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길이 나를 찾아왔다.
그렇게 시작됐다. 나의 유랑길은.
한 시대의 끝간 데까지 온몸을 던져 살아온 나는,
슬프게도 길을 잃어버렸다. 나는 이 체제의 경계 밖으로
나를 추방시켜, 거슬러 오르며 길을 찾아 나서야 했다.
‘앞선 과거’로 돌아 나오고자 하는 기나긴 유랑길이었다.
오래된 만년필과 낡은 흑백 필름 카메라 하나를 들고
내가 가 닿을 수 있는 지상의 가장 멀고 높은 깊은 마을과
사람들 속을 걸었다. 내가 찾아간 마을들은
공식 지도에 없는 곳이 대부분 이었다.
현장에서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길을 잃어버리곤 했다.
이세계의 지도가 선명하고 첨단일수록 길은 하나뿐인 길.
그렇게 오래되고 다양한 삶의 길들은
무서운 속도로 잊혀지고 삭제돼가고 있었다.
어느 아침 나는 지도를 던져 버렸다.
차라리 간절한 내 마음속의 ‘별의 지도’를 더듬어 가기로 했다.
막막함과 불안과 떨림의 날들. 난 모른다. 언제였는지.
어디서 왔는지, 어떻게 왔는지 나는 모른다.
길을 잃어버리자, 그 길이 나를 찾아 왔다.
아주 오래 전부터 누군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길에서 만난 그 땅의 사람들이
나의 살아있는 지도였고 나의 길라잡이였다.
눈부시게 진보하는 세계와 멀어져 사람들 눈에 띄지도 않는
헌난한 곳에서 자급자족의 삶을 이어온 전통마을 토박이들.
자신이 무슨 위대한 일을 하는지 의식하지도 않고
인정받으려고 하지도 않고, 인류를 먹여 살릴 한 뼘의 대지를
늘려가고자 오늘도 가파른 땅을 일구어 가는 개척자들
인간이기에 ‘어찌할 수 없음’의 주어진 한계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인간으로서 ‘어찌할 수 있음’의 가능성에
최선을 다해 분투하면서, 우리의 삶은 ‘이만하면 넉넉하다’며
감사와 우애로 서로 기대어 사는 사람들.
역사에도 기록되지 않고 마치 한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들처럼 잊혀지고 무시되고 있지만, 이들이야말로
구누구보다 이 세상 깊숙이 자리르 차지하고 있다.
이들이야말로 이세게를 떠받치고 있는
지구인류 시대의 진정한 ‘삶의 전위’이다
어느날 이들이 사라지고 나면 우리 삶의 지경과
인간 정신은 단번에 그만큼 줄어들고 숨 막혀 오리라
역사상 가장 풍요롭고 똑똑하고 편리해진 시대에
스스로 할 수 있는 인간 능력을 잃어버리고 모든 걸 돈으로
살 수밖에 없는 무력해진 세계에서, 그들은 내안에
처음부터 있었지만 어느 순간 잃어버린 나 자신의 모습이다 .
조용한 시간, 내 마음 깊은 곳의 소리를 듣는다.
‘지금 이대로 괜찮은 걸까 ?’ ‘나 어떻게 살아야 하나’
나는 실패투성이 인간이고 앞으로도 패배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겠지만, 내가 정의하는 실패는 단 하나다.
인생에서 진정한 나를 찾아 살지 못하는 것!
진정으로 나를 살지 못했다는 두려움에 비하면
죽음의 두려움조차 아무것도 아니다.
나에게 분명 나만의 다른 길이 있다.
그것을 잠시 잊어버렸을지언정 아주 잃어버린 것은 아니다.
지금 이대로 괜찮지 않을 때, 지금 이 길이 아니라는 게
분명해질 때, 바로 그때, 다른 길이 나를 찾아 온다
길을 찾아 나선 자에게만 그길은 나를 향해 마주 걸어 온다
나는 알고 있다. 간절하게 길을 찾는 사람은 이미
그마음속에 자신만의 별의 지도가 빛나고 있음을.
나는 믿는다. 진정한 나를 찾아 좋은 삶 쪽으로
나아가려는 사람에게는 분명, 다른 길이 있다.
‘무력한 사랑’의 발바닥 하나로 써온 이 유랑노트가,
그대 삶이 흔들릴 때마다 작은 위로와 용기가 되어주기를.
이미 오래 전부터 그대를 초대해온 그이들과 함께
내마음의 순례길을 걸어가 보자.
한 걸음 다른 길로. 한 걸음 나에게로
박노해 (다른길,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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