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뉴욕의 유대인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난 그레이버는 뉴욕주립대와 시카고대에서 공부하고 1989년부터 약 2년간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에서 연구했는데 그것이 그의 학문에 기초가 되었다. 1998년부터 학생들을 가르친 예일대는 2005년 그를 해고했다. 노조에 가입해 제명된 제자를 지지한 탓이라고 그는 말했으나, 더 큰 이유는 1999년 시애틀에서 열린 세계무역기구(WTO) 반대 시위 이후 각종 시위에 참여했던 이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저명한 인류학자들을 위시해 4500명 이상이 예일대를 비판하고 그레이버를 지지하는 탄원서에 서명했으나 소용없었다. 그 뒤 미국에서 20개 이상의 연구직에 지원했으나 모두 거부당했다. 이것이 미국 대학이다. 그나마 영국 대학은 조금 나아서 2008년부터 런던대 골드스미스 칼리지, 2013년부터 런던정경대학원에서 가르쳤다. 그러나 그는 학계를 끔찍이도 싫어했다. 예일대처럼 부끄러운 짓을 일삼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노동자 출신답게 학계의 엘리트주의와 학맥주의를 혐오한 그는 학자들의 천박한 종파주의 속물근성을 철저히 거부했다.미국 학계의 추방은 그를 제거하기는커녕 그의 가장 중요한 저서인 <부채, 그 첫 5000년>을 낳았다. 월가를 점령한 2011년에 나온 그 책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대기업은 부채를 탕감받고 공적 자금으로 구제된 반면 개인은 대출금 반환에 끝없이 시달리는 모순을 계기로 집필됐다. 경제사를 부채사로 보는 그에 의하면 역사적으로 실물 화폐보다 부채가 먼저고 인류 초기의 부채는 공동체 유대를 강화하는 힘이었다. 그래서 중동(오리엔트)에서는 주기적인 부채 탕감이 이루어졌고 중세 종교들은 이자 대출을 금지하여 채무자를 보호했다. 그러나 인간의 모든 행위가 일대일 교환으로 규정되면서 부채가 사회를 파괴할 수 있는 위협으로 등장했다.특히 현대에 와서 채무자가 아닌 채권자를 보호하기 위한 조직인 국제통화기금(IMF)이 미국 주도로 세계 경제를 파괴한다. 아프리카를 비롯해 전세계에서 차입금이 커지자 국제통화기금은 지원 조건으로 구조조정을 요구했고, 각국은 농업보조금이나 의료 등의 사회서비스 예산을 삭감해야 했다. 그래서 그레이버가 현장 연구를 한 마다가스카르에서는 사라졌던 말라리아가 다시 창궐해 1만명 이상이 죽었다. 코로나19에서도 구조조정으로 인한 공공의료의 후퇴가 문제다. 그래서 세계적으로 공공의료 확충이 요구되고 있는데 한국에서만은 거꾸로 의사들이 나서서 반대하는 반사회적 코미디가 벌어지고 있다.
부채의 논의는 <관료제 유토피아>에서도 반복된다. 흔히들 시장을 국가권력과 무관한 순수경제현상으로 보지만, 그레이버는 그것이 도시 약탈, 공물 탈취, 전리품 처리 등에 따른 부산물이었고 자유시장이란 19세기 이후 조작된 환상에 불과하다고 본다. 그 시장을 유지하기 위해 엄청난 규제와 규칙 그리고 관료가 필요해졌다는 것이다. 그 결과 지금 우리는 물건 하나를 사기 위해서도 이해할 수 없는 깨알 같은 글씨들이 빼곡한 약관에 동의해야만 한다. 관료제의 이러한 구조적 폭력은 우리의 상상력마저 마비시키고 그것에 저항하면 테러리스트로 간주되는데, 그레이버는 월가 점령 시위의 평화시위 군중을 폭력집단으로 묘사하며 그들을 물리치는 슈퍼 영웅을 그린 영화 <배트맨>을 좋은 예로 들었다. 공권력이라는 합법적 폭력을 행사하는 집행자가 배트맨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영화에 열광하듯이 우리는 ‘전면적 관료주의화’의 희생양인 동시에 관료주의에 매료되고 나아가 동조하는 조력자들이기도 하다.부채나 관료 등에 대한 그레이버의 비판적 관점은 2009년 우리말로 처음 번역된 <가치 이론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에서 부족사회의 삶을 시장경제와 대비시키면서 현재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물리적 시장과 그 배후 논리가 자연스럽거나 불가피하다는 주장을 전복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그에 의하면 유럽에서도 합리적 판단에 따라 만족의 극대화를 추구한다는 ‘개인’이나 그들의 이윤 추구를 매개하는 공간인 ‘시장’ 등은 근대에 갑작스럽게 등장한 개념에 불과할 뿐 아니라 임금노동에 근거한 상품시장 논리도 근대 서양의 일반적인 윤리조차 전혀 반영하지 않은 것이었다.전근대의 재화 교환은 개인적 요구의 충족이나 만족의 극대화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의 형성과 재생산을 위한 수단이었던 반면, 근대적 시장은 물신의 형태로 드러나는 가치의 상징물들을 ‘상품’과 ‘화폐’라는 고착화된 형태로 받아들인 것에 불과했다. 그 극단이 금융과 정치체제 간의 돈이라는 연결고리를 유지·확대해가는 군사 전략과 보수 언론인과 지식인, 경찰에 의해 유지되고 있는 1%를 위한 미국이다. <우리만 모르는 민주주의>에서 그레이버는 2005년 미국의 기업 이윤 중 약 38%가 금융회사에서 나왔고, 비금융회사의 금융 이윤을 더하면 절반이 넘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그들에게 세금을 감면해주고, 도산을 해도 국민의 세금으로 구제해주어 결국 금융 먹이사슬의 하층에 놓인 계급만이 채무자가 되고 있는 것이 민주주의 국가 미국의 현실이다.
민주주의가 서양이 아니라 인디언 사회와 같은 비서양에서 나왔다고 주장하였다. 민주주의는 서양에서 시작되었고 서양 것이 진짜니 최고니 하지만 이번 코로나 사태로 그것이 거짓임이 드러났다. 특히 미국 민주주의는 트럼프라는 괴물과 함께 반민주의 계급적인 것임이 드러났다. 미국에서는 돈이 주인이니 민주주의가 아니라 돈주주의다. 특히 의료가 돈이다. 누가 그렇게 만들었나? 의사들이다. 의사니, 변호사니, 목사니 하는 ‘사’자들이 주인인 ‘사주주의’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레이버의 저서 중에 가장 흥미로운 책인 <쓸데없는 직업>에서 그 직업을 가진 사람들조차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느끼거나 필요하지 않다고 느끼는 직업의 전형으로 전문직, 경영직, 사무직, 판매직, 서비스직을 들었다. 그리고 그들의 특성을 관료적 봉건주의라고 했다.
<인류학을 바꾼 아나키스트, 데이비드 그레이버> 박홍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