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은 들뢰즈 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프스>에서 가장 중심적인 개념입니다. 욕망이란 모든 생산적인 활동을 이끄는 동력일 뿐아니라 생산적인 능력 자체를 뜻하기도 합니다. 이를 표현하기 위해 그들은 두개념을 결합하여 ‘욕망하는 생산’이라는 말을 만들어 사용합니다. 하지만 이말에서 의미상 주어는 생산이 아니라 욕망입니다. 즉 ‘생산이 욕망’한다는 말이 아니라 ‘욕망이 생산’ 한다는 말입니다. 생산이란 욕망의 활동입니다. 생산으로서의 욕망 개념에서 우리는 ‘ 만들어 내는 차이’  ‘생성으로서의 차이’ 개념을 다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니체의 '가면이 얼굴이다'라는 의미에서 욕망은 차이 개념의 새로운 가면이라 하겠습니다.

생산하고 생산된 것들은 모두 욕망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언제나 문제는 욕망입니다. 정신분석학은 성욕이 욕망의 본성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특정한 선험적 본성을 갖는 욕망이 실체로서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저런 배치에 따라 달라지는 구체적 욕망이 있을 뿐입니다. 성욕도 이점에서 예외가 아닙니다. 따라서 어떤 현상이나 사태가 어떤 욕망과 결부되어 있는지, 그것의 근저에 어떤 욕먕이 있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또한 현행의 현실을 바꾸기 위해선 그 욕망을 어떤 욕망으로 바꾸어야 하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언제나 욕망이 문제라지만 이는 욕망의 개념이 모든 사태를 설명하는 하나의 원리나 해답이 아니라 언제나 어떤 욕망인가를 물어야 함을 뜻합니다. 이는 모든 현상이나 사태의 근저에서 그것의 발생원인을 묻는 니체의 계보학과 가까이 있습니다. 욕망의 개념이 니체가 말하는 의지, 정확히는 힘의 의지 개념과 사실상 같음을 안다면 니체와의 인접성은 더 분명하다 하겠습니다.

1962년 간행된 <니체와 철학>에서 들뢰즈는 힘을 통한 대상이나 현상을 파악하고 해석하는 것이 니체의 자연철학의 요체라고 합니다. 그런데 힘의 존재는 복수적이고, 언제난 모든 힘은 다른 힘과 관계 되어 있습니다. 의지는 이처럼 하나의 힘을 다른 힘과 관계짓는 성분이란 점에서 미분적 요소라고 합니다. 힘을 어디로 향하게 할것 인지, 어떤 힘과 어떤 방향에서 만나게 할 것인지, 쉽게 말해 어디다 투여하게 할지를 결정하는 성분이 바로 의지입니다. 따라서 의지란 힘에 작용하는 의지란 점으로 힘에의 의지라고 이해해도 좋겠습니다. 계보학이란 어떤 대상이나 현상의 의미를 읽어 내는 것이란 점에서 해석입니다. 의미란 대상이나 현상에서 표현된 힘과 의지 입니다. 계보학이란 어떤 것을 산출하고 지배하는 것이 어떤 힘, 어떤 의지 인지를 묻는 것입니다. 힘과 의지는 개념적으로 구별되지만 사실 힘과 의지는 분리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내가 던진 공의 힘은 그것을 어떤 방향으로 얼마만큼 날아가게 하려는 내 의지와 분리 될 수 없습니다. 의지가 공을 그런 양상으로 운동하도록 힘을 만들어 내는 발생인이고, 공의 궤적을 규정하는 미분적 요소입니다. 힘을 x라고 한다면 힘에의 의지는 거기에 더해지는 미분적 요소는 dx 입니다. 그러니 공에 실린 힘과 의지는 x + dx로 표시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운동하는 공에는 또 다른 힘과 의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래로 잡아 당기는 중력입니다. 이것을 y+dy라고 표시할 수 있습니다. 공의 질량과 그것에 작용하는 중력을 합한 것입니다. 그래서 공의 힘은 상이한 힘과 방향을 갖는 두 의지적 성분에 의해 그 양적 크기 비율의 변화에 따라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 갑니다.

하지만 힘과 의지를 분리할 수 없다고 해서 같은 것이라고 해서는 안됩니다. 힘은 할 수 있는 것이고, 힘의 의지는 하려는 것이다. 가령 같은 힘을 실어 던진다 해도 날아 가는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의지 입니다. 힘을 운동하는데 투여할 것인지, 글쓰는데 투여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도 의지 입니다. 벽돌의 질량 자체는 중력 즉 아래로 당기는 힘을 갖지만 이 벽돌을 앞으로 밀려는 의지가 작용하면 문제는 마찰력과 미는 힘의 미분적 관계로 바뀝니다. 의지에 따라 다른 힘으로 변환 됩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힘이 있고 , 의지가 더해지는 것이 아니라 의지에 따라 다른 힘이 되는 어떤 x가 있다고 해야 합니다. 의지가 힘의 질을 규정하는 겁니다.

주의해야 할 것은 여기서 의지란 인간이나 동물과 같은 유기체의 의지만이 아니란 점입니다. 공을 당기는 지구도, 쇳가루를 당기는 자석도 의지를 갖고 있습니다. 자지 않으려고 애를 써도 잠이 올때 자려는 의지는 내가 아니라 내몸의 어떤 부분에 속합니다. 술을 먹지 말아야지 결심을 하지만 어느새 술병에 손이 나갈 때도 그렇습니다. 따라서 내몸을 움직이는 의지는 단일하지 않습니다. 의지도 힘만큼 복수적입니다. 내 몸안에 여러가지 의지가 병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망설임을 경험 합니다. 먹으려는 의지와 먹으면 안된다고 저지 하려는 의지, 읽는 글에 집중하려는 의지와 쉬려는 의지가 맞서기도 하고 하나가 다른 것에 지배를 넘겨주기도 합니다. 바로 이것이 의지 개념을 하나의 유기체 그것의 단일성을 가정했던 쇼펜하우어와 니체가 다른 점입니다.

들뢰즈 가타리가 말하는 욕망이란 정확하게 이런 의지를 뜻합니다. 욕망이란 하려고 함이 하려는 바를 위해 힘을 사용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힘을 사용한다 함은 힘을 투여함입니다. 배가 고파 먹고자 함은 먹을 것을 찾거나 만들기 위해 힘을 투여하고, 멋진 글을 쓰고 싶다면 글을 쓰는데 힘을 투여 합니다. 피아노를 치고 싶은데 칠 줄 모르다면 칠 수 있는 힘을 고양시키기 위해 투여 힘을 투여 합니다. 능력내지 힘(power)을 향해 힘(force)을 투여하게 됩니다. 내 신체에 있는 힘이 글쓰는 힘이 되게하는 것은 글을 쓰는 욕망이고 피아노를 치게하는 것은 피아노를 향한 욕망입니다.

니체의 의지 개념과 마찬가지로 욕망 또한 인간이나 유기체의 욕망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욕망 투여’에서 욕망은 주어이지 목적어가 아닙니다. 내가 욕망을 투여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이 힘을 투여하는 것입니다. 힘이 투여 될때 주어는 내가 아니라 욕망이란 말입니다. 나는 그 욕망이 힘을 투여하는 양상에 따라 그때마다 산출되는 주체 입니다. 욕망이 기타 연주를 향해 힘을 투여할때 나는 기타리스트 주체가 됩니다. 먹으려는 욕망이 먹지 않으려는 욕망을 초과 할때 실패한 다어어트 주체가 됩니다. 주체는 처음이 아니라 나중에 오는 겁니다. 욕망이 산출하는 결과물입니다.

욕망은 힘을 투여하고 이로서 대상과 활동을 생산합니다. 이때 생산은 이중적 아니 삼중적입니다. 첫째 욕망은 대상을 생산합니다. 욕망의 대상으로 음식을, 글을, 음악을 생산합니다. 그렇게 생산된 대상을 생산합니다. 둘째 욕망은 생산 능력과 생산활동을 생산합니다. 먹을 것인지 아닌지를 식별하는 활동, 좋은 먹이인지 나쁜 먹이인지 식별하는 능력, 그림이 무엇을 표현하려는지 판단하는 능력 , 그림 그리는 힘을 만들기 위한 활동 등 입니다. 여기에 대해 욕망은 주체를 생산합니다. 욕망이 가동시키는 생산활동이 먹는 주체, 그리는 주체, 연주하는 주체, 연습하는 주체들을 생산합니다.

여기서, 들뢰즈 가타리는 욕망은 결여가 아님을 힘주어 강조 합니다. 결여가 없다면 왜 욕망하는가 하겠지만 결여는 이미 생산된 욕망에게 발생한 특정한 사태일 뿐입니다. 두더지와 지렁이에게 빛의 부재는 결여가 아닙니다. 빛의 부재를 결여로 느끼려면 빛이 이미 욕망의 대상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욕망은 대상과 동시에 생산됩니다. 빛에 대한 욕망은 빛이 없다면 생길 수 없습니다. 맛도, 소리도 그렇습니다. 어떤 대상이 욕망의 대상이 되는가 아닌가는 그 대상이 결여 되어 있는가보다 일차적입니다. 욕망에게 결여는 없습니다. 욕망은 자신의 대상을 생산하고 그것을 영유하려고 합니다. 대상으로 생산된것 만이 결여될 수 있습니다. 그 결여는 생산활동이 주어진 조건일 뿐입니다.

생산이란 종합입니다. 종합은 상이한 것들을 결합하여 새로운 것들로 변화시키는 활동 입니다. 식물은 빛과 이산화탄소를 결합하여 탄수화물을 만들고, 요리사는 상이한 재료를 결합하여 파스타를 만듭니다. 광합성을 하는데 빛이 필요하고 파스타를 만드는데 올리브유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뒤집어 식물에게는 빛이 결여되어 있고, 요리사에게는 올리유가 결여되어 있다고 한다면 바보같은 말입니다. 빛이 있으니 광합성을 하게 된것이고,  빛에 대한 욕망이 생긴것입니다. 올리브유가 있으니 파스타란 요리가 생겨난 것입니다. 올리브유가 없다면 다른 기름을 찾을 것이고 기름이 없으면 파스타 대신 다른 요리를 생산할 겁니다.

주어진 환경에서 가능했던 생산적 종합 덕분에 좀더 생산에 유리 했고, 그런 종합을 반복하려 할때 그 종합은 욕망이 되고 종합의 재료는 욕망의 대상이 됩니다. 나에게 근원적 결여가 있고 그것이 나의 욕망이다. 나는 이 결여를 채워줄것을 찾으며 산다는 정신분석학의 명제는 욕망의 이러한 생산과정을 거꾸로 뒤집어 출현한 것입니다. 물이 있는데 물을 욕망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우리는 없는 것을 욕망할뿐이야. 따라서 결여 된 것이말로 욕망된 것이지. 결여가 욕망의 본질이야. 욕망이 있다면 결여가 있다는 뜻이지. 만약 누군가 항상 욕망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충족될 수 없는 결여가 있기 때문이야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물이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면 없다고 욕망할 이유가 없습니다. 특별한 목적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청산가리가 없다고 그것을 욕망할 이유가 없듯이 말입니다.

욕망은 자신이 얻을 수 없는 것을, 충족할 수 없는 결여를 대상으로 갖지 않습니다. 결코 얻을 수 없는 것에 대한 욕망은 생명체의 욕망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주 특정한 조건에서 인간이라는 특정한 종의 일부가 갖는 도착적 욕망일 뿐입니다. 충족될 수 없는 결여는 그것을 채울 불충분한 대체물을 찾아 나서게 하는게 아니라 욕망이나 능력을 사라지게 합니다. 두더지나 심해어들 처럼 빛이 없는 곳에서 사는 동물들에게는 빛을 감지하는 능력이, 그런 기관이 사라집니다. 빛에 대한 욕망도 사라집니다.

결여가 있든 없는 생산은 계속 됩니다. 생산은 항상적이고 결여는 조건적 입니다. 지금 세상처럼 결여가 항상적인 것은 특정한 사회 체제 위에 창출되고 조직된 것입니다. 가령 공동체를 파괴하고 생존 조건을 모두 빼앗아 농민들을 무산자로 만드는 울타리 치기가 그랬습니다. 기본소득 같은 것에 대하여 말하면 “일을 하지 않아도 먹고 살 돈을 준다면 누가 일을 하려 하겠는가 ?“ 하고 반대하는 발상은 결여가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디에나 욕망이 있습니다. 확실히 욕망은 보편적입니다. 그러나 욕망은 어떤 활동에서도 동일한 본성을 갖는 보편적 실체가 아닙니다. 성욕이나 권력욕처럼 어디서나 답을 주는 보편적 욕망은 없습니다. 어디에서나 어떤 욕망인지 물어야 한다는 것이 욕망의 보편성에 함축된 요구 입니다. 하지만 모든 문제를 욕망의 문제로 다룰려는 건지 반문할 수도 있을 겁니다. 이에 대해 들뢰즈 가타리는 스피노자가 던졌던 문제를 다시 던져야 한다고 답합니다. “ 왜 사람들은 그것이 자신의 구원이라도 되는양 예속을 위해 투쟁하는가”. 그들은 이를 ‘정치 철학의 근본 문제’라고 답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 잘 알려진 대답은 대중이 지배 계급에 속아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파시즘에 대한 대중의 열광을 냉정하게 지켜본 빌헬름 라이히는 여기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아니다. 대중은 속고 있지 않았다. 어떤 점에서, 특정한 조건에서 그들은 파시즘을 욕망했던 것이다. 설명되어야 하는 것은 대중의 이러한 욕망의 도착이다.” 이것이 욕망에 대한 물음이 이책에서 문제화된 이유고 맥락입니다. 이는 또한 어디서든 ‘어떤 욕망인가’를 묻는 것이 정치 철학이 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들뢰즈의 이념 개념에 대해 안다면 이러한 욕망개념이 차이와 반복에서 들뢰즈가 사용했던 이념의 하나임을 알 수있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로 묶는 거대한 원리이자, 모든 질문에 답을 제공하는 최고의 근거가 아니라 언제나 반복해서 던져야할 물음이나 문제인 이념, 그 물음을 문제화 하도록 해주는 최소 크기의 미분적 이념, 모든 생산활동이나 모든 생산적 대상의 배아가 되어주는 잠재성 내지 능력으로서의 이념. 욕망은 차이 철학의 또 하나의 이념, 또 하나의 얼굴입니다.

 

 

 

5장은 기호에 대해 다룬다.  기표를 의미화하는기호 이론을 기호학이라고 부른다. 일반적인 기호학에서는 기호를  다시 기표로  전환 한다. 이는 소쉬르나 바르트의 기호학적 관점이다.  기호라는 것은 어느 사회집단이 인위적으로 약속한 '표시와 의미의 결합이다. 기호는 표시 의미가 하나가 되어 비로소 진정한 의미가 생긴다.  표시’ 와 의미’ 사이에는 어떠한 자연적, 내재적 관계 없다. 의미하는  의미 되는  기능적 관계일 뿐이다장기를 두려고 하는데 졸이 하나 없는 경우 바둑알을 장기판에 놓는다고 했을  장기를 두는 사람이  귤껍질 졸로 약속 하면 장기는 계속진행된다. 그러나 귤 껍질과 졸 사이에는  어떠한 자연적이고 사회적인 결합이 없다. 자의적인 결합이다.  이것이  기호 본질이다.  ‘귤 껍질 같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표시 의미하는 것을  시니피앙으로, 장기의 졸의 작용을 의미되는 것을 시니피에'라고 불렀다. 기호란 의미하는 것과 의미되는 것의 세트이며 이둘을 합친것이 기호라고 한다언어 뿐만아니라 복장, 먹는 요리, 좋아하는 음악, 타고 다니는 자동차, 살고 있는  등이 모두 기호로 가능하다. 기호학은 우리 주위에 있는 것이 기호가    있는지,  것이 어떤 메시지를 어떤 방식으로 발신하고 이떻게 해독되는지 등을 규명하는 학문이다. 

 

 롤랑 바르트는 기호의 자의성에 관한 주장을  비판적으로 계승해서 신화 기호학을 창안하였다. 그는 1 체계의 언어를 대상언어라고 부르며, 2 체계의 언어를 메타언어라고 부른다. 신화학자가 다루는 대상은 바로 메타언어,  2 체계의 언어이다. 신화의 출발점으로서의  1 체계의 언어인 대상언어에는 문자와 이미지가 모두 포함된다. 예를 들어  언어, 사진, 회화, 광고, 의식, 사물 등은 모두 신화의 출발점이   있다.  예로  '파리 마치  잡지의 표지에 인쇄된 사진을 언급하는데,  사진은 프랑스 군복을입은  흑인 소년병사가 거수경례를 하고 있는 장면  담고 있다. 대상언어 체계(1 체계) 차원에서  ,  이미지의 의미는 프랑스식 거수경례를 하고 있는 흑인 소년 병사이다.  하지만 메타언어 체계(2 체계)로서  신화적 기호로서의  이미지의 의미는 '인종차별 없는 위대한 프랑스를 위한 순수한 충성이다. 신화의 기능은 특정한 세계관을 자연화시키는 것에 있다. 신화가 특정한 세계관을 자연화시킨다는 것은  신화가 비정치화된 파롤 만들어 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달리 말해 신화는 언어 활동에 권력을 기재하는 것이다. 롤랑 바르트는 신화의 기능이 기호에 권력을 기재함으로써 권력을 끝임없이 재생산하는 것에 있다고 주장한다. 신화는 권력에 결부된 역사를 자명한 것으로,  자연적인  으로 바꾼다.  현실의 거짓된 자연스러움으로서의 신화는 역사적인 것을 자연적인  으로 전도시킨다. 

 

라캉은 무의식이 언어처럼 구조화 되어 있다고 한다  구조화된 언어들이 갖는 힘을 기표의 물질성이라고한다 기표 내지 언어를 의미하는 상징들은 구조화된 어떤 질서를,  나름의 세계를 이룬다. 우리가 말하고 사유하기 위해선, 혹은 무의식이 작동하기 위해서  상징적인 것의 구조화된 질서 속으로 들어가  질서와 구조에 따라야만 한다이처럼  상징적인 것의 구조화된 질서  상징계라고 한다통상 언어학적 모델을 따르는 기호학에서 상징계라는 개념으로 기표적인 기호를 유일하고 특권적인 기호형태로 간주한다.  

 

기호체제의 개념 

들뢰즈와 가타리는 화용론이라는 입장에서 기호를 이야기 한다. 화용론은 외부적인 요건에 의해서 기호 의미 해석이 달라질  있다는 관점이다.  표현 형식이 언어적 형식을 취할때 그것을 기호체제라고 정의 한다하나의 기호체제가 하나의 기호계를 이룬다. 기호계는 특정한 질서를 이루는 기호들의 집합을 의미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구조라는 개념에 비판적이며 영토성 이상으로 탈영토화의 첨점을 강조하고 있다.  상징계와 달리 기호계는 인간이 정상적인 삶을 살기 위해 선택할  밖에 없는 인간조건 아니다.  표현형식에는  나름의 다양성이 있으며,  형식들에는  나름의 혼합이 있으므로 기표 형태(형식) 체제에 유난스런 특권을 부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기호계를 기호체제로 보는 것은 기호들의 집합이 하나의 질서 내지 세계 뿐만 아니라그것을 하나의 세계로 질서 지우고 유지하는 권력의 배치라는 것을 표현하기위한 것이다체제란 말은 정치학 영역에선 흔히 정권이라고 번역되던 단어이다기호체제란 기호계적인 권력이 작동하는 정권임을 뜻한다. 

 

네가지 기호체제 

1) 기표적 기호체제

의미화 작용이란 기표와 기의의 상호연관을 표시하는 말로, 기표들의 상호작용 내지 놀이를 통해 기표에 어떤 기의가 할당되는 것을 말한다. 4가지 기표 체계는 기표적 기호체제, 전기표적  기호체제, 반기표적 체제, 탈기표적 기호체제이다. 기표적 기호체제에서  어떤 기호가 연관된 다른 기호들과의 관계속에서 그것에 고유한 의미를 획득하는 것을  의미화라고 한다이런 방식으로 작동하는 기호체제를 기표적 기호 체제라고 한다.  연관된 다른 기표들과의 관계 속에서 기의를 획득하게 된다. 이런  의미화란 기표들의 소급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의미를 만들어 내는 특정한 방식을 내포한다즉 여기서 각각의 기호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으며, 이는 언제나 기표일 뿐이다. 기호로 소급되는 기호는 불확실함에 사로잡히지만 능력을 갖는 것은 기호의 연쇄를 만들어 내는 기표다하나의 기표가 다른 기표들로 소급 되고, 이런 소급은 기표 아닌어떤 의미가 어디선가 등장하지 않는  무한히 반복될  밖에 없다. 기표는 기호로 넘쳐흐르는 기호다.    

 

말하고자 하는 것이란 점에서 의미 사전에 존재하는 어떤 순수한 것이 아니며,  자체로 항상-이미 기표적인 관계 안에 있을 수밖에 없다해석은 의미화에 종속되며  점에서 기의가  나름대로 기표를 재 부여하지 않는다면 기표는 어떠한 기의도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은 정신분석적 사제들의 발견이었다. 기표적인 체제에서 기의란 개인 의지의 외부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자체로 물질적인 힘을 갖고 있는 실재 내지 세계라는 것이다. 그래서 라캉은 기표들이 만드는 이런 세계(질서)  상징계라고 불렀고, 기표들의 질서가 갖는 독립적인 힘을 기표의 물질성이라고 불렀다. 기표적인 기호의 세계 안에서 우리는 자신의 욕망을 표현하기 위해, 이미  자체로 질서화된 기표들의 힘을 빌릴  밖에 없고, 이로 인해 의미와 기호사이에 근본적인 분열이 발생한다고 말한다. 이를 라캉은 소외라고 한다. 

 

기표로만 무한히 소급될 뿐이라면 그래서 기표들이 기의 위로 미끄러질 뿐이라면 기표들이 기의(의미) 갖는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  정신분석은 그런 기표들을  어머니 혹은 남근에서 찾는다. 이는 모든 것을 성욕이나 오이디푸스적 욕망의 징후로 본다는 것을 뜻이다. 오이디푸스적 욕망을 표현하는 기호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점에서 정신분석학은 모든 것을 성욕과 결부된 기호로,  자체만으론 무의미한 기표로 간주하는셈입니다.  라캉에게 최초의 기의는 자체론 기표를 갖지 않기에 말할  없는 무엇이며 다만 그에 상응하여어떤 기표가 들어설  있는 빈자리 결핍 뿐이다.  대상 a 일차적으로  근원적인 결핍 내지 빈자리를 표시하는 개념이다.  때론 소문자 파이라고도 부르는  실재계의 빈자라는 그에 상응하는 기표를 만들어 낸다. 이를 그는 대문자 파이라고 부른다.  이는 남근이라는 기표이다.  남근이라는 기표가 다른 기표들이잠정적이나마 기의를 갖고 고정되게 만드는 특권적인 기표이며  특권적인 중심 역할을 한다.   

 

 중심엔 전제군주의 기표, 전체군주처럼 도든 기표들의 자리를 할당하고 그것의 의미를 여탈할  있는 그런 기표가 자리잡고 있다.  기표인 남근의 근저에 채워질  없는 빈자리만 있기 때문에 이러한 의미의 할당은 잠정적인 것에 불과하고 일시적으로 봉합 것에 불과하다.  이로 인해 욕망의 기표들은 끊임없이 다른기표들로 치환 된다. 이를 욕망의 환유연쇄 라고 한다.  여렵겹의 기표 연쇄들은 모두가 남근 내지 전제군주의 기표로 환원가능하다. 기표가 소급되는 양상은 본질적으로 하나의 중심적인 기표, 특권적인 기표로 환원되는 것으로 귀착된다. 이러한 환원가능성으로 인해 기표적인 기호체제를 편집증적인 체제라고 부른다. 

 

새로운 원환이 펼쳐지고 낡은 원환이 다시 만들어   있도록 기표를 재공급해야 한다. 다시 말해 의미화에복무하는 이차적인 메커니즘이 필요하다. 주석 내지 해석이 바로 그것이다.  주석이나 해석은  자체로 다시해석과 주석의 대상이 되고 이런식으로 중심의 기표를 전하는 다양한 원환들이 증식된다. 해석은 무한히 계속되고  자체로 이미 하나의 해석이 아닌 어떤 해석자도 만나지 못한다. 기의는 기표를 끊임없이 다시 제공하며, 기표를 계속하여 보충하고 생산한다.  원환들의 중심에 있는 전제군주의 기표, 혹은 그것에 상응하는어떤 종국적 기의  모든 기표들의 연쇄를 통해 전달되는 잉여성이며  잉여적인 기표  자체라고  있다.  기호가 다른 기호로 무한히 소급된다고 말하는 것이나, 기호의 무한한 전체가 지고한 기표로 소급된다고 말하는 것은 동일하다.  

 

언어적인 기호, 혹은 기표적인 기호는 탈영토화되어 있는 기호이다.  기표란  자체론 아무의미도 없다는 것은 그것이 탈영토화된 기호임을 보여 준다. 탈영토화된 기호인  언어나 기표는 얼굴(표정)  영토화된다. 목소리가 나오는 곳은 얼굴이다. 기표에 실체를 부여하는 것은 표정(얼굴)이며, 해석할 것을 제공하는 것도표정이다.  해석이  실체에 기표를 다시 부여할 때에도 변하는 것은 그리고  특징을 변화시키는 것은 바로 표정이다. 기표는 언제나 안면화 된다.  언어 활동은 언제나 안면성이란 특질을 수반할 분만 아니라 얼굴은 잉여성 전체를 응결시킨다. 목소리가 나오는 곳은 얼굴이다.  안면성은  모든 의미화  해석의 총체 위에 물질적으로 군림한다.  전체 군주의 얼굴, 그것은  하지 않으면 죽어라는 명령어를 발화하는 입이고, 전제군주의 기표,  그것은 전제군주의 얼굴로 재영토화된 수많은 기표들의 실질적인 의미이다. 

 

얼굴(표정) 지워질때,  얼굴의 특징이 사라질때 우리는 분명히 다른 체제에 들어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저자들은 사형수는 무엇보다 우선 그의 얼굴(표정) 잃은 사람이라고 한다. 얼굴을 살피기를 중단한 자의형상이다. 이때, 탈주자의 탈주선은 새로운 여행의 , 새로운 창조적 선을 그리며 시작되지만, 기존의 체제는 그들이 설정한 금지와 부정의 벽을 넘는 순간 사형을 선고하고 범죄자의 형상을 부여한다. 사형수는 종국적인 말이 결코 아니며, 반대로 배제를 향해 내딛는 첫걸음이라고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해 신이 부과하는 탈주자의 부정적 형상이다.  탈주 자체가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탈주자에게 내리는 전제군주의 사형선고가 그에게 부정적 형상을 덮어 씌운다는 것이다. 기표적인 기호체계가 우리의 삶을 항상-이미 사로잡고제한하며 규정하는 체제라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우리가 빈번하게 만나고 부딪치는 체제임이 분명합니다. 

 

2) 전기표적 기호체제 

원시적이라고 간주되는  기표적 기호계로서 이는 기호 없이 작동하는 자연적 코드화에 훨씬 가깝다.  여기서는 어떤 것도 표현의 유일한 실체로서  안면성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기의의 추상에 의해 내용의 형식을제거하는 경우도 전혀 없다.  신체성, 몸짓성, 리듬, , 제전의 형태가 이질성 안에서 음성적 형태와 공존한다. 기호 내지 기표들의 인위적인 코드화 대신에 기호없이 작동하는 자연적 코드화 하나하나의 동작이나행동에서 발견할  있다.  여기에는 기호적  추상을 위해 신체적인 것을 제거하는 추상화도 없고, 기호나 표현을 얼굴로 재영토화하는 일도 없다. 

 

3) 반기표적 기호체제 

기표적인 의미작용에 반하는 기호들로 구성되는 체제이며, 대표적인 예로 암호, 축구선수나 야구선수의 번호와 같이 수나 번호(명목수) 사용한 번호적 조직을   있다.  여기에도 숫자라는 기호가 사용되긴 하지만,  기호들은 구조화된 관계를 통해 의미작용을 만들어내는 그런 기표가 아니며, 기표의 형태를 취하면서도 사실은 기표적 기능을 깨거나 벗어나 있다는 점에서  기표적 기호라고   있으며, 의미작용에 반하는 기호라는 의미에서 -의미적인 기호라고도   있다.  번호적 기호는 그것을 만들어내는 표시 이외에는 어떤 것도 생산하지 않는다. 다양하고 유동적인 재분할을 표시하며,  자체로 기능들과 관계들을 수립한다.  총체를 이루기보다는 배열을 이루며, 수집보다는 분배를 행하고, 단위의 조합보다는 전달과 이행, 이동과 축적에 의해 작동한다. 번호적 기호는  자체로는 아무 의미도 없기 때문에 어디로든 움직이거나 넘나들 있는 있다. 이는 유목민적 이동능력이 기호의 의미를 제한하는 기표적 연쇄에서 자유롭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4) 탈기표적 기호체제

탈기표적 체제는 기표적 의미화의 중심에서 벗어나는 체제로서 나선환에서 벗어나는 탈주선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출발한다.  이는 익숙하게 길들여진 주어진 기표적인 권력에 복종하던 것을 그치고 그로부터 얼굴을돌리는데서 시작한다. 이러한 이탈은 통상 이성이나 이유’, ‘합리등과 같은 개념으로 설명되고 정당화되는, 기존의 지배적인 의미화를 배신하는 정염, 정열에 이끌리며 시작된다.  그에 따른 수난을 동반한다는 점에서 점염적 체제이다.  탈기표적 체제는 탈주선에 의해 시작되는 체제이고, 전제군주의 기표에서 벗어나는주체화의 에서 시작되는 체제(탈기표적 체제=주체화의 체제)이다.  기표적 체제가 전제적이고 편집증적인 속임수의 체제로서 해석이나 주석 형태로 다른 기표들을 공급하고 원환을 만들어 낸다면, 탈기표적 체는 권위적이고 주체적 내지 정염적 체제이다.  탈기표적인 체제에는 속임수가 없으면 배신이 있을 뿐이다. 어떤한 새로운 해석도 배신을 의미하며, 얼굴을 돌리는 것이  뿐이다. <> 모든 것이 담겨 있으며그것을 암송하고 복종하는 것이지 그것을 다양화하는 어떤 새로운 해석의 기표를 제공하는게 아니다. 탈기표적인 주체화의 기호체제에서  오직하나에 대한 더없이 기묘한 숭배 내포하고 있다. 

 

 주체화 체제의 얼굴

주체화 체제는 배신 혹은 얼굴 돌리는 것으로 시작된다.  주체화는 지층에서 벗어난 어떤 독립적인 주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지층을 달리하면서 주체가 될뿐이다.  이는 탈주선 내지 탈영토화의 선으로  다른 영토를 찾아 재영토화된다. 이런 점에서 주체화는 새로운 , 새로운  주체 예속되는 예속화 귀착된다. 이런이유로 탈기표적인 주체화 제제는 기표적인 체제와 다른 얼굴을 갖는다.  따라서 주체화 체제의 고유한 얼굴은 정면의 얼굴이 아니라 옆으로 돌린 얼굴이다. 이것은 배신을 촉발하거나 돌린 얼굴을 사로잡는  다른 얼굴과 짝이 된다. 돌린 얼굴을 바라보는 얼굴이기에  역시 돌린 얼굴이 되어야 한다.  결국 서로  마주보는 쌍의 돌린 얼굴이(예속화로 귀착되는) 주체화 체제의 얼굴이다.  마주본다는 것은 부르는 주체(대문자 주체) 대답하는 주체(소문자 주체) 호응하고  공명하여 하나로 포개진다.  이처럼 둘이지만 사실은  하나인주체를 분신 혹은 이중체라고 부른다.  이런  주체가 구성되는 것을  이중화라고 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  코기토의 의식적 이중체는 생각한다고  때의 언표행위의 주체였다면, 존재한다고  때의  생각과 의심의 결과 존재한다고 믿어도 좋은 것으로 언표되는 주체, 언표 주체이다. 언표행위의 주체와 언표주체로 이중화하고  양자를 동일시하는 방식으로 포갬으로써 이중화된 주체(이중체) 만들어 내었다. “남자라면 작은 일에 눈물을 흘려선 안된다 같은언표를 접하면서 우리는 두개의 주체가 포개지는 경험을 합니다.  남자라는 말은 문장의 언표주체(주어) 이다.  작은 일에 눈물을 흘려서는 안된다 이말을 듣는 남자 이다.  언표행위의 주체는  된다. “남자=라는 등식에 이끌려 주어에 나를 일치시키고 그것을 통해  문장을 나에관한 얘기로, 내가 의당 해야 바라고 생각한다. 언표행위의 주체인  언표 주체인 남자 포개지게 되고  언표에 예속화 되는거다.   언표행위의 주체를 언표 주체와 포개는 이런 코기토 식의  의식적 이중체는 어떤 지배적인 질서가 요구하는 규범이나 규칙에  자신을 동일시하는 메커니즘을 형성하게 된다.   근대적 법들은 원리상 모두 입법자로서 제정한 것이라고 함으로써,  스스로 따르는 입법자-노예라는 새로운 노예제도가 발명된것이다. 

 

 커플의 정염적 이중체는 마주보는 상이한  주체가 공명하여 서로에게 이끌리고 빠져드는 방식으로 동일화가 발생한다.   경우 주체화의 점은 커플의 이름을 부르고 그에 응답하는 식으로 정의된다.  트리스탄과이졸데의 이야기처럼 사랑의 형식으로 진행되는 커플의 이중체가 구성되는 것은 이름을 부르고  부름에화답하는 것이다.  사랑은 정염을 통해 서로를 분신(이중체) 만든다. 정신분석가와 환자는 전이에 의해 이중체가 구성된다.  환자가 의사와 동일시하거나 의사에게 자기감정을 투사하는 방식으로 언표행위의 주체와언표 주체의 전이가 발생하고 결국은 의사를 대신해서 환자가 자기 자신에 대해 해석하고 그에 필요한 것을연상하게 된다.  결국 정염적 이중화란 상이한  명의 주체가 공명하여 서로에게 이끌리며 하나의 이중체로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커플의 이중체는 결국 죽음으로 이어지는 검은 구멍으로 끌려들어가고 만다.  예속화를 내포하는 주체화란 결국 언표행위의 주체(S) 언표주체(s) 이중체가 형성되고  포개지는 과정이다. 이렇게 포개지는 것을 주체화의 결합적인 축이라고 하고,   주체(S1 S2 혹은 s1 s2) 이중체를 이루는 것을 주체화의 계열적인 축이라고 봅니다. 

 

 가지 잉여성

의식과 사랑이라는 두형태의 주체화 체제는 특정한 잉여성을 갖는다.  이것은  주관적 공명으로서,  의미화하는 기표적 체제의 잉여성인 객관적 주파수와는 다른 종류의 잉여성이다. 기호의 잉여성이란 다양한 명령어를 전달하는 음고, 음색, 볼륨,  등의 음향학적 특성을 통해 이루어진다.  높은 주파수와 대비되는 낮은주파수의 소리는 높은 주파수의 소리가 부각되고 의미화되기 위한 배경이 된다. 다른 기호들과의 관계에서배경으로 작용하는 것들의 주파수를 최소화했을  이는 기호가 새겨지는  내지 흰벽 된다. 주파수를통해 각각의 기호와 관련된 최대주파수와 다른 기호와 관련된 비교 주파수를 살펴볼  있다. 각각의 기호와관련된 최대주파수는  비명이나 절규는 주파수로 표시할 경우 가장 높은 값을 갖는다. 

 

탈기표적 체제의 잉여성이 공명이다. 기표적인 체제와 달리 주체화 제체는 주파수가 기재되는 벽이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양한 기표들을 향해 방사되는 중심의 기표나 다양한 의식들을 동일화하는 의식이 아니라 오직 코기토적인 이중체 안에서 진행되는 독신자의 자기의식뿐이거나 서로 마주보며 공명하는 커플의 검은 구멍만 존재할 뿐이기 때문이다. 대신 주체화 체제에서의 잉여성은 주관적 공명이다. 자기의식(Moi=Moi) 대한 최대공명, 이름들(트리스탄이졸데…) 대한 비교공명으로 구분된다. 주파수가 기재되는 벽은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의식과 정염을 끌어당기며 그것들을  공명시키는 검은 구멍이 존재한다. 

 

탈지층화의  

기표적 기호는 기호로 소급될 뿐이기에,  기호들의 집합은 기표자체로 소급될 뿐이기에, 기호계는  탈영토화의 높은 수준을 누리지만 주파수로 표시되는  상대적인 탈영토화다. 이러한 체계에서  탈주선은 부정적인것에 머물러있으며 부정적인 기호를 할당받는다. 주체화 체제가 긍정적 탈주선을 그리며 탈영토화를 절대적인 것으로 가져간다고 해서, 그것이 모든 모든 지층에서 탈주하는 탈지층화의 절대적 탈영토화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언표행위의 주체는 언표주체위로 포개져 재영토화되거나, 불리는 주체는 부르는 주체에 재영토화되어 결국은 죽금과도 같은 검은 구멍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의식이 나는 나야라는 자기동일성의 확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우리는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버리고 맙니다.  이로써 독신자-기계는 자폐증-기계가 되고 만다. 반면 라고 하는 존재는 내가 만나는 다양한 외부에 따라  기대고 있는 연기적 조건들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진다는 것을 알고 실행할  있을 , ‘라는 주체화의 점에서 시작한 탈주선은 모든 세계를 향해 확장되며, 모든 세계를 담을  있는 것이된다.    정해진 언표주체와 포개기 보다는 부재하는 언표 주체로 창안하는 ,  그리하여 부재하는 언표 주체로서   잠재성 전체를 향해 스스로를 개방하는 , 결국 잠재성의 전체가 되는 (‘만인-되기’) 주체화 체제에서 긍정적 탈주선을 획득하는 지점이  것이다.  무아(無我)!  

 

정염에서도 오직 자신의 커플에 사로잡힌 정염은 탈주선을 커플 안에 가두는 것이고, 빠져나갈  없는 구멍을 파는 것이다. 오면 오는 대로 받아들이고 가면 가는 대로 보내주는 , 애증의 감정에 끄달리지 않으며 모두를 사랑하는 , 사랑한다는 생각도 없이 사랑하는 ,  대상의 차별을 떠나 사랑하는  따라서 미움의 짝인 사랑이란 개념을 벗어난 사랑이다.  주체도 대상도 없는 사랑’, ‘무심한 사랑’, ‘절대적 사랑’,  절대적 코뮨주의이다.  

 

기호체제의 혼성과 변환 

대부분의 기호체제는  이상이 섞여서 이루어진  혼성적 체제이다.  혼성의 과정에서,  혹은 다른 배치 속에어떤 기호체제가 도입될 , 하나의 기호체제는 다른 기호체제로 변환되기도 한다.   예로 모세가 탈주선을타는 데서 시작되고, 신이 그를 호명함으로써 고유한 주체화의 체제를 형성했다.  신의 계율이라는 새로운 기표들을 수반하며,  기표들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의미화 체제를 동반한다.  모세는 이집트를 벗어나기 위해 유목민의 장인에게서 배운 대로 히브리인들을 번호적인 방식으로 조직했다. 반기표적 체제가 추가 된다. 이렇게  기호체제는 주체화 체제와 기표적 체제, 반기표적 제제가 섞인 혼성적 기호계를 이루고 있다.  조건에 따라, 배치에 따라 지배적 내지 일차적 위상을 차지하는 것이 있겠지만 조건이나 배치가 달라지면  또한달라진다. 따라서 기표적 기호계에 일반성 내지 보편성이라는 특권을 부여할  없다.  유목민들의 번호적인방식이 히브리인들에 의해 다른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와 같이 기호체제의 코드는 탈코드화의 여백,   잉여가치를 갖는다. 

 

하나의 기호계는 다른 기호계로 번역되거나 변환될  있다. 기호계의 변환을 다섯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있다. 첫번째 어떤 기호체계를 -기표적 체제로 옮겨놓는 모든 것을 유비적 변환이라고 한다. 무용극의 발레 연출자가 동화라는 문학적이고 기표적인 기호들을 신체의 동작이라는 전기표적 기호들로 변환시키는 것이다. 다른 예로  <주자가례>에서 유교의 교리를 구성하는 기표적 기호계가 라고 총칭되는 특정하게 코드화된 신체적 동작으로, 전기표적 기호계로 변환된다.  두번째 기표적 체제로 옮겨놓는 것을 상징적 변환이라고 한다. 정신 분선학에서 어떤 행동이나 동장, 꿈등을 성적인 상징이나 징표로 해석하고 의미화하는 것이다. 다른 예로 엘리아스의  <문명화 과정>에서 다룬 것처럼 궁정에서의 우연적이고 의례적인 행동이 매너가 되어가는 과정이다. 의례적인 행동이 문명의 기호가 되어가는 과정이었다. 세번째는 논쟁적 내지 전략전변환으로 어떤 기호계를 반기표적 체제로 옮겨 놓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암호이다. 예로 운동권에서 여러가지 이유로 인해 자신들이 사용하는 용어들을 최대한 약호나 외국어 등을 섞어 알아듣기 힘든 단어로 바꾸어 버리는 것이다.  네번째 의식적, 의태적 변환이다.  어떤 기호계를 탈기표적 기호계로 변환하는 것을 말한다. 흑인들은 백인들에게 배운 노래를 전혀 다른 스타일로 만들어 버린다. 블루스나 재즈, 혹은 흑인영가라부루는 것등이다. 뒤샹이 기성의 소변기에다 샘이라고 명명하고 전시장에 갖다 놓음으로써 새로운 종류의오브제를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다이어그램적 변환이 있다.  어떤 기호계를 절대적이고 긍정적인 탈영토화가 이루어지는 일관성의 구도 위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중국 선사들이 동문서담 식의 화두나, 도를 묻는질문에 고함을 지르는 방할 같은 것이다.  불교의 기표적인 기호계를 기호들이 통하지 않는 영역으로 옮겨놓는다. 불립문자, 언어도단 같은 말이 새로운 기호계가 언어적인 기호계와 무관한다는 것을 명시적으로 보여 준다. 

 

기호계의 성분들 

앞에서 살펴 보았던 네가지 기호체제의 개념은 혼성적 체제를 구성하는 발생적 요소들이다. 실제적인 기호계란 발생적 요소들의 복합체로 존재한다.  이를 기호계를 구성하는 발생적성분이라 한다. 두번째  변환적성분은  하나의 기호계가 어떻게 다른 기호계로 변하는지,  와중에 어떻게 변이가 발생하는지를 설명하는요소이다.   성분이 기호계에 독창성을 부여하거나 독창적 기호를 새로이 창조한다. 세번째 다이어그램적성분은   이상 형식화되어 있지 않는, 하나를 다른 하나에 결합할  있는 비형식적 틀을 갖는 기호-입자를추출하기 위해 기호체제나 표현형식을 포착하는 것이다. 이는 추상의 절정으로서 추상이 실재화하는 계기기도 하다.  다이어그램이란 기호이지만 기호형식에서 벗어난 기호 점에서  자체로는  표현도 아니며, 또한 물리적 내지 신체적 내용을 갖지 않는 다는 점에서 내용도 아니다.  표현의 층위는 물론 내용의 층위에서도 작동하는 힘과 변화의 양상을 표시하는 표현이다. 손의 동선을 표시하는 다이어 그램은 가장 경제적이 효율적인 동작이라는 목적에  따라 손이라는 물리적 신체의  움직임을 표시한다.  이는 얼굴-기호라는 표현의 층위만이 아니라 이미 -도구라는 내용의 층위까지 소재와 기능을 표시하는 기호이다. 그 자체로 표현도 내용도 갖 않는다. 다른 예로 원형 감옥의 도식, 반음계주의를 표시하는 음악적 다이어그램(글리산도의 다이어그램)이다.  '라고 하는 흐름의 추상기계도 있고 경락이나 혈도처럼 신체상의 기의 흐름을 표시하는다이어그램도 있다. 마지막으로 기계적 성분이다. 추상 기계와 결부된 기계적 배치를 의미한다. 추상기계들이 구체적 배치들 안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정확하게 표현의 특질에 뚜렷한 형식을 제공하기도 한다. 언표 행위의 배치인 기호계와 짝을 이루는 내용의 층위를, 언어학적인 기호들의 외부인 신체적이고,  물리적인 요소들의 배치들, 표현적인 기호체제가 내적인 성분으로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궁정의 매너는 궁정사회의 물리적 공간을 제공하는 저택을 포함하고, 범죄와 행형에 관한 언표 행위는 감옥같은 물리적 건물을 내적인 성분으로 포함한다는 것이다. 

 

 

길브레스  운동의 궤적

 

유머와 아이러니는 흔히 수사학적 기술에 속한다고 합니다.  들뢰즈는 여기서 더나아가 물음을 던지고 답을구하는 철학적 스타일의 자리를 유머와 아리어니에 부여 합니다. 이때 스타일이란 니체와 마찬가지로 사유나 철학의 내용과 상관적인 표현 형식을 뜻합니다.   단지 기교가 아니라 내용 자체를 끌고 가거나 내용을역으로 규정하는 사유의 표현형식이란 말입니다. 

 

일단 간단히 대비하면 아이러니는 묻거나 반문하는 형식으로 거슬러 올라가 답을 제시하는 기술이라면 유머는 답하거나 추종하는 형식으로 내려가며 물음을 던지게 하는 기술입니다. 철학에서 전통적으로 중요한 지위를 가졌던 것은 아이러니 입니다. 소크라테스식 아이러니라는 말이 보여주듯이 이는 소크라테스 라는 이름으로 시작하는 주류 철학의 스타일과 가까이 있습니다.  그에 반해 유머는 단지 희극적 성격이 예술이나 언행 흔히 농담 같은 극히 주변적인 지위만을 갖고 있었지요. 들뢰즈는 오랜전통의 아이러니에 반하여 유모의독자적인 지위를 부여합니다. 뿐만 아니라 반문의 형식을 취하는 아이러니의 부정적 방법과 대비되는 유머의 긍정적인 방법에 조금  높은 가치를 부여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면 너무 단순화 하는게  겁니다. 특히 아이러니의 위상이나 그에 대한 평가는 길지 않은 시기에 달라져 갑니다.

 

먼저 아이러니는 상대방이 하는 말에 대해 이유나 근거를 묻는 물음의 기술입니다.  이는 소크라테스의 변증술에서 즐겨 사용한 방법입니다. 가령 상대방에게 정의란 무엇인가 ?   물으면 상대는 정의로운 사람들이나 사례들을 들어 말합니다. 그러면 소크라테스는 다시 묻습니다. “그런 사례가 아니라  사례들을 정의롭다고 하게할 근거 내지,  원리가 무엇인가가 ?”  내가 묻는 것이지.  무엇이 그들이 정의롭다고 하게 하는가 ?   덕이나 아름다움  모든 핵심 개념에 대해 이런 물음을 던져 결국 상대방이 모르겠다고 말하게 만듭니다. “ 자신을 알라    자신의 무지를 알라는 명법을 이런식으로 상대에게 밀어 붙이는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무지에 내몰린 상대애게 정의란 무엇인지,  덕이란 무엇인지를 알려 줍니다.  처럼 물음을 통해좀더 상위의 답으로  근거 내지 원리로 올라가는 상승의 기술이 아이러니 입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원리를 제시하고 수용케 하는 기술인 셈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물음을 던지면서 항상 이런 식으로 말합니다.  내가  몰라서 묻는 건데,  현명한 자네가 알려주게  알다 시피 자신이 무지하지 않으면서 무지를 가장하여 묻는 것이고,  이로써 뭔가 안다고 생각했던 이들의 무지를 폭로하는 겁니다. 가장의 방법을 이용해 상대를 궁지에 몰아 넣고 그의 무지를 최대치로증폭시켜 드러내는 겁니다.  입으로 하는 말과 반대로 자신은 높이고 상대는 낮추는 방법이란 점에서 다시 한번 상승의 기술이라 하겠습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식 아이러니라는 말에는 조롱과 풍자,  면박이 함축되어있습니다. 그러니 상대방을 무력화 시킨 부정성의 힘이 아이러니의 동력이라 하겠습니다. 

 

들뢰즈는 데카르트나 칸트의 의심을 하고 물음을 던지는 방법 또한 이런 아이러니 개념에 속한다고 봅니다.  데카르트는 감각적인 것이나 학습된  모든 통념들에 대해 의문을 던집니다.  그런 의심을 통해 더는 의심할 없는 확고한 근거에 도달하려 하죠. 나라는  개인의 판단에 대한 의심을 통해 그의  모든 판단을  받쳐주는 가장 높은 원리를 찾으려는 것입니다. 칸트는 흄의 회의주의로 인해 진리의 가능성이 사라진  보이는상황에서 묻습니다.  나는 무엇을  수있는가 ? 나는 무엇을   있는가 ? 나는 무엇을 바랄  있는가 ?  자신의 능력에 대한 질문을 통해  또한 의심스러운 경험에 좌우 되지 않은 선험적 형식을 찾아 냅니다. 진리를 가능하게 해주는 형식을,  이들 뿐아니라 진리나 확고한  최고의 원리나 근거를 찾으려는 철학자는 모두 이런 의심과 물음을 통해 사유합니다. 모두 아이러니의 철학이지요. 

 

물음을 던지며 좀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 거기다 답을 적는 아이러니와 반대로 유머는 하라는 대로 충실하게따라 내려 감으로써  명령이나 규칙을 물에 빠뜨리는 기술입니다.  카프카의 소설  <선고> 이를  보여줍니다.   작품에서 아들 개오르그에게 장광설을 늘어 놓던 아버지는 끝내 아들에게 물에 빠져 죽을 것을선고합니다. 그러자 게오르그는  선고 대로 집을 뛰쳐나가  다리 위에서 강으로 몸을 던집니다. “그래도 부모님을 사랑했습니다라고 중얼 대면서,  명령에 극히 충실하게 따르고 있는 거죠.  당혹스럽게도 소설은거기서 끝납니다. 이거 뭐지 싶은 결말입니다.  그런데 만약 누군가에게 나가 죽어라 라고 했을때 그가 정말 나가 죽어 버린다면 어떨까요 ?  그의 죽음은그 명령에 대한 과도한 충실함을 통해 그렇게 말한 사람을 난감하게 하지 않을까요. 그런 명령 자체를 죽음으로 끌고 들어가지 않을까요. 

 

아이러니와 유머는 웃음을 이야기하는 상반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상승의 방법인 아이러니는 상대를바보로 낮추며 웃음을 야기 합니다. 소크라테스가 항상 그렇게 하죠.  하강의 방법인 유머는 자신을 바보로낮추며 웃음을 야기 합니다. 아이러니의 웃음이 고상한 자리를 차지한 자가 그렇지 못한 자를 비난하고 조롱하는 부정적 웃음이라면 유머의 웃음은 낮은 사람보다  아래로 내려가 고상하지 않은 세상을 긍정하는 따뜻하고 여유 있는 웃음 입니다. 

 

중국의 선승 다나는 이런 유머의 아주 멋진 사례를 제공합니다.  어느 겨울  다나 스님이 몹시  가난한 절에머물고 있었습니다. 날씨가 참기 힘들 만큼 추운데 장작이 없어서 불을 지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스님이 성큼 대웅전에 들어가  있던 목불중 하나를 들고와 도끼로 뽀개 불을 뗐다고 해요.   얘기를 들은 주지가 놀라 달려와 소리를 지릅니다.  아니 어쩌자고 불상을 태우는 거요   불상을 태워 사리를 얻으려고요” “ 불상을 태워 무슨 사리를 얻겠다는 거예요  그래요 그럼 저기 있는 불상 두개도 마저 가져다 불을 땝시다  

 

소크라테스라면 여기서 주지에게 불상이 무언지 ? 나무조각을 불상으로  받들게 하는 근거가 무언지 ?  부처란 무엇인지 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나는 그런  묻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지의 비난 어린 물음에부처나 고승들의 시신을 태우면 사리가 나온다는 불교의 통념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며 능청스레 대답을하고 있지요.  이를 통해 불상과 부처를 동일시하는 통념이 단번에 웃음거리가 되며 와해 됩니다. 통념에 따라가면서 통념에 반하는 지점으로 통념을 끌고 내려가는 거지요.  의미로 채워진 통념을 무의미로 밀어너어부처나 불상에 대해 혹은 불도나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하는 겁니다. 이런식의 계열화를 들뢰즈는 역설이라고 정의 합니다. 

 

여기서 다나는 상대방의 무지를 공격하며  높은 원리나 근거를 향해 상승하려 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목불을 태워 사리를 얻을 거라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자의 자리로 내려갑니다. 그렇게 스스로 바보가 됨으로써 비난을 자초 합니다.   비난에 대해서도 반문 하지 않습니다.  다만 사리가 안나온다면 날도 추운데 나머지목불 마저 장작으로 씁시다  라며 통념을 다시 따라 가자고  뿐입니다. 

 

아이러니는 상대가 말하는 것에 대해 반문하기 위해 자신이 무식하다고 하며 낮추지만 실은  똑똑하다고 믿는 상대를 조롱하고 반박하며 공격하는 방법입니다. 반면 유머는 상대의 비난 마저 그대로 받아 들입니다. “ 똑똑하다 더니  뭐야 아니라 맞아 내가 사실  미련하잖아 하며    뜨는겁니다. 그러나 그를 통해 상대의 비난으로 부터  빠져 나오기 힘든  속으로 끌고 들어가 같이 죽는 겁니다. 규칙을 너무 충실하게따르는 바보가 되어  바보 같은 언행을 하게 하는 규칙을 웃음 거리로 만드는 겁니다.  부조화와 모순을 반박하는  아니라 스스로  속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그러나 아이러니가 언제나 원리를 적립하는 방법만은 아닙니다.   또한 도덕이나 법등 삶을 지배하는 원리에 대해 반문하는 비판의 기술이   있습니다. 싸드의 작품 소돔 120일은 극단적 폭력을 위해 엄격한 규칙을 만들어 가학하는 자들을 통해 법이야 말로 폭군의 존재를 가능하게 해준다는 아이러니를 보여줍니다.  미덕의 불운의 주인공 지스티는 더할  없이 착한 여성입니다.  하지만 그로 인해 못된 놈들에게 시달리며 불행을 거듭하게 됩니다. 이를 통해 싸드는 반문하고 있는 겁니다. 착하게 살다가 이렇게 불행해지는 경우가 비일 비재 한데 정말 착하게 살아야 하는가 ?

 

소크라테스가  상위의 원리를 제시하기 위해 묻고 있다면 싸드는 그런 원리를 제시하지 않고 단지 물음만을 던집니다. 이처럼 감춰 놓은 답을 최고 원리로 제시하는  아니라 물음을 반복하며 정작 문제가 되는게무엇인지를 드러내려   아이러니는 비판의 방법이 됩니다.  그래서 들뢰즈는 아이러니는 문제들을 개선하거나  문제들의 조건을 규정하는  필요한  미분화들을 수행하는 문제와 물음에 기술이고 이념과 결부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이념이  전체를 근거 짓는 원리인지 아니면  없는 물음에 반복인지가 소크라테스와 싸드의 차이라고 하겠습니다. 

 

싸드가 아이러니에 비판적 기술을 보여 준다면 마조흐는  유머의 비판적 기술을 보여 줍니다. 마조히스트란고통에서 쾌락을 얻는 자란 통념을 비판합니다. 쾌락을 추구한다면  고통의 대가로 지불하게 될거야 라는 것이 법의 명령임을 알게 되었을   쾌락의 댓가가 고통이냐고 반문하는 아이러니스와 반대로 마조히스트는 쾌락을 위해 고통을 청하는 자라는 겁니다. 우리에게 쾌락을 금지 해왔던  법의 지고 성이 모든 쾌락에가능성을 부여해주는  행동함으로써 처벌이란 위협을  통해 욕망의 충족을 금지 하던 법이 처벌 후에는 당연히 욕망의 충족이 뒤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는 법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의 아이러니가 통념에 대한 물음을 통해 올바른 지식,  원리에 입각한 자식으로 밀고 올라가는 상승의 기술이라면 유머는 규칙에 대한 과도한 추종을통해 통념을 역설로 무의미로 내려가는 하강의 기술입니다.  아이러니에게 중요한 것이 물음이라면 유머에게 중요한 것은 과도함이나 가장 같은 방법을 써서  얻어지는 강도 입니다.  당혹으로 밀어 넣는 강도가 없다면 규칙에 복종하는 것은 유머가될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들뢰즈는 아이러니는 이념으로 상승하는 물음과 문제의 기술이고,  유머는 개체를 향해 하강하는 감성적 유희의 기술이라고 말합니다. 이로써 아이러니는 유머와 더불어 비판의 방법중 하나가 되고 이념과 강도라는 차이 철학의 핵심 개념과 연결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들뢰즈는 끝내 양자를  동열에 놓을 수없다고 보는  합니다. 차이와 반복  이듬해에 출간된 의미의 논리에서 그는 아이러니의 모든 형상의 공통된 점은 그것이 특이성을 개체나 인칭에  가둔다고비판합니다. 이데아의 보편성도, 코기토도, 선험적 형식의 보편성도 모두 개체로부터 시작해 개체로 되돌아간다는 겁니다.  반면 유머는 전개체적이고 비인칭적인 특이성을 표현하면서 동시에 모든 의미가 사라지는역설적 표면을 주파하는 유목적 특이성과 우발점과 손을 잡는 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가 쉽지요.  가령 수용시설에 개같은 처우에 대해 내가 개냐?” 라며 항의하는 사람은 나라는 개인에서 시작해 인간이란 보편성으로 상승하고자 하며 이로써 나라는 개인에게 인간다운 처우를 해달라고 요구하는 겁니다. 아이러니의 방법으로 비판하는 것이지요. 이로써 그는 마땅한 개인적 삶으로 인간적 처우로 되돌아 가려 합니다. 

 

반면 그런 처우에 대해 그래 나는 개다. 그러니 나는 개처럼 행동하겠다면서 소리지르고 규칙을 전혀 모르는 행동하고 개처럼 아무곳에서 변을 보고 하는 항의의 방법도 있습니다.   라는 개체의 자리로 내려 감으로써 그는 개라는 말로 표현된 전개체적 특이성과  인격성,  인칭성을 증폭시켜 자신이 속한 장의 특이성을 드러내고 있는 겁니다.  개나 인간의 통념에 반하는 역설을 통해 무의미의 물결이 범람 하게 하는  겁니다.   특이성 인근에 우발점을 불러들여 개와도 인간과도 다른  새로운 삶의 가능 지대를 열고자 하는 겁니다. 그러니  아이러니와 유머는 상이한 삶의 방법,  상이한 정치의 방법이기도 하다 하겠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말과 목소리를 구별하면서 인간만이 말을 갖고 있다 한적이 있습니다. 항의의 소음을  목소리로 몰아내려는 이런 시도에 대해 자신의 항의가 로고스 임을 주장하는 것이 아이러니의 정치학이라면  자신의 말을동물의 목소리로  끌고 내려가 동물 되기를 하려는 시도는 말과 소리에 새로운 관계를 창안하려는 유머의 정치학 이라고 하겠습니다.    

 

크로노스와 아이온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신의 이름입니다. 크로노스가 시간의 신이라면 아이온은 우주의 신, 하늘의 신인데 원이나, 비비꼬인 뱀의 몸으로 상징화 되어 있습니다. 순환의 시간, 되돌아오는 시간을 뜻한다고 합니다. 영원회귀의 시간을 상징한다고 하겠습니다. 의미의 논리에서 들뢰즈는 이둘을 속성을 달리하는 두가지 시간개념으로 재 영유 합니다.

흔히 아이온이 되돌아 오는 시간의 원으로 표상되기에 이에 대비하여 크로노스는 직선의 시간으로 표상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들뢰즈는 이를 뒤집어 크로노스가 원환적 시간이라면 아이온은 직선적 시간이라고 합니다. 니체의 영원회귀를 계절적 순환이나 되돌아 오는 시간으로 해석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사실 기독교적 종말 개념이 시간 관념에 끼어들기 이전에 시간이란 계절적 순환 같은 것이었습니다. 달이나 해를 주기를 순환하는 시간이 그것입니다. 이것이 크로노스의 시간입니다. 그러니 이건 원으로 표현되는게 적절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들뢰즈에게 아이온은 사건의 시간이고 영원회귀의 반복과 대응하는 시간입니다. 미리 말하자면 반복할때 마다 다른 과거와 미래로 뻗어 나가는 시간의 직선이 아이온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무한히 많은 방향으로 열려 있는 과거와 미래를 잇는 사건의 시간이 그것입니다.

크로노스는 크로놀로지가 표현하듯 연대기적 시간, 신체적 시간입니다. 우리가 익숙한 시간이 그것입니다. 사물의 신체 심층을 지배하는 시간입니다. 자연적 시간이 크로노스에는 흔히 과거 현재 미래라는 세개의 시제가 있다고들 합니다. 하지만 지나간 현재이고 미래는 다가올 것이라고 예상되는 현재라는 점에서 현재의 연장 입니다. 그래서 크로노스의 관점에서는 오직 현재만이 시간속에 실존한다고 합니다. 아이온은 사건의 시간, 생성의 시간 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사건이란 사물이 아니라 그것의 계열화로 발생하는 표면효과 입니다. 따라서 아이온은 계열화 되는 사물사이 혹은 상이한 사물의 상태 사이에 있습니다. 그 상태 중간에서 한쪽은 과거, 다른 한쪽은 미래로 두방향으로 분할 되는 것이 아이온입니다. 변화와 생성이 발생하는 한 현재 상태 마저도 과거와 미래로 무한히 분할 하는 시간이 아이온 입니다.

간단한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빵을 굽다는 밀가루 반죽과 구어진 빵이라는 두 사물 사이에서 진행되는 사건입니다. 한 사물의 두상태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반죽과 빵은 사물의 상태를 지칭하는 명사 입니다. 빵을 굽다는 반죽도 빵도 지칭하지 않습니다. 양자 사이에서 발생하는 사건을 표현하는 동사입니다. 굽기 전에 반죽에도, 구어진 빵에도 시간이 관통하여 흘러 갑니다. 그게 크로노스의 시간입니다. 빵을 굽다라는 사건의 시간은 반죽과 빵사이에 있습니다. 반죽은 그 사건 이전에 속하고, 구어진 빵은 사건 이후에 속합니다. 굽다, 구워지다라는 그 사건은 이미 반죽이 아니고, 아직 빵도 아닌 중간 어딘가를 통과하고 있습니다.

굽기를 중단하면 구워지다 만 상태가 새로이 현재 상태로 출현합니다. 다시 굽기를 계속한다면 시간은 그상태를 벗어나며 흘러 갑니다. 그렇게 흘러가기를 중단하지 않아야만, 현재 상태를 벗어나길 멈추지 않아야만, 구워지다 굽다라는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굽다라고 말할때 굽다만 빵이라는 말을 할 수 없습니다. 굽다만 빵이라고 말할때는 굽다라고 할 수 없습니다. 현재의 상태를 말하려 하면 사건은 사라지고, 사건에 대해 말하려 하면 현재 상태는 사라집니다. 날아가는 화살이 어느지점에 있는지를 말하는 순간 그 화살은 날지 않고 멈추어 버리게 됩니다. 멈춘 화살에겐 현재만 있습니다. 날아가는 화살에겐 현재가 없습니다. 방금 떠나온 과거와 막 도착하려는 미래가 있을 뿐입니다.

이처첨 아이온은 변화와 생성의 시간입니다. 그러나 이것 만으로 아직 아이온에 대해 충분히 말했다 할 수 없습니다. 아이온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이처럼 물리적으로 실행된 사건이 아니라 잠재적인 사건에 대해 다룰때 드러납니다. 아이온이란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은 시간이고, 아무것도 발생하지 않은 사건과 대응하는 시간 이기 때문입니다.

일단 들뢰즈의 사건개념이 잠재성과 짝을 이룸을 강조 해야 합니다. 이는 들뢰즈의 사건 개념이 다른 이들과 어떻게 다른 가를 아는데 중요합니다. 사건이란 개념은 대개 현행적인 발생을 지칭합니다. 뉴스나 신문에 나오는 사건들은 모두 현행적으로 발생한 것입니다. 사람이 죽고 화재가 발생하고 다리가 무너지고 등등 모두 물리적으로 실행된 사건입니다. 시인들에게 오는 시적 사건도 그렇습니다. 시가 시인에게 다가와 손으로 글씨를 쓰게 하는 일이 그것입니다. 철학적 개념에서도 그렇습니다. 사건을 철학적 개념으로 가장 먼저 사용했던 철학자는 하이데거 입니다. 하이데거에게 사건이란 일상적인 삶에 덮쳐와 그동안 존재의 의미를 망각하고 살았음을 경악속에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가령 개발을 위해 파헤쳐진 고향의 산천을 보고 경악하여 하던 일을 접고 다른 삶을 살도록 결단하게 하는 사건, 그런 것입니다. 따라서 하이데거에는 덮쳐 오지 않은 사건, 발생하지 않은 사건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바디유의 사건 개념도 마찬 가지 입니다.

그러나 들뢰즈에게 사건이란 차라리 이념적이고 잠재적인 것입니다. 이념적이란 말은 신체적이란 말과 대비 되기도 하지만 반복가능한 보편성을 갖고있음을 뜻하기도 합니다. 빵을 굽다, 칼을 갈다 같은 동사는 물론 사랑이나 혁명같은 명사로 표현되는 사건들도 모두 반복 가능한 보편성을 갖습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뿐만아니라 옆집 고양이에게도, 시베리아의 늑대에게도 커지다 라는 사건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사랑에 크게 실패한 사람도 아직 시작도 못해본 사람도 모두 사랑에 대해 말할 수 있고 소련이 망한 이후에도 여전히 혁명을 꿈꿀 수 있습니다.

아직 경험하지 못한 사람도 실패이후 다시 꿈꾸는 사람도 아직 현행화 되지 않은 사건입니다. 그런 사건을 말한다 함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건을 말하는 것입니다. 잠재적인 것으로서의 사건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처음이라면 어떻게 다가올까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릴 것이고 실패했다면 다음엔 다르겠지라며 기대하는 마음으로 기다릴 것입니다. 잠재적 사건이란 어떤 조건과 만나는가에 따라 아주 다르게 펼쳐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시인에게 찾아오는 시적 사건이나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의 사건은 유일무이한 고유성을 갖겠지만 들뢰즈가 말하는 사건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건이란 주어를 바꾸어도 반복 가능하고 한사람에게도 반복 가능한 것 입니다. 시인이나 하이데거의 사건이 이미 닥쳐온 사건에 속하다면 들뢰즈의 사건은 기다림에 속합니다.

아이온에 대한 가장 흔한 오해중에 하나는 시적 사건이나 존재의 사건처럼 어떤 전면적 변화가 발생하는 어떤 특별한 순간 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들뢰즈에게 사건의 시간은 시적 시간도 놀라게 하는 전면의 시간도 아닙니다. 그것은 사건의 반복 가능성과 관련된 시간이고 심지어 실행되지 않은 사건에 속하는 시간입니다. 그것이 순간이라 하기도 하지만 그 순간은 자리를 갖지 않습니다. 아이온의 선에서 끊임없이 자리를 옮기며 선 전체를 주파합니다. 반복가능성 속으로 기다림 속으로 누군가를 불러 들이는 모든 잠재적 사건의 시간이 순간 이란 말입니다.

이러한 순간은 역설적 심급 내지 우발점이라고 들뢰즈는 말합니다. 이말의 의미는 잠재와의 선을 따라 갈때 비로소 드러납니다. 들뢰즈는 잠재적 사건을 물리적으로 현행화된 사건과 대비합니다. "사건을 고찰하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는 페기(Peguy)의 말을 빌어 이를 각자 '생성'과 '역사'란 개념과 짝을 짓습니다. 현행화란 사건을 따라 가면서 역사속에서의 그것의 실행을 기록하는 과정이라면 잠재화란 사건을 거슬러 올라가 생성속에 자리잡듯 그속에 자리잡는 것이라는 겁니다. 가령 소련이나 중국에서 역사적으로 펼쳐진 혁명의 과정을 따라가며 기록하는 것이 사건을 따라 가는 것입니다. 반면 그런 혁명을 두고, 혁명이란 무엇인지를 다시 물으며 혁명이란 사건의 잠재성으로 다른 순간에 다른 곳에서 펼쳐질 사건들로 밀고 올라가는게, 사건을 거슬러 올라가 생성으로서의 사건속에 자리를 잡는 것입니다.

그런데 잠재화란 현행화 된것을 필름 되감듯 애초에 출발점으로 되돌아 가는게 아닙니다. 현행화된 사물의 상태로 부터 잠재적인 것으로 올라갈때 거기서 발견하는 것은 전혀 다른 현실 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발점으로 다른 규정 가능성들로 열린 생성의 지대로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성의 지대란 동시에 젊어지기도 하고 늙어지기도 하며 사건을 이루는 모든 특이성을 겪어 보는 것이 가능한 곳입니다. 사건을 거슬러 간다함은 혁명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속에서 혁명의 관념 자체를 바꾸며 아주 다른 혁명의 가능성들이 분개하는 지점으로 감을 뜻합니다. 혁명에 대한 기존의 의미 모두를 무의미로 되돌기에 수많은 가능한 다른 의미들이 출현하는 지점이 그곳입니다. 혁명에 반한다고 믿던 것들 마저 혁명 속으로 밀려 들어가는 역설적 계열화가 거기서 필요하게 됩니다.

그렇게 현행화 된 역사속에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듯 보이지만 잠재화된 사건속에서는 모든 것이 변합니다. 잠재적 규정의 최소치와 우발점이 연결되면서 모든 사건화를 향해 열리기 때문입니다. 규정된 의미는 수 많은 다른 의미를 함축하는 무의미로, 역설로 되돌아 가고 특이점을 둘러싼 우발점은 모든 사건화를 향한 선을 그릴 수 있게 해줍니다. 사건의 순간이란 역설적 심급이고 우발점이란 말은 바로 이런 뜻입니다. 따라서 사건의 시간은 사건이 발생하는 현행적 시간이 아니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시간입니다.

모든 가능한 사건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상이한 의미 상이한 방향으로 사건 하나에 동시에 뻗어나가는 시간 그것이 바로 사건의 시간입니다. 의미의 논리에서 아이온이라고 명명했던 이 시간을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는 사이 시간 이라고 명명합니다. 두순간 사이에 시간이 있는 것이 아니다. 사건이 바로 사이 시간이다. 사이 시간이란 사이에 속한 시간이고 사이로서의 시간 입니다. 과거와 미래로 무한히 분할되는 사이로 우발 점이 끼어드는 시간이며 상이한 방향의 선들이 동시에 붕괴되는 시간입니다.

이런 시간 개념에 영감을 준 것은 보르헤스(Borges) 입니다. 보르헤스는 <바빌로니아의 복권>에서 모든 추첨의 단계에 우연을 개입시킬 복권에 대해 말합니다. 가령 상금을 줄 건지, 벌금을 매길 건지, 상금이면 상금을 얼마나 줄건지, 그걸 정하는 사람은 누구로 할건지, 그 사람을 어느 지역에서 뽑을 건지, 그 지역을 뽑을 기준은 무엇으로 할것인지 등등 추첨으로 정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추첨의 횟수는 무한히 거듭될 수 밖에 없습니다. 무한히 많은 우연이 영원히 끼어드는 겁니다. 그렇게 우연히 끼어드는 사이가 바로 사이 시간입니다.

아이온은 사이 시간 입니다. 수많은 방향으로 열린 우발점에 따라 다르게 현행화될 사건들이 거기에 있습니다.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은 시간이지만 일어날 모든 일들로 열린 시간이고 그 사건들을 암시하는 시간이며 사건들을 기다리는 시간입니다. 암시로 남은 사건, 그 암시에 홀린 기다림이 거기에 있습니다. 사건의 철학 그것은 거대한 암시로서의 철학입니다. 철학이란 그런 암시를 담은 개념을 창안하는 작업이라는게 들뢰즈와 카타리의 생각입니다. 현행화를 거슬러 사이 시간속에서 암시의 유혹을 던지는 사건의 개념을 발명하는 것이 철학입니다. 철학은 언제나 사이시간이다. 그러니 아이온은 철학의 신이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들뢰즈에 따르면 스토아 주의자들은 한 사물에서 다른 사물로 이어지는 인과의 연쇄를 운명이라고 명명했습니다. 크로노스는 그 물질적 인과의 연쇄를 지배하는 신입니다. 물론 운명을 거역하는 미친 크로노스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온은 미친 크로노스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다시 말해 운명을 긍정하면서도 필연의 힘에서 벗어날 수 있는 빈칸이 무한히 많이 있음을 알려줍니다. 과거와 미래로 무한히 갈라지는 모든 순간들이 사물들에 표면 모두가 다른 사건화를 향해 열린 잠재성으로 암시와 기다림의 사건으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렇기에 지극히 낮은 확률에도 반복되는 실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 다시한번 하며 주사위를 던지게 되는 것입니다. 빵을 굽는 이도 공을 차는 이도 공동체를 만드는 이도 혁명을 꿈꾸는 이도 말입니다. 다른 반복가능성으로 열린 차이가 거기에 있기에 그 주사위 던지기는 영원히 계속될 것이라고 들뢰즈는 믿고 있습니다. 영원회귀란 그런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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