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글에서 나는 새로운 것을 낳는다는 문제를 생각했다. 읽고, 생각하고, 흔들리고, 오래 품은 끝에 새로운 생각이 태어난다면, 그것을 낳은 나 역시 이전의 나와 같을 수 없다고 썼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상한 질문 하나가 생긴다. 그렇다면 그 모든 변화 뒤에는 변하지 않는 ‘진짜 나’가 따로 존재할까? 우리는 흔히 그렇게 생각한다. 사회생활을 하는 나, 직장에서의 나, 가족 앞에서의 나, 혼자 있을 때의 나는 서로 조금씩 다르지만, 그 모든 가면을 하나씩 벗겨내면 결국 어딘가에 ‘본래의 나’가 있을 것이라고. 마치 양파 껍질을 계속 벗기다 보면 마지막에 핵심이 나올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니체를 읽다 보면 이 익숙한 생각이 흔들린다.
여성의 표면은 정말 얕은 것일까
「늙은 여인들과 젊은 여인들」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여성의 마음을 표면에, 남성의 마음을 깊이에 비유한다. 처음 읽으면 역시 불편하다.
여성은 얕고 남성은 깊다는 식의 낡은 성별 이미지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문장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읽는다. 표면이 정말 깊이보다 낮은 것인가? 우리는 늘 표면 아래에 진짜 본질이 숨어 있다고 생각한다. 자연현상 뒤에는 법칙이 있고, 행동 뒤에는 동기가 있으며, 가면 뒤에는 진짜 얼굴이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끊임없이 묻는다. “진짜 이유가 뭐야?” “속마음은 뭐야?” “본질은 무엇이야?” 하지만 니체에게서는 이 질문 자체를 다시 의심하게 된다. 어쩌면 표면 뒤에 본질이 숨어 있는 것이 아니라, 표면에서 이미 모든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가면을 벗기면 무엇이 나올까
나는 사람을 볼 때도 가끔 ‘진짜 모습’을 찾으려 한다. 직장에서 보이는 모습은 사회적인 가면이고, 공식적인 자리에서 하는 말은 역할에 따른 말이며, 정말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는 사적인 순간을 봐야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면 이상하다. 직장에서의 나도 나다. 팀장으로서 판단하는 나도 나이고, 가족과 있을 때의 나도 나이며, 혼자 책을 읽으며 생각하는 나도 나다. 어느 하나가 가짜이고 어느 하나만 진짜라고 말할 수 있을까. 오히려 사람은 상황마다 서로 다른 얼굴을 만들어내면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닐까. 그렇다면 가면을 벗긴다고 맨얼굴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또 하나의 가면이 나오는 것인지 모른다. 그리고 그 가면도 거짓이라고 할 수 없다. 그것 역시 내가 살아온 방식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진짜 나’를 찾는 것과 ‘나를 만드는 것’
이 지점에서 이전 글의 생성 문제가 다시 돌아온다. 만약 내 안 어딘가에 완성된 ‘진짜 나’가 이미 존재한다면, 삶의 과제는 그것을 발견하는 일이 될 것이다. 껍질을 벗기고, 타인의 기대를 걷어내고, 사회적 역할을 내려놓고, 마지막에 남는 본래의 나를 찾아내는 것이다. 하지만 니체의 관점에서는 방향이 조금 달라지는 것 같다. 나를 찾는 것보다 나를 만드는 것. 이미 있는 본질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며 계속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도 달라진다. “내 안에 숨어 있는 진짜 나는 누구인가?”가 아니라, “나는 지금 어떤 나를 만들어가고 있는가?” 가 된다. 이 차이는 작지 않다.
니체에게도 하나의 얼굴만 있었을까
우리는 사상가를 읽을 때도 하나의 ‘진짜 니체’를 찾으려 한다. 젊은 니체와 성숙한 니체 가운데 어느 쪽이 진짜인가. 바그너를 사랑했던 니체와 바그너를 공격했던 니체 가운데 어느 니체가 본질인가. 차라투스트라의 니체인가, 디오니소스의 니체인가. 하지만 어쩌면 이런 질문 자체가 니체와 맞지 않을지 모른다. 니체는 계속 변했다. 가까이했던 사람과 결별했고, 자신이 한때 믿었던 것을 비판했으며, 이전의 자신까지 공격했다. 그렇다면 그의 여러 얼굴 가운데 하나를 골라 ‘이것이 진짜 니체다’라고 말하는 순간, 오히려 니체의 생성 자체를 놓치는 것이 아닐까. 한 사람의 역량은 하나의 얼굴을 끝까지 지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많은 얼굴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에 있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나에게도 조금 불편한 생각이다. 나는 일관성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제 했던 말과 오늘 하는 말이 다르면 스스로도 불편하다. 하지만 정말 살아 있는 생각이라면 변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지 않을까. 생각이 달라졌는데도 과거의 말을 지키기 위해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이 더 정직한 것일까.
작은 진리는 왜 소리를 지를까
이 에피소드의 마지막에서 늙은 여인은 차라투스트라에게 ‘작은 진리’를 건넨다. 나는 이 표현이 재미있다. 우리는 진리라고 하면 대개 거대한 것을 떠올린다. 하나뿐이어야 하고, 보편적이어야 하며, 누구에게나 적용되어야 하고, 엄숙해야 한다. 하지만 여기서는 ‘작은 진리’가 등장한다. 나는 이것을 곧바로 “진리는 사람마다 다르다”는 식으로 읽고 싶지는 않다. 그보다 먼저 떠오르는 것은 이런 것이다. 내가 실제로 살아가면서 발견하는 진리는 대부분 작다. 인생 전체를 설명하지 못한다. 모든 사람에게 적용할 수도 없다. 다만 지금의 나에게는 분명히 작동한다. 책 한 권을 읽다가 발견한 문장 하나, 누군가와의 관계에서 뒤늦게 깨달은 한 가지, 실패하고 나서야 알게 된 습관 하나. 그것들은 대문자 ‘진리’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작다. 하지만 내 삶의 방향을 조금 바꾸어놓는다. 어쩌면 내가 앞으로 가져야 할 것은 거대한 하나의 진리가 아니라, 살아가면서 계속 발견하고 수정하는 작은 진리들인지도 모르겠다.
작은 진리는 오래가지 않을 수도 있다
여기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오늘 발견한 진리가 내일도 반드시 같은 모습으로 남아 있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다. 몇 년 전의 나는 어떤 생각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지금 보면 지나치게 단순했다고 느끼는 것도 있다. 그렇다고 그때의 생각이 전부 잘못된 것이었을까.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 생각은 그때의 나에게 필요했고, 그 단계에서 나를 움직였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그것을 지나 다른 생각에 도달했다. 그렇다면 어떤 진리는 틀렸기 때문에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그 역할을 다했기 때문에 떠나보내는 것일 수도 있다. 이것은 앞서 살펴본 자기극복과도 닿아 있다. 자기극복은 내가 틀렸음을 끊임없이 증명하는 일이 아니라, 한때의 나에게 필요했던 것을 영원한 진리로 만들지 않는 일인지 모른다.
가면은 숨기기 위한 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나는 그동안 가면이라는 말을 부정적으로 생각했다. 자신을 숨기거나 꾸미는 것. 진짜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것. 하지만 이제는 조금 다르게 보인다. 가면은 어떤 모습을 감추기도 하지만, 동시에 아직 없던 나를 만들어내는 방법일 수도 있다. 새로운 역할을 맡으면 처음에는 어색하다. 마치 나와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 같다. 그러다 그 역할을 계속 수행하면서 실제로 이전에는 없었던 능력이 생긴다. 처음에는 가면이었던 것이 어느 순간 내 일부가 된다. 그렇다면 삶이란 진짜 얼굴을 찾기 위해 모든 가면을 벗어던지는 과정만은 아닐 것이다. 때로는 새로운 가면을 써보고, 그 가면을 통해 새로운 삶을 연습하고, 그 과정에서 또 다른 내가 만들어지는 일일 수도 있다.
나는 지금 진짜 나를 찾고 있는가
결국 질문은 다시 나에게 돌아온다. 나는 오랫동안 ‘나답게 산다’는 말을 좋아했다. 하지만 ‘나다움’이 이미 완성된 어떤 본질을 의미한다면 조금 답답해진다. 평생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할 것 같기 때문이다. 오히려 지금은 이렇게 생각하고 싶다. 나다움은 변하지 않는 핵심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살아온 변화 전체를 감당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한때 무엇을 믿었던 나도, 그것을 의심한 나도, 다른 길로 돌아선 나도, 지금 다시 새롭게 생각하는 나도 모두 나다. 가면 뒤에 마지막 하나의 얼굴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수많은 얼굴을 만들어온 과정 자체가 나일 수 있다. 그러고 보면 니체가 표면과 가면을 통해 흔드는 것은 단순히 진리의 문제가 아니다. 삶을 대하는 방식의 문제다. 완성된 본질을 찾아내려는 삶과, 계속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가는 삶. 나는 어느 쪽을 살고 있는가. 그리고 어쩌면 더 중요한 질문은 이것인지도 모른다. 가면을 모두 벗긴 뒤에 남는 ‘진짜 나’를 찾는 대신, 나는 앞으로 어떤 얼굴을 새롭게 만들어볼 것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