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나는 가치는 원래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 평가를 통해 만들어진다고 썼다. 그렇다면 이제 더 불편한 질문이 남는다. 내가 중요하다고 믿는 것들은 정말 내가 선택한 것인가. 나는 지금까지 꽤 많은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살아왔다. 좋은 대학, 좋은 직장, 승진, 성과, 책, 카메라, 좋은 집, 경제적인 안정. 이 가운데 어느 것도 이상하지 않다. 오히려 대부분은 한 사람의 삶을 안정시키고 넓혀주는 중요한 가치들이다.문제는 다른 데 있다. 나는 이것들을 언제부터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을까.

 

내가 선택하기 전에 이미 주어진 것들

 

생각해보면 우리는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삶을 시작하지 않는다. 태어나면 가족이 있고, 학교가 있고, 사회가 있고, 이미 만들어진 언어와 기준이 있다. 성실한 사람이 좋다고 배우고, 남에게 피해를 주면 안 된다고 배우고, 공부를 잘하면 칭찬받는다. 직장에 들어가면 또 다른 기준이 생긴다. 성과를 내야 하고, 책임을 져야 하고, 조직에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나는 그 기준들을 따라 살아왔다. 그 덕분에 여기까지 왔다. 그러니 그것들을 단순히 ‘남이 강요한 가치’라고 부르고 싶지는 않다. 그 가치들은 실제로 나를 성장시킨 힘이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이 든다. 나를 여기까지 데려온 가치가 앞으로도 계속 나를 데려가야 하는가.

 

한때 중요했던 것은 계속 중요해야 할까

 

승진이 그랬다. 오랫동안 승진은 성장과 성취를 보여주는 분명한 기준이었다. 더 많은 책임을 맡고, 더 넓은 역할을 하는 것. 당연히 중요한 일이었다. 그래서 승진만 하면 삶도 뭔가 크게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그 자리에 가보니 내가 기대했던 변화와는 조금 달랐다. 직급은 바뀌었지만 나는 여전히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고, 삶의 만족이 자동으로 따라오는 것도 아니었다. 그 경험은 승진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었다. 다만 승진이라는 가치가 내 삶의 최종 목적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했다. 한때 나를 움직였던 가치가 어느 순간 질문의 대상이 되기 시작한 것이다.

 

세대가 물려준 가치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온 것 가운데에는 내 세대가 공유해온 가치도 있을 것이다. 안정적인 직장. 내 집 마련. 자녀 교육. 노후 준비. 이런 것들은 그저 개인적인 욕망이 아니라 우리 세대가 살아온 조건과도 연결되어 있다. 불확실한 시기를 지나온 사람들에게 안정은 좋은 가치가 된다. 가족을 책임져야 했던 세대에게 소득과 직장은 단순한 성공이 아니라 의무에 가까웠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안전과 안정에 높은 가치를 두는 것도 나만의 선택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어쩌면 내가 살아온 시대가 내 안에 만들어놓은 가치서판일 수 있다.

 

그런데 시대가 만든 가치도 내 가치가 될 수 있다

 

여기서 한 가지를 조심하고 싶다. “사회가 가르친 가치니까 가짜이고 내가 스스로 만든 것만 진짜다.” 라고 생각하면 너무 단순해진다. 내가 스스로 만든 언어는 하나도 없다. 생각하는 방식도 대부분 누군가에게 배운 것이다. 중요한 것은 가치의 출처가 외부인가 내부인가가 아니라,

지금의 내가 그것을 다시 선택하고 있는가인 것 같다. 부모에게 배운 성실함이라도 지금 내가 여전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이제 내 가치가 될 수 있다. 반대로 내가 오래 따라왔다는 이유만으로 더 이상 의미 없는 것을 계속 붙잡는다면 그것은 습관일 수 있다.

 

물려받은 가치와 선택한 가치의 차이

 

둘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요즘은 이런 질문이 도움이 될 것 같다. 아무도 이것을 중요하다고 말하지 않아도 나는 여전히 이것을 중요하게 생각할까. 예를 들어 직급이 전혀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도 나는 지금 같은 방식으로 일하고 싶을까. 누구도 내 카메라의 가격을 모른다면

나는 같은 장비를 선택할까. 책을 많이 읽었다는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다면 나는 여전히 같은 책을 읽을까. 내 글의 조회수가 0이라도 나는 계속 쓸까. 질문을 이렇게 바꾸면 가치와 인정욕망이 어디에서 섞이는지가 조금 보인다.

 

책을 많이 갖는다는 것

 

이사와 책 정리를 앞두고 어떤 책을 남기고 어떤 책을 보낼지 고민했던 것도 비슷한 경험이었다. 책은 오랫동안 내게 단순한 물건이 아니었다. 읽을 가능성이고, 알고 싶은 세계였고, 어떤 의미에서는 ‘나는 이런 것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이기도 했다. 그래서 책을 버리는 것은 물건 하나를 처분하는 것보다 어려웠다. 하지만 책장을 바라보다 보면 몇 년 동안 한 번도 펼치지 않은 책도 많았다. 그때 질문이 생겼다.나는 이 책을 정말 읽고 싶은 것인가. 아니면 이 책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가능성을 보유하고 싶은 것인가. 이 질문을 하고 나니

소유와 가치가 조금씩 분리되기 시작했다.

 

물건을 갖는 것과 사용하는 것

 

노트북과 카메라도 비슷했다. 새로운 장비를 볼 때마다 나는 그 장비로 할 수 있는 일을 먼저 상상했다. 이것도 할 수 있고, 저것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기존 장비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 많았다. 어떤 물건은 가능성을 열어주지만 어떤 물건은 가능성을 소유했다는 느낌만 준다. 그리고 그 둘은 다르다. 이 경험을 통해 내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좋은 장비’의 기준도 조금 변했다. 가장 뛰어난 장비보다

실제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장비가 나에게는 더 좋은 장비일 수 있다. 가치가 바뀌자 소유에 대한 판단도 달라졌다.

 

조직에는 조직의 선과 악이 있다

 

회사에서는 더 분명하다. 조직마다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구분하는 기준이 있다. 어떤 조직은 빠른 실행을 높게 평가한다. 어떤 조직은

안정과 무사고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또 어떤 조직은 숫자로 보이는 성과에 높은 가치를 둔다. 오랫동안 한 조직에 있으면 그 기준은 자연스럽게 내 안으로 들어온다. 그래서 어느 순간 조직의 평가와 나의 평가가 구분되지 않기도 한다. 성과가 좋으면 내가 괜찮은 사람처럼 느껴지고, 평가가 좋지 않으면 내 존재까지 부족한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조직의 가치서판은 조직이 살아가기 위해 만든 기준이다. 그것이 내 삶 전체를 평가하는 기준일 필요는 없다. 이 구분은 생각보다 중요하다.

 

좋은 팀장이라는 기준도 다시 묻게 된다

 

나는 어떤 팀장이 좋은 팀장이라고 생각하는가. 성과를 잘 내는 사람일까. 윗사람에게 신뢰받는 사람일까. 구성원이 좋아하는 사람일까.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관리하는 사람일까. 아마 모두 중요하다. 하지만 최근에는 조금 다른 기준도 생각하게 된다. 내가 없어도 구성원들이 스스로 판단할 수 있게 만드는 사람. 앞의 글에서 썼던 ‘싸구려 여관’이라는 이미지가 다시 떠오른다. 사람들이 계속 나를 찾는 것이 좋은 리더십의 증거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사람들이 나를 덜 필요로 하게 된다면 오히려 더 잘된 것일 수도 있다. 이것은 조직이 내게 가르쳐준 평가 기준이라기보다 살아오면서 내가 조금씩 다시 만든 기준에 가깝다.

 

가족이 물려준 것

 

가족에게서 받은 가치도 있다. 책임감, 성실함, 가족을 돌보는 마음. 이런 것은 쉽게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버리고 싶지도 않다. 다만 가족에게서 물려받은 가치조차 내 삶 속에서 다시 이해할 필요는 있을 것 같다. 예를 들어 가족을 위해 일한다는 것이 계속 일만 하는 것을 의미하는지, 경제적 책임을 다한다는 것이 함께 보내는 시간을 희생해도 된다는 뜻인지, 그 구체적인 형태는 다시 생각할 수 있다. 가치는 이어받을 수 있지만 그 가치를 살아내는 방식까지 똑같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니체를 읽는 것도 결국 이 질문으로 돌아온다

 

처음에는 니체의 말을 이해하려고 했다. 신의 죽음이 무엇인지, 위버멘쉬가 무엇인지, 영원회귀가 무엇인지. 그런데 읽을수록

개념보다 질문이 더 많이 남는다. 나는 왜 이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이 판단은 어디에서 왔지. 지금도 유효한가.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누가 말했지. 그리고 결국 가장 어려운 질문이 남는다. 나는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며 살고 싶은가. 이 질문은 책에서 답을 그대로 가져올 수 없다. 니체도 대신 답해줄 수 없다.

 

‘나의 가치’를 만든다는 것

 

예전에는 나만의 가치를 만든다는 말을 들으면 아주 거창하게 느껴졌다. 새로운 철학을 만들거나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야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내가 물려받은 것들을 하나씩 꺼내어 보고, 이것은 여전히 중요하다. 이것은 조금 덜 중요하다.

이것은 이제 놓아도 되겠다. 라고 다시 평가하는 것. 그 과정 자체가 나만의 가치서판을 만드는 일일 수 있다. 완전히 새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물려받은 것을 다시 선택하는 것.

 

매일 쓰는 이유도 조금 달라진다

 

매일 글을 쓰는 일도 이런 재평가의 시간이 되고 있다. 하루를 보내고 나서 내가 무엇에 마음을 썼는지 적다 보면 내가 실제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드러난다. 입으로는 가족이 중요하다고 하면서 하루 종일 업무 생각만 했다면 내 실제 가치서판은 말과 다를 수 있다. 책이 중요하다고 하면서 계속 새 장비만 검색했다면 내 시간은 다른 가치를 따라간 것이다. 그래서 기록은 내가 무엇을 믿는지 적는 일이 아니라 내가 실제로 무엇에 시간을 주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일 이기도 하다. 가치는 말보다 시간에 더 잘 드러나는 것 같다.

 

시간을 어디에 쓰는가

 

어쩌면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알고 싶다면 내 말을 듣기보다 내 하루를 보는 편이 정확할 수도 있다. 무엇에 시간을 쓰는가.

무엇 때문에 걱정하는가. 무엇을 반복해서 검색하는가. 어떤 일은 피곤해도 계속하고 싶은가. 무엇을 위해 돈을 쓰는가. 무엇을 위해 기다릴 수 있는가. 거기에 내가 실제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가 있다. 그러고 보면 나의 가치서판은 이미 매일 작성되고 있다. 다만 내가 읽지 않고 있었을 뿐이다.

 

천 개의 목표 사이에서

 

니체는 수많은 민족이 저마다의 가치서판을 만들었다고 말한다. 나는 이제 그 말을 조금 작게 가져와본다. 가족의 목표가 있었고, 학교의 목표가 있었고, 회사의 목표가 있었고, 내 세대의 목표가 있었다. 나는 그 천 개의 목표 사이에서 여기까지 왔다. 그것들을 모두 버릴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중 많은 것은 앞으로도 내가 살아가는 데 중요한 가치일 것이다. 다만 이제는 한 번쯤 묻고 싶다. 이것을 나는 지금도 선택하는가.

 

아마 나만의 가치는 완전히 새로운 곳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이미 내 안에 들어와 있는 수많은 가치 가운데 무엇을 다시 선택하고 무엇을 놓아줄지 결정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질 것이다. 그래서 이제 “이것은 내 가치다.” 라고 너무 쉽게 말하지 않으려 한다. 대신 먼저 묻는다. 누구에게서 배웠는가. 어떤 삶의 조건에서 필요했던가. 지금도 나를 살게 하는가. 그리고 가장 마지막에 묻는다. 아무도 이것을 요구하지 않아도 나는 여전히 이것을 중요하게 여길 것인가. 그 질문을 통과한 뒤에도 남아 있는 것. 아마 그것부터 조금씩 ‘나의 가치’라고 불러도 되지 않을까.

 

 

니체는 이상한 말을 한다. “평가하는 것이 곧 창조하는 것이다.” 처음 읽으면 과장처럼 들린다. 사물은 이미 존재하고, 좋고 나쁨도 어느 정도 정해져 있지 않은가. 맛있는 음식은 맛있고, 위험한 행동은 위험하며, 좋은 성과와 나쁜 성과도 어느 정도 구별할 수 있다. 그런데 니체는 묻는다. 그 ‘좋다’와 ‘나쁘다’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가치를 발견한 것일까. 아니면 우리가 가치를 부여한 것일까.

 

같은 것을 보고도 전혀 다르게 평가한다

 

사진을 찍으러 시장에 가면 이 질문이 쉽게 이해된다. 누군가에게 오래된 시장 골목은 낡고 복잡하고 정리되지 않은 공간일 수 있다. 나에게는 같은 장소가 빛과 사람, 물건과 거리 사이의 관계가 끊임없이 바뀌는 공간으로 보일 수 있다. 장소는 같다. 그런데 한 사람에게는 “정비해야 할 낡은 공간” 이고, 다른 사람에게는 “오래 머물며 바라보고 싶은 공간” 이다. 어느 쪽이 그 장소의 ‘진짜 모습’일까. 아마 하나만을 고르기는 어려울 것이다. 무엇을 보고,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며,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같은 장소가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니체가 말하는 퍼스펙티브를 나는 이런 데서 조금 이해하게 된다.

 

우리는 보고 난 뒤 평가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예전에는 이런 순서라고 생각했다. 먼저 객관적으로 본다. 그다음 판단한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내가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가 이미 무엇을 볼 것인지를 결정한다. 좋은 카메라에 관심이 많을 때는 다른 사람의 사진을 보면서도 먼저 해상력과 계조, 렌즈의 특성을 본다. 사진의 의미에 더 관심을 두기 시작하면 사람의 표정이나 거리, 기다림이 먼저 보인다. 대상은 그대로인데 내 눈이 달라진다. 그렇다면 퍼스펙티브는 단순히 “같은 것을 다르게 해석한다”는 정도가 아닐 것이다. 내가 무엇을 가치 있다고 보느냐에 따라 세계 자체가 다르게 나타난다.

 

회사에서도 ‘좋은 일’은 이미 정해져 있지 않다

 

업무에서도 비슷하다. 운영조직에서 ‘일을 잘한다’는 말은 무엇을 뜻할까. 장애가 없는 것일까. 문제가 생겼을 때 빨리 복구하는 것일까. 보고를 잘하는 것일까. 사전에 위험을 찾아 제거하는 것일까. 어느 하나만 맞다고 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두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행동은 크게 달라진다. “장애가 나지 않는 것”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두면 안정과 통제가 우선된다. “위험을 먼저 찾아 개선하는 것”을 중요하게 두면 문제가 없어 보이는 영역까지 들여다보게 된다. “보고를 잘하는 것”을 중요하게 두면 사람들은 보여주는 방식에 더 많은 에너지를 쓴다. 평가 기준 하나가 조직 전체의 행동을 바꾼다. 그렇다면 리더가 하는 평가란 이미 있는 성과를 측정하는 행위만은 아닌 것 같다. 무엇을 잘한 일이라고 부를지 정하는 순간, 앞으로 어떤 행동이 반복될지를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평가가 곧 창조’라는 말의 현실적인 의미일지도 모른다.

 

선과 악도 처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닐까

 

「천 개와 하나의 목표」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여러 민족에게 서로 다른 선과 악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어떤 민족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이

다른 민족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일 수 있다. 그렇다면 선과 악이 하늘에서 완성된 채 내려온 것이 아니라 각자가 살아온 조건 속에서 만들어진 것은 아닐까. 이 생각은 처음에는 불안하다. 선악이 만들어진 것이라면 무엇이든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뜻 아닐까. 하지만 니체가 말하려는 것은 그렇게 단순한 상대주의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더 어려운 책임이 생긴다. 가치가 만들어진 것이라면, 지금 내가 믿는 가치가 무엇을 만들어내는지도 다시 물어야 하기 때문이다.

 

“원래 그렇다”는 말

 

생각해보면 나는 많은 가치를 ‘원래 그런 것’으로 받아들였다. 좋은 학교에 가는 것이 좋다. 직장에서 승진하는 것이 좋다. 성과가 많을수록 좋다. 책은 많이 읽을수록 좋다. 비싼 장비는 더 좋은 결과를 만든다. 그런데 실제로 살아보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승진해도 삶 전체가 바뀌지는 않았다. 책을 많이 사도 읽지 않으면 내 것이 되지 않았다. 고성능 장비를 가지고 있어도 사용하지 않으면 가능성만 소유한 채 에너지를 빼앗기기도 했다. 그러면서 조금씩 질문이 생겼다. 이것은 정말 좋은 것인가. 아니면 내가 오랫동안 좋다고 배워온 것인가.

 

가치에는 역사가 있다

 

이 질문을 던지고 나니 가치에도 역사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한때 어떤 가치가 내게 필요했던 이유가 있다. 승진은 성장을 확인하는 중요한 기준이었을 수 있다. 좋은 장비는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는 도구였을 수 있다. 많이 읽는 것은 내가 몰랐던 세계를 넓히는 방식이었을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가치가 한때 나를 움직였다고 해서 영원히 같은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조건이 바뀌면 평가도 달라질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과거에 필요했던 가치를 계속 붙잡는다. 예전의 나에게는 중요했던 것이

지금의 나에게도 중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마 가치창조는 완전히 새로운 것을 갑자기 만들어내는 일만은 아닐 것이다. 한때 나를 살게 했던 가치가 지금도 나를 살게 하는지 다시 묻는 것. 거기서 시작할 수도 있다.

 

좋은 독서란 무엇인가

 

독서에서도 내 가치평가는 꽤 많이 변했다. 예전에는 많이 읽는 것이 중요했다. 몇 권을 읽었는지, 어떤 책을 읽었는지, 어떤 분야까지 알고 있는지가 독서의 성과처럼 느껴졌다. 지금은 한 권을 오래 붙들고 있다. 읽은 권수는 거의 늘지 않는다. 대신 한 문장이 며칠씩 따라다닌다.

그 문장을 업무와 연결해보고, 사진과 연결해보고, 내가 살아온 방식과 연결해본다. 예전 기준으로 보면 독서 속도가 매우 느려졌다. 그런데 내게는 오히려 독서가 더 깊어진 느낌이 든다. 그러면 좋은 독서의 기준도 바뀐 것이다. 얼마나 많이 읽었는가에서 얼마나 나를 다르게 보게 했는가로. 가치평가가 달라지니 같은 ‘독서’라는 행동의 의미까지 달라진다.

 

좋은 사진에 대한 기준도 변하고 있다

 

사진도 비슷하다. 예전에는 선명하고 아름다운 사진에 쉽게 눈이 갔다. 좋은 카메라와 좋은 렌즈가 만들어내는 계조와 색, 정교한 묘사도 여전히 좋아한다. 하지만 요즘에는 조금 다른 사진이 오래 남는다. 완벽하게 정리되지 않았어도 사람 사이의 미묘한 거리가 있고, 특별한 사건이 없어도 그날의 공기와 기다림이 느껴지는 사진. 그렇다면 사진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내가 사진에서 찾는 가치가 달라진 것이다. 그리고 그 변화가 내가 카메라를 들고 서 있는 위치와 기다리는 시간까지 바꾼다. 평가는 생각 속에만 머물지 않는다. 몸을 움직인다.

 

그러면 모든 평가는 똑같이 좋은가

 

여기서 중요한 문제가 남는다. 사람마다 관점이 다르다면 모든 평가가 똑같은 것인가. 나는 니체를 그렇게 읽고 싶지는 않다. 어떤 가치는 나를 더 좁게 만든다. 계속 비교하게 하고, 두려움 때문에 행동하게 하고, 내 가능성을 줄인다. 반대로 어떤 가치는 더 많은 것을 보게 하고, 더 오래 생각하게 하고, 새로운 것을 시도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가치에 절대적인 정답이 없다고 해서 가치를 평가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질문은 더 구체적이 된다. 이 가치는 어떤 삶을 만들어내는가.

 

내가 믿는 ‘좋음’이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가

 

요즘 나는 무엇이 좋은 것인지 판단할 때 이 질문을 써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승진이 좋은가 나쁜가가 아니라, 승진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삼을 때 나는 어떤 사람이 되는가. 좋은 장비가 좋은가 나쁜가가 아니라, 장비를 중요하게 여기는 방식이 나를 더 많이 찍게 하는가, 더 많이 검색하게 하는가. 매일 글을 쓰는 것이 좋은가 나쁜가가 아니라, 글쓰기가 나를 더 깊이 생각하게 하는가, 아니면 매일 써야 한다는 또 다른 의무가 되는가. 가치의 문제를 이렇게 보면 선과 악은 멀리 있는 철학적 문제가 아니다. 매일 내가 하는 작은 판단 속에 있다.

 

나는 매일 작은 가치서판을 만들고 있다

 

회사에서 누군가의 일을 평가할 때. 아이에게 어떤 말을 해줄 때. 좋은 사진을 고를 때. 책을 정리하고 버릴 책과 남길 책을 결정할 때. 하루를 돌아보며 오늘 무엇을 잘했다고 생각하는지 적을 때. 나는 계속 “이것은 중요하다.”“이것은 덜 중요하다.” 라고 말하고 있다. 그 판단들이 모여 내 삶의 가치서판을 만든다. 그러고 보면 나는 이미 가치창조를 하고 있었다. 다만 그것을 의식하지 못했을 뿐이다.

 

문제는 ‘누가 만든 가치인가’

 

그래서 이제 선악의 문제보다 조금 더 나에게 가까운 질문이 생긴다.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가운데 정말 내가 다시 평가해 선택한 것은 얼마나 될까. 가족에게 배운 것, 학교에서 배운 것, 회사에서 익힌 것, 내 세대가 당연하게 여겨온 것. 그것들이 잘못되었다는 뜻은 아니다.오히려 대부분은 나를 여기까지 오게 한 중요한 가치였을 것이다. 하지만 물려받았다는 것과 지금도 선택한다는 것은 다르다. 한 번쯤은 내 앞에 펼쳐놓고 물어야 할 것 같다. 지금도 이것을 원하는가. 지금도 이것을 좋은 삶이라고 생각하는가.

 

니체의 “평가하는 것이 곧 창조하는 것이다.” 라는 말을 이제 조금 다르게 읽는다. 마음대로 좋고 나쁨을 붙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내가 무엇을 좋다고 부르는지에 대해 더 큰 책임을 가지라는 말처럼 느껴진다. 내가 좋다고 부르는 것을 따라 내 시간과 관심이 움직이고, 그 선택들이 반복되면서 결국 내가 어떤 사람이 될지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치평가는 세상을 설명하는 일이면서 동시에 앞으로 살아갈 나를 만드는 일이다. 그렇다면 이제 질문은 “무엇이 좋은가.” 에서 끝나지 않는다. 한 걸음 더 가야 한다. 내가 좋다고 믿는 이것은 나를 어떤 사람으로 만들고 있는가. 아마 나만의 가치서판은 그 질문을 반복하는 동안 조금씩 만들어질 것이다(56)

 

 

좋은 친구란 어떤 사람일까. 내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 힘들 때 내 편이 되어주는 사람. 오랫동안 연락하지 않아도 다시 만나면 편안한 사람.나도 그렇게 생각해왔다. 그래서 니체가 친구를 이야기하면서 갑자기 ‘적’을 끌어들이는 것이 처음에는 낯설었다. “벗을 원한다면 그 벗을 위해 적이 될 줄도 알아야 한다.” 친구에게 적이 되라니. 친구라면 나를 이해하고 지지해야 하는 것 아닌가. 힘든 사람에게 굳이 긴장을 더해줄 필요가 있을까. 그런데 앞에서 욕망의 문제를 생각하면서 조금 다르게 읽히기 시작했다. 좋은 관계란 나를 늘 편안하게 해주는 관계일까. 아니면 때때로 내가 익숙하게 머물고 있는 자리에서 조금 움직이게 만드는 관계일까.

 

나를 인정해주는 사람과 나를 넘어가게 하는 사람

 

우리는 친구에게 많은 것을 기대한다. 내가 잘했다고 말해주기를 바라고, 힘든 일을 이야기하면 내 입장을 이해해주기를 바란다. 나도 마찬가지다. 특히 내 판단이 흔들릴 때 가까운 사람이 “네가 맞아.” 라고 해주면 마음이 편해진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 편안함이 언제나 나에게 좋은 것만은 아니다. 내가 잘못 판단하고 있는데도 내 편이 되어주는 사람과, 내 마음을 이해하면서도 “그런데 정말 네가 옳은 걸까?” 라고 물어주는 사람은 다르다. 그 순간에는 두 번째 사람이 더 불편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오히려 그 질문이 오래 남을 때가 있다. 니체가 말하는 친구는 아마 두 번째에 조금 더 가까운 것 같다.

 

‘최상의 적’이라는 이상한 표현

 

니체는 벗의 내면에서 ‘최상의 적’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을 서로 공격하고 상처를 주라는 뜻으로 읽고 싶지는 않다. 오히려 내게는 이렇게 들린다. 나를 무너뜨리는 적이 아니라, 내가 지금의 나로 머무는 것을 어렵게 만드는 사람. 내가 쉽게 변명할 때 그 변명을 알아차리는 사람. 내가 잘하는 것에 안주할 때 그 너머를 보여주는 사람. 내가 나 자신에게 만들어놓은 이야기를 너무 쉽게 믿지 못하게 하는 사람. 그런 사람 앞에서는 조금 긴장하게 된다. 하지만 그 긴장은 불편함과는 다른 종류의 긴장이다. 나를 방어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나를 조금 더 정확하게 보게 만든다.

 

좋은 관계는 왜 거리를 필요로 할까

 

지난 글에서 나는 욕망과 나 사이에 작은 거리가 생길 때 선택할 수 있다고 썼다. 친구 관계도 비슷할지 모른다. 너무 가까워져 경계가 사라지면 상대의 기분이 내 기분이 되고, 상대의 판단이 내 판단이 된다. 친구가 나를 좋아하면 안심하고, 친구가 나에게 실망하면 내가 잘못된 사람처럼 느낀다. 그렇게 되면 친밀함은 어느 순간 의존이 된다. 니체의 우정에는 의외로 많은 거리가 있다. 모든 것을 알려고 하지 말 것. 모든 것을 보여주려고 하지 말 것. 친구에게도 고독을 허락할 것. 처음에는 이것이 차갑게 느껴졌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상대를 정말 독립된 사람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나에게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영역까지 인정하는 것 인지도 모른다.

 

친하다는 이유로 모든 것을 알아야 할까

 

가까운 사이일수록 이런 생각을 하기 쉽다. 왜 내게 말하지 않았지. 왜 나와 상의하지 않았지. 왜 저런 결정을 혼자 했지. 그 속에는 관심도 있지만 어쩌면 작은 소유욕도 숨어 있을 것이다. 친구는 내 사람이라는 생각. 그러나 사람이 가까워진다고 해서 그 사람의 모든 삶이 내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니체가 말하는 벗은 내 외로움을 없애주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혼자 설 수 있도록 고독을 허락하는 사람에 가깝다. 이 표현이 마음에 남는다. 좋은 친구가 내 고독을 없애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더 잘 혼자 있을 수 있게 해준다니.

 

위로와 연민은 같은 것일까

 

니체는 친구에게 연민을 쉽게 내보이지 말라고 한다. 이 말도 처음에는 거슬렸다. 힘든 친구에게 공감하고 위로하는 것이 무엇이 잘못일까. 그런데 니체가 경계하는 것은 아마 따뜻함 자체가 아니라 상대를 ‘불쌍한 사람’으로 고정하는 시선일 것이다. “너는 지금 힘든 사람이니까 내가 도와줄게.” 라는 마음과 “나는 네가 이것을 넘어갈 힘이 있다고 생각해.” 라는 마음은 미묘하게 다르다. 첫 번째에는 내가 위에 있고

상대가 아래에 놓일 위험이 있다. 두 번째에는 상대의 힘을 먼저 본다. 물론 힘든 사람에게 무조건 강해지라고 요구하는 것은 또 다른 폭력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더 어려운 것 같다. 곁에 있어주되 대신 살아주지 않는 것. 도와주되 상대의 힘까지 빼앗지 않는 것.

 

회사에서도 비슷한 관계가 있다

 

팀장이 되고 나니 관계를 바라보는 방식도 조금 달라졌다. 일을 대신 해결해주는 것이 가장 빠를 때가 있다. 내가 답을 알고 있다면 그냥 방향을 정해주고 따라오게 하는 편이 효율적이다. 하지만 그렇게 할수록 사람은 내 판단을 기다리게 된다. 반대로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판단하게 두면 시간이 더 걸린다. 때로는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 과정을 지나야 나 없이도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 생긴다. 앞에서 이야기했던 ‘싸구려 여관’이 다시 떠오른다. 내가 계속 필요해지는 것이 좋은 관계의 증거일까. 아니면 어느 순간 내가 필요하지 않아지는 것이 더 좋은 결과일까. 친구도, 리더도 상대를 자기 주변에 오래 붙잡아두는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이 자기 길을 갈 수 있도록 만드는 사람일지 모른다.

 

나를 편안하게만 하는 사람

 

그렇다고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이 모두 좋은 친구라는 뜻은 아니다. 계속 평가하고, 상처를 주고, 자신의 기준을 강요하는 사람을 “나를 성장시키는 친구” 라고 미화할 필요는 없다. 나를 작게 만드는 관계와 나를 넘어가게 만드는 관계는 다르다. 둘의 차이는 무엇일까. 요즘 나는 그것을 힘이 남는가로 생각해본다. 어떤 사람을 만나고 나면 내가 더 부족하고 초라하게 느껴진다. 반면 어떤 사람과 이야기를 나눈 뒤에는

불편한 말을 들었는데도 이상하게 다시 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첫 번째 관계는 나의 힘을 줄이고, 두 번째 관계는 긴장을 주면서도 힘을 남긴다. 이전 글에서  욕망을 보며 물었던 질문을 관계에도 적용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이 관계는 나를 더 살아 있게 하는가.

 

친구를 보면 내가 보인다

 

니체는 벗에 대한 우리의 동경이 우리 자신을 드러내는 누설자라고 말한다. 이 말도 오래 생각하게 된다. 내가 어떤 사람을 좋아하는가를 보면 내가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가 보인다. 어떤 사람의 글을 부러워하고, 어떤 사진가의 시선을 좋아하고, 어떤 사람의 삶의 태도에 끌리는가. 그것은 단순한 취향이 아닐 수도 있다. 아직 내가 갖지 못했지만 갖고 싶은 어떤 가능성을 그 사람에게서 보고 있는 것일 수 있다. 그렇다면 친구는 단지 지금의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아직 되지 않은 모습을 조금 먼저 보여주는 사람일 수도 있다.

 

책 속의 사람도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지금 나에게 가장 불편한 질문을 많이 던지는 사람 가운데 하나는 백 년도 훨씬 전에 죽은 니체다. 그는 내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다. 내 사정을 고려하지도 않는다. 내가 힘들다고 해서 “그래도 지금까지 잘했어.” 라고 위로해주지도 않는다. 대신 계속 묻는다. 그것은 정말 네 생각인가. 왜 인정받고 싶어 하는가. 네 욕망인가, 욕망이 너를 움직이고 있는가. 지금의 너를 왜 계속 유지하려 하는가. 불편하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질문 때문에 나는 내가 살아온 방식을 다시 보게 된다. 그렇다면 친구는 반드시 내 곁에 있는 사람이어야 하는 것도 아닐지 모른다. 책 한 권이 때로는 가까운 사람보다 더 멀리 나를 밀어낼 수 있다.

 

매일 쓰는 글도 나에게 질문을 돌려준다

 

매일 몇 줄이라도 써놓고 나중에 다시 읽으면 당시에는 몰랐던 반복이 보인다. 비슷한 물건을 사고 싶어 했던 이유, 비슷한 상황에서 흔들렸던 마음, 몇 달 간격으로 다시 나타나는 질문. 쓸 때는 그저 그날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쌓이고 나면 글들이 내게 다시 묻는 것 같다. 너는 왜 여기에서 계속 멈추는가. 이런 점에서 기록은 나를 위로하는 일기이면서 동시에 내가 외면했던 것을 보여주는 거울이기도 하다. 좋은 친구가 그렇듯 좋은 기록도 항상 나를 편안하게만 하지는 않는다.

 

친구에게 무엇이 되어야 할까

 

여기까지 생각하면 질문의 방향이 바뀐다. 좋은 친구를 찾는 것보다 먼저 나는 누군가에게 어떤 친구인가. 상대가 힘들 때 무조건 내 편으로 끌어들이고 있지는 않은가. 내가 답을 알고 있다는 이유로 상대가 자기 답을 찾을 기회를 빼앗고 있지는 않은가. 나를 필요로 하는 것을

관계가 깊다는 증거로 착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상대가 나와 다른 길을 선택했을 때 그 차이를 견딜 수 있는가. 친구가 나를 넘어가는 것을

진심으로 기뻐할 수 있는가. 생각보다 어려운 질문이다.

 

좋은 친구는 나를 편안하게 해주는 사람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때로는 나를 흔들고, 내가 붙잡고 있던 생각에 질문을 던지고, 내가 아직 보지 못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람. 그러면서도 나를 자기 방식으로 만들려 하지 않고 내가 내 길을 갈 수 있도록 거리를 남겨주는 사람. 니체가 말하는 ‘최상의 적’은 아마 나를 이겨야 할 경쟁자가 아니라 내가 지금의 나로 머무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타자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그리고 좋은 우정이란 서로를 닮게 만드는 관계가 아니라 각자가 자기 길을 더 멀리 갈 수 있도록 서로에게 작은 긴장을 남겨주는 관계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제 친구를 생각하며 이 질문을 남겨본다. 그 사람은 나를 편안하게 해주는가. 그리고 그보다 한 걸음 더, 그 사람을 만난 뒤 나는 조금 더 나 자신이 되어가는가. 마지막에는 나에게도 같은 질문을 돌려야 할 것이다. 나는 누군가에게 그런 친구인가.

 

니체의 「순결」을 읽으며 처음에는 조금 낯설었다. 순결과 관능. 요즘의 내 삶과는 멀리 떨어진 주제처럼 느껴졌다. 그러나니체가 묻는 것은 성적 욕망만이 아니었다. 더 근본적인 질문이었다. 나는 욕망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억누르는가. 끌려가는가. 아니면 그 욕망을 내 삶의 힘으로 바꿀 수 있는가. 이렇게 바꾸어 생각하니 갑자기 이야기가 가까워졌다.

 

나는 꽤 많은 욕망과 함께 살고 있다. 좋은 카메라를 갖고 싶고, 새로운 렌즈를 써보고 싶고, 책을 사고 싶고, 글을 잘 쓰고 싶고, 일에서도 좋은 결과를 내고 싶다. 어쩌면 욕망이 없는 날보다 욕망으로 움직이는 날이 훨씬 많다. 그렇다면 문제는 욕망 자체가 아닐지도 모른다.

 

욕망을 없애면 자유로워질까

 

우리는 종종 욕망을 자유의 반대편에 놓는다. 욕심을 줄여라. 집착하지 마라. 소유를 줄여라. 절제하라. 맞는 말이다. 실제로 욕망이 너무 커지면 그것에 끌려다니기 쉽다. 그런데 니체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욕망을 억압한다고 해서 욕망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억누른 욕망은 사라지지 않는다. 모습을 바꾼다.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할수록 오히려 그것에 더 많은 생각을 쓰기도 한다. 먹지 않겠다고 결심했는데 하루 종일 음식 생각을 하고, 물건을 사지 않겠다고 하면서 계속 쇼핑 사이트를 들여다본다. 겉으로는 절제하고 있지만 마음은 여전히 그것에 붙잡혀 있다. 그렇다면 절제와 자유는 같은 것이 아니다.

 

사고 싶은 마음

 

고가의 장비를 사고팔면서 이 문제를 여러 번 경험했다. 처음에는 분명 사용하고 싶어서 샀다. 더 좋은 성능을 경험하고 싶었고, 그 장비가 가능하게 할 새로운 작업을 상상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사용보다 소유가 앞서기 시작한다. 사고 나면 잠시 만족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장비가 눈에 들어온다.

 

비교하고, 검색하고, 가격을 알아보고, 다시 가능성을 상상한다. 정작 사용하는 시간보다 장비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더 길어질 때도 있었다. 이때 이상한 질문이 생긴다. 내가 이 물건을 원하는 것인가, 아니면 원하는 상태 자체를 계속 원하는 것인가. 둘은 꽤 다르다.

 

가능성을 소유하고 싶다는 욕망

 

예전에 고성능 노트북을 정리하면서 물건을 보유한다는 것은 단순히 공간을 차지하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물건은 관심을 요구한다. 관리해야 하고, 업데이트해야 하고, 가격이 떨어지는 것도 신경 쓰이고, 쓰지 않으면 아깝다는 생각도 든다. 나는 물건을 소유하지만

어느 순간 물건도 내 시간과 관심의 일부를 소유한다. 그때 내가 원했던 것은 물건 자체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이 장비가 있으면 이런 것도 할 수 있다.” 라는 가능성을 갖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영상 편집도 할 수 있고, 그래픽도 할 수 있고, AI도 돌릴 수 있고, 언젠가 새로운 작업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가능성. 하지만 가능성을 소유하는 것과 실제로 사용하는 것은 다르다. 나는 가능성을 많이 갖고 있으면서 정작 그 가능성을 충분히 사용하지 못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욕망은 나쁜 것인가

 

여기서 다시 니체가 중요해진다. 그는 욕망 자체를 악으로 돌리지 않는다. 오히려 욕망을 죽이려 하지 말라고 한다. 나는 이 태도가 마음에 든다. 좋은 카메라를 사고 싶은 마음도, 새로운 책을 읽고 싶은 마음도, 더 좋은 글을 쓰고 싶은 마음도 그 자체로 잘못은 아니다. 오히려 그런 욕망이 없었다면 나는 지금보다 훨씬 적게 움직였을 것이다. 카메라가 있었기에 밖으로 나갔고, 책을 샀기에 읽기 시작했고, 글을 남기고 싶었기에 생각을 문장으로 만들었다. 욕망은 나를 흔들지만 동시에 나를 움직인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욕망이 있는가 없는가가 아니라, 그 욕망이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가 인 것 같다.

 

욕망이 나를 사용하는 순간

 

같은 카메라에 대한 욕망도 전혀 다르게 작동한다. 어떤 날에는 카메라 때문에 밖으로 나간다. 거리의 빛을 보고, 사람을 기다리고, 평소 지나치던 풍경을 더 오래 본다. 그날 카메라는 내 감각을 넓혀준다. 그런데 어떤 날에는 하루 종일 장비 비교만 한다. 해상력과 센서 성능을 찾아보고, 사용기를 읽고, 새 제품 가격을 비교한다. 사진은 한 장도 찍지 않는다. 같은 욕망인데 결과는 정반대다. 하나는 세계와의 관계를 넓히고, 다른 하나는 내 관심을 물건 안에 가둔다. 그래서 요즘은 욕망을 판단할 때 이 질문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욕망은 내 힘을 늘리고 있는가, 줄이고 있는가.

 

힘을 늘린다는 것

 

여기서 ‘힘’은 남을 이기는 힘이 아니다. 더 많이 보고, 더 오래 집중하고, 더 잘 판단하고, 조금 더 넓게 관계 맺을 수 있는 힘에 가깝다. 책에 대한 욕망도 그렇다. 책을 많이 사는 것 자체가 내 힘을 늘려주는 것은 아니다. 책장이 가득 차도 읽지 않으면 그 가능성은 잠든 채 남아 있다.

반대로 한 권을 오래 읽고, 문장 하나를 붙들고, 그 문장이 내 경험을 다시 보게 만든다면 한 권의 책이 수십 권보다 더 큰 힘을 줄 수도 있다.

 

그래서 요즘의 니체 읽기가 예전의 독서와 조금 다르게 느껴진다. 읽은 권수는 늘지 않는데 질문은 늘어난다. 어쩌면 지금 내게 필요한 독서는 더 많이 소유하는 독서가 아니라 더 깊이 변하는 독서인지도 모른다.

 

순진무구한 관능

 

니체는 ‘관능의 순진무구’를 말한다. 나는 이 표현을 욕망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상태로 읽어본다. 좋은 것을 갖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고

스스로를 탐욕스럽다고 비난하지 않는다. 멋진 사진을 찍고 싶고,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 싶고, 좋은 성과를 내고 싶은 마음도 인정한다. 그 욕망이 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 그 대신 한 가지를 더 본다. 그 욕망이 지금 나를 어디로 끌고 가고 있는가. 그러면 억압하는 대신 관찰할 수 있다. 욕망을 적으로 만들지 않으면서도 그 욕망의 노예가 되지 않는 가능성이 생긴다.

 

‘참는 것’과 ‘필요하지 않은 것’

 

 ‘바탕에서 순결한 자’라는 표현이 있다.  나는 이것을 억지로 참는 사람과 더 이상 크게 끌리지 않는 사람의 차이로 생각해보았다. 무언가를 눈앞에 두고 “참아야 한다.” 고 계속 말하고 있다면 나는 아직 그것과 강하게 싸우고 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굳이 필요하지 않다.” 고 느끼게 되면 싸움 자체가 줄어든다.

 

이 둘의 차이는 크다. 전자는 의지력으로 버티는 것이고, 후자는 가치가 바뀐 것이다. 예전에는 갖고 싶었던 것이 지금은 별로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을 때가 있다. 그때 비로소 나는 욕망을 이긴 것이 아니라 욕망을 바라보는 내가 달라졌다는 것을 알게 된다.

 

버리는 것보다 관계를 바꾸는 것

 

물건을 줄이는 일도 비슷하다. 많이 버린다고 반드시 자유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미니멀리스트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고 얼마나 적게 소유하는지를 자랑하기 시작하면 다시 다른 방식의 소유욕이 생긴다. 중요한 것은 개수가 아닐 수 있다. 열 개를 가지고 있어도 그것들이 나를 지배하지 않을 수 있고, 하나밖에 없어도 그 하나에 완전히 사로잡힐 수 있다. 그래서 요즘은 “무엇을 버릴까.” 보다 “이것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라는 질문이 더 중요하게 느껴진다.

 

글쓰기도 욕망이다

 

매일 글을 쓰는 것도 욕망에서 시작한다. 생각을 남기고 싶다. 잊고 싶지 않다. 조금 더 잘 쓰고 싶다. 어쩌면 누군가 읽어주었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있다. 이전 글에서  나는 내 이름이 사라져도 괜찮을까를 물었다. 그러나 이름을 남기고 싶은 욕망이 있다고 해서 글쓰기가 곧 나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욕망 덕분에 나는 더 오래 생각하기도 한다. 문제는 글이 나를 더 잘 생각하게 하는가, 아니면 “계속 써야 하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나를 다그치는가에 있다. 같은 습관도 어느 순간 힘이 되었다가 또 다른 순간에는 짐이 될 수 있다.

 

욕망은 계속 변한다

 

니체를 읽으며 알게 되는 것은 욕망 역시 고정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한때 그렇게 갖고 싶었던 물건이 어느 날 별 의미가 없어지기도 한다.

한때 중요했던 승진이 그 자리에 오른 뒤에는 다른 모습으로 보인다. 젊을 때 중요했던 것이 지금은 덜 중요하고, 예전에는 관심 없던 독서와 글쓰기가 지금은 내 삶에서 큰 자리를 차지한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원하는 사람이다.” 라고 나 자신을 너무 빨리 규정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욕망도 생성한다. 나도 변하고, 욕망도 변하고, 둘의 관계도 계속 달라진다.

 

자유는 욕망이 없는 상태일까

 

이제 처음 질문으로 돌아온다. 욕망을 없애면 자유로워질까. 나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삶을 내가 정말로 원하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여전히 좋은 사진을 찍고 싶고, 좋은 책을 만나고 싶고, 글을 잘 쓰고 싶고, 일을 잘하고 싶다. 그 욕망들은 삶을 움직이는 힘이기도 하다. 다만 조금 달라지고 싶은 것은 있다. 원한다는 이유만으로 반드시 따라가지는 않는 것. 욕망을 억누르지도 않고, 욕망을 명령으로 받아들이지도 않는 것. “나는 이것을 원한다.” 라고 인정한 뒤, 한 걸음 떨어져 “그런데 이 욕망은 나를 어디로 데려갈까.” 라고 물을 수 있는 것.

 

어쩌면 자유는 욕망이 사라진 상태가 아니라 욕망과 나 사이에 작은 거리가 생긴 상태인지도 모른다. 그 거리에서 나는 선택할 수 있다. 따라갈 수도 있고, 멈출 수도 있고, 다른 방향으로 바꿀 수도 있다. 어떤 욕망은 작품이 되고, 어떤 욕망은 산책이 되고, 어떤 욕망은 사진 한 장이 되고, 어떤 욕망은 그냥 지나가게 둘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욕망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욕망이 내 삶의 어떤 힘이 될지를 내가 다시 선택하는 것.

 

니체가 말한 ‘순진무구한 관능’은 어쩌면 이런 상태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욕망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에 끌려가지 않는 것. 그리고 그 욕망을 나를 더 살아 있게 만드는 쪽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 그래서 이제 나는 욕망 앞에서 조금 다른 질문을 해보려 한다. 나는 이것을 원하는가. 그리고 그 다음, 이 욕망을 따라간 나는 지금보다 더 살아 있게 될까(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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