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리치는 1926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나 얼룩반점 개 달마티안의 원산지인, 소박한 동유럽 발칸반도의 달마티아에서 성장했다. 이곳에서 보낸 어린 시절은 일리치의 소박한 자율의 삶과 생각의 기본이 되었다. 동유럽 출신의 비주류 사상가들이 서유럽 주류의 사상을 전복하는 이단의 혁명은 일리치의 경우에도 분명하게 나타난다.

 

아버지는 크로아티아인, 어머니는 유대인인 일리치는 유럽을 뒤덮은 반유대주의 탓에 대도시인 빈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곳에서 일리치는 프로이트의 손을 잡고 산책하면서 정신분석학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도 했지만, 다시 1942년 이탈리아 피렌체로 도피해야 했고, 10대의 나이로 레지스탕스에 참여하기도 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신부가 되기 위해 로마 바티칸의 그레고리안 대학교에서 신학과 철학, 이어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 대학교에서 역사학을 공부해 아널드 토인비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폭넓은 지식과 11개 언어에 능통해 바티칸 국제부에 들어갔으나, 가톨릭의 관료주의와 배타적인 보신주의에 질려 곧 사퇴하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1951년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중세사상을 연구하다가 뉴욕에서 푸에르토리코 이주민들을 위해 4년간 신부로 일했다. 1956년 푸에르토리코의 가톨릭대학교 부총장으로 임명돼 남미에서 활동할 사제들을 위한 집중훈련센터를 설립했으나, 기독교당 결성에 반대하고 가톨릭이 반대한 산아제한에 찬성한 탓에 부총장직을 사임해야 했다. 이후 도보로 남미를 횡단했다.

 

1961년 멕시코의 쿠에르나바카에 대안적 학문공동체인 ‘국제문화형성센터’(1967년 ‘국제문화자료센터’로 개칭)를 세우고, “학문이란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므로 함께 사례해야 한다”는 이유로 스스로 돈을 내고 가르치며 사람들과 함께 공부했다. 그리고 당시 막 시작된 미국 중심의 후진국 개발을 자립자존적 생활에 대한 전쟁으로 보고, 이를 지원한 로마가톨릭을 ‘문화제국주의’라고 비판했다. 1968년 바티칸에 의해 종교재판에 가까운 심문을 받고, 결국 1969년 ‘정치적인 부도덕’을 이유로 사제직에서 쫓겨났다.

 

당시 그는 무기를 든 카밀로 신부와 카리스마적인 해방사상가인 카마라 신부와 함께 ‘위험한’ 진보적 신부로 불렸으나, 그들과 달리 일리치는 산업사회의 산업적 생산방식 대신 기존의 사회주의와는 다른 자율적 공동사회 구축을 위한 일상생활의 저항적 삶을 제창하고 스스로 실천했다. 즉, 1971년 학교를 비판한 <학교 없는 사회>, 1973년 교통체계를 비판한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와 기술사회를 비판한 <절제의 사회>, 1976년 의료제도를 비판한 <병원이 병을 만든다>, 1977년 전문가사회를 비판한 <인간을 불구로 만드는 전문가>를 발표해 학교와 병원은 각각 교육과 건강의 장애물이며, 근대화가 빈곤을 없애기는커녕 빈곤을 근대화하고, 국가교육에 의해 국민의 언어능력은 쇠퇴한다고 주장했다. 과거의 자율적 생활 주체였던 민중이 그들의 고유한 기술을 박탈당하여 건강은 의사에게, 공부는 교사에게, 교통은 자동차에, 놀이는 텔레비전에, 생존은 임금노동에, 남녀의 고유한 성적 차이는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의해 중성화되는 과정으로 봤다. 따라서 그는 경제발전은 수요에 의한 노예화이지 희소성으로부터의 자유화가 아니라고 비판했다. 이와 같이 경제발전이 인간에게 더욱 큰 자유를 부여한다는 명제를 근본적으로 부정하여 1968년 학생운동 이후 서구의 소비풍요사회, 더 중요하게는 자본주의적 경제발전에 의해 생겨난 잘못된 수요로부터 민중의 자율적 능력을 지키고자 한 제3세계의 발전전략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1976년 센터가 폐쇄되자, 독일과 멕시코를 왕래하면서 중세사를 중심으로 한 저술 및 강의 활동을 한 그는 1970년대 저술과 같은 충격을 던지지는 못하고 오랫동안 잊혔다. 그러나 1978년 노동의 환상을 비판한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 1981년 여성 노동을 분석한 <그림자 노동>, 1982년 여성문제를 다룬 <젠더>, 1985년 물질의 역사성을 다룬 , 1988년 독서 능력을 다룬 , 1992년 상식과 진보를 비판한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 1993년 지식이 책으로 획득되는 기원을 다룬 <텍스트의 포도밭> 등은 1970년대의 계몽적 저술을 심화시킨 것으로 보아야 한다. 안타깝게도 1992년 암에 걸려서 한쪽 뺨에 자라는 커다란 혹이 주는 고통에 시달렸다. 그는 일을 못하게 한다는 이유로 진통제를 대량 투여하는 치료를 거부하고, 스스로 만든 아편 가루를 먹으면서 10년간 일하다가 2002년 독일 브레멘에서 76살에 숨졌다.

 

그의 공식 직함은 신부나 교수였지만, 교수로서는 물론이고 신부로서도 권위주의나 형식주의와는 담을 쌓은 자유인이었다. 죽기 몇년 전 브레멘시로부터 평화상을 받았을 때 그는 수상식장의 화려한 분위기에 대한 묘사로 수상 소감을 시작했다가 그가 브레멘에 갈 때마다 묵었던 친구 집의 소박하고 개방된 분위기, 누구나 초대받는 스파게티와 포도주의 파티, 밤늦게까지 이어지는 활발한 토론, 사람들이 자유롭게 오가거나 멋대로 잠을 자기도 하는 우정과 환대의 묘사로 바꾸어갔다.

일리치는 20세기를 인간을 불구로 만드는 전문가의 시대라고 했다. 그런 전문가의 머릿속에서 나온 화려한 이데올로기나 유토피아가 아니라, 우리들 일반시민 자신의 생활을 스스로 근원적으로 바꾸어보려는 작고 소박한 희망이 더 중요하다.

"전문가 시대는 인간을 불구로 만든다" (박홍규) 
 

 

1961년 뉴욕의 유대인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난 그레이버는 뉴욕주립대와 시카고대에서 공부하고 1989년부터 약 2년간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에서 연구했는데 그것이 그의 학문에 기초가 되었다. 1998년부터 학생들을 가르친 예일대는 2005년 그를 해고했다. 노조에 가입해 제명된 제자를 지지한 탓이라고 그는 말했으나, 더 큰 이유는 1999년 시애틀에서 열린 세계무역기구(WTO) 반대 시위 이후 각종 시위에 참여했던 이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저명한 인류학자들을 위시해 4500명 이상이 예일대를 비판하고 그레이버를 지지하는 탄원서에 서명했으나 소용없었다. 그 뒤 미국에서 20개 이상의 연구직에 지원했으나 모두 거부당했다. 이것이 미국 대학이다. 그나마 영국 대학은 조금 나아서 2008년부터 런던대 골드스미스 칼리지, 2013년부터 런던정경대학원에서 가르쳤다. 그러나 그는 학계를 끔찍이도 싫어했다. 예일대처럼 부끄러운 짓을 일삼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노동자 출신답게 학계의 엘리트주의와 학맥주의를 혐오한 그는 학자들의 천박한 종파주의 속물근성을 철저히 거부했다.미국 학계의 추방은 그를 제거하기는커녕 그의 가장 중요한 저서인 <부채, 그 첫 5000년>을 낳았다. 월가를 점령한 2011년에 나온 그 책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대기업은 부채를 탕감받고 공적 자금으로 구제된 반면 개인은 대출금 반환에 끝없이 시달리는 모순을 계기로 집필됐다. 경제사를 부채사로 보는 그에 의하면 역사적으로 실물 화폐보다 부채가 먼저고 인류 초기의 부채는 공동체 유대를 강화하는 힘이었다. 그래서 중동(오리엔트)에서는 주기적인 부채 탕감이 이루어졌고 중세 종교들은 이자 대출을 금지하여 채무자를 보호했다. 그러나 인간의 모든 행위가 일대일 교환으로 규정되면서 부채가 사회를 파괴할 수 있는 위협으로 등장했다.특히 현대에 와서 채무자가 아닌 채권자를 보호하기 위한 조직인 국제통화기금(IMF)이 미국 주도로 세계 경제를 파괴한다. 아프리카를 비롯해 전세계에서 차입금이 커지자 국제통화기금은 지원 조건으로 구조조정을 요구했고, 각국은 농업보조금이나 의료 등의 사회서비스 예산을 삭감해야 했다. 그래서 그레이버가 현장 연구를 한 마다가스카르에서는 사라졌던 말라리아가 다시 창궐해 1만명 이상이 죽었다. 코로나19에서도 구조조정으로 인한 공공의료의 후퇴가 문제다. 그래서 세계적으로 공공의료 확충이 요구되고 있는데 한국에서만은 거꾸로 의사들이 나서서 반대하는 반사회적 코미디가 벌어지고 있다.

 

부채의 논의는 <관료제 유토피아>에서도 반복된다. 흔히들 시장을 국가권력과 무관한 순수경제현상으로 보지만, 그레이버는 그것이 도시 약탈, 공물 탈취, 전리품 처리 등에 따른 부산물이었고 자유시장이란 19세기 이후 조작된 환상에 불과하다고 본다. 그 시장을 유지하기 위해 엄청난 규제와 규칙 그리고 관료가 필요해졌다는 것이다. 그 결과 지금 우리는 물건 하나를 사기 위해서도 이해할 수 없는 깨알 같은 글씨들이 빼곡한 약관에 동의해야만 한다. 관료제의 이러한 구조적 폭력은 우리의 상상력마저 마비시키고 그것에 저항하면 테러리스트로 간주되는데, 그레이버는 월가 점령 시위의 평화시위 군중을 폭력집단으로 묘사하며 그들을 물리치는 슈퍼 영웅을 그린 영화 <배트맨>을 좋은 예로 들었다. 공권력이라는 합법적 폭력을 행사하는 집행자가 배트맨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영화에 열광하듯이 우리는 ‘전면적 관료주의화’의 희생양인 동시에 관료주의에 매료되고 나아가 동조하는 조력자들이기도 하다.부채나 관료 등에 대한 그레이버의 비판적 관점은 2009년 우리말로 처음 번역된 <가치 이론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에서 부족사회의 삶을 시장경제와 대비시키면서 현재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물리적 시장과 그 배후 논리가 자연스럽거나 불가피하다는 주장을 전복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그에 의하면 유럽에서도 합리적 판단에 따라 만족의 극대화를 추구한다는 ‘개인’이나 그들의 이윤 추구를 매개하는 공간인 ‘시장’ 등은 근대에 갑작스럽게 등장한 개념에 불과할 뿐 아니라 임금노동에 근거한 상품시장 논리도 근대 서양의 일반적인 윤리조차 전혀 반영하지 않은 것이었다.전근대의 재화 교환은 개인적 요구의 충족이나 만족의 극대화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의 형성과 재생산을 위한 수단이었던 반면, 근대적 시장은 물신의 형태로 드러나는 가치의 상징물들을 ‘상품’과 ‘화폐’라는 고착화된 형태로 받아들인 것에 불과했다. 그 극단이 금융과 정치체제 간의 돈이라는 연결고리를 유지·확대해가는 군사 전략과 보수 언론인과 지식인, 경찰에 의해 유지되고 있는 1%를 위한 미국이다. <우리만 모르는 민주주의>에서 그레이버는 2005년 미국의 기업 이윤 중 약 38%가 금융회사에서 나왔고, 비금융회사의 금융 이윤을 더하면 절반이 넘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그들에게 세금을 감면해주고, 도산을 해도 국민의 세금으로 구제해주어 결국 금융 먹이사슬의 하층에 놓인 계급만이 채무자가 되고 있는 것이 민주주의 국가 미국의 현실이다.

 

민주주의가 서양이 아니라 인디언 사회와 같은 비서양에서 나왔다고 주장하였다. 민주주의는 서양에서 시작되었고 서양 것이 진짜니 최고니 하지만 이번 코로나 사태로 그것이 거짓임이 드러났다. 특히 미국 민주주의는 트럼프라는 괴물과 함께 반민주의 계급적인 것임이 드러났다. 미국에서는 돈이 주인이니 민주주의가 아니라 돈주주의다. 특히 의료가 돈이다. 누가 그렇게 만들었나? 의사들이다. 의사니, 변호사니, 목사니 하는 ‘사’자들이 주인인 ‘사주주의’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레이버의 저서 중에 가장 흥미로운 책인 <쓸데없는 직업>에서 그 직업을 가진 사람들조차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느끼거나 필요하지 않다고 느끼는 직업의 전형으로 전문직, 경영직, 사무직, 판매직, 서비스직을 들었다. 그리고 그들의 특성을 관료적 봉건주의라고 했다. 

 

<인류학을 바꾼 아나키스트, 데이비드 그레이버> 박홍규 

 

 

다들 젊었을때 테니스를 시작하는데 나이가 들어 시작 하였다. 해외 프로젝트 수행 중 호텔에 테니스장이 있어 우연히 접하게 되었다. 국내에 복귀하여 레슨을 시작하며 정식으로 배웠다. 하지만 실력은 잘 늘지 않았다. 해외에선 단식 경기도 많이 했는데 한국은 대부분 복식 경기이다. 복식에선 발리 기술이 필수인데 네트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쉬운 서비스와 폴트로 경기 흐름을 방해하기도 했다.  서비스 연습중 어깨에 무리가 갔는지 어깨가 아파서 1년동안 쉬었다.  다시 테니스를 시작하려는데 포핸드와 백핸드도 엉성하다. 나보다 늦게 시작한 직장 동료는 어느정도 수준에 올라 왔다. 어떻게 실력을 향상 시켰는지 물어 보았다. 하늘쌤 RTP 볼머신기를 이용하여 꾸준히  연습했다고 한다. 내게도 이 볼머신기를 추천하였다.

 

볼머신기를 이용하려면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테니스 코트가 필수이다. 집근처에 코트가 있어 볼 머신기를 구매하여 연습을 시작했다. 볼 머신기 하나로 백핸드 포핸드 연습을 혼자 할 수 있게 되었다.  볼을 던져주는 주기도 길고 속도도 빠르지 않지만 볼 머신기 없이 연습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다. 일정하게 던져주는 볼에 맞추어 스트록을 휘두르면 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1시간도 순간이었다. 비간 온 다음날은 약간 물이 스며든 공도 넣어서 연습을 하였다. 볼 던져주는 주기도 더 길어 지고 속도가 더 늦어지면 배터리를 교체해야 하는 주기가 도래 한 것이다.  대형 배터리르 6개를 교체하면 볼머신기는 이전의 힘을 찾았다. 

 

 몇주전에 볼 머신기가 고장이 났다.  모터 돌아가는 소리는 들리는데 공이 나오지 않는다.  하늘쌤 RTP 볼머신기의 고질고장인 스프링 끊어짐을 예상했다. 볼 머신기를 추천해준 동료도 볼머신기를 오래  볼 발사후 스위치를 꺼야 오래 사용할 수 있다고 하였다. 스트링 장력 최소화 상태 보관 방법이라고 연신 이야기 했다.  동료가 제안한 내용을 기억하고 항상 스위치 끌때는 볼발사 소리 후 바로 껐는데 고장이 난 것이다.  열어 보지도 않고 인터넷을 찾았다.  볼머신기 고장으로 스프링 교체한 내용이 올라와 있었다. 스프링 문제로 확정하고 스프링만 찾으면된다고 생각했다. 온라인 몰에서 스프링을 판매 했다. 바로 주문을 넣었다. 스프링이 도착하여 교체하려고 볼 머신기를 열었는데 스프링은 멀쩡 하였다. 

 

하늘쌤 볼머신기
볼머신기 구조(모터)

 

 

볼머신기 고장부분

 

모터가 돌아가면서 공을 쳐주는 플라스틱 부품을 돌려주도록 만드는 부품이 닳아서 없어 졌다. 해당 부품만 구매할 수 있는지  AS센터에 문의 해보니 답변이 없다. 볼머신기를 택배로 보내면 확인 후 수리가능하다고만 하였다. 대체 가능 부품을 찾아보다 택배로 보냈다. 이틀이 지난 수리가 완료 되었다고 문자가 왔다. 비용은 6만이라고 하였다. 부품리 비싸다고 생각하였지만 사용하지 못하는 것보다는 낳다고 생각하여 수리 하였다.

필요한 부품

 

수리 완료

 

리토르넬로는 차이와 반복에서 들뢰즈가 제시한 반복의 개념과 바로크 음악에서 사용되던 음악적 반복의 형식이 만나며 탄생한 개념입니다. 흔히 후렴이라고 번역되지만 이는 개념적 내용을 표현하기에 불충분하며 오해의 여지도 있기에 리토르넬로라고 그대로 음역하는게 더 적절합니다. 이유는 이 개념이 리듬적 반복에서 시작하지만 상이한 부분의 배치를 포함하여 휠씬 포괄적인 의미를 갖기 때문입니다. 일단 리토르넬로를 시에서 사용하는 라임이나 음악에서 사용되는 후렴 같은 것으로 간주하면 그 개념을 크게 오해하게 됩니다. 리토르넬로는 반복될때마다 다르게 반복되는 리듬이나 선율입니다. 그렇기에 동일하게 반복되는 노래의 후렴과는 거리가 멉니다. 음악을 두고 말하자면 그것은 후렴보다는 오히려 대위법이나 소나타 형식에서 변주되며 반복되는 주제와 더 가깝습니다. 프랑스어에도 후렴을 뜻하는 리프레인(refrain) 말이 있지만 그말을 쓰지 않고 리토르넬로라고 썼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이하에서는 인용될 때에도 리프레인을 리토르넬로라고 수정하겠습니다. 

리토르넬로는 좁게는 리듬적 반복을 지칭하지만 박자와 대비 됩니다. 박자란 음악을 시간적으로 분절하는 형식인데 음가와 강약에 의해 리듬의 규칙적인 통일성을 부여하는 척도이지요. 우리에게 익숙한 서양 음악은 2박자 내지 3박자 계열이 대부분인데 2박자와 4박자의 차이는 강약의 박이 다르다는 점이지요. 2박자가 한마디안에서 강약을, 4박자는 강약 중간 약을 동일하게 반복합니다. 박자가 차이 없는 반복이라면 리듬은 차이의 반복이라고 대비할 수 있겠습니다.  가령 군대의 행진에 박자는 있지만 그것만큼 리듬이 없는 것은 없다 하지요. 리듬은 주어진 박자안에서 음가와 강도를 변화시켜가며 차이화 됩니다. 이런 강도적 차이화는 박자 안에서 조차 박자를 교란하고 초과하기도 합니다.  가령 봄의 제전에서 스트라빈스키는 악센트를 바꾸는 것만으도 박자라는 형식을 와해시킬 수 있음을 보여준 바 있습니다. 

음악적 기원을 언급하지 않으면 리토르넬로는 바로크 시대의 협주곡이나 합주 협주곡에서 사용하던 형식을 지칭합니다. 거기서는 T-a T'-b  T"-… T 와 같은 형식으로 총주 투티(tutti)와 솔로가 번갈아 연주되는데 여기서 반복되는 총주 T, T', T'' ... 이런 것들을 리토르넬로라고 하며 그사이에 솔로로 연주되는 부분을 에피소드라고 합니다.  또 이렇게 리토르넬로와 에피소드가 번갈아 연주되는 형식을 리토르넬로 형식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리토르넬로란 반복구를 뜻하기도 하고, 그런 반복구를 이용한 구성형식을 뜻하기도 한다 하겠습니다. 이때 총주 T는 반복될때 마다 조를 바꾸어 연주됩니다. 나중에 고전주의 시대에 자주 사용되는 론도 형식은 이로부터 나온 것인데 반복되는 주제 론도가 동일한 조로 연주된다는 점이 다릅니다. 

들뢰즈 가타리의 개념인 리토르넬로란 동작, 색채, 음향 등을 재료로 만들어 주는 반복구나 형식을 뜻하지만 음향적인 성분이 주도하는 배치를 뜻하기도 합니다. 게다가 배치의 개념으로 사용할 경우에도 리토르넬로는 단지 음향이 주도하는 배치로 국한 되지는 않습니다. 즉 리토르넬로는 음향이나 다른 반복구들이 영토화와 탈영토화를 주도하는 배치 전반을 포괄합니다. 반복되는 요소가 무엇인가에 따라 음향적 리토르넬로, 색채적 리토르넬로, 동작적 리토르넬로 등이 있고 그 기능이 무엇인가에 따라 영토표시 리토르넬로, 구애의 리토르넬로, 경고성 리토르넬로, 사교의 리토르넬로 등이 있는 겁니다.

리토르넬로는 이런 복합적인 개념을 다루기 위해 들뢰즈 가타리는 리토르넬로의 세가지 성분을 구별합니다. 방향적/영토적 성분, 차원적 성분, 이행적 성분이 그것입니다. 리토르넬로의 방향적 성분은 카오스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 어디로 갈 것인지를 찾기 위한 리듬적 반복입니다. 어둠속에서 노래하며 안정을 찾는 아이처럼 반복적 성분을 통해 어디로 갈지 방향을 찾습니다. 이 리듬적 반복을 통해 카오스는 생존 가능한 환경이 되지요. 대개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성분은 여기가 누구의 영토인지를 표시하는 일종의 깃발이자 벽입니다. 예술조차 우선 포스터요 플래카드란 말이 그것입니다. 여기는 나의 집이라는 영토를 표시하는 새들의 노래가 그렇습니다. 물론 노래만은 아닙니다. 반복되는 냄새, 반복되는 동작, 반복되는 가시적 흔적이 모두 그렇습니다. 

베를리오즈나 바그너가 특정 인물의 등장을 표시하기 위해 사용되는 고정 악성이나 라이트모티브도 포스터나 말뚝으로서 동일하게 기능 합니다. 이처럼 주기적 반복의 코드화가 환경을 구성하는 방법입니다. 이 방향적 성분은 모든 배치의 토대가 되는 일차적 성분이란 점에서 하부 배치라고도 합니다. 이는 자신을 둘러싼 무상한 조건을 자신의 환경으로 구성하는 것이란 점에서 카오스에 대한 환경의 응수입니다. 이로써 무상하게 변하는 카오스의 우주는 카오스 모스가 됩니다. 역으로 카오스란 모든 환경이 탄생되는 조건이란 점에서 모든 환경들의 환경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박자가 동일성의 반복이라면 리듬은 차이의 반복이고 반복되는 모든 주제는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 되며 반복됩니다. 뿐만 아니라 대위적인 선율을 동반하여 다른 표정을 갖습니다. 영토적 배치 안에서 이처럼 표현적 차이를 만드는 성분이 리토르넬로의 두번째 성분인데 이를 들뢰즈 가타리는 차원적 성분이라고 합니다. 이로써 영토를 표시하는 방향적 성분의 코드화된 반복의 표현적 스타일을 만드는 차이가 섞여 들어갑니다. 가령 모방 대위법은 하나의 주제를 반복해서 사용하는데 동시에 이와 대응하는 대위적 선율들이 그 주제와 섞여 들어갑니다. 그렇지 않으면 반복되는 선율은 아무리 아름다운 것이어도 금방 지겨워지지요. 포스터나 플랭카드가 예술 작품이 되기 어려운것이 이때문 이지요. 푸가(fugue)는 물론 카논(canon)이나 파스칼리아(passacaglia)처럼 주제가 고집스레 반복되는 곡 조차 이 대위적 선율들로 인해 아름다운 텍스쳐를 갖게 됩니다. 

단순화하여 말하자면 반복되는 주제의 선율 자체는 수평적 방향을 따라 진행된다는 의미에서 1차원적이라면 대위적 선율은 수직 방향으로 음을 덧붙여 텍스쳐를 2차원으로 확장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두번째 성분을 방향적 성분과 대비해 차원적 성분이라고 하는 것은 이러한 의미 입니다. 물론 선율 자체도 고저를 달리하는 음들로 구성되며 강약이라는 성분 또한 갖기에 1차원이라는 말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대위적 성분들이 추가됨에 따라 차원수가 늘어난다는 사실은 틀림 없습니다. 그러니 차원적 성분이란 이처럼 차원수를 늘리는 성분이라는 말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겁니다. 차원적 성분이 추가됨에 따라 이제 애초에 주제나 리듬은 포스터나 깃발에서 벗어나고 영토적 모티브는 표현적 스타일이 됩니다. 이처럼 하나의 배치 안에 섞여 들며 영토적 표현성을 직조해내는 성분이란 점에서 차원적 성분은 내부 배치라고 합니다. 

영화를 두고 말한다면 반복되는 리듬이 여러 장면에 등장하는 공통된 인물과 상응한다면 하나의 장면을 다른 장면과 풍경으로 만들어 주는 것은 다른 선율들이지요. 리토르넬로의 두성분을 리듬적 인물과 선율적 풍경이라는 개념으로 변주하는 것은 이때문입니다. 이는 리토르넬로가 단지 음향적 배치에 국한된 개념이 아님을 잘 보여 줍니다. 리듬적 인물과 선율적 풍경은 단순한 이항 대립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대위법이나 소나타 형식에서 주제가 그러하듯 선율도 반복되면 리듬적 인물이 됩니다. 그 곡의 얼굴이 되는 것이죠. 또한 리듬도 달라지면 다른 풍경을 만듭니다. 역으로 풍경이 달라지면 그 안에서 인물들의 표정도 달라지게 됩니다. 리듬적 인물은 자신을 둘러싼 것이 달라지면 표정을 달리하며 다르게 행동하게 됩니다. 조건이나 상황에 따라 새들의 노랫소리는 달라지고 고정 악상이나 라이트모티브(leitmotif) 또한 변주됩니다. 그때마다 다른 풍경 속에서 다른 표정을 갖게 되는 것이지요. 반대로 풍경이 반복되며 방향적 성분이 되고 달라지는 인물의 언행이 표현적 풍경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여기서도 보이듯 리듬적 인물과 선율적 풍경의 개념은 천의 고원에서 리토르넬로의 고원과 얼굴성의 고원이 연결되는 교차로 입니다. 

이는 흔히 작품에서 표현과 대응하는 내용의 개념을 이해하는 데 중요 합니다. 가령 렘브란트의 자화상들은 한 인물을 그린 그림들이지만 다른 풍경의 얼굴들을 갖고 있습니다. 초상화를 보고 누구를 그린 것인지만을 본다면 그건 작품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사건이 묘사된 그림도 그렇지요. 작품의 재현된 대상이나 묘사된 주제는 그 작품의 내용이 아닙니다. 포스터와 깃발이지요. 얼굴을 그린 그림이 작품이 될 수 있는 것은 그 얼굴이 어떤 감응을 응결시킨 풍경이 될 때 입니다. 작품의 내용이란 작품에 재현된 인물이나 사건이 아니라 그 풍경에  응결된 감응입니다.  이때 풍경은 그 인물이나 그가 겪었을 어떤 사건에 특이한 감응을 표현하지만 종종 그 감응은 그 인물을 벗어나기도 합니다. 

이게 정말 렘브란트야 하게 하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사건도 그렇지요. 이는 탈영토화하는 이행적 성분이 강력할때 발생하는 일입니다. 이행적 성분이란 반복으로써의 리토르넬로를 차이화하는 또 하나의 성분입니다. 방향적 성분과 차원적 성분이 표현적인 스타일로 영토화하는 성분이라면 이행적 성분은 하나의 배치로부터 탈영토화하는 성분입니다. 물론 새로운 배치로의 재 영토화하가 다시 거기 이어지지만 말입니다. 가령 굴뚝새는 둥지를 짓고 노래를 하여 자신의 영토를 표시하는 배치를 구성하는 데 침입자가 다가오는 기색이 있으면 그 노래를 바꾸어 경고성 리토르넬로를 생성합니다. 암컷이 다가오면 날개를 휘저으며 노래의 강도를 낮추고 단순한 트릴로 바꾸어 구애의 리토르넬로를 만듭니다. 

이렇게 노래나 몸짓 혹은 물리적 성분을 추가하거나 변화시킴으로써 영토적 경계의 배치로 혹은 구애의 배치로 이행하게 됩니다. 영토를 바꾸지 않은채 다른 배치로 이행하는 것이지요.  이처럼 하나의 배치에서 다른 배치로 이행하게 하는 성분이 바로 리토르넬로의 이행적 성분입니다. 이행적 성분은 상이한 배치 사이에 있다는 점에서 사이 배치라고 합니다. 카오스의 우주를 자신의 생존을 위한 집으로 만드는 영토적 모티브가 방향적 성분이고 그 집을 멋지게 꾸며 표현적 스타일을 부여하는게 차원적 성분이라면 문이나 창문으로 외부를 불러들이는 것이 이행적 성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불러들인다 했지만 그건 외부적인 것에서 집의 내부를 여는 것입니다. 집 내부를 집 바깥의 우주와 연결하는 것이지요. 이는 작은 변화만으로도 가능합니다. 

인간의 집을 예로 들자면 인간에게 집이란 통상 거주를 위한 환경이고 나의 영토로서 거주의 배치에 속합니다. 하지만 창과 문을 닫고 조명을 바꾸면 성애의 배치로 바뀌고 음식을 준비하여 친구들을 불러들이면 사교의 배치로 바뀌지요. 과거의 장인이나 작가는 집을 작업장의 배치로 만들어 사용했고 최근에 히키코모리는 집을 유폐의 배치로 바꿉니다. 

우주적 탈영토화라는 말을 이해하는 데 더 좋은 예는 음악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서양음악은 1도에서 5도로 갔다가 다시 1도로 되돌아 오는 조성이라는 구조를 갖고 있었습니다. 화성적 탈영토화와 재영토화가 만드는 소리의 배치인 셈입니다. 하지만 이 구조는 3가지 화성적 코드에서 벗어난 반음계의 사용을 허용합니다. 그런데 허용된 반음계가 다시 그로부터 반음계를 낳으며 탈영토화와 운동이 증식될때 조성적 배치는 와해 됩니다. 이러한 탈영토화 운동은 무조음악이나 음열주의 전자음악을 거치며 모든 주파수로 열린 음향적 우주로 나아가게 됩니다. 파동의 우주 혹은 음향적 입자들의 우주이지요. 모든 분절이나 형식에서 벗어난 음향적 진료들의 우주입니다. 형식 실체관계에서 독립된 일관성을 취하는 표현의 진료, 그 진료의 흐름으로 일어나는 우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들뢰즈 가타리가 음악사에서 모던이라고 명명하는 배치는 이처럼 우주로 탈영토화된 음악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간단히 덧 붙이자면 이렇게 리토르넬로의 이행적 성분은 절대적 탈영토화의 선을 그리며 일관성의 구도와 이어지게 됩니다. 

이는 이후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구성의 구도라는 개념으로 변환되어 그들의 예술 이론을 이끄는 탈 영토화의 선을 그리게 됩니다. 우주라고 했지만 이는 우리에게 주어진 즉자적 카오스로서의 우주가 아니라 영토를 갖지 않지만 동시에 모든 영토와 이어져 있는 전체를 뜻합니다. 즉 이행적 성분이 여는 우주란 가령 모든 모든 소리를 구성할 수 있는 비형식화된 진료의 흐름이고 모든 배치로 열린 잠재성의 장 전체를 뜻하지요. 방향적 성분이 카오스의 우주로부터 환경을 구성하고 벽을 세워 영토를 만든다면 이행적 성분은 절대적 탈영토화의 우주를 향해 배치를 개방합니다. 리토르넬로를 통해 우리는 카오스의 우주로부터 영토적 배치로 나아가지만 또한 그것을 통해 우주로 향한 탈영토화의 선을 그리는 겁니다 

생명이란 이처럼 어떤 것을 기존의 지층이나 영토에서 떼어내 다른 배치로 구성하여 이득을 얻는 능력입니다. 생명의 자리란 일관성의 이득이나 탈 지층화의 잉여 가치라고 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 입니다. 요컨데 리토르넬로의 세 성분은 인물과 풍경을 만들며 작동합니다. 영토적 모티브는 반복을 통해 리듬적 인물을 만들고 영토적 대위법은 그 인물을 둘러싼 것들을 풍경화 하며 이행적 성분은 인물과 풍경을 우주로 개방합니다. 이 가운데 주도적인 성분이 무엇인가에 따라 리토르넬로는 다시 상이한 배치로 구별됩니다. 

가령 그들은 유럽 음악사에서 등장하는 양식 내지 시대 개념을 고전, 낭만, 모던이라는 세가지 배치로 재정의 합니다. 고전은 바로크와 고전주의 모두를 포함하는데 카오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방향적 성분이 주도하는 배치의 이름입니다. 이는 대비법에서 주제와 대선율 소나타 형식에서 대립되는 두 주제들처럼 하나를 둘로 나누는 방식으로 구성됩니다. 낭만은 대지적 영토화가 주도하는 배치이고 모던은 우주적 탈 영토화를 여는 이행적 성분이 주도하는 배치 입니다. 

리토르넬로는 리듬적 반복이 작동하는 배치 모두와 관련되지만 들뢰즈 가타리는 동작이나 색채등과 대비해 음향이 주도하는 배치를 리토르넬로라고 규정하기도 합니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우리가 리토르넬로라고 부르는 모든 표현 진료의 집합은 하나의 영토를 그리며 영토적 모티브와 영토적 풍경을 통해 전개된다. 좁은 의미에서 우리가 리토르넬로라고 부르는 것은 배치가 음향적일때 혹은 그것이 소리에 의해 지배될때를 지칭한다. 

이처럼 시각적인 것에 대비해 음향적 성격을 강조하는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 입니다. 두성분의 탈 영토화 계수와 능력이 그것 입니다. 첫째는 소리가 시각적 성분에 비해 탈영토화 계수가 크다는 점 때문입니다. 소리는 탈영토화되면서 점점 더 정련되고 특정화 되며 자율적인 것이 된다. 반면에 색채는 우선 대상이 아니라 영토성에 집착한다. 그것은 탈영토화될 때 해체되어 다른 성분으로 인도 되는 경향이 있다. 둘째는 도래할 민중과 관련된 능력 때문입니다. 그들에 따르면 예술에서 본질적이지만 여전히 결여된 것이 민중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예술가의 문제는 민중의 모던한 탈 군집화가 열린 대지로 나아가는 것이고 탈 군집화로부터 우주적 민중을 만드는 것 탈영토화로 부터  우주적 대지를 만드는 것입니다. 여기서 탈 군집화란 몰적 집단인 개체적 군중으로부터 벗어나는 분자적 이탈의 선을 그리는 것이고 우주적 민중을 만든다 함은 일관성의 구도로 이어지는 긍정적 탈주선을 그리는 것입니다. 소리가 중요한 것은 이때문입니다. 색깔로는 민중을 움직이지 못한다. 깃발은 트럼펫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며 레이저는 소리로 조절된다. 리토르넬로는 무엇보다 우선 음향적이다. 물론 이런 능력은 역으로 파시즘적 방향으로 인도하는 힘이 강력할 수 있음을 뜻하기도 하지만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리트르넬로와 시간에 대한 중요한 명제를 하나 추가하는게 좋겠습니다. 칸트가 명시한바 있지만 칸트주의자가 아니어도 시간은 음악을 비롯한 모든 경험에 선험적 형식이라고 믿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공허한 형식이자 척도인 그런 시간은 따로 없습니다. 스피노노자식으로 말하자면 상이한 부분들이 리듬을 맞추어 하나처럼 움직일때 크로노스가 즉 시간이 만들어 집니다. 가령 우리 신체의 각 부분이 하나의 신체로 작동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그것 입니다. 농부의 시간이란 자연의 리듬과 자신의 활동을 그처럼 동기화하는 형식 입니다. 리듬적 반복으로서의 리토르넬로가 시간을 만드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라는 겁니다.  선험적 형식으로서의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리토르넬로는 시간의 선험적 형식이며 언제나 상이한 시간들을 만들어 낸다는 말이 뜻하는 것은 바로 이것 입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