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의 환경으로 내재성

내재성은 쁠랑은 사유의 이미지라고 말한다. 개념들이 창조 되며 펼쳐지는 환경이다. 사유의 환경이란 사유를 가능케 하는 것이며, 그 스스로는 사유의 대상이 되지는 않는 것이다. 이러한 사유의 환경을 초월의 환경과 내재성의 환경으로 나눌 수 있다. 철학자에게 조차 의식되지 못하는 전제의 환경과 전제 없음의 환경이다. 저자는 프랑스와 줄리앙의 텍스트를 참조하여 두 환경의 차이를 그리스 철학과 중국 철학의 성향 비교를 통해 설명 한다.

두 철학은 공통적으로 생성, 운동, 변화를 희박함/빽빽함, 작음/큼 이라는 대립자들로부터 사유한다. 차이점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두 대립자 사이에 세번째 항으로 ‘토대-주체' 을 덧붙인다. 이 토대-주체는 '실체'로서 두 대립자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어린 아이가 큰 어른이 되는 것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으로 설명하면 아이는 작음에서 큼으로의 변화가 아니라 작음의 이데아가 담겼다가 큼의 이데아가 담기게 되는 것이다. 작음과 큼의 속성 자체는 변화하지 않는다. 여기에 다른 것을 운동하게 하는힘을 가진 존재로 원동자를 더한다. 어떤 속성을 담은 토대가 다른 속성을 담게 되기까지의 운동을 설명하기 위하여 변화의 원인의 역할을 하는 외부의 요인을 개입 시켜야 한다. 이렇게 하여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인설이 완성 된다. 즉 질료, 형상, 원동자 그리고 목적인 이다. 모든 변화에 질료의 역할을 하는 주체의 개념과 변화를 일어나게 하는 행위자의 개념이 함축되어 있다. 반면 동양 철학은 음과 양의 변화에 의해 설명 되기에 주체를 설정할 필요가 없다. 음이 극해서 양이 되고, 양이 극해서 음이 된다. 작음이 큼이 되고, 희박함이 빽빽함이 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유에서는 작음과 큼이라는 속성을 담을 그릇이 필요 없다. 주체라는 개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리스 철학은 모든 것이 정지해 있다고 생각하고 출발한 것이다. 하지만 그 출발 자체가 정당한 것인지는 사유되지 않고 그저 암묵적 합의가 있었을 뿐이다. 그들은 그러한 것을 그냥 전제하고 사유를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 철학의 '사유의 환경'이다. 개념들이 전제한 사유의 이미지로서 사유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 철학이 존재에 대한 사유, 초월자의 철학, 암묵적, 임의적 전제의 철학이라고 한다면, 중국 철학은 생성과 변화에 대한 사유이며 전제없는 사유의 이미지이다. 내재성의 철학이다.

칸트도 형이상학의 독단에 빠지지 않기 위하여 모든것을 '내재적'으로 사유하고자 하다. 하지만 그의 내재성은 일치, 조화, 통일, 선 등을 전제하는 '선험적 주체'에 구겨 넣어진 내재성이라고 한다. 그는 형이상학의 독단으로 부터 철학을 깨워 이성을 재판정에 세우려 하였다. 경험을 넘어서는 모든것을 배제하고, 모든가능한 경험을 조건 짓는 '내적인 원리'를 찾았다. 데카르트가 주관적이고 암묵적인 최초의 확실성을 코기토에서 찾았다면 칸트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능력들의 일치가 그의 사유의 최초의 확실성이 된다. 경험을 가지고 인간의 이성을 철저하게 비판하려 한다. 이는 경험적인 것의 다양을 통일체로 '종합'하는 인간의 능력 을 필요로 한다. 이 능력은 내부에 경험과 독립적으로 존재해야 한다. 그 근거는 반드시 인간의 능력들의 자발적 일치에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능력의자발적 일치'에 대해 칸트는 탐구 하기를 회피한다.

들뢰즈의 마지막 논문 『내재성: une vie』(a life, 비유기적 생명)에서 내재성은 곧 생명이라고 한다. 생명은 내재성이라는 사유의 환경이다. 여기에서 '생명'은 유기체적 생명이 아니다. 물, 공기, 흙 같은, 무기물이 없는 생명은 상상할 수 없다. 생명과 비생명을 가르는 경계를 부정한다. 결과적으로 이런 무기적 생명에는 어떤 방향성도 목적도 의미도 있을 수 없다. 자연, 진화에는 어떤 합목적성도 없다. 생명과 내재성의 환경이다. 내재성의 환경은 아무 전제도 없는 사유의 환경이다. 그런데 이런 전제없는 사유의 환경에서 사유를 한다는 것은 지난한 일이다. 사유 이전에 아무것도 주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이에 대해 비자발적, 반로고스적, 비변증법적 사유의 방법을 제시 한다. 그것은 내가 사유하고 싶은 것을 사유하기 위하여 능력들을 자발적으로 동원시키고 일치하는 것이 아니다. 감각의 강요에 의해 사유를 시작하고, 능력들을 비자발적으로 동원하는, 수용적 사유가 된다. 우리는 오로지 우연적 만남으로부터 유발되는 고통과 즐거움으로부터 질문을 던질수 밖에 없다.

개념의 생산원리로 내재성

다음으로 사유의 환경에서 개념과 현실적인 것의 생산 원리로서의 내재성을 다룬다. 평등하고 다양한 것들의 생산 원리이다. 내재성을 접근하기 위한 다른 길로 제시된다. 먼저 철학사에서 생산원리로서 내재성을 어떻게 다루는지 살펴본다 모리스 블롱뎅은 초월적인 신이 우리의 삶에 내재한다는 것을 근거로 신을 변호하고 재인 한다. 칸트는 이성과 원리들의 '내재적 사용'과 '초월적 사용'을 구분한다. 가능한 경험의 틀안에 머물러 있는 선험적 지식으로서의 '내재적 형이상학'과 가능한 모든 경험의 한계를 뛰어 넘는 '초월적 형이상학'을 구분한다. 하지만 들뢰즈는 칸트의 선험은 경험의 진정한 가능 조건이라기 보다는 '경험적인 것의 복사'일 뿐이라고 말한다.

플라톤이래 세계는 경험적인 것의 세계와 가지적인 것의 세계로 나뉜다. 경험적인 것의 세계는 가지적인 것의 세계의 모방이며 분유라고 한다. 신플라톤주의자들은 분유의 원인을 분유하는 자들 즉 경험적인 것들에서 찾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분유의 원인을 분유된 것 다시말해 가지적인 것에서 찾아야 한다. 하지만 분유를 가능하게 하는 원리가 분유된 것 일 수 없고 그 너머에 존재하는 원리로 설명할 수 있다. 이를 모든 것이 흘러나오는 유출적 원인이라고 한다.

스피노자는 실체로서의 신은 초월적 원인이 아니라 내재적 원인이라고 표현한다. 이는 신이 경험적인 것들(양태들)을 만들어 내기 위해 자기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서 자기의 내부에서 모든것을 만들었다는 뜻이다. 내재적 원인은 생산하는 원인으로서 자기 내부에 머물뿐 아니라 생산된 것 역시 원인에 내재한다는 의미하다. 원인이 유출적이라는 것은 결과와 원인 사이에 위계가 존재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원인이 내재적이라는 것은 원인과 결과가 존재론적으로 동등하다는 존재의 평등을 이야기 한다. 스피노자가 말하는 실체가 그것의 양태보다 우월한 근거는 없다. 유일 실체인 신과 유한 양태인 인간이 존재론적으로 평등하다. 이는 존재자들 사이의 평등을 이야기하는 존재의 일의성과 만난다.

스피노자에게 존재의 일의성이란 모든 개별적 차이들 또는 내재적 양태들에 대하여 단 하나의 동일한 의미로 말해진다는 것이다. 이는 존재의 의미가 다양하다는 전통적 철학의 입장에 반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의 다의성이란 서로 구분되는 다양한 것들이 다시 하나의 기준(종, 유/범주, 있음)에 의하여 재정리되고 줄 세워진다. 기준으로 제시된 것의 존재성이 그 다양한 것들에 비례적/위계적으로 분배되는 것을 말한다. 있음을 좀더 많이 분배받은 것이 그렇지 않은 것보다 우월하기 때문이다. 이 여러가지 의미를 분배한 그 최종적인 것의 일자성과 분배받은 자들 사이의 위계성과 불평등성을 의미한다.

이에 반에 존재의 일의성에서 존재는 이런 모든 양태들에 대하여 동일하고 평등하다. 하지만 이 양태들은 서로 같은 것들이 아니다. 이는 개별적인 다양한 양태들의 이질성과 다수성으로서의 ‘있음’이라는 점에서 같다는 뜻이다. 이때 있음은 ‘됨/생성’이다. 그러므로 이때의 ‘있음’을 개별자들에게 비례적으로 또는 위계적으로 분배할 수 없다. 지금까지 개별자들의 위계를 부여해 왔던 그 유일하고 완전하며 영원히 불변하는 ‘존재/있음’이 여기에는 없다. 있는 것은 오로지 개별자들, 양태들 뿐이다. 실체라는 것은 양태들과 독립적인 어떤 다른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 실체란 양태들일 뿐이다. 양태들과 다른 것으로 실체는 없다. 들뢰즈는 개념의 생산 원리로 ‘내재성’에 가장 철저하고 충실한 이해라고 한다.

어떤 일자로 부터 무엇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잠재성으로 현실태가 내재적으로 파생되어 나온다고 설명한다. 대립자들의 상호관계로부터 내재적으로 흘러 나오는 경향에 따라 존재의 움직임이 형성된다. 에너지들의 현실화 '과정'으로 인해 현실적인 것이 생산되고 내재성이란 이러한 '과정'을 나타내는 것이다. 모든 변화는 과정의 지속적인 갱신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지향하지 않는다. 들뢰즈의 잠재적인 것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잠재태를 구분해야 한다.

잠재적인 것 혹은 가끔 잠재태라고 번역하는 들뢰즈의 le virtuel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잠재태 뒤마니스와 혼동되기 쉬우나 이 둘은 전혀 다른 존재론적 위상을 가지고 있다. 아리스토 텔레스의 철학 체계 내에서 현실적인 것은 ‘잠재태’로 부터 파생되는 것이 아니라 잠재태에 목적의 역할을 하는 ‘형상’으로 부터 파생된다. 그러므로 ‘현실태’는 ‘잠재태’보다 형상에 더 가깝기 때문에 잠재태 보다 우월하다. 그러나 들뢰즈의 잠재적인 것은 이로부터 현실태가 내재적으로 파생되어 나오는 것으로 서로 상관적이다. 당연히 들뢰즈에게 있어서 잠재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 외에 아리스토텔레스에서와 같은 외부의 형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들뢰즈의 잠재적인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의 질료와 같은(형상이 아직 작용하지 않았다는 의미에서의) 무규정성이 아니라 완전한 규정으로 사유되어야만 한다.( 차이와 반복 449~451)

우리가 살펴 보았던 생산원리라는 것은 독립하여 존재하는 그 무엇이 아니라 이들의 관계를 표현하는 것일뿐이다 내재적 장치일 뿐이다. 장치의 한가운데서 생산성은 밖으로부터 오지 않으며 전적으로 내재적 이다. 내재적 원인은 과정중에 있으며, 대립자들에 더하여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의 관계(생명)을 표현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존재의 움직임은 초월자가 지도하는 방향대로 어떤 초월적 목적을 향하여 인도되는 것이 아니다. 대립자들의 상호 관계로부터 내재적으로 흘러나오는 경향에 따라 움직이다.

‘내재성’의 환경에서 모든 변화는 과정의 지속인 갱신 외에 다른 어떠한 것도 지향하지 않는다. 이질성으로 부터 이질적인 것이 생산되는 우주이다. 이러한 우주에 목적, 의미, 방향이 있으리 만무하다. 존재자의 삶에 미리 주어진 목적도 의미도 방향도 없다. 내재성의 장은 의식의 이전 내지 너머에 존재한다. 내재성의 장에서는 온갖 초월로 부터 벗어난다. 강도와 역량과 변이를 생성하는 ‘잠재성들, 사건들, 특이성들’의 장이 된다. 차이와 반복의 영원회귀를 통하여 잠재성, 사건과 특이성을 생성하는 무대가 바로 내재성이다.

 

 『내재성이란 무엇인가』 (신지영 저, 그린비, 2009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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