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의 「순결」을 읽으며 처음에는 조금 낯설었다. 순결과 관능. 요즘의 내 삶과는 멀리 떨어진 주제처럼 느껴졌다. 그러나니체가 묻는 것은 성적 욕망만이 아니었다. 더 근본적인 질문이었다. 나는 욕망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억누르는가. 끌려가는가. 아니면 그 욕망을 내 삶의 힘으로 바꿀 수 있는가. 이렇게 바꾸어 생각하니 갑자기 이야기가 가까워졌다.
나는 꽤 많은 욕망과 함께 살고 있다. 좋은 카메라를 갖고 싶고, 새로운 렌즈를 써보고 싶고, 책을 사고 싶고, 글을 잘 쓰고 싶고, 일에서도 좋은 결과를 내고 싶다. 어쩌면 욕망이 없는 날보다 욕망으로 움직이는 날이 훨씬 많다. 그렇다면 문제는 욕망 자체가 아닐지도 모른다.
욕망을 없애면 자유로워질까
우리는 종종 욕망을 자유의 반대편에 놓는다. 욕심을 줄여라. 집착하지 마라. 소유를 줄여라. 절제하라. 맞는 말이다. 실제로 욕망이 너무 커지면 그것에 끌려다니기 쉽다. 그런데 니체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욕망을 억압한다고 해서 욕망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억누른 욕망은 사라지지 않는다. 모습을 바꾼다.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할수록 오히려 그것에 더 많은 생각을 쓰기도 한다. 먹지 않겠다고 결심했는데 하루 종일 음식 생각을 하고, 물건을 사지 않겠다고 하면서 계속 쇼핑 사이트를 들여다본다. 겉으로는 절제하고 있지만 마음은 여전히 그것에 붙잡혀 있다. 그렇다면 절제와 자유는 같은 것이 아니다.
사고 싶은 마음
고가의 장비를 사고팔면서 이 문제를 여러 번 경험했다. 처음에는 분명 사용하고 싶어서 샀다. 더 좋은 성능을 경험하고 싶었고, 그 장비가 가능하게 할 새로운 작업을 상상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사용보다 소유가 앞서기 시작한다. 사고 나면 잠시 만족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장비가 눈에 들어온다.
비교하고, 검색하고, 가격을 알아보고, 다시 가능성을 상상한다. 정작 사용하는 시간보다 장비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더 길어질 때도 있었다. 이때 이상한 질문이 생긴다. 내가 이 물건을 원하는 것인가, 아니면 원하는 상태 자체를 계속 원하는 것인가. 둘은 꽤 다르다.
가능성을 소유하고 싶다는 욕망
예전에 고성능 노트북을 정리하면서 물건을 보유한다는 것은 단순히 공간을 차지하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물건은 관심을 요구한다. 관리해야 하고, 업데이트해야 하고, 가격이 떨어지는 것도 신경 쓰이고, 쓰지 않으면 아깝다는 생각도 든다. 나는 물건을 소유하지만
어느 순간 물건도 내 시간과 관심의 일부를 소유한다. 그때 내가 원했던 것은 물건 자체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이 장비가 있으면 이런 것도 할 수 있다.” 라는 가능성을 갖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영상 편집도 할 수 있고, 그래픽도 할 수 있고, AI도 돌릴 수 있고, 언젠가 새로운 작업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가능성. 하지만 가능성을 소유하는 것과 실제로 사용하는 것은 다르다. 나는 가능성을 많이 갖고 있으면서 정작 그 가능성을 충분히 사용하지 못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욕망은 나쁜 것인가
여기서 다시 니체가 중요해진다. 그는 욕망 자체를 악으로 돌리지 않는다. 오히려 욕망을 죽이려 하지 말라고 한다. 나는 이 태도가 마음에 든다. 좋은 카메라를 사고 싶은 마음도, 새로운 책을 읽고 싶은 마음도, 더 좋은 글을 쓰고 싶은 마음도 그 자체로 잘못은 아니다. 오히려 그런 욕망이 없었다면 나는 지금보다 훨씬 적게 움직였을 것이다. 카메라가 있었기에 밖으로 나갔고, 책을 샀기에 읽기 시작했고, 글을 남기고 싶었기에 생각을 문장으로 만들었다. 욕망은 나를 흔들지만 동시에 나를 움직인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욕망이 있는가 없는가가 아니라, 그 욕망이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가 인 것 같다.
욕망이 나를 사용하는 순간
같은 카메라에 대한 욕망도 전혀 다르게 작동한다. 어떤 날에는 카메라 때문에 밖으로 나간다. 거리의 빛을 보고, 사람을 기다리고, 평소 지나치던 풍경을 더 오래 본다. 그날 카메라는 내 감각을 넓혀준다. 그런데 어떤 날에는 하루 종일 장비 비교만 한다. 해상력과 센서 성능을 찾아보고, 사용기를 읽고, 새 제품 가격을 비교한다. 사진은 한 장도 찍지 않는다. 같은 욕망인데 결과는 정반대다. 하나는 세계와의 관계를 넓히고, 다른 하나는 내 관심을 물건 안에 가둔다. 그래서 요즘은 욕망을 판단할 때 이 질문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욕망은 내 힘을 늘리고 있는가, 줄이고 있는가.
힘을 늘린다는 것
여기서 ‘힘’은 남을 이기는 힘이 아니다. 더 많이 보고, 더 오래 집중하고, 더 잘 판단하고, 조금 더 넓게 관계 맺을 수 있는 힘에 가깝다. 책에 대한 욕망도 그렇다. 책을 많이 사는 것 자체가 내 힘을 늘려주는 것은 아니다. 책장이 가득 차도 읽지 않으면 그 가능성은 잠든 채 남아 있다.
반대로 한 권을 오래 읽고, 문장 하나를 붙들고, 그 문장이 내 경험을 다시 보게 만든다면 한 권의 책이 수십 권보다 더 큰 힘을 줄 수도 있다.
그래서 요즘의 니체 읽기가 예전의 독서와 조금 다르게 느껴진다. 읽은 권수는 늘지 않는데 질문은 늘어난다. 어쩌면 지금 내게 필요한 독서는 더 많이 소유하는 독서가 아니라 더 깊이 변하는 독서인지도 모른다.
순진무구한 관능
니체는 ‘관능의 순진무구’를 말한다. 나는 이 표현을 욕망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상태로 읽어본다. 좋은 것을 갖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고
스스로를 탐욕스럽다고 비난하지 않는다. 멋진 사진을 찍고 싶고,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 싶고, 좋은 성과를 내고 싶은 마음도 인정한다. 그 욕망이 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 그 대신 한 가지를 더 본다. 그 욕망이 지금 나를 어디로 끌고 가고 있는가. 그러면 억압하는 대신 관찰할 수 있다. 욕망을 적으로 만들지 않으면서도 그 욕망의 노예가 되지 않는 가능성이 생긴다.
‘참는 것’과 ‘필요하지 않은 것’
‘바탕에서 순결한 자’라는 표현이 있다. 나는 이것을 억지로 참는 사람과 더 이상 크게 끌리지 않는 사람의 차이로 생각해보았다. 무언가를 눈앞에 두고 “참아야 한다.” 고 계속 말하고 있다면 나는 아직 그것과 강하게 싸우고 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굳이 필요하지 않다.” 고 느끼게 되면 싸움 자체가 줄어든다.
이 둘의 차이는 크다. 전자는 의지력으로 버티는 것이고, 후자는 가치가 바뀐 것이다. 예전에는 갖고 싶었던 것이 지금은 별로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을 때가 있다. 그때 비로소 나는 욕망을 이긴 것이 아니라 욕망을 바라보는 내가 달라졌다는 것을 알게 된다.
버리는 것보다 관계를 바꾸는 것
물건을 줄이는 일도 비슷하다. 많이 버린다고 반드시 자유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미니멀리스트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고 얼마나 적게 소유하는지를 자랑하기 시작하면 다시 다른 방식의 소유욕이 생긴다. 중요한 것은 개수가 아닐 수 있다. 열 개를 가지고 있어도 그것들이 나를 지배하지 않을 수 있고, 하나밖에 없어도 그 하나에 완전히 사로잡힐 수 있다. 그래서 요즘은 “무엇을 버릴까.” 보다 “이것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라는 질문이 더 중요하게 느껴진다.
글쓰기도 욕망이다
매일 글을 쓰는 것도 욕망에서 시작한다. 생각을 남기고 싶다. 잊고 싶지 않다. 조금 더 잘 쓰고 싶다. 어쩌면 누군가 읽어주었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있다. 이전 글에서 나는 내 이름이 사라져도 괜찮을까를 물었다. 그러나 이름을 남기고 싶은 욕망이 있다고 해서 글쓰기가 곧 나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욕망 덕분에 나는 더 오래 생각하기도 한다. 문제는 글이 나를 더 잘 생각하게 하는가, 아니면 “계속 써야 하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나를 다그치는가에 있다. 같은 습관도 어느 순간 힘이 되었다가 또 다른 순간에는 짐이 될 수 있다.
욕망은 계속 변한다
니체를 읽으며 알게 되는 것은 욕망 역시 고정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한때 그렇게 갖고 싶었던 물건이 어느 날 별 의미가 없어지기도 한다.
한때 중요했던 승진이 그 자리에 오른 뒤에는 다른 모습으로 보인다. 젊을 때 중요했던 것이 지금은 덜 중요하고, 예전에는 관심 없던 독서와 글쓰기가 지금은 내 삶에서 큰 자리를 차지한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원하는 사람이다.” 라고 나 자신을 너무 빨리 규정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욕망도 생성한다. 나도 변하고, 욕망도 변하고, 둘의 관계도 계속 달라진다.
자유는 욕망이 없는 상태일까
이제 처음 질문으로 돌아온다. 욕망을 없애면 자유로워질까. 나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삶을 내가 정말로 원하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여전히 좋은 사진을 찍고 싶고, 좋은 책을 만나고 싶고, 글을 잘 쓰고 싶고, 일을 잘하고 싶다. 그 욕망들은 삶을 움직이는 힘이기도 하다. 다만 조금 달라지고 싶은 것은 있다. 원한다는 이유만으로 반드시 따라가지는 않는 것. 욕망을 억누르지도 않고, 욕망을 명령으로 받아들이지도 않는 것. “나는 이것을 원한다.” 라고 인정한 뒤, 한 걸음 떨어져 “그런데 이 욕망은 나를 어디로 데려갈까.” 라고 물을 수 있는 것.
어쩌면 자유는 욕망이 사라진 상태가 아니라 욕망과 나 사이에 작은 거리가 생긴 상태인지도 모른다. 그 거리에서 나는 선택할 수 있다. 따라갈 수도 있고, 멈출 수도 있고, 다른 방향으로 바꿀 수도 있다. 어떤 욕망은 작품이 되고, 어떤 욕망은 산책이 되고, 어떤 욕망은 사진 한 장이 되고, 어떤 욕망은 그냥 지나가게 둘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욕망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욕망이 내 삶의 어떤 힘이 될지를 내가 다시 선택하는 것.
니체가 말한 ‘순진무구한 관능’은 어쩌면 이런 상태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욕망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에 끌려가지 않는 것. 그리고 그 욕망을 나를 더 살아 있게 만드는 쪽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 그래서 이제 나는 욕망 앞에서 조금 다른 질문을 해보려 한다. 나는 이것을 원하는가. 그리고 그 다음, 이 욕망을 따라간 나는 지금보다 더 살아 있게 될까(5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