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아스의 이론은 독창적이다.  그의 독창성은 "결합태 사회학”, “상호 의존성, “문명화과정등의 개념을 통해 유감없이 표출되었다.  엘리아스는 사회학의 연구대상을  상호 의존하는 인간들이 구성하는 인간 결합태 보았다. 결합태는 사람들이 자신의 행위를 통해 형성하는 인간관계의 구체적 형태를 일컫는다. 이러한 결합태는 상호 의존성 정태적이 아닌,  동태적인 특성 지닌다. 또한 모든 결합태에서는 과정적 성격이 강조된다

 

결합태와 문명과정의 역동적 구조  

엘리아스의 문명이론은 호이징가의 역사학, 막스 베버의 사회학,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가지 관점의 강한 영향에서 출발한 것이다.  엘리아스는 호이징가의 <중세의 가을>에서 보이는 중세상,   <<공적, 사적 생활영역의 분리를 특징으로 하는 현대사회와 달리 (근대적 의미의 개인이나, 개인적인 삶의 공간은 거의 존재하지 않고),  모든 생활영역이 공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던 중세인의 특성뿐만 아니라, 중세인들은 단순성, 극단적인 양극성, 극단을 오가는 감정의 커다란 동요, 통제하기 어려운 거친 열정을 거침없이 표출했다.>> 수용했고, 근대가 중세사회 내부의 역동성로부터 점차 발전해 성립했다는 호이징가의 역사 해석, 또한 개인의 발전과 사회구조는 서로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심층사적 접근방법을 수용하여 <<문명화과정>> 이론 정립의 기둥으로 삼고 있다. 엘리아스는 중세에서 르네상스와 근대로 이어지는 유럽의 역사과정을 관찰하여 분권과 독점의 해체로 부터 중앙집권화와 독점의 형성이라는 법칙성을 정립하고 이와 관련된 문명화의 의미 규명에 천착하고 있다

 

<<정당한 폭력의 독점>>으로 규정하는 막스 베버의 국가의 의미는 엘리아스에 의해 물리적 <<폭력행사의 독점>> <<조세권의 독점>>이라는 이중의 독점의 형성으로 안정과 평화의 발생한다는 근대국가형성 모델로 발전한다. 그러나 베버가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역사관과는 다른 역사 해석의 탈출구로써, 역으로 상부구조가 토대에 영양을 미치거나 상호작용, 특정한 친화력을 가질 있다는 점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치열하게 추적한다. 프로테스탄티즘이 자본주의 정신과 직업윤리에 특정한 상관관계, 친화력을 지니고 자본주의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과는 달리,  엘리아스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운동에서 표출되는 종교심의 문명적 전환, 내면화와 합리화는 중산층의 구조와 상황의 특정한 변화 , 사회적 종속 관계로부터 발생하는 외부 강요와 밀접하게 연관된다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베버가 서유럽 근대화에서 근대정신의 담지자인 중산 시민계급의 역할에 의미부여를 하였지만  엘리아스는 문명화가 궁정의 귀족사회에서 유래했다고 보고 있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발달과정에서 점차 강해지는 내면적 통제가 본래 인류의 역사과정에서는 외면적 통제이며, 사람이 태어나 어른으로 성장하는 심리발생적 과정은 개인의 차원에서 반복되는 인류역사라는 가정을 세웠는데, 엘리아스는 이에서 출발하여 문명화과정은 개인적 심리차원에서 외부통제로부터 자기통제로의 이행이라고 본다. 자기통제는 프로이트의 초자아를 뜻하는 것이다.  엘리아스는 프이트가 그대로 인간이 맹목적인 힘에 지배를 받고 있다는 비합리적인 측면도 인정하고 있지만, 프로이트가 개인적 본능에너지와 전환에 치우쳐있는 것과는 달리 개인적 본능에너지도 인간들의 상호의존관계의 안에서 처음부터 사회적으로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본능에너지의 사회적 형태는 사회 안에 존재하는 상호의존의 기제에 의해 달라질 있다고 보는 점에서 프로이트와는 달리 인간의 새로운 조형 가능성, 문명의 발전, 인간 역사의 전환과 진보의 가능성까지도 내다보고 있다.

 

엘리아스는 사회는 인간들이 상호결합욕구 때문에 서로 형성된 상호의존의 고리로서 끊임없는 변화의 흐름 속에 놓여 있고, 인간은 사회 밖에 존재하는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수많은 상호의존관계를 통해 서로 얽혀 있는 사회 속의 개인으로 설정하는데 <결합태>라는 개념을 통해서 이를 표현하고 있다.

 

엘리아스가 문명화과정에서 밝혀내고자 것은, 사회적 행동기준의 장기적 발전과정으로, 개인의 사회심리적 발달과정을 사회화라고 한다면, 사회나 문화의 사회심리적 발전과정이 바로 문명화과정이며,  문명은 인간행동의 특수한 변화라는 것이다. 어린아이의 사회화과정이 장기적인 문명화과정의 반복으로 여겨진다. 엘리아스는 행동기준과 인격구조의 장기적인 변화는 미리 정해진 합리적 계획의 산물이 아니며, 유럽의 문명화과정은 비교적 자율적인 과정으로 일정한 방향과 구조를 지녔지만 결코 미리 규정된 계획에 따라 어떤 목적을 향해 진행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근대 유럽이 중산시민계층이 대표하고, 주도하는 합리화의 추구가 도달한 역사의 과정이라는 막스 베버의 사회학과는 다른 시각을 보여 준다

 

엘리아스가 생각하는 유럽 문명화과정의 원동력은, 행동과 인격 구조의 변화과정이 중세사회에서 근대사회로의 전환이라는 사회구조적 변화과정과 맞물려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데중세는 농업 경제에 바탕한 낮은 수준의 교역과 제한된 화폐사용, 낮은 단계의 노동 분화로 인한 미숙한 경제수준으로 통일된 중앙집권적 국가를 형성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왕은 자신의 영토를 수많은 영주에게 분할 위임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폭력을 독점하고 통제할 중앙권력이 없는 상황과 맞물려  지역을 분할 점거한 영주들에 의한 끊임없는 상호경쟁과 무력충돌로 사회불안이 지속되는 구조였다따라서 봉건제도가 해체되고 근대국가가 형성되는 과정은 바로 물리적 폭력과 조세권의 독점이 관철되는 과정이라는 것이 엘리아스의 관점이다엘리아스에 의하면 문명화과정은 다른 사람이 담당하던 강제의 역할을 개인이 스스로 담당하게 되는 사회적 통제의 내면화과정이며, 이것의 원동력은 물리적 폭력수단이 궁정으로 집중되고 사회내의 평화가 달성되는 국가형성의 과정이다개인적 문명화과정은 수세기에 걸쳐 이어져온 사회적 문명화의 결과인 것이다개인은 일종의 사회발생적인 근본원칙에 따라 자신의 짧은 개인사를 통해 사회가 역사 속에서 통과하였던 과정의 일부를 다시 통과하는 셈이다문명화과정의 개념이 지시하는 사실적 핵심은 인성구조의 변화인데 변화는 수치심과 혐오감의 한계점이 낮아지는 형태로 인간의 감정통제력과 경험이 안정되고 분화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는 것이다.

 

엘리아스는 데카르트 이래 개인을 완전히 자유로운 독립적 존재로, 내면적으로 자족하며 모든 사람으로부터 분리된 닫힌 개인으로 인식하는 인간관을 유럽의 전통으로 규정한다. 자신의 내면 속의 자아와 정체성이 외부의 모든 인간들과 사물들로부터 단절되어 혼자 존재한다는 것인데, 데카르트의 생각하는 자아, 라이프니츠의 없는 모나드, 칸트의 인식 주체와 물자체의 대립, 막스 베버의 행위, 파슨스의 검은 상자는 모두 근대적 개인에 관한 동일한 사유 형태라는 것이 엘리아스의 관점이다. 엘리아스는 이러한 사유체계에서는 개인이 다른 사람들과 상호의존관계에서 살아간다는 사실에 의미를 부여하기 어렵다고 본다.

 

엘리아스의 문명화과정이 말하고 있는 것은,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물리적 폭력이 종식된 비교적 안전하고 평화로운 사회는 국가권력이 폭력행사를 중앙집중화, 독점한 다음에 가능한 일이다.

이제 국민국가 단위로 재편된 근대국가 단위에서는 중세에 비해서는 비교적 안전하고 평화로운 문명화된 사회가 가능해졌지만 국가단위로 경쟁하는 국제사회의 갈등과 전쟁의 위험이 계속되고 있는데 이의 해결방안으로 엘리아스의 이론은 자연스럽게 초국가 차원의 통합 국가의 출현을 끌어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세계 차원의 통합 국가의 출현이 국가 외적인 분쟁과 전쟁의 가능성을 종식시킬 수는 있겠지만, 단계의 인류가 인종과 언어문화 종교의 차이를 뛰어 넘어 국가로 통합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고, 만에 하나 그것이 가능해진다해도 국가 내부의 불평등의 문제와 갈등은 지속한다는 점에서 엘리아스의 이론은 한계를 드러낸다.

 

한편으로 동아시아의 역사 경험, 중국과 한국의 경우 일찍이 중앙 집권화된 국가를 형성했지만 유럽과는 달리 근대적 개인, 개인주의, 근대기계론적 자연관을 형성하지 않았고 근대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을 형성하지 않았던 까닭을 엘리아스의 이론으로 설명할 없다. 엘리아스가 모든 문명권에서 전사계급이 궁정화되는 것을 문명화의 가장 중요한 전제조건으로 보는 것도 동아시아의 역사 경험에서는 일치하지 않는다.

 

엘리아스도 직접 언급한 것이지만 문명화과정 이론은 형성되었던 문명이라도, 사회가 급변하여 다시금 예전과 같은 불확실성이 엄습하고 위험의 예측가능성이 줄어든다면 문명화된 행동을 둘러싼 갑옷은 부서진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못한다. 엘리아스 자신도 겪은 홀로코스트, 유럽 문명의 대참사, 문명의 붕괴를 보면 수백 년에 걸친 문명화과정이 그토록 어렵게 이룩하고, 짧은 시간에 그렇게 쉽게 무너지는 것은 단지 엘리아스 만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학, 사회학을 포함한 인간에 대한 모든 학문적 성찰이 지닌 지난함을 다시 일깨워 준다.

 

 

머리말

연구의 중심 주제는 서구적으로 문명화된 사람들에게 전형적이라고 간주되는 행동양식이다. 서구의 문명화가 실제로 일어났는가? 내용은 무엇이며 원동력과 원인 또는 동기는 무엇이었는가?

 

중심문제에 접근하기 위해 서구인들이 행동과 감정을 다스리는 구조가 중세 이래 어떤 방식으로 변화했는지 살펴본다. 개인적 문명화과정은 세기에 걸쳐 이어져온 사회적 문명화의 결과이다. 개인은 일종의 사회발생적인 근본원칙에 따라 자신의 짧은 개인사를 통해 사회가 역사 속에서 통과하였던 과정의 일부를 다시 통과하는 셈이다. 엘리아스는 문명화 과정을 밝히기 위해서 우선적으로 절대주의 정권과 국가의 형성과정을  규명하는데 연구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에 의하면 문명화된 행동의 성립은 서구사회가 절대주의 국가로 조직되는 과정과 밀접하게 연관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엘리아스는 국가의 사회발생적 근거에서 권력의 독점문제를 중시하는데, 이것은 물리적 폭력행사의 독점이 국가라는 사회조직체의 구성요소라는 것을 지적한 막스 베버의 관점을 받아들여서 폭력행사가 서로 경쟁관계에 있던 무사집단의 특권이었던 중세 초기부터, 점차 물리적인 폭력행사와 이를 위한 수단이 중앙화, 독점화에 이르는 구체적인 역사과정을 밝혀내고자 한다. 또한 육체적 폭력행위의 독점과 더불어 개인을 형성하고 각인하는 장치들, 개인에게서 사회적 태도를 조형해내는 사회적 요구와 금지의 작용 그리고 무엇보다도 개인의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불안의 형태가 결정적으로 변화하는 것을 밝히고 있다.

 

<<1>> 어느 특정한 사회의 인간들의 감정구조와 통제구조에 있어서 여러 세대를 거쳐 동일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장기적인 변화가 있다는 것을 다룬다.  <<2>> 인격구조의 장기적인 변화를 보다 높은 수준의 사회분화와 통합의 방향으로 진행되는 전체 사회의 장기적 구조변화와 연관 짓는 것을 분석한다.  2권의  <<문명화이론의 초안>> 사회구조의 변화와 심리적 태도 행동구조의 변화 간의 연관관계를 다시 강조한다. 엘리아스가 주장하는 문명화과정의 핵심 개념은 인성구조의 변화인데 변화는 수치심과 혐오감의 한계점이 낮아지는 형태로 인간의 감정통제력과 경험이 안정되고 분화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는 것이다.

 

탤컷 파슨스가 개인과 사회, 자아와 체계는 서로 분리되어 존재하며 인간이 본래의 실재이고 사회는 모방현상이라는 관념을 전제로, 관찰 가능한 사회형태를 이를 구성하는 기본요소들로 분석적으로 분해하는 정태적인 방법론에서 출발하는 것에 비해,엘리아스는 개인과 사회는 분리되어 존재하는 개의 객체를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인간의 상이하지만 분리 불가능한 측면을 의미한다는 것에서 출발한다.

 

엘리아스는 19, 20 세기의 선발 산업국가의 국가 내적. 외적인 특수한 변형과정과 사회학의 주요한 작업들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나라들의 지배적 이상이 보다 포괄적으로 격변하고 있다는 사실이 밀접하게 상관이 있다고 본다.  사회학의 위대한 선구적 저작들이 탄생되었던 19세기의 산업국가에서 부상하는 산업계급의 사회적 믿음, 이상, 장기적 목표와 희망을 표현하는 목소리들이 기득권층(왕족, 귀족, 도시귀족의 권력 엘리트) 이해관계와 기존질서를 점차 누르게 되는데 사회학자들은 부상하는 산업계급들과 연대하여 인류의 발전은 계급이 희망하고 소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라는 확증을 찾으려 하였다.(막스 베버가 대표적인 경우)

 

19세기 산업화과정에 있던 유럽국가에서 산업계급의 사회적 상승은 국가 자체의 상승과 병행하였다. 이들 유럽 국가들은 서로 경쟁하는 한편, 지구상의 후진 국가들에 대한 지배권을 확장하는 혈안이 되어 있었다.  국가 내의 계급들뿐만 아니라 이들 국가사회들 자체도 상승과 확장의 와중에 처해 있던 사회적 구성체들이었다.

 

엘리아스는 유럽인들에게 문명이라는 개념이 제국주의 침략시대에 유럽인들의 팽창과식민지 지배의 합리화에 유용한 도구가 되었음을 논증하고 있다. 그들이 다른 민족들에게 행사할 있는 권력은 영원한 사명의 표현이며 자신의 본질에 기인하는 우월함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엘리아스는 19세기에서와 같이 20세기에 와서도 사회학이 학문적인 중립성과 과학성에아직 이르지 못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20세기의 많은 사회학자들이 사회를 말할 그들이 생각하는 것은 이제 시민사회나 국가 저편에 있는 인간사회가 아니라 조금은 희석된 민족국가의 이상형이라는 사실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20세기에 들어서는 미국사회학이 사회이론의 발전을 선도하였기 때문에 시대 사회학이론의 지배적인 유형은 미국의 국가 이상이 특성을 반영한다는 것이다엘리아스는 마르크스적 전통에서 발전된 이데올로기 개념에 따르면, 사회발전으로부터 현재의 사회학이론에서 지배적인 상태로의 시각전환은, 계급의 이상에 의해, 다시 말하면  자신들의 희망, 소망, 이상을 미래에 걸지 않고, 오로지 기존질서의 유지에만 두고 있는 계급에 의해 결정된다고 있다는 것이다.

 

1 문명과 문화 개념의 사회적 발생

문명은 하나의 과정 또는 적어도 과정의 결과를 표현하며 무언가 항상 운동 속에 있는 , 끊임없이 앞으로 나가는 것을 지시한다. 문화는 인간의 생산품들, 예술작품과 책들, 민족의 특성을 표현하는 종교적. 철학적 체계들과 관계된다.

 

  1 독일에서 문화와 문명의 대립이 발생하게 사회적 기원

엘리아스는 문명의 개념이 일차적으로 서구의 자아의식을 표현하며, 민족의식이라고도 말할 있는데, 이는 서구사회가 지난 2, 3세기 동안 자신들의 이전 시대나, 동시대의 다른 원시적이라고 간주하는 사회들보다 앞서 가지고 있었던 모든 것들이 개념에 집약되어 있다고 본다. 서구인들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기술수준, 예절의 종류, 학문적 인식과 세계관과 밖의 많은 발전들을 문명의 개념으로 표현한다는 것이다.

 

 엘리아스는 문명의 의미가 서구의 모든 나라에서 동일하지 않는데, 특히 영국과 프랑스에서 사용하는 문명의 의미와 독일에서의 문명의 의미는 현격한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본다.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문명이 자국의 중요성에 대한 자부심과 서구와 인류 전체의 진보에 대한 자부심을 의미하지만 독일에서는 문명은 2급의 가치를 의미하고 문화가 상위의 가치를 의미한다. 엘리아스는 독일에서 문화와 문명의 대립이 발생하게 사회적 기원을 추적한다.

 

엘리아스는 독일에서 문화의 개념이 정신적인 것을 강조하고 민족적인 차이와 집단의 특성을 유달리 부각시키는 것은 독일 민족의 역사과정과 일치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것은 독일이 많은 제후국들로 분할 통치되어 프랑스나 영국에 비해 훨씬 뒤늦게 정치적 통일을 이루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독일에서 문명과 문화의 차이점을 최초로 표현한 것은 1784 칸트로 <우리는 번거로울 정도로 각종 사회적인 예의범절로 문명화 되었다.  도덕성의 이념은 문화에 속한다. 이념의 사용이 단지 명예욕을 위해 도덕의 모방과 외면적인 예절로만 흐른다면, 그것은 단순한 문명화를 의미한다.> 칸트에 의해 표명된 대립 개념은 18세기 중반 태동하던 중산층 지식인과 프랑스식으로문명화 되었던 궁정귀족의 대립과 일치한다. 당시 독일은 30 종교전쟁(1618-1648)으로 인구가 감소하고 경제적으로 황폐한 상태였으며 더욱이 지리상의 발견으로 동서교역로가 바뀌면서 상업은 쇠퇴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독일 자본주의와 시민계층의 성장이 지지부진하고 부의 축적과 계급적 영향력도 미미하게 되고 말았다. 궁정의 귀족계급은 모두 프랑스어로 말하였는데 1740 까지도 독일어는 천한 것으로 간주되고 정직한 사람, 사려 깊은 사람은 모두 프랑스어로 말했다는 것이다

 

독일 궁정귀족들에게 이류급 인간에 불과했던 시민계급의 아들들은 정치에서 배제된 18세기부터 독일어를 사용하는 새로운 문학운동에 나서게 되는데 자연과 자유를 향한 사랑, 고독한 공상, 차가운 이성에 방해받지 않고 자신의 열정에 몰두하는 것에서 나타나며 이는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아주 명료하게 표현 된다. 작품의 성공은 그런 감정이 당시의 특정한 세대에게 얼마나 전형적이었는지 보여주고 있다

 

괴테 <나를 가장 괴롭히는 것은 시민계급이 처해 있는 숙명적인 상황이다.  나는 계급의 일원으로서 신분의 차이가 얼마나 필요하며, 그것이 스스로에게도 얼마나 많은 이익을 가져다주는지 알고 있지만 단지 그것이 나를 방해해서는 된다,  이것은 중산층 의식의 특징으로 밑으로 향하는 문은 닫혀져 있어야만 한다그러나 위로 향한 문은 열려야만 하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과 하류층을 가로막고 있는 벽이 물결에 같이 휩쓸려 파괴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위로 향하는 막힌 벽을 부순다는 것을 생각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독일에서 귀족과 시민계급의 엄격한 분리와, 궁정귀족의 모델에 근거하는 존재가치가 시민계급의 모델 업적에 근거하는 가치가 서로 융합하지 못한 것이 독일의 민족 성격을 결정적으로 규정하게 되었다. 독일 귀족들은 프랑스에 비해 훨씬 폐쇄적이었고 더욱이 정치적인 분열로 중산 시민계층으로부터 분리되어 통일국가 형성의 전초지 역할을 수행하지 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대학의 교수, 목사 관료를 주축으로 상층의 시민계급은 궁정귀족과 대립하면서 신분상승을 기도하는데 칸트, 실러, 빙켈만, 헤르더, 피히테, 괴테 모두가 바로 그들이었다. 1780년을 후로 괴테와 실러의 작품,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은 독일어로 이들 중산 시민계층에 의한 본격적인 독일 문화의 개화를 알리는 신호들이었다. 이들은 귀족계급에 의해 정치적으로 철저하게 배제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신과 책을 도피처 안식처로 삼았으며 업적과 학문 예술은 그들의 자존심이었다.

 

중산층의 전위와 귀족의 대립으로 깊이와 피상성, 정직과 거짓, 진정한 미덕과 외면적 예절 같은 상대 개념군의 형성되고 여기서 문화와 문명의 대립적인 개념이 발생했다고 보는 것이 지금까지 살펴  엘리아스의 관점이다.

 

독일 시민계급은 처음에는 궁정귀족 상류층과 나중에는 주로 경쟁국들과 대립하면서 자기 정당성을 확보해야만 했는데, 그들은 자신이 처한 2 계층의 위치에서 독일 민족의식의 담지자로 마침내 아주 늦게 그리고 제한적이었지만 지배계층으로 점차 부상하면서 문화와 문명의 대립관계가 지닌 의미와 기능도 변하하여 이제 민족적 대립의 의미가 부각되게 된다

 

2 프랑스에서 문명 개념의 사회적 발생근거 

엘리아스는 독일과 달리 프랑스는 국가적 통일과 절대왕정이 조기에 확립되고, 시민계급의 지식인들과 상층부는 비교적 일찍이 궁정사회로 흡수되어 계층 간의 장애물이 완화되었기 때문에 이미 18세기에 적어도 시민계급 상층부와 궁정귀족들 간에 현저한 관습의 차이를 이상 찾아 없었다고 본다프랑스는 독일과 달리 원래 궁정귀족 사회의 특성이었던 표현법, 일상의례, 감정규제법, 예절의 평가, 언어의 명료화 등이 지속적으로 확산되어 민족적 특성이 되었다는 것이다.

 

프랑스의 문명개념은 독일의 문화개념과 마찬가지로 18세기 중반 앙시앵 레짐의 궁정에 세력을 확보한 온건 반대파인 중산계급의 정치 투쟁에서 비롯하였는데 중산계급은 과정에서 미덕이라는 이상으로 자신들을 정당화 하였지만 미라보는 문명개념을 궁정귀족들의 특성과 연결시켰고 문명인으로 표현되는 인간형은 궁정사회의 이상적 교양인을 확대한 것이었다

 

루소는 사회비판의 급진성에도 불구하고 여러 비난들을 한곳에 모아 응집시킬 있는 대립 개념을 만들어내지는 않았기 때문에 실제 프랑스 지식인의 개혁운동에 미친 영향은 크지 않았다. 미라보가 최초로 그것을 만들었거나 아니면 적어도 자신의 저서에서 처음 사용하였다.

 

시민계급이 모두 개혁 지향적이고 귀족들이 모두 개혁의 저항자였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중산층집단 중에는 진지한 개혁시도에 강력히 저항한 무리들이 있었는데 대다수의 고위관료들 , 법복귀족들이 여기에 속하며 또한 수공업조합, 납세소작인들과 금융자본가들도 여기 포함된다. 프랑스에서 개혁이 실패하고 사회의 불균형이 앙시앵 레짐의 제도적 구조를 폭력적으로 파괴한 데는 개혁에 저항한 집단의 책임이 크다고 있다 프랑스는 독일과 달리 당시에 시민계급이 벌써 정치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독일의 발전과정 독일적 개념장치와 분명하게 구분되는 프랑스는, 중산층 지식인들이 궁정 귀족적 전통 안에 서있고, 그들은 궁정집단 내의 자신들의 사회적 위치에 상응하여 문명화됨과 같은 궁정 귀족적 개념을 중심으로 자신들의 정치적. 경제적 요청들로부터 나온 생각들을 결정화 시킨다는 것이다.프랑스 시민계급은 행동이나 감정 면에서 궁정적 전통 속에 있었고 귀족과 중산층의 밀접한 관계로 인하여 궁정풍속의 많은 부분이 혁명 이전에 이미 중산층의 풍속이 되었기 때문에 대혁명으로 앙시앵 레짐이 파괴된 후에도 이것은 변하지 않았다.

 

 한편으로 혁명이 온건해지고, 프랑스가 제국주의 침략의 시기로 접어들면 문명의 개념은 식민지 정책을 정당화하는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프랑스인들은 스스로를 기존의 완성된 문명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문명의 전달자라고 합리화 한다. 그들은 문명의 결과를 보다 우수한 자신들의 재능의 표현으로 간주하게 되는 것이다. 문명개념의 정신인 정중함이나 예절이 궁정귀족 상류층의 지배를 정당화했듯이 자신들의 우월성에 대한 의식, 문명의식은 그때부터 비유럽국가들에 대한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구실이 되는 것이다

 

엘리아스는 문명화과정의 중요한 단계는 이미 문명의 의식, 자기행동의 우월성에 대한 의식 그리고 의식이 학문 기술 또는 예술에서 실체화되어 서구 전체의 국가들로 확대되던 시대에 실제로 끝났다고 보고 있다.

 

2 인간행동의 특수한 변화로서 문명에 관하여

시빌리테 (예절) 개념이 서구사회에서 중요하게 시기는 기사사회가 붕괴되고 가톨릭교회의통일이 해체되던 때였다. 개념은 서구의 풍속 또는 문명의 형성에 있어 하나의 특수한 단계로서 사회의 구체화이고 사회구성체의 표현이며 상징이다. 궁정사회의 상황, 자아의식과 특성이 개념에서 드러난다. 시빌리테 개념이 고유한 특성과 기능을 얻은 것은 16세기  후반이다.

 

1530 출판된 에라스무스의 <어린이의 예절에 관하여> 사람들의 사회적 행동양식 특히 신체예절을 다루고 있는데 이는 당시의 사회적 욕구를 정확하게 반영한 책이었다.  중세의 일상의례 식사예법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데 식사와 음주는 대화와 사교적 모임에서 중심을 이루었다.

 

중세의 좋은 태도의 기준은 특정한 장소에서 특정한 개념으로 표현되는데 이는 궁정에서 이렇게 행동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영주를 둘러싼 궁정기사들이 자신들을 차별화 해주는특징으로서의 특별한 규율과 금기를 궁정예절 (courtoisie) 라는 개념으로 표현했다.

 

엘리아스는 식사 행동양식의 수준은 특정한 사회구조에 상응한다고 보고 구조를 분석하는데 일례로 유럽문명에서 포크 사용이 일반화에 대해서 추적한다. 11세기 베네치아 공국의 총독이 비잔틴제국의 공주와 결혼, 공주는 갈래 황금포크를 가져 사용하였다. 이는 당시 베네치아의 스캔들, 포크는 지나치게 세련된 태도의 징표로 간주되어 성직자들로부터 비난과 저주를 초래한다. 당시 맨손으로 음식을 먹던 식습관은 무려 500년이 지나서 변화, 16세기 이탈리아에서 포크가 사용되고 이어서 프랑스 등지로 파급된다. 17세기에도 포크는 일반적으로 상류층의 사치품이었다. 이는 행동양식의 변화가 아주 오랜시간에 걸쳐 천천히 이루어진다는 것의 구체적인 예에 속하는 것이다.

 

에라스무스의 저서가 나온 시기는 사회집단이 재편성되던 때와 일치한다. 책은 중세적 위계질서는 느슨해졌지만 아직 근대적 사회질서는 확립되지 못했던 혼란스러운 전환기의 표현이었다.

 

16세기에서 시작하여 17세기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곳에서, 새로운 사회적 계급질서, 신흥 상류층과 신흥귀족층이 형성되고 있었다. 때문에 하나의 통일된 행동양식이 중심문제로 부상하게 된다. 더구나 신흥 상류층의 변화된 구조는 개개의 구성원들에게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강조의 사회적 강제력을 행사한다.

 

르네상스 시대의 행동규칙을 고찰해보면 중세적이면서도 근대적인 감정을 모두 발견할 수있는데 이것은 16세기 현실이 전환기로써 유럽사회가 시빌리테의 기치 아래 실제로 문명화된 사회 현대 서구 문명의 특징으로 여겨지는 태도 습관 감정규제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엘리아스는 예법서와 식탁규율에 주목한다. 사회의 구조와 상황이 요청하는 행동양식에 부합하도록 개인을 길들이는 도구, 훈련 또는 유형 만들기의 직접적인 도구가 바로 그런 저서들이었던 것이다.

 

16세기 예법서들은 다양한 사회계층으로부터 새로이 구성된 궁정귀족들의 구체적 표현이라 있다. 신흥귀족들의 형성과 함께 스스로를 다른 계층과 구분하려는 이들 귀족들의 행동규율이 생겨났다. 상류층의 행동방식은 이러한 매커니즘으로부터, 궁정관습의 발전, 밑으로부터의 확산, 가벼운 사회적 변형, 구분되는 특징으로서 평가절하 등의 매커니즘으로부터 지속적으로 운동할 있는 원동력을 얻는다.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은 일견 불규칙적이며 우연적으로 보이는 궁정 행동의 형성과정이 장기적 안목에서 바라볼 일정한 방향과 발전노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방향을 수치심과 불쾌감의 벽이 높아진다고 표현할 있고  또는 세련화, 문명화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한편 감정규제, 전체 행동의 통제 형식화는 시빌리테라는 이름하에 처음에는 순수하게 세속적. 사회적 현상으로  상류층에서 형성되었으나 점차 교회의 전통적 행동방식과 일치하게 되었다. 시빌리테는 기독교적 토대를 갖게 된다.

 

18세기 프랑스대혁명 시기에 이르러서야 프랑스 상류층은 오늘날 문명화된 사회에서 통용되는 식사습관의 수준에 도달한다. 그때까지 기사적 궁정적 전성기를 정점으로 하는 중세의 특징은 손으로 식사하는 습관이었다. 16, 17세기와 18세기를 아우르는 급변의 시대에 식사행동의 발전에 대한 압력은 부단히 방향으로, 식사예법의 새로운 수준을 향해 가해진다. 스푼, 나이프, 포크를 쥐고 사용하는 방식도 한걸음씩 표준화되었다.제한된 범위의 궁정 집단이 사회적 요구와 상황이 일치하는 심리상태에 적합한 모델을 만들어 내고 점차 사회전체로 확산되게 된다. 식사방식뿐만 아니라 사고와 언어의 방식 같은 일반적인 행동양식이 프랑스에서 비슷한 방식으로 조형되었다. 프랑스어에 결정적 영향력을 곳은 궁정과 궁정사회였고 독일어의 경우 프랑스만큼의 영향력을 결코 행사하지 못했다.

 

무엇이 식탁에서 문명화 행동이고 무엇이 문명화되지 않은 행동인지를 결정하는 근본기관은 우리의 혐오감이었고, 중세부터 근대까지 식사법의 변화 뒤에는 다른 종류의 구체화를 분석하면서 드러났던 것과 동일한 현상이 있다. 그것은 충동구조와 감정구조의 변동이다

 

고기를 자르는 , 나이프의 사용법은 가변적인 충동과 소망을 포함한 인간성 전체의 변화를 반영한다. 그것은 역사적 상황과 사회적 구성 법칙을 구체화한 것이다. 나이프는 공격용 무기에서 유래한 것이기 때문에 식사용이라 할지라도 그에 관계되는 위험과 불편함을 연상하는 무수한 금지사항이 뒤따르게 되는 것이다

 

항시 전투태세를 갖춘 전사들이 상류층을 구성하였던 중세에는 감정 극복의 수준이 낮고 충동에 대한 규제가 비교적 느슨했기 때문에 나이프에 대한 금지도 그리 많지 않았다.그러나 사회가 점차 내적 평화를 이룩하면서 칼이 불러일으키는 불쾌감이 즐거움을 능가하여 결국 나이프의 사용을 사회적으로 배제하게 되는 것이다.

 

중국인들이 아주 오래 전에 식탁에서 나이프를 사용하지 않게 것은 기사층이 아닌 평화적인 계층, 학자 관료사회가 전형적인 상류층을 형성한 것과 관련이 있는 같다.

 

개인이 처음에는 외부의 강요에 의해 타율적으로 적응하였던 사회적 수준은 결국 내면 속에서 거의 아무런 마찰 없이 자율적으로 재생산된다.이런 방식으로 수백 년에 걸친 역사적. 사회적 과정이 완성된다. 과정 속에서 수치감과 혐오감의 수준은 서서히 높아지며 개인들은 축소된 형태로 새로이 과정을 겪는다. 엘리아스는 이를 생물학적 반복적 법칙에 빗대어 사회발생적 법칙과 심리발생학적 근본법칙이라 명명할 있다고 주장한다.

 

궁정귀족시대의 사람들이 자신의 성향과 감정을 자제하려 했던 까닭은 주로 다른 사람들이나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의 사람들에 대한 배려와 존경 때문이었다. 다음 시대에서 충동의 포기, 규제와 억제를 강요하는 것은 특정한 사람들로 대변되지 않는다. 엘리아스는 감정이나 본능을 자제하고 규제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눈에 드러나지 않는 비인격적인 사회관계, 분업과 시장 그리고 경쟁에서 유래한 것으로 본다. 이러한 비인격적 강요가 이전에도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제 한층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앞에서 언급한 훈련방식과 훈련을 근거 짓는 방식이 바로 비인격적 강요에 합당한 방식들이며 그때 조형이 노리는 바는 사회적으로 요청되는 행동을 개개인이 자발적으로 원하는 행동으로 보이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노동에 필수적인 본능규제나 본능자제에도 해당된다, 또한 시민산업사화에 사용되던 본능 조형의 전체 도식도 마찬가지이다

 

중세시대 일반 평신도들은 일반적으로 나체로 잠을 잤으며, 완전 나체를 보는 일은 16세기까지 평범한 일상이었다는 놀라운 결과가 밝혀졌다.모든 사람들은 잠자러가기 매일 저녁 완전히 옷을 벗었고 사우나 때도 가리는 천을 알지 못했다. 이러한 자연스러움은 16세기에 점차 없어지기 시작하여 17, 18세기와 19세기에는 결정적으로 사라지게 된다. 시대 사람들은 육체에 대해 훨씬 순진하고 자유로운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잠옷이 등장한 것은 포크나 푸는 수건이 사용될 무렵이었다. 강하게 내면으로 방향을 틀어 자기강제가 되어버린 수치감 또는 도덕이 은밀한 것의 불완전성과 독특하게 결합한 점이19세기 사회와 우리 자신의 시대의 특징이라 있다.

 

일부일처제는 본능규제가 점점 엄격해진 후기 단계에 이르러 남녀 모두에게 구속력있는 엄격한 제도로 확립되었고 전에는 남자나 여자의 혼외정사가 문제되지 않았다.

 

문명화과정은 결코 직선으로 전개되지 않는다. 장기적으로 운동을 관찰하면 물리적, 전투적 제압을 통한 위협에 기인하는 통제가 서서히 줄어들고 의존과 종속의 형식이 강화되며, 이것은 자기훈련과 자기통제의 형식으로 감정생활을 규제하고 경영하는 결과를 낳는다.

 

감정경제의 여러 측면에 있어서 시민사회의 기능들, 특히 상업은 궁정의 기능들보다 더욱 강한 자기통제를 요구하고 생산한다.

 

인간행위가 사회적으로 허용된 행동과 허용되지 않은 행동으로 분열되면서 인간의 심리구조도 변형된다. 사회적 제재가 뒷받침하는 금지는 개인에게 자기통제로 재생산된다. 충동을 억제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 본능을 둘러싼 사회 발생적 수치감은 완벽하게 습관이 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제 은밀한 공간에 혼자 있더라도 습관의 힘에 저항할 없다. 쾌락을 약속하는 충동과 고통을 약속하는 금지와 제한, 사회 발생적 수치감과 혐오감이 그의 내면에서 서로 투쟁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프로이트가 초자아나 무의식이라는 개념으로 표현하고자하는 바로 사태인 것이다. 우리는 사회적 행동규칙이 이런저런 형식으로 개인에게 깊이 각인되어 개인적 자아의 구성요소가 되었다고 말할 있다. 개인의 심리구조와 자아처럼 초자아도 사회적 행동규칙 구조와 일치하여 끊임없이 변한다. 자아와 의식의 심한 분열은 문명화된 사회 속에서의 생활이 강요하는 행동의 특수한 이중성과 일치한다. 또한 이는 본능표출과 연관된 규제와 제한의 정도에 상응한다.  우리 사회에서 나타나는 분열의 강도 형태는 특수한 역사발전의 반영이며 문명화과정의 결과이다. 우리가 사회구조와 개인의 자아구조는 지속적으로 상응하고 있다고 말할 의미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엘리아스는 공격욕의 변화를 중세 귀족들의 삶의 양식에서 찾아본다. 중세의 세속 지배층은 대부분 갱두목과 같은 삶을 영위 했는데, 이러한 삶은 그들의 취미와 습관을 형성했다. 중세의 무사들은 전투를 사랑했을 아니라, 속에서 살았고 여력이 있는 노인이 때까지 전쟁을 치렀다. 그들은 전사로서의 말고는 어떤 다른 기능도 가지지 않았다. 이러한 전투적인 삶은 기사계급만의 전유물이 아니었고 도시시민들의 또한 크고 작은 분쟁들로 가득 있어서 공격욕, 증오, 타인의 고통에 대한 쾌락을 분출하고 있었다. 본능과 감정이 적나라하게 분출하였기 때문에 기독교도 사태를 조금도 진정시키지 못했다. 엘리아스는 막스 베버와 달리 현실에서 종교의 역할에 분명한 선을 긋는다. <<종교, 화복의 전지전능한 신에 대한 의식은 결코 자체로는 문명화나 감정순화의 효과가 없다. 오히려 반대로 종교는, 그대 그때의 사회 종교를 지탱하는 계층이 문명화되는 만큼만 문명화된다.>>라는 것이다.

 

중세에는 우리와는 다른 감정구조를 가진 , 안정도 없고 미래를 위한 장기적 예측도 불가능한 존재들이 눈에 띤다. 사회에서 힘을 다해서 사랑하거나 미워하지 못했던 사람, 열정의 유희에서 사나이답게 행동하지 못한 사람은 수도원에 밖에 없었다. 세속적인 삶에서 그는 패배자였다. 이와는 반대로 후대의 삶에서는 특히 궁정에서는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자신의 감정을 감추지 못하여 문명화될 없었던 사람이 패배자였다.문명화과정에서 중세인의 공격욕이 변화되는 것을 말하고 있다.

 

당시에는 사람들을 통제할 있을 정도로 막강한 세력을 지닌 중앙권력이 없었다. 중앙권력이 점차 강해져 여러 지방에 흩어져 살고 있던 국민들에게 평화적 공존을 강요할 비로소 그들의 감정모형과 본능구조의 수준도 변한다. 공격욕은 세련되고 합리적인 형태로 변형되어 문명화된 사회의 일상에서 규정된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데 이는 감정의 문명화와 더불어 일어나는 전환의 특징을 보여준다. 스포츠 경기는 사회적으로 허용된 호전성 공격욕의 표현이다. 본능표출이 직접행위로부터 관전으로 옮겨가는 과정에서도 감정변화의 절제와 인간화의 곡선이 뚜렷이 드러난다.

 

엘리아스는 기사들의 생활상을 추적한다. 중세 상류층의 정서는 자신들이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을 아는 것으로 만족하였으나, 사회의 상호의존과 분화가 계속 진행되면 될수록 상류층은 실제로 점점 다른 계층에 의존하게 되고, 그와 함께 다른 계층의 사회적 세력은 적어도 잠재적으로는 커진다고 본다

 

중세인들의 감정표현은 전체적으로 후대의 사람들보다 즉흥적이고 자유분방하다. 그러나 그것이 절대적인 의미에서 자유롭다거나 또는 사회적으로 조형되지 않았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15세기 더욱 결정적으로는 16세기로 들어가면서 상황은 변한다. 귀족들과 새로 귀족으로 부상한 집단으로 구성된 신흥 귀족층이 半도시적 궁정에서 형성되는데 이들은 새로운 삶의 공간 새로운 기능, 이에 상응하는 전혀 다른 감정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제후의 신하라는 새로운 삶의 공간이 귀족에게 요구하는 것은 전에는 필요하지도 가능하지도 않았던 행동의 새로운 통제 더욱더 포괄적인 규제였다. 이는 궁정귀족으로 사회적 성격이 변한 계층의 새로운 의존관계의 결과라 있다. 그는 이제 성의 소유주로서 자신의 성을 고향으로 삼은 자유인이 아니라 궁정에 살면서 제후들에게 봉사해야 하고 그들의 식사시중을 들어야 하는 사람이다. 그는 여러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그들 사람 사람의 지위에 따라 각각 다르게 행동해야 한다. 그는 궁정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다양한 서열과 명망에 맞추어 정확하게 처신하고 자신의 언어를 정확하게 조절하면서 시선조차도 정확하게 통제하도록 배워야 한다. 이와 같은 새로운 삶의 공간과 새로운 통합형식이 인간에게 강요한 것은 새로운 자기규율, 비교할 없을 정도로 강한 자기절제인 것이다. 쿠르투아지(봉건적 예절) 표현되던 태도의 이상적 형태는 시빌리테(예절) 개념으로 대체된다. 사람들이 서로에게 가하는 제제가 개인의 자기통제로 전환되면서 인간의 사회관계도 변화한다. 초자아가 확고하게 형성되는 사회전체가 수백 동안 거쳐 문명화과정을 개인은 단축하여 처음부터 통과해야 한다.

 

엘리아스는 문명화과정은 외부의 위험과 그에 대한 불안을 제한하고 통제하는 과정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실행된다고 본다. 사회가 급변하여 다시금 예전과 같은 불확실성이 우리를 엄습하고 위험의 예측가능성이 줄어든다면 문명화 갑옷은 부서질 것이며, 특수한 형태의 불안은 문명의 진행과 더불어 오히려 증가한다고 본다.

 

3 서양문명의 사회발생

엘리아스는 절대주의 사회발생사를 고찰하면서 행동의 문명화인 감정의 억제와 조절이, 왕과 제후의 기능이 절대적 형태를 띠는 시기에 강해지는 것에 주목한다. 절대군주와 그의 궁정을 최상부로 위계적 사회질서의 발생이 문명화과정과 밀접하게 관계된다고 본다.

 

<<봉건화의 매커니즘>> 고찰하는데 물물교환 관계가 사회에서 지배적인 , 엄격하게 중앙화된 관료제와 주로 평화적 수단을 사용하여 항상 중앙의 통제를 받는 안정된 통치기구의 형성은 거의 불가능하다. 어떤 사회에서 인간의 일상생활에 근본적으로 필요한 모든 욕구가 자체충족적일 있다면 분업과 생산품의 장거리 교환은 발달하지 않았을 것으로 본다.

 

십자군운동이 일어나게 되는 서유럽 내부의 문제를 주목한다. 외침에서 벗어나고 봉건화가 이루어지던 서유럽의 인구는 10세기부터 엄청나게 늘어나 14세기 초에는 18세기 인구와 거의 맞먹게 되었다고 분석한다. 이에 11세기부터 서프랑크 제국 내에 땅에 대한 압력, 새로운 영토와 기존의 땅의 생산성 증가에 대한 욕구가 점점 가시화된다.

 

십자군운동은 이러한 상황에서 발생한 서구 기독교국가들의 1 확장운동과 식민지운동의 특수형태라는 것이 엘리아스의 해석이다. 상류층 예비군 , 재산이나 생활수준을 유지할 없는 기사들도 사회에 있었다는 점이 여기서 전개되는 과정에 결정적이었다. 주요자극은 기사들의 부족. 상류층의 인구과잉이 최초의 확장기 식민지기에 특별한 각인을 찍었다는 것이며, 교회는 이러한 흐름에 포괄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정당화 해준 것으로 보는 것이 엘리아스의 견해이다.

이러한 사회 확장의 원동력은 지배자에게는 새로운 영토의 정복을 추구하게 하였고,하류층에게는 노동의 분화를 유도하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로 이루어진 집합체(엘리아스는 아직 도시라는 개념을 부여하지 않는다)9세기 농경위주 사회에서도 발견된다. 그러나 그것들은 농지경작 대신에 주로 수공업이나 장사로 생활했거나 특별권리와 특수제도들을 가지고 있던 행정단위가 아니라 요새인 동시에 대영주들의 농업행정지역이었다. 그러나 11세기 들어서면서 집합체는 성장하기 시작한다.

 

잉여노동인구가 모여 들면서 주인과 하류층 사람들의 권력관계는 변한다. 신참자들은 단결하여 유혈투쟁을 전개하면서 권리를 쟁취하려 한다.노동시민계급은 수많은 패배를 겪으면서 기사계급으로부터 아주 작은 권리를 쟁취하기 시작한다. 노동하는 도시 하류계층이 정치적 자립을 획득하고 정치적 지도권을 얻게 되는 점진적 상승과정은 서구사회를 동양과 구분 짓는, 서구사회의 고유한 구조적 특수성이다. 11세기에는 계급의 자유인 귀족과 성직자만이 있었지만1200 부터는 일련의 수공업자 거주지인 도시공동체 코뮌은 고유의 권리와 특권과 자율성을 획득한다.3 자유인 신분이 등장하는 것이다. 사회는 인구증가의 압력과 부족에 의해 밖으로 팽창할 뿐만 아니라 내부에서도 확장, 분화하여 새로운 세포를 번식시키고 새로운 기구, 도시를 만들어낸다. 돈이 필요하게 되는 때는 교환사회 내에서 기다란 고리들이 형성될 특정한 인구밀도와 복잡한 사회관계 분화라는 조건이 형성될 때다. 화폐사용이 일단 증가하게 되면 이번에는 그것이 반대로 인구증가, 분화, 도시의 성장과 같은 운동 전체를 일정한 포화상태에 이를 때까지 촉진시킨다.

 

문명화라고 부르는 행동 본능생활의 변화는 인간들의 강한 상호연관성 상호의존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보는 것이 엘리아스의 문명화과정 이론의 핵심 논지이다.

 

엘리아스는 하우징가의 견해를 수용하여, 서유럽이 르네상스와 더불어 근대사회로 나간다는 일반적인 해석에 반대하고 진보의 원동력이 고대의 부활이나 학습이 아니고 중세 사회 자체의 내재적 역동성과 인간들이 서로 적응해야만 했던 조건들에있었다고 파악한다. 엘리아스는 내재적 운동의 본질을 중세사회가 노예제사회가 아니었다는 것에서 찾았다. 그리스. 로마의 노예제사회에서 대다수의 도시 자유인이 노동에서 소외된 것과 달리 중세는 자유인들의 노동으로 인하여 인간의 상호 그물망이 확장되고 노동 상류층 귀족들도 노동하는 자유인 계층에 더욱 의존하게 되었으며 또한 서구의 기술적 발전과 자본이라는 특수한 형태로 화폐가 발전하는 현상은 서유럽에만 특징적인 것으로서, 역시 노예노동의 결여와 자유노동의 발전을 전제로 하고 있다고 본다. 엘리아스는 중세가 정체기가 아니라 팽창의 단계, 변동과 혁명의 단계, 노동기구의 개선단계를 포함하고 근대로 발전하는 역동적인 시기였다고 보고 있다.

 

엘리아스는 소유의 분열, 땅에 대한 권한이 왕에게서 등급화된 전사사회 전체로 이양하는 것을 봉건화의 핵심으로 파악하며, 이러한 분열적 경향이 최고조에 달하자 사회적 긴장관계는 동시에 반대 방향, 새로운 중앙 집중화의 동력을 찾았다고 본다. 또한 상업화와 화폐화의 점진적 진행은 대다수의 소기사들에 비해 소수의 대지주들과 영주들에게 훨씬 유리하게 작용하여 봉건사회를 해체하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본다. 상업화와 화폐유통의 진전으로 소수의 대영주를 제외한 중소기사들이 경제적으로 몰락하면서 그들은 생존을 찾아 대제후의 궁정으로 몰리게 된다는 것이다.

 

엘리아스는 유럽사에서 절대주의 궁정은 중요한 생활영역과 행동방식의 평등이 그때까지의 어느 시대보다 가장 완벽하게 성취된 장소로 여긴다. 대영주나 귀족부인에게 봉사하면서 노래를 부르고 시를 쓰는 것은 토지소유의 길이 막힌 기사계층에게 도시와 농촌의 하류층에게 열려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계층 출신들은 트루바두르로서 대제후의 궁정에 모여든다. 9세기 10세기 그리고 이후의 기사들은 보통 자신과 같은 계층이나 낮은 계층의 여자들에게 부드럽게 대하지 않았다. 트루바두르 서정시와 미네 연가의 바탕을 이루는 형태의 인간관계는 바로 관계, 부부관계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낮은 위치의 남성이 높은 지위의 여성과 맺는 관계이다.

 

사회적으로 같은 신분인 남성과의 관계에서 종속적이고 열등한 존재였던 여성들이 자기통제, 감정의 억제 이에 따른 충동의 승화를 산출할 있는 유일한 관계는 사회적으로 열등하고 종속적인 남성과 높은 지위의 여성 간의 관계밖에 없다. 이러한 인간적 상황에서 개인적 현상이기도 하고 사회적 현상이기도 서정시가 생겨나고 사회적 현상으로서 쾌락의 변형, 감정의 채색, 충동의 순화가 일어나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원하는 여성을 얻을 없거나 가까이 다가갈 없는 남자의 안타까움, 남자에 가해지는 자제의 압력, 배려와 자신의 근본적 충동과 욕구의 조절 전환 그리고 마지막으로 꿈의 언어, 시로 출구를 찾는,이루어질 없는 소망을 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다시 말해서 대기사의 봉건궁정에서 엄격한 일상의례, 감정의 순화와 행동규칙이 생겨난다. 그것들이 바로 사회 자체가 쿠르투아지란 이름을 붙였던 매너, 교제관습과 행동의 연마인 것이다. 궁정 예절 (courtoisie) 역시 일차적으로는 봉건궁정의 상류층에 의한 사교모임에서 사회적으로 예속된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행동양식이다. 대궁정 안에서는 다수의 사람들이 평화로운 방식으로 상호교류를 하지 않을 없었다. 이는 특히 높은 지위의 여성 앞에서는 행동의 통제와 억제, 감정과 예절의 정확한 조절을 요구했다.

 

엘리아스는 <<국가의 사회발생사>>에서 독점 메커니즘을 중심으로 고찰한다. 우리가 현대사회라 부르는 것은, 특히 서구에서는 일정한 수준의 독점형성을 특징으로 한다는 것인데 핵심을 징세권과 물리적 폭력의 행사를 독점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조세권은 징세를 통해서 중앙권력으로 유입되는 재정적 수단은 군사력의 독점을 유지시키며, 군사력의 독점은 반대로 조세권을 유지시킨다. 이는 동일한 독점의 가지 측면이다 11세기경부터 프랑크를 중심으로 중앙권력자에 의한 물리적 폭력과 조세권의 독점이 시작되는데, 독점 매커니즘의 전개과정은 단계에서 소수에게 집중되고 결국은 사람의 수중으로 들어가는 독점형성의 단계를 거쳐 둘째 단계에서는 사람에게서 여러 사람의 손으로 넘어가고 결국 상호의존적 인간 결합체 전체의 기능으로 변화하는 단계 공적 독점으로 전환하는 단계로 파악한다. 번째 공적 독점의 단계는 기능 분화가 고도화되고계속되는 사회에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개개인의 사적 독점은 사회화한다. 그것은 전체 사회계층의 독점이 되고 공적인 독점이 됨으로써 국가의 중앙기관으로 자리 잡는다. 독점 덕분에 제후가 나누어주는 자원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귀족들의 각축전에서는 폭력의 직접적 사용이 배제된다. 경기의 수단은 세련되어가고 승화되었다.독점군주에게 종속됨으로써 개인들이 알아서 행하는 감정표출의 억제는 강해진다. 개인들은 한편으로는 자신의 존재를 누르는 강제에 대한 저항, 자신들의 종속적 처지에 대한 증오, 기사들 간의 자유경쟁에 대한 동경과 다른 한편으로는 훈련을 통해 획득한 자기통제에 대한 자긍심, 그들에게 새롭게 열려지는 쾌락에 대한 즐거움 사이에서 표류한다. 간단히 말하면 이것은 문명화의 길을 향한 하나의 역주인 것이다. 다음 걸음은 폭력 조세의 독점권,이에 근거하는 다른 모든 독점권이 시민계급의 손에 넘어가는 것이다.

 

기능의 분화가 상당정도 진척된 후에야 그리고 전문화된 독점행정이 지루한 투쟁의 산물로서 생겨난 다음에야 넓은 지역에 적용되는 중앙의 공적 폭력의 독점기구가 설립된 이후에 비로소소비와 생산수단을 얻기 위한 경쟁이 육체적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이루어질 있었고 비로소 경제라고 생각하는 순수한 의미에서의 경제, 경쟁이라고 부르는 그런 종류의 경쟁이 존재하게 된다.

 

자유경쟁은 어떤 의미에서든 서로 의존하고 있는 다수의 사람들이 거의 엇비슷한 규모의 토지와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어 그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확실한 최강자가 아닐 등장한다. 또한 자유경쟁은 재정적 기회가 수많은 상호의존적 인간들에게 비교적 균등하게 나누어져 있을 때에도 나타날 있다.

 

20세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적 독점에 대한 보편적인 충동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처럼, 국가들 간의 경쟁에서 모든 독점형성과 모든 포괄적 통합을 선행하는 지배적 세력의 형성경향이 뚜렷해지듯이, 중세 기사가문들 간의 투쟁 그리고 나중에는 봉건영주들 간의 투쟁도 독점형성에 대한 보편적 충동을 보여준다.

 

중앙집권화와 통합, 절대주의 국가의 탄생과 폭력행사와 조세권의 독점이라는 경향은 어떤 개인도 계획하거나 의도하지 않았던 것이 수많은 개인들의 의도와 행위들로부터 산출된 사회적 결합태로 보는 것이 엘리아스의 국가의 사회발생사이다.

 

어떤 지역 내에서 교역과 화폐유통, 그것을 담당하는 사회적 구성체의 발달은 통치독점의 발전과 부단한 상호작용관계에 있다. 발전노선들은 서로 맞물려 있는 톱니바퀴처럼 상호 상승작용을 한다. 통치독점권의 형태와 발전경향은 여러 측면으로부터 사회의 분화, 화폐유통의 확산, 그리고 돈을 벌고 소유하는 계층의 형성과 같은 요인들에 의해 영향 받는다. 다른 한편 분업의 성공 자체나 넓은 지역에 퍼져 있는 도로나 시장의 확보, 화폐주조와금전체계의 표준화, 육체적 폭력으로부터 평화로운 생산의 보호와 밖의 협조조치 규제조치 등은 독점제도와 중앙제도의 형성에 달려 있다. 달리 표현하면 어떤 사회조직체 내의 노동과정과 전체 기능이 분화하면 할수록, 개인적 행위가 사회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그것들이 서로 맞물려 형성한 사슬이 길어지고 복잡해지면 질수록 중앙기관의 특수한 성격은 그만큼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기능적으로 분화되어 이루어지는 과정 전체를 상호조정하고 규제할 있는 상부기관의 성격이 바로 그것이다.

 

지배라고 부르는 것은 고도로 분화된 사회에서는 특정한 기능들. 특히 중앙기능들이 담당자에게 부여하는 특별한 사회적 힘과 다를 없다. 중앙관리자들의 통차권이 강화된다는 것은 기능분화가 이루어진 사회에서는 다른 집단들과 계층들이 최상부 조절기관 규제기관에 의존하는 정도가 커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엘리아스는 중앙권력의 역학구도에서 왕권 메커니즘 형성의 핵심을 고도로 분화된 사회에서 강력한 중앙권력의 시간은, 중요한 기능집단들의 이해가 너무 다르고 권력이 거의 비슷하게 분배되어 있어 그들 간에 결정적인 타협도 이루어질 없고 결정적인 투쟁과 승리도 불가능 다가온다고 본다. 이것은 왕권 메커니즘이라는 용어가 간단하게 적용될 있는 그런 종류의 결합태이다. 실제로 서유럽의 역사에서 중앙권력은 이러한 역학구도 하에서 절대주의 왕정이라는 최고의 사회적 힘을 획득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절대주의 왕권의 성립이 귀족계급과 부르주아 계급의 세력균형의 상태에서 이루어진 것을 논증하고 있는 것이다. 중세 말기에 대부분의 봉건 기사영주들을 사회적으로 추락시킨 것은 시민 계급의 의식적 공격이라기보다 당시 확산 중에 있던 금전화와 상업화의 메커니즘이었다.

 

시민계급이나 상층부를 이루는 집단의 목표는 사회적 제도로서의 귀족을 제거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최대목표는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위해 귀족 작위 이에 수반되는 특권을 얻는 것이었다. 엘리아스는 <<시민계급의 이중성>> 분석한다. 시민계급이 맞수 귀족에게 결정적 일격을 가할 없게 만드는 장치의 특별한 측면을 보면 시민계급은 귀족의 이런저런 특권을 폐지하려고 투쟁할 수는 있다. 그러나 시민계급은 귀족에게 특별지위를 부여하는 특권이란 사회적 제도 자체를 없앨 수도 없고 없애려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그에게 가장 중요한 자신의 사회적 존재 자체도 이런 특권들로 유지되고 보호되기 때문이다.  사회의 세포구조 곳곳에 이제 이상 신분적 특권에 사회적 기반을 두지 않는 시민계급의 존재가 등장할 그리고 결과로서 점점 많은 사회부문들이 정부가 보장하거나 설립한 특수권리를 기능분화의 전체과정에 대한 심각한 장애로 인식할 그럴 때에야 비로소 귀족에게 단호하게 맞설 있는 세력, , 귀족이 가진 개의 특권뿐만 아니라 귀족의 특권이라는 사회제도 자체를 폐지하려는 세력이 등장하게 된다. 그러나 특권제도 자체에 반기를 드는 신흥시민계급은 그렇게 함으로써 알게 모르게 신분제적 시민계급의 존재근거를 공격하는 것이 된다.

 

이들의 특권과 이들의 신분제적 조직형태는 반대편에 특권을 가진 귀족계층이 존재하는 동안에만 사회적 기능을 가지는 것이다. 신분계급들은 정확히 말하자면 적대적이고 이중적인 자매들, 동일한 사회질서의 상호의존적 세포들인 것이다. 제도가 파괴되면 다른 것은 자동적으로 무너지고 질서 전체도 붕괴된다.

 

실제로 1789년의 혁명은 단순히 귀족에 대한 시민계급의 투쟁으로 봐서는 된다. 혁명으로 인해 신분제 시민계급. 3계급의 특권관료인 법복귀족과 길드의 수공업자들도 귀족계급과 마찬가지로 몰락의 운명을 맞는다. 공동의 파멸은 앞서간 시대의 복잡하게 얽힌 관계망과 특별한 역학구도를 일거에 해명해준다. 그것은 앞서 특정한 사회계층들의 상호의존과 모순적 이해관계 그와 함께 발생한 평형장치 그리고 중앙권력의 강력한 힘에 관해 극히 일반적으로 언급했던 것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제도로서의 귀족에 대한 결정적 타격은 전체국가와 사회장치를 뒤흔들 것이며 그와 함께 부메랑처럼 기득권을 가진 시민계급 자신을 되맞출 것이다. 모든 특권계층들은 과도한 투쟁을 삼가는 일치된 관심을 보인다. 그들 모두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전체사회의 극심한 동요와 무게중심의 이동인 것이다.

 

물리적 폭력과 조세권을 서서히 중앙집중화 하면서, 기능분화의 진전과 직업시민계급의사회적 상승과 더불어 프랑스 사회는 점차 국가의 형태를 갖추게 된다.  엘리아스는 <<조세권 독점의 사회발생사>>에서 독점조직의 기능과 조직들이 장기적 계획에서 개인의 의도적 창조물로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작은 단계들과 시행착오를 거쳐 사회세력들 간의 부단한 부딪침으로 탄생한다고 본다. 엘리아스는 조세독점권은 물리적 폭력의 독점과 함께 국가를 형성하는 중추적인 제도이며 사회의 금전화, 봉토 지불에서 화폐지불로 바뀌면서 거기에 의존하는 사람들을 중앙기관에 지속적으로 묶어 놓게 되면서 궁극적으로 봉건제도를 해체하게 되는 것으로 본다

 

권력투쟁의 과정에서 영토를 확장함으로써 여타 전사계층으로부터 돌출해 나온 왕은 동시에 전사계급과 도시계층들 간의 갈등의 한가운데 있는 자신의 위치로 인해 다른 전사들에게 점점 거리를 두게 된다. 왕들은 3계급의 이해가 자신의 이해와 일치하는 그것을 꾸준히 장려했다. 무엇보다 세금을 부과할 있는 부르주아지의 경제력을 장려했다. 왕권의 부상과 시민계급의 부상은 상호 밀접한 의존관계에 있었다. 의식적으로 또는 인식하지 못한 계급은 서로가 서로를 높이 올려준 것이다.

 

시민계급은 점차적으로 통치기구 내의 귀족들과 성직자들을 몰아낸다. 왕의 충복계층. 관료는 독일에서와 달리 시민계급으로만 이루어진 조직이 된다.통치기구로부터 귀족들이 완전히 배제되면서 시민계급은 점차 사회 내부의 평형관계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지위를 획득하게 된다. 앙시앵 레짐의 최후까지 귀족과의 대결에서 시민계급을 대표했던 자들은 프랑스에서는 부유한 상인도, 길드도 아니었다. 그들은 여러 조직에서 활동하던 관료들이었다. 베르사유의 구조는 왕정의 서로 맞물려 있는 경향, 귀족을 부양하고 눈에 드러나게구분 지으려는 과제와 그들을 통제하고 길들여야하는 과제가 완벽하게 일치한다.

 

엘리아스는 전체의 개략으로서 <<문명화 이론의 초안>> 정리하는데 여기서 사회구조의 변화와 심리적 태도 행동구조의 변화 간의 연관관계를 강조 한다. 문명은 합리화와 마찬가지로 멀리 내다보며 수립한 계획의 결과도 아니고 인간 이성의 산물도 아니다. 변화는 무계획적으로 일어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정한 방향성과 질서를 가지게 된다고 주장한다.

 

인간들의 상호의존성으로부터 독특하고 독자적인 질서, 그것을 형성한 개인들의 의지와 이성보다 강하고 강제적인 질서가 출현한다. 이것이 역사변동의 길을 결정하며 인간의 충동과 투쟁이 얽혀 만들어내는 조직망의 질서인 것이다. 또한 문명화과정의 토대를 이루는 질서이다.

 

문명은 이성적인 것이 아니고 합리적인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비합리적인 것도 아니며,맹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여 관계망에 내재한 역동성에 의해 그리고 인간들이 상호 살아가는 특수한 변화로 인해 지속적인 운동 속에 있게 된다. 엘리아스는 서유럽인들이 중세 초기부터 합리적 계획을 근거로 현재의 제도들과 질서들을 향해 꾸준히 노력해왔다는 (막스 베버 같은) 생각은 사실로 입증할 없다는 입장이다.

 

폭력의 독점이 깊이 뿌리 내리지 못한 사회는 기능분화가 이루어진 사회이며, 개인들이서로 구성하는 행위의 고리가 비교적 짧은 사회이다. 폭력의 독점이 정착된 사회는 기능의 분화가 어느 정도 진척되어 있고 개인들의 행위고리가 길며 개인들 서로간의 기능적 의존성이 사회이다.

 

엘리아스는 <<문명화의 의미에서 일어나는 행동변화>> 폭력행위의 행사가 중앙권력으로 독점된 후에는 타인에 대한 공격을 억제해야 하고 행동과 감정표출 또한 억제해야 하는 것으로 사회 환경이 바뀌면서, 이제는 자신의 감정을 자제할 아는 사람이 유리하게 되자, 개인은 자신의 행위의 결과를 고려하도록 압력을 받게 되고 사회 영역 내의 의존성도 증가하게 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인간관계의 구조가 변하고 육체적 폭력을 독점하는 조직이 등장하며, 부단한 파벌싸움과 전쟁 대신 금전과 명성의 획득이라는 평화로운 기능들이 개인을 통제하게 되면감정표출은 극단의 중간지점을 지향한다.

 

중세사회이 특정한 영역에서는 극단적 형태의 금욕주의와 자기억제와 절제가 발견되지만, 사회의 다른 부분에서는 그에 못지않게 극단적인 쾌락의 탐닉이 존재하며, 우리는 종종 이를, 태도에서 태도로 급격한 반전을 이루는 것을 사람에게서도 관찰할 있다. 사회에서 개인이 스스로에게 부과하는 자기통제와 자신의 육체에 대한 투쟁은 정도에서 반대편인 타인에 대한 투쟁이나 향락에의 도취 못지않게 강력하고 일방적이다. 중세사회는 이렇게 극단의 양극성이 존재하였는데, 평화로운 공간에서 폭력이 독점되면서 나타나는 자기억제나 자기통제는 전혀 다른 유형의 것이다. 그것은 정열 없이 무의미한 자기억제인 것이다. 사회의 통제기관과 감시기관은  개인의 인격 속에 만들어지는 통제장치와 일치한다. 가지 모두 어떤 행동이나 열정적 충동 모두를 조종하려 한다.

 

엘리아스는 프로이트의 이론을 수용하여 <<충동의 내면화, 욕망의 승화>> 말하는데 귀족들이 궁정화 과정에서 기사소설을 읽거나 현대인들이 영화나 스포츠를 통해 폭력과 열정을 즐기는 것을 예로 들고 있다. 육체적 대립과 전쟁은 줄어들고 그것을 연상시키는 , 죽은 가축을 자르거나 식탁에서 칼을 사용하는 관습은 점차 사라지거나 적어도 정확한 사회적 규제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전쟁이 벌어지는 무대는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의 내면으로 이전된 것이다. 과거에는 인간과 인간의 직접대결로 해결되던 갈등과 열정의 일부를 이제는 자기 내부에서 극복해야만 한다. 타인에 대한 자신의 관계가 스스로에게 가하는 평화적인 압력은 자신의 내면에서 모사물을 찾게 된다는 것이다. 그의 내면에, 특이한 형태의 습관과 초자아와 그의 감정을 사회구조에 부합하도록 조절하고 변형시키며 억압하는 장치가 확고하게 자리 잡고,점점 많은 인간집단이 서로 의존하게 되고 그들 사이에 물리적 폭력이 배제되면서인간 상호간의 강제를 자기강제로 전환시키는 사회장치가 형성된다는 것이다.

 

서유럽의 문명화과정을 특별하고 유일한 현상으로 만드는 것은 기능의 분화수준과 폭력 조세독점의 견고성 그리고 상호의존성과 경쟁의 정도가 세계사에서 전례를 찾을 없을 정도로 앞서 있다는 것이다.

 

상호의존의 연결망의 크기 내적 압력과 개인의 인격 간의 연관성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특징들 하나가 우리가 현대의 속도로 부르는 것이다. 속도는 서로 종속되는 수많은 행위들의 표현이고 사람 사람의 행동이 부분으로서 서로 연결되어 만들어진 길고 촘촘한 고리의 표현이며 상호의존의 관계망이 작종시키는 각축전과 선발전의 표현이다

 

행동변화의 전체방향인 문명화운동의 추세는 어디나 동일하다. 어디에서나 변화는 자동적인 자기감시의 방향으로  단기적 충동을 습관화된 장기적 시각의 요구에 종속시키려는 방향으로 그리고 복잡하고 안정된 초자아 장치가 형성되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순간적 감정을 미래의 목적에 종속시켜야만 하는 필연성이 널리 보급되는 방식도 전체적으로 동일하다.

 

 사회적 상황과 행동규약에서 상류층과 하류층 간의 차이가 사회의 발전으로 줄어들었다는 것은 서구사회의 특성 하나이다. 발전과정에서 하류층의 특성이 사회로 확산되어나간다. 서구사회 전체가 능력 있는 모든 사람들도 일정한 유형의 노동을 통해 생계를 이어가는 사회가 되어 간다는 사실은 그것의 징후이다. 노동은 과거 하류층의 특징이었다. 동시에 예전에는 상류층을 구분하던 특징들이 이제 사회 전체로 퍼져 나간다. 사회적 외부통제에서 자기통제로의 전환, 습관적이고 자동적인 본능억제와 감정조절로의 전환은 이제 서구사화 내에서는 전체 민중계층에게서도 일어난다.

 

엘리아스는 서유럽 문명이 차이와 우월성을 증명해주는 특징으로 보며, 동양인들과 아프리카인 들이서유럽 수준으로 전환하기 시작하는 현상은 문명화운동의 마지막 물결로 보는 점에서는 막스 베버와 다를 없는 유럽 우월주의자이다.

 

 서구의 문명화과정뿐만 아니라 밖의 모든 문명화과정에서 이루어지는 결정적인 전환은 전사의 궁정화이다. 서구에서 이는 11세기, 12세기에 서서히 시작되어 17세기와 18세기에 마무리 된다. 전사들의 궁정화과정에 추진력을 제공한 전체운동 기능분화 지역과 계층들의 통합과 상호의존망의 형성은 마침내 15세기와 16세기에 가속화된다. 독점이 진행되면서 자유기사라는 기능은 사회에서 사라졌다. 엘리아스는 지구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명운동의 기초적인 전제조건으로 전사들의 궁정화를 들고 있는데 이는 서유럽에서는 비교적 적실성을 가지지만 동아시아나 다른 문명권에서는 맞지 않는 것으로 본다. 화폐유통망의 확충과 더불어 장원의 수확만으로는 평범한 생활수준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고 때로는 그것조차 불가능했으며 시민계층의 커진 힘에 대항하여 상류층으로서 위상을 지키기에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궁정으로 들어갔으며 그로써 왕에게 종속되는 위치에 처하게 된다. 사회적 위상의 상실, 또는 감소에 대한 두려움은 외부통제를 자기통제로 전환하는 가장 강력한 원동력이 되었다. 검이 해결의 수단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게 되자 이제 출세와 사회적 성공을 위해 말로 언쟁을 벌이는 음모와 암투 등이 대신 등장한다. 그것은 무기로 치르는 투쟁 대신 다른 특성을 요구하고 길러낸다. 심사숙고 자기안목 자기절제 자기감정의 정확한 조절 인간을 비롯한 전체 영역에 대한 광범한 지식 등은 사회적 성공에서 필수적인 전제조건이 된다

 

전사들의 궁정화과정에 추진력을 제공했던 전체운동, 기능분화 지역과 계층들의 통합과 상호의존망의 형성은 마침내 15세기와 16세기에 가속화된다. 이런 현상은 화폐의 운동에서 분명하게 있다. 화폐의 증가, 유통이 활성화 되면서 화폐가치 또한 하락하게 되는데 이것이 왕이나 제후에게는 유리하게 작용하였고 중소 기사계급을 몰락시킨 근본 원인이다.

 

사회적 위상의 상실 도는 감소에 대한 두려움은 외부통제를 자기통제로 전환하는 가장 강력한 원동력이 되었다. 17, 18세기 궁정귀족들은 아직은 돈보다는 궁정에 속한다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왕에 대한 의존성과 종속성이 수밖에 없었다. 또한 귀족들에게 의존 수밖에 없었는데 핵심은 점차 부상하는 시민계급을 반대편에서 제어할 있는 세력 균형의 기능 때문이었다.

 

엘리아스는 인간을 극히 조형가능하고 변형가능한 존재로 보기 때문에 이성이란 원래 없고 기껏해야 합리화가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명사화하여 이성 또는 오성, 분별력이라 부르는 것은 전체의 심성구조가 특정한 방식으로 조형된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본다. 이성, 자기통제, 초자아가 어느 문득 발생한 것도 아니고 항상 있어 것도 아니고 분명하게 설명될 있는 방식으로 조형된 것이라고 보는 점에서는 프로이트를 따르고 있다.

 

인간의 의식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 고정관념 하나는 심리 인간의 정신가계는 여러 개의 영역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영역들은 서로 무관하게 기능하고 따라서 따로따로 고찰해도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의식이나 이성 또는 이념만을 주목하고 본능의 구조 인간의 감정과 정열의 형태나 방향을동시에 고찰하지 않는 종류의 연구들은 처음부터 효과나 생산성에서 제한될 수밖에 없다.

 

이념사나 사유형태의 역사를 진정으로 이해하려면 인간 상호간의 관계가 어떻게 변화했는가와 함께 행동의 구조와 심리구조의 조직 전체를 고려해야만 한다. 무의식과 이드를 전체 심리구조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강조하는 경향은 이론화과정에서 사유도구로 발전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엘리아스의 입장이다. 엘리아스는 무의식적인 리비도의 자극에 의한 인간의 통제가 개인의 결합태적 운명이나 다른 조절기능들의 형태 구조와 무관한 나름의 형태와 구조를 지닌다는 것에는 반대하고 있다. 엘리아스에 의하면 행동을 결정하는 것은 인간의 조형 가능한 충동과, 짜서 붙박이로 심리구조 안에 넣어진 충동-통제 간의 균형과 갈등인 것이다.

 

엘리아스는 <<수치심과 당혹감>> 문명화과정을 연구하는 중요한 포인트로 보고 있는데 16세기 합리화의 강력한 추진과, 수치심과 당혹감을 느끼는 한계점이 낮아지는 현상을 동일한 심리적 변형의 양면으로 보고 있다.

 

서양에서 행동의 문명화가 진행되는 결합과정은 국민계층이 생활수준의 향상, 상류계급의 기능적 의존 중앙독점, 기능분화와 노동 생산성의 증대 등이며 매우 높은 단계의 기능분화로부터 비로소 전문화된 독점적 행정기관을 갖춘 폭력 조세독점들의 형성이 가능해진다. 이러한 국가의 형성으로 개인은 보다 높은 수준의 안전성을 획득하고, 많은 인간들과의의존성이 확대된다. 이것은 개인의 자제, 그의 행동과 정념의 정확한 규제를 요구하고 배양하는 것이다. 신분의 벽이 무너지고 만인에 대한 만인의 기능적 의존이 점점 강화되고 모든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동등하게 비로소 내밀한 특정 공간 밖에서 다른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이루어지는 노출은 점차 미풍양속을 침해하는 것이 된다. 그렇게 되면 이러한 행동들은 개개인에게 어릴 때부터 완전히 불안과 두려움의 감정을 야기하여 금지의 사회적 성격은 그의 의식으로부터 완전히 사라진다. 이제 수치심은 그에게 전적으로 자신의 내면의 명령으로 나타난다. 당혹감은 초자아를 통해 대변되는 사회의 금기지침을 다른 사람이 파괴할 위험이 있거나 또는 파괴할 등장하는 불쾌감 또는 불안이다.

 

엘리아스는 현대 세계의 통합이 지향하는 방향을 개별국가를 넘어서는 일종의 초국가적통합국가에서 찾고 있다. 국제경쟁으로 인한 갈등은 우리 사회의 구조가 강한 갈등의 압력으로 인해 일련의 유혈. 무혈 권력투쟁을 거쳐 폭력이 독점되고 통합단위의 중앙조직이 확립되지 않는 결코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라는 이유에서이다.

 

특별한 가족들에게만 세습적으로 주어지는 독점기회는 해당사회 내에서 갈등과 분열을 야기한다. 우리 사회에서 개인들의 행동에 가해지는 통제를 오로지 논리적 사유에 근거한 합리적인 어떤 것으로 설명하는 것이 오래 전부터의 관례이지만 엘리아스는 다르게 생각한다. 합리화과정 자체와 사회적 터부의 합리적 형상화 정당화는 본능과 감정뿐만 아니라 의식과 반성의 수준을 포함한 전체인격에 영향을 미쳤던 전환과정의 측면이라는 것이 그의 견해이다.

 

 현재 우리 의식의 부분이자 개인적 초자아로서 우리에게 이식된 행동규칙들 대부분은 권력과 사회적 위상에 대한 기득권 집단의 열망들 중에 남아 있는 잔재들로서 그들의 우월한 권력과 지위를 한층 강화하려는 기능만을 가지고 있다. 행동규칙들의 도움으로 집단의 구성원들은 자신들의 능력과 업적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다른 집단들에게는 통로가 봉쇄된 권력기회의 독점적 소유를 통해서 스스로를 차별화한다. 국제적 국내적 갈등이 해소되어야만 인간관계의 통제는 기능분화의 높은 수준과 이를 전제로 높은 생활수준과 노동 생산력을 유지하는데 필수적인 명령과 금지들에만 국한될 것이고 인간의 자기통제도 사람들이 두려움 없이 서로 살아가고 노동하고 즐길 있기 위해 필요한 만큼으로 줄어들 것이다.

 

그렇게 되어야만 인간은 충족을 요구하는 자신의 불가피한 본능과 이에 가해지는 제재 간의 최상의 균형- 행복, 자유로 말해지는 심리적 조건 지속적인 평형상태. 자신의 사회적 과제들. 사회적 실존의 요청과 자신의 개인적 성향과 욕구들 간의 조화- 예외가 아니라 규칙이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결합태의 구조와 인간상호의존성의 구조가 이런 성격을 가지게 되고, 인간의 공존이 이런 방식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마음의 평형을 있는 방식으로 기능한다면 비로소 인간은 문명화되었다고 주장할 있을 것이다문명화 과정은 끝나지 않았다. 그것은 진행 중이다라고 말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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