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자본을 읽자  

고병권 (지은이)천년의상상  2018-08-27

 

 

 

 

 

 

 

 

 

 

마르크스의 <자본> 나를 긴장 시키며 동시에 매혹한다. 이책을 읽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에게 책을 읽는 다는 것은 무엇인가 공부란 무엇인가 ?  삶의 추동하는 의지는 무엇인지 그러면 나는 부끄러울  같다. 니체는 인식의 매력이 인식의 길에 놓인 부끄러움을 극복하는  있다고 했지만, 사실은 부끄러움 자체가 자기 극복의 조짐이다. 예전에는 아무렇지 않았던 것에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것은 예전의 자기 자신과 거리가 생긴 거다. 그래서 부끄러움에는 고통과 기쁨이 함께 한다. 부끄러운  모르고 저질렀던 일이 창피하고 고통스럽다. 하지만 그래도 이제는 뭔가 알게 되었다는 , 조금은 내가 성숙한  같다는 생각에서 오는 수줍은 기쁨도 있다.   기쁨 덕분에 사람들은 주저하고 망설이면서도 인식의 길을 걷는  아닐까 싶다. 주체변형의 위협과 매력이 공존하는 독서를 추동하는 <자본> 다시 읽기 이다.  

 

우리가 읽을 책의 제목은 <자본> 이다.  마르크스는 사람들이 쓰던 말들의 무리에서  자본   단어를 뽑아 내었다.  자본은 자산, , 재력, , 가치 등과 함께 쓰였다.   화폐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통해 구매하고자 하는 재화들이었습니다. 인간의 욕구와 필요를 만족시키는 실절적 재화들이었다.  17~ 18세기 경제학자들이 말한 진정한  재화들이 제공하는 효용이다. ‘화폐 효용을  재화를 매개하는 수단일 뿐이다.  19세기  가치개념이 분화 된다.  재화가 풍부한 것과 가치가 큰것은 다르다. 예컨데 양말 1000켤레를 생산하던 공장에서 혁신을 통해 양말 2000켤레를 생산할  있게 된다면 효용의 관점에서 부가 두배로 늘었다고   있지만 가치의 총량은 그래로다. 양말  켤레에 들어간 가치량만 반으로 준것이다. 새로운 시대에는 가치의 축적이 중요해졌다. 고전주의 시기(17~18세기) 경제학이 부의 과학이었다면, 근대(19세기) 경제학은 가치론이었다. 자본의 시대는 가치의 증식과 축적을 목적으로 하는 사회이다. 상품을 생산하고 판매하고 소비하는 시스템이 계속 돌아가는 이유는 가치의 끊임 없는 증식을 위해서다. 가치의 증식,   잉여가치에 있다. 마르크스가 증식하는 가치를 자본이라고 불렀다. 

 

<자본>  비판한 정치 경제학이란 무엇인가.  

루소에 따르면 정치경제 내지 정치경제학이란 국가 통치술로확장된 가정관리술 이라고  수있다.  사적인 것의 공적화 이다.  가정을 꾸려가는 기술이 국가통치술로 확장 되면서 생겨났다. 다시 말해  고대 그리스의 오이코스의 영역이 폴리스로 확정 되었음을 보여 준다.    오이코스는 사적영역으로 생명유지를 위해 필요한 생계의 영역이며  폴리스는 공론의 영역이자 자유의영역으로 엄격히 분리 되었다.  공적 영역에서 생계 문제가 정치의 주제가 아니었고 그렇게  수도 없었다. 근대에서  부분이 깨진 것이다.  에코노미라는 말은 오이코스  집이라는 말과 노모스  법이라는 말에서온것으로 본래는 가족전체의 공동 이익을 위해 집을 현명하고 정당하게 통치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말의 의미가 커다란 가족, 국가의 통치로 까지 확장되었다. 두가지 의미를 구분하기 위해 후자를  일반경제 내지 정치 경제라고 부르고 전자를 특수경제 내지 가정 경제라고 부른다. 정치경제는  두가지 목적이 있다. 하나는국민들에게 풍부한 소득이나 생활수단을 제공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국가에 넉넉한 세입을 제공해 공공서비스를 충분히 공급할  있게 하는 거다.  

 

아렌트는 사적인 이해가 오이코스에 갇히지 않고 폴리스로 확대된 , 그래서 오이코스와 폴리스 모두가 변화한것 이것이 근대사회이다.  사회계약론은 사회가 사적 부르주아들의 이익 공동체에 다름 아님을 보여준다. 결합의 주체로서 개인, 결합의 형식으로서 계약,  결합의 목적으로 이익 이것이 사회계약론이 말하는 사회 이다. 가정경제와 정치경제가 구분되는 결정적 지점이 인구이다.  미셸 푸코는 인구가 부의 분석에 도입되어 경제적 성찰과 실천의 영역을 뒤흔드는 효과를 냈을때 비로서 정치경제학이라는 새로운 지식 영역이열리게 되었다고 한다. 즉  정치 경제학은 인구가 앎의 대상이 된것과 깊이 관련 된다. 

 

정치경제학이  전체 국민을 풍족하게 만드는 보편 과학인 것처럼 보였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국민의  만큼이나 국민의 가난이 늘어나고 있었다. 두개의 국민이 생겨났다. 마르크스 부의 증대와 빈곤의 증대가 나란히 나타난 현실을 지적하며 가장 부유한 사회 상태를 추구하는 국민경제학이 사회의 불행을 목적으로 하는  같다고 말한다. 모든 가치의 원천은 노동이라는 정치경제학의 주장과 대비 시킨다. 가치를 생산하는 자는  가난 한가 ? 그것도 가치를 많이 생산할 수록   가난해 지는가  

 

에티엔 발리바르에 따르면  <자본>에서 마르크스는 이러한 '현실'로 '이론'을 비판하려 했던 것은 아니다. 이론의 더 안쪽으로 중심 원리쪽으로 파도든다.  착취를 경제적 메커니즘(이를 테면 불평등한 분배) 결과(귀결)로 정의하는  아니라 반대로 경제적 형태들을 임노동 착취의 전제적 과정의 계기들과 효과들로 정의 한다. 착취는 매커니즘의 경과가 아니라 매커니즘의 전제라는 것이다. 만약 착취가 결과  생산된 가치를 분배하는 문제 였다면 우리는 재분배를 통해 이를 바로 잡을  있다.하지만 자본주의적 경제 형태가 작동하기 위해 착취가 전제되어 있다면 다시 말해 상품 생산과 가치 증식이 착취에 입각해서만 가능하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불법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법자체가 문제인 상황이다. 

 

과학에 대한 비판은 과학보다 멀리 간다.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은 이론 학문 과학으로의 비판이다.  과학의 탄생이 의미하는 바를 따져 들어간다.   과학의 전제가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검토하며, 이 학문을 통해 표현되는계급적 욕망과 의지를  문제 삼는다. 많은 사람이 <자본> 마르크스의 과학이라고 부른다.  저자는 <자본>에는 과학 다른 차원으로 비판 존재하며 여기에 <자본> 위대함이 있다고 본다.   과학,  학문에 대한 비판 이란 그것의 한계, 그것의 불가능, 그것의 파산 장소까지 나아가는 것이다. 이는 비판이 과학보다 멀리 가는 것임을 말해 준다. 과학이 이를  없는 , 과학이 멈추는 , 과학의 한계가 드러나는 곳까지 나아가는 것이 비판이라는 말이다. 

 

정치 경제학은  역사적 생산 양식으로서 자본주의에 한정된 과학이며, 특정한 입장에서 있는 과학이다.  역사성과 당파성을 갖는다.  <자본>에서 정치경제학적 사실들이 자본주의와 더불어 역사적으로 출현했음을 지적 한다. 개인, 상품, 가치, 인구 등등 정치 경제학이 전제하고 있는 사실들 모두가 역사적인 것이다. 자본 현재의 역사와 자본 형성의 역사를 구분해야 한다.  자본주의 논리가 자리잡는 과정은 결코 논리적이거나 합리적이지 않다. 온갖 사기와 협잡, 강요, 폭행이 끼어 들었다.  마르크스는 이를 피와 불의 문자로 기록된 연대기라고 했다.  자본의 현재 역사를 가지고 자본 형성의 역사를 도출할  없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우리가 보려고 하는 것과 무관치 않다. 우리의 시각에는 의지, 욕망, 충동 같은  개입한다.  이데아론은 자격 없는 자들을 검열하고 추방하고자 했던 플라톤의 철학적이고 정치적인 충동의 산물이라고   있다.  이데아론을 비판 한다는 것은 플라톤의 이런 의지와 욕망을 드러내는 것일  있다.  과학을 통해 호소하고 설득하려는  장악하려는 의지와 욕망을 비판적으로 살펴야 한다.  철저한 논리를 동원해 지배력을 획득하려는 의지와 욕망이 있다. 

 

비판 1. 정치경제학의 역사성

마르크스는 <자본> 초판 서문에서 '현미경'과  '하데스의 투구' 비유를 썼다. 현미경은 시야를 확장하고 투구는 볼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현미경' 비유를 통해 겉모습만 대강 보는 사람들을 비판한다.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자들의 큰 문제 중 하나가 둔한 시선이라고 생각 했던 것 같다.  역사를 보려면 작은 차이에서 큰 차이를 알아볼 수 있는 역사적 눈이 필요하다.마르크스는 신체의 세포를 보는 데는 현미경이 필요하지만 경제형태를 보려면 추상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추상력은 지능을 의미하는  아니다.  천재성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성의 문제이다. 동질화된 가치 공간은역사적 생산물이다. 생산자들 사이에 동등성이 확보되어야 하고, 상이한 노동들이 동질적으로 보일 정도로단순노동이 통계적으로 일반화되어야 한다. 자본은 결코 초역사적 법칙을 말하는 책이 아니다.  마르크스는 역사적 사회형태로서, 역사적 생산양식으로 자본주의를 분석하고 비판한다. 

 

 

마르크스는 기관들이 어떤 구조를 이루고 있느냐에 따라 동일한 현상도 전혀 다른 법칙의 지배를 받는 다고생각 했다사회적 편제에 따라 동일한 인간도 다른 존재가 된다흑인은 흑인이다그러나 어떤 조건에서 그는 노예가 된다.  하나의 동일한 현상이라도  유기체들이 상이한 총체적 구조그것들의 개개 기관의 다양성기관이 기능하는 조건들의 차이 따위로 말미암아 전혀 다른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자본>에서 정치경재학 비판은 정치경제학 나아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철저히 역사적으로 특수한 형태로서 고찰하고있으며 자본주의의 역사적 필연성이나 미래로의 연속성을 제거하고 오직 역사적 이행 속에서만 그것을 보고있다

 

비판 2 정치경제학의 당파성

 

'하데스의 투구'는 도깨비 감투처럼 자신을 볼 수 없게 한다. 페르세우스가 메두사를 잡기 위해 사용한 것이다. 보지 않으려는 의지에 대한 비판이다.  보지 않으려는 것은 계급적 이해와 관련이 있다마르크스는 앎만이 아니라 앎을 둘러싸고 있는 의지, 앎에 투여된 욕망을 드러낸다.  정치경제학에 투여된 욕망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정치경제학을 지배하는 욕망은 마르크스가 가장 맹렬하고 가장 저열하며 가장 추악한 감정이라고 부른 사적 이익에 대한 추구 욕망이다. 

 

이론적 비판은 과학을  받치는 근거의 근거없음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그것의 정치적의미는 혁명이라고   있다. 1848 혁명에 대한 마르크스의 여러 글은 부르주아 독재를 폭로하고 있다. 어떤 제도나 법률이 거추장 스럽게 되자 마자 그것을 간단히 무시하는 권력이 출현한다. 여기서 독재는 제멋대로 불법을 저지르는 권력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독재의 본질은 불법성이 아니라 합법성에 있다. 힘은 법을 넘어서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는  일차적으로 법을 통해서 작동한다 한마디로 주권 권력이다. 독재는 법을 통해, 법칙을 통해,  과학을 통해 작동하기 때문에 정말로 꼼꼼하게 그리고 멀리까지 분석을 밀고 가야 한다. 

 

루이 알튀세르는 공산주의 철학자가 된다는 것은 '파르티잔'이자 '아르티잔'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 아르티잔  세공업자처럼 섬세하면서도 파르티잔  투사처럼 입장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 사물들의 관계를 섬세하게 짚어가면서  구도의 특성을 읽어 내는 , 앎을 따라가면서 앎의 의지를 읽어 내는 , 거기서 자기가 대결하는 것의 정체를 드러내고 투쟁하는  말이다. 노동자 계급의 편을드는 투사인 파르티잔은 최고의 물건을 만들어 내는 장인인 아르티잔이기도 했다.  마르크스의 편들기, 입장취하기는 노골적이다. 하지만 이것이 과학에 미달하는 이데올로기적 선동이 아니라 과학보다 멀리 나아간혁명적 비판이라고 생각한다. 과학 이전에 입장의 차원, 당파성의 차원이 있음을 드러낸 것이라는 뜻에서 그렇다. 

 

 마르크스는 <자본> 분책할 경우  책의  부분이 너무 어려워 노동자들이 독서를 아예 포기할지 모른다고 걱정했다.  노동자의 공부를 독려 한다. “학문에는 지름길이 없습니다. 오직 피로를 두려워하지 않고 학문의 가파를 오솔길을 기어 올라가는 사람 만이 학문의 빛나는 꼭대기에 도달  수있다.”  마르크스는  <자본> 노동자들이 사용할 무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강 만든 무기를 제공할  없었다. 엄격한 논리를 구성하고 과학을 따진 이유이다.   

 

 당파적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사물을 특정한 조명, 특정한 퍼스펙티브로 보고 있음을 인정한 것이다.  견해에는 색조가 있다.  동일한 내용을 말하고 있는데도 진술의 색채가 상반된다. 자본가 입장에서 묘사하는 사건의 색채와 노동자 입장에서 묘사하는 사건의 색채가 너무 다르다. 자본가가 묘사할 때는 그저 불운한 사건이 노동자가 묘사할때는 불의의 사건이 되고, 대중의 공분을  사건의 당사자가 슬픈 사연의 주인공이 되기도 한다. 어떤 입장에 있느냐에 따라 우리는 안타까워하기도 하고 분노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한다. 동일한사물의 관계도 입장에 따라 다른 색깔을 갖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잉여 가치율과 착취도는 동일한 관계를가리키는 용어이지만  말이 주는 어감은 완전히 다르다.  자신이  있는 시간  역사를 무시하는  만큼이나 자신이 서있는 자리  입장을 무시하는 과학도 형이상학이다. 

 

<자본>이 독자에게 요구하는 것 

마르크스가 정치경제학자보다  보았기 때문에 잉여가치 개념에 도달한 것은 아니다.엥겔스는 마르크스의 잉여가치 개념이 화학에서 산소 발견과 유사하다고 말한다. ‘연소 플로지스톤 이라는 연소체가 빠져나가는 현상이라는 주이었다. 가상의 물질로  존재가 실험으로 입증되지 않았다.  프리스틀리와  셀례는 플로지스톤이 들어 있지 않은  확실한 기체를 만드는데 성공했습니다.  셸레는 물체를 태우면  기체가공기중에 사라진다는 것을 알아 냈다.  이들은 산소를 손에 쥔거다. 그런데도 정체를 몰랐다.  자신들이 물려받은 플로지스톤 가설에 매여 있었기 때문이다. 라부아지에는 연소란 플로지스톤이라는 신비한 물질이 달아나는 현상이 아니라 프리스틀리가 추출해낸 어떤 원소와 물체가 결합하는 현상이라고 해석했다.  어떤 렌즈, 어떤 조명, 어떤 시각, 어떤 틀에서 보느냐에 따라 우리는 자신이 쥐고 있는 것조차   없다는 것이다. 정치경제학자와 마르크스는 다르게 본거다. 다른 눈으로 본것이다.

 

우리는 <자본> 그동안 너무 투명하게 읽었기 때문에 문제인 것이다. 통상적인 조명 아래서, 전통적인 시각으로, 권위자의 지도에 따라 올바른 독해를 해온 것이다. 하지만 그런 독해는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우리는 렌즈를 빌려 끼울 수는 있지만 투명한 렌즈를 끼울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단지 어떤 독해를 올바른 독해, 보편적 독해, 정통의 독해, 순수한 독해로 간주해왔을 뿐이다.  

 

<자본>에 적용된 '나자신의' 방법 

마르크스와 헤겔의 관계는 중요한 논쟁 주제이다. 마르크스는 분명이 변증법적 방법  자신의 방법이라고 불렀다. 저자는  <자본> 결코 헤겔적인 책이 아니며  <자본>에서 헤겔에 대한 비판을 느꼈다고 한다. 저자의 언급 내용을 옮긴다. 

 

o 서술방법과 연구방법은 다르다 - 첫째 -마르크스는 2독일어판 후기에서 변증법적 방법 두고 <자본> 사용한  자신의 방법이라고 했다. 이는 서술방법이라는 뜻이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헤겔은 현실과정이  인간의 두뇌에 번역된  거꾸로 세웠다. 현실 과정을 따라 자신의 두뇌 속에 관념들의 체계를 구축했으면서도, 나중에 구축된 것이 먼저 존재했고 마치 그것에 따라 현실과정이 만들어진 것처럼 생각했다. 

o 아주 우연히 훑어 본것이 - 둘째 마르크스가 변증법을 채택하게된 사연이 흥미롭다.  프라일리그라트가 보내준 헤겔의 <논리학> 훑어보다가 마르크스는 서술방법을 떠올린 것이다. 아주우연히   마르크스의 글들은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에서 <자본> 이르는 동안 헤겔식 서술 방법에서 계속 멀어진다. 

o 어떻게 가상이 실재 처럼 나타나는지 - 셋째, 마르크스와 헤겔의 관계를  기묘하게 만드는 것은 헤겔식방법이 강하게 채용된 부분이다. <자본>에서 <논리학> 일과 다의 변증법 부분을 차용하고 있는데 화폐물신주의이다. 헤겔의 변증법을 직접 차용해 서술한 과정은 진리의 인식 과정이 아니라 허위의 형성과정이다.  또한 자본은 상품과  화폐로 자기 모습을 바꾸어 가며 끊임없이 증식해 나간다.  자본 헤겔의 이념과같은 운동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것은 허위라는 것이다. 자본의 운동은 자기 운동이 아니라 그렇게 보일 뿐이다.  허위와 가상 사기의 운동 우리눈에 비친 가상을 서술할때 마르크스는 헤겔을 찾는다. 

o 논리의 실패로서의 모순과 이율배반 - 넷째 모순과 역설에 대한 것이다.   표준 노동일의 길이’(하루 노동시간)  임금  권리  권리, 옮음  옮음, 둘다 노모스를 갖추었다. 이렇게 되면 이율배반이 생겨난다. 논리가 해결할  있는 영역이 아니다. 여기에는 힘이 재판관으로 들어온다.   하나의 주장이 상반된 옮음을동시에 의미할 때도 있다. 이것이 역설이다.  마르크스에게는 모순의 변증법 이상으로 역설의 변증법이 중요하다. 역설의 상화에서는 한쪽이 커지면 다른 쪽도 커니다. 생산력이 가장 발달했을때는 자본주의가 가장 강할때 이지만 또한 자본주의가 가장 위험할 때이다. 

 

추리소설 같은 <자본>, 탐정 마르크스 

마르크스의 자본은 추리 소설 같다고 한다.  마르크스가 완전범죄에 가까운 절대 내지 살인 사건을 파헤쳐 가는 탐정 같다.  추리소설은 대개 개인적 범죄만을 다룬다. 범인이  그런 범죄를 저지르게 되었는지 구조적인 문제를 파고들지 않는다. 추리소설은 사회구조가 개인들에게 저지른 범죄는 아예 생각지도 않는다. 추리소설은 사회의 불안요소를 오직 범죄자 개인에게 찾는다. 탐정은 위험요소를 적발하거 제거함으로써 체제를안정화 한다. 마르크스의 자본은 완전히 다르다. 그가 추적하는 범죄는 제도의 범죄, 체제의 범죄이다. 범죄성은 개인적 캐릭터가 아니라 사회적 캐릭터 이다.  자본가는 자본주의적 생산에 필수적인 기능의 수행자이며, 잉여가치를 제공하고 강탈하기 전에 그것을 창출하도록 돕는 자이다. 더욱이 잉여가치에 대한 자본가의권리는 노동력에 대해 가치를 제대로 지불한 사람이 갖는 권리라고 했다.  자본가가 단순한 절도범이나 강도는 아니라는 거다. 그의 절도와 강탈은 합법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마르크스가 추적하는 범죄는 합법적 절도와 강탈인 셈이다. 

 

마르크스는 상품더미에서 뭔가를 발견하다. 추상력이라는 특수안경을 써야만 보이는  그것은 바로 가치라고하는 것이다.  상품더미라고 했지만 실상은 가치 더미 이다. 도대체  가치들은 어디에서 왔을까  바로 노동력이라는 상품이 거래되는 시장이었다.  구매자는 뭔가 할일이 있는  기분좋게 성큼 성큼 앞장서 가는데 판매자는 제값을 받고 팔았으면서도 고개 처박고 쭈뼛쭈뼛 따라가는 겁니다.  한노동자가  자본가를 만나는것은 우연이겠지만 노동자가 자본가를 만나는 것은 필연이라는 것도 알게 된다.  자본의 확대 재생산이 빈곤의 확대재생산이라는 것도 알았다. <자본> 광범위한 수준에서 끊임 없이 재생산되는 자본주의의 범죄 보고서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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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에서는 매끄러운 공간과 패인 공간을 중심으로 논의를 하였다.  데카르트적 좌표계와 국소좌표계를 가각 패인 공간과 매끄러운 공간에 상응하여 설명하였다. 여기서 국소좌표계와 리만 계량 또한 패인 공간에 해당하지 않느냐는 질문이 있었다  국소좌표계도 공간을 수학적으로 표현하므로 매끄러운 공간에 홈을 파는 것으로 이해할 있기때문이다. 하지만 국소좌표계는 데카르트적 좌표계와는 달리 공간을 동질화하지 않는다. 데카르트적 좌표계가 공간을 동질화하는 방식으로 표현한다면, 국소좌표계는 동질화하지 않으면서 이질성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공간을 표현한다.이런 맥락에서 국소좌표계가 데카르트 좌표계보다 매끄러운 공간에 가깝다고  있다.

 

패인 공간과 매끄러운 공간이라는 기준으로 자본주의를 분석하는 내용도 있었다. 오늘날 자본주의에서는 가변 자본과 불변 자본의 구별이 점차 불분명 해진다. 과학자나 기술자가 발명한 신기술의 가치를 기술을 창안하는데 투입하는 시간으로 환원한다는 이치에 맞지않다. 음악이나 영화와 같은 문화산업의 생산물들에 대해서도노동시간 가지고 가치를 매겨 가격을 붙인다는 생각은 이해하기 어렵다.

 

자본주의가 패인 공간을 부정하고 매끄러운 공간을 창출하는 식으로 작동 방식을 바꾸었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오히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가 패임의 극한에서 매끄러운 공간을 낳는다는 사실이다. 자본주의가 초국가적으로 변화해가면서 매끄러운 공간을 만든다. 한편으로는 현재에도초국가적자본이 얼마나 국민국가를 필요로 하는가를 생각 해본다. 초국가적 자본이 발전해온 과정은 발전도상국의 무역 장벽과 금융 장벽을 철폐하기 위해 미국이라는 강력한 국가를 필요로 했다. 뿐만 아니라 2008년의 금융위기의 사례에서 나타나듯이, 초국적 금융자본은 자신들의 목숨이 걸린 위기에 봉착했을 국가의 힘을 빌려 살아남을 있었다.

 

군사기구들이 위도와 경도를 가지고 바다에 홈을 패놓은 이후 그들은 전략잠수함이나 항공모함, 나아가 인공위성이나 미사일을 통해 어디든 공격할 있게 됨으로써매끄러운 공간 구성해냈다. 이처럼 패인 공간과 매끄러운 공간은 현실에서 이분법적으로 구분되어 작동하지 않고 서로를 넘나든다.

 

노마디즘 저자와의 질의응답에는 우선 야금술과 관련된 내용이 있었다.  야금술사란 질료적 흐름을 따르는자다. 목공을 할때 나무의 결을 읽고 그것을 따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무를 다룰 없다.  악기를 연주할 때도 비슷하다. 같은 피아노라도 피아노에 따라 다른데, 이를 적절히 읽어내고 다룰 알아야 좋은 연주를 있다. 연주회 때마다 자신의 피아노를 비행기로 실어 날라야 했던 피아니스트는 피아노의 결과 관련이 있다. 야금술사처럼 결을 읽는다는 것은 비단 사물과의 관계에 그치지 않고 어떤 사람 혹은 사람들 사이의 분위기를 읽는 또한 결을 읽는 문제라고 있다. 

 

감정과 감응을 구별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노마디즘 10장에서 되기 개념을 이야기할   되기란 감응을 생산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감응이 무엇이며 감정과는 어떻게 다른지를 물었다. 감정은 재현의 대상으로서 슬픔, 분노, 기쁨, 즐거움 단순한 형태를 가진다. 이때 머릿속에 있는 감정을 정확하게 표현해 상대방에게 동일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관건이다. 반면에 감응은 감정과는 달리 미묘한 성격을 갖는다. 감정처럼 정확하게 표현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사람에 따라 다른 감응을 느끼게 된다.  슬픔의 감응을 담은 음악을 듣고 누군가는 분노가 담긴 슬픔을, 누군가는 후회가 담긴 슬픔을, 누군가는 슬픔 속에 담긴 고통을 강하게 느낄 있다.  감응을 표현하는 것은 감정을 표현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데이비드사순 도서관 근처이다. 주말 박물관과 도서관이 있는 콜라바 지역에 자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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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점점 길어 지고 있다. 이전 7시면 캄캄한 밤이었는데 아직 빛치 남아 있다. 겨울이 지나가고 있다. 도시에 밤이 찾아온다. 머리를 싸늘하게 하는 차가운 바람이 춥기 보다는 시원하게 느껴진다.  잠시 멈춤었던 자전거에 다시 올라 집으로 향하는 길을 재촉한다. 가족들이 반갑게 맞이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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