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올로기라는 말은, ‘이데올로기에 속박된다’든가 ‘그것은 하나의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처럼 부정적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본래 이데올로기라는 말은 19세기 초에 ‘관념학’ 이란 의미로 생성된 것이다. 즉  ‘형이상학’에 대비되는 과학이론으로서의 ‘관념학’이라는 긍정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다.  최초로 이데올로기란 용어를 부정적으로 상요한 것은 나폴레옹이었다고 한다. 그는 관념적인 학자들의 현실과 동떨어진 사고상식을 이데올로기라고 비난했다. 현재와 거의 비슷한 의미로 상용했다고 할 수도 있다. 


​이데올로기를  ‘허위의식’으로서 최초로 정식화한 것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서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당시 철학자들, 예를 들어 포이에르바흐와 바우어 등의 철학을 가지각색의 이데올로기(허위의식)로 비판했다. 그러나 이데올로기를 단순한 ‘허위의식’으로만 받아들이면 ‘허위의식’에 대응하는 ‘올바른 의식’이 존재하는 것이 되며, 어느 쪽이 올바른가 하는 이른바 이데올로기 투쟁에 빠지게 된다. 냉전의 종언을 ‘이데올로기의 종언’으로 받아들인 역사관도 같은 부류에 속한다. 그러나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이데올로기를 ‘허위의식’이라고 명명하는 것은 그것이 현실생활의 여러 과정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현실적인 여러 관계(‘소통’이나 ‘생산’)에 의해 규정된다는 점을 설명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허위의식’에 대해서 ‘올바른 의식’을 대치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런 ‘허위의식(환상)’을 탄생시킨 구체적인 조건들을 탐구할 것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장치’라는 사고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으로 부터 <독일 이데올로기>를 독해하는 과정에서 종래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경제적인 과정에서만 이데올로기의 형성 원인을 구한 데 반해, 사회의 가지각색의 일상적 실천 속에서 이데올로기의 형성을 발견해 낸 것이다.  “무릎 꿇고 기도 하라, 그러면 믿을 것이다.”라는 파스칼 말 인용한다.  제도화된 물질적 장치와 거기서 행해지는 특정한 방식의 실천을 통해 존재하고 작동한다.  교회(물질적 장치)에 나가서 손을 모아 기도(실천) 해야 신(이데올로기)을 믿게 되는 것처럼 이데올로기 역시 마찬가지다.  가정, 학교, 직장, TV 같은 제도화된 물질적 장치에서 그에 합당한 실천을 함으로써 이데올로기가 형성된 것이다.  인간이 사회에서 태어나고 세계와 관계하는 이상, 이데올로기의 존재는 불가결한 것이다. 이데올로기는 개인의 의식과 관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세계와 관계함으로써 발생하는 상상적인 표상이자 그 상상적 표상을 형성하는 구조인 것이다. 그리고 그결과로서의 개인(주체)을 형성해내는 사회구조 그 자체도 이데올로기인 것이다. (p.189, 그림으로 이해하는 현대 사상)


표상은 감각적으로 외적 대상을 의식상에 나타내는 것을 말한다. 단어를 보고 의식상에 떠올리는 것이다. 감각 지각에 입각하여 머릿속에 재현시킨다. 어떤 행동이나 판단이든 특정한 표상과 함께 한다고 한다. 이를 ‘표상 체계’라고 한다. 동일한 경험이나 문화를 공유하는 사람들은 표상체계가 유사한 구조로 되어있다. 가정, 학교, 직장과 같은 제도적 장치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동일한 표상 체계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를 다르게 표현하면 ‘세상 사람들의 표상체계" 라고 한다.  "우리가 이데올로기에서 발견하는 표상, 즉 세계에 대한 상상적 표상 속에서 반영된 것은 인간들의 존재 조건 들이고 따라서 그들의 현실 세계이다". 즉 우리는  이데올로기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떠올린 표상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 한다고 주장 한다.  이데올로기 장치는 개인(주체)을 형성하는 이데올로기가 현실에서 기능하는 사회공간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단순하게 억압적인 법과 정치제도 등의 국가 장치만이 이데올로기 장치는 아니며, 시민사회를 형성하고 있는 모든 제도를 이데올기 장치로 보는 것이다. 학교, 종교단체, 매스미디어, 각종 조합 등 모든 제도가 이데올로기 장치에 다름 아니다. 우리는 이런 제도 속에서 일상적인 실천을 통해 우리의 몸에 이데올로기를 각인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데올로기를 당연시하고 이것 외에는 삶의 대안이 없는 것처럼 내면화 한다.  안토니오 그람시는 이데올로기의 역할은 상식, 즉 모든 사람이 그렇다고 알고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을 정의하고 감시하는 것이라고 한다.  상식은 일상의 모든 영역을 결정한다. 평범한 사람들은 상식의 명령대로 살아간다. 이데올로기가 그러한 역할을 할 때 이데올리기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의 내면화 과정으로 호명을 이야기 한다. 다양한 이데올로기에 호명된적이 많았기 때문이다. 호명으로 인해 한 개인의 생각이나 판단, 행동에 이데올로기라는 무의식적인 표상 체계가 작동하게 된다는 것이다. 호명은 특정한 사회적 구성이 주체를 지명하는 비강제적 과정을 가리킨다. 존재의 실제 조건에 개인이 갖는 상상적 관계다. 호명 과정에서 개인은 자신을 주체로 오인한다. 자신이 사회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자신을 구성한다는 사실을 망각한다. 이데올로기 조건에서 개인들은 사회적으로 생산된 가상 재현을 그들의 실제 자아로 오인한다(교양인을 위한 철학 사전). 

​이데올로기는 구체적인 개인들을 주체로 호명한다고 말하고자 한다. 우리는 아주 흔한 경찰의 일상적인 호명과 같은 유형 속에 그것을 표상할 수 있다. “헤이, 거기 당신!”만일 우리가 상정한 이론적 장면이 길거리에서 일어난다고 가정한다면, 호명된 개체는 뒤돌아볼 것이다. 이 단순한 180도의 물리적 선회에 의해서 그는 주체가 된다. 왜냐하면 그는 호명이 ‘바로' 그에게 행해졌으며, '호명된 자가 바로(다른 사람이 아니라) 그’ 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우리가 매일 경험하는 일과 삶, 학교와 직장, 사회와 역사에 대하여 그 근원을 캐묻고 본질을 파악하기 시작하면  우리에게 강요하는 이데올로기(허위의식)에 대한 각성이 가능하다. 당연하게 받아 들이는 상식을 의심해야 한다. 그 것은 단지 허위의식에 눈을 뜨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제도 분석을 통한  이데올로기의 형성과정을 분석하고, 실천(행위)의 수준에서 사회적 관계들을 변화 시켜야 한다.  나를 다르게 불러줄 사람을  찾고 그들과 연대하여 호명관계를 바꾸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허상을 벗겨내고 자유롭고 당당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한다. 이데올로기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라기 보다,  세계와 관계함으로써 발생하는 상상적 표상이 변화하는 것이다.

 

 

 <그림으로 이해하는 현대 사상>(빌리스 듀스 지음, 남도현 옮김, 계마고원, 2003년) 

 <교양인을 위한 인문학 사전>(이안 뷰캐넌, 윤민정/이선주 옮김, 자음과 모음, 2017년 )

 <개념어 사전>(남경태, 들녘,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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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응은 ‘느끼고 응한다’ 뜻이다. 특정한 관념이나 기분의 상태, 결정된 느낌 따위가 아니라 말 그대로 이질적인 것과의 마주침을 ‘느낄 수 있고’, 그 만남에 ‘호응할 수 있는’힘 자체이다. 이 같은 감응의 힘 곧 능력에 따라 우리는 우리 아닌 것과 관계 맺게 되고, 또 다른 우리로, 혹은 어떤 다른 무엇으로도 변화될 가능성을 얻는다. 요컨대 감응은 우리의 존재론적 기초라 할 만하다. 살아가면서 환경과 사건을 마주하고 이에 대한 감응으로 현재의 내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감응이라는 개념 자체는 이미 오래전부터 제안되었고, 세공되어 왔다. 스피노자는 <윤리학>에서 감응을 논리적 인식 이상의 힘으로 간주 했고,이로써 인간과 자연, 세계의 변화를 지각하는 능력으로 정의한 바 있다. 근대적 주체를 명료하고 뚜렷한 의식의 담지자로 한정했던 데카르트와 달리, 스피노자는 감응이 신체와 정신을 일관되게 관통하고 상호작용하도록 만드는 실제적 힘으로 규정지었다. 이성이 감성을 지배하고 정신이 신체를 통제한다는 코기토의 전제주의에 맞서 스피노자는 신체와 감성의 종속성을 부정했고, 나아가 후자들이 인간 주체와 자연 및 세계의 상호관계와 역동의 줌심에 있음을 주장했던 것이다. 신체와 감성적인 것이 정신과 이성적인 것을 견인하거나 인도한다고 말했을때, 스피노자가 염두에 두었던 것은 바로 신체와 감성이 내포한 능력이었기 때문이다.

스피노자 이후 감응의 개념은 정신분석을 통해 이론적으로 더욱 진전되었다. 성적 에너지로 정의되는 리비도는 동시에 무의식적 감정의 에너지고, 전이를 통해 개인 사이에서 교환되고 순환하는 힘으로 정의되었다. 이러한 정신분석의 성과를 비판적으로 이어받은 들뢰즈는 무의식적 욕망을 통해 감응의 동력학적 사유를 심화시켰다. 프로이트가 무의식을 억압된 것으로 규정한데 반해 들뢰즈는 본연의 무의식이 있음을 지적했으며, 이는 차이화하는 힘으로서 비인간적인 욕망의 존재를 가리킨다. 달리 말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 개인의 숨겨진 과거를 해명하기 위해 그의 정신적 비밀을 캐묻고 그 답안을 끌어내기 위해 리비도라는 감응적 에너지를 문제화 했다면, 들뢰즈는 개인과 개인의 연결을 넘어서 인간과 사회, 자연과 세계 전체를 관련짓고 운동하게 만드는 우주론적 힘의 문제로서 감응을 조망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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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살아가면서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과 사물들을 만나고 부딪친다. 어떤 경우에도 피할 수 없는 이 부딪침이나 만남이 나에게 변화를 만들어 낸다. 이러한 외부의 자극을 감지하여 발생하는 정성적 반응을 감응이라고 한다. 스피노자는 이러한 감응을 크게 ‘기쁨’과 ‘슬픔’으로 구분 한다. 스피노자는 <에티카> 에서 욕망, 기쁨, 슬픔에서 시작하여 비루함, 경탄, 경멸, 사랑, 믿음, 싫음 등 40가지 감정을 정의 하고 있다. 정서적 반응은 이렇게 다양하지만, 이 많은 정서적 반응을 ‘기쁨’과 ‘슬픔’ 두가지로 분류 할 수 있다. 이 두개념은 다른 정서적 반응과 구별되는 정서들의 계통을 표시한다. 하지만 기쁨과 슬픔이라는 다른 정서들과 함께 표시되면 그 많은 정서 중의 하나가 되어 혼동을 피하기 어렵다. 철학자 이진경은 이를 피하려면 수많은 정서들 중 일부인 ‘기쁨’, ‘슬픔’과 구별하여, 그 정서 들을 능력의 증감에 따른 반응을 표시하는 ‘고양감’과 ‘저하감’ 혹은 훨씬 단순화된 ‘쾌감’, ‘불쾌감’으로 표현 한다.  신체의 능력이 증가할 때 흔히 말하는 기쁨이 발생되고, 감소할때 불쾌감이 발생된다. 이 쾌감과 불쾌감에는 그에 상응하는 어떤 정서적 반응이 동반된다. 즉 쾌감에는 기쁨에 속하는 정서적 반응이, 불쾌감에는 슬픔에 속하는 정서적 반응이 동반된다. 외부의 자극을 감지하여 발생하는 이 정서적 반응은 주어진 자극에 적절하게 대응하는 어떤 작용 내지 행동으로 이어진다. 혹은 좋음/싫음이라는 판단을 동반하는 기억을 통해 이후 유사한 종류의 자극을 다시 얻고자 하거나 미리 피하려 하는 태도로 이어진다. 이처럼 감지된 촉발에 응하여 발생하는 정서적 반응들의 집합이 감응이다.(감응의 유물론과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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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응'이란 말은 'affectus'라는 라틴어의 번역어 이다.  스피노자의 <에티카>에서 사용했던 개념이다. 국역본에서는 '정서'라고 번역되어 있고, 일본에서는 그런 감정이나 정서가 어떤 동적인 힘을 갖는다는 의미에서 '정동'이라고 번역하는데, 정서라는 말에 만족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이런 일본어 번역어를 그대로 채택하기도 한다. 

 

스피노자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양태'라고 하고 이 양태들이 서로에 대해 맺는 관계를 '변용/촉발'이라고 한다. 각각의 양태는 서로에게 변용을 가하는 촉발로 존재하며, 그로 인해 다른 양태들에게 변용을 야기한다. 어떤 양태가 다른 양태와 만나는경우 능력이 감소할 수도 있고 증가할 수도 있는데, 전자의 경우에 느끼는 감응/감정이 '슬픔'이고, 후자의 경웨 느끼는 감응/감정이 '기쁨'이다(물론 다른 감정/감응들도 있지만 그본적으로 이 두감정/감응과 결부되어 있다). 이처럼 어떤 양태가 다른 양태의 촉발/변용에 응하여 갖게 되는 감정/정서라는 점에서 이를 '감응'이라고 할 수있다. 역으로 다른 양태에 특정한 느낌을 야기하는 것 또한 감응 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감응이 어떤 강한 힘을 가질때  그것을 우리는 '감동'이라고 부르며, 그정도는 아니어도 무언가 움직이게 하는 힘을 행사했을때 '감흥'이라고 할수 있다. 이들 모두 내적 강밀도에 따른 감응의 양상을 표현하는 개념으로 사용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는 '감응'이란 말에 어떤 움직임이나 움직임을 야기하는 힘이 포함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정동'이라는 말에 끌리게 되는 요인을 이 번역어가 포함하고 있음을 뜻한다. 

 

'감정'과 '감응'을 구별할 수 있는데 감정이 인간처럼 어떤 유기체 전체가 느끼는 것이라면 ("나는 기쁘다", "그는 화가 났다") 그래서 인간과 같은 유기체에 고유한 것이라면, 감응은 모든 양태에 적용되는 것이고 유기체를 전제하지 않는다. 가령 어떤 칼이 섬뜩하고 무서운 느낌을 줄때, 그것은 그 칼에 대한 '나'의 감정이라기 보다는 바로 그 칼에 속하는 감응이라고 할 수 있다. 짐수레를 끄는 말은 말보다는 차라리 '소'와 같은 느낌을 준다. 그것 역시 '나'만의 주관적 감정이 아니라 '말'에 속하는 감응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무협영화에서처럼 손으로 무언가를 때리고 부스는 겨우에 우리는 그 손에 대해 "몽둥이 같다"거나 "칼 같다"는 감응을 갖게 된다. 이 역시 그 손에 귀속되는 감응이다. 스피노자가 호랑이를 고양이와 같은 과로 묶을 것이 아니라 애완 동물과는 전혀 다른 '맹수'라는 개념으로 분리할 것을 주장할때, 그는 바로 이런 감응에 따른 분류법을 제창하고 있는 것이다. (노마디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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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의 정의에 따르면 “실체란 그 자체 이외에 다른 어느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독자적인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을 가리킨다.“ 즉 실체는 다른 존재를 끌어 들여 이해할 필요 없이 그 자체로 이해가 가능하다. 그래서 그는 신, 정신, 물체의 세 가지를 실체로 보았다. 정신은 사유의 속성을 가진 실체이고, 신체와 물체는 연장의 속성을 가진 보았다. 그런데 그는 신=창조자의 관념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정신, 신체, 물체의 실체적 속성을 부인하는 모순을 빚었다. 피조물인 정신, 신체, 물체는 서로 연관될 수밖에 없으므로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게다가 인식의 주체인 정신과 인식의 대상인 물체를 동등한 실체로 파악한 탓에 데카르트는 양자의 올바른 관계를 설명하지 못하고 결국 이원론의 수렁에 빠져들고 말았다.

스피노자는 데카르트가 정의한 실체의 개념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데카르트는 실체가 아닌 것을 실체로 규정했기 때문에 딜레마에 빠졌고 그 ‘실체’들의 관계를 설정하는 데 실패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스피노자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실체와 양태의 개념을 구분한다. 그에 따르면 데카르트가 실체라고 간주한 정신, 신체, 물체는 실상 실체가 아니라 모두 양태에 불과하다. 양태란 실체의 변용이다. 우리는 실체 자체를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실체의 속성을 인식한다. 다시 말해 속성이란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실체의 측면이며, 양태와 마찬가지로 속성도 하나의 실체에서 여럿이 나올 수 있다. 이렇듯 양태와 속성은 다수로 존재하지만 스피노자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실체는 오직 하나뿐이라고 말한다. 만약 같은 속성을 가진 두 개 이상의 실체가 존재한다면 그것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 제약을 가할 것이기 때문에 실체라는 개념에 위배된다. 스피노자는 유일하게 존재하는 실체가 바로 신이라고 말한다. 세계속에서 유일하게 무한하고 자족적인 방식으로 존재한다. 개별자는 실체가 아니라 양태일 뿐이다. 세계속에 많은 등가적 실체들이 빼곡히 존재한다면 운동과 변화가 불가능해진다. 고대 그리스의 파르메니데스가 겪었던 자가당착-운동은 불가능하다-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실체를 최소화시키고 실체 대신 양태의 개념을 도입해 운동과 변화를 설명하려는 것이다. 실체적 사고를 버리고 관계적 사고로 이행하려는 시도다. “세상 만물의 근본적인 요소는 무엇인가?” “삶의 궁극적 목적은 무엇인가?” “ 세상 만물의 보편자는 실재하는가” 모두 실체 혹은 실체적 진리를 찾고자 하는 시도 였다.

실체의 측면에서 자연은 처음도 끝도 없이 그저 무한하게 존재할 따름이지만 양태의 측면에서는 전혀 다른 약동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자연에는 온갖 변화와 운동이 가득하다. “무한한 종류의 사물들이 무한한 모습을 띠고 생겨난다” 실체로서 자연은 필연성 이외에 우연성을 전혀 허용하지 않지만, 양태로서 자연은 숱한 사물들이 다양한 규칙과 법칙을 따라 인과적인 연속성과 우연적 상호 의존성을 무수하게 맺어가는 관계를 보여 준다. 이런 자연의 이중적인 존재 방식을 스피노자는 ‘생산하는 자연’과 ‘생산된 자연’ 즉 능산적 자연과 소산적 자연으로 구분했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전자가 후자를 규정하고 대상화하는 관계라고 본 데카르트와 달리 스피노자의 자연은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포함한다. 스피노자에게서 신은 곧 자연이므로 인간은 신의 일부이기도 하다. 모든 유한자는 유일한 무한자인 신=자연 안에 잠재하는 가능성이 발현된 결과로 생겨난 존재들이다. 하나의 실체는 여러가지 양태를 가질 수 있다. 따라서 사유와 연장은 같은 실체를 말하는 두 가지 양태일 뿐이다. 사유는 정신적인 속성이고 연장은 물체적인 속성이다. 이 속성이 같은 실체에 내재한다고 보는 것은 곧 외부의 사물과 내부의 관념 간에 차이를 두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우리는 실체를 사유의 관점에서 인식할 수도 있고 연장의 관점에서 인식할 수도 있다.

(혼자 공부하는 이들을 위한 최소한의 지식: 철학, 남경태 저)

 

 

심신병행론(처음 시작하는 철학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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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체는 그리스어로 ‘우시아’이다. 직역하면 ‘존재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내린 실체의 정의는 이렇다. 서술어로 쓰이지 않고 주어로만 쓰여서 다른 것이 그것에 관해 서술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사람은 이성적 동물이다. 동물은 생장하며 이동가능한 실체다. 여기서 ‘사람’이나 ‘동물’은 주어로도 술어로도 쓰인다. 주어로만 쓰이는 단어가 실체라고 한다. 다른 술어를 가져와서 소크라테스에 대해 설명할 수는 있지만 소크라테르가 술어가 되는 법은 없다. 주어로만 쓰이려면 범위가 가장 작아야 한다. 이런 건 개별적인 사람이나 개별적인 사룸이라야 한다. 소크크라테스가 말하는 실체는 눈에 보이는 하나하나의 사물들, 즉 개별자이다. 더 부연 설명하면 실체는 이것 저것 이렇게 지시가 가능해야 한다. 그러려면 눈에 보이고 시공간 상에 존재재야 한다. 두번째로 실체 끼리는 분리 가능하고 독립적으로 존재 한다.

꽃은 실체이다. 그런데 이 꽃이 갖는 여러 특성이 있다. 분홍색이고 향기롭고 송기가 크다. 이런 특징들이 있다. 이런한 특징들도 존재하지만 실체가 존재하는 방식과는 조금 다르다. 실체는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존재하지만 이런 특징들은 실체에 의존해서만 존재 한다. 실체에 속하는 특성으로만 존재한다. 이런 의미에서 이 특징들을 ‘속성’이라고 부른다. 속성이 실체에 의존해서만 존재한다는 건 아리스토텔레스 특유의 생각이다. 플라톤이라면 분홍색의 꽃은 분홍의 이데아에 참여함으로써 존재한다고 할 것이다. 분홍색을 떠받쳐주는 게 꽃이 아니라 이데아라고 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본질적 속성과 우연적 속성을 구분한다. 본질적 속성은 공통으로 가지는 속성 즉 사람이라면 사람이기 위해서 반드시 가져야 하는 속성이다. 이와는 달리 우연적 속성은 말 그대로 우연히 가지게 된 특징을 말한다. 피부색이 흰지 검은지, 키가 큰지 작은지 등이다. 본질과는 상관없는 속성이다.

실체에 대한 설명하는 주요 이론은 질료-형상설, 4원인설, 가능태-현실태 등이 있다. 질료-형상설은 모든 실체는 질료와 형상이 결합된 복합체라고 본다. 어떤 재료에 특정한 모양을 부여해서 사물이 생겨났다고 본다. 이를 질료-형상설이라고 한다. 형상은 플라톤에서 이데아랑 같은 말이었는데 아리스토텔레스에서는 사물의 기능적 형태로 본다. 반면에 이데아는 공통되는 보편적인 특성이므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은 이데아와는 다르다. 질료-형상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사물을 어떤 수준에서 보느냐에 따라 질료와 형상이 달라진다. 가령 신체의 기관을 실체로 보면 그 질료는 물, 불, 흙, 공기같은 4원소이고 형상은 그것들이 결합하는 방식이다. 몸전체로 보면 질료는 기관들이고 형상은 기관들이 유기적으로 결합하는 방식이다. 거기서 좀더 나아가 사람 자체를 실체로 보면 그 질료는 몸이고 형상은 영혼, 즉 몸을 움직이게 하는 원리인 영혼이다.

다음은 4원인설이다. 모든 변화에는 원인이 있다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한 원인은 개념이 조금 다르다. 그는 왜 라는 물음에 대해 대답으로 제시할 수 있는 걸 원이라고 본다. 왜 걷는지를 다양한 관점에서 따져 볼 수 있는데 그걸 설명하는 답변들이 모두 원인이라고 본다. 이러한 원인으로 여러가지가 있지만 4가지 유형으로 분류한다. 질료인, 형상인, 작용인, 목적인이다. 질표인은 사물을 구성하는 질료의 특징으로 인한 원인이다. 형상인은 사물의 형태적 특성으로 인한 원인이다. 작용인은 외부에서 그 사물에 끼친 여향이다. 목적인 말그대로 지향하는 목적을 말한다. 소크라테스는 체력단련을 한다. 왜냐하면 그는 건강을 유지하려 하기 때문이다. 목적인의 예이다.

세번째 실체를 설명하는 개념은 가능태와 현실태이다. 실체들은 끊임 없이 변화한다. 생성하고 소멸하고 운동을 한다. 변화를 설명하려면 ‘있다’와’있지 않다’ 사이의 이분법적인 대립을 넘어서야 했다. 이를 위해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내 놓은 해결책은 바로 가능태와 현실태라는 개념이다.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능력과 그것을 현실화하는 작용이 결합하여 변화가 일어난다고 본다. 가능태란 변화의 능력이 있는 상태, 다시 말해 아직 X가 아니지만, X가 될 수 있는 능력이 내재한 상태이다. 현실태는 그런 능력이 발휘되어 이제 현실화된 상태이다.

여기서 질문하나 해본다. 변화는 왜 일어나는 걸까 ? 가능태가 변화의 능력이긴 한데, 능력이 있다고 무조건 발휘되는 건 아니다. 그렇다면 변화를 촉발하는 것, 변화의 능력을 실현하도록 이끄는 것, 그건 뭘까 ?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게 현실태라고 답했다. 가능태인 씨앗이 꽃이 되고 싶어서 스스로 변화를 일으킨다는 거다. 4원인설의 목적인에 해당한다. 건강을 이루기 위해 식사조절도 하고 적절한 운동도 한다. 건강자체가 우리에게 그렇게 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목적이 되는 것이다. 변화를 촉발하는 건 목적에 대한 욕구라고 한다. 씨앗도 꽃이 되고자 하는 욕구 때문에 싹을 틔우고 변화하기 시작한다는 거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세계의 모든 것이 목적을 향해 움직인다고 생각 했다. 목적을 향한 이 변화가 단 한번으로 끝나는 것도 아니다. 씨앗이 나무가 되고 나무가 집이 된다. 씨앗의 목적은 나무이고 나무의 목적은 집이고 집의 목적은 사람사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목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바로 이러한 목적이 사물에 존재 의미를 부여한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삶의 의미를 자주 묻곤 하는데 이는 이런 목적론적 세계관을 받아 들이기 때문이다 .

아리스토텔레스는 세상이 있는 모든 운동이 지향하는 단 하나의 궁극적인 목적이 있다고 본다. 그게 바로 “신”이다. 신은 세상 모든 변화의 궁극 목적이면서 동시에 최초의 원인인 것이다. 신은 최초의 원인이라서 자신을 변화하게끔 하는 다른 원인이 없다. 신 자신은 움직이지 않으면서 다른 것을 움직이게 한다. 이런 의미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신을 ‘부동의 원동자’라고 한다. 세상의 모든 변화와 운동이 이 부동의 우너동자에서 비롯한다고 보았다. 신은 순수한 현실태로만 존재한다고 덧붙였다. 변하지 않으니 가능태를 함축하지 않으며 신은 질료가 없고 물질적인 존재가 아니다. 신이 순수현실태라는 말은 신이 어떤 종류의 활동을 한다는 말이다. 그리스인들이 신의 본성에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한 활동은 ‘사유’이다. 사유는 비신체적이고 가장 지성적인 활동이기 때문이다. (철학사 수업, 김주연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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