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목이란 이동이 아니라 매끄러운 것을 통해 정의되는 반면 , 국가장치란 모든 것에 홈을 파는 기능을 통해 정의된다 . 이런 점에서 매끄러움과 홈 패임은 유목과 정착 , 전쟁기계와 국가장치의 구별을 정의하는 '본질적 요소 ' 라고 할 수 있다 . 그런데 이 두 공간사이에는 혼합과 이행 , 반전이 발생한다 . " 두 공간이 사실상 뒤섞여서만 존재한다는 것을 상기해야만 한다 . 매끄러운 공간은 항상 홈 패인 공간으로 번역되며 그것에 의해 횡단되고 있다 . 홈 패인 공간은 매끄러운 공간으로 항상 반전되며 회귀하고 있다 ."
두 공간과 결부하여 ‘선 ’ 의 문제를 추상적 선과 유기적 선으로 다룬다 . 감정이입충동과 관련된 선을 ‘유기적 선 ’ 이라고 부르고 추상충동과 관련된 선을 '추상적 선 ' 이라고 부른다 . " 예술은 추상적 선에서 시작한다 ." 는 테제를 제기하고 이 추상적 선은 기하학적 선과 달리 유목적인 선으로 이해된다 . 여기서 추상 개념은 모든 형식을 탈형식화해서 흐름 그 자체로 ‘일관성의 구도 ’ 로 이어지는 그런 추상기계 개념이다 . 이는 예술을 모방이나 재현 . 혹은 구상으로 보는 전통적 개념에 벗어나 있다 . 홈 패인것과 매끄러운 것을 대비하는 여섯가지 상이한 ‘모델 ’ 을 제시한다 .
1. 기술적 모델
흔히 보는 천인 직물이 홈 패인 공간을 이룬다면 동물의 털을 압착하거나 열을 가해서 만든 펠트는 매끄러운 공간을 이룬다 . 직물을 통해 홈 패인 공간의 몇가지 특징을 보면 다음과 같다 . 첫째 , 두종류의 평행적 요소에 의해 구성된다 . 수직적이고 수평적 요소가 교차한다 . 둘째 , 두 종류의 요소는 '고정 ' 과 그 고정된 것의 위아래를 가로지르면서 이동하는 기능을 가진다 . 셋째 , 홈 패인 공간에서는 반드시 적어도 한 면이 한계 지어지면서 닫혀있다 . 마지막으로 이 종류의 공간은 반드시 앞면과 뒷면을 갖는 것으로 보인다 . 날실과 씨실이 성질 , 수 , 밀도에서 엄밀히 같을 때조차도 직조법은 한면을 매듭지어 뒷면을 재구성한다 . 하지만 압축에 의해 만들어진 엉킨 섬유 , 펠트는 직물공간과 대비되는 매끄러운 공간을 이룬다 . 펠트는 무한하고 열려있으며 , 모든 방향으로 무제한적이다 . 그것은 앞면도 , 뒷면도 , 중심도 갖고 있지 않다 . 그것은 고정되고 움직이는 요소들을 지정하지 않고 , 배정하지 않으며 , 오히려 연속적인 변이를 분포시킨다 . 매끄러운 공간이라고 말할때의 매끄러움이 고르게 짜여진 동질성이 아니라 이질적인 것들이 결합되어 울퉁불퉁한 채 공존하는 것을 보여 준다 . 퀼트나 패치워크처럼 이질성을 통해서 정의되어야 하는 매끄러움이다 .
2. 음악적 모델
음악에서 홈 패인 공간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절단된 소리들의 분포를 뜻한다 . 대표적인 것이 평균율이다 . 도레미파솔라시도 동알한 간격 ( 평균화된 간격 ) 으로 주파수들이 고르게 절단한 음악적 소리로 정의하고 ,두 음 사이의 간격에 의해 어울리는 음정과 어울리지 않는 음정 등의 정의된다 . 이처럼 절단과 간격들이 일정한 단위들로 분할되어 표준화된 방식으로 배열될 때 , 그 배열과 분포의 원리를 '모듈 ' 이라고 한다 . 동일한 원리로 주파수를 절단하여 음계가 일정한 간격으로 정의되는 곳은 홈 패인 공간이다 . 반면 음악에서의 매끄러운 공간은 정해진 간격없이 소리들이 모이고 흩어지는 것을 통해 정의된다 . 여기서는 모든 주파수의 소리가 다 음악적 소리로 사용될 수 있다 .
3. 해양적 모델
홈 패인 공간에서 선이나 궤적은 점에 종속되는 경향이 있다 . 두점을 연결하는 직선이 중요한 선이 된다 . 반대로 매끄러운 공간에서 점은 선의 일부이고 , 선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갖는 통과점일 뿐이다 . " 매끄러운 공간에서 선은 벡터 , 방향이지 , 차원 혹은 척도적 규정이 아니다 ." 그래서 매끄러운 공간은 형태화되고 지각된 사물로 채워지기보다는 사건 혹은 특개성의 원리로 채워진다 . 매끄러운 공간은 소유의 공간이라기 보다 '이곳 ' 마다 고유한 느낌을 주는 '감응 ' 의 공간이고 , 멀리서 눈으로 휘둘러보고 파악하는 시각적 / 광학적 공간이라기 보다 직접적인 느낌을 통해 느끼게 되는 촉각적 공간이다 . 폼패인 곳에서는 형식이 진료를 조직하는 반면 매끄러운 곳에서는 쇚가 힘을 표현하거나 힘의 징후로 복무한다 . 바다는 전형적인 매끄러운 공간이다 . 위도와 경도로 표시되는 좌표가 바다에 덮어씌워지고 , 지역을 격자화하는 자오선과 평행선 , 경선과 위선들이 교차하는 지도가 바다에 홈을 파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 중요한 것은 사막이 매끄러운 공간인가 , 도시가 홈 패인 공간인가가 아니다 . 매끄러운 공간은 홈이 패이기 마련이고 반대로 홈페인 공간 또한 매끄러운 공간으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중요한 것은 매끄러운 공간에서 매끄러운 공간에 적합한 삶과 실천을 창안해야 하며 , 홈 패인 공간에서 다시 매끄러운 공간을 만들어 살아가는 삶과 실천을 창안해야 한다는 것이다 . 동일한 공간을 흘러가는 상이한 두가지 여행을 구별해주는 것은 측정 가능한 혹은 척도적인 운동량이 아니라 공간화의 양식 , 공간에의 , 공간에 대한 존재 방식이다 .
4. 수학적 모델
척도적 다양체와 비척도적 다양체 , 외연적인 당양체와 질적인 다양체 , 중심화된 다양체와 비중심화된 다양체 , 수목적 다양체와 리좀적 다양체 등 모두 대비 되는 다양체의 짝들이다 . 이 홈 패인 다양체와 매끄러운 다양체가 다양한 다양체의 짝들에 대응하는 것이다 . 각각의 부분이 아무리 분할되어도 동질적인 ‘연장 ’ 과 달리 분할될때 마다 상이한 질을 갖는 ‘지속 ’ 이라는 말로 구분했다 . 전자가 양적 수적 다양체라면 후자는 질적인 다양체라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다르다 . 매끄러운 공간에 서식하는 것들은 분할될 때마다 그 본성을 달라진다는 의미에서 '매끄러운 다양체 ' 라고 할 수 있다 . 그러나 공간 자체와 모든 수가 동질적 , 척도적 다양체라고 간주하는 것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 " 수는 그자체로 매끄러운 공간에 분배되고 분할될 때마다 매번 그성질을 변화 시킨다 . 세어진 수가 홈패인 공간에 속하는 것같이 , 서수적이고 방향성이 있으며 유목적이면서 분절된 수 , 세는 수는 매끄러운 공간에 속한다 ." 부분마다 이질성을 특징으로 하는 매끄러운 공간은 언제나 상이한 요인들의 복합효과에 의해 국지적인 특개성을 갖는다 . 두 가지 요인이 결정하는 경우에 두개의 상황을 비교할 수 없다면 , 매끄러운 공간에서는 아무것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일까 ? 비교나 측정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 리만 공간의 경우가 바로 그렇다 . 이공간에서는 각각의 부분들이 이질적이다 . 각각은 무한히 근접하는 두 점사이의 거리의 제곱을 정의하는 표현형식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
이런 논의에 의해 저자들은 매끄러운 공간의 두 가지 특징을 요약한다 . 한편으로 , 서로의 일부분을 이루는 결정인이 크기와는 상관없이 포함된 거리 내지 배열된 차이로 소급될 때가 그것이다 . 다른 한편 , 하나를 다른 것의 일부로 만들 수 없는 , 결정인들이 척도와는 무관하게 오직 주파수나 누적의 과정에 의해 연결될 때가 그것이다 . 이것이 매끄러운 공간의 노모스의 두 측면이다 .
(1) 차원수가 정수고 방향이 일정한 집합은 모두 홈패인 것 혹은 척도적인 것이라고 부를 수 있다 .( 2) 비척도적인 매끄러운 공간은 1이상의 분수 차원을 갖는 선 , 또는 2이상의 분수 차원을 갖는 면을 구성함으로써 만들어진다 . (3) 분수의 차원은 말그대로 방향적인 공간의 지표다 (접선은 없으며 , 방향의 연속적 변이만이 있다 . (4) 매끄러운 공간은 그 공간속을 통과하는 것 , 혹은 공간 속에 기입되어 있는 것 이상의 보충적인 차원을 갖지 않는 것으로 정의되는데 , 이런 의미에서 매끄러운 공간에는 예컨대 선이 여전히 선으로 있으면서 면을 채우는 평평한 다양체가 있다 . (5) 세는 수 내지 비정수의 부정확하지만 엄밀한 형식아래 , 공간 자체와 그 공간을 점유하는 것은 동일화되는 경향이 있으며 , 동일한 능력을 갖는 경향이 있다 . ( 계산없는 점유 ). (6) 이러한 무정형의 매끄러운 공간은 이웃관계의 누적에 의해 만들어지는데 , 이때 각각의 누적은 '생성 ' 에 고유한 식별 불가능성의 지대를 정의한다 .( 선 이상이지만 평면 이하 , 입체 이하지만 평면 이상 )"
5. 물리적 모델
물리적 모델에서 다루는 중심 개념은 ‘노동 ’ 과 ‘자유활동 ’ 이다 . 노동의 어원은 창조적인 활동으로서의 작업보다 참고 견디는 고통스런 활동을 지칭하는데 사용 되었던 말임을 보여 준다 . " 직각으로 교차하는 두 계열의 평행선으로 , 그 하나인 수직선들은 고정적인 것 내지 상수의 역할을 하는 반면에 다른 하나인 수평선은 변수의 역할을 한다 ." 이 두 계열의 평행선은 "교차가 규칙적이 될수록 , 홈 패임이 더 단단하게 되고 , 공간은 보다 동질화되는 경향이 있다 . 이런 의미에서 동질성은 처음부터 매끄러운 공간의 특징이 아니라 반대로 홈 패임의 극단적 결과이다 ."
이 고원에서 들뢰즈 / 가타리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노동의 모델과 국가장치에 관한 것이다 . 19 세기에 이르러 일에 대한 물리 - 과학적 모델과 노동력 내지 추상적 노동에 관한 사회 - 경제학적 개념의 정교화가 동시에 이루어 졌다 . 전자를 다루는 물리학과 후자를 다루는 사회학이 발생석 친근성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 콩트는 사회물리학 이라고 작명해놓았으나 이미 같은 제목으로 책을 출간하여 사회학이란 이름으로 변경했다 . 사회가 노동의 경제적인 척도를 제공했다면 물리학은 노동의 역학적 화폐를 제공했다 .
임금체제는 그 상관자로서 힘의 역학을 갖는다 . 물리학이 (이때만큼 ) 사회적이었던 적은 없었다 . 왜냐하면 두 경우 모두 표준 인간에 의해 일률적인 방식으로 들어올리고 끌어당기는 힘의 일정한 평균치를 정의하는 것이 문제였기 때문이다 . 평균적이 것에 기초한 표준적인 힘 , 표준적인 노동강도 , 표준적인 숙련도 등을 가정할 수 있을때 노동시간은 가치의 척도가 될 수 있다 . 이러한 평균치의 노동력이라는 개념이 노동모델을 형성한다 . " 모든 활동에 노동 - 모델을 부과하는 것 , 모든 행위를 가능한 노동 내지 잠재적 노동으로 바꾸는 것 , 자유활동을 훈육하는 것 , 또는 자유 활동을 단지 노동과 관련해서만 존재하는 '여가 ' 로 밀어놓는 것 ." 이다 .
추상노동 개념의 전제인 '표준적 인간 ' 내지 '평균적 인간 ' 은 어떻게 탄생했을까 ? 국가의 공공노동에서 , 혹은 군대의 조직화에서 탄생한 것이다 . 전쟁기계를 국가적 건설현장과 공장에서의 노동 - 모델에 복속시키는 것은 18-19세기 국가장치가 전쟁기계를 영유하는 새로운 수단이었다는 것이다 . 이와는 반대로 인디언의 경우 노동력을 파는 행위 , 대가를 받고서 일을 하는 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 노동을 치욕으로 여겼으며 노동을 거부했다 . 미국인들이 그많은 흑인을 노골적으로 들여 올수밖에 없었던 것은 인디언을 노예로서 이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
이러한 노동의 물리 - 사회적 모델은 국가장치에 속하며 , 국가장치가 두 가지 이유에서 발명한 것이라는 것이 저자들의 주장이다 . " 첫째 , 노동은 오직 잉여의 구성과 더불어서만 출현하므로 , 스톡 없는 노동은 없다 . 따라서 (말 그대로의 ) 노동은 잉여노동과 더불어서만 출현한다 " 는 것이다 . 자본주의에서 노동이란 이처럼 ‘자본 ’ 이라 불리는 스톡을 통해 그것의 일부를 대가를 받고 수행하는 활동을 지칭한다 . 자본주의 이전의 노동에 대해서는 다양한 형태의 스톡을 대가로 받고 수행하는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
둘째 , 노동은 시공간의 홈 패임의 일반화된 조작 , 자유활동의 종속 , 매끄러운 공간의 파기를 수행하며 , 국가의 본질적인 사업과 전쟁기계의 정복에서 자신의 기원과 수단을 발견한다 . 시계는 공간화된 시간으로 시간을 동질화하고 양화한다 . 특정한 공간에서 주어진 시간에 맞추어 시작하고 끝내야 한다 . 삶의 지반 자체를 홈 페인 공간으로 만들어 버린셈이다 . 자본은 이런 홈 패임의 극단에서 새로이 매끄러운 공간을 구성한다 . 자본주의에서는 필요노동과 잉여노동이 시간적 내지 공간적으로 분리 되기를 그치며 어떤 가시적인 형태로 국지화 될 수 없게 된다 . 필요 노동과 잉여 노동의 국지적 구별 뿐아니라 불변 자본과 가변 자본의 구별이 어렵게 된다 . 소프트웨어 , 지적 소유권 등에 대한 자본의 집요한 공세는 가변자본조차 불변자본의 일부로 흡수하고 통합하려는 자본의 집요한 노력을 뜻한다 . 네그리는 생산과 착취가공장에서만이루어지는게 아니라 사회 전체가 잉여가치를 착취하는 장이 된다 . 사회적 공장이라는 개념이 여기에서 유래한다 . 이러한 맥락에서 저자들은 새로운 조건에서 모든 노동은 잉여 노동이다 . 인간의 소외는 일반화된 ‘기계적 노예화 ’ 로 대체되는데 여기서 사람들은 어떤 노동과도 무관하게 잉여가치를 제공하기도 한다 . 모든 공간 , 모든 시간이 잉여가치 착취의 장이 됨에 따라 "자본에 의한 홈 패임의 끝에서 이런 식으로 일종의 매끄러운 공간이 만들어지게 " 된다 . 본질적인 것은 홈 패인 자본과 매끄러운 자본의 구별이며 , 전자가 영토와 국가 , 심지어 다른 유형의 국가조차 넘나드는 복합체를 통해 후자를 낳는방식이다 .
6. 미학적 모델
미학적 모델에 대해 말하며 그특징을 세가지 정도로 요약한다 . 원거리상과 대비되는 근거리 상 , 광학적 공간과 대비되는 촉감적 공간 , 구체적선 내지 구상적 선과 대되는 추상적 선이다 .
1)근거리 상과 촉감적 공간
접사는 원거리 상의 시각적 이미지를 근거리 상의 감응적이고 감정적인 이미지로 바꾼다 . 과잉접사에서는 시각적 형태가 없기에 이미지는 촉감적이고 질감적인 것이 되는 것처럼 보인다 . 표면에서는 시선이 형태를 그리는 선이나 윤곽선을 따라 가지 않고 대신 표면이 제공하는 질감을 느끼게 된다 . 이를 눈으로 만진다는 말로 표현한다 . 시선은 어디에서든 어느 방향으로도 향할 수 있다 . 형태의 선이나 윤곽선이 만드는 홈이 사라지고 모든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 집니다 . 이를 ‘절대적 국지 ’ 라고 하며 상대적 포괄과 대비하고 있다 .
그림은 떨어져야 보이지만 , 가까이서 그려진다 . 마찬가지로 , 작곡가는 듣지 않는다고들 한다 . 즉 청취자는 떨어져서 듣는 반면 , 작곡가는 가까이서 듣는다 . 더욱이 독자는 긴 기억을 갖는 것으로 추정되는 반면 , 작가는 짧은 기억으로 쓴다 . 이런 근거리상과 촉감적 공간이라는 특징은 매끄러운 공간에 상응한다 . 반면 홈 패인 공간은 원거리상의 요구에 의해 정의된다 . 방향의 일정함 , 관성적인 좌표의 교환에 따른 거리의 불변성 , 주위 환경에서의 흡수에 의한 상호결합 , 중심화 된 투시법의 구성이다 . 늘어선 대상들은 소실선과 각 점을 잇는 선의 비례 관계에 의해 정해진 거리를 확보하게 된다 .
2) 포괄성과 국지성
포괄성은 많은 부분들을 자기 안에 담는 것이고 국지성은 어떤 제한된 부분에 머물러 있는 것을 뜻한다 . 매끄러운 것은 근거리적이고 촉감적이다 . 따라서 많은 것을 담는 포괄성은 갖지 않으며 반대로 각각의 부분들이 갖는 특개성에 주목하는 만큼 '국지성 ' 을 갖는다 . 반면 홈 패인 것은 원거리상이고 다양한 것들을 풍경의 일부분으로 포함하고 수평선이나 윤곽선 안에 담는다는 점에서 '포괄성 ' 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 그러나 매끄러운 것이 국지적 부분에 집착하는 것은 아니다 . 형태나 윤곽선의 홈을 넘어 모든 방향으로 동시에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 이러한 국지성은 상대성을 벗어나 절대성을 갖으며 이를 '절대적 국지성 ' 이라고 할 수 있다 . 매끄러운 공간에 달라붙어 그 전체를 점유하며 나아가는 유목민을 '절대적 유목민 ' 이라고 표현한다 . 반면 홈 패인 공간의 포괄성은 '상대적 포괄성 ' 이다 . 시야에 들어온 것을 담지만 특정한 것을 특정한 방식으로만 담아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 소실점을 향해 모이는 보조선 안에 담는다는 점에서 상대적이고 시선은 소실점을 제외한다면 제한된 것 , 제한된 형태만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상대적이다 . 투시적인 풍경에서 시선이 모든 곳으로 동시에 향할 수 있는 점은 바로 소실점밖에 없으며 그런 이유로 이점은 '국지적인 절대성 ' 을 갖는다 .
3)구상적 선과 추상적 선
20 세기 초반 활동했던 미술사가 보링거는 리글에게 끌어온 개념을 사용하여 모든 예술 작품은 가장 내면적인 본질에 따르면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절대적 예술의지의 객관화며 이런 의미에서 예술의지란 대상과 창작방법과 무관하게 그 자체로 존립하는 의지로서 활동하는 잠재적 욕구라고 말한다 . 그는 예술이란 모방충동이 아니라 추상충동에 의해 창조된다고 주장한다 . 추상 충동은 외부적 현상으로 야기되는 인간의 커다란 내적 불안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 불안한 외부의 사물이나 공간에서 불명료한 세계상을 제거하고 거기에 필연성과 합법칙성을 부여하고자 하는 충동이다 . 이런 추상충동은 감정이입충동과 달리 무기적인 것을 지향하고 , 자아를 통한 향유가 아니라 자아를 버리고 몰입하게 하며 , 모방보다는 변형시키는 방식으로 작용을 한다 . 반면 주류 예술 이론가들의 모방이나 모사 미메시스라는 개념을 통해 예술의 발생기원을 파악했다 . 여기서 모방충동과 감정이입충동을 인간과 외부적 현상간의 친화성이나 유사성에 대한 확인하려는 것이라는 점에서 매우 밀접한 것으로 보았다 . 이러한 충동은 대상과 자신을 동일화함으로써 발생하는 "쾌감 " 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항상 "유기적인 것을 향하고 있다 ." 고 본다 .
들뢰즈 / 가타리는 예술이란 일차적으로 모방이 아니라 추상이며 , 따라서 추상적 선에서 출발한다는 명제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 . " 예술이 추상적 선에서 시작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 추상적 선이 출발점이다 .” 들뢰즈 / 가타리는 추상이란 개념자체에 대해서 보링거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 . 불안을 극복하기 위한 합법칙성의 개념에 중심을 두고 있다면 들뢰즈 / 가타리는 추상을 변형이요 탈형식화라고 이해하고 있다 . 추상적인 선은 직선이나 기하학적 선이 아니라 오히려 곡선이고 비기하학적 선이다 . 그것은 어디서나 존재하는 탈주선이고 '클리나멘 ' 이며 , 의식적인 변형인 경우에 조차 니체적인 의미에서 그 자체로 즐거운 ' 놀이 ' 이다 . 이러한 추상적 선은 유기적인 선이나 기하학적 선에 의해 , 구상적인 선에 의해 사로잡히지 않았던 원시인이나 선사시대의 예술에서 , 혹은 유목민의 예술에서 잘 나타난다고 한다 .
추상적인 선을 직선적인 것이나 기하학적 선으로 환원하는 것 자체가 그리고 구상적이지 않은 선은 전부 일종의 기하학적으로 양식화된 선이라고 보는 것 자체가 서구적인 편견이다 . 추상적인 것은 기하학적인 것이 아니라 유목적인 것이며 그러한 유목민의 추상적 선이 바로 매끄러운 공간을 정의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특정이라고 한다 . 추상적 선이 추상화의 역할을 대신하는 글의 출현과 더불어 , 그리고 그러한 글을 만들고 관리하는 제국적 국가장치의 출현과 더불어 구상화되는 경향이 있다 .
추상적인 선이 특정한 양상으로 사용되는 경우 구상적인 선이 그려진다고 말할 수 있다 . 구상적인 것 혹은 모방이나 표상은 선이 이러저런 형식을 가질 때 , 그선들이 어떤 특징으로부터 생겨난 결과다 . 즉 구상적 선이 어떤 조건하에서 구상적인 기능을 수행할때 나타난다 . 구상적 선은 이미 어떤 형태만을 그리는 한에서만 구상적이기 때문에 구상적인 선이 특정한 조건에 따라 추상적인 선이 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는 비대칭성이 두선사에 있다 . 구상은 추상과 대립되지만 추상은 구상과 대립되지 않는다 . 추상적 선은 구상적 선이라는 '대립물 ' 이 출현하기 이전에 , 대립과 무관하게 이미 존재했기 때문이다 .
홈 패인 선의 체계를 형성하는 요소로 중요한 것이 대칭성이다 . 대칭성은 정해진 위치를 벗어나는 모든 선을 불합리하고 부적절한 것으로 간주한다 . " 직선적인 체계가 반복을 제한하고 , 그것의 무한한 전진을 가로막으며 , 반사상 내지 별모양으로 중심점과 방사적 선들의 유기적 지배를 유지하는 것이 바로 대칭이다 . 저자들은 대칭과 반복을 대비시키고 , 반복과 고딕선을 병치한다 . 즉 고딕적 선은 ‘형식이 아닌 표현 능력을 , 형식으로서의 대칭성이 아니라 능력으로서의 반복성을 지닌다 ’ 들뢰즈와 가타리는 현대적 의미에서 추상적 선에 관한 정의를 내린다 . " 어떠한 윤곽도 그리지 않고 어떠한 형식을 제한하지도 않는 , 가변적인 방향의 선 " 이다 . 매끄러운 공간 자체가 해방적인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 하지만 투쟁이 변화하고 치환되는 것은 바로 거기서고 , 생명이 자신의 쟁점을 재구성하고 새로운 장애물과 대면하고 , 새로운 스타일을 창안하고 상대를 변용시키는 것도 바로 거기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