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 신체, 사회체, 욕망적 생산  들뢰즈 가타리는 자신들의 사상을 전개하기 위해 새로운 개념과 장치들을 만들어 사용합니다. 집을 짓는데 비유한다면 그들은 이미 만들어진 건축 자재들을 사용하는  아니라 벽돌과 철근, 기와  모든 기초 자재들을 일일이 만들어 가면서 집을 짓는 셈입니다.   한채 짓는 일에 굳이 이토록 어렵게 공사를 벌이는 이유는 뭘까요 ? 기존의 자재들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전통 철학의 범주에서 벗어난 학문의 영역 나아가 예술의 영역까지 다양하게 섭렵하면서 개념과 이미지들을 차용하고 변형합니다. 이번 들뢰즈 카타리 개념어 설명은 기계와 기계주의 입니다. 

안티오이디프스를 함께  이래  들뢰즈 카타리는 신체를 가진 모든 것을 기계라고 말합니다. 기계란 말에서흔히 표상되는 것은 컴퓨터나 엔진,  시계, 망치  같은 것이겠지요. 맞습니다이것들은 모두 기계 입니다. 하지만 오히려 들뢰즈 카타리가 처음에 기계라는 말로 지칭했던 것은 이런 표상과 어쩌면   반대편에 있다 해야  것이었습니다. 유방과 , 항문 같은 것이 기계라고 서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방은 젖을 생산하는기계고,  입은 그와 짝을 이룬다. 거식증자의 입은 먹는 기계,  항문 기계,  말하는 기계 혹은 숨쉬는 기계 사이에서 망설이고 있다." 

통상적인 관념에서 기계는 생명체, 유기체와 대립되는 개념입니다 .유방이나 입은 생명체의 신체에 속하기에 그것을 기계라고 말하는  그런 관념에 반합니다. 따라서  들뢰즈 가타리가 말하는 기계는 상식적인 기계개념과 아주 다른 것이라 하겠습니다.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신체를 갖는 것은 모두 기계 입니다. 그런데  기계는 고립된 것이 아니라 언제나 다른 것과 접속되어 있고  접속의 양상에 따라 다른 기계가 됩니다. 안티오이디푸스에서 들뢰즈 가타리는 기계에 대해 이렇게 정의합니다 . 욕망하는 기계는 이항적 규칙 내지 결합을 집에는 규칙에 따르는 이항 기계다. 하나의 기계는 언제나 다른 것과 짝지어져 있다. 흐름을 생산하는 기계가 있고  기계에 접속하여  흐름의 일부를 절단하여 채취하는 다른 기계가 언제나 있다. 

이항기계란 말은 모든 기계는 이웃한 다른 기기와 짝지어 작동한다는 의미 입니다. 입과 유방이 그렇습니다. 엄마의 유방은 젖의 흐름을  생산하는 기계이고 아기의 입은 유방에 접속하여 젖의 흐름을 절단하여 채취하는 기계 입니다. 여기서 엄나나 아기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젖병과 ,  양의 젖과 새깨 염소의 입으로 바뀌어도 동일하게 말할  있습니다. 어떤 유기체에 속해 있느냐와 무관하게 젖과 입은 이런식으로 접속하여 작동합니다. 그런데  -기계는 이런식으로만 작동하지는 않습니다. 입이 먹은 젖을 토할때  입은 먹는 기계가아니라 싸는 기계가 됩니다. 배설물의 흐름을 절단하고 채취하는 항문기계로 변환된 것이지요 공기의 흐름을 절단하고 채취하여 울음 소리를 내거나 말을 할때  이기계는 말하는 기계로 변환된 겁니다. 

요약하자면 이항적으로 접속하여 어떤 흐름을 절단하고 채취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은 모두 기계라는 겁니다.  접속하는 이웃기계가 달라지거나 절단을 채취하는 흐름이 달라지면 동일한 신체나 사물도 다른 기계가 됩니다. 입이 식도와 접속하여 음식 물의 흐름을 절단하고 채취하면 먹는 기계지만 입이 기도와 접속하여공기의 흐름을 절단하고 채취하면 말하는 기계가 되듯이 말입니다. 기계가 이항기계라 함은 언제나 이웃한기계와 이항적으로 접속하여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기계와 접속하여 어떤 흐름을 절단하고  채취할 것인가는 욕망이 결정합니다.  욕망의 결정에 따라 기계는  대상을 생산하고 절단하고 채취합니다 .다르게  말하자면 욕망은 대상을 생산할   대상을 생산한 기계 또한 생산됩니다. 먹으려는 욕망에 따르면  입이라는 기계는  먹는 기계가 되고,  말하려는 욕망에 따르면입은 말하는 기계가 됩니다. 이모두를  기계라고 부르는 것은 모든 것은 일정한 방식으로 작동하며 어떤 결과를 생산 함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욕망의 세계란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담론처럼 꿈이나 환상을 표상하는 연극 무대가 아니라 신체적 결과물을 생산하는 공장 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기계를 이렇게 정의하면 엔진이나 시계처럼 생명체 속하지 않는 기계는 반대로 기계라는 개념에서배제되는 것은 아닌가 반문하게  것입니다.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엔진도 바퀴와 접속하면  이동기기가되지만 펌프와 접속하면 물을 퍼올리는 양수 기계가 됩니다.  이동 기계는   빠르게 이동하려는 욕망의 산물이자 동시에 그런 욕망을 행사하는 기계 입니다. 양수 기계에는 물을 분배를 조절하려는 욕망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기계는 생물 무생물의 경계를 넘나들며 접속하고 작동합니다.   하나 기억할 점은 여기서 욕망은 인간이나 유기체의 욕망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카프카가  보여 주듯 수위 기계는 문기계와 접속하여 사람들의 동선을 절단하고 채취합니다.  두기계는 하나의 욕망에 접속해  작동하는 이항기계 입니다.

반대로 언어나 명제도 기계라   있지 않은가 ? 생각할  있습니다. 하지만 언어나 명제는 기계의 상태를 표현하는 기호이지 기계는 아닙니다. 기계는 신체적 속성을 갖는 것이란 점에서 비신체적인것과 구별 됩니다. 위대한 사상이나 멋진 상상력도 책이라는 신체성을 얻지 못하면 무언가를 반복하여 기계적으로 생산하는 기계가 되지 못한체 소멸되버리고 맙니다. 탁월한 기술적 아이디어도 신체성을갖지 못했다면 아직 현실속의 기계가 되지 못한 것입니다.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나는 아이디어는 고대 이래 계속해서 있었지만 신체적으로 구현할 능력을 얻기 전까지는 한낱  공상에 불과 했지요. 아이디어의 중요성을강조하는 개념 예술도 그것을 실행하는 퍼포먼스나 기록하고 전시하는 물리적인 장치가 없다면 개인적인 공상에 머물고 말았을 것입니다. 

법이나 계율에 따를 것을 명령하는 문장도 그렇습니다. 아무리 강한 어조로 명령해도 그것을 강제할 물리적인 장치나 기계가 없다면 법조문은 그저  묶음의 단어들에 불과합니다. 정보 패턴이 모든 것이라는 말을 자주 듣지만 정보의 흐름을 기록하고 가공하고 처리하는 물리적인 장치가 없다면 그건 사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모든 정보를 이진수로 바꾸고 변환 하며 가공하는 기계적 장치가 없었다면 정보 패턴이 지금처럼 중요성을 가질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물론 사상도 아이디어나 법이나 정보도 강력한 힘을 가지고 기계를 변환시키는 능력을 갖습니다. 하지만 그건 신체성을 갖는 기계적 성분이 있을 때에만 가동됩니다. 생산하며 작동하는기계가 중요한 것은 바로 이때문입니다. 정리하자면 신체성을 갖지 못한 것은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자체만으로는 기계가   없습니다. 기계처럼 반복적으로 작동하며 무언가를 생산하는 힘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죠. 들뢰즈 가타리가 표현 개념 조차 관념론 적이라며 거리를 두고 기계의 유물론을 표명하는 것은 바로 이때문일  입니다. 

한편 모든 기계가 이항적이며 흐름을 생산하는 기계와 그것을 절단 채취하는 기계가 선형적으로 이어져 있다는 명제는 후기에 가면 수정됩니다. 가령 , 등자, 기수로 구성되는 배치나 유목민이 발명한 인간,  ,  이라는 배치가 야기한 혁신을 말할때  기계들은 이항적이지도 선형적이지도 않습니다 . 세개의 기계중 흐름을 생산하는 것과 절단 채취하는 것을 구별하는 것도 어렵습니다. 그렇게 이제 기계는 하나의 배치속에서 접속하여 함께 작동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작동하는 최소 단위는 배치라고 정정 합니다. 이는 배치가 달라지면 동일한 사물이나 사람도 다른 기계가 됨을 뜻합니다. 

이러한 기계 개념이 겨냥하는 것은 1차적으로는 유기체와 짝을 이루는 기관의 개념입니다. 허파는 호흡 기관, 위장은 소화 기관 이라고 하지요.  생명체는 유기적 전체이고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호흡 순환의 기능을수행하는 도구가 바로 기관이지요.   기관이라는 개념에는 유기체의 전체를 위해 하나의 고정된 자리와 기능을  기관에 할당하고  기능을 충실히 수행 하라는 명령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스펜서 같은 이들이 제안한 사회 유기체로는  명령의 의미를  보여 줍니다. 그에 따르면 사회 유기체의 머리  다리  기관의 역할에 신분 집단을 할당하고 그것의 삶을 고정하는 카스트나 신분제는 생명의 본성에 부합하는 것이 됩니다. 국가, 가족 등의 공동체를 실체화해서 국민이나 자식으로서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도 다르지 않죠.

들뢰즈 카타리는 아르또 처럼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신의 심판과 절연하기 위해 기관과의  전쟁을 선포하려는 것입니다. 기관으로서의 운명에서 벗어나 다르게 작동할 잠재성을 강조하고자 기계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거죠.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부분 대상의 개념을 사용하는 것은  이때문이었습니다. 부분대상은 유기체라는 전체를 상정하지 않고 엄마도 나도 모르는 부분적인 욕망의 짝입니다. 프로이트에겐 입의 대상인 유방,  항문의 대상인 똥이  것이었지요. 들뢰즈 가타리는 유기적 전체에 반하는 신체의  부분성을 확대하여 모든신체 부분이 각자의 부분 대상을 갖는 기계라고 했던 것입니다. 생명체나 신체의 일부에 굳이 기계라는 개념을 사용한건 기관 개념을 대체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있겠습니다. 기계 개념이 이처럼 생물과 무생물 유기체와 기계사이를 가로 지르게 되자 이제  개념은 기계론과 생기론의 오랜 대립을 해체하는 횡단적 능력을 갖게 됩니다. 뉴턴으로 대표되는 17, 18세기는 물리학의 시대  모든 것을 기계적인 원리로 설명하려는기계론의 시대 였지요 반면 다윈으로 표상되는 19세기는 생물학의 시대 생명의 실체적 특권을 부여 하던 생기론의 시대 였습니다. 유기체가 생명체와 등치되고 무기물과 대립된 유기물이란 말이 생겨난 것도 이런 흐름에서 였습니다. 하지만 유전학의 발전은 생명의 중심에 있는 유전 현상이 기계적 프로세스로 이루어져 있음을 보여주었지요. 프랑스와 자콕과 함께 조절 유전자의 작동을 밝혀냈던 자크 모노는 구형 단백질은 분자적 수준에서 진정한 기계라고 합니다. 

생기론이 주장하는 생명체의 개체적 통일성도 기계론이 가정하는 기계의 구조적 통일성도 이로써 폭파 됩니다. 함께 작동할  양자 모두 독립적이고 유기적인 통일성은 없기 때문입니다. 접속하는 이웃에 따라 달라지는 기계적 일관성 만이 있다고 해야 합니다. 화학적으로 작동하는 기계로서의 세포,  세포 이하의 미시적 수준에서 작동하는 단백질 기계는 모든 것을 기계로 보는 것을 가능하게 해줍니다. 기계적으로 작동하는 생명체,  생명체 처럼 함께 작동하는 기계가 여기 있습니다. 이제 인위적인 것과 자연 적인 ,  문화와 자연, 기계와 자연,  기계와 생명,  사물과  생명을 가르는 모든 구별이 사라지게 됩니다. 이제  이상 인간도 자연 같은것은 없다. 하나를 다른 것안에서 생산하고 기계들을 서로  짓는 과정만이 있을 뿐이다. 도처에 생산은 기계 욕망하는 기계가 있고 분열적 기계가 있다. 

정해진 절차에 따라 고정된 방식으로만 움직이며 외부에서 가해지는 명령에 따라서만 움직이는 낡은 기계의개념과 결별해야 합니다.  세포가 화학적 또는 물리적으로 작동하는 기계인  처럼 물리적 기계  또한 구체적 형상을 벗어나 유연하게 작동합니다. 사이버네틱스  인공지능이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 지금이라면 이에 대해 조금  쉽게 인정할  있을 겁니다 .부분 대상이란 개념도  이상 필요 없습니다. 사실 부분 대상이란 개념에는 정신분석학의 고질 병인 고정된 본성 관념이 함축되어 있기에 접속하는 항에 달라 지는 기계개념이 되기에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생명체  사물이든 이웃하는 기계와 함께 작동한다는  이웃한 기계와 관계에  따라 다시 말해  그것이 속한  배치에 따라 다른 기계가 된다는   생명체가 기계에 대해 미치는 능동적 효과 만큼이나 기계나 사물도 인간이나 생명체의 능동적 효과에 미친다는  모든 기계는안정화된 패턴에 따라 작동하지만  패턴의 작동 양상은 가변적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입장을 들뢰즈 가타리는 낡은 기계론과 대비하여 기계주의 라고 부릅니다 . 생물과 무생물, 자연과문명,  자연과  기계등의 대립을 넘어서 신체를 갖고 다른 것과  접속하여 어떤 흐름을 절단하고 채취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은 모두 기계 입니다. 아니 존재하는 것은 모두 기계 입니다 우리가 알든 모르든 이웃하는 어떤 것과 접속하여 작동하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기계다.  하늘의 별이나 무지개 같은천상 기계들,  알프스 기계들 이들은 모두  몸의 기계들과  연결되어 있다. 기계의 지속적인 윙하는 소리다. 

모든 것이 기계라고 하는 이런 입장에 들뢰즈 카타리는 보편적 기계주의라고 명명합니다. 그것은 무수한 배치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추상기계에 의해 점유된 일관성의 평면입니다. 여기서 기계의 개념은 신체르 갖고존재하는 존재자 전체를 포함합니다. 그런점에서 기계도 공장도 도시도 모든 인공물도 자연에 속한다고 보는 스피노자의 보편적 자연주의와 동일한 외연을 갖는다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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