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동적 종합은 들뢰즈가 차이와 반복에서 시간의 종합을 설명하기 위해 도입한 개념입니다.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들뢰즈 가타리는 이 개념을 접속, 이접, 통접 이라는 세 유형으로 분류하여 욕망하는 기계의 작동 양상을 설명하는 좀 더 적극적 개념으로 확장합니다. 접속, 이접, 통접은 수동적 종합의 세 양상을 표현하는 개념입니다. 의미의 논리에서 혼성어를 만드는 상이한 방법과 대응하던 이 세 개념이 수동적 종합과 결합된 것입니다. 천의 고원에에 수동적 종합이란 개념은 명시적으로 사용되지 않지만 접속, 통접의 개념은 변화된 양상으로 계속 사용됩니다. 이 과정에서 새 개념의 의미는 변화되고 그와 더불어 각 개념의 위상 또한 달라집니다.

분석이 어떤 결과를 만드는 뚜렷한 원인을 찾기 위해 서로 혼합되어 있는 것들 중 핵심적인 요인을 분리 하는 것이라면 종합이란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을 하나로 결합함으로써 새로운 효과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예컨대 식물의 광합성은 햇빛과 어떤 기체를 종합하여 탄수화물을 만들어 내는 과정입니다. 이는 식물이 일상적으로 수행하는 종합 입니다. 그런데 식물 인근의 여러 기체 중 어떤 기체가 광합성에 관여하는 지를 가려내는 것이 분석입니다. 분석이 변수들의 작용을 비교하면서 결과를 만드는 핵심적인 변수만 남기고, 다른 변수를 제거하는 감산과 대응한다면 종합은 서로 무관하다고 생각했던 것들 마저 더해 새로이 형성되는 변화를 보는 가산과 대응합니다. 분석이 빼기를 통해 어떤 변수에 효과를 분리하는 순수화 과정이라면 종합은 멀리 떨어진 변수들을 혼합하여 새로이 생성되는 것을 보는 혼성화 과정입니다. 전자가 여러 변수 가운데 동일한 결과를 만들어내는 요인을 찾아내는 것이라면 후자는 결합을 통해 새로이 생성되는 것을 주목한다는 점에서 차이를 만드는 차이를 가동 시키는 것입니다.

종합이란 말이 철학에서 중요한 개념으로 부상한 것은 칸트를 통해서였습니다. 수동적 종합이란 말을 개념으로 부각시켰던 것은 현상학을 창안한 후설이었습니다. 그는 종합을 의식의 본성에 속하는 능동적 작용이라고 봅니다. 저기 있는 것이 무엇인지 보거나 들을 때 조차 의식은 주의를 집중하여 대상을 구상하는 종합을 수행합니다. 이처럼 무언가에 주의를 집중하는 작용을 그는 능동적 종합 이라고 합니다. 이와 대비에 철저한 수동성이란 가령 방금 전에 우리 귀에 들려오는 개 짖는 소리 처럼 우리가 주목하거나 집중하지 않았지만 어디선가 발생해 내 감각기관에 들어온 것입니다. 따라서 후설에게 수동성이란 적극적 개념이 라기보다는 의식의 능동성과 철저하게 대비되는 소극적 개념이라 하겠습니다.

들뢰즈는 후설이 구석으로 밀쳐 놓은 수동적 종합 개념을 무의식의 작동을 위해 사용합니다. 의식이나 자아 이전에 존재하는 수많은 작은 자아, 애벌레 자아들의 작동이 그것입니다. 예컨데 습관의 종합은 어떤 충만한 응시의 흥분을 통해 어떤 자극이나 움직임이 심장, 근육, 신경 세포 등에 수축되면서 발생하는 반복입니다. 이 작은 자아들의 응시와 수축이 유기체 전체 수준에서 발생하는 능동적 종합에 대지적 토양이고 기초입니다.

애벌레 자아라고 그가 명명한 이 작은 자아들이 박테리아적 기원을 갖는 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습관적 종합을 통해 형성된 것만으로는 아직 책인지 서가 인지 알 수 없습니다. 여기에 더에 과거의 본 것들의 기억이 다시 끼어 들어야 합니다. 색깔과 형태, 냄새 등의 미시적 기억들이 이때 기억은 세포나 근육, 신경이나 혀가 기억하고 있는 작은 기억들, 특정한 형태와 냄새가 결합된 어떤 사물의 기억입니다. 이 모두는 나 이전에 미시적 기억들이 입니다.나의 기억은 이 모든 종합이 이루어진 다음에 의식이 뇌의 기억된 어떤 것을 회상하여 재생하는 것입니다.

다른 한편 의미의 논리에서 제시되는 종합의 세 유형인 접속, 통접, 이접은 일단 혼성어를 만드는 방법과 관련된 것입니다. 접속은 한 문장이나 여러 단어들을 하나의 말로 축약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를 축약해 만든 ‘지못미’. ‘이번 생은 망했다’를 축약해 만든 ‘이생망’ 같은 것이 그런 경우입니다. 이는 유행어로 사용되는 단어 에서 흔히 사용되는 방법입니다. 통접은 이질적인 계열의 말들이 축약되어 무언가 새로운 어떤 의미를 갖는 대상으로 통합되는 경우입니다. 루이스 캐럴이 스네이크와 샤크 를 축약해 만든 새로운 동물 스나크가 그렇습니다.

들뢰즈가 좀 더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것은 이접인데 선택 가능한 상이한 의미가 병존하는 방식으로 결합되는 경우 입니다. 그는 불어에서 격노하다 와 연기나다를 축약해서 만든 단어를 예로 들고 있습니다. 어느쪽 말의 무게를 두는 가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는 점에서 이것도 저것도 모두 함축 한다는 의미로 이접이라 합니다. 아주 상반되는 의미로 발산 될 수 있는 의미를 동시에 담아내는 이접적 종합의 방법이 사용된 혼성어라 하겠습니다.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수동적 종합 개념은 의식이 개입하지 않는 종합 즉 미시적 층에서 무의식의 종합으로 재 규정됩니다. 이 종합 에는 세가지 다른 계기가 있습니다. 생산, 등록, 소비가 그것인데 접속, 이접, 통접이 그 각각에 대응하는 종합의 형식입니다.

생산의 종합은 하나의 신체와 다른 신체가 혹은 신체의 한 부분이 다른 신체와 접속하여 특정한 기계로 생산 되는 종합 입니다. 가령 입 이라 불리는 부분이 식도 라 불리는 부분과 접속하여 영양소의 흐름을 절단 체취하는 먹는 기계가 생산 되는 경우가 그것입니다. 두 사람의 신체가 접속하여 여성 이라 불리는 성적 기계와 남성 이라 불리는 성적 기계가 생산되는 것도 그렇습니다. 생산적 종합의 형식이 접속이 라고 하면서 ‘와’ 라는 접속사와 대응시키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이 책에선 접속의 두 가지 다른 양상이 있다고 씁니다. 신체 부분들이 분자적 다양성을 갖고 접속하는 것이 하나라면 어떤 신체 든 남성이나 여성 이라는 물적 전반적 규정성 속에서 접속하는 것이 다른 하나 입니다.

등록의 종합은 생산적 종합을 통해 발생한 어떤 규정을 신체상에 등록하는 것과 관련 됩니다. 가령 입 이라는 신체는 식도와 접속하면 먹는 기계가 되지만 성대와 접속하면 말하는 기회가 되고, 다른 입과 접속하면 성적 기계가 됩니다. 즉 입 이라 불리는 신체는 상이한 규정들이 등록 될 수 있습니다. 생산적 접속의 양상에 따라 다른 기회가 될 수 있다는 말이고 이는 그 신체의 다른 규정들이 분배될 수 있다는 말로 바꿔 쓸 수 있습니다. 이는 상이한 규정들 사이에서 A인가 B인가 를 정하는 문제이기에 이접 이라고 합니다. 물론 A이든 B의 형태로 분배 될 수도 있습니다. 전자가 어떤 신체를 두고 저게 사람이야 늑대야 를 하며 그 중 한 규정을 선택하게 하는 배타적 이접이라면 후자는 사람이기도 하고 늑대이기도 하네 라고 하며 다른 규정들의 등록을 열어두는 포함적 이접입니다.

생산적 접속에 의해 산출된 규정은 신체상에 등록되고 그렇게 등록된 부분 신체들을 하나로 통합하여 유기체나 인간 같은 하나의 전체가 탄생합니다. 입, 식도, 위장, 항문, 손, 발 등이 통합되어 나 라고 불리는 하나의 유기체가 되기에 이를 통접 이라고 합니다. 여러 부분을 모아 하나의 결과로 귀착 시키는 ‘그리하여가’ 통접의 접속사 입니다. 바꿔 말하면 이러한 통접을 통해 나는 신체의 부분을 운동기관, 소화기관, 배설 기관으로 소비합니다. 라캉은 거울에 비친 상을 보면서 그렇게 부분 신체 들이 통합되어 나라는 전체를 이룬다는 사실을 발견할 때 아기들이 쾌감을 느낀다고 했습니다. 역시 통합된 전체를 소비하는 한 방식입니다 그래서 통접은 소비의 종합 이라고 합니다.

여기에도 두 가지 다른 통접이 있습니다. 유기체 라는 전체 속에서 가령 넙치의 아가미와 나의 허파, 소의 앞발과 나의 앞발을 대응시켜 동일성이나 차이 를 할당하는 유기체적 일대일 대응적 통합이 하나 입니다. 다른 하나는 나의 손 조차 걷는 기계, 욕하는 기계, 몸둥이 기계 등 유기체에서 벗어난 다른 규정성 들로 분배하는 유목적, 다의적 통접입니다.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욕망의 생산을 분석하는 중심적 위치를 갖는 이 세가지 수동적 종합 개념은 그 의미나 위상이 천의 고원에 이르면 크게 달라집니다.

먼저 의미의 논리에서 가장 중요하고 긍정적인 위상을 가졌던 이접 개념이 사라집니다. 천의 고원에서 이접 개념이 등장하는 것은 단 한 번인데 그마저 접속 개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문장에서 입니다. 모든 것은 선 위에서 선 사이에서 사실을 지각할 수 없게 하는’ 와’ 속에서 하나와 다른 하나사이에서 일어났다. 이는 이접도, 통접도 아니라 단념, 내지 포기와는 반대로 새로운 포용을 위해 끊임없이 그려지는 탈주선이다.

둘째 이와 반대로 접속의 개념은 천의 고원 전반에 걸쳐 빈번하게 사용되는 중심 개념이 되며 배치를 형성하고 다양체를 구성하는 이념적 위상을 차지하게 됩니다 . 가령 리좀의 특성에 대해 설명할 때 가장 먼저 언급되는 것이 바로 접속 입니다. 첫 번째 및 두 번째 접속과 이질성의 원리, 리좀에 어떠한 점도 다른 어떤 점과 접속 될 수 있으며 접속되어야 한다. 이 두가지 변화는 이접이 차이 철학의 원리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기에 약간 부연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의미의 논리에서 이접은 확실히 세가지 종합의 방법 중 가장 중요한 지위를 부여 받습니다. 존재의 일의성이 그것과 짝지어 지는 것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들뢰즈는 철학은 존재론과 동일시 되지만 존재로 존재의 일의성과 동일시 된다면서 존재의 일의성은 이접적 종합의 적극적 사용, 극단의 긍정과 일치한다고 까지 말합니다. 이 말은 간단히 말해 존재란 상이한 규정들 모두를 자신을 표현하는 말로써 가질 수 있음을 뜻합니다. 이것이든 저것이든 모두 존재의 표현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반면 이 책에서 접속은 하나의 계열을 이루는 말이나 문장의 축약으로 정의 되기에 통접에 비해서도 동질적인 종합 입니다. 그런데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접속은이질적인 항들의 결합으로 새로이 정의됩니다. 이로써 접속은 비로서 그 말에 부합하는 의미를 갖게 됩니다. 어떤 것이 어떤 기계가 되는가는 접속을 통해서 이며 접속하는 이웃이 달라지면 다른 기계가 된다는 것이 이때 비로서 분명해 지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 접속은 ‘와’ 라는 접속사 그대로 플러스 라는 기호로 표시될 수 있습니다. 반면 의미의 논리에서 처럼 접속이 한계열의 말이나 문장의 축약 이라면 거기에는 이질적인 것들의 만남이란 없습니다. 주어진 계열안의 말들이 빠져나가는 방식의 축약 이기에 플러스가 아니라 마이너스로 표시되어야 할 겁니다. 그러니 이런 접속 개념은 차이의 철학과 아직은 거리가 있다 하겠습니다.

이 책에서 접속이 부차적이고, 부정적인 위치만을 갖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접속은 플러스로서 재정의 되고, 이제 접속, 이접, 통접은 생산, 등록, 소비 에 대응하는 수동적 종합의 형식으로써 등위적인 위상을 갖게 됩니다. 앞서 본 것처럼 이접에도 배타적인 것과 포함적인 것이 있고 접속에도 분자적 부분적인 것과 몰적 전반적인 것이 있으며 통접조차 유기체적인 것과 유목적인 것이 있습니다. 세 종합 모두,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을 갖고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천의 고원에서는 의미의 논리 에서 가장 중요했던 이접 개념이 사라지고 접속이 일반적인 개념으로 또한 가장 긍정적인 개념으로 부상 합니다. 만남에 의해 어떤 항의 규정을 만들어 내고, 만나는 항이 달라짐에 따라 그 규정을 다르게 만드는 것으로서의 차이, 만들어내는 차이와 대응하는 위상을 갖게 됩니다.

일자를 상정하는 초월적 사유와 대비되는 리좀의 개념을 제안하면서 그 첫번째 특성으로 접속을 언급한 것 입니다. 그리고 접속에 수가 늘어남에 따라 차원 수가 늘어나며 이를 통해 일관성의 구도에 이룰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러니 천의 고원에서 보자면 차이의 철학에 종합의 이념 같은게 있다면 이접이 아니라 접속 이라고 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하겠습니다.

세번째로 통접 개념 또한 의미와 위상이 달라집니다. 천의 고원에서 통접은 유기체적 내지 수목적 양상으로 전체화하는 경우에도 지칭하기 위해 사용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흐름의 통접 이라는 개념입니다. 흐름의 통접은 추상 기계와 결부되어 있고 이는 긍정적인 일관성의 구도와 이어집니다. 일관성의 구도(또는 추상 기계)는 지층들의 형식과 실체 저변에서 강렬도의 연속체를 구축한다. 그것은 구별되는 형식과 실체로 부터 강렬도를 추출하고, 이 강렬도들의 연속성을 창조한다. 상대적 운동들의 저변에서 일관성의 구도(또는 추상 기계)는 탈영토화 흐름들의 통접을 수행한다.

이 경우 흐름의 통접은 긍정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그러나 그게 다는 아닙니다. 흐름의 통접도 다시 두가지로 구분 됩니다. 흐름의 통접이란 개념이 분석적으로 가장 많이 사용되는 경우는 탈코드화 되고 탈 영토화 된 흐름과 관련해서 입니다. 먼저 상이한 국가나 제국 사이에서 탈 코드화 된 부의 흐름을 통합하는 제한적이고 국소적인 통접이 그것입니다. 또 하나는 부의 흐름과 노동의 흐름에 추상적이고 일반화 된 통접이 그것입니다. 이는 자본주의의 탄생 으로 이어집니다그러나 이러한 추상적 통접조차 공리계의 추상 기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 창조적인 접속과 달리 봉쇄를 야기하는 통접에 지나지 않으며 접속에 수를 증가시켜 일관성의 구도를 그린 능력과 대비 됩니다.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통접 조차 그저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란 겁니다.

요약하자면 수동적 종합의 개념은 차이와 반복 부터 천의 고원에 이르기 까지 들뢰즈의 사유에 계속하여 등장합니다. 초기에는 세가지 종합 중 이접의 개념이 중심적인 위상을 갖고 있었지만, 후기로 가면 접속의 개념이 중심적인 것으로 변화됩니다. 이 과정에서 새 개념의 의미는 계속 달라져 가는 데 접속의 개념은 만남을 통해 생성되는 차이 만들어내는 차이 개념과 정확하게 부합하는 것이 됩니다. 이 개념이 일관성의 구도를 그리는 능력과 이어지는 것은 이 개념이 갖는 긍정성의 최대치를 표시한다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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