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에서 신의 죽음보다 더 어려운 것은 신 없이 살아가는 일일지도 모른다고 썼다. 외부에서 삶의 방향을 알려주는 절대적인 기준이 사라졌다면 이제 우리는 스스로 선택해야 한다. 그런데 인간은 그 빈자리를 오래 견디지 못하는 것 같다. 하나의 정답이 사라지면 곧 다른 정답을 찾는다. 신은 죽었지만 신의 자리는 남아 있는 것이다.

 

니체가 말한 ‘신의 그림자’도 이런 의미로 읽힌다. 신에 대한 믿음은 약해졌지만 절대적인 무엇인가를 필요로 하는 습관은 사라지지 않는다. 무엇이 옳은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어떤 삶이 성공한 삶인지 확실하게 알려줄 무엇인가를 다시 찾는다. 그렇다면 새로운 신은 반드시 종교적인 모습을 하고 나타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너무 익숙해서 신처럼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

 

돈,  성공,  좋은 직장,  집, 안정된 노후, 사회적 인정,  과학적 진리, 도덕적으로 올바른 사람이라는 자기 이미지. 이것들은 모두 삶에 필요한 가치일 수 있다. 나 역시 돈 없이 살아갈 수 없고, 안정된 생활을 원하며, 내가 하는 일이 인정받으면 기쁘다. 그러니 니체를 읽는다고 해서 이런 것을 버려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다. 문제는 조금 다른 곳에 있는 것 같다.

 

하나의 가치가 다른 모든 가치를 판단하는 최종 기준이 되는 순간이다.

 

돈은 삶을 살아가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돈을 많이 버는 삶은 성공이고 적게 버는 삶은 실패라고 생각하기 시작한다면, 돈은 단순한 수단을 넘어선다. 삶 자체를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 그때 돈은 신의 자리에 가까워진다. 좋은 직장도 마찬가지다. 내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고 안정적인 생활을 가능하게 해주는 좋은 조건일 수 있다. 하지만 이름난 회사에 다니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성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당연하게 생각하기 시작한다면 직장은 하나의 사회적 표지가 아니라 인간의 가치를 판단하는 척도가 된다.

 

우상은 어쩌면 특별한 모습을 하고 있지 않는지도 모른다. 오히려 “그게 당연한 거 아니야?”라고 말하는 순간 가장 강한 우상이 되는 것 같다. 『꽃들에게 희망을』에 나오는 애벌레 기둥이 떠오른다. 수많은 애벌레들이 서로를 밀치며 위로 올라간다. 새로 도착한 애벌레가 묻는다. 저 위에는 무엇이 있는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모두가 올라가고 있으니 틀림없이 좋은 것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장면을 처음 읽었을 때는 단순한 경쟁사회의 우화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니체를 읽으며 다시 생각하니 더 흥미롭게 보인다. 애벌레들의 문제는 경쟁 자체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왜 올라가는지를 아무도 묻지 않는다는 데 있다.

 

모두가 올라가기 때문에 올라간다. 위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면서도 위가 아래보다 좋은 곳이라고 믿는다. 그 믿음이 너무 강해서 질문할 시간조차 없다.나는 이 장면에서 우리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좋은 직장을 얻고, 승진하고, 집을 사고, 자산을 늘리고, 노후를 준비한다. 이런 삶의 과정에는 분명 현실적인 이유가 있다. 나 역시 그 많은 것들의 필요성을 부정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어느 순간 질문은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어디로 올라가고 있는가.

 

그 꼭대기에는 무엇이 있는가.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이 있는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올라가기 때문에 나도 서둘러 올라가고 있는가. 지난 글에서 이야기한 ‘시대의 중력장’도 여기에서 다시 나타난다. 사회적 중력은 반드시 우리를 아래로 끌어내리는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모두를 같은 방향의 ‘위’로 끌고 갈 수도 있다. 더 많이,  더 높이, 더 빨리,  더 좋은 것으로. 그런데 위라는 방향 자체를 누가 정했는지는 묻지 않는다.

 

모두가 올라가고 있다는 사실은 내가 올라가야 할 이유가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기둥에서 당장 내려와야 한다는 뜻도 아니다. 꼭대기에 내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올라가도 된다. 중요한 것은 다른 애벌레들이 올라가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왜 올라가는지를 알고 있는가 하는 문제다. 니체가 돈에 대해 이야기한 대목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는다.

문제는 단순히 돈을 원하는 욕망이 아니다. 충분히 가지고 있는데도 더 빨리 쌓이지 않으면 초조해지는 상태다.

 

이 부분은 요즘의 삶과도 닮아 있다. 얼마를 가지고 있는가만큼 얼마나 빠르게 늘어나고 있는가가 중요하다. 자산이 증가하지 않으면 뒤처지는 것 같고, 다른 사람의 수익률이 나보다 높으면 불안해진다. 돈이 필요한 정도를 넘어 돈이 늘어나는 속도 자체가 삶의 안정감을 결정하기 시작한다. 이런 상태에서는 돈을 내가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돈의 리듬이 나를 움직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여기서 나는 물건을 사는 욕망도 떠올리게 된다. 더 좋은 카메라와 렌즈가 생기면 더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을 것 같고, 더 좋은 장비가 있으면 새로운 가능성이 열릴 것처럼 느껴진다. 물론 실제로 장비는 가능성을 넓혀준다. 하지만 어느 순간 장비를 사용하는 즐거움보다 다음 장비를 생각하는 시간이 더 많아진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필요해서 물건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소유 자체가 계속 새로운 욕망을 생산하기 시작한다. 그러면 물건은 단순히 물건으로 끝나지 않는다. 관심과 시간과 에너지까지 함께 요구한다. 무엇을 소유하느냐보다 무엇이 나의 관심을 소유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하는 순간이 생긴다.

 

과학도 비슷한 질문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과학은 종교적 설명을 무너뜨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관찰하고 검증하며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을 바꾸었다. 그런데 니체의 질문은 거기에서 한 번 더 나아간다. 왜 우리는 ‘진리’를 반드시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하는가. 이 질문은 과학이 틀렸다는 뜻이 아니다. 과학적 방법을 종교와 같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과학 역시 절대화될 때는 하나의 새로운 정답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는 문제다. “과학적으로 설명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측정할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라고 생각한다면 과학은 세계를 이해하는 강력한 방법에서 세계를 판단하는 유일한 기준으로 바뀐다.

 

문제는 과학이 아니라 과학주의다. 어떤 가치든 그것만이 유일한 정답이라고 선언하는 순간, 다시 용의 목소리가 들린다. “가치는 이미 모두 만들어졌다.” “정답은 여기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신의 죽음은 한 번으로 끝나는 사건이 아닌 것 같다. 기존의 신을 죽였더라도 새로운 신이 등장하면 다시 그 절대성을 의심해야 한다.

 

니체가 신의 그림자를 계속 정복해야 한다고 말한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가장 어려운 우상은 무엇일까. 나는 오히려 선하고 좋은 모습으로 나타나는 우상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성공해야 한다. 좋은 부모가 되어야 한다. 올바른 사람이 되어야 한다. 꾸준히 성장해야 한다. 자기다운 삶을 살아야 한다. 이 말들은 대부분 좋은 말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이런 말도 나를 판단하는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있다.

 

특히 ‘자기다운 삶’이라는 말조차 그렇다. 남들과 달라야 하고, 나만의 스타일이 있어야 하고, 계속 새로운 것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얼마 전까지 자유를 의미했던 가치가 새로운 의무가 된다. “너는 자기답게 살아야 한다.” 용은 생각보다 쉽게 모습을 바꾼다. 그래서 니체를 읽는 것 자체도 하나의 우상이 될 수 있다. “니체라면 어떻게 생각했을까.” “니체가 말한 위버멘쉬처럼 살아야 하지 않을까.” 이런 질문이 도움이 될 때도 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니체의 말을 새로운 정답처럼 사용한다면 이상한 일이 된다.

 

신의 죽음을 말했던 철학자를 새로운 신으로 만드는 셈이다. 그렇다면 니체를 제대로 읽는 방법은 그의 말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의 문장이 나에게 질문을 만들도록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니체의 답보다 내 질문이 살아 있어야 한다. 나는 무엇을 당연하다고 믿고 있는가. 그 믿음은 어디에서 왔는가. 그것 없이도 살아볼 수 있는가.

 

이 질문을 던지다 보면 한 가지 구분이 중요해진다. 가치를 갖는 것과 가치를 절대화하는 것은 다르다. 나는 돈을 중요하게 생각할 수 있다.

가족을 중요하게 생각할 수 있다. 일의 성취와 사회적 인정도 중요하게 생각할 수 있다. 문제는 그것들 가운데 하나가 삶 전체를 평가하는 유일한 척도가 되는 것이다. 가치가 여러 개 존재하고 서로 긴장할 수 있다면 나는 선택해야 한다.하지만 하나의 가치가 모든 것을 지배하면 선택할 필요가 없다. 그것이 나 대신 판단해준다.

 

어쩌면 바로 그 편리함 때문에 인간은 계속 신을 만드는지도 모른다. 절대적인 기준이 있으면 덜 불안하다.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실패했을 때도 “나는 기준대로 살았다”고 말할 수 있다. 반대로 정답이 없는 세계에서는 내가 선택해야 하고, 그 선택의 책임도 내가 져야 한다. 그래서 새로운 우상을 만드는 것은 인간의 나약함이라기보다 불확실성을 견디기 어려워하는 아주 인간적인 욕망일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위버멘쉬의 강함도 모든 가치에서 자유로운 상태는 아닐 것이다. 아무것도 믿지 않는 사람도 아니다. 오히려 어떤 가치를 선택하면서도 그것을 영원한 진리로 만들지 않을 수 있는 힘. 필요하면 자신이 만든 가치까지 다시 질문할 수 있는 힘. 그것이 더 어려운 것 같다.

 

이번 글을 쓰면서 결국 질문은 이것으로 돌아온다. 나는 신을 버린 뒤 무엇을 신처럼 떠받들고 있는가. 돈일 수도 있고, 안정일 수도 있고, 성공일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의 인정일 수도 있다. ‘좋은 사람이어야 한다’는 자기 이미지일 수도 있고, 끊임없이 성장해야 한다는 자기계발의 명령일 수도 있다.그리고 더 중요한 질문이 하나 남는다.

 

그것이 더 이상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라면, 나는 여전히 그것을 선택할 것인가. 돈이 성공의 증명이 아니어도 나는 지금의 일을 할 것인가.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글을 쓸 것인가. 좋은 사진이라는 기준이 없어도 계속 사진을 찍을 것인가. 다른 사람보다 앞설 필요가 없어도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가. 이런 질문 앞에서 남는 것들이 있다면, 그것은 조금 더 내 삶에 가까운 가치일지도 모르겠다.

 

신은 죽었다. 그러나 신을 죽이는 일보다 어려운 것은 그 빈자리를 너무 빨리 다른 것으로 채우지 않는 일인지도 모른다. 잠시 비어 있는 자리를 견디는 것. 정답이 없는 상태를 견디는 것. 그리고 그 자리에서 “남들은 무엇을 믿는가”가 아니라 “나는 무엇을 가치 있게 만들 것인가”

를 다시 묻는 것. 아마 가치창조는 그 빈자리에서부터 시작되는 것 같다.

 

 

니체의 문장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을 하나 고르라면 아마 “신은 죽었다”일 것이다. 너무 유명해서 오히려 제대로 읽기 어려운 문장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단순하게 들린다. 니체는 신의 존재를 부정했고, 그래서 “신은 죽었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즐거운 학문』의 광인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이 문장은 무신론의 선언보다 훨씬 복잡한 사건을 가리키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광인은 대낮에 등불을 들고 시장으로 뛰어간다. 그리고 외친다. “나는 신을 찾고 있다.” 이 장면부터 이상하다. 대낮인데 왜 등불을 들고 있을까. 더 이상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왜 신을 찾는다고 외치는 것일까. 사람들은 광인을 비웃는다. 이미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신은 죽었다”는 말은 별로 놀랍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광인이 말한다. “우리가 그를 죽였다. 바로 너희와 내가.” 이 문장을 읽으면서 처음으로 질문이 바뀐다. “신이 정말 존재하는가”가 아니라, “신이 죽었다면 우리는 무엇을 잃은 것인가.” 니체가 묻는 것은 오히려 그쪽에 가까운 것 같다.

 

광인은 계속 묻는다. 어떻게 우리가 대양을 마셔버렸는가. 누가 지평선을 지워버릴 스펀지를 주었는가. 태양으로부터 지구를 풀어놓았을 때 우리는 무슨 짓을 한 것인가.이 표현들이 모두 과장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씩 생각하면 의미가 선명해진다.

 

인간에게 신은 단순히 하늘 어딘가에 존재하는 하나의 초월적 존재만은 아니었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인간은 왜 살아야 하는지, 죽음 뒤에는 무엇이 있는지, 어떻게 살아야 올바른 삶인지, 세계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 이런 질문에 하나의 중심을 제공했다.

 

그러니 신을 죽였다는 것은 세계에서 하나의 존재를 없앤 정도의 일이 아니다. 세계의 방향을 알려주던 중심을 잃은 사건이다. 그래서 니체는 신을 태양에 비유했는지도 모르겠다. 지구가 태양의 중력에서 갑자기 풀려난다면 자유로워지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어디로 갈지 모르게 된다. 계속 떨어지는 것인지, 위로 가는 것인지, 앞으로 가는 것인지조차 알 수 없어진다. 이 이미지는  ‘시대의 중력장’과 연결하니 더 잘 이해된다. 신은 오랫동안 인간에게 가장 거대한 중력장이었다. 신이 무엇이 옳은지 결정하고, 삶의 방향을 정하고, 인간이 어디에 있어야 할지를 알려주었다. 그 중력이 사라졌다면 우리는 자유를 얻게 된다.

 

하지만 동시에 방향도 잃는다. 신의 죽음이 해방이면서 동시에 불안인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우리는 흔히 자유를 좋은 것으로 생각한다. 누군가가 정해준 답에서 벗어나면 자유로워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실제로 답이 사라지고 나면 문제가 생긴다. 이제 무엇을 기준으로 선택할 것인가. 무엇이 좋은 삶인가. 무엇 때문에 살아야 하는가.

 

그 질문에 더 이상 외부에서 보장된 답이 없다. 그때 자유는 가벼움보다 부담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신이 죽었다고? 그래서 뭐?”

니체는 아마 바로 이 반응을 문제 삼은 것 같다. 신을 믿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과 신이 죽은 세계에서 살아가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신을 믿지 않으면서도 이전과 똑같이 절대적인 진리를 원할 수 있다. 신을 부정하면서도 삶에는 하나의 정답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초월적인 존재를 믿지 않으면서도 누군가가 나 대신 옳고 그름을 결정해주기를 바랄 수 있다. 그렇다면 신은 죽었지만 신을 필요로 하는 방식은 그대로 남아 있는 것 아닐까.

 

이 점에서 광인이 “나는 너무 일찍 왔다”고 말한 부분이 특히 인상적이다. 사건은 이미 일어났지만 그 사건의 의미는 아직 사람들에게 도착하지 않았다. 나는 이 문장이 ‘신의 죽음’만을 설명하는 말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살다 보면 사건과 그 의미 사이에 시간이 생길 때가 있다.

 

어떤 관계는 이미 끝났지만 한참 뒤에야 그것이 내 삶에서 무엇을 의미했는지 알게 된다. 어떤 선택은 이미 했지만 몇 년이 지나서야 그것이 나를 얼마나 바꾸었는지 깨닫는다. 가치관 역시 마찬가지일 수 있다. 예전에는 당연하다고 믿었던 것이 어느 날 더 이상 나를 움직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 대신 무엇으로 살아야 하는지는 아직 모른다.

 

사건은 먼저 일어났고 의미는 뒤늦게 따라온다. 신의 죽음도 그런 사건일 수 있다. 그렇다면 신이 죽은 뒤 인간 앞에는 무엇이 남을까.  두 가지 방향을 이야기한다.

 

하나는 가치상실의 허무다. 절대적인 기준이 사라졌으니 아무것도 의미가 없다고 느끼는 방향이다. 무엇을 해도 결국 같은 것이고,

옳고 그름도 없고, 삶에도 특별한 의미가 없다고 느끼는 것. 이런 상태를 오래 견디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다시 무엇인가를 찾는다.

 

새로운 정답,  새로운 중심,  새로운 절대가치. 신이 죽은 자리에서 또 다른 신이 태어난다. 여기에서 나는 앞에서 본 세 가지 변신을 다시 떠올리게 된다. 낙타는 “너는 해야 한다”는 명령을 필요로 한다. 사자는 그 명령에 “아니오”라고 말한다. 하지만 사자가 용을 쓰러뜨리고 난 뒤 아무것도 만들지 못한다면 빈 사막만 남는다. 그 사막이 두려워 다시 새로운 용을 만든다면 결국 처음으로 돌아가는 셈이다. 그래서 사자의 부정만으로는 부족하다. 신을 죽이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신 없이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두 번째 방향이 열린다. 가치전환이다. 기존의 절대적 기준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허무로만 받아들이지 않고, 이제 인간이 스스로 가치를 만들어야 한다는 문제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광인은 묻는다. “이런 일을 저지를 자격이 있으려면 우리 스스로 신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처음에는 아주 오만한 문장처럼 들렸다. 인간이 신이 되겠다는 것인가. 하지만 지금까지의 흐름 속에서 읽으니 조금 다르게 보인다.

 

전능한 존재가 되라는 뜻이 아니라, 신에게 맡겨두었던 가치의 책임을 인간 자신이 떠맡아야 한다는 뜻에 가까워 보인다. 무엇을 믿을지,

어떻게 살지, 무엇을 가치 있다고 할지, 그 선택을 더 이상 외부의 절대자에게 맡길 수 없다. 그리고 선택한 가치의 결과도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

 

이것이 생각보다 무거운 일이다. 어쩌면 신을 믿는 것보다 더 어려울 수도 있다. 여기에서 위버멘쉬의 의미도 조금 더 분명해진다. 위버멘쉬는 신을 부정하는 사람이 아니다. 신을 믿지 않는 사람도 아니다. 오히려 절대적인 정답이 사라진 세계에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갈 수 있는 존재에 가까워 보인다.

 

그래서 위버멘쉬는 신의 죽음 뒤에 등장한다. “이제 아무것도 의미가 없다”에서 멈추지 않고, “그렇다면 무엇을 의미 있게 만들 것인가”를 묻는 존재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나는 한 가지 불편함도 남는다. 정말 인간이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만들 수 있을까. 우리는 혼자 살아가지 않는다. 태어나면서 언어를 배우고, 가족과 사회의 영향을 받고, 이미 만들어진 도덕과 제도 속에서 살아간다.

 

완전히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자기 가치를 만드는 인간은 현실적으로 존재하기 어렵다. 그래서 가치창조를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고 내 마음대로 삶의 기준을 만드는 것”이라고 이해하고 싶지는 않다. 오히려 이미 주어진 가치들을 다시 살펴보고, 그 가운데 무엇을 계속 받아들일지,

 

무엇과 거리를 둘지, 무엇을 새롭게 구성할지를 선택하는 일에 더 가까울 것 같다. 완전히 새로운 재료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재료로 새로운 배열을 만드는 것. 그렇게 보면 위버멘쉬도 조금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또 하나의 질문이 생긴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에게 신앙은 살아 있다. 그렇다면 “신은 죽었다”는 말은 틀린 것일까. 나는 이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니체의 신의 죽음을 “오늘날 아무도 신을 믿지 않는다”는 주장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개인에게 살아 있는 신앙과,사회 전체의 가치와 진리를 최종적으로 보증하는 하나의 절대적 중심은 서로 다른 문제일 수 있다.

 

누군가에게 신앙은 여전히 삶을 붙잡아주는 살아 있는 힘일 수 있다. 그러면서도 현대사회 전체는 서로 다른 가치와 믿음이 공존하는 세계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신의 죽음은 신앙인의 소멸이라기보다, 하나의 절대적 가치가 모든 사람의 삶을 동일하게 지배할 수 있었던 세계의 붕괴로 이해하는 편이 내게는 더 자연스럽다.

 

그러면 니체의 질문도 종교의 찬반을 넘어선다. 신을 믿는 사람에게도, 신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도, 똑같은 질문이 가능해진다. 나는 무엇에 내 삶의 최종 판단을 맡기고 있는가. 그리고 그것이 사라진다면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이 질문 앞에서 종교를 믿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신을 부정한 자리에 다른 절대적 기준을 세워두고 살아갈 수도 있다.

 

돈일 수도 있고, 성공일 수도 있고, 도덕일 수도 있고, 과학이나 이념일 수도 있다. 그것들이 잘못됐다는 뜻은 아니다. 문제는 어느 순간 그것이 질문할 수 없는 최종 정답이 되는 것이다.

 

이 부분은 다음 글에서 더 생각해보고 싶다. 신이 죽었다면 신의 자리는 정말 비었을까. 아니면 우리는 너무 빨리 그 자리에 다른 것을 올려놓고 있는 것은 아닐까.이번 글을 쓰면서 결국 가장 오래 남은 문장은 이것이다. 신의 죽음보다 더 어려운 것은 신 없이 살아가는 것이다.

 

외부의 정답 없이 선택하고, 자신의 선택을 책임지고, 자신이 만든 가치조차 다시 질문할 수 있는 것. 어쩌면 니체가 요구하는 강함은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나에게 남는 질문은 조금 더 개인적이다. 내 삶에서 이미 죽었는데도 여전히 나를 지배하고 있는 가치는 무엇인가.

 

더 이상 믿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그것을 기준으로 성공과 실패를 판단하는 것은 없는가. 그리고 그것이 정말 사라진다면, 나는 무엇을 새롭게 가치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신이 죽었다는 선언은 그래서 끝이 아닌 것 같다. 오히려 그때부터 질문이 시작된다.

 

 

낙타와 사자와 아이를 읽다 보면 어느 순간 사람을 분류하고 싶은 유혹이 생긴다. 저 사람은 낙타 같다. 저 사람은 사자다. 저 사람은 강자이고, 저 사람은 약자다. 니체의 문장에는 강자와 약자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하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읽기가 쉽다. 특히 위버멘쉬까지 등장하면 사람들을 아래와 위로 나누는 어떤 등급표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읽으면 이상해진다. 어제까지 낙타였던 사람이 오늘 사자가 될 수 있고, 어떤 일에서는 사자처럼 행동하는 사람이 다른 일에서는 낙타처럼 복종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 역시 어떤 순간에는 남들이 정해놓은 기준을 그대로 따르면서, 또 다른 순간에는 그 기준에 강하게 반발한다. 그리고 드물게는 남과 비교하거나 반대하지 않고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방식으로 무언가를 만들기도 한다.

 

그렇다면 약자와 강자, 위버멘쉬는 세 종류의 사람이라기보다 한 사람 안에서도 계속 달라지는 힘의 상태로 보는 편이 더 자연스럽지 않을까.

자료에서 ‘시대의 중력장’이라는 표현을 접했다. 이 표현이 오래 남았다. 중력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늘 그 영향을 받는다. 공중에 떠 있다고 생각해도 결국 땅으로 끌려온다. 중력을 의식하지 않아도 중력은 계속 작용한다.

 

시대의 가치도 비슷한 것 같다.

돈, 성공,  직장,  집, 학벌,  사회적 위치,  안정,  좋은 부모, 좋은 배우자, 좋은 직장인이라면 이래야 한다는 생각. 이런 가치들은 누군가 매일 나에게 명령하지 않아도 나를 움직인다. 나는 자유롭게 선택한다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이미 만들어진 중력장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낙타란 중력장 안에 있는 사람이라기보다, 자신을 움직이는 중력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상태에 가까울 것이다. “다들 그렇게 사니까.” “이 정도는 해야 하니까.” “원래 삶은 그런 거니까.”

 

이런 말들이 많아질수록 내가 왜 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지는 점점 희미해진다. 하지만 여기에서 한 가지 조심하고 싶다. 시대의 가치에 영향을 받는다고 해서 그것이 모두 잘못된 것은 아니다. 안정된 직장을 원하는 것도 자연스럽고, 돈이 필요한 것도 당연하다. 가족을 책임지고 싶고, 어느 정도의 사회적 인정을 받고 싶은 마음도 이상하지 않다.

 

문제는 그것들을 원한다는 데 있지 않다. 그것밖에는 다른 삶이 없다고 믿는 순간에 문제가 시작되는 것 같다. 돈이 필요하다는 것과 돈이 삶의 최종 기준이 되는 것은 다르다. 안정을 원하는 것과 불확실한 가능성을 모두 포기하는 것은 다르다. 사회적 인정을 기뻐하는 것과 인정받지 못하면 내 삶의 가치가 사라진다고 생각하는 것도 다르다. 중력장은 우리를 움직이지만, 그 중력이 어디에서 오는지 알아차리는 순간부터 관계가 조금 달라질 수 있다.

 

니체가 말하는 강자도 그래서 다시 생각하게 된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강자는 돈과 권력과 사회적 영향력을 많이 가진 사람이다. 높은 지위에 있고, 많은 것을 소유하며, 다른 사람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을 강자라고 부른다. 그런데 니체의 관점에서 보면 상황이 조금 복잡해진다. 만약 한 사람이 평생 돈과 지위와 명성을 얻기 위해 시대가 요구한 모든 규칙에 누구보다 충실하게 복종했다면, 그는 사회적으로는 강자일 수 있지만 니체적인 의미에서도 강자일까. 반대로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지 않더라도, 자신에게 주어진 가치에 질문을 던지고 다른 방식의 삶을 선택할 수 있다면 그는 다른 의미의 강함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고 돈이 많으면 약자이고 돈이 없으면 강자라는 새로운 공식을 만들면 또 이상해진다. 그것 역시 또 하나의 용이 될 것이다.

 

니체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을 가졌느냐보다 어떤 힘이 나를 움직이고 있는가인 것 같다. 같은 행동도 다른 힘에서 나올 수 있다. 돈을 벌기 위해 일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만들고 싶은 일을 계속하다 보니 돈이 따라올 수도 있다. 승진을 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권력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더 넓은 책임을 맡아 해보고 싶은 일이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반대로 “나는 승진 같은 것은 필요 없다”고 말하면서도 사실은 실패가 두려워 미리 물러나는 것일 수도 있다. 겉으로 보이는 행동만으로는 알기 어렵다.그래서 질문은 다시 내 안으로 돌아온다.

 

나는 왜 이것을 원하는가 

이 질문이 생각보다 어렵다. 내 욕망이라고 생각했던 것 안에 다른 사람의 시선이 섞여 있고, 사회의 기준이 들어 있고, 과거의 경험과 불안도 숨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완전히 순수한 ‘나의 욕망’을 찾는 것은 가능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어떤 힘에 끌리고 있는지는 조금씩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남보다 뒤처질까 봐 움직이는가. 인정받지 못할까 봐 움직이는가. 불안해서 붙잡고 있는가. 아니면 정말 해보고 싶어서 움직이는가. 이 차이가 약자와 강자를 구분하는 하나의 기준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사자의 강함도 마지막은 아니다. 사자는 시대의 중력에 저항한다. “나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 “나는 다른 방식으로 살겠다.”

중력에서 벗어나려는 힘이다. 하지만 지난 글에서 보았듯 저항은 여전히 저항하는 대상을 필요로 한다. 중력에 맞서 계속 힘을 쓰고 있다면 아직 중력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여기에서 아이의 정신이 다시 등장한다.아이는 중력과 싸우기보다 새로운 움직임을 만든다. 이 표현을 떠올리니 춤이 생각난다. 춤추는 사람은 중력이 없는 공간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중력을 온몸으로 느낀다. 발은 땅을 딛고 있고, 몸은 끊임없이 떨어지려 한다. 그런데 그 중력을 이용해 뛰고, 돌고, 다시 착지한다. 중력을 없애지 않는다. 중력과 다른 관계를 만든다. 그렇다면 위버멘쉬도 시대의 모든 가치에서 완전히 벗어난 초월적 인간이라기보다, 주어진 힘들과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내는 존재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돈을 없앨 수는 없다. 사회적 평가도 사라지지 않는다. 가족과 조직과 공동체의 책임도 없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들이 나의 모든 선택을 결정하도록 내버려둘 것인지, 아니면 그것들과 다른 관계를 만들 것인지는 달라질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위버멘쉬는 아주 멀리 있는 특별한 인간이라는 느낌이 조금 줄어든다.

 

오히려 내 안에서도 잠깐씩 그런 힘이 나타날 수 있을 것 같다. 무언가를 하면서 다른 사람의 평가를 잊는 순간. 결과보다 과정 자체가 즐거워지는 순간. 남들이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망설이기보다 한번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앞서는 순간. 기존 방식을 비판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작은 대안을 만들어보는 순간. 그때 나는 잠깐 시대의 중력장과 다른 방식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진을 찍는 일도 비슷하게 생각해볼 수 있다. 좋은 사진이 무엇인지 배우는 동안에는 다른 사람의 사진과 평가가 필요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유행하는 사진과 다른 사진을 찍고 싶어진다. 하지만 일부러 유행을 피하는 것 역시 유행을 기준으로 삼는 일이다. 정말 자기 스타일이 생긴다면 어느 순간부터는 유행에 따르는지 거스르는지가 덜 중요해질 것이다. 그냥 내가 보고 싶은 방식으로 보게 된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좋은 글을 읽고 배우는 시간이 필요하다. 다른 사람의 글과 비교하는 시간도 있다. 하지만 언젠가는 “이렇게 써야 좋은 글이다”보다 “나는 이것을 이렇게 생각했다”가 앞서야 한다. 그 순간에는 잘 쓰는 것보다 자기 질문이 중요해진다.

 

아마 이것이 창조의 시작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제 약자와 강자라는 말을 사람에게 붙이고 싶지 않다. “저 사람은 약자다.” “저 사람은 강자다.” 라고 말하는 순간 사람을 고정된 존재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렇게 묻는 편이 낫겠다. 지금 내 안에서는 어떤 힘이 더 강한가. 어떤 순간에는 불안이 나를 움직인다. 어떤 순간에는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움직인다. 어떤 순간에는 반발심이 움직인다. 그리고 어떤 순간에는 그냥 좋아서 움직인다. 한 사람 안에서도 힘의 배열은 계속 달라진다. 그렇다면 자기극복 역시 약자에서 강자로 신분이 상승하는 일이 아닐 것이다.

 

나를 지배하는 힘의 관계가 달라지는 것. 주어진 힘에 끌려가는 상태에서, 그 힘을 알아차리고, 필요하면 거리를 두고, 마침내 새로운 힘을 만들어내는 것. 그것이 ‘위버멘쉬-되기’라는 말을 조금 더 현실적으로 이해하는 방법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 생각은 나를 조금 편안하게 한다.

 

나는 항상 강해야 할 필요가 없다. 언제나 창조적이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새로운 것을 배우는 동안 다시 낙타가 될 수도 있다. 어떤 문제에서는 사자가 필요할 수 있다. 그리고 드물게 아이처럼 놀 수 있는 순간이 찾아올 수도 있다.중요한 것은 어느 단계에 있는지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 어떤 힘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지를 알아차리는 것일 것이다.

 

이번 글을 쓰면서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돌아오게 된다. 나는 지금 어떤 중력장 안에서 살고 있는가. 돈인가, 안정인가, 타인의  인정인가,

내가 만들어놓은 자기 이미지인가,  혹은 오랫동안 옳다고 믿어온 삶의 방식인가. 그리고 한 가지를 더 묻게 된다.

 

그 중력이 사라진다면 나는 어디로 움직일까. 아무것도 나를 끌어당기지 않는다면, 그래도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그 질문에 쉽게 답할 수는 없다. 하지만 어쩌면 위버멘쉬-되기는 거창한 초인이 되는 일이 아니라, 이런 질문을 계속 던지면서 내가 움직이는 방향을 조금씩 다시 선택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중력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중력에 끌려갈 것인지, 중력과 싸우기만 할 것인지, 아니면 그 힘을 이용해 새로운 움직임을 만들어낼 것인지는 달라질 수 있다. 낙타가 걷고, 사자가 싸우고, 아이가 춤추는 이유도 어쩌면 거기에 있을 것이다.

 

사자는 용에게 “아니오”라고 말했다. “너는 마땅히 해야 한다”는 오래된 명령에서 벗어나 “나는 하고자 한다”고 선언했다.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이 부정이 필요했다. 하지만 지난 글에서 확인했듯 사자는 그곳에 오래 머물 수 없다. 무엇에 반대하는지만으로는 자기 삶을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니체는 사자 다음에 뜻밖의 존재를 등장시킨다.

 

어린아이. 가장 강해 보이는 사자 다음에 왜 가장 작고 연약해 보이는 아이가 오는 것일까. 니체는 아이를 순진무구, 망각, 새로운 시작, 놀이, 제 힘으로 돌아가는 바퀴, 최초의 운동, 신성한 긍정이라고 부른다. 처음에는 이 표현들이 조금 아름답기만 한 비유처럼 보였다. 그러나 낙타와 사자를 지나온 뒤 다시 읽으니 아이가 왜 마지막에 오는지 조금 알 것 같다. 사자는 과거와 싸운다. 아이는 미래를 시작한다. 사자는 기존의 규칙을 부순다. 아이는 새로운 규칙을 만든다.사자는 자유를 얻는다. 아이는 그 자유로 무엇인가를 시작한다. 그래서 어쩌면 사자보다 아이가 더 어렵다.

 

망각은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다

니체가 어린아이를 설명하면서 ‘망각’을 말하는 부분이 특히 흥미롭다. 망각이라고 하면 보통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떠올린다. 과거를 잊고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여기서 망각은 단순한 기억상실은 아닌 것 같다. 과거의 상처도 기억하고, 실패도 기억하고, 자신이 무엇과 싸웠는지도 기억하지만 그것들이 더 이상 현재의 모든 선택을 결정하지 못하게 하는 힘. 그런 의미에서 망각은 과거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지배력에서 벗어나는 것에 가깝다. 이 점에서 사자와 아이의 차이가 선명해진다. 사자는 여전히 자신이 싸우는 용을 기억한다. 용이 있기 때문에 싸우고, 용의 명령에 반대하며 자신의 자유를 확인한다. 하지만 아이는 더 이상 용과 싸울 필요가 없다. 용을 이겼다는 사실조차 삶의 중심에 놓지 않는다. 이제 다른 것을 시작하면 된다. 어쩌면 진짜 극복은 기억하지 않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그것을 중심으로 살아가지 않는 데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자유를 얻은 다음이 더 어렵다

우리는 흔히 자유를 목표처럼 생각한다. 억압에서 벗어나면 자유롭고, 남의 기대에서 벗어나면 자유롭고, 하기 싫은 것을 거부할 수 있으면 자유롭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니체에게 자유는 끝이 아니라 시작인 것 같다. 자유로워진 뒤 무엇을 할 것인가. 그 질문이 남는다. 직장을 그만두는 것보다 그 다음 삶을 만드는 것이 어렵고, 기존 방식이 잘못됐다고 말하는 것보다 새로운 방식을 실제로 만들어내는 것이 어렵다. 무엇을 하지 않을지는 비교적 분명하다. 그러나 무엇을 할지는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사자는 “나는 이것을 하지 않겠다”고 말할 수 있다. 아이는 “나는 이것을 해보겠다”고 말한다. 두 문장의 차이는 생각보다 크다.

 

아이는 왜 놀이를 하는가

니체가 아이를 ‘놀이’와 연결한 것도 중요하게 느껴진다. 놀이는 결과보다 과정이 먼저다. 아이는 놀이를 시작하면서 그것이 어떤 성과를 낼지 계산하지 않는다. 재미있어서 시작하고, 새로운 규칙을 만들고, 필요하면 중간에 규칙을 바꾼다. 그렇다고 아무 의미 없는 행동은 아니다. 오히려 놀이 속에서는 새로운 세계가 만들어진다. 바닥의 선 하나가 강이 되고, 의자가 성이 되고, 작은 돌멩이가 중요한 보물이 된다. 아이는 이미 존재하는 세계의 의미만 받아들이지 않는다. 사물의 의미를 바꾼다. 그래서 놀이가 창조와 연결되는 것 같다. 이미 정해진 의미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관계를 만든다. 이렇게 생각하면 니체에게 놀이가 가벼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창조적인 행위로 보인다.

 

사막은 어떻게 놀이터가 되는가

낙타는 짐을 지고 사막으로 간다. 사자는 그 사막에서 용과 싸운다. 그리고 아이는 그 사막을 놀이터로 만든다. 같은 사막인데 의미가 완전히 달라진다. 낙타에게 사막은 견뎌야 할 공간이다. 사자에게 사막은 싸워서 자유를 얻어야 할 공간이다. 아이에게 사막은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무엇이든 시작할 수 있는 공간이다. 이 점이 아주 인상적이다. 니힐리즘도 어쩌면 비슷하지 않을까. 기존의 가치가 무너졌을 때 처음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무엇이 옳은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 수 없다. 사막이다. 그러나 그 빈자리를 반드시 결핍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 아직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았다는 것은, 새롭게 정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같은 빈 공간을 보고 누군가는 허무를 느끼고, 누군가는 가능성을 느낀다. 아이의 힘은 사막을 없애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막의 의미를 바꾸는 데 있는 것 같다.

 

“세계를 상실한 자는 자신의 세계를 획득한다”

니체의 이 문장이 이제 조금 다르게 들린다. 세계를 상실한다는 것은 단순히 모든 것을 잃는다는 뜻이 아닐 것이다. 내가 당연하다고 믿었던 세계가 더 이상 당연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좋은 삶의 기준, 성공의 기준, 도덕의 기준, 사랑과 관계의 방식.무엇이 옳은지 알려주던 외부의 기준이 흔들린다. 처음에는 불안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세계를 잃어야만 자신의 세계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 니체의 생각인 것 같다. 물론 ‘자신의 세계’라고 해서 마음대로 만든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세상과 단절된 개인적 환상도 아닐 것이다. 오히려 지금까지 주어진 재료를 가지고 자기 방식으로 다시 구성하는 것에 가깝다.

 

이미 존재하는 언어를 쓰지만 자기 문장을 만들고, 이미 존재하는 빛과 공간을 찍지만 자기 사진을 만드는 것처럼. 창조는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갑자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을 다른 방식으로 배열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이의 ‘예’는 낙타의 ‘예’와 어떻게 다른가

낙타도 ‘예’라고 말한다. 아이도 ‘예’라고 말한다. 하지만 둘은 정반대다. 낙타의 예는 “그렇게 하겠습니다”에 가깝다. 주어진 가치에 대한 긍정이다. 아이의 예는 “이렇게 해보겠습니다”에 가깝다.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긍정이다. 하나는 복종이고, 다른 하나는 창조다.그래서 아이의 긍정을 ‘신성한 긍정’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 부정할 대상이 없어도 움직일 수 있는 긍정. 누군가가 시키지 않아도 시작할 수 있는 긍정. 남의 인정을 받지 않아도 자신의 놀이를 계속할 수 있는 긍정. 그것이 아이의 힘이다. 하지만 아이가 된다는 것은 철없어지는 것일까

 

여기에서 한 가지 오해는 피하고 싶다. 어린아이 정신을 모든 책임에서 벗어나 마음대로 살자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은 너무 단순할 것이다.

아이에게도 제멋대로인 모습이 있고, 현실의 어린아이는 다른 사람의 돌봄 없이는 살아가기 어렵다. 니체가 말하는 아이는 실제 연령으로서의 어린아이보다 하나의 정신적 이미지에 가깝다. 이미 낙타의 무게를 알고, 사자의 싸움도 거친 뒤, 그 무게와 싸움에 갇히지 않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존재. 그래서 니체의 아이는 아무것도 경험하지 않은 순진함이 아니라, 오히려 많은 것을 지나온 뒤 다시 가벼워질 수 있는 능력에 가까워 보인다. 이 점이 중요하다. 아무것도 몰라서 가벼운 것이 아니라, 무거움을 알고도 다시 가벼워지는 것. 나이가 들수록 아이가 되기는 더 어려울까. 살면서 경험이 쌓이면 판단도 빨라진다.

 

이건 해봐야 안 된다. 저건 이미 누군가 했다.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이 정도 나이에는 무리다. 현실적으로 어렵다. 경험은 우리를 현명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가능성의 범위를 좁히기도 한다. 그래서 어린아이의 정신을 읽으면서 이런 질문이 생긴다. 나는 경험이 많아질수록 세상을 더 잘 보게 된 것일까. 아니면 무엇이 가능한지를 너무 빨리 결정하게 된 것일까. 어쩌면 아이의 정신은 경험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경험이 미래를 미리 결정하지 못하도록 하는 힘인지도 모르겠다. "전에 실패했으니 이번에도 안 될 것이다.” 라는 문장을 “이번에는 어떻게 될지 아직 모른다.” 로 바꾸는 것. 그 작은 차이가 새로운 시작을 가능하게 한다.

 

창조는 거창해야 하는가

위버멘쉬와 가치창조라는 말을 계속 듣다 보면 조금 부담스럽기도 하다. 마치 세상에 없던 거대한 가치를 만들어야 할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반드시 그래야 할까. 자신의 글을 자기 방식으로 쓰는 것. 익숙한 길에서 새로운 장면을 발견하는 것.다른 사람이 정해놓은 기준 대신 자신의 리듬으로 하루를 구성하는 것. 오랫동안 반복하던 관계에서 다른 방식으로 말해보는 것. 이런 작은 변화도 자신의 삶에서 새로운 가치를 만드는 일이 아닐까. 가치창조를 너무 거창하게 만들면 그것 자체가 다시 용이 될 수 있다. “나는 창조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나는 남들과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 이렇게 되면 어린아이조차 또 하나의 의무가 된다. 그래서 아이의 창조는 성취보다 놀이에 가까워야 하는 것 같다. 결과보다 해보는 것. 정답보다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

 

나에게 남는 질문

어린아이의 정신을 읽으면서 결국 이런 질문이 남는다. 나는 무엇을 새롭게 시작하고 싶은가. 무엇을 거부할 것인가보다 어려운 질문이다.

누구와 다르게 살 것인가보다도 어렵다. 아무도 보지 않아도 계속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잘하지 못해도 해보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당장 어떤 결과가 나오지 않아도 즐겁게 반복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또 하나. 나는 내 삶에서 무엇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아이에게 놀이가 가능한 이유는 모든 규칙을 절대적인 것으로 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필요하면 바꿀 수 있고, 다시 시작할 수 있고, 실패해도 또 다른 놀이를 만들 수 있다. 어쩌면 삶의 가벼움도 거기에서 오는 것인지 모른다. 낙타는 짐을 진다. 사자는 그 짐을 내려놓고 용과 싸운다. 아이는 그 빈자리에서 놀이를 시작한다. 니체가 세 변신의 마지막에 아이를 놓은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다. 가장 큰 힘은 남을 이기는 힘도, 끝없이 저항하는 힘도 아니라,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어쩌면 자기극복의 끝에는 더 강한 내가 아니라, 조금 더 자유롭게 놀 수 있는 내가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