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열분석이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을 비판하면서 들뢰즈 가타리가 창안한 무의식의 분석 방법 입니다. 분열분석의 대상 역시 무의식인데 그들은 무의식이란 다양한 방향으로 분열된 욕망의 다양체란 점에서 분열자 내지 정신분열자라고 합니다.
분열자는 무의식이 분열되어 있음을 즉 통일성을 갖지 않음을 표현하기 위해 선택된 말입니다. 프로이트도 주체의 분열, 무의식의 분열에 대해 말하지만 그것의 성적 분석을 갖는 이드와 그것을 억압하는 초자아의 대립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반면 분열자는 욕망이 대립되는 두 방향이 아니라 상이한 여러 방향을 동시에 향하고 있음을 표현하려는 말입니다. 무의식의 분열을 대립이 아닌 차이를 통해 개념화하려는 것입니다.
정신분열증적이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분열자는 임상적 실체로서의 질병을 뜻하는 정신분열증이 아닙니다. 정신분열증적 이라 함은 여러 방향으로 분열된 욕망의 본성을 표현하는 말이죠. 그런데 정신분열자는 정신분열증의 형용사형이란 사실로 인해 양자를 애써 구별하려는 들뢰즈 카타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것으로 오인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를 오해하게 되면 분열분석은 정신분열증이나 정신병에 대한 낭만적 찬가라는 흔한 비난이 즉각 튀어나오게 됩니다. 그러나 정신분열자란 다양한 방향으로 동시에 향하고 있는 욕망의 잠재성을 표현하는 말인 반면 정신분열증은 망상이나 환각 무논리 증 같은 증상을 동반하는 현행적 질병을 명명하는 말임을 잊어선 안됩니다.
이러한 분열자 개념을 이해하려면 니체와 스피노자를 모태로 하는 욕망의 개념을 경유할 필요가있습니다. 증상적 행동은 물론 일상의 언행을 추동하고 의식의 작동을 규정하지만, 의식이 포착할수 없는 욕망의 흐름이 바로 무의식 입니다. 충동 이라고도 하지요. 스피노자는 자신의 실존을 지속하려는 이 충동이나 욕망을 코나투스라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힘을 사용하고 힘을 투여하게 합니다. 힘을 어디에 어떻게 투여할 지를 규정하는 성분을 니체는 힘에의 의지라고 합니다. 힘에 대해 명령하고 그 힘의 작용 양상을 규정 하려는 의지를 뜻하지요.
들뢰즈 가타리가 말하는 욕망이란 스피노자의 코나투스나 니체가 말하는 힘에의 의지를 뜻합니다. 이는 생존과 결부된 모든 활동, 단지 먹고 번식하는 것 뿐 아니라 놀고 쉬고 즐기고, 훈련하고싸우는 등 모든 활동을 생산하는 추동력 입니다. 이러한 욕망은 수없이 다양한 방향으로 동시에 열려있으며 여기에서 저기로 힘의 투여 지점을 쉽게 바꿉니다. 증권에 투자한 돈으로 욕망이 옮겨 갔다가 쇼핑으로, 골프로, 욕망은 이동하곤 할 겁니다. 오직 진리만 생각하는 과학자도, 혁명만을 생각하고 사는 사회운동가도 다르지 않습니다. 욕망이 그자체로 분열자라고 함은 이런 뜻입니다.
그런데 좀더 깊이 들어가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의 욕망에서 다른 욕망으로 이동할 뿐아니라 하나의 행동안에서도 주저하고 망설이며 상이한 욕망 사이를 이동하곤 합니다. 하나처럼 보이는 욕망안에도 복수의 욕망이 섞여 있는 겁니다. 음식을 먹으며 살 찔까 걱정하고 책을 읽지만 마음은 콩밭에 가 있는 경우가 많죠. 혁명에 대한 욕망이라지만 권력에 대한 욕망과 구별할 수 없게 섞여있는 경우도 흔합니다. 이런점에서 하나로 보이는 욕망조차 하나가 아닙니다. 그래서 들뢰즈 가타리는 욕망이란 분열적 흐름이고 다양체라고 하죠.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이 욕망이 흔히 나라고 말하는 유기체나 주체의 속한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생물학의 기대어 말하자면 세포는 미생물의 공생체이고 다세포 생물은 그런 공생체들의 공생체입니다. 인간의 신체는 60조개 정도의 세포들의 공생체인데 그 몸 안에는 그보다 많은 수의 미생물들이 서식하고 있습니다. 내몸의 세포도, 내몸 속의 미생물도 모두 각자의 욕망을 갖고 있습니다. 가령 망막속의 광감세포는 빛에 대한 욕망을 갖고 있습니다. 빛이라는 자극과 감각적 반응에 수축과 응시가 반복되며 그러한 세포를 만든 거니까요. 우리는 수축된 물, 흙, 빛, 공기 입니다. 심장도 근육도 그렇죠. 심장, 근육, 신경, 세포 등에는 어떤 영혼이 있다고 해야 한다. 이들을 들뢰즈는애벌레 주체라는 익살스러운 개념으로 명명한 바 있습니다. ‘나’는 우리의 자아는 이 애벌레 주체들의 복합체 입니다.
모든 욕망이 분열자이고 분열된 욕망 각각이 다시 분열자 입니다. 그 흐름이 어디에 집중되는 가에 따라 그때마다 ‘하나의’ 욕망인 양 현행화 되지만 그때 조차 다른 방향을 향한 욕망이 항상 잠재적으로 존재합니다. 미생물이나 세포, 기관 등 유기체 이하 수준의 욕망을 미시적 욕망이라고 합니다. ‘나’란 주체, ‘인간’이란 유기체의 욕망은 미시적 욕망들을 통합하여 하나의 욕망으로 통합한 것이란 점에서 거시적 욕망이라 할 수 있죠. 물론 각자의 길을 가려는 개인의 욕망들을 조직이나 집단의 욕망으로 통합할 경우 라면 전자를 미시적 욕망, 후자를 거시적 욕망 이라고 해야 합니다. 욕망의 흐름을 구성하는 미시적 욕망을 분자적 욕망이라 하고 그것을 하나로 통합하여 구성된 거시적 욕망을 몰적 욕망이라고 합니다.
몰이란 기체 역학에서 기체의 상태와 변화를 다루기 위해서 사용하는 서술단위 인데 6.02x10의 23승개의 분자를 하나로 묶어 1몰 이라 합니다. 거시적 집단 인 셈인데 그 안에서 분자들은 각자의힘을 갖고 운동 하겠지만 그 전체는 통계적 통일성을 갖는다고 가정됩니다. 이 경우 각각의 분자적 움직임은 거대 집합체의 움직임으로 환원되어 포착되지 않습니다. 유기체 욕망에 대해 말할때 세포들의 욕망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건 아니지요. 오히려 장내 미생물들의 욕망에 따라 유기체가 먹을 것을 선택하고 세포들의 욕망으로 인해 끊으려고 결심했던 술에 다시 손에 가게 됨을 우리는 압니다. 무의식에 대해 말할때 흔히 사용되는 표현 그대로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하려는지 알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물론 프로이트 말처럼 억압되었기에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이 알기엔 너무 ‘작고’ 너무 분열적 이어서 그런것이지만 말입니다.
분열적인 욕망의 흐름이 투여되고 집중되는 곳에서 욕망하는 기계가 작동합니다. 그와 짝을 이루는 욕망하는 기계들이 접속되어 욕망의 대상을 생산합니다. 함께 작동하는 기계들을 하나로 묶어 ‘배치’라고 합니다. 성대와 혀와 입술 혹은 피아노와 클라리넷과 연주자 등 배치를 구성하는 기계들이 하나로 묶여 하나처럼 작동합니다. 기계는 배치를 단위로 작동하기에 배치가 욕망하는 생산의 최소 단위라고 하지요. 하나의 배치 안에도 기계들 만틈 혹은 그 이상으로 다양한 욕망들이 있는 겁니다. 하나이자 복수인 욕망의 다양체가 거기 있는 겁니다.
이러한 욕망의 다양체에 대한 분석이 분열분석 입니다. 분열적인 욕망의 흐름이 쏠리고 집중되며생산하고 또 그 흐름이나 조건이 달라지며 하나의 기계가 다른 기계로 변환되는 양상의 분석이 그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지금 이 배치 속에서 기계들을 가동 시키는 것은 어떤 욕망인지 그것이 쏠리는 지점은 어디고 그것이 이탈하며 흘러가는 출구는 어디 인지 그것은 또 어떤 말이나 기호들을동반하는지 등등을 분석하는 것이 바로 분열 분석입니다.
욕망은 대상을 생산하고, 활동을 생산합니다. 그렇게 이루어지는 활동을 욕망하는 생산 이라고 합니다. 이 개념은 욕망이란 개념을 유기체와 대응시키고 생산이라는 개념을 사회와 대응 시키는언어적 관습을 횡단하며 상이한 영역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하나로 연결 합니다. 이를 더확실하게 밀고 나가기 위해 들뢰즈 가타리는 욕망하는 생산과 사회적 생산이 하나라고 말합니다. 분열분석의 주장은 간단하다. 욕망은 기계고, 기계들의 종합이고, 기계적 배치다. 즉 욕망하는 기계들이다. 욕망의 생산은 질서에 속하며 모든 생산은 욕망하는 생산인 동시에 사회적 생산이다. 따라서 욕망의 투여는 가족적 투여일때 조차 언제나 사회적 입니다. 아니 가족적 투여보다 사회적투여가 우의를 가지며 전자는 후자안에서 이루어 진다고 강조합니다.
욕망은 힘이 투여될 곳을 결정하지만 힘이 닿는 한도 안에서만 그러합니다. 유기체 든 세포든 혹은 사회든 가용한 힘이나 에너지에는 제한이 있습니다. 그 제한된 자원을 어떻게 사용하는게 가장 좋은 지를 다루는 각자의 경제가 있습니다. 사회적 생산의 경제는 구성원들의 욕망의 흐름을 어떻게 끌어들여 생산적인 활동으로 투여하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다룹니다. 유기체도 그렇습니다. 자기안에서 욕망의 투여와 생산이 이루어질 때 제안된 힘 내지 에너지를 어디에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를 다루는 리비도의 경제가 작동합니다. 욕망하는 생산의 경제는 사회적 생산의 경제와 다르지않고 사회적 생산에 요구되는 욕망의 통제는 신체적 활동에 요구되는 욕망의 통제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경제학은 욕망과 분리된 생산된 추상적 노동을, 정신분석학은 생산과 분리된 추상적 욕망을 다룹니다. 여기서 욕망과 생산은 분리되어 있습니다. 분열 분석은 이렇게 갈라진 두 개념을하나로 묶습니다. 생산과 욕망을 동시에 다루는 새로운 분석 방법이 여기서 출연합니다. 뿐만 아니라 분열 분석은 사회학이나 정치학과 무의식의 이론을 다시 하나로 연결합니다. 욕망의 흐름에 대한 통제는 권력과 정치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고 욕망의 전염을 통해 형성되는 집합체의 분석은 바로 사회학의 과제이기 때문입니다. 분열 분석이 미시 정치학 이나 미시 사회학 이라고 불리는 건바로 이때문입니다. 이 모든 문제가 욕망에 따른 힘과 에너지의 투여 충돌과 전환의 문제란 점에서분열 분석은 미시 물리학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요컨데 들뢰즈 가타리는 주체안에서 욕망하는 기계들의 본성, 구성, 기능을 포착하는 것이 바로 분열 분석의 첫번째 적극적 임무라고 합니다. 분열 분석의 두번째 적극적 임무는 욕망의 투여 양상에 대한 분석입니다. 이는 욕망하는 기계들의 작동을 규정하는 기계적 배치를 분석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를 분석하기 위해서 하나의 거대한 몰적 구성체를 형성하는 양상으로 이루어지는지 아니면 욕망의 흐름이 분자적이고 미시적인 전염의 양상으로 이루어지는지를 구별해야 합니다. 가령 생산수단 소유 여부나 소속등에 의해 구성되는 계급이 몰적 집단이라면 동질성을 갖지 않는 사람들이 분자적 전염에 의해 모여 집단을 구성하는 대중은 분자적 입니다. 또 파시즘과 전체주의도 이런 방식으로 구별될 수 있습니다. 하나의 중심에 구성원을 복속시켜 하나의 전체 하나의 몰적 집단을이루게 될때 출연하는 것이 전체주의 입니다. 대중 사이에서 수평적으로 전염되는 욕망이나 감정의 흐름이 어떤 적을 향해 쏠려가며 파괴와 죽음을 생산할때 파시즘이 출연합니다. 가령 스탈린주의가 몰적 전체주의에 속한다면 나치즘은 분자적 파시즘에 속합니다. 집단적 통일성의 개인들이복속된다는 이유로 양자를 동일하다고 해선 안됩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분열적인 욕망의 흐름이 하나의 특권적인 지점으로 쏠려가는지, 아니면 여러방향으로 분산되고 다양한 지점들로 흘러가는를 구별하는 겁니다. 전자를 욕망의 편집증적 투여라고 한다면 후자를 분열적 투여라고 합니다. 가령 자본주의는 모든 욕망을 돈으로 끌어 들입니다. 자본주의에서 돈은 욕망의 블랙홀이지요. 자본주의가 욕망의 편집증적 체제라고 하는 것은 이때문입니다. 반면 돈으로 환원되지 않는 다양한 가치를 향해 흘러가고 새로운 가치를 창안하려는욕망의 흐름은 이와 대비해 욕망의 분열적 투여라고 하겠습니다. 정착적 투여가 전자와 가까이 있다면 후자는 유목적 투여와 가까이 있다고 할 수 있겠죠. 편집증적 투여에서 욕망을 빨아들이는 하나의 특권적 지점은 역으로 모든 욕망을 통제하는 권력의 자리란 점에서 파시즘적 투여와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분열적 투여는 지배적인 모든 가치와 대결하며 새로운 가치를 창안 하려한다는 점에서 혁명적 투여와 인접하다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분열 분석은 가족과 성욕을 넘어 경제, 정치, 사회 등 과 욕망과 생산이 존재하는 모든 곳으로 욕망과 무의식의 분석을 확장합니다. 언어, 얼굴과 풍경 소리와 음악등도 분석의 대상이 됩니다. 분열적 욕망이 산출하는 다양한 삶의 수많은 고원들이 있습니다. 거기서 충돌하고 부딪치며 변환되는 권력과 욕망의 양상들, 그 모두가 분열 분석의 대상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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