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은 기호에 대해 다룬다. 기표를 의미화하는기호 이론을 기호학이라고 부른다. 일반적인 기호학에서는 기호를 다시 기표로 전환 한다. 이는 소쉬르나 바르트의 기호학적 관점이다. 기호라는 것은 어느 사회집단이 인위적으로 약속한 '표시와 의미의’ 결합이다. 기호는 ‘표시’와 ‘의미’가 하나가 되어 비로소 진정한 의미가 생긴다. ‘표시’ 와 ‘의미’ 사이에는 어떠한 자연적, 내재적 관계 없다. ‘의미하는 것’과 ‘의미 되는 것’의 기능적 관계일 뿐이다. 장기를 두려고 하는데 졸이 하나 없는 경우 바둑알을 장기판에 놓는다고 했을 때 장기를 두는 사람이 ‘귤껍질’을 졸로 ‘약속’ 하면 장기는 계속진행된다. 그러나 귤 껍질과 졸 사이에는 그 어떠한 자연적이고 사회적인 결합이 없다. 자의적인 결합이다. 이것이 ‘기호’의 본질이다. ‘귤 껍질’과 같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표시’를 의미하는 것을 ‘시니피앙’으로, 장기의 졸의 작용을 의미되는 것을 ‘시니피에'라고 불렀다. 기호란 의미하는 것과 의미되는 것의 세트이며 이둘을 합친것이 기호라고 한다. 언어 뿐만아니라 복장, 먹는 요리, 좋아하는 음악, 타고 다니는 자동차, 살고 있는 집 등이 모두 기호로 가능하다. 기호학은 우리 주위에 있는 것이 기호가 될 수 있는지, 그 것이 어떤 메시지를 어떤 방식으로 발신하고 이떻게 해독되는지 등을 규명하는 학문이다.
롤랑 바르트는 기호의 자의성에 관한 주장을 비판적으로 계승해서 신화 기호학을 창안하였다. 그는 1차 체계의 언어를 대상언어라고 부르며, 2차 체계의 언어를 메타언어라고 부른다. 신화학자가 다루는 대상은 바로이 메타언어, 즉 2차 체계의 언어이다. 신화의 출발점으로서의 1차 체계의 언어인 대상언어에는 문자와 이미지가 모두 포함된다. 예를 들어 언어, 사진, 회화, 광고, 의식, 사물 등은 모두 신화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그 예로 '파리 마치’ 잡지의 표지에 인쇄된 사진을 언급하는데, 이 사진은 프랑스 군복을입은 한 흑인 소년병사가 거수경례를 하고 있는 장면 을 담고 있다. 대상언어 체계(1차 체계)의 차원에서 볼 때, 이 이미지의 의미는 ‘프랑스식 거수경례를 하고 있는 흑인 소년 병사’이다. 하지만 메타언어 체계(2차 체계)로서 즉 신화적 기호로서의 이 이미지의 의미는 '인종차별 없는 위대한 프랑스를 위한 순수한 충성’이다. 신화의 기능은 특정한 세계관을 자연화시키는 것에 있다. 신화가 특정한 세계관을 자연화시킨다는 것은 곧 신화가 ‘비정치화된 파롤’를 만들어 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달리 말해 신화는 언어 활동에 권력을 기재하는 것이다. 롤랑 바르트는 신화의 기능이 기호에 권력을 기재함으로써 권력을 끝임없이 재생산하는 것에 있다고 주장한다. 신화는 권력에 결부된 역사를 자명한 것으로, 즉 자연적인 것 으로 바꾼다. “현실의 거짓된 자연스러움”으로서의 신화는 역사적인 것을 자연적인 것 으로 전도시킨다.
라캉은 무의식이 언어처럼 구조화 되어 있다고 한다 구조화된 언어들이 갖는 힘을 ‘기표의 물질성’이라고한다. 기표 내지 언어를 의미하는 상징들은 구조화된 어떤 질서를, 그 나름의 세계를 이룬다. 우리가 말하고 사유하기 위해선, 혹은 무의식이 작동하기 위해서 그 ‘상징적인 것의 구조화된 질서’ 속으로 들어가 그 질서와 구조에 따라야만 한다. 이처럼 ‘상징적인 것의 구조화된 질서’를 상징계라고 한다. 통상 언어학적 모델을 따르는 기호학에서 상징계라는 개념으로 기표적인 기호를 유일하고 특권적인 기호형태로 간주한다.
기호체제의 개념
들뢰즈와 가타리는 화용론이라는 입장에서 기호를 이야기 한다. 화용론은 외부적인 요건에 의해서 기호 의미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는 관점이다. 표현 형식이 언어적 형식을 취할때 그것을 기호체제라고 정의 한다. 하나의 기호체제가 하나의 기호계를 이룬다. 기호계는 특정한 질서를 이루는 기호들의 집합을 의미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구조라는 개념에 비판적이며 영토성 이상으로 탈영토화의 첨점을 강조하고 있다. 상징계와 달리 기호계는 인간이 정상적인 삶을 살기 위해 선택할 수 밖에 없는 ‘인간조건’이 아니다. “표현형식에는 그 나름의 다양성이 있으며, 이 형식들에는 그 나름의 혼합이 있으므로 ‘기표’의 형태(형식)나 체제에 유난스런 특권을 부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기호계를 기호체제로 보는 것은 기호들의 집합이 하나의 ‘질서’ 내지 ‘세계’일 뿐만 아니라, 그것을 하나의 세계로 질서 지우고 유지하는 권력의 배치라는 것을 표현하기위한 것이다. 체제란 말은 정치학 영역에선 흔히 ‘정권’이라고 번역되던 단어이다. 기호체제란 기호계적인 권력이 작동하는 ‘정권’임을 뜻한다.
네가지 기호체제
1) 기표적 기호체제
의미화 작용이란 기표와 기의의 상호연관을 표시하는 말로, 기표들의 상호작용 내지 놀이를 통해 기표에 어떤 기의가 할당되는 것을 말한다. 4가지 기표 체계는 기표적 기호체제, 전기표적 기호체제, 반기표적 체제, 탈기표적 기호체제이다. 기표적 기호체제에서 어떤 기호가 연관된 다른 기호들과의 관계속에서 그것에 고유한 의미를 획득하는 것을 의미화라고 한다. 이런 방식으로 작동하는 기호체제를 기표적 기호 체제라고 한다. 연관된 다른 기표들과의 관계 속에서 기의를 획득하게 된다. 이런 의미화란 기표들의 소급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의미를 만들어 내는 특정한 방식을 내포한다. 즉 여기서 각각의 기호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으며, 이는 언제나 기표일 뿐이다. 기호로 소급되는 기호는 불확실함에 사로잡히지만 능력을 갖는 것은 기호의 연쇄를 만들어 내는 기표다. 하나의 기표가 다른 기표들로 소급 되고, 이런 소급은 기표 아닌어떤 의미가 어디선가 등장하지 않는 한 무한히 반복될 수 밖에 없다. 기표는 기호로 넘쳐흐르는 기호다.
말하고자 하는 것이란 점에서 ‘의미’는 사전에 존재하는 어떤 순수한 것이 아니며, 그 자체로 항상-이미 기표적인 관계 안에 있을 수밖에 없다. 해석은 의미화에 종속되며 그 점에서 기의가 그 나름대로 기표를 재 부여하지 않는다면 기표는 어떠한 기의도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은 정신분석적 사제들의 발견이었다. 기표적인 체제에서 기의란 개인 의지의 외부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그 자체로 물질적인 힘을 갖고 있는 ‘실재’ 내지 ‘세계’라는 것이다. 그래서 라캉은 기표들이 만드는 이런 세계(질서)를 ‘상징계’라고 불렀고, 기표들의 질서가 갖는 독립적인 힘을 ‘기표의 물질성’이라고 불렀다. 기표적인 기호의 세계 안에서 우리는 자신의 욕망을 표현하기 위해, 이미 그 자체로 질서화된 기표들의 힘을 빌릴 수 밖에 없고, 이로 인해 의미와 기호사이에 근본적인 분열이 발생한다고 말한다. 이를 라캉은 소외라고 한다.
기표로만 무한히 소급될 뿐이라면 그래서 기표들이 기의 위로 미끄러질 뿐이라면 기표들이 기의(의미)를 갖는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 정신분석은 그런 기표들을 어머니 혹은 남근에서 찾는다. 이는 모든 것을 성욕이나 오이디푸스적 욕망의 징후로 본다는 것을 뜻이다. 오이디푸스적 욕망을 표현하는 ‘기호’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점에서 정신분석학은 모든 것을 성욕과 결부된 기호로, 그 자체만으론 무의미한 기표로 간주하는셈입니다. 라캉에게 최초의 기의는 자체론 기표를 갖지 않기에 ‘말할 수 없는 무엇’이며 다만 그에 상응하여어떤 기표가 들어설 수 있는 ‘빈자리’요 ‘결핍’일 뿐이다. 대상 a는 일차적으로 이 근원적인 결핍 내지 빈자리를 표시하는 개념이다. 때론 소문자 파이라고도 부르는 이 실재계의 빈자라는 그에 상응하는 기표를 만들어 낸다. 이를 그는 대문자 파이라고 부른다. 이는 남근이라는 기표이다. 남근이라는 기표가 다른 기표들이잠정적이나마 기의를 갖고 고정되게 만드는 특권적인 기표이며 특권적인 중심 역할을 한다.
그 중심엔 전제군주의 기표, 전체군주처럼 도든 기표들의 자리를 할당하고 그것의 의미를 여탈할 수 있는 그런 기표가 자리잡고 있다. 기표인 남근의 근저에 채워질 수 없는 빈자리만 있기 때문에 이러한 의미의 할당은 잠정적인 것에 불과하고 일시적으로 ‘봉합’된 것에 불과하다. 이로 인해 욕망의 기표들은 끊임없이 다른기표들로 치환 된다. 이를 욕망의 환유연쇄 라고 한다. 여렵겹의 기표 연쇄들은 모두가 남근 내지 전제군주의 기표로 환원가능하다. 기표가 소급되는 양상은 본질적으로 하나의 중심적인 기표, 특권적인 기표로 환원되는 것으로 귀착된다. 이러한 환원가능성으로 인해 기표적인 기호체제를 “편집증적인 체제”라고 부른다.
새로운 원환이 펼쳐지고 낡은 원환이 다시 만들어 질 수 있도록 기표를 재공급해야 한다. 다시 말해 의미화에복무하는 이차적인 메커니즘이 필요하다. 주석 내지 해석이 바로 그것이다. 주석이나 해석은 그 자체로 다시해석과 주석의 대상이 되고 이런식으로 중심의 기표를 전하는 다양한 원환들이 증식된다. 해석은 무한히 계속되고 그 자체로 이미 하나의 해석이 아닌 어떤 해석자도 만나지 못한다. 기의는 기표를 끊임없이 다시 제공하며, 기표를 계속하여 보충하고 생산한다. 원환들의 중심에 있는 전제군주의 기표, 혹은 그것에 상응하는어떤 ‘종국적 기의’는 그 모든 기표들의 연쇄를 통해 전달되는 ‘잉여성’이며 ‘잉여적인’ 기표 그 자체라고 할수 있다. 기호가 다른 기호로 무한히 소급된다고 말하는 것이나, 기호의 무한한 전체가 지고한 기표로 소급된다고 말하는 것은 동일하다.
언어적인 기호, 혹은 기표적인 기호는 탈영토화되어 있는 기호이다. 기표란 그 자체론 아무의미도 없다는 것은 그것이 탈영토화된 기호임을 보여 준다. 탈영토화된 기호인 언어나 기표는 얼굴(표정)로 재 영토화된다. 목소리가 나오는 곳은 얼굴이다. 기표에 실체를 부여하는 것은 표정(얼굴)이며, 해석할 것을 제공하는 것도표정이다. 해석이 그 실체에 기표를 다시 부여할 때에도 변하는 것은 그리고 그 특징을 변화시키는 것은 바로 표정이다. 기표는 언제나 안면화 된다. 언어 활동은 언제나 안면성이란 특질을 수반할 분만 아니라 얼굴은 잉여성 전체를 응결시킨다. 목소리가 나오는 곳은 얼굴이다. 안면성은 이 모든 의미화 및 해석의 총체 위에 물질적으로 군림한다. 전체 군주의 얼굴, 그것은 “하지 않으면 죽어”라는 명령어를 발화하는 입이고, 전제군주의 기표, 그것은 전제군주의 얼굴로 재영토화된 수많은 기표들의 실질적인 의미이다.
얼굴(표정)이 지워질때, 얼굴의 특징이 사라질때 우리는 분명히 다른 체제에 들어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저자들은 사형수는 무엇보다 우선 그의 얼굴(표정)을 잃은 사람이라고 한다. 얼굴을 살피기를 중단한 자의형상이다. 이때, 탈주자의 탈주선은 새로운 여행의 선, 새로운 창조적 선을 그리며 시작되지만, 기존의 체제는 그들이 설정한 금지와 부정의 벽을 넘는 순간 사형을 선고하고 범죄자의 형상을 부여한다. 사형수는 종국적인 말이 결코 아니며, 반대로 배제를 향해 내딛는 첫걸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해 신이 부과하는 탈주자의 부정적 형상이다. 탈주 자체가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탈주자에게 내리는 전제군주의 사형선고가 그에게 부정적 형상을 덮어 씌운다는 것이다. 기표적인 기호체계가 우리의 삶을 항상-이미 사로잡고제한하며 규정하는 체제라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우리가 빈번하게 만나고 부딪치는 체제임이 분명합니다.
2) 전기표적 기호체제
원시적이라고 간주되는 전 기표적 기호계로서 이는 기호 없이 작동하는 ‘자연적’ 코드화에 훨씬 가깝다. 여기서는 어떤 것도 표현의 유일한 실체로서 안면성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기의의 추상에 의해 내용의 형식을제거하는 경우도 전혀 없다. 신체성, 몸짓성, 리듬, 춤, 제전의 형태가 이질성 안에서 음성적 형태와 공존한다. 기호 내지 기표들의 인위적인 코드화 대신에 ‘기호없이 작동하는 자연적 코드화’를 하나하나의 동작이나행동에서 발견할 수 있다. 여기에는 기호적 추상을 위해 신체적인 것을 제거하는 추상화도 없고, 기호나 표현을 얼굴로 재영토화하는 일도 없다.
3) 반기표적 기호체제
기표적인 의미작용에 반하는 기호들로 구성되는 체제이며, 대표적인 예로 암호, 축구선수나 야구선수의 등번호와 같이 수나 번호(명목수)를 사용한 번호적 조직을 들 수 있다. 여기에도 숫자라는 기호가 사용되긴 하지만, 이 기호들은 구조화된 관계를 통해 의미작용을 만들어내는 그런 기표가 아니며, 기표의 형태를 취하면서도 사실은 기표적 기능을 깨거나 벗어나 있다는 점에서 반 기표적 기호라고 할 수 있으며, 의미작용에 반하는 기호라는 의미에서 반-의미적인 기호라고도 할 수 있다. 번호적 기호는 그것을 만들어내는 표시 이외에는 어떤 것도 생산하지 않는다. 다양하고 유동적인 재분할을 표시하며, 그 자체로 기능들과 관계들을 수립한다. 총체를 이루기보다는 배열을 이루며, 수집보다는 분배를 행하고, 단위의 조합보다는 전달과 이행, 이동과 축적에 의해 작동한다. 번호적 기호는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도 없기 때문에 어디로든 움직이거나 넘나들수 있는 있다. 이는 유목민적 이동능력이 기호의 의미를 제한하는 기표적 연쇄에서 자유롭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4) 탈기표적 기호체제
탈기표적 체제는 기표적 의미화의 중심에서 벗어나는 체제로서 나선환에서 벗어나는 탈주선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출발한다. 이는 익숙하게 길들여진 주어진 기표적인 권력에 복종하던 것을 그치고 그로부터 얼굴을돌리는데서 시작한다. 이러한 이탈은 통상 ‘이성’이나 ‘이유’, ‘합리’등과 같은 개념으로 설명되고 정당화되는, 기존의 지배적인 의미화를 배신하는 정염, 정열에 이끌리며 시작된다. 그에 따른 수난을 동반한다는 점에서 점염적 체제이다. 탈기표적 체제는 탈주선에 의해 시작되는 체제이고, 전제군주의 기표에서 벗어나는‘주체화의 점’에서 시작되는 체제(탈기표적 체제=주체화의 체제)이다. 기표적 체제가 전제적이고 편집증적인 ‘속임수의 체제’로서 ‘해석’이나 ‘주석’의 형태로 다른 기표들을 공급하고 원환을 만들어 낸다면, 탈기표적 체는 권위적이고 주체적 내지 정염적 체제이다. 탈기표적인 체제에는 속임수가 없으면 배신이 있을 뿐이다. 어떤한 새로운 해석도 배신을 의미하며, 얼굴을 돌리는 것이 될 뿐이다. <책>에 모든 것이 담겨 있으며그것을 암송하고 복종하는 것이지 그것을 다양화하는 어떤 새로운 해석의 기표를 제공하는게 아니다. 탈기표적인 주체화의 기호체제에서 ‘책’은 오직하나에 대한 ‘더없이 기묘한 숭배’를 내포하고 있다.
주체화 체제의 얼굴
주체화 체제는 배신 혹은 얼굴 돌리는 것으로 시작된다. 주체화는 지층에서 벗어난 어떤 독립적인 주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지층을 달리하면서 주체가 될뿐이다. 이는 탈주선 내지 탈영토화의 선으로 다른 영토를 찾아 재영토화된다. 이런 점에서 주체화는 새로운 신, 새로운 ‘큰 주체’에 예속되는 ‘예속화’로 귀착된다. 이런이유로 탈기표적인 주체화 제제는 기표적인 체제와 다른 얼굴을 갖는다. 따라서 주체화 체제의 고유한 얼굴은 정면의 얼굴이 아니라 옆으로 돌린 얼굴이다. 이것은 배신을 촉발하거나 돌린 얼굴을 사로잡는 또 다른 얼굴과 짝이 된다. 돌린 얼굴을 바라보는 얼굴이기에 그 역시 돌린 얼굴이 되어야 한다. 결국 서로 마주보는한 쌍의 돌린 얼굴이(예속화로 귀착되는) 주체화 체제의 얼굴이다. 마주본다는 것은 부르는 주체(대문자 주체)와 대답하는 주체(소문자 주체)가 호응하고 공명하여 하나로 포개진다. 이처럼 둘이지만 사실은 하나인주체를 ‘분신’ 혹은 ‘이중체’라고 부른다. 이런 두 주체가 구성되는 것을 ‘이중화’라고 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 코기토의 의식적 이중체는 생각한다고 할 때의‘나’가 언표행위의 주체였다면, 존재한다고 할 때의 ‘나’는 생각과 의심의 결과 존재한다고 믿어도 좋은 것으로 언표되는 주체, 언표 주체이다. 언표행위의 주체와 언표주체로 이중화하고 그 양자를 동일시하는 방식으로 포갬으로써 이중화된 주체(이중체)를 만들어 내었다. “남자라면 작은 일에 눈물을 흘려선 안된다” 같은언표를 접하면서 우리는 두개의 주체가 포개지는 경험을 합니다. ‘남자’라는 말은 문장의 언표주체(주어) 이다. ‘작은 일에 눈물을 흘려서는 안된다’ 이말을 듣는 남자 ‘나’이다. 언표행위의 주체는 ‘나’가 된다. “남자=나”라는 등식에 이끌려 주어에 나를 일치시키고 그것을 통해 그 문장을 나에관한 얘기로, 내가 의당 해야할 바라고 생각한다. 언표행위의 주체인 ‘나’는 언표 주체인 ‘남자’와 포개지게 되고 그 언표에 예속화 되는거다. 언표행위의 주체를 언표 주체와 포개는 이런 코기토 식의 의식적 이중체는 어떤 지배적인 질서가 요구하는 규범이나 규칙에 나 자신을 동일시하는 메커니즘을 형성하게 된다. 근대적 법들은 원리상 모두‘내’가 입법자로서 제정한 것이라고 함으로써, 스스로 따르는 입법자-노예라는 새로운 노예제도가 발명된것이다.
커플의 정염적 이중체는 마주보는 상이한 두 주체가 공명하여 서로에게 이끌리고 빠져드는 방식으로 동일화가 발생한다. 이 경우 주체화의 점은 커플의 이름을 부르고 그에 응답하는 식으로 정의된다. 트리스탄과이졸데의 이야기처럼 사랑의 형식으로 진행되는 커플의 이중체가 구성되는 것은 이름을 부르고 그 부름에화답하는 것이다. 사랑은 정염을 통해 서로를 분신(이중체)로 만든다. 정신분석가와 환자는 전이에 의해 이중체가 구성된다. 환자가 의사와 동일시하거나 의사에게 자기감정을 투사하는 방식으로 언표행위의 주체와언표 주체의 전이가 발생하고 결국은 의사를 대신해서 환자가 자기 자신에 대해 해석하고 그에 필요한 것을연상하게 된다. 결국 정염적 이중화란 상이한 두 명의 주체가 공명하여 서로에게 이끌리며 하나의 이중체로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커플의 이중체는 결국 죽음으로 이어지는 검은 구멍으로 끌려들어가고 만다. 예속화를 내포하는 주체화란 결국 언표행위의 주체(S)와 언표주체(s)의 이중체가 형성되고 포개지는 과정이다. 이렇게 포개지는 것을 주체화의 결합적인 축이라고 하고, 두 주체(S1과 S2 혹은 s1과 s2)가 이중체를 이루는 것을 주체화의 계열적인 축이라고 봅니다.
두 가지 잉여성
의식과 사랑이라는 두형태의 주체화 체제는 특정한 잉여성을 갖는다. 이것은 ‘주관적 공명’으로서, 의미화하는 기표적 체제의 잉여성인 ‘객관적 주파수’와는 다른 종류의 잉여성이다. 기호의 잉여성이란 다양한 명령어를 전달하는 음고, 음색, 볼륨, 톤 등의 음향학적 특성을 통해 이루어진다. 높은 주파수와 대비되는 낮은주파수의 소리는 높은 주파수의 소리가 부각되고 의미화되기 위한 배경이 된다. 다른 기호들과의 관계에서배경으로 작용하는 것들의 주파수를 최소화했을 때 이는 기호가 새겨지는 ‘벽’ 내지 ‘흰벽’이 된다. 주파수를통해 각각의 기호와 관련된 최대주파수와 다른 기호와 관련된 비교 주파수를 살펴볼 수 있다. 각각의 기호와관련된 최대주파수는 비명이나 절규는 주파수로 표시할 경우 가장 높은 값을 갖는다.
탈기표적 체제의 잉여성이 공명이다. 기표적인 체제와 달리 주체화 제체는 주파수가 기재되는 벽이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양한 기표들을 향해 방사되는 중심의 기표나 다양한 의식들을 동일화하는 의식이 아니라 오직 코기토적인 이중체 안에서 진행되는 독신자의 ‘자기의식’뿐이거나 서로 마주보며 공명하는 커플의 검은 구멍만 존재할 뿐이기 때문이다. 대신 주체화 체제에서의 잉여성은 주관적 공명이다. 자기의식(Moi=Moi)에 대한 ‘최대공명’과, 이름들(트리스탄…이졸데…)에 대한 ‘비교공명’으로 구분된다. 주파수가 기재되는 벽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의식과 정염을 끌어당기며 그것들을 공명시키는 검은 구멍이 존재한다.
탈지층화의 선
기표적 기호는 기호로 소급될 뿐이기에, 기호들의 집합은 기표자체로 소급될 뿐이기에, 기호계는 탈영토화의 높은 수준을 누리지만 주파수로 표시되는 는 상대적인 탈영토화다. 이러한 체계에서 탈주선은 부정적인것에 머물러있으며 부정적인 기호를 할당받는다. 주체화 체제가 긍정적 탈주선을 그리며 탈영토화를 절대적인 것으로 가져간다고 해서, 그것이 모든 모든 지층에서 탈주하는 탈지층화의 절대적 탈영토화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언표행위의 주체는 언표주체위로 포개져 재영토화되거나, 불리는 주체는 부르는 주체에 재영토화되어 결국은 죽금과도 같은 검은 구멍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의식이 ‘나는 나야’라는 자기동일성의 확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우리는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버리고 맙니다. 이로써 독신자-기계는 자폐증-기계가 되고 만다. 반면 ‘나’라고 하는 존재는 내가 만나는 다양한 외부에 따라 ‘내’가 기대고 있는 연기적 조건들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진다는 것을 알고 실행할 수 있을 때, ‘나’라는 주체화의 점에서 시작한 탈주선은 모든 세계를 향해 확장되며, 모든 세계를 담을 수 있는 것이된다. ‘나’를 정해진 언표주체와 포개기 보다는 부재하는 언표 주체로 창안하는 것, 그리하여 부재하는 언표 주체로서 ‘나’의 잠재성 전체를 향해 스스로를 개방하는 것, 결국 잠재성의 전체가 되는 것(‘만인-되기’)이 주체화 체제에서 긍정적 탈주선을 획득하는 지점이 될 것이다. 무아(無我)!
정염에서도 오직 자신의 커플에 사로잡힌 정염은 탈주선을 커플 안에 가두는 것이고, 빠져나갈 수 없는 구멍을 파는 것이다. 오면 오는 대로 받아들이고 가면 가는 대로 보내주는 것, 애증의 감정에 끄달리지 않으며 모두를 사랑하는 것, 사랑한다는 생각도 없이 사랑하는 것, 대상의 차별을 떠나 사랑하는 것 따라서 미움의 짝인 사랑이란 개념을 벗어난 사랑이다. ‘주체도 대상도 없는 사랑’, ‘무심한 사랑’, ‘절대적 사랑’, ‘절대적 코뮨주의’이다.
기호체제의 혼성과 변환
대부분의 기호체제는 둘 이상이 섞여서 이루어진 혼성적 체제이다. 혼성의 과정에서, 혹은 다른 배치 속에어떤 기호체제가 도입될 때, 하나의 기호체제는 다른 기호체제로 변환되기도 한다. 그 예로 모세가 탈주선을타는 데서 시작되고, 신이 그를 호명함으로써 고유한 주체화의 체제를 형성했다. 신의 계율이라는 새로운 기표들을 수반하며, 그 기표들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의미화 체제를 동반한다. 모세는 이집트를 벗어나기 위해 유목민의 장인에게서 배운 대로 히브리인들을 번호적인 방식으로 조직했다. 반기표적 체제가 추가 된다. 이렇게 기호체제는 주체화 체제와 기표적 체제, 반기표적 제제가 섞인 혼성적 기호계를 이루고 있다. 조건에 따라, 배치에 따라 지배적 내지 일차적 위상을 차지하는 것이 있겠지만 조건이나 배치가 달라지면 이 또한달라진다. 따라서 기표적 기호계에 일반성 내지 보편성이라는 특권을 부여할 수 없다. 유목민들의 번호적인방식이 히브리인들에 의해 다른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와 같이 기호체제의 코드는 탈코드화의 여백, 즉 잉여가치를 갖는다.
하나의 기호계는 다른 기호계로 번역되거나 변환될 수 있다. 기호계의 변환을 다섯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있다. 첫번째 어떤 기호체계를 전-기표적 체제로 옮겨놓는 모든 것을 유비적 변환이라고 한다. 무용극의 발레 연출자가 동화라는 문학적이고 기표적인 기호들을 신체의 동작이라는 전기표적 기호들로 변환시키는 것이다. 다른 예로 <주자가례>에서 유교의 교리를 구성하는 기표적 기호계가 ‘예’라고 총칭되는 특정하게 코드화된 신체적 동작으로, 전기표적 기호계로 변환된다. 두번째 기표적 체제로 옮겨놓는 것을 상징적 변환이라고 한다. 정신 분선학에서 어떤 행동이나 동장, 꿈등을 성적인 상징이나 징표로 ‘해석’하고 의미화하는 것이다. 다른 예로 엘리아스의 <문명화 과정>에서 다룬 것처럼 궁정에서의 우연적이고 의례적인 행동이 매너가 되어가는 과정이다. 의례적인 행동이 문명의 기호가 되어가는 과정이었다. 세번째는 논쟁적 내지 전략전변환으로 어떤 기호계를 반기표적 체제로 옮겨 놓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암호이다. 예로 운동권에서 여러가지 이유로 인해 자신들이 사용하는 용어들을 최대한 약호나 외국어 등을 섞어 알아듣기 힘든 단어로 바꾸어 버리는 것이다. 네번째 의식적, 의태적 변환이다. 어떤 기호계를 탈기표적 기호계로 변환하는 것을 말한다. 흑인들은 백인들에게 배운 노래를 전혀 다른 스타일로 만들어 버린다. 블루스나 재즈, 혹은 흑인영가라부루는 것등이다. 뒤샹이 기성의 소변기에다 샘이라고 명명하고 전시장에 갖다 놓음으로써 새로운 종류의오브제를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다이어그램적 변환이 있다. 어떤 기호계를 절대적이고 긍정적인 탈영토화가 이루어지는 일관성의 구도 위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중국 선사들이 동문서담 식의 화두나, 도를 묻는질문에 고함을 지르는 ‘방할’ 같은 것이다. 불교의 기표적인 기호계를 기호들이 통하지 않는 영역으로 옮겨놓는다. 불립문자, 언어도단 같은 말이 새로운 기호계가 언어적인 기호계와 무관한다는 것을 명시적으로 보여 준다.
기호계의 성분들
앞에서 살펴 보았던 네가지 기호체제의 개념은 혼성적 체제를 구성하는 발생적 요소들이다. 실제적인 기호계란 발생적 요소들의 복합체로 존재한다. 이를 기호계를 구성하는 ‘발생적성분’이라 한다. 두번째 변환적성분은 하나의 기호계가 어떻게 다른 기호계로 변하는지, 그 와중에 어떻게 변이가 발생하는지를 설명하는요소이다. 이 성분이 기호계에 독창성을 부여하거나 독창적 기호를 새로이 창조한다. 세번째 다이어그램적성분은 더 이상 형식화되어 있지 않는, 하나를 다른 하나에 결합할 수 있는 비형식적 틀을 갖는 기호-입자를추출하기 위해 기호체제나 표현형식을 포착하는 것이다. 이는 추상의 절정으로서 추상이 실재화하는 계기기도 하다. 다이어그램이란 기호이지만 기호형식에서 벗어난 ‘기호’란 점에서 그 자체로는 표현도 아니며, 또한 물리적 내지 신체적 내용을 갖지 않는 다는 점에서 내용도 아니다. 표현의 층위는 물론 내용의 층위에서도 작동하는 힘과 변화의 양상을 표시하는 표현이다. 손의 동선을 표시하는 다이어 그램은 가장 경제적이 효율적인 동작이라는 목적에 따라 손이라는 물리적 신체의 움직임을 표시한다. 이는 얼굴-기호라는 표현의 층위만이 아니라 이미 손-도구라는 내용의 층위까지 소재와 기능을 표시하는 기호이다. 그 자체로 표현도 내용도 갖지 않는다. 다른 예로 원형 감옥의 도식, 반음계주의를 표시하는 음악적 다이어그램(글리산도의 다이어그램)이다. '기’라고 하는 흐름의 추상기계도 있고 ‘경락’이나 ‘혈도’처럼 신체상의 기의 흐름을 표시하는다이어그램도 있다. 마지막으로 기계적 성분이다. 추상 기계와 결부된 기계적 배치를 의미한다. 추상기계들이 구체적 배치들 안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정확하게 표현의 특질에 뚜렷한 형식을 제공하기도 한다. 언표 행위의 배치인 기호계와 짝을 이루는 내용의 층위를, 언어학적인 기호들의 외부인 신체적이고, 물리적인 요소들의 배치들, 표현적인 기호체제가 내적인 성분으로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궁정의 매너는 궁정사회의 물리적 공간을 제공하는 저택을 포함하고, 범죄와 행형에 관한 언표 행위는 감옥같은 물리적 건물을 내적인 성분으로 포함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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