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은 들뢰즈 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프스>에서 가장 중심적인 개념입니다. 욕망이란 모든 생산적인 활동을 이끄는 동력일 뿐아니라 생산적인 능력 자체를 뜻하기도 합니다. 이를 표현하기 위해 그들은 두개념을 결합하여 ‘욕망하는 생산’이라는 말을 만들어 사용합니다. 하지만 이말에서 의미상 주어는 생산이 아니라 욕망입니다. 즉 ‘생산이 욕망’한다는 말이 아니라 ‘욕망이 생산’ 한다는 말입니다. 생산이란 욕망의 활동입니다. 생산으로서의 욕망 개념에서 우리는 ‘ 만들어 내는 차이’ ‘생성으로서의 차이’ 개념을 다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니체의 '가면이 얼굴이다'라는 의미에서 욕망은 차이 개념의 새로운 가면이라 하겠습니다.
생산하고 생산된 것들은 모두 욕망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언제나 문제는 욕망입니다. 정신분석학은 성욕이 욕망의 본성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특정한 선험적 본성을 갖는 욕망이 실체로서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저런 배치에 따라 달라지는 구체적 욕망이 있을 뿐입니다. 성욕도 이점에서 예외가 아닙니다. 따라서 어떤 현상이나 사태가 어떤 욕망과 결부되어 있는지, 그것의 근저에 어떤 욕먕이 있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또한 현행의 현실을 바꾸기 위해선 그 욕망을 어떤 욕망으로 바꾸어야 하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언제나 욕망이 문제라지만 이는 욕망의 개념이 모든 사태를 설명하는 하나의 원리나 해답이 아니라 언제나 어떤 욕망인가를 물어야 함을 뜻합니다. 이는 모든 현상이나 사태의 근저에서 그것의 발생원인을 묻는 니체의 계보학과 가까이 있습니다. 욕망의 개념이 니체가 말하는 의지, 정확히는 힘의 의지 개념과 사실상 같음을 안다면 니체와의 인접성은 더 분명하다 하겠습니다.
1962년 간행된 <니체와 철학>에서 들뢰즈는 힘을 통한 대상이나 현상을 파악하고 해석하는 것이 니체의 자연철학의 요체라고 합니다. 그런데 힘의 존재는 복수적이고, 언제난 모든 힘은 다른 힘과 관계 되어 있습니다. 의지는 이처럼 하나의 힘을 다른 힘과 관계짓는 성분이란 점에서 미분적 요소라고 합니다. 힘을 어디로 향하게 할것 인지, 어떤 힘과 어떤 방향에서 만나게 할 것인지, 쉽게 말해 어디다 투여하게 할지를 결정하는 성분이 바로 의지입니다. 따라서 의지란 힘에 작용하는 의지란 점으로 힘에의 의지라고 이해해도 좋겠습니다. 계보학이란 어떤 대상이나 현상의 의미를 읽어 내는 것이란 점에서 해석입니다. 의미란 대상이나 현상에서 표현된 힘과 의지 입니다. 계보학이란 어떤 것을 산출하고 지배하는 것이 어떤 힘, 어떤 의지 인지를 묻는 것입니다. 힘과 의지는 개념적으로 구별되지만 사실 힘과 의지는 분리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내가 던진 공의 힘은 그것을 어떤 방향으로 얼마만큼 날아가게 하려는 내 의지와 분리 될 수 없습니다. 의지가 공을 그런 양상으로 운동하도록 힘을 만들어 내는 발생인이고, 공의 궤적을 규정하는 미분적 요소입니다. 힘을 x라고 한다면 힘에의 의지는 거기에 더해지는 미분적 요소는 dx 입니다. 그러니 공에 실린 힘과 의지는 x + dx로 표시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운동하는 공에는 또 다른 힘과 의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래로 잡아 당기는 중력입니다. 이것을 y+dy라고 표시할 수 있습니다. 공의 질량과 그것에 작용하는 중력을 합한 것입니다. 그래서 공의 힘은 상이한 힘과 방향을 갖는 두 의지적 성분에 의해 그 양적 크기 비율의 변화에 따라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 갑니다.
하지만 힘과 의지를 분리할 수 없다고 해서 같은 것이라고 해서는 안됩니다. 힘은 할 수 있는 것이고, 힘의 의지는 하려는 것이다. 가령 같은 힘을 실어 던진다 해도 날아 가는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의지 입니다. 힘을 운동하는데 투여할 것인지, 글쓰는데 투여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도 의지 입니다. 벽돌의 질량 자체는 중력 즉 아래로 당기는 힘을 갖지만 이 벽돌을 앞으로 밀려는 의지가 작용하면 문제는 마찰력과 미는 힘의 미분적 관계로 바뀝니다. 의지에 따라 다른 힘으로 변환 됩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힘이 있고 , 의지가 더해지는 것이 아니라 의지에 따라 다른 힘이 되는 어떤 x가 있다고 해야 합니다. 의지가 힘의 질을 규정하는 겁니다.
주의해야 할 것은 여기서 의지란 인간이나 동물과 같은 유기체의 의지만이 아니란 점입니다. 공을 당기는 지구도, 쇳가루를 당기는 자석도 의지를 갖고 있습니다. 자지 않으려고 애를 써도 잠이 올때 자려는 의지는 내가 아니라 내몸의 어떤 부분에 속합니다. 술을 먹지 말아야지 결심을 하지만 어느새 술병에 손이 나갈 때도 그렇습니다. 따라서 내몸을 움직이는 의지는 단일하지 않습니다. 의지도 힘만큼 복수적입니다. 내 몸안에 여러가지 의지가 병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망설임을 경험 합니다. 먹으려는 의지와 먹으면 안된다고 저지 하려는 의지, 읽는 글에 집중하려는 의지와 쉬려는 의지가 맞서기도 하고 하나가 다른 것에 지배를 넘겨주기도 합니다. 바로 이것이 의지 개념을 하나의 유기체 그것의 단일성을 가정했던 쇼펜하우어와 니체가 다른 점입니다.
들뢰즈 가타리가 말하는 욕망이란 정확하게 이런 의지를 뜻합니다. 욕망이란 하려고 함이 하려는 바를 위해 힘을 사용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힘을 사용한다 함은 힘을 투여함입니다. 배가 고파 먹고자 함은 먹을 것을 찾거나 만들기 위해 힘을 투여하고, 멋진 글을 쓰고 싶다면 글을 쓰는데 힘을 투여 합니다. 피아노를 치고 싶은데 칠 줄 모르다면 칠 수 있는 힘을 고양시키기 위해 투여 힘을 투여 합니다. 능력내지 힘(power)을 향해 힘(force)을 투여하게 됩니다. 내 신체에 있는 힘이 글쓰는 힘이 되게하는 것은 글을 쓰는 욕망이고 피아노를 치게하는 것은 피아노를 향한 욕망입니다.
니체의 의지 개념과 마찬가지로 욕망 또한 인간이나 유기체의 욕망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욕망 투여’에서 욕망은 주어이지 목적어가 아닙니다. 내가 욕망을 투여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이 힘을 투여하는 것입니다. 힘이 투여 될때 주어는 내가 아니라 욕망이란 말입니다. 나는 그 욕망이 힘을 투여하는 양상에 따라 그때마다 산출되는 주체 입니다. 욕망이 기타 연주를 향해 힘을 투여할때 나는 기타리스트 주체가 됩니다. 먹으려는 욕망이 먹지 않으려는 욕망을 초과 할때 실패한 다어어트 주체가 됩니다. 주체는 처음이 아니라 나중에 오는 겁니다. 욕망이 산출하는 결과물입니다.
욕망은 힘을 투여하고 이로서 대상과 활동을 생산합니다. 이때 생산은 이중적 아니 삼중적입니다. 첫째 욕망은 대상을 생산합니다. 욕망의 대상으로 음식을, 글을, 음악을 생산합니다. 그렇게 생산된 대상을 생산합니다. 둘째 욕망은 생산 능력과 생산활동을 생산합니다. 먹을 것인지 아닌지를 식별하는 활동, 좋은 먹이인지 나쁜 먹이인지 식별하는 능력, 그림이 무엇을 표현하려는지 판단하는 능력 , 그림 그리는 힘을 만들기 위한 활동 등 입니다. 여기에 대해 욕망은 주체를 생산합니다. 욕망이 가동시키는 생산활동이 먹는 주체, 그리는 주체, 연주하는 주체, 연습하는 주체들을 생산합니다.
여기서, 들뢰즈 가타리는 욕망은 결여가 아님을 힘주어 강조 합니다. 결여가 없다면 왜 욕망하는가 하겠지만 결여는 이미 생산된 욕망에게 발생한 특정한 사태일 뿐입니다. 두더지와 지렁이에게 빛의 부재는 결여가 아닙니다. 빛의 부재를 결여로 느끼려면 빛이 이미 욕망의 대상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욕망은 대상과 동시에 생산됩니다. 빛에 대한 욕망은 빛이 없다면 생길 수 없습니다. 맛도, 소리도 그렇습니다. 어떤 대상이 욕망의 대상이 되는가 아닌가는 그 대상이 결여 되어 있는가보다 일차적입니다. 욕망에게 결여는 없습니다. 욕망은 자신의 대상을 생산하고 그것을 영유하려고 합니다. 대상으로 생산된것 만이 결여될 수 있습니다. 그 결여는 생산활동이 주어진 조건일 뿐입니다.
생산이란 종합입니다. 종합은 상이한 것들을 결합하여 새로운 것들로 변화시키는 활동 입니다. 식물은 빛과 이산화탄소를 결합하여 탄수화물을 만들고, 요리사는 상이한 재료를 결합하여 파스타를 만듭니다. 광합성을 하는데 빛이 필요하고 파스타를 만드는데 올리브유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뒤집어 식물에게는 빛이 결여되어 있고, 요리사에게는 올리유가 결여되어 있다고 한다면 바보같은 말입니다. 빛이 있으니 광합성을 하게 된것이고, 빛에 대한 욕망이 생긴것입니다. 올리브유가 있으니 파스타란 요리가 생겨난 것입니다. 올리브유가 없다면 다른 기름을 찾을 것이고 기름이 없으면 파스타 대신 다른 요리를 생산할 겁니다.
주어진 환경에서 가능했던 생산적 종합 덕분에 좀더 생산에 유리 했고, 그런 종합을 반복하려 할때 그 종합은 욕망이 되고 종합의 재료는 욕망의 대상이 됩니다. 나에게 근원적 결여가 있고 그것이 나의 욕망이다. 나는 이 결여를 채워줄것을 찾으며 산다는 정신분석학의 명제는 욕망의 이러한 생산과정을 거꾸로 뒤집어 출현한 것입니다. 물이 있는데 물을 욕망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우리는 없는 것을 욕망할뿐이야. 따라서 결여 된 것이말로 욕망된 것이지. 결여가 욕망의 본질이야. 욕망이 있다면 결여가 있다는 뜻이지. 만약 누군가 항상 욕망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충족될 수 없는 결여가 있기 때문이야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물이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면 없다고 욕망할 이유가 없습니다. 특별한 목적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청산가리가 없다고 그것을 욕망할 이유가 없듯이 말입니다.
욕망은 자신이 얻을 수 없는 것을, 충족할 수 없는 결여를 대상으로 갖지 않습니다. 결코 얻을 수 없는 것에 대한 욕망은 생명체의 욕망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주 특정한 조건에서 인간이라는 특정한 종의 일부가 갖는 도착적 욕망일 뿐입니다. 충족될 수 없는 결여는 그것을 채울 불충분한 대체물을 찾아 나서게 하는게 아니라 욕망이나 능력을 사라지게 합니다. 두더지나 심해어들 처럼 빛이 없는 곳에서 사는 동물들에게는 빛을 감지하는 능력이, 그런 기관이 사라집니다. 빛에 대한 욕망도 사라집니다.
결여가 있든 없는 생산은 계속 됩니다. 생산은 항상적이고 결여는 조건적 입니다. 지금 세상처럼 결여가 항상적인 것은 특정한 사회 체제 위에 창출되고 조직된 것입니다. 가령 공동체를 파괴하고 생존 조건을 모두 빼앗아 농민들을 무산자로 만드는 울타리 치기가 그랬습니다. 기본소득 같은 것에 대하여 말하면 “일을 하지 않아도 먹고 살 돈을 준다면 누가 일을 하려 하겠는가 ?“ 하고 반대하는 발상은 결여가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디에나 욕망이 있습니다. 확실히 욕망은 보편적입니다. 그러나 욕망은 어떤 활동에서도 동일한 본성을 갖는 보편적 실체가 아닙니다. 성욕이나 권력욕처럼 어디서나 답을 주는 보편적 욕망은 없습니다. 어디에서나 어떤 욕망인지 물어야 한다는 것이 욕망의 보편성에 함축된 요구 입니다. 하지만 모든 문제를 욕망의 문제로 다룰려는 건지 반문할 수도 있을 겁니다. 이에 대해 들뢰즈 가타리는 스피노자가 던졌던 문제를 다시 던져야 한다고 답합니다. “ 왜 사람들은 그것이 자신의 구원이라도 되는양 예속을 위해 투쟁하는가”. 그들은 이를 ‘정치 철학의 근본 문제’라고 답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 잘 알려진 대답은 대중이 지배 계급에 속아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파시즘에 대한 대중의 열광을 냉정하게 지켜본 빌헬름 라이히는 여기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아니다. 대중은 속고 있지 않았다. 어떤 점에서, 특정한 조건에서 그들은 파시즘을 욕망했던 것이다. 설명되어야 하는 것은 대중의 이러한 욕망의 도착이다.” 이것이 욕망에 대한 물음이 이책에서 문제화된 이유고 맥락입니다. 이는 또한 어디서든 ‘어떤 욕망인가’를 묻는 것이 정치 철학이 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들뢰즈의 이념 개념에 대해 안다면 이러한 욕망개념이 차이와 반복에서 들뢰즈가 사용했던 이념의 하나임을 알 수있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로 묶는 거대한 원리이자, 모든 질문에 답을 제공하는 최고의 근거가 아니라 언제나 반복해서 던져야할 물음이나 문제인 이념, 그 물음을 문제화 하도록 해주는 최소 크기의 미분적 이념, 모든 생산활동이나 모든 생산적 대상의 배아가 되어주는 잠재성 내지 능력으로서의 이념. 욕망은 차이 철학의 또 하나의 이념, 또 하나의 얼굴입니다.
나는생각한다.고로나는존재한다(Cogito ergo sum).코기토의의식적이중체는생각한다고할때의‘나’가언표행위의주체였다면,존재한다고할때의‘나’는생각과의심의결과존재한다고믿어도좋은것으로언표되는주체,언표주체이다.언표행위의주체와언표주체로이중화하고그양자를동일시하는방식으로포갬으로써이중화된주체(이중체)를만들어내었다. “남자라면작은일에눈물을흘려선안된다”같은언표를접하면서우리는두개의주체가포개지는경험을합니다.‘남자’라는말은문장의언표주체(주어)이다.‘작은일에눈물을흘려서는안된다’이말을듣는남자‘나’이다.언표행위의주체는‘나’가된다. “남자=나”라는등식에이끌려주어에나를일치시키고그것을통해그문장을나에관한얘기로,내가의당해야할바라고생각한다.언표행위의주체인‘나’는언표주체인‘남자’와포개지게되고그언표에예속화되는거다.언표행위의주체를언표주체와포개는이런코기토식의의식적이중체는어떤지배적인질서가요구하는규범이나규칙에나자신을동일시하는메커니즘을형성하게된다.근대적법들은원리상모두‘내’가입법자로서제정한것이라고함으로써,스스로따르는입법자-노예라는새로운노예제도가발명된것이다.
크로노스와 아이온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신의 이름입니다. 크로노스가 시간의 신이라면 아이온은 우주의 신, 하늘의 신인데 원이나, 비비꼬인 뱀의 몸으로 상징화 되어 있습니다. 순환의 시간, 되돌아오는 시간을 뜻한다고 합니다. 영원회귀의 시간을 상징한다고 하겠습니다. 의미의 논리에서 들뢰즈는 이둘을 속성을 달리하는 두가지 시간개념으로 재 영유 합니다.
흔히 아이온이 되돌아 오는 시간의 원으로 표상되기에 이에 대비하여 크로노스는 직선의 시간으로 표상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들뢰즈는 이를 뒤집어 크로노스가 원환적 시간이라면 아이온은 직선적 시간이라고 합니다. 니체의 영원회귀를 계절적 순환이나 되돌아 오는 시간으로 해석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사실 기독교적 종말 개념이 시간 관념에 끼어들기 이전에 시간이란 계절적 순환 같은 것이었습니다. 달이나 해를 주기를 순환하는 시간이 그것입니다. 이것이 크로노스의 시간입니다. 그러니 이건 원으로 표현되는게 적절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들뢰즈에게 아이온은 사건의 시간이고 영원회귀의 반복과 대응하는 시간입니다. 미리 말하자면 반복할때 마다 다른 과거와 미래로 뻗어 나가는 시간의 직선이 아이온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무한히 많은 방향으로 열려 있는 과거와 미래를 잇는 사건의 시간이 그것입니다.
크로노스는 크로놀로지가 표현하듯 연대기적 시간, 신체적 시간입니다. 우리가 익숙한 시간이 그것입니다. 사물의 신체 심층을 지배하는 시간입니다. 자연적 시간이 크로노스에는 흔히 과거 현재 미래라는 세개의 시제가 있다고들 합니다. 하지만 지나간 현재이고 미래는 다가올 것이라고 예상되는 현재라는 점에서 현재의 연장 입니다. 그래서 크로노스의 관점에서는 오직 현재만이 시간속에 실존한다고 합니다. 아이온은 사건의 시간, 생성의 시간 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사건이란 사물이 아니라 그것의 계열화로 발생하는 표면효과 입니다. 따라서 아이온은 계열화 되는 사물사이 혹은 상이한 사물의 상태 사이에 있습니다. 그 상태 중간에서 한쪽은 과거, 다른 한쪽은 미래로 두방향으로 분할 되는 것이 아이온입니다. 변화와 생성이 발생하는 한 현재 상태 마저도 과거와 미래로 무한히 분할 하는 시간이 아이온 입니다.
간단한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빵을 굽다는 밀가루 반죽과 구어진 빵이라는 두 사물 사이에서 진행되는 사건입니다. 한 사물의 두상태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반죽과 빵은 사물의 상태를 지칭하는 명사 입니다. 빵을 굽다는 반죽도 빵도 지칭하지 않습니다. 양자 사이에서 발생하는 사건을 표현하는 동사입니다. 굽기 전에 반죽에도, 구어진 빵에도 시간이 관통하여 흘러 갑니다. 그게 크로노스의 시간입니다. 빵을 굽다라는 사건의 시간은 반죽과 빵사이에 있습니다. 반죽은 그 사건 이전에 속하고, 구어진 빵은 사건 이후에 속합니다. 굽다, 구워지다라는 그 사건은 이미 반죽이 아니고, 아직 빵도 아닌 중간 어딘가를 통과하고 있습니다.
굽기를 중단하면 구워지다 만 상태가 새로이 현재 상태로 출현합니다. 다시 굽기를 계속한다면 시간은 그상태를 벗어나며 흘러 갑니다. 그렇게 흘러가기를 중단하지 않아야만, 현재 상태를 벗어나길 멈추지 않아야만, 구워지다 굽다라는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굽다라고 말할때 굽다만 빵이라는 말을 할 수 없습니다. 굽다만 빵이라고 말할때는 굽다라고 할 수 없습니다. 현재의 상태를 말하려 하면 사건은 사라지고, 사건에 대해 말하려 하면 현재 상태는 사라집니다. 날아가는 화살이 어느지점에 있는지를 말하는 순간 그 화살은 날지 않고 멈추어 버리게 됩니다. 멈춘 화살에겐 현재만 있습니다. 날아가는 화살에겐 현재가 없습니다. 방금 떠나온 과거와 막 도착하려는 미래가 있을 뿐입니다.
이처첨 아이온은 변화와 생성의 시간입니다. 그러나 이것 만으로 아직 아이온에 대해 충분히 말했다 할 수 없습니다. 아이온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이처럼 물리적으로 실행된 사건이 아니라 잠재적인 사건에 대해 다룰때 드러납니다. 아이온이란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은 시간이고, 아무것도 발생하지 않은 사건과 대응하는 시간 이기 때문입니다.
일단 들뢰즈의 사건개념이 잠재성과 짝을 이룸을 강조 해야 합니다. 이는 들뢰즈의 사건 개념이 다른 이들과 어떻게 다른 가를 아는데 중요합니다. 사건이란 개념은 대개 현행적인 발생을 지칭합니다. 뉴스나 신문에 나오는 사건들은 모두 현행적으로 발생한 것입니다. 사람이 죽고 화재가 발생하고 다리가 무너지고 등등 모두 물리적으로 실행된 사건입니다. 시인들에게 오는 시적 사건도 그렇습니다. 시가 시인에게 다가와 손으로 글씨를 쓰게 하는 일이 그것입니다. 철학적 개념에서도 그렇습니다. 사건을 철학적 개념으로 가장 먼저 사용했던 철학자는 하이데거 입니다. 하이데거에게 사건이란 일상적인 삶에 덮쳐와 그동안 존재의 의미를 망각하고 살았음을 경악속에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가령 개발을 위해 파헤쳐진 고향의 산천을 보고 경악하여 하던 일을 접고 다른 삶을 살도록 결단하게 하는 사건, 그런 것입니다. 따라서 하이데거에는 덮쳐 오지 않은 사건, 발생하지 않은 사건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바디유의 사건 개념도 마찬 가지 입니다.
그러나 들뢰즈에게 사건이란 차라리 이념적이고 잠재적인 것입니다. 이념적이란 말은 신체적이란 말과 대비 되기도 하지만 반복가능한 보편성을 갖고있음을 뜻하기도 합니다. 빵을 굽다, 칼을 갈다 같은 동사는 물론 사랑이나 혁명같은 명사로 표현되는 사건들도 모두 반복 가능한 보편성을 갖습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뿐만아니라 옆집 고양이에게도, 시베리아의 늑대에게도 커지다 라는 사건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사랑에 크게 실패한 사람도 아직 시작도 못해본 사람도 모두 사랑에 대해 말할 수 있고 소련이 망한 이후에도 여전히 혁명을 꿈꿀 수 있습니다.
아직 경험하지 못한 사람도 실패이후 다시 꿈꾸는 사람도 아직 현행화 되지 않은 사건입니다. 그런 사건을 말한다 함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건을 말하는 것입니다. 잠재적인 것으로서의 사건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처음이라면 어떻게 다가올까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릴 것이고 실패했다면 다음엔 다르겠지라며 기대하는 마음으로 기다릴 것입니다. 잠재적 사건이란 어떤 조건과 만나는가에 따라 아주 다르게 펼쳐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시인에게 찾아오는 시적 사건이나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의 사건은 유일무이한 고유성을 갖겠지만 들뢰즈가 말하는 사건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건이란 주어를 바꾸어도 반복 가능하고 한사람에게도 반복 가능한 것 입니다. 시인이나 하이데거의 사건이 이미 닥쳐온 사건에 속하다면 들뢰즈의 사건은 기다림에 속합니다.
아이온에 대한 가장 흔한 오해중에 하나는 시적 사건이나 존재의 사건처럼 어떤 전면적 변화가 발생하는 어떤 특별한 순간 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들뢰즈에게 사건의 시간은 시적 시간도 놀라게 하는 전면의 시간도 아닙니다. 그것은 사건의 반복 가능성과 관련된 시간이고 심지어 실행되지 않은 사건에 속하는 시간입니다. 그것이 순간이라 하기도 하지만 그 순간은 자리를 갖지 않습니다. 아이온의 선에서 끊임없이 자리를 옮기며 선 전체를 주파합니다. 반복가능성 속으로 기다림 속으로 누군가를 불러 들이는 모든 잠재적 사건의 시간이 순간 이란 말입니다.
이러한 순간은 역설적 심급 내지 우발점이라고 들뢰즈는 말합니다. 이말의 의미는 잠재와의 선을 따라 갈때 비로소 드러납니다. 들뢰즈는 잠재적 사건을 물리적으로 현행화된 사건과 대비합니다. "사건을 고찰하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는 페기(Peguy)의 말을 빌어 이를 각자 '생성'과 '역사'란 개념과 짝을 짓습니다. 현행화란 사건을 따라 가면서 역사속에서의 그것의 실행을 기록하는 과정이라면 잠재화란 사건을 거슬러 올라가 생성속에 자리잡듯 그속에 자리잡는 것이라는 겁니다. 가령 소련이나 중국에서 역사적으로 펼쳐진 혁명의 과정을 따라가며 기록하는 것이 사건을 따라 가는 것입니다. 반면 그런 혁명을 두고, 혁명이란 무엇인지를 다시 물으며 혁명이란 사건의 잠재성으로 다른 순간에 다른 곳에서 펼쳐질 사건들로 밀고 올라가는게, 사건을 거슬러 올라가 생성으로서의 사건속에 자리를 잡는 것입니다.
그런데 잠재화란 현행화 된것을 필름 되감듯 애초에 출발점으로 되돌아 가는게 아닙니다. 현행화된 사물의 상태로 부터 잠재적인 것으로 올라갈때 거기서 발견하는 것은 전혀 다른 현실 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발점으로 다른 규정 가능성들로 열린 생성의 지대로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성의 지대란 동시에 젊어지기도 하고 늙어지기도 하며 사건을 이루는 모든 특이성을 겪어 보는 것이 가능한 곳입니다. 사건을 거슬러 간다함은 혁명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속에서 혁명의 관념 자체를 바꾸며 아주 다른 혁명의 가능성들이 분개하는 지점으로 감을 뜻합니다. 혁명에 대한 기존의 의미 모두를 무의미로 되돌기에 수많은 가능한 다른 의미들이 출현하는 지점이 그곳입니다. 혁명에 반한다고 믿던 것들 마저 혁명 속으로 밀려 들어가는 역설적 계열화가 거기서 필요하게 됩니다.
그렇게 현행화 된 역사속에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듯 보이지만 잠재화된 사건속에서는 모든 것이 변합니다. 잠재적 규정의 최소치와 우발점이 연결되면서 모든 사건화를 향해 열리기 때문입니다. 규정된 의미는 수 많은 다른 의미를 함축하는 무의미로, 역설로 되돌아 가고 특이점을 둘러싼 우발점은 모든 사건화를 향한 선을 그릴 수 있게 해줍니다. 사건의 순간이란 역설적 심급이고 우발점이란 말은 바로 이런 뜻입니다. 따라서 사건의 시간은 사건이 발생하는 현행적 시간이 아니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시간입니다.
모든 가능한 사건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상이한 의미 상이한 방향으로 사건 하나에 동시에 뻗어나가는 시간 그것이 바로 사건의 시간입니다. 의미의 논리에서 아이온이라고 명명했던 이 시간을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는 사이 시간 이라고 명명합니다. 두순간 사이에 시간이 있는 것이 아니다. 사건이 바로 사이 시간이다. 사이 시간이란 사이에 속한 시간이고 사이로서의 시간 입니다. 과거와 미래로 무한히 분할되는 사이로 우발 점이 끼어드는 시간이며 상이한 방향의 선들이 동시에 붕괴되는 시간입니다.
이런 시간 개념에 영감을 준 것은 보르헤스(Borges) 입니다. 보르헤스는 <바빌로니아의 복권>에서 모든 추첨의 단계에 우연을 개입시킬 복권에 대해 말합니다. 가령 상금을 줄 건지, 벌금을 매길 건지, 상금이면 상금을 얼마나 줄건지, 그걸 정하는 사람은 누구로 할건지, 그 사람을 어느 지역에서 뽑을 건지, 그 지역을 뽑을 기준은 무엇으로 할것인지 등등 추첨으로 정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추첨의 횟수는 무한히 거듭될 수 밖에 없습니다. 무한히 많은 우연이 영원히 끼어드는 겁니다. 그렇게 우연히 끼어드는 사이가 바로 사이 시간입니다.
아이온은 사이 시간 입니다. 수많은 방향으로 열린 우발점에 따라 다르게 현행화될 사건들이 거기에 있습니다.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은 시간이지만 일어날 모든 일들로 열린 시간이고 그 사건들을 암시하는 시간이며 사건들을 기다리는 시간입니다. 암시로 남은 사건, 그 암시에 홀린 기다림이 거기에 있습니다. 사건의 철학 그것은 거대한 암시로서의 철학입니다. 철학이란 그런 암시를 담은 개념을 창안하는 작업이라는게 들뢰즈와 카타리의 생각입니다. 현행화를 거슬러 사이 시간속에서 암시의 유혹을 던지는 사건의 개념을 발명하는 것이 철학입니다. 철학은 언제나 사이시간이다. 그러니 아이온은 철학의 신이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들뢰즈에 따르면 스토아 주의자들은 한 사물에서 다른 사물로 이어지는 인과의 연쇄를 운명이라고 명명했습니다. 크로노스는 그 물질적 인과의 연쇄를 지배하는 신입니다. 물론 운명을 거역하는 미친 크로노스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온은 미친 크로노스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다시 말해 운명을 긍정하면서도 필연의 힘에서 벗어날 수 있는 빈칸이 무한히 많이 있음을 알려줍니다. 과거와 미래로 무한히 갈라지는 모든 순간들이 사물들에 표면 모두가 다른 사건화를 향해 열린 잠재성으로 암시와 기다림의 사건으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렇기에 지극히 낮은 확률에도 반복되는 실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 다시한번 하며 주사위를 던지게 되는 것입니다. 빵을 굽는 이도 공을 차는 이도 공동체를 만드는 이도 혁명을 꿈꾸는 이도 말입니다. 다른 반복가능성으로 열린 차이가 거기에 있기에 그 주사위 던지기는 영원히 계속될 것이라고 들뢰즈는 믿고 있습니다. 영원회귀란 그런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