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응은 ‘느끼고 응한다’ 뜻이다. 특정한 관념이나 기분의 상태, 결정된 느낌 따위가 아니라 말 그대로 이질적인 것과의 마주침을 ‘느낄 수 있고’, 그 만남에 ‘호응할 수 있는’힘 자체이다. 이 같은 감응의 힘 곧 능력에 따라 우리는 우리 아닌 것과 관계 맺게 되고, 또 다른 우리로, 혹은 어떤 다른 무엇으로도 변화될 가능성을 얻는다. 요컨대 감응은 우리의 존재론적 기초라 할 만하다. 살아가면서 환경과 사건을 마주하고 이에 대한 감응으로 현재의 내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감응이라는 개념 자체는 이미 오래전부터 제안되었고, 세공되어 왔다. 스피노자는 <윤리학>에서 감응을 논리적 인식 이상의 힘으로 간주 했고,이로써 인간과 자연, 세계의 변화를 지각하는 능력으로 정의한 바 있다. 근대적 주체를 명료하고 뚜렷한 의식의 담지자로 한정했던 데카르트와 달리, 스피노자는 감응이 신체와 정신을 일관되게 관통하고 상호작용하도록 만드는 실제적 힘으로 규정지었다. 이성이 감성을 지배하고 정신이 신체를 통제한다는 코기토의 전제주의에 맞서 스피노자는 신체와 감성의 종속성을 부정했고, 나아가 후자들이 인간 주체와 자연 및 세계의 상호관계와 역동의 줌심에 있음을 주장했던 것이다. 신체와 감성적인 것이 정신과 이성적인 것을 견인하거나 인도한다고 말했을때, 스피노자가 염두에 두었던 것은 바로 신체와 감성이 내포한 능력이었기 때문이다.

스피노자 이후 감응의 개념은 정신분석을 통해 이론적으로 더욱 진전되었다. 성적 에너지로 정의되는 리비도는 동시에 무의식적 감정의 에너지고, 전이를 통해 개인 사이에서 교환되고 순환하는 힘으로 정의되었다. 이러한 정신분석의 성과를 비판적으로 이어받은 들뢰즈는 무의식적 욕망을 통해 감응의 동력학적 사유를 심화시켰다. 프로이트가 무의식을 억압된 것으로 규정한데 반해 들뢰즈는 본연의 무의식이 있음을 지적했으며, 이는 차이화하는 힘으로서 비인간적인 욕망의 존재를 가리킨다. 달리 말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 개인의 숨겨진 과거를 해명하기 위해 그의 정신적 비밀을 캐묻고 그 답안을 끌어내기 위해 리비도라는 감응적 에너지를 문제화 했다면, 들뢰즈는 개인과 개인의 연결을 넘어서 인간과 사회, 자연과 세계 전체를 관련짓고 운동하게 만드는 우주론적 힘의 문제로서 감응을 조망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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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살아가면서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과 사물들을 만나고 부딪친다. 어떤 경우에도 피할 수 없는 이 부딪침이나 만남이 나에게 변화를 만들어 낸다. 이러한 외부의 자극을 감지하여 발생하는 정성적 반응을 감응이라고 한다. 스피노자는 이러한 감응을 크게 ‘기쁨’과 ‘슬픔’으로 구분 한다. 스피노자는 <에티카> 에서 욕망, 기쁨, 슬픔에서 시작하여 비루함, 경탄, 경멸, 사랑, 믿음, 싫음 등 40가지 감정을 정의 하고 있다. 정서적 반응은 이렇게 다양하지만, 이 많은 정서적 반응을 ‘기쁨’과 ‘슬픔’ 두가지로 분류 할 수 있다. 이 두개념은 다른 정서적 반응과 구별되는 정서들의 계통을 표시한다. 하지만 기쁨과 슬픔이라는 다른 정서들과 함께 표시되면 그 많은 정서 중의 하나가 되어 혼동을 피하기 어렵다. 철학자 이진경은 이를 피하려면 수많은 정서들 중 일부인 ‘기쁨’, ‘슬픔’과 구별하여, 그 정서 들을 능력의 증감에 따른 반응을 표시하는 ‘고양감’과 ‘저하감’ 혹은 훨씬 단순화된 ‘쾌감’, ‘불쾌감’으로 표현 한다.  신체의 능력이 증가할 때 흔히 말하는 기쁨이 발생되고, 감소할때 불쾌감이 발생된다. 이 쾌감과 불쾌감에는 그에 상응하는 어떤 정서적 반응이 동반된다. 즉 쾌감에는 기쁨에 속하는 정서적 반응이, 불쾌감에는 슬픔에 속하는 정서적 반응이 동반된다. 외부의 자극을 감지하여 발생하는 이 정서적 반응은 주어진 자극에 적절하게 대응하는 어떤 작용 내지 행동으로 이어진다. 혹은 좋음/싫음이라는 판단을 동반하는 기억을 통해 이후 유사한 종류의 자극을 다시 얻고자 하거나 미리 피하려 하는 태도로 이어진다. 이처럼 감지된 촉발에 응하여 발생하는 정서적 반응들의 집합이 감응이다.(감응의 유물론과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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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응'이란 말은 'affectus'라는 라틴어의 번역어 이다.  스피노자의 <에티카>에서 사용했던 개념이다. 국역본에서는 '정서'라고 번역되어 있고, 일본에서는 그런 감정이나 정서가 어떤 동적인 힘을 갖는다는 의미에서 '정동'이라고 번역하는데, 정서라는 말에 만족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이런 일본어 번역어를 그대로 채택하기도 한다. 

 

스피노자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양태'라고 하고 이 양태들이 서로에 대해 맺는 관계를 '변용/촉발'이라고 한다. 각각의 양태는 서로에게 변용을 가하는 촉발로 존재하며, 그로 인해 다른 양태들에게 변용을 야기한다. 어떤 양태가 다른 양태와 만나는경우 능력이 감소할 수도 있고 증가할 수도 있는데, 전자의 경우에 느끼는 감응/감정이 '슬픔'이고, 후자의 경웨 느끼는 감응/감정이 '기쁨'이다(물론 다른 감정/감응들도 있지만 그본적으로 이 두감정/감응과 결부되어 있다). 이처럼 어떤 양태가 다른 양태의 촉발/변용에 응하여 갖게 되는 감정/정서라는 점에서 이를 '감응'이라고 할 수있다. 역으로 다른 양태에 특정한 느낌을 야기하는 것 또한 감응 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감응이 어떤 강한 힘을 가질때  그것을 우리는 '감동'이라고 부르며, 그정도는 아니어도 무언가 움직이게 하는 힘을 행사했을때 '감흥'이라고 할수 있다. 이들 모두 내적 강밀도에 따른 감응의 양상을 표현하는 개념으로 사용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는 '감응'이란 말에 어떤 움직임이나 움직임을 야기하는 힘이 포함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정동'이라는 말에 끌리게 되는 요인을 이 번역어가 포함하고 있음을 뜻한다. 

 

'감정'과 '감응'을 구별할 수 있는데 감정이 인간처럼 어떤 유기체 전체가 느끼는 것이라면 ("나는 기쁘다", "그는 화가 났다") 그래서 인간과 같은 유기체에 고유한 것이라면, 감응은 모든 양태에 적용되는 것이고 유기체를 전제하지 않는다. 가령 어떤 칼이 섬뜩하고 무서운 느낌을 줄때, 그것은 그 칼에 대한 '나'의 감정이라기 보다는 바로 그 칼에 속하는 감응이라고 할 수 있다. 짐수레를 끄는 말은 말보다는 차라리 '소'와 같은 느낌을 준다. 그것 역시 '나'만의 주관적 감정이 아니라 '말'에 속하는 감응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무협영화에서처럼 손으로 무언가를 때리고 부스는 겨우에 우리는 그 손에 대해 "몽둥이 같다"거나 "칼 같다"는 감응을 갖게 된다. 이 역시 그 손에 귀속되는 감응이다. 스피노자가 호랑이를 고양이와 같은 과로 묶을 것이 아니라 애완 동물과는 전혀 다른 '맹수'라는 개념으로 분리할 것을 주장할때, 그는 바로 이런 감응에 따른 분류법을 제창하고 있는 것이다. (노마디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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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치란 사람과 사물, 동물 등 이질적인 것들이 결합된 다양체 입니다. 역으로 어떤 다양체의 특이성을 표현해주는 특지점들의 분포를 뜻하기도 합니다. 배치는 일단 기계와 인접한 개념으로 시작됩니다. 가타리는 구조화된 질서로부터의 절단으로 기계를 정의한 바 있습니다. 이는 유기체적 구조로부터 절단 된 것으로서의 부분 대상이나, 라캉이 말하는 대상 a와 가까이 있습니다. 물론 가타리는 구조화된 장안에 주체와 반대로 구조에서 벗어날 수 있는 탈열토화의 지점임을 강조합니다. 다른 한편 들뢰즈는 구조주의의 중요한 기여로 계열적 사고를 강조하며 수용하지만 구조적 동영성을 벗어나는 지점으로 밀고 갑니다. 이러한 사고가 만나는 지점에서 탄생한게 안티 오이디푸스의 기계 개념이죠.

기계는 이웃항과의 계열화 양상에 따라 특정한 규정성을 갖게 되지만 동시에 다른 이웃항과 계열화 되면 그 규정성에서 이탈하여 다른 규정성을 갖게 됩니다. 다른 기계가 된다는 말이죠. 이는 그때마다 그렇게 접속된 기계들의 복합체가 있음을 뜻합니다. 이것이 배치입니다. 가령 종이는 문자, 관료, 돈과 접속하여 세금을 기록하는 서류 기계로 작동합니다. 또 그것은 문자, 시인, 독자와 접속하여 시를 기록하는 기계로 작동합니다. 기록하는 기능을 한다는 점에서 비슷해 보이지만 전자에서 기록은 세금이라는 사물의 이름을 야기한다면 후자 에서 기록은 시정이라는 감응에 이름을 야기합니다. 이때 종이, 문자, 관료, 돈이 서로 접속된 복합체가 조세의 배치를 구성한다면 종이, 문자, 저자, 독자의 복합체는 문학의 배치를 구성합니다.

배치란 이처럼 복수의 기계들이 접속하여 만들어지는 다양체를 뜻합니다. 여기서 배치는 구조라고 부르는 것과 어쩌면 유사한 이론적 기능을 합니다. 그것은 상이하게 반복되는 특이성을 표현 하기 때문이죠. 문학이 배치 안에서라면 종이에 기록된 것은 숫자 나 그림 조차 작품이 됩니다. 그것이 과연 훌륭한 것인지는 별개 이지만 말입니다. 구조 개념과 다른게 있다면 배치란 구조와 달리 쉽게 다른 배치로 이행한다는 것입니다. 가령 문학의 배치에 돈을 하나 추가한다면 얼마나 팔리느냐가 기록되는 것을 규정하는 아주 다른 배치로 넘어갑니다.

또 하나의 다른점은 구조라는 개념은 계열화 되는 항들을 동질화 하는데 반해서 배치는 이질적인 것 그대로 계열화 한다는 것입니다. 가령 한 언어의 구조를 말하려면 소리는 음소라는 동질적 대상으로 환원해야 하고 문장의 의미는 형태소나 통사 같은 동질적 성분으로 환원해야 합니다. 반면 배치 개념은 단어와 표정, 손가락, 어조 같은 아주 이질적인 것들을 그대로 계열화하여 낭독의 배치, 욕설의 배치, 강의의 배치 등 상이한 배치들을 구별하고 해명할 수 있습니다.

기계와 배치 개념의 이러한 인접성 때문에 안티오이디프스에서 배치는 기계적 배치로 한정되어 사용됩니다. 즉 안티 오이디푸스에서는 언표 행위의 배치란 개념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대신 언표 행위의 집합적 대행자라는 개념이 사용될 뿐입니다. 반면 그 이후에 쓴 카프카 나 천의 고원등에서는 배치는 기계적 배치와 언표 행위의 배치로 구별되고 양자에 대해 모두 등가적인 의미로 사용되죠. 나아가 기계적, 언표 행위와 같은 관형어 없이 그 자체만으로 사용됩니다. 카프카의 마지막 장 제목의 배치란 무엇인가 ? 라는 점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 줍니다.

천의 고원은 한마디로 말해 배치에 대한 책입니다. 먼저 이 책의 각각의 고원은 언어와 기호, 유기체, 얼굴, 사회와 정치, 국가, 예술 등에서 발견되는 다양한 배치에 대한 분석입니다. 또한 그러한 영역에서 삶의 양상을 형성하는 욕망과 권력의 배치에 대한 분석이며 각각의 배치에서 영토화와 탈영토화의 선이 그려지는 양상에 대한 분석입니다. 혹은 그런양상 들을 형성하는 다양체로서의 무의식에 대한 분석이 고 하나의 배치에서 다른 배치로 이행하는 강도적 변이에 대한 분석입니다.

약간 각도를 바꾸어 보면 천의고원은 배치라는 중간을 통해 지층화 된 것을 영토화 하고 탈영토화 하는 운동에 대한 책이며 지층들로부터 탈 영토화 의 선을 밀고 나가 추상 기계와 일관성의 구도에 이르는 길을 찾는 책입니다. 개념에 대한 사전 인양 서술된 이 책의 결론에서 우리는 이러한 사회의 흐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구체적 규칙과 추상적인 기계들 라는 부제의 결론은 지층, 지층화에서 시작하여 배치로 이어집니다. 그 다음에 그 배치의 양상을 서술하는 리좀이란 개념을 통과한 뒤 일관성의 구도, 기관 없는 신체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거기에 탈영토화와 추상 기계가 부가 되면 끝나죠. 지층이 구체적 규칙의 가장 완고한 극 이라면 그 규칙이 추상화 되어 이루게 되는 강도 영의 순수 잠재성이 그 반대 극입니다. 추상기계가 그리고 절대적 탈영통화를 통해 도달하는 일관성이 구도가 거기에 있지요. 이러한 사유의 흐름은 대부분 고원이 지층화된 것들의 배치에서 시작하여 일관성의 구도로 마무리 된다는 사실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배치는 지층 들 사이에 있다는 점에서 간지층이 라는 말은 이런 의미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천의 고원에서 모든 배차가 4가성을 갖는다고 합니다. 먼저 기계적 배치와 언표 행위의 배치는 하나의 배치가 갖는 두성분 혹은 두 가지 속성을 표시합니다. 달리 말하면 이는 내용과 표현 이라는 성분인데 전자가 신체적인 것에 속한다면 후자는 비신체적인 것에 속합니다. 실체의 두 속성에 대한 스피노자의 개념과 대응하는 구별이죠. 다른 한편 모든 배치는 그에 속한 요소들을 결합하여 안정화하는 재영토화힘을 갖는 동시에 그로부터 이탈하여 다른 배치로 이행하는 탈 영토화의 첨점을 같습니다. 예컨대 내용과 표현 혹은 기계적 배치와 언표 행위의 배치라는 두 성분과 그 각각의 포함된 재영토화 하는 힘과 탈영토화에 첨점이 모든 배치의 포함된 4가성을 표현합니다.

예를 들어 학교는 강의실이 라는 분할된 공간, 교탁과 책걸상, 나이에 따라 동질화된 학생들 교과서 등이 결합된 기계적 배치로 구성 되죠. 또한 교사나 학생들의 언행을 규제하는 규칙들 교육에 대한 지식들 지위에 따른 발언권의 분배, 발언의 내용과 방식을 규정하는 규칙들 등으로 구성되는 언표 행위의 배치가 거기에 동시에 있습니다. 언표 행위의 배치는 신체적 기계적 성분들이 서로 부딪히고 조절 되는 양상을 규정하며, 기계적 배치는 그러한 언표 행위들이 물리적 유연성을 갖게 하는 조건이 됩니다. 다른 한편 교육의 중요성이나 교육방법, 시험이나 처벌의 유용성 같은 것은 상이한 기원을 갖는 이질적인 것들을 하나로 묶어 재영토화 합니다. 반면 교사, 학생 관계 만큼이나 학교에 중요한 요소인 학생과 학생의 관계는 가르치고 배우는 학교의 배치로부터 이탈할 수 있는 가능 지대를 형성합니다. 시험으로 환원되지 않는 관심이나 능력, 교육의 기능을 초과하는 처벌 등 도 그렇습니다. 이러한 요소들이 학교의 배치 안에 존재하는 탈영토화할 첨점이라고 하겠습니다. 여기에서 작동하는 탈영토화의 힘이 재영토화하는 힘을 초과할 때 학교의 배치는 다른 끝으로 이행하게 됩니다.

들뢰즈는 배치야 말로 현실적 최소 단위라고 말합니다. 최소한의 현실적 단위는 단어도 관념도 개념도 시니피앙도 아닌 배치입니다. 이는 문학과 관련해 한 말이므로 언표 행위의 배치에 직접 해당 되는 말이지만 기계적 배치도 다르지 않습니다. 요컨대 현실에서 활동하는 최소 단위는 주체도 개인도 사람도 생물도 아닌 배치입니다. 가령 학교에서 건물이나 책상이 독자적인 활동 단위가 아닌 것처럼 교사나 학생 교장 또한 독자적 활동 단위가 아닙니다. 사실 사람을 언제나 주체라고 보고 다른 요소들을 그의 도구라고 보는 인간 중심적 관념으로는 뭔 소리야 라고 할 얘기지요. 하지만 하나의 배치안에서 함께 작동하던 이웃 기계들 없이 집이나 카페 같은 곳에서 개인이 교사의 언행을 하게 된다면 또라이 아니면 꼰대가 됩니다. 현실에 존재하는 최소 단위가 배치 라고 한다는 것은 이러한 뜻입니다.

그럼 배치 안에서 사람이나 사물 등 각각의 기계는 대체 무엇이고 그들의 행동은 무엇이냐 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그 배치가 요구하는 바를 실행하면 대행자 입니다. 여기서 배치 라는 말이 프랑스어 앙자스망의 번역어 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장쓰는 대행사무소 나 중개소를 뜻 합니다. 누군가로 부터 부여받은 과제를 수행하는 대행자와 직결된 말이죠. 들뢰즈는 말년에 저작 다이얼로그에서 아장쓰 라는 동사 또한 이와 연결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는 영역본에서는 어셈블링 이라고 되어 있어서 에이전트와 결부된 의미가 살아나지 않습니다. 뭐뭐를 위해 말하거나 뭐뭐를 대신해 말하는 것이 대행 이지요. 혹은 과제를 부여한 누군가와 함께 말하고 함께 쓰는게 대행입니다. 연예인 에이전씨가 표방하는 게 이런 말이죠. 무역상 이나 대리점도 그렇습니다. 누군가를 위해 그가 부여한 과제를 위해 그를 대신해 일하지요. 그런 점에서 대행이란 중간에 있는 것이고 상이한 두 세계가 만나는 선 위에 있는 것입니다.

학교의 배치 안에서 교사나 교장은 모두 그 배치의 대행자 입니다. 책상이나 시험 시간표도 그렇죠. 학생을 위하여 교육을 위하여 그 배치가 부여한 과제를 나름대로 실행하는 대행자 입니다. 대행은 한 배치 안의 기계 사이에서도 일어 납니다. 글을 쓰려는 욕망을 위해 타자기를 다룰 때 타자기는 글을 쓰려는 작가의 의지를 대행합니다. 역으로 타자를 잘 다루려면 타자기에 자신의 손과 눈을 길들여야 합니다. 즉 타자기의 기계적 의지를 신체가 대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랬을 때 자신들이 타자기 같은 기계를 다른 작동자이지만 동시에 그 기계가 선택하여 다루는 재료 라고 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학교의 배치 안에서 교사는 교과서나, 시간표에 내장된 욕망을 대행하며 그런 방식으로 학생들을 위해 행동하는 대행자입니다. 학생들 또한 강의실이 나 시간표가 요구하는 바를 실행하는 충실한 대행자가 되길 요구 받습니다. 강의실이 나 시간표는 역으로 또한 학생들을 가르치려는 교사의 의지를 대행합니다.

이처럼 어떤 배치 안에서 각각의 기계는 이웃한 기계들의 대행자 입니다. 조금 더 강하게 말해 배치들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모두 그 배치의 부품이자 톱니바퀴 입니다. 하나의 톱니바퀴는 이웃한 톱니바퀴 의지를 다른 톱니바퀴에 전달하는 대행자입니다. 물론 대행이 항상 정확하게 이루어 지지 않습니다. 모든 기계는 고장 나면서 작동 하죠. 그렇게 삐걱 되면서 하나의 배치는 하나의 다양체 로써 작동합니다.

권력이란 이처럼 주어진 배치 안에서 이웃한 톱니 바퀴에게 대행을 요구하는 욕망이고 그에 따라 작동하는 복종을 통해 실현되는 의지 입니다. 그렇게 권력과 욕망은 다른 것이아닙니다. 권력에 대한 욕망은 없다 . 권력이 욕망이다. 배치안에서 각자는 이웃한 기계들에게 복종하는 대행자이고 노예입니다. 동시에 자신은 이웃한 기계들에게 대행을 즉 복종을 요구하는 주인입니다. 이처럼 이웃한 톱니, 선분의 작용의 맞추어 움직이도록 하는게 권력이란 점에서 권력은 선분적 이라고 합니다. 각각의 선분은 권력이다. 그것은 욕망의 형상인 동시에 하나의 권력이다. 각각의 선분은 기계 내지 기계의 부품이다.

이는 권력과 욕망에 대한 새로운 사유를 함축한다. 안티 오이디푸스에서는 기계적 배치를 통해 욕망을 다루긴 했지만 억압에 대한 욕망과 혁명적 욕망, 억압하려는 욕망과 억압 받으려는 욕망이라는 대립이 확실하게 있었습니다. 대중은 왜 자신에 대한 억압을 욕망 하는가? 라는 물음 자체가 이를 보여줍니다. 반면 권력이 선분적으로 작동한다는 말은 각 부품이 이웃 부품에 대해 특정 욕망을 대행하기를 요구하는 동시에 다른 이웃 부품의 욕망을 대행함을, 그의 명령을 따라 작동함을 뜻합니다. 모든 부품은 이웃 기계에게 명령하는 주인이면서 다른 기계의 명령을 실행하는 노예입니다. 어느 위치에 있는가에 따라 다른 기능을 할 뿐입니다. 억압은 억압하는자에게나 억압 받는 자에게나 욕망 권력의 이러저러한 배치, 기계들의 이러저러한 상태에서 연연한다. 억압이 기계에 의존하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이로써 욕망과 권력이 서로 내재적인 관계에 물려 들어가 있음이 분명해 집니다. 배치란 욕망과 권력의 내재적 장입니다. 그러나 욕망과 권력이 내재적 이란 말은 양자가 동일함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배치안에서 위상만이 아니라 작동하는 방식도 다릅니다. 권력은 하나의 배치 안에서 자신의 욕망을 다른 부품에게 대행하고 그것이 제대로 실행 되었나를 확인하는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이때 시작과 끝이 중요합니다. 선분 이란 두 끝점이 뚜렷한 선 이지요. 두끝점이 권력이 작동하는 지점입니다. 지금은 점심시간 이 아니라 수업시간이야. 이런 식으로 권력은 시작점에서 작동합니다. 시험이나 평가는 끝점에서 작동하는 권력을 가동시키는 데 끝에서 만이 아니라 중간으로서 소급 되며 작동 하죠. 아니 시험 어떻게 보려고 그래. 권력은 이로써 배치안 에서 재영토화하는 힘을 가동 시킵니다.

그러나 기계는 고장나며 작동 하죠. 충실한 부품이길 정지하고 명령의 수행 을 거부하며 심지어 그 배치에서 이탈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권력은 정지되고 권력에서 이탈한 욕망이 탈주선을 그리게 됩니다. 이것이 탈 영토화의 첨점에서 벌어지는 일입니다. 이 욕망은 다른 배치로 이행 하거나 새로운 배치를 창안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구성된 배치 또한 재영토화의 힘을 가동 시켜야 합니다. 즉 권력의 배치로써 작동하게 됩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욕망은 선분화된 권력을 흘러 넘치 외부로 흘러 간다는 사실입니다. 즉 새로운 배치를 창안 하는 것은 욕망이며 권력은 만들어진 배치 안에서만작동합니다. 배치는 권력의 배치이기 이전에 욕망의 배치 라는 명제, 권력보다 탈주선이 선행 한다는 명제는 이런 말입니다. 주어진 배치를 벗어나 새로운 배치를 만드는 것은 욕망이며 권력은 욕망이 만든 배치 안에서 그것을 유지하는 방식으로만 작동한다는 것입니다.

기계가 대행자 라는 개념도 이런 양면성이 있습니다. 배치는 이질적인 부품들이 결합되어 구성되고 작동합니다. 그렇기에 배치가 하나의 다양체로 작동하려면 이 이질적인 것들이 서로 협동하여 하나의 집합체로 작동하도록 해야 합니다. 배치는 공기능이고 공감이 며 공생입니다. 물론 이때 공감은 신체와 신체가 부딪침이고, 그 사이에서 발생하 갈등과 투쟁을 함축합니다. 따라서 대행한다면 요구되는 바를 그대로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대행자는 중간 입니다. 훌륭한 대행자는 주인의 욕망을 그대로 재현하는 대변자가 아니라 두부품 사이, 상이한 두 세계의 중간에서 간극이나 마찰을 조정하는 자이고 중간에서 주인의 요구 자체를 바꾸는 자입니다. 가령 광인을 대신 쓴다 함은 광인을 대변하며 쓰는게 아니라 차라리 광인으로부터 광끼 를 구해 내며 쓰는 것입니다. 광인의 입장을 수용하며 쓰는게 아니라 광인과 정상인의 중간에서 삶을 위해 긍정적인 어떤 것을 찾아내며 쓰는 것입니다. 요컨데 대행자는 이웃한 권력의 요구를 충실히 실행하는 자이지만 훌륭한 대행자란 이질적 부품들을 공감하고 공생하게 하는 자 이면서, 새로운 배치를 향한 이행의 성분을 동시에 가동하는 자라고 해야 합니다. 기계란 언제나 하나의 배치, 하나의 영토를 개방 하거나 폐쇄하는 특이한 열쇠라고 하는데, 이는 배치 안에서 대행자의 두극에 대한 문장 이기도 합니다.

 

                                - 유해준

 

땅거미진 거리에 어둠이 잦아들면

 거리 불빛 가슴을 친다

 바람에 무뎌진 사소한 두려움이

 사랑에 남겨져  몸이 아파온다

아주 가끔 가끔 미치게 그리워서

멍하니 하늘에 기대어 너의 안부를 묻곤한다.

너도 가끔 조금  생각 나긴하니

듣는  없는  노래를 혼자 오늘도 불러본다.

 쓸쓸히 걷다가 문득  생각나서

허전한 맘에  한잔 한다.

 손에  전화에  이름 지워봐도

 지우지 못하고 일어나 집에 간다.

아주 가끔 가끔 미치게 그리워서

사는게 지치고 힘들다 모진 너를 원망해본다

바보 같은 내가 정말로 사랑한다

너밖에 없는 나에게는 정말 세상이 잔인하다

가진건 없지만 남은  사랑을    사람

너에게 미쳐 사랑이 미쳐 너에게로 달려간다

아주 가끔 가끔 미치게 그리워서

멍하니 하늘에 기대어 너의 안부를 묻곤한다.

너도 가끔 조금  생각 나긴하니

미칠  사랑한 기억에 죽을 만큼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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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에 산책을 나와  천변을 걸었다. 따뜻한 오후의 햇살을 기대 했다.  잠시 햇빛이 비추더니 해가 진다.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석양을 향해 걸어 갔다.  도시속에 시골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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