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본문을 읽기 시작했다. 첫 장면은 의외로 조용하다. 차라투스트라는 서른 살에 고향을 떠나 산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10년 동안 고독 속에서 자신의 정신과 삶을 즐긴다. 그러다 마흔이 되던 어느 날 변화가 찾아온다. 혼자 간직하기에는 자신의 지혜가 너무 많아졌다. 그래서 그는 인간들에게 내려가기로 한다. 차라투스트라는 태양을 바라보며 말한다. 자신도 태양처럼 몰락하겠다고. 그리고 니체는 이렇게 쓴다. “이렇게 하여 차라투스트라의 몰락은 시작되었다.” 처음 이 문장을 읽으면 자연스럽게 부정적인 느낌이 든다.
몰락, 무너짐, 추락, 실패. 우리가 살아가면서 가능하면 피하고 싶은 단어들이다. 그런데 니체는 이 몰락을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한다. "태양은 왜 몰락하는가"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을 태양에 비유한다. 태양은 하루 종일 빛을 내뿜다가 저녁이면 지평선 아래로 사라진다. 우리의 눈에는 태양이 ‘떨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몰락이다. 하지만 태양의 입장에서 보면 어떨까. 태양이 사라졌다고 해서 빛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있는 곳에서는 저물지만 다른 곳에서는 다시 빛을 비춘다. 그리고 다음 날 다시 떠오른다. 태양에게 몰락과 생성은 서로 반대되는 사건이 아니다. 하나의 과정이다.
몰락하면서 생성하고, 생성하면서 다시 몰락한다. 차라투스트라가 “나는 태양처럼 몰락하겠다”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산 위의 고독한 철학자로 머무르는 자신을 내려놓고 인간들의 세계로 내려가려는 것이다. 이때 몰락은 실패가 아니다. 오히려 새로운 존재가 되기 위한 움직임이다.
새로운 것은 무엇인가의 무너짐에서 시작된다. 생각해 보면 우리 삶에서도 새로운 것은 종종 무너짐 이후에 나타난다. 오랫동안 믿어왔던 생각이 더 이상 맞지 않다는 것을 깨닫기도 한다. 예전에는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어느 순간 의미를 잃기도 한다. 익숙한 관계가 끝나기도 하고, 계획했던 일이 실패하기도 한다. 그 순간에는 그것이 단순한 상실처럼 보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 무너짐이 없었다면 새로운 방향도 생기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을. 니체는 이런 가능성을 몰락이라는 단어 안에서 바라보는 것 같다. 몰락 자체를 미화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실패가 좋은 것도 아니고, 모든 고통이 사람을 성장시키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다음이다. 그 무너짐 위에서 무엇이 생성되는가. 몰락을 견디는 힘. 그래서 니체에게 중요한 질문은 아마 이런 것이 아닐까.
“어떻게 하면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수 있을까.” 가 아니라, “무너진 뒤 무엇을 다시 만들어낼 수 있는가.” 같은 사건도 사람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어떤 사람에게 실패는 자기 삶의 끝이 될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는 이전의 자신을 넘어서는 출발점이 될 수도 있다.
이 차이는 사건 자체보다 그 사건을 받아들이고 전환할 수 있는 힘에서 생기는 것 같다. 이런 의미에서 니체가 말하는 강함은 단순히 견디는 힘과도 조금 다르다. 무너지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무너짐을 새로운 생성으로 바꿀 수 있는 사람. 그것이 자기극복과 연결되는 힘일지도 모르겠다.
태양처럼 베푼다는 것. 「머리말 1」에는 몰락과 함께 또 하나의 중요한 주제가 등장한다. 베품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지혜가 너무 많아졌다고 말한다. 너무 많은 꿀을 모은 꿀벌처럼 이제는 나누어주고 싶다고 한다. 그래서 인간들에게 내려간다. 여기에서도 태양이 등장한다.
태양은 자신의 빛이 넘쳐서 세상을 비춘다. 누군가에게 인정받기 위해 비추는 것도 아니고, 베풀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달라고 요구하지도 않는다. 자신에게 빛이 넘치기 때문에 그냥 비춘다. 이를 ‘과잉’ 또는 ‘넘쳐흐름’의 베품이라고 설명했다. 이 설명이 흥미로웠다.
우리는 보통 베품을 선한 행위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니체식으로 생각하면 베품에도 서로 다른 힘이 숨어 있을 수 있다. 정말 넘쳐서 주는 것인지,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서 주는 것인지, 상대방이 계속 나를 필요로 하기를 바라며 주는 것인지, 혹은 내가 우월한 위치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주는 것인지. 행동은 같아 보여도 그 안의 힘은 다를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도 아직 태양은 아니다. 흥미로운 것은 차라투스트라도 아직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태양처럼 베풀고 싶다고 말한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지혜를 받아줄 사람들이 필요하다고도 말한다. 태양은 자신이 베푼다고 의식하지 않지만, 차라투스트라는 아직 ‘베푸는 나’를 의식하고 있다. 나는 지혜를 가진 사람이고,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받아야 할 사람이다. 여기에는 미묘한 위계가 남아 있다.이 대목이 중요하게 느껴졌다. 차라투스트라는 완성된 위버멘쉬가 아니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자기극복을 가르치지만 자신 역시 계속 변해야 하는 존재다.
무너짐은 항상 나쁜 것일까. 우리는 성공과 안정에는 긍정적인 가치를 붙이고, 실패와 몰락에는 부정적인 가치를 붙인다. 하지만 니체는 이런 언어의 습관부터 흔드는 것 같다. 몰락, 고통, 파괴, 질병, 경멸. 이런 단어들은 언제나 나쁜 것인가. 반대로 성공, 행복, 안정, 정의, 선함 같은 단어들은 언제나 좋은 것인가. 니체는 하나의 단어에 하나의 고정된 가치만 붙이는 것을 경계한다. 같은 몰락도 무엇을 만들어내느냐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같은 베품도 어떤 힘에서 나오는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같은 경멸도 타인을 깎아내리는 경멸과 자기 자신을 넘어가기 위한 경멸은 다를 수 있다.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를 읽을 때는 단어의 뜻을 빨리 결정하지 않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 이 단어가 지금 어떤 힘과 어떤 맥락에서 사용되고 있는가. 그것을 먼저 봐야 한다.
나에게 남는 질문
「머리말」을 읽으면서 가장 오래 남은 질문은 이것이다. 나는 무엇이 무너지는 것을 지나치게 두려워하고 있는가. 지금의 나, 내가 가진 것, 익숙한 관계, 내가 옳다고 믿어온 생각, 다른 사람이 나를 바라보는 방식. 이런 것들을 지키는 데 너무 많은 힘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물론 모든 것을 일부러 무너뜨릴 필요는 없다. 하지만 어떤 것은 무너져야 다음 것이 시작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무너짐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무너짐에서 무엇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일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질문이 남는다. 나는 무엇인가를 줄 때 정말 넘쳐서 주고 있는가. 혹은 ‘주는 사람’이라는 자기 이미지를 필요로 하고 있는가. 차라투스트라는 태양처럼 되고 싶어 인간들에게 내려간다. 하지만 그 자신도 아직 완전히 태양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이 여정을 따라갈 이유가 생기는 것 같다. 완성된 존재의 가르침이 아니라, 자신의 한계를 안고 계속 변해가는 존재의 이야기. 『차라투스트라』의 첫 장은 그렇게 시작된다. “이렇게 하여 차라투스트라의 몰락은 시작되었다.”. 이제부터는 이 몰락이 무엇을 만들어내는지 지켜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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