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이란 무엇인가 ?
이전의 상태와 다른 상태로 변화를 의미 한다. ‘신체가 크다’, ‘작다’는 상태를 표시 하지만 ‘커지다’, ‘작아지다’는 사건을 표현한다. 이러한 사건은 사실과도 구별된다. 동일한 사물이 무엇과 이웃하게 되는가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갖을때도 ‘사건’이 된다. 예를 들어 채플린이 들고 있는 붉은 깃발은 트럭과 접속되면 ‘주의!’를 요구하는 깃발이 되고 시위대와 접속되면 공산주의를 의미하는 깃발이 되고 찰리를 ‘공산주의자’라고 체포한다. 사건은 사고와도 구별 할 수 있다. 사고 역시 신체적 상태의 변화를 통해 정의된다는 점에서순수사건의 외연 안에 있다. 숲속에 어떤 사람이 쓰러진 사고 가 났을 때 경찰은 대체 무슨일일 발생한 것인지를 분석하기 위해 발자국, 유류품들, 없어진 물건 등 그사람의 이웃항에 관심을 둔다. 분석으로 특별한이유를 밝혀 냈을때 단순한 사고가 ‘의미’를 갖는 사건이 된다. 하나의 사물이 이웃항과 연결되어 하나의계열을 이룰때 계열화라고 한다. 이러한 계열화를 통해 사물들 사이의 특정한 의미 내지 표면효과를 야기하는 이웃관계가 형성된다.
점적 사유와 선적 사유
사물의 상태를 하나의 점으로 표현한다면 사건이란 두 점을 잇는 선으로 표시할 수 있다. 선을 통해 점은 하나의 사건을 구성하는 선의 일부로 들어가고, 선으로 연결된 이웃한 점들의 관계속에 의미를 획득한다. 점은 선의 궤적안에 의미를 갖는다. 점의 미분계수가 바로 의미를 표시한다. 분열분석은 이러한 선들의 배치를, 다시 말해 선들의 성격과 선들의 교차, 선들의 섞임과 변환 등을 대상으로 한다. 삶의 문제를 선의 배치를통해서 포착하고 분석하는 것이다. 선을 단지 두 점을 연결하는 선으로만 본다면, 그것은 점에 갖힌 선이며점에서 점으로 이동하기위한 선에 불과 하다. 9시에서 오후 6시를 연결하는 선, 학생시절의 선, 군대시절의선, 이모두가 시점과 종점이라는 두개의 점을 잇는다. 두점에 갖힌 선분이다. 우리의 삶은 모두 선분적인 방식으로 절단되고 채취된다. 중요한 선분은 그것을 ‘통과’하여 빠져나가도 좋은지를 시험하고 체크한다. 일정한 ‘자격’을 갖춘자만 통과 시킨다. 대표적인 것이 시험이다. 반면 점들을 통과하는 선이 있으며 , 그 선에따라 점들의 의미가 달라지는 경우가 있다. 출장가는 회사원은 목적지를 바꿀 수 없지만 자유롭게 여행하는사람은 얼마든지 통과하는 점을 바꿀 수 있습니다. 점보다는 선 자체가 중요합니다. 이동하는 과정에서 만나는 모든 것이 중요한 체험의 일부가 됩니다.
점을 통한 사유는 각각의 점이 먼저 결정되고, 그 점으로 이동하기 위해 선을 그린다. 되도록 짧고 직선이 되도록, 적은 노력과 비용이 되도록 한다. 반면 선을 통한 사유는 어느 방향으로 열려 있는 선을 그리며, 그것이 통과하는 점은 선의 궤적안에 의미를 갖게 된다. 여기서 어떤 점도 시점(기원)이나 종점(목적)과 같은 특권적인 점이 아니며, 다만 선안에서 끊임없이 다른 점과 관계지어지는 임의점일 뿐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사회적 삶이나 무의식, 욕망 등이 이런 선들로 그려지고 선의 궤적을 통해 진행한다고 본다. 이러한 선을 세가지로 구분한다.
세가지 선
첫째는 점을 통과하는 요소들이 획일적으로 적용되고 선분성의 요구를 강제하는 선분이다. 획일적이고 경직된 몰적 선분성의 선으로 명확한 선분적 선을 따라 산다. 정해진 계급과 위치에서 순서와 숫자로 이루어진반복적인 일상이다. 예측 가능한 ‘미래’로 장래는 있지만 생성은 없다. 이러한 경직된 몰적 선분선의 선은 남들과 다름없는 평균적인 삶, 다양한 습속에 따른 경직된 삶이다 자의적으로 무의식적으로 동일하게 반복하는 몰적인 삶을 통과하는 선이다.
두번째로 유연한 분자적 선분성의 선이다. 몰 단위로 서술되는 운동 내에서 개개 분자들의 운동은 배제되고포착되지 않고 지각 불가능하다. 분자적 선분은 몰 단위의 경직성을 벗어나 유연하게 움직이며 서로 인접한분자들끼리 영향을 주고 받고 몰적 동질성을 벗어나 유연한 흐름을 형성한다. 양자적인 흐름을 갖습니다. 그것은 몰적인 것을 교란하고 빠져나가는 탈영토화의 양자처럼, 존재하거나 터널링하는 양자처럼 몰적인성분의 영향을 받지만 그것에 갇히지 않고 새로운 선분을 만들어내 어긋난다. 유연한 분자적 선분성의 선이경직된 선분성보다 더 좋은 것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전자는 후자보다 유연하지만 그만큼 불안정하고 위험하며 죽음의 선, 무력화의 선으로 연결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게다가 몰적인 선분의 벽을 돌파하지 못할 경우그것에 포섭되어 버립니다.
마지막 탈주선은 유연한 선분성 내지 흐름의 선 안에서, 더 이상 넘어설 수 없는 일종의 양자의 최대치(스스로가 원해도 더 이상 멀리 나갈 수는 없는)에 이른다. 기존의 몰적 선분을 흔드는 진동이나, 그 벽을 넘는 유연한 양자적 흐름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의 선을 그리는 것이다. 기존의 선분적 삶에서 벗어나는출구를 발견하는 것이다. 비록 다시 새로운 몰적 선분이 되고 말지라도 새로운 방향성을 갖는 선을 그리는것이다. 이 선은 관성, 타성, 중력에서 벗어나 기존의 것과 다른 것을 창조하고 생성한다. 기존의 지배적인 가치나 방법에서 벗어나 새로운 가치나 방법을 창안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탈주선은 ‘세상에서 도망치는것이 아니라 세상으로 하여금 도망치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절단, 균열, 단절
세가지 삶의 선에 상응하는개념이 절단, 균열, 단절이다. 몰적인 선분성의 선은 가장자리가 절단이 되어 있다. 누구나 따라야 하는 것이란 점에서 이절단은 아무리 잘게 쪼게 지는 경우라도 삶의 흐름을 절단하는 것이란 점에서 크고 경직된 절단이다. 이런 절단된 선분들은 일정한 선형적 순서에 따라 배열된다. 삶의 자유로운흐름을 절단하고 제한하여 그것에 몰적인 ‘통일성’을 부여한다. 몰적인 선분성 안에서 성공과 실패를 판단하는 사람들에게는 안정과 출세를 위한 규범으로 보이겠지만 자유로운 삶을 희망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선분들이 자신의 삶을 파괴한다고 생각한다.
몰적 선분들의 끝에서 우리에게 이항적인 방식의 선택을 요구한다. 열심히 일해서 살아남을 것인가, 아니면싸우고 게기다가 짤릴 것인가? 우리는 부유함이냐 빈곤이냐라는 하나의 항에서 다른 항으로 넘어가는 계속적인 이항적 선택을 거쳐 간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양식에 벗어나는 삶도 있고 양식에 반하는 삶도 있으며, 양식 안에 갈라진 틈새를 만드는 삶도 있다. 몰적인 선분성의 선 안에서도 어디로 흘러가는 알기 힘든 미시적이고 미세한 균열을 야기한다. 극히 유연하지만 그 만큼 불안정한 이 분자적 선은 모든 것을 움직이게 한다.
분자적 선분성의 선이 다양한 균열의 선을 그리면서 뻗어나간다면, 탈주선은 단절에 의해 그려진다. 기존의것과 단절하여 새로운 방향으로 뻗어나가는 선을 그리는 것이다. 탈주선이란 단순한 저항이나 부정, 혹은 동요나 진동에 머무는 게 아니라,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선이다. 탈주선을 그리는 데 몰적인 선을 따라가면서 그것을 뒤집고 그것과 단절된 선을 그리는 방식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고통스럽게 통과한 몰적 선분성의 선을 충분히 이용하고 변형시켜 강력한 탈주선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
두종류의 감시자
선분적인 선들위에는 각각의 선분마다 그것을 통과하는 대중들을 감시하는 두종류의 감시자가 있다. ‘대충보는 자’와 ‘자세히 보는자’이다. 대충 보는 자는 선분 사이에 있는 심연이나 선분이 둘러싸고 있는 심연, 그곳에서 발생하는 운동, 격동, 위반, 혼란 및 반란을 감시한다. 선분적인 선에서 벗어나지 않았는지, 그선분들을 혼란에 빠뜨리거나 전복하려 하지 않는지 감시한다. 몰적 선분성의 선과 대응한다. 거리의 경찰, 학교의교사, 관청의 관리등이 감시자에 속한다. 이들은 거대한 기표적인 절단을 다스리고 일시적인 위협을 물리치고 몰적 질서를 복원한다. 모든 것을 초코드화 한다. 몰적인 선분성의 선을 교란하는 분자적 진동과 위반과이탈을 감시한다.
자세히 보는 자는 유연한 분자적 선분성의 선에 대응하지만 이들도 몰적 선분성의 선에서 이탈하는 것을 막고 통제하기 위한 것이다. 이들이 거대한 절단기계를 사용하는 공식적 감시자라기보다는 때론 함께 동요하고 이탈하던 자일 수도 있다. 때론 아주 가까운 이웃일 수도 있으며 형제나 친구일 수도 있다. 그들의 안목은자세히 보는 능력을 의미한다. 그 고유한 능력과 위치로 인해 그들에게는 두가지 길이 있다. 미시적 위반을발견하여 몰적인 선분성의 선에 재단하도록 알리고 교정하도록하거나 자신의 선분을 버리고 탈주선을 따라이동할 수 있다.
선의 배치
우리의 삶은 서로 교차하고 뒤섞이는 수많은 선들에 의해 횡단되고 있다. 사람마다 나름대로 가장 중요하며결정적인 선을 갖는다. 관료, 정치인 등 공인 뿐만 아니라 평번한 삶을 사는 사람도 서류에 기록되는 삶, 공적으로 인정될 수 있는 몰적인 선분성의 삶을 산다. 공적인 인정 욕망이 삶을 장악하고 그것을 목표대로 절단한다. 절단의 날을 통과할때마다 삶이 절단 되었다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이력을 하나 더 쌓았다고 생각한다.
방황하기도 하고 벽을 넘는 미시적 선들도 있다. 숱한 방황의 끝에서 새로운 삶의 길을 찾은 사람들이 있다. 그것이 외면적으로 몰적인 선분성의 선과 포개진다고 해도, 몰적 선분성의 습관적인 선에서도, 분자적 방황의 선에서도 단절된 창조의 선을 그리는 사람들도 있다. 숱한 고난 속에 저자들이 일관성의 구도라고 부르는 도의 경지에 이르는 장대한 선을 볼수도 있다. 탈주선에서 시작하는 사람들도 있다. 예술가나 혁명을꿈꾸며 잠행하는 지하 혁명가가 이들에 해당한다. 쫓기는 탈옥수와 잠행하는 혁명가가 다른 것은 단지 도망치기 위해 잠행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활동, 새로운 작업, 새로운 삶을 만들기 위해 달린다는 것이고 심지어 붙잡혀 감옥으로 가능 경우에도 촉발로 인해 야기된 결코 무화될 수 없는 변용의 흔적을 남긴다.
다양한 선의 교차와 혼합, 연결과 끊어짐, 변환과 전변 등 선의 배치 내지 선의 양상을 대상으로 분석하는 것이 분열분석의 과제이다. 분열분석은 삶에서 작동하는 권력의 문제를 다루는 미시정치학과 다르지 않으며, 나아가 몰적인 거대선분을 다루는 거시정치학 또한 포함한다고 할 수 있다. 일상적인 삶조차 탈주와 생성, 권력과 혁명의 문제로 파악하는 삶의 정치학이며, 그런 의미에서 스피노자가 말한 동일한 의미에서 윤리학이며, 맑스가 말한 것과 동일한 의미의 실천철학 이라고 할 수 있다.
세가지 선: 혼합, 이행 그리고 위험
몰적인 선분성의 선은 제도와 법과 의해 작동되는 만큼 현실적이고 실재적이다. 하지만 유연한 선분성은 선은 몰적 선분성의 선과 같은 실재성을 갖는다고 하기에는 너무도 개별적이고 순간적이다. 그 미세한 움직임을 포착할 수 있는 섬세한 눈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잘보이지 않는 것이라 상상적인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저자는 이에 대해 “유연한 선분성은 상상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미시정치는 그 외연과 현실성에서 다른 것에 못지 않은 것이다. 거대정치는 거기에 우호적이거나 방해가 되는 이 미시적 주입 내지 침투를 통하지 않고는 그 몰적인 집합들을 다룰 수 없다. 마찬가지로 집합체가 커지면 커질수록 그것이 작동시키는 실급들의 분자화도 증가한다.”
“탈주선에 관해 말하자면, 그 것은 결코 세상으로부터 탈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마치 사람들의 수도관에구멍을 뚫듯이, 세상을 탈주케 하는 것이다. 모든 경계에서 탈주가 발생하지 않은 사회체계란 없다.” 탈주란부정적인 도피도, 무책임한 외면도 아니다. 그것은 반대로 긍정적인 창조이고 적극적인 생성이다. 몰적 선분성의 권력에 의해 외면당해 실패와 패배로 귀착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들이 창안한 세계는 사람들로하여금 그림, 음악 등 예술 작품에 대해 새로운 방식으로 창안하고 영유하게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새로운감각과 감응이 수반된 새로운 삶으로 변용하고 촉발 한다. 이는 혁명과 다르지 않다.
혁명이란, 새로운 인간 관계, 새로운 삶의 방식, 새로운 종류의 세계를 구성하고자 창안하는 것이다. 탈주선은 절대적 탈영토화와 함께 있는 최초의 선이다. 유연한 선분성의 성은 탈주선과 달리 상대적 탈영토화에 의해 진행된다. 다시 몰적인 권력에 포섭되거나 국가 장치에 포획 될 수 있다.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연 유연한선분성이 이와 반대 방향으로 결합할 가능성이 있다. 양의성을 갖는다. 몰적인 선분성의 선과 분자적 선분성의 선이 겹치거나 중첩 되거나 혹은 어긋나며 교차한다. 또한 탈주선과 분자적 선분성의 선이 겹치거나 교차하고 때론 방해하기도 한다. 세가지 선은 서로 내재적인 연관을 갖는다. 이를 상호 내재성이라고 말한다. 어떤 선도 초월성을 가지 않으며 각각의 선은 다른 선들 속에서 작동한다.
들뢰즈 가타리는 세가지 선에 대응하는 세 가지 유형의 ‘인물’을 들고 있다. 몰적 선분성의 선에서는 다른 개체면서도 서로간에 정확하게 대응하여 하나처럼 동일하게 행동하는 커플이라는 이항적 기계가 발견된다. 분자적 선분성의 선에서는 같아 보이지만 다르게 움직이는, 독립적이라기보다 보충적인 분신이라는 이항적 기계가 발견된다. 탈주선에서 선분적 선의 심연을 감시하는 감시자로부터 벗어난 혹은 선분적 지각능력을 벗어난 잠행자가 발견된다.
마지막으로 각각의 선에는 고유한 위험이 있다고 한다. 첫번째 선에서의 위험은 몰적 선분성에 따라 그 선분을 통과하는 모든 것이 동일화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획일화 되는 것이며, 더불어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이항적 선택, 그리고 몰적 선분성의 요구에 부합하지 않는 것을 배제하는 것이 그 선에서의 또 다른 위험이다. 두번째 선에서의 위험은 양의성이다. 몰적인 선분성에 분자적 움직임을 가두고 포획하는 방향과 다른 한편으론 그 동요와 진동을 따라가면서 공감하고 그것이 새로운 삶의 싹을 틔울 수 있도록 하는 방향을 동시에 향하고 있다. 양의성의 위험이란 그 능력이 두 방향으로 열려 있다는 것의 위험이 아니라 나쁜 방향을 향할 위험이란 점이다. 세번째로 탈주선에 고유한 위험이 있다. 그 자체로 긍정적이고 창조선인 선을 그림에도 불구하고 선분적인 선분적인 선들의 억압이나 무시 외면이나 배제 등에 의해 실패로 귀착될 위험이 있다. 그리하여 창조적인 삶을 실패요, 패배라고 자인하여 절망할 위험이다. 그리하여 결국 자살이나 죽음으로 이어질 위험, 바로 그것이 탈주선에 고유한 위험이다. 탈주선이 제공하는 그 기쁨의 메시지에도 불구하고, 왜 저토록특유한 절망을 담고 있는 것일까 ? 탈주선이 죽음의 선으로 이어지는 것, 그것은 아마도 다른 어떤 위험에도비할 수 없는 최악의 위험이라 할 수 있다. 이 질문을 하게 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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