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는 어떤 사물과의 마주침에 의존하는데, 이 마주침은 우리에게 사유하도록 강요하고 참된 것을 찾도록 강요한다”(질 들뢰즈) "만들어진 신(김영사, 도킨스)" 과의 마주침은 종교에 대해 사유하고 고민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리처드 도킨스가 종교에 대한 문제제기와 과학적 논증을 통한 신의 부재를 이야기 하였다. 이 책을 펼칠때 종교를 가졌던 독자들은 책을 덮을때는 무신론자가 되어 있을 것라고 한다. 어린 시절의 교화가 치밀하지 않았거나, 또 어떤 이유로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거나 그것을 극복할 정도로 강한 지성을 타고난 사람들, 열린 마음을 지닌 사람들은 약각만 도와주면 종교라는 악덕에서 벗어 날 수 있다고 한다.
종교를 악덕으로 표현한 것은 종교없는 세상을 상상해 보라로 대신 할 수 있다. 자살 폭파범도 없고, 911도, 런던폭탄테러도, 십자군도, 마녀사냥도, 화약음모사건, 인도 분할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전쟁도,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와 브스니아에서 벌어진 대량학살도, 유대인을 '예수 살인자'라고 박해하는 것도, 순진한 사람들의 돈을 우려 먹는 복음전도사도 없다.
이 책에서 신에 대해 이야기 할때 유신론자의 초자연적 지성을 말한다. 즉 우주를 창조하는 큰일을 했을 뿐아니라 여전히 주위를 맴돌면서 자신이 창조한 것의 운명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자연이나 우주 또는 그 움직임을 지배하는 법칙을 가리키는 비 초자연적 동의어로 사용하는 범신론의 신을 의미 하지 않는다. 범신론의 신은 물리학자들의 신이라고 할 수 있다.
신 존재에 대한 증명에 대한 러셀의 차주전자 우화로 그 거증책임이 불신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신자에게 있다고 이야기 한다. 신이 존재 한다는 가설이 우주에 과학적 가설 중 하나로 다른 모든 가설처럼 회의적으로 분석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많은 사람들은 이미 수용된 독단적 견해는 독단론자들이 아닌 회의론자들이 반증해야 하는 것처럼 말한다. 물론 그것은 잘못이다. 내가 지구와 화성 사이에 타원형 궤도를 따라 태양을 도는 중국 찻주전자가 하나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 찻주전자가 우리의 가장 강력한 망원경으로도 보이지 않을 만큼 아주 작다는 단서를 신중하게 덧붙인다면, 아무도 내 주장을 반증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주장이 반증될 수 없다고 해서 그것을 의심하는 것은 인간이성에 대한 용납하기 어려운 억측이라고까지 내가 말한다면 그건 헛소리로 여겨져야 옳다. 하지만 그런 찻주전자가 존재한다고 옛 서적에 명확히 나와 있고, 일요일 만다 그를 신성한 진리라고 가르치며, 학교에서도 그를 아이들의 정신에 주입시킨다면, 그 존재를 선뜻 믿지 못하는 것은 괴짜라는 표시가 될 것이고, 이를 의심하는 자는 계몽시대의 정신과의사나 그 이전의 종교 재판관의 이목을 끌게 될 것이다.(러셀)
신의 존재와 관련된 각종 논증들을 보여준다. 성서는 신의 존재를 입증하는 증거가 아니라고 한다. 대다수의 명성 있는 성서학자들은 '성서'를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을 담은 신뢰할 만한 기록으로 보지 않는다. "복음서들은 모두 예수가 사망하고 오랜 시간이 지난뒤에 쓰였다. 심지어 예수의 삶에 관해 거의 언급하지 않은 사도 바울의 서간들보다 한참뒤에 쓰인 것이다. 그뒤로 모든 복음서들은 종교적 의도를 지닌, 오류에 빠지기 쉬운 필경사들을 통해 복사되고 또 복사 되었다."고 한다.
대부부의 기독교 신자들의 성경에 신의 존재를 의지한다. 성경 내용이 진실임을 믿는다. 진실인 것과 진실이라고 믿는 것의 차이의 구분이 필요한 부분이다. "크레도 퀴아 압수드룸" 불합리하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 중세의 관용어이다. 종교가 진리인지가 중요한게 아니라 그것이 나에게 진리인지가 중요하다.라는 말이 생각났다.
신의 비존재를 어떻게 확인 하는가 ? 신이 없다면 생명은 어떻게 출현할 수 있었겠는가 ?
비개연성 논증을 통해 복잡한 것들이 우연을 통해 출현할 수 없다고 말하지만 신의 존재는 설계자 자신의 기원이라는 더 큰 문제를 제기 하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지적으로 설계할 수 있는 존재는 더욱 개연성이 없을 것이 분명하며 신은 기 지독한 회귀를 종식시키기는커녕 극도로 악화 시킨다고 표현한다.
생명출현은 찰스 다윈의 자연선택설을 통해 훨씬 더 경제적이고 우하하게 설명되며, 유일한 대안이라고 이야기 한다.
신이 무엇인가의 설명이 아니다. 그것은 설명의 부재, 어깨를 으쓱하는 것, 영성과 의식으로 치장한 '난 몰라'다. 누군가가 무언가를 신의 공로로 돌린다면, 일반적으로 그 말의 의미는 그것을 자신의 능력 밖의, 이해할 수 없는 요정과 같은 범주로 본다는 것이다. 그 녀석이 어디에서 왔는지, 설명을 요구하면, 그것이 언제나 존재하고 있었다거나 자연 바깥에 존재하는 것이라는 등의 모호하고 사이비 철학적인 답변을 들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그런 대답은 아무것도 설명해 주지 않는다. 신앙은 우리가 가진 이성의 능력을 훌쩍 '뛰어넘을" 것을 요구하는 터무니 없는 것이다.(키에크케고르)
인류학자와 역사학자는 모든 문화권에 종교가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사람들은 과학적 사실과도 명백히 모순되는 신앙을 지니고 있으며 손실을 무릅쓰고 거기에 시간과 자원까지 투자한다. 그들은 종교를 위해 죽거나 종교를 위해 죽인다. 우리는 당혹스러워하면서 왜나교 묻는다. 종교적 행동은 빗나간 것 즉 다른 상황에서 유용한 혹은 과거에는 유용했던 심리적 성향의 불운한 부산물 이라는 견해를 들어 내다. 이 의견에 따르면 우리 조상들에게서 자연적으로 선택된 성향은 종교 자체가 아니었다. 그것은 다른 혜택이었고, 그것이 부수적으로 종교적 행동으로 발현되었을 뿐이다 라고 말한다.
우리는 어떤 종보다도 더 앞선 세대들의 축적된 경험을 토대로 생존하며, 그 경험을 아이들의 안녕과 복지를 위해 대물림한다 이러한 경험으로 획득된 말은 의심하지 말고 따르라. 일반적으로 아이에게 매우 유익한 규칙이다. 그러나 현재에는 그것이 잘못될 수 있다. 빛을 나침반으로 이용하는 나방의 특성이 촛불을 향해 달려들어 의도하지 않은 '자살'로 이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천성적 이원론과 목적론은 적절한 조건이 주어지면 종교로 향하게끔 성향을 부여한다. 우리의 타고난 이원론은 영혼을 몸의 통합된 일부가 아니라 몸에 깃든 별개의 것으로 믿게 한다. 아이의 목적론은 더욱 확연히 종교를 받아들이게끔 우리를 설정해 놓는다. 모든 것이 목적을 지닌다면, 그것은 누구의 목적인가 ? 물론 신의 목적이다.
우리는 종교 없이 선할 수 있는가 ?
고대에 우리는 가까운 친족과 잠재적인 보답자에게만 이타적일 수 있었다 오늘날 그 제한조건은 사라지고 없지만 그 경험 규칙은 남아 있다. 왜 사라지지 않았을까 ? 그것은 성욕과 마찬가지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이성(불임이나 다른 어떤 이유로 자식을 낳을 수 없을지도 모를 상대)에게 욕망을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로 울먹이는 불행한 사람(친척도 아니고 보답을 받을 수도 없는 눈군가)을 볼때 어쩔 수 없이 측은 지심을 느낀다. 다윈주의적 실수다. 그러나 그것은 다행스럽고 고귀한 실수다 도덕감정이 종교이전의 다윈주의적 과거에 깊이 뿌리를 박고 있다 우리의 도덕적 판단을 추진하는 것은 수백만년에 걸쳐 진화한 마음의 능력중 하나인 일종의 보편 도덕 문법이다.그 안에는 다양한 도덕 체계들을 구축할 원리들이 포함되어 있다고 말한다.
서구인들과 거의 접촉이 없고 공식 종교도 지니지 않는 중앙아메리카의 쿠나족을 대상으로 그 도덕을 실험해 보았다.그 결과 우리와 똑같은 도덕적 판단을 내린다. 무신론자와 종교인의 판단에 통계적으로 의미 있는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선하거나 악하기 위해서 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교회에 가면 착한 사람을 만날 수 있다라고 생각은 잘못일지도 모른다.
전쟁의 동기로 더 설득력이 있는 것은 자신의 종교가 유일하게 참된 종교이고, 모든 이단자들과 경쟁 종교의 추종자들은 죽어야 한다고 노골적으로 비난하며, 신의 병사들은 순교자의 천국으로 진행한다고 명확히 약속하는 경전의 뒷받침을 받는 흔들림 없는 신앙이다. 자살 테러와 인간 폭탄의 양산이 이 신앙이다. 이 신앙은 아이들이 선택한것이 아니었다. 부모님의 종교나 태어난 곳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슬람 아이가 아니라 이슬람 신자의 아이이다. 그 아이는 너무 어려서 자신이 이슬람교도 인지 아닌지도 모른다.
도킨스는 특히 근본주의 종교에 적대적이다. 과학적 탐구심을 적극적으로 꺾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마음을 바꾸지 말고, 알아낼수 있는 것들을 알려고 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그것을 과학을 전복시키고 지성을 부패시킨다. 근본주의 종교는 수많은 순진하고 선량하고 열의가 있는 젊은이들의 과학 교육을 망치려고 필사적이다. 비 근본주의적인 양식 있는 종교는 그런 짓을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종교는 아주 이른 시기부터 아이들에게 의심없이 믿는 것이 미덕이라고 가르침으로써 근본주의가 활개 칠 세상을 만든다.
전쟁의 동기로 더 설득력이 있는 것은 자신의 종교가 유일하게 참된 종교이고, 모든 이단자들과 경쟁 종교의 추종자들은 죽어야 한다고 노골적으로 비난하며, 신의 병사들은 순교자의 천국으로 진행한다고 명확히 약속하는 경전의 뒷받침을 받는 흔들림 없는 신앙이다. 자살 테러와 인간 폭탄의 양산이 이 신앙이다. 이 신앙은 아이들이 선택한것이 아니었다. 부모님의 종교나 태어난 곳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슬람 아이가 아니라 이슬람 신자의 아이이다. 그 아이는 너무 어려서 자신이 이슬람교도 인지 아닌지도 모른다.
종교의 역할 중에 하나가 두려움의 위로라고 한다. 하지만 종교 없이도 위로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철학자는 노인이 죽는 순간이 그다지 특별하지는 않다고 지적한다. 한때 그였던아이는 오래전에 '죽었다' 갑자기 목숨이 끊어져서가 아니라 성장했기 때문이다. 노인이 마침내 숨을 거두는 순간도 그의 평생에 걸쳐 진행된 느린 죽움들과 다를바 없다. 저자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한다. 태어나기 전 영겁에 걸친 세월을 죽은 채로 있었고, 그사실은 내게 일말의 고통도 준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설령 활짝 열린 과학의 창문들이 처음에는 대대로 내려온 인간화한 신화들이라는 안락한 실내 온기에 적응되어 있던 우리를 덜덜 떨게 할지라도 결국에는 신선한 공기가 우리에게 활력을 불어넣고 드넓은 세상이 우리 앞에 장엄함을 드러낼 것이다. 신이 사라지면 틈새가 생길것이고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그것을 메울 것이다. 저자는 현실세계의 진리를 찾으려는 정직하고 체계적인 노력인 과학을 그렇게 활용하고 있다고 한다.
종교에 대한 마주침을 원하는 사람, 당연하게 생각했던 믿음을 고민하고 스스로 선택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