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올로기라는 말은, ‘이데올로기에 속박된다’든가 ‘그것은 하나의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처럼 부정적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본래 이데올로기라는 말은 19세기 초에 ‘관념학’ 이란 의미로 생성된 것이다. 즉  ‘형이상학’에 대비되는 과학이론으로서의 ‘관념학’이라는 긍정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다.  최초로 이데올로기란 용어를 부정적으로 상요한 것은 나폴레옹이었다고 한다. 그는 관념적인 학자들의 현실과 동떨어진 사고상식을 이데올로기라고 비난했다. 현재와 거의 비슷한 의미로 상용했다고 할 수도 있다. 


​이데올로기를  ‘허위의식’으로서 최초로 정식화한 것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서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당시 철학자들, 예를 들어 포이에르바흐와 바우어 등의 철학을 가지각색의 이데올로기(허위의식)로 비판했다. 그러나 이데올로기를 단순한 ‘허위의식’으로만 받아들이면 ‘허위의식’에 대응하는 ‘올바른 의식’이 존재하는 것이 되며, 어느 쪽이 올바른가 하는 이른바 이데올로기 투쟁에 빠지게 된다. 냉전의 종언을 ‘이데올로기의 종언’으로 받아들인 역사관도 같은 부류에 속한다. 그러나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이데올로기를 ‘허위의식’이라고 명명하는 것은 그것이 현실생활의 여러 과정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현실적인 여러 관계(‘소통’이나 ‘생산’)에 의해 규정된다는 점을 설명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허위의식’에 대해서 ‘올바른 의식’을 대치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런 ‘허위의식(환상)’을 탄생시킨 구체적인 조건들을 탐구할 것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장치’라는 사고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으로 부터 <독일 이데올로기>를 독해하는 과정에서 종래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경제적인 과정에서만 이데올로기의 형성 원인을 구한 데 반해, 사회의 가지각색의 일상적 실천 속에서 이데올로기의 형성을 발견해 낸 것이다.  “무릎 꿇고 기도 하라, 그러면 믿을 것이다.”라는 파스칼 말 인용한다.  제도화된 물질적 장치와 거기서 행해지는 특정한 방식의 실천을 통해 존재하고 작동한다.  교회(물질적 장치)에 나가서 손을 모아 기도(실천) 해야 신(이데올로기)을 믿게 되는 것처럼 이데올로기 역시 마찬가지다.  가정, 학교, 직장, TV 같은 제도화된 물질적 장치에서 그에 합당한 실천을 함으로써 이데올로기가 형성된 것이다.  인간이 사회에서 태어나고 세계와 관계하는 이상, 이데올로기의 존재는 불가결한 것이다. 이데올로기는 개인의 의식과 관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세계와 관계함으로써 발생하는 상상적인 표상이자 그 상상적 표상을 형성하는 구조인 것이다. 그리고 그결과로서의 개인(주체)을 형성해내는 사회구조 그 자체도 이데올로기인 것이다. (p.189, 그림으로 이해하는 현대 사상)


표상은 감각적으로 외적 대상을 의식상에 나타내는 것을 말한다. 단어를 보고 의식상에 떠올리는 것이다. 감각 지각에 입각하여 머릿속에 재현시킨다. 어떤 행동이나 판단이든 특정한 표상과 함께 한다고 한다. 이를 ‘표상 체계’라고 한다. 동일한 경험이나 문화를 공유하는 사람들은 표상체계가 유사한 구조로 되어있다. 가정, 학교, 직장과 같은 제도적 장치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동일한 표상 체계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를 다르게 표현하면 ‘세상 사람들의 표상체계" 라고 한다.  "우리가 이데올로기에서 발견하는 표상, 즉 세계에 대한 상상적 표상 속에서 반영된 것은 인간들의 존재 조건 들이고 따라서 그들의 현실 세계이다". 즉 우리는  이데올로기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떠올린 표상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 한다고 주장 한다.  이데올로기 장치는 개인(주체)을 형성하는 이데올로기가 현실에서 기능하는 사회공간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단순하게 억압적인 법과 정치제도 등의 국가 장치만이 이데올로기 장치는 아니며, 시민사회를 형성하고 있는 모든 제도를 이데올기 장치로 보는 것이다. 학교, 종교단체, 매스미디어, 각종 조합 등 모든 제도가 이데올로기 장치에 다름 아니다. 우리는 이런 제도 속에서 일상적인 실천을 통해 우리의 몸에 이데올로기를 각인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데올로기를 당연시하고 이것 외에는 삶의 대안이 없는 것처럼 내면화 한다.  안토니오 그람시는 이데올로기의 역할은 상식, 즉 모든 사람이 그렇다고 알고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을 정의하고 감시하는 것이라고 한다.  상식은 일상의 모든 영역을 결정한다. 평범한 사람들은 상식의 명령대로 살아간다. 이데올로기가 그러한 역할을 할 때 이데올리기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의 내면화 과정으로 호명을 이야기 한다. 다양한 이데올로기에 호명된적이 많았기 때문이다. 호명으로 인해 한 개인의 생각이나 판단, 행동에 이데올로기라는 무의식적인 표상 체계가 작동하게 된다는 것이다. 호명은 특정한 사회적 구성이 주체를 지명하는 비강제적 과정을 가리킨다. 존재의 실제 조건에 개인이 갖는 상상적 관계다. 호명 과정에서 개인은 자신을 주체로 오인한다. 자신이 사회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자신을 구성한다는 사실을 망각한다. 이데올로기 조건에서 개인들은 사회적으로 생산된 가상 재현을 그들의 실제 자아로 오인한다(교양인을 위한 철학 사전). 

​이데올로기는 구체적인 개인들을 주체로 호명한다고 말하고자 한다. 우리는 아주 흔한 경찰의 일상적인 호명과 같은 유형 속에 그것을 표상할 수 있다. “헤이, 거기 당신!”만일 우리가 상정한 이론적 장면이 길거리에서 일어난다고 가정한다면, 호명된 개체는 뒤돌아볼 것이다. 이 단순한 180도의 물리적 선회에 의해서 그는 주체가 된다. 왜냐하면 그는 호명이 ‘바로' 그에게 행해졌으며, '호명된 자가 바로(다른 사람이 아니라) 그’ 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우리가 매일 경험하는 일과 삶, 학교와 직장, 사회와 역사에 대하여 그 근원을 캐묻고 본질을 파악하기 시작하면  우리에게 강요하는 이데올로기(허위의식)에 대한 각성이 가능하다. 당연하게 받아 들이는 상식을 의심해야 한다. 그 것은 단지 허위의식에 눈을 뜨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제도 분석을 통한  이데올로기의 형성과정을 분석하고, 실천(행위)의 수준에서 사회적 관계들을 변화 시켜야 한다.  나를 다르게 불러줄 사람을  찾고 그들과 연대하여 호명관계를 바꾸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허상을 벗겨내고 자유롭고 당당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한다. 이데올로기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라기 보다,  세계와 관계함으로써 발생하는 상상적 표상이 변화하는 것이다.

 

 

 <그림으로 이해하는 현대 사상>(빌리스 듀스 지음, 남도현 옮김, 계마고원, 2003년) 

 <교양인을 위한 인문학 사전>(이안 뷰캐넌, 윤민정/이선주 옮김, 자음과 모음, 2017년 )

 <개념어 사전>(남경태, 들녘,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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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에 관한 정의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그러한 정보를 전달하는 의사소통 매체의 특성에 기인한다는 사실이다. 이제 매체가 어떻게(진실에 관한 정의를 받아 들이는) 우리의 인식론에 결부되는지 검토하도록 하자. ‘인식론으로서의 매체’라는 이장의 제목이 지닌 의미를 단순화하기 위해 ‘공명’이라는 원리의 쓰임새를 창안한 노스럽프라이의 말을 차용하는 것이 도움이 될 듯하다. 프라이는 “공명을 통해 특정한 상황속에서 특정한 진술이 보편적인 의미를 획득한다”고 했다. 프라이는 첫 사례로 “분노의 포도”1) 라는 어구를 거론했는데, 이 말은 성경의 이사야서 중 장래에 있을 에돔족속의 살육을 찬양하는 정황2)에서 처음 나타난다. 그러나 이 어구는 프라이에 따르면 “이미 오래 전에 그러한 맥락을 벗어나 단순하고 고집스러운 신앙을 반영하는 대신, 인간의 처한 상황에 대한 존엄성을 나타내는 의미로 자리잡았다.” 이렇게 말하면서 프라이는 공명의 개념을 어구와 문장 이상으로 확장시킨다. .. 프라이는 공명의 원천에 대한 물음에 답하면서, 바로 메타포가 추진력(사람들이 겪는 다양한 태도나 경험을 일체화하여 의미를 부여하는 단어나 책, 인물, 역사 등이 반향하는 힘)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래서 아테나 사람은 지적으로 탁월한 사람의 메타포가, 햄릿은 생각만 하는 우유부단함의 매타포가, 앨리스의 호기심은 의미상 말도 안되는 세계에서질서 찾기의 메타포가 되었음을. 세계 어디서든지 확인할 수 있다. (p.38)

1) 존 스타인벡은 이스라엘인들이 홍해를 탈출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는 성경의 줄거리를 차용하여, 인간이 처한 상황에 대한 존엄성을 드러낸 동명의 소설 '분노의 포도'를 집필했다.

2)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으로 가는 도중에 에돔족속이 이들을 괴롭혔으며, 이때문에 성경의 예언서에는 에돔족속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곳곳에 언급되어 있다. 본 내용은 이사야서 34장의 내용으로 하나님이 장래에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애돔족을 심판할 것을 찬양하는 예언서이다.

“당신은 어떤 생각이 전달되는 형식이 그 생각의 진위 여부와 관계가 없다고 착각하는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학계에서는 간행물에 실린 글은 말보다 훨씬 높은 신뢰성과 확실성을 지닙니다. 또한 사람들은 글보다 말이 더 우발적이라는 전제를 갖고 있습니다. 기록된 글은 저자가 숙고하고 수정해 왔으며, 권위자나 편집자가 검토해 왔다고 여깁니다. 기록된 글은 입증하거나 논박하기 용이하며, 개인적이지 않고 객관적인 성격을 지녔다고 여기는데 이게 바로 당신이 논문에서 자신을 지칭할때 이름 석자 대신 당연히 ‘연구자’로 언급한 이유가 됩니다. 말하자면 기록된 글은 본질적으로 개개인이 아닌 세계를 대상으로 발표하는 셈입니다. ..기록된 문서는 ‘진실’을 나타내겠지만, 구두 합의는 단지 풍문에 불과할 것입니다.” (p.43)

당시 280명의 배심원 중 상당수는 수사법이 진실을 좌우한다고 인식하고 있었기에 수사법을 쓰지 않는 소크라테스의 태도야말로 진실을 드러내는 형식과 일치하지 않았기에 유죄평결을 내렸다고 추측할 수 있다. ..진실의 개념은 이를 표현하는 형식이 지닌 편향성에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점이다. 진실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고 그런 적도 없다. 진실은 반드시 적절한 옷을 입고 나타나며 그렇지 않으면 인정받지 못하는데, 이는 ‘진실’은 일종의 문화적 편격이라고 말하는 셈이다. 각 문화는 어떤 상징적 형태중에서 가장 믿을 만하게 표현된 것을(다른 문화에서 하찮게 여기거나 부절적하게 취급할지라도) 진실이라고 여긴다.(p.45)

내가 당신을 설득시키고 싶은 것은, 활자기반 인식론의 쇠퇴와 맞물려 텔레비전 지배 인식론이 부상하면서 사람들이 시시각각으로 멍청해지며 공공생활에 심상치 않은 결과가 도래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바로 이점이, 진실-말하기의 형식이 무엇이건 간에 그 형식에 대한(활용) 비중이 결국 의사소통 매체의 영향력을 결정한다는 요점을 부각시키고자 애써야 했던 이유다. “보면 믿는다”는 말은 인식록전 논리에 있어서 늘 독보적 지위를 누려왔으나 “말하면 믿는다” “읽으면 믿는다” “세어보면 믿는다” “추론해 보면 믿는다” 그리고 “느끼면 믿는다” 및 그 밖의 다른 논리는, 문화가 매체적 변화를 겪을 때마다 그 중요성이 부침을 겪어 왔다. (p.48)

첫째로, 나는 어디에서도 매체의 변화가 사람들의 정신구조나 인지능력의 변화를 초래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중장을 했거나 근접한 사람이 있기는 하다(예를 들면 제롬 브루너, 잭 구다, 월터 옹, 마샬 맥루한, 줄리언 제인스, 에릭 하블로크 같은 사람들이다). .. 나는 어느 정도 피아제적 관점에서 볼때 구어시대 사람들이 문자시대 사람들보다 지적으로 덜 발달했다거나 또는 텔레비전 시대 사람들이 덜 발달 했다는 가능성을 두고 논쟁하는 부담은 지지 않을 생각이다. ..

두번째 요점은 인식론적 전환이 모든 사람과 모든 것들에 다 해당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일부 오래된 매체는 그러했으나 사실상 당시의 관습과 인지적 습관과 함께 사라져버린 반면, 말하기나 쓰기와 같은 의사소통 형식은 계속 살아남을 것이다. 그러므로 텔레비전과 같은 새로운 형식의 인식론도 아무런 도전없이 영향력을 지속할 수는 없다. ..

세번째 요점은 텔레비전을 바탕으로 하는 인식론이 공공의사소통과 그 주변 여건을 오염시켰다는 뜻이지 모든 것을 다 오염시켰다는 의미는 아니다. 노인이나 몸이 약한사람, 그리고 모텔 방에서 홀로 외로움을 느끼는 모든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안락함을 선사하는 텔레비전의 가치를 늘 떠올린다. ..텔레비전은 이성적 담론을 약화시키는 능력만큼 감성적 영향력이 엄청나기 때문에 베트남 전쟁이나 가혹한 인종차별 형태에 대해 감정적 반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 매체는 때때로 파괴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인쇄술은 개체성에 대한 근대적 관점을 촉진시켰지만, 공동체와 융화라는 중세적 감각을 파괴했다. 인쇄술은 산문양식을 만들어 냈지만, 시를 유별나고 배타적인 표현양식으로 밀어내버렸다. 또한 인쇄술로 인해 현대과학의 발전이 가능했으나 종교적 감수성을 단순한 미신적 행위로 변질시켰다. 인쇄술은 국가와 지역의 성장에 이바지 했으나 그렇게 함으로써 애국심을(파괴적인 수준은 아닐지라도) 비열한 감정으로 만들어 버렸다. (p.54)

텔레비전이 그중심부를 장악하면서 공공담론의 진지함, 명료함, 무엇보다도 그 가치를 위험할 정도로 저하시킨다는 점을 드러내고자 애쓸 것이다.(p.55)

 

 

 

 

 

감응은 ‘느끼고 응한다’ 뜻이다. 특정한 관념이나 기분의 상태, 결정된 느낌 따위가 아니라 말 그대로 이질적인 것과의 마주침을 ‘느낄 수 있고’, 그 만남에 ‘호응할 수 있는’힘 자체이다. 이 같은 감응의 힘 곧 능력에 따라 우리는 우리 아닌 것과 관계 맺게 되고, 또 다른 우리로, 혹은 어떤 다른 무엇으로도 변화될 가능성을 얻는다. 요컨대 감응은 우리의 존재론적 기초라 할 만하다. 살아가면서 환경과 사건을 마주하고 이에 대한 감응으로 현재의 내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감응이라는 개념 자체는 이미 오래전부터 제안되었고, 세공되어 왔다. 스피노자는 <윤리학>에서 감응을 논리적 인식 이상의 힘으로 간주 했고,이로써 인간과 자연, 세계의 변화를 지각하는 능력으로 정의한 바 있다. 근대적 주체를 명료하고 뚜렷한 의식의 담지자로 한정했던 데카르트와 달리, 스피노자는 감응이 신체와 정신을 일관되게 관통하고 상호작용하도록 만드는 실제적 힘으로 규정지었다. 이성이 감성을 지배하고 정신이 신체를 통제한다는 코기토의 전제주의에 맞서 스피노자는 신체와 감성의 종속성을 부정했고, 나아가 후자들이 인간 주체와 자연 및 세계의 상호관계와 역동의 줌심에 있음을 주장했던 것이다. 신체와 감성적인 것이 정신과 이성적인 것을 견인하거나 인도한다고 말했을때, 스피노자가 염두에 두었던 것은 바로 신체와 감성이 내포한 능력이었기 때문이다.

스피노자 이후 감응의 개념은 정신분석을 통해 이론적으로 더욱 진전되었다. 성적 에너지로 정의되는 리비도는 동시에 무의식적 감정의 에너지고, 전이를 통해 개인 사이에서 교환되고 순환하는 힘으로 정의되었다. 이러한 정신분석의 성과를 비판적으로 이어받은 들뢰즈는 무의식적 욕망을 통해 감응의 동력학적 사유를 심화시켰다. 프로이트가 무의식을 억압된 것으로 규정한데 반해 들뢰즈는 본연의 무의식이 있음을 지적했으며, 이는 차이화하는 힘으로서 비인간적인 욕망의 존재를 가리킨다. 달리 말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 개인의 숨겨진 과거를 해명하기 위해 그의 정신적 비밀을 캐묻고 그 답안을 끌어내기 위해 리비도라는 감응적 에너지를 문제화 했다면, 들뢰즈는 개인과 개인의 연결을 넘어서 인간과 사회, 자연과 세계 전체를 관련짓고 운동하게 만드는 우주론적 힘의 문제로서 감응을 조망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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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살아가면서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과 사물들을 만나고 부딪친다. 어떤 경우에도 피할 수 없는 이 부딪침이나 만남이 나에게 변화를 만들어 낸다. 이러한 외부의 자극을 감지하여 발생하는 정성적 반응을 감응이라고 한다. 스피노자는 이러한 감응을 크게 ‘기쁨’과 ‘슬픔’으로 구분 한다. 스피노자는 <에티카> 에서 욕망, 기쁨, 슬픔에서 시작하여 비루함, 경탄, 경멸, 사랑, 믿음, 싫음 등 40가지 감정을 정의 하고 있다. 정서적 반응은 이렇게 다양하지만, 이 많은 정서적 반응을 ‘기쁨’과 ‘슬픔’ 두가지로 분류 할 수 있다. 이 두개념은 다른 정서적 반응과 구별되는 정서들의 계통을 표시한다. 하지만 기쁨과 슬픔이라는 다른 정서들과 함께 표시되면 그 많은 정서 중의 하나가 되어 혼동을 피하기 어렵다. 철학자 이진경은 이를 피하려면 수많은 정서들 중 일부인 ‘기쁨’, ‘슬픔’과 구별하여, 그 정서 들을 능력의 증감에 따른 반응을 표시하는 ‘고양감’과 ‘저하감’ 혹은 훨씬 단순화된 ‘쾌감’, ‘불쾌감’으로 표현 한다.  신체의 능력이 증가할 때 흔히 말하는 기쁨이 발생되고, 감소할때 불쾌감이 발생된다. 이 쾌감과 불쾌감에는 그에 상응하는 어떤 정서적 반응이 동반된다. 즉 쾌감에는 기쁨에 속하는 정서적 반응이, 불쾌감에는 슬픔에 속하는 정서적 반응이 동반된다. 외부의 자극을 감지하여 발생하는 이 정서적 반응은 주어진 자극에 적절하게 대응하는 어떤 작용 내지 행동으로 이어진다. 혹은 좋음/싫음이라는 판단을 동반하는 기억을 통해 이후 유사한 종류의 자극을 다시 얻고자 하거나 미리 피하려 하는 태도로 이어진다. 이처럼 감지된 촉발에 응하여 발생하는 정서적 반응들의 집합이 감응이다.(감응의 유물론과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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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응'이란 말은 'affectus'라는 라틴어의 번역어 이다.  스피노자의 <에티카>에서 사용했던 개념이다. 국역본에서는 '정서'라고 번역되어 있고, 일본에서는 그런 감정이나 정서가 어떤 동적인 힘을 갖는다는 의미에서 '정동'이라고 번역하는데, 정서라는 말에 만족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이런 일본어 번역어를 그대로 채택하기도 한다. 

 

스피노자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양태'라고 하고 이 양태들이 서로에 대해 맺는 관계를 '변용/촉발'이라고 한다. 각각의 양태는 서로에게 변용을 가하는 촉발로 존재하며, 그로 인해 다른 양태들에게 변용을 야기한다. 어떤 양태가 다른 양태와 만나는경우 능력이 감소할 수도 있고 증가할 수도 있는데, 전자의 경우에 느끼는 감응/감정이 '슬픔'이고, 후자의 경웨 느끼는 감응/감정이 '기쁨'이다(물론 다른 감정/감응들도 있지만 그본적으로 이 두감정/감응과 결부되어 있다). 이처럼 어떤 양태가 다른 양태의 촉발/변용에 응하여 갖게 되는 감정/정서라는 점에서 이를 '감응'이라고 할 수있다. 역으로 다른 양태에 특정한 느낌을 야기하는 것 또한 감응 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감응이 어떤 강한 힘을 가질때  그것을 우리는 '감동'이라고 부르며, 그정도는 아니어도 무언가 움직이게 하는 힘을 행사했을때 '감흥'이라고 할수 있다. 이들 모두 내적 강밀도에 따른 감응의 양상을 표현하는 개념으로 사용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는 '감응'이란 말에 어떤 움직임이나 움직임을 야기하는 힘이 포함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정동'이라는 말에 끌리게 되는 요인을 이 번역어가 포함하고 있음을 뜻한다. 

 

'감정'과 '감응'을 구별할 수 있는데 감정이 인간처럼 어떤 유기체 전체가 느끼는 것이라면 ("나는 기쁘다", "그는 화가 났다") 그래서 인간과 같은 유기체에 고유한 것이라면, 감응은 모든 양태에 적용되는 것이고 유기체를 전제하지 않는다. 가령 어떤 칼이 섬뜩하고 무서운 느낌을 줄때, 그것은 그 칼에 대한 '나'의 감정이라기 보다는 바로 그 칼에 속하는 감응이라고 할 수 있다. 짐수레를 끄는 말은 말보다는 차라리 '소'와 같은 느낌을 준다. 그것 역시 '나'만의 주관적 감정이 아니라 '말'에 속하는 감응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무협영화에서처럼 손으로 무언가를 때리고 부스는 겨우에 우리는 그 손에 대해 "몽둥이 같다"거나 "칼 같다"는 감응을 갖게 된다. 이 역시 그 손에 귀속되는 감응이다. 스피노자가 호랑이를 고양이와 같은 과로 묶을 것이 아니라 애완 동물과는 전혀 다른 '맹수'라는 개념으로 분리할 것을 주장할때, 그는 바로 이런 감응에 따른 분류법을 제창하고 있는 것이다. (노마디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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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재성이란 무엇인가 ?  (0) 2021.11.22

 

라스베이거스라는 도시를 주목해야 한다.  이도시는 20세기  미국의 특징과 열망을 상징하는 메타포와 같기 때문이다. 라스베이거스는 오락과 유흥 외에는  어떤 것도 생각할  없는 도시이기에, 공공담론조차 하찮은 오락거리로 변질시키는 방식으로 사람들의 문화의식을 물들인다미국의 정치, 종교, 뉴스, 스포츠, 교육과 상거래는 별다른 저항이나 소리소문 없이 쇼비즈니스와 유사한 부속물로 변질되었다.  결과 우리들은 죽도록 즐기기 일보 직전에 있다.(p.17)

미국인들보다  뛰어난 자동차를 만든다는 소리를 듣는 일본인들도 경제란 과학이라기보다는 공연 예술에가깝다고 하는데, 도요타자동차의 연간 광고비를 보면 수긍이 간다.(p.19)

나는 의사소통이란 용어를 포괄적 은유로 사용하는데, 담화뿐 아니라 특정문화권의 사람들이 서로 메시지를교환할  있는 모든 방법과 기술체계를 뜻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모든 문화자체가 의사소통 행위이며, 조금  명확하게는 상징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의사소통이 얽히고 설킨 관계인 셈이다. 이제 여기서 공공담론을 표현하는 형식이 어떻게  형식 자체로 인해 드러나는 내용을 규제하고 심지어 지시까지 하는지주목해 보도록 하자. 예로, 원시적인 연기 신호 체계를 생각해보자. 철학을 논하기 위해 연기 신호를 이용할수는 없다. 이처럼 의사소통 형식자체가 전달되는 내용을 제한한다.(p.22)

하루의 뉴스는 우리의 기술적 상상력이 빚어낸 허구다. 조금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이는 미디어가 주관하는 이벤트에 불과하다. 요사이 우리는 세계 도처에서 단편적인 뉴스를 접하는데, 이는 우리가 이용하는 여러가지 매체가 의사소통 과정을 무의미한 조각정보로 파편화시키는 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빛과 같이 빠른 매체가 없는 문화(이를테면 연기신호가 공간지배 도구로서 가장 유용한 문화)에는 오늘의 뉴스가 없다. 뉴스의 형식을 만들어 내는 매체가 없으면, 오늘의 뉴스도 존재하지 않는다(p.24)

마샬 맥루한의 경구(미디어는 메시지다) 처럼 수상쩍게 들린다면,  연관성을 부인하지 않겠다. 나는 30전에 맥루한을 만났는데, 당시 나는 대학원생이었고 그는 알려지지 않은 영문과 교수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나는 맥루한이 오웰과 헉슬리의전통을 따라서 예언자처럼 말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문화를꿰뚫어보는 가장 명확한 방법으로 의사소통 수단을 살펴야 한다는 그의 가르침을 여전히 나의 발판으로 삼고 있다.(p.25)

 문화에서 접할  있는 의사소통 매체가  문화의 지적 사회적 선입관 형성에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추측하는 것은현명할 뿐만 아니라 심히 타당하리라 확신한다. 말하기는 당연히 근본적이고 필수불가결한 매체다. 말로 이해 인간다울  있고인간으로 살아갈  있을 뿐만 아니라, 사실상 말하는 행위가 인간 존재를 규정한다...우리는 언어구조의 다양성이 이른바 '세계관' 차이를 낳는다고 이해할 만큼 언어에 대해서 충분히 알고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의 문법적 특성은 시간과 공간을 인지하고, 사물과 과정을 인식하는 사고방식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 따라서, 모든 사람들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한마음 한뜻으로이해하리라고는 감히 추측할 수도 없다. 

 문화가 다를  세계관의 차이는 얼마나  클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왜냐하면 문화가 (하기) 소산이기는 하지만, 문화는 모든 종류의 의사소통 매체(그림에서부터 상형문자와 알파벳을 거쳐 텔레비전까지) 의해 다른 방법으로 재창조되기 때문이다.

언어와 마찬가지로 각각의 매체는 생각하고 표현하고 느끼는  있어서 새로운 방향감각을 제시하기 때문에독특한 담론형식을만들어낸다. 이는 물론 맥루한이 매체는 메세지라고 말하면서 의미했던 바이다. 그러나맥루한의 경구 그대로는 메시지와 메타포를 혼동할  있기에 개선할 필요가 있다.(p.26~27)

*메타포: 행동, 개념, 물체 등이 지닌 특성을 그것과는 다르거나 상관없는 말로 대체하여, 간접적이며 암시적으로 나타내는일(네이버사전)

 

우리가 말을 통하든 아니면 문자나 텔레비전 카메라를 통해 세계를 이해하든지 간에, 우리가 접하는 매체가방출하는 메타포는세계를 분류하고 계열화하고  지우고 확대하고 축소하고 채색하여 세계가 어떻게 생겼는지 나름대로의 인식론을 편다.(p.27)

 그런데 특이하게도 사람들은 매체가 개입함으로써 우리가 보거나 알게  것을 지정하는 역할에 대해서는별로 주의를 기울이지않는다. 책을 읽거나 텔레비전을 보거나 시계를 힐끗 쳐다볼  사람들은 그러한 행위가 자신의 정신세계를 어떻게 체계화하고통제하는지 대체적으로 관심이 없으며 , 텔레비전 또는 시계가어떠한 세계관을 제시하는지에 대해선 더더욱 둔감하다.(p.28)

  중에서도 20세기 말에 이러한 사실을 알아챈 사람들이 있다.  위대한 관찰자 중의  사람이 루이스 멈포드였다. 그는 단순히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시계를 보는 부류의 사람이 아니었다. 시시각각 모든 사람들의신경을 잡아끄는 시계의 역할보다는, 시계가 어떻게 '순간'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내는지에 훨씬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시계의 철학,  메타포로서의 시계에 주목했는데, 이는 당시 시계제작자는 물론 지성계에서조차 드물었던 관점이었다.

 멈포드는 "시계는 분과 초라는 '생산품' 만들어내는 강력한 기계장치와 같다" 단정지었다. 어떤 제품을생산할  시계는 인간활동을 시간과 분리시키는 효과를 내기 때문에, 이로 인해 수학적으로 측정 가능한 일련의 독립세계가 있다는 믿음을 조장한다. 시계가 만들어내는 순간순간은 자연에서도 신에게서도 비롯된 개념이 아니다. 이는 자신이 만들어낸 기계장치를 통해 자기자신과 대화하는 인간이 만들어낸 개념일 뿐이다.(p.29)

 음성표기로 인해 지식에 대한 새로운 개념뿐 아니라 정보, 청중, 미래세대에 대한 새로운 감각이 형성되었음이 분명한데, 이는문자발전 초기단계에 플라톤이 이미 모두 알아챈  있는 사실이다.

 철학은 비평 없이는 존재할  없는데, 글쓰기를 통해 생각하는 바를 지속적이며 집중적으로 파고들  있으며 편리하기까지 하다. 글쓰기는 말하기를 동결시키고, 그렇게 함으로써 문법학자, 논리학자, 수사학자, 역사학자를 낳았다. 이들은 모두 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디에 오류가 있는지, 지향점이 어디인지 파악하기위해 눈앞에서 언어를 놓치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매달려야하는 부류들이다.(p.30)

 플라톤은  모두를  알고 있었는데, 이는 글쓰기를 통해 인간의 언어처리기관이 귀에서 눈으로 이동하는지각혁명이 도래할것임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실제로 플라톤은, 그러한 인지 전환을 촉진시키기 위해 학생들이 자신의 학파에 들어오기 전에 기하학을 익히도록 요구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만약 사실이라면 이는옳은 판단이었는데, 위대한 문학비평가 노스럽 프라이가 했던말에서  이유를 발견할  있다. "기록된 글은 단순한 기억보다 훨씬 강력하다. 기록은 과거를 현재에 재창조하고, 익히 알고 있는 사실뿐 아니라 환상을불러일으킬 정도로 눈부신 긴장감을 선사한다." 

 노스럽 프라이가 시사했듯이, 인류학자들은 기록된 글이 그저 반복되는 말소리가 아님을 알았다. 이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소리로, 마법사의 일급 속임수와 같다. 글을 발명한 사람에게도 이같이 보였음이 확실한데, 티무스 왕에게 글을 발명해 소개했다는 이집트의  토토가 마법의 신이기도 했다는 사실은 그리 놀랄 일도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와 같은 사람들은 글쓰기에서 놀랄 만한것을 찾아낼  없겠지만, 인류학자들은 순전히 구어만을 쓰는 사람들에게  쓰는 행위(아무와도 이야기하지 않으면서 모든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 얼마나 기이하게 보였는지  알고 있었다.(p.31)

우리는 자연이나 지성이나 인간욕구나 사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언어로 드러나는  대로만 본다. 따라서언어는 우리가 이용하는 매체이고, 언어라는 매체는 우리의 메타포가 되며, 이메타포가 문화의 내용을 형성한다. (p.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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