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카르트의 정의에 따르면 “실체란 그 자체 이외에 다른 어느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독자적인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을 가리킨다.“ 즉 실체는 다른 존재를 끌어 들여 이해할 필요 없이 그 자체로 이해가 가능하다. 그래서 그는 신, 정신, 물체의 세 가지를 실체로 보았다. 정신은 사유의 속성을 가진 실체이고, 신체와 물체는 연장의 속성을 가진 보았다. 그런데 그는 신=창조자의 관념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정신, 신체, 물체의 실체적 속성을 부인하는 모순을 빚었다. 피조물인 정신, 신체, 물체는 서로 연관될 수밖에 없으므로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게다가 인식의 주체인 정신과 인식의 대상인 물체를 동등한 실체로 파악한 탓에 데카르트는 양자의 올바른 관계를 설명하지 못하고 결국 이원론의 수렁에 빠져들고 말았다.

스피노자는 데카르트가 정의한 실체의 개념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데카르트는 실체가 아닌 것을 실체로 규정했기 때문에 딜레마에 빠졌고 그 ‘실체’들의 관계를 설정하는 데 실패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스피노자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실체와 양태의 개념을 구분한다. 그에 따르면 데카르트가 실체라고 간주한 정신, 신체, 물체는 실상 실체가 아니라 모두 양태에 불과하다. 양태란 실체의 변용이다. 우리는 실체 자체를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실체의 속성을 인식한다. 다시 말해 속성이란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실체의 측면이며, 양태와 마찬가지로 속성도 하나의 실체에서 여럿이 나올 수 있다. 이렇듯 양태와 속성은 다수로 존재하지만 스피노자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실체는 오직 하나뿐이라고 말한다. 만약 같은 속성을 가진 두 개 이상의 실체가 존재한다면 그것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 제약을 가할 것이기 때문에 실체라는 개념에 위배된다. 스피노자는 유일하게 존재하는 실체가 바로 신이라고 말한다. 세계속에서 유일하게 무한하고 자족적인 방식으로 존재한다. 개별자는 실체가 아니라 양태일 뿐이다. 세계속에 많은 등가적 실체들이 빼곡히 존재한다면 운동과 변화가 불가능해진다. 고대 그리스의 파르메니데스가 겪었던 자가당착-운동은 불가능하다-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실체를 최소화시키고 실체 대신 양태의 개념을 도입해 운동과 변화를 설명하려는 것이다. 실체적 사고를 버리고 관계적 사고로 이행하려는 시도다. “세상 만물의 근본적인 요소는 무엇인가?” “삶의 궁극적 목적은 무엇인가?” “ 세상 만물의 보편자는 실재하는가” 모두 실체 혹은 실체적 진리를 찾고자 하는 시도 였다.

실체의 측면에서 자연은 처음도 끝도 없이 그저 무한하게 존재할 따름이지만 양태의 측면에서는 전혀 다른 약동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자연에는 온갖 변화와 운동이 가득하다. “무한한 종류의 사물들이 무한한 모습을 띠고 생겨난다” 실체로서 자연은 필연성 이외에 우연성을 전혀 허용하지 않지만, 양태로서 자연은 숱한 사물들이 다양한 규칙과 법칙을 따라 인과적인 연속성과 우연적 상호 의존성을 무수하게 맺어가는 관계를 보여 준다. 이런 자연의 이중적인 존재 방식을 스피노자는 ‘생산하는 자연’과 ‘생산된 자연’ 즉 능산적 자연과 소산적 자연으로 구분했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전자가 후자를 규정하고 대상화하는 관계라고 본 데카르트와 달리 스피노자의 자연은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포함한다. 스피노자에게서 신은 곧 자연이므로 인간은 신의 일부이기도 하다. 모든 유한자는 유일한 무한자인 신=자연 안에 잠재하는 가능성이 발현된 결과로 생겨난 존재들이다. 하나의 실체는 여러가지 양태를 가질 수 있다. 따라서 사유와 연장은 같은 실체를 말하는 두 가지 양태일 뿐이다. 사유는 정신적인 속성이고 연장은 물체적인 속성이다. 이 속성이 같은 실체에 내재한다고 보는 것은 곧 외부의 사물과 내부의 관념 간에 차이를 두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우리는 실체를 사유의 관점에서 인식할 수도 있고 연장의 관점에서 인식할 수도 있다.

(혼자 공부하는 이들을 위한 최소한의 지식: 철학, 남경태 저)

 

 

심신병행론(처음 시작하는 철학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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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체는 그리스어로 ‘우시아’이다. 직역하면 ‘존재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내린 실체의 정의는 이렇다. 서술어로 쓰이지 않고 주어로만 쓰여서 다른 것이 그것에 관해 서술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사람은 이성적 동물이다. 동물은 생장하며 이동가능한 실체다. 여기서 ‘사람’이나 ‘동물’은 주어로도 술어로도 쓰인다. 주어로만 쓰이는 단어가 실체라고 한다. 다른 술어를 가져와서 소크라테스에 대해 설명할 수는 있지만 소크라테르가 술어가 되는 법은 없다. 주어로만 쓰이려면 범위가 가장 작아야 한다. 이런 건 개별적인 사람이나 개별적인 사룸이라야 한다. 소크크라테스가 말하는 실체는 눈에 보이는 하나하나의 사물들, 즉 개별자이다. 더 부연 설명하면 실체는 이것 저것 이렇게 지시가 가능해야 한다. 그러려면 눈에 보이고 시공간 상에 존재재야 한다. 두번째로 실체 끼리는 분리 가능하고 독립적으로 존재 한다.

꽃은 실체이다. 그런데 이 꽃이 갖는 여러 특성이 있다. 분홍색이고 향기롭고 송기가 크다. 이런 특징들이 있다. 이런한 특징들도 존재하지만 실체가 존재하는 방식과는 조금 다르다. 실체는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존재하지만 이런 특징들은 실체에 의존해서만 존재 한다. 실체에 속하는 특성으로만 존재한다. 이런 의미에서 이 특징들을 ‘속성’이라고 부른다. 속성이 실체에 의존해서만 존재한다는 건 아리스토텔레스 특유의 생각이다. 플라톤이라면 분홍색의 꽃은 분홍의 이데아에 참여함으로써 존재한다고 할 것이다. 분홍색을 떠받쳐주는 게 꽃이 아니라 이데아라고 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본질적 속성과 우연적 속성을 구분한다. 본질적 속성은 공통으로 가지는 속성 즉 사람이라면 사람이기 위해서 반드시 가져야 하는 속성이다. 이와는 달리 우연적 속성은 말 그대로 우연히 가지게 된 특징을 말한다. 피부색이 흰지 검은지, 키가 큰지 작은지 등이다. 본질과는 상관없는 속성이다.

실체에 대한 설명하는 주요 이론은 질료-형상설, 4원인설, 가능태-현실태 등이 있다. 질료-형상설은 모든 실체는 질료와 형상이 결합된 복합체라고 본다. 어떤 재료에 특정한 모양을 부여해서 사물이 생겨났다고 본다. 이를 질료-형상설이라고 한다. 형상은 플라톤에서 이데아랑 같은 말이었는데 아리스토텔레스에서는 사물의 기능적 형태로 본다. 반면에 이데아는 공통되는 보편적인 특성이므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은 이데아와는 다르다. 질료-형상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사물을 어떤 수준에서 보느냐에 따라 질료와 형상이 달라진다. 가령 신체의 기관을 실체로 보면 그 질료는 물, 불, 흙, 공기같은 4원소이고 형상은 그것들이 결합하는 방식이다. 몸전체로 보면 질료는 기관들이고 형상은 기관들이 유기적으로 결합하는 방식이다. 거기서 좀더 나아가 사람 자체를 실체로 보면 그 질료는 몸이고 형상은 영혼, 즉 몸을 움직이게 하는 원리인 영혼이다.

다음은 4원인설이다. 모든 변화에는 원인이 있다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한 원인은 개념이 조금 다르다. 그는 왜 라는 물음에 대해 대답으로 제시할 수 있는 걸 원이라고 본다. 왜 걷는지를 다양한 관점에서 따져 볼 수 있는데 그걸 설명하는 답변들이 모두 원인이라고 본다. 이러한 원인으로 여러가지가 있지만 4가지 유형으로 분류한다. 질료인, 형상인, 작용인, 목적인이다. 질표인은 사물을 구성하는 질료의 특징으로 인한 원인이다. 형상인은 사물의 형태적 특성으로 인한 원인이다. 작용인은 외부에서 그 사물에 끼친 여향이다. 목적인 말그대로 지향하는 목적을 말한다. 소크라테스는 체력단련을 한다. 왜냐하면 그는 건강을 유지하려 하기 때문이다. 목적인의 예이다.

세번째 실체를 설명하는 개념은 가능태와 현실태이다. 실체들은 끊임 없이 변화한다. 생성하고 소멸하고 운동을 한다. 변화를 설명하려면 ‘있다’와’있지 않다’ 사이의 이분법적인 대립을 넘어서야 했다. 이를 위해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내 놓은 해결책은 바로 가능태와 현실태라는 개념이다.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능력과 그것을 현실화하는 작용이 결합하여 변화가 일어난다고 본다. 가능태란 변화의 능력이 있는 상태, 다시 말해 아직 X가 아니지만, X가 될 수 있는 능력이 내재한 상태이다. 현실태는 그런 능력이 발휘되어 이제 현실화된 상태이다.

여기서 질문하나 해본다. 변화는 왜 일어나는 걸까 ? 가능태가 변화의 능력이긴 한데, 능력이 있다고 무조건 발휘되는 건 아니다. 그렇다면 변화를 촉발하는 것, 변화의 능력을 실현하도록 이끄는 것, 그건 뭘까 ?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게 현실태라고 답했다. 가능태인 씨앗이 꽃이 되고 싶어서 스스로 변화를 일으킨다는 거다. 4원인설의 목적인에 해당한다. 건강을 이루기 위해 식사조절도 하고 적절한 운동도 한다. 건강자체가 우리에게 그렇게 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목적이 되는 것이다. 변화를 촉발하는 건 목적에 대한 욕구라고 한다. 씨앗도 꽃이 되고자 하는 욕구 때문에 싹을 틔우고 변화하기 시작한다는 거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세계의 모든 것이 목적을 향해 움직인다고 생각 했다. 목적을 향한 이 변화가 단 한번으로 끝나는 것도 아니다. 씨앗이 나무가 되고 나무가 집이 된다. 씨앗의 목적은 나무이고 나무의 목적은 집이고 집의 목적은 사람사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목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바로 이러한 목적이 사물에 존재 의미를 부여한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삶의 의미를 자주 묻곤 하는데 이는 이런 목적론적 세계관을 받아 들이기 때문이다 .

아리스토텔레스는 세상이 있는 모든 운동이 지향하는 단 하나의 궁극적인 목적이 있다고 본다. 그게 바로 “신”이다. 신은 세상 모든 변화의 궁극 목적이면서 동시에 최초의 원인인 것이다. 신은 최초의 원인이라서 자신을 변화하게끔 하는 다른 원인이 없다. 신 자신은 움직이지 않으면서 다른 것을 움직이게 한다. 이런 의미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신을 ‘부동의 원동자’라고 한다. 세상의 모든 변화와 운동이 이 부동의 우너동자에서 비롯한다고 보았다. 신은 순수한 현실태로만 존재한다고 덧붙였다. 변하지 않으니 가능태를 함축하지 않으며 신은 질료가 없고 물질적인 존재가 아니다. 신이 순수현실태라는 말은 신이 어떤 종류의 활동을 한다는 말이다. 그리스인들이 신의 본성에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한 활동은 ‘사유’이다. 사유는 비신체적이고 가장 지성적인 활동이기 때문이다. (철학사 수업, 김주연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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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는 무의식이다.

라캉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적 관점을 수용하였으며  프로이트가 정신분석에서 주요 도구로 삼았던 성욕의 개념을 제외하고  소쉬르의 구조언어학을 더하였다. 프로이트가 발견한 것은 무의식이 의식에 의해 억압되어 있으나 의식처럼 모종의 판단 작용을 하고 의식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이었다. 소쉬르는 언어의 의미를 발화자가 부여하는 게 아니라 기호 자체의 소산이라고 하였다. 라캉은 이 두가지 입장을 종합해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 되어 있다.”라는 진단을 내린다. 이 말은 무의식이 체계적이라는 것과 더불어 언어 자체가 무의식이라는 것을 뜻한다. 의식적인 주체가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언어가 주체를 규정한다. “내가 말을 하는 게 아니라 말이 나를 통해 드러난다.”는 것이 라캉의 입장이다.

 

우리가 말한다는 것은 언어의 규칙에 따른다는 것이며, 언어의 규칙에 따른 다는 것은 우리가 만들지 않았고 언제나-이미 존재하는 언어 구조에 참여한다는 의미다. 단어와 문장을 선택하는 데 자유의 폭이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단어, 문장, 문법을 직접 만들어 쓰는 게 아니라 기존의 것을 가져다 조합할 수 있을 따름이다.

소쉬르에 따르면 기표(말)는 기의(말하는 사람의 의도)를 투명하게 전달 하기는 커녕 무관하다. 기표가 기의를 반영해 의미를 나타내는 게 아니라 다른 기표들과의 관계에 의해 의미가 결정된다. 언어 구조가 무의식적이기 때문에 이런 기표의 힘은 무의식적으로 작용한다. 라캉은 기표가 가진 강력한 힘, 제약, 강제성을 가리켜 기표의 물질성이라고 부른다. 우리의 말은 물질적 힘을 가진 기표의 규칙에 종속되고 예속되어 있다.

무의식이 거의 배제되고 확실하게 의식적인 언어도 있다. 법조문과 같이 특정한 메시지를 최대한 객관적으로 전달하는 데 주력하는 언어는 비록 기존의 언어 규칙에 종속되더라도 무의식성이 휠씬 덜하다. 이런 경우에는 언어가 의도를 전달하는 수단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식으로 전달될 수 있는 것은 지극히 단순한 의도밖에 없다. 의식적 언어의 기표는 의미가 고정되어 있으므로 기표 특유의 창조성이 제한된다. 이런 언어는 인간의 언어라기 보다 동물의 몸짓이나 거의 다를 바 없다.

그에 비해 무의식은 사회적 약속에서 비롯되는 기표의 현실적 의미를 고려하지않기 때문에 언어 구조의 속박을 받지 않는다. 그래서 기표와 자유로이 어울려 무의식 특유의 은밀한 의미를 낳는다. 기표의 창조성이 무한정 발휘되는 언어는 바로 시다. 시는 무의식적 기표의 의미와 시인이 의식적으로 부여한 의미가 조화된 결과로 탄생한다.

욕망마자 빼앗긴 주체

소쉬르는 기표와 기의가 무관하다고 말했지만 그것은 낱말과 지시체의 관계를 가리키는 것일 뿐 언어 본래의 기능, 즉 의사 소통의 영역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소쉬르는 의사소통에서 기표와 기의의 일치가 가능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라캉은 기표와 기의 사이에 근본적인 단절이 있다고 본다. 바꿔 말해 언어는 말하는 사람의 의도를 결코 완벽하게 표현하거나 전달할 수 없다. 프로이트는 꿈이나 실수를 통해 무의식의 징후(기표)을 읽을 수 있다고 여겼으나, 라캉은 그 무의식의 억압, 변형 때로는 날조되어 있는 탓에 기의를 온전히 나타내지 못한다고 본다.

기표와 기의 사이에 단단한 장벽이 있다면 언어의 기능은 마비된다. 다행히 그 장벽은 성긴 울타리와 같아서 분열된 기표와 기의가 만나는 것을 간헐적으로 허용한다. 하지만 말끔한 만남이 아닌지라 그 만남은 접착제로 붙인 것처럼 찰싹 달라 붙지 못하고 끊임 없이 겉돈다. 이런 현상을 라캉은 “기표가 기의 위에서 미끄러진다”라고 말한다. 일시적으로 기표와 기의가 제대로 된 만남을 가질때가 있는 데 라캉은 이 순간을 ‘카피통(의자의 쿠션을 고정하는 장치)’이라고 표현한다. 말과 세계가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는 순간이다.

언어를 알기 이전 유아는 기표 자체를 모르기 때문에 기표의 방해를 받지 않고 기의와 일체화 되어 있다. 유아는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처음으로 자아를 의식하며 이세상에 자기 혼자만 존재하는 것으로 여기는 상상계에 머물고 있다. 아이가 말을 배우고 상상계에서 벗어나면 언어의 세계, 즉 상징계로 들어가게 된다. 상징계로 들어가면 하나의 인간으로 개체성(개성)을 부여 받는 혜택을 누리게 되지만 - 이름이 그 징표다 - 그 대가는 혹독하다. 자아와 주체가 형성되었으되 그 자아와 주체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기표다. 따라서 주체는 결코 주체적이지 않다. 주체는 기표의 물질성에서 나오는 강제성에 복종해야 하며, 기표의 장벽 때문에 기의로 부터 멀어지고 실재로 소외된다. 그와 동시에 본능적 욕구가 언어로 번역되면서 욕망이 된다. 이 욕망은 갈증이나 배고픔 같은 ‘욕구’와 다르고 욕망의 의식적 표현인 ‘요구’와도 구분된다. “욕망은 요구가 욕구로부터 분리되는 지점에서 형태를 취하기 시작한다.” 라캉에 따르면 욕망은 근원적 결핍이다.

유아 시절의 본능적 욕구는 쉽게 충족시킬 수 있었지만 이제 욕망은 언어의 세계에서 언어의 제약을 받으므로 결핍에 직접 다가갈 수 없다. 그래서 욕망은 끝없는 환유를 시도한다. 결핍을 메워줄 대상으로 하나의 기표를 점찍지만 이내 그것을 부정하고 다시 다른 기표를 찾는다. 물론 그 시도는 계속 실패한다. 마치 기표가 기의에 고착되지 못하고 미끄러짐을 반복하듯이(사르트르의 실존철학에서 대자존재가 무근거성을 해소하기 위해 끊임없이 대상을 사냥하지만 늘 실패하는 것과 비슷하다) “결국 그 과정에서 지쳐 욕망은 궁극적으로 스스로의 욕망이 되어 버린다. … 욕망은 욕망의 욕망이며 타자의 욕망이다.” 여기서 타자란 사르트르가 말하는것과 같은 ‘타인’의 의미가 아니라 강력한 물질성으로 주체를 예속시키는 기표를 가리킨다. 주체가 사용하는 언어는 주체의 의도를 담지 못하고 주체가 가진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 된다. 언어와 욕망은 무의식이므로 주체의 무의식은 곧 주체 안의 타자가 규정하고 통제한다. 그래서 라캉은 “무의식은 타자의 담론이며 타자의 욕망”이라고 말한다.(p.570, 혼자 공부하는 이들을 위한 최소한의 지식: 철학)

타자의 담론 

라캉은 무의식을 간단히 ‘타자의 담론’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라캉은 소타자(little other)와 대문자화된 대타자(big Other)를 구분할 것을 강조한다. 소문자로 된 타자는 항상 상상계의 타자들을 가리킨다. 우리는 이 타자들을 통일되고 통합되고 일관된 자아들로 간주하고 그들은 우리 자신의 반영들로서 우리에게 완전히 통일된 존재가 된 듯한 느낌을 제공한다. 이것은 거울단계에서 유아가 자신의 욕망을 완전히 충족시켜 줄 것으로 가정하는 타자이다. 동시에 유아는 자신을 타자의 유일한 욕망의 대상으로 간주한다. 반면 대타자는 우리가 우리의 주체성 안으로 동화시킬 수 없는 절대적 타자성이다. 대타자는 상징계이다. 그것은 외국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우리는 그 안에서 태어나면서 자신의 욕망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말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것은 또한 우리를 둘러싼 사람들의 담론이자 그들의 욕망이며 우리는 이것을 통하여 우리 자신의 욕망을 내재화하고 변형시킨다. 우리의 욕망이 항상 타자의 욕망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타자의 무의식적인 욕망과 소원들은 언어 -담론-을 통해 우리들 안으로 유입 되며 그렇기 때문에 욕망은 항상 언어에 의해 형상화 되고 주조된다. 우리의 욕망은 우리가 가진 언어를 통해서만 표현될 수 있으며 우리는 타자들을 통하여 그 언어를 배워야만 한다. 그러므로 무의식적 욕망은 대타자-상징계-와의 관계 속에서 나타난다. 우리가 타자의 언어와 욕망을 통해서 우리의 욕망을 말할 수밖에 없는 이상 무의식은 타자의 담론이다. 핑크에 의하면 ‘무의식 안에는 그러한 낯선 욕망들이 가득하다고 말 할 수 있다.”

타자의 욕망의 수수께끼를 대면한 주체는 이 욕망을 말로 표현하고자 노력하고 이후 타자의 영역에서 기표들과 동일시 함으로써 자신을 구성하지만, 결코 주체와 타자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데는 성공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기표에서 기표로의 끊임없는 움직임 속에서 주체는 나타나고 사라짐을 반복한다.(p.119, 라캉읽기)

 

 

* 남경태의 <혼자 공부하는 이들을 위한 최소한의 지식: 철학>을 읽던 중 “욕망은 궁극적으로 스스로의 욕망이 되어 버린다. … 욕망은 욕망의 욕망이며 타자의 욕망이다. 여기서 타자란 사르트르가 말하는것과 같은 ‘타인’의 의미가 아니라 강력한 물질성으로 주체를 예속시키는 기표를 가리킨다." 나는 타자를 타인으로 읽었다. 타자가 기표를 가리킨다면 기표의 욕망 즉 상징계의 욕망이다.  타자의 의미가 이 문장에서만 기표를 의미하지는 ?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에서는 타자가 타인을 의미하는지 질문을 던지고 자료를 찾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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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길이 나를 찾아왔다.

 

 

그렇게 시작됐다. 나의 유랑길은.

 

한 시대의 끝간 데까지 온몸을 던져 살아온 나는, 

슬프게도 길을 잃어버렸다. 나는 이 체제의 경계 밖으로 

나를 추방시켜, 거슬러 오르며 길을 찾아 나서야 했다.

‘앞선 과거’로 돌아 나오고자 하는 기나긴 유랑길이었다. 

 

오래된 만년필과 낡은 흑백 필름 카메라 하나를 들고 

내가 가 닿을 수 있는 지상의 가장 멀고 높은 깊은 마을과 

사람들 속을 걸었다. 내가 찾아간 마을들은 

공식 지도에 없는 곳이 대부분 이었다. 

현장에서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길을 잃어버리곤 했다. 

 

이세계의 지도가 선명하고 첨단일수록 길은 하나뿐인 길.

그렇게 오래되고 다양한 삶의 길들은 

무서운 속도로 잊혀지고 삭제돼가고 있었다. 

어느 아침 나는 지도를 던져 버렸다. 

차라리 간절한 내 마음속의 ‘별의 지도’를 더듬어 가기로 했다.

 

막막함과 불안과 떨림의 날들. 난 모른다.  언제였는지.

어디서 왔는지, 어떻게 왔는지 나는 모른다. 

길을 잃어버리자, 그 길이 나를 찾아 왔다.

아주 오래 전부터 누군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길에서 만난 그 땅의 사람들이

나의 살아있는 지도였고 나의 길라잡이였다. 

 

눈부시게 진보하는 세계와 멀어져 사람들 눈에 띄지도 않는

헌난한 곳에서 자급자족의 삶을 이어온 전통마을 토박이들.

자신이 무슨 위대한 일을 하는지 의식하지도 않고 

인정받으려고 하지도 않고, 인류를 먹여 살릴 한 뼘의 대지를 

늘려가고자 오늘도 가파른 땅을 일구어 가는 개척자들 

 

인간이기에 ‘어찌할 수 없음’의 주어진 한계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인간으로서 ‘어찌할 수 있음’의 가능성에 

최선을 다해 분투하면서, 우리의 삶은 ‘이만하면 넉넉하다’며

감사와 우애로 서로 기대어 사는 사람들.

 

역사에도 기록되지 않고 마치 한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들처럼 잊혀지고 무시되고 있지만, 이들이야말로 

구누구보다 이 세상 깊숙이 자리르 차지하고 있다. 

이들이야말로 이세게를 떠받치고 있는 

지구인류 시대의 진정한 ‘삶의 전위’이다

어느날 이들이 사라지고 나면 우리 삶의 지경과 

인간 정신은 단번에 그만큼 줄어들고 숨 막혀 오리라 

 

역사상 가장 풍요롭고 똑똑하고 편리해진 시대에

스스로 할 수 있는 인간 능력을 잃어버리고 모든 걸 돈으로 

살 수밖에 없는 무력해진 세계에서, 그들은 내안에

처음부터 있었지만 어느 순간 잃어버린 나 자신의 모습이다 .

 

조용한 시간, 내 마음 깊은 곳의 소리를 듣는다. 

‘지금 이대로 괜찮은 걸까 ?’ ‘나 어떻게 살아야 하나’

 

나는 실패투성이 인간이고 앞으로도 패배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겠지만, 내가 정의하는 실패는 단 하나다.

인생에서 진정한 나를 찾아 살지 못하는 것!

진정으로 나를 살지 못했다는 두려움에 비하면

죽음의 두려움조차 아무것도 아니다. 

 

나에게 분명 나만의 다른 길이 있다. 

그것을 잠시 잊어버렸을지언정 아주 잃어버린 것은 아니다.

지금 이대로 괜찮지 않을 때, 지금 이 길이 아니라는 게 

분명해질 때, 바로 그때, 다른 길이 나를 찾아 온다

길을 찾아 나선 자에게만 그길은 나를 향해 마주 걸어 온다

 

나는 알고 있다. 간절하게 길을 찾는 사람은 이미

그마음속에 자신만의 별의 지도가 빛나고 있음을.

나는 믿는다. 진정한 나를 찾아 좋은 삶 쪽으로 

나아가려는 사람에게는 분명, 다른 길이 있다. 

 

‘무력한 사랑’의 발바닥 하나로 써온 이 유랑노트가, 

그대 삶이 흔들릴 때마다 작은 위로와 용기가 되어주기를.

이미 오래 전부터 그대를 초대해온 그이들과 함께 

내마음의 순례길을 걸어가 보자. 

 

한 걸음 다른 길로. 한 걸음 나에게로 

 

                                                           박노해 (다른길,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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