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은 들뢰즈 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프스>에서 가장 중심적인 개념입니다. 욕망이란 모든 생산적인 활동을 이끄는 동력일 뿐아니라 생산적인 능력 자체를 뜻하기도 합니다. 이를 표현하기 위해 그들은 두개념을 결합하여 ‘욕망하는 생산’이라는 말을 만들어 사용합니다. 하지만 이말에서 의미상 주어는 생산이 아니라 욕망입니다. 즉 ‘생산이 욕망’한다는 말이 아니라 ‘욕망이 생산’ 한다는 말입니다. 생산이란 욕망의 활동입니다. 생산으로서의 욕망 개념에서 우리는 ‘ 만들어 내는 차이’  ‘생성으로서의 차이’ 개념을 다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니체의 '가면이 얼굴이다'라는 의미에서 욕망은 차이 개념의 새로운 가면이라 하겠습니다.

생산하고 생산된 것들은 모두 욕망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언제나 문제는 욕망입니다. 정신분석학은 성욕이 욕망의 본성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특정한 선험적 본성을 갖는 욕망이 실체로서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저런 배치에 따라 달라지는 구체적 욕망이 있을 뿐입니다. 성욕도 이점에서 예외가 아닙니다. 따라서 어떤 현상이나 사태가 어떤 욕망과 결부되어 있는지, 그것의 근저에 어떤 욕먕이 있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또한 현행의 현실을 바꾸기 위해선 그 욕망을 어떤 욕망으로 바꾸어야 하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언제나 욕망이 문제라지만 이는 욕망의 개념이 모든 사태를 설명하는 하나의 원리나 해답이 아니라 언제나 어떤 욕망인가를 물어야 함을 뜻합니다. 이는 모든 현상이나 사태의 근저에서 그것의 발생원인을 묻는 니체의 계보학과 가까이 있습니다. 욕망의 개념이 니체가 말하는 의지, 정확히는 힘의 의지 개념과 사실상 같음을 안다면 니체와의 인접성은 더 분명하다 하겠습니다.

1962년 간행된 <니체와 철학>에서 들뢰즈는 힘을 통한 대상이나 현상을 파악하고 해석하는 것이 니체의 자연철학의 요체라고 합니다. 그런데 힘의 존재는 복수적이고, 언제난 모든 힘은 다른 힘과 관계 되어 있습니다. 의지는 이처럼 하나의 힘을 다른 힘과 관계짓는 성분이란 점에서 미분적 요소라고 합니다. 힘을 어디로 향하게 할것 인지, 어떤 힘과 어떤 방향에서 만나게 할 것인지, 쉽게 말해 어디다 투여하게 할지를 결정하는 성분이 바로 의지입니다. 따라서 의지란 힘에 작용하는 의지란 점으로 힘에의 의지라고 이해해도 좋겠습니다. 계보학이란 어떤 대상이나 현상의 의미를 읽어 내는 것이란 점에서 해석입니다. 의미란 대상이나 현상에서 표현된 힘과 의지 입니다. 계보학이란 어떤 것을 산출하고 지배하는 것이 어떤 힘, 어떤 의지 인지를 묻는 것입니다. 힘과 의지는 개념적으로 구별되지만 사실 힘과 의지는 분리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내가 던진 공의 힘은 그것을 어떤 방향으로 얼마만큼 날아가게 하려는 내 의지와 분리 될 수 없습니다. 의지가 공을 그런 양상으로 운동하도록 힘을 만들어 내는 발생인이고, 공의 궤적을 규정하는 미분적 요소입니다. 힘을 x라고 한다면 힘에의 의지는 거기에 더해지는 미분적 요소는 dx 입니다. 그러니 공에 실린 힘과 의지는 x + dx로 표시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운동하는 공에는 또 다른 힘과 의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래로 잡아 당기는 중력입니다. 이것을 y+dy라고 표시할 수 있습니다. 공의 질량과 그것에 작용하는 중력을 합한 것입니다. 그래서 공의 힘은 상이한 힘과 방향을 갖는 두 의지적 성분에 의해 그 양적 크기 비율의 변화에 따라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 갑니다.

하지만 힘과 의지를 분리할 수 없다고 해서 같은 것이라고 해서는 안됩니다. 힘은 할 수 있는 것이고, 힘의 의지는 하려는 것이다. 가령 같은 힘을 실어 던진다 해도 날아 가는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의지 입니다. 힘을 운동하는데 투여할 것인지, 글쓰는데 투여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도 의지 입니다. 벽돌의 질량 자체는 중력 즉 아래로 당기는 힘을 갖지만 이 벽돌을 앞으로 밀려는 의지가 작용하면 문제는 마찰력과 미는 힘의 미분적 관계로 바뀝니다. 의지에 따라 다른 힘으로 변환 됩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힘이 있고 , 의지가 더해지는 것이 아니라 의지에 따라 다른 힘이 되는 어떤 x가 있다고 해야 합니다. 의지가 힘의 질을 규정하는 겁니다.

주의해야 할 것은 여기서 의지란 인간이나 동물과 같은 유기체의 의지만이 아니란 점입니다. 공을 당기는 지구도, 쇳가루를 당기는 자석도 의지를 갖고 있습니다. 자지 않으려고 애를 써도 잠이 올때 자려는 의지는 내가 아니라 내몸의 어떤 부분에 속합니다. 술을 먹지 말아야지 결심을 하지만 어느새 술병에 손이 나갈 때도 그렇습니다. 따라서 내몸을 움직이는 의지는 단일하지 않습니다. 의지도 힘만큼 복수적입니다. 내 몸안에 여러가지 의지가 병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망설임을 경험 합니다. 먹으려는 의지와 먹으면 안된다고 저지 하려는 의지, 읽는 글에 집중하려는 의지와 쉬려는 의지가 맞서기도 하고 하나가 다른 것에 지배를 넘겨주기도 합니다. 바로 이것이 의지 개념을 하나의 유기체 그것의 단일성을 가정했던 쇼펜하우어와 니체가 다른 점입니다.

들뢰즈 가타리가 말하는 욕망이란 정확하게 이런 의지를 뜻합니다. 욕망이란 하려고 함이 하려는 바를 위해 힘을 사용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힘을 사용한다 함은 힘을 투여함입니다. 배가 고파 먹고자 함은 먹을 것을 찾거나 만들기 위해 힘을 투여하고, 멋진 글을 쓰고 싶다면 글을 쓰는데 힘을 투여 합니다. 피아노를 치고 싶은데 칠 줄 모르다면 칠 수 있는 힘을 고양시키기 위해 투여 힘을 투여 합니다. 능력내지 힘(power)을 향해 힘(force)을 투여하게 됩니다. 내 신체에 있는 힘이 글쓰는 힘이 되게하는 것은 글을 쓰는 욕망이고 피아노를 치게하는 것은 피아노를 향한 욕망입니다.

니체의 의지 개념과 마찬가지로 욕망 또한 인간이나 유기체의 욕망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욕망 투여’에서 욕망은 주어이지 목적어가 아닙니다. 내가 욕망을 투여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이 힘을 투여하는 것입니다. 힘이 투여 될때 주어는 내가 아니라 욕망이란 말입니다. 나는 그 욕망이 힘을 투여하는 양상에 따라 그때마다 산출되는 주체 입니다. 욕망이 기타 연주를 향해 힘을 투여할때 나는 기타리스트 주체가 됩니다. 먹으려는 욕망이 먹지 않으려는 욕망을 초과 할때 실패한 다어어트 주체가 됩니다. 주체는 처음이 아니라 나중에 오는 겁니다. 욕망이 산출하는 결과물입니다.

욕망은 힘을 투여하고 이로서 대상과 활동을 생산합니다. 이때 생산은 이중적 아니 삼중적입니다. 첫째 욕망은 대상을 생산합니다. 욕망의 대상으로 음식을, 글을, 음악을 생산합니다. 그렇게 생산된 대상을 생산합니다. 둘째 욕망은 생산 능력과 생산활동을 생산합니다. 먹을 것인지 아닌지를 식별하는 활동, 좋은 먹이인지 나쁜 먹이인지 식별하는 능력, 그림이 무엇을 표현하려는지 판단하는 능력 , 그림 그리는 힘을 만들기 위한 활동 등 입니다. 여기에 대해 욕망은 주체를 생산합니다. 욕망이 가동시키는 생산활동이 먹는 주체, 그리는 주체, 연주하는 주체, 연습하는 주체들을 생산합니다.

여기서, 들뢰즈 가타리는 욕망은 결여가 아님을 힘주어 강조 합니다. 결여가 없다면 왜 욕망하는가 하겠지만 결여는 이미 생산된 욕망에게 발생한 특정한 사태일 뿐입니다. 두더지와 지렁이에게 빛의 부재는 결여가 아닙니다. 빛의 부재를 결여로 느끼려면 빛이 이미 욕망의 대상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욕망은 대상과 동시에 생산됩니다. 빛에 대한 욕망은 빛이 없다면 생길 수 없습니다. 맛도, 소리도 그렇습니다. 어떤 대상이 욕망의 대상이 되는가 아닌가는 그 대상이 결여 되어 있는가보다 일차적입니다. 욕망에게 결여는 없습니다. 욕망은 자신의 대상을 생산하고 그것을 영유하려고 합니다. 대상으로 생산된것 만이 결여될 수 있습니다. 그 결여는 생산활동이 주어진 조건일 뿐입니다.

생산이란 종합입니다. 종합은 상이한 것들을 결합하여 새로운 것들로 변화시키는 활동 입니다. 식물은 빛과 이산화탄소를 결합하여 탄수화물을 만들고, 요리사는 상이한 재료를 결합하여 파스타를 만듭니다. 광합성을 하는데 빛이 필요하고 파스타를 만드는데 올리브유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뒤집어 식물에게는 빛이 결여되어 있고, 요리사에게는 올리유가 결여되어 있다고 한다면 바보같은 말입니다. 빛이 있으니 광합성을 하게 된것이고,  빛에 대한 욕망이 생긴것입니다. 올리브유가 있으니 파스타란 요리가 생겨난 것입니다. 올리브유가 없다면 다른 기름을 찾을 것이고 기름이 없으면 파스타 대신 다른 요리를 생산할 겁니다.

주어진 환경에서 가능했던 생산적 종합 덕분에 좀더 생산에 유리 했고, 그런 종합을 반복하려 할때 그 종합은 욕망이 되고 종합의 재료는 욕망의 대상이 됩니다. 나에게 근원적 결여가 있고 그것이 나의 욕망이다. 나는 이 결여를 채워줄것을 찾으며 산다는 정신분석학의 명제는 욕망의 이러한 생산과정을 거꾸로 뒤집어 출현한 것입니다. 물이 있는데 물을 욕망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우리는 없는 것을 욕망할뿐이야. 따라서 결여 된 것이말로 욕망된 것이지. 결여가 욕망의 본질이야. 욕망이 있다면 결여가 있다는 뜻이지. 만약 누군가 항상 욕망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충족될 수 없는 결여가 있기 때문이야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물이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면 없다고 욕망할 이유가 없습니다. 특별한 목적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청산가리가 없다고 그것을 욕망할 이유가 없듯이 말입니다.

욕망은 자신이 얻을 수 없는 것을, 충족할 수 없는 결여를 대상으로 갖지 않습니다. 결코 얻을 수 없는 것에 대한 욕망은 생명체의 욕망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주 특정한 조건에서 인간이라는 특정한 종의 일부가 갖는 도착적 욕망일 뿐입니다. 충족될 수 없는 결여는 그것을 채울 불충분한 대체물을 찾아 나서게 하는게 아니라 욕망이나 능력을 사라지게 합니다. 두더지나 심해어들 처럼 빛이 없는 곳에서 사는 동물들에게는 빛을 감지하는 능력이, 그런 기관이 사라집니다. 빛에 대한 욕망도 사라집니다.

결여가 있든 없는 생산은 계속 됩니다. 생산은 항상적이고 결여는 조건적 입니다. 지금 세상처럼 결여가 항상적인 것은 특정한 사회 체제 위에 창출되고 조직된 것입니다. 가령 공동체를 파괴하고 생존 조건을 모두 빼앗아 농민들을 무산자로 만드는 울타리 치기가 그랬습니다. 기본소득 같은 것에 대하여 말하면 “일을 하지 않아도 먹고 살 돈을 준다면 누가 일을 하려 하겠는가 ?“ 하고 반대하는 발상은 결여가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디에나 욕망이 있습니다. 확실히 욕망은 보편적입니다. 그러나 욕망은 어떤 활동에서도 동일한 본성을 갖는 보편적 실체가 아닙니다. 성욕이나 권력욕처럼 어디서나 답을 주는 보편적 욕망은 없습니다. 어디에서나 어떤 욕망인지 물어야 한다는 것이 욕망의 보편성에 함축된 요구 입니다. 하지만 모든 문제를 욕망의 문제로 다룰려는 건지 반문할 수도 있을 겁니다. 이에 대해 들뢰즈 가타리는 스피노자가 던졌던 문제를 다시 던져야 한다고 답합니다. “ 왜 사람들은 그것이 자신의 구원이라도 되는양 예속을 위해 투쟁하는가”. 그들은 이를 ‘정치 철학의 근본 문제’라고 답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 잘 알려진 대답은 대중이 지배 계급에 속아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파시즘에 대한 대중의 열광을 냉정하게 지켜본 빌헬름 라이히는 여기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아니다. 대중은 속고 있지 않았다. 어떤 점에서, 특정한 조건에서 그들은 파시즘을 욕망했던 것이다. 설명되어야 하는 것은 대중의 이러한 욕망의 도착이다.” 이것이 욕망에 대한 물음이 이책에서 문제화된 이유고 맥락입니다. 이는 또한 어디서든 ‘어떤 욕망인가’를 묻는 것이 정치 철학이 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들뢰즈의 이념 개념에 대해 안다면 이러한 욕망개념이 차이와 반복에서 들뢰즈가 사용했던 이념의 하나임을 알 수있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로 묶는 거대한 원리이자, 모든 질문에 답을 제공하는 최고의 근거가 아니라 언제나 반복해서 던져야할 물음이나 문제인 이념, 그 물음을 문제화 하도록 해주는 최소 크기의 미분적 이념, 모든 생산활동이나 모든 생산적 대상의 배아가 되어주는 잠재성 내지 능력으로서의 이념. 욕망은 차이 철학의 또 하나의 이념, 또 하나의 얼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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