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만에 주말 가족과 함께 명동성당에 다녀 왔다. 아침 일찍가기로 했는데 늦잠으로 계획보다 한시간 늦게 도착 했다. 명동역에서 나와 복잡한 거리를 지나자  붉은 벽돌로 지어진 성당이 멀리 보였다.  성당 철탑을 이정표 삼아 걷다 보니 성당으로 들어서는 길이 보였다. 정문은 아니고 옆문이었다. 천막에서 무료 급식을 하는 것 같았다. 번호를 호출하면 식사를 받으로 간다. 봉사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 왔다. 아침 일찍 부터 준비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급식소를 지나 조금 경사진 길을 오르니 고딕 양식의 성당이 모습을 드러냈다. 미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미사가 끝나자 성당안에 들어 섰다.  바깥의 소음은 사라지고 스테인드글라스 창문과 불빛들이 보였다. 자리에 앉자 마음을 차분해졌다. 어렸을때 다녔던 동네 작은 교회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종교를 떠나서 성당에 머무는 동안 마음은 평온하였다.

 

 

 

 

 

 

 

일리치는 1926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나 얼룩반점 개 달마티안의 원산지인, 소박한 동유럽 발칸반도의 달마티아에서 성장했다. 이곳에서 보낸 어린 시절은 일리치의 소박한 자율의 삶과 생각의 기본이 되었다. 동유럽 출신의 비주류 사상가들이 서유럽 주류의 사상을 전복하는 이단의 혁명은 일리치의 경우에도 분명하게 나타난다.

 

아버지는 크로아티아인, 어머니는 유대인인 일리치는 유럽을 뒤덮은 반유대주의 탓에 대도시인 빈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곳에서 일리치는 프로이트의 손을 잡고 산책하면서 정신분석학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도 했지만, 다시 1942년 이탈리아 피렌체로 도피해야 했고, 10대의 나이로 레지스탕스에 참여하기도 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신부가 되기 위해 로마 바티칸의 그레고리안 대학교에서 신학과 철학, 이어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 대학교에서 역사학을 공부해 아널드 토인비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폭넓은 지식과 11개 언어에 능통해 바티칸 국제부에 들어갔으나, 가톨릭의 관료주의와 배타적인 보신주의에 질려 곧 사퇴하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1951년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중세사상을 연구하다가 뉴욕에서 푸에르토리코 이주민들을 위해 4년간 신부로 일했다. 1956년 푸에르토리코의 가톨릭대학교 부총장으로 임명돼 남미에서 활동할 사제들을 위한 집중훈련센터를 설립했으나, 기독교당 결성에 반대하고 가톨릭이 반대한 산아제한에 찬성한 탓에 부총장직을 사임해야 했다. 이후 도보로 남미를 횡단했다.

 

1961년 멕시코의 쿠에르나바카에 대안적 학문공동체인 ‘국제문화형성센터’(1967년 ‘국제문화자료센터’로 개칭)를 세우고, “학문이란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므로 함께 사례해야 한다”는 이유로 스스로 돈을 내고 가르치며 사람들과 함께 공부했다. 그리고 당시 막 시작된 미국 중심의 후진국 개발을 자립자존적 생활에 대한 전쟁으로 보고, 이를 지원한 로마가톨릭을 ‘문화제국주의’라고 비판했다. 1968년 바티칸에 의해 종교재판에 가까운 심문을 받고, 결국 1969년 ‘정치적인 부도덕’을 이유로 사제직에서 쫓겨났다.

 

당시 그는 무기를 든 카밀로 신부와 카리스마적인 해방사상가인 카마라 신부와 함께 ‘위험한’ 진보적 신부로 불렸으나, 그들과 달리 일리치는 산업사회의 산업적 생산방식 대신 기존의 사회주의와는 다른 자율적 공동사회 구축을 위한 일상생활의 저항적 삶을 제창하고 스스로 실천했다. 즉, 1971년 학교를 비판한 <학교 없는 사회>, 1973년 교통체계를 비판한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와 기술사회를 비판한 <절제의 사회>, 1976년 의료제도를 비판한 <병원이 병을 만든다>, 1977년 전문가사회를 비판한 <인간을 불구로 만드는 전문가>를 발표해 학교와 병원은 각각 교육과 건강의 장애물이며, 근대화가 빈곤을 없애기는커녕 빈곤을 근대화하고, 국가교육에 의해 국민의 언어능력은 쇠퇴한다고 주장했다. 과거의 자율적 생활 주체였던 민중이 그들의 고유한 기술을 박탈당하여 건강은 의사에게, 공부는 교사에게, 교통은 자동차에, 놀이는 텔레비전에, 생존은 임금노동에, 남녀의 고유한 성적 차이는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의해 중성화되는 과정으로 봤다. 따라서 그는 경제발전은 수요에 의한 노예화이지 희소성으로부터의 자유화가 아니라고 비판했다. 이와 같이 경제발전이 인간에게 더욱 큰 자유를 부여한다는 명제를 근본적으로 부정하여 1968년 학생운동 이후 서구의 소비풍요사회, 더 중요하게는 자본주의적 경제발전에 의해 생겨난 잘못된 수요로부터 민중의 자율적 능력을 지키고자 한 제3세계의 발전전략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1976년 센터가 폐쇄되자, 독일과 멕시코를 왕래하면서 중세사를 중심으로 한 저술 및 강의 활동을 한 그는 1970년대 저술과 같은 충격을 던지지는 못하고 오랫동안 잊혔다. 그러나 1978년 노동의 환상을 비판한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 1981년 여성 노동을 분석한 <그림자 노동>, 1982년 여성문제를 다룬 <젠더>, 1985년 물질의 역사성을 다룬 , 1988년 독서 능력을 다룬 , 1992년 상식과 진보를 비판한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 1993년 지식이 책으로 획득되는 기원을 다룬 <텍스트의 포도밭> 등은 1970년대의 계몽적 저술을 심화시킨 것으로 보아야 한다. 안타깝게도 1992년 암에 걸려서 한쪽 뺨에 자라는 커다란 혹이 주는 고통에 시달렸다. 그는 일을 못하게 한다는 이유로 진통제를 대량 투여하는 치료를 거부하고, 스스로 만든 아편 가루를 먹으면서 10년간 일하다가 2002년 독일 브레멘에서 76살에 숨졌다.

 

그의 공식 직함은 신부나 교수였지만, 교수로서는 물론이고 신부로서도 권위주의나 형식주의와는 담을 쌓은 자유인이었다. 죽기 몇년 전 브레멘시로부터 평화상을 받았을 때 그는 수상식장의 화려한 분위기에 대한 묘사로 수상 소감을 시작했다가 그가 브레멘에 갈 때마다 묵었던 친구 집의 소박하고 개방된 분위기, 누구나 초대받는 스파게티와 포도주의 파티, 밤늦게까지 이어지는 활발한 토론, 사람들이 자유롭게 오가거나 멋대로 잠을 자기도 하는 우정과 환대의 묘사로 바꾸어갔다.

일리치는 20세기를 인간을 불구로 만드는 전문가의 시대라고 했다. 그런 전문가의 머릿속에서 나온 화려한 이데올로기나 유토피아가 아니라, 우리들 일반시민 자신의 생활을 스스로 근원적으로 바꾸어보려는 작고 소박한 희망이 더 중요하다.

"전문가 시대는 인간을 불구로 만든다" (박홍규) 
 

 

1961년 뉴욕의 유대인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난 그레이버는 뉴욕주립대와 시카고대에서 공부하고 1989년부터 약 2년간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에서 연구했는데 그것이 그의 학문에 기초가 되었다. 1998년부터 학생들을 가르친 예일대는 2005년 그를 해고했다. 노조에 가입해 제명된 제자를 지지한 탓이라고 그는 말했으나, 더 큰 이유는 1999년 시애틀에서 열린 세계무역기구(WTO) 반대 시위 이후 각종 시위에 참여했던 이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저명한 인류학자들을 위시해 4500명 이상이 예일대를 비판하고 그레이버를 지지하는 탄원서에 서명했으나 소용없었다. 그 뒤 미국에서 20개 이상의 연구직에 지원했으나 모두 거부당했다. 이것이 미국 대학이다. 그나마 영국 대학은 조금 나아서 2008년부터 런던대 골드스미스 칼리지, 2013년부터 런던정경대학원에서 가르쳤다. 그러나 그는 학계를 끔찍이도 싫어했다. 예일대처럼 부끄러운 짓을 일삼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노동자 출신답게 학계의 엘리트주의와 학맥주의를 혐오한 그는 학자들의 천박한 종파주의 속물근성을 철저히 거부했다.미국 학계의 추방은 그를 제거하기는커녕 그의 가장 중요한 저서인 <부채, 그 첫 5000년>을 낳았다. 월가를 점령한 2011년에 나온 그 책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대기업은 부채를 탕감받고 공적 자금으로 구제된 반면 개인은 대출금 반환에 끝없이 시달리는 모순을 계기로 집필됐다. 경제사를 부채사로 보는 그에 의하면 역사적으로 실물 화폐보다 부채가 먼저고 인류 초기의 부채는 공동체 유대를 강화하는 힘이었다. 그래서 중동(오리엔트)에서는 주기적인 부채 탕감이 이루어졌고 중세 종교들은 이자 대출을 금지하여 채무자를 보호했다. 그러나 인간의 모든 행위가 일대일 교환으로 규정되면서 부채가 사회를 파괴할 수 있는 위협으로 등장했다.특히 현대에 와서 채무자가 아닌 채권자를 보호하기 위한 조직인 국제통화기금(IMF)이 미국 주도로 세계 경제를 파괴한다. 아프리카를 비롯해 전세계에서 차입금이 커지자 국제통화기금은 지원 조건으로 구조조정을 요구했고, 각국은 농업보조금이나 의료 등의 사회서비스 예산을 삭감해야 했다. 그래서 그레이버가 현장 연구를 한 마다가스카르에서는 사라졌던 말라리아가 다시 창궐해 1만명 이상이 죽었다. 코로나19에서도 구조조정으로 인한 공공의료의 후퇴가 문제다. 그래서 세계적으로 공공의료 확충이 요구되고 있는데 한국에서만은 거꾸로 의사들이 나서서 반대하는 반사회적 코미디가 벌어지고 있다.

 

부채의 논의는 <관료제 유토피아>에서도 반복된다. 흔히들 시장을 국가권력과 무관한 순수경제현상으로 보지만, 그레이버는 그것이 도시 약탈, 공물 탈취, 전리품 처리 등에 따른 부산물이었고 자유시장이란 19세기 이후 조작된 환상에 불과하다고 본다. 그 시장을 유지하기 위해 엄청난 규제와 규칙 그리고 관료가 필요해졌다는 것이다. 그 결과 지금 우리는 물건 하나를 사기 위해서도 이해할 수 없는 깨알 같은 글씨들이 빼곡한 약관에 동의해야만 한다. 관료제의 이러한 구조적 폭력은 우리의 상상력마저 마비시키고 그것에 저항하면 테러리스트로 간주되는데, 그레이버는 월가 점령 시위의 평화시위 군중을 폭력집단으로 묘사하며 그들을 물리치는 슈퍼 영웅을 그린 영화 <배트맨>을 좋은 예로 들었다. 공권력이라는 합법적 폭력을 행사하는 집행자가 배트맨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영화에 열광하듯이 우리는 ‘전면적 관료주의화’의 희생양인 동시에 관료주의에 매료되고 나아가 동조하는 조력자들이기도 하다.부채나 관료 등에 대한 그레이버의 비판적 관점은 2009년 우리말로 처음 번역된 <가치 이론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에서 부족사회의 삶을 시장경제와 대비시키면서 현재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물리적 시장과 그 배후 논리가 자연스럽거나 불가피하다는 주장을 전복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그에 의하면 유럽에서도 합리적 판단에 따라 만족의 극대화를 추구한다는 ‘개인’이나 그들의 이윤 추구를 매개하는 공간인 ‘시장’ 등은 근대에 갑작스럽게 등장한 개념에 불과할 뿐 아니라 임금노동에 근거한 상품시장 논리도 근대 서양의 일반적인 윤리조차 전혀 반영하지 않은 것이었다.전근대의 재화 교환은 개인적 요구의 충족이나 만족의 극대화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의 형성과 재생산을 위한 수단이었던 반면, 근대적 시장은 물신의 형태로 드러나는 가치의 상징물들을 ‘상품’과 ‘화폐’라는 고착화된 형태로 받아들인 것에 불과했다. 그 극단이 금융과 정치체제 간의 돈이라는 연결고리를 유지·확대해가는 군사 전략과 보수 언론인과 지식인, 경찰에 의해 유지되고 있는 1%를 위한 미국이다. <우리만 모르는 민주주의>에서 그레이버는 2005년 미국의 기업 이윤 중 약 38%가 금융회사에서 나왔고, 비금융회사의 금융 이윤을 더하면 절반이 넘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그들에게 세금을 감면해주고, 도산을 해도 국민의 세금으로 구제해주어 결국 금융 먹이사슬의 하층에 놓인 계급만이 채무자가 되고 있는 것이 민주주의 국가 미국의 현실이다.

 

민주주의가 서양이 아니라 인디언 사회와 같은 비서양에서 나왔다고 주장하였다. 민주주의는 서양에서 시작되었고 서양 것이 진짜니 최고니 하지만 이번 코로나 사태로 그것이 거짓임이 드러났다. 특히 미국 민주주의는 트럼프라는 괴물과 함께 반민주의 계급적인 것임이 드러났다. 미국에서는 돈이 주인이니 민주주의가 아니라 돈주주의다. 특히 의료가 돈이다. 누가 그렇게 만들었나? 의사들이다. 의사니, 변호사니, 목사니 하는 ‘사’자들이 주인인 ‘사주주의’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레이버의 저서 중에 가장 흥미로운 책인 <쓸데없는 직업>에서 그 직업을 가진 사람들조차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느끼거나 필요하지 않다고 느끼는 직업의 전형으로 전문직, 경영직, 사무직, 판매직, 서비스직을 들었다. 그리고 그들의 특성을 관료적 봉건주의라고 했다. 

 

<인류학을 바꾼 아나키스트, 데이비드 그레이버> 박홍규 

 

 

다들 젊었을때 테니스를 시작하는데 나이가 들어 시작 하였다. 해외 프로젝트 수행 중 호텔에 테니스장이 있어 우연히 접하게 되었다. 국내에 복귀하여 레슨을 시작하며 정식으로 배웠다. 하지만 실력은 잘 늘지 않았다. 해외에선 단식 경기도 많이 했는데 한국은 대부분 복식 경기이다. 복식에선 발리 기술이 필수인데 네트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쉬운 서비스와 폴트로 경기 흐름을 방해하기도 했다.  서비스 연습중 어깨에 무리가 갔는지 어깨가 아파서 1년동안 쉬었다.  다시 테니스를 시작하려는데 포핸드와 백핸드도 엉성하다. 나보다 늦게 시작한 직장 동료는 어느정도 수준에 올라 왔다. 어떻게 실력을 향상 시켰는지 물어 보았다. 하늘쌤 RTP 볼머신기를 이용하여 꾸준히  연습했다고 한다. 내게도 이 볼머신기를 추천하였다.

 

볼머신기를 이용하려면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테니스 코트가 필수이다. 집근처에 코트가 있어 볼 머신기를 구매하여 연습을 시작했다. 볼 머신기 하나로 백핸드 포핸드 연습을 혼자 할 수 있게 되었다.  볼을 던져주는 주기도 길고 속도도 빠르지 않지만 볼 머신기 없이 연습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다. 일정하게 던져주는 볼에 맞추어 스트록을 휘두르면 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1시간도 순간이었다. 비간 온 다음날은 약간 물이 스며든 공도 넣어서 연습을 하였다. 볼 던져주는 주기도 더 길어 지고 속도가 더 늦어지면 배터리를 교체해야 하는 주기가 도래 한 것이다.  대형 배터리르 6개를 교체하면 볼머신기는 이전의 힘을 찾았다. 

 

 몇주전에 볼 머신기가 고장이 났다.  모터 돌아가는 소리는 들리는데 공이 나오지 않는다.  하늘쌤 RTP 볼머신기의 고질고장인 스프링 끊어짐을 예상했다. 볼 머신기를 추천해준 동료도 볼머신기를 오래  볼 발사후 스위치를 꺼야 오래 사용할 수 있다고 하였다. 스트링 장력 최소화 상태 보관 방법이라고 연신 이야기 했다.  동료가 제안한 내용을 기억하고 항상 스위치 끌때는 볼발사 소리 후 바로 껐는데 고장이 난 것이다.  열어 보지도 않고 인터넷을 찾았다.  볼머신기 고장으로 스프링 교체한 내용이 올라와 있었다. 스프링 문제로 확정하고 스프링만 찾으면된다고 생각했다. 온라인 몰에서 스프링을 판매 했다. 바로 주문을 넣었다. 스프링이 도착하여 교체하려고 볼 머신기를 열었는데 스프링은 멀쩡 하였다. 

 

하늘쌤 볼머신기
볼머신기 구조(모터)

 

 

볼머신기 고장부분

 

모터가 돌아가면서 공을 쳐주는 플라스틱 부품을 돌려주도록 만드는 부품이 닳아서 없어 졌다. 해당 부품만 구매할 수 있는지  AS센터에 문의 해보니 답변이 없다. 볼머신기를 택배로 보내면 확인 후 수리가능하다고만 하였다. 대체 가능 부품을 찾아보다 택배로 보냈다. 이틀이 지난 수리가 완료 되었다고 문자가 왔다. 비용은 6만이라고 하였다. 부품리 비싸다고 생각하였지만 사용하지 못하는 것보다는 낳다고 생각하여 수리 하였다.

필요한 부품

 

수리 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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