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성과 소수 문학, 소수자 되기 


니체는 도덕이나 종교 감각이나 예술 등 모든 문제를 삶의 광학으로 보고자 했습니다.  스피노자 도 그랬지요. 들뢰즈 가타리도 모든 문제를 삶의 문제로 다루고자 합니다. 창안과 실험 속에서 다른 삶을 만들어 낸 것이 그것입니다.  차이나 생성 존재 내재성 같은 그렇게 추상적인 철학적 개념들을 다룰 때 조차 이는 다르지 않습니다.  정치에 관한 개념 또한 그렇습니다.  안정화 되는 만큼 고형화 되는 삶의 변이와 생성의 선을 끌어 들일길 반복합니다. 이를 위해 고형화 된 틀에 가두는 모든 성분과 대결하는 것 그것이 바로 정치 입니다.  그 대결이 국가 장치나 제도 등과 맞서게 될때 때 거시정치가 작동하게 되고 그것이 나 라고 불리는 유기체나 의미화 주체화하는 기호들 사이를 통과하게 될 때 미시 정치가 작동하게 됩니다.  피할 수 없는 몰적 선분성의 선을 빠져나가는 분자적 선분성의 선을 따라 가며 창조적 탈출선을 그린 것,  이것이 그들의 정치적 사유를 방향 짓고 있습니다 다.다시 말해 정치란 신체와 사유를 횡단하며 작동하는 일종의 추상 기계를 가동시키는 것이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따라서 좋은 삶을 생산하기 위한 윤라학과 생성의 정치학은 하나의 평면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소수자나 소수성의 개념은 흔히들 현실적 문제라고 생각하는 구체적 사람들과 이러한 정치적 사유가 만나는
접점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른바 소수자 정치 내지 소수성의 정치학이 거기서 출연합니다. 소수성이란 개념이 처음 나타난 것은 소수문학 연구를 위하여 라는 부제를 달고 출판된 카프카에서 입니다.  카프카의 문학과 언어에 대한 연구가 소수성 개념이 탄생한 곳이라는 겁니다. 그 뒤에 출간된 책 천의 고원에서 소슈성 개념이 중요하게 사용되는 곳은 언어학의 공준, 되기 그리고 자본과 국가의 문제를 다루는 포획 장치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약간 단순화하여 말하자면 언어나 소수자 되기가 미지적  정치 영역에 가깝다면 자본의 공리계와 국가 장치 안에서 소수자 운동을 다루는 포획 장치 부분은 거시 정치 영역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소수자 정치는 각각의 개인적인 문제를 직접적으로 정책인 것으로 연결하는 소수자의 생존 조건을 모태로 합니다. 이러한 조건은 모든 것이 집합적인 가치를 갖도록 만듭니다. 들뢰즈 가타리가 카프카의 얘기를 인용하며 문학은 민중의 문제다 라고 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이는 소수 문학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소수자 개념이 미시 정치와 거시 정치의  모두의 교점에 있는 것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소수성 개념이 뜻하는 바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카프카와 소수 문학을 경유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소수성을 다수성의 결여나 다수성의 거부로 오해하는 경우가 적지 않게 하는 말입니다. 소수성은 이런 부정적 개념이 아니라 생성 이라는 긍정적 개념이 강조되어야 합니다.

알다시피 카프카는 프라하의 유대인 이었죠. 그는 글을 쓰는 것이 삶 자체였던 작가였지만 체코어 나 히브리어 이디비시(Yiddish)어 가 아니라 독일어로 글을 썼습니다. 하지만 괴테처럼 풍부하고 아름다운 독일어로 글을 쓰지 않고 반대로 빈곤하고 간결한 독일어로 글을 썼습니다. 그건 틀렸다고 는 할 수 없지만 뭔가 이상한 독일어 였읍니다. 프라하라는 변방 거기서도 유대인이라는 소수자의 낯선 독일어로 쓴 것이지요. 그가 괴테적 전범을 따라 아름다운 독일어로 쓰고자 했다면 잘 해도 독일어 충실하게 복종하게 되었을 겁니다. 아마도 자신의 독일어의 빈약함을 한탄 하게 되었을 가능성이 크죠.  반면 체코어 나 히브리어 이디시어로 썼다면 그는 민족 문학 작가가 되었겠지만 자신을 포위한 채 복종을 강요하는 독일어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을 겁니다. 독일어의 충실하게 쓸 수도 없고 그걸 안 쓸수도 없는 궁지 그것이 바로 카프카로 하여금 새로운 출구를 찾도록 만든 조건이었습니다.  그 언어의 빈곤함 이란 표현 능력의 결여가 아니라 생략의 빈틈이고 탈영토화를 위한 빈틈 입니다.  

이런 조건에서 문학은 일종의 대결이 되고 전투가 됩니다 이런 전투적 대결의 멘탈을 잘 보여주는 것은 카프카 처럼 식민지 제국의 소수자 로써 그들의 언어로 문학을 했던 재일 시인 김시종 입니다. 그는 모국어인 조선어로 쓰는 민족 문학을 거절하고 식민지 언어인 일본어로 작품을 씁니다. 이유는 그 일본에 대해서 복수하기 위해서 라고 합니다.  자신의 정서를 형성하고 자기 삶을 대기 처럼 포기하고 있는게 일본어 이기에 모국어로 작품을 쓰게 되면 고부의 방식으로 회피하며 고립의 길로 가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는 그에 반하여 그 친숙한 일본어와 대결하며 일본어에  없는 것을 그 안에 밀어 넣는 길을 택합니다. 까찰 까칠하고 낯설지만 매력적이게 제거할 수 없는 일본어를 만들어 그곳에 돌려주는 것 그것이 바로 일본어에 대한 자신의 복수 라는 겁니다. 복수 마저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것으로 만드는 놀라운 발상이죠.  

카프카도 자신의 글쓰기가 이런 대결이라고 말합니다.  프라하의 유대인으로 하여금 글을 쓰는 것을 가로막는 궁지에서 지배적 다수적 언어 안에서 새로운 언어를 창안하며 진행되는 문학적 전투 그것이 카프카 문학 입니다 추종도 아니고 거부도 아닌 이상한 독일어로 결코 던져버릴 수 없도록 매력적인 작품들을 쓴 거죠. 그 매력에 힘으로 점거한 영토를 통해 파고 들며 독일어를 더듬 거리게 하는 낯선 독일어 그것이 카프카 독일어 입니다. 그처럼 다수적 언어 안에서 그로부터 탈 영토와 된 이상한 언어를 통해 다수적 척도와 대결하는 문학 그것이 소수 문학 입니다. 

소수적 언어도 이런 방식으로 이해 해야 합니다.  소수어는 사용자 수가 적어서 소수언어가 아닙니다.  근대 국가는 어디나 표준어를 정하고 그와 다른 언어를 방언으로 규정합니다. 가령 한국에서는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사용하는 현대 서울말을 표준어 라고 합니다. 표준어는 여러 말들 가운데 척도가 되는 말입니다. 이는 다수 적 언어지만 다수가 사용하는 말이었던건  아닙니다. 서울에 교양있는 사람이 많아요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표준어로 정하면 문서나 신문방송 등에서 사용하고 학교에서 가르치기에 다수가 사용하게 되기는 합니다.  다수여서 척도가 되는게 아니라 척도가 되었기에 다수가 되는 겁니다. 따라서 다수란 말은 주류란 말과 유사합니다. 주류에 속한 자들은 지배적이지만 수가 많지는 않죠. 가령 자본주의 사회의 다수자는 자본가들이고 가부장제 사회의 다수자는 남성이지만 이는 그들 수가 많아서 그런게 아닙니다. 척도를 장악한게 주류이고 다수자 입니다. 다수 소수의 문제는 수의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소수어는 방언이 아니라 언어 안에서 생성되는 새로운 언어이고 모어 아닌 외국어 입니다.  다수어의  지배로부터 지키고 보호해야 하는 언어가 아니라 그것과 대결 하며 그것을 더듬 거리게 하는 언어이고 새로운 것을 창안 하는 언어입니다. 척도 표준과 대결하는 언어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척도로부터의 거리가 아니라 척도를 바꾸는 변이 능력에 의해 정의 됩니다.  방언이 소수어가 되도록 해주는 것 또한 다수어를 변이 시킬 수 있는 능력입니다.  카프카 같은 문학적 언어만 소수어는 아닙니다.  은어나 속어를 끌어들이고 축약과 생략, 중의성과 치환 등을 이용해 영어를 아주 다른 것으로 바꿔 버린 흑인 영어도 그런 경우 이죠. 소수어와 마찬가지로 소수자 또한 수가 적은 집단을 뜻하지 않습니다. 지배적 척도나 가치 로부터 멀리 떨어진 자, 소위 주변이나 소외된자 들입니다. 가령 가난한 이들은 돈이 없다는 점에서 자본주의의 척도와 거리가 멀지만 돈 벌 생각에 사로 접했을 뿐이라면 소수자라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돈이라는 척도를 벗어난 게 아니라 자신이 척도로 삼는 것을 결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변인 입니다.  자기 피부를 원망하며 수세미로 문지른 흑인도 남성들과 동일한 권력을 갖는게 해방이라 믿는 여성도 다르지 않습니다. 자신이 결여하고 있는 다수성을 추종한다는 점에서 음의 부호가 붙은 다수자입니다. 소수자는 또 그저 지배적 속도를 거부하며 그것과 분리만을 고수하는 자들도 아닙니다. 분리된 집단성을 고집하고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척도를 바꾸는 어떤 것을 창안하여 다수적 세계 속에 밀어 넣는 자입니다. 이를 위해 다양한 동맹자를 찾아내는 자입니다.  

이때 동맹자는 단지 어떤  인간들만 뜻하지 않습니다. 동물이나 식물 사물이나 언어 분자나 파동 등도 그 동맹자에 포함되죠 따라서 소수자는 현재의 어떤 상태를 표시하는 말이 아니라 현재 상태를 바꾸는 생성 되기에 의해 정의 됩니다.  소수자는 언제나 소수자 되기를 통해 구성됩니다. 가령 토니 모리슨의 파라다이스에서  잘 보여주듯 흑인이 가는 어떤 특성을 지배적 속도를 대신하는 본성으로 고수하게 되면 흑인성을 척도로 혼혈을 차별하는 대칭적 억압이 나타납니다. 여성이 어떤 특징을 남성과 대결하기 위한 본성적 척도로 삼게 되면 그런 특징 이 결여된 여성이나 트랜스젠더 동성애자 등이 차별과 배제의 대상이 됩니다. 중요한 것은 백인과 흑인, 남성성과 여성성 사이를 횡단하며 새로운 삶의 방식과 척도를 창안 하는 것입니다. 흑인도 흑인 되기를 해야하고 여성도 여성 되기를 해야 한다 함은 이러한 이유에서입니다. 반복하지만 다수성과 소수성은 수에 의해 정의 되지 않습니다. 사실 다수와 소수의 관계는 복잡하고 역설적 입니다. 먼저 어떤 특성이나 상태의해 다수자를 정하면 다수자는 대단히 적은 수만이 있다고 해야 합니다. 가령 미국에서 백인은 다수자이지만 그 가운데 다른 인종과 피가 섞이지 않은 이들은 많지 않을 겁니다. 피부는 희지만 혼혈의 과거가 전혀 없는 순수 백인은 정말 희소 할 겁니다.

반대로 소수자는 셀 수 없이 많습니다.  피부가 희지 않아도 과거에 다른 피가 섞인 이들은 모두 소수자라 해야 하니까요. 그래서 들뢰즈 가타리는 무한 집함 논의 개념을 이용해 다수자는 많아도 가산 집합인 반면 소수자 는 비가산 집합이라고 합니다. 가산 집합 이란 자연수를 차례대로 대응 시킬 수 있는 수입니다.  비가산 집합이란  그럴수  없는 수, 즉 셀 수 없이 많은 수를 뜻합니다. 소수자는 이처럼 접속이나 혼성에 의해 구성 되기에 단일한 성원으로 구성될 때 조차 비가산적인 능력을 행사합니다. 접속과 혼합은 그 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생성의 잠재성을 뜻하는 것입니다. 비가산적인 것이 중요한 것은 사실 수가 많다는 것보다는 이것 때문입니다. 다른 한편 다수자는 수적 다수가 될 수 있습니다. 척도와 표준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척도나 표준은 누구든 따라야 할 가치라고 간주되기 에 다수자에 속하지 않은 이들도 의당 따르기 쉽습니다.  그렇게 척도와 표준을 공유하면 다수자에 속하지 않은 이들도 다수자와 동일한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돈버는 생각에 사로잡힌 노동자, 남성보다 더 남성적인 여성들이 그렇죠. 지배적인 척도를 따른 이들이 바로 다수자인 겁니다. 이와 다른 이유에서 들뢰즈 가타리가 말하는 의미의 소수자는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적습니다.

흑인, 여성, 식민지인, 선주민 등 어떤 특징을 공유하는 범주에 속한 이르게 아니라 새로운 삶의 방식 새로운 표현 기계 새로운 척도를 만들어내는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소수자 되기가 소수자를 정의하는 겁니다. 하지만 방언이 소수어는 아니지만 소수어가 될 능력이 크 듯이 상태로서의 소수자는 소수자 되기로 나아갈 잠재성이 크다고 하겠습니다. 다수적 권력에 의해 포위된 삶을 매순간 살아야 하기에 소수자들을 삶은 개인적인 것 조차 정치적이기 마련이고 그것이 현행의 삶의 조건을 바꾸려는 욕망을 촉발하기 때문이죠. 소수적 조건이 소수자 되기 후자 운동의 긍정적 삶을 향한 잠재성을 함축하고 있는 것입니다. 소수자 되기란 그처럼 그런 잠재성을 다른 감수성이나 다른 의식으로 밀고 나가 새로운 동맹, 새로운 공동체를 구성하는 것입니다.  소수자는 이질적이고  혼동적이며 접속과 변이에 의해 증식 합니다. 이질적인 것이 섞여 들며 만들어지는 동맹이나 공동체가 소수자를 만들어 냅니다.  셀수없이 많은 그런 접속과 혼종은  자본의 공리계로 제한되지 않는 생성능력을 같습니다. 소수 자의 혁명성은 이로부터 나옵니다.  공유계를 벗어나 결정 불가능한 명제나 주장을 착안 하는 것 바로 그것이 혁명적 결정의 싹과 장소라고 들뢰즈 가타리는 말합니다.  물론 자본의 공리계는 그렇게 창안된 명제나 요구를 다시 공리로 추가하여 포섭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괴델의 정리는 그렇게 포섭해도 결정 불가능한 명제가 새로이 생성될 수 있음을 함축합니다. 더는 공리를 추가할 수 없는 절대적 포화는 없습니다. 포화란 상대적일 뿐 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어떤 공리적 포섭도 새로운 결정 불가능한 명제의 생성을 막을 수 없습니다. 결정 불가능한 것에 포섭 또 생성도 끝이 없는 겁니다. 결정 불가능한 것의 창안과 포섭 그리고 재창안이 반복되는 내재적 과정 민이 있는 거죠. 막스라면 영구 혁명 이라 했을 이러한 과정을 니체라면 영원 회귀 라고 했을 겁니다. 이러한 소수성 개념은 욕망과 권력의 관계에서 정치가 길을 찾는 데 중요합니다 소수성 개념이 등장한 책 카프카는 욕망과 권력의 대립 대신 양자의 내재적 관계를 명시하는 명제가 등장한 책이기도 합니다. 권력이 욕망이다 라는 명제가 그것입니다. 이로써 욕망과 권력은 별개의 대립적 개념이 아니라 하나가 다른 하나를 만들어 내는 상호 내재적인 것이 됩니다. 어떤 하나는 좋고 다른 것 나쁘다는 식의 말을 할 수 없게 되죠. 그렇다면 권력에 대한 비판과 저항은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물음이 제기되고 됩니다. 욕망과 권력의 대한 가치평가도 그에 따른 선별도 방향을 잃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권력은 생산 한다 라며 권력의 긍정성을 강조함으로써 푸코가 빠지게 된 이론적 궁지와 유사합니다. 

알다시피 푸코는 저항의 지점을 찾기 위해 권력을 연구했죠. 권력이 있는 곳에 저항이 있다 그런데 그또한 욕망과 권력의 내재성에 도달합니다. 욕망있는 곳에 이미 권력 관계가 있다. 그러니 나중에 나타나는 억압을 보고 권력을 비난하는 것은 환상이며 권력의 바깥에서 욕망을 추구하려 나서는 것 역시 허망한 일이다. 권력은 생산적이고 아래로부터 작동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그에 대해 저항할 이유가 사라지고 맙니다. 천의 고원에서 들뢰즈 가타리는 권력이란 욕망이 지층화 된 것이고 탈주선이 일차적 이라는 명제를 통해 그 내재성안에 가치 평가의 거점을 마련합니다. 그런데 하나가 다른 하나가 되는 욕망과 권력 사이에서 침로를 찾기 위해선 개념적 위상의 일차성만으로 불충분 합니다. 상충되는 권력 사이에서 다수성과 소수성을 식별하는 것이 중요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욕망 권력의 경직된 몰적 선분성과 유연한 분자적 선분성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게 아니라 양자 사이에서 소수적인 긍정적 탈주선을 그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소수자 되기 이고 소수 성의 정치학 입니다 .

 

 

카프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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