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목이란 이동이 아니라 매끄러운 것을 통해 정의되는 반면, 국가장치란 모든 것에 홈을 파는 기능을 통해 정의된다. 이런 점에서 매끄러움과 홈 패임은 유목과 정착, 전쟁기계와 국가장치의 구별을 정의하는 '본질적 요소'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두 공간사이에는 혼합과 이행, 반전이 발생한다. "두 공간이 사실상 뒤섞여서만 존재한다는 것을 상기해야만 한다. 매끄러운 공간은 항상 홈 패인 공간으로 번역되며 그것에 의해 횡단되고 있다. 홈 패인 공간은 매끄러운 공간으로 항상 반전되며 회귀하고 있다."
두 공간과 결부하여 ‘선’의 문제를 추상적 선과 유기적 선으로 다룬다. 감정이입충동과 관련된 선을 ‘유기적 선’이라고 부르고 추상충동과 관련된 선을 '추상적 선'이라고 부른다. "예술은 추상적 선에서 시작한다."는 테제를 제기하고 이 추상적 선은 기하학적 선과 달리 유목적인 선으로 이해된다. 여기서 추상 개념은모든 형식을 탈형식화해서 흐름 그 자체로 ‘일관성의 구도’로 이어지는 그런 추상기계 개념이다. 이는 예술을 모방이나 재현. 혹은 구상으로 보는 전통적 개념에 벗어나 있다. 홈 패인것과 매끄러운 것을 대비하는 여섯가지 상이한 ‘모델’을 제시한다 .
1. 기술적 모델
흔히 보는 천인 직물이 홈 패인 공간을 이룬다면 동물의 털을 압착하거나 열을 가해서 만든 펠트는 매끄러운공간을 이룬다. 직물을 통해 홈 패인 공간의 몇가지 특징을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두종류의 평행적 요소에 의해 구성된다. 수직적이고 수평적 요소가 교차한다. 둘째, 두 종류의 요소는 '고정'과 그 고정된 것의 위아래를 가로지르면서 이동하는 기능을 가진다. 셋째, 홈 패인 공간에서는 반드시 적어도 한 면이 한계 지어지면서 닫혀있다. 마지막으로 이 종류의 공간은 반드시 앞면과 뒷면을 갖는 것으로 보인다. 날실과 씨실이성질, 수, 밀도에서 엄밀히 같을 때조차도 직조법은 한면을 매듭지어 뒷면을 재구성한다. 하지만 압축에 의해 만들어진 엉킨 섬유, 펠트는 직물공간과 대비되는 매끄러운 공간을 이룬다. 펠트는 무한하고 열려있으며, 모든 방향으로 무제한적이다. 그것은 앞면도, 뒷면도, 중심도 갖고 있지 않다. 그것은 고정되고 움직이는 요소들을 지정하지 않고, 배정하지 않으며, 오히려 연속적인 변이를 분포시킨다. 매끄러운 공간이라고 말할때의 매끄러움이 고르게 짜여진 동질성이 아니라 이질적인 것들이 결합되어 울퉁불퉁한 채 공존하는 것을 보여 준다. 퀼트나 패치워크처럼 이질성을 통해서 정의되어야 하는 매끄러움이다.
2. 음악적 모델
음악에서 홈 패인 공간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절단된 소리들의 분포를 뜻한다. 대표적인 것이 평균율이다. 도레미파솔라시도 동알한 간격(평균화된 간격)으로 주파수들이 고르게 절단한 음악적 소리로 정의하고 ,두음 사이의 간격에 의해 어울리는 음정과 어울리지 않는 음정 등의 정의된다. 이처럼 절단과 간격들이 일정한단위들로 분할되어 표준화된 방식으로 배열될 때, 그 배열과 분포의 원리를 '모듈'이라고 한다. 동일한 원리로 주파수를 절단하여 음계가 일정한 간격으로 정의되는 곳은 홈 패인 공간이다. 반면 음악에서의 매끄러운공간은 정해진 간격없이 소리들이 모이고 흩어지는 것을 통해 정의된다. 여기서는 모든 주파수의 소리가 다음악적 소리로 사용될 수 있다.
3. 해양적 모델
홈 패인 공간에서 선이나 궤적은 점에 종속되는 경향이 있다. 두점을 연결하는 직선이 중요한 선이 된다. 반대로 매끄러운 공간에서 점은 선의 일부이고, 선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갖는 통과점일 뿐이다. "매끄러운 공간에서 선은 벡터, 방향이지, 차원 혹은 척도적 규정이 아니다." 그래서 매끄러운 공간은 형태화되고 지각된 사물로 채워지기보다는 사건 혹은 특개성의 원리로 채워진다. 매끄러운 공간은 소유의 공간이라기 보다 '이곳'마다 고유한 느낌을 주는 '감응'의 공간이고, 멀리서 눈으로 휘둘러보고 파악하는 시각적/광학적 공간이라기 보다 직접적인 느낌을 통해 느끼게 되는 촉각적 공간이다. 폼패인 곳에서는 형식이 진료를 조직하는반면 매끄러운 곳에서는 쇚가 힘을 표현하거나 힘의 징후로 복무한다. 바다는 전형적인 매끄러운 공간이다. 위도와 경도로 표시되는 좌표가 바다에 덮어씌워지고, 지역을 격자화하는 자오선과 평행선, 경선과 위선들이 교차하는 지도가 바다에 홈을 파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중요한 것은 사막이 매끄러운 공간인가, 도시가 홈 패인 공간인가가 아니다. 매끄러운 공간은 홈이 패이기 마련이고 반대로 홈페인 공간 또한 매끄러운공간으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매끄러운 공간에서 매끄러운 공간에 적합한 삶과 실천을 창안해야 하며, 홈 패인 공간에서 다시 매끄러운 공간을 만들어 살아가는 삶과 실천을 창안해야 한다는 것이다. 동일한 공간을 흘러가는 상이한 두가지 여행을 구별해주는 것은 측정 가능한 혹은 척도적인 운동량이 아니라 공간화의 양식, 공간에의, 공간에 대한 존재 방식이다.
4. 수학적 모델
척도적 다양체와 비척도적 다양체, 외연적인 당양체와 질적인 다양체, 중심화된 다양체와 비중심화된 다양체, 수목적 다양체와 리좀적 다양체 등 모두 대비 되는 다양체의 짝들이다. 이 홈 패인 다양체와 매끄러운 다양체가 다양한 다양체의 짝들에 대응하는 것이다. 각각의 부분이 아무리 분할되어도 동질적인 ‘연장’과 달리분할될때 마다 상이한 질을 갖는 ‘지속’이라는 말로 구분했다. 전자가 양적 수적 다양체라면 후자는 질적인다양체라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다르다. 매끄러운 공간에 서식하는 것들은 분할될 때마다 그 본성을 달라진다는 의미에서 '매끄러운 다양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공간 자체와 모든 수가 동질적, 척도적 다양체라고간주하는 것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수는 그자체로 매끄러운 공간에 분배되고 분할될 때마다 매번 그성질을변화 시킨다. 세어진 수가 홈패인 공간에 속하는 것같이, 서수적이고 방향성이 있으며 유목적이면서 분절된수, 세는 수는 매끄러운 공간에 속한다." 부분마다 이질성을 특징으로 하는 매끄러운 공간은 언제나 상이한요인들의 복합효과에 의해 국지적인 특개성을 갖는다. 두 가지 요인이 결정하는 경우에 두개의 상황을 비교할 수 없다면, 매끄러운 공간에서는 아무것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일까 ? 비교나 측정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리만 공간의 경우가 바로 그렇다. 이공간에서는 각각의 부분들이 이질적이다. 각각은 무한히 근접하는 두 점사이의 거리의 제곱을 정의하는 표현형식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이런 논의에 의해 저자들은 매끄러운 공간의 두 가지 특징을 요약한다.한편으로, 서로의 일부분을 이루는 결정인이 크기와는 상관없이 포함된 거리 내지 배열된 차이로 소급될 때가 그것이다. 다른 한편, 하나를 다른것의 일부로 만들 수 없는, 결정인들이 척도와는 무관하게 오직 주파수나 누적의 과정에 의해 연결될 때가 그것이다. 이것이 매끄러운 공간의 노모스의 두 측면이다.
(1)차원수가 정수고 방향이 일정한 집합은 모두 홈패인 것 혹은 척도적인 것이라고 부를 수 있다.( 2)비척도적인 매끄러운 공간은 1이상의 분수 차원을 갖는 선, 또는 2이상의 분수 차원을 갖는 면을 구성함으로써 만들어진다. (3)분수의 차원은 말그대로 방향적인 공간의 지표다 (접선은 없으며, 방향의 연속적 변이만이 있다. (4)매끄러운 공간은 그 공간속을 통과하는 것, 혹은 공간 속에 기입되어 있는 것 이상의 보충적인 차원을갖지 않는 것으로 정의되는데, 이런 의미에서 매끄러운 공간에는 예컨대 선이 여전히 선으로 있으면서 면을채우는 평평한 다양체가 있다. (5)세는 수 내지 비정수의 부정확하지만 엄밀한 형식아래, 공간 자체와 그 공간을 점유하는 것은 동일화되는 경향이 있으며, 동일한 능력을 갖는 경향이 있다. (계산없는 점유). (6)이러한 무정형의 매끄러운 공간은 이웃관계의 누적에 의해 만들어지는데, 이때 각각의 누적은 '생성'에 고유한식별 불가능성의 지대를 정의한다.(선 이상이지만 평면 이하, 입체 이하지만 평면 이상)"
5. 물리적 모델
물리적 모델에서 다루는 중심 개념은 ‘노동’과 ‘자유활동’이다. 노동의 어원은 창조적인 활동으로서의 작업보다 참고 견디는 고통스런 활동을 지칭하는데 사용 되었던 말임을 보여 준다. "직각으로 교차하는 두 계열의 평행선으로, 그 하나인 수직선들은 고정적인 것 내지 상수의 역할을 하는 반면에 다른 하나인 수평선은 변수의 역할을 한다." 이 두 계열의 평행선은 "교차가 규칙적이 될수록, 홈 패임이 더 단단하게 되고, 공간은 보다 동질화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의미에서 동질성은 처음부터 매끄러운 공간의 특징이 아니라 반대로 홈 패임의 극단적 결과이다."
이 고원에서 들뢰즈/가타리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노동의 모델과 국가장치에 관한 것이다. 19세기에 이르러 일에 대한 물리-과학적 모델과 노동력 내지 추상적 노동에 관한 사회-경제학적 개념의 정교화가 동시에이루어 졌다. 전자를 다루는 물리학과 후자를 다루는 사회학이 발생석 친근성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콩트는사회물리학 이라고 작명해놓았으나 이미 같은 제목으로 책을 출간하여 사회학이란 이름으로 변경했다. 사회가 노동의 경제적인 척도를 제공했다면 물리학은 노동의 역학적 화폐를 제공했다.
임금체제는 그 상관자로서 힘의 역학을 갖는다. 물리학이 (이때만큼) 사회적이었던 적은 없었다. 왜냐하면두 경우 모두 표준 인간에 의해 일률적인 방식으로 들어올리고 끌어당기는 힘의 일정한 평균치를 정의하는것이 문제였기 때문이다. 평균적이 것에 기초한 표준적인 힘, 표준적인 노동강도, 표준적인 숙련도 등을 가정할 수 있을때 노동시간은 가치의 척도가 될 수 있다. 이러한 평균치의 노동력이라는 개념이 노동모델을형성한다. "모든 활동에 노동-모델을 부과하는 것, 모든 행위를 가능한 노동 내지 잠재적 노동으로 바꾸는것, 자유활동을 훈육하는 것, 또는 자유 활동을 단지 노동과 관련해서만 존재하는 '여가'로 밀어놓는 것." 이다.
추상노동 개념의 전제인 '표준적 인간'내지 '평균적 인간'은 어떻게 탄생했을까 ? 국가의 공공노동에서, 혹은군대의 조직화에서 탄생한 것이다. 전쟁기계를 국가적 건설현장과 공장에서의 노동-모델에 복속시키는 것은 18-19세기 국가장치가 전쟁기계를 영유하는 새로운 수단이었다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인디언의 경우 노동력을 파는 행위, 대가를 받고서 일을 하는 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노동을 치욕으로 여겼으며노동을 거부했다. 미국인들이 그많은 흑인을 노골적으로 들여 올수밖에 없었던 것은 인디언을 노예로서 이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노동의 물리-사회적 모델은 국가장치에 속하며, 국가장치가 두 가지 이유에서 발명한 것이라는 것이저자들의 주장이다. "첫째, 노동은 오직 잉여의 구성과 더불어서만 출현하므로, 스톡 없는 노동은 없다. 따라서 (말 그대로의) 노동은 잉여노동과 더불어서만 출현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에서 노동이란 이처럼 ‘자본’이라 불리는 스톡을 통해 그것의 일부를 대가를 받고 수행하는 활동을 지칭한다. 자본주의 이전의 노동에대해서는 다양한 형태의 스톡을 대가로 받고 수행하는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
둘째, 노동은 시공간의 홈 패임의 일반화된 조작, 자유활동의 종속, 매끄러운 공간의 파기를 수행하며, 국가의 본질적인 사업과 전쟁기계의 정복에서 자신의 기원과 수단을 발견한다. 시계는 공간화된 시간으로 시간을 동질화하고 양화한다. 특정한 공간에서 주어진 시간에 맞추어 시작하고 끝내야 한다. 삶의 지반 자체를 홈페인 공간으로 만들어 버린셈이다. 자본은 이런 홈 패임의 극단에서 새로이 매끄러운 공간을 구성한다. 자본주의에서는 필요노동과 잉여노동이 시간적 내지 공간적으로 분리 되기를 그치며 어떤 가시적인 형태로 국지화 될 수 없게 된다. 필요 노동과 잉여 노동의 국지적 구별 뿐아니라 불변 자본과 가변 자본의 구별이 어렵게 된다. 소프트웨어, 지적 소유권 등에 대한 자본의 집요한 공세는 가변자본조차 불변자본의 일부로 흡수하고 통합하려는 자본의 집요한 노력을 뜻한다. 네그리는 생산과 착취가공장에서만이루어지는게 아니라 사회전체가 잉여가치를 착취하는 장이 된다. 사회적 공장이라는 개념이 여기에서 유래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저자들은 새로운 조건에서 모든 노동은 잉여 노동이다. 인간의 소외는 일반화된 ‘기계적 노예화’로 대체되는데 여기서 사람들은 어떤 노동과도 무관하게 잉여가치를 제공하기도 한다. 모든 공간, 모든 시간이 잉여가치착취의 장이 됨에 따라 "자본에 의한 홈 패임의 끝에서 이런 식으로 일종의 매끄러운 공간이 만들어지게"된다. 본질적인 것은 홈 패인 자본과 매끄러운 자본의 구별이며, 전자가 영토와 국가, 심지어 다른 유형의 국가조차 넘나드는 복합체를 통해 후자를 낳는방식이다.
6. 미학적 모델
미학적 모델에 대해 말하며 그특징을 세가지 정도로 요약한다. 원거리상과 대비되는 근거리 상, 광학적 공간과 대비되는 촉감적 공간, 구체적선 내지 구상적 선과 대되는 추상적 선이다.
1)근거리 상과 촉감적 공간
접사는 원거리 상의 시각적 이미지를 근거리 상의 감응적이고 감정적인 이미지로 바꾼다. 과잉접사에서는시각적 형태가 없기에 이미지는 촉감적이고 질감적인 것이 되는 것처럼 보인다. 표면에서는 시선이 형태를그리는 선이나 윤곽선을 따라 가지 않고 대신 표면이 제공하는 질감을 느끼게 된다. 이를 눈으로 만진다는 말로 표현한다. 시선은 어디에서든 어느 방향으로도 향할 수 있다. 형태의 선이나 윤곽선이 만드는 홈이 사라지고 모든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 집니다. 이를 ‘절대적 국지’라고 하며 상대적 포괄과 대비하고 있다.
그림은 떨어져야 보이지만, 가까이서 그려진다. 마찬가지로, 작곡가는 듣지 않는다고들 한다. 즉 청취자는 떨어져서 듣는 반면, 작곡가는 가까이서 듣는다. 더욱이 독자는 긴 기억을 갖는 것으로 추정되는 반면, 작가는짧은 기억으로 쓴다. 이런 근거리상과 촉감적 공간이라는 특징은 매끄러운 공간에 상응한다. 반면 홈 패인 공간은 원거리상의 요구에 의해 정의된다. 방향의 일정함, 관성적인 좌표의 교환에 따른 거리의 불변성, 주위환경에서의 흡수에 의한 상호결합, 중심화 된 투시법의 구성이다. 늘어선 대상들은 소실선과 각 점을 잇는 선의 비례 관계에 의해 정해진 거리를 확보하게 된다.
2)포괄성과 국지성
포괄성은 많은 부분들을 자기 안에 담는 것이고 국지성은 어떤 제한된 부분에 머물러 있는 것을 뜻한다. 매끄러운 것은 근거리적이고 촉감적이다. 따라서 많은 것을 담는 포괄성은 갖지 않으며 반대로 각각의 부분들이갖는 특개성에 주목하는 만큼 '국지성'을 갖는다. 반면 홈 패인 것은 원거리상이고 다양한 것들을 풍경의 일부분으로 포함하고 수평선이나 윤곽선 안에 담는다는 점에서 '포괄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매끄러운 것이 국지적 부분에 집착하는 것은 아니다. 형태나 윤곽선의 홈을 넘어 모든 방향으로 동시에 나아갈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국지성은 상대성을 벗어나 절대성을 갖으며 이를 '절대적 국지성'이라고 할 수 있다. 매끄러운 공간에 달라붙어 그 전체를 점유하며 나아가는 유목민을 '절대적 유목민'이라고 표현한다. 반면 홈 패인 공간의 포괄성은 '상대적 포괄성'이다. 시야에 들어온 것을 담지만 특정한 것을 특정한 방식으로만 담아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소실점을 향해 모이는 보조선 안에 담는다는 점에서 상대적이고 시선은 소실점을 제외한다면 제한된 것, 제한된 형태만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상대적이다. 투시적인 풍경에서 시선이모든 곳으로 동시에 향할 수 있는 점은 바로 소실점밖에 없으며 그런 이유로 이점은 '국지적인 절대성'을 갖는다.
3)구상적 선과 추상적 선
20세기 초반 활동했던 미술사가 보링거는 리글에게 끌어온 개념을 사용하여 모든 예술 작품은 가장 내면적인 본질에 따르면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절대적 예술의지의 객관화며 이런 의미에서 예술의지란 대상과 창작방법과 무관하게 그 자체로 존립하는 의지로서 활동하는 잠재적 욕구라고 말한다. 그는 예술이란 모방충동이 아니라 추상충동에 의해 창조된다고 주장한다. 추상 충동은 외부적 현상으로 야기되는 인간의 커다란내적 불안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불안한 외부의 사물이나 공간에서 불명료한 세계상을 제거하고 거기에 필연성과 합법칙성을 부여하고자 하는 충동이다. 이런 추상충동은 감정이입충동과 달리 무기적인 것을 지향하고, 자아를 통한 향유가 아니라 자아를 버리고 몰입하게 하며, 모방보다는 변형시키는 방식으로 작용을 한다. 반면 주류 예술 이론가들의 모방이나 모사 미메시스라는 개념을 통해 예술의 발생기원을 파악했다. 여기서 모방충동과 감정이입충동을 인간과 외부적 현상간의 친화성이나 유사성에 대한 확인하려는 것이라는 점에서 매우 밀접한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충동은 대상과 자신을 동일화함으로써 발생하는 "쾌감"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항상 "유기적인 것을 향하고 있다." 고 본다.
들뢰즈/가타리는 예술이란 일차적으로 모방이 아니라 추상이며, 따라서 추상적 선에서 출발한다는 명제를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 "예술이 추상적 선에서 시작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추상적 선이 출발점이다.” 들뢰즈/가타리는 추상이란 개념자체에 대해서 보링거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 불안을 극복하기위한 합법칙성의 개념에 중심을 두고 있다면 들뢰즈/가타리는 추상을 변형이요 탈형식화라고 이해하고 있다. 추상적인 선은 직선이나 기하학적 선이 아니라 오히려 곡선이고 비기하학적 선이다. 그것은 어디서나존재하는 탈주선이고 '클리나멘'이며, 의식적인 변형인 경우에 조차 니체적인 의미에서 그 자체로 즐거운'놀이' 이다. 이러한 추상적 선은 유기적인 선이나 기하학적 선에 의해, 구상적인 선에 의해 사로잡히지 않았던 원시인이나 선사시대의 예술에서, 혹은 유목민의 예술에서 잘 나타난다고 한다.
추상적인 선을 직선적인 것이나 기하학적 선으로 환원하는 것 자체가 그리고 구상적이지 않은 선은 전부 일종의 기하학적으로 양식화된 선이라고 보는 것 자체가 서구적인 편견이다. 추상적인 것은 기하학적인 것이아니라 유목적인 것이며 그러한 유목민의 추상적 선이 바로 매끄러운 공간을 정의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특정이라고 한다. 추상적 선이 추상화의 역할을 대신하는 글의 출현과 더불어, 그리고 그러한 글을 만들고 관리하는 제국적 국가장치의 출현과 더불어 구상화되는 경향이 있다.
추상적인 선이 특정한 양상으로 사용되는 경우 구상적인 선이 그려진다고 말할 수 있다. 구상적인 것 혹은모방이나 표상은 선이 이러저런 형식을 가질 때, 그선들이 어떤 특징으로부터 생겨난 결과다. 즉 구상적 선이 어떤 조건하에서 구상적인 기능을 수행할때 나타난다. 구상적 선은 이미 어떤 형태만을 그리는 한에서만구상적이기 때문에 구상적인 선이 특정한 조건에 따라 추상적인 선이 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는 비대칭성이두선사에 있다. 구상은 추상과 대립되지만 추상은 구상과 대립되지 않는다. 추상적 선은 구상적 선이라는 '대립물'이 출현하기 이전에, 대립과 무관하게 이미 존재했기 때문이다.
홈 패인 선의 체계를 형성하는 요소로 중요한 것이 대칭성이다. 대칭성은 정해진 위치를 벗어나는 모든 선을불합리하고 부적절한 것으로 간주한다. "직선적인 체계가 반복을 제한하고, 그것의 무한한 전진을 가로막으며, 반사상 내지 별모양으로 중심점과 방사적 선들의 유기적 지배를 유지하는 것이 바로 대칭이다. 저자들은 대칭과 반복을 대비시키고, 반복과 고딕선을 병치한다. 즉 고딕적 선은 ‘형식이 아닌 표현 능력을, 형식으로서의 대칭성이 아니라 능력으로서의 반복성을 지닌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현대적 의미에서 추상적선에 관한 정의를 내린다. "어떠한 윤곽도 그리지 않고 어떠한 형식을 제한하지도 않는, 가변적인 방향의선"이다. 매끄러운 공간 자체가 해방적인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하지만 투쟁이 변화하고 치환되는 것은 바로 거기서고, 생명이 자신의 쟁점을 재구성하고 새로운 장애물과 대면하고, 새로운 스타일을 창안하고 상대를 변용시키는 것도 바로 거기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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