다. 그래도 질문을 던지는 것만으로 판단의 속도가 조금 느려진다. 좋다. 나쁘다. 착하다. 이기적이다. 강하다. 약하다. 그렇게 이름 붙이기 전에 한번 더 본다. 이 행동은 무엇에 대한 반응인가. 무엇을 지키려는가. 무엇을 얻으려는가. 이 행동 이후 어떤 힘이 더 커지는가. 무엇을 새롭게 할 수 있게 되는가. 그리고 이런 질문을 오래 하다 보면 도덕적인 판정보다 조금 더 근본적인 곳에 닿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지금 어떤 힘을 키우며 살고 있는가.

 

책을 정리하면서도 그 질문을 할 수 있다. 버리는 것이 옳은가, 가지고 있는 것이 옳은가보다 이 정리가 앞으로 무엇을 위한 공간을 만드는가. 사람과 거리를 둘 때도 마찬가지다.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착한가, 떠나는 것이 이기적인가보다 그 관계 속에서 서로의 어떤 힘이 커지고 있는가. 일을 선택할 때도 남들이 좋다고 하는 일인가보다 그 일을 하면서 나는 무엇을 더 할 수 있게 되는가. 질문의 순서가 달라진다. 아마 이것이 힘에의 의지를 공부하면서 내가 얻은 가장 실용적인 변화일 것이다. 삶을 빠르게 판정하기보다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는 것. 행동 아래의 욕망을 보고, 욕망 아래의 힘을 보고, 그 힘이 무엇을 만들어내는지를 보는 것. 그리고 그때마다 다시 묻는 것. 이 힘을 계속 키우고 싶은가.

 

2부에서 시작한 힘에의 의지에 대한 질문은 여기까지 왔다. 그런데 힘을 바라보기 시작하면 자연스럽게 사람 사이의 문제로 넘어간다. 어떤 사람과 함께 있으면 내 힘이 계속 줄어드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어떤 관계에서는 자꾸 상대를 미워하고, 비교하고, 반응하게 된다. 그렇다면 그 관계를 계속 붙잡고 싸우는 것이 답일까. 아니면 때로는 싸우는 것보다 거리를 만드는 것이 더 강한 행동일 수도 있을까. 다음 질문은 그곳에서 시작된다(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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