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신체형

 

1 수형자의 신체

1757 - 국왕 시해미수범 다미앙의 판결문 

 

상기한 호송차로 그레브 광장에 옮겨간 다음 그곳에 설치될 처형대 위에서 가슴, , 넓적다리, 장딴지를 뜨겁게 달군 쇠집게로 고문을 가하고, 그오른손은 국왕을 살해하려 했을때의 단도를 잡게 , 유황불로 태워야 한다. (23)

 

1838 - 레옹 포쉐가 작성한  ‘파리 소년 감화원을 위한 규칙 다음과 같다. 17: 재소자의 일과는 겨울에는 오전 6, 여름에는 오전 5시에 시작된다. 노동시간은 계절에 관계 없이 하루 9시간으로 한다. 하루 2시간은 교육에 충당한다. (27)

 

여러가지 변화중에서 내가 주목하고 싶은 한가지 점은 신체형의 소멸이다.  인간화에 초점을 맞추어너무나도 안이하고 과장된 표현으로 신체형의 소멸을 떠들어대기도 했다.(29)  18세기 19세기 . 재판관이 과하는 형벌의 주안점은 처벌에 있는 것이 아니며 근본 목표는 교정ᆞ감화ᆞ치료라는 것이다.  형무소(刑務所) -> 교도소(矯導所)?

근대적인 사법당국과 재판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는 처벌하는 행위에 대한 치욕감이 있다. 이마음의 상처가 원인이 되어 심리학자가 판을 치고, 도덕적 정형외과 성격의 소인배 관리들이 몰려들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체형의 소멸은 구경거리가 자취를 감추게 되었음을 뜻한다. (33)

 

종래와는 다른 억제책 때문에 사형집행인, 사형수의 고통을 직접적으로 유발하는 해부가 대신에 일단의 전문가들이 등장하게 된다.  간수, 의사, 사제, 정신과 의사, 심리학자, 교육자 들이다. (35)

이중화 과정 -  구경거리의 소멸, 육체적 고통의 제거- 대해서는 사형집행의 근대적 의식 전체가 그대로 입증하고 있다. (35)

 

신체형의 이러한 소멸은  1830년에서 1848년에 이르는 시대에는 거의 기정사실와 되었다. 영국은 신체형의 이러한 소멸에 가장저항을 많이 나라의  하나였다. 아마도 그이유는 영국의 형사재판이 배심원 제도와 소송절차의 공개 인신보호 영장의 존중에 의해서 모범적인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1780년에서 1820년까지 수십 년에 걸친 거대한 사회혼란의 시기에는 형법의 엄격한 절차가 감소되기를 바라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신체형이 간소화는 1760년에서 1840년에 이르는 시대의 대변화에 뿌리는 하나의 경향이기는 하지만 완성된 것은 아니다.(41)  

형벌제도가 힘을 행사하는 대상이 신체가 아닌 이상, 그것은 정신이다. 신체에 극심한 고통을 가하는 처벌 뒤에 이어지게 것은 마음, 사고, 의지, 성향등에 대해서 깊숙이 작용해야 징벌이다. 원칙을 결정적으로 정식화 한사람은  마블리(Mably)이다. (43)

 

1810 프랑스 형법전에 따르면 광기의 문제는  64조의 명문에서 제기되었다.  범죄자가 범죄행위를 정신이상의 상태에서 저질 렀을 경우, 중죄도 경범죄도 적용되지 않는다.”(48)  광기의 문제는 64조의 본래적 의미에서 중죄를 소멸시키기는커녕, 걸음 나아가 모든 중죄, 극단적으로는 모든 범죄 자체 속에서 정당한 의혹으로서 그리고 또한 당연히 요구할 있는 권리로서의광기의 가설을,  비정상의 가설 세울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더구나 유죄이든 무죄이든 간에 선고는 단순히 유죄의 판결이거나 혹은 판결을 내리는 법적 결정인 것은 아니다.  판결은 자신 안에 하나의 규범성 평가와  규범화의  가능성에 대한 하나의 기술적 명령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재판을 행하는 사람은, 판사이든 배심원이든, ‘ 과는 다른 어떤 일을 행하고 있는 것이다(49).

 

책의 목표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근대적 영혼과 새로운 사법 권력 사이의 상관적 역사, 처벌을 관장하는 권력이 근거를 두고 있고 그것의 정당성과 법칙을 받아들이며 영향 넓혀가면서 그것의 엄청난 기현상을 은폐하고 있는 과학적이고 사법적인 복합체의 계보학이다. (52)

 

우리 연구는 다음   가지 일반규칙을 따르고자 한다.  (1) 처벌을 복합적인  사회기능으로 파악할 . (2) 징벌에 대해서 정치적 전술이라고 하는 전망을 받아들일  (3) 권력의 기술론을 형벌제도의 인간화 원칙(형법의 역사) 인간 인식의 원칙(인간과학의 역사) 위에 위치시킬것  (4) 인간 영혼 과학적지식 전체의 개입이 권력관계에 의해 신체가 취급되는 장악 수단의 변화에 의해 초래된 효과가 아닌지 구한다. 요컨대, 처벌 수단의 변모 연구를  연구함에 있어 신체에 관한 정치 기술론을 출발점으로 삼도록 시도할 (53).

 

노예제 경제에서는 처벌기국의 역할은 보조적인 노동력을 제공하는 것이고, 봉건사회가 되자 신체야 말로 대체로 사람들이 좌우할 있는 유일한 재산이므로 신체 중심의 징벌이 급격히 증가, 산업화 체계가 노동력의 자유시장을 필요로 함에 따라 강제 노동의 역할은 19세기의 처벌 기구안에 감소하게 되고, 대신에 교정을 목적으로 하는 구류가 행해지게 된다.   우리 사회에서 처벌제도를 신체에 관한 일종의정치경제학속에서 재정립해야 한다(55). 신체를 공격하고 낙인을 찍고, 훈련시키고, 고통을 주고, 노역을 강제하고, 의식을 강요하고 그것에 여러가지 기호를 부여한다. 신체에 대한 이러한 정치적 공격은 복합적이고 상호적인 여러 관계에 따라서 신체의 경제적 활용과 연결된다. 신체는 생산하는 신체인 동시에, 복종하는 신체인 경우에만 유익한 힘이 되는 셈이다 (56)

 

신체의 지식과 체력을 지배하는 능력 이상의 것인 체력의 통제가 존재 있는 것이다. 결국 지식과 통제가 신체의 정치적 기술론이라고 부를 있는 것의 내용을 이룬다. 기술론 자체는 기구와 효력의 점에서는 전혀 다른 차원에 위치해 있다. 중요한 것은 앞에서 말한 국가기구와 제도가 작용시키는 이른바 권력의 미시 물리학이라는 것인데 그것의 유효한 영역은 이러한 기구와 제도의 대규모 작용과 그것들의 물질성과 힘을 포함하는 신체 자체의 사이에 놓여 있다. (57)

 

권력의 미시물리학의 가설들: 행사되는 권력은  하나의 소유물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전략 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권력지배의 효과는 소유에 의해서가 아니라  배열ᆞ조작ᆞ전술ᆞ기 술ᆞ작용 등에 의해 이루어진다.  권력 속에서 우리는 소유할 있는 어떤 특권을 찾아 내기보다는 오히려 긴장되어 있고,  항상 활동 중인 관계망을 찾아내야 하며, 권력의 모델로서 양도ᆞ거래 행하는 계약이라 든가  혹은 영토를 점유하는 정복이 아니라 오히려 영원히 지속되는 전투를 각해야 한다. 권력은 소유되기보다는 행사되는 것이며, 지배계급이 획득ᆞ보존하는특권 아니라 지배계급의 전략적 입장의 총체적 효과이고, 피지배자 입장을 표명하고 때로 장시켜주기도 하는 효과라는 것이다.이권력은 그것을 갖지 못한 자들에게 다만 단순하게 일종의 의무 내지 금지로서 강제되는 것은 아니다. (58).

 

어떤 지식의 영역과 상관관계가 조성되지 않으면 권력적 관계는 존재하지 않으며, 동시에 권력적 관계를 상정하거나 구성하지 않는 지식은 존재하지 안흔다. '권력과 지식' 이러한 관계 들은 권력으 제도와 관련해서 자유로울 수도 있고, 자유롭지 않을 수도 있는 사람의 인식 주체를 바탕으로 하여 분석되지 않는다.  그와 반대로 고려에  두어야 것은 인식하는 주체, 인식되어야 대상 인식의 양태는 모두가 권력-지식의 기본적인 관계와 그것들의 역사적 변화의 결과들이라는 점이다. 요컨데 권력에 유익한 지식이든 불복종하는 지식이든 간에 하나의 지식을 창출하는 것은 인식주체의 활동이 아니라 권력-지식의 상관관계이고  그것을 가로지르고 그것이 조성되고, 본래의 인식 형태와 가능한 인힉영역을 규정하는 과정과 싸움이다. (59)

 

칸토로비치의국왕의 신체 대한 분석에 따르면 국왕의 신체는 중세에 만들어진 법률 중심의 신학에 의거한 이중적 역할의 신체라는 것이다. 국왕의 신체는 살다가 죽는 일시적인 요소외에 다른 요소를 내포하고 있는데, 그것은 시간을 초월하여 머물고, 왕국의 구체적인 그러나 감촉되지 않는 신성불가침의 지주로서 보존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국왕 측에서의 권력을 보충하기 위해 국왕의 신체의 이중화가 생겨났다고 하면,  사형수의 복종하는 신체에 행사되는 과잉 권력은 또다른 유형의 이중화를 불러 일으키지는 않았을까?    신체가 아닌 비신체적 이중화, 마블 리가 말한 것처럼  ‘영혼의 이중화. 그렇다면 처벌 권력의 '미시 물리학' 역사는 하나의 계보학, 아니 오히려 근대 정신의 계보학을 만들기 위한 요소가 것이다

정신은 실재하며, 그것은 하나의 실재성을 갖고 있고 정신은 신체의 주위에서 표면에서 내부에서 권력의 작용에 의해 끊임없이 만들어지는 것이며 그권력이야 말로 보다 일반적으로는 감시받고 훈련받고 교정받는 사람들, 광인, 유아, 초등학생, 피식민자, 어떤 생산기구에 묶여 살아 있는 동안 계속 감시당하는 사람들, 그러한 모든 사람들에게 행사되는 것이라고 정신의 역사적 실재성이라고 할대, 정신은 기독교 신학에 의해서 표상되는 의미에서는 정신과는 달리, 태어나면서 죄를 범해 벌을 받야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처벌, 감시, 징벌, 속박 등의 소송절차를 거쳐 생겨나는 것이다. 한권력의 관련 형태들이 어떤 지식을 만들어 내고 또한 지식이 권력의 여러 성과들을 뒷받침 해주고 강화해 있는 어떤 톱니바퀴의 장치이다. 영혼이 인간 속에 들어가 살면서 인간을 생존하게 만드는 것이고 그것은 권력이 신체에 대해 행사하는 지배력안의 부품인 것이다. 영혼은 정치적 해부술의 성과이자 도구이며 또한 신체의 감옥이다. (61) 

 

나는 감옥에 관한 역사를 쓰려고 한다. 이것은 완전히 시대 착오적인 것일까 ?  나의 의도를 현재의 시대적 상황과 관련 속에 과거의 역사를 집필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을 것이며, 현재에 대한 역사서술이라고 이해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럴 것이다. (63)

 

 

2 신체형의 호화로움

 

프랑스 대혁명까지 형벌실무를 지배해 것은 1670년의 왕령이었다. (65) 

왕령이 몇가지 점에서 이전에 있었던 칙령의 가혹성을 더욱 증대 시켰다.  고전주의 시대의 전성기에 빈발했던 민중 봉기, 가깝게 들여왔던 내란의 함성, 고등법원을 제쳐놓고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려는 국왕의 의지, 이러한 점들이 무자비한 형벌제도의 존속을 설명 (99)

 

사용되는 폭력의 극단성 자체가 사법의 영광을 만드는 요소가 것이다. 죄인이 고통을 받아 신음하고 비명을 지르는 것은 사법의 수치스러운 측면이 아니라, 스스로의 힘을 과시하는 사법의  의식 그자체이다. 형벌로서의 신체형은 신체에 대한 마구잡이식 처벌을 뜩하지 않는다. 그것은 세분화된 고통을 창출해내는 일이며, 형벌의 희생자들을 낙인찍고 처벌하는 권력을 과시하기 위하여 조직된 의식이지, 자기가 세운 원칙을 잊고 무절제하게 표현되는 사법 권력의 분도는 아닌 것이다 신체의 그단성에는 권력의 경제학이라는 모든 논리가 담겨 있다. (69)

고문에서 집행으로의 순환 과정이 완결되는데, 이과정에서 신체는 범죄의 진실을 생산하고 생산하였다. 아니 오히려 신체는 죄의 시험과 의식의 전작용을 통해 범죄가 행해진 것을 자백하고 스스로 범죄를 범했다고 진술하고, 자신 속에, 자신위에 범죄가 각인되어 있음을 나타내고, 징벌의 조작을 감내하고, 그효과를 가장 화려한 방식으로 표출하는 요소이다. (87)

처벌권은 군주가 보유한 자신의 적과 싸울 권리의 한측면이 된다. 처벌하는 것은살생권 로마법중에서메룸 임페리움 명칭으로 불리는 생사여탈의 절대적 권력 군주가 스스로의  법의 시행에서 중죄에 대한 형벌을 명할때에 사용하는 권리에 속한다. (89)

신체형은 법률적 정치적인 기능을 갖는다, 중요한 것은 상처받은 군주권을 회복시키기 위한 의식이다. 의식은 군주권을 화려한 형태로 과시하면서 그것을 회복시킨다. (89)

진실과 권력의 상관관계는 모든 처벌 기구의 핵심에 있는 것이며, 상관관계는 형태도 다르고 효과도 다르긴 하겠지만, 현대적 형벌제도의 실제 내용안에서도 있는 현상이다. (99)  

범죄문학- 암흑소설. 추리소설. 범죄의 아름다움과 위대성의 발견. 위대성이란 범죄를 행할 권리가 있으며 범죄는 현실적으로 위대한 사람들이 갖게 마련인 권이기도 하다(119-120).

 

 

2 처벌

1 일반화된 처벌

 

형벌을 완화시켜 범죄에 적합한 것으로 해야 한다. 사형은 살인범에게만 부과해야 한다. “인간성에 위배되는 신체형은 폐지해야 한다.”(123).

민중은 ‘유혈의 참사를 보는 익숙해져서 ‘피를 흘려야만 복수할 수있다 것을 알게 된다. 무수히 많은 적대적 포위 공격의 대상이 되는 처형의 의식에서 우리는 무장한 사법의 비정상적 행위와 위협당하는 민중의 분노가 교차되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124)  

법제의 형벌 완화보다 선행하여 범죄의 내용이 완화된 것이다. 18세기 사법은 상대적인 빈도수가 증대한 절도에 대해서 한층더 완만하고 한층 겁고 한층더 가혹해 졌는데 이러한 비행에 대해 취한 사법부의 태도는 계급적인 사법에 의거한 부르주아적 태도인 것이다. (126) 

보다 적게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처벌할 , 가혹성이 완화된 형태로 처벌하는 것이면서, 보다 많은 보편성과 필연성이 따르는 처벌이 , 처벌권을 사회구성체 속에 보다 깊숙이 집어 넣도록 등이다. (137)

신체형이야말로 군주의 무제한적 권력과 항상 발생하기 마련인 민중의 위법행위가 뚜렷이 결합되어 있는 형상이었기  때문이다. 형벌의 인간성, 그것은 전자의 권력과 후자의 위법 행위에 모두 제한을두어야 한다는 처벌 제도에 부여된 규칙이나 다름 없다. 사람들이 형벌에서 존중해 주려는 인간의 의미는 이러한 이중적 제한에 부과하는 법률적이고 도덕적인 형식인 것이다. 형벌제도라는 것이 모든 위법행위를 근절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위법 행위를 차이에 따라 나누어 관리하기 위한 장치로서 만들어진 것임을 이해애야 한다. (146)

 

(1) 형벌 개혁의 목표를 이동시켜 그것의 등급을 변화시킬

(2) 한층 미세해지면서 사회체(le corps social) 안에 보다 광범위하게 확산된 목표물에 영향을 미칠 있는 새로운 전략을 세울

(3) 사회체 속에서 처벌을 조정하여 성과를 조절하기 위한 새로운 기술을 찾아낼

(4) 징벌의 기술을 규정화하여 완성시키고 보편화시키기 위한 새로운 규칙을 정할

(5) 기술의 행사를 동질적인 것으로 만들

(6) 기술의 효과를 증대시키고, 그것의 회로를 다양하게 확산시켜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비용을 줄일

(7) 요컨대, 처벌 권력의 새로운 관리방식과 새로운 기술론을 만들

아마도 이러한 것들이 18세기 행형 개혁의 본질적인 존재 이유일 것이다. (147).

 

법은 자연본성에서 벗어나는 인간을  인간적으로 다루어야 하는 것으로 되는데 그것의 동기는 범죄자의 내면에 깊숙이 감추고 있을지도 모르는 인간성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 초래하는 여러 결과들에 대한 필연적인 조절에 기인한다. 경제적 합리성이야말로 형벌의 척도가 되고, 그것의 정비된 기술을 규정하게 되는 근거이다. 인간성이란 이러한 경제성과 그것에 의한 면밀한 계산에 부여된 명칭이다. 형벌에 관련된 사항의 기초는 인간성이 규정하고 정치가 판단을 내린다는 것이다.  (150)

 

하나의 범죄가 사회 집단에 미치는 해악은 바로 범죄에 의해 초래되는 무질서이다. 그것은 추문을 일으키는 원인이자 나쁜 본보기이며, 처벌하지 않으면 재발될지도 모르는 선동이자, 일반화할 가능성을 담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징벌이 유익한 것이 되려면 죄가 초래할 수도 있는 일련의 무질서로서 이해되는 범죄의 결과를 목표로 아야 한다. “형벌과 경범죄의 성질 사이의 비례 관계는 범죄자가 위반하는 계약이 사회질서에 미치는 영향에 의해서 결정된다.” 처벌은 지나간 범행에 대해서가 아니라, 앞으로 있을지도 모르는 무질서에 목표를 두어야 한다.  처벌은 효과를 노리는 기술이 된다 (152)

 

본보기의 징벌이란, 이제 과시적인 의식이 아니라, 범죄를 방지하는데 뜻을 기호이다. 처벌을 지향하는 기호들의 기술을 통하여 개혁자들의 사회집단 전체를 통해 일반화 있고 모든 행동을 기호 체계화하여 결과 적으로 위법행위가 퍼져나갈 있는 모든 영역을 축소시킬 있는 그러한 경제적이고 효과적인 수단을 처벌하는 권력에 제시하려는 생각을 한다.   권력을 튼튼히 무장시키려고 하는데 동원되는 기술론은 아래 다섯가지 주요한 법칙들에 근거하고 있다(1) 최소 분량의 (2) 관념성 충족의 법칙 (3) 측면 효과의 법칙 (4) 완벽한 확실성의 법칙 (5) 보편적인 지실의 법칙 (6) 최적 특성화의 법칙

우리는 범죄와 징벌과의 대응적 분류의 필요성과 범죄자의 개별적 성격과 일치하는 형벌의 개인화의 필요성이 동시에 나타나는 현상을 보게 된다. (161)  점차적으로 범죄 대신에 범죄성이 형벌의 관여 대상으로 되면서, 초범자와 재범자의 차이는 한층더 중요하게 되는 경향을 보인다. (163)

범죄자가 사회 계약의 테두리를 벗어나 시민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하고, 자기 자신속에 본성적인 야만성의 요소를 지니는 사람으로 불쑥 나타난다. 그는 악당이고, 괴물같은 인물이고, 어쩌면 광인일지 모르고, 병자이고, 마침내는 ‘비정상적 인간으로 나타난다. 언제가 그는 이러한 자격 때문에 과학적 객관화 대상이 되고, 그것에 관련되는 취급을 받게 것이다.  이모든 것은 범죄자와 범죄의 잭관화로 귀결된다. 두가지 어느 경우에서도 처벌 행사의 근저에 있는 권력관계는 객체와의 관련에 의해서 뒷받침되는 것이며, 여기서 범죄는 공통적인 규범에 따라 밝힐 있는 사실로 되어 있을 뿐아니라 범죄자는 종별적인 기준에 의거하야 인식해야 개인으로 되어 있다. (165)

 

범죄인이 인식의 영역안에서 어떤 명확한 개체로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을 기다려 것이다. 그에 반해 다른 한쪽의 객관화는 처벌하는 권력 재편성과 한층더 직접 결부되어 있던 만큼 보다 신속하고 결정적인 몇가지 성과를 올렸다. 예를 들면 기호 체계화, 범죄 규정, 형량 계량 결정, 소송 과정 규칙, 사법관의 역할 규정 등이다. 이렇게 된것은   권력이  관념학파가 만든  담론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이해관계, 표상, 기호의 이론에 따라 인간권력에 행사의 일반적인 조제법이 되었다. 그것은 수단으로서의 기호학과 함께  권력을 위한 문자 기록의 표면으로서의정신’, 관념의 통제에 의한 신체의 예속화.  신체형의 의식에 대한 해부학보다 훨씬 유효한 신체에 대한 일종의 정치학의 원칙으로서의 표상분석이다. (166)

 

다시한번  세르방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보자.  죄와 벌의 개념은 긴밀하게 관련되어야 하고, “중단 없이 연결되어야 .  …  어리석은 전제군주는 노예들을 쇠사슬로 구속할지 모르지만, 참된 정치가는 거보다 훨씬 강하게 관념의 사실로 노예들을 구속한다.  정치가가 사슬의 한쪽 끝을 붙잡아 두는 이성이라는 고정된 측면이다. 또한 사슬은 우리가 구조를 모르면서 스스로 만들 어낸 것이라고 믿고,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더 단단히 조여드는 것이다. 절망감과 시간의 과에 따라 쇠와 강철로 쇠사슬은 부식되고 말지만, 습관으로 굳어진 관념의 결합은 더욱 강하게 조여드는 사슬과 같다. 가장 튼튼한 제국의 흔들리지 않는 기반은 인간의 부드러 두뇌신경조직 위에 세워진 것이다.”(167)

 

 

2 유순해진 형벌

 

예전에 제제로서의 낙인이 신체형을 구성했듯이 이제는 장애로서의 기호가 형벌의 새로운 장치를 구성해야 한다. 장애로서의 기호가 작동하려면 몇가지 조건을 따라야만 한다.  

(1) 가능한 자의적이 아닐 ….  “징벌로부터 범죄를 명료하게 이끌어내는 것이야말로 처벌을 범죄와 조화시키는 최선의 방법이다. 이것이 사법의 승리라고 한다면 그것은 또한 자유의 승리이다. 왜냐하면 경우 형벌은 이미 입법자의 의지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불가피하게 생기는 것이 되어 사람들은 이미 인간이 인간에게 폭력을 휘두른다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상동관계의 처벌을 통해 처벌 권력은 자신의 모습을 감추게 된다.(170)

사람들은 징벌의 무대위에서 감각적으로 직접 이해할 있고, 간단히 계산할 있는 근거가 되는 그러한 죄와 벌의 관계를 확립하려고 한다. 이것은 형벌에 관한 일종의 이성적 미학이다.  형벌은 범죄에 근거해서 이루어져야 하고, 법은 사필귀정인 것처럼 보여야 하고, 권력은 부드러운 자연의 힘처럼 자신이 모습이 드러나지 않은채 작용해야 한다. (172)

 

(2) 이러한 기호들의  작용은 여러가지 힘들의 역학관계와 맞물려 있어야 한다. 범죄에 유혹을 느끼게 만드는 욕망을 감소시켜 형벌이 두려운 것임을 깨닫게 하는 이해 관계를 증대 시키고, 죄와 벌사이의 강렬한 비중관계를 역전시켜 형벌과 그것의 불이익이라는 표상이 범죄와 범죄에 따르는 쾌락에 관한 표상이 비해서 훨씬 선명하도록 해야 한다.(172).  안정되고 해독하기 쉬운 기호들로 되어 있는 형벌은 이해관계의 경제학이나 정념의 역학을 재구성해야 한다

 

(3) 형벌의 시간적 조정 배분의 효용성이 문제된다. 형벌은 기호를 변용하고, 변경시키고, 확립하고, 범죄에 대한 여러가지 제동장치를 만들어 낸다. (174). 장시간에 걸친 일련의 권리 박탈상태는 인간에게 고문의 공포를 주지 않으며, 일시적인 고통의 형벌보다 휠씬 죄인에게 영향력을 행사한다. 박탈 상태는 그것을 목격하는 사람들에게 보복적인 법의 기억을 귾임없이 되살리게 하고 유익한 공포를 언제나 소생시킨다. 시간은 형벌을 운용하는 요인이 된것이다.(175) 

 

(4) 수형자 측에서는 형벌은 기호와 이익계산, 시간의 분배량 등에 의해 만들어진 하나의 장치 이다. 그러나 죄인은 징벌의 표적일 뿐이다. 징벌은 특히 다른 사람들을, 죄인이 가능성이 있는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삼는다. (176). 

수형자의 신체는 과거의 제도에서도 국왕의 것이어서 군주는 신체에 낙인을 찍고 권력의 여러가지 효과를 집행할수 있었다. 이제는 신체가 오히려 사회적인 것으로 집단적이면서 유익한 소유의 대상이 것이다(177).

공공 토목사업은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데 그것은 수형자의 노동에 의한 집단 이익이라는 점과 통제 가능한 징벌의 가시적 성격이라는 점이다. 죄인은 죄값을 치른다. 그가 제공하는 노역과 그가 만들 어내는 기호로 보상하는 것이다.  만인의 정신속에 범죄가 바로 징벌이라는 기호를 남몰래 주입시키는 것이다. (177-178).  

 

(5) 그런 점에서 교묘한 경제적 광고 효과가 생겨난다. 과거의 신체형에서는 공포가 징계의 근거로 되어 있었다. 그것은 신체에서 느껴지는 두려움이나 집단적인 공포, 수형자의 어깨에 새겨니는 낙인과 같이 구경꾼의 기억속에 새겨지는 무서운 형상이었다. 그러나  본보기 징계의 근거가 것은  공중도덕에 대한 교훈이나 담화, 판독 가능한 , 연출적 효과나 회화적 표현형태 등이다. (178)

 

법은 개혁되었으나 결국 법을 위반한 범죄의 자리에 다시 자리 잡은 셈이다. 대신 범죄자는 사회로부터 격리된다. 범죄자는 사회를  떠나게 된다. (179)

 

징벌은 축제라기보다는 교육이고, 의식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펼칠 있는 책이어야 한다. 징벌의 현장을 온가족이 일요일에 견학 있는 법의 정원과 같은 곳으로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사회 질서의 유지와 징벌의 효용성에 관하여 이치에 맞는 변론으로 미리 사람들의 정신을 교육해 후에 젊은이나 어른들이 수시로 광신이나 토목 공사의 현장에 가서 사회에서 추방된 죄인의 무서운 운명을 참관할 있도록 하면 좋겠다. (180)

 

(6) 범죄자들의 의심스러운 영광을 어떻게 소멸시켜 버리는가의 문제였다.  범죄를 영웅시하는 찬양 대신에, 사람들은 주로  징벌에 대한 계산된 두려움 때문에 범죄의 욕망을 중단시키는 억제의 기호만을 이야기할 것이다.  담론은 법을 전달하는 수단이 것이고, 보편적인 기호체계의 변함 없는 원칙이 것이다. 민중시인들은 결국 '영원한 이성의 사도라고 자칭하는 사람들과 마찬가지 입장이 되어 도덕주의자가 것이다. (182)

 

처벌의 도시를 어떻게 상상해야 하는 가의 문제는 다음과 같다. 모든 장소에 징벌을 교시하는 수많은 소극장을 설치하는 것이다. 가혹성이 엄밀한 경제성에 의해 교육적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처벌의 도시 위에는 바로 이러한 철창 감옥이 지배하고 있는 것이며, 새로운 형법에 의해서 이렇게 십자가에 매달려야 하는 인간은 바로 반역죄의 범인이자 존속 살해자인 것이다.(184).

 

감금이 순식간에 징벌의 본질적 형태가 되었다. 1810 이전 사형과 벌금형 중간에 해당하는 감금이 여러 가지 형태로 가능한 처벌의 거의  모든 영역을 차지하게 된다 강제 노동형은 투옥의 형태이다. 도형장은 옥외에서의 감옥이다. 구류, 징역, 구금은 말하자면 동일한 하나의 징벌에 붙여진 여러가지 명칭에 불과하다. (186)

 

감옥이 설치 되도록 한것이다. 국가 기구의 총체적 조직과 합치된 폐쇄적이고 복합적이며 등급화 거대 구조이다. 그것은 전혀 다른 물질성이고 권력의 전혀 다른 물리학이며, 인간의 신체를 포위하는 전혀다른 방법이다. (186)

 

 감옥에 의한 형벌의 식민지화가 놀라운 것은 예전에는 징역형이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처럼 형벌제도 중에서 사형의 바로 아래쪽 위치에 확고히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서 그것이 수많은 신체형의 폐지로 비어 있는 자리를 극히 자연스럽게 차지할 있는 그러한 징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189)

 

영국 모형은 노동의 원칙에 덧붙여 독방을 교정의 본질적 조건으로 삼는 것이다. 1775 한웨이가 제시했던 것이다.독방은 수형자가 나쁜영향을 받지 않고 자기반성을 하여  자기 양심 속에서 선의 목소리를 재발견할 있는 무서운 충격효과를 자아낸다는 것이다. 경제적 인간에게 특유한 이해 관계의 작용뿐만 아니라,  도덕적 주체 욕구를 다시 만들어낼 있을 것이다. 독방생활은 신교적인 영국 같은 사회에서  경제적 인간과 동시에 종교적 양심을 재건 있는 수단이 된다.  법과 도덕으로의 복귀와 범죄 사이에서 감옥은 "두세계 사이의 공간이자 국가의 편에서 잃어버린 신하가 국가로 되돌아 가게 개인적 변화에 적합한 장소가 것이다.  (197).

 

징계와 교정은 죄수와 감시하는 사람들 사이에 전개되는 과정이다.  개인을 완전히 변형시키는 개조 과정, 개인이 강제되는 매일의 노동을 통해서 신체 습관을 개조하고, 또한 개인을 대상으로 정신적 배려를 통해서   정신과 의지를 개조하는 과정인 것이다.  행정기관인 감옥은 동시에 정신을 개조하는 기구가 것이다 (201)

 

품행에 대한 이러한 통제와 변화에는 - 조건인 동시에 결과로서 - 개개인에  대한 지식의 축적이 수반된다는 점이다. 감옥안에서 보여주는 품행 여하에 따라, 분규가 가능해진다. 감옥은 여러 종류의 결함과 약점들을 분류할 있는 일종의 상설감시 시설이된다.  인간을 개별화시키는 지식의 총체가 조직화되는 셈이며, 개인이 숨기고 있으며 일상적으로 감시되는 행위 속에 나타나는 잠재적 위험을 참고의 대상으로 삼는다. 감옥은 지식의 도구로서 작용한다 (203)

 

형벌이 가해지는 지점, 형벌이 개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수단은 무엇인가 ?  표상이다. 이해 관계의 표상이며, 개인의 이익과 불이익, 즐거움과 불쾌감의 표상이다. 개인의 교정은 기호 체계와 그것에 의해 확산되는 표상의 강화를 통해 주체로서 개인의 재규정화 과정을 확고히 하게 된다. (205)

 

교정 중심의 형벌기구는 아주 다른 방식으로 작용하고 있다. 형벌의 적용지점은 표상이 아닌 신체 자체이고, 시간이고, 날마다의 동작과 행동이다.  또한 그것은 정신이기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습관적으로 되풀이 되는 지점의 정신이다. 행위의 근본 원칙으로서의 신체와 정신이야 말로 처벌기관의 관여에 제시되는 기본요소를 이룬다. 관여는 어떤 표상기술에 근거한다기 보다 개인에 대한 계산된 통제에 근거해 있다. (206)

 

교정 기술을 통해 사람들이 재구성하려고 애쓰는 것은 무엇일까 ? 그것은 사회 계약의 기본적 이해 관계 속에 걸려 있는 권리의 주체가 아니라 복종하는 주체이고, 습관이라 규칙, 명령에 복종을 강요당하는 개인이고, 개인의 주변에서 부단히 영향력을 가하고 또한 개인으로서는 자기의 내부에서 자동적으로 작용하게 내버려 밖에 없는 어떤 권위이다. 사회 계약상의 법적 주체를 재구성하는 것과 어떤 권력의 일반적이며 동시에 세부적인 모든 형식에 순응하는 복종의 주체를 형성하는 것이다. (206)

 

사회의 그물눈 전체에 유출되는 처벌의 권력은 어느 지점에서도 작용하게 되고, 결국에 가서는 사람이 사람에게 행하는 권력으로서가 아니라   개인에 대한 만인의 직접적 반응으로서 인식될 것이다.. 이는 죄인의 신체와 시간에 대한 세심한 장악이고, 권위와 지식 체계에 의한 죄인의 동작과 품행의 단속이다. 그것은 죄인을 사람 사람 교정시키기 위해서 그들에게 적용하는 신중한 정형수술이다. 이는 엄밀 의미에서 사법권으로 부터와 마찬가지로 사회 자체로부터도 유리되어 있는 권력의 자율적 지배이다. 감옥의 출현과 더불어 생긴 것은 처벌하는 권력의 제도화이다 (208).

 

군주와 그힘, 사회조직, 행정기구가 있고, 낙인과 표명과 흔적이 있고 의식과 표상과 훈련이 있다. 격파된 적이 있고, 새롭게 규정되고 있는 법적 주체가 있고, 직접적인 강제권에 복종되는 개인이 있다. 1) 신체형을 당하는 육체 (르네상스, 과시하는 권력),  2) 자신에 관한 표상이 조작되는 영혼 (고전주의, 이데올로그들의 표상 조작),  3) 훈육을 받는 육체 (근대, 처벌 권력) 이러한 구성요소들로 이루어지 가지 계약이야 말로  18세기 후반에 상호 충돌하는 세가지 형벌 구조의 특색을 이루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 셋을 법이론으로 환원시킬 없으며, 어떤 구구나 제도와 동일화 없고 그세가지 근원을 도덕적 선택에서 구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것들은 처벌의 권력이 의존해서 행사되는 방식들로서의 가지 권력 기술론이다. 어떻게 하여 세번째 것이 결국 주도적인 것으로 부각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강제권, 신체, 독방, 비밀을 중심으로 처벌 권력의 모형이 어떻게 하여 표상, 무대, 기호, 공개, 집단을 중심으로 모형으로 교체 되었는가 ? 처벌의 물리적인 행사 (신체형이 아닌) 제도적인 토대가 되는 감옥과 더불어, 징벌의 기호들과 기호들을 유포시킨 떠들썩한 축제 분위기의 사회적 작용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는가 ? (210)

 

 

 

3 규율

 

1 순종적인 신체

 

메트리의 <인간-기계>  정신의 유물론적 환원인 동시에  훈육에 관한 일반 이론이기도 한데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분석 가능한 신체에  조작 가능한 신체를 결부시키는순종이라는 개념이다. 복종시킬 있고, 쓰임새가 있으며, 변화시킬 있고, 나아가서는 완전하게 만들 있는 신체가 바로 순종하는 신체이다. 유명한 자동 인형은 단지 인체를 설명하는 하나의 수단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다. 정치적 인형이었고, 권력의 축약된 모델이기도 했다. (215)

 

17-18세기를 거치면서 규율은 지배의 일반적 양식이 되었다.  신체에 대한 작업과 신체의 요소, 몸짓, 행위에 대한 계획된 조작이라는 강제권의 정치학이다. 하나의 '권력 역학'이기도 정치 해부학 탄생하고 있는 것이다

기술적 방법으로 결정된 효용성에 의거하여 원하는 대로 다른 사람들을 움직이도록 하기 위해서 어떻게 그들의 신체를 장악할 있는가하는 방법을 규정하고 있다. 규율은 이렇게 복종되고 훈련된 신체, 순종하는 신체를 만들어 낸다. (217) 

 

기술이야 말로 신체에 대한 정치적이고 세부적인 공격 양식, 권력의  새로운 '미시 물리학' 규정하기 때문이다  규율은 세부적 사실의 정치 해부학이다. (219). '돌을 깎는 방법 관해서는 한편의 역사를 서술할 있을 것이다.  여기서  역사는 도덕적 계산과 정치적 통제의 관계 속에서 세부적 사실이 실리적 합리화를 지향해 역사를 뜻한다.  (219).  학교나 병영이나 공장에서 아주 작은 것과 무한한 것에 이러한 종교적 계산법에 대해  세속화 내용과 경제적이고 기술적인 합리성을 부여하게 된다. (221). 

 

인간에 대한 통제와 활용을 위한 세부의 치밀한 관찰, 그리고 동시에 사소한 것에 대한 정치적 고려는 고전주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일련의 총괄적인 기술과 방법, 지식, 설명, 처방, 데이터 등의 일괄적인 자료를 공유하게 된다.  이러한 사소한 일들로부터 근대적 휴머니즘의 인간이 탄생하게 되었을 것이다. (222)

 

 

분할의 기술

 

규율은 우선 공간에 따른 개인의 분할을 실행한다.

(1) 폐쇄성 - 공장은 이제 분명히 수도원이나 성채나 폐쇄적인 도시를 닮아가게 된다. (225). 

 

(2) 공간의 재구성 - 기본적인 위치 결정의 원칙이나 분할 방식의 원칙에 따라 이루어진다. 개인마다 정해진 자리가 있고 또한 지역마다 할당되는 개인이 있다. (225).

 

(3) 공간의 체계화 - 감시하고 위험한 연락을 차단해야 필요성 뿐만 아니라, 유익한 공간을 만들어낸 필요성에 부응하기 위해 장소가 결정된다. 해군병원, 엄격하게 공간을 분배하고 구획지을 필요성이 생긴다. (228)

 

(4) 서열 - 서열은 어떤 분류, 등급속에서 사람이 차지하는 위치이고 간격이다. 규율은 서열의 기술이고, 배열을 변화시킬수 있는 기술이다.  학교의 질서 안에서 개개인의 배치에 관한 골격을 규정하게 되었다. 교실, 복도, 운동장에서의 학생의 정렬, 숙제나 시험과 관련하여 모든 학생에게 부과는 서열, 매주/매월/매년 학생 각자가 갖게되는 서열, 연령순에 따른 학급의 배치 등이다. 서열 중심적 공간편성은 초등 교육의 기술적인 변화의 하나 였다.  (231)

 

교실은 주의를 기울여 분류하는 교사의 시선에 놓인, 여러항목이 들어 있는 알람표와 같은 모양이 것이다...  규율은독방', ‘자리', ‘서열 조직화함으로써 복합적인 공간을, 건축적이면서 동시에 기능적이고 위계질서를 갖는 공간을  만들어낸다(233)

 

자연계의 분류법이 개별적 특징에서 범주에 이르는 위에 설정된 반면, 규율의 전술은 개별적인 것과집단적인 것을 연결하는 축위에 자리잡고 있다. 한개인을 개인으로서 특징짓는 동시에, 어떤 일정한 다수에 질서를 부여하도록 한다. 전술이야말로 개별적인 요소들로 구성된 전체에 대한 통제와 그활용을 위한 일차적 조건이다. 그것은 '독방 중심적' 이라고 명명할 있는 권력의 미시 물리학을 위한 기초가 되는 것이다. (235)

 

활동의 통제

(1) 시간표는 오래된 유산이다. 정확한 모형은 수도원에서 유래 되었다. (235)

 

(2) 행동에 대한 시간의 작성 - 1776년의 왕령이 규정하고 있는 사항은 어떤 행동에 대한 전반적인 틀로서 시간표가 아니라 외부로부터 부과되는 집단적이고 강제적인 리듬 이상의 것이다. 행동에 관한 일종의 해부학적- 시간 구성의 도식이 규정된 셈이다. 시간이 신체를 관통하게 것이다. 그것과 더불어 권력의 모든 치밀한 통제가 진행된다 (239)

 

(3) 신체와 동작의 상관화 훈련받은 신체는 효과적인 동작의 기본인 것이다

 

(4) 신체-객체의 유기적 연결,  대상-신체의 분절화  훈련은 신체와 신체에 의해 조정되는 객체가 유지해야 여러 관계를 개별적으로 규정한다. 양자사이에서 조심스럽게 연결된  톱니바퀴 장치를 구성한다.  18세기 군사학의 교련신체에 대한 도구적 체계화라고 부를 있는 한예이다.  권력은 병기의 신체ᆞ도구의 신체ᆞ기계의 신체라는 복합체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242)

 

(5) 철저한 이용 - 전통적 형태의 시간표를 지탱하는 근본적으로 부정적인 것이다. 신에 의해서 계산되고 인간에 의해 지불되는 시간의 낭비는 금지되었고, 시간표는 도덕적 과오이며 경제적 불성실이라 수있는 낭비의 위험을 막아야 했다. 규율은 긍정적 관리를 목표로 삼으며 적극적 경제 시간의 이론상으로 항상 증대되어 가는 이용의 원리를 세운다. 시간을 사용하기 보다 완전히 소비시켜 버리는 것이다

사소한 순간의  활용도 강화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 한다. 프러시아의 프리드리히 2세가 계속 전쟁에서 이기게 되자  전유럽이 이규정집을 모방했던 것이다. 1743 프러시아 ‘보병규범’  이러한 복종의 기술을 통해서 새로운 객체가 만들어 지고 있는 것이다. 객체는 기계적인 신체 - 이미지가 규율 훈련에 의한 인간 완성을 꿈꾸던 머릿속에서 아주 오랫동안 떠나지 않던 굳건하고 활동적인 그러한 신체- 외양을 갖춘다. (243-245).

규율 중심 권력은 분석적이고,  '독방 중심적' 뿐만 아니라, 자연적이고유기적' 개인을 상대적인 대상물로 갖게 된다 (247)

 

발생의 구조 

1667 고블랭 직물공장 창설 관련 칙령에 부속학교의 설립이 이렇게규정되어 있다. 1737 고블랭 직물제조 견습생을 위한 도안학교를  설립하도록 했다.   가지 절차를통해 이루어지고 군대 조직이 명료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점이다.  (1) 시간의 연속화ᆞ계열화, 시간을 구분하고 조정하여 몇단계로 분해 (2) 분석적 도식화, 힘과 숙련성과 순종성에 관한 전반적인 훈련을 보장  (3) 시험 (4) 서열화 ᆞ단계화. 이제 개인은 수준이나 지위를 특별히 규정한 시간적 순서의 계열 속에 편입된다.  훈련의 규율로 구성된 다성 음악과 같다. (251). 연속적 활동의 계열화는 시간에 대한 권력의 포위 공격을 가능 하게한다.  (252)  시간은진화하는 시간인 것이다.  행정과 경제면의 통제 기술에 의해서 계열을 이루고, 방향이 정해져 있으며 또한 축적되는 특징을 갖는 사회적 시간이 출현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진보라는 의미에서 진화의 발견이다. 한편 규율의 기술은 개인적인 여러 계열을 출현시키고 있는데 이것은생성이란 의미에서 진화의 발견이다 무렵 형성되고 있던진화 역사성은 그것이 심층적으로 이루어진 것이어서 지금은 누구에게나 명백한 사실로 되어 있지만 사실은 권력의 기능 방식과 관련되어 있다.(253) 신체와 시간에 관한 정치적 기술의 한요소로 편입된 훈련은 천상의 세계로 올라가기 위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반복되면서  완성되는 복종을 지향하는 것이다. (255)

 

힘의 조립

규율은 통제하는 신체로부터 가지 성격이 구비된 개체성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공간 배분 작용에 의해서) 독방 중심적이고, (활동의 규범화에 의해서) 유기적이며, (시간의 축적 의해서) 생성적이고, (여러가지 힘을 조립하는 점으로는) 결합적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목적으로 규율은 가지 주요한 기술을 사용한다. 첫번째 일람표의 작성, 둘째  작전을 세우고, 셋째 훈련을 시키며, 넷째 힘의 조합을 확고히 하기 위해 전략을 꾸민다.(263).

 

전략으로서의 전쟁은 정치의 연장일지 모른다. 그러나 정치가 정확하고 직접적인 의미에서 전쟁의 연장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내란방지를 위한 기본적 수단으로서 군사적 모델의 연장처럼 이해되어 왔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전쟁은 정치적 수단과는 다른 수단으로 지속되는 정치에 불과하다.”  클라우제비츠(1780-1831) 

 전략 거쳐가는 정치-전쟁 이라는 계열이 있고전술 거쳐가는 군대-정치라는 계열이 있다. 전략을 통하여 국가간의 정치를 수행하는 방법으로 전쟁을 이해 있다면,  전술을 바탕으로 하여 시민사회에서 전쟁이 없는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원리로서 군대를 이해 있다(264)

 

사상사를 연구하는 사학자들은 완전한 사회의 꿈을 18세기 철학자들과  법학자들의 것으로 돌리고 있지만 사회에 대한 군사적 통제의 꿈도 있다.  그것의 기본적 준거는 자연 상태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의 기계장치의 주도면밀하게 돌아가는 톱니바퀴에 있으며,  원시적인 계약이 아니라  끝없는 강제권에, 기본적 인권에서가 아니라  끝없이 발전되는 훈련 방법에, 그리고 모든 사람의  일반의지가 아니라 자동적 순종에 있었다(265).

 

 “규율을 거국적인 것으로 만들어야 것이다.” 라고 기베르는 말한 있다…. 나폴레옹 체제와 그와 더불어 체제를  대체할 국가 형태의 도래가 이제 멀지 않은 것인데.. 체제를 만들고 준비한 사람들은 법학자들뿐만 아니라 병사, 국정 자문위원, 하급관리, 법률 , 당파의 사람들이기도 하였다는 점이다. (265)

 

2 효과적인 훈육방법

 

교묘히 징수하거나 보다 많이 사취하기 위해 훈육을 시킨다고 말하는 것이 좋을지 모르겠다 분해 방법은 필요하고 충분할 정도의 개체성에 이를 때까지 계속 추진된다.  유동적이고 혼란하며 무익한 많은 신체와 다량의 힘을 개별적 요소의 집합체로 만들게끔 훈육을 시킨다.  규율은 개인을제조한다.’  규율은 개인을 권력 행사의 객체와 도구로 간주 하는 권력의 특정한 기술이다.  규율을 근간으로 하는 권력의 성공은 아마도 단순한 수단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기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수단이란 위계질서적인  감시의 눈빛, 규범 화된 상벌 제도 그리고 이들을 이러한 권력에 특유한 방식인 시험을 통하여 결합 시키는 방식 등이다(267-268).

 

위계질서적 감시

야영지란 총괄적인 가시성의 효과로 작용하는 권력의 도해이다. 야영지와 은밀한 감시 기술과의 관계는 카메라와 거창한 광학과의 관계와 같다. 유기적으로 배치되고 세부에 미치는 내적인 통제를 위한,  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가시적으로 만들기 위해서 건립되는 그러한 건축의 문제가 우선 제기된다. 개개인을 탈바꿈시키기 위한 조직자의 구실을 하게 건축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들에게 권력의 효과를 행사하여 그들을 인식의 대상으로 만들어 결국 그들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271)

 

 병원-건물, 학교-건물, 공장-건물, 감옥-건물, 건물들 중심을 향한 있는 높은 건물은 관리라는 행정적 기능, 감시라는 치안유지적 기능,  단속과 검사라는 경제적 기능, 복종과 노동의 장려라는 종교적 기능을 갖도록 만든 것이다.  이러한 원형건축물들이 위세를 떨쳤던 이유는 그것들이 어떤 정치적 유토피아를 표현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273)

감시가 개개인을 대상화 한것은 사실이지만, 감시의 운용은 상부에서 하부로, 또한 어느정도까지는 하부에서 상부로, 또한 측면적으로 이루어지는 관계망으로 운용되기 때문이다. 이구조에서는 감시자는 항상 감시 받도록 되어 있다. (279) 

 

규범화한 제재

(1) 작업장, 학교, 군대에서는 미시적 형벌 제도가 만연되어 있다.  시간 (지각, 결석, 일의 중단), 품행 (버릇없음, 반항), 활동 (부주의, 태만, 열의 부족), 말투(잡담, 무례함), 신체 (단정치 못한 자세, 불결) 성의 표현 (저속함,추잡함) 등이 처벌의 사항 이었다. (281). 모든 사람이 처벌되고 처벌하는 보편적 구조 속에 포획되어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처벌이라는 단어에는 아동이 자기가 행한 실수를 느끼게 하는 모든 , 아동에게 수치심을 주고 창피하다는 생각을 일으키게 하는 모든 방법이 포함된다. (282) 

 

(2) 규율 중심적 형벌의 대상은 규칙 위반, 규칙에 따르지 않는 일체의 사항,  모든 일탈 행위이다(282). (3) 규율에 따르는 징벌은 일탈행위를 없애도록 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 벌은 본질적으로 교정하는 역할을 해야한다.  (4) 처벌은 보상-제재라는 이중적 체계의 요소일 뿐이다.  (5) 서열이나 등급에 의한 분류는 이중적 역할을 한다.   자체가 보상 혹은 처벌과 같은 기능을 수행한다.  규율은 서열과 지위를 분명히 하여 승진/진급의 작용을 통해 포상하거나 낙제시키고 서열을 떨어 뜨림으로써 벌한다. 처벌의 기술은 다섯가지 조작을 이용한다. 그것은 매순간을 통제하는 상설적인 처벌 제도는 비교하고, 구분하고, 서열화하고, 동질화하고 배제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그것은 모든 것을 규범화한다..(287) 근대적인 형벌제도의 역사가 드러내주고 있는 법률적, 인간학적인 그러한 처벌제도의 기능은 인문과학과 형법학의 중복 결합에 기인한 것도 아니고, 새로운 합리성과 그것에 수반되어 있는 것처럼 생각되는 휴머니즘의 특유한 현상속에 기인한 것도 아니다. 기능은 규범화된 제재의 새로운 메커니즘을 적용시킨 규율의 기술속에서 형성된 것이다. (288)

 

시험 

 

규율ᆞ훈련 과정의 중심에 있는 시험은 객체로 인식되는 사람들의  예속화를 나타내는 것이자, 예속된 이들의 대상화 (객체화) 나타내는 것이다 (289).  

시험은 (1) 가시성의 경제를 역전시킨다. 규율에서 보여야 사람은 복종하는 자들이다.  그들을 빛속에 드러냄으로써 그들에게 행사되는 권력의 지배는 확보된다.  군주의 비영속적 가시성은 신하들의 필연적 가시성으로 전환된다. 무한히 계속되는 시험과 강제적인 대상화의 시대가 것이다.

(2) 시험은 또한 개인을 자료의 영역 안으로 집어넣는다.  개인을 감시영역안에 두는 기록망 속에 넣어 두는 것이다

기록에 의존하는 권력은 규율의 톱니바퀴 같은 장치 안에서 본질적인 부품처럼 조립된다. 개인적인 것을 권력관계의 내부로 끌어들인 최초의 ‘형식화 나타내는 것이다(297).

개인에 대한 학문이 가능한고 정당한 것인가를.. 인간에 관한 과학의 탄생? 아마도 그것은 신체와 동작 , 행동에 대한 근대적인 강제권의 작용이 이루어진 그러한 영광스럽지 않은 고문서 보관소 안에서 그해답을 찾아야 것이다.(298)

 (3) 시험은 기록에 관련된 모든 기술을 통하여 개인을 하나의 사례로 만든다.  그것은 지식의 대상이 되는 동시에 권력의 포획물이 되는 그러한 사례이다. (298)

 

개인이라는 것이 사회의 이데올로기적 표상의 허구적 원자일 있겠지만, 규율이라고 명명되는 권력의 특유한 기술에 의해 제조되는 현실의 모습인 것이다. 이제는 배제한다. 처벌한다. 억누른다. 검열한다. 고립시킨다. 숨긴다. 가린다 등의 부정적인 표현으로 권력의 효과를 기술하지 말아야 한다. 사실상 권력은 생산한다. 현실적인 것을 생산하고 객체의 영역과 진실에 관한 의식을 생산하는 것이다. 개인과 개인에 대해 취할 있는 지식은 이러한 생산의 영역에 속한다개인과 개인에 대해 취할 있는 지식은 이런 생산의 영역에 속한다 (302).

 

3 판옵티콘 감시체제

 

 르네상스의 나병환자는 배척, 추방-봉쇄의 현실속에 사로 잡혀서 개개인의 구별이 별로 중시 되지 않은 대중속에서 그렇듯이 자취를 감춘다고전시대의 페스트 환자는 개인적인 차이들이 바로 다양하고 상호관련적이고 보다 세분화한 권력의 억압적인 효과를 이루는 그러한 섬세하고 전술적인 바둑판 모양의 분할 속에서 포착된다. 나병이 낙인찍히는 것이라면 페스트는 분석되고 배치되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낙인찍기 위해서건 아니면 교정하기 위해서건 비정상인을 둘러싸고 행해지는 권력의 모든 메커니즘은 그러한 기술과 제도의 근원이 되는 두가지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309).

 

제레미 벤담의 『판옵티콘』 수감자는 보일 , 없다. 그는 정보의 대상일 , 정보의 주체가 없다 (310). 벤담은 권력이 가시적이고 확인될 없는 것이 되어 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312). 장치 메커니즘, 자동적, 비개성적, 익명적(313). 보이는 자는 권력관계를 내면화하여 1 2역을 수행한다. 그는 스스로 예속화의 원칙이 된다(314). 벤담은 규율을 결함이나 중단 없이 사회를 관통하면서 도처에서 항상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는 여러 장치의 그물망으로 만들기를 꿈꾼 것이다. 규율의 메커니즘이 구석구석까지 넘나들고 침투해 들어가는 사회의 기초적인 운용을 계획하는 것이다(323)

 

규율에는 두가지 이미지가 있다 한쪽 근단에는 봉쇄적인 규율이 있다 반대 편에는 판옵티콘과 함께 하는 메커니즘으로서의 규율이 있다. 규율의 제도들이 확장된 것은 한층더 심층적인 다양한 과정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현상일 뿐이다

 

(1) 규율의 기능적 전환. 규율은 유용한 개인을 만들어내는 기술.  (2) 규율 구조의 확산. 사회의 규율 사회화, 정상화, 도덕화 (3) 규율 메커니즘에 대한 국가 관리,  모든 , 순간적으로 발새오디는 사건이며 보잘것 없는 사건이다. 치안을 담당하는 행정관과 경감의 직무는 아주 세밀한 조사를 통해서만 대상을 파악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무한히 작은 정치 권력이다. (329) 현대사회는 거창한 구경거리의 사회가 아니라 감시의 사회이다. 정밀하고 구체적인 훈육이 계속되고 정보 소통의 경로는 지식의 축적과 집중화의 지주가 되고, 기호들의 작용은 권력이 어느 곳에 닻을 내려야 하는지를 규정한다사회질서 속에서 힘과 신체에 관한 전술에 의거하여 개인은 세밀한 의도로 만들어 지는 것이다. (333) 나폴레옹 1, 통치권자의 성대함과 권력의 장엄한 과시가 감시의 일상적인 행사와 상호 교차적인 시선의 철저한 경계로 마침내 태양도 독수리도 쓸모없게 만드는 일망 감시방식 속에 사그라져버린 그러한 긴역사 과정이다. (334)

 

규율사회의 형성은 가지 역사과정, 경제적이고, 법률-정치적이며 과학적인 과정과 연관되어 있다.  (1) 총괄적으로 규율은 다수의 인간을 질서 정연하게 배치하기 위한 기술이다. 권력의 경제를 지배해왔던 '선취-폭력이라는 낡은 원칙에 대신하여,  규율은 부드러움-생산성-이익의 원칙이 들어선 것이다. (336).

 

생산장치의 기술적인 변화, 노동의 분업, 규율방식의 완성은 매우 긴밀한 일련의 전체관계를 유지시켜 것이다. 인간의 축적과 자본의 축적 두가지는 서로를  가능하게 하고 필요하게 했다. 규율은 신체의 힘을 가장 값싼 비용의 정치적인 힘으로 환원시키고 유용한 힘으로서 극대화 시키는 단일화한 기술 과정이다. 자본주의 경제의 확장은 규율중심적인 권력이라는 특유한 양식을 초래 했다. 힘과 신체를 복종시키는 방법, 한마디로 말해 ‘정치 해부학 아주 다양한 정치 체제나 기구, 혹은 제도를 통해서 사용될 있게 된것이다. (339).

 

(2) 인간의 자유를 발견한 계몽주의 시대는 또한 규율을 발명한 시대였다. 계약이 법과 권력의 이상적 기초였다면, 판옵티콘 감시체제는 보편적으로 확산된 강제권의 기술 방법을 만들어 놓았다. 규율의 매커니즘을 갖게 되는 순간 부터 관계를 체계적으로 부정하게 만든다. 법률체계가 보편적 규범에 의거하여 법적 주체를 규정하는 반면에 규율은 사람들을 특정짓고 분류하며 특정화 한다. (341).  (3) 규율은 기술적 단계를 넘어서서 질서화하고, 나아가 대상화/예속화의 모든 메커니즘의 중심에 위치한다. (342-343). 종교재판 세속적 증거조사와 자연과학의 관계는 규율 분석과 인간과학의 관계와 같다. 최근 1세기 이상 전부터인류 매료되고 있는 인간과학이란 것이 사실은 규율과 그러한 조사방법의 좀스럽고 심술궂은 꼼꼼한 태도에서 기술적 모형을 빌려온 것이다. 권력 다르면, 지식() 달라진다모든 규율에 고유한 권력-지식의 도식을 어떤 집중된 혹은 관례화된 형식으로 재생산하고 있는 것이다. (345) 근대적 형벌제도의 특징을 이루는 중요한 파생적 움직임들 - 범죄 뒤에 가려져 있는 범죄자에 대한 문제성 제기, 교정ᆞ치료ᆞ 정상화 같은 처벌의 배려,  개인을 측정ᆞ평가ᆞ진단ᆞ치 료하여 변형시키기 위한 여러 가지 심급 기관들 사이의 판결행위 분담 -  이러한  모든 것은  사법적인  조사 안에서 규율의 시험이 침투해 들어간 것임을 드러내준다(346)

 

정상상태의 전문가들, 이러한 여러가지 요소를 감춘 독방 위주의 감옥이 형벌제도의 근대적인 도구가 되었다고 해서, 무엇이 놀라운 일이겠는가 ?  감옥이 공장이나 학교, 병영이나 병원과 흡사하고, 이러한 모든 기관 감옥과 닮은 것이라 해서 무엇이 놀라운 일이겠는가?(347)

 

4 감옥

1 완전하고 준엄한 제도

 

감옥의 자명한 이치는 무엇보다도 먼저 자유의 박탈이라는 단순한 형태에 기반을 두고 있다. 자유의 상실은 모든 이에게 같은 가치를 갖는 다는 점에서 벌금보다 나은평등주의적징벌이다. 감옥의  법률적 명확성이 있다. 형벌을 정확하게 수량화하는 것이 가능하다. 산업사회에서는 감옥의 명백한 경제적 논리성을 이룰 뿐만 아니라, 마땅한 배상이라고 보일 있게 하는 대가의 형식이 존재한다. 이러한 논리성은 하루, , 단위로 하여 형벌을 금전적으로 환산하고, 그리하여 범죄-형기 사이의 수량적 등가 관계 확립하는 형벌제도의 경제적ᆞ도덕적 논리성이라 만하다.  ‘빚을 갚기 위해감옥에 있다고 하는 표현이 유래하게 것이다.  교환물의 측정을 위한 시간의 사용이 우리 사회에서자연스러운것과 마찬가지로, 감옥은자연스러운것이다 (353)

 

무엇보다 먼저 감옥은 교정이라는 기술적 기능이 나중에 추가된 자유의 박탈이 아니라, 처음부터 교정이라는 보조적 역할을 떠맡은법률상의 구류 자유의 박탈로 인하여 법률체계 안에서 수행될 있는 개인들의 변화를 노린 기획이었 .  요컨대 19세기 초부터 형법상의 수감은 자유의 박탈임과 동시에 기술에 의한 개인들의 변화를 담당해온 것이다 (354). 

 

감옥의개혁 감옥 자체와 거의 같은 시기에 시작된다. 그것은 감옥의 계획과 같은 것이다(356)

 

감옥을 개혁 운동에 의해 때때로 흔들렸을 무력한 제도로 생각해서는 된다. ‘감옥 이론 감옥에 대한 우발적 비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부단한 감옥 사용법 - 감옥의 기능 조건들 하나로 서의 - 부당한 감옥 사용법이었다 (357)

 

발타르는 감옥은완전하고 준엄한 제도라고 말했다. 감옥은 훨씬 범규율 이다. 끊임없는 규율, 전제적인 규율, 완전한 교육의 강제이다 (358).

 

감옥이 새로운 삶의 체계를 규정 원칙 (실존의 재코드화의 가지 원칙

(1) 격리. 감옥은 개인들이 정신적 측면에서 고립되어 존재하고, 횡적인 관계없는 엄격한 하관계의 안에서 모임이 결성되며, 그리하여 오직 수직 방향으로만 의사전달이 이루어지는 완벽한 사회의 측도이다(361).

 

마음속에서의 복종이고, 태도가 아니라  도덕성의 변화인 것이다. (362).

 

감옥제도 실행의 일차적 목적은 모든 관계의 단절을 통한 강제적 개인화였다(364).

 

(2) 노동. 피구금자를 가능한 무슨 일이든지 몰두하게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하 .”(365)

 

형벌상의 노동이 본질적으로 유용한 것은 생산 활동으로서가 아니라 사람의 육체적ᆞ정신적 구조에 대해 발휘하는 효과에 의해서이다. 질서와 규칙성의 원리. 다시 말해, 노동에 힘입어규칙이 감옥에 도입되어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수단을 사용하지 않고도 어렵지 않게 그곳을 지배한다.”(367)  

 

감옥은 작업장이 아니라 기계이며, 안에 수감자-노동자는 톱니장치임과 더불어 생산물이 되어야 한다. 노동이 경제적 효과를 낳는다면, 그것은 산업사회의 일반적 규준에 따라 기계화되는 개인을 생산함으로써이다. “노동은 감옥의 종교여야 했다.” 개인-기계뿐만 아니라 프롤레타리아의 제조라 만한다 (368).

 

형벌의 노동이 갖는 효용성이란 무엇인가? 이윤도 아니고, 더구나 유익한 능력의 성도 아니다. 그것은 권력관계, 계산되지 않는 경제적 양식, 개인의 복종과 생산 도구에의 적응에 대한 도식의 구성이다(369)

 

(3) 감옥은 단순한 자유의 박탈을 넘어, 형벌의 경중에 대한 조정 수단, 판결의 원칙을 부분 적으로 수정할 수도 있는 행형적(行刑的) 실천ᆞ제도이다(370)

 

 형벌이 개별화되어야 한다 , 그것은 개인-법률 위반자, 범행의 법적 주체, 불법행위에 대해 책임이 있는 장본인을 출발점으로 해서가 아니라 통제되고 있는 변모의 대상, 감금장치 속에 끼워 넣어져 변모되거나 반응을 보이는 개인을 근거로 해서이다(371)

 

일반적으로 경범죄의 수형자가 가장 사악하다. 중범죄의 수형자들보다 순종적이고 근면하다.  재판장의 판결이라는 법률적ᆞ사법적 실천이 이상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실제로 수행하는 전문가들, 간수들, 소장, 부속 사제 혹은 교사가 형벌권의 보유자들보다 훌륭하게 교정 기능을 발휘할 있다(373)

 

감옥의 독립선언이라고 부르자 행정상의 자율성뿐만 아니라 형벌의 최고권 가운데 일익을 담당하는 권력이 있는 권리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374).

 

감옥 기관의 가지 도식,  개별적인 격리와 위계질서라는 정치적-도덕적 도식강제노동에 적용되는 힘이라는 경제적 모형치유와 정상화라는 기술적ᆞ의학적 모형(독방ᆞ작업장ᆞ병원) 의존하였다.  감옥에는 구금의 임무를 벗어나는 여백의 공간에 규율 형식의 기술들이 자리 잡는다. 리고 법적인 것에 대한 이와 같은 규율의 추가 부분이   ‘행형적(行刑的) 이라 불린 그것이다(375). 

 

감옥은 수형자들에 관한 임상적 지식이 형성되는 장소로 이해 되어야 한다. 일망감시시설의 주제, 감시와 동시에 관찰, 안보와 동시에 지식, 개별화와 동시에 전체화, 격리와 동시에 투명성 등이 감옥에서 자신이 실현될 있는 특권적 장소를 찾은 것이다 (377). 

 

감옥에서 비행자는 인식되어야 대상으로서의 개인이 된다. 선고받은 법률의 위반자를 대신하여, 행형 장치의 대상이 되는 인물은 바로 비행자이다. 비행자는 그의 행위가 아니라, 그의 삶에 의해 범법자와 구별된다 (385).

 

성격, 사회적 교육이라는 삼중의 관점 아래 그의 생활사에서나쁜요소들을 구분해낸다. 이러한 전기적 조사는 도덕관념의 분류를 위한 행형 체계의 조건이 되기 이전에 이미 형벌 분류를 위한 사법적 예심의 본질적 부분을 이룬다. 범죄학의 미궁? 형법상의 담론과 정신의학적 담론 사이에 경계가 뒤섞인다.또한 양자의 접합점이 되는 그지점에서 완전히 전기의 차원을 바탕으로 인과관계의 연결성을 확립하고 처벌-교정의 평결을 내리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위험인물’ 이라는 개념이 형성된다.(386).

 

감옥 인종지라고 부른 것과 같은 별도의 취급이 요구되는 부류들에서 두루 찾아 있다. ‘수형자들은 같은 민족속의 다른 민족, 별도의 습관 본능 풍속을 지닌 민족이다. (387).

 

비행자들과 그와 같은 부류들에 관한 실증적 인식이 점차로 자리 잡는데, 그것은 범죄와 범죄적 상황에 관한 법적 성격의 결정과 매우 상이할 뿐만아니라 개인의 광기를 부각시켜 결국 범행의 위법성을 지워버리는 의학적 인식과도 구별된다. 범죄학의 존립 가능성이 주어진다형사사법의 상관적 존재는  법률위반자이겠지만,  징계기관의 상관적 존재는 다른 인물, 위험성을 지닌 핵심분자, 어떤 비정상 유형을 대표하는 비행자이다.  행형학과 쌍을 이루는 죄수의 육체가 나타난다. “감옥이 비행자를 만들어낸다. ”(389)

 

비행성 이라는 비신체적 내용을 상호작용의 관계속에서 이끌어 들였다는 점이다.(390).  

 

행형기술과 비행자는 쌍둥이 형제이다. 판결을 내릴때 인식하고 평가하고 측정하고 진단하고 취급해야 것도 바로 그것이며,  형법전을 개정할때  고려해야 또한 다름이 아닌것, 비정상, 일탈, 은밀한 위험, 질병, 생존 형태이다.(390). 비행자의 개념은사회계약으로부터 벗어난 도덕적-정치적 괴물의 계열 벌에 의해 다시 자격을 부여받는 법적 주체의 계열이라는 18-19세기 전환기의 가지 상화 방식을 묶어준다 (391)

 

2 위법행위와 비행 

도덕에 관한 이외의 모든 독서는 금지된다”(403).

 

감옥은 형사사법의 대실패작으로 난받는다. 이러한 비판은 1820년부터 1845년에 걸쳐서 나타나게 된다. 오늘날까지 되풀이 되는 비판의 형식은 다음이다. (1) 감옥이 범죄발생률을 감소시키지 않는다. (2) 구금은 범을 유발한다. (3) 감옥은 어김없이 비행자들을 만들어낸다. (4) 감옥은 비행자들이 서로 연대하여 위계질서를 이루고 미래의 모든 공모관계를 예비하는 비행자 집단의 조직을 가능 하게 만들며, 정확히 말해서 그것을 조장한다. (5) 석방된 수감자들에게 가해지는 여러 가지 조건들로 인해 그들은 운명적으로 재범의 굴레를 벗어날 없다. (6) 끝으로, 감옥은 수감자의 가족을 빈곤상태에 빠지게 함으로써 간접적으로 비행자를 만들어낸다(410).

 

감옥의 기본원칙들은 지난 150 전부터 만들어진 훌륭한행형조건 7가지 보편적 준칙 들이다.  (1) 교정의 원칙 - 형벌로서의 구금은 개인의 태도변화를 본질적인 기능으로 삼아 한다. (2) 분류의 원칙 - 수감자들은 그들의 행위에 합당한 형벌의 경중에 따라, 또한 특히 그들의 나이, 기질, 사용될 교정기술, 그들의 변화 단계에 따라 격리되거나 적어도 류되어야 한다.

(3) 형벌 조절의 원칙 - 수감자들이 개선되건 다시 타락하건, 그들 개인별 얻어지는 결과에 따라 형벌의 형기가 조절될 있어야 한다. (4) 의무-권리로서의 노동 원칙 - 노동은 수감자의 변화와 점진적 사회화를 낳는 근본적 부분들 가운데 하나여야 한다.  (5) 행형상의 교육의 원칙 - 공권력의 입장에서 , 수감자 교육은 사회의 이익에 필요한 예방조치임과 동시에 수감자에 대한 의무이다.  (6) 구금에 대한 기술적 통제의 원칙 - 감옥의 체제는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훌륭한 인간 교육에 유의하는 정신적ᆞ기술적 역량을 지닌 전문요원에 의해 통솔되어야 하고, 그런 사람들에게 맡겨져야 한다. (7) 부수적 제도의 원칙 - 과거의 수감자가 결정적으로 재적응할 있을 때까지 수감은 통제와 제의 방책으로 이용되어야 한다 (413)

 

감옥과 감옥의 실패, 그리고 어느 정도 올바로 시행된 감옥의 개혁을 연속적으로 이루어진 현상처럼 이해해서는 된다. 오히려 역사적으로 자유의 사법적 박탈과 중복되어 생겨난 동시적 체제로 이해해야 한다. 이것은 가지 항목의 체계이다  (1) 감옥의 규율화에 따른 보충요소로 서의 초권력의 요소이다. (2) 객관성과 기술과 행형상의 ‘ 리성' 산출로서 관련학문의 요소 이다. (3) 감옥을 통해 제거되어야 범죄가 강화된 것은 아니더라도 사실상 갱신됨으로써 전도 효과가 발생한 요소이다 (4) 관념상의 속성에도 불구하고 감옥의 규율적 기능과 동일한 형태의 개혁이 반복되는 유토피아적 복사판의 요소이다.(414)

 

이른바 감옥의실패 감옥 운용의 일부를 구성하지 않는가? 수감과 관련이 있는 규율 기술 체계에 의해 사법장치 속에, 일반적으로는 사회 속에 이끌려 들어왔고, 이제는감옥 체계라는 이름 아래 통합될 있는 권력 효과에 실패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 아닐 ? 만약 제도로서의 감옥이 그토록 오랫동안 거의 불변의 상태에서 존속해온 것이라면, 만약 감금의 원칙이 번도 진지하게 문제시되지 않았다면, 그것은 아마도 감옥 체계가 깊이 뿌리를 내렸고 빈틈없는 기능을 수행했기 때문일 것이다 (415).

 

그렇다면 감옥의 실패는 무엇에 도움이 되는가? 형벌제도는 단순히 여러 비행들을억제하는것이 아니라, 그것들을차별화하고그것들의 일반적경제책 확보하려는 것이라고 말할 있을 것이다. 합법적 징벌은 위법행위에 관한 전반적인 전략 안에 놓고 보아야 . 감옥의실패 바로 점에 입각하여 이해될 있을 것이다 (415-416).

 

 1780년대에서 1848 혁명까지 사회적 갈등, 정치 체제에 대한 항쟁, 산업화 동향에 대한 저항, 경제위기의 영향이 교차된 모든 움직임 속에 함축된 차원으로 발전한 것일지 모른다.

과거 2세기에 걸친 기간에 민중의 위법행위들은 삼중으로 확산되었다. 그세가지는 일반적 정치 지평으로의 편입, 사회적 투쟁과의 명백한 연결, 여러 가지 형태와 수준의 법률위반 사이의 연계 문제와 관련된다. (419)

 

 범죄가 개인을 사회로부터 소외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이 사회 속에서 이방인처럼 소외되어 있기 때문에 범죄가 발생한다(420).

 

법이 만인의 이름으로 만인을 위해 만들어진다고 믿는 것은 위선이거나 순진한 생각일 것이다. 법은 일부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효과를 인정하는 것이  현명한 생각이다 (420)

 

감옥이 기여하는 것은 위법행위를 확립하는 일이자, 어떤 형식의 위법행위를 그려내어 별도로 취급하고 강조하는 일이다. 비행을 위법행위의 가장 격심하고 가장 해로운 형식, 그것이 나타내는 위험 때문에 형벌 기구가 감옥을 통해 그야말로 이려고 애써야 하는 형식으로 생각해서는 된다. 오히려 비행은 위법행위들을 구별하고 정돈 하며 통제할 있게 해주는 형벌 체계 (그리고 구금 중심의 형벌제도) 결과이다 (422).

 

요컨대, 적법성과 위법적 실행 사이에 사법적 대립 있다면, 위법행위와 비행 사이에는 전략적 대립 있다. 감옥은 범죄를 줄이는 실패하고 있다는 확인 대신에 다음의 가설을 내세워야 할지 모른다.  감옥은 위법행위가 명확히 한정된 유형이자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위험한 - 극단적 경우에는 이용 가능한 - 형태인 비행을 낳는데, 표면적으로는 사회의 주변부에 놓여 있지만 통제의 중심적 대상으로 취급되는 비행자들의 사회가 생기게 하며, 비행자를 병리학에서 피실험자로 만들어내는데 성공을 거두었다는 가설이다.  감옥의 성공은 법과 위법행위를 둘러싼 투쟁의 과정에서비행 특수성을 부여한 점에 있다(422). 그러나 감옥은 무엇 때문에 그리고 어떻게 퇴치해야 비행을 제조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을까? (423) 

 

통제받는 위법행위 비행은 지배 집단들의 위법행위를 위한 일종의 대행인자이다(425).

비행 위법행위들을 관리하고 이용하기 위한 도구인 것이다. (426). 

경찰력에 의한 통제기술의 발전이 없었다면 고립되고 폐쇄된 위법 행위를 범죄의 이름으로 조직하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비행은 상설적 전반적 감시의 특권적 도구인 셈이다.  징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거나 보상의 미끼로 움직이는비밀경관' 밀고자들이 포함된 안전국 이었다.  1833 개인 신상과 삶을 기록한 장부, 일람표, 범죄기록대장, 개인별 카드 또는 보고서 체계의 활용을 있다.  경찰관 다음으로 이들을 이용한 사람이 통계학자와 사회학자들이다경찰-감옥 체계는 여러 위법행위들 중에서 다루기 쉬운 비행을 별도로 떼어 놓는다. 그러한 비행은 자체의 특수성과 더불어 그체계의 결과일 뿐이다. (427-428)  

경찰력에 의한 사법의 과잉, 사법에 대한 감옥 제도의 타성적 제도는 우연이 아니라 근대 사회에서 처벌의 메커니즘을 나타내는 구조적 특징 이다 (429). 

 

 비독(1775–1857) - 경찰과 비행의 직접적이고 제도적 결합 이루어진 것은 바로 그때이다. 비독의 상대편으로는 동시대인인  라스네르 (1803-1836) 있다.  범죄에 대한 탐미 주의자들의 낙원 안에서 그의 존재가 영원히 각인되어 있다는 것은 놀랄 만한 일이다.  부르주아 계급이 실제로 행동에 옮기는 정치적ᆞ경제적 위법행위들이 이론적ᆞ미학적으로 뒷받침되어 나타난 시기를 의미한다.  범죄의 형이상학  『조형예술로서 고찰 살인』 1849년에 간행되었다. (433).

 

지배적 위법행위들에 의한 비행의 식민화, 비행과 다른 위법행위들 사이의 단절 (433). 언론, 사회면 기사의 기능, 범죄 소설, 추리문학과 결합된 사회면 기사는 100 전부터 과도한  ‘범죄 이야기들 산출 (435). 민중신문들은 범죄에 대한 정치적 분석을 자주 시도한다. 신문들은 비행의 출발점이 범죄자 개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범죄자는 범죄의 가지 사례 혹은 최초의 희생물에 지나지 않는다) 사회에 있다고 주장한다 (437).

 

반사회면 기사 - < 팔랑주> (). 푸리에주의자들. 범죄에 대한 가치부여의 치이론. 범죄가 문명의 결과일지라도, 그것은 또한 사실 자체로 문명에 대항하는 하나의 무기(439). “흑인해방이 범죄 없이 성공할 있었을까?”(440) 부도덕하다는 비난을 적대자 들에게 돌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 팔랑주> 지는 서로 대립하는 세력들의 역학관계를 드러내는 것을 목적으로 사회면 사건들을 활용한다. 13살의 소년(440-442).

 

3 감옥체계

 

감옥제도의 형성이 완성된 시기. 1840 1 22, 메트레 소년감화원이 공식적으로 문을 (445). 다섯 가지 모형. 가족 모형, 군대 모형, 작업장 모형, 학교 모형, 사법기관의 (446).

 

신이 그대를 보고 있다.” 메트레의 원장과 부원장은 동시에 재판관, 교사, 직공장, 하사관, 부모가 되어야 한다. 그들은 행동을 다루는 기술자, 품행을 다루는 기술자, 개개인 뜯어고치는 정형외과 의사, 순종적이고 동시에 유능한 신체를 만들어내야 한다 (446-447). 인식되어야 영혼 유지되어야 예속화 (447).

 

정상화된다. 규율적 (disciplinaire) 기술이 하나의 학문(discipline) 되고 자체의 학교를 갖는 것이다 (449).

 

간과학의 역사, 과학적 심리학의 출생. 규율을 근간으로 정상화에 저항하는 개인들에 새로운 유형의 통제(지식인 동시에 권력) 등장, 정확히 말해서 그것의 제도적 특정 화와 명명식. 정상성을 위한 통제책들은 의학이나 정신의학의 틀에 둘러싸인과학성 식을 갖추었으며, 사법기구에 의존하여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법적 보증을 얻게 되었 (449).

  

형법에 의하지 않은 감금 원칙이 폐지된 적은 번도 없었다. 감옥의 중개에 의해 법률상 형벌과 규율의 메커니즘이 동질화되었다(451)

 

그리고 마침내 거대한 감옥 조직은 사회 산재하면서 작동하는 모든 규율장치들과 연결된다. 형사사법에서 감옥은 처벌 절차를 형기술로 변형시켰다. 그런데 이번에는 수용소 군도가 기술을 형벌 기관으로부터 사회 전체로 이전시킨다 (453)

 

(1) 무질서에서 법률위반으로, 법률 위반에서 다시 규칙과 평균과 욕구와 규범에 따른 일탈 에로의 단계적 변화를 확립. 가장 사소한 부정행위와 최악의 범죄 사이에는 탈선과 비정상 이라는 공통점이 확립된다. 사회의 적은 무질서ᆞ범죄ᆞ광기 등의 여러 가지 위험을 내포하 탈선자(déviant) 바뀌었다. 감옥 구조는 처벌의 대상인 것과 비정상적인 것이라는 다양 하고 계열을 복작한 관계에 따라 연결.

(2) 감옥은 자체의 여러 가지 절차를 통해 많은비행자들 징집을 가능케 한다. 규율 .’ 감옥 체계에는 외부가 없다(il n'a pas de dehors). 비행자는 제도의 산물이다. (3) 감옥 제도와 합법적 투옥을 넘어서는 감옥의 확장이 초래한 가장 중요한 효과는 도가 처벌권을 자연스럽고 정당한 것으로 만들고 형벌 행위에 대한 관용의 기준을 낮게 어뜨렸다는 것이다. 그것도 감옥의 체계가 전개되는 영역, 법적인 사법의 영역과 외적 규율의 영역이 상호 작용하게 함으로써 말이다. (4) 권력의 기본 구도인 감옥제도는 권력의 새로운 경제학에 힘입어 새로운 형태의’, 말해서 합법성과 자연성, 규칙과 구조의 절충인 규범(la norme) 개발했다. 끊임없이 표명되는 재판관들의 무한한의학에의 욕구’ - 정신의학의 전문가들에 대한 그들의 호소에 서부터 범죄학의 장광설에 대한 관심에 이르기까지 - 그들에 의해 행사되는 권력이 질되어왔으며, 어떤 수준에서는 법률에 의해 지배되지만 더욱 근본적인 다른 수준에서는 규범적 권력으로 기능한다는 중대한 사실을 드러낸다. 이른바 계몽주의 이래의 사법개혁 양심의 가책이나 휴머니즘이 아니라, 권력의 경제학에 입각한 행동이다. 정상화하는 권력(le pouvoir normalisateur). 규율장치들이 도처에 존재함으로써 지탱되고 모든 감금장치 의존해있는 규범화 권력은 우리 사회의 중요한 기능들 하나가 되었다. 정상성을 판가름하는 재판관들은 우리 사회의 도처에 현존해 있다. 우리는 교수 재판관, 의사-재판관, 교육자-재판관, ‘사회사업가’-재판관의 사회 속에 살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규범적인 보편성을 존속시키고, 저마다 자신이 있는 지점에서 신체, 몸짓, 행동, 품행, 적성, 성적 규범적인 것에 종속시킨다. 감옥의 구조는 밀집된 형태이건 분산된 형태이건 통합ᆞ배분 ᆞ감시ᆞ관찰 체계를 갖추어서 근대 사회에서 정상화 권력의 거대한 토대가 것이다 (460)

 

 (5) 사회의 감금 조직은 신체에 대한 현실적 지배와 동시에 신체에 대한 영속적 관찰을 고히 한다. 그것은 자체의 본질적 속성으로서의 권력의 새로운 경제학에 가장 부합하는 기구이자, 권력의 경제학이 필요로 하는 지식의 형성을 위한 도구이다. 권력관계 안으로 지식의 명확한 관계를 끌어넣는 일이 필요했고, 예속화와 대상화를 교차시키기 위한 기술이 요구되었으며, 개인화에 따른 새로운 절차들이 구성될 있었다. 감옥의 구조는 인간과학 등장을 역사적으로 가능하게 만든 권력-지식의 골격을 이룬다. 인식 가능한 대상 으로서의 인간(영혼, 개성, 의식, 행실 중에서 어느 것이든 여기에서는 중요하지 않다) 러한 분석적 시각의 포위와 지배-관찰의 결과이자 대상이다. (6) 이러한 사실은 아마도 탄생의 순간부터 비난의 대상이어 사소한 발명품인 감옥의 극단적 견고성을 설명해주는 요인일 것이다.

 

오늘날 문제는 오히려 정상화 장치들 대대적 확산과 새로운 대상화의 정착을 통해 이뤄지는 전반적인 권력 효과에 놓여 있다 (463).

 

1836 < 팔랑주> 지의 어떤 기자 ... 상상의 지정학으로 만들어진 감옥 체계의 도시가 갖는 원칙 ... 원칙은, 이를테면 도시의 중심부에는 도시를 오랫동안 유지시키기 위해서인 - ‘권력의 중심이나 세력의 핵심체가 아니라 - 다양한 요소들(, 공간, 제도, 규칙, 담론) 복잡한 조직망이 있다는 원칙이며, 감옥 체계로 도시의 모형은 - 왕의 신체와 거기에서 비롯되는 권력이나 개인의 것임과 동시에 집단의 것이기도 신체가 생겨나던 계약상의 의지의 결합이 아니라 - 다양한 성격과 수준의 요소들을 대상으로 전략적 배치라는 원칙이다.  또한 감옥은 법률이나 법전 또는 사법기구의 산물이 아니라면 원칙여고, 감옥은 법원이 내리는 판결과 효과를 거둘 있는 순종적이고 어설픈 도구 로서 법원에 종속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원칙이며, 감옥에 대해 외면적이고 종속적인 다름 아닌 법원이라는 원칙이다. 스스로 차지하고 있는 중심적 위치에서 감옥은 홀로 재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덜어주고 치료하고 구제하도록 되어 있는 것들이므로 겉보기와 아주 다른 장치들 - 모두가 감옥처럼 정상화 권력을 행사하는 경향을 띄는 일련의 다른감옥장치들 전체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장치들이 적용되는 대상은중심적인법에 대한 위반이 아니라,  생산기구-‘상업공업’- 주변에서, 성격과 기원이 다양하고, 이윤의 측면에서 특수한 역할을 가지며, 처벌의 메커니즘들에 의해 취급되는 방식도 다른 모든 각종의 위법 행위들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든 기제들을 주관하는 것은 하나의 기구나 가지 제도의 단일한 운용이 아니라, 전투의 필연성과 전략의 규칙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억압ᆞ거부ᆞ배제ᆞ소외화 등과 같은 제도적 개념은 감옥과 같은 도시의 중심부에서 교활한 완화책이나 공개할 없는 악의, 사소한 술책, 타산적인 방법, 기술, 결국 규율화된 개인의 제조를 허용하는과학등의 형성과정을 기술하는 데에는 적합하지 않다.  복잡한 권력관계의 효과와 도구, 다양한감옥장치들에 의해 예속화된 신체와 , 그리한 전략의 구성요소인 담론의 대상들 사이에서, 중심적이고 중앙권력 지향적인 사람들 틈에서, 으르렁거리며 싸우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465)

 

주석) 나는 여기서 책을 중단하겠다. 책은 근대 사회에서 규격화의 권력과 지식의 형성에 대한 여러가지 연구의 역사적 배경이 것이다. (465)

 

 

 

 

 

 

 

엘리아스의 이론은 독창적이다.  그의 독창성은 "결합태 사회학”, “상호 의존성, “문명화과정등의 개념을 통해 유감없이 표출되었다.  엘리아스는 사회학의 연구대상을  상호 의존하는 인간들이 구성하는 인간 결합태 보았다. 결합태는 사람들이 자신의 행위를 통해 형성하는 인간관계의 구체적 형태를 일컫는다. 이러한 결합태는 상호 의존성 정태적이 아닌,  동태적인 특성 지닌다. 또한 모든 결합태에서는 과정적 성격이 강조된다

 

결합태와 문명과정의 역동적 구조  

엘리아스의 문명이론은 호이징가의 역사학, 막스 베버의 사회학,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가지 관점의 강한 영향에서 출발한 것이다.  엘리아스는 호이징가의 <중세의 가을>에서 보이는 중세상,   <<공적, 사적 생활영역의 분리를 특징으로 하는 현대사회와 달리 (근대적 의미의 개인이나, 개인적인 삶의 공간은 거의 존재하지 않고),  모든 생활영역이 공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던 중세인의 특성뿐만 아니라, 중세인들은 단순성, 극단적인 양극성, 극단을 오가는 감정의 커다란 동요, 통제하기 어려운 거친 열정을 거침없이 표출했다.>> 수용했고, 근대가 중세사회 내부의 역동성로부터 점차 발전해 성립했다는 호이징가의 역사 해석, 또한 개인의 발전과 사회구조는 서로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심층사적 접근방법을 수용하여 <<문명화과정>> 이론 정립의 기둥으로 삼고 있다. 엘리아스는 중세에서 르네상스와 근대로 이어지는 유럽의 역사과정을 관찰하여 분권과 독점의 해체로 부터 중앙집권화와 독점의 형성이라는 법칙성을 정립하고 이와 관련된 문명화의 의미 규명에 천착하고 있다

 

<<정당한 폭력의 독점>>으로 규정하는 막스 베버의 국가의 의미는 엘리아스에 의해 물리적 <<폭력행사의 독점>> <<조세권의 독점>>이라는 이중의 독점의 형성으로 안정과 평화의 발생한다는 근대국가형성 모델로 발전한다. 그러나 베버가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역사관과는 다른 역사 해석의 탈출구로써, 역으로 상부구조가 토대에 영양을 미치거나 상호작용, 특정한 친화력을 가질 있다는 점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치열하게 추적한다. 프로테스탄티즘이 자본주의 정신과 직업윤리에 특정한 상관관계, 친화력을 지니고 자본주의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과는 달리,  엘리아스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운동에서 표출되는 종교심의 문명적 전환, 내면화와 합리화는 중산층의 구조와 상황의 특정한 변화 , 사회적 종속 관계로부터 발생하는 외부 강요와 밀접하게 연관된다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베버가 서유럽 근대화에서 근대정신의 담지자인 중산 시민계급의 역할에 의미부여를 하였지만  엘리아스는 문명화가 궁정의 귀족사회에서 유래했다고 보고 있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발달과정에서 점차 강해지는 내면적 통제가 본래 인류의 역사과정에서는 외면적 통제이며, 사람이 태어나 어른으로 성장하는 심리발생적 과정은 개인의 차원에서 반복되는 인류역사라는 가정을 세웠는데, 엘리아스는 이에서 출발하여 문명화과정은 개인적 심리차원에서 외부통제로부터 자기통제로의 이행이라고 본다. 자기통제는 프로이트의 초자아를 뜻하는 것이다.  엘리아스는 프이트가 그대로 인간이 맹목적인 힘에 지배를 받고 있다는 비합리적인 측면도 인정하고 있지만, 프로이트가 개인적 본능에너지와 전환에 치우쳐있는 것과는 달리 개인적 본능에너지도 인간들의 상호의존관계의 안에서 처음부터 사회적으로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본능에너지의 사회적 형태는 사회 안에 존재하는 상호의존의 기제에 의해 달라질 있다고 보는 점에서 프로이트와는 달리 인간의 새로운 조형 가능성, 문명의 발전, 인간 역사의 전환과 진보의 가능성까지도 내다보고 있다.

 

엘리아스는 사회는 인간들이 상호결합욕구 때문에 서로 형성된 상호의존의 고리로서 끊임없는 변화의 흐름 속에 놓여 있고, 인간은 사회 밖에 존재하는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수많은 상호의존관계를 통해 서로 얽혀 있는 사회 속의 개인으로 설정하는데 <결합태>라는 개념을 통해서 이를 표현하고 있다.

 

엘리아스가 문명화과정에서 밝혀내고자 것은, 사회적 행동기준의 장기적 발전과정으로, 개인의 사회심리적 발달과정을 사회화라고 한다면, 사회나 문화의 사회심리적 발전과정이 바로 문명화과정이며,  문명은 인간행동의 특수한 변화라는 것이다. 어린아이의 사회화과정이 장기적인 문명화과정의 반복으로 여겨진다. 엘리아스는 행동기준과 인격구조의 장기적인 변화는 미리 정해진 합리적 계획의 산물이 아니며, 유럽의 문명화과정은 비교적 자율적인 과정으로 일정한 방향과 구조를 지녔지만 결코 미리 규정된 계획에 따라 어떤 목적을 향해 진행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근대 유럽이 중산시민계층이 대표하고, 주도하는 합리화의 추구가 도달한 역사의 과정이라는 막스 베버의 사회학과는 다른 시각을 보여 준다

 

엘리아스가 생각하는 유럽 문명화과정의 원동력은, 행동과 인격 구조의 변화과정이 중세사회에서 근대사회로의 전환이라는 사회구조적 변화과정과 맞물려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데중세는 농업 경제에 바탕한 낮은 수준의 교역과 제한된 화폐사용, 낮은 단계의 노동 분화로 인한 미숙한 경제수준으로 통일된 중앙집권적 국가를 형성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왕은 자신의 영토를 수많은 영주에게 분할 위임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폭력을 독점하고 통제할 중앙권력이 없는 상황과 맞물려  지역을 분할 점거한 영주들에 의한 끊임없는 상호경쟁과 무력충돌로 사회불안이 지속되는 구조였다따라서 봉건제도가 해체되고 근대국가가 형성되는 과정은 바로 물리적 폭력과 조세권의 독점이 관철되는 과정이라는 것이 엘리아스의 관점이다엘리아스에 의하면 문명화과정은 다른 사람이 담당하던 강제의 역할을 개인이 스스로 담당하게 되는 사회적 통제의 내면화과정이며, 이것의 원동력은 물리적 폭력수단이 궁정으로 집중되고 사회내의 평화가 달성되는 국가형성의 과정이다개인적 문명화과정은 수세기에 걸쳐 이어져온 사회적 문명화의 결과인 것이다개인은 일종의 사회발생적인 근본원칙에 따라 자신의 짧은 개인사를 통해 사회가 역사 속에서 통과하였던 과정의 일부를 다시 통과하는 셈이다문명화과정의 개념이 지시하는 사실적 핵심은 인성구조의 변화인데 변화는 수치심과 혐오감의 한계점이 낮아지는 형태로 인간의 감정통제력과 경험이 안정되고 분화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는 것이다.

 

엘리아스는 데카르트 이래 개인을 완전히 자유로운 독립적 존재로, 내면적으로 자족하며 모든 사람으로부터 분리된 닫힌 개인으로 인식하는 인간관을 유럽의 전통으로 규정한다. 자신의 내면 속의 자아와 정체성이 외부의 모든 인간들과 사물들로부터 단절되어 혼자 존재한다는 것인데, 데카르트의 생각하는 자아, 라이프니츠의 없는 모나드, 칸트의 인식 주체와 물자체의 대립, 막스 베버의 행위, 파슨스의 검은 상자는 모두 근대적 개인에 관한 동일한 사유 형태라는 것이 엘리아스의 관점이다. 엘리아스는 이러한 사유체계에서는 개인이 다른 사람들과 상호의존관계에서 살아간다는 사실에 의미를 부여하기 어렵다고 본다.

 

엘리아스의 문명화과정이 말하고 있는 것은,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물리적 폭력이 종식된 비교적 안전하고 평화로운 사회는 국가권력이 폭력행사를 중앙집중화, 독점한 다음에 가능한 일이다.

이제 국민국가 단위로 재편된 근대국가 단위에서는 중세에 비해서는 비교적 안전하고 평화로운 문명화된 사회가 가능해졌지만 국가단위로 경쟁하는 국제사회의 갈등과 전쟁의 위험이 계속되고 있는데 이의 해결방안으로 엘리아스의 이론은 자연스럽게 초국가 차원의 통합 국가의 출현을 끌어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세계 차원의 통합 국가의 출현이 국가 외적인 분쟁과 전쟁의 가능성을 종식시킬 수는 있겠지만, 단계의 인류가 인종과 언어문화 종교의 차이를 뛰어 넘어 국가로 통합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고, 만에 하나 그것이 가능해진다해도 국가 내부의 불평등의 문제와 갈등은 지속한다는 점에서 엘리아스의 이론은 한계를 드러낸다.

 

한편으로 동아시아의 역사 경험, 중국과 한국의 경우 일찍이 중앙 집권화된 국가를 형성했지만 유럽과는 달리 근대적 개인, 개인주의, 근대기계론적 자연관을 형성하지 않았고 근대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을 형성하지 않았던 까닭을 엘리아스의 이론으로 설명할 없다. 엘리아스가 모든 문명권에서 전사계급이 궁정화되는 것을 문명화의 가장 중요한 전제조건으로 보는 것도 동아시아의 역사 경험에서는 일치하지 않는다.

 

엘리아스도 직접 언급한 것이지만 문명화과정 이론은 형성되었던 문명이라도, 사회가 급변하여 다시금 예전과 같은 불확실성이 엄습하고 위험의 예측가능성이 줄어든다면 문명화된 행동을 둘러싼 갑옷은 부서진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못한다. 엘리아스 자신도 겪은 홀로코스트, 유럽 문명의 대참사, 문명의 붕괴를 보면 수백 년에 걸친 문명화과정이 그토록 어렵게 이룩하고, 짧은 시간에 그렇게 쉽게 무너지는 것은 단지 엘리아스 만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학, 사회학을 포함한 인간에 대한 모든 학문적 성찰이 지닌 지난함을 다시 일깨워 준다.

 

 

머리말

연구의 중심 주제는 서구적으로 문명화된 사람들에게 전형적이라고 간주되는 행동양식이다. 서구의 문명화가 실제로 일어났는가? 내용은 무엇이며 원동력과 원인 또는 동기는 무엇이었는가?

 

중심문제에 접근하기 위해 서구인들이 행동과 감정을 다스리는 구조가 중세 이래 어떤 방식으로 변화했는지 살펴본다. 개인적 문명화과정은 세기에 걸쳐 이어져온 사회적 문명화의 결과이다. 개인은 일종의 사회발생적인 근본원칙에 따라 자신의 짧은 개인사를 통해 사회가 역사 속에서 통과하였던 과정의 일부를 다시 통과하는 셈이다. 엘리아스는 문명화 과정을 밝히기 위해서 우선적으로 절대주의 정권과 국가의 형성과정을  규명하는데 연구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에 의하면 문명화된 행동의 성립은 서구사회가 절대주의 국가로 조직되는 과정과 밀접하게 연관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엘리아스는 국가의 사회발생적 근거에서 권력의 독점문제를 중시하는데, 이것은 물리적 폭력행사의 독점이 국가라는 사회조직체의 구성요소라는 것을 지적한 막스 베버의 관점을 받아들여서 폭력행사가 서로 경쟁관계에 있던 무사집단의 특권이었던 중세 초기부터, 점차 물리적인 폭력행사와 이를 위한 수단이 중앙화, 독점화에 이르는 구체적인 역사과정을 밝혀내고자 한다. 또한 육체적 폭력행위의 독점과 더불어 개인을 형성하고 각인하는 장치들, 개인에게서 사회적 태도를 조형해내는 사회적 요구와 금지의 작용 그리고 무엇보다도 개인의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불안의 형태가 결정적으로 변화하는 것을 밝히고 있다.

 

<<1>> 어느 특정한 사회의 인간들의 감정구조와 통제구조에 있어서 여러 세대를 거쳐 동일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장기적인 변화가 있다는 것을 다룬다.  <<2>> 인격구조의 장기적인 변화를 보다 높은 수준의 사회분화와 통합의 방향으로 진행되는 전체 사회의 장기적 구조변화와 연관 짓는 것을 분석한다.  2권의  <<문명화이론의 초안>> 사회구조의 변화와 심리적 태도 행동구조의 변화 간의 연관관계를 다시 강조한다. 엘리아스가 주장하는 문명화과정의 핵심 개념은 인성구조의 변화인데 변화는 수치심과 혐오감의 한계점이 낮아지는 형태로 인간의 감정통제력과 경험이 안정되고 분화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는 것이다.

 

탤컷 파슨스가 개인과 사회, 자아와 체계는 서로 분리되어 존재하며 인간이 본래의 실재이고 사회는 모방현상이라는 관념을 전제로, 관찰 가능한 사회형태를 이를 구성하는 기본요소들로 분석적으로 분해하는 정태적인 방법론에서 출발하는 것에 비해,엘리아스는 개인과 사회는 분리되어 존재하는 개의 객체를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인간의 상이하지만 분리 불가능한 측면을 의미한다는 것에서 출발한다.

 

엘리아스는 19, 20 세기의 선발 산업국가의 국가 내적. 외적인 특수한 변형과정과 사회학의 주요한 작업들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나라들의 지배적 이상이 보다 포괄적으로 격변하고 있다는 사실이 밀접하게 상관이 있다고 본다.  사회학의 위대한 선구적 저작들이 탄생되었던 19세기의 산업국가에서 부상하는 산업계급의 사회적 믿음, 이상, 장기적 목표와 희망을 표현하는 목소리들이 기득권층(왕족, 귀족, 도시귀족의 권력 엘리트) 이해관계와 기존질서를 점차 누르게 되는데 사회학자들은 부상하는 산업계급들과 연대하여 인류의 발전은 계급이 희망하고 소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라는 확증을 찾으려 하였다.(막스 베버가 대표적인 경우)

 

19세기 산업화과정에 있던 유럽국가에서 산업계급의 사회적 상승은 국가 자체의 상승과 병행하였다. 이들 유럽 국가들은 서로 경쟁하는 한편, 지구상의 후진 국가들에 대한 지배권을 확장하는 혈안이 되어 있었다.  국가 내의 계급들뿐만 아니라 이들 국가사회들 자체도 상승과 확장의 와중에 처해 있던 사회적 구성체들이었다.

 

엘리아스는 유럽인들에게 문명이라는 개념이 제국주의 침략시대에 유럽인들의 팽창과식민지 지배의 합리화에 유용한 도구가 되었음을 논증하고 있다. 그들이 다른 민족들에게 행사할 있는 권력은 영원한 사명의 표현이며 자신의 본질에 기인하는 우월함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엘리아스는 19세기에서와 같이 20세기에 와서도 사회학이 학문적인 중립성과 과학성에아직 이르지 못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20세기의 많은 사회학자들이 사회를 말할 그들이 생각하는 것은 이제 시민사회나 국가 저편에 있는 인간사회가 아니라 조금은 희석된 민족국가의 이상형이라는 사실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20세기에 들어서는 미국사회학이 사회이론의 발전을 선도하였기 때문에 시대 사회학이론의 지배적인 유형은 미국의 국가 이상이 특성을 반영한다는 것이다엘리아스는 마르크스적 전통에서 발전된 이데올로기 개념에 따르면, 사회발전으로부터 현재의 사회학이론에서 지배적인 상태로의 시각전환은, 계급의 이상에 의해, 다시 말하면  자신들의 희망, 소망, 이상을 미래에 걸지 않고, 오로지 기존질서의 유지에만 두고 있는 계급에 의해 결정된다고 있다는 것이다.

 

1 문명과 문화 개념의 사회적 발생

문명은 하나의 과정 또는 적어도 과정의 결과를 표현하며 무언가 항상 운동 속에 있는 , 끊임없이 앞으로 나가는 것을 지시한다. 문화는 인간의 생산품들, 예술작품과 책들, 민족의 특성을 표현하는 종교적. 철학적 체계들과 관계된다.

 

  1 독일에서 문화와 문명의 대립이 발생하게 사회적 기원

엘리아스는 문명의 개념이 일차적으로 서구의 자아의식을 표현하며, 민족의식이라고도 말할 있는데, 이는 서구사회가 지난 2, 3세기 동안 자신들의 이전 시대나, 동시대의 다른 원시적이라고 간주하는 사회들보다 앞서 가지고 있었던 모든 것들이 개념에 집약되어 있다고 본다. 서구인들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기술수준, 예절의 종류, 학문적 인식과 세계관과 밖의 많은 발전들을 문명의 개념으로 표현한다는 것이다.

 

 엘리아스는 문명의 의미가 서구의 모든 나라에서 동일하지 않는데, 특히 영국과 프랑스에서 사용하는 문명의 의미와 독일에서의 문명의 의미는 현격한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본다.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문명이 자국의 중요성에 대한 자부심과 서구와 인류 전체의 진보에 대한 자부심을 의미하지만 독일에서는 문명은 2급의 가치를 의미하고 문화가 상위의 가치를 의미한다. 엘리아스는 독일에서 문화와 문명의 대립이 발생하게 사회적 기원을 추적한다.

 

엘리아스는 독일에서 문화의 개념이 정신적인 것을 강조하고 민족적인 차이와 집단의 특성을 유달리 부각시키는 것은 독일 민족의 역사과정과 일치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것은 독일이 많은 제후국들로 분할 통치되어 프랑스나 영국에 비해 훨씬 뒤늦게 정치적 통일을 이루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독일에서 문명과 문화의 차이점을 최초로 표현한 것은 1784 칸트로 <우리는 번거로울 정도로 각종 사회적인 예의범절로 문명화 되었다.  도덕성의 이념은 문화에 속한다. 이념의 사용이 단지 명예욕을 위해 도덕의 모방과 외면적인 예절로만 흐른다면, 그것은 단순한 문명화를 의미한다.> 칸트에 의해 표명된 대립 개념은 18세기 중반 태동하던 중산층 지식인과 프랑스식으로문명화 되었던 궁정귀족의 대립과 일치한다. 당시 독일은 30 종교전쟁(1618-1648)으로 인구가 감소하고 경제적으로 황폐한 상태였으며 더욱이 지리상의 발견으로 동서교역로가 바뀌면서 상업은 쇠퇴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독일 자본주의와 시민계층의 성장이 지지부진하고 부의 축적과 계급적 영향력도 미미하게 되고 말았다. 궁정의 귀족계급은 모두 프랑스어로 말하였는데 1740 까지도 독일어는 천한 것으로 간주되고 정직한 사람, 사려 깊은 사람은 모두 프랑스어로 말했다는 것이다

 

독일 궁정귀족들에게 이류급 인간에 불과했던 시민계급의 아들들은 정치에서 배제된 18세기부터 독일어를 사용하는 새로운 문학운동에 나서게 되는데 자연과 자유를 향한 사랑, 고독한 공상, 차가운 이성에 방해받지 않고 자신의 열정에 몰두하는 것에서 나타나며 이는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아주 명료하게 표현 된다. 작품의 성공은 그런 감정이 당시의 특정한 세대에게 얼마나 전형적이었는지 보여주고 있다

 

괴테 <나를 가장 괴롭히는 것은 시민계급이 처해 있는 숙명적인 상황이다.  나는 계급의 일원으로서 신분의 차이가 얼마나 필요하며, 그것이 스스로에게도 얼마나 많은 이익을 가져다주는지 알고 있지만 단지 그것이 나를 방해해서는 된다,  이것은 중산층 의식의 특징으로 밑으로 향하는 문은 닫혀져 있어야만 한다그러나 위로 향한 문은 열려야만 하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과 하류층을 가로막고 있는 벽이 물결에 같이 휩쓸려 파괴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위로 향하는 막힌 벽을 부순다는 것을 생각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독일에서 귀족과 시민계급의 엄격한 분리와, 궁정귀족의 모델에 근거하는 존재가치가 시민계급의 모델 업적에 근거하는 가치가 서로 융합하지 못한 것이 독일의 민족 성격을 결정적으로 규정하게 되었다. 독일 귀족들은 프랑스에 비해 훨씬 폐쇄적이었고 더욱이 정치적인 분열로 중산 시민계층으로부터 분리되어 통일국가 형성의 전초지 역할을 수행하지 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대학의 교수, 목사 관료를 주축으로 상층의 시민계급은 궁정귀족과 대립하면서 신분상승을 기도하는데 칸트, 실러, 빙켈만, 헤르더, 피히테, 괴테 모두가 바로 그들이었다. 1780년을 후로 괴테와 실러의 작품,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은 독일어로 이들 중산 시민계층에 의한 본격적인 독일 문화의 개화를 알리는 신호들이었다. 이들은 귀족계급에 의해 정치적으로 철저하게 배제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신과 책을 도피처 안식처로 삼았으며 업적과 학문 예술은 그들의 자존심이었다.

 

중산층의 전위와 귀족의 대립으로 깊이와 피상성, 정직과 거짓, 진정한 미덕과 외면적 예절 같은 상대 개념군의 형성되고 여기서 문화와 문명의 대립적인 개념이 발생했다고 보는 것이 지금까지 살펴  엘리아스의 관점이다.

 

독일 시민계급은 처음에는 궁정귀족 상류층과 나중에는 주로 경쟁국들과 대립하면서 자기 정당성을 확보해야만 했는데, 그들은 자신이 처한 2 계층의 위치에서 독일 민족의식의 담지자로 마침내 아주 늦게 그리고 제한적이었지만 지배계층으로 점차 부상하면서 문화와 문명의 대립관계가 지닌 의미와 기능도 변하하여 이제 민족적 대립의 의미가 부각되게 된다

 

2 프랑스에서 문명 개념의 사회적 발생근거 

엘리아스는 독일과 달리 프랑스는 국가적 통일과 절대왕정이 조기에 확립되고, 시민계급의 지식인들과 상층부는 비교적 일찍이 궁정사회로 흡수되어 계층 간의 장애물이 완화되었기 때문에 이미 18세기에 적어도 시민계급 상층부와 궁정귀족들 간에 현저한 관습의 차이를 이상 찾아 없었다고 본다프랑스는 독일과 달리 원래 궁정귀족 사회의 특성이었던 표현법, 일상의례, 감정규제법, 예절의 평가, 언어의 명료화 등이 지속적으로 확산되어 민족적 특성이 되었다는 것이다.

 

프랑스의 문명개념은 독일의 문화개념과 마찬가지로 18세기 중반 앙시앵 레짐의 궁정에 세력을 확보한 온건 반대파인 중산계급의 정치 투쟁에서 비롯하였는데 중산계급은 과정에서 미덕이라는 이상으로 자신들을 정당화 하였지만 미라보는 문명개념을 궁정귀족들의 특성과 연결시켰고 문명인으로 표현되는 인간형은 궁정사회의 이상적 교양인을 확대한 것이었다

 

루소는 사회비판의 급진성에도 불구하고 여러 비난들을 한곳에 모아 응집시킬 있는 대립 개념을 만들어내지는 않았기 때문에 실제 프랑스 지식인의 개혁운동에 미친 영향은 크지 않았다. 미라보가 최초로 그것을 만들었거나 아니면 적어도 자신의 저서에서 처음 사용하였다.

 

시민계급이 모두 개혁 지향적이고 귀족들이 모두 개혁의 저항자였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중산층집단 중에는 진지한 개혁시도에 강력히 저항한 무리들이 있었는데 대다수의 고위관료들 , 법복귀족들이 여기에 속하며 또한 수공업조합, 납세소작인들과 금융자본가들도 여기 포함된다. 프랑스에서 개혁이 실패하고 사회의 불균형이 앙시앵 레짐의 제도적 구조를 폭력적으로 파괴한 데는 개혁에 저항한 집단의 책임이 크다고 있다 프랑스는 독일과 달리 당시에 시민계급이 벌써 정치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독일의 발전과정 독일적 개념장치와 분명하게 구분되는 프랑스는, 중산층 지식인들이 궁정 귀족적 전통 안에 서있고, 그들은 궁정집단 내의 자신들의 사회적 위치에 상응하여 문명화됨과 같은 궁정 귀족적 개념을 중심으로 자신들의 정치적. 경제적 요청들로부터 나온 생각들을 결정화 시킨다는 것이다.프랑스 시민계급은 행동이나 감정 면에서 궁정적 전통 속에 있었고 귀족과 중산층의 밀접한 관계로 인하여 궁정풍속의 많은 부분이 혁명 이전에 이미 중산층의 풍속이 되었기 때문에 대혁명으로 앙시앵 레짐이 파괴된 후에도 이것은 변하지 않았다.

 

 한편으로 혁명이 온건해지고, 프랑스가 제국주의 침략의 시기로 접어들면 문명의 개념은 식민지 정책을 정당화하는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프랑스인들은 스스로를 기존의 완성된 문명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문명의 전달자라고 합리화 한다. 그들은 문명의 결과를 보다 우수한 자신들의 재능의 표현으로 간주하게 되는 것이다. 문명개념의 정신인 정중함이나 예절이 궁정귀족 상류층의 지배를 정당화했듯이 자신들의 우월성에 대한 의식, 문명의식은 그때부터 비유럽국가들에 대한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구실이 되는 것이다

 

엘리아스는 문명화과정의 중요한 단계는 이미 문명의 의식, 자기행동의 우월성에 대한 의식 그리고 의식이 학문 기술 또는 예술에서 실체화되어 서구 전체의 국가들로 확대되던 시대에 실제로 끝났다고 보고 있다.

 

2 인간행동의 특수한 변화로서 문명에 관하여

시빌리테 (예절) 개념이 서구사회에서 중요하게 시기는 기사사회가 붕괴되고 가톨릭교회의통일이 해체되던 때였다. 개념은 서구의 풍속 또는 문명의 형성에 있어 하나의 특수한 단계로서 사회의 구체화이고 사회구성체의 표현이며 상징이다. 궁정사회의 상황, 자아의식과 특성이 개념에서 드러난다. 시빌리테 개념이 고유한 특성과 기능을 얻은 것은 16세기  후반이다.

 

1530 출판된 에라스무스의 <어린이의 예절에 관하여> 사람들의 사회적 행동양식 특히 신체예절을 다루고 있는데 이는 당시의 사회적 욕구를 정확하게 반영한 책이었다.  중세의 일상의례 식사예법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데 식사와 음주는 대화와 사교적 모임에서 중심을 이루었다.

 

중세의 좋은 태도의 기준은 특정한 장소에서 특정한 개념으로 표현되는데 이는 궁정에서 이렇게 행동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영주를 둘러싼 궁정기사들이 자신들을 차별화 해주는특징으로서의 특별한 규율과 금기를 궁정예절 (courtoisie) 라는 개념으로 표현했다.

 

엘리아스는 식사 행동양식의 수준은 특정한 사회구조에 상응한다고 보고 구조를 분석하는데 일례로 유럽문명에서 포크 사용이 일반화에 대해서 추적한다. 11세기 베네치아 공국의 총독이 비잔틴제국의 공주와 결혼, 공주는 갈래 황금포크를 가져 사용하였다. 이는 당시 베네치아의 스캔들, 포크는 지나치게 세련된 태도의 징표로 간주되어 성직자들로부터 비난과 저주를 초래한다. 당시 맨손으로 음식을 먹던 식습관은 무려 500년이 지나서 변화, 16세기 이탈리아에서 포크가 사용되고 이어서 프랑스 등지로 파급된다. 17세기에도 포크는 일반적으로 상류층의 사치품이었다. 이는 행동양식의 변화가 아주 오랜시간에 걸쳐 천천히 이루어진다는 것의 구체적인 예에 속하는 것이다.

 

에라스무스의 저서가 나온 시기는 사회집단이 재편성되던 때와 일치한다. 책은 중세적 위계질서는 느슨해졌지만 아직 근대적 사회질서는 확립되지 못했던 혼란스러운 전환기의 표현이었다.

 

16세기에서 시작하여 17세기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곳에서, 새로운 사회적 계급질서, 신흥 상류층과 신흥귀족층이 형성되고 있었다. 때문에 하나의 통일된 행동양식이 중심문제로 부상하게 된다. 더구나 신흥 상류층의 변화된 구조는 개개의 구성원들에게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강조의 사회적 강제력을 행사한다.

 

르네상스 시대의 행동규칙을 고찰해보면 중세적이면서도 근대적인 감정을 모두 발견할 수있는데 이것은 16세기 현실이 전환기로써 유럽사회가 시빌리테의 기치 아래 실제로 문명화된 사회 현대 서구 문명의 특징으로 여겨지는 태도 습관 감정규제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엘리아스는 예법서와 식탁규율에 주목한다. 사회의 구조와 상황이 요청하는 행동양식에 부합하도록 개인을 길들이는 도구, 훈련 또는 유형 만들기의 직접적인 도구가 바로 그런 저서들이었던 것이다.

 

16세기 예법서들은 다양한 사회계층으로부터 새로이 구성된 궁정귀족들의 구체적 표현이라 있다. 신흥귀족들의 형성과 함께 스스로를 다른 계층과 구분하려는 이들 귀족들의 행동규율이 생겨났다. 상류층의 행동방식은 이러한 매커니즘으로부터, 궁정관습의 발전, 밑으로부터의 확산, 가벼운 사회적 변형, 구분되는 특징으로서 평가절하 등의 매커니즘으로부터 지속적으로 운동할 있는 원동력을 얻는다.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은 일견 불규칙적이며 우연적으로 보이는 궁정 행동의 형성과정이 장기적 안목에서 바라볼 일정한 방향과 발전노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방향을 수치심과 불쾌감의 벽이 높아진다고 표현할 있고  또는 세련화, 문명화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한편 감정규제, 전체 행동의 통제 형식화는 시빌리테라는 이름하에 처음에는 순수하게 세속적. 사회적 현상으로  상류층에서 형성되었으나 점차 교회의 전통적 행동방식과 일치하게 되었다. 시빌리테는 기독교적 토대를 갖게 된다.

 

18세기 프랑스대혁명 시기에 이르러서야 프랑스 상류층은 오늘날 문명화된 사회에서 통용되는 식사습관의 수준에 도달한다. 그때까지 기사적 궁정적 전성기를 정점으로 하는 중세의 특징은 손으로 식사하는 습관이었다. 16, 17세기와 18세기를 아우르는 급변의 시대에 식사행동의 발전에 대한 압력은 부단히 방향으로, 식사예법의 새로운 수준을 향해 가해진다. 스푼, 나이프, 포크를 쥐고 사용하는 방식도 한걸음씩 표준화되었다.제한된 범위의 궁정 집단이 사회적 요구와 상황이 일치하는 심리상태에 적합한 모델을 만들어 내고 점차 사회전체로 확산되게 된다. 식사방식뿐만 아니라 사고와 언어의 방식 같은 일반적인 행동양식이 프랑스에서 비슷한 방식으로 조형되었다. 프랑스어에 결정적 영향력을 곳은 궁정과 궁정사회였고 독일어의 경우 프랑스만큼의 영향력을 결코 행사하지 못했다.

 

무엇이 식탁에서 문명화 행동이고 무엇이 문명화되지 않은 행동인지를 결정하는 근본기관은 우리의 혐오감이었고, 중세부터 근대까지 식사법의 변화 뒤에는 다른 종류의 구체화를 분석하면서 드러났던 것과 동일한 현상이 있다. 그것은 충동구조와 감정구조의 변동이다

 

고기를 자르는 , 나이프의 사용법은 가변적인 충동과 소망을 포함한 인간성 전체의 변화를 반영한다. 그것은 역사적 상황과 사회적 구성 법칙을 구체화한 것이다. 나이프는 공격용 무기에서 유래한 것이기 때문에 식사용이라 할지라도 그에 관계되는 위험과 불편함을 연상하는 무수한 금지사항이 뒤따르게 되는 것이다

 

항시 전투태세를 갖춘 전사들이 상류층을 구성하였던 중세에는 감정 극복의 수준이 낮고 충동에 대한 규제가 비교적 느슨했기 때문에 나이프에 대한 금지도 그리 많지 않았다.그러나 사회가 점차 내적 평화를 이룩하면서 칼이 불러일으키는 불쾌감이 즐거움을 능가하여 결국 나이프의 사용을 사회적으로 배제하게 되는 것이다.

 

중국인들이 아주 오래 전에 식탁에서 나이프를 사용하지 않게 것은 기사층이 아닌 평화적인 계층, 학자 관료사회가 전형적인 상류층을 형성한 것과 관련이 있는 같다.

 

개인이 처음에는 외부의 강요에 의해 타율적으로 적응하였던 사회적 수준은 결국 내면 속에서 거의 아무런 마찰 없이 자율적으로 재생산된다.이런 방식으로 수백 년에 걸친 역사적. 사회적 과정이 완성된다. 과정 속에서 수치감과 혐오감의 수준은 서서히 높아지며 개인들은 축소된 형태로 새로이 과정을 겪는다. 엘리아스는 이를 생물학적 반복적 법칙에 빗대어 사회발생적 법칙과 심리발생학적 근본법칙이라 명명할 있다고 주장한다.

 

궁정귀족시대의 사람들이 자신의 성향과 감정을 자제하려 했던 까닭은 주로 다른 사람들이나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의 사람들에 대한 배려와 존경 때문이었다. 다음 시대에서 충동의 포기, 규제와 억제를 강요하는 것은 특정한 사람들로 대변되지 않는다. 엘리아스는 감정이나 본능을 자제하고 규제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눈에 드러나지 않는 비인격적인 사회관계, 분업과 시장 그리고 경쟁에서 유래한 것으로 본다. 이러한 비인격적 강요가 이전에도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제 한층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앞에서 언급한 훈련방식과 훈련을 근거 짓는 방식이 바로 비인격적 강요에 합당한 방식들이며 그때 조형이 노리는 바는 사회적으로 요청되는 행동을 개개인이 자발적으로 원하는 행동으로 보이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노동에 필수적인 본능규제나 본능자제에도 해당된다, 또한 시민산업사화에 사용되던 본능 조형의 전체 도식도 마찬가지이다

 

중세시대 일반 평신도들은 일반적으로 나체로 잠을 잤으며, 완전 나체를 보는 일은 16세기까지 평범한 일상이었다는 놀라운 결과가 밝혀졌다.모든 사람들은 잠자러가기 매일 저녁 완전히 옷을 벗었고 사우나 때도 가리는 천을 알지 못했다. 이러한 자연스러움은 16세기에 점차 없어지기 시작하여 17, 18세기와 19세기에는 결정적으로 사라지게 된다. 시대 사람들은 육체에 대해 훨씬 순진하고 자유로운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잠옷이 등장한 것은 포크나 푸는 수건이 사용될 무렵이었다. 강하게 내면으로 방향을 틀어 자기강제가 되어버린 수치감 또는 도덕이 은밀한 것의 불완전성과 독특하게 결합한 점이19세기 사회와 우리 자신의 시대의 특징이라 있다.

 

일부일처제는 본능규제가 점점 엄격해진 후기 단계에 이르러 남녀 모두에게 구속력있는 엄격한 제도로 확립되었고 전에는 남자나 여자의 혼외정사가 문제되지 않았다.

 

문명화과정은 결코 직선으로 전개되지 않는다. 장기적으로 운동을 관찰하면 물리적, 전투적 제압을 통한 위협에 기인하는 통제가 서서히 줄어들고 의존과 종속의 형식이 강화되며, 이것은 자기훈련과 자기통제의 형식으로 감정생활을 규제하고 경영하는 결과를 낳는다.

 

감정경제의 여러 측면에 있어서 시민사회의 기능들, 특히 상업은 궁정의 기능들보다 더욱 강한 자기통제를 요구하고 생산한다.

 

인간행위가 사회적으로 허용된 행동과 허용되지 않은 행동으로 분열되면서 인간의 심리구조도 변형된다. 사회적 제재가 뒷받침하는 금지는 개인에게 자기통제로 재생산된다. 충동을 억제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 본능을 둘러싼 사회 발생적 수치감은 완벽하게 습관이 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제 은밀한 공간에 혼자 있더라도 습관의 힘에 저항할 없다. 쾌락을 약속하는 충동과 고통을 약속하는 금지와 제한, 사회 발생적 수치감과 혐오감이 그의 내면에서 서로 투쟁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프로이트가 초자아나 무의식이라는 개념으로 표현하고자하는 바로 사태인 것이다. 우리는 사회적 행동규칙이 이런저런 형식으로 개인에게 깊이 각인되어 개인적 자아의 구성요소가 되었다고 말할 있다. 개인의 심리구조와 자아처럼 초자아도 사회적 행동규칙 구조와 일치하여 끊임없이 변한다. 자아와 의식의 심한 분열은 문명화된 사회 속에서의 생활이 강요하는 행동의 특수한 이중성과 일치한다. 또한 이는 본능표출과 연관된 규제와 제한의 정도에 상응한다.  우리 사회에서 나타나는 분열의 강도 형태는 특수한 역사발전의 반영이며 문명화과정의 결과이다. 우리가 사회구조와 개인의 자아구조는 지속적으로 상응하고 있다고 말할 의미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엘리아스는 공격욕의 변화를 중세 귀족들의 삶의 양식에서 찾아본다. 중세의 세속 지배층은 대부분 갱두목과 같은 삶을 영위 했는데, 이러한 삶은 그들의 취미와 습관을 형성했다. 중세의 무사들은 전투를 사랑했을 아니라, 속에서 살았고 여력이 있는 노인이 때까지 전쟁을 치렀다. 그들은 전사로서의 말고는 어떤 다른 기능도 가지지 않았다. 이러한 전투적인 삶은 기사계급만의 전유물이 아니었고 도시시민들의 또한 크고 작은 분쟁들로 가득 있어서 공격욕, 증오, 타인의 고통에 대한 쾌락을 분출하고 있었다. 본능과 감정이 적나라하게 분출하였기 때문에 기독교도 사태를 조금도 진정시키지 못했다. 엘리아스는 막스 베버와 달리 현실에서 종교의 역할에 분명한 선을 긋는다. <<종교, 화복의 전지전능한 신에 대한 의식은 결코 자체로는 문명화나 감정순화의 효과가 없다. 오히려 반대로 종교는, 그대 그때의 사회 종교를 지탱하는 계층이 문명화되는 만큼만 문명화된다.>>라는 것이다.

 

중세에는 우리와는 다른 감정구조를 가진 , 안정도 없고 미래를 위한 장기적 예측도 불가능한 존재들이 눈에 띤다. 사회에서 힘을 다해서 사랑하거나 미워하지 못했던 사람, 열정의 유희에서 사나이답게 행동하지 못한 사람은 수도원에 밖에 없었다. 세속적인 삶에서 그는 패배자였다. 이와는 반대로 후대의 삶에서는 특히 궁정에서는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자신의 감정을 감추지 못하여 문명화될 없었던 사람이 패배자였다.문명화과정에서 중세인의 공격욕이 변화되는 것을 말하고 있다.

 

당시에는 사람들을 통제할 있을 정도로 막강한 세력을 지닌 중앙권력이 없었다. 중앙권력이 점차 강해져 여러 지방에 흩어져 살고 있던 국민들에게 평화적 공존을 강요할 비로소 그들의 감정모형과 본능구조의 수준도 변한다. 공격욕은 세련되고 합리적인 형태로 변형되어 문명화된 사회의 일상에서 규정된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데 이는 감정의 문명화와 더불어 일어나는 전환의 특징을 보여준다. 스포츠 경기는 사회적으로 허용된 호전성 공격욕의 표현이다. 본능표출이 직접행위로부터 관전으로 옮겨가는 과정에서도 감정변화의 절제와 인간화의 곡선이 뚜렷이 드러난다.

 

엘리아스는 기사들의 생활상을 추적한다. 중세 상류층의 정서는 자신들이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을 아는 것으로 만족하였으나, 사회의 상호의존과 분화가 계속 진행되면 될수록 상류층은 실제로 점점 다른 계층에 의존하게 되고, 그와 함께 다른 계층의 사회적 세력은 적어도 잠재적으로는 커진다고 본다

 

중세인들의 감정표현은 전체적으로 후대의 사람들보다 즉흥적이고 자유분방하다. 그러나 그것이 절대적인 의미에서 자유롭다거나 또는 사회적으로 조형되지 않았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15세기 더욱 결정적으로는 16세기로 들어가면서 상황은 변한다. 귀족들과 새로 귀족으로 부상한 집단으로 구성된 신흥 귀족층이 半도시적 궁정에서 형성되는데 이들은 새로운 삶의 공간 새로운 기능, 이에 상응하는 전혀 다른 감정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제후의 신하라는 새로운 삶의 공간이 귀족에게 요구하는 것은 전에는 필요하지도 가능하지도 않았던 행동의 새로운 통제 더욱더 포괄적인 규제였다. 이는 궁정귀족으로 사회적 성격이 변한 계층의 새로운 의존관계의 결과라 있다. 그는 이제 성의 소유주로서 자신의 성을 고향으로 삼은 자유인이 아니라 궁정에 살면서 제후들에게 봉사해야 하고 그들의 식사시중을 들어야 하는 사람이다. 그는 여러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그들 사람 사람의 지위에 따라 각각 다르게 행동해야 한다. 그는 궁정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다양한 서열과 명망에 맞추어 정확하게 처신하고 자신의 언어를 정확하게 조절하면서 시선조차도 정확하게 통제하도록 배워야 한다. 이와 같은 새로운 삶의 공간과 새로운 통합형식이 인간에게 강요한 것은 새로운 자기규율, 비교할 없을 정도로 강한 자기절제인 것이다. 쿠르투아지(봉건적 예절) 표현되던 태도의 이상적 형태는 시빌리테(예절) 개념으로 대체된다. 사람들이 서로에게 가하는 제제가 개인의 자기통제로 전환되면서 인간의 사회관계도 변화한다. 초자아가 확고하게 형성되는 사회전체가 수백 동안 거쳐 문명화과정을 개인은 단축하여 처음부터 통과해야 한다.

 

엘리아스는 문명화과정은 외부의 위험과 그에 대한 불안을 제한하고 통제하는 과정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실행된다고 본다. 사회가 급변하여 다시금 예전과 같은 불확실성이 우리를 엄습하고 위험의 예측가능성이 줄어든다면 문명화 갑옷은 부서질 것이며, 특수한 형태의 불안은 문명의 진행과 더불어 오히려 증가한다고 본다.

 

3 서양문명의 사회발생

엘리아스는 절대주의 사회발생사를 고찰하면서 행동의 문명화인 감정의 억제와 조절이, 왕과 제후의 기능이 절대적 형태를 띠는 시기에 강해지는 것에 주목한다. 절대군주와 그의 궁정을 최상부로 위계적 사회질서의 발생이 문명화과정과 밀접하게 관계된다고 본다.

 

<<봉건화의 매커니즘>> 고찰하는데 물물교환 관계가 사회에서 지배적인 , 엄격하게 중앙화된 관료제와 주로 평화적 수단을 사용하여 항상 중앙의 통제를 받는 안정된 통치기구의 형성은 거의 불가능하다. 어떤 사회에서 인간의 일상생활에 근본적으로 필요한 모든 욕구가 자체충족적일 있다면 분업과 생산품의 장거리 교환은 발달하지 않았을 것으로 본다.

 

십자군운동이 일어나게 되는 서유럽 내부의 문제를 주목한다. 외침에서 벗어나고 봉건화가 이루어지던 서유럽의 인구는 10세기부터 엄청나게 늘어나 14세기 초에는 18세기 인구와 거의 맞먹게 되었다고 분석한다. 이에 11세기부터 서프랑크 제국 내에 땅에 대한 압력, 새로운 영토와 기존의 땅의 생산성 증가에 대한 욕구가 점점 가시화된다.

 

십자군운동은 이러한 상황에서 발생한 서구 기독교국가들의 1 확장운동과 식민지운동의 특수형태라는 것이 엘리아스의 해석이다. 상류층 예비군 , 재산이나 생활수준을 유지할 없는 기사들도 사회에 있었다는 점이 여기서 전개되는 과정에 결정적이었다. 주요자극은 기사들의 부족. 상류층의 인구과잉이 최초의 확장기 식민지기에 특별한 각인을 찍었다는 것이며, 교회는 이러한 흐름에 포괄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정당화 해준 것으로 보는 것이 엘리아스의 견해이다.

이러한 사회 확장의 원동력은 지배자에게는 새로운 영토의 정복을 추구하게 하였고,하류층에게는 노동의 분화를 유도하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로 이루어진 집합체(엘리아스는 아직 도시라는 개념을 부여하지 않는다)9세기 농경위주 사회에서도 발견된다. 그러나 그것들은 농지경작 대신에 주로 수공업이나 장사로 생활했거나 특별권리와 특수제도들을 가지고 있던 행정단위가 아니라 요새인 동시에 대영주들의 농업행정지역이었다. 그러나 11세기 들어서면서 집합체는 성장하기 시작한다.

 

잉여노동인구가 모여 들면서 주인과 하류층 사람들의 권력관계는 변한다. 신참자들은 단결하여 유혈투쟁을 전개하면서 권리를 쟁취하려 한다.노동시민계급은 수많은 패배를 겪으면서 기사계급으로부터 아주 작은 권리를 쟁취하기 시작한다. 노동하는 도시 하류계층이 정치적 자립을 획득하고 정치적 지도권을 얻게 되는 점진적 상승과정은 서구사회를 동양과 구분 짓는, 서구사회의 고유한 구조적 특수성이다. 11세기에는 계급의 자유인 귀족과 성직자만이 있었지만1200 부터는 일련의 수공업자 거주지인 도시공동체 코뮌은 고유의 권리와 특권과 자율성을 획득한다.3 자유인 신분이 등장하는 것이다. 사회는 인구증가의 압력과 부족에 의해 밖으로 팽창할 뿐만 아니라 내부에서도 확장, 분화하여 새로운 세포를 번식시키고 새로운 기구, 도시를 만들어낸다. 돈이 필요하게 되는 때는 교환사회 내에서 기다란 고리들이 형성될 특정한 인구밀도와 복잡한 사회관계 분화라는 조건이 형성될 때다. 화폐사용이 일단 증가하게 되면 이번에는 그것이 반대로 인구증가, 분화, 도시의 성장과 같은 운동 전체를 일정한 포화상태에 이를 때까지 촉진시킨다.

 

문명화라고 부르는 행동 본능생활의 변화는 인간들의 강한 상호연관성 상호의존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보는 것이 엘리아스의 문명화과정 이론의 핵심 논지이다.

 

엘리아스는 하우징가의 견해를 수용하여, 서유럽이 르네상스와 더불어 근대사회로 나간다는 일반적인 해석에 반대하고 진보의 원동력이 고대의 부활이나 학습이 아니고 중세 사회 자체의 내재적 역동성과 인간들이 서로 적응해야만 했던 조건들에있었다고 파악한다. 엘리아스는 내재적 운동의 본질을 중세사회가 노예제사회가 아니었다는 것에서 찾았다. 그리스. 로마의 노예제사회에서 대다수의 도시 자유인이 노동에서 소외된 것과 달리 중세는 자유인들의 노동으로 인하여 인간의 상호 그물망이 확장되고 노동 상류층 귀족들도 노동하는 자유인 계층에 더욱 의존하게 되었으며 또한 서구의 기술적 발전과 자본이라는 특수한 형태로 화폐가 발전하는 현상은 서유럽에만 특징적인 것으로서, 역시 노예노동의 결여와 자유노동의 발전을 전제로 하고 있다고 본다. 엘리아스는 중세가 정체기가 아니라 팽창의 단계, 변동과 혁명의 단계, 노동기구의 개선단계를 포함하고 근대로 발전하는 역동적인 시기였다고 보고 있다.

 

엘리아스는 소유의 분열, 땅에 대한 권한이 왕에게서 등급화된 전사사회 전체로 이양하는 것을 봉건화의 핵심으로 파악하며, 이러한 분열적 경향이 최고조에 달하자 사회적 긴장관계는 동시에 반대 방향, 새로운 중앙 집중화의 동력을 찾았다고 본다. 또한 상업화와 화폐화의 점진적 진행은 대다수의 소기사들에 비해 소수의 대지주들과 영주들에게 훨씬 유리하게 작용하여 봉건사회를 해체하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본다. 상업화와 화폐유통의 진전으로 소수의 대영주를 제외한 중소기사들이 경제적으로 몰락하면서 그들은 생존을 찾아 대제후의 궁정으로 몰리게 된다는 것이다.

 

엘리아스는 유럽사에서 절대주의 궁정은 중요한 생활영역과 행동방식의 평등이 그때까지의 어느 시대보다 가장 완벽하게 성취된 장소로 여긴다. 대영주나 귀족부인에게 봉사하면서 노래를 부르고 시를 쓰는 것은 토지소유의 길이 막힌 기사계층에게 도시와 농촌의 하류층에게 열려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계층 출신들은 트루바두르로서 대제후의 궁정에 모여든다. 9세기 10세기 그리고 이후의 기사들은 보통 자신과 같은 계층이나 낮은 계층의 여자들에게 부드럽게 대하지 않았다. 트루바두르 서정시와 미네 연가의 바탕을 이루는 형태의 인간관계는 바로 관계, 부부관계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낮은 위치의 남성이 높은 지위의 여성과 맺는 관계이다.

 

사회적으로 같은 신분인 남성과의 관계에서 종속적이고 열등한 존재였던 여성들이 자기통제, 감정의 억제 이에 따른 충동의 승화를 산출할 있는 유일한 관계는 사회적으로 열등하고 종속적인 남성과 높은 지위의 여성 간의 관계밖에 없다. 이러한 인간적 상황에서 개인적 현상이기도 하고 사회적 현상이기도 서정시가 생겨나고 사회적 현상으로서 쾌락의 변형, 감정의 채색, 충동의 순화가 일어나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원하는 여성을 얻을 없거나 가까이 다가갈 없는 남자의 안타까움, 남자에 가해지는 자제의 압력, 배려와 자신의 근본적 충동과 욕구의 조절 전환 그리고 마지막으로 꿈의 언어, 시로 출구를 찾는,이루어질 없는 소망을 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다시 말해서 대기사의 봉건궁정에서 엄격한 일상의례, 감정의 순화와 행동규칙이 생겨난다. 그것들이 바로 사회 자체가 쿠르투아지란 이름을 붙였던 매너, 교제관습과 행동의 연마인 것이다. 궁정 예절 (courtoisie) 역시 일차적으로는 봉건궁정의 상류층에 의한 사교모임에서 사회적으로 예속된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행동양식이다. 대궁정 안에서는 다수의 사람들이 평화로운 방식으로 상호교류를 하지 않을 없었다. 이는 특히 높은 지위의 여성 앞에서는 행동의 통제와 억제, 감정과 예절의 정확한 조절을 요구했다.

 

엘리아스는 <<국가의 사회발생사>>에서 독점 메커니즘을 중심으로 고찰한다. 우리가 현대사회라 부르는 것은, 특히 서구에서는 일정한 수준의 독점형성을 특징으로 한다는 것인데 핵심을 징세권과 물리적 폭력의 행사를 독점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조세권은 징세를 통해서 중앙권력으로 유입되는 재정적 수단은 군사력의 독점을 유지시키며, 군사력의 독점은 반대로 조세권을 유지시킨다. 이는 동일한 독점의 가지 측면이다 11세기경부터 프랑크를 중심으로 중앙권력자에 의한 물리적 폭력과 조세권의 독점이 시작되는데, 독점 매커니즘의 전개과정은 단계에서 소수에게 집중되고 결국은 사람의 수중으로 들어가는 독점형성의 단계를 거쳐 둘째 단계에서는 사람에게서 여러 사람의 손으로 넘어가고 결국 상호의존적 인간 결합체 전체의 기능으로 변화하는 단계 공적 독점으로 전환하는 단계로 파악한다. 번째 공적 독점의 단계는 기능 분화가 고도화되고계속되는 사회에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개개인의 사적 독점은 사회화한다. 그것은 전체 사회계층의 독점이 되고 공적인 독점이 됨으로써 국가의 중앙기관으로 자리 잡는다. 독점 덕분에 제후가 나누어주는 자원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귀족들의 각축전에서는 폭력의 직접적 사용이 배제된다. 경기의 수단은 세련되어가고 승화되었다.독점군주에게 종속됨으로써 개인들이 알아서 행하는 감정표출의 억제는 강해진다. 개인들은 한편으로는 자신의 존재를 누르는 강제에 대한 저항, 자신들의 종속적 처지에 대한 증오, 기사들 간의 자유경쟁에 대한 동경과 다른 한편으로는 훈련을 통해 획득한 자기통제에 대한 자긍심, 그들에게 새롭게 열려지는 쾌락에 대한 즐거움 사이에서 표류한다. 간단히 말하면 이것은 문명화의 길을 향한 하나의 역주인 것이다. 다음 걸음은 폭력 조세의 독점권,이에 근거하는 다른 모든 독점권이 시민계급의 손에 넘어가는 것이다.

 

기능의 분화가 상당정도 진척된 후에야 그리고 전문화된 독점행정이 지루한 투쟁의 산물로서 생겨난 다음에야 넓은 지역에 적용되는 중앙의 공적 폭력의 독점기구가 설립된 이후에 비로소소비와 생산수단을 얻기 위한 경쟁이 육체적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이루어질 있었고 비로소 경제라고 생각하는 순수한 의미에서의 경제, 경쟁이라고 부르는 그런 종류의 경쟁이 존재하게 된다.

 

자유경쟁은 어떤 의미에서든 서로 의존하고 있는 다수의 사람들이 거의 엇비슷한 규모의 토지와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어 그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확실한 최강자가 아닐 등장한다. 또한 자유경쟁은 재정적 기회가 수많은 상호의존적 인간들에게 비교적 균등하게 나누어져 있을 때에도 나타날 있다.

 

20세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적 독점에 대한 보편적인 충동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처럼, 국가들 간의 경쟁에서 모든 독점형성과 모든 포괄적 통합을 선행하는 지배적 세력의 형성경향이 뚜렷해지듯이, 중세 기사가문들 간의 투쟁 그리고 나중에는 봉건영주들 간의 투쟁도 독점형성에 대한 보편적 충동을 보여준다.

 

중앙집권화와 통합, 절대주의 국가의 탄생과 폭력행사와 조세권의 독점이라는 경향은 어떤 개인도 계획하거나 의도하지 않았던 것이 수많은 개인들의 의도와 행위들로부터 산출된 사회적 결합태로 보는 것이 엘리아스의 국가의 사회발생사이다.

 

어떤 지역 내에서 교역과 화폐유통, 그것을 담당하는 사회적 구성체의 발달은 통치독점의 발전과 부단한 상호작용관계에 있다. 발전노선들은 서로 맞물려 있는 톱니바퀴처럼 상호 상승작용을 한다. 통치독점권의 형태와 발전경향은 여러 측면으로부터 사회의 분화, 화폐유통의 확산, 그리고 돈을 벌고 소유하는 계층의 형성과 같은 요인들에 의해 영향 받는다. 다른 한편 분업의 성공 자체나 넓은 지역에 퍼져 있는 도로나 시장의 확보, 화폐주조와금전체계의 표준화, 육체적 폭력으로부터 평화로운 생산의 보호와 밖의 협조조치 규제조치 등은 독점제도와 중앙제도의 형성에 달려 있다. 달리 표현하면 어떤 사회조직체 내의 노동과정과 전체 기능이 분화하면 할수록, 개인적 행위가 사회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그것들이 서로 맞물려 형성한 사슬이 길어지고 복잡해지면 질수록 중앙기관의 특수한 성격은 그만큼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기능적으로 분화되어 이루어지는 과정 전체를 상호조정하고 규제할 있는 상부기관의 성격이 바로 그것이다.

 

지배라고 부르는 것은 고도로 분화된 사회에서는 특정한 기능들. 특히 중앙기능들이 담당자에게 부여하는 특별한 사회적 힘과 다를 없다. 중앙관리자들의 통차권이 강화된다는 것은 기능분화가 이루어진 사회에서는 다른 집단들과 계층들이 최상부 조절기관 규제기관에 의존하는 정도가 커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엘리아스는 중앙권력의 역학구도에서 왕권 메커니즘 형성의 핵심을 고도로 분화된 사회에서 강력한 중앙권력의 시간은, 중요한 기능집단들의 이해가 너무 다르고 권력이 거의 비슷하게 분배되어 있어 그들 간에 결정적인 타협도 이루어질 없고 결정적인 투쟁과 승리도 불가능 다가온다고 본다. 이것은 왕권 메커니즘이라는 용어가 간단하게 적용될 있는 그런 종류의 결합태이다. 실제로 서유럽의 역사에서 중앙권력은 이러한 역학구도 하에서 절대주의 왕정이라는 최고의 사회적 힘을 획득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절대주의 왕권의 성립이 귀족계급과 부르주아 계급의 세력균형의 상태에서 이루어진 것을 논증하고 있는 것이다. 중세 말기에 대부분의 봉건 기사영주들을 사회적으로 추락시킨 것은 시민 계급의 의식적 공격이라기보다 당시 확산 중에 있던 금전화와 상업화의 메커니즘이었다.

 

시민계급이나 상층부를 이루는 집단의 목표는 사회적 제도로서의 귀족을 제거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최대목표는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위해 귀족 작위 이에 수반되는 특권을 얻는 것이었다. 엘리아스는 <<시민계급의 이중성>> 분석한다. 시민계급이 맞수 귀족에게 결정적 일격을 가할 없게 만드는 장치의 특별한 측면을 보면 시민계급은 귀족의 이런저런 특권을 폐지하려고 투쟁할 수는 있다. 그러나 시민계급은 귀족에게 특별지위를 부여하는 특권이란 사회적 제도 자체를 없앨 수도 없고 없애려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그에게 가장 중요한 자신의 사회적 존재 자체도 이런 특권들로 유지되고 보호되기 때문이다.  사회의 세포구조 곳곳에 이제 이상 신분적 특권에 사회적 기반을 두지 않는 시민계급의 존재가 등장할 그리고 결과로서 점점 많은 사회부문들이 정부가 보장하거나 설립한 특수권리를 기능분화의 전체과정에 대한 심각한 장애로 인식할 그럴 때에야 비로소 귀족에게 단호하게 맞설 있는 세력, , 귀족이 가진 개의 특권뿐만 아니라 귀족의 특권이라는 사회제도 자체를 폐지하려는 세력이 등장하게 된다. 그러나 특권제도 자체에 반기를 드는 신흥시민계급은 그렇게 함으로써 알게 모르게 신분제적 시민계급의 존재근거를 공격하는 것이 된다.

 

이들의 특권과 이들의 신분제적 조직형태는 반대편에 특권을 가진 귀족계층이 존재하는 동안에만 사회적 기능을 가지는 것이다. 신분계급들은 정확히 말하자면 적대적이고 이중적인 자매들, 동일한 사회질서의 상호의존적 세포들인 것이다. 제도가 파괴되면 다른 것은 자동적으로 무너지고 질서 전체도 붕괴된다.

 

실제로 1789년의 혁명은 단순히 귀족에 대한 시민계급의 투쟁으로 봐서는 된다. 혁명으로 인해 신분제 시민계급. 3계급의 특권관료인 법복귀족과 길드의 수공업자들도 귀족계급과 마찬가지로 몰락의 운명을 맞는다. 공동의 파멸은 앞서간 시대의 복잡하게 얽힌 관계망과 특별한 역학구도를 일거에 해명해준다. 그것은 앞서 특정한 사회계층들의 상호의존과 모순적 이해관계 그와 함께 발생한 평형장치 그리고 중앙권력의 강력한 힘에 관해 극히 일반적으로 언급했던 것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제도로서의 귀족에 대한 결정적 타격은 전체국가와 사회장치를 뒤흔들 것이며 그와 함께 부메랑처럼 기득권을 가진 시민계급 자신을 되맞출 것이다. 모든 특권계층들은 과도한 투쟁을 삼가는 일치된 관심을 보인다. 그들 모두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전체사회의 극심한 동요와 무게중심의 이동인 것이다.

 

물리적 폭력과 조세권을 서서히 중앙집중화 하면서, 기능분화의 진전과 직업시민계급의사회적 상승과 더불어 프랑스 사회는 점차 국가의 형태를 갖추게 된다.  엘리아스는 <<조세권 독점의 사회발생사>>에서 독점조직의 기능과 조직들이 장기적 계획에서 개인의 의도적 창조물로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작은 단계들과 시행착오를 거쳐 사회세력들 간의 부단한 부딪침으로 탄생한다고 본다. 엘리아스는 조세독점권은 물리적 폭력의 독점과 함께 국가를 형성하는 중추적인 제도이며 사회의 금전화, 봉토 지불에서 화폐지불로 바뀌면서 거기에 의존하는 사람들을 중앙기관에 지속적으로 묶어 놓게 되면서 궁극적으로 봉건제도를 해체하게 되는 것으로 본다

 

권력투쟁의 과정에서 영토를 확장함으로써 여타 전사계층으로부터 돌출해 나온 왕은 동시에 전사계급과 도시계층들 간의 갈등의 한가운데 있는 자신의 위치로 인해 다른 전사들에게 점점 거리를 두게 된다. 왕들은 3계급의 이해가 자신의 이해와 일치하는 그것을 꾸준히 장려했다. 무엇보다 세금을 부과할 있는 부르주아지의 경제력을 장려했다. 왕권의 부상과 시민계급의 부상은 상호 밀접한 의존관계에 있었다. 의식적으로 또는 인식하지 못한 계급은 서로가 서로를 높이 올려준 것이다.

 

시민계급은 점차적으로 통치기구 내의 귀족들과 성직자들을 몰아낸다. 왕의 충복계층. 관료는 독일에서와 달리 시민계급으로만 이루어진 조직이 된다.통치기구로부터 귀족들이 완전히 배제되면서 시민계급은 점차 사회 내부의 평형관계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지위를 획득하게 된다. 앙시앵 레짐의 최후까지 귀족과의 대결에서 시민계급을 대표했던 자들은 프랑스에서는 부유한 상인도, 길드도 아니었다. 그들은 여러 조직에서 활동하던 관료들이었다. 베르사유의 구조는 왕정의 서로 맞물려 있는 경향, 귀족을 부양하고 눈에 드러나게구분 지으려는 과제와 그들을 통제하고 길들여야하는 과제가 완벽하게 일치한다.

 

엘리아스는 전체의 개략으로서 <<문명화 이론의 초안>> 정리하는데 여기서 사회구조의 변화와 심리적 태도 행동구조의 변화 간의 연관관계를 강조 한다. 문명은 합리화와 마찬가지로 멀리 내다보며 수립한 계획의 결과도 아니고 인간 이성의 산물도 아니다. 변화는 무계획적으로 일어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정한 방향성과 질서를 가지게 된다고 주장한다.

 

인간들의 상호의존성으로부터 독특하고 독자적인 질서, 그것을 형성한 개인들의 의지와 이성보다 강하고 강제적인 질서가 출현한다. 이것이 역사변동의 길을 결정하며 인간의 충동과 투쟁이 얽혀 만들어내는 조직망의 질서인 것이다. 또한 문명화과정의 토대를 이루는 질서이다.

 

문명은 이성적인 것이 아니고 합리적인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비합리적인 것도 아니며,맹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여 관계망에 내재한 역동성에 의해 그리고 인간들이 상호 살아가는 특수한 변화로 인해 지속적인 운동 속에 있게 된다. 엘리아스는 서유럽인들이 중세 초기부터 합리적 계획을 근거로 현재의 제도들과 질서들을 향해 꾸준히 노력해왔다는 (막스 베버 같은) 생각은 사실로 입증할 없다는 입장이다.

 

폭력의 독점이 깊이 뿌리 내리지 못한 사회는 기능분화가 이루어진 사회이며, 개인들이서로 구성하는 행위의 고리가 비교적 짧은 사회이다. 폭력의 독점이 정착된 사회는 기능의 분화가 어느 정도 진척되어 있고 개인들의 행위고리가 길며 개인들 서로간의 기능적 의존성이 사회이다.

 

엘리아스는 <<문명화의 의미에서 일어나는 행동변화>> 폭력행위의 행사가 중앙권력으로 독점된 후에는 타인에 대한 공격을 억제해야 하고 행동과 감정표출 또한 억제해야 하는 것으로 사회 환경이 바뀌면서, 이제는 자신의 감정을 자제할 아는 사람이 유리하게 되자, 개인은 자신의 행위의 결과를 고려하도록 압력을 받게 되고 사회 영역 내의 의존성도 증가하게 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인간관계의 구조가 변하고 육체적 폭력을 독점하는 조직이 등장하며, 부단한 파벌싸움과 전쟁 대신 금전과 명성의 획득이라는 평화로운 기능들이 개인을 통제하게 되면감정표출은 극단의 중간지점을 지향한다.

 

중세사회이 특정한 영역에서는 극단적 형태의 금욕주의와 자기억제와 절제가 발견되지만, 사회의 다른 부분에서는 그에 못지않게 극단적인 쾌락의 탐닉이 존재하며, 우리는 종종 이를, 태도에서 태도로 급격한 반전을 이루는 것을 사람에게서도 관찰할 있다. 사회에서 개인이 스스로에게 부과하는 자기통제와 자신의 육체에 대한 투쟁은 정도에서 반대편인 타인에 대한 투쟁이나 향락에의 도취 못지않게 강력하고 일방적이다. 중세사회는 이렇게 극단의 양극성이 존재하였는데, 평화로운 공간에서 폭력이 독점되면서 나타나는 자기억제나 자기통제는 전혀 다른 유형의 것이다. 그것은 정열 없이 무의미한 자기억제인 것이다. 사회의 통제기관과 감시기관은  개인의 인격 속에 만들어지는 통제장치와 일치한다. 가지 모두 어떤 행동이나 열정적 충동 모두를 조종하려 한다.

 

엘리아스는 프로이트의 이론을 수용하여 <<충동의 내면화, 욕망의 승화>> 말하는데 귀족들이 궁정화 과정에서 기사소설을 읽거나 현대인들이 영화나 스포츠를 통해 폭력과 열정을 즐기는 것을 예로 들고 있다. 육체적 대립과 전쟁은 줄어들고 그것을 연상시키는 , 죽은 가축을 자르거나 식탁에서 칼을 사용하는 관습은 점차 사라지거나 적어도 정확한 사회적 규제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전쟁이 벌어지는 무대는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의 내면으로 이전된 것이다. 과거에는 인간과 인간의 직접대결로 해결되던 갈등과 열정의 일부를 이제는 자기 내부에서 극복해야만 한다. 타인에 대한 자신의 관계가 스스로에게 가하는 평화적인 압력은 자신의 내면에서 모사물을 찾게 된다는 것이다. 그의 내면에, 특이한 형태의 습관과 초자아와 그의 감정을 사회구조에 부합하도록 조절하고 변형시키며 억압하는 장치가 확고하게 자리 잡고,점점 많은 인간집단이 서로 의존하게 되고 그들 사이에 물리적 폭력이 배제되면서인간 상호간의 강제를 자기강제로 전환시키는 사회장치가 형성된다는 것이다.

 

서유럽의 문명화과정을 특별하고 유일한 현상으로 만드는 것은 기능의 분화수준과 폭력 조세독점의 견고성 그리고 상호의존성과 경쟁의 정도가 세계사에서 전례를 찾을 없을 정도로 앞서 있다는 것이다.

 

상호의존의 연결망의 크기 내적 압력과 개인의 인격 간의 연관성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특징들 하나가 우리가 현대의 속도로 부르는 것이다. 속도는 서로 종속되는 수많은 행위들의 표현이고 사람 사람의 행동이 부분으로서 서로 연결되어 만들어진 길고 촘촘한 고리의 표현이며 상호의존의 관계망이 작종시키는 각축전과 선발전의 표현이다

 

행동변화의 전체방향인 문명화운동의 추세는 어디나 동일하다. 어디에서나 변화는 자동적인 자기감시의 방향으로  단기적 충동을 습관화된 장기적 시각의 요구에 종속시키려는 방향으로 그리고 복잡하고 안정된 초자아 장치가 형성되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순간적 감정을 미래의 목적에 종속시켜야만 하는 필연성이 널리 보급되는 방식도 전체적으로 동일하다.

 

 사회적 상황과 행동규약에서 상류층과 하류층 간의 차이가 사회의 발전으로 줄어들었다는 것은 서구사회의 특성 하나이다. 발전과정에서 하류층의 특성이 사회로 확산되어나간다. 서구사회 전체가 능력 있는 모든 사람들도 일정한 유형의 노동을 통해 생계를 이어가는 사회가 되어 간다는 사실은 그것의 징후이다. 노동은 과거 하류층의 특징이었다. 동시에 예전에는 상류층을 구분하던 특징들이 이제 사회 전체로 퍼져 나간다. 사회적 외부통제에서 자기통제로의 전환, 습관적이고 자동적인 본능억제와 감정조절로의 전환은 이제 서구사화 내에서는 전체 민중계층에게서도 일어난다.

 

엘리아스는 서유럽 문명이 차이와 우월성을 증명해주는 특징으로 보며, 동양인들과 아프리카인 들이서유럽 수준으로 전환하기 시작하는 현상은 문명화운동의 마지막 물결로 보는 점에서는 막스 베버와 다를 없는 유럽 우월주의자이다.

 

 서구의 문명화과정뿐만 아니라 밖의 모든 문명화과정에서 이루어지는 결정적인 전환은 전사의 궁정화이다. 서구에서 이는 11세기, 12세기에 서서히 시작되어 17세기와 18세기에 마무리 된다. 전사들의 궁정화과정에 추진력을 제공한 전체운동 기능분화 지역과 계층들의 통합과 상호의존망의 형성은 마침내 15세기와 16세기에 가속화된다. 독점이 진행되면서 자유기사라는 기능은 사회에서 사라졌다. 엘리아스는 지구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명운동의 기초적인 전제조건으로 전사들의 궁정화를 들고 있는데 이는 서유럽에서는 비교적 적실성을 가지지만 동아시아나 다른 문명권에서는 맞지 않는 것으로 본다. 화폐유통망의 확충과 더불어 장원의 수확만으로는 평범한 생활수준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고 때로는 그것조차 불가능했으며 시민계층의 커진 힘에 대항하여 상류층으로서 위상을 지키기에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궁정으로 들어갔으며 그로써 왕에게 종속되는 위치에 처하게 된다. 사회적 위상의 상실, 또는 감소에 대한 두려움은 외부통제를 자기통제로 전환하는 가장 강력한 원동력이 되었다. 검이 해결의 수단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게 되자 이제 출세와 사회적 성공을 위해 말로 언쟁을 벌이는 음모와 암투 등이 대신 등장한다. 그것은 무기로 치르는 투쟁 대신 다른 특성을 요구하고 길러낸다. 심사숙고 자기안목 자기절제 자기감정의 정확한 조절 인간을 비롯한 전체 영역에 대한 광범한 지식 등은 사회적 성공에서 필수적인 전제조건이 된다

 

전사들의 궁정화과정에 추진력을 제공했던 전체운동, 기능분화 지역과 계층들의 통합과 상호의존망의 형성은 마침내 15세기와 16세기에 가속화된다. 이런 현상은 화폐의 운동에서 분명하게 있다. 화폐의 증가, 유통이 활성화 되면서 화폐가치 또한 하락하게 되는데 이것이 왕이나 제후에게는 유리하게 작용하였고 중소 기사계급을 몰락시킨 근본 원인이다.

 

사회적 위상의 상실 도는 감소에 대한 두려움은 외부통제를 자기통제로 전환하는 가장 강력한 원동력이 되었다. 17, 18세기 궁정귀족들은 아직은 돈보다는 궁정에 속한다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왕에 대한 의존성과 종속성이 수밖에 없었다. 또한 귀족들에게 의존 수밖에 없었는데 핵심은 점차 부상하는 시민계급을 반대편에서 제어할 있는 세력 균형의 기능 때문이었다.

 

엘리아스는 인간을 극히 조형가능하고 변형가능한 존재로 보기 때문에 이성이란 원래 없고 기껏해야 합리화가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명사화하여 이성 또는 오성, 분별력이라 부르는 것은 전체의 심성구조가 특정한 방식으로 조형된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본다. 이성, 자기통제, 초자아가 어느 문득 발생한 것도 아니고 항상 있어 것도 아니고 분명하게 설명될 있는 방식으로 조형된 것이라고 보는 점에서는 프로이트를 따르고 있다.

 

인간의 의식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 고정관념 하나는 심리 인간의 정신가계는 여러 개의 영역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영역들은 서로 무관하게 기능하고 따라서 따로따로 고찰해도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의식이나 이성 또는 이념만을 주목하고 본능의 구조 인간의 감정과 정열의 형태나 방향을동시에 고찰하지 않는 종류의 연구들은 처음부터 효과나 생산성에서 제한될 수밖에 없다.

 

이념사나 사유형태의 역사를 진정으로 이해하려면 인간 상호간의 관계가 어떻게 변화했는가와 함께 행동의 구조와 심리구조의 조직 전체를 고려해야만 한다. 무의식과 이드를 전체 심리구조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강조하는 경향은 이론화과정에서 사유도구로 발전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엘리아스의 입장이다. 엘리아스는 무의식적인 리비도의 자극에 의한 인간의 통제가 개인의 결합태적 운명이나 다른 조절기능들의 형태 구조와 무관한 나름의 형태와 구조를 지닌다는 것에는 반대하고 있다. 엘리아스에 의하면 행동을 결정하는 것은 인간의 조형 가능한 충동과, 짜서 붙박이로 심리구조 안에 넣어진 충동-통제 간의 균형과 갈등인 것이다.

 

엘리아스는 <<수치심과 당혹감>> 문명화과정을 연구하는 중요한 포인트로 보고 있는데 16세기 합리화의 강력한 추진과, 수치심과 당혹감을 느끼는 한계점이 낮아지는 현상을 동일한 심리적 변형의 양면으로 보고 있다.

 

서양에서 행동의 문명화가 진행되는 결합과정은 국민계층이 생활수준의 향상, 상류계급의 기능적 의존 중앙독점, 기능분화와 노동 생산성의 증대 등이며 매우 높은 단계의 기능분화로부터 비로소 전문화된 독점적 행정기관을 갖춘 폭력 조세독점들의 형성이 가능해진다. 이러한 국가의 형성으로 개인은 보다 높은 수준의 안전성을 획득하고, 많은 인간들과의의존성이 확대된다. 이것은 개인의 자제, 그의 행동과 정념의 정확한 규제를 요구하고 배양하는 것이다. 신분의 벽이 무너지고 만인에 대한 만인의 기능적 의존이 점점 강화되고 모든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동등하게 비로소 내밀한 특정 공간 밖에서 다른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이루어지는 노출은 점차 미풍양속을 침해하는 것이 된다. 그렇게 되면 이러한 행동들은 개개인에게 어릴 때부터 완전히 불안과 두려움의 감정을 야기하여 금지의 사회적 성격은 그의 의식으로부터 완전히 사라진다. 이제 수치심은 그에게 전적으로 자신의 내면의 명령으로 나타난다. 당혹감은 초자아를 통해 대변되는 사회의 금기지침을 다른 사람이 파괴할 위험이 있거나 또는 파괴할 등장하는 불쾌감 또는 불안이다.

 

엘리아스는 현대 세계의 통합이 지향하는 방향을 개별국가를 넘어서는 일종의 초국가적통합국가에서 찾고 있다. 국제경쟁으로 인한 갈등은 우리 사회의 구조가 강한 갈등의 압력으로 인해 일련의 유혈. 무혈 권력투쟁을 거쳐 폭력이 독점되고 통합단위의 중앙조직이 확립되지 않는 결코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라는 이유에서이다.

 

특별한 가족들에게만 세습적으로 주어지는 독점기회는 해당사회 내에서 갈등과 분열을 야기한다. 우리 사회에서 개인들의 행동에 가해지는 통제를 오로지 논리적 사유에 근거한 합리적인 어떤 것으로 설명하는 것이 오래 전부터의 관례이지만 엘리아스는 다르게 생각한다. 합리화과정 자체와 사회적 터부의 합리적 형상화 정당화는 본능과 감정뿐만 아니라 의식과 반성의 수준을 포함한 전체인격에 영향을 미쳤던 전환과정의 측면이라는 것이 그의 견해이다.

 

 현재 우리 의식의 부분이자 개인적 초자아로서 우리에게 이식된 행동규칙들 대부분은 권력과 사회적 위상에 대한 기득권 집단의 열망들 중에 남아 있는 잔재들로서 그들의 우월한 권력과 지위를 한층 강화하려는 기능만을 가지고 있다. 행동규칙들의 도움으로 집단의 구성원들은 자신들의 능력과 업적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다른 집단들에게는 통로가 봉쇄된 권력기회의 독점적 소유를 통해서 스스로를 차별화한다. 국제적 국내적 갈등이 해소되어야만 인간관계의 통제는 기능분화의 높은 수준과 이를 전제로 높은 생활수준과 노동 생산력을 유지하는데 필수적인 명령과 금지들에만 국한될 것이고 인간의 자기통제도 사람들이 두려움 없이 서로 살아가고 노동하고 즐길 있기 위해 필요한 만큼으로 줄어들 것이다.

 

그렇게 되어야만 인간은 충족을 요구하는 자신의 불가피한 본능과 이에 가해지는 제재 간의 최상의 균형- 행복, 자유로 말해지는 심리적 조건 지속적인 평형상태. 자신의 사회적 과제들. 사회적 실존의 요청과 자신의 개인적 성향과 욕구들 간의 조화- 예외가 아니라 규칙이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결합태의 구조와 인간상호의존성의 구조가 이런 성격을 가지게 되고, 인간의 공존이 이런 방식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마음의 평형을 있는 방식으로 기능한다면 비로소 인간은 문명화되었다고 주장할 있을 것이다문명화 과정은 끝나지 않았다. 그것은 진행 중이다라고 말할 있을 뿐이다.

 

 

 

 

모더니티(근대성)을 생각하다  20세기 초  경성의 모던 보이 ‘이상'을 떠올렸다. 이상은 시골은 권태이며, 근대화된 도시는 백화점과 화려한 상품들, 현란한 광고, 카페 등 강렬한 자극으로 가득차 있다고 표현하였다. 모던한 생활은 많은 순간성과 변화가 펼쳐진 환경을 의미 했다. 근대화된 도시의 원형은 서양의 자본주의적 대도시에서 출발했다. 대표적인 도시가  프랑스  파리였다. 데이비드 하비의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는 19세기 파리에서 행해졌던 자본주의적 도시 개조 작업을  자세하게 묘사하고 분석 하였다. 국내에  2005년  2월에 출간 되었다가 절판  되었다.  올해  ‘글 항리아리’에서  다시 출판 하였다.  번역자는 김병화로 동일한데  일부 번역어가  변경 되었다.  목차에서  변경된 용어를 확인할 수 있다. 1부  2장 의 '신체 정치(body politics)’가  ‘정치체'로 변경 되었다.  정치의 의미보다는 유기체를 의미하는 개념으로 변경한 것 같다.  2부  '물질화(materialisations)’가  '형체를 갖다’ 로 변경 되었다.  도시의 자본주의적 물신화 과정과 연계한  물질화가  더 가깝게  느껴졌다 

 

저자  데이비드 하비는 1935년 영국에서 태어나 케임브리지대에서 지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옥스퍼드대 존스홉킨스대 등을 거쳐  뉴욕시립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40여년간 마르크스의 '자본'을 강연하였다. 역사지리학 분야의 개척자로서 자본주의가 갖는 모순이 역사지리적 전환을 겪으면서 어떻게 재편 되는가를 추적하였다. 그의 가장 큰 관심분야는 자본주의와 도시의 관계다.  벤야민 이후 가장 강력하게 도시와 마르크스 주의를 결합시키고자 했던 사상가다. 대부분의 책이 국내에 번역 되어 있다. 1990년대에  번역된 ‘도시의 정치 경제학’, '포스트 모더니티의 조건’등은 절판 되었다. ‘도시의 정치 경제학’은 1985년 출간된 '자본의 도시화'와 ‘의식과 도시경험’에서 중요하고 기본이 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자본주의 도시화에서 하비의 도시 및 공간에 대한 사회 이론을 살펴보는데 도움이 된다.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에서 하비의 이론을 파리라는 곳에서 구체적으로 확인 할 수 있다.  ‘포스트 모더니티의 조건”은  자본주의 물신숭배와 그 의식의 조건으로서 시간,  공간, 도시 경험을 들을 분석 하였다. 모더니티 개념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다.   

 

현재 우리의 삶을 만들어내고 있는 서울이라는 도시를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를 통해 읽을 수 있다. 우리가 19세기로  돌아가 파리를 읽어야 하는 이유를  벤야민은 신화적 사유에서 벗어나야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일상화 된 신화적 사유가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고 올바른 인식을 가로막는다고 한다. 자본주의 도시화가 가져다준 진보와 행복이란 관념이 신화적 사유에 불과하다고 한다. 여성과 노동자의 삶은 더 나아 졌다고 하지만 실제로 나아진것은 미비하다. 억압의 양상과 방식이 변화 되었다고 한다. 자본가와 노동자의 갈등과 대립은 오늘날에도 여전하다고 한다.  20세기를 살았던 벤야민이 19세기 파리를 연구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벤야민은 데이비드 하비 이전 “아케이드 프로젝트”로 파리를 연구한 철학자이다. 벤야민과 하비의 분석의 차이점을 이 책에서 만날 수 있다. 

 

벤야민은 파리라는 도시의  물질적 생활과 문화 활동, 사고 유형에 관한 수많은 관점을 살폈다. 이렇게 함으로써 일종의 전체적인 감각을 전달하는 일을 해내는 것이다. 그는 온갖 종류의 2차 자료에서 얻은 수많은 정보를 집결시켰다. 그런 정보의 조각과 단편들을 이용하여 파리가 어떻게 작동했으며,  어떻게 해서 근대 탄생을 위한 중심 장소가 되었는지 보여주었다. 거대한 만화경의 일부인 것 처럼 열거해나가는 방식이었다. 전체성에 대한 이 단편적인 접근이 '아케이드 프로젝트'에 드러나 있다. 하비는 전체적인 관점에서 19세기 파리에서 자본과 근대성이 어떻게  특정한 장소와 시간에 만났는지를 설명하였다. 이 만남에서 사회적 관계와 정치적 상상력이 어떻게 활기를 얻었는지를 재구성 했다. 역사적/지리학적 탐구에 기반한 정치경제학적 틀로 분석하였다. 이와 더불어  하비는 파리라는 도시의 구체적 상황들을 설명하고 분석하기 위해  보들레르, 플로베르, 발자크, 도미에를 호출한다. 그들의 작품에 들어 나 있는 생생한 묘사와 삽화는 그 시대의 모습을 독자가 받아 들이기 쉽게 한다. 하비의 인문학적 상상력이 발휘되는 지점이다. 우리는 하비의 도움으로  생생하게 복원된 파리 모습을 그려 볼 수 있고 그 안에 내재 되었던 이면을 통찰 할 수 있다.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는 1830년 부터 1871년 파리 코뮌 까지 이르는  기간 동안의  근대적 도시화 과정을 설명 하였다.  이간동안 파리는 1848년 6월 혁명과  1851년 제2제정의 시기를 거친다.  1848년 혁명은 노동자들과 부르주아들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 하였다.  공화주의와 사회주의자들은 군주제와 상대하여  민주적 개혁을 요구하였으나 좌절되었다. 이후 1871년 파리 코뮌에서도 사회주의 공화국을 꿈꾸었지만  처절히 살해되는 비극을 겪게 되었다.  책의 구성도 서문 이후는 1848년을 기점으로 나뉜다. 1848년 혁명이 경제, 정치, 일상생활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1부는  1830년 ~ 1848년대의 묘사이다.  2부  형체를 갖다는  1848년부터 1871년 파리 코뮌까지를 다룬다.  이책의 주요 내용이다. 전체 18장중 15장을 할애 하였다.  제2제정 대부분 기간 동안 파리지사 오스만이  시행 했던  도시 개편 작업과  영향에 대해 상세하게 분석해 놓았다. 그 결과로 인해 발생한 1871년의 파리 코뮌을 상세하게 설명 하였다. 19세기 파리의  일상생활을  볼 수 있으며 그것이 갖는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마지막 3부 코다는 샤크레콰르 바실리카의 건설을 다룬다. 바실리카 건설에 관련된 일화들을 통해  파리 코뮌의  피비린내 나는 역사를 느낄 수 있다.  도시 개편 작업으로  변형된 도시공간에서의 계급 투쟁을 살펴 볼 수 있다. 

 

서문에서는 근대성을 다룬다. 익숙한 용어지만 구체적으로 설명하려고 하면  머뭇거리게 된다.  근대성은  일반적으로  근대적 형태의 합리성을 뜻한다.  신비적인 것에서 벗어난 과학적인 것을 의미한다.  계산과 예측  그리고 그에 따르는 통제의 가능성이다. 이러한 것들이 근대적 삶의 합리성을 가능하게 했다고 한다.  생활에서  계산 가능성은 삶의 모든 것을 양적인 형태인 화폐로 표현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화폐가 모든 가치 있는 것을 대신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상품화 되는 것이다.  관계는 물신화 되는 것이다.  우리는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에서  이러한  자본이 만든 도시의 원류를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특징들은  현대라고 불리는 우리 시대에 지속되고 있다. 

 

하비는 근대성의 신화가운데 하나가  과거와의 근본적인 단절이라는 개념이라고 한다.  근본적인 단절이 발생하지도 않았고 발생할 수도 없다고 주장한다.  어떤 사회질서도 기존 여건속에 이미 잠복해 있지 않던 변화를 만들어 낼수 없다는 입장이다.  근본적 단절의 가능성을  명백히 부정한다. 그와 동시에 혁명적 변화의 중요성을 주장 하였다. 이는 창조작 파괴와 만난다. 자본주의가 새로운 부를 창조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는 생태계 조성차원에서 경제질서를 파괴, 재편 해야 하는 것이다.  달걀을 깨뜨리지 않고 오믈렛을 만들 수는 없다는 속담을 인용한다. 새로운 사회형태를 만들려면 어떤 방법으로든 옛것을 능가하거나 그것을 폐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근대성이 하나의 개념으로서 의미를 가진다면 그것이 창조적 파괴의 결정적인 순간들을 신호해주기 때문이다 라고 하비는 말한다. 

 

오스만은 제 2제정 시기의 도시 개편작업을 근본적인 단절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자신과 나폴레옹을 포장하기 위한 목적이며, 새로운 정권에 필수적인 건국 신화와 전제주의 정당성 확보에 기여 하였다고 한다. 하비는 이러한 단절 신화에 대해  발자크의 소설과 단편 분석을 통해 신화 임을 드러낸다. 그 당시 인간 전형과 공간의 모습들을 생생하게 만날 수 있다. 만보객이라는 인물형을 이용하여  현미경으로 들여다 본 것이다. 현미경에 나타난 모습은 자본주의 물신적 모습이었다. 철저한 단절 이라기 보다 기저에 흐르는 연속성을 발견할 수 있다. 

하비는 1848년 이후에 달성된 급격한 변형이 그 이전 시기에서 어느 정도로, 어떤 방식으로 미리 예시되어 있었는가를 분석한다. 1830년대와 1840년대에 고작 ‘배아' 상태에 상태에 있던 사회적 관계들을 예고 했다. 발자크의 작품에서 파리의 장래 모습까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하비는 또한 1860년대 보들레르가 정의한 근대성을 인용한다. 예술가의 목표는 “영원하고 확고 부동한 것”을 다루는 예술의 다른 절반과 관련하여 근대를 상대적으로 “일시적으로 덧없고 우연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어야 한다 (32쪽). 보들레르는 근대성이 일시적이고 우연적인 측면과 영원 불변의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연속성의 측면이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도  어떠한 사회질서도 새로운 것의 특징들이 기존 상태에 이미 현존하지 않고서는 변화할 수 없다는 입장을 견지 했다고 한다. 이 책에서 하비는 근대성 개념을 구체적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다만 하비는 오스만의  등장이  도시를 강제로 근대성으로 몰아 넣어다고 표현한다. 이책 부제가  '자본이 만든 메트로폴리스’이다. 자본이 만들어낸 대도시가 하비의 근대성과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추정하였다.   

 

하비는 근대성 개념에 대한 이야기에서 공간 분석으로 시야를 돌린다. 역사지리학자의 면모를 드러낸다.  발자크의 소설에 구체적으로 나타난  공간적 유형을 분석한다. 사회관계가 공간에 새겨져 있다고 한다. 공간 유형은 도덕적 질서의 반영이다라고 한다. 상류계급과 귀족은 자기들만의 중심을 가지고 있고, 평민들도 언제나 자기만의 특별한 구역을 갖게 되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도 "어떤 위치에 있음”이라는 사실을 결코 무시할 수 없다고 한다.  공간은 인간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소인 것이다. 발자크를 통해 보여주는 것은 도시의 길거리와 이웃들의  ‘심리지리학’ 이다. 그의 인물들은 심지어 한 구역에서 다른 구역으로 이사하면 성격이 바뀌기까지 한다. 공간이 만들어 내는 영향이다. 자본주의의 지리적 팽창과 자본 순환의 가속화 경향이 갖는 혁명적 성질을 의미한다. 그것은 주기적으로 시공간 압축을 벌이려는 자본주의의 경향을 가리킨다. 오스만의 새로운 교통, 통신 체계에 대한 투자는 공간적 장벽을 감소시키고 자본 순환을 위한 지리적 경계를 축소시켰다.   

 

하비는 공간에 이어 기억을 이야기 한다. 발자크 작품에 나타난 역사적 상황 설명으로 기억이다.  발자크는 '희망은 욕구하는 기억이다’ 라고 한다. 기억과 욕구의 이러한 결합은 근대성의 신화가 어떻게 그 처럼 강력한 힘으로 유통되는 지 밝히는데 기여한다. 기억이란 우리를 살아 있게 하는 유일한 기능이다. 그것은 수동적이고 관조적이라기 보다 활동적이고 원기가 넘치며 자발적이고 상상력이 풍부하다. 그것은 과거의 시간과 미래의 시간을 지금 여기서의 활동을 통해 통합할 수 있게 해주며, 기억은 과거의 엄청난 잠재력을 전부 현재로 끌어 온다.

 

공간과 기억은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도시를 기억할 만한 것으로 만들고, 그렇게 함으로써 집합적 기억을 위한 특별한 장소를 상상속에 구축한다. 이것은 혁명의 순간이 오면 '번뜩이는' 어던 정치적 감수성의 근거가 된다. 이것이 바로 작동중인 도시를 근거로 한 혁명적 변형으로서의 근대성의 신화라고 한다. 기억이 1830년에 '번뜩여' 혁명적 감수성을 이어 붙이는 데서 핵심적 역할을 담당했고, 1848년 혁명과  1871년 코뮌에서 마찬가지 였다고 한다.  희망이 기억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욕망에 연결된 기억이 희망을 발생시킨다고 한다. 

하비는 이어 정치체를 이야기한다.  정치체는 자연적 신체의 은유를 사용하여 정치적 주체를 그와 같은 하나의 유기체로  간주 하는 개념이다. 1840년대의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여성운동가, 개혁가들은 도시를 미래의 좋은 사회가 되어야 할 어떤 것의 기반이 되는 하나의 정치적, 사회적, 물질적 유기체 형태로 보고 관심을 가졌다. 하나의 신체적 정체인 것이다. 1840년대 사회를 거꾸로된 세계로 규정하고,  노동자와 진보적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사회주의적 대안이 고려되기 시작했다. 다양한 유토피아적 전망을 가졌다.  우리는 하비를 통해 다양한 사상가를 만난다. 

 

 블랑키 혁명을 준비한 사람들은 국가 권력을 떠맡고 대중을 교육시키고 자치 정부를 운영할 능력을 고취시키기 위해 프롤레타리아의 이름으로 독재 권력 구축을 이야기 했다. 생시몽 주의는 노동권과 조직 조직 결성으로 노동자 농민의 빈곤과 불안을 해소하려 했다. 푸리에는 생산과 소비는 ‘팔랑스테르’라 불리는 공동체 조직을 언급한다.다양한 노동과 사회적 참여의 기회를 제공하여 욕구와 필요와 욕망의 충족 및 행복감을 보장하는 것이다. 이외에도 프루동의 상호부조주의, 르루의 공동체 주의, 푸리에의 열정적 매력과 해방의 이론, 카베의 공동체/공산주의 해석, 뷔셰의 생산자조합이론을 만날수 있다. 급속도로 바뀌는 도시 생활과 이러한 수많은 유토피아적 계획 사이에는 괴리가 있었다. 하지만 콩시데랑과 페레몽은 실용적이고 납득할만한 것이었다고 하비는 이야기 한다. . 1848년 6월 혁명에서 대로에서 실제로 근복적으로 상이한 개념이 충돌했다고 한다. 철저한 부르주아적 개념과 사회공화국의 이상에 기반을 둔 개념 이었다. 부르주아적 개념은 사유자산의 강고한 기반에 근거하여,  언론과 시장에서 행동의 자유를 추구하고 화폐권력에 수반되는 종류와 자유와 평등이 었다. 사회공화국 개념은 인구 전체를 양육할 수 있고 국민 대다수가 겪고 있는 빈곤과 몰락의 여건을 다룰 수 있다는 것이다. 

 

제 2제정은 이와 다른 근대성을 추구 했다고 한다,  사유 재산의 존중, 민중주의적 기반을 배양하려는 주기적인 시도로 인해 정지되곤하는 시장에 대한 떨떠름한 존중이 권위주의와 뒤섞이게 되었다고 표현하였다.  발자크를 포함한 당대의 사람들은 자신의 도시를 소유하고 자기것으로 만들며, 그것을 개조하는 과정에서 사회절서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자신은 개조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고 한다. 1848년 이후 그 도시를 소유하고 그것을 자기만의 특별한 이익과 목적에 맞추어 개조한 것은 오스만과 개발업자, 투기꾼, 자금주, 시장의 힘이었다. 이는 대중에게는 상실감과 허탈감만 남겼다. 도시는 아무리 아릅답게 건설되고, 고상하게 꾸며졌다고 해도 그 위에 진행되는 인간 행동의 배경 구실을 할 뿐이었다고 한다. 도시는 죽은 대상이 되었다. 그  도시는 "감정을 가진 존재"나 “정치체”로서의 성격은 완전히 잃어 버렸다고 한다.

 

오스만의 파리 제편 과정을 다루는 제2부 형체를 갖다는 1848년 혁명부터 1870년대를 이야기 한다. 1848년은 자본주의가 충분히 성숙한 단계에 올라섰을 시기 였다.  당시에 무모한 투자, 과잉생산과 관계가 있었다. 자본주의적 과잉 축적의 문제로 대규모 과잉 사태를 빚은 것이다. 자본과 노동력이 나란히 존재하는데도 그것들을 재통합하여 이윤을 낼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없는 상태 였으며 제대된 위기 였다. 제 2제정 18년은 오스만의 작업이 도시의 물리적 바탕을 절개하고 개조하는 하였다.  도시 개조사업의 가치가 입증 되었고  파리는 그 뒤 30년이 지난 뒤에도 대체로 오스만이 규정한 노선에 따라 개발되었다고 한다. 하비는 개발 과정을 서로 맞물리고 교차하는 일련의 주제들에 기대어 제2제정기에 일어난 파리의 역사지리적 변형을 설명 하였다. 공간관계의 조직, 화폐/신용/금융, 임대료와 부동산 이권, 국가를  거쳐 추상적 구체적 노동 등을 구분하여 설명 하였다. 도시에 대한 역사지리학으로서 공간을 움직여 나가는 의식의 형성에 설명하고 도시 변형의 지정학으로 마무리를 한다.  

 

1848년에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적나라하게 드러난 자본과 노동력의 잉여는 건조환경에 대한 대규모 장기 투자로 흡수 되었다. 이는 수송과 교통 등 공간 관계의 개선 사업을 통해 자본이 순환을 개선 한 것이다. 새로 건설된 철도역 사이를 이어주는 흐름, 도심과 주변부 간의 흐름을 개선하였다. 도시구역내에서 상품과 인간의 유통 능력을 개선 시킨 것이었다. 자본의 순환 시간을 단축시킨것이다. 

 

이는 소매업의 혁명을 가져 왔다. 1840년에 처음 개설된 대규모 백화점의 성장하였고 이로 인한 상인과 제조업자간의 권력관계가 이동 되었다. 이는 부분적으로 새로운 공간관계가 낳은 산물이었다.  현지 생산물에 한정되고 안정적인 보급도 보장해주지 못하는 공급선에 의존하는 관계에서 벗어나 지방과 외국으로 공급선을 확대한다. 관광객들이 몰려와 유효 수요를 더해 주었으며, 근교에서 쇼핑객들이 밀려 들었다.  파리 노동시장 또한 더욱 커지는 노동력 수요를 채우기 위해 더 먼지역까지 범위를 확대 하였다. 이러한  외부적 공간관계의 변형은 다시 파리 자체의 내부 공간을 합리화하려는 추진력에 강한 압력을 가했다. 오스만이 기여하여 만들어낸 것은 그 속에서 자본의 순환이 제국주의적 권력이 되어버린 도시 였다. 하비는 제 2제정은 시공간적 압축으로 인해 격렬한 발작을 겪었다고 표현한다.  이 현상이 낳은 모순적인 결과는 어디서나 눈에 뛰었다. 새로운 운송에 대한 투자의 방향은 행정과 재정, 경제, 인구가 파리에 집중되는 경향을 더욱 강화 했다. 도시 규모에 창조적 파괴를 수행 것이었다.  

 

신용체계의 혁신은 장기간의 투자를 가능하게 하고 근본적으로 다른 회전 시간을 갖고 있는 서로 다른 생산 체계와 가능한 병립할 수 있도록 하여 시간적 제약을 완화 시켰다.  제2제정 금융시스템은 공공사업의 투자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설립된 크레디 모빌리에를 중심으로 이루어 졌다. 신용시스템은 자본의 연합을 통해 합리화되고 확장되고 민주화 되었지만 대개 무절제한 투기와 중앙집중화되고 위계적으로 조직된 시스템속으로 모든 저축을 빨아 들였다.  

 

파리의 부동산은 파리 재편이 진행됨에 따라 순수한 재정적 자산으로 자본,  일반적인 유통과정에 통합된 교환가치가 사용가치를 전적으로 지배하는 의제 자본 형태로 평가 되었다. 오스만의 계획에 따라 건설된 대로변과 그 뒷길 사이의 토지 가격의 격 차와 그로 인한 임대료 수준의 격차, 중심부에서 변두리로 갈수록 점층 적으로 낮아지는 임대료로 인해 파리의 여러 지역은 서로 다른 직업적, 계급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자본이 만드는 도시는 노동의 변화도 가져 온다. 점점 더 복잡하고 세부적으로 전문화된 노동 분업을 통하여  수많은 소기업 들이 보다 큰 조직 형태의 하도급 단위에 불과한 존재가 되었다.  새로운 신용시스템의 등장으로  대규모 생산업과 서비스업의 창출을 용이하게 해주었으며  이로 인해 소생산자와 장인들의 입지는 더욱 축소 되었다. 거대한 생산 중심지에서 축적된 자본이 아무 제재도 받지 안았다. 일종의 합법적인 억압기구가 되어 노동을 통제하고 작업을 분배하고 좀더 전문화된 일자리를 만들어 내었다. 노동자들은 이들이 만들어 낸 명백하고 파괴적인 악에 대해 무방비 상태로, 저항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이와 더불어 노동계급에서 소득이 생계비 증가율을 앞질러 증가하는 소수의 특권노동가 집단과 아무리 힘들게 일해도 도저히 수지를 맞출 수 없는 불행한 범주에 속하는 대다수 노동자로 양극화 하는 현상이 일어 났다. 우리의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를 닮았다. 기술 없는 대규모 이주 산업  노동자는 도시 근교에 생활 하였으며, 코뮌이 일어 났을때  낮은 참여도를 보이며 뚜렷한 정치적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하비는 이어 여성의 여건을 이야기한다.  여성은 또하나의 잉여 노동자로서 남성 노동자와 비교하여 대우는 매우 낮았다. 임금으로 임대료와 의류비 등을 제외하면 빵과 우유를 조금 살수 있었다. 여성 노동자로 삶은 암울 하였다. 이 당시 대부분의 매춘은 순전히 배고픔과 절망적 상황 때문에 이루어졌다고 한다. 프롤레타리아의 중의 프폴레타리아라고 표현된 노동계급 여성의 지위라는 것이 성별과 계급간의 긴장, 페미니즘과 사회주의 사이의 긴장이 당시에 상대적으로 약화 되었음을 의미한다는 점도 대체적으로 인정되었다고 한다.파리 코뮌에서 여성 조합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하비는 오스만이 시장이 된 이유중의 하나가 스펙터클을 성공적으로 연출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제2제정을 통해 오스만은 기회가 있을때마나 스펙터클을 연출한다. 이러한 스펙터클속에 개인은 관중으로서의 삶을 시청할 수 밖에 없는 사회가 시작된 것이다. 개인은  도시라는 공적 공간의 주인이 될 수 없다. 도시는 나와 상관없이 무심하게 저기 저렇게 거대하고 화려한 공간으로 놓여 있을 뿐이다. 구경꾼이 탄생이었다. 그들은 근대성이 만드는 스펙터클의 일부 즉  파리를 이루는 수천명의 뿌리 뽑힌 삶을 상징으로 본다. 공적 공간에서의 자아의 현시가 표상의 대체물이 되었으며, 자아의 현시는 점점 더 상품화와 스펙테클의 문제로 환원되었다. 제2제정이 시작이 되면서 제국이 제공하는 스펙터클이 어마어마하게 강조되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상품이 제공하는 스펙터클이 우세해 졌다. 개인이 스펙터클의 운반자가 되는 것이다. 보여주기 위한 스펙터클의 소비가 시작되는 것이다. 

 

자본은 파리의 전경을 불가 항력적인 방식으로 바꾸어 놓았다. 하비는  경제와 사회 조직, 정치, 문화 영역에서 변형을 복합적인 방식으로 설명을 이어갔다. 파리지앵은 모두 동일한 도시 공간 속에 들어 있었고, 이따금씩 대로나 바리케이드에서 서로 마주치기도 했고, 모두들 각각의 방식으로 그들 나름의 역사적이고 지리적인 존재의 사회적 여건을 형성하고 통제하려고 분투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하비는 사크레쾨르 바실리카  건설에 관련된 일화들을 통해  파리 코뮌의  피비린내 나는 역사를 느낄 수 있다.  도시 개편 작업으로  변형된 도시공간에서의 계급 투쟁을 살펴 볼 수 있다.  몽마르트 언덕 꼭대기의 위차한 사크레쾨르 바실리카는 성스러운 장엄함의 이미지, 영원한 기억의 이미지를 전달한다. 하비는 무엇의 기억인가를  묻는다. 시크레쾨르는 성심의 의미다.  한 백인 대장이 십자가에서 고통 받는 예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을때 드러난 그 심장이 성심이다. 환상을 본 마르그리트마리는 성심 숭배로 변모 시켰다. 1870년 프러시아와 프랑스의 전쟁 기간중에 신께서 파리를 구원을  구해주신다면 성심에 봉헌된 성소를 만들겠다고 맹세하면서 사크레쾨르 바실리카가 건설이 이야기 되었다. 바실리카가 건설된 그 곳은 1871년 파리 코뮌시 정부군과 코뮌가담자가 희생된 장소였다.  군중에게 발포 명령을 내렸던  프랑스  르콩드 장군과 1848년 6월 혁명기간에 잔혹한 학살에서 큰 역할을 담당했던 토마 장군이 군중들에 의해 총살되었다. 32살의 코뮌의 지도자 였던  발랭이 총살되었다. 파리 코뮌은 가장 잔혹한 피의 폭풍이었다. 사크레쾨르 바실리카는 그 위엄과 경관으로 무덤 같은 침묵으로 그 비밀을 숨기려 하고 있다. 하지만 이 역사를 알고 있는 자만이 진정으로 매장된 신비를 드러나게 할 수 있다며 마무리를 한다. 

 

이책은 번역자가 이야기 처럼 19세기 파리를 문화, 정치, 역사, 문학 등  다양한 관점에서 폭넓게 다루고 있다. 이책을 통해 생생하게 복원된 19세기 파리를 만나게 된다.  자본의 도시화에  대해서 포괄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준다.  마르크스 자본에 대한 이론적인 틀이 갖추어져 있고 핵심 개념어에 대한 지식이 있다면 이 책에 발견 할 수 있는 자본의 도시 이해는 더 확대 될 수 있을 것 같다. 자본주의 도시 이면에 감춰져 있는 현실을 이해하고자 하는 독자에게 권장한다. 이책은 벤야민의 방대한 책 ‘아케이드 프로젝트’로 나를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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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하비의  『도시의 정치 경제학』 (한울, 1996)을 펼쳐 들었다. 하비의 저작  『자본의 도시화 』와 『의식과 도시 경험 』의 주요 내용을 취합하여 발간한 책이다. 『자본의 도시화 』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에서 도시화가 어떻게 전개되며, 도시화의 결과가 자본주의 관계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파악하는 내용이라고 한다.  『의식과 도시 경험 』은  개인인들이 도시 일상의 생활 속에서 만들어나가는 경험  의식의 의미와  뿌리에 있는 사회적 총체성을 분석 하였다고 한다. 이후  발간한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 (글항아리, 2019)를 접하고 만난 책이다.  발간 순서를 거슬러 읽기를 진행하는 중이다.  『도시의 정치 경제학』은 절판이 되어 중고서적으로 구매 하였다. 

 

데이비드  하비는 1935년 영국에서 태어나 케임브리지대에서 지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옥스퍼드대, 존스홉킨스대 등을 거쳐 현재 뉴욕시립대 대학원 교수로 재직 중이며 전 세계적인 영향력을 가진 인문학자다. 40여 년간 마르크스의 『자본』을 강연한 것을 기반으로 펴낸 『데이비드 하비의 마르크스 「자본」 강의』가 특히 유명하다. 그는 역사지리학 분야의 개척자라 할 수 있다.  그는 공간과 인간의 관계를 여러 각도에서 파고 들었다. 자본주의와 도시의 관계에 분석을 진행하였다. 자본주의가 갖는 모순이 역사지리적 전환을 겪으면서 어떻게 재편되는가를 분석하고 추적하였다. 

 

 『도시의 정치 경제학』 역자 서문에  내용을 장별로 간략하게 요약하였다. 요약 내용을 확인한 후 관심 분야 장을 중심으로 읽을 예정이다.   

 

제1장은 자본주의 발전과 도시형태의 변화를 추적하고 있다. 자본주의의 잉여가치 생산과 축적은 자본주의 도시의 생산과 더불어 진행되는데, 여기서 잉여가치 집중의 중심으로서 도시가 형성된다. 그 구체적 표현은 물리적/사회적 건조환경의 건설로 나타난다. 과잉축적, 도시내 경쟁, 지리적 팽창으로 인한 불안정성은 20세기에 연이어 포디즘 도시, 케인즈주의 도시, 탈케인즈주의 도시로 전환하도록 하였고 노동분업, 소비분업, 지휘 및 명령, 재분배 등의 기능을 둘러싼 도시내 세력들과 도시간 경쟁을 촉진하였다. 그리하여 자본주의는 공간에 대한 우월한 장악을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하게 된다.

 

제2장은 자본의 순환과 축적의 과정 한가운데 존재하는 도시과정에 대한 연구이다. 도시과정내에서 전개되는 가치 및 잉여가치 생산의 1차 순환, 고정자본과 소비기금의 2차 순환, 과학/기술 및 사회적 소비의 3차 순환의 조직화에 따른 의미를 분석하고 난 뒤, 자본주의 순환의 위기형태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과잉축적은 위기의 공간적 해소와 재축적을 위해 건조환경에 대한 투자로 발전하나 다양한 공간구조는 다시 축적의 장애로 발전되는 모순적 성격을 나타내게 된다. 자본주의 도시과정은 노동자계급의 저항과 계급투쟁으로 인한 긴장이 발생하여 교외화의 등장 등 이에 대처하는 공간적 변형으로 나타난다.

 

제3장은 자본주의하의 지대에 관한 것으로 맑스의 미완적 내용을 재구성하여 순수 자본주의적 생산양식하에서의 의미로 확대시킨 것들을 다루고 있다. 독특한 분석은 차액지대 1과 차액지대 2의 내용을 토지에서 기인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본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고 있고 토지문제를 자본순환내 미래의 초과이윤을 겨냥한 의제자본의 금융자산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지대의 전유를 도시공간에서 더욱 두드러지는 수익순환의 다양한 모습 속에서 고찰하여 그 복합적 내용들을 더욱 풍부하게 하고 있다.

 

제4장은 도시공동체내의 계급구조와 거주분화에 관한 것인데 맑스주의에서 간과되어온 거주분화 문제를 계급구조 및 사회이론 영역으로 통합시키려는 의도를 깔고 있다. 여기서 독특한 점은 기본계급뿐 아니라 도시구조내 기본계급 사이에 존재하는 다양한 2차적인 세력들, 즉 잉여집단과 파생적인 세력이 도시의 거주분화에 다양한 질서체계를 형성하게 된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는 데 있다. 이 도시환경내 거주분화는 자본주의의 소외적 사회관계 재생산에 영향을 미치는데 그 기본적 동력은 계급관계임을 피력하고 있다.

 

제5장은 도시노동시장, 계급동맹, 도시정치 등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도시는 노동력의 일일 교환과 대체가 가능한 곳이 지리적으로 근접해 있는 노동시장이기도 하다. 하비는 노동시장분석에 통근가능성과 지리적 노동이동의 개념을 포함시키고 있어서 흥미로운 분석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아울러 기술, 조직, 노동공급의 우월한 입지를 통한 자본가간 초과이윤 확보의 공간적 경쟁이 치열하게 존재하고 있음을 지적하여 입지를 생산의 지리적 경관의 형성에 있어서 능동적 요소로 보고 있다. 특정 도시는 도시내 다양한 생활양식, 생산조직, 계급조직, 사회심리적 태도로 인해 독특한 ‘구조화된 응집’을 지니고 있으며 이 응집의 주된 힘은 도시정치와 지배계급동맹의 힘으로부터 나온다.

 

제6장은 화폐, 시간, 공간이 도시과정내에서 서로에 대해 갖는 규정적 의미를 서술하고 있다. 상품교환을 중재하는 화폐는 시간과 공간의 의미를 변형하여 도시화의 형태와 형식에 한계를 규정한다. 화폐는 합리적 계산과 측정이라는 물질적 기초 위에 존재하며 그에 의한 보편적 공동체를 형성시킨다. 19세기와 20세기에 시간의 엄격한 측정과 계산이 가능해진 것이 자본주의 발전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고 지적한 것은 흥미로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시간과 공간의 관계에 있어서는 교통, 통신의 발달 때문에 시간은 공간에 대한 승리로 계속 돌진해 가고 있음을 정리하고 있다. 궁극적으로 화폐와 시간 및 공간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에서 화폐의 소유가 바로 공간과 시간에 대한 소유, 도시과정내 권력의 원천이 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한 것은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이기도 하다.

 

제7장은 도시건축물에 담겨진 역사적 내용과 사회적 관계 등을 조명하는데 집중되어 있다. 몽마르트 언덕의 성심대성당은 파리 제2왕정 시기를 전후로 하여 왕당파, 부르주아, 카톨릭, 파리 코뮌의 민중 사이에 벌어진 계급투쟁의 산물이자 상징이다. 파리의 성심대성당은 그 위엄과 경관이 출중하여 ‘음침한 침묵 속으로 그 비밀을’ 묻어두려 하지만 그 속에 감춰진 ‘자유의 순교자’들의 신비는 “산 자들에 의해 자유의 요람으로” 드러나게 된다.

 

제8장에서는 의식의 도시화를 다루고 있다. 도시의 현란함과 경이로움, 소외와 억압 속에 꿈틀거리는 의식의 근원에는 개인주의, 가족, 공동체, 계급, 국가 등이 존재한다. 이들은 자본주의하에서 사회생활의 기본적인 물질적 전략의 기초이기도 하다. 자본주의 의식의 도시화는 자아실현의 미사여구 속에서 야만으로의 전환을 위협하고 있다. 자본축적의 측면뿐만 아니라 의식과 경험의 측면 역시 분석에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하비는 이런 의식의 중심 영역인 도시화과정을 무시하는 어떠한 정치운동도 성공할 수 없다고 특히 맑스주의 진영을 겨냥해 단호히 주장하고 있다.

 

제9장은 포스트 모더니즘, 유연적 축적, 그리고 도시화에 관한 것이다. 1972년 이후 포스트 모더니즘이란 새로운 상징의 변화와 73년부터 시작된 세계적 경기 침체 이후 유연적 축적은 시장, 생산, 자본이동, 기술, 금융구조의 변화를 초래하였을 뿐 아니라 도시화, 도시구조, 도시계급동맹에서의 변화와 도시경쟁 촉진, 도시혁신 등을 몰고 와서 도시의 내/외적 재구조화를 결과하였다. 하비는 르페브르의 ‘물질적인 공간적 실천,’ ‘공간의 표상,’ ‘표상의 공간’ 등 공간 생산의 다양한 개념을 차용하여 도시공동체를 설명하고 있다. 유연적 축적에 따른 도시발전은 감탄을 자아내는 상징자본의 확대, 화려한 스펙터클의 동원을 가져오기도 하지만 다른 한 축에서는 빈곤과 비공식화의 집적을 초래하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7쪽, 도시의 정치 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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