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젊었을때 테니스를 시작하는데 나이가 들어 시작 하였다. 해외 프로젝트 수행 중 호텔에 테니스장이 있어 우연히 접하게 되었다. 국내에 복귀하여 레슨을 시작하며 정식으로 배웠다. 하지만 실력은 잘 늘지 않았다. 해외에선 단식 경기도 많이 했는데 한국은 대부분 복식 경기이다. 복식에선 발리 기술이 필수인데 네트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쉬운 서비스와 폴트로 경기 흐름을 방해하기도 했다.  서비스 연습중 어깨에 무리가 갔는지 어깨가 아파서 1년동안 쉬었다.  다시 테니스를 시작하려는데 포핸드와 백핸드도 엉성하다. 나보다 늦게 시작한 직장 동료는 어느정도 수준에 올라 왔다. 어떻게 실력을 향상 시켰는지 물어 보았다. 하늘쌤 RTP 볼머신기를 이용하여 꾸준히  연습했다고 한다. 내게도 이 볼머신기를 추천하였다.

 

볼머신기를 이용하려면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테니스 코트가 필수이다. 집근처에 코트가 있어 볼 머신기를 구매하여 연습을 시작했다. 볼 머신기 하나로 백핸드 포핸드 연습을 혼자 할 수 있게 되었다.  볼을 던져주는 주기도 길고 속도도 빠르지 않지만 볼 머신기 없이 연습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다. 일정하게 던져주는 볼에 맞추어 스트록을 휘두르면 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1시간도 순간이었다. 비간 온 다음날은 약간 물이 스며든 공도 넣어서 연습을 하였다. 볼 던져주는 주기도 더 길어 지고 속도가 더 늦어지면 배터리를 교체해야 하는 주기가 도래 한 것이다.  대형 배터리르 6개를 교체하면 볼머신기는 이전의 힘을 찾았다. 

 

 몇주전에 볼 머신기가 고장이 났다.  모터 돌아가는 소리는 들리는데 공이 나오지 않는다.  하늘쌤 RTP 볼머신기의 고질고장인 스프링 끊어짐을 예상했다. 볼 머신기를 추천해준 동료도 볼머신기를 오래  볼 발사후 스위치를 꺼야 오래 사용할 수 있다고 하였다. 스트링 장력 최소화 상태 보관 방법이라고 연신 이야기 했다.  동료가 제안한 내용을 기억하고 항상 스위치 끌때는 볼발사 소리 후 바로 껐는데 고장이 난 것이다.  열어 보지도 않고 인터넷을 찾았다.  볼머신기 고장으로 스프링 교체한 내용이 올라와 있었다. 스프링 문제로 확정하고 스프링만 찾으면된다고 생각했다. 온라인 몰에서 스프링을 판매 했다. 바로 주문을 넣었다. 스프링이 도착하여 교체하려고 볼 머신기를 열었는데 스프링은 멀쩡 하였다. 

 

하늘쌤 볼머신기
볼머신기 구조(모터)

 

 

볼머신기 고장부분

 

모터가 돌아가면서 공을 쳐주는 플라스틱 부품을 돌려주도록 만드는 부품이 닳아서 없어 졌다. 해당 부품만 구매할 수 있는지  AS센터에 문의 해보니 답변이 없다. 볼머신기를 택배로 보내면 확인 후 수리가능하다고만 하였다. 대체 가능 부품을 찾아보다 택배로 보냈다. 이틀이 지난 수리가 완료 되었다고 문자가 왔다. 비용은 6만이라고 하였다. 부품리 비싸다고 생각하였지만 사용하지 못하는 것보다는 낳다고 생각하여 수리 하였다.

필요한 부품

 

수리 완료

 

리토르넬로는 차이와 반복에서 들뢰즈가 제시한 반복의 개념과 바로크 음악에서 사용되던 음악적 반복의 형식이 만나며 탄생한 개념입니다. 흔히 후렴이라고 번역되지만 이는 개념적 내용을 표현하기에 불충분하며 오해의 여지도 있기에 리토르넬로라고 그대로 음역하는게 더 적절합니다. 이유는 이 개념이 리듬적 반복에서 시작하지만 상이한 부분의 배치를 포함하여 휠씬 포괄적인 의미를 갖기 때문입니다. 일단 리토르넬로를 시에서 사용하는 라임이나 음악에서 사용되는 후렴 같은 것으로 간주하면 그 개념을 크게 오해하게 됩니다. 리토르넬로는 반복될때마다 다르게 반복되는 리듬이나 선율입니다. 그렇기에 동일하게 반복되는 노래의 후렴과는 거리가 멉니다. 음악을 두고 말하자면 그것은 후렴보다는 오히려 대위법이나 소나타 형식에서 변주되며 반복되는 주제와 더 가깝습니다. 프랑스어에도 후렴을 뜻하는 리프레인(refrain) 말이 있지만 그말을 쓰지 않고 리토르넬로라고 썼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이하에서는 인용될 때에도 리프레인을 리토르넬로라고 수정하겠습니다. 

리토르넬로는 좁게는 리듬적 반복을 지칭하지만 박자와 대비 됩니다. 박자란 음악을 시간적으로 분절하는 형식인데 음가와 강약에 의해 리듬의 규칙적인 통일성을 부여하는 척도이지요. 우리에게 익숙한 서양 음악은 2박자 내지 3박자 계열이 대부분인데 2박자와 4박자의 차이는 강약의 박이 다르다는 점이지요. 2박자가 한마디안에서 강약을, 4박자는 강약 중간 약을 동일하게 반복합니다. 박자가 차이 없는 반복이라면 리듬은 차이의 반복이라고 대비할 수 있겠습니다.  가령 군대의 행진에 박자는 있지만 그것만큼 리듬이 없는 것은 없다 하지요. 리듬은 주어진 박자안에서 음가와 강도를 변화시켜가며 차이화 됩니다. 이런 강도적 차이화는 박자 안에서 조차 박자를 교란하고 초과하기도 합니다.  가령 봄의 제전에서 스트라빈스키는 악센트를 바꾸는 것만으도 박자라는 형식을 와해시킬 수 있음을 보여준 바 있습니다. 

음악적 기원을 언급하지 않으면 리토르넬로는 바로크 시대의 협주곡이나 합주 협주곡에서 사용하던 형식을 지칭합니다. 거기서는 T-a T'-b  T"-… T 와 같은 형식으로 총주 투티(tutti)와 솔로가 번갈아 연주되는데 여기서 반복되는 총주 T, T', T'' ... 이런 것들을 리토르넬로라고 하며 그사이에 솔로로 연주되는 부분을 에피소드라고 합니다.  또 이렇게 리토르넬로와 에피소드가 번갈아 연주되는 형식을 리토르넬로 형식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리토르넬로란 반복구를 뜻하기도 하고, 그런 반복구를 이용한 구성형식을 뜻하기도 한다 하겠습니다. 이때 총주 T는 반복될때 마다 조를 바꾸어 연주됩니다. 나중에 고전주의 시대에 자주 사용되는 론도 형식은 이로부터 나온 것인데 반복되는 주제 론도가 동일한 조로 연주된다는 점이 다릅니다. 

들뢰즈 가타리의 개념인 리토르넬로란 동작, 색채, 음향 등을 재료로 만들어 주는 반복구나 형식을 뜻하지만 음향적인 성분이 주도하는 배치를 뜻하기도 합니다. 게다가 배치의 개념으로 사용할 경우에도 리토르넬로는 단지 음향이 주도하는 배치로 국한 되지는 않습니다. 즉 리토르넬로는 음향이나 다른 반복구들이 영토화와 탈영토화를 주도하는 배치 전반을 포괄합니다. 반복되는 요소가 무엇인가에 따라 음향적 리토르넬로, 색채적 리토르넬로, 동작적 리토르넬로 등이 있고 그 기능이 무엇인가에 따라 영토표시 리토르넬로, 구애의 리토르넬로, 경고성 리토르넬로, 사교의 리토르넬로 등이 있는 겁니다.

리토르넬로는 이런 복합적인 개념을 다루기 위해 들뢰즈 가타리는 리토르넬로의 세가지 성분을 구별합니다. 방향적/영토적 성분, 차원적 성분, 이행적 성분이 그것입니다. 리토르넬로의 방향적 성분은 카오스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 어디로 갈 것인지를 찾기 위한 리듬적 반복입니다. 어둠속에서 노래하며 안정을 찾는 아이처럼 반복적 성분을 통해 어디로 갈지 방향을 찾습니다. 이 리듬적 반복을 통해 카오스는 생존 가능한 환경이 되지요. 대개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성분은 여기가 누구의 영토인지를 표시하는 일종의 깃발이자 벽입니다. 예술조차 우선 포스터요 플래카드란 말이 그것입니다. 여기는 나의 집이라는 영토를 표시하는 새들의 노래가 그렇습니다. 물론 노래만은 아닙니다. 반복되는 냄새, 반복되는 동작, 반복되는 가시적 흔적이 모두 그렇습니다. 

베를리오즈나 바그너가 특정 인물의 등장을 표시하기 위해 사용되는 고정 악성이나 라이트모티브도 포스터나 말뚝으로서 동일하게 기능 합니다. 이처럼 주기적 반복의 코드화가 환경을 구성하는 방법입니다. 이 방향적 성분은 모든 배치의 토대가 되는 일차적 성분이란 점에서 하부 배치라고도 합니다. 이는 자신을 둘러싼 무상한 조건을 자신의 환경으로 구성하는 것이란 점에서 카오스에 대한 환경의 응수입니다. 이로써 무상하게 변하는 카오스의 우주는 카오스 모스가 됩니다. 역으로 카오스란 모든 환경이 탄생되는 조건이란 점에서 모든 환경들의 환경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박자가 동일성의 반복이라면 리듬은 차이의 반복이고 반복되는 모든 주제는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 되며 반복됩니다. 뿐만 아니라 대위적인 선율을 동반하여 다른 표정을 갖습니다. 영토적 배치 안에서 이처럼 표현적 차이를 만드는 성분이 리토르넬로의 두번째 성분인데 이를 들뢰즈 가타리는 차원적 성분이라고 합니다. 이로써 영토를 표시하는 방향적 성분의 코드화된 반복의 표현적 스타일을 만드는 차이가 섞여 들어갑니다. 가령 모방 대위법은 하나의 주제를 반복해서 사용하는데 동시에 이와 대응하는 대위적 선율들이 그 주제와 섞여 들어갑니다. 그렇지 않으면 반복되는 선율은 아무리 아름다운 것이어도 금방 지겨워지지요. 포스터나 플랭카드가 예술 작품이 되기 어려운것이 이때문 이지요. 푸가(fugue)는 물론 카논(canon)이나 파스칼리아(passacaglia)처럼 주제가 고집스레 반복되는 곡 조차 이 대위적 선율들로 인해 아름다운 텍스쳐를 갖게 됩니다. 

단순화하여 말하자면 반복되는 주제의 선율 자체는 수평적 방향을 따라 진행된다는 의미에서 1차원적이라면 대위적 선율은 수직 방향으로 음을 덧붙여 텍스쳐를 2차원으로 확장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두번째 성분을 방향적 성분과 대비해 차원적 성분이라고 하는 것은 이러한 의미 입니다. 물론 선율 자체도 고저를 달리하는 음들로 구성되며 강약이라는 성분 또한 갖기에 1차원이라는 말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대위적 성분들이 추가됨에 따라 차원수가 늘어난다는 사실은 틀림 없습니다. 그러니 차원적 성분이란 이처럼 차원수를 늘리는 성분이라는 말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겁니다. 차원적 성분이 추가됨에 따라 이제 애초에 주제나 리듬은 포스터나 깃발에서 벗어나고 영토적 모티브는 표현적 스타일이 됩니다. 이처럼 하나의 배치 안에 섞여 들며 영토적 표현성을 직조해내는 성분이란 점에서 차원적 성분은 내부 배치라고 합니다. 

영화를 두고 말한다면 반복되는 리듬이 여러 장면에 등장하는 공통된 인물과 상응한다면 하나의 장면을 다른 장면과 풍경으로 만들어 주는 것은 다른 선율들이지요. 리토르넬로의 두성분을 리듬적 인물과 선율적 풍경이라는 개념으로 변주하는 것은 이때문입니다. 이는 리토르넬로가 단지 음향적 배치에 국한된 개념이 아님을 잘 보여 줍니다. 리듬적 인물과 선율적 풍경은 단순한 이항 대립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대위법이나 소나타 형식에서 주제가 그러하듯 선율도 반복되면 리듬적 인물이 됩니다. 그 곡의 얼굴이 되는 것이죠. 또한 리듬도 달라지면 다른 풍경을 만듭니다. 역으로 풍경이 달라지면 그 안에서 인물들의 표정도 달라지게 됩니다. 리듬적 인물은 자신을 둘러싼 것이 달라지면 표정을 달리하며 다르게 행동하게 됩니다. 조건이나 상황에 따라 새들의 노랫소리는 달라지고 고정 악상이나 라이트모티브(leitmotif) 또한 변주됩니다. 그때마다 다른 풍경 속에서 다른 표정을 갖게 되는 것이지요. 반대로 풍경이 반복되며 방향적 성분이 되고 달라지는 인물의 언행이 표현적 풍경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여기서도 보이듯 리듬적 인물과 선율적 풍경의 개념은 천의 고원에서 리토르넬로의 고원과 얼굴성의 고원이 연결되는 교차로 입니다. 

이는 흔히 작품에서 표현과 대응하는 내용의 개념을 이해하는 데 중요 합니다. 가령 렘브란트의 자화상들은 한 인물을 그린 그림들이지만 다른 풍경의 얼굴들을 갖고 있습니다. 초상화를 보고 누구를 그린 것인지만을 본다면 그건 작품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사건이 묘사된 그림도 그렇지요. 작품의 재현된 대상이나 묘사된 주제는 그 작품의 내용이 아닙니다. 포스터와 깃발이지요. 얼굴을 그린 그림이 작품이 될 수 있는 것은 그 얼굴이 어떤 감응을 응결시킨 풍경이 될 때 입니다. 작품의 내용이란 작품에 재현된 인물이나 사건이 아니라 그 풍경에  응결된 감응입니다.  이때 풍경은 그 인물이나 그가 겪었을 어떤 사건에 특이한 감응을 표현하지만 종종 그 감응은 그 인물을 벗어나기도 합니다. 

이게 정말 렘브란트야 하게 하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사건도 그렇지요. 이는 탈영토화하는 이행적 성분이 강력할때 발생하는 일입니다. 이행적 성분이란 반복으로써의 리토르넬로를 차이화하는 또 하나의 성분입니다. 방향적 성분과 차원적 성분이 표현적인 스타일로 영토화하는 성분이라면 이행적 성분은 하나의 배치로부터 탈영토화하는 성분입니다. 물론 새로운 배치로의 재 영토화하가 다시 거기 이어지지만 말입니다. 가령 굴뚝새는 둥지를 짓고 노래를 하여 자신의 영토를 표시하는 배치를 구성하는 데 침입자가 다가오는 기색이 있으면 그 노래를 바꾸어 경고성 리토르넬로를 생성합니다. 암컷이 다가오면 날개를 휘저으며 노래의 강도를 낮추고 단순한 트릴로 바꾸어 구애의 리토르넬로를 만듭니다. 

이렇게 노래나 몸짓 혹은 물리적 성분을 추가하거나 변화시킴으로써 영토적 경계의 배치로 혹은 구애의 배치로 이행하게 됩니다. 영토를 바꾸지 않은채 다른 배치로 이행하는 것이지요.  이처럼 하나의 배치에서 다른 배치로 이행하게 하는 성분이 바로 리토르넬로의 이행적 성분입니다. 이행적 성분은 상이한 배치 사이에 있다는 점에서 사이 배치라고 합니다. 카오스의 우주를 자신의 생존을 위한 집으로 만드는 영토적 모티브가 방향적 성분이고 그 집을 멋지게 꾸며 표현적 스타일을 부여하는게 차원적 성분이라면 문이나 창문으로 외부를 불러들이는 것이 이행적 성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불러들인다 했지만 그건 외부적인 것에서 집의 내부를 여는 것입니다. 집 내부를 집 바깥의 우주와 연결하는 것이지요. 이는 작은 변화만으로도 가능합니다. 

인간의 집을 예로 들자면 인간에게 집이란 통상 거주를 위한 환경이고 나의 영토로서 거주의 배치에 속합니다. 하지만 창과 문을 닫고 조명을 바꾸면 성애의 배치로 바뀌고 음식을 준비하여 친구들을 불러들이면 사교의 배치로 바뀌지요. 과거의 장인이나 작가는 집을 작업장의 배치로 만들어 사용했고 최근에 히키코모리는 집을 유폐의 배치로 바꿉니다. 

우주적 탈영토화라는 말을 이해하는 데 더 좋은 예는 음악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서양음악은 1도에서 5도로 갔다가 다시 1도로 되돌아 오는 조성이라는 구조를 갖고 있었습니다. 화성적 탈영토화와 재영토화가 만드는 소리의 배치인 셈입니다. 하지만 이 구조는 3가지 화성적 코드에서 벗어난 반음계의 사용을 허용합니다. 그런데 허용된 반음계가 다시 그로부터 반음계를 낳으며 탈영토화와 운동이 증식될때 조성적 배치는 와해 됩니다. 이러한 탈영토화 운동은 무조음악이나 음열주의 전자음악을 거치며 모든 주파수로 열린 음향적 우주로 나아가게 됩니다. 파동의 우주 혹은 음향적 입자들의 우주이지요. 모든 분절이나 형식에서 벗어난 음향적 진료들의 우주입니다. 형식 실체관계에서 독립된 일관성을 취하는 표현의 진료, 그 진료의 흐름으로 일어나는 우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들뢰즈 가타리가 음악사에서 모던이라고 명명하는 배치는 이처럼 우주로 탈영토화된 음악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간단히 덧 붙이자면 이렇게 리토르넬로의 이행적 성분은 절대적 탈영토화의 선을 그리며 일관성의 구도와 이어지게 됩니다. 

이는 이후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구성의 구도라는 개념으로 변환되어 그들의 예술 이론을 이끄는 탈 영토화의 선을 그리게 됩니다. 우주라고 했지만 이는 우리에게 주어진 즉자적 카오스로서의 우주가 아니라 영토를 갖지 않지만 동시에 모든 영토와 이어져 있는 전체를 뜻합니다. 즉 이행적 성분이 여는 우주란 가령 모든 모든 소리를 구성할 수 있는 비형식화된 진료의 흐름이고 모든 배치로 열린 잠재성의 장 전체를 뜻하지요. 방향적 성분이 카오스의 우주로부터 환경을 구성하고 벽을 세워 영토를 만든다면 이행적 성분은 절대적 탈영토화의 우주를 향해 배치를 개방합니다. 리토르넬로를 통해 우리는 카오스의 우주로부터 영토적 배치로 나아가지만 또한 그것을 통해 우주로 향한 탈영토화의 선을 그리는 겁니다 

생명이란 이처럼 어떤 것을 기존의 지층이나 영토에서 떼어내 다른 배치로 구성하여 이득을 얻는 능력입니다. 생명의 자리란 일관성의 이득이나 탈 지층화의 잉여 가치라고 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 입니다. 요컨데 리토르넬로의 세 성분은 인물과 풍경을 만들며 작동합니다. 영토적 모티브는 반복을 통해 리듬적 인물을 만들고 영토적 대위법은 그 인물을 둘러싼 것들을 풍경화 하며 이행적 성분은 인물과 풍경을 우주로 개방합니다. 이 가운데 주도적인 성분이 무엇인가에 따라 리토르넬로는 다시 상이한 배치로 구별됩니다. 

가령 그들은 유럽 음악사에서 등장하는 양식 내지 시대 개념을 고전, 낭만, 모던이라는 세가지 배치로 재정의 합니다. 고전은 바로크와 고전주의 모두를 포함하는데 카오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방향적 성분이 주도하는 배치의 이름입니다. 이는 대비법에서 주제와 대선율 소나타 형식에서 대립되는 두 주제들처럼 하나를 둘로 나누는 방식으로 구성됩니다. 낭만은 대지적 영토화가 주도하는 배치이고 모던은 우주적 탈 영토화를 여는 이행적 성분이 주도하는 배치 입니다. 

리토르넬로는 리듬적 반복이 작동하는 배치 모두와 관련되지만 들뢰즈 가타리는 동작이나 색채등과 대비해 음향이 주도하는 배치를 리토르넬로라고 규정하기도 합니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우리가 리토르넬로라고 부르는 모든 표현 진료의 집합은 하나의 영토를 그리며 영토적 모티브와 영토적 풍경을 통해 전개된다. 좁은 의미에서 우리가 리토르넬로라고 부르는 것은 배치가 음향적일때 혹은 그것이 소리에 의해 지배될때를 지칭한다. 

이처럼 시각적인 것에 대비해 음향적 성격을 강조하는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 입니다. 두성분의 탈 영토화 계수와 능력이 그것 입니다. 첫째는 소리가 시각적 성분에 비해 탈영토화 계수가 크다는 점 때문입니다. 소리는 탈영토화되면서 점점 더 정련되고 특정화 되며 자율적인 것이 된다. 반면에 색채는 우선 대상이 아니라 영토성에 집착한다. 그것은 탈영토화될 때 해체되어 다른 성분으로 인도 되는 경향이 있다. 둘째는 도래할 민중과 관련된 능력 때문입니다. 그들에 따르면 예술에서 본질적이지만 여전히 결여된 것이 민중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예술가의 문제는 민중의 모던한 탈 군집화가 열린 대지로 나아가는 것이고 탈 군집화로부터 우주적 민중을 만드는 것 탈영토화로 부터  우주적 대지를 만드는 것입니다. 여기서 탈 군집화란 몰적 집단인 개체적 군중으로부터 벗어나는 분자적 이탈의 선을 그리는 것이고 우주적 민중을 만든다 함은 일관성의 구도로 이어지는 긍정적 탈주선을 그리는 것입니다. 소리가 중요한 것은 이때문입니다. 색깔로는 민중을 움직이지 못한다. 깃발은 트럼펫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며 레이저는 소리로 조절된다. 리토르넬로는 무엇보다 우선 음향적이다. 물론 이런 능력은 역으로 파시즘적 방향으로 인도하는 힘이 강력할 수 있음을 뜻하기도 하지만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리트르넬로와 시간에 대한 중요한 명제를 하나 추가하는게 좋겠습니다. 칸트가 명시한바 있지만 칸트주의자가 아니어도 시간은 음악을 비롯한 모든 경험에 선험적 형식이라고 믿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공허한 형식이자 척도인 그런 시간은 따로 없습니다. 스피노노자식으로 말하자면 상이한 부분들이 리듬을 맞추어 하나처럼 움직일때 크로노스가 즉 시간이 만들어 집니다. 가령 우리 신체의 각 부분이 하나의 신체로 작동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그것 입니다. 농부의 시간이란 자연의 리듬과 자신의 활동을 그처럼 동기화하는 형식 입니다. 리듬적 반복으로서의 리토르넬로가 시간을 만드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라는 겁니다.  선험적 형식으로서의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리토르넬로는 시간의 선험적 형식이며 언제나 상이한 시간들을 만들어 낸다는 말이 뜻하는 것은 바로 이것 입니다. 

 

천년의 상상,  2018년 12월 27일 

 

 

 

 

 

 

 

 

 

 

 

 

 

 

 

 


1.  생체상품으로 노동력의 특수성 
상품은 스스로 시장에  갈 수 없고 스스로 자신을 교환할 수도 없다.  우리는 상품의 보호자 즉 상품소유자를 찾지 않으면 안된다. 상품을 소유 한다는 것은 전제적 지배권을 갖는다는 뜻이다. 이는 상품을  사물화 한다는 뜻을 담고 있으며, 마음대로 처분해도 좋은 존재가 되는 것이다. 노동력은 '몸에 대한 사용권'을 판 것이지 '몸에 대한 소유권'을 넘긴것은 아니다. 인간 자체를 매매 대상으로 삼는다면 우리는 노예제 사회로 퇴행하는 것이다. 생체상품은 인간 생체를 벗어나는 순간 파괴되므로 노동력과 이를 소유한 인간은 물리적으로 분리 되지 않는다. 노동력이 생체 속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에 생체 사용권을 임대하듯 넘겨야 한다.  

자본가는 노동력에 대한 처분권을 얻었으므로 최대한 가치를 생산하도로 능력을 쥐어짤 것이다. 노동력은 잉여가치를 창출하는 가변자본으로 작동한다. 농동력을 주체와 능력, 주체와 활동 등으로 개념적으로 정교하게 분리해도 노동자는 노동행위 속에서 속사을 입을 수 밖에 없다. 노동시간 연장, 노동강도 강화라는 생체에 대한 폭력에 노동자는 고분고분할 수가 없다. 자본가는 고분고분하지 않은 생체를 유순하고 유능한 노동신체로 만들기 위해 끔찍한 폭력을 행사한다. 

2.  상품교환이 전제하는 인간 관계

상품을 교환하는 사람들은 서로에게 타인이다.  이에 반해 공동체 구성원은 애초에 한몸을 이루고 있으니 서로를 타인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퇴니스에 따르면 공동체 구성원들은 우리 몸에 팔다리처럼 내적 규정에 의해 통합되어 있다. 반면 사회는 개별 구성원의 선택의지에 따라 외적 규정에 의해 통합되어 있다. 이를 '비동료간 외적 유대'로 표현했다. 인간의 교환 성향은 본래적인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생산약식의 산물로 역사적인 것이다. 

상품소유자는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사용가치를 지닌 다른 상품과 교환하게 될때 자기 상품을 넘겨준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교환은 개인적 과정이다. 또한 상품은 교환을 통하지 않고 가치를 실현할 수 없으므로 상품의 가치에 대한 사회적 승인을 필요로 한다. 이런 관점에서 사회적인 과정이다. 교환의 일반적 등가물로서 화폐가 출현한다. 자신의 상품이야말로 다른 모든 상품들에 대한 일반적 등가물인 것처럼 행동하지만 개인이나 한두사람이 합의해서 통용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런점에서 등가물의 출현은 '사회적 행동'의 결과 물이다. 화폐의 상징하는 가치의 통일성하에서 각각의 상품은 저마다의 가치로 개별화할 수 있다.  

상품교환이 일반화 되고 화폐가 일반적 등가물로 기능하는 곳에서는 기존의 공동체를 해체하면서 자신의 코뮨 즉 화폐공동체(상품소유자의 공동체)를 구성한다.  사실 화페는 공동체 내에서가 아니라 다른 공동체들과 만나는 소수의 지점들에서 나타난다.  다른 공동체와 끊임 없이 접촉하는 유목민족은 화폐형태를 가장 먼저 발달 시켰다. 일단 물건들이 공동체 외부에서 상품들로서 교환되기 시작하면, 그 물건들은 내부에서도 상품이 되기 시작한다.  교환이 끊임없이 반복 되어 공동체의 생산물 일부가 의도적으로 교환을 목적으로 생산 되면 노동 생산물은  상품으로 전환된다. 

공동체 내부에서 상품거래와 물품 거래는 엄격히 규제 되었지만 식민화와 공동체의 몰락이 상품과 화폐 유통을 가능하게 했다. 상품을 받아 들인다는 것은 단순히 사물하나가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인간관계-하나의 세계가 들어오는 것이다.  그런데 공동체화폐나 지역 통화 운동이라는 것도 있다. 이는 공동체적 인간관계의 회복과 생성을 목표로 한다.  공동체화폐는 공동체적 관계를 강화한다.  공동체를 소통시키는 코뮨적 화폐가 된다. 공동체 화페가 삶의 일부분, 어쩌면 아주 작은 부분만 해결해주지만 이 부분만큼은 비자본주의적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

3. 자본에서 사회적이라는 말의 의미
사회적 이라는 말은 한무리의 공통규칙들을 공유하지 않는 공동체들 사이의 교환이 지니는 고유한 특징을 가리킨다. 시장에서 한 상품소유자가 다른 상품 소유자를 만난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각자는 저마다 사정과 저마다의 규칙에 따라 물건을 만들어 왔지만, 개인들은 서로의 사정을 알지 못한 채 행동할 수밖에 없다.  사회적으로 결절된다는 것은 공통의 규칙, 미리 정해진 체계가 없는 상태에서 결정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개인으로서는 알수도 없고 제어할 수도 없다. 이런 사회적 행동을 통해 생산의 사회적 성격과 자본주의적 위기(공황)이 나타난다. 

4. 화폐의 기능
화폐가 금의 형태로 존재하느냐, 종이 형태로 존재하느냐 하는 것이 화폐의 '물질적 현존'으로 화폐를 소재의 측면에서 보는 거다. 반면 화폐가 어떤 기능으로 존재하는 지,  즉  가치척도로 존재하느냐, 유통수단으로 존재하느냐를 구별하는 것이 '기능적 현존' 이다.  유통수단으로 화폐는 서로 모르는 판매자와 구매자의 관계를 일시적으로 매개하지만 어음과 같은 지불 수단은 판매자와 구매자 사이에 믿을 만한 관계가 이미 수립되었음을 전제한다. 
화폐는 상품유통과 무관하게 지불수단으로서 국각에 의해 만들어 졌고, 유통에 투입되고 사용되면서 가치척도가 된것이다. 확대된 가치형태 내부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경제의 바깥에서 국가에 의해 만들어져 경제적 교환 내부로 끌어들어진 것이다.  근대의 화폐들이 온갖 목적들에 사용될 수 있게 된 것은 시장에서의 교환이 다른 유통방식들을 다 대체해버렸고 우리의 생존과 욕구충족에 필요한 재화와 용역 모두를 시장에서만 구할 수 있게 된 상황과 관련된다.  모든 것이 시장에 상품으로 나와 있다는 조건에서 돈을 가졌다는 것은 그야말로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다는 뜻이 된다. 

5. 가치척도로서 화폐의 기능
화폐가 가치척도인 한에서 화폐는 일단 가치를 지닌 사물, 즉 상품이어야 한다. 한마디로 화폐상품이어야 한다.  모든 상품들엔는 인간의 추상노동이 들어 있다. 화폐 덕분에 상품들을 같은 단위로 측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공통된 단위로 측정할 수 있기 때문에 어떤 상품이 화폐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가치를 가진 것만이 가치를 재는 데 이용할 수 있다. 가치척도인 한에서 화페가 상품인 이유가 이것이다. 

상품들의 가치를 화폐로 표현할 때 우리는 그것을 '가격'이라고 부른다. 가격이란 화폐상품으로 표현된 해당 상품의 가치이다. 가격은 해당 상품의 가치가 표현된 것이지만 가치 자체는 아니다. 가치를 잴 때 실제 금이 필요하지 않는데  "머릿속에 있는 금", "상상적이고 관념적인 금"으로 충분하다.  상상적일 뿐인 화폐가 가치척도의 기능을 수행한다 할지라도 가격은 전적으로 실제 화폐재료에 달려있다. 

가격이란 해당 상품과 화폐상품의 교환비율이다. 교환은 가치에 따라 이루어 졌지만 교환 비율은 다를 수 있다. 각 상품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사회적 노동량은 그대로이지만 둘의 교환 비율이 달라진다. 시장가격이 변한거다. 가격의 변동과 가치의 변동은 이처럼 다를 수 있다.이러한 이유는 첫째 상품의 가치가 직접 나타나지 못하고 화폐상품으로만 나타난다는 사정이 있다. 가치에서의 가격으로의 질적 변신이다. 둘째는 시장의 수요 공급이 가격이 영향을 미친다. 장기적으로는 어떤  균형점을 갖지만 일시적으로 수요 공급의 사정에 따라 가격이 변화한다. 단순가격에서 시장가격으로 양적 변화가 일어난 거다. 양적 전형이다. 경쟁의 심화나 똑같은 양의 자본을 투자해도 원료나 기계에 투자한 부분과 노동력에 투자한 부분의 비율이 전체 평균에서 얼마나 벗어나는냐에  따라 상품의 가격과 가치 사이에 괴리가 나타난다.  

가격이 가치의 반영 비율에 상관없이 가치는 가격에 논리적으로 선행하한다. 상품의 가치는 그것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사회적 노동시간과 내재적 관계를 맺지만 가격은 해당 상품과 교환되는 화폐상 품과의 외재적 관계를 맺는다. 하지만 가치척도로서 화폐를, 가치 없는 것 즉 상품도 아닌 것의 가치를 재는 데 남용하는 일이 생긴다.  이를테면 양심이나 명예에도 가격이 붙는다. 양심이나 명예나 인격이 가치를 가지지 않으면서도 가격을 가질 수 있다. 물론 이가격은 상상적인 거다. 마르크스는 이를 수학의 허수에 비유했다. 사람을 볼 때도, 땅을 볼 때도, 심지어 행성을 볼 때도 '저거 얼마짜리일까' 하는 생각을 올리는 것. 모든 사물들에 가격표를 붙이려 들고, 가치눈금이 새겨진 눈으로 사물들과 세상을 보는 것이다. 바로 자본주의다.  

상품에 가격을 부여하려면 상상적인 금을 상품에 등치시키면 되지만, 상품이 그 소유자에게 일반적 등가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실제 금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가격을 책정할때는 상상적인 금으로 되지만 해상 상품을 교환하고자 한다면 실제 금을 내놓아야 한다는 말이다. 

6.  유통수단으로서 화폐
마르크스는 상품교환이 이루어지는 유통을 '사회적 물질대사' 라고 불렀다. 유통이란 상품의 흐름으로 사람들에게 필요한 물건을 공급하는 것이다. 교환이란 내가 원하는 물건을 가진 사람이 우연히 내가 가진 물건을 원할때 가능하다.  욕구의 우연적 이중일치이다. 

유통에서 상품과 화폐가 반복해서 교환된다. 내가 생산한 아마포는 사회 전체가 생산한 아마포의 한조각인 것처럼 취급된다. 내가 아마포를 더 생산한 게 아니어도 사회 전체가 과잉생산했다면 나도 과잉생산한 것으로 간주된다. 생산물을 "단 한개의 거래 품목"으로 여긴다. 거대한 아마포 한장을 모두가 생산한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여러사람이 여러 조건에서 아마포를 생산했지만 모든 아마포들은 하나의 아마포로서 "사회적으로 규정된 동질의 인간노동량이 대상화된 것일 뿐"이다. 

상품은 개인이 생산하지만 그 가치는 사회적으로 결정된다. 아마포 생산업자는 아마 재배자 외투 제작자와 연결되어 있다. 이 연결은 생산자 개인으로서는 알수가 없다. 고립된 개인들을 매개하는 것은 상품과 화폐이다. 서로 독립해 있는데 한편으로 상품과 화폐를 매개로 묶여 있는 것이다.  즉 자본주의는 "상호 간의 독립성"과 "생산물을 통한 전면적 상호 의존성"이 붙어 있는 사회이다. 

상품 하나가 유통에서 나간다 해도 그것이 관여했던 유통은 계속이어진다. 상품의 자리를 화폐가 차지하고 그 화폐의 자리를 다른 상품이 차지한다. 상품의 유통은 자본주의사회의 기본적 물질대사이자 가치대사이다. 자기 물건은 팔면서 구매에 나서지 않는 상황이 일어난다.  마르크스는 여기서 자본주의사회의 커다란 위기, 즉 공황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판매와 구매라는 "두 과정의 외적 자립화가 일정한 점까지 진행되면 그 내적 통일은 공황이라는 형태를 통해 폭력적으로 관철된다." 상품유통의 형식을 취하는 한에서 이런 상업공황의 가능성은 항존한다. 

금은의 새로운 생산지 발견에 따라 상품가격이 오른 것은 유통수단으로 기능하는 금은이 더 많아졌기 때문이라는 그릇된 결론에 도달했다.  상품과 교환되는 금량의 급격한 증대는 금의 가치 저하와 관련이 있다.  이것은 유통수단으로서 화폐의 문제가 아니라 가치척도로서 화폐와 관계된 문제이다.  이것은 유통수단으로 화폐의 문제가 아니라  가치척도로 사용되는 금의 급격한 가치변동이 상품과 금의 교환 비융을 변동시켰고, 당연히 유통에 필요한 통화의 양도 증대시킨 것이다. 유통수단인 한에서의 지페는 그것이 대신하는 금량을 대체하는 것일 뿐이라는 점이다. 유통수단의 양은 상품들의 양과 가격, 유통수단의 회전속도에 달렸고 그것을 따르면 된다. 상품들의 양과 가격, 화폐의 회전속도는 유통 자체에 달린 것이 아니다. 유통은 그저 현살일 뿐이다. 

7.  화폐로서 화폐(축장화폐)
가치 척도로서의 화폐나 유통수단으로서 화폐에서는 화폐가 수단일 뿐 목적은 아니었다. 거래의 최종목적이 상품이 아니라 화폐인 경우이다. 부의 물질적 대표로서 화폐이다다. 요컨대 화폐가 치부욕의 대상이자 원천인 것이다. 화폐가 욕구의 대상이 된다. 즉 축장화폐이다. 축장이란 화폐를 재물로서 모으는 것이다. 화폐가 재물로서 의미를 갖는 경우이다. 케인스는 이를 유동성 선호라고 불렀다. 불확실성을 대처하는 효과적인 수단으로 기능을 한다. 언제라도 사용할 수 있는 절대적인 사회적 부의 형태이다. 화폐를 사물들의 힘줄이라고 불렀다.  축장화폐가 보여주는 바는 사회적 힘을 사적인 힘으로 만들 수 있다는 뜻이다.  부라고 하는 사회적이고 추상적인 것이 '사물'의 형태로 존재하기 대문에 개인은 화폐를 축적함으로써, 사회적 관계에서 나오는 힘을 사유재산화하는 것이다. 축장화폐는 구체적 상품, 구체적인 물건에 대한 욕망과는 다른 욕망을 보여준다.  치부욕이다. 물욕은 한계가 있지만 치부욕은 한계가 없다. 세계 제일의 부자도 결핍감을 느끼는 것이 치부욕이다. 

화폐를 퇴장시키려는 충동이 너무커서 정부의 통화 정책이 전혀 먹이지 않을때 정부가 직접 투자자로 나서거나 중앙은행을 통해 통화량을 더 크게 늘릴 수 있다. 상품 유통이 발전하면서 상품을 건네는 것과 값을 치르는 것 사이에 시간적 괴리가 자주 나타난다. 관념적 약속의 현실적 이행시기가 온다. 지불수단으로서의 화폐는 가치척도로서 관념적으로 기능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교환가치를 지닌 일반적 상품으로서도 기능한다. 이 모순 때문에 화폐 공황이 발생한다 

상품유통이 확대되면 그에 따라 지불도 연쇄되어 있다. 한 채권자가 다른 사람에게는 채무자인 경우가 많다. 지불이 연쇄되어 있어, 한쪽에 문제가 생기면 사회 전체로 퍼져간다. 화폐공황이 일어난다. 이런 지불 수단의 문제 때문에 화폐를 준비금으로 저장해 둘 필요가 생긴다. 자산을 저장하는 축장 기능만이 아니라 지불을 위한 준비금을 확보해 두는 것이다. 상품의 생산 판매와는 별개로 지불문제 자체에서 파생한 공황이다. 2008년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에서 발생한 금융위기이다. 이는 화폐자본이 그 운동의 중심이며 따라서 은행, 증권거래소, 금융계가 직접적 영향을 받는다. 화폐의 기능적 현존에 따라 발발할 수 있는 공황의 현태가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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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성과 소수 문학, 소수자 되기 


니체는 도덕이나 종교 감각이나 예술 등 모든 문제를 삶의 광학으로 보고자 했습니다.  스피노자 도 그랬지요. 들뢰즈 가타리도 모든 문제를 삶의 문제로 다루고자 합니다. 창안과 실험 속에서 다른 삶을 만들어 낸 것이 그것입니다.  차이나 생성 존재 내재성 같은 그렇게 추상적인 철학적 개념들을 다룰 때 조차 이는 다르지 않습니다.  정치에 관한 개념 또한 그렇습니다.  안정화 되는 만큼 고형화 되는 삶의 변이와 생성의 선을 끌어 들일길 반복합니다. 이를 위해 고형화 된 틀에 가두는 모든 성분과 대결하는 것 그것이 바로 정치 입니다.  그 대결이 국가 장치나 제도 등과 맞서게 될때 때 거시정치가 작동하게 되고 그것이 나 라고 불리는 유기체나 의미화 주체화하는 기호들 사이를 통과하게 될 때 미시 정치가 작동하게 됩니다.  피할 수 없는 몰적 선분성의 선을 빠져나가는 분자적 선분성의 선을 따라 가며 창조적 탈출선을 그린 것,  이것이 그들의 정치적 사유를 방향 짓고 있습니다 다.다시 말해 정치란 신체와 사유를 횡단하며 작동하는 일종의 추상 기계를 가동시키는 것이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따라서 좋은 삶을 생산하기 위한 윤라학과 생성의 정치학은 하나의 평면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소수자나 소수성의 개념은 흔히들 현실적 문제라고 생각하는 구체적 사람들과 이러한 정치적 사유가 만나는
접점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른바 소수자 정치 내지 소수성의 정치학이 거기서 출연합니다. 소수성이란 개념이 처음 나타난 것은 소수문학 연구를 위하여 라는 부제를 달고 출판된 카프카에서 입니다.  카프카의 문학과 언어에 대한 연구가 소수성 개념이 탄생한 곳이라는 겁니다. 그 뒤에 출간된 책 천의 고원에서 소슈성 개념이 중요하게 사용되는 곳은 언어학의 공준, 되기 그리고 자본과 국가의 문제를 다루는 포획 장치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약간 단순화하여 말하자면 언어나 소수자 되기가 미지적  정치 영역에 가깝다면 자본의 공리계와 국가 장치 안에서 소수자 운동을 다루는 포획 장치 부분은 거시 정치 영역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소수자 정치는 각각의 개인적인 문제를 직접적으로 정책인 것으로 연결하는 소수자의 생존 조건을 모태로 합니다. 이러한 조건은 모든 것이 집합적인 가치를 갖도록 만듭니다. 들뢰즈 가타리가 카프카의 얘기를 인용하며 문학은 민중의 문제다 라고 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이는 소수 문학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소수자 개념이 미시 정치와 거시 정치의  모두의 교점에 있는 것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소수성 개념이 뜻하는 바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카프카와 소수 문학을 경유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소수성을 다수성의 결여나 다수성의 거부로 오해하는 경우가 적지 않게 하는 말입니다. 소수성은 이런 부정적 개념이 아니라 생성 이라는 긍정적 개념이 강조되어야 합니다.

알다시피 카프카는 프라하의 유대인 이었죠. 그는 글을 쓰는 것이 삶 자체였던 작가였지만 체코어 나 히브리어 이디비시(Yiddish)어 가 아니라 독일어로 글을 썼습니다. 하지만 괴테처럼 풍부하고 아름다운 독일어로 글을 쓰지 않고 반대로 빈곤하고 간결한 독일어로 글을 썼습니다. 그건 틀렸다고 는 할 수 없지만 뭔가 이상한 독일어 였읍니다. 프라하라는 변방 거기서도 유대인이라는 소수자의 낯선 독일어로 쓴 것이지요. 그가 괴테적 전범을 따라 아름다운 독일어로 쓰고자 했다면 잘 해도 독일어 충실하게 복종하게 되었을 겁니다. 아마도 자신의 독일어의 빈약함을 한탄 하게 되었을 가능성이 크죠.  반면 체코어 나 히브리어 이디시어로 썼다면 그는 민족 문학 작가가 되었겠지만 자신을 포위한 채 복종을 강요하는 독일어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을 겁니다. 독일어의 충실하게 쓸 수도 없고 그걸 안 쓸수도 없는 궁지 그것이 바로 카프카로 하여금 새로운 출구를 찾도록 만든 조건이었습니다.  그 언어의 빈곤함 이란 표현 능력의 결여가 아니라 생략의 빈틈이고 탈영토화를 위한 빈틈 입니다.  

이런 조건에서 문학은 일종의 대결이 되고 전투가 됩니다 이런 전투적 대결의 멘탈을 잘 보여주는 것은 카프카 처럼 식민지 제국의 소수자 로써 그들의 언어로 문학을 했던 재일 시인 김시종 입니다. 그는 모국어인 조선어로 쓰는 민족 문학을 거절하고 식민지 언어인 일본어로 작품을 씁니다. 이유는 그 일본에 대해서 복수하기 위해서 라고 합니다.  자신의 정서를 형성하고 자기 삶을 대기 처럼 포기하고 있는게 일본어 이기에 모국어로 작품을 쓰게 되면 고부의 방식으로 회피하며 고립의 길로 가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는 그에 반하여 그 친숙한 일본어와 대결하며 일본어에  없는 것을 그 안에 밀어 넣는 길을 택합니다. 까찰 까칠하고 낯설지만 매력적이게 제거할 수 없는 일본어를 만들어 그곳에 돌려주는 것 그것이 바로 일본어에 대한 자신의 복수 라는 겁니다. 복수 마저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것으로 만드는 놀라운 발상이죠.  

카프카도 자신의 글쓰기가 이런 대결이라고 말합니다.  프라하의 유대인으로 하여금 글을 쓰는 것을 가로막는 궁지에서 지배적 다수적 언어 안에서 새로운 언어를 창안하며 진행되는 문학적 전투 그것이 카프카 문학 입니다 추종도 아니고 거부도 아닌 이상한 독일어로 결코 던져버릴 수 없도록 매력적인 작품들을 쓴 거죠. 그 매력에 힘으로 점거한 영토를 통해 파고 들며 독일어를 더듬 거리게 하는 낯선 독일어 그것이 카프카 독일어 입니다. 그처럼 다수적 언어 안에서 그로부터 탈 영토와 된 이상한 언어를 통해 다수적 척도와 대결하는 문학 그것이 소수 문학 입니다. 

소수적 언어도 이런 방식으로 이해 해야 합니다.  소수어는 사용자 수가 적어서 소수언어가 아닙니다.  근대 국가는 어디나 표준어를 정하고 그와 다른 언어를 방언으로 규정합니다. 가령 한국에서는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사용하는 현대 서울말을 표준어 라고 합니다. 표준어는 여러 말들 가운데 척도가 되는 말입니다. 이는 다수 적 언어지만 다수가 사용하는 말이었던건  아닙니다. 서울에 교양있는 사람이 많아요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표준어로 정하면 문서나 신문방송 등에서 사용하고 학교에서 가르치기에 다수가 사용하게 되기는 합니다.  다수여서 척도가 되는게 아니라 척도가 되었기에 다수가 되는 겁니다. 따라서 다수란 말은 주류란 말과 유사합니다. 주류에 속한 자들은 지배적이지만 수가 많지는 않죠. 가령 자본주의 사회의 다수자는 자본가들이고 가부장제 사회의 다수자는 남성이지만 이는 그들 수가 많아서 그런게 아닙니다. 척도를 장악한게 주류이고 다수자 입니다. 다수 소수의 문제는 수의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소수어는 방언이 아니라 언어 안에서 생성되는 새로운 언어이고 모어 아닌 외국어 입니다.  다수어의  지배로부터 지키고 보호해야 하는 언어가 아니라 그것과 대결 하며 그것을 더듬 거리게 하는 언어이고 새로운 것을 창안 하는 언어입니다. 척도 표준과 대결하는 언어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척도로부터의 거리가 아니라 척도를 바꾸는 변이 능력에 의해 정의 됩니다.  방언이 소수어가 되도록 해주는 것 또한 다수어를 변이 시킬 수 있는 능력입니다.  카프카 같은 문학적 언어만 소수어는 아닙니다.  은어나 속어를 끌어들이고 축약과 생략, 중의성과 치환 등을 이용해 영어를 아주 다른 것으로 바꿔 버린 흑인 영어도 그런 경우 이죠. 소수어와 마찬가지로 소수자 또한 수가 적은 집단을 뜻하지 않습니다. 지배적 척도나 가치 로부터 멀리 떨어진 자, 소위 주변이나 소외된자 들입니다. 가령 가난한 이들은 돈이 없다는 점에서 자본주의의 척도와 거리가 멀지만 돈 벌 생각에 사로 접했을 뿐이라면 소수자라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돈이라는 척도를 벗어난 게 아니라 자신이 척도로 삼는 것을 결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변인 입니다.  자기 피부를 원망하며 수세미로 문지른 흑인도 남성들과 동일한 권력을 갖는게 해방이라 믿는 여성도 다르지 않습니다. 자신이 결여하고 있는 다수성을 추종한다는 점에서 음의 부호가 붙은 다수자입니다. 소수자는 또 그저 지배적 속도를 거부하며 그것과 분리만을 고수하는 자들도 아닙니다. 분리된 집단성을 고집하고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척도를 바꾸는 어떤 것을 창안하여 다수적 세계 속에 밀어 넣는 자입니다. 이를 위해 다양한 동맹자를 찾아내는 자입니다.  

이때 동맹자는 단지 어떤  인간들만 뜻하지 않습니다. 동물이나 식물 사물이나 언어 분자나 파동 등도 그 동맹자에 포함되죠 따라서 소수자는 현재의 어떤 상태를 표시하는 말이 아니라 현재 상태를 바꾸는 생성 되기에 의해 정의 됩니다.  소수자는 언제나 소수자 되기를 통해 구성됩니다. 가령 토니 모리슨의 파라다이스에서  잘 보여주듯 흑인이 가는 어떤 특성을 지배적 속도를 대신하는 본성으로 고수하게 되면 흑인성을 척도로 혼혈을 차별하는 대칭적 억압이 나타납니다. 여성이 어떤 특징을 남성과 대결하기 위한 본성적 척도로 삼게 되면 그런 특징 이 결여된 여성이나 트랜스젠더 동성애자 등이 차별과 배제의 대상이 됩니다. 중요한 것은 백인과 흑인, 남성성과 여성성 사이를 횡단하며 새로운 삶의 방식과 척도를 창안 하는 것입니다. 흑인도 흑인 되기를 해야하고 여성도 여성 되기를 해야 한다 함은 이러한 이유에서입니다. 반복하지만 다수성과 소수성은 수에 의해 정의 되지 않습니다. 사실 다수와 소수의 관계는 복잡하고 역설적 입니다. 먼저 어떤 특성이나 상태의해 다수자를 정하면 다수자는 대단히 적은 수만이 있다고 해야 합니다. 가령 미국에서 백인은 다수자이지만 그 가운데 다른 인종과 피가 섞이지 않은 이들은 많지 않을 겁니다. 피부는 희지만 혼혈의 과거가 전혀 없는 순수 백인은 정말 희소 할 겁니다.

반대로 소수자는 셀 수 없이 많습니다.  피부가 희지 않아도 과거에 다른 피가 섞인 이들은 모두 소수자라 해야 하니까요. 그래서 들뢰즈 가타리는 무한 집함 논의 개념을 이용해 다수자는 많아도 가산 집합인 반면 소수자 는 비가산 집합이라고 합니다. 가산 집합 이란 자연수를 차례대로 대응 시킬 수 있는 수입니다.  비가산 집합이란  그럴수  없는 수, 즉 셀 수 없이 많은 수를 뜻합니다. 소수자는 이처럼 접속이나 혼성에 의해 구성 되기에 단일한 성원으로 구성될 때 조차 비가산적인 능력을 행사합니다. 접속과 혼합은 그 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생성의 잠재성을 뜻하는 것입니다. 비가산적인 것이 중요한 것은 사실 수가 많다는 것보다는 이것 때문입니다. 다른 한편 다수자는 수적 다수가 될 수 있습니다. 척도와 표준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척도나 표준은 누구든 따라야 할 가치라고 간주되기 에 다수자에 속하지 않은 이들도 의당 따르기 쉽습니다.  그렇게 척도와 표준을 공유하면 다수자에 속하지 않은 이들도 다수자와 동일한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돈버는 생각에 사로잡힌 노동자, 남성보다 더 남성적인 여성들이 그렇죠. 지배적인 척도를 따른 이들이 바로 다수자인 겁니다. 이와 다른 이유에서 들뢰즈 가타리가 말하는 의미의 소수자는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적습니다.

흑인, 여성, 식민지인, 선주민 등 어떤 특징을 공유하는 범주에 속한 이르게 아니라 새로운 삶의 방식 새로운 표현 기계 새로운 척도를 만들어내는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소수자 되기가 소수자를 정의하는 겁니다. 하지만 방언이 소수어는 아니지만 소수어가 될 능력이 크 듯이 상태로서의 소수자는 소수자 되기로 나아갈 잠재성이 크다고 하겠습니다. 다수적 권력에 의해 포위된 삶을 매순간 살아야 하기에 소수자들을 삶은 개인적인 것 조차 정치적이기 마련이고 그것이 현행의 삶의 조건을 바꾸려는 욕망을 촉발하기 때문이죠. 소수적 조건이 소수자 되기 후자 운동의 긍정적 삶을 향한 잠재성을 함축하고 있는 것입니다. 소수자 되기란 그처럼 그런 잠재성을 다른 감수성이나 다른 의식으로 밀고 나가 새로운 동맹, 새로운 공동체를 구성하는 것입니다.  소수자는 이질적이고  혼동적이며 접속과 변이에 의해 증식 합니다. 이질적인 것이 섞여 들며 만들어지는 동맹이나 공동체가 소수자를 만들어 냅니다.  셀수없이 많은 그런 접속과 혼종은  자본의 공리계로 제한되지 않는 생성능력을 같습니다. 소수 자의 혁명성은 이로부터 나옵니다.  공유계를 벗어나 결정 불가능한 명제나 주장을 착안 하는 것 바로 그것이 혁명적 결정의 싹과 장소라고 들뢰즈 가타리는 말합니다.  물론 자본의 공리계는 그렇게 창안된 명제나 요구를 다시 공리로 추가하여 포섭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괴델의 정리는 그렇게 포섭해도 결정 불가능한 명제가 새로이 생성될 수 있음을 함축합니다. 더는 공리를 추가할 수 없는 절대적 포화는 없습니다. 포화란 상대적일 뿐 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어떤 공리적 포섭도 새로운 결정 불가능한 명제의 생성을 막을 수 없습니다. 결정 불가능한 것에 포섭 또 생성도 끝이 없는 겁니다. 결정 불가능한 것의 창안과 포섭 그리고 재창안이 반복되는 내재적 과정 민이 있는 거죠. 막스라면 영구 혁명 이라 했을 이러한 과정을 니체라면 영원 회귀 라고 했을 겁니다. 이러한 소수성 개념은 욕망과 권력의 관계에서 정치가 길을 찾는 데 중요합니다 소수성 개념이 등장한 책 카프카는 욕망과 권력의 대립 대신 양자의 내재적 관계를 명시하는 명제가 등장한 책이기도 합니다. 권력이 욕망이다 라는 명제가 그것입니다. 이로써 욕망과 권력은 별개의 대립적 개념이 아니라 하나가 다른 하나를 만들어 내는 상호 내재적인 것이 됩니다. 어떤 하나는 좋고 다른 것 나쁘다는 식의 말을 할 수 없게 되죠. 그렇다면 권력에 대한 비판과 저항은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물음이 제기되고 됩니다. 욕망과 권력의 대한 가치평가도 그에 따른 선별도 방향을 잃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권력은 생산 한다 라며 권력의 긍정성을 강조함으로써 푸코가 빠지게 된 이론적 궁지와 유사합니다. 

알다시피 푸코는 저항의 지점을 찾기 위해 권력을 연구했죠. 권력이 있는 곳에 저항이 있다 그런데 그또한 욕망과 권력의 내재성에 도달합니다. 욕망있는 곳에 이미 권력 관계가 있다. 그러니 나중에 나타나는 억압을 보고 권력을 비난하는 것은 환상이며 권력의 바깥에서 욕망을 추구하려 나서는 것 역시 허망한 일이다. 권력은 생산적이고 아래로부터 작동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그에 대해 저항할 이유가 사라지고 맙니다. 천의 고원에서 들뢰즈 가타리는 권력이란 욕망이 지층화 된 것이고 탈주선이 일차적 이라는 명제를 통해 그 내재성안에 가치 평가의 거점을 마련합니다. 그런데 하나가 다른 하나가 되는 욕망과 권력 사이에서 침로를 찾기 위해선 개념적 위상의 일차성만으로 불충분 합니다. 상충되는 권력 사이에서 다수성과 소수성을 식별하는 것이 중요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욕망 권력의 경직된 몰적 선분성과 유연한 분자적 선분성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게 아니라 양자 사이에서 소수적인 긍정적 탈주선을 그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소수자 되기 이고 소수 성의 정치학 입니다 .

 

 

카프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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