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의 환경으로 내재성

내재성은 쁠랑은 사유의 이미지라고 말한다. 개념들이 창조 되며 펼쳐지는 환경이다. 사유의 환경이란 사유를 가능케 하는 것이며, 그 스스로는 사유의 대상이 되지는 않는 것이다. 이러한 사유의 환경을 초월의 환경과 내재성의 환경으로 나눌 수 있다. 철학자에게 조차 의식되지 못하는 전제의 환경과 전제 없음의 환경이다. 저자는 프랑스와 줄리앙의 텍스트를 참조하여 두 환경의 차이를 그리스 철학과 중국 철학의 성향 비교를 통해 설명 한다.

두 철학은 공통적으로 생성, 운동, 변화를 희박함/빽빽함, 작음/큼 이라는 대립자들로부터 사유한다. 차이점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두 대립자 사이에 세번째 항으로 ‘토대-주체' 을 덧붙인다. 이 토대-주체는 '실체'로서 두 대립자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어린 아이가 큰 어른이 되는 것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으로 설명하면 아이는 작음에서 큼으로의 변화가 아니라 작음의 이데아가 담겼다가 큼의 이데아가 담기게 되는 것이다. 작음과 큼의 속성 자체는 변화하지 않는다. 여기에 다른 것을 운동하게 하는힘을 가진 존재로 원동자를 더한다. 어떤 속성을 담은 토대가 다른 속성을 담게 되기까지의 운동을 설명하기 위하여 변화의 원인의 역할을 하는 외부의 요인을 개입 시켜야 한다. 이렇게 하여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인설이 완성 된다. 즉 질료, 형상, 원동자 그리고 목적인 이다. 모든 변화에 질료의 역할을 하는 주체의 개념과 변화를 일어나게 하는 행위자의 개념이 함축되어 있다. 반면 동양 철학은 음과 양의 변화에 의해 설명 되기에 주체를 설정할 필요가 없다. 음이 극해서 양이 되고, 양이 극해서 음이 된다. 작음이 큼이 되고, 희박함이 빽빽함이 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유에서는 작음과 큼이라는 속성을 담을 그릇이 필요 없다. 주체라는 개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리스 철학은 모든 것이 정지해 있다고 생각하고 출발한 것이다. 하지만 그 출발 자체가 정당한 것인지는 사유되지 않고 그저 암묵적 합의가 있었을 뿐이다. 그들은 그러한 것을 그냥 전제하고 사유를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 철학의 '사유의 환경'이다. 개념들이 전제한 사유의 이미지로서 사유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 철학이 존재에 대한 사유, 초월자의 철학, 암묵적, 임의적 전제의 철학이라고 한다면, 중국 철학은 생성과 변화에 대한 사유이며 전제없는 사유의 이미지이다. 내재성의 철학이다.

칸트도 형이상학의 독단에 빠지지 않기 위하여 모든것을 '내재적'으로 사유하고자 하다. 하지만 그의 내재성은 일치, 조화, 통일, 선 등을 전제하는 '선험적 주체'에 구겨 넣어진 내재성이라고 한다. 그는 형이상학의 독단으로 부터 철학을 깨워 이성을 재판정에 세우려 하였다. 경험을 넘어서는 모든것을 배제하고, 모든가능한 경험을 조건 짓는 '내적인 원리'를 찾았다. 데카르트가 주관적이고 암묵적인 최초의 확실성을 코기토에서 찾았다면 칸트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능력들의 일치가 그의 사유의 최초의 확실성이 된다. 경험을 가지고 인간의 이성을 철저하게 비판하려 한다. 이는 경험적인 것의 다양을 통일체로 '종합'하는 인간의 능력 을 필요로 한다. 이 능력은 내부에 경험과 독립적으로 존재해야 한다. 그 근거는 반드시 인간의 능력들의 자발적 일치에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능력의자발적 일치'에 대해 칸트는 탐구 하기를 회피한다.

들뢰즈의 마지막 논문 『내재성: une vie』(a life, 비유기적 생명)에서 내재성은 곧 생명이라고 한다. 생명은 내재성이라는 사유의 환경이다. 여기에서 '생명'은 유기체적 생명이 아니다. 물, 공기, 흙 같은, 무기물이 없는 생명은 상상할 수 없다. 생명과 비생명을 가르는 경계를 부정한다. 결과적으로 이런 무기적 생명에는 어떤 방향성도 목적도 의미도 있을 수 없다. 자연, 진화에는 어떤 합목적성도 없다. 생명과 내재성의 환경이다. 내재성의 환경은 아무 전제도 없는 사유의 환경이다. 그런데 이런 전제없는 사유의 환경에서 사유를 한다는 것은 지난한 일이다. 사유 이전에 아무것도 주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이에 대해 비자발적, 반로고스적, 비변증법적 사유의 방법을 제시 한다. 그것은 내가 사유하고 싶은 것을 사유하기 위하여 능력들을 자발적으로 동원시키고 일치하는 것이 아니다. 감각의 강요에 의해 사유를 시작하고, 능력들을 비자발적으로 동원하는, 수용적 사유가 된다. 우리는 오로지 우연적 만남으로부터 유발되는 고통과 즐거움으로부터 질문을 던질수 밖에 없다.

개념의 생산원리로 내재성

다음으로 사유의 환경에서 개념과 현실적인 것의 생산 원리로서의 내재성을 다룬다. 평등하고 다양한 것들의 생산 원리이다. 내재성을 접근하기 위한 다른 길로 제시된다. 먼저 철학사에서 생산원리로서 내재성을 어떻게 다루는지 살펴본다 모리스 블롱뎅은 초월적인 신이 우리의 삶에 내재한다는 것을 근거로 신을 변호하고 재인 한다. 칸트는 이성과 원리들의 '내재적 사용'과 '초월적 사용'을 구분한다. 가능한 경험의 틀안에 머물러 있는 선험적 지식으로서의 '내재적 형이상학'과 가능한 모든 경험의 한계를 뛰어 넘는 '초월적 형이상학'을 구분한다. 하지만 들뢰즈는 칸트의 선험은 경험의 진정한 가능 조건이라기 보다는 '경험적인 것의 복사'일 뿐이라고 말한다.

플라톤이래 세계는 경험적인 것의 세계와 가지적인 것의 세계로 나뉜다. 경험적인 것의 세계는 가지적인 것의 세계의 모방이며 분유라고 한다. 신플라톤주의자들은 분유의 원인을 분유하는 자들 즉 경험적인 것들에서 찾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분유의 원인을 분유된 것 다시말해 가지적인 것에서 찾아야 한다. 하지만 분유를 가능하게 하는 원리가 분유된 것 일 수 없고 그 너머에 존재하는 원리로 설명할 수 있다. 이를 모든 것이 흘러나오는 유출적 원인이라고 한다.

스피노자는 실체로서의 신은 초월적 원인이 아니라 내재적 원인이라고 표현한다. 이는 신이 경험적인 것들(양태들)을 만들어 내기 위해 자기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서 자기의 내부에서 모든것을 만들었다는 뜻이다. 내재적 원인은 생산하는 원인으로서 자기 내부에 머물뿐 아니라 생산된 것 역시 원인에 내재한다는 의미하다. 원인이 유출적이라는 것은 결과와 원인 사이에 위계가 존재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원인이 내재적이라는 것은 원인과 결과가 존재론적으로 동등하다는 존재의 평등을 이야기 한다. 스피노자가 말하는 실체가 그것의 양태보다 우월한 근거는 없다. 유일 실체인 신과 유한 양태인 인간이 존재론적으로 평등하다. 이는 존재자들 사이의 평등을 이야기하는 존재의 일의성과 만난다.

스피노자에게 존재의 일의성이란 모든 개별적 차이들 또는 내재적 양태들에 대하여 단 하나의 동일한 의미로 말해진다는 것이다. 이는 존재의 의미가 다양하다는 전통적 철학의 입장에 반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의 다의성이란 서로 구분되는 다양한 것들이 다시 하나의 기준(종, 유/범주, 있음)에 의하여 재정리되고 줄 세워진다. 기준으로 제시된 것의 존재성이 그 다양한 것들에 비례적/위계적으로 분배되는 것을 말한다. 있음을 좀더 많이 분배받은 것이 그렇지 않은 것보다 우월하기 때문이다. 이 여러가지 의미를 분배한 그 최종적인 것의 일자성과 분배받은 자들 사이의 위계성과 불평등성을 의미한다.

이에 반에 존재의 일의성에서 존재는 이런 모든 양태들에 대하여 동일하고 평등하다. 하지만 이 양태들은 서로 같은 것들이 아니다. 이는 개별적인 다양한 양태들의 이질성과 다수성으로서의 ‘있음’이라는 점에서 같다는 뜻이다. 이때 있음은 ‘됨/생성’이다. 그러므로 이때의 ‘있음’을 개별자들에게 비례적으로 또는 위계적으로 분배할 수 없다. 지금까지 개별자들의 위계를 부여해 왔던 그 유일하고 완전하며 영원히 불변하는 ‘존재/있음’이 여기에는 없다. 있는 것은 오로지 개별자들, 양태들 뿐이다. 실체라는 것은 양태들과 독립적인 어떤 다른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 실체란 양태들일 뿐이다. 양태들과 다른 것으로 실체는 없다. 들뢰즈는 개념의 생산 원리로 ‘내재성’에 가장 철저하고 충실한 이해라고 한다.

어떤 일자로 부터 무엇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잠재성으로 현실태가 내재적으로 파생되어 나온다고 설명한다. 대립자들의 상호관계로부터 내재적으로 흘러 나오는 경향에 따라 존재의 움직임이 형성된다. 에너지들의 현실화 '과정'으로 인해 현실적인 것이 생산되고 내재성이란 이러한 '과정'을 나타내는 것이다. 모든 변화는 과정의 지속적인 갱신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지향하지 않는다. 들뢰즈의 잠재적인 것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잠재태를 구분해야 한다.

잠재적인 것 혹은 가끔 잠재태라고 번역하는 들뢰즈의 le virtuel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잠재태 뒤마니스와 혼동되기 쉬우나 이 둘은 전혀 다른 존재론적 위상을 가지고 있다. 아리스토 텔레스의 철학 체계 내에서 현실적인 것은 ‘잠재태’로 부터 파생되는 것이 아니라 잠재태에 목적의 역할을 하는 ‘형상’으로 부터 파생된다. 그러므로 ‘현실태’는 ‘잠재태’보다 형상에 더 가깝기 때문에 잠재태 보다 우월하다. 그러나 들뢰즈의 잠재적인 것은 이로부터 현실태가 내재적으로 파생되어 나오는 것으로 서로 상관적이다. 당연히 들뢰즈에게 있어서 잠재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 외에 아리스토텔레스에서와 같은 외부의 형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들뢰즈의 잠재적인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의 질료와 같은(형상이 아직 작용하지 않았다는 의미에서의) 무규정성이 아니라 완전한 규정으로 사유되어야만 한다.( 차이와 반복 449~451)

우리가 살펴 보았던 생산원리라는 것은 독립하여 존재하는 그 무엇이 아니라 이들의 관계를 표현하는 것일뿐이다 내재적 장치일 뿐이다. 장치의 한가운데서 생산성은 밖으로부터 오지 않으며 전적으로 내재적 이다. 내재적 원인은 과정중에 있으며, 대립자들에 더하여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의 관계(생명)을 표현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존재의 움직임은 초월자가 지도하는 방향대로 어떤 초월적 목적을 향하여 인도되는 것이 아니다. 대립자들의 상호 관계로부터 내재적으로 흘러나오는 경향에 따라 움직이다.

‘내재성’의 환경에서 모든 변화는 과정의 지속인 갱신 외에 다른 어떠한 것도 지향하지 않는다. 이질성으로 부터 이질적인 것이 생산되는 우주이다. 이러한 우주에 목적, 의미, 방향이 있으리 만무하다. 존재자의 삶에 미리 주어진 목적도 의미도 방향도 없다. 내재성의 장은 의식의 이전 내지 너머에 존재한다. 내재성의 장에서는 온갖 초월로 부터 벗어난다. 강도와 역량과 변이를 생성하는 ‘잠재성들, 사건들, 특이성들’의 장이 된다. 차이와 반복의 영원회귀를 통하여 잠재성, 사건과 특이성을 생성하는 무대가 바로 내재성이다.

 

 『내재성이란 무엇인가』 (신지영 저, 그린비, 2009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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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욕망'이라는 단어를  자주 접한다.  뜻을 말하라고 하면 원하는 것, 바라는 것, 결코 채울수 없는 것으로 이야기 한다. 서 있으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다. 누으면 편히 잡고 싶다. 욕망은 끝이 없는 결여라고 생각 했다. <노마디즘1>에서는 욕망을 생산이라고 한다. 의미가 쉽게 다가 오지 않아 <남경태의 스토리 철학18>을 펼쳤다. 이야기와 함께 개념어를 쉽게 설명한다. 요즘 고 남경태 작가의 역사책과 철학책이 끌린다. 다른 책에 비해 이해하기 쉽게 설명 한다. 욕망은 맹목적이며 무의식적인 흐름이라고 한다. 내가 어찌할 수 없다. 접속과 배치를 바꾸면서 욕망의 흐름을 조정할 수 있다고 한다. 욕망의 포로가 되지 않기 위해 공부한다.

"욕망의 흐름 앞에 무릎을 꿇고 포로가 되면 광인이 되고, 욕망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타고 장벽을 돌파하면 시인이 된다."

합리성을 강조하는 시대에 감정이나 욕망은 올바른 평가를 받지 못한다. 이성reason은 이유라는 뜻도 함께 가진 것에서 알 수 있 듯이 인과율을 중시한다.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고 같은 원인은 같은 결과를 낳는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일은 예측 가능하고 합리적이다. 이 합리성을 바탕으로 자본주의와 산업혁명이 일어났고 자연과학이 발달했다. 그런데 감정이나 욕망은 인과율의 통제를 받지 않는다. 특히 감정 중에서도 욕망은 이성처럼 밝고 깨끗하지 못하고 어딘가 지저분하고 끈적끈적한 이미지를 준다.

"뭔가를 하고 싶다"는 게 욕망의 본질이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싶은 것처럼 욕망에도 인과적인 측면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이유 없는 욕망도 얼마든지 있다. 배가 고플 때 밥 대신 빵이 나 스파게티를 먹고 싶을 수도 있다. 배가 고프지만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을 수도 있고, 반대로 배가 고프지 않은데 뭔가 먹고 싶을 수도 있다. 이유가 있다 해도 이성의 관점에서 보기에는 터무니없는 이유일 수도 있다. 햇볕이 너무 따가워 살인을 저지른 '이방인'의 뫼르소에게 햇볕은 살인의 합리적인 이유가 아니다. 이성이 인간의 다른 모든 속성보다 부각되었던 계몽주의 시대에는 이성으로 설명되지 않는 욕망이 금기시 되었다. 계몽주의 철학은 인간에게 그런 측면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 고, 인정하더라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으려 했다. 이런 지적 추세에 처음으로 반기를 든 것은 낭만주의 시조였다. 장 자크 루소 같은 반성적 계몽주의자들이 제창한 낭만주의는 이성을 만능의 무기로 내세우는 풍조에 맞서 감정과 열정을 자연스러운 인간적 속성으로 간주했다.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그의 모토는 이성에 기반을 둔 문명에 던진 도전장이었다.

그러나 합리주의에 대한 반감에서 싹튼 낭만주의는 감정, 특히 욕망을 다룰 만한 이론적 기반이 취약했다. 비록 엄격한 합리주의는 거부했지만 낭만주의자들에게 욕망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 주제였다. 그들은 욕망을 열정으로 해석하는 정도 이외에 다른 해석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욕망을 체계적으로 다룬 것은 철학이 아니라 경제학이었다. 카를 마르크스는 자본을 추구하는 욕망이 자본가의 심리적 성향이 아니라 마치 생명을 지닌 별개의 생물처럼 객관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욕망은 낭만주의적 열정과 확연히 구분된다. "자본가가 존경을 받는 것은 자본의 인격화라는 자격 때문이다. 자본가는 수전노처럼 절대적인 치부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수전노에게는 그 욕망이 개인적 열정으로 나타나는 데 비해 자본가의 경우에는 사회적 메커니즘의 작용으로 나타난다(자본 가는 그 메커니즘을 구성하는 하나의 나사에 지나지 않는다).…자본가의 모든 행동은 자본의 기능에 불과하다."

형이상학을 바탕으로 하는 전통 철학에서 욕망은 도덕적으로도 문제시 되었고 인식론적으로도 철학의 범주 안에 들지 못했 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욕망을 자신의 이론 체계 안에 포함시킬 뿐 아니라 주역으로 등장시킨다. 자본가의 욕망은 단지 자본가가 가진 여러 가지 속성들 중 하나(예를 들면 탐욕이나 욕심)가 아니라 자본의 확대재생산을 가능케 하는 원동력이다. 욕망에 관한 새로운 입장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마르크스는 현대 철학의 선구자다.

마르크스가 욕망을 새로이 바라보는 관점을 취할 수 있었던 것은 유물론에 바탕을 두고 이론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이성만이 아니라 욕망도 인간의 본성 가운데 하나다. 오히려 이성보다 욕망이 더 인간적인 측면을 반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계몽주의의 정점인 19세기 자유주의 사상은 도덕철학을 앞세워 욕망을 부정하려 했으나 그것은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을 외면한 결과다. 귀족의 살롱에서 탄생한 철학적 담론과 자본주의 초창기 런던의 더러운 뒷골목에서 탄생한 철학적 담론의 차이라고나 할까?

이렇게 욕망을 새롭게 조명하는 현대 사상의 흐름은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가 이어받는다. 그들은 욕망 에 대한 전통철학의 부정적인 견해를 거부하는 데서 출발한다.

이성의 관점에서 보면 욕망은 결핍이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게 뭔지 고민하듯이, 욕망은 자신에게 없는 것을 바라는 마음이다. 결핍이 없는 존재는 욕망하지 않는다. 또한 전통적인 견해 에 따르면 욕망은 뭔가를 소비하려는 마음 상태를 의미한다. 식욕, 성욕 같은 본능적인 욕구에서부터 물욕, 출세욕, 권력욕 등 에 이르기까지 욕망의 여러 형태들은 모두 뭔가를 소비하고 사용하려는 태도를 가리킨다.

그러나 들뢰즈와 가타리는 정반대의 입장을 취한다. 욕망은 결핍도 아니고 소비도 아니다. 욕망은 결핍이 아니라 충만이며, 소비하는 게 아니라 생산한다. 17세기 철학자 스피노자가 말한 '생산하는 자연'의 개념을 차용해 그들은 '생산하는 욕망'이라는 개념을 만든다. 여기서 생산한다는 동사에는 목적어가 없다. 특정한 대상을 생산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욕망은 끊임없이 뭔가를 생산하는 속성을 가진다는 의미다. 그런 뜻에서 욕망은 맹목적이고 무의식적인 에너지이며 흐름이다.

욕망은 흐른다. 흘러서 차고 넘친다(그런데 결핍이라니!) 욕망은 자연스러운 흐름이므로 욕망의 주인이나 주체를 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욕망은 어느 누가 소유한 성질이 아니다. 하지만 욕망이라고 하면 당연히 주체와 대상을 떠올리게 되지 않는가? 욕망은 "누가 무엇을 하고 싶다"는 뜻이 아닌가? '시험을 앞두고도 밤새 게임을 즐기고 싶은 수험생의 욕망', '틈만 나면 책상 다 리를 물어뜯고 싶은 강아지의 욕망', '악마와의 계약을 통해 돈을 벌고 싶은 욕망'이 욕망의 일반적인 양태가 아닌가?

욕망을 의식의 속성으로 보면 그렇다. 욕망을 결핍이나 소망으로 이해하는 견해는 모두 욕망을 의식의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보는 데서 비롯된다. 욕망은 의식이 아니라 무의식이다. 욕망은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르는 물처럼, 양극에서 음극으로 흐르는 전기처럼 무작정 흐른다. 심리적인 요소라기보다는 물리적인 요소에 가깝다.

자본가가 자본을 확대재생산하려는 노력은 언뜻 보면 의식적인 활동으로 생각되지만, 실은 자본의 논리에 종속된 결과다. 자본은 달리지 않으면 넘어지는 자전거처럼 증대하지 않으면 유지 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자본의 증식은 자본가의 욕망이 아니라 자본의 욕망이다("자본가의 모든 행동은 자본의 기능에 불과하다"

욕망은 특정한 주체와 대상이 없이 그 자체로 존재하고 기능 한다. 전통 철학에서는 욕망을 인격적이고 의식적인 속성으로 여겼기 때문에 욕망을 설명하거나 이해하지 못했다(설명과 이해의 주요 수단인 이성 자체가 인격적이고 의식적인 개념이다). 그러나 욕망은 비인격적이고 무의식적이다. 욕망은 끊임없이 뭔가를 생산하지만 그것은 의식적이고 합리 적인 생산이 아니다. 욕망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과 같다. 늘 움직이지만 움직인다는 것만 알 뿐 방향은 예측할 수 없다. 그래서 인류 사회는 역사적으로 항상 욕망을 통제하고자 했다. 그렇지 않으면 사회가 존립할 수 없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욕망의 통제 방식에 따라 원시사회, 고대사회, 자본주의사회를 구분한 다. 마지막 단계인 자본주의는 욕망의 흐름을 한편으로는 방치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통제하는 이중적인 방식을 취한다. 자본주의는 노동력과 소비자를 다원화해야만 성장할 수 있지만 동시에 화폐자본으로 모든 것이 집중되어야만 하는 체제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분열증이 자연스러운 사회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분열증을 극복하는 게 아니라 가속화시켜야만 자본주의를 해체할 수 있다고 믿는다.

광인과 시인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 욕망의 흐름 앞에 무릎을 꿇고 포로가 되면 광인이 되고, 욕망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타고 장벽을 돌파하면 시인이 된다. (남경태의 스토리 철학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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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하는 독서의 힘>(북바이북, 2020.6월)을 읽었다. 독서와 글쓰기 강의를 하며 책모임을 운영하고 있는 김민영, 권선영, 윤석윤, 장정윤 작가가 함께 썼다. 부제가 토론을 위한 논제 만들기 이다. 질문 독서의 노하우를 전수 받고, 논제 만드는데 도움을 받고자 책을 펼쳤다. 

 

책은 4장으로 구성 되어 있다. 한장씩 나누어서 작성하였다. 1장은 질문하는 독서를 위한 마음 가짐(김민영) 이다. 2장은 홀로 책 읽는 이를 위한 질문 독서(권선영)을 실었다. 3장은 책모임의 논제 만드는 법과 논제 토론 진행 노하우를 구체적으로 담았다.(윤석윤) 4장은 독서 교육을 위한 논제 독서(장정윤)는 초등학생과 청소년을 포함한 독서 토론 수업 법을 다루었다. 

 

1장과 2장은 잘 읽고 쓰기 위한 방법으로 질문하는 독서를 다루고 있다. 잘 읽기 위해서는 기록하고 메모하며 다양한 관점에서 질문한것을 권장하지만 세부적인 방법에서 차이가 있었다. 책 읽는 이유를 다시한 돌아 보고, 문제 제기로 부터 질문으로 이어지는 구체적 과정이 제시되어 있는 2장 내용이 도움이 되었다. 3장은 논제 만들기로 모임을 진행할때 논제를 만들어 놓고 놓치는 부분이 없는지 참조용으로 읽었다. 마지막장은 초등학생과 청소년을 위한 독서 교육을 진행한다면 도움이 될 내용이다. 내게는 직접적인 필요로 다가오지 않아 목차 중심으로 읽었다. 

 

제 1장에서는 질문을 위한 독서 습관으로 기록하는 습관을 강조한다. 책을 읽고 독후감, 서평 쓰기를 권장한다. 작가의 경험을 배경으로 블로그 글쓰기를 추천한다. 책을 읽으면서 어떤 내용이 질문이 될 수 있는지 소소한 예를 든다. 책 모임에서 이 질문은 고정관념을 드러나게 하며, 읽기를 깊게 만들고 사고의 폭을 넓힌다. 이는 책에 대한 자기 입장을 갖는 단계로 이어진다. 명확한 근거에 따른 자기 입장을 갖는 사람들 중심으로 책모임을 하다 보면 고정관념에 작은 창은 낼 수 있다고 한다. 

 

“적게 읽더라도 자기 입장을 정리하며 느리게 꾸준히 가는 독서야 책의 유효기간을 늘리는 습관이다. 저자의 주장을 무조건 신뢰하지 않기, 권위를 추종하지 않기, 자기 생각을 포기하지 않기 세가지 약속에 충실한 읽기라면 쓰기와 토론으로 나아갈 수 있다 ”(p.49) 

 

2장에서 책을 잘 읽기 위한 방법으로 채게 표시하며 읽기를 권장한다. 책에 푹 빠지기 전에 브레이크를 걸어 주기 위한 방법이다. 밑줄긋기, 단상 메모하기, 발췌 하기 이다. 책을 나만의 노트로 만들라는 책읽기 방법의 다른 표현이다. 책에 메모하고 줄 긋고 단상을 적는 것이다. 이 책은 나만의 책이자 내 생각의 변화를 기록한 노트가 되는 것이다. 작가는 질문의 힘을 기르기 위해 기본적인 독서양이 요구 된다고 한다. 배경 지식이 확보를 위해서 이다. 실천 전략으로 독서 목록을 만들어 방향성을 갖는 책 읽기를 권장한다. 

한계로 상승하기 위한 양의 축적이며, 폭 넓은 시야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어 책을 읽으면서 질문으로 이어지기 방법을 안내한다. 질문하는 습관 기르기 이다. 불편함을 문제의식으로 연결하고, 개인의 문제를 사회적 문제로 확장하는 것이다. 칼럼이나 기사에서 찾은 사회 이슈에서 키워드를 찾아 내고 질문을 확장 하라고 한다. 이러한 질문이 자기의 확고한 입장으로 이어진다. 

 

질문을 만들고 생각을 정리하면 자기 입장이 생기고 하고 싶은 말이 많아진다. 질문하는 습관이 가장 빛을 발할때는 같은 주제의 ‘다른글’을 읽을 때다. 그간 쌓은 배경지식과 자기 주관을 가지고 읽기에 글을 보는 안목이 달라졌음을 스스로 깨닫게 되지 않을까. (p.69)

 

고통받는 이의 곁에 있는 사람들, 너무 고통스러워서 누구의 말도 귀에 들어 오지 않는 사람들, 누군가에게 공감할 마음의 여유가 없는 사람들, ‘진정한’공감의 필요성을 이야기기 하는 사람들....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봄으로써 삶의 다양성을 경험하고 자의적인 생각에서 벗어 날 수 있다. 처음에는 의식적으로 질문을 만들지만 습관이 되면 절로 궁금해진다. 문제를 해결해가면서 생각은 깊어진다. (p.71)

 

작가는 이어 성찰과 사유를 위한 구체적 질문 만들기 방법을 설명한다. 책을 읽는 이유가 뭔가요 ? “삶의 변화를 경험하기 위해서 책을 읽습니다.” 책을 읽는 이유가 편향된 의식을 바로 잡고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책 읽기 목적에 부합하는 질문이다. 지적 호기심을 충족하고 교양을 보이기 위한 책 읽기가 아닌 머리에서 가슴으로 공감하며 해동하기 위한 책 읽기이다. 책을 읽고 실천을 위한 질문을하는것이다. 나이 책읽기 목적을 한번 돌아 보게한 부분 이었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오랫동안 유지해온 관습, 환경, 습관 등의 영향이 여전히 남아 있는데다 변화의 과정이 그다지 드라마틱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변화는 눈에 보이지않게 차곡차곡 쌓이다가 어느 한순간 발현된다. 책한권을 읽더라도 삶에 작은변화를 경험하는 것.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가 아닐까 (p.74)

 

작가는 이어 “나와 타인을 깊이 이해하는 질문”, “사회를 보는 다양한 관점의 질문”을 설명한다. 공감을 위한 질문이다. 감정적인 공감에서 벗어나 그럴 수 밖에 없는 사회적 구조까지 볼 수 있는 안목을 요구 한다. 질문을 통해서 사회를 드러낸다. 

 

우연이든 필연이든 인간의 삶은 각각의 논리가 있기 마련이다. 그 논리를 역추적하다 보면 완벽하지는 않아도 인물의 삶을 이해하거나 공감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나 역시 똑 같은 선택을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양한 인물을 간접적으로 경험하는 것에 중점을 두면 된다. 이런 경험이 누적되면 비슷한 사람을 현실에서 만나게 되었을때 한 번더 그의 입장을 생각해 볼것이다. ..평생 경험해보지 못할 누군가의 상처, 고통, 절망, 슬픔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소설을 읽을 가치가 있다. (p.81)

 

책을 읽으며 질문을 던지고 생각을 정리하며 다다른 최종 단계는 글쓰기 이다. 작가는 소설가 김영하를 이용하여 글을 쓰는 행위는 내가 살아 있음을 나타낼 수 있는 마지막 권리라고 한다. 뇌졸증으로 전신 마비가된 프랑스 엘르의 편집장 장 도미니크 보비가 눈 깜박 임만으로 글을 썼다는 이야기가 생각났다. 글을 씀으로써 재 질문을 명확하게 한다. 다른 책에서 질문의 해결 책을 찾을 수 없을때 이데 대한 답으로 글을 쓴다면 새로운 영역에 대한 글쓰기가 되는 것이다. 변화의 방향을 다른 사람에게까지 향하는 것이다. '독서내공' 을 전수 받은 느낌 이었다. 변화를 위한 실천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소설가 김영하는 에세이 <말하다>(문학동네, 2015)에서 “글을 쓴다는 것은 인간에게 허용된 최후의 자유이며, 아무도 침해할 수 없는 마지막 권리”라고 했다. 글쓰기는 틀에 박힌 삶속에서 숨 쉴수 있는 아가미이자 ‘나’로 온전히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인간의 특권이다. 김영하는 이어 “글을 씀으로써 우리는 세상의 폭력에 맞설 내적인 힘을 기르게 되고 자신의 내면도 직시하게” 된다고 말한다. 결국 글을 쓰는 행위는 지금 이순간을 살아가는 ‘나’의 존재 확인이다. (p.92)

 

독서가의 종착지는 자기 질문에 대한 답을 글로 써보는 것이다. 흩어진 생각들을 문장으로 표현하는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글을 쓰면서 생각이 구체화되기도 하니 처음부터 입장을 정하지 않아도 된다. 글을 쓴 후 생각이 명징해지면 주체적으로 사고한 것에 기쁨을 느낄 수 있고, 정리가 덜 되었어도 같은 주제로 나중에 글을 쓸때 좋은 토대가 될 것이다.(p. 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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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보다 사람을 중심을 둔 북클럽 운영장의 성장기 <나는 오늘도 책모임에 간다>(김민영 저, 2020년, 북바이북)를 읽었다. 블로그 ‘글쓰는 도넛’, ‘유튜브 김민영 글쓰기 수업’을 운영하는 김민영 작가의 에세이다. 책모임 운영자의 생각과 참여자의 의견을 읽을 수 있었다.

요즘 책모임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다. 코로나가 앗아간 내 일상중의 하나이다. 책은 내가 직접 겪을 수 있는세상보다 훨씬 더 넓은 세상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하게 해준다. 책 모임은 나만의 간접적인 체험이 공감을통해 보편성을 획득한다. 평등하게 말 할 수 있고 들어 준다는 경험은 책 모임의 장점이다. 모임을 통해 활자를 읽는데 그치지 않고 삶의 자세와 행동의 변화를 가져온다.

이 책을 읽으며 독서모임에 참여하는 상상을 했다. 논제를 준비하고 모임을 진행하는 운영자의 모습이 보였다. 각자 새로운 시각으로 책에 대한 느낌을 이야기하는 참여자들도 보였다. 요즘 논제 중심의 독서모임을 많이 한다. 책 내용을 요약해서 세미나 위주의 책모임 보다는 논제 중심의 모임을 더 선호한다. 가끔은 어려운철학책은 진행자가 책 내용을 요약해오는 세미나 형 모임도 참석한다. 논제 중심 독서 모임에서는 논제와 진행자의 역할이 중요하다. 이 책에서 진행자의 논제에 대한 고민이 묻어 나온다. 작가는 작가의 인생책, <달과6펜스>에 독서모임 진행해 왔지만, 질문을 위한 모임을 추가한다. 주인공 스트릭랜드에 대한 질문보다 이야기를 끌고 가는 작가이자 화자인 ‘나’ 시선도 꿰뚫으며 참여자는 질문을 추가한다. 이 물음이 진행자에게는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사람들을 초대하고 식탁에 앉아 질문에 대한 답을 하며 생각을 나눈다. 작가는 논제를 음식을 장만하고 함께 나누는 과정이었다.

책 모임을 안해본 사람은 많지만 한 번만 한사람은 없다고 한다. 낮술을 한것도 아닌데 가까운 사람들에게도하지 못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소통하고 나누는 즐거움을 느끼게 해준다. 나도 책모임에 발을 들여 놓고 지속적으로 참여 했다. 새로운 책을 만날 수 있고 다른 방향으로 볼수 있는 안목도 생긴다. 논제를 발췌하고 책 모임을 진행해 보았다. 작가는 추천한 책이 사랑을 받으면 춤이라도 추고 싶어 진다고 한다. 나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내가 준비한 논제로 준비한 모임이 잘 진행 되었으면 했다. 모임을 진행하면서 내 이야기는 줄이고 참여자들이 골고루 의견을 발표할 기회를 주려고 노력 하였다.

이 책에서는 독서의 방법도 등장한다. 한작가의 전작 읽기와 주제 읽기이다. 작가는 전작 읽기 책 모임을 진행 했다. 성석재, 김훈, 서경식, 도스토옙스키, 로맹가리, 스티븐 킹, 카프카, 오르한 파쿡, 올리버 색스, 귀스타브 플로베르 포함한 작가 들의 전작으을 읽는 것이다. 마음은 있지만 해당 작가의 전작 읽기는 시도해보지 못했다. 부러움의 시선으로 전작 읽기 책모임 후기를 읽었다. 주제 읽기 모임도 등장한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사법부> <6월 항쟁> <세월호, 그날의 기록> 이다. 모임을 운영하는 작가는 책의 순서도 중요하다고 덧 붙인다. 모임을 통해 독서를 이어가는 것이다. 모임은 책읽기와 토론에만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글 쓰기까지 이어진다. 함께 모여서 읽고 쓴다면자기 검열로 부터 벗어 날 수 있다고 한다. 작가는 나타리아 긴츠부르그의 <가족어 사전> 모임의 예를 들어설명한다. 글쓰기의 강력한 동기 부여를 위한 책 읽기 모임도 만날 수 있다. 글쓰기로 부터 구원 받은 올리버색스의 자서전 <온더무브> 모임 이다. <온더무브>를 포함하여 모임 진행한 책들을 장바구니에 담았다. 책모임의 기록이 나의 책읽기로 독려하고 있다. 코로나 상황이 개선되어 이 책의 제목처럼 '나는 오늘도 책모임에 간다'가 일상이 되었으면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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