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분열분석의 대상

 

분열분석이란 프로이트가 말하는 정신분석과 대비되는 의미에서 들뢰즈와 가타리가 자신들의 연구작업 전체를 명명하는 이름이다.  그 대상은 무의식이다. 정신분석에서 대상으로 설정하는 무의식과 외연과 내포가 다르며, 그 범위와 성질또한 다르다. 
 
2. <안티 오이디푸스> 욕망으로서의 무의식
 
1) 정신분석학에서 욕망의 개념 
프로이트는 모든 욕망의 근저에서 성욕을 본다. 첫번째 명제 ‘모든 욕망은 본질적으로 성욕이다’.  예술가들의 창조적 욕망이나 정치가들의 권력에 대한 욕망 등 다양한 비-성적 욕망은 성욕이 승화된 것이고, 리비도가 그 대상을 바꾸어버린 욕망이라고 할 수 있다. 두번째 명제는 모든 성욕, 아니 모든 욕망을 어머니에 대한 욕망으로, 그리하여 남근으로 귀착되는 욕망으로 환원하는 것이다.세번째 명제는 아버지에 의한 일차적인 욕망의 억압은 문명화된 모든 인간적 질서의 출발점이다.  어머니에 대한 욕망은 억압되거나 승화되어 다른 대상을 찾는다. 쾌락 원칙에 따라 움직이는 거시기(das Es, Id)는 아버지로 상징되는 내면화된 문명(초자아!)과 충돌하여 ‘현실원칙’에 따라 움직이는 ‘자아(Ego)’에게 자리를 내주게 된다. 억압된 채 무의식 깊은 곳에 남아서 변형된 형태로 다시-나타나거나, 꿈이나 환상같은 수많은 표상들로  무의식을 드러낸다. 

 

 

2)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욕망 개념 
들뢰즈와 가타리는 욕망이란 ‘하고자 함’이다. 놀고자 함, 사유하고자 함, 말하고자 함, 무언가 새로운 방식으로 하고자 함, 살고자 함 등등 모든 ‘하고자 함’이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에서 ‘나’가 존재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했다. 이는 문법이 그렇게 하고자 한 것을 데카르트가 말한 것이다. 모든 동사에, 모든 활동에 주어 내지 주체가 전제된다고 하는 주체철학적 사유란 문법에 내재하는 ‘권력의지’에 따라 사유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주체나 자아가 실체라는 생각은 문법에 내재한 권력의지의 표현이고 ‘문법의 욕망’이다. 내가 ‘욕망’하고 내가 ‘사유’하는 것처럼 표현되지만 내가 아는 다른 사람들이 동일하게 욕망하고 사유한다면 그것이 진정 어디에 속한 욕망인지 잘 생각해보아야 한다.  
 
침대를 보면 눕고 싶어지고, 키보드를 보면 두들기고 싶어진다. 펜으로 쓸때는 도식을 그리며 사유하지만 워드 프로세서를 쓸 때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기표들의 선형적 배열에 따라 사유하는 것은 ‘나’의 욕망이라기 보다는 펜이나 워드프로세서에 속한 욕망이다.  펜과 내손이 만나서 형성되는 욕망, 워드 프로세서와 내 손이 접속하여 형성되는 욕망이다.  욕망이란 오직 인간이나 생물체의 전유물이라고 하는 생각은 편협한 자기중심주의에 불과 하다.  그것은 어떤 활동을 하기 위해 만나고 접속하는 신체들에 속하는 것이고, 그 신체들을 접속하여 작동하게 만드는 요인이며, 그러한 작동을 통해 무언가를 생산하는(산출하는) 그런 결정적인 요인이다. 
 
성이나 생식과 관련된 욕망은 리비도의 흐름을 절단하고 채취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먹고 마시는 것과 관련된 욕망은 영양소의 흐름을 절단하고 채취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문과 수위는 사람들의 동선의 흐름을 절단하고 채취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창문이나 커튼은 시선의 흐름을 절단하고 채취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이처럼 절단하고 채취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모든 것을 들뢰즈와 가타리는 ‘기계’라고 정의 한다 .기계란  다른 것과 접속하여 어떤 흐름을 절단하고 채취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모든 것을 지칭한다. 기관들을 하나로 통일하고 통합하는 생물학적 유기체론이나 기계들을 오직 구조가 할당한 기능만을 수행하는 것으로 보는 구조 개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기계와 욕망사이에 직접적인 연결이 나타나고, 기계는 욕망의 심장부로 이행한다. 기계는 욕망하는 것이되고, 욕망은 기계화 된다. 
 
접속항이 달라 지면 다른 기계가 되는데, 다른 기계가 된다는 것은 다른 욕망, 다른 의지가 작동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그들은 욕망과 기계를 하나로 연결하여 ‘욕망하는 기계’라는 개념을 창안했다. ‘욕망은 기계고, 기계들의 종합이며, 기계적 배치다. 즉 욕망하는 기계다’  이런 의미에서 욕망은 표상이나 환상을, 다시 말해 현실적이지 않은 어떤 대상을 생산하는 게 아니라 직접적으로 현실적인 ‘기계’를, 실재적인 것을 생산한다. “욕망하는 기계들은 아무것도 표상하지 않고, 아무것도 기호화하지 않으며,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욕망하는 기계란 바로 우리가 그것으로 만들어내는 것이고, 우리가 무언가를 만들때 사용하는 수단이며, 그것들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다.  욕망하는 기계는 현실적인 것을, 기계를 생산하고 작동시킨다. 모든 욕망은 욕망하는 생산인 동시에 사회적 생산이다.  욕망은 기계를 통해 작동하는 의지로서, 기계로서 존재하며 기계를 통해 어떤 흐름을 절단하고 채취하며 현실적인 무언가를 생산한다. 접속항이 달라지면 다른 기계가 되고 다른 욕망이 작동한다. 
 
무의식이란 기관 없는 신체 상에서 욕망하는 기계의 생산이고,  그것의 변형이며, 그러한 생산과 반생산, 변형을 야기하는 리비도의 투여고 그러한 투여의 양상을 규정하는 욕망의 배치라고 할 수 있다 . 즉 무의식은 기관 없는 신체 위에서 리비도의 투여를 규정하는 욕망의 배치라는  것이다. 따라서 무의식을 다루는 것은 치환되고 응측되어 표상의 형태로 만들어지는 징후들의 기호학이 아니라, 현실적이고 실재적인 것을 만들어 내는 물리적인 강밀도의 생산, 기계들의 생산, 기계적 배치, 그리고 그와 상관적인 언표행위의 배치를 다루는  ‘물리학’이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무의식 이란  기관 없는 신체라고 할 수 있고, 또한 욕망하는 기계라고 할 수 있으며, 욕망하는 기계와 결부된 모든 생산과 활동을 포괄한다고 할 수  있다. 
 
욕망하는 기계가 그것이 무엇과 접속하는가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것이라고 할때, 그 기계화된 욕망의 본성은 이웃항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고, 어떤 기계를 둘러싼 관계가 달라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다른 식으로 말한다면, 욕망은 고정된 어떤 본성도 갖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관계에 따라, 접속되는 이웃항에 따라, 차라리 ‘외부’에 포함시켜 마땅한 그 이웃항과의 관계에 의해 다른 본성을 갖게 되는 점에서 말이다. 따라서 욕망에 가족적 본성이나 성적 본성을 부여하는 것은 물론, 다른 어떤 본성을 부여하는 것도 불가능하며 부적절하다. 욕망은 이런 관점에서 그 자체로 사회적인 것이다 . 욕망하는 기계와 그것이 거대한 규모의 집합체를 이루는 사회적 욕망을 구별하며 이와 상응하여 욕망하는 기계와 사회적 기계라는 개념을 구별하여 사용한다. 사회적 기계란 욕망하는 기계들이 큰 규모로 모여 형성하는 것이란 점에서 사회적 기계 외부에 존재하는 욕망하는 기계란 없다. 욕망하는 기계들은 사회적 기계 안에서 작은 규모로 거주하는 것이란 점에서 욕망하는 기계 없는 사회적 기계도 없다.  
 
3)분열분석의 네 가지 명제 
첫째 욕망 내지 리비도의 모든 투여는 몰적이고 사회적이고, 어떤 경우든 사회역사적 장위에 새겨진다.   장인의 기술적 세련됨이 자신의 능력과 가치에 대한 평가로 이어지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사회적 욕망이다. 자본주의에 노동에 대한 욕망은 화폐로 환산되는 ‘가치’에 의해 지배되며, 화폐화되는 양의 크기에 따라 활동이나 능력의 집중과 분산, 이동이 나타난다. 성적인 욕망의 투여조차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조건에 따라 상이한 양상으로 이루어진다. 18세기 이전에는 서양에서는 가족과 사랑은 분리되어 있었다. "아내를 정부처럼 대하는 것"은 아내에 대한 무례함으로 간주되었다. 아내와는 결혼하여 가정생활을 영위하는 것이라면 사랑이나 섹스는 정부와 나누는 것이라는 것이었다. 18세기 이후 가정은 성적 욕망의 특권적인 개화의 지점이 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욕망은 사회, 역사적 조건에 따라 상이하게 투여된다는 의미에서 “무의식은 사회 역사적이다’라고 말한다. 
 
두번째 사회적 투여에서 계급 내지 이해의 선의식적 투여는 욕망 내지 집단의 무의식적 리비도 투여와 구별된다.  계급이란 이해관계에 따라 그에 속한 사람들로 하여금 힘과 능력, 욕망을 동일한 양상으로 투여하게 한다는 점에서 몰적인 집합이고 따라서 노동조합이나 당과 같은 사회적 기계를 구성한다면, 미시적 욕망의 분자적 흐름이 모여서 만들어 지는 집단(무리)은 분자적 상호작용에 의해 상이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양상으로 리비도의 투여를 야기한다는 점에서 앞의 것과 다르다는 것이다. 앞의 것을 선의식적 투여라하고, 뒤의 것을 무의식적 투여라고 구별한다. 
 
세번째 사회적 장의 리비도적 투여는 가족적 투여와의 관계에서 일차적이다. 리비도가 사회적 장애 투여되는 것은 그것이 탈성욕화되고 승화되는 조건 아래서만 가능하다는  프로이트 명제에 대한 반박이다. 18세기 후반  가장들에게 가족의 부양과 행복이라는 책임이 지워지며 그결과 ”모든 것을 내 가족을 위해 바치리라”는 가족주의적 욕망이 탄생하게 된다. 하지만 가족적 삶은 이미 사회적인 삶 안에서 그것의 양상에 의해 항상-이미 관통되고 있기에, 가족적 욕망이나 리비도의 투여와 분배 또한 그런 비-가족적인,  부모 외적인 것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네번째  리비도의 사회적 투여에는 두 극이 있다. 파시즘적이고 편집증적 투여와 혁명적이고 분열적인 투여가 그것이다. 편집증적 투여는 다양한 방향으로 흘러가려는 욕망의 흐름을 오직 하나의 방향으로 제한하고, 그것으로만 쏠리게 하는 것이며, 분열적인 투여는 그 다양한 방향을 긍정하고, 심지어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촉발 하는 것이다 .
 
4) 분열분석의 과제
분열분석의 첫번째 임무는 “사회적 장의 무의시적 욕망의 투여에 도달하는 것 “이다.  다양한 욕망하는 기계들에 대한 탐색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두번째 임무는 “사회적 장의 리비도 투여의 본성, 이러한 투여에서 발생할 수 있는 내적 갈등, 이러한 투여와 선의식적 투여의 관계, 이 두가지 투여의 가능한 갈등들, 요컨대 욕망하는 기계들과 욕망의 억압 간의 상호작용 전체를 발견하는 것” 이다. 
 
3. <천의 고원>:  다양체로 무의식 
1)변화의 요소들 
<천의 고원>에서는 ‘욕망하는  기계’라는 개념이나 ‘욕망하는 생산’이란 개념은 사라지고 그 대신 욕망과 배치, 기계라는 개념이 독립적으로 사용된다.   배치라는 개념이 상대적으로 부각된다.  욕망의 흐름 자체는 형식화 되지 않은 질료적 흐름으로서 “기관없는 신체” 개념으로 대체된다.  모든 고원은 추상기계와 ‘일관성의 구도’ 개념이 중요 해진다. 이는 욕망의 사회적 투여의  ‘분열적인 극’만으로는 올바른 정치학 내지 실천철학을 구성하는데 불충분 하다는 생각과 무관하지 않다. 파시즘을  욕망 투여의  ‘편집증적 극’으로 설정한 것과 달리, 몰적인 선분들의 공명을 통해 작동하는 국가 장치와 구별하며 분자적인 상호작용의 선 위에서 정의함으로써, 국가장치와 구별되는 파시즘의 위상을 분명하게 했다. 파시즘 및 편집증 개념과 독립적으로 국가장치의 문제를 다룰 수있게 되었다. 
 
2)무의식 혹은 늑대의 무리
<천의 고원>에서 강조되는 것은 무의식의 ‘무리’적인 특징이고, 다양한 욕망이나 기계들이 증식되며 서식하는 서식처로서 무의식이란 개념입니다. 이를 저자들은  ‘다양체’ 개념을 통해서 설명한다. 다양한 욕망들이 무리지어 서식하는 곳, 그 욕망에 따라 신체와 힘의 분포를 움직여 필요한 기관을 만들어 내는 곳, 그것을 저자들은 ‘기관 없는 신체’라고 부른다. 무의식이란 결국 욕망들이 무리지어 서식하는 기관없는 신체고, 또한 그 위에서 만들어지는 다양한 ‘기계’ 들의 집합이며, 동시에 그러한  ‘기계’들을 만들어 내며 그런 기계로 ‘기계화되어’ 존재하는 욕망들의 집합이다. 기관없는 신체가 욕망하는 기계들이 만들어 지고 작동하는 질료요 터전이라면, 욕망하는 기계, 혹은 욕망 내지 기계는 특정한 배치 안에서 그런 질료로 만들어지는 무의식적 구성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구성체는 기관없는 신체상에서 기관없는 신체를 질료로 하여 만들어진다는 점에 항상-이미 기관없는 신체를 포함하고 있다고 해야 한다.   
 
3)무의식, 리좀적 다양체
저자들은 무리를 이루고 있는 저 다양한 욕망들, 무의식의 무리들을 일자로 환원하지 말고 그대로 두라고 말한다. 분열적인 흐름, 복수적인 흐름으로서의 무의식, 그래서 어떤 대상을 향해 집중하는 경우에 조차 무리처럼 복수의 목소리를 내면서 하나로 움직이는 무의식을 지칭하기 위해 분열분석이라 했다.  이처럼 하나의 중심, 하나의 비밀로 환원될 수 없는 다양한 흐름의 공존을 저자들은 ‘리좀’이라고 부른다.  무의식 자체가 ‘무리’를 이룬다고 하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 ‘무의식은 리좀적이다’ ‘무의식은 리좀적 다양체다’ 무의식에서 진행되는 욕망들의 이 리좀적인 양상을 포착하기 위해서 저자들은 복수성/다양체와 그 요소들 간의 관계를  ‘강도/강밀도’로 포착해야 한다고 말한다.  
 
강밀도의 특정한 분포를 형성하며 펼쳐질 때, 그 분포가 바로 고유한 이름을 정의하는 것이다. 기관없는 신체상에서 특이점들의 분포로 정의되는 강밀도의 분배, 바로 이것을 특이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신체를 구성하는 강밀도를, 강밀도의 분포를 변화시킨다면 다른 신체가 되는 것이고 다른 기계가 되는 것이다. 기관없는 신체란 이런 강밀도의 연속체이고, 어떤 신체도 구성할 수 있는 잠재적 상태로 강밀도의 분배가 이루어진 신체이다. 또한 그것은 특정한 분배와 집중을 통해 생산된 기관 내지 기계의 강밀도가 0으로 되돌아간 상태를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기관없는 신체도, 욕망이나 욕망하는 기계도 그리고 무의식도 이제 모두 강밀도를 통해 포착되는 리좀적 다양체라고 말할 수 있다. 
 
무의식의 문제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증상이나 비현실적인 공상내지 환상을 해석하여 이해하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현실을 생산하고 변혁하는 문제고, 또한 그러한 현실속에서 우리의 삶을 생산하고 변환하는 문제이다. 늑대 인간에게서 늑대란 아버지를 의미하는 표상이나 아버지의 대체물이 아니라, 무엇보다 우선 신체적인 강밀도의 복합체고 기관없는 신체상에서 어떤 강밀도의 발생이고 집중이며, 따라서 그것은 해석할 대상이 아니라 신체적으로 느끼고 그 느낌으로 스스로 변용되는 감응이다. 
 
4. 분열분석이란 무엇인가 ?
통상적인 의미에서 현실적인 것은 무의식이 숨겨진 채 드러나는 기호/징표였고, 무의식적 욕망의 대체물이었으며, 무의식이 다시-나타나는 것이었다. 이경우 진정한 실재, 진정한 현실이란 우리가 말하고 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말과 행동으로 대체되어 나타나는 무의식이고, 그런 말과 행동을 반복하여 행하게 하는 숨겨진 ‘원인’이다. 말해진것(상징적인 것)혹은 상상된 것들을 통해서 그 숨겨진 ‘ 실재계’를 찾아내는 것이 바로 정신분석가가 하는 일이며 정신분석학의 과제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무의식이란 상징이나 환상 기호를 만들어내며 통상적인 현실을 통해 숨겨진 채 다시 나타나는 그런 실체가 아니라. 우리의 신체를 통해 작동하는 우리 자신의 욕망이고 그런 욕망에 의해 생산되는 기계와 실천들의 집합이며, 그런것을 변이시키고 변환시키는 변혁의 장이고, 그 모든 것의 질료로서 그 모든 욕망이 자리잡고 작동하며 물러서고 전진하는 기관 없는 신체를 뜻한다. 욕망의 배치, 욕망에 의해 만들어지고 작동하며 동시에 욕망이 기계화된 것인 수많은 기계들,  그것들의 집적들, 그  모두가 바로 무의식에 속하는 것이다.  <안티 오이디푸스>의 개념으로 말하면 욕망하는 기계들의 집합, 혹은 기계화된 욕망들의 집합, 그리고 기관 없는 신체가 바로 무의식의 외연을 구성한다. 이를 가타리는 '기계적 무의식' 이라고 명명한 바 있다.  《천의 고원》에서는 "한 마리의 늑대인가. 여러 마리의 늑대인가”를 묻고 있는 이 고원의 말로 표현하면, 늑대 인간의 꿈에서 늑대들의 무리와 그 늑대들이 앉아 있는 호두나무, 바로 그것이 무의식이라는 다양체를 구성하는 기본적인 요소라고 말할 수 있다. 

 

분열분석은 욕망의 배치와 그것을 구성하는 기계들을, 그리고 그것들이 자리잡고 있으며 그것들을 구성하는 질료기도 한 기 관 없는 신체를 대상으로 한다.  무의식이 때론 욕망 내지 욕망의 배치로 정의되기도 하고, 때론 기관 없는 신체로 정의되기도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이다. 이 말은 신체적인 모든것, 신체적인 변용을 야기하는 모든 것, 그리고 그러한 신체와 결부된 인표행위 모두가 바로 무의식에 포함되며, 그 모두가 바로 분열분석의 연구하고자 하는 대상이란 것을 뜻한다. 이는 우리들의 삶 전체를 대상으로 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따라서 분열분석은 스피노자적인 의미에서 삶을 다루는 "'윤리학'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며,  삶을 구성하는 모든 실천, 그리고 그와 결부된 언어활동을 포괄하는 모든 활동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화용론'이라고 해도 좋다. 그 것은 삶을 둘러싼 욕망이 변이선 탈선을 만들고, 그러한 욕망에 대해 통제하고 제어하려는 권력이 작동하며 충돌하고 대립하는, 그 리고 어느새 반대편의 것으로 변환되는 상호적인 관계를 다루는 미 시정치학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런 방식으로 사람 들의 삶을, 민중들의 삶을 분석하는 민중분석이라고 도 할 수 있다.
 
무의식은 하나의 중심으로 환원할 수 없는, 무리지어 움직이는 다양한 욕망의 집합이란 점에서 리좀적 다양체를 이룬다. 따라서 분열분석은 이런 다양체에 대한 분석으로서 ‘리좀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리좀적 다양체, 연속적 다양체를 끊임없이 침범하여 거기에 홈을 파고 무리적인 움직임을 하나의 일자로 귀속시키려는 수목적 다양체, 이산적 다양체, 홈 패인 다양체의 상호관계를 포함한다고 할 수 있다. "리좀학=분열분석=지층분석 = 화용론=미시정치학'이라는 등식은 그리고 곧이어 등장하는 "리좀학=민중분석"이라는 등식은 바로 이러한 사실을 요약해서 보여 준다.
 
 
늑대무리와 호두나무

 

 

<천의 고원>, 혹은 철학적 음악 ?

누군가 "『천의 고원』을 어떻게 읽으면 이해하기 쉽겠는가" 고 질문하자. 들뢰즈는 "오디오에 음반을 걸어놓고 듣듯이 읽어 달라" 고 한적이 있다고 한다.  웃자고 한 얘기일 수도 있지만 그의 책을 음악 듣듯이 들어달라고 주문하는 것은, 책의 리듬을 타고 읽어달라는 것이고, 그리듬을 타는데 익숙해지면 그가 말하려는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한다. 가령 수영을 한다는 것은 물의 리듬을 타는 것이고, 그 리듬에 자신의 리듬을 일치시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리듬을 탄다는 것은 '이해'나 '인식'과는 다른 차원에서 무엇인가를 제대로 실행할 수 있는 능력과 결부되어 있다.

 

책을 읽는 것은 단순히 그 내용을 읽고 이해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유의 감각을 촉발하고, 우리의 감각과 정서를 변용시켜 새로운 사유의 리듬에 적절하게 감응하게 한다. 신체의 표면에 새겨져 있는 무의식적인 삶의 감각을 바꾸는 계기를 만들어 내다. 감각이 바뀌면 새로운 탈주의 선을 탈 수 있다. 들뢰즈/가타리가 『천의 고원』에서 말하는 책이란 그 책이 가지는 리듬을 통해 자신이 가진 기존의 삶의 리듬을 바꾸는 것을 말한다. 

 

<천의 고원>에 이르는 길 

1) 1968년 이전 

철학자들이 만들어냈던 다양한 사고의 선들, 새로운 창조적 사유의 선들이 어떤 하나의 틀 속으로 수렴되거나 갇혀버리게 되고, 결국 그들이 각각 만들어 냈던 다양한 창조와 변이의 선들은 망실되고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된다. 

 

"모순보다 더 심오한 차이를 어떻게 사유할 것인가?" 라는 문제 설정 속에서, '존재'가 아닌 '생성'을 사유하는 것, 무한한 '생성'을 사유할 수 있는 '내재성의 장'을 철학적으로 구성하는 것, 그것이 들뢰즈가 철학사를 통해서 이루고자 했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모든 것을 내재성의 장 안에서 끊임없이 변화해가는 강밀도의 연속체를 다룬다. 

 

2) <안티 오이디푸스> : ‘정신 분석학 비판을 위하여’

이 책 전반에서 사용하는 '욕망하는 생산' 이란 개념은 욕망과 생산이 하나의 동일한 힘이라는 것을 표시합니다. 이를 통화 가족화된 욕망, 오이디푸스화된 욕망에 파열구를 만들어 내고 그들 통해 ‘욕망하는 생산’의 흐름이 분출하며 흐르게 하는 것이다. 정신분석학 자체 혹은 무의식 이론을 혁명적으로 변환시킬 가능성을 시험한다. 욕망에 기초하여 혁명을 다시 정의하고 다시 사유한다. 이론적 변환은 금욕적 틀로부터 탈주하는 게 이중의 질문의 통해 이루어진다. 

 

첫째 “대중은 어째서 마치 그것이 자신을 위한 것이라도 되는 양 자신에 대한 억압을 욕망 하는가?” 라이히와 “왜 인민은 자신의 예속을 영예로 여기는가 ? 왜 인간은 예속이 자신의 자유가 되기라도 하듯 그것을 위해 투쟁하는가 ? 스피노자의 질문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러한 억압적인 욕망의 문제를 바로 ‘억압에 대한 욕망’이라고 말하면서 억압에 길든 욕망을 혁명적 욕망을 변형시키는 것이다. 

 

둘째 “금욕에 기초하지 않은 혁명, 반대로 욕망에 기초한 혁명은 불가능한가 ?” 레닌은 “대중들은 이데올로기라는 거짓된 의식속에 빠져 있고, 혁명의 전위계급이 이들에게 노동자 계급이라는 올바른 계급의식을 일깨 워주면 이들은 혁명의 주체로서 이데올로기에서 빠져나오게 된다. 이와 더불어 욕망이란 기득 권의 향락과 같은 것에 결부되어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들은 사람들에게 도덕적 금욕을 요구하며 대의를 위한 행동으로 나아갈 것을 촉구한다.” 혁명이라고 하는 것은 금욕적 의무나 도덕이 아니라, “정말 하고 싶어서 하는 욕망’에 기초할때 비로소 그 힘이 극대화 될 수 있고 진정 혁명적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3)<카프카>: ‘욕망’에서 ‘배치’로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 권력의 배치들이 다양한 양상, 그리고 권력은 금지하고 억합하는 방식으로 작용하기 보다는 차라리 생산하고 구성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명제, 주체란 그러한 권력의 효과로 만들어진 결과물이라는 명제가 권력과 욕망이라는 관계에 대한 들뢰즈와 가타리의 개념에 큰 변화를 야기한다. 

 

들뢰즈 카타리의 『카프카: 소수적인 문학을 위하여』에서 ‘억압적인 욕망’과 ‘혁명적인 욕망’ 이분법을 포기하고, 욕망이 권력이 되고, 권력이 욕망이 되는 관계를 발견하고 카프 카의 소설을 통해 그것을 확립한다. 카프카의 『성』에서 욕망이 성의 권력이 작동하기 이전에 이미 권력자가 바라는 바에 따라 타인은 물론 자신들의 삶을 길들이고 그에 응하지 않은 아말리아의 가족을 파괴한 것이라고 한다. 또한 『소송』이 보여주는 것처럼 법이라는 초월적 권력은 어떤 특정한 욕망이 법화된 것 이다. 소설의 주인공인 K가 체포되는 이유는 K의 욕망이 법의 자리를 차지한 특정한 욕망과 달랐기 때문이다. 욕망은 순수하거나 고정된 본성을 가진 것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특정한 배치 속에서 특정한 욕망으로 존재 한다. 그 상이한 배치들간의 차이와 대립이 있으며 지배적인 위치를 갖는 경우 권력이란 개념을 부여 받게 된다. 배치가 바뀌면 그것에 지배적인 욕망 역시 바뀌게 된다. 『카프카』는 욕망과 권력이 상호 분리된 것이 아니고, 또한 권력이 초월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욕망과 권력이 내재적인 관계에 있음을 드러내고 이들의 위치가 언제나 특정한 배치 속에서 결정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4) <천의 고원>: 새로운 역사 유물론 

천의 고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배치다. 배치란 어떤 항의 의미를 그것과 연결된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 파악하게 만드는 개념이다. 하나의 사물이나 사실이 그것이 다른 것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다시 말해 다른 것과 어떻게 게열화되는 가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이런 개념에서 들뢰즈는 사물의 의미를, 지시나 의도, 혹은 기호 작용이 아니라 이웃한 항들과의 이웃관계로 의해 정의하려고 한다. 이것이 의미를 사건으로, 생성으로 다루려는 들뢰즈의 구상이 창안해낸 독창적 의미의 논리다. 

 

배치 안에서 각각의 항은 다른 이웃항과 접속하여 하나의 기계로 작동한다. 기계란 부분과 전체가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고 부분이 전체를 위해 존재하는 일반적인 기계를 가리키는 의미가 아니다. 배치 안에서 다른 것과 연결되어 계열화된 모든 항 하나하나가 기계이다. 기계란 다른 기계와 접속하여(연결되어) 흐름을 절단하고 채취 하는 모든 것을 일컫는다. 가령 입은 음식과 연결되면 먹는 기계가 되고, 소리의 흐름과 연결 되면 말하는 기계가 된다. 『천의 고원』에서 모든 것은 배치와 기계를 통해 다뤄진다. 욕망 주체를 기계라고 부른다. 이것은 욕망에서 인격성을 떼어버리려는 의도이다. 욕망이라고 하면 그것을 소유한 주체를 인간으로 보기 쉽기 때문이다. 욕망이 비인격적이고 무의식적인 것이라면 인간의 속어이 아니다. 

 

배치는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앞서 얘기한 물질적 기계들로 이루어진 ‘기계적 배치’이고 다른 하나는 기호와 언표 행위로 이루어진 ‘언표행위의 배치’이다. 이 둘은 하나의 동일한 배치 를 이루는 두 가지 측면이다. 더불어 배치는 탈영토화와 재영토화를 통해 작동한다. 배치가 바뀌면 배치를 이루는 기계들의 접속이 바뀌고 동시에 배치를 이루는 언표행위 역시 바뀌게 된다. 식당의 배치 속에서 입은 먹는 기계가 되고 식당에서의 언표 행위는 일상적인 말들로 이루어진다. 반면 식당의 배치에서 강의의 배치로 바뀌면(식당에서 탈영토화홰서 강의로 재영토화되면) 입은 말하는 기계가 되고 그에 상응하는 언표 행위는 강의와 관련된 이론과 개념으 로 이루어진다.

 

이 지점에서 배치는 맑스의 역사유물론과 연결된다. 맑스는 중세에서 근대 자본주의로의 이 행을 W-G-W’(상품-화폐-상품)에서 G-W-G’(화폐-상품-화폐)로 상품과 화폐의 계열화과 바뀐 것을 통해 설명한다. 맑스는 자본주의가 화폐와 상품의 특정한 계열화를 통해 구성된 특정한 배치라는 것을 드러냈다. 『천의 고원』은 맑스가 선취한 배치의 역사유물론을 다양한 영역으로 확장하고 변형한 책이다. 『천의 고원』은 모든 것을 욕망으로 다루며 또한 욕망을 언제나 특정 한 배치 속에서 다룬다. 욕망의 다른 배치를 만들어 내는 것이 바로 욕망의 문제로 혁명을 사유하고 실천을 이야기 한다. 욕망 및 권력배치의 배치와 그 변환을 다루는 역사이론이요. 욕망/권력의 역사유물론이라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 

책에 대하여

1)책이란 무엇인가

책 이란 무엇인가 ? 책에서 저자가 혼자 말하는 경우에도 인용된 글로 많은 사람들이 말하고 있다. 사람들이 하나의 배치안에서 집합적인 언사를 발하고 있는 것 책이다. 책은 주체를 갖지 않는다. 책은 이용 가능한 폭 만큼이나 많은 대상을 갖는다. 책을 어떤 하나의 대상에 귀착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의미에서 책은 대상을 갖지 않는다. 한권의 책에는 분절선, 선분성의 선들, 지층 및 영토성의 선들이 또한 탈주선과 탈영토화된 선들, 탈지층화의 선들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책은 하나의 배치이다. 상이한 상대 속도를 갖는 흐름들의 복합체라는 의미에서 “책은 하나의 다양체”이다.

소쉬르의 책 <일반 언어학 강의 >은 책이 배치이자 다양체라는 것을 보여 준다. “기호는 지시대상과 무관한다”라는 기호의 자의성에 관한 명제로 기호를 지시체로 부터 탈 영토화 시킨다. 기표적 분절의 선과 기의적 분절의 선이 각각 음운론과 의미론이라는 지층을 형성한다. 기표들의 가치는 어떤 지시체에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기표들과의 관계에 의해 다른 기표와의 차이에 의해 결정 된다. 동일한 기표가 상이한 의미를 갖게 되는 지점을 보여 주는데 이는 기표와 기의가 대응 한다고 하는 소쉬르의 다른 명제를 탈영토하는 명제이기도 하다. 이책으로 부터 구조 언어학처럼 새로운 음운론적 언어학을 끌어내거나, 라캉처럼 무의식의 언어적 구조와 ‘기표의 물질성’을 끌어낼 수도 있다. 반대로 그흐름을 거슬러 바흐친 처럼 음성학과 파롤이 강조된 새로운 종류의 언어학적 사유를 이끌어 낼 수도 있는 것이다.

맑스의 <자본>은 자본주의 생산 양식에 대한 책이지만 정치 경제학에 관한 책이기도 하다. 잉여 가치라는 개념은 정치 경제학이라는 거대한 담론적 지층을 깨며 파열구를 만들어 낸다. 이를 통해 새로 발전된 ‘맑스주의 정치경제학”으로 재영토화 한다. 이 책은 정치경제학의 최고봉이라고 하겠지만(구 소련이나 동구의 정통파), ‘사물화된 논리’에 따라 자본의 논리만을 일반적으로 서술한 책(네그리), 자본주의에서의 사물화와 소외의 메커니즘에 대한 책(루카치), 자본주의 비판이 이데올로기에서 과학으로 비약한 책(알튀세르)으로 볼수 있다. <자본>이라는 하나의 책에서 연원하는 것이지만 어느 것도 동일하지 않은 상이한 책이 된다.

2) 책과 외부

책은 외부의 산물이지만 책의 외부는 그 책과 만나게 되는 다른 책들을 의미한다. 그것이 대결하고 있는 어떤 사유들 , 그 책을 통해서 읽는 사유들 아니면 그 이미 씌어진 상태에서 어떤 책이 새로이 만나게 되는 역사적 사건들 등이 모두 외부이다. 이 처럼 어떤 책도, 이미 완성된 작품의 경우조차 그것이 어떤 외부와 만나는 가에 따라 다른 내용의 책이 되고 다른 효과를 발휘하며 다른 의미를 갖는다.

책이 외부성을 갖는다는 말은 책이 어떤 외부와 만나고 접속하는 가에 따라 책-기계로 작동한다는 것을 함축한다. 책이란 기호의 연쇄나 흔적의 집합인 텍스트가 아니라 실제로 유효하게 작동하며 특정한 효과를 생산하는 기계이다. 책을 통해 읽게 되는 모든 텍스트는 책이 그 외부와 만나면서 만들어지는 주름이다. ‘모든 텍스트는 그 외부에 의해 접힌 주름 위에 씌어진다.” 외부에 의해 책이 변형되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과 만나는 외부에 대해서 어떤 효과를 생산하는 기계라는 것을 내포한다. 새로이 다가올 외부와의 어떤 만남에 의해 다른 것이 된다고 보는 경우에 책은 다가올 장래와 연결된 것이 된다.

 

3) 책의 유형들

책이란 단지 물질적 힘을 갖는 기호의 연쇄나 흔적의 집합인 텍스트가 아니라, 실제로 유효하게 작동하며 특정한 효과를 생산하는 기계이다. 이 책을 책-기계로 중심화된 사유를 깨부수고 동일화하는 논리를 파괴하며, 새로운 다양체를 생산하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만드는데 ‘이용’해달라고 한다. 책을 실천과 이용의 문제로 보는 입니다. 책에는 세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첫번재 수목형의 책, 혹은 뿌리 유형의 책이다. 책의 내용은 결론으로 귀착되면 그것을 통해 하나의 전체성을 획득하는 유기적 체계로 구성된다. 나무나 뿌리처럼 하나의 중심으로 귀결되고 그것을 통해 하나의 전체가 되는 유기적인 통일체라고 보는 관점이다. 각각의 장들이 결론을 위해 점점 상승하는 혹은 결론을 향해 모여가는 그런부분들로 구성하는 것이다.

두번째 유형은 곁뿌리 내지 총생뿌리의 유형이다. 여러편의 책들에 해당되는데 전집에 실린 여러편의 책이나 글들은 하나의 결론으로 귀착되는 중심이 없다고해도 그것을 지은 저자로 귀착되는 통일성이 있을 것이란 생각이다. 사상가의 전집을 읽으면서 그 통일성을 깨지 않는 범위에서 이해하려고 한다. 변화의 바탕에 깔려 있는 문제의식 내지 일관성을 보려고 한다. 저자가 보여주는 일관성이란 한 사람이 평생을 바치게 만든 화두를 통해 각이한 그의 책을 하나로 묶이는 것을 뜻한다. 그가 쓴 책들, 그가 말 한 대답들은 다양한 외부에 의해 각이한 주름으로 펼쳐진다. 사회 역사적 조건이 달라지거나 연구하고 참조하는 책이나 사람이 달라지며 혹은 저자 자신의 체험이 달라지면 동일한 화두를 들고서도 다른 대답들을 하게 된다. 질문과 화두의 단일성이 이질적인 것들의 접속과 변이를 낳는 방식으로 다야한 것들을 낳으면서 증식할 수있다.

세번째 유형은 리좀적인 유형이 책이다 곁뿌리들을 끌어들이며 통일 시키는 중심, 일자로서의 중심을 제거한 뿌리들의 망이 리좀이다. 리좀과 같은 양상으로 구성된 책이다. 각각의 장은 중심 정점도 없는 고원이고 그 고원 같은 장들을 독립적으로 읽을 수 있다. 동시에 다른 모든 장들에 연결되어 있다. 결론이 있지만 그것은 각각의 장들을 통합하는 중심이 아니라 각각의 고원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개념들의 집합이다.

리좀의 몇 가지 특징들

1)접속의 원리

접속은 A와 B가 등위적으로 결합하여 A도 아니고 B도 아닌 제 3의 것인 C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접은 A냐 B냐를 선책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둘중 하나를 배타적으로 선택하는 배타적 이접과 상이한 경우를 허용하는 포함적 이접이 있다. 이분법은 둘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도록 요구하거나 호오의 가치 판단을 포함한다. 통접은 다양한 요소들이 결합하여 어떤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는 것이다. A와 B는 물론 C, D등 그 이상의 것들이 모여 모두가 어떤 하나로 귀결되는 것이다. 소화기관, 호흡기관, 순환기관, 배설기관 등이 모여 하나의 유기체를 형성하는 것이다. 이를 유기적 통접이라고 한다. 임금 이윤 소득 이자 등등이 모여 통화량이라고 부르는 하나의 화폐 흐름이 된다. 각각이 탈형식화되어 통화량이라고 부르는 하나의 흐름으로 통합된다. 흐름으로서의 통접입니다. 이접과 통접은 관련된 항들을 어떤 하나의 방향으로 몰고 간다. 반면 접속은 두항이 등가적으로 만나서 제 3의것 새로운 무언가를 생성한다. 여기에는 어떤 귀결점도 없고, 호오의 선택도 없다. 접속이 리좀의 원리라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 이다.

2)이질성의 원리

리좀은 이질적인 모든 것에 대해 새로운 접속 가능성을 허용한다. 맑스의 사유와 다양한 외부가 서로 뒤섞이면서 새로운 사유의 선들이 여러가지 방향으로 증식된다. 이를 맑스적 사유의 리좀적 증식이라고 할 수 있다.

3)다양성의 원리

진정한 의미에서 다양성이 존재하는 것을 뜻한다. 진정한 다양성이란 차이가 어떤 하나의 중심, ‘일자’로 포섭되지 않는 다양성이다. 차이가 차이 그 자체로서 의미를 갖고, 동일자의 운동에 포섭되지 않는 것이다. 종류가 늘거나 무언가가 추가되어 ‘다양성’이 증가하기는 하지만 전체는 아무런 변화가 없는 이런 종류의 다양성은 수목형 다양성이며 사이비 다양성이다. 리좀적 다양성은 어떤 하나의 척도, 하나의 원리로 환원되지 않는 이질적인 집합이고, 따라서 하나가 추가되는 것이 전체의 의미를 크게 다르게 만드는 그런 다양성이다. 배치라는 개념이 그런 리좀적 다양체를 함축한다.

4)비의미적 단절의 원리

리좀적 다양체는 비의미적인 단절의 윈리로 특징지을 수 있다. 비의미적인 단절은 무나 두부를 자르는 것처럼 어던 대상이나 흐름을 일정한 규칙에 따라 자르는 절단과 대비된다. 단절은 어떤 주어진 선과 연을 끊는 것이고 그 선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선안에서 만들어지는 의미화의 계열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소리의 절단(분절)이 의미적인/기표적인 기호를 만드는 것과 반대로, 단절은 기존의 기표적인 계열에서 벗어나 다른 계열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이런 단절을 탈영토화내지 탈주와 상관적인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다.

단절의 예로 말벌(수컷)과 오르키데를 든다. 난초의 일종인 오르키데는 말벌 암컷 ‘흉내’를 내어 말벌 수컷을 끌어들임으로써 꽃가루를 퍼뜨립니다(오르키데의 말벌되기와 말벌의 오르키데 되기) 오르키데와 말벌은 이질적이지만 리좀을 만든다. 고양이의 C형바이러스는 수백만 년 전 지중해 연안에 살던 선조 개코원숭이(비비) 바이러스가 선조 고양이에게 옮아 내재화 된다. 리좀은 이런 식으로 그 선들을 넘나들고 횡단하며 접속하는 것이다. 이처럼 종을 넘나들며 진화하는 것을 ‘비평행적 진화’라고 하며, 덜 분화된 것에서 더 분화된 것으로 나아가는 진화 모델에서 벗어난다는 점에서 리좀적입니다. 두 개의 지층이 나란히 가며 소통한다는 의미에서는 ‘두 지층 간의 평행론’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비기표적인 단절을 두 지층간의 평행론이라고 한다. 두개의 지층이 나란히 가면서 소통한다는 점에서 무한원점에서는 만나는 평행선과 같다고 한다. 스피노자는 실체가 갖는 다양한 속성들이 각각의 지층을 이루면서 평행성을 갖는다는 뜻에서 평행론을 주장하였다.

5)지도 그리기와 전사술

지도 그리기와 전사술은 모상, 모방, 재현과 재생산과 반대되는 개념이다. 지도는 길의 분기점들과 간단한 지형지물만을 표시한 약도에서부터 정교한 지도에이르기 까지 다양 하다. 길을 찾기 위한 것으로 구체적인 행동의 경로를 찾으려고 할때 사용된다. 즉 지도란 우리가 행동의 경로와 진행 분기를 표시하여 행동의 지침으로 삼는 일종의 다이어 그램이다. 지도에서 중요한 것은 행동과 삶의 길/방법이 접속되고 분기하는 양상이고 그 경로들의 위상학적 관계며, 그 경로를 가는데서 만나게 될 장애물이나 위험물의 적절한 표시이다. 여기서 선들의 접속으로 구성되는 다양체로서 리좀이란 개념을 떠올릴 수 있다. .정확한 모상을 지도 안으로 옮겨 놓을때 조차 그것은 모상을 지도의 리좀적인 선안에서 변용시키는 것이라고 해야 한다. 현실에 따라 지도를 그리지만 그려지는 지도에 따라 변형되는 현실이다. 이 책에서 하려고 하는 것은 일종의 지도 제작법을 알려주고 그것으로써 사람들이 생산적이고 긍정적인 삶의 지도를, 행동과 실천의 지도를 만들도록 촉발하고자 한다. 자본주의 세계에서 삶을 둘러싸고 그것을 포섭하는 거대한 몰적 선분상의 선들, 거기서 갈라져 나가는 유연한 분자적 선분성의 선들의 배치에 대해서 일종의 잠재적 지도를 그려주고 거기서 벗어나는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탈주선들을 그리는 법을 알려주는 것이다.

수목적 사유와 리좀적 사유

1)수목적 체계와 위계적 체계

다양하게 분기하는 선들이 하나의 중심으로 귀착되는 것은 수목적 체계이다. 중심에 가까운 것과 먼 것 간에 위계가 발생하며, 주변의 잔가지나 곁뿌리들을 줌심에 동일화하고 그것과 포개는 메커니즘이 작동한다. 그 잔가지나 곁뿌리들은 중심과의 관계에서 의미화 되고 그 중심을 통해서 주체화 된다. n명의 사람 가운데 독재자를 제거하는 것 즉 수목형 체계에서 오직 하나의 중심인 일자를 제거하는 것을 n-1이라고 표시한다. 중심의 제거, 바로 이것이 수목적 체계와 대비되는 리좀적 체계를 정의하는 명제이다. 리좀이란 비체계가 아니라 비중심화된 체계이며 각각의 부분들이 중심으로 귀속되는 상위의 이웃을 통하지 않고 직접 이웃과 만나고 접속하는 체계다. 그 자체로 유의미한 다양한 집결지를 가질 수 있으며 그런 만큼 여러 방향으로 열린 체계고 접속되는 항들이 늘거나 줄어 듦에 따라 성질이 달라지는 가변적 체계 라고 할 수 있다.

2)초월성과 내재성

초월성은 유럽에 고유한 질병이다. 모든 것을 근거나 원인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는 사유, 그리하여 그것을 첫번째 원인이나 원리로 삼아 모든 것을 설명하는 사유가 그것이다 . 이런 사유는 자신이 찾아낸 그 첫번째 원리를 모든 것을 설명하는 ‘보편적인 것’으로 만든다. 이 원리 자리에 어떤 존재자가 들어설때 그걸 제1원인이라고 부르든, 그것은 초월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일종의 신이다. 서양 형이 상학을 신학적으로 보아 ‘존재-신-론’이라고 명명하는 이유이다. 반면 연기적인 관계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진다는 생각이다. 어떤 것이 무엇과 관계하는 가에 따라 본질이 달라지고 관계의 질(가령 상생과 상극)이 달라진다는 생각이다. 내재적인 사유는 오직 상호간의 내재적인 관계에 의해 모든 것을 포착한다.

3)리좀 속의 수목, 수목 속의 리좀

리좀 구조이지만 수목적인 가지들이 뻗어 나갈 마디들을 갖고 있으며 그것을 통해 수목적인 체계로 변형될 가능성이 있다. 반대로 수목적인 체계 또한 뻗어 나간 가지들 사이에 몇 개의 선을 새로 긋는 것만으로도 하나의 중심으로 결집되는 양상을 전혀 다른 것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나무-뿌리와 리좀-운하라는 두 모델의 대립이 아니라 “끊임없이 세워지고 부숴지는 모델에 관한 것이며 끊임 없이 연장되고 파괴되며 다시 세워지는 과정’이다. 모든 것이 연기적인 조건에 따라 다른 것으로 바뀔 수 있다. 그런점에서 리좀도 나무도 어떤 자성을 갖지 않는다.

리좀 그것은 일자적 중심을 제거함으로써 내재성으로 나아가는 방법이다. 초월성이란 질병을 치유하는 방법이다. 내재성이란 관계에 따라 어던 것의 본질이 달라진다고 보는 사유방식을 의미한다. 이는 모든것을 한아의 근거, 하나의 초월적 원리로 환원하는 초월성과 대립되며 그러한 초월자를 제거하거나(n-1) 그것을 무나 공으로 전복시킴으로써 이루어진다. 따라서 내재성에서 본다는 것은 어떤 것의 고정된 본질, 내적인 본질이 없으며, 다만 다른 것(외부)과의 관계에 따라 그 본질이 달라진다고 보는 것을 뜻한다. 이런 이유에서 내재성은 외부라는 개념과 대립하는 게 아니라 정확하게 외부의 사유고 외부에 의한 사유라고 말할 수 있다. 리좀은 초월자를 제거함으로써 나무나 뿌리의 초월성을 내재성으로 바꾸는 것이며, 외부와의 접속이란 원리를 통해 ‘외부’를 통해 사유한다는 점에서 내재성의 구도를 형상한다. 내재성의 원리에 따라 접속 가능한 양태들 전체의 장을 ‘내재성의 장’이라고 말한다.

 

 

수목형 vs. 리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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