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목이란 이동이 아니라 매끄러운 것을 통해 정의되는 반면, 국가장치란 모든 것에 홈을 파는 기능을 통해 정의된다. 이런 점에서 매끄러움과  패임은 유목과 정착, 전쟁기계와 국가장치의 구별을 정의하는 '본질적 요소'라고   있다. 그런데   공간사이에는 혼합과 이행, 반전이 발생한다. " 공간이 사실상 뒤섞여서만 존재한다는 것을 상기해야만 한다. 매끄러운 공간은 항상  패인 공간으로 번역되며 그것에 의해 횡단되고 있다.  패인 공간은 매끄러운 공간으로 항상 반전되며 회귀하고 있다."  

 

 공간과 결부하여   문제를  추상적 선과 유기적 선으로 다룬다. 감정이입충동과 관련된 선을  유기적 이라고 부르고  추상충동과 관련된 선을 '추상적 '이라고 부른다.  "예술은 추상적 선에서 시작한다." 테제를 제기하고   추상적 선은 기하학적 선과 달리 유목적인 선으로 이해된다. 여기서 추상 개념은모든 형식을  탈형식화해서 흐름  자체로  일관성의 구도 이어지는 그런 추상기계 개념이다. 이는 예술을 모방이나 재현. 혹은 구상으로 보는 전통적 개념에 벗어나 있다.   패인것과 매끄러운 것을 대비하는 여섯가지 상이한 모델 제시한다 .

 

1. 기술적 모델 

흔히 보는 천인 직물이  패인 공간을 이룬다면 동물의 털을 압착하거나 열을 가해서  만든 펠트는 매끄러운공간을 이룬다.  직물을 통해  패인 공간의 몇가지 특징을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두종류의 평행적 요소에 의해 구성된다. 수직적이고 수평적 요소가 교차한다.  둘째,  종류의  요소는 '고정'  고정된 것의 위아래를 가로지르면서 이동하는 기능을 가진다.  셋째,  패인 공간에서는 반드시 적어도  면이 한계 지어지면서 닫혀있다.  마지막으로  종류의 공간은 반드시 앞면과 뒷면을 갖는 것으로 보인다. 날실과 씨실이성질,  , 밀도에서 엄밀히 같을 때조차도 직조법은 한면을 매듭지어 뒷면을 재구성한다.  하지만 압축에 의해 만들어진 엉킨 섬유, 펠트는 직물공간과 대비되는 매끄러운 공간을 이룬다. 펠트는 무한하고 열려있으며, 모든 방향으로 무제한적이다. 그것은 앞면도, 뒷면도, 중심도 갖고 있지 않다. 그것은 고정되고 움직이는 요소들을 지정하지 않고, 배정하지 않으며, 오히려 연속적인 변이를 분포시킨다. 매끄러운 공간이라고 말할때의 매끄러움이 고르게 짜여진 동질성이 아니라 이질적인 것들이 결합되어 울퉁불퉁한  공존하는 것을 보여 준다. 퀼트나 패치워크처럼 이질성을 통해서 정의되어야 하는 매끄러움이다. 

 

2. 음악적 모델 

음악에서  패인 공간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절단된 소리들의 분포를 뜻한다. 대표적인 것이 평균율이다. 도레미파솔라시도 동알한 간격(평균화된 간격)으로 주파수들이 고르게  절단한  음악적 소리로 정의하고 , 사이의 간격에 의해  어울리는 음정과 어울리지 않는 음정 등의 정의된다. 이처럼 절단과 간격들이 일정한단위들로 분할되어 표준화된 방식으로 배열될 ,  배열과 분포의 원리를 '모듈'이라고 한다. 동일한 원리로 주파수를 절단하여 음계가 일정한 간격으로 정의되는 곳은   패인 공간이다. 반면 음악에서의 매끄러운공간은 정해진 간격없이 소리들이 모이고 흩어지는 것을 통해 정의된다. 여기서는 모든 주파수의 소리가 음악적 소리로 사용될  있다.

 

3. 해양적 모델 

 패인 공간에서 선이나 궤적은 점에 종속되는 경향이 있다.  두점을 연결하는 직선이 중요한 선이 된다. 반대로 매끄러운 공간에서 점은 선의 일부이고, 선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갖는 통과점일 뿐이다.  "매끄러운 공간에서 선은 벡터, 방향이지, 차원 혹은 척도적 규정이 아니다." 그래서 매끄러운 공간은 형태화되고 지각된 사물로 채워지기보다는 사건 혹은 특개성의 원리로 채워진다.  매끄러운 공간은 소유의 공간이라기 보다  '이곳'마다 고유한 느낌을 주는 '감응' 공간이고, 멀리서 눈으로 휘둘러보고 파악하는 시각적/광학적 공간이라기 보다 직접적인 느낌을 통해 느끼게 되는 촉각적 공간이다.   폼패인 곳에서는 형식이 진료를 조직하는반면 매끄러운 곳에서는 쇚가 힘을 표현하거나 힘의 징후로 복무한다. 바다는 전형적인 매끄러운 공간이다. 위도와 경도로 표시되는 좌표가 바다에 덮어씌워지고,  지역을 격자화하는 자오선과 평행선, 경선과 위선들이 교차하는 지도가  바다에 홈을 파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중요한 것은 사막이 매끄러운 공간인가, 도시가  패인 공간인가가 아니다.  매끄러운 공간은 홈이 패이기 마련이고 반대로 홈페인 공간 또한 매끄러운공간으로 사용할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매끄러운 공간에서 매끄러운 공간에 적합한 삶과 실천을 창안해야 하며,   패인 공간에서 다시 매끄러운 공간을 만들어 살아가는 삶과 실천을 창안해야 한다는 것이다.  동일한 공간을 흘러가는 상이한 두가지 여행을 구별해주는 것은 측정 가능한 혹은 척도적인 운동량이 아니라 공간화의 양식, 공간에의, 공간에 대한 존재 방식이다. 

 

4. 수학적 모델 

척도적 다양체와 비척도적 다양체, 외연적인 당양체와 질적인 다양체,  중심화된 다양체와 비중심화된 다양체,  수목적 다양체와 리좀적 다양체  모두 대비 되는 다양체의 짝들이다.   패인 다양체와 매끄러운 다양체가 다양한 다양체의  짝들에 대응하는 것이다. 각각의 부분이 아무리 분할되어도 동질적인 연장 달리분할될때 마다 상이한 질을 갖는 지속이라는 말로 구분했다. 전자가 양적 수적 다양체라면 후자는 질적인다양체라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다르다.  매끄러운 공간에 서식하는 것들은 분할될 때마다  본성을 달라진다는 의미에서 '매끄러운 다양체'라고   있다. 그러나 공간 자체와 모든 수가 동질적, 척도적 다양체라고간주하는 것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수는 그자체로 매끄러운 공간에 분배되고 분할될 때마다 매번 그성질을변화 시킨다. 세어진 수가 홈패인 공간에 속하는 것같이, 서수적이고 방향성이 있으며 유목적이면서 분절된, 세는 수는 매끄러운 공간에 속한다."  부분마다 이질성을 특징으로 하는 매끄러운 공간은 언제나 상이한요인들의 복합효과에 의해 국지적인 특개성을 갖는다.  가지 요인이 결정하는 경우에 두개의  상황을 비교할  없다면,  매끄러운 공간에서는 아무것도 비교할  없는 것일까 ?  비교나 측정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리만 공간의 경우가 바로 그렇다.  이공간에서는 각각의 부분들이 이질적이다. 각각은 무한히 근접하는  점사이의 거리의 제곱을 정의하는 표현형식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이런 논의에 의해 저자들은  매끄러운 공간의  가지 특징을 요약한다.한편으로, 서로의 일부분을 이루는 결정인이 크기와는 상관없이 포함된 거리 내지 배열된 차이로 소급될 때가 그것이다. 다른 한편, 하나를 다른것의 일부로 만들  없는, 결정인들이 척도와는 무관하게 오직 주파수나 누적의 과정에 의해 연결될 때가 그것이다. 이것이 매끄러운 공간의 노모스의  측면이다.

 

(1)차원수가 정수고 방향이 일정한 집합은 모두 홈패인  혹은 척도적인 것이라고 부를  있다.( 2)비척도적인 매끄러운 공간은 1이상의 분수 차원을 갖는 , 또는 2이상의 분수 차원을 갖는 면을 구성함으로써 만들어진다. (3)분수의 차원은 말그대로 방향적인 공간의 지표다 (접선은 없으며, 방향의 연속적 변이만이 있다. (4)매끄러운 공간은  공간속을 통과하는 , 혹은 공간 속에 기입되어 있는  이상의 보충적인 차원을갖지 않는 것으로 정의되는데, 이런 의미에서 매끄러운 공간에는 예컨대 선이 여전히 선으로 있으면서 면을채우는 평평한 다양체가 있다. (5)세는  내지 비정수의 부정확하지만 엄밀한 형식아래, 공간 자체와  공간을 점유하는 것은 동일화되는 경향이 있으며, 동일한 능력을 갖는 경향이 있다. (계산없는 점유). (6)이러한 무정형의 매끄러운 공간은 이웃관계의 누적에 의해 만들어지는데, 이때 각각의 누적은 '생성' 고유한식별 불가능성의 지대를 정의한다.( 이상이지만 평면 이하, 입체 이하지만 평면 이상)" 

 

5. 물리적 모델 

물리적 모델에서 다루는 중심 개념은 노동 자유활동이다.  노동의 어원은 창조적인 활동으로서의 작업보다 참고 견디는 고통스런 활동을 지칭하는데  사용 되었던 말임을 보여 준다. "직각으로 교차하는  계열의 평행선으로,  하나인 수직선들은 고정적인  내지 상수의 역할을 하는 반면에 다른 하나인 수평선은 변수의 역할을 한다."   계열의 평행선은 "교차가 규칙적이 될수록,  패임이  단단하게 되고, 공간은 보다 동질화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의미에서 동질성은 처음부터 매끄러운 공간의 특징이 아니라 반대로  패임의 극단적 결과이다." 

 

 고원에서 들뢰즈/가타리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노동의 모델과 국가장치에  관한 것이다. 19세기에 이르러 일에 대한 물리-과학적 모델과 노동력 내지 추상적 노동에 관한 사회-경제학적 개념의 정교화가 동시에이루어 졌다.  전자를 다루는 물리학과 후자를 다루는 사회학이 발생석 친근성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콩트는사회물리학 이라고 작명해놓았으나 이미 같은 제목으로 책을 출간하여 사회학이란 이름으로 변경했다.  사회가 노동의 경제적인 척도를 제공했다면 물리학은 노동의 역학적 화폐를 제공했다.  

 

임금체제는  상관자로서 힘의 역학을 갖는다. 물리학이 (이때만큼) 사회적이었던 적은 없었다. 왜냐하면 경우 모두 표준 인간에 의해 일률적인 방식으로 들어올리고 끌어당기는 힘의 일정한 평균치를 정의하는것이 문제였기 때문이다.  평균적이 것에 기초한 표준적인 , 표준적인 노동강도, 표준적인 숙련도 등을 가정할  있을때 노동시간은 가치의 척도가   있다.  이러한  평균치의 노동력이라는 개념이 노동모델을형성한다. "모든 활동에 노동-모델을 부과하는 , 모든 행위를 가능한 노동 내지 잠재적 노동으로 바꾸는, 자유활동을 훈육하는 ,  또는 자유 활동을 단지 노동과 관련해서만 존재하는 '여가' 밀어놓는 ." 이다.   

 

추상노동 개념의 전제인 '표준적 인간'내지 '평균적 인간' 어떻게 탄생했을까 ? 국가의 공공노동에서, 혹은군대의 조직화에서 탄생한 것이다. 전쟁기계를 국가적 건설현장과 공장에서의 노동-모델에 복속시키는 것은 18-19세기 국가장치가 전쟁기계를 영유하는 새로운 수단이었다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인디언의 경우 노동력을 파는 행위, 대가를 받고서 일을 하는 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노동을 치욕으로 여겼으며노동을 거부했다. 미국인들이 그많은 흑인을 노골적으로 들여 올수밖에 없었던 것은 인디언을 노예로서 이용할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노동의 물리-사회적 모델은 국가장치에 속하며, 국가장치가  가지 이유에서 발명한 것이라는 것이저자들의 주장이다.  "첫째, 노동은 오직 잉여의 구성과 더불어서만 출현하므로, 스톡 없는 노동은 없다. 따라서 ( 그대로의) 노동은 잉여노동과 더불어서만 출현한다" 것이다. 자본주의에서 노동이란 이처럼 자본이라 불리는 스톡을 통해 그것의 일부를 대가를 받고 수행하는 활동을 지칭한다.  자본주의 이전의 노동에대해서는 다양한 형태의 스톡을 대가로 받고 수행하는 활동이라고   있다 . 

 

 둘째, 노동은 시공간의  패임의 일반화된 조작, 자유활동의 종속, 매끄러운 공간의 파기를 수행하며, 국가의 본질적인 사업과 전쟁기계의 정복에서 자신의 기원과 수단을 발견한다.  시계는 공간화된 시간으로 시간을 동질화하고 양화한다. 특정한 공간에서 주어진 시간에 맞추어 시작하고 끝내야 한다. 삶의 지반 자체를 페인 공간으로 만들어 버린셈이다.  자본은 이런  패임의 극단에서 새로이 매끄러운 공간을 구성한다. 자본주의에서는 필요노동과 잉여노동이 시간적 내지 공간적으로  분리 되기를 그치며  어떤  가시적인 형태로 국지화   없게 된다. 필요 노동과 잉여 노동의 국지적 구별 뿐아니라 불변 자본과 가변 자본의 구별이 어렵게 된다.  소프트웨어, 지적 소유권 등에 대한 자본의 집요한 공세는 가변자본조차 불변자본의 일부로 흡수하고 통합하려는 자본의 집요한 노력을 뜻한다. 네그리는 생산과 착취가공장에서만이루어지는게 아니라 사회전체가 잉여가치를 착취하는 장이 된다. 사회적 공장이라는 개념이 여기에서 유래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저자들은 새로운 조건에서 모든 노동은 잉여 노동이다.  인간의 소외는 일반화된 기계적 노예화 대체되는데 여기서 사람들은 어떤 노동과도 무관하게 잉여가치를 제공하기도 한다.  모든 공간, 모든 시간이 잉여가치착취의 장이 됨에 따라 "자본에 의한  패임의 끝에서 이런 식으로 일종의 매끄러운 공간이 만들어지게"된다.   본질적인 것은  패인 자본과 매끄러운 자본의 구별이며, 전자가 영토와 국가, 심지어 다른 유형의 국가조차 넘나드는 복합체를 통해 후자를 낳는방식이다. 

 

6. 미학적 모델 

미학적 모델에 대해 말하며 그특징을 세가지 정도로 요약한다.  원거리상과  대비되는 근거리 , 광학적 공간과  대비되는 촉감적 공간, 구체적선 내지 구상적 선과  대되는 추상적 선이다. 

 

 1)근거리 상과 촉감적 공간 

접사는 원거리 상의 시각적 이미지를 근거리 상의 감응적이고 감정적인 이미지로 바꾼다. 과잉접사에서는시각적 형태가 없기에 이미지는 촉감적이고 질감적인 것이 되는 것처럼 보인다. 표면에서는 시선이 형태를그리는 선이나 윤곽선을 따라 가지 않고 대신 표면이 제공하는 질감을 느끼게 된다. 이를  눈으로 만진다는  말로 표현한다. 시선은 어디에서든 어느 방향으로도 향할  있다. 형태의 선이나 윤곽선이 만드는 홈이 사라지고 모든 방향으로 움직일  있는 공간이 만들어 집니다. 이를  절대적 국지라고 하며 상대적 포괄과 대비하고 있다. 

 

그림은 떨어져야 보이지만, 가까이서 그려진다. 마찬가지로, 작곡가는 듣지 않는다고들 한다.  청취자는 떨어져서 듣는 반면, 작곡가는 가까이서 듣는다. 더욱이 독자는  기억을 갖는 것으로 추정되는 반면, 작가는짧은 기억으로 쓴다. 이런 근거리상과 촉감적 공간이라는 특징은 매끄러운 공간에 상응한다. 반면  패인 공간은 원거리상의 요구에 의해 정의된다.  방향의 일정함, 관성적인 좌표의 교환에 따른 거리의 불변성, 주위환경에서의 흡수에 의한 상호결합, 중심화  투시법의 구성이다. 늘어선 대상들은 소실선과  점을 잇는 선의 비례 관계에 의해 정해진 거리를 확보하게 된다. 

 

2)포괄성과 국지성 

포괄성은 많은 부분들을 자기 안에 담는 것이고 국지성은 어떤 제한된 부분에 머물러 있는 것을 뜻한다. 매끄러운 것은 근거리적이고 촉감적이다. 따라서  많은 것을 담는 포괄성은 갖지 않으며 반대로 각각의 부분들이갖는 특개성에 주목하는 만큼 '국지성' 갖는다.  반면  패인 것은 원거리상이고 다양한 것들을 풍경의 일부분으로 포함하고 수평선이나 윤곽선 안에 담는다는 점에서 '포괄성' 갖는다고   있다. 그러나  매끄러운 것이 국지적 부분에 집착하는 것은 아니다.  형태나 윤곽선의 홈을  넘어 모든 방향으로 동시에 나아갈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국지성은 상대성을 벗어나 절대성을 갖으며 이를  '절대적 국지성'이라고   있다. 매끄러운 공간에  달라붙어  전체를 점유하며 나아가는 유목민을 '절대적 유목민'이라고 표현한다. 반면  패인 공간의 포괄성은 '상대적 포괄성'이다. 시야에 들어온 것을 담지만 특정한 것을 특정한 방식으로만 담아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소실점을 향해 모이는 보조선 안에 담는다는 점에서 상대적이고  시선은 소실점을 제외한다면 제한된 , 제한된 형태만을   있다는 점에서 상대적이다.  투시적인 풍경에서 시선이모든 곳으로 동시에 향할  있는 점은 바로 소실점밖에 없으며 그런 이유로 이점은 '국지적인 절대성' 갖는다. 

 

 3)구상적 선과 추상적  

20세기 초반 활동했던 미술사가 보링거는 리글에게 끌어온 개념을 사용하여  모든 예술 작품은 가장 내면적인 본질에 따르면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절대적 예술의지의 객관화며 이런 의미에서 예술의지란 대상과 창작방법과 무관하게  자체로 존립하는 의지로서 활동하는 잠재적 욕구라고 말한다. 그는  예술이란 모방충동이 아니라 추상충동에  의해 창조된다고 주장한다.  추상  충동은 외부적 현상으로 야기되는 인간의 커다란내적 불안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불안한 외부의 사물이나 공간에서 불명료한 세계상을 제거하고  거기에 필연성과 합법칙성을 부여하고자 하는 충동이다. 이런 추상충동은 감정이입충동과 달리 무기적인 것을 지향하고, 자아를  통한 향유가 아니라 자아를 버리고 몰입하게 하며, 모방보다는 변형시키는  방식으로 작용을 한다.  반면 주류 예술 이론가들의  모방이나 모사 미메시스라는 개념을 통해 예술의 발생기원을 파악했다. 여기서   모방충동과 감정이입충동을  인간과 외부적 현상간의 친화성이나 유사성에 대한 확인하려는 것이라는 점에서  매우 밀접한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충동은 대상과 자신을 동일화함으로써 발생하는 "쾌감" 지향한다는 점에서 항상 "유기적인 것을 향하고 있다."  본다.  

 

 들뢰즈/가타리는 예술이란 일차적으로 모방이 아니라 추상이며, 따라서 추상적 선에서 출발한다는 명제를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 "예술이 추상적 선에서 시작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추상적 선이 출발점이다.”  들뢰즈/가타리는 추상이란 개념자체에 대해서 보링거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  불안을 극복하기위한 합법칙성의 개념에 중심을 두고 있다면 들뢰즈/가타리는 추상을 변형이요 탈형식화라고 이해하고 있다.  추상적인 선은 직선이나 기하학적 선이 아니라 오히려 곡선이고 비기하학적 선이다.   그것은 어디서나존재하는 탈주선이고  '클리나멘'이며, 의식적인 변형인 경우에 조차 니체적인 의미에서   자체로 즐거운'놀이' 이다. 이러한 추상적 선은 유기적인 선이나 기하학적 선에 의해, 구상적인 선에 의해 사로잡히지 않았던 원시인이나 선사시대의 예술에서, 혹은 유목민의 예술에서  나타난다고 한다.  

 

추상적인 선을 직선적인 것이나 기하학적 선으로 환원하는  자체가 그리고 구상적이지 않은 선은 전부 일종의 기하학적으로 양식화된 선이라고 보는  자체가 서구적인 편견이다.  추상적인 것은 기하학적인 것이아니라 유목적인 것이며 그러한 유목민의 추상적 선이 바로 매끄러운 공간을 정의하는  하나의 중요한 특정이라고 한다.   추상적 선이 추상화의 역할을 대신하는 글의 출현과 더불어, 그리고 그러한 글을 만들고 관리하는 제국적 국가장치의 출현과 더불어 구상화되는 경향이 있다. 

 

추상적인 선이 특정한 양상으로 사용되는 경우 구상적인 선이 그려진다고 말할  있다.  구상적인  혹은모방이나 표상은 선이 이러저런 형식을 가질 , 그선들이 어떤 특징으로부터 생겨난 결과다.   구상적 선이 어떤  조건하에서 구상적인 기능을 수행할때 나타난다.  구상적 선은 이미 어떤 형태만을 그리는 한에서만구상적이기 때문에 구상적인 선이 특정한 조건에 따라 추상적인 선이 되었다고는 말할  없는  비대칭성이두선사에 있다. 구상은 추상과 대립되지만 추상은 구상과 대립되지 않는다. 추상적 선은 구상적 선이라는 '대립물' 출현하기 이전에, 대립과 무관하게 이미 존재했기 때문이다. 

 

 패인 선의 체계를 형성하는 요소로 중요한 것이 대칭성이다.  대칭성은 정해진 위치를 벗어나는 모든 선을불합리하고 부적절한 것으로 간주한다.  "직선적인 체계가 반복을 제한하고, 그것의 무한한 전진을 가로막으며, 반사상 내지 별모양으로 중심점과 방사적 선들의 유기적 지배를 유지하는 것이 바로 대칭이다. 저자들은 대칭과 반복을 대비시키고, 반복과 고딕선을 병치한다.   고딕적 선은 형식이 아닌 표현 능력을, 형식으로서의 대칭성이 아니라 능력으로서의 반복성을 지닌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현대적 의미에서 추상적선에 관한 정의를 내린다.  "어떠한 윤곽도 그리지 않고 어떠한 형식을 제한하지도 않는, 가변적인 방향의"이다.  매끄러운 공간  자체가 해방적인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하지만 투쟁이 변화하고 치환되는 것은 바로 거기서고, 생명이 자신의 쟁점을 재구성하고 새로운 장애물과 대면하고, 새로운 스타일을 창안하고 상대를 변용시키는 것도 바로 거기서다. 

 

 

 

4. 국가와  형태들 

국가장치에는 어떠한 형태들이 있으며 어떻게 변화하는가 ? 그러한  변환 요소는 무엇이고, 진화된 국가들과고대 제국국가 사이의 관계는 무엇인가?   질문을 통해 국가의 형태들에 대한 유형학 시도한다.    

 

1) 제국적 고대국가

제국적 고대국가는 관개사업, 대규모 공공사업  국가적 사업 통해 다양한 영토를 하나의 제국으로  통일함으로써 성립한다. 이는 이전에 존재했던 다양한 코드들을 탈코드화하여 단일한 하나의 코드로 통합하는 초코드화과정을 수반한다. 연호나 ,  도량형, 문자 등과 같은 제국적 기표는 제국적 초코드화의 징표라고   있다. 이는 초코드화하는 동시에 새로운 종류의 탈코드화를 동반한다. 

 

이러한 변화 중에 사유재산의 발생을 추적한다.  초코드화하는 국가에 속하는 동시에 국가적 공동체에서 자유로운 사람들이 존재 했다.  해방된 노예” 로서  사유재산의 최초의 씨를 뿌렸다. 대표적으로 그들은  야금술사나 상인,  장인이었다.  장인이나 상인을 구성하거나 유지하기 위해서는 농경적인 생산에서 소비되거나 교환되지 않는 스톡의 비축이 필요했다. 서양, 특히 에게해 지역의 국가들은 국가에  비축된 스톡에 의존하지 않고 동양의 농업 스톡을 이용할  있었다. 이에 따라 이들은 자유로운 지위와 다양한 시장을 향하면서 새로운 계급을 미리 준비할  있었다.  동양에서 초코드화되었던 흐름은 서양에서 탈코드화되는 경향속에 있었던 셈이다.  초코드화에 따른 코드의 잉여가치는 흐름의 잉여가치로 변환되었다. 흐름의 잉여가치는 탈코드화된 상품이 화폐와 교환됨으로써 어떤 것으로 상용될수 있는잉여 가치로 변환 된다. 

 

2) 진화된 제국의 국가적 

서양에서 상인과 수공업자 들의 자유로운 이동이 보장되는 공적 영역 만들어 졌다. 이들은 활동 영역은국가적 업무 였다. 하지만 서양에서는 이들은  동시에  공적-국가적 성경과 무관한 사적 성격을 갖는 사람들이었다.  영주로부터 독립하여 도시적인 국가 형태의 모태가 된다. 국가의 형성 계기는 상인이나 장인들의 활동을 보장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특권적인 이익 단체로의 이행이다.  근대적 의회도 이익들이 충돌하고타협하면서 사적 영유에 부합하는 법적 형식을 만들어 내는 곳인데 사적인 이해관계에 법적이고 공공성의형식을 부여하는 장치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이 명확히 분리 되었지만 근대에 와서는 공적인것과 사적인 것이 섞여 버린다. 사적인 것들이 공적인 것들을 장악하게 된다. 이를 아렌트는 사회 탄생이라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무슨 일을 하든 간에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자신의 활동을 주로 자신과 자기 가족의 생계 유지수단으로 파악 한다는 것이다. 단지 살기 위해서 상호 의존 한다는 사실이 공적인 의미를 획득하고, 단순히 생존에 관련된 활동이 공적인것으로 등장하는 곳이 사회다. 공적인 것이 사적인 것의수단이 된다. 

 

 진화된 제국 경우에는 국가가 이러한 의미의 공적 영역 형태와 결부된 것으로 진화되면서, 이전에는 집합적이고 신분적이었던 그런 관계가 이제는 소유자 사이의 사적이고 인격적인 의존 관계, 그리고 소유자와 비소유자 사이의 사적이고 인격적인 의존관계가 된다. 이때 법은 주관적이고 통접적이고 상례적인 것이 된다. 다시 말해, ‘진화된 제국 법은 누구인가 따라 다른 양상의 규칙들이 분배되기에 상례적이다.  탈코드화된 흐름들의 통접으로 다양한 경우들이 갖는 개별적 고유성을 추상하여 하나의 형태로 통합하거나 탈형식화된 하나의 흐름으로 통합한다는 것이다. 진화된 제국  주체화ㆍ통접ㆍ영유는 탈코드화된 흐름들이 계속해서 흐르고 탈주하는 새로운 흐름들을 부단히 발생시키는 것을 막을  없다. 이러한 흐름들이 모이면서 함께 흐르는 것을 방치하지는 않는다. 흐름의 통접은 국지적인 것에 머물고, 통접적인 일반화는 상례적인  이상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본주의를 위한 조건들은 실존했지만 실행되지 않았다. 

 

3)근대 국민국가

 자본주의 국가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탈코드화된 흐름의 전체적 적분(통합), 선행의 장치들을 범람하고 뒤엎는 일반화된 통접 전체가 있어야 한다.  맑스의 <자본> 1권에서  자유로운 노동자 축적과 일반화된  축적이 결합할   자본주의가 시작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서 일반화된 부란 어떤 것도 교환되고 등치될  있는 부와 재화의 흐름이 되는 것을 뜻한다. 자본주의는 동질화된 부의 흐름이 동질화된 노동의 흐름과 조우하여 그것과 결속될 때 형성된다. 

 

봉건 시대는 하나의 토지에 대해 소유권과 점유권의 이중소유권 관계를 가졌다. 따라서 법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는 보편성의 형식을 취할  없었다. 근대에 이르러 이중 소유권이 해체되고 일물일권주의의 사유재산을 기초로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형식을 취하게 된다.  즉 로마의 상례적인 법과 달리 공리적인 형식을 취하게 된다.  ‘공리 관련된 정리들 전체에 동등하고 동일하게 적용되는 최소한의 보편 규칙이고 다른 정리들이 기초해야 하는 최상위 규칙이다. 이러한 공리적 법은 피지배 계급에 대한 명령문의 형식이 아니라 객관적이고 서술적인 문장으로 씌어지고, 완벽하고 포화된 합리적 체계를 형성하는  가장하며 새로운 공리들이 추가될  있는 방식으로 만들어 진다. 

 

경제는 공적 형식 취할 뿐만 아니라  정치나 그밖의 심급에서 분리하여 독립된다. 이는 경제로 하여금정치의 영토적 제한과 독립적으로 확대되게 하는 탈영토화의 벡터가 내포되어 있다. 이에 따라 자본주의는 국경을 가로 지르며 국적 없는 화폐 대중을 형성한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영토적 국가와 긴밀하게 결부 되어 있다. 국가는 자본의 탈영토화를 조절하고 보완적 재영토화를 제공한다. 자본주의 공리계의 실현 모델이 국민국가 이다  국민은 집단적 주체화의 작동이고 근대국가는 예속화 과정으로 집단적 주체화에 조응한다.  

 

4) 공리계와 실현 모델

공리계란 몇개의 공리에 의거해 추론할  있는 정리들을 체계화된 집합이다. 공리들은 오랫동안 자명하다고 간주되었던 일반적인 명제들이고, 공리계 안에의 어디서나 유효하게 이용될  있는 명제들이다. 이러한 공리계에 새로운 공리가 추가되거나 제거될  있다.  실현모델이란 형식화된 공리적 체계에 기호를 적절한 단어로 바꾸어 만든 실제적인 모델을 지칭한다. 자본주의 공리계가 교환의 공리, 소유의 공리, 가치의 공리, 노동의 공리, 시장의 공리라고 한다면 생산 부문이나 공장, 노동시장 등은 이런 공리계가 실제로 작동하는실현 모델이다. 

 

자본주의를 하나의 공리계로 정의하는 것과 코드화된 체계로 정의하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 ?  공리계란 본성을 특정화하지 않은  아주 다양한 영역에서 동시에 직접적으로 실현되는 순수하게 기능적인 요소나 관계를 그 자체로 다루른 것이다. 반면 코드란 영역이 상대적이며, 질적인 요소들 간의 특정화된 관계를 언표하며, 초월적이고 간접적인 방식으로만 상위의 형식적 통일성에 도달(초코드화)  있을 뿐이다.  중세 도시에서 교환이란 제한된 영역에서 상인들이 맺는 특정화된 관계를 표시해주는 것이란 점에서 공리가 아니라 일종의 코드이다.   모든 특정한 신분적인 코드들을 제거(탈코드화)하여 공리계적 성격을 얻게 되었다. 공리계가 다양한 영역에서 공통된 규칙으로 초월적 규칙으로 군림하고 있다는 점에서 초코드화의 일종이다. 

 

공리계가 다형성은 물론 이형성조차 포괄하는 능력을 갖는다.  예로 자본주의적 세계 시장에서 작동하는 공리계는 사회주의라는 이형적 체제조차도 포괄한다. 사회주의 국가도 세계시장안에서 이윤을 극대화하려는원리에 따라 거래를 한다.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인 노예제 등이 자본주의와 공존하면서 자본에 의해 초과착취를 한다. 이런 점에서 자본주의는 다형적이다라고   있다.  자본주의적 요소를 착취하여 이윤을그대화하려는 자본의 공리에 따른 것이다. 

 

5) 기계적 노예화와 사회적 예속화

기계적 노예화란 인간이  자체로 인간 상호 간에, 혹은 인간과 다른 것들(동물, 도구들) 함께 구성되는기계의 구성요소가  , 그리고 상급의 단위의 통제와 지휘 아래 놓이게  , [기계적] 노예화가 존재한다.” 반면 일하는 인간이 도구나 동물, 기계를 부리고 작동시키며 사용하는 존재로서 관계할 때를 사회적 예속화라고 부른다자본주의와 동력기계는 사회적 예속화를 발전 시켰지만 사이버네틱 기계나 정보적인 기계들은 이른바  인간적 요소라고   있는 것을 기술적 기계자체의 일부분으로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일반화된 노예화 체제를 구성하는  번째 시대를 형성한다 이런 새로운 노예화 체제에서는 인간과 기계의 경계는 모호해 지고, 그에 따라 작업체제가 변하며 잉여가치의 생산은 인간과 기계의 결합체로 기계가 하는 것이다. 잉여가치가 기계적으로 된다고 말한다.

 

 잉여가치에 예로 TV를 예시로 든다. TV 시청자들의 반응과 태도 등에 관한 정보를 수합하고 피드백하여 프로그램을 만든다. 시청자는 TV에서 나오는 정보들로 자신의 행동과 삶을 만들어간다. 이런 측면에서  제작진이나 시청자는 TV기계의 일부로서 TV-기계의 입구와 출구로 TV기계에 포함된 부품이다 노예화되어 있다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TV 보는 것도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것이다.  따라서 시청자도 착취당하는 사회적 노동자 일부라는 네그리 같은 사람의 주장을 이해할 수 있다. 

 

5. 공리계와 현재의 상황 

오늘의 세계 현재의 상황으로 들어가기 전에  개의 개념에 대해 설명한다. '결정 불가능한 명제'와  '가산 집합/비가산 집합'이라는 개념이다. ‘결정 불가능한 명제 수학자 괴델이 증명한 불완전성의 정리에서 사용된 것이다. 괴델 이전에 힐베르트는 모든 수학을 형식적인 공리계로 정리할 것을 주장했다.  그것은 공리계 자체의 완전성 무모순성 증명하는 것으로  완전성은 공리계 안의 어떤 명제도 공리들만으로 참인지 거짓인지를 결정할  있음을 뜻한다. 반면  볼완전성은  결정할 수 없음을 의미하고  결정 불가능한 명제라고 한다. 무모순성은 공리계 안의 명제들 상호 간에 모순이 없음을 뜻한다.  결정 불가능한 명제는 어떤 공리로 증명이 안되지만 반박도  되기에 모든 공리에서 독립적이다. 따라서 결정 불가능한 명제를 새로운 공리로 추가하여새로운 공리계를 구성하는  가능하다. 이는 공리계 안에서 탈주선을 봉쇄하는 것의 불가능성을 보여주는것이며 모든 공리계가  외부를 포함하고 있다는 , 다시 말해 외부를 향해 열려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다음 개념은 가산집합/비가산 집합이다. 가산 집합은 셀수 있는 집합이다.  비가산 집합은 셀수 없는 집합이다. 가산 집합인 자연수를 갖고 만들  있는 부분집합의 수는 분명히 자연수의 수보다 많다.  따라서 그것은 비가산집합이다.  어떤 집합의 원소보다,   원소들을 연결(접속)하여 만들  있는 계열의 수는 항상  많다.  다수자가 어떤 척도적인 요소들의 집합이라면, 다수자가 구성요소들을 추가하여 수를 늘리는 것은 무한히 진행되어도 가산집합을 넘지 않는다. 그러나 소수자는 그와 다른 요소들의 다양한 접속을 통해 정의되는 만큼, 무한히 진행될 경우  확장 가능성을 가산집합에 담을  없다.

 

공리계와 정치학의 근접성에 대해 말하면서 공리계의 특징을 세가지로 요약한다. 첫째, 공리계는 자신의 암중모색, 실험, 직관의 양식을 가지고 있다. 둘째 결정 불가능한 명제들에 직면하고, 통제 불가능한 상급의 능력들과 필연적으로 대결하는 것이 공리계의 성격이다. 셋째  공리계들은 과학의 첨점을 구성하지 않는다.  공리계는 어떤 해결해야  문제를 풀기 위한 추구의 형식이 아니라,  발견된 것을 정리하고 체계화 하는 형식이다.  체계 안에 담을  없는 것을 찾아내서 배제하고, 특이한 것을 체계 안에 담을  있는 방식으로 코드화하는 형식이다. 과학적 발견을 치고 나가는 첨점이 아니라 오히려 정지시키는 점이고,재질서화며 탈코드화된 기호계적 흐름들이 모든 방향으로 탈주하지 못하게  막는 점이다.

 

1)추가와 제거

들뢰즈와 가타리는 자본주의를 하나의 공리계로 본다.  자본주의를 이루고 있는 교환의 공리, 소유의 공리, 가치의 공리, 노동의 공리, 생산의 공리, 화폐의 공리, 투자의 공리  등으로 요약할  있다. 자본주의의 공리계는 정치적 경제적 상황이나 계급투쟁, 전쟁 등의 조건에 따라 새로운 공리를 추가하거나 아니면 있던 공리를 제거한다. 새로운 공리를 하나 추가하면 공리계 전체는  크게 달라진다. 케인스주의적 입장의 공리의 추가를 통해 계급대립이나 공황 등에 대처하고자 하는 입장이라면 실업이나 복지문제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갖고 있는 신자유주의는  추가된 공리를 제거하는 입장이라   있다. 

 

2) 포화

자본주의는 공리를  추가함에 따라 더는 넣을  없는 그런 포화 상태 있을  있는가 ?  공리의 추가로  다른 체제로 넘어갈  있는가?  체계의 포화로 인해 자본주의가 도치/전복되는 일은 발행하지 않는다.  자본주의 공리계의 부단한 재조정, 달리 말해 추가와 제거는 그저 기술-관료들에게 일임해선   투쟁의 대상이다. 공리의 추가나 제거로 자본주의가 전복되는 것은 아니라고 해도 그를 위한 투쟁은 언제나 자본주의적기업의 틀을 넘쳐 흐르게 마련이고 이로 인해 뜻밖의 사태로 진행될  있다는 생각이다. 문제는 공리의 추가로 만족하고 자족하는 것이며, 노동자 계급의 투쟁을 그런 한계 안에 제한하고 가두려는 것이지 공리를 추가내지 제거하려는 투쟁이 아니라는 것이다. 

 

 3) 모델과 동형성

원칙상 중심의 동형성이  있고, 관료주의적 사회주의 국가들에 의해 부과되는 이형성이 있으며, 3세계국가들에 의해 조직되는 다형성이 있다.  첫째  중심에서의 동형성이다. “원칙적으로 모든 국가들은 동형적이다.  국가들은 유일한 외부적 세계시장의 하나의 함수로서 자본의 실현 영역들이다  단일한 세계시장을가질  사회주의도 역시 동형적이다.  둘째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이형성이다.  생산양식이 자본주의적이지 않을 뿐만아니라 생산관계가 자본이 아니께 때문에 진정한 이형성이 존재한다. 셋째 남북간의 다형성이다.  자본주의에서  축적이란 일국적인 것이 아니라 세계적인 규모에서 이루어지며 중심부에서 축적은 주변부의 착취와 수탈을 전제하며, 그것을 통해 이루어진다.   3세계의 다형성은 식민화의 대체물을 제공하는공리로서 부분적으로 중심부에 의해 조직된다. 

 

4)능력

잠재적인 것으로 존재하는 것을 지칭하며 주로 전쟁기계나 금융적,  산업적,  군사기술적 복합체 등과 관련된능력 내지 권력을 지칭하기 위해  단어를 사용한다.  전쟁이라는 제한되고 특수한 경우에만 현재화되는 잠재력으로서(하지만 현실적인 것으로서) 전쟁능력을 갖고 있기에  개념을 사용한다.   공리계는 지극히 다양하고 미시적인 영역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법칙(공리) 작동케 하며 탈코드화된 흐름에 작용하기 때문에일종의 초코드화라고   있다. 하지만 공리계가 만들어낸 어떤 결과물이 공리계가 다룰  있는 능력이나범위를 벗어나는 사태를 막을  있는 방법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예로 국가의 포획 아래의 전쟁기계가  전쟁이라는 목적 자체를 위해 국가나 정치를 움직이게 한다.  이때 전쟁기계는 자본주의 공리계가 다룰  있는 범위를 이미 충분히 넘어선 것으로   있다.  

 

5) 포함된 3

포함된  3항이란 말은 상당히 모호하다.  수학에서 이말은 배중률의 부정과 관련되어 있다.  배중률은 수학에서 ‘A라면 A이고, A 아니면  ~A 이도저도 아닌 중간은 없다는 것이다.  중간(3)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무한집합에서 배중률이 적용될  없는 경우가 수학적으로 존재한다.  저자들은 아마도  중심과주변, 선진국과 후진국, 북과 남이라는 이항성을 넘어서는  다른 중간을 말하려는 뜻에서 이말을 사용한 같다.  1세계 안에 존재하는  3세계라는 현상을 지칭한다. 미국의 경우에도 내부적  3세계라고  있을 만한 비참한 생활을 하는 부분이 매무 광범위하다. 

 

6) 소수자들

우리의 시대는 소수자의 시대가 되고 있다다수자의 척도적 규정에 벗어난 자들이고 이런저런 공리로 부터 편차 내지 격차를 갖고 분리되는 자들이다.  백인이 다수자라면 이 집합은 셀수 있는 가산 집합인 반면 소수자로서 비백인이란  모든 규정에 부정어를 붙인  그것들로 만들  있는 모든 부분집합 전체이다. 따라서 비가산집합이다. 어디서든  동질성을 통해 정의되는 것은 다수자처럼 가산적이다. 반면 이질성과 혼혈성에 의해 정의되는 것은 모든 규정 가능한 혼합 전체를 포괄하기에, 모든 규정 가능한 부분집합 전체를 포함하게 되어 비가산집합을 형성한다. 소수자의 능력은 비가산적인 능력, 접속과 생성 능력, 혼성의 능력, 예측하지 못했던 새로운 선을 생성하는 능력에 의해 측정된다고    있다. 새로운 생성의 선들에 의해 이질적인 것들을 새로이 접속하는 능력에 의해서 정의 된다. 

 

자본주의적 공리계와 다른 삶의 방식을 그런 삶의 지대를 만들어가는 운동을 자율주의라고 정의한다면, 이는 분명히 자본주의 공리계의 틀을 이미 충분히 넘어서는 그런 지점들을 만들어 내고 그것을 촉발하며 증식되도록  것이다수자 운동에서 중요한 것은 비가산집합적인 생성을 계속  만들어낼  있는가의 여부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국가나 공리적 과정을 통해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소수자의 순수한 생성을 통해 진행되어야 한다. 

 

7) 결정 불가능한 명제

소수자의 소멸이나 통합을 통해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 불가능한 것은 자본축적의 일반 법칙처럼 자본주의 공리계 안에서 결코 제거할  없는 공리들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오로지  모델들을 가로지르고 혼란시키는 비가산적인 집합들을 구성하는 가운데서만 자신의 모델들로 봉사하는 가산적인 집합들 속에서 실행된다.  소수자는 통상 거론되는 것처럼 주변인이 아니다.  주변인은 배제되고 소외된 사람들로 다수자들의 요건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다.  주변인은 상태에 의해 정의되며 대개는 출세 내지 성공의 형태로 다수자가 누리는것을 얻고자 하기 십상이다.  소수자란 자신이 결여한 권력이나 지위등을 개인적으로 혹은 제도적으로 얻고자 하는 것이아니라 다수자를 정의하는 척도 자체를 거부하고 그와는 다른 방향의 삶을 생성해가는 사람들이다.  노동자는 기본적으로 다수자인 자본가와 대비되는 소수자였다. 노동운동은 분명히 그런 소수자 운동으로 시작 했던 것이다.  노동 귀족에 대해 비판한 것은 이미 다수자가 되어 버린 노동자와 노동운동에 대한비판 이었다. 

 

소수자의 능력, 특수성의 능력은 프롤레타리아 속에서 자신의 형상 내지 보편적 의식을 발견한다. 그러나 노동 계급이 획득된 지위에 의해서만 스스로를 저으이하는 , 혹은 이론적으로 정복된 국가에 의해서만 스스로를 정의하는 ,  그것은 자본으로서, 자본의 일부로서 나타날 뿐이고 자본의 계획/구도를 떠나지 못한다. 소수자와 프롤레타리아를 대립시키는  아니라 양자의 접속을 주장할 뿐만 아니라 프롤레타리아가 바로 소수자들의 보편적 형상, 보편적 의식을 담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노동운동을 포함한 어떤 운동도 수수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자 역시 소수적인 의미에서 프롤레타리아화되어야 한다.  프롤레타리아가 획득된 지위에 의해 다수자가 /되는 사태에서 벗어나야 하며 그와 동일한 이유에서 국가권력의 회득과 새로운 지배계급이 되는 것에 의해 혁명을 정의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횡단과 접속의 드넓은 지대, 비가산적인 가능성의 지대에서 결정 불가능한 명제들이 자본주의 공리계의 외부들이 끊임 없이 생성되길 기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결정불가능한 것이란 단지 결과의 불확실성이나 예측 불가능성을 뜻하는  아니다.  그건  차라리 탈주선을 따라 공리계로부터 끊임 없이 이탈하는흐름의 불가피한 공존에 관한 것이고 공리계의 결속과 통합에 반하는 모든 혁명적 접속에 관한 것이다. 결정불가능한 것은 무엇보다도 혁명적 결정의 싹과 장소라고   있다. 

 

 

 

 

 

 

 

 

 

 

리좀은  들뢰즈 가타리의 개념 가운데  가장  알려진   하나일 겁니다.  리좀이란 땅속 줄기 내지 뿌리줄기를 뜻합니다. 식물학적으로 보자면 땅속 줄기는좀  상위 범주이고  아래 뿌리 줄기,   줄기,  덩이줄기,  비늘 줄기, 덩이 뿌리 등이 있습니다. 하지만 철학적 개념으로서   리좀에서 그런 분류학적 구별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그것이 뿌리나 나무를 타겟으로 하는 개념이란 점입니다. 

 

뿌리는 중심이 되는 하나의 주축이 있으며 이로부터 잔뿌리가 차례로 뻗어 나가지요. 옥수수 처럼 수염 뿌리인 경우에는 주축은 없지만 잔뿌리가 하나의 중심에 모여 있습니다.  어느 것이든 확고한 중심이 있고 이로부터 가지를  나가는 형태를 취하고 있죠.  지하에 뿌리  만이 아니라 지상에 나뭇가지도 그렇습니다. 나무 줄기가 뿌리 위로 뻗어 나가고 그로부터 가지들이 분기 합니다. 원줄기가 하나의 확고한 중심 되는게 교목 이라면 여러 개의 줄기들이 지면에서 뻗어 나가는  관목이지만 어느 것이든 하나의 중심에서 갈라져 나갑니다.

 

반면  땅속 줄기나 뿌리 줄기는 중심이 없이 서로 얼기 설기 엮여 있습니다. 뿌리의 경우에는 중심으로부터하나씩 차례로 갈라지며 분기 하기에 잔뿌리 끼리는 연결되지 않습니다.  하나의 잔뿌리 에서 다른 잔뿌리로가려면 상위의 중심으로 올라 갔다가 가야 합니다. 나뭇가지도 그렇지요. 하지만 뿌리줄기는 그물처럼 서로간 연결되어 있습니다. 중심으로   없이 가지에서 가지로 잔뿌리 에서 잔뿌리로 직접   있습니다.  하나씩 차례로 분기하는 중심화된 다양 체가 뿌리나 나무라면 어떤 중심도 없이 가지들이 서로 이어진 다양체가 리좀입니다. 

 

 알려진 것처럼 핵전쟁이 발생했을 때를 염두에  통신망인 인터넷이  바로 이런 리좀적 연결망을 컨셉으로 만들어 졌지요. 수목형 유형의 통신망은 모든 가지들이 상위의 가지와 하나씩 빠짐없이 연결 되기에 어디서든 중간에 절단  곳이 하나만 생기면 중심으로 가는 통신이 두절됩니다. 그래서 어떤 절단이 발생해 중심의 도달할 경로가 끊어지지 않게 복수화  연결망을 채택해서 만든게 인터넷이죠.  이는 역으로 중심으로부터 하나씩 차례로 분화되는 연결망의 무능함을 보여줍니다. 이후 그러한 리좀적  연결 망이 갖는 강력한힘은 누구도 모를  없게 되었고 그것이 연결망의  시대라고 불리는 새로운 시대를 열었지요.  연결망 분석이 통계학 못지 않는 영향력을 갖게  것도 이와 상관적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리좀 이라는 개념은 이후도래할 세계에 대한  대한  지적 감각의 징후적 개념이었다 하겠습니다.  리좀 개념이  알려진 것은 이와무관하지 않을 겁니다. 

 

 인터넷이란 중심과의  통신 가능성을 최대한 확보하기 위해 중심으로  가는 경로를 복수화 했습니다.  중심으로 가는 길이 복수화된 연결망에서는 특권적 중심이 사라져 버립니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중심에 도달할  있는 연결 망은  중심 없는 연결망 이라는 역설을 보게 됩니다. 리좀이처럼 중심을 제거해버린 다양체 입니다. 

 

리좀과 달리 나무나 뿌리는 중심을 같습니다. 그런데 나무나 뿌리라는 말로 겨냥하고 있는 것은 수학이나 생물학 등에서 자주 보게되는 수용도 입니다.  수용도란 점과 선으로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 모든 경우의 수를표시하는 도식이죠. 가령 주사위 2개를 던져 둘다  6 나올 확률을 계산할  앞의  주사위의  눈이 나올 6가지 가지를 그리고 각각의 가지 끝마다 다시 여섯 개씩 가지를 치지요 그래서 나온 전체 갯수 가운데 6   나오는 가지의 수를 세서 확률을 구합니다. 인공지능이  찾기를  때도 이런 식으로 했었지요.  가지치기를 반복하여 그리고 각각의 경우마다 확률이나 비용 같은걸 계산했습니다.  이는 생물학을 비롯해 분류를  때도 흔히 사용합니다.  생물계를 세균, 고세균, 진핵생물  나누고,  진핵 생물을  원생 생물,  조류,  균류,  식물, 동물로 나두고 동물은  척추 동물과 무척추 동물로 나누고 하는 식으로 분류의 가지를 쳐나가지요. 진화의 역사도 이렇게 수용도를 그리며 분기되는 수용도로 그려집니다.  촘스키는 이를 언어에 대해 사용합니다.   모든 문장을 명사구와 동사구로 나누고 나누어진 각각의 구를 다시  둘로 나누지요.  어느 경우든  점에서 나무 가지가 펼쳐지고 각각의 끝점에서 다시 가지가 분기하는 모양으로 그려지는 수용도가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생명의 역사는 이런 수용도가 부당함을  보여 줍니다.  수용도로 표상되는 생물의 진화는 하나로부터 다른 가지들이 분화되어나온다는  가정하고 있습니다.  영장류에서 침팬지와 인간이 갈라져 나오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핵이 없는 생물이 분화되어 핵이 있는 생물이 나올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없던 핵이갑자기 생기는 기적을 가정 해야 하니까요. 이런게 돌연변이 라고 하면 돌연변이는 생물학적 기적의 다른 이름이 됩니다. 미토콘드리아  엽록체  대한 연구가 보여주는 것은 그런 세포 소기관은  미생물이 다른미생물을 잡아 먹었으나 소화시키는  실패함으로써 뜻하지 않게 시작된 공생의 산물이라는 겁니다. 다시말해 하나의 생물이 둘로 갈라지는  아니라  개의 다른 생물이 합쳐지며 세포 소기관을 가진 생물이 탄생한 겁니다. 다세포 생물  그렇습니다 단세포 생물이 아무리 갈라지고 분화되어 봐야 다른 단세포 생물이  다세포 생물이   없지요.  세포 생물들이 결합되어 하나처럼 살기 시작할  다세포 생물이 탄생합니다.  역시 분기가 아니라 접속을 통해 진화가 이루어졌음을  합니다.

 

이처럼 접속 내지 동맹을 통한 진화는 다른   아니라 다른 ,  사이에서도 발생합니다. 가령 지의류(이끼) 균류와 녹조류가 결합되어 탄생한 공생체 입니다.  인간 세포 안에 미토콘드리아는 인간이란 종이 알파 프로테오박테리아와  세균이 합체한 사건의 산물임을 증언하고 인간의 유전체 안에 있는 바이러스의  유전자는 그렇게 합체된 신체에 다시 바이러스가  합체한 사건의 증거 입니다.

 

들뢰즈 가타리는 난초와 말벌의 예를 통해 독자적 유기체로 개체와  생물 사이에서도 이런 접속과 동맹이존재함을 지적합니다. 난초는 꽃으로 말벌 암컷의 형태를 만들어 말벌을 불러들이고 꽃에 앉은 말벌의 꽃가루를 잔뜩 빨라 수정을 하지요.  이를 두고 말벌은 난초의 의태에 속한 것이니 일방적 이라 한다면 그건 말벌이나 생명체의 능력을 너무 졸로 보는 것입니다.  그저 속은 것에 불과하다면 기나긴 진화의 시간 동안 그런행동을 지속 했을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생각은 수정이나 섭식 만이 생명 활동의 목적 이라고 보기 때문에 발생하는 오해입니다. 오히려 말벌의 그런 행동이 오랜 세월 지속되고 있다면 그들 나름대로 거기서 어떤 이득을 얻고 있는건 아닐까 생각해야 합니다. 그들은 과연 거기서 어떤 이득을 얻고 있는 것일까  물어야 합니다.  가령 포르노가 수정이나 번식에 도움이 되지 않을  아니라 씨라는 소중한 자원을 낭비 함을 알면서도 그걸 즐기는 어떤 종을 보면   또한 그걸 즐기고 있는 것이라고   있지 않을까요. 사실 인간보다  리얼하게 즐기고 있다고   있지 않나요. 수용도의 모델은 순차적 분화의 가정으로 생명체  진화를 이해하려 합니다 반면 이러한 동맹으로 인해 발생하는 비평 행적 진화는 비약적 접속이 진화의 분기점일 가능성을 보게 합니다.  씨를 퍼트리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혈통적 분화 대신 혈통의 계보를 뒤흔드는 횡단적 소통이 사실은 생명의 역사를 이끌어온 것이라는 겁니다.  리좀이란 이런 점에서 생태의 본질과 역사에대한 근본적으로 새로운 생각과 잇닿아 있습니다. 마군 리스가 발견했고 전광우가 아메바를 연구하는 실험실에서 확인한 공생 진화는 리좀적 사유와 독립적으로 진행된 일종의 비평행적 진화의 사례라 하겠습니다.  유기체를 유전자의 생존기계로 다룬 이론이 씨뿌리기의 혈통주의를 미시적으로 확장 것이라면 리좀적 사유는 미생물과 유기체 사이,  종과   이를 넘나드는 횡단적 동맹주의를 모든 영역으로 확장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언어도 그렇습니다.  명사구와  동사구라는  개의 가지를 갖는 구조적 보편성 같은 것은 가령 추워 오늘밤 같은 단어 하나만으로 아주 다른 수많은 의미를 표현할  있다는 사실 만으로 쉽게 웃어넘길  있습니다.  거기서 같은 단어가 다른 의미를 갖게 만드는 것은 문법 구조가 아니라 어조이고 표정 이지요.  어떤어조,  어떤 표정이 접속 되는가에 따라 같은 단어도 다른 말이 되는 겁니다.문장이 명사구와 동사구로 분기하는게 아니라 단어와 어조,  표정 같은 이질적인 것이 접속함으 로써 의미가 생성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질적인 것들의 접속 이것은 바로 리좀을 규정하는 핵심적인 원리입니다.  어떤 선도 다른 선과 이어지며 선위에 어떤 점도 다른 점과 이어질  있다는  그것이 접속의   번째 원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접속이나동맹을 다룰 때에도 동질적인 것들 간의 동등한 층위에서 그렇게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정치적 동맹을 다룰때는 국가  혹은 부족간 등의 동등한 층위에서 다루고,  생물의 동맹을 다룰 때는 인간과 ,  악어와 악어새  동등한 수준에서 다루지요.  그러나 유기체인  우리는 우리 신체 내부에 미생물과 동맹을 맺고 있죠.  정치적 동맹 조차 국가와 부족 혹은 군대와 지형,  무장한 사람과   상이한 층위에서 발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언어적 기호와 표정의 동맹도 있습니다.  이처럼 접속하는 것들의 이질성이 리좀의 두번째 원리입니다. 

 

  원리라고는 하지만 철학이나 과학 정치 등에서 흔히 원리 라고 하는 것과는 아주 다른 원리입니다 흔히 원리 라고 하면 거기에는 모든 것의 기원이자 모든 것이 귀착되는  중심 모든 것을 규정하거나 규명하는 하나의원리 모든 것을 통일하는  근거 등의 의미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이를 철학에서는 흔히 일자라고 하지요.  그러나 접속이나 이질성  원리    거기에는 접속을 규제하는 통일성이나 구현  내용이 없습니다.  접속되는 것들을 통합하는 중심도 없습니다.  따라서 이는  원리라 하기 어렵습니다.  원리 아닌 원리인 거지요나아가 들뢰즈 가타리  이러한 일자를 제거함으로써 구성되는 다양 체가   이라고 정의합니다 이는 통일하고 규제하고 동질화하는 원리를 제거하는 것을 원리로 한다는 점에서 원리에 반하는 원리를 갖는다 하겠습니다

 

리좀을  N - 1 이라고 표기하는 것은 이런 의미를 표현하기 위함입니다 n개의 부분들로 이루어지는 다양체가 진정한 다양체가 되려면  다양체  부분이 다양성을 구성하는 힘을 제대로 가동 시키려면 일자를 제거해야 한다는 겁니다.    일자는 이데아 같은 초월적  모델일 수도 있고  같은 초월자 일수도 있으며 단일한 법칙이나 초월적 좌표계 어디에서나 발견되는 동질화  최소 단위  같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환원적 사유 안에서 환원의 거점이  유전자나 원자도

그렇습니다.  이러한 일자  제거할  비로서 부분마다 다르고 분할  때마다 달라지는 연속적 다양체가가능해집니다. 접속과 이질성에 이어 리좀의 세번째 원리가 다양체 라고 함은 이런 뜻입니다. 

 

이러한 다양체는 주체도 대상도 없고 의미도 모델도 없습니다.  알파 프로테오 박테리아와 고세균이 공생체를 이룰  잡아 먹었지만 먹는데 실패했으니 고세균이  주체가 아니며 잡아 먹혔으나 먹히지 않고 살아남았으니 박테리아 또한 대상이 아닙니다.  고세균이 주체 이고 박테리아가 대상이라면 먹이를 먹어 치운 고세균 있을  공생체는 없을 겁니다.  뜻하지 않은 사건을 통해 접속한 공생체가 있는 것이고 ,  새로운 개체에 말려 들어가간 박테리아와 고세균이 있는 겁니다. 난초와 말벌도 다르지 않습니다.  난초에게 말려 들어갈 말벌은 난초의  욕망을 대응하기에 주체가 아니며 또한 그의 욕망만 구현한  아니기에 그저 대상인 것만도 아닙니다. 서로를 맴도는 쌍둥이  처럼 하나의 배치로 말려 들어간 것들의 공동체가 있는거지요. 의미도그렇습니다.  실패한 섭식기계의  공생체가  박테리아는 먹이라는 의미를 벗어나,  고세균  또한 포식자란의미를  못합니다. 양자가 접속하여 출연한 사건은 차라리 포식 이라는 통상적 의미와 단절 하며 이루어지고 먹혔지만 살아남은 박테리아는 먹이라는 의미와 단절 하기에 동맹자가 됩니다.  이런 점에서 리좀은 의미화 하지 않는 단절을  하나의 원리로 합니다.  

 

말벌을 불러들이기 위해 난초 꽃이 말벌 암컷의 형상을 만드는 것을 모방이나 모사라고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겉으로 드러난 유사성 만을 보기에 그런 겁니다.  난초가 그런 모습을 만들  그것은 말벌을 흉내내기 위해서  아니라 말벌의 신체 활동을 자기 신체로 재영토화  하기 위한 겁니다.  말벌은 난초를 통해 자기 신체로부터 탈영토화  되어 다른 길로 이탈하게 됩니다.  현실 속에서 새로운 길을 찾기위해 자신에게 없는 것을 만들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아닌 다른 이의 삶에서 무언가를 배우고 모방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우리는 그저 모방 하는게 아니라  삶을 위한  길을 찾고 시험하고 있는 겁니다. 모사가 아니라  영토화탈영토화를 위한 지도 제작이 있는 것이라 함은 이런 뜻입니다.  이것이 리좀의 다섯번째 원리입니다.  이를달리 말하자면 지도를 만들며 난초와 말벌도 고세균과 박테리아도 그런 식으로 서로가 서로의 코드를 포획하여  잉여 가치를 이용하고 있다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모방 조차 사실은 애초의 코드를 탈코드화하는 것이고 모상을 코드의 여백을 이용해 해체하는 것입니다. 리좀의 6번째 원리가 모상의  해체를 뜻하는데칼코마니 이라 함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리좀은 모든  위에 군림하며 모든 것을 통일하는 일자  제거한 다양체 라고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모든 것을 초월적 일자로 환원하는서구의 오래된 초월성의 사유와 반대 편에 있습니다.  일자가 사라지면모든 것은 그것이 접속하는 다른 것에 의해 그때마다 다른 본성을 갖게 됩니다.  다양체는 외부에 의해 정의된 다는 말은 이런 뜻입니다. 그것은 추상적인 선에 의해  탈주선 내지 탈영토화의 선에 의해 정의 되며  선을 따라 가며 이루어지는 다른 다양체와 접속에 의해 다양체는  본성을 바꾸게 됩니다.  이는 내재성의 구도를 향해 사유를 개방합니다.  어떤 곳에 본성도 그것과 접속하는 것과의 관계에 내재적 이라는 의미에서 어떤 것도 자신이 접속하는 것의 원인인 동시에 그것에 의해 결국 자신이 규정한 이웃에 의해 규정되는 결과 라는 의미에서

 

 

 

 

 

 

 

 

주말에 전철을 전철을 타고 가다 내렸다. 특별한 목적 없이 주위를 돌았다.  전철에 주변에 릭샤가 있고 버스터미널이 있었다. 길거리 음식도 빠지지 않는다.

 

 

전철을 타고 내리는 사람들

 

 

 

전철역사 

 

전철역 주변 버스 터미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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