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 되기,  강밀 하게 되기, 지각 불가능하게 되기, 생성이란 흔히 없던 것이 생겨나는것이라고 이해하지만 있던 것이 없어지는 것 또한 의미합니다. 두경우 모두 시간에 따른 변화라는 의미를 함축하지만 사실 생성 이란 어떤 것이 다른 것으로 달라지는 공시적 변화를 뜻하기도 합니다. 요컨대 모든 종류의 변화를 뜻합니다. 

들뢰즈 이전에 생성, 되기란 말은 독립적으로 사용 되었습니다. 이는 종종 존재와 대립되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는데 존재라는 말이 지금 어떤 상태에 있음을 지칭한다고 간주되기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지금 그대로 있다고 보일때조차 그 내부에서는 무언가가 생겨나고 사라지는 미시적 변화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모든 존재자는 생성속에 있습니다. 즉 존재란 생성을 뜻합니다. 하이데거는 존재를 존재자와 구별해야 함을 강조한 바 있습니다. 존재론을 존재에 대한 사유라 한다면 존재론적 명제는 오직 하나 밖에 없었다고 들뢰즈는 말합니다. 존재는 일의적이다 라는 명제가 그것이라고, 존재의 일의성이란 존재란 오직 하나의 목소리를 가짐을 뜻합니다. 존재가 생성을 뜻한다 함은 그 오직 하나의 목소리가 바로 생성이란 말입니다.

존재하다란 어떤 존재자도 사용할수 있는 술어 입니다. 그것은 모든 존재자에게서 반복되는 생성을 뜻합니다. 존재는 생성 이지만 생성의 양상은 단 한번도 같을리 없습니다. 모든 물방울에 대해 똑같은 하나의 바다가 있지만 그 바다는 역으로 각각의 물방울들이 달라질 수 있음을, 모든 차이의 열려 있음을 뜻합니다. 물방울 들이 합쳐지고,  변형되고 갈라지고 하며 무수한 형상을 취할 수있는 건 그게 모두 하나의 바다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개방성은 일의성의 본질적 특징이라고 하겠습니다.  

존재는 생성이라는 말은 맞지만 그것만이라면 그 말은 모든 존재자가 입을 수 있는 아주 크고 헐렁한 옷이 되고 맙니다. 생성을 제대로 사유하려면 역으로 존재자들의 차이를 통해 생성을 사유해야 합니다. 존재 자체를 차이를 통해 사유해야 합니다. 들뢰즈가 스피노자주의에 대해 실체로 하여금 양태들 주위를 돌게 만든 것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고 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이게 바로 그가 차이의 철학을 통해 하려는 것입니다. 차이의 존재론이란 존재와 존재자 간의 차이가 아니라 존재 자체를 차이로써 사유 하려는 문제 설정입니다. 존재자를 존재하게 해주는 차이, 존재자를 만들고 변화시키는 차이, 그게 바로 들뢰즈의 존재론을 하이데거의 그것과 다르게 해주는 차이 개념입니다.

존재자 네지 양태의 층위에서 생성을 사유하는 것은 어쩌면 존재 자체를 생성으로 사용하는 것보다 더 어렵습니다. 존재자는 존재와 달리 뚜렷한 경계를 갖는 명확한 대상으로 포착 되기때문입니다.  그 명확함과 뚜렷함으로 인해 생성이 오히려 보이지 않는 겁니다. 우리가 감지하고 생각하며 말하는 것은 규정된 대상으로서의 존재자 입니다. 우리는 그 규정성안에서 존재자를 보고 그 규정성을 통해 그것에 대해 말합니다. 너는 여자고 저건 개고 이때 그 존재자를 지속적으로 관통하고 있는 변화는 그 규정성에 가려 지워집니다.

여자, 개 등 익숙한 가시적 형태나 그걸 지칭하는 언어는 대부분의 사람들로 하여금 비슷한 방식으로 보고 행동하게 한다는 점에서 아무리 작아도 물적인 구성물 입니다. 이는 어떤 것에 대해 쉽고 빠르게 보도록 해 주지요. 바로 그렇기에 잘 보이지 않으니 미시적 변화를 보지 못하게 하고 감지 되었을 때조차 사소한 것으로 간주하게 합니다. 언어와 감각의 격자와 대응하는 물적 구성물에 가려 분자적인 미시적 차이가 생성을 반복하고 있음을 놓치게 됩니다. 감각의 격자 안에 있기에 물리적으로 지각 되기 어렵고,  언어의 격자 안에 있기에 지각 되어도 말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들뢰즈 가타리는 홀로 고립되어 변화 일반을 지칭하던 생성 되기란 말을 하이픈으로 다른 단어와  결합하여 사용하는 새로운 개념으로 재발명합니다. 동물-되기, 여성-되기, 강밀하게-되기, 분자-되기, 지각불가능하게-되기 등등이 그것입니다. 이는 단지 존재자의 층위에서 발생하는 변화를 포착하기 위한 개념일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그 변화를 만들어가기 위한 전략적 개념이기도 합니다. 즉 되기는 하이픈으로 연결되는 존재자를 통해 기존의 익숙한 감각이나 사유의 격자에서 벗어나기 위한 적극적 전략을 표현합니다. 가령 동물-되기나 흑인-되기는 동물, 흑인 같은 소수적인 몰적 구성물을 통해 다수적인 몰적 구성물로부터 벗어나는 창조적 탈주 선을 그리는 것입니다. 지각 불가능한 것을 위한 통로나 지각 가능한 표지를 만드는 물적 성분을 동반하지 않고 선 어떤 흐름, 어떤 분자 되기도 몰적 구성 물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 이로써 우리는 능동적 생성의 장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예를 들어 동물 되기는 인간이 동물적이라고 보이는 어떤 것을 통해 자신의 현재 상태 즉 인간의 통상적 상태를 벗어나는 것입니다. 말타는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인간이 말을 타는 데는 두 가지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속도로 말의 속도를 맞추는 겁니다. 말을 길들여 말의 움직임을 인간화하는거지요. 말을 타려면 둘다 변화가 필요하지만 사실 이 경우에는 인간도 말도 본질적으로 어떤 변환의 문턱을 넘지 않습니다. 인간에  맞추어 말의 속도를 줄이는것이니 인간은 기존의 문턱 안에 머물러 있습니다. 말에게도 그 속도는 이미 기존 문턱 안에 있는 것이니 애써 달라질 게 없습니다. 인간화라고 하지만 이는 사실 어떤 문턱을 넘지 않기에 무언가 다른것이 되는 게 아닙니다. 

다른 하나는 말의 속도와 움직임에 말 타는 사람을 맞추는 겁니다. 말에 맞추어 인간이 말의 일부가 되는것이니 말 되기라 할 수 있겠지요. 말의 속도를 통해 인간의 속도에서 벗어나는 겁니다. 그러려면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속도의 문턱을 넘어야 합니다. 통상의 인간과는 다른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몽골 기병들의 놀라운 속도는 이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하죠.  모비딕에서 에이허브는 모비딕을 쫓아가기 위해 미쳤느냐는 항해사의 비난을 묵살하고 태풍에 돛을 올려 항해를 계속합니다. 모비딕에 홀려 인간으로서는 감당하지 못할 어떤 강도의 문턱을 넘는 겁니다. 고래-되기 혹은 모비딕-되기 라고 할수 있겠습니다.

되기는 하이픈으로 연결되는 것과 동맹을 맺는 겁니다. 몽골인들은 말을 부하나 도구로 부리는게 아니라 말을 따라 달리며 말과의 동맹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에이 허브와 피커드 호의 선원들은 모비딕을 따라가며 모비딕과 동맹을 맺는 겁니다. 이는 공통의 목적도 없고 계약이나 동의도 없으며 심지어 적대의 감정마저 동반하는 동맹 입니다. 정치인들이 흔히 하듯 협정문에 서명하거나 나란히 서서 악수하며 사진을 찍는게 훌륭한 동맹의 징표는 아니지요. 반대로 펭귄의 대한 인간의 일방적 동맹도 있고 에이허브처럼 경쟁이나 적대마저 새로운 힘의 자원으로 삼는 동맹도있습니다. 적마저 동지로 삼는 동맹 입니다. 정치의 문제는 적과 동지를 가르는 문제라는 칼슈미트의  정의가 놓치고 있는 치명적인 지점이 바로 이것이지요. 

누군가를 감당할 수 없는 속도로 향해 나아가게 하는 것은 지금 있는 곳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것은 강력한 매혹의 힘입니다. 모비딕에 홀려, 말의 속도에 매혹되어 인간의 문턱을 넘게 되는 겁니다. 그렇기에 되기 동맹은 감염에 의해 이루어지는 셈입니다. 마치 흡혈귀에 물려 인간을 등지고 흡혈귀가 되는 사람 처럼 말입니다. 1730년부터 1735 년까지 사람들이 듣는 것은 모두 흡혈귀에 대한 이야기 뿐 이었다. 따라서 동물 농장처럼 인간들의 행태를 풍자하기 위해 동물들을 동원하는 알레고리나 아감벤 처럼 인간의 삶인 바이오스가 동물적 생명인 조애(zoe)로 전락했음을 비판하기 위해 생명 정치를 말하는 것은 동물 되기와 정 반대편에 있다 하겠습니다.

되기는 자기에게 없는 어떤 힘을 얻기 위해 자기와 이질적인 어떤 것과 동맹 하는 것입니다. 분자적인 감염에 의해 이질적인 것에 말려 들어가는 동맹입니다. 그렇기에 이것은 혈연 관계의 선을 따라 펼쳐지는 진화가 아니며 신화적 형태를 동반 할 때 조차 신화적 원형으로 후퇴하는 퇴행도 아닙니다. 시베리아 부족들에게는 피로 이어진 가족을 떠나 곰이나 호랑이와 결연 동맹을 맺는 신화가 많습니다. 그들은 대게 이를 근거로 그 동물이 자신들의 시조라고생각합니다. 이는 그 동물과 유사성이나 그 동물에 대한 원형적 상상력의 산물이 아니라 그 동물에게서 감지했던 어떤 힘에 매료되어 그 힘과 동맹 하려는 욕망, 그 동물의 힘을 통해 자신의 힘을 표현하려는 욕망의 산물입니다. 이는 유사한 것에 대한 공감이 아니라 차라리 이질적인 것에 매혹되어 본성에 반하는 참여에 말려 들어가는 겁니다. 되기는 혈연이나 종을 가로지르는 횡단적인 선을 따라 낯선 것의 생성 속으로 말려 들어가는 동맹 입니다. 이질적인 것과의 접속을 통해 혈연적 선을 꺾으며 새로운 이탈의 선을 그리는 리좀적 동맹 입니다. 

동물 되기는 동물의 행동을 모방하는게 아닙니다. 몽골인은 말의 흉내를 내거나 말의 동작을 모방 하는게 아니라 말을 타고 달리는 겁니다. 동물 되기는 동물을 따로 만들어 내는 것도 아닙니다. 되기는 자기 자신 이외의 어떤 것도 생산 하지 않는다. 에이허브의 고래 되기에는 고래가 보이지 않습니다. 고래를 쫓는 선원들 만 있을 뿐입니다. 모두들 동물과 함께 자신을 다른 무언가로 생산하는 것입니다. 또한 동물 되기는 꿈이나 상상, 환상이 아니며 그것은 전적으로 현실적입니다.  몽골인의 기마술은 상상이나 환상이 아닙니다. 모비딕이나 에이허브는 문학적 상상속의  존재자이지만 모비딕의 속도를 따라가기 위해 배를 가속하는 것은 분명 현실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현실에서 물리적이고 신체적인 강도를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되기는 강밀하게 되기 이고 강도적인 힘의 생산 입니다. 상상이나 환상이 등장할 때 조차 그것은 현실에서 어떤 강도를 생산하기 위해 이용되는 겁니다. 하지만 강밀하게 되기가 단지 속도나 강도를 올리는 것만은 아닙니다. 공중에 멈춰선 매는 속도가 없는게 아니라 대단히 강밀한 속도를 갖습니다. 학춤을 추는 사람에겐 팽팽한 부드러움을 위해 오히려 속도를 감속하는 게 중요합니다. 거기서 문제는 속도의 고저가 아니라 학의 감응이고 그 감응을 만드는 강도 입니다. 속도든 움직임이든 동물 되기를 한다는 것은 그 동물의 감응을 산출하는 어떤 강도들의 흐름을 만들어내는 겁니다. 

동물의 감응을 통해 새로운 강도적 분포를 만들고 이를 통해 우리의 신체와 행동을 바꾸는 것입니다. 다른 되기 들도 그렇습니다. 제니스 조플린(Janis Joplin)은 흑인의 목소리를 통해 백인의 성대가 만들어 내던 통상적 음색을 바꾸어 버립니다. 카운터테너나 카스트라토는 여성들의 목소리를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바꾸죠. 여기서 흑인이나 여성은 도달해야 할목표가 아닙니다. 되기는 그것을 향해 가지만 도달하는 곳은 그곳이 아니라 중간의 어딘가 입니다. 출발지와 목적지의 중간에서 새로운 다양체를 창안하는 겁니다. 도달한 그 중간이 목적지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입니다. 목적지 없이 도달한 중간이 여성이나 흑인 같은 몰적 구성물의 이름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심지어 도달점이 언제나 중간 이기에 흑인 목소리라는 목적지가 있었던 경우임에도 다른 것으로 간주되기도 합니다. 예전에 조플린의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 저는 흑인 가수라고 생각했는데 한참을 지난 후에야 그게 아님을 알고 크게 놀란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노래를 듣고서 제 어머니가 했던 반응은 동물의 소리지 사람의 소리냐라는 것이었습니다. 똑같은 소리가 누구에겐 흑인의 목소리로 다른 누구에겐 동물의 소리로 들렸던 겁니다. 

모든 되기는 이중적입니다. 작곡가 올리비에 메시앙(Olivier Messiaen)은 새를 통해 새로운 음악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탁월하게 새 되기를 했던 사람입니다. 조류 학자라 할 만큼 새에 대해 관찰하고 연구했던 그는 새들의 노래는 물론 새들의 행동 등을 통해서 새로운 음악적 소리를 만들었습니다. 역으로 그의 작품 집인 조류 도감은 음악적 소리를 통해 다양한 새들의 감응을 산출합니다. 그 소리는 새들의 리듬이나 선율을 이용할 때 조차 새들이 노래하는 것을 모방하지 않습니다. 종달새의 노래 같은 것을 기대 했다면 아주 당황할 음악을 들려줍니다. 여기서 메시앙의 새 되기는 새의 음악되기를 통해 진행됩니다. 이중의 되기라 함은 이런 의미에서 입니다. 새들은 그대로 둔 채 새들에게 다가가는 게 아니라 새 자체 또한 다른 것이 되게 하는 겁니다. 새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새마저 다른 어떤 것이 되게 하는 겁니다. 이중적으로 진행되는 되기와 관련해 들뢰즈 가타리는 되기의 블록 이라는 개념을 제안합니다.

즉, 메시앙의 새 되기,  새의 음악 되기라는 두개의 되기가 하나의 블록을 이루고 있다는 겁니다. 에이허브의 고래 되기는 모비딕에 속도 되기를 동반하고 제니스 조플린의 흑인 되기는 흑인의 음악 되기를 동반합니다. 이중의  되기는 이중의  탈 영토화를 통해 이루어 집니다. 메시앙이라는 인간이 탈 영토화 되어 새가 되는 것이고 새는 탈영토화 되어 음악이 되는 것입니다.  이 이중의 탈영토화를 끌고 가는 것은 새의 음악 되기 입니다. 새를 탈영토화는 음악 되기의 선을 따라 메시앙의 탈영토화가 이루어 집니다. 탈영토화를 끌고 가는 힘은 상대적으로 표현의 역할을 하고 그것에 의해 탈 영토화 되는 힘은 상대적으로 내용의 역할을 합니다. 즉 새의 음악 되기가 표현의 역할을 한다면 그 표현에 의해 발생하는 메시앙이 새 되기는 내용의 역할을 한다는 겁니다.  쉽게 말하면 어떤 음악을 들으며 이건 새 소리야 이건 동물의 소리야 하는 느낌을 갖게 될 때 그 음악적 소리가 표현이 라면 새니 늑대니 하는 느낌은 내용 이라는 겁니다. 새의 감응을 음악으로 표현하며 매시앙은 새 되기를 합니다. 그는 새를 대상으로 묘사하거나 재현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새가 되어 음악을 하는 겁니다. 동물원에 갖힌 원숭이의 세계를 글로 쓰며 카프카는 동물 되기를 합니다. 카프카 역시 그 원숭이에 대해 글을 쓰는 게 아니라 원숭이가 되어 글을 쓰는 겁니다.  

새가 되어 익숙한 음악에서 벗어나는 창조적 탈주선을 그리는 것이고 원숭이가 되어 인간 세계로 부터 벗어나는 탈주선을 그리는 겁니다. 그렇게 글을 쓰며 카프카는 원숭이의 분자를 방사하는 것이고 그렇게 음악을 쓰며 메시아앙은 새의 파동을 만들어 내는 겁니다. 인간들의 격자로 부터 벗어나는 어떤 새로운 생성의 흐름을 창안하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모든 되기는 분자 되기 이고,  파동 되기 입니다. 몽골 가수 노르부 반자드(Namjilyn Norovbanzad)가 노래할때 그는 시원하게 펼쳐진 광대한 초원의 파동들을 방사 합니다. 우리는 그의 초원 되기에서 음향화된 초원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게 어째서 초원이냐고 물으면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통상적 지각을 벗어나있는 소리이기 때문입니다. 지각 되지만 지각될 뿐 그게 무언지 말할 수 없는 지각, 그저 초원 같다는 모호한 감응만  남기는 지각 입니다. 지각 불가능한 지각 입니다. 이는 사실 다른 모든 되기도 그렇습니다. 그렇기에  모든 되기는 엄밀하게 말하면 지각의 격자를 벗어나는 지각 불가능하게 되기 입니다. 초험적 경험입니다. 그 극한에는 모든 몰 쪽 구성물에서 분자적으로 이탈하는 입자들의 강도적 흐름이 있습니다. 일관성의 평면이 거기에 있습니다. 모든 되기 들은 자신의 출구를 발견하게 될 이 최후의 문인 일관성의 평면 위에 쓰여 진다. 일관성의 평면 위에서 모든 것은 지각 불가능하게 되고 모든 것은 지각 불가능하게 되기 이다.  그러나 바로 그 위에서 지각 불가능 한것은 보이고 들린다.

 

 

미시 권력이나 미시 정치학 이라는 말은 감시와 처벌에서 푸코가 사용한 이래 널리 사용되는 개념이 되었습니다. 들뢰즈와 가타리 또한 미시 정치학 이란 말을 자신들의 문제 설정을 요약하는 개념으로 사용합니다. 특히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 안티오이디푸스에게 진 빚을 명시한 바 있고, 안티 오이디푸스 영역판의 서문을 써 주기도 했습니다. 들뢰즈 가타리의 카프카는 푸코의 영향이 크게 드러나는 책입니다.  천의 고원에서 미시 정치학과 선분성을 다루는 부분은 이를 다시 확인해 줍니다. 이는 기존 정치학의 권력 개념을 근본에서 뒤흔들며 새로운 정치분석의 장을 열었습니다. 동시에 이는 들뢰즈 가타리와 푸코의 차이가 가장 분명히 드러나는 곳이기도 합니다. 

권력이 있는 곳에 저항이 있다. 이 명제가 보여주듯 푸코는 권력과 저항이라는 개념을 근간으로 사유합니다. 반면 들뢰즈 가타리는 욕망과 권력이라는 개념에서 시작합니다. 푸코는 욕망이란 개념이 결여나 억압과 뗄수 없다고 거부하지만 들뢰즈 가타리는 배치란  권력의 배치가 아니라 욕망의 배치이고 권력이란 배치가 지층화된 차원이라며, 자신의 입장을 그와 대비합니다. 푸코는 욕망보다는 쾌락이 더 낫다며 후일 성의 역사2에  쾌락의 활용 이란 부제를 붙이지만 들뢰즈 가타리는 쾌락은 욕망의 내재적 과정을 중단시키는 방종이자 재영토화라며 비판 합니다. 들뢰즈 가타리의 미시 정치학이욕망이란 개념에서 시작되어야 하는 이유는 이로써 분명해집니다

들뢰즈 가타리에에게 욕망이란 니체의 말로 바꾸면 '의지'  더 정확히는 '힘에의 의지'입니다. 니체는 우리의 의지가 단일 하지 않으며 항상 이미 복수적임을 강조합니다. 음식을 하나 먹으려 할 때도 허기를 채우려는 욕망과 맛에  끌리는 욕망, 늘어나는 살을 저지하려는 욕망이 동시에 공존하며 맛에 대한 욕망 또한 여러 가지 다른 맛을 향하여 분열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들뢰즈 가타리 는 의지 즉 욕망은 그 자체로 다양체라고 합니다. 동시에 여러 방향으로 향해 있기에 분열자 라고 명명합니다. 마치 평평한 면 위에 물처럼 모든 방향으로 열려있는 흐름 그것이 욕망입니다.  

약간 통상적인 어법 이지만 모든 방향으로 열려있는 흐름을 통제하여 질서를 부여하고 할 때 권력이 출연합니다. 권력이란 욕망의 흐름을 분절하고 지칭화하여 통제 가능한 질서를 부여하는 성분입니다. 역으로 말하면 욕망이란 권력의 통제 이전의 흐름,  권력의 통제를 벗어난 흐름입니다.  만약 욕망이 혁명적이라고 한다면 이는 욕망이 혁명을 욕망 한다는 말이 아니라 권력의 통제 이전에 그 통제와 무관하게 모든 방향으로 열린 흐름 이란 말입니다.

그러나 욕망과 권력은 그저 대립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특정한 형태로 지층화 되고 고체적 안정성에 갇힌 욕망이 바로 권력이기 때문입니다.  맛에 대한 욕망은 애초에 모든 방향으로 열려 있지만 자신이 속한 음식 문화의 코드에 따라 지층화 됩니다. 지층화 된 맛으 세계 안에서 익숙한 음식과 좋아하는 맛 안에서 벗어날 줄 모르게 된다면 맛에 대한 욕망은 권력이 됩니다. 내 신체를 내 취향을 선 규정하여 정해진 틀 안에서만 먹게 하는 권력이 되죠.  외국 여행을 가서도 항상 먹던 음식만 찾는 것은 선호와 욕망의 형태로 작동하는 이 권력의 작용입니다. 물론 푸코의 지적처럼 이는 그저 부정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지층화된 맛 안에서 미각을 지배하는 권력은 좀 더 나은 맛, 좀 더 맛있는 음식을 생산하게 하니까요.  공부하도록 훈육된 신체가 학습 능력이나 집중력을 생산 하듯이 그러나 그 때 조차 지금의 감각 지금 만든 음식에서 벗어나 좀 더 나은 것을 만들려는 욕망이 없으면 불모적인 반복에 갇히고 맙니다. 

욕망은 지층화되어 권력이 되지만 그 권력에서 다시 누수하고 그것을 범람하는 것 또한 욕망입니다. 늘 만들던 음식의 다른 무언가를 섞어 새로운 방식으로 조리해 보려는 욕망 낯설지만 뭔가 끌리는 새로운 맛에 대한 호기심이 익숙한 맛에 길든 혀의 틈새로 파고들지요. 그것은 다시 지층화 되며 권력이 되겠지만 욕망은 그 안에서 다시 탈 주 선을 그리게 될 것입니다.  혁명과 보수라는 본성을 가진 욕망과 권력이 따로 있는게 아니라 이처럼 탈영토화와 와 재영토화가 반복되는 내재성의 장이 있을 뿐입니다. 혁명과 권력도 그렇습니다.  혁명은 의무감이 아니라 하고 싶다는 욕망을 바탕으로 해야만 가능합니다. 그러나 욕망은 혁명적인 때조차 혁명만 욕망 하진 않습니다. 혁명이 성공하면 혁명을 생산한 욕망은 자신이 생산한 체제 안에서 지층화 됩니다. 혁명의 욕망이 그 혁명을 만든 체제를 유지하려는 권력이 되는 건 차라리 자연스럽다 하겠습니다. 그러니 혁명 이후 혁명은 다시 시작되어야 합니다.  혁명과 권력 역시 영구 혁명을 함축하는 내재성의 장안에 있는 겁니다. 

욕망의 흐름을 통제하는 데는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홈을 파서 욕망의 흐름을 통제하고 이용하는 겁니다. 수로를 파서 물에 흐름을 고체적 틀에 따라 흐르게 하여 그것을 경작에 이용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동시에 모든 방향으로 열린 공간이 매끄러운 공간이라면 이처럼 특정한 홈을 따라 흐르도록 하는 공간을 홈 페인 공간이라고 합니다. 가령 경찰은 이동하려는 욕망에 따라 흘러가는 교통의 흐름을 홈페인 도로 따라 흘러 가게 하고 신뢰하는 대중의 흐름은 폴리스라인 안에 가두려고 하지요.

또 하나의 방법은 선분화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것의 흐름을 선으로 표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때 선이란 곡선 입니다. 직선이란 곡선의 아주 제한된 경우 일 뿐이지요. 선분이란 끝점으로 절단 된 선을 말합니다. 선분화는 욕망의 흐름을 그와 상응하는 활동의 흐름, 행동의 흐름, 사고의 흐름 그리고 대중의 흐름을 뚜렷하게 구별되는 경계에 의해 절단 하는 작용입니다. 일하는 건지 쉬는 건지,  사랑인지 우정 인지,  남자인지 여자인지를 확실히 하라는 말이 바로 선분적으로 절단하는 권력의 명령어입니다. 이렇게 둘로 나누는 이항적 선분만 있는건 아닙니다.  분업은 노동의 흐름을  절단해  선분화하는 방법입니다. 학교의 시간표는 하루의 시간을 일련의 선분들로 분할하여 학생들의 활동을  통제합니다.  이처럼 어떤 흐름을 순차적인 선분들로 절단한 것은 선형적 성분이라고 합니다. 방사상의 선을 따라 절단되는 원형적 선분도 있습니다. 나,  내가 속한 지역,  도시,  국가,  세계, 우주로 확대되는 것이 그것입니다.  

선분이란 개념에서 중요한 건 양끝의  경계를 뚜렷하게 절단 하는 것입니다.이를 선분 성이라고 합니다.  권력은 그렇게 구별하고 확인하며 절단 하는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분업화 된 라인에서 내 작업을 제대로 완수하라고 요구하는 작업 반장이나 바로 옆에 동료를 통해 선분적 권력은 작동합니다. 특히 권력이 가장 결정적으로 작동하는 것은 흐름이 선분화 되기 시작하는 것과 끝나는 곳입니다. 학기, 학점이란 선분의 끝점에도 권력은 작동하지만 학교의 권력이 가장 강력하게 작동하는 곳은 입학과 졸업이라는 두개의 끝이죠. 그래서 어떤 흐름이 선분화되는 양끝점을 권력 중심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선분성은 단지 일차원의 선분에만 속하는 것은 아닙니다.  두개 끝점을 갖는 선분을 2차원으로 확장하면
선분성을 갖는 면이 되지요. 원환을 그리는 면은 그 선분의 한 끝을 고정한 채 회전시켜 얻어진 겁니다. 이를 3차원으로 확장하면 선분적인 입체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를 굳이 선분적인 선으로 다루는 건 면이나 입체는 흐름을 표현하기 어렵고 또한 절단의 중요성을 드러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선은 흐름과 절단을 다이어그램 적으로 사고하는데 가장 적합합니다.  들뢰즈 가타리의 분열분석이 겨냥하는 것은 개인들 만큼이나 집단들을 가로지르는 선의 배치라고 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실천은 선들을 그리는데 능동적으로 관여하며 그 선들과 동일한 위험 내지의 변이에 부딪힌다. 분열 분석은 선들을 풀어주며 이 선들은 또한 그만큼 삶의 선들 문학 내지 예술작품의 선등 한 사회의 선들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앞서 이항적, 원환적, 선형적 이라는 3가지 형태의 선분의 대해 말했는데 이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들 모두를 관통하는 상이한 유형의 선분성입니다. 하나는 유연한 분자적 선분성의 선이고 다른 하나는 경직된 물적 선분성의 선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또 다른 유형의 선이 하나 더 해집니다. 탈주선이 그것입니다.  

경직된 선분성은 뚜렷하게 분할되고 계산과 예측이 가능한 양상으로 작동합니다. 국민,  계급 같은 거대 집단 뿐 아니라 집단의 원소가 되는 개인이나 관계 감정도 이런식으로 선 분화되어 있습니다. 소속된 원소 모두에게 동일하게 작용하기에 모드를 동일화 시키는 힘이 강력한 선분성입니다. 이 몰적인 성분에서 빠져나가는 유연한 양자적 그림이 있습니다.  대학이나 취업이 요구하는 걸 하지 않고 무언가 이해할 수 없는 짓을 하는 학생들, 남자인 것 같은데 여성복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  겉으로는 멀쩡하지만 비밀스러운 지하 활동을 하는 잠행자들 물론 이들도 모호 하지만 나름의 경계를 같기에 선분화되어 있다 해야 합니다. 그러나 절단의 경계가 모호하고 절단 방식이 유연하다는 점에서 유연한 선분성을 갖고 있습니다.

경직된 선분성은 절단의 기준이나 방법을 소속된 모두에게 동일하게 작동시키기에 물적 선분성이라고 합니다. 너는 사내 자식이 왜 이딴 일로 우는 거야,  여기는 학교니 시험 보기 싫으면 나가,  몰적이라는 말은 기체 역학에서 나온 말인데  6.02 곱하기 10의 23승계의 분자들을 하나로 묶은 단위를 표시합니다. 분자 하나씩 다루어선 기체 상태를 서술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수만큼의 분자들이 동질적이며 동일하게 움직인다고 가정하여 그 전체가 하나인 것처럼 서술하는 겁니다. 개개 분자의 특이한 성질이나 운동은 물적 동일성을 표시하는 통계적 평균속의 작은 편차 중 하나가 되고 맙니다. 

브라운 운동처럼 물적 평균으로 서술할 수 없는 특이한 분자적 운동이 있습니다.  물적 선분성에서 벗어난 움직임에 감염되어 함께 움직이는 이웃이 나타날 때 편차로 환원될 수 없는 분자적 운동이 시작됩니다. 이웃한 것에서 다시 이웃한 것으로 감염되며 확산되는 분자적 선들이 그려지게 됩니다. 물론 이런 분자적 선들 또한 선분성을 같습니다. 드래그 퀸과 드래그 킹, 팸과 부치 같은 선분들이 그런 경우이지요.  엄격한 지하 조직이나 비밀 조직은 유연한 분자적 선분성의 선이 다시 물적인 선분성의 선으로 경화된 경우입니다.  

분자적 선이 기존의 물적 선분성의 선에서 이탈하여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 내기 시작할 때 창조적 탈주선이 그려집니다. 가령 시험이 싫다고 거부하던 이들이 증식 되면서 새로운 교육의 장을 착안 하게 될 때가 그런 경우 겠죠. 그런데 물적인 권력으로 인해 실패하게 될 때 혹은 새로운 걸 창조하는 구성적 능력이 소진될 때 이 다른 욕망은 기존 세계에 대한 분노나 혐오에 정념이 되기 쉽습니다. 이런 정념이 절망과 저주의 정념으로 이어질 때 탈주선을 그리던 분자적선은 파괴와 죽음의 선을 그리게 됩니다. 들뢰즈 가타리는 나치즘이 그런 경우라고 합니다. 그것은 현행화된 니힐리즘이고 전쟁만을 목적으로 하는 전쟁 기계 이며,  죽음 이어 만세를 외치는 자살적 국가였다고 합니다.  물적 전체주의와 구별되는 이런 분자 적인 파시즘은 나치 나 네오 나치 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혐오의 정념이 확산되며 증식되는 대중 운동들도 이러한 경우에 속합니다.  현행의 세계에 대한 극히 정당한 분노에서 시작된 운동조차 창조적 구성 능력을 잃고 혐오의 정념 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면 이런 길을 가게 됩니다.

선분성과  관련해 가장 흔한 오해는 물적인 것은 집단적인 것이고 분자적인 것은 개인적 이라는 생각입니다.
물적 동일성을 가진 개인들이 많지요. 흔히 말하는 개성은 대게 물적인 선분안에 있습니다. 분자적인 것은 개인 이하이거나 개인 이상입니다. 돈과 교환이 지배하는 세상이지만 연대의 욕망들이 있고 증여의 작은 행동들이 있습니다. 일시적 이거나 부분적 이라는 점에서 개인 이하인 그런 것의 흐름을 따라갈 때 개인은 물적 성분에서 이탈하게 됩니다 또 개인의 분자적 이탈은 그의 감염되는 이웃이 생겨나 개인 이상으로 증식 되게 될 때 물적 선분안의 편차를 넘어서 분자적인 운동이 됩니다. 

분자적인 것은 경직된 물적 격자 들을 빠져나가는 누수와 범람의 흐름과 관련된 것이지 개별적인 이탈의 편차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게 분자적인 것은 개인이 아니라 오히려 대중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계급은 생산관계상 의 지위나 기능에 의해 규정된 몰적 집단 이지만 대중은 자신이 소속된 곳에서 벗어난 이들이 모여 들며 형성된 분자적 집단입니다. 즉 대중이란 이웃한 것들과 상호 작용하며 조건에 따라 상이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미시적 요소들의 흐름입니다.  이는 정치적 대중으로 한정되지 않습니다.  은행이나 기업의 회계 단위 같은 경제적 선분을 통과하며 흘러가는 화폐 대중,  도로를 따라 흘러가는 자동차 들로 이루어진 교통 대중 등등이 있죠.

물적인 것이 것이 거시적이라면 분자적인 것은 미시적 입니다. 거시 정치와 미시 정치의 구별은 이와 상응합니다. 그러나 미시 정치는 가정이나 연인 등 일상의 작은 영역에서 작동하는 정치가 아니며 미시적 이라는 말은 단지 규모나 크기가 작음을 뜻하지 않습니다. 미시 정치란 분자적 감염의 양상으로 형성되는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정치 입니다. 대중은 규모나 크기가 작지 않고 큽니다. 그런데도 미시적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것이 거시 정치가 계급이나 국민 등 거대 집단의 이해관계 같은 규정성을 통해 정치를 사고 한다면 미시정치는 하나하나를 보면 작다고 할 수 있는 분자적 원소들의 운동 양상을 통해 정치를 사고 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작동 방식입니다. 국가나 계급 같은 몰적인 집단은 하나의 중심에서 방사되는 명령어나 기준에  공명하며 하나의 구성체로 움직인다면 대중이라는 분자적 집단은 수평적이고 분자적인 감염에 의해 흐름을 형성하며 움직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들뢰즈 가타리는 전체주의와 파시즘을 구별합니다. 스탈린주의 같은 전체주의 는 국가 장치에  상응해 개인들이 공명하거나 복종하며 작동한다는 점에서 물 적입니다.  파시즘은  분자적 감염에 의해 집단적 의지가 형성되고 증식된 다는 점에서 분자적 입니다. 그렇기에 스탈린주의적 전체주의의는 대중 운동이 없습니다.  반면 파시즘은 일차적으로 대중 운동 입니다. 나치즘만이 아니라 수평적으로 감염되며 파괴와 죽음의 검은 구멍을 향해 흘러가는 운동은 모두 미시 파시즘 입니다.  

따라서 몰 적인 것은 나쁘고 분자적인 것은 좋다고 할 수 없습니다.  분자적인 것이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방식으로 작동할 때에는 대중 전체가 부정적 권력을 행사하게 되기에 더욱 더 참혹해지기 쉽습니다. 약간의 유연성이 사태를 좀 더 낫게 하는데 충분하리라는 믿음이야 말로 미시 정치학이 경계해야 할 첫번째 오류 라고 하면 이 때문입니다. 파시즘 처럼 죽음의 선을 그리는 분자적 운동은 시작하지 않은 것보다 못한게 되고 맙니다. 다른 한편 분자적 탈주와 운동은 물적 조직으로 되돌아 가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대중의 흐름은 흘러가 버리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으며 결국 낡은 권력과 과거의 물적 선분들이 재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분자적 탈주선을 새로운 물적 선분 성 으로 변환시키는 입니다. 분자적 이탈이 다시 시작 되더라도 말입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라도 권력 중심은 자신의 손 밖에 있는 분자적 흐름을 따라갈 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무능력 지대로 부터 능력을 끄집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위대한 정치가 란 이런 흐름과 접속하는 사람들 일 뿐이며 파괴의 검은 구멍을 뛰어넘는 양자를 방사하는 사람들일 뿐이라는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강원도 고성 출장 중 휴대폰으로 주위 풍경을 담았다. 목적지로 이동 중 우연히 마주친 풍경들이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학창시절 수행여행 갔을때 숙소였던 속초 설악동 숙박시설들이 대부분 문을 닫았다. 일부 건물은 흉물스럽게 변해 있었다.  설악동의 옛 영광을 살리 겠다고 하시는 숙소 주인장을 만났다.  은퇴 후 제 2인생을 준비하고 계셨다. 이른 아침 설악동 숙소에서 설악산 국립공원 사무실 까지 산책을 하였다. 계곡 물흐르는 소리가 리듬을 타고 고요한 아침산의 정적을 깨고 있었다.    

 

 

등대에서 바라본 양양 물치항

 

물치항 방파제에서

 

 

방파제에서 바라본 모습

 

 

속초 청초호

 

 

설악동 청봉교

 

설악동

 

설악동 숙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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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과 머리를 구별하는 것에서 얼굴에 대한 개념은 시작합니다.  머리는 신체의 일부이지만 얼굴은 신체가 아니라 그 표면이고 그 표면에 세겨진 표정입니다. 신체의 상태를 표현하기도 하지만 그 이상으로 얼굴과 마주한 누군가를 향해 무언가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기호입니다. 그런 점에서 얼굴은 신체로 부터 탈 영토화 되어 비신체적 표현기계가 될 때 탄생합니다. 얼굴은 그 자체로 기호이지만 또한 입에서 나가는 말들 손으로 쓰는 문자가 실질적으로 요구하는 것을 표시하는 기호이기도 합니다. 기호에 실려가는 잉여성으로서의 명령어를 표시하는 기계, 그것이 얼굴이라는 표현기계입니다. 언어적 기호처럼 그 자체로 의미가 없는 자의적 기표들은 얼굴을 통해 얼굴에 재영토화 됨으로써 비로서 의미화 됩니다.  또한 얼굴은 마주한 얼굴에게 공감 내지 공명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부르고 답하는 주체화가 얼굴을 통해 이루어지는 겁니다. 

얼굴은 정치다. 얼굴성에 대한 들뢰즈 가타리의 생각을 요약해주는 것이 될 이 명제는 얼굴에 대한 우리의 통념을 깨는 단적인 문장일 겁니다. 동시에 얼굴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들은 곰곰히 생각해보면 쉽게 수긍할 수 있는 문장이기도 합니다. 의미화나 주체화를 요구하는 이런 저런 명령어를 발송하는 게 얼굴이니까요. 환한 얼굴이나, 찌푸린 얼굴, 슬픈 얼굴 서운한 얼굴, 모두 다 내게 특정한 감응을 요구하는 얼굴이지요.  사실 우리는 상대방이 무얼 원하는지를 알기 위해 눈치를 보기도 합니다.  주변의 얼굴들을 보면서 표정관리를 하기도 하죠. 노동자와 대면한 고용주 얼굴, 학생과 대면한 교사의 얼굴, 유권자와 대면한 정치인의 얼굴은 그 에 부합하는 얼굴을 요구합니다. 이렇게 얼굴들 사이에는 명령어들이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 나의 시선을 잡아주는  얼굴도 그렇습니다. 공명을 요구하고 응답을 요구하는 얼굴이죠. 얼굴을 통해 권력이 작동하고 있는 겁니다. 여기서 들뢰즈 가타리는 두 유형의 얼굴을 구별합니다. 앞 얼굴과 옆 얼굴이 그것입니다. 앞 얼굴은 이마와 볼이라는 여백을 갖는 둥그런 얼굴이고 눈과 입 눈썹 등으로 의미화하는 기호를 방사하는 얼굴입니다. 옆 얼굴은 다른 얼굴과 마주보며 부르고 답하는 얼굴 입니다. 주체와 상응하는 얼굴이죠. 물론 서로 외면하며 반대 방향으로 향한 옆 얼굴도 있습니다.  이  두유형의 얼굴이 섞이면서 의미화와 주체화의 양상이 표현됩니다. 얼굴은 의미와 주체화가 교차되는 지점에 있는 특수한 장치라는 말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입니다. 

머리는 신체를 움직이는 코드에 의해 작동하지만 얼굴은 신체의 의한 코드화가 정지되고 머리가 표정이라 불리는 어떤 것을  초코드화 될때 탄생합니다. 머리가 이처럼 얼굴이 되고 표현적 기호를 갖게 되면 이제 다른 신체 부위도 얼굴화 됩니다.  힘차게 치켜든 주먹, 가운데 손가락을 세운 손은 도구와 짝인 신체가 아니라 얼굴과 짝인 기호 입니다. 어깨가 구부러지도록 숙인 고개도,  두팔을 치켜든 상체도,  무릎 꿇은 다리도 그렇습니다. 얼굴이 머리를 넘어 신체 전체를 뒤덮은 겁니다. 

또한 얼굴은 신체를 덮은 옷으로 확장됩니다.  주머니와 단추, 어깨에 심은 뽕과 페인 허리성, 띠와 브로치는 신체적 기능을 보완하던 옷을 표정을 갖는 의상으로 바꿉니다. 머리에서 시작된 표면의 정복은 이제 모든 것의 신체의 표면으로 확장됩니다. 주전자나 자동차 집이나 건물 도시등 크고 작은 사물이 나름의 표정을 갖고 얼굴화 됩니다. 

사물의 얼굴화는 신체적 생존의 조건인 환경을 풍경으로 변화시킵니다. 즉 풍경이란 환경의 얼굴 혹은 얼굴화된 환경입니다. 역으로 미술이나 영화는 이제 얼굴을 풍경으로 다루게 됩니다. 탁월한 초상화는 그 인물의 얼굴을 그가 산 세계로 풍경화 합니다. 영화의 클로즈업은 얼굴의 풍경 그 자체가 되도록 함으로써 어떤 사건에 대한 그의 감응이나 감정을 장면화 합니다. 이런점에서 도구가 손의 상관자라면 풍경은 얼굴에 대한 상관자 자라고 하겠습니다. 다양한 신체의 얼굴화나 얼굴의 풍경화를 통해 확인 할 수 있는 것은 얼굴이 단지 인간의 얼굴로 제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건물이나 도시 혹은 사물의 표정을 인간적인 방식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들이 빈번하지만 인간의 얼굴은 결코 일반적인 지위를 갖지 않습니다. 인간의 얼굴은 수많은 얼굴의 한 부류 일 뿐입니다. 가령 자동차의 헤드라이트와  라디에이터 그릴에서 인간의 얼굴을 상기하기 쉽지만 그 것이 꼭 인간의 얼굴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유선형으로 늘씬하게 뻗은 차체는 인간아닌 새나 돌고레 신체를 참조하는 경우가 많고 권위적인 관료는 로봇을 연상하게 합니다. 

그런 참조나 연상을 이용할때 조차 실은 그것으로써 늘씬함이나 빠름 경쾌한 딱딱함 등의 감응을 표현하려는 것일 겁니다. 얼굴에는 심지어 절대적인 비인간적인 어떤 것이 있다 함은 이런 뜻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얼굴만 있는게 아니라 수많은 얼굴들이 있는 겁니다. 그렇게 상이한 얼굴들을 만들어 내는 추상기계가 있습니다. 

얼굴은 기호들의 잉여성이 명령어가 등록되는 흰벽과 주체화의 정념을 끌어 당기는 검은 구멍을 통해 작동합니다. 이마와 볼사이에 흰 벽위에 세겨지는 이런저런 표정은 입에서 나간 말의 실질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다시말해 원하는게 무엇인지를 표시합니다. 보는 이의 시선을 잡아 끄는 두개의 검은 구멍은 그 흰벽에 세겨지는  기호를 만들뿐 아니라 공감 하거나 공명하는 정념을 잡아 당깁니다. 

이렇게 흰벽과 검은 구멍의 조합을 통해 다양한 표정을 만들어 내지요. 그래서 그들은 구체적인 표정의 다양한 얼굴을 만들어 내는 흰 벽과 검은 구멍에 체계를 얼굴 성의 추상 기계라고 명령합니다. 얼굴성의 추상기계는 흰벽과 검은 구멍이 체결하고 있지만 이때  흰벽이란 기호가 세겨지는 일종의 서판  같은 것을 뜻합니다. 희다는 것은 비어 있음을 즉 기호가 세겨지기에 적절한 빈 여백을 뜻합니다. 이 서판의 색깔이 반드시 흰색일 이유는 없습니다. 사람의 얼굴이 모두 흰 것은 아니며 건물이나 옷, 사물의 흰벽 또한 모두 희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마치 그것이 기호를 세기는데 최선의 방책인양 흰색을 특권하게 될 때 희다라는 말은 특정 색을 지칭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특정한 색깔이 그런 세계에 대한 선호가 마치 얼굴 자체의 척도라도 되는 양 간주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흰벽의 정도가 좋은 얼굴에 정도를 표시하는 것으로 간주되면서 얼굴 색깔의 위계가 만들어 지게 됩니다. 얼굴성의 추상기계가 넓은 흰 뺨과 눈에 검은 구멍을 가진 백인 그 자체가 된것은 이 때문입니다.

여기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은 바로 예수의 얼굴입니다. 알다시피 신이나 성인의 얼굴은 어디서나 그 성인을 떠받드는 사람들,  자신의 모습을 바탕으로 만들어 집니다. 가령 흑인들의 신이나 성인이 흰 얼굴을 하고 있을리 없습니다. 직접보고 그린 당대의 조각이나 초상조차 없기에 누구도 알리 없는 예수의 얼굴이 지금의 형태로 그려진 건 르네상스 시대였습니다. 그것은 그걸 그린 당시의 유럽의 백인 남성들의 평균적인 얼굴을 통해 발명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예수의 얼굴이 됨에 따라 이제 그렇게 생긴 얼굴이 성인의 얼굴, 본 받아야할 얼굴 한마디로 좋은 얼굴이 되게 됩니다. 척도적인 얼굴의 자리를 차지하는 겁니다. 그 얼굴을 척도로 하여 그로 부터 멀어지는 정도에 따라 차별의 정도가 작동하는 위계화된 인종주의가 이로부터 탄생합니다. 피부색뿐만아니라 눈과 코의 모양 등이 선호와 차별의 대상이 됩니다. 

인종주의는 백인 남자의 얼굴을 기준으로 이탈의 편차를 결정함으로써 작동한다고 하는 이런 의미에서 입니다. 즉 인종주의는 백인 자신의 얼굴에 보편성을 부여하는 이러한 선별적 척도의 산물이란 것입니다. 흰뺨을 모델로 하는 이 척도적 얼굴의 자의성은 사실 검은 구멍의 눈에서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검은 구멍에 검다도 실은 특정 색깔이 아니라 정념이나 시선을 잡아 당기는 어트렉터를 뜻하죠. 그러나 이 역시 흰벽처럼 특정 색깔의 눈을 지칭할 수 있죠. 하지만 희지 않은 뺨이 흰정도에 따라 위계화되는 것과 달리 검지 않은 눈은 검은색의 정도에 따라 위계가 되지 않습니다. 유럽인 자신의 눈이 검지 않기 때문이죠.

요컨데 유럽의 백인 남성들이 자기 얼굴로 예수의 얼굴을 만들고  예수의 그 얼굴을 좋은 얼굴의 척도로 삼는 자기 민족 중심적인 순환론이 거기에 있습니다. 백인 남자 얼굴에 보편적인 척도의 지위를 부여하고 그것을 통해 모든 얼굴에 선별과 등급화를 가동 시키는 겁니다. 이로써 흰벽과 검은 구멍의 체계인 얼굴성의 추상기계가 흰색을 특권화하는 인종주의적 추상기계가 되고 맙니다. 

앞서 우리는 명령어를 방사하는 얼굴에서 권력을 보았지만 척도가 되어 선별과 위계가 차별의 힘을 행사하는 이 얼굴에서 우리는 얼굴의 또 다른 권력, 얼굴성의 추상기계가 행사하는 또 다른 권력을 보게 됩니다.  얼굴은 정치다라는 명제는 이 또한 함축되어 있다 하겠습니다. 얼굴성의 추상기계는 두가지 방식으로 얼굴성의 권력을 가동시킵니다. 하나는 원소적 얼굴,  다른 하나는 선별 입니다. 먼저 원소적 얼굴이란 특정한 관계내지 배치안에서 준거가 되는 얼굴입니다. 아버지와 자식의 얼굴, 사장과 노동자의 얼굴, 경찰과 용의자의 얼굴, 어른과 아이의 얼굴 등  얼굴의 양식을 형성하는 표준적인 얼굴입니다. 이를 척도로 삼아 좋은 얼굴과 나쁜 얼굴, 허용되는 얼굴과 그렇지 않은 얼굴이 구별되고 선별됩니다. 아니 아버지 앞에서 어떻게 그런 얼굴을, 아니 아이 얼굴을 이따위로 그릴 수 있지, 당신은 경찰 같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네요. 

물론 인간의 얼굴, 아시아인의 얼굴 등도 마찬가지 입니다. 표준에서 벗어나는 정도에 따라 좋고 나쁨의 정도가 배열됩니다. 피부 색의 정도에 따라 인간의 얼굴에서 몇 번째 얼굴인지,양순한 표정의 정도에 따라 뻔뻔함의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가 정해집니다. 그 정도에 따라 가능한 얼굴의 범위가 증식됩니다.

물론 가운데 있는 척도적 얼굴을 향해 얼굴을 동일화 시키려는 권력의 벡터가 그와 반대 방향으로 작동합니다. 얼굴성의 추상기계의 작동 양상을 보여주는 추상기계의 변형들을 들뢰즈 가타리는 극한적 얼굴로 정의합니다. 이는 원소적 얼굴과 선별을 통해 구성되는 혼성적인 얼굴들입니다. 이는 상이한 배치들을 넘나 들며 작동하는 기계 입니다. 먼저 의미화가 주도하는 앞 얼굴에 추상기계들이 있습니다. 일단 흰벽과 검은 구멍만으로 이루어진 단순한 추상기계가 있습니다. 다음으로 편차를 통해 그어지는 경계선들로 확장되는 다중적 경계를 갖는 추상기기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장과 노동자 교사와 학생처럼 짝을 갖는 얼굴이라면 의미화와 주체화가 동시에 작동하겠지요. 이는 기호를 방사하는 두눈과 그의 공명하는 두눈의 짝으로 이루어집니다. 한쌍의 앞 얼굴이 마주보며 공명하는 얼굴기계인데 그 두 얼굴 간 적절한 표정의 정도에 따라 복수의 경계선들이 만들어 집니다. 네 개의 눈을 갖는 기계가 그겁니다. 학교, 집, 회사, 경찰서 등 구체적인 조건에 따라 척도에 부합하는 얼굴들이 이 추상기계를 통해 생산됩니다. 서로 연관된 얼굴이 늘어나면 더 많은 눈들이 그에 따라 늘어나게 되겠지요. 들뢰즈 가타리는 대조와도 같은 흰벽에 기호를 기입하는 이런 추상기계들을 대지의 기표적 전제적 얼굴들이라고 명명합니다. 

다른 한편 주체화의 옆 얼굴은 되게 마주보는 두 얼굴을 짝으로 갖지요. 트리스탄 이졸데 처럼 서로 부르고 답하며 검은 구멍으로 끌려들어가는 커플 기계는 검은 구멍을 향한 하나이자 둘인 선을 따라 작동합니다.  주체화 체제와 상응하는 옆 얼굴이 검은 구멍에 끌려가는 양상을 표현하는 추상기계 또한 공명하는 인물들의 수에 따라 공명을 위로하는 성분들의 수에 따라 증식됩니다. 공명을 촉발하는 음악 풍경 얼굴 의식 회화 등이 더해짐에 따라 그 선들은 증식되고 중첩되며 작동합니다. 

하지만 코키토의 주체화 즉 생각하는 나는 존재하는 나 라는 등식을 통해 작동하는 주체화는 그 처럼 마주보는 짝을 갖지 않습니다. 짝없이 고립된 하나의 얼굴이란 점에서 독신자 기계라 명명되는 주체화의 추상기계는 하나의 옆 얼굴이 나라는 자아내면의 검은 구멍에 빨려 들어가는 양상으로 작동합니다.  

얼굴에 대한 사유를 앞서 제시했던 것은 사르트르의 현상학이었습니다. 그는 눈과 구별되는 응시, 지향성이 담긴 시선인 응시를 통해 어떤 즉자적 존재가 나에 대한 존재가 됨을 지적합니다. 그때 그의 머리에서 나는 그의 얼굴을 보게 됩니다. 응시와 지향성이 얼굴을 만들어 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들뢰즈 가타리는 응시는 응시하지 않은 눈과의 관계에서 즉 얼굴성의 검은 구멍과의 관계에서 이차적일 뿐이라고 비판합니다. 

응시하지 않으려고 해도 무심고 지나쳤다 해도 누군가 소리치며 시선을 잡아 당길때 검은 구멍이 응시보다 일차적임을 확인할 수 있죠. 눈군가를 꽃이라고 부르며 달려가지만 내가 부여한 그 의미를 거부하고 스토커라고 밀쳐내며 현상학적 지향성 바깥으로 도망가는 얼굴도 있습니다. 다른 한편 라깡은 거울상을 통해 부분 대상들을 하나의 유기체로 통합하는 상상적 동일시를 강조하지만 우리는 동일시를 명령하는 얼굴에 권력이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동일시란 흰벽에 쓰여진 명령어를 받아들이는 행위의 반복을 통해 습속이 된 주체화의 결과일 뿐입니다. 거울은 얼굴성의 흰벽과의 관계에서 이차적일 뿐이라는 말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입니다. 덧붙이자면 레비나스는 고통받는 얼굴이야말로 주체의 생각이나 감각 바깥에 존재하는 타자라고 하지만 고통받는 얼굴만이 타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차라리 찡그린 얼굴, 화난 얼굴,  엄격한 얼굴이 그보다 더 빈번하고 일상적인 타자라고 해야 합니다. 아니 실은 고통받는 얼굴 또한 연민과 공명을 요구하는 얼굴입니다. 

의미화와 주체화의 명령어를 방사하는 얼굴이죠. 타자를 향해 주체 자신을 초월하는 윤리학은 내의지 바깥에서 오는 명령하는 권력, 연민이나 동일 시 마저 명령하는 권력의 작용이  있다 하겠습니다.  얼굴의 문제가 도덕이나 윤리학이 아닌 정치학의 대상이 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 입니다. 머리와 얼굴 사이에 생물학적 진화나 도덕적 우열 같은 것은 없습니다. 얼굴은 자의적 기표들로 발송되는 명령어의 전달과 상관적인 특정한 배치의 산물입니다. 의미화와 주체화를 강요하는 것은 특정한 권력의 배치이고 그런 배치를 갖는 특정한 사회 구성체 만이 얼굴과 풍경을 필요로 한다는 겁니다. 따라서 배치가 달라지고 사회구성체가 다른 종류의 사회구성체로 이해한다면 얼굴은 명령어를 방사하는 권력 장치의 길을 중지할 수 있습니다. 들뢰즈 가타리는 진정한 탈 얼굴화를 가동 시키면서 탐사적 머리를 해방시켜 의미화의 벽을 돌파하고 주체성의 구멍에서 솟구쳐 오르며 풍경을 통해 지층들을 해체하고 진정한 리좀을 위해 나무를 잘라 버리며 긍정적 탈 영토화 내지 창조적 탈주선을 그리자고 제안합니다. 이 제안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가는 사실 애매합니다. 그것은 차라리 얼굴의 정치학을 통해서 얼굴과 머리에 대한 새로운 사유를 가동시키기위한 물음이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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