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관 없는 신체란 문자 그대로 어떤 기관도 갖지 않는 신체 입니다. 들뢰즈가 이 개념의 참조로 자주 인용하는 아르또의 문장이 이를 선명하게 표현합니다. 입도 없다. 혀도 없다. 이도 없다. 목구멍도 없다. 식도도 없다. 위장도 없다. 배도없다. 항문도 없다. 나는 나라는 인간을 재구성 한다. 기관 없는 신체란 말은 바로 이문장과 더불어 의미의 논리에서 처음 등장합니다. 안티오이디프스에서 이 문장이 겨냥하는 바를 아르또의 다른 글을 인용하여 명확하게 표현 합니다. “ 그 신체는 신체다. 그것은 홀로 있다. 기관은 필요 없다. 그 신체는 결코 유기체가 아니다. 유기체는 그 신체의 적이다.” 유기체를 적으로 하는 신체, 그것이 바로 기관 없는 신체 입니다. 우리 몸은 알다시피 소화기관 운동기관 등이 하나로 통일된 유기체입니다. 기관 없는 신체라니, 유기체를 적으로하는 신체라니, 그런 신체가 정말있을까요. 물론 돌이나, 흙, 물, 항아리 같은 것은 어떤 기관도 없는 신체를 갖습니다. 그러나 아르또가 말하려는 건 이런게 아닙니다. 그것이 유기체를 적으로 한다니, 유기체를 전제하는 개념이라 해야 합니다. 유기체 가운데 기관을 갖지 않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 맞습니다. 알이나 수정란이 그것입니다. 아직 분화된 기관을 갖지 않는 신체, 그렇기에 모든 분화된 기관들의 질료나 모태가 되는 생명체가 알입니다. 그래서 “기관 없는 신체는 알이다” 라고하지요. 들뢰즈 가타리도 기관 없는 신체를 다루는 천의 고원 여섯 번째 고원 모두에 아프리카도 도공족의 알을 올려 놓았습니다. 수정란은 기관으로 분화 되기 이전에 신체란 점에서 기관없는 신체 입니다 .

수정란은 표면에 주름이 만들어 지며, 각 부분 유전자에 기록돼 있는 바에 따라 기관들로 분화되어 갑니다. 물론 발생 조건에 따라 다른 양상으로 분화되어 갑니다. 양수나 모체 신체 상태 등 외부의 조건에 따라 그것과의 만남의 강도에 따라 다르게 주름이 만들어지며 다르게 분화 됩니다. 이처럼 다르게 분화될 수 있는 것은 유전자가 상이한 현행성에 열린 규정 가능성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정란은 분화된 신체와 대비되는 잠재성을 뜻 합니다. 잠재적 이기에 다른 경로로 분화 되면 다른 신체가 될 수 있는 겁니다. “나는 나라는 인간을 재구성한다”는 아르또의 말은 기관 없는 신체를 통해 하고자 하는것이 무엇인지를 명시적으로 보여줍니다. 지금 현행의 신체와 다른 신체를 재구성 하려는 겁니다. 그러나 당장 반문 하겠지요. 이미 분화되어 기관이 된 선체를 어떻게 없애서 다른 신체로 만들 수 있단말인가. 맞습니다. 대단히 어렵습니다. 그래서 주어진 신체, 유기체로써 분화된 지금의 신체 상태를 어찌할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살아 가야 된다고들 믿습니다. 마치 신이 정해준 운명처럼 신의 심판처럼 그래서 아르또의 저 발언을 들뢰즈 가타리는 신의 심판과 절연하기 위한 전쟁 선포 라고 말합니다. 신체의 유기적 통일성을 받아들이려는 심판과 각각의 부분에 주어진 기관, 도구로써의 운명과 싸우려는 겁니다. 따라서 이전쟁은 기관이 아니라 유기체 입니다. 우리는 기관없는 신체가 기관의 대리물이 아님을 조금씩 깨닫게 됩니다. 적은 유기체 다. 기관 없는신체를 만든 다음은 유기체의 고정된 기관이 된 신체를 잠재성으로 되돌려 다른 신체로 재구성하는 겁니다

그러나 이 재구성은 성형이나 트랜스포머의 변신로봇 처럼 신체 형태의 전체를 아주 다른 것을 바꾸는 것만은 아닙니다. 가령 식도와 접속하여 영양의 흐름을 절단 채취하면 먹는 기계로 작동하던 입을 성대와 접속하여 소리의 흐름을 절단 처치하면 말하는 기계로 변하는것도 이런 재구성의 하나입니다. 팔로 서서 걷거 팔을 칼 같은 무기로 변환시키는 것도 그렇습니다. 입이나 팔을 하나의 기계에서 다른기계로 바꾸려면 현행의 기관에서 이탈 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기계로 작동하게 해주는 조건과 접속해 합니다. 그러려면 중간에 어떤 기관도 아닌 상태 그러나 다른 기관이 될 수 있는 신체 상태를 통과해야 합니다. 모양 그대로 입 이지만 더는 먹는기관이길 중단한 상태, 그래서 말하는 기계도 될 수 있고, 키스 하는 기계도 될 수 있는 신체 상태를, 이를 약간 다른 식으로 말할 수있습니다. 팔을 칼로 바꾸려면 팔 근육의 분포된 힘의 강도를 바꾸어야 합니다. 입도 그렇죠. 먼저 현재 팔이나 입의 강도 분포를 0으로 되돌리는 것 다음으로 다른 강도 분포를 만들어 팔이나 입을 움직이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신체를 다르게 사용하는 변화는 모두 강도 0의 상태로 다가 갔다가 다시 새로운 강도의 분포를 만드는것입니다. 글씨를 쓰다 젓가락질을 하고 피아노를 치고, 하는 모든 변환이 실은 이 두 단계의 변환을 통과는 겁니다. 동물 같은 신체로 자기 신체를 바꾸는동물 되기 같은 모든 되기도 그렇습니다. 들뢰즈 가타리는 강도 0인 상태가 바로 기관 없는 신체에 상응한다고 합니다.

기관 없는 신체를 만든 다음은 기관없는 상태 즉 알과 같은 상태로 퇴행하는 게 아니라 현행의 신체 상태를 바꾸기 위해 강도 0의 상태를 경유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기관 없는 신체는 유기체와 대립 할뿐 아니라 욕망하는 기계와도 대립합니다. 먹으려는 욕망은 몸이 신체를 먹는 기계로 생산하고 탁구를 치려는욕망은 그것을 탁구 기계로 생산합니다. 먹는 것도 좋고 탁구를 치는 것도 좋지만 그것만 하게 된다면 누구나 고통을 느끼게 될 겁니다. 다른 것을 하고 싶다는 욕망이 발동하기 전에 이젠 그것 그만 하고 싶어 하게 될겁니다. 욕망하는 기계 는 우리들을 유기체로 만든다. 하지만 이런 생산은 바로 그 중심에서 생산의 생산, 바로 그 안에서 신체는 이처럼 조직되는 것으로 인해 다르게 조직 되지 않는 데에 대한고통을 느낀다. 차라리 조직화 되지 않았으면 하고 따라서 현행적 신체 상태를 생산한 욕망이 반발하여그 생산을 중지 시키려는 욕망이 발동하게 됩니다. 자동 기계들은 한순간 정지 되고 그것들이 이전에 분절 해오던 비유기적인 덩어리가 출연한다. 이런 이유에서 들뢰즈 가타리는 기관없는 신체란 욕망하는 기계의 생산 반대편에 있는 반생산 이라고 합니다. 기관 없는 충만한 신체는 비생산적인 것, 불모의 것, 태어나지 않은 것, 섭외할 수 없는 것이다. 생산 된다는 것은 무언가가 태어 나는것입니다. 생산의 정지로써 반생산은 그렇게 죽음과 대응한다 고 할 수 있습니다. 입이 먹는 기계를 그친다 함은 먹는 기계의 죽음 이라고 해도 좋을겁니다.

이러한 죽음은 차이와 반복에서 인용하는 블랑쇼의 비인칭적 죽음과 이어져 있습니다. 비인칭적 죽음이란 생물학적이고 인격적인 죽음이 아니라 가령 시가 시인에 올때 시인 안에 있던 누군가가 죽는 사건입니다. 필경 그때까지 나 라고 불리던 누군가가 죽고 죽음으로 인해 비워진 신체, 탈 영토하던 신체를 움직여 시가 쓰여 집니다. 비인칭적 죽음이란 기관없는 신체로 되돌아 가는 과정입니다. 그 강도 0의 신체에 시인에게 온 시와 상응하는 누군가가 탄생한다고 할 수 있겠죠. 아르또의 말대로 나라는 인간을 재구성한다 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이런 점에서 그것은 다채롭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어떤 모험 의 원천으로서 항상 도래하고 있는 죽음입니다. 비인칭적 죽음은 죽음에 대한 욕망없이 시인에게 덮쳐 오는 것입니다. 수동적 죽음입니다. 욕망하는 기계의 죽음도 대게 그렇습니다. 먹는 기계가 말하는 기계나 섹스 기계로 변화는 것은 먹는 기계를 죽이는 욕망이 아니라 신체나 그 인간에서 발생한 어떤 조건에 따른 것입니다. 말하기 쉽게 만드는 조건, 성욕을 추동하는 조건 등등 물론 그만하고 싶은 때도 있긴 하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죽음 본능에 대한 들뢰즈의 생각이 달라져 감에 따라 죽음이나 기관 없는 신체 개념도 달라져 갑니다. 프로이트의 개념을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지만 그래도 차이와 반복에서는 그 개념 자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사용합니다. 반면 천의 고원에서는 그 개념은 사라지고 보이지 않습니다. 중간에 있는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상충되는 서술이 보입니다.

이로 인해 기관이 없는 신체는 죽음 본능과 대응하는 것으로 오해되기 쉽습니다. 이 책 앞부분에서 아르또의 발견을 언급하며 이렇게 씁니다. 죽음 본능이 그것의 그 이름입니다. 죽은 본능에는 모델이 없지 않다. 욕망은 죽음 또한 욕망하기 때문이다. 반면 이는 같은 책의 후반부에 가면 명시적으로 뒤집힙니다. 죽음은 욕망 되지 않으며 죽음 본능은 없다고 그리고 프로이트의 죽음 개념에 대한 비판이 길게 이어집니다. 상충되는 이 서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프로이트와 대비 하여 자신들의 주장을 개진하는 후반부를 세심히 보아야합니다. 거기에서 그들은 죽음 본능이나 죽음 욕망과 대비하여 죽음의 모델과 죽음의 경험을 말합니다. 죽음 모델이란 강도 0으로서 기관없는 신체 입니다. 기관없는 신체는 죽음의 모델이다. 죽음의 경험이란 강도 0으로 다가가고 그것에 투여하여 그로부터 재 출발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죽음 본능은 없으며 단지 죽음의 모델에서 죽음의 경험으로 나아가고 다시 모델에서 경험으로 재출발하여 되돌아가는 영원회귀 가 있을 뿐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죽음을 분열자 하는 것이라고 한번 죽으면 끝이 기에 죽음은 경험할수 없다고들 하지요. 그러나 여기에서 죽음이 생물학적인격적 죽음이 아니라 비인칭 죽음 개념임을 안다면 죽음의 경험이란 말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을 겁니다. 강도 0을 모델로 하는 죽음의 경험은 누차 반복될 수 있으며 이는 새로운 기계의 탄생 조건 이기에 죽음의 경험은 오히려 욕망하는기계의 부품 입니다. 그렇다면 죽음 본능에 대한 앞부분에서의 서술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들뢰즈 가타리에 따르면 본능이란 타고난 성향이 아니라 욕망의 생산과 반생산을 규정하는 조건의 산물입니다. 원시 사회 심지어 전제 군제 사회 처럼 신분 등 사회적 코드가 확고한 사회에선 욕망하는 기계가 그 코드를 따라야 합니다. 이 경우 죽음 본능은 즉 죽음을 향한 욕망은 약화 됩니다. 정해진 신분이나 규칙을 바꿀 수 없는 운명으로 받아 들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자본주의에서는 신분 등 사회적 코드가 해체되고 토지의 부속 물로 존재하던 생산자가 토지로 분리되어 탈영토화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자본주의는 탈 코드화되고 탈 영토화된 사회기계 입니다. 욕망이 신분적 코드나 토지의 경작의 의무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짐을 뜻합니다. 맑스는 이를 이중의 자유라고 표현한 바있는데 이 말은 사실 먹고 살 수있는 생존 조건을 상실한 프로레타리아가 되었음을 뜻합니다. 아무거나 할 수 있게 되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 내던져진 겁니다. 그래서 먹고 살려면 몸을 팔아야합니다. 공장에 가야 합니다. 그때마다 자본가가 요구하는 기관 기계가 되어야 합니다. 욕망은 정해진 코드가 없어 자유로워졌기에 누구도 그런 요구를 운명으로 받아 들이지 않고 반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용 되지 않고서는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없으니 그 욕망 자체만으로는 다른 기계로 변화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 반발은 일체 기관을 부정하는 욕망으로죽음에 대한 욕망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죽음 본능은 이렇게 출연합니다. 자본주의라는 탈코드화 된 체제에서는 죽음이 모델이나 경험과의 관계를 상실한 체 본능이 된다는 겁니다. 예컨대 죽음 본능은 자본주의 기계의 산물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자본주의에서 죽음 본능은 일종의 보편성을 갖게 되었다고해야할까요.

그렇다고 할 거 같지 않습니다. 물론 파시즘처럼 기존 세계에 대한 혐오의 정념으로 죽음을 향해 치달리는 욕망이 나타나지만 이는 자본주의에서도 아주 특정한조건에서 나타납니다. 그래서 그들은 천의 고원에서는 파시즘과 죽음 충동을 말할 때조차 죽음 본능이나 죽음 충동 같은 개념 자체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죽음 충동 같은 것을 상기 시키려는 것이 아니다. 욕망안에는내적 충동이 없으며 거기에는 오직 배치 만있을 뿐이다. 그 대신 유기체 운명을 거부하는욕망이 죽음의 경험 내지 비인칭적 죽음이 아니라 파괴를 향해 물리적 죽음을 향해 치달리는 사태를 해명하기 위해 세 종류의 기관 없는신체를 구별합니다. ‘ 텅빈 기관 없는신체’ 와 ‘암적인 기관 없는 신체’, ‘충만한 기관 없는 신체’가 그것입니다. 텅빈 기관 없는 신체는 약물 중독자의 신체처럼 자신들의 기관들을 지워버린 신체 입니다. ‘암적인 기관 없는 신체’는 유기체안에서 기관화 될 능력을 혐오하며 유기체 자체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자살적 신체입니다. 격도 나쁘고 위험한 경우입니다. 사회 기계에서는 파시즘이 여기에속합니다. ‘충만한 기관없는 신체’ 란 다양한 규정 가능성을 향해 신중하게 실험하며 새로운 신체를 구성해 가는 과정속의 신체 입니다. 강도 0을 반복적으로 통과하며 새로운 기계를 만들어가는 창조적이고 긍정적인 신체 입니다. 여기서 안티 오이디푸스 개념과 연결 하자면 앞의 두 개가 죽음 본능의 기계적 형태라면 충만한 신체는 죽음 모델과 죽음 경험의 영원회귀속에서 욕망하는 기계 변환을 반복하는 겁니다. 죽음 본능에 대한 상충되는 서술은 사실 기관 없는 신체 개념의 함축된 상반된 두 방향과 관련된 것입니다.

이는 기관없는 신체가 유기체와 순수 잠재성 사이, 지층화된 운명과 일관성의 구도라는 규정 가능성의 하늘 사이에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것 혹은 저것이라는 배타적 선택이 아닙니다. 오히려 죽음의 모델과 경험이 그러하듯 양자 사이에서 원활하게 오가는 것입니다. 유기체에 대한 부정적 반발, 기관의 파괴라는 위험은 사실 유기체 보다 더 위험한 것입니다. 정작 나쁜 것은 지층화에 머물러있는게 아니라 지층들을 치매 상태 내지 자살적인 붕괴 상태로 몰아 넣는것이다. 지층 위에 자리잡고 그것이 제공하는기회를 실험하며 거기에서 유리한 장소를 추구하고 궁극적인 탈영토화 운동을 가능한 탈주선을 찾으며 그것을 검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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