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 되기,  강밀 하게 되기, 지각 불가능하게 되기, 생성이란 흔히 없던 것이 생겨나는것이라고 이해하지만 있던 것이 없어지는 것 또한 의미합니다. 두경우 모두 시간에 따른 변화라는 의미를 함축하지만 사실 생성 이란 어떤 것이 다른 것으로 달라지는 공시적 변화를 뜻하기도 합니다. 요컨대 모든 종류의 변화를 뜻합니다. 

들뢰즈 이전에 생성, 되기란 말은 독립적으로 사용 되었습니다. 이는 종종 존재와 대립되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는데 존재라는 말이 지금 어떤 상태에 있음을 지칭한다고 간주되기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지금 그대로 있다고 보일때조차 그 내부에서는 무언가가 생겨나고 사라지는 미시적 변화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모든 존재자는 생성속에 있습니다. 즉 존재란 생성을 뜻합니다. 하이데거는 존재를 존재자와 구별해야 함을 강조한 바 있습니다. 존재론을 존재에 대한 사유라 한다면 존재론적 명제는 오직 하나 밖에 없었다고 들뢰즈는 말합니다. 존재는 일의적이다 라는 명제가 그것이라고, 존재의 일의성이란 존재란 오직 하나의 목소리를 가짐을 뜻합니다. 존재가 생성을 뜻한다 함은 그 오직 하나의 목소리가 바로 생성이란 말입니다.

존재하다란 어떤 존재자도 사용할수 있는 술어 입니다. 그것은 모든 존재자에게서 반복되는 생성을 뜻합니다. 존재는 생성 이지만 생성의 양상은 단 한번도 같을리 없습니다. 모든 물방울에 대해 똑같은 하나의 바다가 있지만 그 바다는 역으로 각각의 물방울들이 달라질 수 있음을, 모든 차이의 열려 있음을 뜻합니다. 물방울 들이 합쳐지고,  변형되고 갈라지고 하며 무수한 형상을 취할 수있는 건 그게 모두 하나의 바다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개방성은 일의성의 본질적 특징이라고 하겠습니다.  

존재는 생성이라는 말은 맞지만 그것만이라면 그 말은 모든 존재자가 입을 수 있는 아주 크고 헐렁한 옷이 되고 맙니다. 생성을 제대로 사유하려면 역으로 존재자들의 차이를 통해 생성을 사유해야 합니다. 존재 자체를 차이를 통해 사유해야 합니다. 들뢰즈가 스피노자주의에 대해 실체로 하여금 양태들 주위를 돌게 만든 것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고 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이게 바로 그가 차이의 철학을 통해 하려는 것입니다. 차이의 존재론이란 존재와 존재자 간의 차이가 아니라 존재 자체를 차이로써 사유 하려는 문제 설정입니다. 존재자를 존재하게 해주는 차이, 존재자를 만들고 변화시키는 차이, 그게 바로 들뢰즈의 존재론을 하이데거의 그것과 다르게 해주는 차이 개념입니다.

존재자 네지 양태의 층위에서 생성을 사유하는 것은 어쩌면 존재 자체를 생성으로 사용하는 것보다 더 어렵습니다. 존재자는 존재와 달리 뚜렷한 경계를 갖는 명확한 대상으로 포착 되기때문입니다.  그 명확함과 뚜렷함으로 인해 생성이 오히려 보이지 않는 겁니다. 우리가 감지하고 생각하며 말하는 것은 규정된 대상으로서의 존재자 입니다. 우리는 그 규정성안에서 존재자를 보고 그 규정성을 통해 그것에 대해 말합니다. 너는 여자고 저건 개고 이때 그 존재자를 지속적으로 관통하고 있는 변화는 그 규정성에 가려 지워집니다.

여자, 개 등 익숙한 가시적 형태나 그걸 지칭하는 언어는 대부분의 사람들로 하여금 비슷한 방식으로 보고 행동하게 한다는 점에서 아무리 작아도 물적인 구성물 입니다. 이는 어떤 것에 대해 쉽고 빠르게 보도록 해 주지요. 바로 그렇기에 잘 보이지 않으니 미시적 변화를 보지 못하게 하고 감지 되었을 때조차 사소한 것으로 간주하게 합니다. 언어와 감각의 격자와 대응하는 물적 구성물에 가려 분자적인 미시적 차이가 생성을 반복하고 있음을 놓치게 됩니다. 감각의 격자 안에 있기에 물리적으로 지각 되기 어렵고,  언어의 격자 안에 있기에 지각 되어도 말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들뢰즈 가타리는 홀로 고립되어 변화 일반을 지칭하던 생성 되기란 말을 하이픈으로 다른 단어와  결합하여 사용하는 새로운 개념으로 재발명합니다. 동물-되기, 여성-되기, 강밀하게-되기, 분자-되기, 지각불가능하게-되기 등등이 그것입니다. 이는 단지 존재자의 층위에서 발생하는 변화를 포착하기 위한 개념일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그 변화를 만들어가기 위한 전략적 개념이기도 합니다. 즉 되기는 하이픈으로 연결되는 존재자를 통해 기존의 익숙한 감각이나 사유의 격자에서 벗어나기 위한 적극적 전략을 표현합니다. 가령 동물-되기나 흑인-되기는 동물, 흑인 같은 소수적인 몰적 구성물을 통해 다수적인 몰적 구성물로부터 벗어나는 창조적 탈주 선을 그리는 것입니다. 지각 불가능한 것을 위한 통로나 지각 가능한 표지를 만드는 물적 성분을 동반하지 않고 선 어떤 흐름, 어떤 분자 되기도 몰적 구성 물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 이로써 우리는 능동적 생성의 장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예를 들어 동물 되기는 인간이 동물적이라고 보이는 어떤 것을 통해 자신의 현재 상태 즉 인간의 통상적 상태를 벗어나는 것입니다. 말타는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인간이 말을 타는 데는 두 가지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속도로 말의 속도를 맞추는 겁니다. 말을 길들여 말의 움직임을 인간화하는거지요. 말을 타려면 둘다 변화가 필요하지만 사실 이 경우에는 인간도 말도 본질적으로 어떤 변환의 문턱을 넘지 않습니다. 인간에  맞추어 말의 속도를 줄이는것이니 인간은 기존의 문턱 안에 머물러 있습니다. 말에게도 그 속도는 이미 기존 문턱 안에 있는 것이니 애써 달라질 게 없습니다. 인간화라고 하지만 이는 사실 어떤 문턱을 넘지 않기에 무언가 다른것이 되는 게 아닙니다. 

다른 하나는 말의 속도와 움직임에 말 타는 사람을 맞추는 겁니다. 말에 맞추어 인간이 말의 일부가 되는것이니 말 되기라 할 수 있겠지요. 말의 속도를 통해 인간의 속도에서 벗어나는 겁니다. 그러려면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속도의 문턱을 넘어야 합니다. 통상의 인간과는 다른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몽골 기병들의 놀라운 속도는 이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하죠.  모비딕에서 에이허브는 모비딕을 쫓아가기 위해 미쳤느냐는 항해사의 비난을 묵살하고 태풍에 돛을 올려 항해를 계속합니다. 모비딕에 홀려 인간으로서는 감당하지 못할 어떤 강도의 문턱을 넘는 겁니다. 고래-되기 혹은 모비딕-되기 라고 할수 있겠습니다.

되기는 하이픈으로 연결되는 것과 동맹을 맺는 겁니다. 몽골인들은 말을 부하나 도구로 부리는게 아니라 말을 따라 달리며 말과의 동맹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에이 허브와 피커드 호의 선원들은 모비딕을 따라가며 모비딕과 동맹을 맺는 겁니다. 이는 공통의 목적도 없고 계약이나 동의도 없으며 심지어 적대의 감정마저 동반하는 동맹 입니다. 정치인들이 흔히 하듯 협정문에 서명하거나 나란히 서서 악수하며 사진을 찍는게 훌륭한 동맹의 징표는 아니지요. 반대로 펭귄의 대한 인간의 일방적 동맹도 있고 에이허브처럼 경쟁이나 적대마저 새로운 힘의 자원으로 삼는 동맹도있습니다. 적마저 동지로 삼는 동맹 입니다. 정치의 문제는 적과 동지를 가르는 문제라는 칼슈미트의  정의가 놓치고 있는 치명적인 지점이 바로 이것이지요. 

누군가를 감당할 수 없는 속도로 향해 나아가게 하는 것은 지금 있는 곳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것은 강력한 매혹의 힘입니다. 모비딕에 홀려, 말의 속도에 매혹되어 인간의 문턱을 넘게 되는 겁니다. 그렇기에 되기 동맹은 감염에 의해 이루어지는 셈입니다. 마치 흡혈귀에 물려 인간을 등지고 흡혈귀가 되는 사람 처럼 말입니다. 1730년부터 1735 년까지 사람들이 듣는 것은 모두 흡혈귀에 대한 이야기 뿐 이었다. 따라서 동물 농장처럼 인간들의 행태를 풍자하기 위해 동물들을 동원하는 알레고리나 아감벤 처럼 인간의 삶인 바이오스가 동물적 생명인 조애(zoe)로 전락했음을 비판하기 위해 생명 정치를 말하는 것은 동물 되기와 정 반대편에 있다 하겠습니다.

되기는 자기에게 없는 어떤 힘을 얻기 위해 자기와 이질적인 어떤 것과 동맹 하는 것입니다. 분자적인 감염에 의해 이질적인 것에 말려 들어가는 동맹입니다. 그렇기에 이것은 혈연 관계의 선을 따라 펼쳐지는 진화가 아니며 신화적 형태를 동반 할 때 조차 신화적 원형으로 후퇴하는 퇴행도 아닙니다. 시베리아 부족들에게는 피로 이어진 가족을 떠나 곰이나 호랑이와 결연 동맹을 맺는 신화가 많습니다. 그들은 대게 이를 근거로 그 동물이 자신들의 시조라고생각합니다. 이는 그 동물과 유사성이나 그 동물에 대한 원형적 상상력의 산물이 아니라 그 동물에게서 감지했던 어떤 힘에 매료되어 그 힘과 동맹 하려는 욕망, 그 동물의 힘을 통해 자신의 힘을 표현하려는 욕망의 산물입니다. 이는 유사한 것에 대한 공감이 아니라 차라리 이질적인 것에 매혹되어 본성에 반하는 참여에 말려 들어가는 겁니다. 되기는 혈연이나 종을 가로지르는 횡단적인 선을 따라 낯선 것의 생성 속으로 말려 들어가는 동맹 입니다. 이질적인 것과의 접속을 통해 혈연적 선을 꺾으며 새로운 이탈의 선을 그리는 리좀적 동맹 입니다. 

동물 되기는 동물의 행동을 모방하는게 아닙니다. 몽골인은 말의 흉내를 내거나 말의 동작을 모방 하는게 아니라 말을 타고 달리는 겁니다. 동물 되기는 동물을 따로 만들어 내는 것도 아닙니다. 되기는 자기 자신 이외의 어떤 것도 생산 하지 않는다. 에이허브의 고래 되기에는 고래가 보이지 않습니다. 고래를 쫓는 선원들 만 있을 뿐입니다. 모두들 동물과 함께 자신을 다른 무언가로 생산하는 것입니다. 또한 동물 되기는 꿈이나 상상, 환상이 아니며 그것은 전적으로 현실적입니다.  몽골인의 기마술은 상상이나 환상이 아닙니다. 모비딕이나 에이허브는 문학적 상상속의  존재자이지만 모비딕의 속도를 따라가기 위해 배를 가속하는 것은 분명 현실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현실에서 물리적이고 신체적인 강도를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되기는 강밀하게 되기 이고 강도적인 힘의 생산 입니다. 상상이나 환상이 등장할 때 조차 그것은 현실에서 어떤 강도를 생산하기 위해 이용되는 겁니다. 하지만 강밀하게 되기가 단지 속도나 강도를 올리는 것만은 아닙니다. 공중에 멈춰선 매는 속도가 없는게 아니라 대단히 강밀한 속도를 갖습니다. 학춤을 추는 사람에겐 팽팽한 부드러움을 위해 오히려 속도를 감속하는 게 중요합니다. 거기서 문제는 속도의 고저가 아니라 학의 감응이고 그 감응을 만드는 강도 입니다. 속도든 움직임이든 동물 되기를 한다는 것은 그 동물의 감응을 산출하는 어떤 강도들의 흐름을 만들어내는 겁니다. 

동물의 감응을 통해 새로운 강도적 분포를 만들고 이를 통해 우리의 신체와 행동을 바꾸는 것입니다. 다른 되기 들도 그렇습니다. 제니스 조플린(Janis Joplin)은 흑인의 목소리를 통해 백인의 성대가 만들어 내던 통상적 음색을 바꾸어 버립니다. 카운터테너나 카스트라토는 여성들의 목소리를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바꾸죠. 여기서 흑인이나 여성은 도달해야 할목표가 아닙니다. 되기는 그것을 향해 가지만 도달하는 곳은 그곳이 아니라 중간의 어딘가 입니다. 출발지와 목적지의 중간에서 새로운 다양체를 창안하는 겁니다. 도달한 그 중간이 목적지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입니다. 목적지 없이 도달한 중간이 여성이나 흑인 같은 몰적 구성물의 이름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심지어 도달점이 언제나 중간 이기에 흑인 목소리라는 목적지가 있었던 경우임에도 다른 것으로 간주되기도 합니다. 예전에 조플린의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 저는 흑인 가수라고 생각했는데 한참을 지난 후에야 그게 아님을 알고 크게 놀란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노래를 듣고서 제 어머니가 했던 반응은 동물의 소리지 사람의 소리냐라는 것이었습니다. 똑같은 소리가 누구에겐 흑인의 목소리로 다른 누구에겐 동물의 소리로 들렸던 겁니다. 

모든 되기는 이중적입니다. 작곡가 올리비에 메시앙(Olivier Messiaen)은 새를 통해 새로운 음악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탁월하게 새 되기를 했던 사람입니다. 조류 학자라 할 만큼 새에 대해 관찰하고 연구했던 그는 새들의 노래는 물론 새들의 행동 등을 통해서 새로운 음악적 소리를 만들었습니다. 역으로 그의 작품 집인 조류 도감은 음악적 소리를 통해 다양한 새들의 감응을 산출합니다. 그 소리는 새들의 리듬이나 선율을 이용할 때 조차 새들이 노래하는 것을 모방하지 않습니다. 종달새의 노래 같은 것을 기대 했다면 아주 당황할 음악을 들려줍니다. 여기서 메시앙의 새 되기는 새의 음악되기를 통해 진행됩니다. 이중의 되기라 함은 이런 의미에서 입니다. 새들은 그대로 둔 채 새들에게 다가가는 게 아니라 새 자체 또한 다른 것이 되게 하는 겁니다. 새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새마저 다른 어떤 것이 되게 하는 겁니다. 이중적으로 진행되는 되기와 관련해 들뢰즈 가타리는 되기의 블록 이라는 개념을 제안합니다.

즉, 메시앙의 새 되기,  새의 음악 되기라는 두개의 되기가 하나의 블록을 이루고 있다는 겁니다. 에이허브의 고래 되기는 모비딕에 속도 되기를 동반하고 제니스 조플린의 흑인 되기는 흑인의 음악 되기를 동반합니다. 이중의  되기는 이중의  탈 영토화를 통해 이루어 집니다. 메시앙이라는 인간이 탈 영토화 되어 새가 되는 것이고 새는 탈영토화 되어 음악이 되는 것입니다.  이 이중의 탈영토화를 끌고 가는 것은 새의 음악 되기 입니다. 새를 탈영토화는 음악 되기의 선을 따라 메시앙의 탈영토화가 이루어 집니다. 탈영토화를 끌고 가는 힘은 상대적으로 표현의 역할을 하고 그것에 의해 탈 영토화 되는 힘은 상대적으로 내용의 역할을 합니다. 즉 새의 음악 되기가 표현의 역할을 한다면 그 표현에 의해 발생하는 메시앙이 새 되기는 내용의 역할을 한다는 겁니다.  쉽게 말하면 어떤 음악을 들으며 이건 새 소리야 이건 동물의 소리야 하는 느낌을 갖게 될 때 그 음악적 소리가 표현이 라면 새니 늑대니 하는 느낌은 내용 이라는 겁니다. 새의 감응을 음악으로 표현하며 매시앙은 새 되기를 합니다. 그는 새를 대상으로 묘사하거나 재현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새가 되어 음악을 하는 겁니다. 동물원에 갖힌 원숭이의 세계를 글로 쓰며 카프카는 동물 되기를 합니다. 카프카 역시 그 원숭이에 대해 글을 쓰는 게 아니라 원숭이가 되어 글을 쓰는 겁니다.  

새가 되어 익숙한 음악에서 벗어나는 창조적 탈주선을 그리는 것이고 원숭이가 되어 인간 세계로 부터 벗어나는 탈주선을 그리는 겁니다. 그렇게 글을 쓰며 카프카는 원숭이의 분자를 방사하는 것이고 그렇게 음악을 쓰며 메시아앙은 새의 파동을 만들어 내는 겁니다. 인간들의 격자로 부터 벗어나는 어떤 새로운 생성의 흐름을 창안하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모든 되기는 분자 되기 이고,  파동 되기 입니다. 몽골 가수 노르부 반자드(Namjilyn Norovbanzad)가 노래할때 그는 시원하게 펼쳐진 광대한 초원의 파동들을 방사 합니다. 우리는 그의 초원 되기에서 음향화된 초원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게 어째서 초원이냐고 물으면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통상적 지각을 벗어나있는 소리이기 때문입니다. 지각 되지만 지각될 뿐 그게 무언지 말할 수 없는 지각, 그저 초원 같다는 모호한 감응만  남기는 지각 입니다. 지각 불가능한 지각 입니다. 이는 사실 다른 모든 되기도 그렇습니다. 그렇기에  모든 되기는 엄밀하게 말하면 지각의 격자를 벗어나는 지각 불가능하게 되기 입니다. 초험적 경험입니다. 그 극한에는 모든 몰 쪽 구성물에서 분자적으로 이탈하는 입자들의 강도적 흐름이 있습니다. 일관성의 평면이 거기에 있습니다. 모든 되기 들은 자신의 출구를 발견하게 될 이 최후의 문인 일관성의 평면 위에 쓰여 진다. 일관성의 평면 위에서 모든 것은 지각 불가능하게 되고 모든 것은 지각 불가능하게 되기 이다.  그러나 바로 그 위에서 지각 불가능 한것은 보이고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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