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 오이디푸스 이후 코드화는  영토화와 짝을 이루지만 동시에 대비되면서 그만큼 자주 사용되는 개념입니다.  코드란 암호나 부호, 규칙   뜻하는데 정보 통신이나 언어 활동과 결부되어 흔히 사용됩니다.  상대방이 하는 말을 알아 들을려면  말을 사용하는 코드를 알아야 합니다. 문법은 물론 소리와 단어들을 분절하는  규칙도 알아야 합니다. P F 구별하는 분절 규칙이 없기에 한국인은 Punk Funk 구별하기 쉽지 않습니다.  둘은 아주 다른 종류의 음악이지만 한국어로 표기하면 둘다 펑크가 됩니다. 말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이와 입술 사이로 바람 새는 소리를 뚜렷하게 내서 내가 지금 내는 소리가 f  시작하는 말임을 확실하게 하지 않으면 목청껏 Puck You  라고 해도 미국인은  소리야  겁니다.  한국어의  원래 f 발음이 없으니 평소대로 발음하면 Puck You  겁니다.  나중에야   소린지 알아 들은 상대방은 오히려 웃을겁니다. 그걸 욕이라고  거냐고. 욕을 하려해도 코드를 따라야 합니다. 

 

암호는 의미를 이해할  없도록 부여  것이지만 동시에 그것을 전송받은 상대가 해독할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은닉된 코드가 사용됩니다. 코드화 한다 함은 기호 사용 규칙을 이처럼 부호화  하는 것을 뜻합니다.  또한  규칙에 따라 기호를 사용하게 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주어진 기호 사용 규칙에서 벗어나는것을 탈코드화 라고 합니다. 그렇게 규칙에서 벗어난 기호들의 새로운 규칙을 만드는 것을 재코드화 하라고합니다.  주의할 것은 정해진 규칙에 따라 어떤 기호들을 다른 기호 들로 바꾸는 것을 코드화라고 바로  규칙에 의해  기호들을 원래 기호로 되돌리는 것을 탈코드화라고 하는 정보 이론이나 소통 이론의 통상적인어법과  다르다는 점입니다. 

 

A T G C  구성되는 유전자 정보와 단백질을 만드는 과정도 코드를 통해 작동합니다.   개의 뉴클레오티가 결합하여 아미노산의 코드를 형성하고  아미노산 분자들이  다른 코드에 따라 결합되어 단백질이 만들어집니다. 하지만 DNA  유전자 코드를 RNA 복사하고 전달하는 과정에서 스플라이싱(Splicing) 자리바꿈 인자 레트로바이러스  다양한 요인에 의해 탈코드화가 발생합니다. 유전 공학은 역전사 유전자를이용해 유전자 코드를 목적에 맞게 재코드화 하려는 기술입니다. 이처럼 의미화의 지층  아니라 유기체의지층에서도 코드화와 탈코드화와 재코드화는 일상적으로 일어납니다.  코드란 말은 법이나 규약  뜻하기도 하고 그처럼 명시적 이지 않은  규칙들  지칭합니다.  신분적인 코드,  직업적인 코드,  젠더적인 코드,  종교 의례나 식사매너,  식사나 의복,  요리를 규제하는 다양한 문화적 코드들이 있습니다.

 

만나고 헤어질 때의 예절,  교통신호나 스포츠  게임의 규칙도  코드입니다. 인간이 사는  어디나 코드가있습니다. 사회는  구성원들에게 주어진 규칙에

충실하게 복종할 것을 요구하고 강요합니다. 사회적 코드에  충실히 복종할   사회에서 요구하는 주체가됩니다.  사회적 코드는 이처럼 주체화의 지층을 구성하고 유지합니다.  그런데 사회적 코드는 사회를 상이한코드에 따르는 집단들로 분할하고  위계화  합니다. 자유인과 노예 귀족과 농민은 결코 인간 같은 하나의 범주로 묶일  없는 상이한 질의 집단 입니다.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의 엄격한 분화를 유지하는  카스트는 이런 코드화  집단의 불연속성과 위계성을  극단적으로 강화한 체제입니다. 

 

주체화는 이렇게 분할된 상이한 코드에 따라 상이한 주체들을 생산합니다.  이처럼 상이한 코드들의 실존은상이한 집단에 속한 이들에게 의문과 저항을 야기합니다.  신분에  반하는 투쟁 들이 역사적으로 반복되었던  것은  때문입니다.  투쟁의 양상이 아니어도 주어진 코드에서 이탈하려는  시도들도 끊임없이 발생합니다.  농노나 노예 신분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아 도망치는 흐름도 있고 공동체로부터 추방되어 표류하는 이들도있습니다.

 

젠더적 코드의 강요를 벗어나 다른 옷을 입고 다른 연인을 선택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주체화의 지층에서 이탈하는 탈주선을 그리는 것입니다.  이런 탈주선이  집합적인 유출의 흐름을 형성할  주어진 코드로 부터탈코드화  흐름이 형성됩니다.  탈코드화  흐름이 범람 하게 되면 신분,  직업,  젠더 등의 지층을 형성하고  코드들이 와해  됩니다.  가령 서구의 봉건 사회는 도시를 찾아 도망치는 탈코드화  흐름에 의해 또한엔클로저에 의해 토지를 잃고 부랑하게  농민 들의 탈코드화  흐름에 의해 해체 되게 됩니다. 그러나 이처럼 탈코드화된 흐름이 범람 하게 되면 사회나 질서 혹은 통치가 불가능하게 됩니다.  그래서 대게 다른 코드들로  흐름을 포획하려 하게 됩니다.  재코드화하는 시도들이 발생하는 겁니다. 코드화가 기존의 상이한코드들을 와해 시키고 탈코드화  흐름을 유출시켜 거대한 하나의 코드로 통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를초코드화 하라고 합니다. 

 

가령 중국 최초의 거대 제국인 진은 이전의 부족 집단들이  작은 국가들을 하나의 국가로 통합해 씁니다 이는 이전 사회의 코드  속했던 신분이나 직업에서 이탈하는 탈코드화된 흐름을 야기합니다.  제국의 국가는이들을 광산 이나 제련  제국적 필요에 따른 새로운 영토로 영토화 합니다.  영토화가 코드화가 아니라 탈코드화와 짝을 이루는 경우라 하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왕조는 도량형과 화폐, 문자와 역등을 통일 합니다. 이전의 코드들을 해체하고 새로운 하나의 코드로 초코드화  것입니다.  그런데  경우에는 신분이나직업 등의 새로운 집단의 분할과 위계가  도입되기에 이러한 초코드화는 여전히 하나의 코드화의  일종이라고 해야 합니다.

 

이와 달리 초코드화의  일종이지만 탈코드화  흐름을 다시 위계화된 집단으로 나누지  않고  집단에 상이한 코드를 부여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코드 없는 체계로 통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엔클로저로 인해 토지를 잃은 거대한 불황의 흐름이 출연하는데 이들은 직업이나 신분을 잃은 만큼  신분적 예속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토지로부터 탈영토화 되고 신분에서  코드화   잠재적 노동력의 흐름이 자본의 흐름  만날 자본주의가 탄생합니다. 자본주의는 이들을 다시 신분 으로 재코드화 하지 않습니다. 시장에서는 신분이 무언가는 전혀 중요하지 않죠.   상품을 얼마에  사겠다는  지만 중요합니다. 시장의 논리는 모든 이들에게이런 종류의 등가성을 부여합니다.  인간이란 보편적 범주가 이로부터 출연합니다. 이전에는 신분적 코드가무엇을 하고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행동해야하는지를 규제 했습니다.  코드가 사라지면 이런 규제가 불가능해집니다.  사회가 어떻게 가능한가?  라는 홉스의 질문은 이로부터 나온 겁니다.

 

자본주의는 신분에 따라 정해진 코드 대신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는 보편적 규칙의 체계를 수립합니다.  고용을 통해 직업을 얻어라.  노동을 통해 가치를 생산 하라. 노동을 하지 않으면 먹을  없다.  등가교환의 따라물건을 사고 팔라.  모든 가치의 척도는 돈이다 등등.  이전의 코드로 부터 이탈한 흐름 전체를 하나의 보편적규칙들의 체계로 통합했다는 점에서  또한 초코드와  일종입니다.

 

그러나 이전의 제국적 초코드화가 위계적 지위를 갖는 집단으로 사람들을 재분할하고  속한 집단에 따라 다른 규칙을 강요하던 것과는 확실히 다릅니다. 일종의 공리처럼 자명해 보이는 보편적 규칙들의 체계로 통합했다  점에서 이를 공리계화 라고 합니다.  하나의 지층 안에서 발생한 탈영토화 운동이 다시 어떤 영토로재영토화 되고  다시 탈코드화  흐름도 재코드화 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탈코드화란 기존의 코드를 대대적으로 부수어 없애기도 하지만 특정 요소를 살짝 바꾸는 것만으로도 가능한 경우가 많습니다. 유럽의 고전음악 에는 여러 형식의 코드들이 중첩되어 있습니다.  화성 조성의 코드, 대위법이나 소나타  학곡 형식의코드,  협주곡 이나 교향곡 등의 장르적 코드 등등 악보로 그려진 하나의 작품은 복수의 코드들이 중첩된 결과물 이죠. 연주와의 관계에서 보면 악보 또한 연주자의 행위를 반복하게 하는 일종의 규칙이란 점에서  하나의 코드라고   있겠습니다.  연주자는  악보 코드에 따라 연주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속도 내지 템포는 주어진 리듬 패턴이나 선율을 그대로    코드   있는 계기를 제공합니다.

 

안단테,  프레스토  템포 기호를 악보에 적어 두지만 사실 템포 자체는 연주할 때마다 달라집니다.  연주자가 자신의 해석을 강조하기 위해 크게 바꾸기도 합니다.  글렌 굴드는 느린건  느리게 빠른   빠르게 연주하여 자기 색깔을 만듭니다.  터치  악기 소리에 강도도 악보를 그대로   바꿀  있습니다.  째즈 뮤지션은 주제의 진행을 따르면서 선율을 바꿉니다. 이것들은 정해진 악보의 명령으로부터 이탈하는 유연성이나 탄력성을 가능하게 해주는 여백 이라 하겠습니다.   여백이 허용하는 가변성은 그것만으로도  코드와가능하게 해줍니다.  이러한 여백을 들뢰즈 가타리는 탈코드화의 여백 이라 합니다.  언어도 그렇습니다.  같은 문장이라도 읽거나 말할 때마다 우리는 다른 톤으로 읽거나  말하기 마련이죠.  그런데  톤을 비명 소리에 가깝게 크게 하거나 몽골인들의 후미 창법 처럼 아주 낮은 목소리로 발화하면 애초에 기호에  담겨있던 의미는 사라지고 비언어적인 소리  바뀝니다.

 

, 이건 동물의 소리야 !”   여기서 음성적 또는 의미화 하는 언어로 부터 벗어나는  코드화의 여백을 제공합니다.  그리고 이런 소리가 반복되며 어떤 새로운 규칙을 갖게 되면 다른 유형의 소리로 재코드화 됩니다.  스트라빈스키는 무용 음악 봄의 제전에서 악센트의 규칙성을 깨는 불규칙한 강박을 사용해서 서양음악의 박자 구조를 탈코드화 했죠. 메시아앙은 이렇게 탈코드화  박자를 비서구 음악의 리듬을 이용하여 새로운 리듬 선법으로  코드 합니다.

 

이처럼  탈코드화의 여백을 통해 발생하는 탈코드화와  재코드화를 코드변환이 라고 합니다. 이러한 코드 변환은 대게 어떤 코드의 사슬로 부터 일부를 떼어내 자신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이용하는 것입니다.  이를 들뢰즈 가타리는 코드의 잉여가치를 포획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모든 코드는  이상의 조각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조각들은 하나의 사슬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슬에 묶여 있기에 조각들은 자유롭게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탈코드화의 여백을 통해 일부 조각을 떼어내 다른 방식으로 사용할  있죠.  다른 코드 속에 넣어서  일부로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경우 떼어낸 조각은 애초에 갔던 가치와 다른 가치를 갖게 됩니다.   조각이 갖는 잠재성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애초에 갖던  가치 이상의 가치란 점에서 이를 잉여 가치라고 합니다.

 

이런 잉여가치는 애초에 속했던 코드안에서의 가치를 초과하는 잉여 가치란 점에서 코드의 잉여가치 입니다.  코드 변환을 통해 어떤 코드의 조각을 이용하는 것은 이러한 잉여가치를 자신의 이득을 위해 영유하는것입니다.  이를 잉여가치의 포획 이라고 합니다.  앞서 음악 연주자들은 자신의 음악적 해석이나 스타일을위해 작곡자가 악보나 이전 음악 속에 코드화 했던 소리들을 떼어내 코드의 잉여가치를 포획하는 것이라고하겠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애초에 맑스가 경제학적 개념으로 정의해 놓은 잉여 가치란 개념이 해석이라는 주관적개념으로 해소되는  아닌가 하고 반문   있습니다.  그렇진 않은데 먼저 경제학의 경우를 보자면 원격지 교역을 통해 상품을 팔아 얻는 이득이 바로 코드의 잉여가치 입니다.  상품의 사용 가치와 교환 가치는 사회마다 다르게 코드화 되어 있습니다. 소의 내장이나 뼈는 미국에선 먹지 않고 버리지만 한국에선 훌륭한 음식 재료지요.  러시아에서 사슴의 뿔은 별다른  모가 없지만 한국에선 귀한 약재죠.  이처럼 어떤 사회의 코드화  가치의 사슬로 부터 내장이나  같은 일부 조각을 떼어 내어 코드를 달리하는 사회속으로 이전 시키면 코드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잉여 가치를 포획할  있습니다. 원격지 교역에서 상인들이 얻은 이득은 이처럼 코드의 잉여 가치 경제적 형태를 보여 줍니다.  생명체의 생존에서도 코드의 잉여가치는 널리 발견 됩니다.  말벌의 형태를 모방하여 말벌을 유혹하고 그것을 이용해 수분하는 난초  이웃한 식물의 잎을 모방하는보킬라 트리폴리아타의 의태는 생명체가 자신의 생존을 위해 다른 개체들로부터 코드의 잉여가치를 포획하는 경우입니다. 

 

자궁속에 인간의 태아가 모체의 면역반응을 면할  있는 것은 인간의 유전체 안에 있는 ERV-3 라는 레트로바이러스의 유전자 코드 덕분입니다. 애초에 바이러스의 유전자 사슬에 속해있던 유전자 조각들을 포획해  코드의 잉여가치를 획득하는 것이죠.  생명의 자리란 탈지층화의 잉여가치를 뜻한다는 들뢰즈 가타리  말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있을 겁니다.

 

사실 인간의 유전체 안에는 유전자 보다 많은 바이러스나 미생물 유전자가 들어 있다고 하죠. 알파프로텍터박테리아나 고세균의 뜻하지 않은 공생은 동물이나 식물의 유전 형질 자체가 이질적인 미생물들의 유전자들을  코드와 하여 구성된 것임을 함축하합니다.  코드는 그에 고유한 탈코드와 과정으로부터 분리할  없다.  유전적 표류  없는 유전학  없다.  현대 돌연변이 이론은 코드가 필연적으로 개체군과 연관되어 있으며 본질적인 탈코드화의 여백을 갖는다는 것을 명쾌하게 보여주었다. 이는 코드들 간의 번역이 아니라 우리가 코드의 잉여가치 또는 방계적 소통이라고 부르는 단일한 현상과 관련된다.”

 

그런데 안티 오이디푸스에는 이와 약간 다른 뉘앙스로 코드의 잉여 가치 개념이 사용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가령 포틀레치나 쿨라 같은 의례화된 증여에서는 주고 받는 선물에 비평형성이 두드러집니다.  말하자면 받은 것보다 많은 것을 주는 자가 이기는 게임입니다. 이때 많은 것을 주는 자는 위신을 획득합니다. 이는 주고받은 선물의 비평형성을 만회하는 요소인 셈인데  책에선 이를 코드의 잉여가치 라고 합니다.  니체에 따르면 형벌의 기원에는 죄인이 끼친 손해만큼 고통을 주는 생각해보면 기이한 방정식이 있죠. 이는 죄인의 고통에서 눈이 없는 쾌감 때문에 가능한 것이며  쾌감이 바로 코드의 잉여가치 라고 말합니다. 이는 코드의 조각을 이용해 얻는 잉여가치 보다는 특정한 코드 안에서 선물이나 채무가 야기한 비평형성과 짝을 이루는 어떤 대가를 뜻합니다. 이는  다른 코드로 이행하는 데서 발생하는  아니라 주어진 코드 안에 있지만 명시되지 않은 어떤 이득입니다.  이러한 뉘앙스의  개념은 천의 고원  가면 사라지고 코드의 잉여가치는 어떤 코드의 조각을 다른 코드로 옮기는 코드 변환과 대응되는 개념으로 명확하게 한정됩니다.

 

 

 

탈영토화와 재영토화라는 개념은 안티오이디푸스에서 처음 등장하는데요. 이후 들뢰즈 가타리가 가장 빈번하게 사용하는 개념 중 하나가 됩니다. 영토, 영토성, 영토화라는 개념이 여기에 추가되어야 합니다. 언어적 형태를 보면 영토라는 말이 일차적 이지만 이 개념을 가동시킨 문제 설정에서 가장 중요하고 일차적인 것은 탈영토화 운동 입니다. 몇 개의 핵심개념에 대해 요약하듯이 서술하는 천의 고원 결론에서 그들이 탈영토화를 표제로 뽑은 것은 이 때문입니다.

 

짐작하시겠지만 영토, 영토성이란 개념은 원래 동물 행동학에서 나온 것입니다. 거주하고 먹이를 얻고 짝짓기를 하는 특정한 구역이 영토이고, 그 영토를 형성하고 방어하며 영토에서 영토로 이동하려는 상향이 영토성 이지요. 개나, 늑대, 새들이 영토를 표시하기 위해 분변을 배설 하거나 소리 또는 시각적 표지를 이용하는 것은 이미 잘 잘 알려진 일 입니다. 인간은 좀 더 강력해서 영토에 대해 배타적 처분권을 보장하는 법적 권리를 사용하고 울타리를 치거나 담장을 세워 침범을 저지하며 관문을 만들어 드나드는 사람들을 선별합니다. 그 안에 있는 이들에게 돈을 뜯어 내기도 하고요. 끔찍할 만큼 영토성이 강한 동물이죠. 

 

영토화란 원래 자신에게 속하지 않았던 것을 자신의 영토로 만드는 것이고 탈영토화는 자신이 영토로 삼고 있던 곳을 떠나는 것입니다. 탈주선의 작동 입니다. 재영토화란 영토가 아닌 곳을 새로운 영토로 삼는 것입니다. 영토를 찾아 나설때조차 떠나는 운동 없이는 영토란 있을 수 없기에 역설적이지만 가장 일차적인 것은 탈영토화 입니다. 고향을 떠나 본 적이 없는 사람에겐 고향이란 관념이 없듯이, 떠나고 이동하는 운동 없이는 영토란 관념도 없지요. 말하자면 영토란 영토화의 산물이고 영토화란 영토 아닌것을 영토화 하는 것입니다. 즉 영토화는 언제나 재영토화 입니다. 이는 주어져 있는 것을 떠나는 운동 즉 탈영토화 운동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탈영토화와 운동이 영토나 영토화 보다 일차적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운동의 양상이나 강도는 상이한 삶의 방식과 연결되어 있는데요. 예를 들면 사냥하는 동물이 그러하듯 수렵민은 자신이 사냥하는 영토를 같습니다. 채취 생활인 또한 영토를 갖겠지요. 영토의 범위는 사냥이나 채취를 위해 자신이 거주하는 곳에서 얼마나 멀리 이동 하는가가 결정합니다. 즉 탈영토화 운동이 영토의 크기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수렵하고 채취하는 사람들에게는 영토 자체가 욕망이나 생산의 직접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영토의 범위는 유연하고 가변적 입니다. 치명적인 재난 같은 특별한 상황이 아니라면 영토를 둘러싼 충돌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동물들이 그러하듯 통상적 상황이라면 서로 영토에 대해 존중하며 살아 갑니다. 목축을 하는 유목민도 그렇습니다. 계절이나 조건에 따라 이동을 하며 살기에 영토를 확보해 둘 이유가 없습니다. 이동을 위해 머물 뿐이니 재영토화 조차 탈영토화 운동의 일부라고 하겠습니다.

 

영토성이 급격하게 증가하게 된 것은 농경 생활과 더불어서 입니다. 토지가 노동의 직접적인 대상이자 생산물의 원천 이기에 생존 조건을 확보 한다고 하는 것은 곧 영토를 확보하는 것과 같은 말이 되기에 그렇습니다. 농경이 시작되면서 대지는 노동이 가해지는 대상이 되고 투입되는 생산요소가 등록될 뿐 아니라 그 자체가 생산물을 산출 하는 핵심적인 자산이 됩니다. 영유하거나 이용하는 대상이자 소유 대상으로의 토지가 이처럼 대지와 구별되게 되면서 영토는 인간들이 생산과 욕망이 집중되는 중요한 대상이 됩니다. 영토를 확보하고 영토를 지키는 것이 중요한 일이 되고 이를 위해 무장력을 조직하고 관리하는 사회기계가 출연합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를 영토기계 라고 명명 합니다. 이 영토기계는 사회의 첫 번째 형식이고 원시적 기계 형태이며 사회적 장을 덮는 거대한 기계입니다. 기관 없는 신체로서의 대지라는 표면에 탈 영토화와 재 영토화의 선을 따라 욕망하는 기계들이 복합체인 사회 기계가 세워지는 겁니다. 

 

사실 지구의 표면인 대지는 원래 그 누구의 영토도 아닙니다. 대지는 환경의 모태이고 누군가의 생존 조건이 될 잠재성을 뜻하지요. 주어진 환경을 떠나지 않는 한 대지는 없습니다. 그저 자신의 환경만 있을 뿐입니다. 대지란 어떤 다른 환경이 될 능력으로서 발견 되는데요. 따라서 자신의 환경을 떠나 어디론가 가려는 자들의 눈에만 대지는 대지로서 드러납니다. 탈영토화가 대지를 대지로 만드는 거지요. 그렇게 떠난 자들이 대지의 일부를 영토화 함으로써 영토가 탄생합니다. 즉 대지는 영토화의 장이자 전제 조건입니다. 

 

하지만 도시의 대지는 지진, 홍수 등을 통해서 영토화 된 생산의 장을 지우고 지구의 표면으로 되돌리기도 하는데요. 안티 오이디프스식으로 말하면 생산의 전제이자 생산하는 기계들을 지우는 반생산의 장이라는 점에서 기관 없는 신체라고 하겠습니다. 들뢰즈 가타리는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대지란 욕망과 생산의 원시적이고 야만적인 통일체이다. 왜냐하면 대지는 노동의 복수적이고 분할된 대상일 뿐 아니라 분할할 수 없는 단일한 실체로서 생산력을 향해 반격하여 그것을 자연적 내지 신적인 존재로 영유하는 충만한 신체이기 때문이다 라고 말입니다.

 

인간도 다른 생명체도 모두 대지라는 기관 없는 신체의 표면에서 생존하는 겁니다. 특히 인간은 그 생존 조건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대지의 표면에 금을 긋고 생산요소를 등록하며 소유권이라는 고체적 형식으로 분할하여 영토화 합니다. 하지만 종종 그 모두를 지우는 반생산이 발생하는 거지요. 최근 기후 위기는 인간이 생산능력을 무력화 하며,  지구의 표면으로 되돌리려는 반 생산이란 말을 실감하게 합니다. 

 

동물 행동학에서 기원한 탈영토와 개념은  행동이나 습속에 관한 좀더 일반적인 개념으로 확장됩니다. 단지 대지 위에서 벌어지는 글자 그대로 영토만이 아니라 어떤 크기와 방향을 갖고 진행되는 다양한 운동이나 흐름을 분석하고 서술하는 개념이 되는 것인데요. 예를 들면 인간이나 원숭이처럼 직립하는 동물의 앞다리는 대지로부터 탈영토와 되요. 도구로 재 영토와 될 때 손이 됩니다. 막대기에서 망치로 젓가락으로 펜으로,  손의  짝이 달라질 때마다 탈영토화와 재영토화의 운동이 발생합니다. 이런 저런 대상들을 향하지만 결국은 남근을 향해 움직이는 성욕의 운동, 신분적 코드에서 벗어났기에 무엇이든 해도 좋지만 결국은 돈을 향해 움직이는 자본주의적 욕망의 흐름은 결국은 일자로 귀착되는 탈영토화 운동을 보여줍니다. 대상을 한없이 바꾸는 욕망의 환유도, 자유라고 명명되는 개인의 선택도,  실은 새로운 초월자로 재영토화 되는 그저 바쁜 탈영토와 운동이 옆으로 간 것입니다. 

 

손과 도구에 대해서 언급 했습니다만 얼굴은 이와 약간 다른 유형의 탈영토화와 관련이 됩니다. 얼굴은 머리의 표면이란 점에서 애초에는 신체의 일부 였지만 그 표면에서 발생하는 표정이 표현 능력을 갖게 되면서 얼굴은 신체로부터 탈 영토화 됩니다. 머리로부터 얼굴이 탈영토화 되는 것과 대응하여 환경으로부터 탈영토화된 풍경이 탄생합니다. 환경이 생존의 신체적 조건인 반면 풍경은 환경을 표면에서 표정을 읽어낼 때 발생합니다. 풍경이란 환경이 얼굴화 된 것입니다. 

 

역으로 영화에서의 클로즈 업은 얼굴을 풍경화 하지요. 얼굴은 풍경이라는 상관 자를 갖는다는 말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입니다. 얼굴이 탈영토화 됨에 따라 손이나 발,  손가락 또한 표현 기계가 되지요.  손가락을 세워 욕을 할 때 손가락은 신체로부터 탈영토화 되어 표현 기계가 됩니다.  옷도 그렇습니다.  추위나 물리적 접촉으로부터 신체를 보호하는 것이 옷이지만 옷이 단추와 주머니 칼라 등을 이용해 표정을 갖게 될 때 의상이 됩니다.

 

손의 탈영통화는 언제나 그것에 의해 탈 영토와 되는 대상을 짝으로 갖는데요. 손이 앞 발이기를 그치고 나뭇가지를 들어 바나나를 딸 때, 나뭇가지는 나무의 일부 위기를 그치고 막대기가 됩니다. 나무로 부터 탈 영토화 되어서 도구로 재영토화 되는 것이죠. 이처럼 탈영토화는 언제나 이중적 입니다. 물론 이는 반대편에서 보면 이중적인 재영토화이기도 합니다. 나뭇가지는 막대기가 되면서 도구로 재영토화 되는 것이고 손 역시 막대기를 사용하면서 도구로 재영토화 되는 것이니까요. 그 막대기로 땅바닥에 글씨를 쓸 때에도 마찬가지로 이중적인 탈영토화와 재영토와 운동이 발생합니다.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포괄적 내지, 국제적 재영토화를 동반하지 않는 분열적 욕망의 탈영토화는 없다. 하나는 다른 하나의 이면이다" 라고했습니다. 이처럼 재영토화 되는 짝을 갖는 탈영토화를 상대적 탈영토화라고 합니다. 

 

손의 이러한 탈영토화는 신체 내지는 유기체의 지층 안에서 발생합니다. 반면 얼굴의 이탈 정도는 스피노자식으로 말하면 머리라는 신체로부터 기호라는 비신체적인 것으로 넘어가는 변용이고,  천의 고원식으로 말하면 유기체의 지층으로부터 의미화 내지 주체화의 지층으로 넘어가는 탈영토화 입니다. 즉 상이한 속성, 상이한 지층을 횡단하는 탈영토화 입니다. 이는 하나의 지층 안에서 진행되는 것보다 훨씬 감도가 높은 탈영토화 이지요. 이는 자신이 속해있던 지층 안에서는 어떠한 재영토화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절대적 탈영토화 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 세운 손가락도 의상도 그렇습니다. 

 

여기서 신체와 비신체 머리와 얼굴을 구별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머리를 통제하는 것이 자신의 신체라면 표정에 대한 통제는 위 아래를 따지고 예의를 요구하는 권력이란 점에서 양자는 아주 다르지요. 감시와 처벌에서 푸코가 제시한 신체의 정치학은 사실 신체 보다는 그로부터 탈영토화 된 표면의 통제를 겨냥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신체에 작용하는 권력은 신체적 능력을 생산하기에 생산적 이지만 신체 표면에 작용하는 권력은 명령에 길들인 표현 기계를 생산하기에 생산적 이라 하기 어려워 보입니다. 동일한 목표를 겨냥한 하나의 권력으로 보이지만 다른 목표를 겨냥한 다른 종류의 권력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탈영토화와 재영토화의 개념이 중요한 것은 이처럼 신체적인 것과 비신체적인 것 혹은 상이한 치층 사이를 횡단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속성을 달리하거나 지층을 달리하는 것으로 황단하며 하나의 배치로 묶어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무대와 좌석대 그리고 악기와 같이 신체 적인 것과 연주자나 가수들이 몸짓이나 표정, 선율이나 음색 같은 비 신체적인 것이 하나로 묶이며 공연의 배치가 만들어집니다. 물리적 기계와 표현 기계를 하나로 묶어 자신의 영토적 색채를 확연하게 만들어낼 때 탁월한 연주자가 출연합니다. 상이한 연속성을 갖는 성분들을 하나로 묶는 것이 영토화인데 이는 각 성분을 고집스러운 신체성이나 물리적인 소리로부터 탈영토화하여 자신의 소리로 재영토화 하는 것이지요. 요컨대 상이한 지층에 속하는 것을 하나의 배치로 묶어주는 것이 바로 탈영토화와 재영토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얼굴의 탈영토화는 하나의 지층 안에서는 절대적 탈영토화지만 재영토화를 동반하지 않는 탈영토화는 분명 아닙니다. 하나의 지층에서 다른지 층으로 횡단하는 탈영토화 이고, 다른 지층에서 재영토화 되는 탈영토화이죠. 그렇기에 절대적이란 말은 제한된 의미를 가질 뿐이고, 어쩌면 절대적이란 말에 대한 일종의 반어적 표현이라 해야 합니다. 사실 얼굴의 탈영토화는 탈영토화의 정도가 낮은 것들을 재영화화한 영토가 됩니다. 얼굴이 풍경화 된 표현기계가 됨에 따라 손이나 발 엉덩이 목덜미도 표정을 갖게 되고 자동차도 주전자도 얼굴화 됩니다.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들뢰즈 가타리가 말하는 가장 탈영토화 되지 않은 것이 가장 탈영토화 된 것 위에서 재 영토화 된다 는 말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있겠습니다.

 

두 가지 탈 영토화를 혼동 해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들뢰즈 가타리는 이렇게 씁니다. 이런 상대적 운동들을 절대적인 탈 영토와 절대적인 탈 주선 절대적인 표류의 가능성과 결코 혼동해서는 안된다. 상대적 운동들은 지층 내적 이거나 지층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인 반면 절대적 운동들은 일관성의 구도와 그 탈지층 화 에 관련된 것이다 라고 말입니다.이에 따르면 얼굴의 탈영토화는 지층 사이에서 발생하니 탈영토화 정도가 크다고 해도 상대적 운동에 속합니다. 

 

탈영토화는 어떠한 영토도 갖지 않는 탈영토화 운동입니다. 어떤 영토도 갖지 않지만 모든 영토로 열린 순수 잠재성을 향한 운동이고 모든 형식을 추상하여 일관성의 구도에 이르는 운동입니다. 강도 제로의 순수 잠재성의 수많은 규정 가능성으로 충만한 긍정적 기관 없는 신체에 이르는 운동 말이죠. 이는 현실에 없는 이상이나 이념이 아니라 언제나 실제하는 운동임을 그들은 강조합니다. 절대적 탈영토화는 애초부터 존재하며 일관상의 구도는 도처에 존재하고 항상 근원적 이며 항상 내재적이다. 기관 없는 신체가 일차적 이며 모든 기계를 근저에 항상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탈영화 된 것으로서 이 대지야 말로 절대적 촬영 토 하의 엄밀한 상관자이고 탈영토화 야말로 대지의창조자 라는 말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앞서 앞서 인용한 안티오디디푸스에서 대지와 영토에 대한 서술에서 그렇듯이 바립니다.

 

 

 

 

 

생성, 혹은 되기의 철학적 문제 

서양의 형이상학은 모든 (존재자) 원천이자 근거가 되는 본질적이고 불변적인 실체에 대해 사유하고 그것을 규명하고자 했다.  요약하면 근거에 대한 추구였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시도를 존재들의 근거인 존재   존재자들을 존재하게  존재에 대한 탐구라고 하였다.   존재란 무엇인가 ?  존재는 근거라는 본질양식속에서 나타난다. 그러므로 사유의 사태,  근거로서의 존재는  근거가 최초의 근거로서  프로테 아르케로서 표상될 경우에만 근본적으로 사유된다.  근거라는 의미에서  존재자의 존재는 근본적으로는 오직 자기원인으로서만 표상 된다.  하이데거는 존재를 포착하려면  하나의 특성으로 동일성을 전제하는 그런 근본명제의 형식에서 근본적인 비약이 필요하다고 한다. 이러한 도약은 존재를 존재자의 근거로서 간주하려는 태도를 버리고 심연 속으로 뛰어들어가는 행위라고 한다. 존재에 대한 질문을 통해 그는 근거가 아닌 심연을 발견한 것이다.. 이러한 심연은   무나 어두운 혼란이 아니라 일어남(사건)이다. 심연에서 나오는 존재의일어남을 보고 존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자 한다. 신이나 부동의 동자   다른 존재자에게 사로잡혀존재의 목소리를 잊은 형이상학들을 해체함으로서  안에 잊혀진  새겨진 존재의 흔적을 읽어낼  있으리라고 한다.  이것이 데리다가 말하는 해체와 다르지 않다. 

 

크다-작다:  사물의 상태=현재 상태가 갖는 동일성/정체성을 명시하며,  커진다(크게-되다) 작아진다(작게-되다): ‘되기 어느 하나의 정해진 ,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며 이동하는 것이다. 들뢰즈는  사물의 상태를 표시하는   구별하고  아닌  차원에서 의미의 논리를 사유하고  존재와 존재자의 차이라는 근본적인 차이보다는 개체들의 접속에 의해 생성되는 차이 사유 했다.  하나의존재에서 다른 존재로 되는 변화를 주목하고, 그러한 변화의 내재성을 주목하며 그것을 통해 끊임없이 탈영토화되고 변이하는 삶을 촉발하는 ,  모두가 바로 되기라는 개념을 둘러싸고 진행되기 때문이다.  관성이나 중력에서 벗어나는 편위(클리나멘) 강조하는 것은 이러한 입장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

 

 그럼에도  되기에서는 개개의 사물이나 존재자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되기를 강조하는 경우에도 있다/이다라는 동사를 사용하지 않을  없고, 되기를 통해 도달한 어떤 상태에 대해 말하지 않을  없기 때문이다. 이는 생성의 철학이란 관점에서 사물(존재자)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 하는 문제라고도   있다. 이에 대해  가지 차원에서 접근할  있다. 하나는 그것의 질을 규정하는 의지 내지욕망 차원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내지 강밀도의 차원이다. 첫째  사물이 무엇인가  연관된 다른 것들과의 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관계란 상이한 사물들을 하나로 계열화 하려는 의지 내지 욕망 결부되어 있다.  둘째 하나의 양태에서 다른 양태로 되기 위해선 그에 필요한  갖고 있어야 한다. 새로운 양태가 되기 위한 문턱 넘는 힘을 가져야 하며,    문턱으로 인해 되기의 연속적 과정속에서도 각각의 양태는 일정한 규정성 갖는다. 하나의 사물(양태)에서 다른 사물로, 하나의 신체(양태)에서 다른 신체로 변용되기 위해선, 그렇게 변용되려는 의지가 있어야 하고, 또한 그에 필요한 강밀도의 변화가 수반되어야 한다. 

 

강밀도의 문턱은 사물의 상태를 하나의 양태로 정의하게  주지만, 그것이 연속적인 변화를 통해서 넘나들 있는 것이란 점에서, 그런 사물의 정의는 되기의 구도 위에서 사물이 정의되고 변용되어 다른 사물이 되는 것을 파악할  있게  준다. 따라서 그것은 사물을 하나의 상태로, 규정성을 갖는 것으로 정의하면서도, ‘되기 과정에 열려 있는 것으로 보게 해준다.이는 사물의 상태를 이다 차원에서 포착하여 분류하는 관념과는 다르다.  따라서 다른 것이 된다는 것은 욕망이나 의지를 바꾸는 것인 동시에 그와 결부하여 힘과 속도를 바꾸고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처럼 이들이 말하는 강밀도와 스피노자가 말하는 양태,  변용, 감응 등의 개념은 아주 긴밀하게 결부되어있다. 스피노자는 양태를 이미  자체로 하나의 촉발이요 변용이라고 본다. 하나의 양태로서 존재한다는 것은 관련된 다른 양태들에 촉발되어 강밀도의 분포를 다르게 만듦으로써 다른 종류의 양태로 만들어버린다는점에서 이미 변용이다. 역으로 그렇게 변용된 양태와의 관련 속에서만  양태로서 존재할  있는 것이란점에서 자신을 둘러싼 다른 모든 양태들의 관계를 스스로 내부에 함축한다. 그렇기에 자신을 둘러싼 양태들의 관계가 변하는 순간  자신 역시 다른 양태로 변용된다.  강밀도라는 개념을 통해 사물의 상태와 변이를포착함으로써 사물의 상태를 변이 안에서, ‘되기의 구도 안에서 연속적이고 내재적인 과정으로 다룰  있게  된다.  

 

되기와 기억들

기억이라는 주제는 베르그송이나 프루스트 같은 사람들에 의해서 중요하게 다루어  졌다.  그러나 여기서저자들은 기억에 대해  비판적이다. 기억은 되기와 대립되는 것으로 간주 한다.  되기란 -기억(contre-memoire) 이다 것이다.  되기란 기억에 대항하여 이루어지는 것디다.  애니메이션 <메모리스> 세개의중편으로 구성된 작품으로 기억의 세가지 시제를 다룬다.    마그네틱 로즈 과거의  순간에 대한 집착, 그것은 생성의 중단을 의미하고, 새로운 것이 되지 못하는 생성의 중단이란 결국 죽음 검은 구멍이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둘째 영화인 악취탄 비밀 서류를 본사로 가져오라는 명령의 기억이  거대한 사건에도 지워지지 않은 기억이 되어 죽음의 악취가스를 목적지까지  실어 나르게 된다.    포대 도시에서는아이가 꿈꾸는 미래  또한 과거와 현재의  구성이 하나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지워지지 않은 기억의 다른 형식이 된다.  -기억 내지 대항-기억이란 이처럼 현재를 과거에 사로잡는 기억에 대항하여 기억을 지우며 다른것이되고 새로운 삶을 구성하는 그런 능력으로서 망각능력을 뜻한다. 다만 주의할 것은 망각능력이란 가령 상처와도 같은 과거를, 혹은 영광스럽고 행복했던 과거조차 지우며 넘어서는 적극적 능력이지, 건망증처럼 기억해야  것을 잊는 무능력 아니란 점이다.  

 

무엇이 다른 것이 되기 위해서는 현재 가지고 있는 것을 이용하고 변형시킬수 있어야 한다. 기억이 없다면 언제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되기의 문제는 기억과 망각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기억 자체의 내부에 있으며, 기억의 형태로 존재하는 것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갖고 있는가,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이용하는가하는데 있다. 기억에는 이미 호오(好惡) 선별이 내장되어 있다. 그것은 선별의 기준과 전제가 되는 가치를포함한다. 우리는 모든 것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하고 싶은 것만을 그리고 지우고 싶어도 잊혀지지 않는 상처 같은 것만을 기억한다. 다수적인 가치 척도에서 벗어나는 것은 사소한 것으로 잊혀지거나, 아니면기억 한쪽 구석에 쳐박혀 버려지게 마련이다. 다수적 척도에 따라 좋고 나쁨의 판단으로 분별된 기억이고, 그에 따라 집착하거나 떨쳐버리고 싶은 상처같은 기억이며, 그런 기준에 따른 소망과 욕망에 따라 선별되어 재구성된 기억이다. 이런 점에서 기억은 이미 영광과 상처를 분할하는 척도에 따라 재영토화 되어 있음을의미한다. 

 

새로운 배치 안에서 기억된 것들을 이용하는 것은 이처럼 주어진 기억의 재영토화된 지대에서 벗어나 새로운 배치로 탈영토화함으로써 가능하다.  그것은 통상적인 몰적인 선분을 벗어난 새로운 무엇(어린이) 개념을 형성하고 그것을 통해 무엇(어린이)-되기를 수행한다. 물론 분자적인 기억도 있을  있겠지만, 그것은몰적이거나 다수적인 체계로 통합되는 요인으로서다. 기억은 언제나 재영토화의 기능을 갖고 있다.  분자적구성 요소들을 함께 묶어세우는 것은 바로 탈영토화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어린이-되기를 어린 시절의기억에 대립 시킨다.  들뢰즈와 카타리는 어린시절의 기억과 대립하여 어린시절의 블록이란 개념을 사용한다.  어린이-되기란  어떤 사람  어린이가 되는 것이면서 동시에 어린시절 자체가 다른 것이 되는 어떤 변형을 수반하는 것이란 점에서,  어떤 사람  어린시절  다른 어떤 것이 된다. 그래서 양자가 모두 변하는 이중적 과정이 된다.   반면 어린시절의 기억은, 어린시절은 기억대로 그대로    시절로 돌아가는 것이란 점에서 어린시절의 블록이나 어린이-되기와 다르다.  어린이-되기를 통상적인 어법대로 어린시절로돌아가는 이라고 표현한다면,  어린시절 나의 어린시절, 나의 기억 속에 있는 어린시절이 아니라 '어떤 분자적인 어린시절, 소수적인 어린시절이며,  사실은 부재하는 어린 시절이다. 

 

사람의 -되기는 곰의 다른- 되기를 포함하며 화가의 어린이-되기는 어린이의 다른--되기를 포함한다.  되기란 이처럼 되기의  항이 모두 변한다는 점에서 되기의 블록이란 개념을 사용할  있다. 들뢰즈와카타리가 마법사의 기억이니 스피노자주의자의 기억이니 하는기억 개념을 사용했지만, 그것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것이 되기였다고  , 그것은 이처럼 블록의  항이 모두 변하는 그런 되기로서 기억을 말한다. 기억을 다수적이고 몰적인 집합에서 끄집어내 소수-화하려는 것이라고   있다.  가령 베르그송주의자의 기억, 스피노자주의자의 기억 등과 같은 철학자들의 기억인 경우에도 그것은 단지 베르그송이나 스피노자의 이론을 상기하게 하거나, 그들 본래의 입론으로 회귀하는 (스피노자로 돌아감, 베르그송으로돌아감) 아니라  그것  내용을, 그것의 기억을 변형시키는 방식으로 돌아가는 그런 되기의 블록을 작동시키는 것이다. 인용을 한다는 것은  사람이 되는 것이면서 동시에  사람을 변형시키는 것이다. 

 

동물되기 

동물 되기란  동물을 흉내내는 것이 아나라  동물의 신체적 감응을 만들어낼  있는 속도와 힘을  신체에부여하는 것이다.  어떤 동물이 되는 방식으로 자신의 신체적 힘과 에너지의 분포를 바꾸고 새로운 분포를 만들어내  동물의 감응을 생산하는 것이다. 이는 부합하는 요소들의 새로운 계열화를 통해 동물-되기의 배치를 형성함으로써 이루어진다.  하나가 강밀도의 분포라는 힘과 관련된 성분이라면 다른 하나는  배치라는 관계적 성분으로 배치를 선택하거나 배치를 바꾸는 욕망이나 의지와 결부된 성분이라고   있다.  되기는 진화도 퇴화나 역행도 아닙니다. 함입(involution)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함입이란 이질적인 어떤 짝과의 결연으로 엉뚱한 되기의 블록 속으로  말려들어가는  이다. 

 

 

 

선분성과 권력중심 

분자적인 것의 흐름은 어던 끝을 갖는 것들이 연쇄적으로 연결되고 전염되며 증식하지만,  이웃한 분자들 간의 경계는 모호해지며, 흐름은 대중 그렇듯 모호한 입자들이 하나로 이어진 연속체가 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선분이나 선이란 개념은 몰적인 것에 국한하고, 분자적인 것에 대해서는 양자라는 개념을 사용하자고 제안한다.  양자화된 흐름 이란 양자란 말로 개개의 분자의 입자적 구별을 표시하면서도, 선분적인 벽을 터널링하는 흐름을, 탈주선을 그리는 흐름을 함축하는 개념이다.  

 

선분화된 선과 양자화된 흐름, 그리고  경계에 있는 권력의 중심이란 개념을 설병하기 위해 화폐 대중의 흐름과 화폐적인 선분들을 살펴 본다. 화폐 대중의 흐름은 포착할  없는 미시적 흐름인  반해, ‘통화량 ‘money supply’로서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본원통화와 은행에서 신용차조등의 방법으로 발생하는파생통화의 합으로 계산되는 거시적 지표일 뿐이다.  화폐대중의 흐름이  선분적인 지표들에 쉽사리 포착되지 않기 때문에  통화량을 계산하는 지표들은 다르게 정의하여 사용한다.  하지만 화폐대중의 흐름은 자체로 양자적인 흐름으로서 정확하게 측정할  없다.  통화지표 표시되는 통화량을 측정하고 그것을바탕으로 화폐대중의 흐름을 통제 가능한 화폐적 선분들로 변화시키려고 한다. 하지만 화폐대중의 흐름은어느새 부분적으로 그선분을  터널링해 빠져나가기 때문에 다시 새로운 선분화를 시도해야 한다. 이권력은항상 흐름의 양자를 포획하지만 어느새 벗어난 흐름이 발생한다.  이런 의미에서  끊임없이 실패하는 권력이다. 양자화된 흐름의 탈주선, 그것을 따라가며 선분화하는 권력,  결과 만들어지는 선분 그리고 거기서 다시벗어나는 양자화된 흐름의 순환이 일어난다. 

 

뒤르켐과 타르드의 이론차이는 표상체계라는 거대한 몰적인 것과 믿음과 욕망의 흐름이라는 분자적인 흐름의 차이와 상응한다.  여기서 표상체계는 하나의 단어나 사물을 다른 것들과 연결하여 다시-나타나게 하는문화적인 조건을 말한다.   뒤르켐은 개인이란 범위를 넘어선 사회적 사실에 속하고 몰적인 집합성을 갖는거대한 대상으로 한다고 본다. 가령자살과 같은 개인적인 행위조차도 사회적인 조건 속에 결정되는 것으로보았다. 반면 타르드는 분자적인 믿음의 흐름, 욕망의 흐름, 심리의 전염과 전파 등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가를 파악하고자 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타르드가 사용했던 접속과 결속을 다시 정의한다. 접속은 탈코드화되고 탈영토화된 흐름이 서로를 활성화 하고 그들 공통의 탈주를 자극하며  양자를 추가하고 가속하는 방식을 표시한다. 반면 결속은 오히려 그것들의 상대적인 정체를 뜻하고, 탈주선을 봉인하고 틀어막으며 일반적 재영토화를 작동시키며 다른 것들을 초코드화할  있는 것들 가운데 어느 하나의 지배 아래 흐름을 밀어넣는다. 사회적 장은 상이한 속도와 추세로 대중에게 영향을 미치는 모든 종류의 탈코드화와 탈영토화 운동들에 의해 끊임없이 활기를 얻는다. 이는 모순이 아니라 탈주다. 권력이란 바로 대중의 문제로 이런 대중의흐름을 포착하여 그것을 선분화하는 능력에 의해 정의 된다. 

 

초코드화는 선은 다른 선분들에 대한  선부의 우위를 확보하고서만 그려질 뿐이며, 다른 선분과 관련된 상대적인 공명의 권력을 그러한 중심에 부여하면서 그려질 뿐이고,  자신이 통과하는 지배적인 선분을 강조하면서 그려질 뿐이다.  집중화는 언제나 위계적이지만 위계는 언제나 선분적이다.   권력의 중심은 확산되고분산되고 감소되고 축소된 것으로 존재할 분이며, 끊임없이 치환되고, 미세한 선분화에 의해 활동하며 세부적인  안에서 작동한다.  푸코가 <감시와 처벌>에서  제시했던 범죄의 흐름과 그것의 선분화로서 처벌이나감금의 양상에 대해 이야기 하며 재편과 축적,  도피와 탈주가 상충하며 역전을  야기하는 불안정한 초점들 미시적인 권력의 중심들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학교에서 교장이라는 중심의 형태를 취하지 않은  양자적인 흐름을 선분화하는 권력의 중심이 있다. 반장, 감시자, 우등생과 열등생, 수위 등등 그것이다. 분자적인 양상의 파시즘을 보여 준다. 이러한 미시적 중심들은 역으로  거대한 국가적 권력이 도대체 어떻게 일상적 삶의  미시적 요소들까지 촉수를 뻗치고 그것을통제할 수있는지를 보여 준다. 권력 중심은 가능한  흐름의 양자를 선의 선분들로 변환시키는 것을  존재 이유로 한다. 위대한 정치가란  무능력의 지대에 속하는흐름을 따라가면서 그것을 바탕으로 삼아 흐름의 양자를 선분적인 선으로 변형시키고 초코드화할  있는능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한다.  

    

 가지 선과  가지 위험  

추상기계에 대해 먼저 살펴 본다.  추상기계에는 초코드화 추상기계와 변이의 추상기계가 있다. 초코드화 추상기계는경직된 선분성,거시적 선분성을 정의하는 추상기계이다.  초코드화란 하나의 코드 아래 모든 것을 통합하고 통일하는 것이다. 중앙권력이라는 위로부터 덮쳐오는 코드화가아니라 일차적으로 시장 내지 교환에서 오는 것이란 점에서 차라리 옆에서 혹은 발딛고   밑에서 덮쳐오는 코드화라고 해야 한다. 초코드화는  코드를  덧씌우는 것이 아니라  이전의 모든 코드들을 제거한다는의미에서 변형 내지 추상을 이야기 하지만 하나의 단일한 코드로 통합하기 위함이다.  프란체스코 파가 탈코드화되고 탈영토화된 신항의 흐름을 예수라는 이름으로 교황청 아래 다시 통합 했을때 흐름의 초코드화가진행되었던 것이다 . 이는 지층 안에서 진행된 변환이요. 다수의 지층을 하나의 지층안으로 통합하고 포획하는 추상이다. 

 

변이의 추상기계는 선분화된 것을 흐름의 양자로 변환시키고, 양자적 흐름이 선분적 벽을 터널링하면서누수하고 범람하게 하는 변환과 상응하는 변이요 추상이다. 흐름의 창조 접속을 보장하며 새로운 양자를 방사한다.   자체로 탈주의 상태로 자신의 선위에 전쟁기계를 설치한다. 탈주선을 그리는 배치를 전쟁기게라고 한다. 경직된 선불들 사이로 흐르게 하고 다른 방향으로 분자 이하적인 것으로 흐르게 한다. 일관성으로이어지는 추상기계 이다. 

 

밀접하게 뒤섞여 있는 세가지 종류의 선이, 부족과 제국 및 전쟁기계가 공존하는 공간이었다.  이 세가지선은  첫째 서로 얽힌 코드와 영토성의 상대적으로 유연한 . 이것이 영토  혈통의 선분화가 사회적 공간을 이루는 이른바 원시적 영토성에서 시작한 이유이다. 둘째 선분들의 이원적 조직으로 공명하는 원들의 동심성으로 일반화된 초코드화로 나아가는 경직된 선이다. 셋째 탈주선들로 양자에 의해 표시되며 탈코드화와 탈영토화에 의해 정의된다.  탈주선이야말로 가장 일차적이며,  탈주선의 자유로운 흐름을 선분화하는권력이 있고 그것을 절단하고 채취하는 몰적 선분성의 선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푸코와의 차이를 요약하면서 추상기계는 탈주선을 가지며, 이것이 일차적이다. 이는 하나의 배치 안에서 저항이나 반박이라는 현상이아니라 창조의 첨점 내지 탈영토화의 첨점이다.  배치는 권력의 배치가 아니라 무엇보다 우선 욕망의 배치라고 하는 것이 이와 결부된 명제이다. 

 

마지막으로 세가지 선과 관련된 네가지 위험에 대해 이야기 한다. 첫째 위험은 공포이다.  공포는 모든 상실에 대한 공포요 두려움이다.  우리는  반대편의 안전을 욕망한다. 몰적 선분안에서 획득한 것을 계속하여 소유하고 지속하게 하고자 한다. 욕망은 지속하려는 힘을 작동시키는 권력이기도 하다.  권력은 억압과 통제 이전에 욕망을 유인하는 검은 구멍이고, 욕망의 흐름을 절단하여 포획하는 거대한 칼날이며,  욕망의 흐름에 하나의 공정점을 부여하는 닻이다.  경직된 선분안에 안주하는 것이고 몰적 동일성/정체성 안에서 평안해하는것이다.  다른 모든 경직된 선분들을 자신의 삶으로 수용하고 받아 들이게 하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울리히 백의 위험사회는 상실에 대한 공포를 자그갛여 안전성으로, 안전한 사회로 다시 - 돌아가고 싶다는 반성을 요구하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보수적 입장이다. 

 

둘째 위험은 명확성이다. 분자적 선분성의 선에 고유한 위험이다. 명확성은 분자적인 유연한 움직임과 균열의 선을 명확하게 들여다 보려는 욕망을 의미한다. 욕망이 움직이는 미세한 양상을 포착하여 그것을 긍정하거나 그것을 자극하는   혹은 그것을 따라 가는 것이다. ‘욕망의 본령 성욕에 빠져드는 것이 예이다. 가족적 제한을 넘어서 욕망의 대상을 끊임 없이 대체하며 따라가는 (끝없이 바람을 피우는 ’)    예이다. 이는 유연한 선분성이 경직된 것의 감정과 가식을 소규모 형태로 재생산할 위험을 감수해야하기 때문이다 . 모든 사람들에게 나름대로 판사나 집행관, 경찰관 등의 사명을 부여하는 맹목적 빛이다. 

 

세번째 위험은 권력이다.  양자화된 흐름을 선분적인 것으로 바꾸려는 시도의 위험, 대개는 우리 자신이 양자화된 흐름에 대해 불안해 하거나 못마땅해하면서 그것에 안정성을 부여하려고 하는 경우에 발견되는 그런위험이다. 무능력의 지대를 최소화 하려는 최소화하려는 시도 그리하여 탈주선을 멈추게하련느 시도이다.  당이나 노동조합이 전혀 손을   없는 무능력의 지대에서 발생한 학생 혁명을 프티 부르주아의 난동이라면서 원래 자리로 복귀할 것을 요구했던 68 5 혁명이 사례의 하나이다. 

 

마지막 혐오 혹은 멸망의 정염의 위험이다. 탈주선은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생성하는첨점이며 다른 삶으로 인도하는 선이다. 하지만 이러한 창조적 변이능력을 상실한 경우에도 탈주를 꿈꾸었던 욕망은 선분적인 벽으로 가득  세계에 대한 혐오의 정염을 상실하진 않는다.  차라리 더욱더 강해지기도한다. 기존의 세계에 대한 비판과 비난이 없이는 새로운 삶의 흐름을 창출하고 촉발할  없다. 죽음의 선이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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