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의 고원>에서 3장의 제목은 ‘기원전 10,000년: 도덕의 지질학’ 이다. 기원전 10,000년의 지구로 돌아 간다. 오직 입자와 같은 질료들의 흐름 만이 존재 한다. 비지층화되거나 탈 지층화된 신체와 그 신체를 흐르는 모든 흐름, 원자 이하의 입자들, 전 생명적이고 전물리적인 자유로운 특이성을 질료라고 한다. 여기에서 지층화와 이중분절로 나아간다. 지층화는 질료의 흐름을 채취하고 일정한 형태로 고정하거나 일정한 코드에 따라 분할하여 포착한다. 지층화는 고정하고, 다양한 것을 하나로 제한다. 이러한 지층은 나름의 층들로 분할되고 분절된다. 분절은 질료의 흐름을 기본적인 구성단위로 분할하고 그것을 일정한 형식으로 결합하는 것이다.
옐름슬레브의 기호학적 개념을 빌려와 내용과 표현으로 분절을 설명한다. 각각의 분절은 형식과 실체를 모두 갖고 있다. 내용과 표현의 두가지 층위에서 다시 실체와 형식에 따라 분절한다. 여기서 각 실체는 기본 적인 구성단위이며, 형식은 그 실체들을 결합하는 규칙이다. 언어학 기준으로 내용과 표현 구분하여 본다. 즉 언어는 음운론적 층위와 의미론적 층위로 이중 분절되어 있다. 음운론적 분절은 음소라고 하는 언어학적 최소 단위의 분할과 그것의 결합인 음절이 있다. 의미론적 분절은 형태소라고 하는 최소 단위와 통사적인 결합관계나 단어들이 선택되는 언어 형식이 있다. 즉 음소와 형태소는 실체이고 그것들이 결합되고 조직되는 각 규칙은 형식이다.
지리학적인 지층과 연관하여 내용과 표현을 구분하여 본다. 지구는 크게 세 종류의 지층을 자신 위에 산출한다. 즉, 물리-화학적, 생물학적, 문화-기술적 지층이다. 첫번째 물리-화학적 지층이다. 여기에서 형식화 된 질료를 ‘내용’이라고 부른다. 질료들이 선별된다는 점에서 실체의 관점이고, 그것이 특정한 질서에 따라 선별된다는 점에서 ‘형식’이라고 부른다. 내용의 실체와 형식이다. 기능적 구조는 ’ 표현’ 이다. 표현 또한 형식과 실체로 구분한다. 고유한 형식의 조직이란 관점과 그 화합물을 형성하는 실체의 관점이다. 이는 결정이라는 물리 화학적 현상을 설명한다. 시몽동의 개체화 이론의 결정화 모델의 설명이다. 분자적 수준과 몰적 수준의 관계가 ‘표현’이다.
예를 들어 다이아몬드는 탄소로 이루어져 있고 어떤 특정한 구조를 이루고 있다. 이 특정한 구조가 확대되면 다이아 몬드라는 결정체가 만들어 진다. 결정은 탄소라는 미시적 구조의 거시적 표현이다. 분자들이 특정한 결합으로 이루어진 구조물이다. 이 지층에서는 내용은 분자적이다. 표현은 다이아몬드으며 몰적이다. 내용과 표현의 차이는 크기와 구조의 차이 이다. 표현은 증폭하는 구조화 작업과 같다. 원초적 미시물리적인 불연속성의 능동적인 특성들을 거시물리적인 층위로 이동하도록 만든다. 이를 내용과 표현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유형으로 구분 한다면 실재적-형식적 구별에 속한다. 동일한 지층에서 크기와 질서에 따라 내용과 표현을 구별한 것이다. 몰 단위로 포착되는 기체분자들의 움직임에서는 분자적 움직임이, 각각의 분자적 고유함이 몰적인 단위, 몰적인 집합체의 움직임으로 환원된다. 개개의 분자들이 몰적인 움직임과 양상에 공명하도록 유도한다.
생물학적 지층으로 내용과 표현을 살펴본다. <노마디즘1>에서 내용과 표현의 관계중 실재적-실재적 구별의 예로 들었던 유전의 경우이다. 유전에 관여하는 것은 단백질하고 핵산이다. 핵산은 대개 세포의 핵안에 염색체에 자리잡고 있으며 유전정보를 갖고 단백질을 합성하는 기능을 한다. 단백질을 통해서만 생명체는 유지 된다. 핵산과 단백질은 표현과 내용의 관계를 이루고 있다. 표현의 실체와 형식이 각각 뉴클레오티드(혹은 그것의 코돈)와 핵산이라면, 내용의 실체와 형식은 각각 아미노산과 단백질이라고 할 수 있다. 각각 별개의 지층을 이루고 있다. 내용의 실체인 아미노산은 표현의 실체인 뉴클레오티드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존재하는 것도 다르고 성분도 다르다. 다른데 이것들이 특별한 과정을 거치면서 생명체를 복제 해낸다.
이처럼 표현과 내용이 각각 별개의 실재적 지층을 이룰 때 실재적-실재적 구별이라고 한다. 이는 몰적인 것과 분자적인 것의 차이가 커져 내용과 표현의 층위가 독립적인 지층을 형성할 때를 의미한다. 물리-화학적 지층에서 생물학적 지층으로 옮겨 갈때 내용과 표현을 구분하는 본성이 변한다. 생물학적 계층으로 올라가면 형식적 구분과 달리 내용과 표현이 떨어져 있다. 본성이 완전히 달라진다. 이게 실재적 구분이다. 스피노자는 사유하고 연장이라는 두가지 속성의 구별을 실재적 구별이라고 한다. 이렇게 속성이 완전히 다른 실체를 갖는 연장과 사유는 실재적 구별이다.
세번째로 문화-기술적 지층이다. 자연적으로 결정화 과정을 거치지 않으며 유전적으로 결정돼 있지도 않는다. 예를 들어 감옥이 있다. 감옥은 인간이 만든 산물로 결정체도, 생명체도 아니다. 외부세계를 변양 시킨 문화적 지층이다. 감옥은 하나의 형식이지만 내용과 표현이 독립되어 별개의 지층을 이룬다. 감옥이 내용의 형식이라면 이에 상관적인 표현의 형식은 비행이다. 비행 자체는 강도, 강간, 절도, 경제 범죄, 수뢰 등의 말로 표현되는 표현의 형식을 갖고 동시에 그런 범죄를 저지르는 신체적이고 물리적인 양상을 내용의 형식으로 갖는다. 또한 감옥은 건축물과 간수를 내용의 형식으로 갖고, ‘독방’ ‘혼거방’ ‘징벌방’ 등과 같은 감옥의 고유한 언표 등을 표현의 형식으로 갖는다. ‘언표적인 것’의 다양체인 비행과 ‘기계적인 것’의 다양체인 감옥이다. 표현이라는 ‘담론적 다양체’와 내용이라는 ‘비담론적 다양체’로 교차하는 두개의 다양체 이다.
이렇게 내용과 표현의 지층이 본질적으로 다를 때 실재적-본질적 구별이라고 한다. 내용과 표현의 상응성이 사라진다. 스피노자 식으로 말하면 신체적인 것과 비신체적인 것의 구별이다. 들뢰즈/카타리가 사용한 개념을 빌면 기계적인 것과 언표적인 것의 구별이다. 먹는 기계로서의 입이 신체적인 것 내지 ‘기계적인 것’의 층위, 다시 말해 내용의 층위로 자립적인 지층을 형성한 것이라면, 말하는 기계로서의 입은 비신체적인 것 내지 ‘언표적인 것’의 층위 이다. 표현의 층위가 자립적인 층위를 형성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실재적-본질적 구별에 이르면 내용과 표현의 상응성은 사라진다. 각 지층은 내용과 표현 사이의 독립성이 커져서, 문화 -기술적 수준에서는 완전히 독립성을 획득한다.
추가적으로 내용과 표현의 관계에 대해 무엇이 아닌가를 보여줌으로써 내용과 표현 개념을 좀더 명확하게 한다. 첫째 ‘내용과 표현은 기의/기표 관계로 환원되지 않는다.” 내용과 표현은 쉽게 언어의 기의/기표 개념을 떠올리게 하지만 내용과 표현의 관계는 기의/기표 관계로 환원되지 않는다. 내용과 표현 구별의 유형중 언어적 의미를 포함하는 기호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실재적-본질적 구별이다. 표현의 형식과 내용의 형식 간에 실재적일 뿐만 아니라 범주적인 구별이 있을 때에만 우리는 기호에 관해 정확히 말 할 수있다. 표현의 형식이 존재하는 모든 곳에 기호가 존재한다고는 할 수 없으며, 표현의 형식과 기호를 동일시 해서도 안된다. 표현과 내용을 기표와 기의, 혹은 기호와 대상, 말과 사물 이라는 기호학적 관계로 환원해서 안됨을 의미한다. 내용의 형식은 하나의 사물 내지 지시체로 환원되지 않으며, 표현역시 기표나 기호로 환원되지 않는다. 문화적-기술적 지층의 예로 설명한 감옥은 내용의 형식이며, 이 형식은 ‘감옥’이란 말이 아니라 ‘비행자’, ‘비행’과 같이 완전히 다른 말과 개념에 준거 한다. 비행은 감옥이라는 내용의 형식과 상호 전제되는 표현의 형식이다. 비행은 결코 감옥의 기표가 아니다. 그것은 심지어 사법적 기표도, 감옥의 기의도 아니다.
둘째 ‘내용/표현은 내용/형식 관계로 환원되지 않는다.’ 내용과 형식이 서로 자율성을 갖지만 내용이 형식을 규정한다는 점에서 형식에 대해 우위성을 가지며, 내용과 형식은 일정한 상응성을 갖는다는 식의 명제는 문학이나 예술을 다루는 맑스주의적 이론 안에서 항상 발견되는 것이다. 경제적 토대와 그 상부구조의 관계 이다. 통상 경제적 토대를 내용이라고 보고 그것의 상부구조를 형식이라고 본다면 내용이 형식을 규정한다. 내용과 형식이 동등하게 다뤄지는 게 아니라, 내용이 중요하다. 양자는 서로 조응하고 상응한다고 말한다. 엥겔스는 쿠겔만이라는 동료와 나눈 편지에서 상부구조의 자율성에 대해 강조한바 있으며, 알튀세르는 이를 좀더 밀고 나가 형식인 정치나 이데올로기 등이 상대적 자율성을 갖는다고 주장한다. 그는 경제는 단지 최종심급에서만 결정적이라고 말한다.
어떤 내용도 형식이 없을 수 없다. 내용과 형식의 관계는 사실상 내용의 형식에 대한 것만을 일방적으로 다루게 된다는 점이다. 형식이란 말이 내용과 구별되는 것으로 사용되는 한, 그것은 내용과 하나인 형식이 아니라 별도의 형식을 갖는 별도의 개념이 있어야 한다. 표현이란 말이 바로 그것이다. 내용의 우위성이나 내용-형식 간 상응성을 내용과 표현 사이에는 설정할 수 없다. 내용과 표현을 내용과 형식이란 말로 쓰자마자 구별되어야 할 두개의 층위에 그런 관계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착각이 발생합니다. 동일한 표현조차 어떤 맥락에서 어떻게 씌어지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셋째 ‘내용과 표현의 상이한 형식에 진화적 단계를 설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떤 지층이 다른 어떤 지층과 소통할 것인지 혹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지를 사전에 알 수 없다. 무엇보다도, 좀더 낮거나 좀더 높은 수준의 조직체란 없다. 하부 지층은 지층의 통합적 부분이고, 변화가 일어나는 환경으로서 지층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것이지, 조직화의 증가가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무생물, 생물, 인간, 정신 식의 이미 진화적인 서열을 내포하고 있는 구별 자체를 부정한다. 세포 내부의 핵산이나 단백질이 “화학적으로 작동하는 기계’인 것처럼, 그리고 입이나 손 등이 이웃한 항들에 따라 다른 기계가 되는 ‘기계’인 것처럼, 그리고 문과 함께 수위가 건물 안으로 드나드는 동선의 흐름을 절단하고 채취하는 기계인 것 처럼, 동물이나 사람 또한 진료의 흐름을 특정한 양상으로 절단하고 채취하는 기계이다. 그러한 절단과 채취의 양상에 적합한 방식으로 분절된 지층을 형성함을 의미한다.
다음으로 지층들의 토양이 되고, 지층들을 다양하게 변화시키는 환경에 대해 다룬다. 지층이란 개념자체가 그 외부로서 그것과 접촉하는 다른 지층과의 관계속에서 정의 된다. “하나의 지층은 애초부터 필연적으로 이 지층에서 저 지층으로 옮겨 다닌다. 그것은 이미 다수의 층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중심에서 주변으로 옮겨가는 동시에 주변은 중심에 반작용해서 새로운 주변과의 관계 속에서 새로운 중심을 형성한다. 흐름들은 끊임없이 외부로 방사되고 되돌아온다.” 이러한 환경은 내부환경과 외부환경으로 구분한다. ‘내부환경’은 ‘매개적 환경’이라고도 부르며 바깥지층이라고 정의한다. 외부 환경은 지층에 ‘병합된 환경’ 내지 ‘결합된 환경’이라고 할 수 있으며 병렬지층이라고도 한다.
예를 들어 먹는 기계로서의 입은 손과 결부되어 있고 말하는 기계로서의 입은 얼굴과 결부되어 있다. 이 경우 손은 입이 먹는 기계로 작동하기 위한 내부 환경이다. 여기에 식도와 위장이라는 소화기관에 이어지는 바깥지층들의 계열입니다. 수직적으로 연결되어 의미로 수직지층으로 이미지화 할 수 있다. 얼굴은 입이 말하는 기계로서 작동하기 위한 조건으로 내부 환경이다. 손-입-혀 등의 계열은 음식과 맛이라는 외부환경을 갖는다. 음식이 없다면 영양소의 흐름을 절단하고 채취하는 ‘먹는 기계’는 존재할수 없다. 음식과 맛은 입 내지 혀라는 먹는기계에 병렬지층의 계열을 형성한다. 말하는 기계로서 입과 혀도 공기와 기표들이라는 외부 환경을 갖는다. 이렇게 하나의 지층은 외부를 이루는 수직지층과 병렬지층들 속에서 존재한다. 이중분절에서 형식은 코드에, 형식화된 질료인 실체는 영토성과 관련이 있다. 병렬지층은 코드화 및 탈코드와 과정에 관련되며, 바깥지층은 탈영토 및 재영토화와 관련된다.
여기서 코드화란 코드를 익히고, 그 코드에 길들이는 것이다. 영토화란 어딘가에 끌어 들이거나 귀속시키는 것이다. 코드는 기호의 사용규칙이나 법조문이 그 예가 될 수 있다. 탈코드화는 그 규칙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재코드화는 다른 종류의 규칙에 길들이는 것이며 탈 영토화란 귀속되거나 머물렀던 영토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재영토화란 다른 영토에 다시 머물거나 귀속되는 것이다. 탈코드화나 탈영토화는 어떤 식으로든 재코드와 되거나 재영토화 된다. 따라서 이런 운동은 모두 절대적이 아니라 상대적이다. 상대적 운동이 하나의 지층에서 다른 지층으로 변환되는 것이다. 절대적 탈영토화는 상대적 탈영토화를 극한으로 밀어붙인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상대적 탈영토화의 속도나 강도를 강화한다고 해서 도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미 우리는 항상 거기에 도달해 있으며 애초에 거기서 시작했다. 절대적 탈영토화는 애초부터 존재하며 지층들은 일관성의 구도 위에서 시작 되었다. 일관성의 구도는 도처에 존재하고 항상근원적이고 내재적이다. 절대적인 탈영토화, 일관성의 구도가 어떤 운동을 통해 비로소 도달해야 할 가능성의 세계가 아니라, 다양한 지층들을 만나며 통과하는 우리의 삶 자체에 항상-이미 내재하는 현실성의 세계라는 것을 뜻한다 물론 현재화된 형상, 현재적인 지층이 아니라, 비형상적인 잠재성이라는 점을 잊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마지막으로 지층과 배치, 추상 기계의 개념을 다룬다. 지층을 탈지층화하여 일관성의 구도로 이어지게 하는 것이 배치이다. . 배치가 작동시키는 탈영토화는 그 자체로 항상 상대적 탈지층화에 머물 뿐이다. 추상기계는 지층과 주어진 지층 위에서 무엇이 변하고 무엇이 변하지 않는가를 다룬다. 무엇이 지층의 통일성 및 다양성을 설명해 주는가 이다. 상이한 방식의 추상을 통해 지층들의 통일성을 형성하는 요소이다. 지층의 통일성을 설명해주는 것이 추상기계라면, 그것의 다양성을 설명해주는 것은 지층의 탈코드화와 탈영토화라고 할 수 있다. 추상은 형식의 추상과 탈형식적 추상으로 나눌 수 있다. 형식의 추상은 다양한 것들에 공통된 어떤 형식적 통일성을 추출하는 것으로 공통된 형식(형상)을 찾아 내는 방법이다. 원, 직선, 삼각형이니 하는 유클리드 기하학에서 다루는 모든 개념이 바로 이런 추상을 통해서 성립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이란 개념이 이런의미이고, 플라톤의 이데아 역시 이러한 기하학적 추상에 의해 만들어진 추상물이다.
탈형식적 추상은 모든 형식 자체로부터 탈형식화되는 것을 의미하는 개념이다. 가령 기라는 개념은 모든 종류의 형식을 벗어난 개념이고 상이한 형식을 가로지르며 그것들을 하나로 연결해주는 탈 형식적 통일성을 형성 한다. 예로 예술 사례를 살펴 본다. 서양 예술에서 ‘비례’는 다양한 지층에서 ‘미’를 정의해주는 형식적 통일성을 형성하는 추상기계다. 음악에서는 미란 현의 비례 관계를 통해 발생하는 상이한 소리들의 조화라고 한다. 화가나 건축가들은 귀에 쾌감을 주는 비례관계가 눈에도 쾌감을 주리라고 믿었다. 이에 건축에서도 비례가 기본 원리가 되었다. 여기에서 상이한 지층을 넘나드는 건 추상기계(비례) 때문이 아니라 ‘유사성’에 입각하여 사유하는 르네상스 공유의 에피스테메(푸코의 특정시대를 지배하는 무의식의 인식체계) 덕분이라고 한다.
공통된 형식의 추상으로서 추상기계는 관련 지층의 유기적 통일성을 만들기는 하지만 상이한 지층을 넘어다니는 그런 통일성을 만들진 못한다. 그것은 형식 자체를 넘어서는 통일성으로 탈형식적 추상에서 가능하다. 각각의 지층에 고유한 어떤 구성 단위를 넘어서 질료적 흐름 자체까지 추상을 밀고 나간다. 모든 형식을 넘어선 질료로 나아가는 것, 가장 기본적인 구성 단위조차 탈형식화해서 ‘기관없는 신체’에 이르게 된다. 강밀도의 분포가 완전히 평평한 상태, 디그리 제로 상태 이다. 여기서 디그리제로 즉 공이라는 개념은 멈추어 있는 게 아니라 흐르고 생산하는 잠재성 자체, 무나 부재가 아니라 모든 지층을 형성하지만 절대적으로 탈지층화된 상태를 매우 적절하게 표현 해준다. 모든것이 가능한 상태로의 기관없는 신체이다.
‘일관성의 구도’에 해당된다. 일관성의 구도의 고유한 요인은 ‘강밀도의 연속체’, ‘입자 혹은 기호-입자들의 결합된 방사’, ‘ 탈영토화된 흐름들의 통접’ 이다. 탈형식화한 추상기계는 불변성이 아니라 변이와 변환이 성분으로 추상화의 선, 플라노메논(Planomene)에 근접한 추상기계라고 한다. 이에 비해 지층에 감싸여 있으며 그것의 통일성을 구성하는 단일한 추상기계는 에쿠메논(OEcumene) 이다. 추상기계는 지층과 일관성의 구도 사이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구체적인 배치는 항상 추상기계를 작동시키고 변이의 선을 포함한다. 역으로 추상기계는 항상 구체적인 배치를 통해서만 작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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