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령어는 천의 고원에서 제시되는 들뢰즈 가타리 언어이론의 중심 개념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모든 언어는 본질적으로 명령어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입니다. '더워요' 라는 말은 냉방기를 켜달라는 명령어를 담고 있고, '커피한잔 하실래요' 라는 말은 '저와 사귀어 주세요' 라는 명령어를 담고 있지요. 물론 이 명령어는 직설적으로 말해지지 않습니다. 일종의 간접화법으로 말해집니다. 그런데 누군가의 말에서 정작 알아 들어야 할 것은 간접적으로 말해지는 이 명령어 입니다. 이를 못알아 들으면 문장을 이해 했어도 실은 못알아 들은 겁니다. 커피 한잔 하자는 말에 '저는 커피를 못마셔요'라고 답하거나 '더워요' 라는 말에 '나도 더워'라고 응수 한다면 그 말을 못알아 들은 거지요. 아 알아 듣고 한 말일 수도 있겠네요. 이 경우에 대답은 거절의 명령어가 실려 되돌아 가는 겁니다.
이러한 언어 개념은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나 소통을 위한다는 것이라는 통상적인 명제에 반합니다. '언어란 상대에게 정보나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행동을 하도록 하려고 하는 것이다' 라고 말하는 거죠. 정보나 소통은 그처럼 원하는 행동을 하도록 전달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심지어 1+2 = 3이라는 것을 가르치려는 교사의 말 조차 수학적 지식을 그저 전달하거나 알려 주는 것이 아니라 1+2가 얼마냐고 묻거든 3이라고 대답하라는 명령어를 실어 나름니다. 그래서 그걸 가르치는 학교에서는 명령어를 제대로 실행하는 지 확인하기위해 시험을 보지요. 수학 교재에 지식을 알려주는 증명의 종류 보다 차라리 그것을 사용하여 풀어야할 수많은 연습문제들이 더 중요한 것은 이때문입니다. 군인들에게 훈련이 그렇듯이 명령어를 제대로 실행하도록 다양한 상황 속에서 훈련을 하게 하려는 겁니다.
들뢰즈 가타리가 직접 인용하지 않지만 언어에 대한 이런 생각을 앞서 제안한 사람이 있지요. 비트겐슈타인이 그 사람입니다. 초기의 저작인 논리 철학 논고에서 그는 ‘사실’과 ‘그림’이라는 개념으로 단어와 명제의 의미를 규정했지만 말년의 저작에서 입장을 크게 바꿉니다. 단어의 의미는 지시체가 아니라 용법이고 언어가 가르치는 것은 설명이 아니라 훈육이며, 언어란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이러저런 영향을 주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입장을 언어학에서는 보통 화용론이라고 하는데요. 들뢰즈 가타리 또한 화용론이야 말로 언어의 본질을 정확히 표현하는 이론이라고 봅니다. 언어의 조건 및 언어적 요소의 용법이 어떻게 실행되는가를 정의 해주는 화용론이 없다면 언어학은 아무것도 아니다. 나아가 '리좀학= 분열분석 = 지층분석= 화용론 = 미시정치학' 이라는 등식을 통해 화용론 이전에 자신의 기획 전반을 표현하는 분열 분석과 같은 위상을 부여합니다.
언어의 화용론이 미시정치학이라는 말이 보여주는 것은 언어라는 비신체적인 것이 신체적인 것과 관련되어 있을 때입니다. 명령어는 프랑스어 무디어흐드를 번역한 말인데 지령이나 행동지침, 슬로건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들은 이 단어를 '슬로건에 대하여' 라는 레닌의 글에서 따왔음을 명시합니다. 슬로건이란 물리적 힘들에 의해 조성된 사회적 상황과 관련된 명령문입니다. 슬로건은 주어진 상황안에서 어떤 것을 실행 하라는 명령이지만 이는 대게 신체적인 변환을 동반합니다. '모두 손들어' 라는 비행기 납치범의 명령어는 비행기 신체를 감옥 신체로 바꿉니다. 같은 신체적 조건의 변화가 언표 행위의 의미를 바꾸기도 합니다. '솔직하게 말해'라는 말도 카페에서 친구가 말할 때와 경찰서에서 형사가 말할때 아주 다른 의미를 갖게 됩니다.
명령어란 그 자체적으로 비신체적인 것이지만 신체적인 상태의 변환을 겨냥한 언표 입니다. 예컨데 “만국의 프롤레타리아 단결하라” 막스의 슬로건은 그 자체로는 비신체적인 언표이지만 프롤레타리아트라는 새로운 계급 유형을 발명했다는 점에서 신체적 변환을 야기한 언표의 탁월한 사례라고 합니다. 막스가 새로운 계급을 발명했다는 말이냐고 반문하시겠죠. 맞습니다. 그 이전에는 노동자들은 있었지만 다른 계급과 구별 되는 독자적 계급으로서 노동자 계급 즉 프롤레타리아트라는 계급은 없었습니다. 막스의 그 슬로건은 프랑스 혁명 이후 '상 퀼로트(Sans-culottes)'라고 불리는 대중들로 부터 노동자를 하나의 계급으로 불러낸 겁니다. 단결하여 다른 계급이나 대중과 분리되어 행동해야 할 별개의 계급을 창안한 거죠.
정보 전달이나 소통을 위한 일반적 수단이 언어라는 관점은 오랫 동안 언어 이론을 지배해왔습니다. 이는소통이론이나 정보 이론으로 확장 되기도 합니다. 고전 적인 소통이론은 발신자가 수신자를 향해 어떤 매체에 담아 메시지를 발송하고 수신자는 그것을 수신하여 정해진 코드에 따라 해독한다는 것을 기본프레임으로 합니다. 발송한 메시지가 전달과정에서 소음에 의해 지워지거나 망실 될 수 있는데 그 경우에도 알아 들을수 있도록 잉여적인 정보를 추가 한다고 하죠. 가령 수신된 문장이 '날도 추운데 __을 먹었어' 라고 합시다. 빈칸은 소음으로 지워진 부분 입니다. 그런데 그 빈칸에 들어갈 말은 을이라는 말을 통해 목적어라는 것을 알수가 있고, 먹었어라는 말을 통해 먹는 음식임을 알 수 있지요. 앞에 추운데라는 말은 의미상 추위를 더해 주는 것임을 알려주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소음에 의해 지워진 빈칸에 찬밥과 비슷한 말이 있었으리라고 추측 할 수 있습니다. 이 처럼 정보가 소음으로 지워져도 알 수 있게 해주는 잉여적인 정보를 정보 이론에서 잉여성이라고 합니다.
들뢰즈 가타리는 메시지의 교환을 근간으로 하는 이런 입장을 명시적으로 비판합니다. 잉여성이라는 개념을 아주 다른 개념으로 바꾸어 버리죠. 남아 도는 여분의 정보가 아니라 말해지는 문장의 간접화법으로 실려가는 명령어가 바로 잉영성이라는 것입니다. 직접적인 말이나 정보에 추가된 것이라는 점에서 잉여적이지만 사실은 그 말을 통해 바로 전하려는 것이 그것이란 점에서 없어서는 안될 핵심이 잉여성이라는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말을 한다는 것은 잉여성의 형태로 간접적으로 실려 가는 명령어를 발송하는 것입니다.
정보나 의미는 원하는 행위가 무엇인지를 알려주기 위한 것입니다. 정보나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문법이나 랑그 단어도 기표도 아니라 말하는 어조 입니다. 때로 우리는 한마디 유의미한 단어없이 그저 '야 !' 하고 소리칠때 우리의 의사를 전달하는 것은 바로 어조 입니다. 연출가 스타니슬랍스키(Stanislavski)는 오디션을 할때 오늘밤 이라는 말하나로 30가지의 의미를 표현해보라고 요구했다고 합니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 맞습니다. 어조와 표정을 이용하는 겁니다. 어떤 어조로 말하는 가에 따라 오늘 밤이라는 동일한 말은 아주 다른 의미를 갖게 됩니다.
음향학에서 음고나 음색은 주파수라는 형식으로 표현됩니다. 단순하게 말하면 주파수가 높은 소리는 음고가 높고 낮은 소리는 음고가 낮습니다. 어조는 음고를 포함하여 음색으로 표현됩니다. 음색은 배음 관계에 있는 여러 사인파들이 섞여 만들어지는 합성 함수의 그래프로 표시됩니다. 미디어 플레이어에서 보신적이 있죠. 요컨데 모든 음색의 어조는 주파수라는 형식으로 표현됩니다. 어조를 바꾼다 함은 주파수를 변조하는 겁니다. 음성적 주파수가 말의 의미를 결정하는 거죠. 이는 문법이나 랑그의 보편성을 강조하면서 개별적인 파롤은 과학의 대상이 아니라는 전통적인 언어학과 반대로 말할때 마다 다른 주파수를 갖는 파롤이 언어에서 본질적이라고 보는 관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전달 받은 명령어를 제대로 실행하려면 그것이 자신이 해야할일, 하고 싶은 일로 받아 들여야합니다. 의미는 알아 들었지만 '흥' 하고 무시할 수도 있고, '싫어 !' 라고 거부할 수도 있으니까요. 대개 전달된 의미를 받아 들인다는 것은 내가 알아 들은 명령에 따르겠다는 말이고 나를 호명하는 말에 대답한다는 말입니다. '모세야 !' 하는 신의 호명에 대답한다 함은 그의 명령에 따르겠다는 말이고 신이 요구하는 주체, 명령에 자기 의지를 갖고 실행하는 주체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주체화라고 하지요. 이렇게 주체화 된다는 말은 자신에게 발송된 말의 주파수에 공명한다는 말로 바꾸어 말 할 수 있습니다. 소리 굽쇠 옆에 있는 소리 굽쇠가 같은 주파수로 진동하는 현상을 공명이라고 하죠. 주체화란 내게 의미를 전달하는 주파수에 내가 공명하는겁니다. 그래서 의미화가 주파수와 대응된다면 그걸 전달된 의미로 받아들인다면 주체화는 공명하는 작용과 대응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어조의 음색에 언어의 본질을 연결하는 입장을 그들은 반음계적 언어학 내지 일반화된 반음계주의라고 명명합니다. 이는 음악에서 온 개념입니다. 장조, 단조같은 온음계는 도, 레, 미 등 보통 정해진 7개의 음을 사용하는데요. 그 음들 사이의 반음을 화성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이 반음계주의 입니다. 가령 파샵이나 솔샵같은 소리를 사용하는 것이 그것이죠. 이렇게 반음을 사용하면 그 조의 화성에 없는 소리가 나면서 음악의 색조가 크게 달라집니다. 바그너 이후 후기 낭만주의자들은 통상적인 조성적 작곡법에서는 제한적으로만 사용되던 이런 반음계 주의를 계속 확장하여 아주 음색을 다채롭게 하면서 해체하는 지점까지 밀고 나갑니다. 들뢰즈 가타리는 음색의 다양성을 이용는 이런 방법을 자신들의 언어 이론으로 끌어 들입니다. 즉 음색의 효과를 통해 기호를 의미화 하고 그것을 이용해 기호의 의미를 바꾼다는 자신의 언어학을 반음계적 언어학 내지 일반화된 반음계주의라고 명명합니다.
요약하면 언어는 명령어를 본질로 하고 명령어는 말에 간접적으로 실려 오는 잉여성입니다. 그 잉여성은 의미화와 주체화를 통해 행위로 이어집니다. 의미화가 어조의 음색을 표시하는 주파수와 대응한다면 주체화는 그 주파수에 동조되는 공명과 대응 합니다. 잉여성은 주파수와 공명이라는 두형식을 갖는데 전자는 정보의 의미화와 관려되고 후자는 소통의 주체화와 관련 된다.
여기에 하나더 추가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의미화하고 주체화하는 것은 말의 음색인 어조 이지만 좀더 확실히 전하기 위해 표정이 더해 집니다. 가령 오늘밤이라는 말로 다른 의미, 다른 상황을 표현하려는 배우는 어조만으로 부족하기 때문에 얼굴과 신체로 표현하게 됩니다. 배우의 연기란 어조와 표정 동작으로 이루어지죠. 전화로 하는 말이 종종 오해를 낳는 것은 얼굴을 보지 못한체 말을 주고 받기 때문입니다. 의미가 충분히전달히 안되는 거죠. 눈치를 본다는 말은 그가 하는 말이 정말 뜻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표정을 읽는것입니다. 어조 만큼이나 얼굴 또한 명령어를 전달하는 잉여성이라 하겠습니다. 얼굴은 그 자체로 잉여성이다. 그것은 의미화 내지 주파수의 잉여성과 더불어 또한 공명 내지 주체화의 잉여성과 더불어 잉여성을 이룬다. 같은 말을 하면서도 확실하게 명령어를 전달하려면 엄하고 무거운 표정을 짓게 되죠. 그래서 들뢰즈 가타리는 기호는 얼굴로 재영토화 된다고 합니다. 연기할때 처럼 의미를 표현하는 신체의 동작은 이런 얼굴 표정의 연장이기에 신체의 얼굴화라고 합니다. 얼굴은이런점에서 의미화와 주체화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하는 표현기계 입니다.
언어는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집합적인 것 입니다. 언어를 사용할때 우리는 특정한 규칙에 따라 의미화하고 주체화합니다. 더구나 언어활동이란 본질적으로 명령어를 주고 받는 과정이기에 권력이 작동하는 과정입니다. 명령하고 응답하는 패턴화된 양상이고 그것을 제대로 실행하도록 강제하는 배치가 있습니다. 부모와 자식, 교사와 학생, 고용주와 피고용자, 여자와 남자 등의 관계 속에서 우리는 그때마다 지배적인 패턴에 따라 말하고 행동합니다. 지배적인 의미 작용에서 독립적인 의미화는 없으며, 기존의 예속화의 질서에서 독립적인 주체화는 없다. 양자는 모두 주어진 사회적 장에서 명령어의 본성과 전달에 의존한다.
그러나 언어가 사회적이고 집합적이라 해도 하나의 보편적인 규칙, 보편적인 언어는 없습니다. 사회나 집단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규칙이나 언어들이 있을 뿐이죠. 사회적인 규칙들은 보편성의 형태로 강제될때 조차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끊임 없이 달라지는 가변적인 것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이라면 상황이나 생활 형태에 따라 달라지는 상이한 규칙들, 상이한 언어 게임들이 있다고 말했을 겁니다. 물론 이규칙은 하나의 집단안에서도 다른 유형의 언어 게임을 창안하고, 실행함으로써 달라질 수 있습니다. 가령 인터넷에서 새로운 말과 언어 게임이 만들어지고 이것들이 오프라인 세계에 끼어들면서 디시 새로운 언어 게임이 만들어지죠. 이를 통해 새로운 언어의 용법과 규칙이 발명 됩니다. 어느 사회든 하나의 언어가 아니라 수많은 언어들이 있습니다. 미국 영어와 영국 영어가 다르고 미국 안에서조차 수많은 영어들이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우리가 아는 문법 조차 사실 특정 시기마다 사람들의 지지를 받는 문체가 확장되며 출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화용론이 미시정치학이라는 말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언어란 본질적으로 명령어이고 그것을 사용할때 따라야 할 집합적 규칙이 있다함은 언어가 권력의 장임을 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양한 어조로 같은 단어 조차 다르게 사용할 수 있고, 비슷한 말을 사용하여 슬그머니 의미와 주체화의 장에서 빠져 나갈 수 있습니다. 지배적인 의미가 더는 작동하기 힘든 새로운 언어 게임을 발명함으로써 권력의 작동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학교에서 온라인에서 새로운 언어게임, 새로운 언어들이 빠르게 발명되고 아주 빠르게 변화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죠. 지배적인 권력에 저항하거나 그 권력을 무력화하려는 시도들이 거기에 있는 겁니다. 이처럼 언어는 권력이 작용하는 장이면서 동시에 그에 저항하고 그것과 대결하는 장이라는 점에서 미시정치의 장입니다. 화용론이란 명령어를 통해 의미화 하고 주체화하려는 권력에 대해 잉여성을 이용하여 새로운언어 게임, 새로운 규칙의 언어를 창안하려는 것이라는 점에서 분명 미시정치학이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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