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응은 ‘느끼고 응한다’ 뜻이다. 특정한 관념이나 기분의 상태, 결정된 느낌 따위가 아니라 말 그대로 이질적인 것과의 마주침을 ‘느낄 수 있고’, 그 만남에 ‘호응할 수 있는’힘 자체이다. 이 같은 감응의 힘 곧 능력에 따라 우리는 우리 아닌 것과 관계 맺게 되고, 또 다른 우리로, 혹은 어떤 다른 무엇으로도 변화될 가능성을 얻는다. 요컨대 감응은 우리의 존재론적 기초라 할 만하다. 살아가면서 환경과 사건을 마주하고 이에 대한 감응으로 현재의 내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감응이라는 개념 자체는 이미 오래전부터 제안되었고, 세공되어 왔다. 스피노자는 <윤리학>에서 감응을 논리적 인식 이상의 힘으로 간주 했고,이로써 인간과 자연, 세계의 변화를 지각하는 능력으로 정의한 바 있다. 근대적 주체를 명료하고 뚜렷한 의식의 담지자로 한정했던 데카르트와 달리, 스피노자는 감응이 신체와 정신을 일관되게 관통하고 상호작용하도록 만드는 실제적 힘으로 규정지었다. 이성이 감성을 지배하고 정신이 신체를 통제한다는 코기토의 전제주의에 맞서 스피노자는 신체와 감성의 종속성을 부정했고, 나아가 후자들이 인간 주체와 자연 및 세계의 상호관계와 역동의 줌심에 있음을 주장했던 것이다. 신체와 감성적인 것이 정신과 이성적인 것을 견인하거나 인도한다고 말했을때, 스피노자가 염두에 두었던 것은 바로 신체와 감성이 내포한 능력이었기 때문이다.

스피노자 이후 감응의 개념은 정신분석을 통해 이론적으로 더욱 진전되었다. 성적 에너지로 정의되는 리비도는 동시에 무의식적 감정의 에너지고, 전이를 통해 개인 사이에서 교환되고 순환하는 힘으로 정의되었다. 이러한 정신분석의 성과를 비판적으로 이어받은 들뢰즈는 무의식적 욕망을 통해 감응의 동력학적 사유를 심화시켰다. 프로이트가 무의식을 억압된 것으로 규정한데 반해 들뢰즈는 본연의 무의식이 있음을 지적했으며, 이는 차이화하는 힘으로서 비인간적인 욕망의 존재를 가리킨다. 달리 말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 개인의 숨겨진 과거를 해명하기 위해 그의 정신적 비밀을 캐묻고 그 답안을 끌어내기 위해 리비도라는 감응적 에너지를 문제화 했다면, 들뢰즈는 개인과 개인의 연결을 넘어서 인간과 사회, 자연과 세계 전체를 관련짓고 운동하게 만드는 우주론적 힘의 문제로서 감응을 조망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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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살아가면서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과 사물들을 만나고 부딪친다. 어떤 경우에도 피할 수 없는 이 부딪침이나 만남이 나에게 변화를 만들어 낸다. 이러한 외부의 자극을 감지하여 발생하는 정성적 반응을 감응이라고 한다. 스피노자는 이러한 감응을 크게 ‘기쁨’과 ‘슬픔’으로 구분 한다. 스피노자는 <에티카> 에서 욕망, 기쁨, 슬픔에서 시작하여 비루함, 경탄, 경멸, 사랑, 믿음, 싫음 등 40가지 감정을 정의 하고 있다. 정서적 반응은 이렇게 다양하지만, 이 많은 정서적 반응을 ‘기쁨’과 ‘슬픔’ 두가지로 분류 할 수 있다. 이 두개념은 다른 정서적 반응과 구별되는 정서들의 계통을 표시한다. 하지만 기쁨과 슬픔이라는 다른 정서들과 함께 표시되면 그 많은 정서 중의 하나가 되어 혼동을 피하기 어렵다. 철학자 이진경은 이를 피하려면 수많은 정서들 중 일부인 ‘기쁨’, ‘슬픔’과 구별하여, 그 정서 들을 능력의 증감에 따른 반응을 표시하는 ‘고양감’과 ‘저하감’ 혹은 훨씬 단순화된 ‘쾌감’, ‘불쾌감’으로 표현 한다.  신체의 능력이 증가할 때 흔히 말하는 기쁨이 발생되고, 감소할때 불쾌감이 발생된다. 이 쾌감과 불쾌감에는 그에 상응하는 어떤 정서적 반응이 동반된다. 즉 쾌감에는 기쁨에 속하는 정서적 반응이, 불쾌감에는 슬픔에 속하는 정서적 반응이 동반된다. 외부의 자극을 감지하여 발생하는 이 정서적 반응은 주어진 자극에 적절하게 대응하는 어떤 작용 내지 행동으로 이어진다. 혹은 좋음/싫음이라는 판단을 동반하는 기억을 통해 이후 유사한 종류의 자극을 다시 얻고자 하거나 미리 피하려 하는 태도로 이어진다. 이처럼 감지된 촉발에 응하여 발생하는 정서적 반응들의 집합이 감응이다.(감응의 유물론과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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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응'이란 말은 'affectus'라는 라틴어의 번역어 이다.  스피노자의 <에티카>에서 사용했던 개념이다. 국역본에서는 '정서'라고 번역되어 있고, 일본에서는 그런 감정이나 정서가 어떤 동적인 힘을 갖는다는 의미에서 '정동'이라고 번역하는데, 정서라는 말에 만족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이런 일본어 번역어를 그대로 채택하기도 한다. 

 

스피노자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양태'라고 하고 이 양태들이 서로에 대해 맺는 관계를 '변용/촉발'이라고 한다. 각각의 양태는 서로에게 변용을 가하는 촉발로 존재하며, 그로 인해 다른 양태들에게 변용을 야기한다. 어떤 양태가 다른 양태와 만나는경우 능력이 감소할 수도 있고 증가할 수도 있는데, 전자의 경우에 느끼는 감응/감정이 '슬픔'이고, 후자의 경웨 느끼는 감응/감정이 '기쁨'이다(물론 다른 감정/감응들도 있지만 그본적으로 이 두감정/감응과 결부되어 있다). 이처럼 어떤 양태가 다른 양태의 촉발/변용에 응하여 갖게 되는 감정/정서라는 점에서 이를 '감응'이라고 할 수있다. 역으로 다른 양태에 특정한 느낌을 야기하는 것 또한 감응 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감응이 어떤 강한 힘을 가질때  그것을 우리는 '감동'이라고 부르며, 그정도는 아니어도 무언가 움직이게 하는 힘을 행사했을때 '감흥'이라고 할수 있다. 이들 모두 내적 강밀도에 따른 감응의 양상을 표현하는 개념으로 사용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는 '감응'이란 말에 어떤 움직임이나 움직임을 야기하는 힘이 포함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정동'이라는 말에 끌리게 되는 요인을 이 번역어가 포함하고 있음을 뜻한다. 

 

'감정'과 '감응'을 구별할 수 있는데 감정이 인간처럼 어떤 유기체 전체가 느끼는 것이라면 ("나는 기쁘다", "그는 화가 났다") 그래서 인간과 같은 유기체에 고유한 것이라면, 감응은 모든 양태에 적용되는 것이고 유기체를 전제하지 않는다. 가령 어떤 칼이 섬뜩하고 무서운 느낌을 줄때, 그것은 그 칼에 대한 '나'의 감정이라기 보다는 바로 그 칼에 속하는 감응이라고 할 수 있다. 짐수레를 끄는 말은 말보다는 차라리 '소'와 같은 느낌을 준다. 그것 역시 '나'만의 주관적 감정이 아니라 '말'에 속하는 감응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무협영화에서처럼 손으로 무언가를 때리고 부스는 겨우에 우리는 그 손에 대해 "몽둥이 같다"거나 "칼 같다"는 감응을 갖게 된다. 이 역시 그 손에 귀속되는 감응이다. 스피노자가 호랑이를 고양이와 같은 과로 묶을 것이 아니라 애완 동물과는 전혀 다른 '맹수'라는 개념으로 분리할 것을 주장할때, 그는 바로 이런 감응에 따른 분류법을 제창하고 있는 것이다. (노마디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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