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글에서 젊은 날의 상처와 무덤을 생각했다. 과거의 상처가 사라지지 않아도 다시 시작하게 만드는 힘이 있고, 오래된 꿈의 형태는 사라져도 그 꿈을 만들었던 힘은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차라투스트라의 젊은 날을 죽인 것은 특정한 사람만이 아니었다.

 

가족이 있고, 학교가 있으며, 조직과 사회가 있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이미 어떤 세계 안으로 들어온다. 그 세계에는 무엇이 좋은 삶인지, 무엇을 이루어야 하는지, 어떤 사람이 인정받는지에 대한 기준이 있다. 니체 강의에서는 이것을 ‘시대의 중력장’이라고 표현한다. 중력이라는 비유가 재미있다. 우리는 중력 속에서 살면서 매 순간 중력을 의식하지 않는다. 컵이 바닥에 놓여 있는 것도, 내가 의자에 앉아 있는 것도 당연하게 느낀다.

 

시대의 가치도 비슷하다는 것이다. 너무 오랫동안 그 안에서 살기 때문에 그것이 하나의 선택이라는 사실조차 잊는다. 좋은 학교에 가는 것. 안정적인 직업을 갖는 것. 회사에서 인정받는 것. 승진하는 것. 집을 마련하는 것. 경제적으로 여유를 갖는 것. 자녀가 잘되는 것. 이런 것들은 모두 실제로 중요한 가치일 수 있다. 문제는 그것들이 나쁘다는 데 있지 않다. 내가 선택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선택해본 적조차 없을 수 있다는 데 있다.

 

이 전 글에서도  비슷한 질문을 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일까.’ 그때는 사회와 조직이 내 욕망에 어떤 먹이를 주는지를 생각했다. 조금 다른 질문을 해보고 싶다. 시대의 영향을 받지 않고 살 수 없다면, 시대 안에 있으면서도 시대와 거리를 만드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회사를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오랫동안 조직생활을 하다 보면 조직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나도 중요하게 여기게 된다. 평가가 중요하다. 직책이 중요하다. 어떤 일을 맡는지가 중요하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지도 중요하다. 나 역시 이런 것들과 무관하게 살아온 사람은 아니다. 매일글쓰기 1,247편을 분류했을 때도 회사와 조직, 인정과 평가가 오랫동안 반복되는 큰 주제였다. 당시에는 그것이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회사원이 회사 일을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러 해의 글을 한꺼번에 보고 나니 조금 다른 질문이 생겼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 가운데 얼마만큼이 회사 안에서만 중요했던 것일까. 회사에서는 매우 큰일이 시간이 지나면 별것 아닌 일이 되기도 한다. 그해의 평가. 누가 어떤 자리에 갔는가. 누가 어떤 업무를 맡았는가. 당시에는 상당히 신경 쓰였지만 몇 년 지나면 기억조차 희미한 일이 많다.

 

반대로 당시에는 큰 성과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 오랫동안 남기도 한다. 꾸준히 쓴 글. 읽었던 책. 가족과의 시간. 새롭게 배운 것. 어떤 일을 하면서 갖게 된 질문. 회사라는 세계의 시간과 내 삶 전체의 시간은 같은 속도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 차이를 보기 시작하면 작은 거리가 생긴다. 회사에서 중요하다고 해서 내 삶 전체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닐 수 있다. 그렇다고 회사 일을 대충 하겠다는 뜻도 아니다. 오히려

회사라는 하나의 세계 안에서 최선을 다하면서도 그 세계의 평가표가 내 존재 전체의 평가표가 되지는 않게 하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거리’라는 말의 한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강의자료에서 니체의 ‘거리의 파토스’는 처음 읽으면 조금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다. 강자와 약자. 높음과 낮음. 거리. 이런 표현은 사람을 우열로 나누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앞서 81편에서도 생각했듯 니체의 강자와 약자는 단순히 사회적으로 힘 있는 사람과 힘없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강의자료가 강조하는 핵심은 다수적인 가치와 다른 감각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에 있다.

 

그러니 거리를 둔다는 것은 사람을 무시하는 일이 아니다. ‘나는 저 사람들과 달라.’라고 우월감을 가지는 일도 아니다. 모두가 당연하다고 느끼는 것을 나도 반드시 당연하게 느껴야 하는가를 묻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최근 사진을 찍으며 경험한 변화가 떠오른다. 출퇴근길 전철은 늘 같은 곳이었다. 사람들은 스마트폰을 보고, 누군가는 졸고, 누군가는 역에서 내린다. 예전에는 나도 그 공간을 목적지까지 이동하기 위한 시간으로 주로 사용했다. 그런데 카메라를 가지고 다니면서 같은 장소가 조금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전철 맨 앞 칸으로 가본다. 유리창에 비친 사람을 본다. 광고판 앞을 사람이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자리 하나를 옮겨보고, 거리와 각도를 생각한다.

 

세상은 그대로인데 보는 감각이 달라졌다. 강의자료에 나오는 ‘다르게 보는 자’라는 표현이 이 경험과 잘 맞는다고 느꼈다. 거리의 파토스는 반드시 거대한 사회적 반항으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닐 수 있다. 평소 보지 않던 것을 보기 시작하는 것도 기존 감각과 거리를 만드는 일이다. 다른 책을 읽는 것. 다른 길로 걸어보는 것. 모두가 빨리 지나가는 곳에서 잠깐 멈추는 것.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을 한번 질문해보는 것. 이런 작은 변화에서도 거리는 생긴다.

 

그래서 ‘남들과 다르게 살아야 한다’고 결심하는 것은 오히려 조금 이상하다.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목표로 삼는 순간 여전히 기준은 ‘남들’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오른쪽으로 가니 나는 왼쪽으로 간다. 모두가 좋아하니 나는 싫어한다. 유행하니 일부러 피한다. 이것도 결국 다른 사람에게 반응하는 삶이다. 89편에서 역겨움에 머물지 않고 ‘그렇다면 나는 어디로 갈 것인가’를 물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싫어하는 대상이 계속 내 방향을 정한다면 나는 그 대상으로부터 아직 자유롭지 않다.

 

강의자료가 거리의 파토스를 최종 단계로 보지 않는 이유도 비슷하다. 시대에 순응하는 사람은 시대에 의해 결정된다. 그런데 시대에 반대하는 사람도 여전히 시대에 의해 결정될 수 있다. ‘나는 저들과 다르다.’라는 정체성도 ‘저들’이 사라지면 함께 힘을 잃을 수 있다. 그래서 니체는 한 단계 더 나아간다. 시대와 다른 사람이 되는 것에서, 이전의 나와 다른 사람이 되는 것으로. 강의자료에서는 이것을 거리의 파토스에서 ‘비극의 파토스’로의 이동이라고 설명한다. 거리의 파토스가 나와 시대 사이에 차이를 만든다면, 비극의 파토스는 현재의 나와 앞으로의 나 사이에 새로운 거리를 만든다.

 

이 구분이 나에게는 상당히 중요하게 느껴진다. 우리는 흔히 성장한다는 것을 다른 사람보다 앞서는 것으로 생각한다. 더 좋은 평가를 받는다. 더 높은 자리에 간다. 더 많이 안다. 더 좋은 결과를 낸다. 그러면 비교 대상은 언제나 바깥에 있다. 하지만 비극의 파토스에서는 비교 대상이 달라진다. 어제의 나와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가. 이것은 조금 더 어려운 문제다. 남보다 앞서는 것은 한 가지 능력을 계속 강화해도 가능하다. 하지만 자신과 달라지려면 내가 잘해왔던 방식까지 때로는 버려야 한다. 익숙한 것을 놓아야 한다.

 

오랫동안 나를 성공하게 해준 습관이 다음 단계에서는 오히려 나를 붙잡을 수도 있다. 직장에서도 그런 순간이 생긴다. 실무자일 때 일을 잘하는 방법과 팀장이 되어 일을 잘하는 방법은 같지 않다. 실무자로서 모든 것을 직접 확인하고 세세하게 챙기는 능력이 큰 장점이었다고 해도, 책임지는 범위가 넓어진 뒤에도 모든 일을 직접 하려고 하면 오히려 조직의 힘을 떨어뜨릴 수 있다. 예전의 강점이 지금의 한계가 된다.

그러면 자기극복은 약점을 고치는 일만이 아니다. 한때 나를 여기까지 데려온 강점을 놓아줄 수 있는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전 글에서 ‘주는 사람’으로만 있으려는 습관을 생각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해결하는 사람. 답을 아는 사람. 도와주는 사람. 책임지는 사람. 이런 모습은 분명 좋은 힘이다. 하지만 그 정체성이 너무 강해지면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고 도움받는 능력을 잃을 수 있다. 자기극복은 무능한 내가 유능한 내가 되는 과정만은 아니다. 때로는 유능하다고 생각하는 나까지 넘어서는 일이다.

 

강의자료에서 ‘비극’이라는 말이 붙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새로운 내가 나타나려면 이전의 내가 어느 정도는 사라져야 한다. 낙타에서 사자로, 사자에서 어린아이로 가는 세 변신처럼 새로운 상태는 이전 상태를 그대로 유지한 채 하나를 더 얹는 방식으로만 만들어지지 않는다. 무엇인가 끝나야 한다. 그래서 자기극복에는 상실이 있다.

 

나는 이것을 요즘 책을 정리하면서도 조금 느꼈다. 책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이 한때는 나에게 꽤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관심 있는 작가라면 여러 권을 모으고, 언젠가 읽을 생각으로 책을 사두었다. 그 행동에는 독서에 대한 욕망이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질문이 달라졌다. 얼마나 많은 책을 가지고 있는가보다 지금 무엇을 읽고 있는가, 읽은 것이 내 생각과 어떻게 연결되는가가 더 중요해졌다. 그러면 과거의 방식과 거리를 만들어야 한다. 한때 소중했던 책을 내보내기도 해야 한다.

 

그 순간 약간의 아쉬움이 생긴다. 그 아쉬움은 단순히 물건을 버리는 데서만 오는 것이 아니다. 그 물건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예전의 나와도 조금 헤어지는 감정일 수 있다. 비극의 파토스라는 말을 이런 일상의 변화에서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다. 거창하게 새로운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오랫동안 ‘나답다’고 생각했던 것을 필요하면 다시 묻는 것.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라고 굳히지 않는 것. 그리고 이전의 나와 조금 다른 삶을 허용하는 것이다.

 

매일글쓰기를 몇 년 동안 이어오면서도 그런 변화가 보인다. 2018~2019년의 글과 2020년의 글이 다르고, 2021년에는 욕망과 철학, 돈과 가치에 대한 질문이 더 많이 나타났다. 이후에는 메모와 개인지식관리, 독서와 글쓰기를 다시 연결하는 방식에 관심이 커졌다. 한 사람이 쓴 글인데 관심의 중심이 움직였다. 나는 이 변화가 흥미롭다.

 

만약 몇 년 동안 계속 같은 질문만 하고 같은 답만 반복했다면 그것을 일관성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변하지 않았다는 뜻일 수도 있다. 생각이 달라진다는 것은 과거의 내가 틀렸다는 뜻만은 아니다. 그때의 나에게 필요했던 질문을 충분히 살았기 때문에 다음 질문으로 이동한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오래된 글을 읽을 때 과거의 나를 심판하고 싶지는 않다. “그때는 왜 저렇게 생각했을까.”라고 비웃을 필요도 없다. 그때의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질문이 생겼다. 다만 지금도 그 답을 계속 가지고 있어야 할 이유는 없다. 과거의 나에게 충실하다는 것은 과거의 생각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처럼 지금도 살아 있는 질문을 계속하는 것일 수 있다.

 

이 지점에서 ‘비극의 파토스’가 104편의 「무덤의 노래」와도 연결된다. 이전 글에서는 꿈의 형태는 사라져도 꿈을 만들던 힘은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힘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가 조금 더 보인다. 살아남은 힘은 과거의 형태를 복원하는 데만 사용되지 않는다. 새로운 형태를 만드는 데 쓰인다. 글쓰기는 계속하지만 쓰는 내용이 달라진다. 독서는 계속하지만 책을 소유하는 방식이 달라진다. 회사생활은 계속하지만 평가와 직책을 바라보는 거리가 달라질 수 있다. 사진을 찍기 시작하면서 출퇴근이라는 익숙한 시간이 다른 활동이 되기도 한다. 같은 삶 안에서도 새로운 세계가 생긴다.

 

자료에서는 거리의 파토스와 비극의 파토스를 구분하면서 중요한 차이를 하나 더 말한다. ‘~으로부터의 자유’와 ‘~을 향한 자유’다. 싫은 것에서 벗어나는 자유는 필요하다. 부당한 관계에서 벗어나고, 타인의 지나친 평가에서 거리를 두고, 나를 소모시키는 습관을 끊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벗어나는 것만으로는 방향이 생기지 않는다. 무엇을 싫어하는지는 알지만 무엇을 좋아하는지는 모를 수 있다. 무엇에 반대하는지는 알지만 어떤 삶을 만들고 싶은지는 모를 수 있다. 그래서 ‘~으로부터의 자유’ 다음에는 반드시 질문이 온다. 나는 무엇을 향해 갈 것인가.

 

이 질문이 없으면 반대하던 대상이 사라졌을 때 내 힘도 함께 사라질 수 있다. 회사 평가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다고 하자.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평가가 덜 중요해졌을 때 그 자리에 무엇을 둘 것인가. 일의 완성도인가. 함께 일하는 사람의 성장인가. 내가 배우는 것인가. 삶의 균형인가. 다른 질문이 필요하다. 소비욕망에서도 마찬가지다. 물건을 덜 사겠다는 결심만으로는 오래가기 어렵다. 사지 않고 남긴 시간과 돈과 공간을 무엇에 사용할 것인가가 있어야 한다. 독서인가. 여행인가. 가족과의 시간인가. 사진인가. 아무것도 아닌 여백인가. 비우는 것보다 그 빈자리에 무엇을 생성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이 점에서 비극의 파토스는 ‘반대’보다 ‘창조’에 가깝다. 현재의 시대와 싸우는 것만으로는 새로운 시대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내가 싫어하는 사람과 달라지는 것만으로 새로운 내가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다. 새로운 가치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가치는 처음부터 거대한 철학적 선언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내가 중요하게 여기고 실제로 시간을 쓰는 것이 곧 가치가 되기 때문이다. 매일 글을 쓴다면 글쓰기가 하나의 가치가 된다. 책을 읽고 생각을 연결하는 데 시간을 쓴다면 그것도 가치다. 가족과 걷는 시간을 지키면 그것 역시 가치다. 출퇴근길을 무의미한 이동시간으로만 두지 않고 사진을 찍으며 관찰하는 시간으로 바꾸면, 삶의 시간을 바라보는 새로운 기준 하나가 생긴다. 가치는 말보다 반복해서 사용하는 시간에서 더 선명하게 드러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매일글쓰기는 내게 시대와 약간의 거리를 만들어준 공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회사에서는 회사의 언어를 쓴다. 성과, 일정, 목표, 문제, 대책, 평가. 필요한 언어다. 하지만 퇴근한 뒤 글을 쓰면 다른 질문을 할 수 있었다. 나는 왜 이렇게 신경 쓰는가.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책의 문장이 왜 마음에 걸리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회사에서는 당장 답을 내야 하지만 글에서는 답이 없어도 질문을 남길 수 있다. 이 차이가 작은 거리였다. 회사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회사만이 세계의 전부가 아니게 만드는 거리였다.

 

최근 사진도 비슷한 역할을 하는 것 같다. 카메라를 들고 있다고 더 특별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남들과 다른 취향을 가졌다는 것을 증명할 필요도 없다. 그보다는 평소 지나치던 것을 다르게 보게 한다. 나는 이런 ‘다른 감각’이 거리의 파토스에서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이 못 보는 것을 보겠다는 경쟁이 아니다. 어제의 내가 보지 못했던 것을 오늘의 내가 하나 더 보는 것.

 

여기에서 거리의 파토스와 비극의 파토스가 만난다. 처음에는 시대와 다른 감각을 만들기 위해 거리를 둔다. 그런데 어느 순간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일 자체를 넘어간다. 이제 중요한 것은 남들과 얼마나 다른가가 아니다. 내 안에 새로운 거리가 생겼는가. 몇 년 전의 내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과 지금의 내가 다르게 생각하는가. 예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을 볼 수 있게 되었는가. 한때 나를 강하게 만들었던 방식에서 필요하면 벗어날 수 있는가. 그렇다면 나는 조금 변한 것이다.

 

이런 변화라면 나는 ‘일관되지 않다’는 말을 너무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사람은 변한다. 오히려 살아 있기 때문에 변한다. 니체가 말하는 자기극복은 어쩌면 매번 새로운 사람이 되라는 강박이 아니라 현재의 나를 최종본으로 만들지 않는 태도인지도 모른다. 나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지금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도 언젠가 달라질 수 있다. 지금 좋아하는 것도 바뀔 수 있다. 지금의 강점도 언젠가는 놓아야 할 수 있다. 그러면 삶은 조금 열려 있게 된다.

 

시대와 거리를 둔다는 말을 이렇게 정리하고 싶다. 첫째, 시대의 가치가 나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유일한 가치라고 믿지 않는 것. 둘째, 남들과 달라지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다른 감각과 다른 삶의 가능성을 만들어보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어려운 거리. 현재의 나에게서도 거리를 둘 수 있는 것.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다.’ ‘나는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왔다.’ ‘내가 잘하는 방식은 이것이다.’ 이 문장들에 너무 오래 머물지 않는 것. 시대와의 거리는 어느 순간 자기 자신과의 거리로 바뀌어야 한다. 그래야 반대에서 창조로 갈 수 있다. 강의자료가 말하는 비극의 파토스는 바로 그 지점에 있다. 낡은 내가 조금 사라지고 새로운 내가 나타나는 과정. 그래서 비극이다. 그러나 끝이 소멸이 아니라 생성이기 때문에 긍정의 파토스다.

 

이제 다음 장 「자기극복」과 「고매한 자들」로 넘어갈 준비가 된 것 같다. 그런데 자기극복이라는 말을 들으면 쉽게 이런 모습을 떠올린다. 더 노력하는 사람. 더 강해지는 사람. 약점을 이겨낸 사람. 자기 자신에게 엄격한 사람. 하지만 니체가 말하는 자기극복이 정말 그런 것뿐일까. 지금까지 열심히 노력해 강한 사람이 되었다고 해도 거기에서 멈추면 어떻게 될까. 자신의 강함에 만족하고, 자신이 세운 기준을 지키며, 높은 곳에 올라간 뒤 더 이상 변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정말 자신을 극복한 것일까. 다음에는 차라투스트라가 ‘고매한 자’를 비판하는 이유를 따라가보고 싶다. 강해진 사람은 왜 다시 자신을 넘어야 하는가(105)

 

 

이전 글에서 삶을 긍정한다는 것은 삶의 심연을 없애는 일이 아니라, 심연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시 움직이는 일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춤은 끝난다. 좋은 시간도 지나가고, 사람도 떠나며, 한때 나를 뜨겁게 만들었던 꿈도 어느 순간 예전과 같지 않다. 그래서 「춤의 노래」 다음에 「무덤의 노래」가 오는 것이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춤추는 사람에게도 무덤은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젊은 날을 돌아본다. 그곳에는 사랑했던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젊은 시절 품었던 꿈, 열정, 아름답다고 믿었던 것, 세상을 향해 가졌던 기대가 함께 묻혀 있다. 강의자료에서는 이것을 ‘청춘의 환영’이라고 표현한다. 환영이라고 해서 거짓이라는 뜻은 아닐 것이다. 한때는 정말 소중했던 것들이다. 그때는 그것이 오래갈 것이라고 믿었고, 그것을 위해 힘을 썼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어떤 것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어떤 것은 사람들에 의해 좌절되었으며, 어떤 것은 내가 스스로 포기했다.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이런 무덤이 조금씩 생기는 것 같다. ‘그때는 이런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그 일은 꼭 해보고 싶었는데.’ ‘그 사람과는 오래 함께할 줄 알았는데.’ ‘나는 이런 방식으로 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과거를 돌아보면 현재의 나와 이어진 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더 이상 이어지지 않는 나도 있다. 이것을 생각하니 「무덤의 노래」가 단순히 과거의 상처를 극복하라는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우리는 성공한 과거만 가지고 현재에 도착하지 않는다. 사라진 가능성도 함께 데리고 온다. 92편에서는 망각을 생각했다. 과거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과거가 현재에게 계속 명령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능동적인 망각일 수 있다고 보았다. 100편에서는 조금 다른 문제를 생각했다. 이미 일어난 사건을 바꿀 수는 없지만, 그것을 앞으로 무엇의 재료로 사용할지는 달라질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무덤의 노래」에는 또 다른 질문이 있다. 과거를 잊지도 않았고, 의미를 완전히 바꾸지도 못했는데, 나는 어떻게 계속 살아왔을까. 이 질문이 내게는 더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사람은 모든 상처를 극복한 다음 앞으로 가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일은 아직 아프다. 어떤 기억은 생각하면 여전히 불편하고, 어떤 실패는 지금도 아쉽다.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관계도 있고, 다른 선택을 했으면 어땠을까 생각하는 순간도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삶은 계속되었다. 다음 날 출근했고, 아이들은 자랐고, 책을 읽었고, 새로운 일을 맡았으며, 또 다른 사람을 만났다. 그리고 어느 순간 예전에 없던 관심이 생겼다. 글을 쓰기 시작했고, 책을 더 깊이 읽게 되었고, 철학을 공부했고, 최근에는 카메라를 들고 평범한 거리를 다르게 보기 시작했다. 과거가 완전히 해결되었기 때문에 새로운 것이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해결되지 않은 것을 가지고도 새로운 것이 생겼다.

 

이 점이 「무덤의 노래」에서 말하는 의지와 닿아 있는 것 같다.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에게 아직 묻히지 않은 어떤 것이 있다고 말한다. 상처를 입지 않았다는 뜻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실제로 그는 상처를 입었다. 젊은 날의 꿈은 죽었고, 사람들에게 실망했으며, 지나간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 모든 상처와 동일하지 않은 무엇인가가 남아 있었다. 다시 원하는 힘. 다시 움직이는 힘. 다시 새로운 것을 만드는 힘. 나는 이것을 ‘상처받지 않는 의지’라기보다 ‘상처만으로는 끝나지 않는 의지’라고 이해하고 싶다.

 

사람은 상처를 받는다. 그러나 상처가 그 사람의 전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실패한다. 그러나 실패가 이후의 모든 행동을 결정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꿈 하나가 사라진다. 그러나 꿈꾸는 능력까지 함께 사라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 구분이 중요해 보인다. 우리는 때때로 자신을 과거의 사건으로 설명한다. 나는 그 일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 어릴 때 이런 환경에서 자라서 그렇다. 회사에서 그런 경험을 했기 때문에 이제 사람을 믿지 않는다.

 

그 설명에는 분명 진실이 있다. 나도 살아온 환경과 경험에서 자유롭지 않다. 하지만 설명이 너무 완벽해지면 이상한 일이 생긴다. 과거가 현재의 나를 설명하는 것을 넘어 앞으로의 나까지 결정하기 시작한다. 그때 상처는 사건이 아니라 정체성이 된다. ‘나는 상처받은 사람.’ ‘나는 인정받지 못한 사람.’ ‘나는 원래 그런 사람.’ 이런 문장은 과거의 무덤 앞에 나까지 함께 앉혀놓을 수 있다. 니체의 의지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는 힘처럼 느껴진다. 무덤이 없었던 척하지 않는다. 그곳에 누구와 무엇이 묻혀 있는지도 안다. 하지만 그 곁에 자신까지 묻히지는 않는다.

 

매일글쓰기를 오래 이어온 경험을 돌아보면 이 점을 조금 볼 수 있다. 여러편의 글에는 서로 다른 시기의 내가 남아 있다. 초기의 글에는 자유와 가족, 관계와 글쓰기 같은 질문이 있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회사와 평가, 인정에 관한 글이 많아졌다. 이후에는 욕망과 철학, 돈과 가치에 대한 질문이 늘었고, 최근 기록으로 갈수록 독서와 글쓰기, 메모와 지식관리처럼 생각을 다시 연결하는 일이 중요해졌다. 그때마다 나는 다른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당시에는 상당히 중요했던 일이 지금은 희미해진 것도 있다. 반대로 그때는 작은 관심이었는데 지금까지 이어져 큰 부분이 된 것도 있다.

 

그중 하나가 글쓰기다. 주제는 계속 달라졌지만 쓰는 일은 여러 해를 가로질러 돌아왔다. 회사 이야기를 썼고, 책 이야기를 썼고, 가족을 썼고, 돈과 욕망을 썼다. 생각이 달라져도 다시 썼다. 그런 의미에서 매일글쓰기는 내가 무엇을 생각했는지 보여주는 기록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무엇이 계속 살아남았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처럼 보인다. 내용은 바뀌었다. 그런데 쓰고 싶다는 힘은 다른 모습으로 계속 나타났다. 한동안 약해졌다가 다시 돌아오기도 했고, 단순한 일기에서 개념을 연결하는 작업으로 형태가 달라지기도 했다.

 

그 힘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나는 평생 글을 쓸 사람이다’라고 선언하고 시작한 것도 아니다. 그냥 썼다. 그리고 오래 지나 돌아보니 계속 살아 있던 것이 보였다. 어쩌면 의지는 이렇게 발견되는 것 아닐까. 내가 무엇을 원한다고 말했는가보다, 무엇이 여러 번 좌절되고도 다시 돌아왔는가. 이 질문이 더 중요할 수 있다. 사람은 많은 것을 원한다고 말한다. 운동하고 싶다. 책을 읽고 싶다. 무언가를 배우고 싶다. 좋은 관계를 만들고 싶다. 하지만 어떤 욕망은 몇 번의 실패 뒤 사라지고, 어떤 욕망은 오래 지나도 다시 나타난다. 한동안 잊었다가도 다시 시작한다. 환경이 바뀌면 다른 모습으로 돌아온다. 그런 욕망에는 나도 잘 설명하지 못하는 생명력이 있다.

 

「무덤의 노래」에서 차라투스트라가 발견하는 것도 그런 힘일 것이다. 젊은 날의 꿈 자체가 그대로 살아남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많은 것은 죽었다. 하지만 꿈을 만들었던 힘까지 죽지는 않았다. 이 차이가 중요하다. 젊었을 때 하고 싶었던 일을 그대로 해야 젊은 날에 충실한 것은 아니다. 그때 가졌던 열정이 다른 대상으로 이동할 수도 있다. 예전에 성공과 인정에 사용했던 힘이 나중에는 공부와 글쓰기에 쓰일 수도 있다. 어떤 시기에는 조직에서 더 큰 역할을 맡는 것이 중요했다가, 시간이 흐르면 한 편의 글이나 한 장의 사진이 더 깊은 만족을 줄 수도 있다. 대상은 바뀐다. 하지만 무엇인가를 향해 가고 싶어 하는 힘은 계속 이동한다.

 

이렇게 보면 과거의 꿈을 포기했다는 것도 조금 다르게 볼 수 있다. 그 꿈의 형태를 유지하지 못했다고 삶 전체가 배신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안에 있던 힘이 다른 형태를 찾았을 수도 있다. 나는 최근 책을 정리하면서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관심 있는 작가의 책을 여러 권 모으고, 언젠가 읽겠다고 생각했던 시기가 있었다. 책을 정리하면 그때의 계획까지 정리하는 것처럼 느껴져 조금 아쉽다. ‘은퇴하면 읽을 텐데.’ ‘공간이 더 넓다면 가지고 있을 텐데.’ 그런 생각도 든다. 하지만 책 몇 권을 보내는 것이 독서에 대한 욕망을 버리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모든 책을 소유해야 한다는 방식에서 벗어나 지금 읽고 싶은 것을 더 깊게 읽는 방식으로 변할 수도 있다. 형태를 놓아준다고 그 안의 힘까지 버리는 것은 아니다.

 

이것도 작은 무덤일 것이다. 한때 중요했던 방식이 끝난다. 하지만 그 방식이 끝난 자리에 다른 방식이 시작된다. 그래서 「무덤의 노래」의 ‘무덤을 파괴한다’는 표현을 과거를 부수고 없앤다는 뜻으로 읽고 싶지는 않다. 무덤에는 소중했던 것도 함께 묻혀 있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젊은 날을 저주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사랑스럽게 기억한다. 동시에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에 대한 저주도 내려놓는다.

 

이 부분이 특히 중요하다. 왜 저주를 내려놓을까. 상대가 용서받을 만해서는 아닐 것이다. 과거의 잘못이 사라졌기 때문도 아니다. 저주에 계속 힘을 쓰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고 읽고 싶다. 91편에서 복수가 정의의 얼굴을 쓰는 순간을 생각했고, 92편에서는 원한을 붙잡는 기억을 생각했다. 「무덤의 노래」에서는 거기에서 한 걸음 더 간다. 상대를 용서해야 한다는 도덕적 명령보다, 내 힘을 어디에 사용할 것인가의 문제가 된다.

 

계속 저주하는 데 쓸 것인가. 아니면 아직 살아 있는 것을 키우는 데 쓸 것인가. 삶에는 사용할 수 있는 힘이 무한하지 않다. 지나간 사람과 사건을 계속 미워하는 데 쓰는 힘은 새로운 것을 만드는 데 사용할 수 없다. 그래서 저주를 내려놓는 것은 상대를 위한 행동이라기보다 남아 있는 내 의지를 위한 행동일 수 있다.

 

나는 이 생각이 마음에 든다. ‘용서해야 좋은 사람이다’라는 말보다 훨씬 현실적이다. 용서하지 못해도 괜찮다. 좋아할 필요도 없다. 다시 가까워질 필요도 없다. 다만 그 사건에게 내 현재의 힘을 계속 지급할 것인지는 선택할 수 있다. 과거가 이미 많은 것을 가져갔다면 현재의 힘까지 계속 줄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 힘으로 다른 것을 만들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부활은 과거의 내가 그대로 살아나는 일이 아니다. 젊은 시절의 꿈이 똑같은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도 아니다. 죽었던 자리에서 다른 것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래서 강의자료의 “부활은 무덤이 있는 곳에만 있다”는 표현을 이렇게 읽고 싶다. 무덤이 있어야 한다는 말은 고통이 필요하다는 뜻이 아니다. 상처를 일부러 만들라는 뜻은 더더욱 아니다. 이미 상실이 생겼다면 그곳이 끝점만은 아닐 수 있다는 뜻에 가깝다. 무언가가 끝난 자리에 이전에는 없던 것이 시작될 수 있다. 직장에서 한 역할이 끝나면 다른 방식으로 일할 수 있다. 자녀가 자라 부모를 덜 필요로 하게 되면 부모의 삶에도 다른 시간이 생긴다. 오랫동안 갖고 있던 물건을 정리하면 빈자리가 생긴다. 읽었던 책을 정리하면 새로운 질문이 남는다.

 

사람은 자꾸 빈자리를 실패로 생각하지만, 생성은 그런 빈자리에서 시작될 때도 있다. 최근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평범한 출퇴근길을 찍는 일도 오래전부터 계획했던 삶은 아니다. 몇 년 전의 내가 지금 전철 안에서 사람과 빛을 관찰하고, 사진을 모아 블로그에 올리는 일을 중요한 활동으로 생각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재미있다. 새로운 시선이 생겼다. 그것은 과거의 어떤 꿈을 복원한 결과가 아니다. 지금의 삶에서 새롭게 생겨난 욕망이다.

 

이것이 오히려 살아 있다는 증거 아닐까. 젊음을 유지한다는 것은 젊을 때와 똑같은 것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것을 좋아할 수 있는 능력이 남아 있는 것일 수 있다. 새로운 질문에 마음이 움직이고, 새로운 장소에 가보고 싶고, 새로운 장면을 발견하며, 아직 써보지 않은 글을 쓰고 싶은 것. 그런 욕망이 남아 있다면 과거의 무덤이 아무리 많아져도 삶 전체가 무덤이 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의지’를 거창한 결단으로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반드시 극복하겠다.”라는 결심만이 의지는 아니다. 오히려 삶에서 여러 번 나타나는 작은 움직임일 수 있다. 다시 책을 펼치는 것. 한동안 쉬다가 다시 운동하는 것. 끊겼던 글을 다시 쓰는 것. 사람에게 실망했지만 다른 사람과 다시 관계를 만드는 것. 하나의 꿈을 놓쳤지만 다른 것에 다시 관심을 갖는 것. ‘다시’라는 말 속에 의지가 있다.

 

완전히 새롭게 시작하는 사람은 없다. 사람은 이미 살아온 것과 실패한 것과 상처받은 것을 가지고 다시 시작한다. 그래서 다시 시작하는 것은 처음 시작하는 것보다 어쩌면 더 많은 힘이 필요하다. 무엇이 잘못될 수 있는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번 실패해봤기 때문에 두렵다. 사람에게 실망해봤기 때문에 조심스럽다. 그래도 다시 움직인다. 그것이 무덤을 뚫고 나오는 힘인지도 모른다.

 

나는 과거의 나를 완전히 구해낼 수 없다. 그때 하지 못했던 말을 대신 해줄 수도 없고, 지나간 기회를 되돌릴 수도 없다. 젊은 날의 나에게 지금의 지혜를 보내줄 수도 없다. 하지만 그 사람이 남긴 것을 지금 사용할 수는 있다. 읽고 싶었던 마음. 쓰고 싶었던 마음. 잘하고 싶었던 마음. 자유롭게 살고 싶었던 마음. 무언가를 이해하고 싶었던 마음. 그 힘들은 다른 형태로 아직 움직이고 있을 수 있다.

 

그러니 과거를 돌아볼 때 상처만 찾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또 하나를 물을 수 있다. 그 시절부터 지금까지 무엇이 살아남았는가. 무엇이 여러 번 좌절되고도 다시 돌아왔는가. 어떤 욕망은 모습이 바뀌었는데도 여전히 나를 움직이는가. 그것이 앞으로 가져갈 힘일 수 있다. 매일글쓰기의 긴 기록을 돌아볼 때도 이제 실패와 고민만 보지 않고 싶다. 그 글들을 쓴 사람은 매번 조금씩 달랐다. 생각도 달라졌고, 중요하게 여기는 것도 바뀌었다. 하지만 계속 질문했다. 계속 읽었다. 그리고 다시 썼다. 어쩌면 1,247편이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사실은 어떤 특정한 생각이 옳았다는 것이 아니라 질문하고 쓰는 힘이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힘이 지금 니체에 관한 104번째 글까지 이어졌다.

 

그렇게 생각하면 「무덤의 노래」는 과거를 애도하는 노래이면서 동시에 미래의 시작을 알리는 노래다. 죽은 것을 억지로 살려내지 않는다. 상처가 없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무덤 앞에서 발견한다. 아직 나까지 죽은 것은 아니다. 나는 여전히 무엇인가를 원한다. 아직 질문이 있고, 보고 싶은 것이 있으며, 쓰고 싶은 문장이 남아 있다. 그것이면 다시 움직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질문이 남는다. 차라투스트라의 젊은 날의 열정을 죽인 것은 단지 몇몇 사람이 아니었다. 강의자료는 어린 시절부터 가족, 학교, 사회가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 선과 악의 무거운 가치들을 우리에게 지워준다는 문제까지 연결한다. 그렇다면 나의 오래된 상처 중에는 특정한 사람에게서 받은 것뿐 아니라 내가 살던 시대의 기준을 너무 오래 내 기준으로 받아들여 생긴 것도 있지 않을까.

좋은 학교. 좋은 직장. 승진. 안정. 남들에게 인정받는 삶. 이런 것들이 잘못된 가치는 아니다. 하지만 시대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과 내가 중요하다고 느끼는 것은 언제나 같은가. 다음에는 시선을 개인의 무덤에서 조금 더 바깥으로 옮겨보고 싶다. 시대와 거리를 둔다는 것은 무엇인가. 세상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 있으면서도 다른 감각을 가질 수 있을까.(104)

 

 

 

이전 글에서 이름 높은 현자와 자유로운 정신을 생각했다. 많은 사람이 믿는 것을 정당화하는 대신 자신의 감각을 끝까지 사유하려면 때로는 사람들과 다른 곳에 서야 한다. 그래서 자유로운 정신에는 어느 정도의 고독이 따라올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차라투스트라』의 다음 장 「밤의 노래」에서 만나는 고독은 조금 다르다.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을 빛에 비유한다. 그는 계속 빛을 내보낸다.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주고, 자신이 발견한 것을 말하고,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누어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는 행복하지 않다. 오히려 어둠을 갈망한다. 빛을 주는 사람이 왜 어둠을 원할까. 강의자료를 읽다가 눈에 들어온 문장이 있었다. “나는 받는 자가 누리는 행복을 알지 못한다.”

 

처음에는 조금 의외였다. 주는 것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많이 가진 사람이 나누고, 아는 사람이 알려주며, 힘이 있는 사람이 어려운 사람을 돕는 모습은 긍정적으로 보인다. 나 역시 주는 쪽이 받는 쪽보다 편했던 것 같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는 것은 어렵지 않은데 내가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조금 불편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가능하면 직접 해결하려고 한다. 누군가에게 부탁해서 부담을 주느니 조금 더 수고하는 편을 택하기도 한다.

 

회사에서도 비슷했다. 직책이 올라갈수록 해결해야 할 문제가 생기면 먼저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생각한다. 구성원이 어려움을 이야기하면 방법을 찾아주려고 하고, 문제가 생기면 책임지는 쪽에 서려고 한다. 가족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부모라면 아이들에게 해주는 것이 자연스럽고, 남편이라면 가족에게 필요한 것을 챙기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베푸는 사람의 고독’이라는 말이 처음에는 잘 이해되지 않았다. 많이 줄 수 있다는 것은 오히려 풍요로운 것 아닌가.

 

그런데 차라투스트라는 반대로 말한다. 계속 주기만 하는 것이 나의 가난이라고. 이 말이 마음에 걸렸다. 왜 주는 것이 가난일까. 강의자료에서 「밤의 노래」는 빛을 발하는 차라투스트라의 고독을 이렇게 설명한다. 빛은 어둠을 비출 수 있지만 자기 자신은 다른 빛을 받을 수 없다.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불꽃을 다시 자기 안으로 삼키며 살아간다. 그에게 부족한 것은 줄 것이 아니다. 너무 많다. 부족한 것은 받는 경험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내가 오랫동안 ‘강함’이라고 생각했던 것 가운데에도 다시 볼 것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혼자 해결하는 사람. 다른 사람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사람. 도움을 주지만 도움은 잘 요청하지 않는 사람. 자기 문제는 자기가 처리하는 사람. 나는 이런 모습을 꽤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독립적이고 책임감 있는 사람처럼 보인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도움을 받을 줄 모르는 것도 하나의 약함일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왜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불편할까. 상대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서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이유만 있는 것은 아닐 것 같다.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 싫을 수도 있다. 내가 해결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지 않을 수도 있다. 누군가에게 빚지는 느낌이 불편할 수도 있다. 그리고 더 깊은 곳에는 이런 마음도 있을지 모른다. 나는 주는 사람이고 싶다.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사이에는 묘한 위치 차이가 생긴다. 주는 사람은 가진 사람이다. 받는 사람은 필요한 사람이다. 주는 사람은 해결할 수 있고, 받는 사람은 도움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계속 주는 위치에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그 위치에 익숙해질 수 있다. ‘나는 도와주는 사람.’ ‘나는 책임지는 사람.’ ‘나는 해결하는 사람.’ 그 정체성이 강해질수록 반대편으로 이동하기가 어려워진다. “잘 모르겠습니다.” “도와주세요.” “이 부분은 제가 못하겠습니다.” “당신 생각은 어떻습니까.” 이런 말이 생각보다 어려워진다. 그렇다면 받는다는 것은 단순히 무언가를 얻는 일이 아닐 수도 있다. 내가 모든 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이다.

 

이 점에서 「밤의 노래」는 이전 글에서 생각했던 도움의 문제와 조금 다른 곳으로 간다. 그때는 주로 어떻게 도울 것인지를 생각했다. 상대를 수치스럽게 하지 않는 도움, 상대의 힘을 빼앗지 않는 도움, 나의 선의 뒤에 숨어 있는 욕망을 살펴보았다. 102편에서는 반대로 나 자신을 묻게 된다. 나는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인가.

 

이 질문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특히 오랫동안 책임지는 위치에 있을수록 더 그런 것 같다. 회사에서 팀장이 되면 사람들이 문제를 가지고 찾아온다. 판단을 요청하고, 방향을 묻고, 때로는 결정을 기다린다. 그런 일이 반복되면 나도 모르게 ‘답을 주는 사람’이라는 역할에 익숙해진다. 그러다 보면 모든 문제에 내가 답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 같은 느낌도 생긴다. 101편에서 이름 높은 현자를 생각하며, 직책이 올라갈수록 사람들이 내 말에 쉽게 동의할 수 있다는 점을 조심해야겠다고 했다.

 

102편에서는 그 반대편이 보인다. 직책이 올라갈수록 내가 다른 사람에게 배우는 능력도 함께 줄어들 수 있다. 답을 말하는 일이 많아지면서 질문하는 일이 줄어든다. 도움을 주는 일이 많아지면서 도움받는 경험이 줄어든다. 그러면 어느 순간 주변에는 사람이 많아도 외로울 수 있다. 모두 나에게 무엇인가를 묻는데, 나는 누구에게 물어야 할지 모른다. 모두에게 방향을 이야기하는데, 내가 흔들릴 때는 누구에게 흔들린다고 말해야 할지 모른다. 차라투스트라의 ‘빛에 둘러싸인 빛’이라는 이미지가 이런 상태와 조금 닮아 보인다.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지만 정작 자신은 다른 빛을 받지 못한다.

 

강의자료는 이 고독의 원인을 받는 사람들에게 돌리지 않는다. ‘사람들이 내 마음을 몰라준다.’ ‘내가 이렇게 많이 해주는데 알아주지 않는다.’라고 끝내지 않는다. 오히려 차라투스트라 자신에게 돌린다. 나는 왜 계속 빛이어야 하는가. 이 질문이 중요하다. 베풀면서 외로운 사람은 쉽게 상대를 원망할 수 있다. 내가 얼마나 해줬는데. 내가 얼마나 도와줬는데. 내가 얼마나 희생했는데. 왜 알아주지 않는가.

그 순간 베풂 안에 이상한 계산이 생긴다. 나는 대가를 바라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었을 수도 있다. 감사. 인정. 사랑. 필요한 사람이라는 느낌. 강의자료에서는 이것을 ‘갈망을 향한 갈망’이라고 표현한다. 베푸는 사람은 자신이 준 것을 상대가 필요로 해주기를 원할 수 있다.

 

이 표현도 마음에 남는다. 나는 물건이나 도움을 주는 것만 원하는 것이 아니다. 상대가 그것을 원해주기를 원할 수도 있다. 조언을 했으면 상대가 받아들이기를 바란다. 도와줬으면 도움이 되었다고 느껴주기를 바란다. 내가 준비한 것을 좋아해주기를 바란다. 가족을 위해 무언가를 했으면 가족이 그 마음을 알아주기를 바란다. 이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마음이다. 문제는 그것을 베풂과 분리해서 보지 못할 때 생긴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했다고 생각했는데 상대의 반응이 기대와 다르면 서운하다. 그러면 선의가 조금씩 원망으로 변한다. “내가 이렇게까지 했는데.” 이 문장이 나오기 시작한다.

 

자료는 더 불편한 지점까지 간다. 베푼다는 의식이 강해지면 허기가 생기고, 그 허기가 심해지면 내가 빛을 비춰준 사람에게 오히려 고통을 주고 싶어지는 악의까지 생길 수 있다고 설명한다. 처음에는 과장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관계에서 종종 일어나는 일이다. 상대를 위해 많이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상대가 자기 뜻대로 움직이지 않을 때 더 크게 화를 내기도 한다. “누구 때문에 내가 이렇게 했는데.” 베풂이 어느 순간 권리가 된다. 내가 많이 주었으니 상대도 어느 정도는 내 기대에 맞춰야 한다는 보이지 않는 계약이 생긴다. 그러면 주는 사람은 더 이상 자유롭지 않다. 받는 사람도 자유롭지 않다.

 

이 점에서 베풂은 사랑과 아주 가까우면서도 위험하다. 가족에게 무엇인가를 해주고 싶은 마음은 사랑에서 나올 수 있다. 아이에게 더 좋은 것을 주고 싶고, 배우자가 힘들면 도와주고 싶다. 하지만 사랑하기 때문에 해준 일이 어느 순간 ‘그러니 너도 이렇게 해야 한다.’로 바뀔 수 있다. 주는 행위에 기대가 숨어 들어온다. 나는 예전 매일글쓰기에서 가족과 관계, 사랑에 관한 이야기도 반복해서 적었다. 당시에는 주로 내가 무엇을 더 해야 하는지를 생각했던 것 같다. 좋은 남편이 되려면. 좋은 아빠가 되려면. 가족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지금 「밤의 노래」를 읽으며 그 질문에 하나를 더 붙이고 싶다. 나는 가족에게서 받을 줄도 알고 있는가. 도움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이들의 다른 생각을 받을 수 있는가. 아내가 보는 나의 모습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방법을 제안하면 그대로 한번 따라가 볼 수 있는가. 내가 챙겨주는 사람이라는 역할에서 잠시 내려와 다른 사람이 나를 챙겨주는 것을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가. 받는다는 것은 수동적인 일이 아닌 것 같다. 어쩌면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다. 받으면 내가 조금 달라져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주기만 하면 관계의 방향을 어느 정도 내가 결정할 수 있다. 무엇을 줄지 내가 선택한다. 언제 줄지도 내가 선택한다. 하지만 받는 순간에는 상대가 가져온 것이 내 안으로 들어온다. 그것이 내 생각을 바꿀 수도 있다. 내 계획을 수정하게 할 수도 있다. 내가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할 수도 있다. 그래서 받는다는 것은 타인에게 내 안의 일부를 열어주는 일인지도 모른다.

 

이전 글에서  바깥의 것을 받아들이는 것도 능력이라고 생각했지만, 「밤의 노래」에서는 그 문제가 훨씬 개인적인 관계로 다가온다. 지식이나 도구를 받아들이는 것보다 사람에게 받는 것이 더 어렵다. 책에게 빚진 느낌은 별로 들지 않지만 사람에게 도움을 받으면 빚진 느낌이 생길 수 있다. AI에게 질문하는 것은 편하지만 동료에게 “이 부분을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더 어려울 수 있다. 왜 그럴까. 받는 순간 관계 속의 내 위치가 바뀌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더 이상 완전한 사람이 아니다. 상대에게 필요한 사람이면서 동시에 상대가 필요한 사람이 된다.

 

하지만 어쩌면 건강한 관계는 바로 여기에서 시작되는 것 아닐까. 한쪽이 계속 주고 다른 쪽이 계속 받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 번갈아 위치를 바꿀 수 있는 관계. 오늘은 내가 돕고, 내일은 내가 도움을 받는다. 이 문제에서는 내가 알고, 다른 문제에서는 상대가 안다. 내가 지쳤을 때 상대에게 기대고, 상대가 힘들 때는 내가 자리를 내준다. 그렇게 주고받는 방향이 계속 바뀔 수 있어야 관계가 오래 살아 있을 수 있다.

 

이런 생각을 하니 리더의 역할도 조금 다르게 보인다. 좋은 팀장은 구성원에게 답을 많이 주는 사람일까. 예전에는 어느 정도 그렇게 생각했다. 경험이 많으니 방향을 제시하고, 문제가 생기면 해결해주며, 구성원이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앞에서 챙기는 것이 리더의 역할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물론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만 계속하면 팀장은 빛을 주는 사람이고 구성원은 빛을 받는 사람이라는 관계가 굳어질 수 있다. 그러면 구성원도 기다리게 된다. “팀장님이 어떻게 하라고 하는지 보자.” 팀장은 점점 더 많이 결정해야 한다. 서로가 서로를 그 역할에 가둔다.

 

반대로 팀장이 물을 수 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 문제는 당신이 더 잘 아는데 어떤 방법이 좋겠습니까.” “내가 놓친 것이 있습니까.” 그 순간 방향이 바뀐다. 내가 받는 사람이 된다. 그리고 상대에게는 줄 수 있는 자리가 생긴다. 받을 줄 아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주는 사람으로 만들 수도 있다. 이것은 내가 「밤의 노래」를 읽으면서 새롭게 생각한 부분이다. 계속 베푸는 것이 반드시 상대를 성장시키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내가 받아줘야 상대도 자신의 힘을 사용할 수 있다. 아이의 이야기를 받아주고, 구성원의 의견을 받아들이고, 배우자의 도움을 받으며, 친구의 조언을 실제로 한번 따라보는 것. 받는 행위가 상대에게 “당신에게도 나에게 줄 것이 있다”고 말해주는 셈이다. 그러니 받는 것은 약함의 표시가 아니라 관계에서 힘을 순환시키는 방식일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가 어둠을 갈망하는 것도 이제 조금 이해된다. 그는 더 이상 빛을 내고 싶지 않아서 어둠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도 한번 빛을 받아보고 싶은 것이다. 늘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듣는 사람이 되고,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배우는 사람이 되고, 주는 사람이 아니라 받는 사람이 되고 싶은 갈망이다. 그 갈망을 인정하는 순간 자기극복이 시작된다. 강의자료도 「밤의 노래」를 차라투스트라가 베푸는 자로서 자신의 한계를 알아차리는 장면으로 정리한다. 나는 이 부분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니체의 자기극복은 늘 약한 것을 없애고 더 강해지는 방식만은 아니다. 때로는 내가 강함이라고 생각했던 방식의 한계를 발견하는 것이다. 혼자 해결하는 것이 강함이라고 생각했다면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새로운 강함일 수 있다. 계속 주는 것이 풍요라고 생각했다면 받는 능력을 배우는 것이 더 큰 풍요일 수 있다. 모든 답을 가지고 있는 것이 리더십이라고 생각했다면 모른다고 말하고 다른 사람에게 배우는 것이 더 좋은 리더십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받는 자의 행복’은 단순히 편하게 얻는 즐거움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내게 들어올 자리를 내주는 행복이다. 세상이 나에게 무엇인가를 줄 수 있다고 믿는 것. 다른 사람에게 내가 모르는 것이 있다고 인정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여 내가 이전과 조금 달라지는 것. 나는 아직 주는 쪽이 더 편한 사람인 것 같다. 문제가 생기면 해결하려 하고, 가족에게도 무엇인가 해주려고 하며, 회사에서도 질문을 받으면 답을 찾아주려고 한다. 그것을 없애고 싶지는 않다. 다만 한 가지를 더 연습해보고 싶다. 받는 쪽으로 자리를 바꾸는 것.

 

도움을 받았을 때 곧바로 갚으려고 하지 않고 그냥 고맙다고 말해보는 것. 누군가 내 생각과 다른 의견을 주면 설명부터 하기보다 한번 들어보는 것. 가족이 나를 위해 해주는 일을 당연하게 넘기지 않고 내가 받은 것으로 느껴보는 것. 모르는 문제에서는 아는 척하지 않고 물어보는 것. 아주 작은 일들이지만 이런 순간에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경계가 조금 흐려질 수 있다.

 

102편에서 내가 「밤의 노래」를 읽으며 가져가고 싶은 것은 그래서 이것이다. 베풀 수 있는 능력만큼 받을 수 있는 능력도 필요하다. 계속 빛이 되려고 하면 어느 순간 자기 빛 속에서 고독해질 수 있다. 밤이 있어야 다른 빛도 보인다. 그리고 받는 경험을 알아야 내가 베푸는 방식도 달라질 수 있다. 내가 무엇인가를 받았을 때 느끼는 부담과 고마움, 수치심과 기쁨을 알아야 다른 사람에게 줄 때도 그 사람의 마음을 조금 더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좋은 베풂은 받는 법을 아는 사람에게서 나오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밤의 노래」 다음에는 분위기가 갑자기 바뀐다. 차라투스트라는 더 이상 고독 속에서 자신만 바라보지 않는다. 「춤의 노래」에서 삶 자체와 마주하고 춤을 춘다. 삶은 아름답기만 한 존재도 아니고, 완전히 믿을 수 있는 존재도 아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삶을 사랑하면서도 삶의 깊은 곳에 있는 어둠을 본다. 그렇다면 다음 질문은 여기에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삶을 사랑한다는 것은 좋은 것만 사랑한다는 뜻일까. 아니면 삶의 변덕과 고통, 심연까지 함께 보면서도 춤출 수 있다는 뜻일까(102)

 

 

 

이전 글 삶의 수수께끼를 푼다는 것은 이미 숨어 있는 정답을 찾아내는 일이 아니라, 지나온 우연과 파편을 다시 해석해 앞으로의 삶을 만드는 일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답이 이미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나니 한 가지 문제가 생긴다. 그렇다면 진리는 무엇일까.

우리는 무언가를 공부할 때 진실을 알고 싶어 한다. 책을 읽는 것도, 강의를 듣는 것도, 전문가의 설명을 찾는 것도 내가 모르는 것을 더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다. 회사에서 문제가 생겨도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어떤 판단이 맞는지 찾으려고 한다. 나 역시 오랫동안 책을 읽으면서 저자가 무엇을 말하는지 정확하게 이해하려고 했다. 철학책을 읽을 때는 더 그랬다.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가보다 먼저 ‘니체는 실제로 무엇을 말했는가’, ‘이 개념의 정확한 뜻은 무엇인가’를 알고 싶었다. 이런 태도는 당연히 필요하다. 자기 마음대로 읽고 그것을 철학자의 생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지금 『차라투스트라』를 읽으면서도 강의자료를 계속 확인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런데 「이름 높은 현자들에 대하여」를 읽다 보면 니체는 조금 다른 곳을 건드린다. 진리를 찾는다고 말하는 사람은 정말 진리를 원하는 것일까. 처음에는 이상한 질문처럼 들린다. 진리를 찾는 사람이 진리를 원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원한다는 것일까. 강의자료에서는 ‘이름 높은 현자’와 ‘자유로운 정신’을 대비한다. 이름 높은 현자는 많은 사람에게 존경받고 진리를 말하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차라투스트라는 그들이 실제로는 민중이 이미 믿고 있는 것을 정당화한다고 비판한다.

 

자료가 정리한 표현이 인상적이다. “민중이 있는 곳에 진리가 있다.” 현자는 사람들이 믿는 가치에 논리와 권위를 붙여준다. 그리고 그것을 ‘진리를 향한 의지’라고 부른다. 이 말을 오늘의 생활로 가져오면 조금 불편해진다. 우리는 흔히 ‘사실을 확인한다’고 말하지만, 때로는 이미 결론을 정해놓고 그 결론을 뒷받침할 자료를 찾는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면 내 생각과 비슷한 전문가의 말을 찾는다. 마음에 드는 주장이 있으면 그것을 뒷받침하는 책이나 영상을 더 찾아본다. 반대되는 자료가 나오면 예외라고 생각하거나 그 자료의 문제점을 먼저 찾는다. 그러고 나면 내 생각은 더 확실해진다. ‘역시 내가 생각한 것이 맞았어.’

 

겉으로 보면 공부했다. 자료도 찾았다. 전문가의 말도 확인했다. 하지만 실제로 한 일은 진리를 찾은 것이 아니라 내가 이미 믿고 있던 것을 더 단단하게 만든 것일 수도 있다. 이 지점에서 「이름 높은 현자들」이 갑자기 철학자들만의 이야기가 아니게 된다. 나도 이름 높은 현자처럼 행동할 수 있다. 책을 많이 읽는다고 자유로운 정신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책을 이용해 내가 이미 믿는 것을 더 그럴듯하게 만들 수도 있다.

 

생각해보면 독서를 시작한 초기에는 이런 일이 꽤 많았던 것 같다. 어떤 문제에 관심이 생기면 관련 책을 찾는다. 책에서 마음에 드는 문장을 발견하면 밑줄을 긋는다. 그리고 그 문장이 내가 평소 생각하던 것과 비슷하면 반갑다. ‘그래, 내 생각이 맞았어.’ 권위 있는 저자가 대신 말해준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반대로 내 생각과 다른 문장을 만나면 쉽게 지나가기도 한다. 지금 생각하면 재미있다. 책을 읽으며 새로운 생각을 만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때로는 책을 거울처럼 사용해 내 생각만 확인하고 있었던 것이다.

 

매일글쓰기를 오래 하면서 조금 달라진 부분이 있다면 여기인 것 같다. 처음에는 읽은 책의 내용을 정리하는 글이 많았다. 저자의 주장 가운데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을 옮기고, 기억하고 싶은 문장을 적었다. 그런데 계속 쓰다 보니 요약만으로는 재미가 없어졌다. 어떤 문장은 왜 내 눈에 들어왔는지 궁금해졌다. 내 경험과 맞는가. 정말 그렇게 살아왔는가. 나는 동의하는가. 동의한다면 왜 그런가. 동의하지 않는다면 무엇이 걸리는가.

 

그 질문을 붙이면서 독서가 조금 달라졌다. 저자의 생각을 ‘정답’으로 가져오는 것보다 그 생각과 내 경험을 부딪쳐보는 일이 더 중요해졌다. 지금 쓰고 있는 니체 글도 그렇다. 니체가 동정을 비판한다고 해서 동정은 나쁘다고 결론 내리지 않았다. 내가 사람을 도왔던 경험을 다시 보면서 도움 속에 어떤 욕망이 있었는지 물었다. 니체가 평등을 비판한다고 해서 평등은 잘못된 가치라고 쓰지 않았다. 현실의 구조적 불평등과 내가 느끼는 질투와 원한을 함께 놓고 보았다. 니체가 자유의지를 의심한다고 해서 인간에게 책임이 없다고 결론 내리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움직이는 조건을 어떻게 볼 것인지 생각했다.

 

이런 과정에서 자료와 내가 완전히 같은 결론에 도착하지 않을 때도 있다. 그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 아닐까. 공부한다는 것은 저자의 결론을 그대로 갖는 일이 아니라, 그 사람이 던진 질문을 내가 다시 살아보는 일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름 높은 현자들」에서 차라투스트라가 문제 삼는 것도 진리 그 자체라기보다 ‘진리를 향한 의지’다. 무엇을 진리라고 부르는가보다 먼저 나는 왜 이것을 진리라고 믿고 싶은가를 묻는다.

 

이 질문은 꽤 날카롭다. 회사생활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다. 어떤 문제가 생기면 원인을 찾는다. 자료를 보고, 현장의 이야기를 듣고, 담당자의 설명을 확인한다. 그런데 사람은 완전히 중립적인 상태에서 자료를 보는 것이 아니다. 이미 가설이 있다. ‘아마 이것 때문일 것이다.’ 경험이 많을수록 가설도 빨리 생긴다. 경험은 큰 도움이 된다. 비슷한 문제를 많이 봤기 때문에 가능성이 높은 원인을 빠르게 찾을 수 있다. 하지만 경험에는 위험도 있다. 답을 빨리 아는 만큼 다른 답을 보지 못할 가능성도 커진다. ‘예전에도 이랬어.’ ‘이 문제는 대개 이쪽이야.’ 그 순간부터 자료는 원인을 찾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내가 예상한 원인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중요한 판단일수록 반대 질문이 필요하다. 내 생각이 틀렸다면 무엇이 보여야 할까. 이 질문은 생각보다 어렵다. 내가 옳다는 증거를 찾는 것보다 내가 틀릴 수 있는 조건을 찾는 일이 훨씬 불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리를 정말 원한다면 내가 틀릴 가능성도 함께 원해야 하는 것 아닐까.

 

자료에서 이름 높은 현자와 대비되는 존재는 ‘자유로운 정신’이다. 자유로운 정신은 단순히 남들과 반대로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다. 모두가 오른쪽으로 갈 때 왼쪽으로 가면 자동으로 자유로운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렇게 하면 여전히 다른 사람들이 기준이다. 남들이 믿기 때문에 반대하는 것 역시 남들에게 반응하는 행동일 수 있다. 내가 이해한 자유로운 정신은 조금 다르다. 누가 말했는가보다 자신이 실제로 무엇을 보고 느끼고 생각했는지를 끝까지 따라가보는 사람에 가깝다. 강의자료에서는 차라투스트라의 진리의 의지를 “인간이 사유할 수 있고,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것으로 바꾸려는 의지”, 그리고 “자신의 감각을 끝까지 사유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나는 ‘자신의 감각을 끝까지 사유하라’는 표현이 마음에 남는다. 그것은 ‘내 느낌이 언제나 옳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반대다. 왜 나는 이렇게 느끼는가. 이 느낌에는 어떤 경험이 들어 있는가. 다른 사람은 왜 다르게 보는가. 내가 놓친 것은 없는가. 내 판단은 무엇에 기대고 있는가. 끝까지 따라가다 보면 처음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 수도 있다. 그러니 자신의 감각을 끝까지 사유한다는 것은 자기 확신을 강화하는 일이 아니라 자기 확신까지 의심할 수 있는 일이다.

 

이 점에서 매일글쓰기는 내게 작은 실험실 같은 역할을 했던 것 같다. 글을 시작할 때는 대개 생각이 있다.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이 책의 주장은 이렇다. 나는 이 문제에서 이렇게 해야 한다고 본다. 그런데 몇 문단을 쓰다 보면 처음의 생각과 다른 곳에 도착할 때가 있다. 이전 글에서 무의식을 생각하면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처음에는 상대가 잘못해서 화가 났다고 쓰다가, 계속 쓰다 보면 내가 인정받지 못했다고 느낀 것이 더 중요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101편에서는 그 경험을 조금 다른 방향으로 보고 싶다. 글을 쓰는 동안 내가 처음 가지고 있던 ‘정답’이 흔들리는 순간이 생긴다. 나는 이것이 사유의 중요한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글을 다 쓴 뒤에도 처음 생각과 완전히 같다면 물론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언제나 처음 생각한 것을 증명하는 글만 쓴다면, 글쓰기는 생각을 만드는 일이 아니라 이미 있는 생각을 변호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책도 마찬가지다. 읽기 전의 나와 읽은 뒤의 내가 언제나 같다면 나는 책에서 무엇을 만난 것일까. 좋은 독서는 때로 나를 불편하게 한다. 내가 옳다고 생각했던 것을 흔든다. 좋아했던 사람에게서 문제를 보게 하고, 싫어했던 생각에서도 배울 것을 발견하게 한다. 그런 책을 읽고 나면 ‘무엇을 배웠다’기보다 내가 서 있던 자리가 조금 움직였다는 느낌이 든다.

 

니체 자신도 그런 철학자인 것 같다. 읽으면 쉽게 동의하기 어려운 말이 많다. 동정에 대한 비판도 불편했고, 평등에 대한 말도 불편했다. ‘잡것들’이라는 표현은 지금 읽기에도 거칠다. 그런데 그 불편함 때문에 오히려 질문이 생긴다. 왜 나는 이 말이 싫은가. 내가 지키고 싶은 가치는 무엇인가. 니체가 공격하는 것과 내가 지키려는 것은 정말 같은 것인가. 그 질문을 따라가다 보면 니체에게 동의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생긴다. 내가 무엇을 믿고 있었는지가 보인다.

 

이것이 내가 지금 철학을 읽는 이유와도 연결된다. 철학자에게 답을 받으려고만 읽는다면 유명한 현자를 한 명 더 섬기는 일이 될 수도 있다. 니체가 말했으니 맞다. 들뢰즈가 그렇게 해석했으니 맞다. 유명한 학자가 말했으니 맞다. 그 순간 책은 생각을 움직이는 도구가 아니라 판단을 대신해주는 권위가 된다. 반대로 철학자의 말을 무시하고 내 생각만 고집한다면 공부할 이유가 없다. 그래서 둘 사이에 긴장이 필요하다. 먼저 정확하게 읽는다. 저자가 무엇을 말했는지 이해하려고 한다. 그 다음 내 경험과 부딪친다. 맞는 부분과 맞지 않는 부분을 본다. 그리고 다시 묻는다. 나는 지금 무엇을 생각하는가. 이 순서가 중요한 것 같다.

 

자료의 「이름 높은 현자들」은 명성과 진리의 관계도 묻는다. 많은 사람이 인정하는 현자는 영향력이 커진다. 그런데 명성이 커질수록 사람들이 기대하는 답도 생긴다. 사람들은 그 사람이 자신들이 믿는 것을 잘 설명해주기를 원할 수 있다. 현자 역시 사람들의 인정과 명성을 잃고 싶지 않을 수 있다. 그러면 진리를 찾는 일과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는 일이 조금씩 섞인다.

 

이것은 철학자에게만 해당하는 문제는 아니다. 회사에서도 비슷하다. 직책이 올라갈수록 사람들이 내 말에 동의하는 경우가 많아질 수 있다. 내 판단이 더 좋아졌기 때문일 수도 있다. 경험이 많아졌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른 이유도 생각해야 한다. 내가 팀장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쉽게 반대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 이 질문은 꽤 중요하다. 회의에서 모두가 동의했다고 해서 내 생각이 옳다는 뜻은 아니다. 말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굳이 반대해서 관계를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다. ‘팀장이 이미 방향을 정했구나’라고 생각하고 자기 의견을 접었을 수도 있다. 그러니 위치가 높아질수록 동의의 숫자를 진실의 증거로 착각하면 위험하다.

 

오히려 반대 의견이 나올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다른 생각은 없습니까?”라고 묻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 이미 결론을 말한 뒤 다른 의견을 물으면 대부분 침묵한다. 때로는 내가 먼저 답을 말하지 않는 편이 낫다. 먼저 현장의 이야기를 듣고, 다른 사람의 판단을 듣고, 마지막에 내 생각을 말하는 것이다. 이런 작은 순서의 차이도 ‘민중의 믿음을 정당화하는 현자’가 되지 않기 위한 생활의 방법일 수 있겠다.

 

여기에서 나는 니체의 ‘민중’이라는 표현도 조심해서 읽고 싶다. 많은 사람이 믿는다고 틀린 것은 아니다. 소수의 생각이라고 더 진실한 것도 아니다. 다수와 다르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가치인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숫자가 아니라 생각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일 것이다. 사람들이 믿기 때문에 믿는가. 권위 있는 사람이 말했기 때문에 믿는가. 내가 믿고 싶어서 근거를 모았는가. 아니면 실제로 보고 듣고 경험한 것과 다른 관점을 함께 놓고 생각해본 뒤에도 그렇게 판단하는가. 이 질문을 통과해야 한다.

 

그렇다면 ‘진리는 누구의 편인가’라는 제목의 질문에도 조금 다른 답을 할 수 있다. 진리는 다수의 편도 아니고 소수의 편도 아니다. 유명한 사람의 편도 아니고 나의 편도 아니다. 적어도 내가 이번 글에서 이해한 니체의 질문은 이렇다. 진리를 내 편으로 만들려고 하지 말 것. 내가 믿는 것을 정당화해주는 도구로 진리를 사용하지 말 것. 오히려 진리라고 부르는 것이 나를 불편하게 만들고, 내가 틀렸다는 것을 보여줄 가능성까지 열어둘 것.

 

이 태도는 생각보다 어렵다. 나는 여전히 내 생각이 맞기를 바란다. 책을 읽을 때도 내 생각과 맞는 문장에 먼저 눈이 간다. 회사에서도 내가 내린 판단이 좋은 결과를 내기를 바란다. 글을 쓸 때도 독자가 공감해주면 좋겠다. 이런 욕망을 없앨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그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한 번 더 물을 수는 있다. 나는 지금 답을 찾고 있는가, 아니면 내 답을 지지해줄 사람을 찾고 있는가. 이 질문은 독서에도 필요하고, 글쓰기에도 필요하고, 회사에서 판단할 때도 필요하다.

 

그리고 매일글쓰기를 계속하는 이유 하나를 여기에 더할 수 있을 것 같다. 글을 쓰는 동안 내가 무엇을 믿고 있는지가 문장으로 드러난다. 머릿속에 있을 때는 당연했던 생각도 글로 쓰면 이상하게 보일 때가 있다. 근거가 부족한 부분도 보이고, 내가 감정을 사실처럼 쓰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래서 글은 내 생각을 세상에 보여주는 도구이기 전에 내 생각을 내가 의심할 수 있게 만드는 도구가 될 수 있다.

 

 ‘진리를 향한 의지’를 이렇게 이해해보고 싶다. 진리를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이 아니다. 정답을 빨리 말할 수 있다는 것도 아니다. 내가 믿고 있는 것조차 다시 질문할 수 있는 힘. 권위 있는 답을 참고하면서도 판단을 완전히 맡기지 않는 힘. 다수가 믿는 것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두려워하지 않되, 다르다는 사실 자체를 자랑하지도 않는 힘.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실제로 보고 느끼고 경험한 것을 끝까지 사유해보는 힘. 그것이 이름 높은 현자와 자유로운 정신을 가르는 작은 차이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여기에서 또 하나의 문제가 생긴다.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 자유롭다고 해도, 그 자유는 때로 외롭다. 다수가 믿는 것을 그대로 반복하지 않으면 사람들과 거리가 생길 수 있다. 내가 가진 것을 계속 나누고 가르치려 해도 정작 나 자신은 아무것도 받지 못한다고 느낄 수도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다음 「밤의 노래」에서 바로 그 고독을 노래한다. 그는 빛을 주는 사람이다. 그런데 빛을 주기만 하는 사람은 왜 오히려 어둠을 갈망하게 될까. 다음에는 그 질문을 따라가보고 싶다. 베푸는 사람은 왜 외로워지는가(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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