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의 「순결」을 읽으며 처음에는 조금 낯설었다. 순결과 관능. 요즘의 내 삶과는 멀리 떨어진 주제처럼 느껴졌다. 그러나니체가 묻는 것은 성적 욕망만이 아니었다. 더 근본적인 질문이었다. 나는 욕망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억누르는가. 끌려가는가. 아니면 그 욕망을 내 삶의 힘으로 바꿀 수 있는가. 이렇게 바꾸어 생각하니 갑자기 이야기가 가까워졌다.

 

나는 꽤 많은 욕망과 함께 살고 있다. 좋은 카메라를 갖고 싶고, 새로운 렌즈를 써보고 싶고, 책을 사고 싶고, 글을 잘 쓰고 싶고, 일에서도 좋은 결과를 내고 싶다. 어쩌면 욕망이 없는 날보다 욕망으로 움직이는 날이 훨씬 많다. 그렇다면 문제는 욕망 자체가 아닐지도 모른다.

 

욕망을 없애면 자유로워질까

 

우리는 종종 욕망을 자유의 반대편에 놓는다. 욕심을 줄여라. 집착하지 마라. 소유를 줄여라. 절제하라. 맞는 말이다. 실제로 욕망이 너무 커지면 그것에 끌려다니기 쉽다. 그런데 니체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욕망을 억압한다고 해서 욕망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억누른 욕망은 사라지지 않는다. 모습을 바꾼다.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할수록 오히려 그것에 더 많은 생각을 쓰기도 한다. 먹지 않겠다고 결심했는데 하루 종일 음식 생각을 하고, 물건을 사지 않겠다고 하면서 계속 쇼핑 사이트를 들여다본다. 겉으로는 절제하고 있지만 마음은 여전히 그것에 붙잡혀 있다. 그렇다면 절제와 자유는 같은 것이 아니다.

 

사고 싶은 마음

 

고가의 장비를 사고팔면서 이 문제를 여러 번 경험했다. 처음에는 분명 사용하고 싶어서 샀다. 더 좋은 성능을 경험하고 싶었고, 그 장비가 가능하게 할 새로운 작업을 상상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사용보다 소유가 앞서기 시작한다. 사고 나면 잠시 만족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장비가 눈에 들어온다.

 

비교하고, 검색하고, 가격을 알아보고, 다시 가능성을 상상한다. 정작 사용하는 시간보다 장비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더 길어질 때도 있었다. 이때 이상한 질문이 생긴다. 내가 이 물건을 원하는 것인가, 아니면 원하는 상태 자체를 계속 원하는 것인가. 둘은 꽤 다르다.

 

가능성을 소유하고 싶다는 욕망

 

예전에 고성능 노트북을 정리하면서 물건을 보유한다는 것은 단순히 공간을 차지하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물건은 관심을 요구한다. 관리해야 하고, 업데이트해야 하고, 가격이 떨어지는 것도 신경 쓰이고, 쓰지 않으면 아깝다는 생각도 든다. 나는 물건을 소유하지만

어느 순간 물건도 내 시간과 관심의 일부를 소유한다. 그때 내가 원했던 것은 물건 자체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이 장비가 있으면 이런 것도 할 수 있다.” 라는 가능성을 갖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영상 편집도 할 수 있고, 그래픽도 할 수 있고, AI도 돌릴 수 있고, 언젠가 새로운 작업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가능성. 하지만 가능성을 소유하는 것과 실제로 사용하는 것은 다르다. 나는 가능성을 많이 갖고 있으면서 정작 그 가능성을 충분히 사용하지 못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욕망은 나쁜 것인가

 

여기서 다시 니체가 중요해진다. 그는 욕망 자체를 악으로 돌리지 않는다. 오히려 욕망을 죽이려 하지 말라고 한다. 나는 이 태도가 마음에 든다. 좋은 카메라를 사고 싶은 마음도, 새로운 책을 읽고 싶은 마음도, 더 좋은 글을 쓰고 싶은 마음도 그 자체로 잘못은 아니다. 오히려 그런 욕망이 없었다면 나는 지금보다 훨씬 적게 움직였을 것이다. 카메라가 있었기에 밖으로 나갔고, 책을 샀기에 읽기 시작했고, 글을 남기고 싶었기에 생각을 문장으로 만들었다. 욕망은 나를 흔들지만 동시에 나를 움직인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욕망이 있는가 없는가가 아니라, 그 욕망이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가 인 것 같다.

 

욕망이 나를 사용하는 순간

 

같은 카메라에 대한 욕망도 전혀 다르게 작동한다. 어떤 날에는 카메라 때문에 밖으로 나간다. 거리의 빛을 보고, 사람을 기다리고, 평소 지나치던 풍경을 더 오래 본다. 그날 카메라는 내 감각을 넓혀준다. 그런데 어떤 날에는 하루 종일 장비 비교만 한다. 해상력과 센서 성능을 찾아보고, 사용기를 읽고, 새 제품 가격을 비교한다. 사진은 한 장도 찍지 않는다. 같은 욕망인데 결과는 정반대다. 하나는 세계와의 관계를 넓히고, 다른 하나는 내 관심을 물건 안에 가둔다. 그래서 요즘은 욕망을 판단할 때 이 질문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욕망은 내 힘을 늘리고 있는가, 줄이고 있는가.

 

힘을 늘린다는 것

 

여기서 ‘힘’은 남을 이기는 힘이 아니다. 더 많이 보고, 더 오래 집중하고, 더 잘 판단하고, 조금 더 넓게 관계 맺을 수 있는 힘에 가깝다. 책에 대한 욕망도 그렇다. 책을 많이 사는 것 자체가 내 힘을 늘려주는 것은 아니다. 책장이 가득 차도 읽지 않으면 그 가능성은 잠든 채 남아 있다.

반대로 한 권을 오래 읽고, 문장 하나를 붙들고, 그 문장이 내 경험을 다시 보게 만든다면 한 권의 책이 수십 권보다 더 큰 힘을 줄 수도 있다.

 

그래서 요즘의 니체 읽기가 예전의 독서와 조금 다르게 느껴진다. 읽은 권수는 늘지 않는데 질문은 늘어난다. 어쩌면 지금 내게 필요한 독서는 더 많이 소유하는 독서가 아니라 더 깊이 변하는 독서인지도 모른다.

 

순진무구한 관능

 

니체는 ‘관능의 순진무구’를 말한다. 나는 이 표현을 욕망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상태로 읽어본다. 좋은 것을 갖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고

스스로를 탐욕스럽다고 비난하지 않는다. 멋진 사진을 찍고 싶고,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 싶고, 좋은 성과를 내고 싶은 마음도 인정한다. 그 욕망이 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 그 대신 한 가지를 더 본다. 그 욕망이 지금 나를 어디로 끌고 가고 있는가. 그러면 억압하는 대신 관찰할 수 있다. 욕망을 적으로 만들지 않으면서도 그 욕망의 노예가 되지 않는 가능성이 생긴다.

 

‘참는 것’과 ‘필요하지 않은 것’

 

 ‘바탕에서 순결한 자’라는 표현이 있다.  나는 이것을 억지로 참는 사람과 더 이상 크게 끌리지 않는 사람의 차이로 생각해보았다. 무언가를 눈앞에 두고 “참아야 한다.” 고 계속 말하고 있다면 나는 아직 그것과 강하게 싸우고 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굳이 필요하지 않다.” 고 느끼게 되면 싸움 자체가 줄어든다.

 

이 둘의 차이는 크다. 전자는 의지력으로 버티는 것이고, 후자는 가치가 바뀐 것이다. 예전에는 갖고 싶었던 것이 지금은 별로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을 때가 있다. 그때 비로소 나는 욕망을 이긴 것이 아니라 욕망을 바라보는 내가 달라졌다는 것을 알게 된다.

 

버리는 것보다 관계를 바꾸는 것

 

물건을 줄이는 일도 비슷하다. 많이 버린다고 반드시 자유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미니멀리스트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고 얼마나 적게 소유하는지를 자랑하기 시작하면 다시 다른 방식의 소유욕이 생긴다. 중요한 것은 개수가 아닐 수 있다. 열 개를 가지고 있어도 그것들이 나를 지배하지 않을 수 있고, 하나밖에 없어도 그 하나에 완전히 사로잡힐 수 있다. 그래서 요즘은 “무엇을 버릴까.” 보다 “이것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라는 질문이 더 중요하게 느껴진다.

 

글쓰기도 욕망이다

 

매일 글을 쓰는 것도 욕망에서 시작한다. 생각을 남기고 싶다. 잊고 싶지 않다. 조금 더 잘 쓰고 싶다. 어쩌면 누군가 읽어주었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있다. 이전 글에서  나는 내 이름이 사라져도 괜찮을까를 물었다. 그러나 이름을 남기고 싶은 욕망이 있다고 해서 글쓰기가 곧 나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욕망 덕분에 나는 더 오래 생각하기도 한다. 문제는 글이 나를 더 잘 생각하게 하는가, 아니면 “계속 써야 하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나를 다그치는가에 있다. 같은 습관도 어느 순간 힘이 되었다가 또 다른 순간에는 짐이 될 수 있다.

 

욕망은 계속 변한다

 

니체를 읽으며 알게 되는 것은 욕망 역시 고정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한때 그렇게 갖고 싶었던 물건이 어느 날 별 의미가 없어지기도 한다.

한때 중요했던 승진이 그 자리에 오른 뒤에는 다른 모습으로 보인다. 젊을 때 중요했던 것이 지금은 덜 중요하고, 예전에는 관심 없던 독서와 글쓰기가 지금은 내 삶에서 큰 자리를 차지한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원하는 사람이다.” 라고 나 자신을 너무 빨리 규정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욕망도 생성한다. 나도 변하고, 욕망도 변하고, 둘의 관계도 계속 달라진다.

 

자유는 욕망이 없는 상태일까

 

이제 처음 질문으로 돌아온다. 욕망을 없애면 자유로워질까. 나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삶을 내가 정말로 원하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여전히 좋은 사진을 찍고 싶고, 좋은 책을 만나고 싶고, 글을 잘 쓰고 싶고, 일을 잘하고 싶다. 그 욕망들은 삶을 움직이는 힘이기도 하다. 다만 조금 달라지고 싶은 것은 있다. 원한다는 이유만으로 반드시 따라가지는 않는 것. 욕망을 억누르지도 않고, 욕망을 명령으로 받아들이지도 않는 것. “나는 이것을 원한다.” 라고 인정한 뒤, 한 걸음 떨어져 “그런데 이 욕망은 나를 어디로 데려갈까.” 라고 물을 수 있는 것.

 

어쩌면 자유는 욕망이 사라진 상태가 아니라 욕망과 나 사이에 작은 거리가 생긴 상태인지도 모른다. 그 거리에서 나는 선택할 수 있다. 따라갈 수도 있고, 멈출 수도 있고, 다른 방향으로 바꿀 수도 있다. 어떤 욕망은 작품이 되고, 어떤 욕망은 산책이 되고, 어떤 욕망은 사진 한 장이 되고, 어떤 욕망은 그냥 지나가게 둘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욕망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욕망이 내 삶의 어떤 힘이 될지를 내가 다시 선택하는 것.

 

니체가 말한 ‘순진무구한 관능’은 어쩌면 이런 상태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욕망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에 끌려가지 않는 것. 그리고 그 욕망을 나를 더 살아 있게 만드는 쪽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 그래서 이제 나는 욕망 앞에서 조금 다른 질문을 해보려 한다. 나는 이것을 원하는가. 그리고 그 다음, 이 욕망을 따라간 나는 지금보다 더 살아 있게 될까(54)

 

 

앞에서 나는 물었다. 아무도 박수치지 않아도 계속할 수 있는가. 지금 이해받지 못해도 견딜 수 있는가. 눈에 띄지 않는 작은 변화도 사건이라고 믿을 수 있는가. 그런데 여기까지 오니 더 불편한 질문이 남는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면 그래도 할 수 있을까. 박수를 받지 못하는 것과 아예 잊히는 것은 조금 다르다. 전자는 지금의 인정 문제지만, 후자는 내가 사라진 뒤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나는 왜 남기려 하는가

 

생각해보면 나는 꽤 많은 것을 남긴다. 사진을 찍고, 글을 쓰고, 책을 읽으며 메모하고, 옵시디언에 생각을 정리한다. 파일 이름을 정하고,

폴더를 만들고, 다시 찾을 수 있도록 연결한다. 처음에는 이것을 단순한 기록 습관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런 질문이 생긴다. 나는 무엇을 위해 이렇게 남기고 있는가. 나중의 나를 위해서일까. 다시 활용하기 위해서일까. 생각이 흩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일까. 물론 그렇다. 하지만 그 아래에는 조금 다른 마음도 있을 것 같다. 내가 읽었다는 것, 내가 보았다는 것, 내가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것이 그냥 사라지는 것이 아쉬운 마음. 어쩌면 기록에는 아주 작은 불멸의 욕망이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

 

사람은 이름을 남기고 싶어 한다

 

자료에는  세 종류의 영원성이 나왔다. 어딘가 다른 세계에서 영원히 존재하고 싶은 욕망이 있고, 이 세계 안에서 작품과 명성과 이름을 통해 오래 남고 싶은 욕망이 있고, 마지막에는 생성과 소멸 그 자체를 긍정하는 다른 종류의 영원성이 있다. 나는 두 번째가 가장 익숙하다.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 책을 쓰고, 건물을 짓고, 회사를 만들고, 사진을 남긴다. 조직에서는 성과를 남기고, 가족 안에서는 기억을 남긴다. 죽은 뒤에도 “그 사람은 이런 사람이었다.” 라는 한 문장으로라도 남고 싶어 한다. 그 마음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 역시 그렇다. 내가 찍은 사진이 남았으면 좋겠고, 내가 쓴 글 가운데 몇 편은 오래 읽혔으면 좋겠다. 아이들이 언젠가 내 글을 읽어준다면 기쁠 것 같다. 그런데 니체를 읽고 있으면 한 가지를 더 묻게 된다. 왜 나는 그렇게까지 남아 있어야 할까.

 

남는 것과 살아 있는 것은 같은가

 

어떤 이름은 수백 년 동안 남는다. 그러나 이름이 남았다는 것과 그 사람의 삶이 계속 살아 있다는 것은 같은 말일까. 반대로 이름은 사라졌지만 누군가에게 건넨 한마디가 다른 사람의 삶을 바꾸고, 그 변화가 또 다른 사람에게 이어질 수도 있다. 그때 최초의 사람은 완전히 잊혔을지 모른다. 그래도 무엇인가는 계속 움직이고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 영원하다는 말의 의미가 조금 달라진다. 내가 계속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통과한 무언가가 계속 생성되는 것. 이것이 강의에서 말한 ‘생성의 영원성’에 조금 가까운 것이 아닐까.

 

요제피네는 왜 사라졌을까

 

카프카의 「요제피네, 여가수 또는 생쥐 종족」 이야기 있다.  요제피네는 특별한 가수였다.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고, 자신만의 특별한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그 자리에서 사라진다. 그리고 결국 수많은 생쥐들 속으로 묻혀 잊힐 것이다. 처음에는 이것이 쓸쓸하게 느껴졌다. 예술가가 사라지고, 그 이름마저 잊힌다면 도대체 무엇을 위해 노래한 것일까. 그런데  이를 다른 방식으로 읽었다. 자신의 특별함을 영원히 보존하지 않고, 다시 전체 속으로 사라지는 것. 개별적인 이름이 사라져도 삶의 흐름은 계속된다. 이 생각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나는 아직 ‘잊힌다는 것’을 아름답게 생각할 만큼 초연하지 않다.

 

내 사진도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다

 

사진을 찍으면서 가끔 이상한 생각을 한다. 내가 지금 꽤 소중하게 관리하는 사진들도 언젠가는 대부분 아무 의미가 없어질 것이다. 하드디스크에 저장하고, 백업하고, 좋은 파일을 골라 보관한다. 어떤 사진에는 촬영 당시의 기억까지 선명하게 붙어 있다. 하지만 백 년 뒤에도 누군가 이 파일을 열어볼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면 사진을 찍는 일이 허무한가. 예전 같았으면 조금 허무하게 느꼈을 것 같다. 그런데 요즘은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사진의 의미가 꼭 사진이 영원히 남는 데 있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 사진을 찍기 위해

내가 한 장소를 오래 바라보았고, 평소 그냥 지나쳤을 사람을 한 번 더 보았고, 빛이 바뀌는 것을 기다렸고, 그 과정에서 세계를 조금 더 세밀하게 보게 되었다면, 사진은 이미 역할을 한 것 아닐까. 파일은 사라져도 사진을 찍었던 경험이 나를 조금 바꾸었다.

 

매일 쓰는 글도 그렇다

 

매일 글을 쓰다 보면 대단한 생각이 나오는 날보다 별것 없는 날이 훨씬 많다. 읽은 책 한 문장을 적고, 오늘 느낀 일을 몇 줄 남기고,

생각 하나를 붙잡아둔다. 몇 달 뒤 다시 보면 “내가 이런 생각도 했었나.” 싶은 글이 많다. 아마 대부분은 다시 읽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매일 쓰는가. 요즘은 기록 자체를 보존하기 위해서만 쓰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쓰는 동안 생각이 한 번 형태를 갖기 때문이다. 머릿속에서 흐릿했던 것이 문장이 되는 순간 조금 선명해진다. 그날의 글은 나중에 사라져도 좋을지 모른다. 그 글을 쓰는 동안 내가 조금 달라졌다면.

 

싸구려 여관처럼 존재한다는 것

 

자료에서 가장 오래 남은 이미지 가운데 하나는 니체의 ‘싸구려 여관’이었다. 누군가 잠시 머문다. 쉬고, 먹고, 다시 길을 떠난다. 몇 년 뒤에는 그 여관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할 수 있다. 이상하게도 이 이미지는 처음에는 초라하게 느껴졌다. 누군가의 목적지가 아니라 잠깐 머물다 가는 곳이라니. 그러나 다시 생각하니 그것은 꽤 다른 삶의 모습이었다. 사람들이 나를 오래 기억하도록 붙잡는 것이 아니라, 나를 거쳐 다시 걸어갈 수 있게 하는 것. 내가 누구를 도왔다면 그 사람이 평생 나에게 감사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알려준 것이 있다면 그 사람이 그것을 ‘한상호에게 배웠다’고 계속 기억할 필요도 없다. 오히려 가장 좋은 경우는 그 사람이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나를 잊는 것인지도 모른다.

 

리더의 흔적도 그런 것일까

 

회사에서도 생각해본다. 좋은 리더는 무엇을 남겨야 할까. 자기가 만든 제도, 성과, 조직문화, 사람들의 기억. 물론 모두 중요하다. 하지만 내가 떠난 뒤에도 사람들이 계속 “그때 한 팀장님이 이렇게 말했다.” 라고 기억해주는 것이 리더십의 최종 목표는 아닐 것이다. 오히려 내가 없어도 사람들이 스스로 판단하고, 서로 가르치고, 더 나은 방식을 만들어간다면 내 이름은 점점 덜 필요해질 것이다. 생각해보면 그것이 더 좋은 결과일 수 있다. 내가 남는 것이 아니라, 내가 없어도 돌아가는 것이 남는 것. 조금 이상하지만 이것이 더 강한 흔적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나로 남아야 한다는 욕망

 

이 지점에서 들뢰즈가 말한 ‘모든 사람-되기’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처음 들었을 때는 자기 자신을 지우라는 말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나는 이런 사람이다.” 라고 끊임없이 자신을 고정하는 힘에서 조금 벗어나는 것에 가깝다. 나는 팀장이고,

나는 사진을 좋아하고, 나는 책을 읽고, 나는 이런 글을 쓰는 사람이다. 이런 정체성은 나를 설명해준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그 설명을 유지하는 일이 삶 자체가 될 수도 있다. 그때 나는 변화하기보다 ‘나라는 이미지’를 관리하게 된다. 인정욕망의 마지막 형태는 어쩌면 남들에게 인정받는 것뿐 아니라, 내가 만든 ‘나’를 계속 유지하려는 욕망 일 수도 있겠다.

 

사라질 수 있어야 새로 생길 수 있다

 

지금까지 니체를 읽으며 계속 만난 단어가 있다. 몰락. 처음에는 부정적인 말처럼 들렸다. 그러나 이제 조금 다르게 읽힌다. 무언가 새로 생기려면이전의 형태가 그대로 남아 있을 수는 없다. 낙엽이 떨어지고, 사진 속의 순간이 지나가고, 한 시기의 관심이 사라지고,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던 가치도 언젠가 낡아진다. 생성은 언제나 조금씩 소멸을 포함한다. 그런데 나는 생성은 원하면서소멸은 피하고 싶어 했던 것은 아닐까. 새로운 내가 되고 싶지만 지금의 나도 그대로 보존하고 싶고, 새로운 것을 만들고 싶지만 이미 얻은 명성과 위치도 놓치고 싶지 않다. 니체가 말하는 생성의 긍정은 어쩌면 이 모순을 피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일부러 흔적을 없앨 필요는 없다

 

여기서 또 조심해야 할 것 같다. “잊혀야 한다.” 는 또 하나의 도덕을 만들고 싶지는 않다. 사진을 잘 보관해도 된다. 글을 남겨도 된다. 성과를 기록해도 된다. 나도 계속 그렇게 할 것이다. 문제는 흔적을 남기는 행동이 아니라, 그 흔적이 나의 존재를 보증해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마음일 것이다. 내 글이 읽히지 않아도 썼던 시간이 의미 있을 수 있고, 내 사진이 사라져도 그것을 찍으며 세계를 바라본 시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영원히 남고 싶은가, 계속 흘러가고 싶은가

 

이제 영원이라는 말을 조금 다르게 생각하게 된다. 예전의 영원은 사라지지 않는 것에 가까웠다. 하지만 생성의 영원은 계속 달라지는 것

에 가까운 것 같다. 내가 그대로 영원히 남는 것이 아니라, 나를 통과한 무언가가 다른 형태로 이어지는 것. 글이 누군가에게 질문 하나를 남기고, 그 질문이 전혀 다른 생각이 되어 이어지는 것. 내가 찍은 사진 한 장이 누군가에게 같은 장소를 다르게 보게 만드는 것. 내가 한 일이

다른 사람의 판단 속에 스며들어 누가 시작했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되는 것. 그것이라면 이름이 사라져도 완전히 사라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아직 내 이름이 사라지는 것을 완전히 편안하게 받아들이지는 못한다. 내가 쓴 글이 오래 남았으면 좋겠고, 좋은 사진 몇 장은 나보다 오래 살아남았으면 좋겠다. 아마 그 마음은 쉽게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다른 가능성도 생각해본다. 내가 남지 않아도 괜찮을 수 있다는 것. 내 이름은 잊혀도 내가 건넨 것이 누군가에게서 다른 모습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나를 영원히 보존하는 것’보다 더 살아 있는 영원일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오늘은 질문을 조금 바꾸어본다. 무엇을 남길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이 나를 통과해 계속 흘러가게 할 것인가. 그렇게 생각하면

기록도, 사진도, 일도, 사람과의 관계도 조금은 다르게 보인다. 싸구려 여관처럼 누군가 잠시 머물다 가도 좋다. 언젠가 그 사람이 여관 이름을 잊어도 괜찮다. 그곳에서 잠시 쉬었기 때문에 조금 더 먼 곳까지 걸어갈 수 있었다면. 어쩌면 그것으로 충분할지도 모른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에서 이상한 말을 한다. 세계는 새로운 소란을 일으키는 사람이 아니라,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사람을 중심으로 돈다. 소리 없이 그렇게 돈다. 처음에는 조금 낭만적인 문장처럼 들렸다. 세상은 실제로 소란스러운 사건에 의해 바뀌지 않는가. 전쟁이 일어나고, 정권이 바뀌고, 기업이 무너지고, 새로운 기술이 등장한다. 뉴스의 첫 화면을 채우는 것은 언제나 크고 빠르고 눈에 띄는 사건들이다. 그런데 차라투스트라는 오히려 말한다. 위대한 일은 시장터와 명성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더 나아가 폭풍을 일으키는 것은 가장 잔잔한 말들이며, 비둘기 걸음으로 찾아오는 사상이 세계를 끌고 간다. 왜 하필 비둘기 걸음일까. 요란하게 날아오르는 독수리도 아니고, 땅을 울리며 달리는 말도 아니다. 그저 사람들이 거의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조용하게 다가오는 움직임이다.

 

우리는 왜 큰 소리를 중요한 것으로 느끼는가

 

시장터에는 언제나 소리가 있다. 누군가는 외치고, 누군가는 박수를 받고, 누군가는 분노하고, 누군가는 찬성하거나 반대하라고 재촉한다. 차라투스트라가 말하는 배우와 어릿광대가 사는 곳이다. 배우는 위대한 것을 만들어내기보다 위대한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사람이다. 어릿광대는 더 빠르다. 오늘의 관심이 무엇인지 누구보다 빨리 알아차리고, 사람들을 그곳으로 불러 모은다.

 

“이것이 지금 중요하다.” “당신도 입장을 밝혀야 한다.” “그렇다고 할 것인가, 아니라고 할 것인가.” 그리고 내일이 되면 또 다른 문제가 나타난다. 어제 그렇게 중요해 보이던 것은 어느새 사라지고, 새로운 소란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생각해보면 나 역시 이런 속도에 꽤 익숙해져 있다.

 

뉴스를 보고, 업무 메시지를 확인하고, 새로운 이슈가 생기면 바로 판단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무언가에 대해 아직 잘 모르면서도

찬성인지 반대인지 먼저 정해야 할 것 같다.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뒤처지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그런데 니체는 이 속도를 의심한다. 정말 중요한 것은 그렇게 빨리 판단할 수 있는 것인가.

 

깊은 우물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시장터의 파리떼」에서 내가 오래 기억하게 된 문장이 있다. 깊은 우물 속에 무엇이 떨어졌는지를 알려면 오래 기다려야 한다는 말이다.

생각해보면 내 삶에서도 정말 중요했던 변화는 대부분 그렇게 왔던 것 같다. 어느 날 갑자기 인생의 방향이 바뀐 것이 아니라, 한 문장이 계속 마음에 남았다.

 

한 번의 실패가 오래 걸려 다른 판단 기준이 되었다.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던 경험이 몇 년 뒤 다시 돌아와 의미를 갖기도 했다. 지금 읽고 있는 니체도 그렇다. 책장을 덮는 순간 인생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승진하면 정말 삶이 달라지는가.” “나는 왜 인정받고 싶어 하는가.”

“좋은 사진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같은 질문 하나가 남는다. 그리고 며칠 뒤 전혀 다른 상황에서 그 질문이 다시 떠오른다. 그때 조금 다르게 판단한다. 변화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작은 차이다. 하지만 어쩌면 변화는 바로 그런 식으로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진을 찍으면서 알게 된 작은 변화

 

요즘 나는 특별한 장소보다 반복해서 지나는 길을 다시 보려 한다. 매일 비슷한 시간에 지나가는 거리와 익숙한 사람들, 건물 사이의 빛,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 처음에는 아무것도 달라 보이지 않는다. 같은 길이고, 같은 가게이고, 비슷한 출근길이다. 그런데 계속 바라보면 조금씩 다른 것이 보인다. 어제 없던 의자가 놓여 있고, 늘 같은 곳에 서던 사람이 오늘은 보이지 않는다.

 

계절이 바뀌면서 빛이 들어오는 방향이 달라지고, 사람들이 길을 걷는 속도와 옷차림도 조금씩 달라진다. 그 차이는 너무 작아서 한 번 지나가는 사람에게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반복해서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보인다. 그래서 요즘 사진을 생각하면서 이런 생각을 자주 한다.

사진은 특별한 사건을 찾아가는 일이 아니라, 반복되는 세계 안에서 작은 차이를 알아차리는 일일 수도 있겠다.

 

클리나멘이라는 작은 비껴감

 

 ‘클리나멘’이라는 말을 다시 만났다. 원자가 중력에 따라 곧게 떨어지다가 어느 순간 아주 조금 비껴간다. 그 작은 편향 때문에 다른 원자와 충돌하고, 만남이 생기고, 새로운 조합이 생긴다. 만약 모든 것이 정확히 예정된 궤도로만 움직인다면 아무런 새로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세계의 생성은 거대한 방향전환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작은 비껴감에서 시작된다.

 

이 개념이 이상하게 마음에 남았다. 나는 변화라고 하면 늘 큰 결심을 먼저 떠올렸다. 회사를 그만두거나, 새로운 일을 시작하거나, 삶의 방식을 완전히 바꾸는 것. 그런데 실제 삶은 그렇게 움직이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 평소보다 십 분 더 걸어본다. 늘 지나치던 골목으로 한 번 들어가 본다. 읽던 책의 한 문장에서 멈춘다. 사려던 물건을 하루 더 생각해본다. 회의에서 늘 하던 방식 대신 질문 하나를 다르게 던져본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작은 비껴감이 다음 행동을 다르게 만들 수도 있다.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 자기 속도는 아닐 수 있다

 

자료를 읽다가 인상적이었던 설명을 발견했다. 중력에 끌려 아무리 빠르게 떨어져도 그것을 자기 고유의 속도라고 부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 말을 내 삶에 가져와보면 조금 불편해진다. 나는 늘 바쁘게 움직였다. 업무를 처리하고, 회의를 하고, 보고서를 만들고, 다음 일을 준비한다. 빠르게 움직이고 있으니 당연히 내가 앞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묻게 된다. 나는 정말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가, 아니면 주어진 중력에 빠르게 끌려가고 있는가.

 

성과를 내야 한다는 중력, 승진해야 한다는 중력, 좋은 것을 가져야 한다는 중력, 뒤처져서는 안 된다는 중력. 그 방향으로 누구보다 빨리 떨어지는 것이 내 속도라고 착각했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자기 속도는 오히려 그 중력에서 아주 조금 비껴나는 순간에 생기는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시간

 

시장터에서는 멈춰 있는 사람이 불안하다. 반응해야 하고, 성과를 보여야 하고, 계속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사진을 찍을 때도 비슷하다. 많이 움직이고 많이 찍으면 뭔가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런데 오히려 한곳에 오래 서서 기다리는 날이 있다. 처음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지나가고, 빛도 별로 좋지 않다.

 

그러다 어느 순간 두 사람이 스쳐 지나가면서 작은 간격이 생기거나, 누군가 잠시 뒤를 돌아본다. 그 순간을 찍기 위해 사실 나는 그 앞의 긴 시간을 보낸 것이다. 겉으로 보면 아무것도 하지 않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 시간이 없었다면 그 장면도 없었을 것이다. 니체의 ‘비둘기 걸음’도 어쩌면 이런 시간인지 모르겠다. 눈에 띄는 결과보다 먼저 오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시간.

 

큰 변화보다 작은 질문

 

내가 니체를 읽으면서 실제로 변한 것이 있는지 생각해본다. 아직 거창하게 달라진 것은 없다. 직장을 떠난 것도 아니고, 생활방식을 완전히 바꾼 것도 아니다. 내일도 회사에 가고, 회의를 하고, 같은 책임을 맡을 것이다. 그런데 이전에는 하지 않았던 질문 몇 가지가 생겼다. 이 일을 왜 하고 있는가. 이 판단은 정말 내 판단인가. 나는 이것을 원하는 것인가, 인정받기를 원하는 것인가. 이 물건을 정말 사용하는가, 아니면 가능성을 소유하려는 것인가. 이 사진은 왜 찍고 싶은가. 질문이 생겼다고 세상이 달라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예전과 완전히 같은 방식으로 살기는 조금 어려워졌다. 아마 작은 편향이 이미 시작된 것인지도 모른다.

 

세상을 바꾸는 사건과 나를 바꾸는 사건

 

‘세계를 바꾼다’는 말을 들으면 너무 거대한 이야기를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나에게 중요한 세계는 내가 매일 살아가는 세계이기도 하다. 아침에 무엇을 먼저 보는지,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 무엇을 사고 무엇을 남기는지, 어떤 일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그 작은 선택들이 달라지면 내가 사는 세계도 조금씩 달라진다. 그렇다면 위대한 사건이라는 것도 처음부터 위대한 모습으로 찾아오는 것은 아닐 수 있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질문으로 시작해서 오래 머물고, 다른 생각들과 부딪히고, 어느 날 행동 하나를 바꾸는 것. 그리고 그 행동이 다시 다른 선택을 가능하게 하는 것.

 

소란과 사건을 구별하는 법

 

그래서 요즘은 이런 질문이 생긴다. 지금 나를 크게 흔드는 것이 정말 중요한 것인가. 큰 목소리 때문에 중요한 것처럼 느끼는 것은 아닐까. 반대로 지금은 거의 느껴지지 않지만 오래 남아 나를 바꿀 무언가가 이미 곁에 있는 것은 아닐까. 시장터는 늘 말한다. “이것을 봐라.”

“지금 답하라.” “이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내가 정말 귀 기울여야 할 것은 때로 그 소란 뒤에서 거의 들리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책을 읽다가 멈추게 하는 한 문장. 매일 지나던 길에서 갑자기 보이는 작은 장면. 가까운 사람이 무심코 한 말. 반복하던 업무에서 생긴 사소한 불편함.

그리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자꾸 마음에 남는 질문. 그것들이 비둘기 걸음으로 들어오는 사건일 수 있다. 나는 여전히 큰 사건에 눈이 간다. 강한 사진에 먼저 시선이 가고, 큰 성과에 마음이 움직이며, 사람들이 많이 이야기하는 것에 관심을 갖는다. 아마 그것은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다만 이제 한 가지를 더 의심해보려 한다.

 

눈에 띄는 것이 중요한 것과 같은가

 

그리고 내 삶을 바꾸는 것은 정말 거대한 결단뿐일까. 어쩌면 나는 이미 여러 번 작은 방향전환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책 한 권을 오래 읽기 시작한 것, 매일 지나가는 길을 천천히 바라보기 시작한 것, 물건을 소유하는 것과 사용하는 것을 다르게 생각하기 시작한 것, 승진 이후에도 삶이 왜 그대로인지 질문하기 시작한 것. 하나하나는 너무 작아서 사건이라고 부르기 어렵다. 하지만 지금의 나와 몇 달 전의 나 사이에 작은 차이를 만들어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니체가 말한 비둘기 걸음은 어쩌면 이렇게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소리 없이. 처음에는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그러나 어느 순간 뒤돌아보면 내가 이미 예전과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걷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하는 방식으로(52)

 

 

앞에서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아무도 박수치지 않아도 나는 이것을 할 것인가. 그 질문을 붙들고 있으니 한 가지가 더 따라온다. 박수를 받지 못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어쩌면 이해받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칭찬하지 않는 것은 견딜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상대가 전혀 중요하게 여기지 않을 때, 내가 애써 설명한 것을 알아듣지 못할 때, 심지어 왜 그런 일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을 때는 마음이 흔들린다. 그때 나는 묻게 된다.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시대와 불화한다는 것

 

니체는 철학자를 ‘내일과 모레의 인간’이라고 불렀다. 현재의 가치에 가장 잘 적응한 사람이 아니라, 아직 오지 않은 가치 때문에 현재와 불화하는 사람이라는 뜻일 것이다. 이 표현이 처음에는 조금 과장되게 느껴졌다. 나와 시대가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거창하지 않은가. 그런데 꼭 세상을 뒤집을 철학자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회사에서도 그렇다. 지금 당장 성과가 보이는 일은 설명하기 쉽다.

 

숫자로 나타나고, 결과가 빨리 나오고, 사람들이 효과를 알아본다. 반대로 장애가 일어나기 전에 위험요인을 정리하거나, 당장은 불편해도 장기적으로 운영방식을 바꾸는 일은 쉽게 인정받지 못할 때가 있다. “아직 문제도 없는데 왜 해야 하지?” 라는 질문이 돌아온다.그럴 때 현재의 기준으로는 불필요해 보이는 일이 나중에는 가장 필요했던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비시대적’이라는 것은 반드시 시대를 거부하는 거창한 태도가 아니라, 현재의 평가만으로 미래의 가치를 판단하지 않는 태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해받고 싶은 마음

 

그러나 나는 여전히 이해받고 싶다. 내가 한 판단의 이유를 사람들이 알아주었으면 좋겠고, 내가 쓴 글의 의도를 제대로 읽어주었으면 좋겠고, 사진 한 장을 오래 기다린 이유도 누군가 알아봐 주었으면 좋겠다. 아무리 인정욕망을 비판해도 이 마음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인간은 혼자 살아가지 않으니까. 문제는 이해받고 싶다는 마음이 아니라, 이해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내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을 너무 빨리 포기하는 것 아닐까.

 

읽히지 않는다는 것

 

니체는 자신을 두고 ‘사후에 태어나는 인간’이라고 했다. 자신의 시대가 아직 자신을 읽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 말에는 상당한 자신감이 있다. 조금 잘못 읽으면 오만하게도 들린다. “너희가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내가 앞서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해버리면 누구나 자신을 천재로 만들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여기서 멈추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해받지 못한다는 사실 자체는 내가 옳다는 증거가 아니다. 틀린 사람도 이해받지 못하고, 설명이 서툰 사람도 이해받지 못하며, 고집 센 사람 역시 이해받지 못한다. 그러므로 비시대적이라는 말은 자신의 고집을 정당화하는 면허가 될 수 없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판단할 것인가

 

결국 다시 어려운 질문으로 돌아온다. 지금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 생각을 나는 무엇을 근거로 계속 붙들 것인가. 여기서 니체가 말했던 정직성이 다시 중요해지는 것 같다. 나는 정말 새로운 가능성 때문에 이 생각을 붙들고 있는가. 아니면 인정받지 못한 자존심 때문에 고집하고 있는가. 나는 반대 의견을 충분히 들었는가. 틀렸다는 증거가 나왔을 때 생각을 바꿀 수 있는가. 누군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계속 실험하고 확인할 수 있는가. 비시대적 존재와 독선적인 사람의 차이는 어쩌면 여기에 있을 것이다. 자기 확신이 강한가가 아니라, 자기 생각까지 의심할 수 있는가.

 

지금의 평가와 미래의 평가

 

우리는 현재의 평가를 지나치게 최종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일이 잘됐다는 평가를 받으면 정말 잘한 것 같고, 반응이 없으면 별 의미가 없었던 것 같고, 글의 조회수가 적으면 글 자체가 부족했던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시간의 축을 조금 길게 놓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당시에는 별일 아니었던 한 문장이 몇 년 뒤 나를 바꿀 수도 있다. 처음에는 실패처럼 보였던 경험이 이후의 판단 기준이 될 수도 있다사진을 찍은 순간에는 평범했던 장면이 시간이 지나면서 전혀 다른 의미를 갖기도 한다. 그렇다면 가치는 언제 확정되는 것일까. 어쩌면 어떤 일의 가치는 그 일을 하는 바로 그 순간에는 충분히 알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사후에 태어난다’는 말을 다르게 읽어본다

 

나는 니체처럼 먼 미래의 독자를 기다리는 철학자가 아니다. 그럼에도 ‘사후에 태어난다’는 표현은 내게 다른 의미로 들어온다. 내가 한 일의 의미가 언제나 지금 당장 완성될 필요는 없다. 오늘 이해받지 못한 생각이 반드시 훌륭하다는 뜻도 아니고, 나중에 반드시 인정받는다는 뜻도 아니다. 다만 지금의 반응만으로 그 가능성을 너무 빨리 닫아버리지 않는 것. 그 정도라면 나에게도 필요한 태도일 것 같다.

 

사진을 찍을 때도 비슷하다

 

사람이 많은 시장에서 사진을 찍다 보면 눈에 잘 띄는 장면이 있다. 강한 색, 극적인 표정, 눈길을 끄는 빛. 그런 장면은 즉각적인 반응을 얻기 쉽다. 하지만 내가 오래 기억하는 사진은 오히려 그런 것이 아닐 때가 있다. 사람과 물건 사이에 생긴 작은 거리, 누군가 잠시 멈춰선 자세,

별일 없이 흘러가는 저녁의 빛. 찍은 직후에는 왜 이 장면이 좋았는지 나도 정확히 설명하지 못한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다시 눈이 간다. 사진에서도 어떤 감각은 이해보다 먼저 오는 것인지 모른다.

 

독서도 그렇다

 

지금 『차라투스트라』를 읽으면서도 자주 경험한다. 처음에는 이해했다고 생각한 문장이 며칠 뒤 전혀 다르게 읽힌다. 강의를 듣고 정리할 때와, 내 경험과 연결해 글을 쓸 때의 의미가 또 다르다.그렇다면 이해는 한 번에 끝나는 일이 아니다. 어떤 생각은 먼저 나에게 들어와 머무르고, 나중에야 내가 그것을 이해하게 된다. 이렇게 생각하면 ‘이해받지 못한다’는 말도 조금 다르게 보인다. 타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때때로 미래의 나에게도 아직 이해받지 못하고 있다.

 

기다릴 수 있는가

 

결국 비시대성의 문제는 기다림의 문제인지도 모른다. 지금 당장 판단받지 않아도 되는 것. 즉시 찬반을 결정하지 않아도 되는 것. 사람들의 반응이 없다고 해서 바로 폐기하지 않는 것. 충분히 시간을 두고 그 생각이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지 지켜보는 것. 시장터는 빠르게 답을 요구하지만 깊은 우물은 오래 기다려야 한다는 차라투스트라의 말이 여기에서도 이어진다.

 

나는 여전히 이해받고 싶다

 

내가 하는 일을 가까운 사람들이 알아주었으면 좋겠고, 내 글을 읽는 사람이 내 질문을 함께 느껴주었으면 좋겠다. 그 마음까지 버릴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다만 이제는 조금 다른 질문을 덧붙이고 싶다. 아무도 지금 이해하지 못한다면, 나는 얼마 동안 이것을 붙들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시간 동안 남들이 틀렸다고 주장하는 대신, 계속 읽고, 시도하고, 고치고, 필요하면 내가 틀렸음을 인정하면서도 내가 본 가능성을 너무 빨리 포기하지 않을 수 있을까. 어쩌면 ‘내일과 모레의 인간’이 된다는 것은 미래를 미리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평가가 최종 판결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조금 더 오래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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