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고성 출장 중 휴대폰으로 주위 풍경을 담았다. 목적지로 이동 중 우연히 마주친 풍경들이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학창시절 수행여행 갔을때 숙소였던 속초 설악동 숙박시설들이 대부분 문을 닫았다. 일부 건물은 흉물스럽게 변해 있었다.  설악동의 옛 영광을 살리 겠다고 하시는 숙소 주인장을 만났다.  은퇴 후 제 2인생을 준비하고 계셨다. 이른 아침 설악동 숙소에서 설악산 국립공원 사무실 까지 산책을 하였다. 계곡 물흐르는 소리가 리듬을 타고 고요한 아침산의 정적을 깨고 있었다.    

 

 

등대에서 바라본 양양 물치항

 

물치항 방파제에서

 

 

방파제에서 바라본 모습

 

 

속초 청초호

 

 

설악동 청봉교

 

설악동

 

설악동 숙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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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과 머리를 구별하는 것에서 얼굴에 대한 개념은 시작합니다.  머리는 신체의 일부이지만 얼굴은 신체가 아니라 그 표면이고 그 표면에 세겨진 표정입니다. 신체의 상태를 표현하기도 하지만 그 이상으로 얼굴과 마주한 누군가를 향해 무언가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기호입니다. 그런 점에서 얼굴은 신체로 부터 탈 영토화 되어 비신체적 표현기계가 될 때 탄생합니다. 얼굴은 그 자체로 기호이지만 또한 입에서 나가는 말들 손으로 쓰는 문자가 실질적으로 요구하는 것을 표시하는 기호이기도 합니다. 기호에 실려가는 잉여성으로서의 명령어를 표시하는 기계, 그것이 얼굴이라는 표현기계입니다. 언어적 기호처럼 그 자체로 의미가 없는 자의적 기표들은 얼굴을 통해 얼굴에 재영토화 됨으로써 비로서 의미화 됩니다.  또한 얼굴은 마주한 얼굴에게 공감 내지 공명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부르고 답하는 주체화가 얼굴을 통해 이루어지는 겁니다. 

얼굴은 정치다. 얼굴성에 대한 들뢰즈 가타리의 생각을 요약해주는 것이 될 이 명제는 얼굴에 대한 우리의 통념을 깨는 단적인 문장일 겁니다. 동시에 얼굴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들은 곰곰히 생각해보면 쉽게 수긍할 수 있는 문장이기도 합니다. 의미화나 주체화를 요구하는 이런 저런 명령어를 발송하는 게 얼굴이니까요. 환한 얼굴이나, 찌푸린 얼굴, 슬픈 얼굴 서운한 얼굴, 모두 다 내게 특정한 감응을 요구하는 얼굴이지요.  사실 우리는 상대방이 무얼 원하는지를 알기 위해 눈치를 보기도 합니다.  주변의 얼굴들을 보면서 표정관리를 하기도 하죠. 노동자와 대면한 고용주 얼굴, 학생과 대면한 교사의 얼굴, 유권자와 대면한 정치인의 얼굴은 그 에 부합하는 얼굴을 요구합니다. 이렇게 얼굴들 사이에는 명령어들이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 나의 시선을 잡아주는  얼굴도 그렇습니다. 공명을 요구하고 응답을 요구하는 얼굴이죠. 얼굴을 통해 권력이 작동하고 있는 겁니다. 여기서 들뢰즈 가타리는 두 유형의 얼굴을 구별합니다. 앞 얼굴과 옆 얼굴이 그것입니다. 앞 얼굴은 이마와 볼이라는 여백을 갖는 둥그런 얼굴이고 눈과 입 눈썹 등으로 의미화하는 기호를 방사하는 얼굴입니다. 옆 얼굴은 다른 얼굴과 마주보며 부르고 답하는 얼굴 입니다. 주체와 상응하는 얼굴이죠. 물론 서로 외면하며 반대 방향으로 향한 옆 얼굴도 있습니다.  이  두유형의 얼굴이 섞이면서 의미화와 주체화의 양상이 표현됩니다. 얼굴은 의미와 주체화가 교차되는 지점에 있는 특수한 장치라는 말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입니다. 

머리는 신체를 움직이는 코드에 의해 작동하지만 얼굴은 신체의 의한 코드화가 정지되고 머리가 표정이라 불리는 어떤 것을  초코드화 될때 탄생합니다. 머리가 이처럼 얼굴이 되고 표현적 기호를 갖게 되면 이제 다른 신체 부위도 얼굴화 됩니다.  힘차게 치켜든 주먹, 가운데 손가락을 세운 손은 도구와 짝인 신체가 아니라 얼굴과 짝인 기호 입니다. 어깨가 구부러지도록 숙인 고개도,  두팔을 치켜든 상체도,  무릎 꿇은 다리도 그렇습니다. 얼굴이 머리를 넘어 신체 전체를 뒤덮은 겁니다. 

또한 얼굴은 신체를 덮은 옷으로 확장됩니다.  주머니와 단추, 어깨에 심은 뽕과 페인 허리성, 띠와 브로치는 신체적 기능을 보완하던 옷을 표정을 갖는 의상으로 바꿉니다. 머리에서 시작된 표면의 정복은 이제 모든 것의 신체의 표면으로 확장됩니다. 주전자나 자동차 집이나 건물 도시등 크고 작은 사물이 나름의 표정을 갖고 얼굴화 됩니다. 

사물의 얼굴화는 신체적 생존의 조건인 환경을 풍경으로 변화시킵니다. 즉 풍경이란 환경의 얼굴 혹은 얼굴화된 환경입니다. 역으로 미술이나 영화는 이제 얼굴을 풍경으로 다루게 됩니다. 탁월한 초상화는 그 인물의 얼굴을 그가 산 세계로 풍경화 합니다. 영화의 클로즈업은 얼굴의 풍경 그 자체가 되도록 함으로써 어떤 사건에 대한 그의 감응이나 감정을 장면화 합니다. 이런점에서 도구가 손의 상관자라면 풍경은 얼굴에 대한 상관자 자라고 하겠습니다. 다양한 신체의 얼굴화나 얼굴의 풍경화를 통해 확인 할 수 있는 것은 얼굴이 단지 인간의 얼굴로 제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건물이나 도시 혹은 사물의 표정을 인간적인 방식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들이 빈번하지만 인간의 얼굴은 결코 일반적인 지위를 갖지 않습니다. 인간의 얼굴은 수많은 얼굴의 한 부류 일 뿐입니다. 가령 자동차의 헤드라이트와  라디에이터 그릴에서 인간의 얼굴을 상기하기 쉽지만 그 것이 꼭 인간의 얼굴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유선형으로 늘씬하게 뻗은 차체는 인간아닌 새나 돌고레 신체를 참조하는 경우가 많고 권위적인 관료는 로봇을 연상하게 합니다. 

그런 참조나 연상을 이용할때 조차 실은 그것으로써 늘씬함이나 빠름 경쾌한 딱딱함 등의 감응을 표현하려는 것일 겁니다. 얼굴에는 심지어 절대적인 비인간적인 어떤 것이 있다 함은 이런 뜻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얼굴만 있는게 아니라 수많은 얼굴들이 있는 겁니다. 그렇게 상이한 얼굴들을 만들어 내는 추상기계가 있습니다. 

얼굴은 기호들의 잉여성이 명령어가 등록되는 흰벽과 주체화의 정념을 끌어 당기는 검은 구멍을 통해 작동합니다. 이마와 볼사이에 흰 벽위에 세겨지는 이런저런 표정은 입에서 나간 말의 실질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다시말해 원하는게 무엇인지를 표시합니다. 보는 이의 시선을 잡아 끄는 두개의 검은 구멍은 그 흰벽에 세겨지는  기호를 만들뿐 아니라 공감 하거나 공명하는 정념을 잡아 당깁니다. 

이렇게 흰벽과 검은 구멍의 조합을 통해 다양한 표정을 만들어 내지요. 그래서 그들은 구체적인 표정의 다양한 얼굴을 만들어 내는 흰 벽과 검은 구멍에 체계를 얼굴 성의 추상 기계라고 명령합니다. 얼굴성의 추상기계는 흰벽과 검은 구멍이 체결하고 있지만 이때  흰벽이란 기호가 세겨지는 일종의 서판  같은 것을 뜻합니다. 희다는 것은 비어 있음을 즉 기호가 세겨지기에 적절한 빈 여백을 뜻합니다. 이 서판의 색깔이 반드시 흰색일 이유는 없습니다. 사람의 얼굴이 모두 흰 것은 아니며 건물이나 옷, 사물의 흰벽 또한 모두 희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마치 그것이 기호를 세기는데 최선의 방책인양 흰색을 특권하게 될 때 희다라는 말은 특정 색을 지칭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특정한 색깔이 그런 세계에 대한 선호가 마치 얼굴 자체의 척도라도 되는 양 간주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흰벽의 정도가 좋은 얼굴에 정도를 표시하는 것으로 간주되면서 얼굴 색깔의 위계가 만들어 지게 됩니다. 얼굴성의 추상기계가 넓은 흰 뺨과 눈에 검은 구멍을 가진 백인 그 자체가 된것은 이 때문입니다.

여기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은 바로 예수의 얼굴입니다. 알다시피 신이나 성인의 얼굴은 어디서나 그 성인을 떠받드는 사람들,  자신의 모습을 바탕으로 만들어 집니다. 가령 흑인들의 신이나 성인이 흰 얼굴을 하고 있을리 없습니다. 직접보고 그린 당대의 조각이나 초상조차 없기에 누구도 알리 없는 예수의 얼굴이 지금의 형태로 그려진 건 르네상스 시대였습니다. 그것은 그걸 그린 당시의 유럽의 백인 남성들의 평균적인 얼굴을 통해 발명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예수의 얼굴이 됨에 따라 이제 그렇게 생긴 얼굴이 성인의 얼굴, 본 받아야할 얼굴 한마디로 좋은 얼굴이 되게 됩니다. 척도적인 얼굴의 자리를 차지하는 겁니다. 그 얼굴을 척도로 하여 그로 부터 멀어지는 정도에 따라 차별의 정도가 작동하는 위계화된 인종주의가 이로부터 탄생합니다. 피부색뿐만아니라 눈과 코의 모양 등이 선호와 차별의 대상이 됩니다. 

인종주의는 백인 남자의 얼굴을 기준으로 이탈의 편차를 결정함으로써 작동한다고 하는 이런 의미에서 입니다. 즉 인종주의는 백인 자신의 얼굴에 보편성을 부여하는 이러한 선별적 척도의 산물이란 것입니다. 흰뺨을 모델로 하는 이 척도적 얼굴의 자의성은 사실 검은 구멍의 눈에서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검은 구멍에 검다도 실은 특정 색깔이 아니라 정념이나 시선을 잡아 당기는 어트렉터를 뜻하죠. 그러나 이 역시 흰벽처럼 특정 색깔의 눈을 지칭할 수 있죠. 하지만 희지 않은 뺨이 흰정도에 따라 위계화되는 것과 달리 검지 않은 눈은 검은색의 정도에 따라 위계가 되지 않습니다. 유럽인 자신의 눈이 검지 않기 때문이죠.

요컨데 유럽의 백인 남성들이 자기 얼굴로 예수의 얼굴을 만들고  예수의 그 얼굴을 좋은 얼굴의 척도로 삼는 자기 민족 중심적인 순환론이 거기에 있습니다. 백인 남자 얼굴에 보편적인 척도의 지위를 부여하고 그것을 통해 모든 얼굴에 선별과 등급화를 가동 시키는 겁니다. 이로써 흰벽과 검은 구멍의 체계인 얼굴성의 추상기계가 흰색을 특권화하는 인종주의적 추상기계가 되고 맙니다. 

앞서 우리는 명령어를 방사하는 얼굴에서 권력을 보았지만 척도가 되어 선별과 위계가 차별의 힘을 행사하는 이 얼굴에서 우리는 얼굴의 또 다른 권력, 얼굴성의 추상기계가 행사하는 또 다른 권력을 보게 됩니다.  얼굴은 정치다라는 명제는 이 또한 함축되어 있다 하겠습니다. 얼굴성의 추상기계는 두가지 방식으로 얼굴성의 권력을 가동시킵니다. 하나는 원소적 얼굴,  다른 하나는 선별 입니다. 먼저 원소적 얼굴이란 특정한 관계내지 배치안에서 준거가 되는 얼굴입니다. 아버지와 자식의 얼굴, 사장과 노동자의 얼굴, 경찰과 용의자의 얼굴, 어른과 아이의 얼굴 등  얼굴의 양식을 형성하는 표준적인 얼굴입니다. 이를 척도로 삼아 좋은 얼굴과 나쁜 얼굴, 허용되는 얼굴과 그렇지 않은 얼굴이 구별되고 선별됩니다. 아니 아버지 앞에서 어떻게 그런 얼굴을, 아니 아이 얼굴을 이따위로 그릴 수 있지, 당신은 경찰 같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네요. 

물론 인간의 얼굴, 아시아인의 얼굴 등도 마찬가지 입니다. 표준에서 벗어나는 정도에 따라 좋고 나쁨의 정도가 배열됩니다. 피부 색의 정도에 따라 인간의 얼굴에서 몇 번째 얼굴인지,양순한 표정의 정도에 따라 뻔뻔함의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가 정해집니다. 그 정도에 따라 가능한 얼굴의 범위가 증식됩니다.

물론 가운데 있는 척도적 얼굴을 향해 얼굴을 동일화 시키려는 권력의 벡터가 그와 반대 방향으로 작동합니다. 얼굴성의 추상기계의 작동 양상을 보여주는 추상기계의 변형들을 들뢰즈 가타리는 극한적 얼굴로 정의합니다. 이는 원소적 얼굴과 선별을 통해 구성되는 혼성적인 얼굴들입니다. 이는 상이한 배치들을 넘나 들며 작동하는 기계 입니다. 먼저 의미화가 주도하는 앞 얼굴에 추상기계들이 있습니다. 일단 흰벽과 검은 구멍만으로 이루어진 단순한 추상기계가 있습니다. 다음으로 편차를 통해 그어지는 경계선들로 확장되는 다중적 경계를 갖는 추상기기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장과 노동자 교사와 학생처럼 짝을 갖는 얼굴이라면 의미화와 주체화가 동시에 작동하겠지요. 이는 기호를 방사하는 두눈과 그의 공명하는 두눈의 짝으로 이루어집니다. 한쌍의 앞 얼굴이 마주보며 공명하는 얼굴기계인데 그 두 얼굴 간 적절한 표정의 정도에 따라 복수의 경계선들이 만들어 집니다. 네 개의 눈을 갖는 기계가 그겁니다. 학교, 집, 회사, 경찰서 등 구체적인 조건에 따라 척도에 부합하는 얼굴들이 이 추상기계를 통해 생산됩니다. 서로 연관된 얼굴이 늘어나면 더 많은 눈들이 그에 따라 늘어나게 되겠지요. 들뢰즈 가타리는 대조와도 같은 흰벽에 기호를 기입하는 이런 추상기계들을 대지의 기표적 전제적 얼굴들이라고 명명합니다. 

다른 한편 주체화의 옆 얼굴은 되게 마주보는 두 얼굴을 짝으로 갖지요. 트리스탄 이졸데 처럼 서로 부르고 답하며 검은 구멍으로 끌려들어가는 커플 기계는 검은 구멍을 향한 하나이자 둘인 선을 따라 작동합니다.  주체화 체제와 상응하는 옆 얼굴이 검은 구멍에 끌려가는 양상을 표현하는 추상기계 또한 공명하는 인물들의 수에 따라 공명을 위로하는 성분들의 수에 따라 증식됩니다. 공명을 촉발하는 음악 풍경 얼굴 의식 회화 등이 더해짐에 따라 그 선들은 증식되고 중첩되며 작동합니다. 

하지만 코키토의 주체화 즉 생각하는 나는 존재하는 나 라는 등식을 통해 작동하는 주체화는 그 처럼 마주보는 짝을 갖지 않습니다. 짝없이 고립된 하나의 얼굴이란 점에서 독신자 기계라 명명되는 주체화의 추상기계는 하나의 옆 얼굴이 나라는 자아내면의 검은 구멍에 빨려 들어가는 양상으로 작동합니다.  

얼굴에 대한 사유를 앞서 제시했던 것은 사르트르의 현상학이었습니다. 그는 눈과 구별되는 응시, 지향성이 담긴 시선인 응시를 통해 어떤 즉자적 존재가 나에 대한 존재가 됨을 지적합니다. 그때 그의 머리에서 나는 그의 얼굴을 보게 됩니다. 응시와 지향성이 얼굴을 만들어 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들뢰즈 가타리는 응시는 응시하지 않은 눈과의 관계에서 즉 얼굴성의 검은 구멍과의 관계에서 이차적일 뿐이라고 비판합니다. 

응시하지 않으려고 해도 무심고 지나쳤다 해도 누군가 소리치며 시선을 잡아 당길때 검은 구멍이 응시보다 일차적임을 확인할 수 있죠. 눈군가를 꽃이라고 부르며 달려가지만 내가 부여한 그 의미를 거부하고 스토커라고 밀쳐내며 현상학적 지향성 바깥으로 도망가는 얼굴도 있습니다. 다른 한편 라깡은 거울상을 통해 부분 대상들을 하나의 유기체로 통합하는 상상적 동일시를 강조하지만 우리는 동일시를 명령하는 얼굴에 권력이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동일시란 흰벽에 쓰여진 명령어를 받아들이는 행위의 반복을 통해 습속이 된 주체화의 결과일 뿐입니다. 거울은 얼굴성의 흰벽과의 관계에서 이차적일 뿐이라는 말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입니다. 덧붙이자면 레비나스는 고통받는 얼굴이야말로 주체의 생각이나 감각 바깥에 존재하는 타자라고 하지만 고통받는 얼굴만이 타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차라리 찡그린 얼굴, 화난 얼굴,  엄격한 얼굴이 그보다 더 빈번하고 일상적인 타자라고 해야 합니다. 아니 실은 고통받는 얼굴 또한 연민과 공명을 요구하는 얼굴입니다. 

의미화와 주체화의 명령어를 방사하는 얼굴이죠. 타자를 향해 주체 자신을 초월하는 윤리학은 내의지 바깥에서 오는 명령하는 권력, 연민이나 동일 시 마저 명령하는 권력의 작용이  있다 하겠습니다.  얼굴의 문제가 도덕이나 윤리학이 아닌 정치학의 대상이 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 입니다. 머리와 얼굴 사이에 생물학적 진화나 도덕적 우열 같은 것은 없습니다. 얼굴은 자의적 기표들로 발송되는 명령어의 전달과 상관적인 특정한 배치의 산물입니다. 의미화와 주체화를 강요하는 것은 특정한 권력의 배치이고 그런 배치를 갖는 특정한 사회 구성체 만이 얼굴과 풍경을 필요로 한다는 겁니다. 따라서 배치가 달라지고 사회구성체가 다른 종류의 사회구성체로 이해한다면 얼굴은 명령어를 방사하는 권력 장치의 길을 중지할 수 있습니다. 들뢰즈 가타리는 진정한 탈 얼굴화를 가동 시키면서 탐사적 머리를 해방시켜 의미화의 벽을 돌파하고 주체성의 구멍에서 솟구쳐 오르며 풍경을 통해 지층들을 해체하고 진정한 리좀을 위해 나무를 잘라 버리며 긍정적 탈 영토화 내지 창조적 탈주선을 그리자고 제안합니다. 이 제안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가는 사실 애매합니다. 그것은 차라리 얼굴의 정치학을 통해서 얼굴과 머리에 대한 새로운 사유를 가동시키기위한 물음이라고 하겠습니다.  

 

 

 

 


흐름 자체는 우리의 포착을 언제나 넘어선다는 점에서 카오스 입니다. 카오스 속에서 살기에 우리는 모든 것을 지층화 합니다. 지층은 흐름의 분절에 의해 구성됩니다. 우리의 삶과 관련해 들로즈 가타리는 세가지 중요한 지층이 있다고 합니다. 의미화, 주체화, 유기체화의 지층이 그것입니다. 천의 고원 에서 언어학의 공준들이 의미화와 관련되어 있다면 어떻게 기관없는 신체를 만들 것인가는 유기체화와 그리고 몇 가지 기호체제들과 의미화 및 주체화와 관련된 고원이라 하겠습니다. 이 세지층들은 그것 없이는 삶이 가능하지 않다는 점에서 삶의 지반이 되는 지층이지만 지층의 고유한 분절 방식대로 살게 한다는 점에서 삶을 보유한 지층입니다. 따라서 다른 삶을 만들고자 한다면 이 세지층에서 탈 지층화 운동을 시도해야 합니다. 비록 그것이 또다른 지층으로 이행하는 것이 될지라도 말입니다. 여기에 모든 지층에는 지층화된 분절에서 이탈하는 방향의 추상 기계가 작동할 수 있음을 덧붙여야 합니다. 

기호계는 라캉의 상징계라는 말을 겨냥한 개념인데 기호체제와 거의 동일한 말로 사용됩니다. 기호체제는 체제라는 말 그대로 기호들이 권력이 작동하는 체제로 조직되어 있음을 명시 하려는 개념입니다. 언어학적 전이 이후에 이론적 통념에 따르면 우리는 언어로 항상 이미  질서화된 의미 체계안에서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우리의 생각은 언어를 통해 이루어지고 언어를 사용하려면 이미 조직된 언어들의 질서 기표들의 의미와 규칙에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해 라는 말이 상투적이라 피하고 싶어서 마미추라고 말해봥야 못 알아 듣기에 서로 아는 기호 기존의 의무화 규칙에 따라야 합니다.라캉은 이를 기표의 물질성이라 합니다 . 기표들은 우리의 사고와 행동을 제약하고 강제하는 물질적 힘을 갖는다는 말입니다. 강하게 말해 언어의 감옥에 갖혀 있는 거죠. 기호들이 하나의 체제를 이루고 있다함은 그것이 이처럼 강제력을 행사하는 체계임을 표현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기호체제 개념이 언어학적 패러다임이나 라캉의 상징계 개념과 유사한 점은 여기까지 입니다. 먼저 랑그의 단일성이나 오이디푸스적 관계의 보편성을 상징하는 라캉의 상징계와 달리 기호체제는 단일하지도 않고 보편적이지도 않습니다. 여러가지 유형의 기호체제들이 있고 한 유형안에도 복수의 아니 수많은 기호체제들이 있습니다. 나아가 하나의 언어가 아니라 수많은 언어들이 있다는게 들뢰즈 가타리의 생각입니다. 다음으로 기호들의 의미화는 단지 기표들만으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비신체적 기호들은 상관적인 신체와 함께 작동합니다. 어조라는 음성적 성분 표정이나 몸짓 리듬과 춤같은 신체적 성분 법정 이나 감옥들의 기계적 성분 국가나 도시 수렵민의 숲이나 유목민의 초원들이 그것입니다. 따라서 의미화를 다룰때 조차 기표의 형식이나 체제에 유난스러운 특권을 부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세번째 다시보겠지만 주체가 되는 것도 단지 상상적 동일시를 통해서만은 아닙니다. 트리스탄 이졸데 트리스탄 이졸데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서로에게 말려들어가는 커플들은 정념에 끌려 주체화 됩니다. 

천의 고원에서 들뢰즈 가타리는 네가지 유형의 기호체제에 대해 언급합니다. 1) 의미화하는 기표들에 의해 주도되는 기표적 체제, 2) 몸짓,  춤, 리듬 등 '자연적' 기호들이 음석적 기호들과 공존하며 경쟁하는 전기표적 체제, 3) 의미 없는 기호를 사용하거나 기호의 의미를 지워버린 기호들을 통해 작동하는 반기표적 체제, 4) 그리고 의미화하는 중심적 기호들을 배신하며 시작되는 탈기표적 체제가 그것입니다. 

기표적 체제는 하나의 일반 공식을 갖는다고 합니다. 기호는 다른 기호로 소급되며, 무한히 소급될 뿐이다가 그것입니다. 소쉬르는 언어라는  기호가 지시체와 무관하다는 점에서 자의적이라고 강조한바 있습니다. 가령 귀가 아주 긴 저 동물을 토끼라고 해야할 이유는 없으며 '두라',  '밀론'이라 해도 괜찮습니다. 다만  일단 토끼라고 하기 시작하면 토끼라고 해야만 알아 듣습니다. 기호가 자의적 이기에 더 그렇습니다. 그래서 기호는 사회적 규약이 되고  강제성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만약 한국어를 잘 모르는 이가 토끼가 뭐냐고 물으면 귀가 아주 길고 뒷다리로 땅을 차며 뛰는 동물 이라는 식으로 말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다시 묻게 될 겁니다. 귀가 뭐냐고  길고 그리고 뒷다리가 뭐냐고  그럼 다시 다른 기호로 설명해야 합니다. 그건 또다시 다른 기호로 이는 무한히 이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한 기호에서 다른 기호로의 무한 소급이 발생하는 거죠 기표는 기호로 넘쳐 흐르는 기호란 말은 이런 의미 입니다. 하나의 기표가 다른 기표로 이어지는 기호의 사슬들이 존재한다 하겠습니다.  

그런데 기표적인 기호들은 하나의 랑그에 머물지 않습니다. 어떤 기호 사슬에 속해 있는가에 따라 어떤 기호로 소급되는 가에 따라 동일한 기호도 다른 의미를 갖게 됩니다. 토끼라는 기호가 거북이 경쟁 등과 같은 기호로 소급될때 의미는 제약회사 피부 민감성 실험 등과 같은 기호로 소급될때와 달라질 겁니다  민족이란 단어도 생물학 인종 진화 등의 기호로 소급될때 의미와 제국주의 식민지 침략 해방 등의 기호로 소급 될때 의미는 달라지지요.  다른 기호를 통해 기호를 의미화 하는 체제이니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기호들을 통해 기호들을 의미화할때 의미와 전체를 방향짓고 연결된 기호들의 사슬들  전반에 의미를 규정하는 특권적 기호가 있기 마련입니다. 가령 민족주의와 결부된 말들이라면 민족이,  정신분석과 관련된 이야기라면 남근이, 생물학이나 생택학적 담론이라면 생명 같은 것이 그것이겠지요 

관련된 다른 기호들은 모두 이 기호에 탯줄을 되고 있으며 그 기호들의 의미는 이 기호로 수렴됩니다. 달라 보이지만 실은 유사한 기호의 사슬들이 이 기호를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고 있습니다.  들뢰즈 가타리는 이처럼 의미화의 중심에 있는 이 특권적 기호를 대문자 기표, 지고한 기표라 하는데  전제 군주의 얼굴 혹은 신의 얼굴과 상응한다고 합니다.  한 기호가 다른 기호로 소급된다고 했지만  그러한 소급은 결국 전제 군주의 기표로 언제나 귀착 되기 마련 입니다. 가령 정신 분석에서 이러 저런 증상들은 트라우마를 거쳐 아버지 어머니 오이디프스로 결국은 남근으로 소급됩니다. 혹은 어머니를 거쳐 결여 그 결여를 메우는 욕망의 대표인 남근으로 귀착 됩니다. 라캉처럼 큰 타자를 말하고 타자의 욕망을 말해도 결국은 동일한 지점으로 귀착됩니다. 역으로 큰 타자든  결여든 오이디푸스든 무얼 말해도 그 기호의 의미는 결국 하나아고 모두 남근의 등과물입니다.  민족을 중심에 두고 있는 기호들의 원환도 그렇습니다. 민족이든  역사든 침략이든 사명이든 억압이든 해방이든 모든 기호는 민족이란 말에 등가물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기표적 기호체제는 모든 기호가 오직 하나의 기호로 귀착된다는 점에서 편집증적이고 전제군주적 기호체제라고 합니다. 물론 상황에 따라 새로운 기호를 추가하거나 다른 기호들의 사슬로 바꾸기도 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는 되게 중심에 자리잡은 특권적 기표를 새로운 기호로 해석해주는 일에 불과 합니다. 이런 해석의 사제들은 전제군주 기표의 관리들이죠. 아주 달라 보이는 기호들이 사실상 하나의 기호의 대체물이란 점에서 이체제는 속임수의 체제입니다 계속  추가된  해석이란 속임수의 제안에서 의미화의 동심원들을 추가하는 것에 불과 합니다. 그 자체로는 의미없는 이 기호들이 겹겹의 사슬을 이루며 의미화를 작동하게 하는 실체는 전제 군주의 얼굴입니다.  얼굴에 의해 기표들은 의미화 됩니다. 반면 이러한 의미화에서 벗어나는 자는 전제 군주의 얼굴을 외면하는 자입니다. 기표적 체제는 이런 자들에게 사형수 내지 속죄양이라는 부정적 가치를 부여합니다. 얼굴을 돌린자를 얼굴이 지워진 자로 만드는 겁니다.  

전 기표적 체제의 기호들은 몸짓이나 리듬 감탄사나 비명소리 그림문자 등 자연적 코드에 따른 것이기에 되게는 별다른 설명없이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다른 기표들로 소급되며 의미화 되는 기표적 체제와 대비 됩니다. 보고 들으면 즉각적으로 알아들을 가능성이 크지만 이 역시 문화적으로 구성된 것이기에 그저 자연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또 웃음이나 눈물 손을 지켜드는 것은 의미가 명확해 보이지만 실은 상황이나 성격에 따라 적잖이 다른 의미를 갖습니다. 또 분노를 표현하는 몸짓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지요. 일부 야만인들의 시기는 상징적 의미를 갖는 행위이니 전기표적 기호로 할 수 있겠는데 그기호의 의미는 부족에 따라 크게 다릅니다. 그래서 전기표적 기호는 다의성과 이질성을 갖습니다. 이는 기표에 의한 권력의 장악을 피하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달라보이는 기호도 사실은 하나인 기표적 체제와 달리 비슷해 보이는 것도 다를 수 있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반기표적 기효체제에서 가장 흔히 사용하는 것은 번호적 기호 입니다. 이때 번호는 수지만 순서와 단위 원을  갖는 계산 가능한 수가 아닙니다. 흔히 명목수라고 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축구 선수의 등번호 또는 8사단 6대대 같은 군대의 번호가 그런 경우이지요 군대의 이러한 기호는 십호대 백호대 천호대 등으로 조직화하여 이름을 붙이는 유목민의 번호적 조직을 국가 장치가 영유한 것입니다. 이 번호적 기호는 계산되는 수는 아니지만 전혀 그런 것만도 아닙니다. 십호대 열개면 백호대 하나가 되고 8개 중대 2개 사단 등 처럼 수를 세고 크기도 비교할 수 있으니까요 단위원을 갖기에 정확하게 비교되고 계산되는 수가 세어지는 수라면 이러한 수는 세는 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는 수가 전쟁기계의 번호적 조직과 상응 한다면 세어지는 수는 국가 장치의 조세 기술에서 기원합니다. 설현 문자들으로 남아 있는 초기의 문자들이 조세와 관련된 문서라는 게 이를 시사합니다. 세는 수의 숫자는 자의적 기호라는 점에서 기표 지만 다른 기표로 소급되지 않거나 그러길 거부하는 기표란 점에서 반기표 입니다.이를 잘 보여주는 것은 암호 입니다.  암호는 의미화를 의도적으로 중단 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기호이지요 암호를 코드화하고 탈코드화는 데  중요한 것 역시 숫자입니다. 더하고 빼는게 무의미한 숫자들이죠.  

탈 기표적 체제는 기표적 체제에서 벗어나는 사건이 발생한 지점에서 작동합니다. 해석의 사제들이 만들어 내는 의미화의 동심원사이를 오가길 중단하고 그 중심에 있는 전제 군주의 얼굴로 부터 얼굴을 돌리는 겁니다. 탈주선을 그리며 기표적 체제 밖으로 나아가는 겁니다.  이러한 이탈은 추방과 방황으로 이어지지만 탈주자는 새로운 의미를 제공하는 기표들을 붙잡기 마련 입니다. 주체화가 발생합니다. 탈기표적 체제가 주체화라는 절차를 통해 정의된 다 함은 이런 의미에서 입니다. 여기서 들뢰즈 가타리는 알튀세르의 호명이라는 개념을 끌어들이지만 중요한 차이가 있음을 유의해야 합니다. 알튀세르는 자신을 부르는 신의 호명에 답함으로써 히브리인의 해방자라는 주체가 되지만 이는 동시에 신이라는 큰 주에의 시민이 된서을 뜻한다고 합니다. 주체와 예속의 동시성을 강조하는 이러한 개념에는 상징계가 할당한 자리를 자기자리라고 상상적으로 동일시하는 라캉의 주체개념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주체화가  탈주화 포섭의 반복적 궤적을 그린다고 할때 들뢰즈 가타리도 이런 양의성을 받아들인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라캉이나 알튀세르의 주체화 절체에는 탈추선이 없습니다. 큰 주체 내지 큰 타자가 할당하는 자리를  받아 들이는 것일 뿐이니 거기서 주체화란 일종의 오인 내지 속임수라 하겠습니다. 반면 들뢰즈 가타리의 주체화는 의미화 하는 체제를 이탈하는 탈주선에서 시작합니다. 그렇기에 주체화는 단지 오인이나 속임수 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속임수와 대비되는 배신에서 시작합니다.  또 하나 들뢰즈 가타리는 주체화에서 정념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배신이나 탈주의 일차적인 이유는 정념입니다. 가령 자기 주군의  왕비가 될 사람을 모시러 갔던 트리스탄이 주군을 배신하고 이졸대와의 사랑에 빠져들어가는 것은 정념때문입니다. 처음 보는 이를 사랑하게 한다는 묘약이 등장하지만 사실 모든 미친 사랑이란 처음 보는 이에게 매혹되어 휘말려 들어가는 정념으로 시작하니 묘약이란 그 정념의 표현인 셈이죠 이렇게 정념적 탈주로 시작되는 주체화는 다시 다른 주체의 물음에 대답하며 예속적 주체화의 길로 넘어 갑니다. 사랑의 주체란 사랑의 노예를 뜻하자나요 모세도 그렇습니다. 자신이 이집트인이 아님을 알게 된 곳에는 히브리적 정념으로 이집트인을 죽이고 파라오를 등지게 됩니다. 그가 신의 호명에 답하게 된 것은 이처럼 정념에 이끌려 사고를 치고 왕을 배신하고 도망치던 와중에 일어난 일이죠. 

이러한 이유에서 들뢰즈 가타리는 기표적 체제가 수많은 기표나 해석으로 그중심에 있는 전제군주를 가리는 속임수의 체제라면 탈기표적 체제는 전제군주에게서 얼굴을 돌리며 시작하는 배신의 체제라고 대비합니다.  주체란 배신이란 말이죠 그러나 이 배신은 자신을 부르는 다른 주체와 공명하며 주체가 됩니다. 누군가의 부름에 예속되는 거지요 그렇기에 기표적 체제가 흰벽에 의미화하는 목소리에 주파수를 세기는 방식으로 작동한다면 탈 기표적 체제는 주파수간 공명을 야기하는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객관적 주파수와 주관적 공명이 두가자의 기호체제에 대응하는 두가지 잉여성이라 함은 이런 뜻입니다. 

이러한 주관적 공명의 최대치는 생각하는 나는 존재한다라는 등식을 통해 보게 되는 코기토적 이중체 입니다.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장애물과 주저함이 있지만 서로를 부르며 서로 끌려들어가는 커플의 이중체 입니다 부르고 답하는 호명의 주체화는 서로를 향해 끌려들어가는 상이한 강도의 공명을 통해 진행됩니다. 이러한 공명의 최대치는 다른 모든 것을 등지고 오직 서로를 향해 끌려 들어가는 공명입니다. 커플의 검은 구멍이 생겨나는 거죠. 이는 예속화의 극단을 이루기에 탈주하지 않은 것만 못하게 되기 쉽습니다.

네 유형의 기호 체제에 대해 말 했지만 현실의 기호체제는 이 상이한 기호체제가 뒤섞여 작용하는 혼성적 체제입니다. 그리고 하나의 기호체제는 그와 대응 되는 다른 기호체제로 변환되기도 합니다. 어떤 기호계가 전기표적 기호계로 변환되는 것은 유비적 변환, 기표적 기호계로 변환되는 것은 '상징적 변환', 반기표적 기호계로 변환되는 것은 '전략적 내지 논쟁적 변환'  탈기표적 기호계로 변환되는 것은 '의태적 내지 의식적 변환'  이라 합니다. 한지층에서 다른 지층으로 이행하는 것인데 이와 달리 탈지층화하는 변환도 있습니다. 다이어그램적 변환이 그것입니다. 더 이상 형식화 하지 않는... 비형식적 기호-입자를 추출하기 위해 기호체제나 표현형식을 포착하는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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