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 독서모임 책으로 선정되어 읽게 되었다.  책장 한 켠에 자리잡은 일리치 책 중에 한권이다.  “깨달음의 혁명(1960년대)”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1974)”   “누가 나를 쓸모 없게 만드는가(1978년)” "그림자 노동(1981)”“과거의 거울에 비추어(1992)”이다.  책장을 바라볼때 마다 언제가 읽겠다고 했다. 뜻밖에 독서 모임에서 이책을 선정하여 읽게 되었다.  책크기도 작고 짧은 에세이로 전철이나 이동중에 쉽게 꺼내서 읽을 수 있다. 

 

 서문에서 이반 일리치는 책의 목적을 3가지로 요약 한다.

1. 날마다 무더기로 상품을 쏟아내어 사용가치의 자율적 창조를 마비시키는 상품·시장 의존 사회의 특징을 묘사하려 한다.

2. 이 시장 의존 사회에서 필요를 만들어내며 전문가들이 수행하는 숨겨진 역할을 파헤치려 한다.

3. 진실을 감추는 환상을 벗겨낸 다음, 시장 의존을 영구화하는 전문가 권력을 허물어낼 전략을 제안하고자 한다.

 

부제 처럼 시장 상품 인간을 거부하고 쓸모 있는 실업을 할 권리를 요구한다.  시장을 위한 상품 생산 바깥에서 사람들이 자신과 타인에게 할 수 있는 유용한 활동을 다룬다. 전문가들로부 부터 벗어 남으로써, 경제학자들이 측정하지 못했고 측정할 수 없는 활동들이 진정으로 만족감, 창조성, 자유를 낳는다고 말한다. 

 

독서 모임에서 요약한 내용이다. 

 

1. 위기인가 선택인가

  오늘날 위기란 말은 의사, 외교관, 은행가, 온갖 사회 공학자가 모든 상황을 접수하고 사람들의 자유를 유보하는 상황을 의미하게 되었다. 국가도 사람처럼 중환자 리스트에 오른다. 이 '위기'에는 불길한 기운이 풍기지만 다룰만한 위협이므로 돈과 인력, 관리 기법이 총동원된다. 중환자실, 사회 제도, 에너지 과소비를 해결하려는 원자력 발전이 전형적인 대응 방식이다. 

  위기가 이런식으로 이해되면, 위기는 언제나 대기업 임원이나 관료, 특히 어제의 경제성장에서 떨어진 부작용을 먹고사는 이들에게 좋을 수밖에 없다. 그들은 사회적 소외를 먹고사는 교사, 건강을 해치는 노동과 여가위에서 번창하는 의사, 그리고 도움을 받아야 하는 사람에게서 걷은 돈으로 복지를 분배하며 영향력을 행사하는 정치인들이다. 위기가 속도를 계속 높이라는 요구로 이해된면 승객은 안전띠를 더 단단히 조여야하지만, 운전자의 손에는 더 많은 권력이 주어진다. 자동차를 몰기 위한 공간과 시간, 자원의 약탈은 정당화되고 자신의 두 발로 걷고자 하는 이들은 희생된다. 그러나 위기는 선택의 순간일 수 있다. 다른 삶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기적의 순간이 될 수 있다. 이것이 오늘 미국과 전 세계가 맞닥뜨린 선택으로서의 위기이다.

 

전세계가 직면한 선택

  최근 몇십 년 들어 세계는 하나의 혼합물이 되었다. 일상의 사건을 대하는 인간의 반응은 표준화되었다. 언어와 종교는 아직 다르지만, 사람들은 똑같은 거대 기계의 박동소리에 발맞추어 행진하는 무리에 매일매일 합류한다. 전기 스위치가 저마다 방식으로 어둠을 밝혀온 장작과 초, 등잔을 몰아냈다. 전 세계의 전기 스위치 사용은 급증했고 수세식 화장실은 배변을 위한 필수 조건이 되었다. 고압 전선의 빛과 화장지가 없다는 이유로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에게 가난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기대는 커지는 한편 자신에 대한 낙관적 믿음과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은 급속도로 사그라졌다.

 

지루하거나 시끄러운 미디어가 공동체와 마을, 회사와 학교로 깊숙이 파고들며 우리의 생활을 침범한다. 세계 곳곳에서 청중이자 고객, 소비자의 특징인 훈련된 순응이 인간의 내면을 잠식한다. 인간 행동의 급격한 표준화가 빠른 속도로 이루어진다.

 

  이제 전 세계 공동체는 한 가지 근본적 물음을 마주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점점 더 의존으로 치닫도록 조건 지어진 군중 속에서 하나이 익명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이 두려움의 끝에 매달린 한 줌의 용기를 찾아 나설 것인가? 그러나 이 세계의 모든 사람이 근본적으로 동일한 선택에 처했다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동의하지 않는다. 그들은 남아메리카 인디언의 배고픔이나 서유럽 노동자의 우울증, 동유럽 관료의 냉소적인 부패의 이면에 놓여 있는 현대의 타락이 모두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상품에 더 의존할 것인가, 덜 의존할 것인가

  경제 발전은 어떤 사회에서건 동일한 효과를 불러온다. 세계 어디서나 사람은 똑같은 공장과 기계, 병원과 방송국, 정책기관에서 흘러나오는 상품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낯선 올가미에 걸려들었다. 이 의존성을 채우기 위해 똑같은 것들이 더 많이 생산된다. 상품은 표준화되고 가공되며, 미래의 소비자가 그 물건을 받는 대로 자신에게 필요한 것으로 느끼도록 전문가들이 훈련시킬 수 있게 디자인된다. 유무형의 이 생산물은 산업사회의 필수품을 구성하고 이 상품에 화폐가치를 얼마나 귀속시킬지는 국가와 시장이 나람의 비율로 결정한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내려온 다양한 문화와 행동양식은 찌꺼기가 되어 쓸려 내려간다. 이 세계는 생산과 소비를 위해 생겨난 기계가 황폐화 시킨 불모지가 되었다.

 

소를 키우며 젖을 짜던 주민들이 그 방식을 잃어버렸다. 이제 그 하얀 물질은 식료품점에서 나온다.(엄격한 소비자보호법규 때문에 산업 유재품이 더 안전하다고 받아들여진다) 이제 더 많은 아이들이 소의 젖을 먹고 아이의 신체기관은 식료품점에 진열된 우유에 길들여진다. 젖가슴이 가진 기능은 퇴화하고 인간의 자율적이고 창조적인 행동은 후퇴한다. 판자나 짚, 기와나 석판으로 올렸던 지붕은 사라진다. 정글의 가난한 사람이나 사회주의 이론가도 하나같이 부자들의 고속도로로 몰려간다. 이 고속도로는 한때 성직자가 차지했고 지금은 경제학자가 들어앉은 세상으로 데려가는 일이다. 각 나라의 은행들이 각 지역이 보존해온 보물과 문화유산 위에 화폐를 찍어내린다. 돈은 측정될 수 없는 것이면 무엇이든 평가절하한다. 위기는 이렇게 상품에 더 의존할 것인가, 어디면 덜 의존할 것인가에 대한 선택으로 모두에게 똑같이 다가온다. 상품에 더 의존한다는 것은 자급활동을 이끄는 규범을 결정해온 문화가 급속히 파괴되다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상품에 덜 의존하는 것은 인간의 행동을 장려하여 다양한 사용가치를 꽃피우는 현대의 문화가 생겨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사는 시장 의존 사회에서는 생산된 상품의 양과 종류로 물질의 진보를 측정한다. 사회의 진보도 물질의 진보를 재는 잣대를 가져다가 측정한다. 즉 상품에 대한 기회가 얼마나 공정하게 분배되는지가 사회 진보에 대한 척도이다. 사회주의는 제대로 기능을 못하는 분배구조에 반대하는 투쟁으로 변질했다. 복지경제학은 공공의 이로움과 물질의 풍요를 구별하지 못한다. 

 

가격표가 붙지 않은 거래는 모조리 무시하는 산업사회는 인간이 적응 할 수 없는 도시의 풍경을 만들었다. 이곳에서는 날마다 쏟아지는 물건과 명령이 내가 원치 않는 결과를 만들고, 그때마다 나를 지키고 싶은 마음이 들 수록 차별과 무기력, 절망의 골이 더 깊어지는 세계이다. 

 

삶의 몰수     

 우리의 삶은 그 어느 때보다 많은 부분이 변질되었다. 이제는 삶 그 자체가 세계 시장에서 유통되는 상품 소비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이 되었다. 

 

에너지 정책은 자칭 사회주의자와 소위 자본주의 지지자의 세계관이 본질적으로 얼마나 일치하는 지를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이다. 현존하는 모든 정당이 가능한 많은 에너지를 쏟아 생산력을 높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그렇게 만들어진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지금보다 자유롭게 자신의 손 발을 쓰지 못하리라는 것을 그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자동차와 버스가 도로 위에서 자전거를 몰아낸다. 전 세계 모든 정부가 한결같이 고용 창출을 강조하지만, 직업이 또한 자유 시간의 사용가치를 파괴한다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모두 사람의 필요에 관해서 객관적이고 완벽하게 전문적 정의를 내리려 하지만 그로 인해 삶이 몰수되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중세 후기 천동설은 너무나 단순하고 불안정한 지동설의 신뢰도를 의심하고 입증하는 이론으로 쓰였다. 현대의 경제학에서도 제도권 경제가 만들어낸 사회적 비용을 사용가치 중심으로 분석하는 이론이 결코 적지 않다. 이것의 정체성은 '급진 기술', '생태', '공동체적 삶의 양식', '작은 것', '아름다움' 등으로 설명되지만 이 실험들은 실제 생활에서 곧잘 실패하기 때문에, 이 이론에 반대하는 논리로 과장된다. 중세의 천문학자들이 갈릴레오의 망원경으로 보려하지 않는 것처럼, 현대의 경제학자들도 그들 경제 이론의 중심을 바꿀지 모를 이 분석을 쳐다보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새로운 분석 이론은 명확한 진실을 알려준다. 어떤 문화든지 교환될 수 없는 사용가치가 반드시 그 중심을 차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구성원 대다수에게 만족스러운 삶을 위한 규범을 줄 수 있다.

 

  그동안 사람들이 어려움에 맞서고, 놀고, 먹고, 우정과 사랑을 나눌 수 있었던 기본 토대가 셀 수 없이 허물어졌다. 개발의 시대 이전까지 사람들은 자립적 양식으로 자신의 욕구를 대부분 충족하며 살았다. 개발이 쓸고 간 자리에는 도자기 대신 플라스틱, 물 대신 탄산음료, 카모마일 대신 신경 안정제, 기타 대신 음반이 들어왔다. 인류역사에서 사람들의 고통을 가늠하는 가장 정확한 척도는 먹는 음식 중에서 사서 먹는 음식이 차지하는 비중이다.

 

태평성대에는 집집이 직접 농사지은 곡식으로, 어려울 때도 도움을 주는 이웃이 나눠준 음식으로 영양소를 섭취했다. 오늘날 전 세계 인구의 40퍼센트는 오로지 다국적 마트 덕분에 생존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흐름에는 사람이 필요를 표현하고 만족하게 하는 유용한 활동을 표준 상품과 서비스로 무한히 대체할 수 있다는 신념이 고스란히 드러나있다.

 

가난의 현대화 

  상품이 어느 한계점을 지나 기하급수적으로 생산되면 사람은 무력해진다. 자기 손으로 농사를 지을 수도, 노래를 부를 수도, 집을 지을 힘도 없게 되는 무기력이다. 땀을 흘려야 기쁨을 얻는 인간의 조건이 소수 부자만 누리는 사치스러운 특권이 된다. 요즘에는 레코드와 라디오가 확성기로 울려퍼지면서 지역의 예인들이 사라지고 있다. 베네수엘라 정부가 마치 상품처럼 국민이 '주택'을 가질 권리를 법으로 선포한 날, 그동안 국민의 4분의 3이 자기 손으로 만들어온 집이 하루아침에 마구간 취급을 받게 되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자가 건축을 바라보는 사회적 편견이 생긴 것이다. 자격증 있는 건축가가 그린 설계도를 제출하지 않으면 합법적으로 집을 지을 수 없게 되었다. 자기 손으로 집을 지으려는 사람은 이상한 사람이 된다. 수많은 법 조항이 생겨나 그의 독창성은 오히려 불법으로 규정되고 범죄행위라는 딱지가 붙는다.

 

  이런 사례를 통해 우리는 새로운 상품이 전통적 자급 기술을 몰아낼때 가장 먼저 고통받는 사람이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직업도 없는 가난한 사람이 고용되지 않은 상태로 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일은 노동시장이 확장되면서 없어져 버렸다. 

 

인간을 무력하게 만드는 풍요에 중독되고 그것이 문화 속으로 한 번 배어들면  '가난의 현대화'가 생겨난다. 상품이 확산되면서 어김없이 발생하는 부정가치와 사회적 비효율을 경제학자들은 주목하지 않는다. 그들의 도구로는 측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사회적 자원을 '가동하여'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므로 사회사업가도 관심을 쏟지 않는다. 경제학자에게는 사회적 규모로 벌어지는 만족감의 상실을 자기들 계산기에 넣을, 쓸 만한 수단이 없다. 시장에는 그에 상응하는 게 없기 때문이다.

 

  '현대화된 가난'이 주요하게 가난한 사람에게 영향을 미칠 때는 알아차릴 수 없으며 그 본성 또한 파악하기 어렵다. 발전이나 현대화가 가난한 이들에게 다가가면 그때까지만 해도 시장 경제에서 배제되어도 생존할 수 있던 이들은 구매 시스템으로 끌려 들어가 물건을 사지 않고는 생존할 수 없게 체계적으로 강요를 당한다. 학교라는 곳에 가본적 없던 멕시코 오악사카주 인디언이 지금은 졸업장을 ‘따기' 위해 학교에 끌려간다. 그나마 이 종이 한 장이라도 없으면 도시에 나가 빌딩 청소부 일도 할 수 없다. '필요'가 현대화될 때마다 가난에는새로운 차별이 하나씩 더 붙는다.

 

물질의 풍요, 인간의 가난

  현대화된 가난은 이제 모두가 겪어야 하는 가난이다. 삶이 차례대로 가공된 보급품에 기대게 되면서 그때마다 반복되는 무력감에서 헤어나올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돈이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시장에 집중하는 문화가 끝도 없이 확장되면서 새롭게 출현한 절망의 풍요를 똑똑히 보게되었다. 진보가 물질의 풍요라고 생각하는 이념은 부자 나라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최근까지도 대부분의 필요를 삶의 자급 양식으로 해결하던 문화가 유지되던 나라에도 이 이념이 들어오자 시장에 팔지 않고 해오던 일들이 하루아침에 변질되기 시작했다. 마오쩌둥 아래에서 중국은 국방이 아니라 창의적 인민을 목표로 내걸고 지역마다 자치 결정을 하자고 강조했다. 하지만 1977년 들어, 중국에서는 산업 생산력을 증대해 더 낮은 비용으로 더 많은 인민에게 보건과 교육, 주택과 사회 복지를 제공하자는 구호가 나부꼈다. 중국도 다른 나라들처럼 익명의 소비자 집단을 겨냥해 타율적으로 상품을 생산하는 표준화가 진행되었다. 이 과정이 진행되면서 지금까지 자기 자신과 이웃에게 있는 놀라운 자율성에 대한 믿음을 잃게 되었다. 중국은 과도한 시장 의존으로 전통 사회를 잡아먹은 서구식 근대화의 최신의 예를 대표적으로 보여 준다.

 

두 갈래 길

  인간이 필요를 충족하는 수단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자동차가 인간의 근육을 위축시키고, 교육이 저절로 차오르던 호기심을 질식시켰다. 그 결과 필요와 욕구 모두에 있어 그 선례가 없는 새로운 특성이 생겨났다. 역사상 최초로 인간에게 필요가 상품과 같은 말이 된 것이다. 사람이 어디든 가고 싶은 곳을 걸어가던 시대에 제약이란 자유가 구속 받을 때였다. 지금처럼 어딜 가더라도 교통수단에 의지하는 시대에는 자유가 아니라 승객의 권리를 요구한다.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에게 가장 많은 운송수단이 '권리'를 제공하면서 걸을 수 있는 자유는 무시되고 수많은 권리 조항에 가려진다. 사람들은 승객이라는 지위에서 벗어날 자유를 상상조차 못하게 되었다.

 

전문가들은 그 본성상 일반인과 공유될 수 없는 그들의 전문지식을 가지고 필요와 시장이 뗄 수 없게 결합된 이 상황을 정당화한다. 극좌 선동가나 극우 경제학자도 일자리를 늘리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더 필요하다고 대중을 선동한다. 교육자는 질서 확립과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지식을 더 습득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산부인과 의사는 건강한 아이를 낳기 위해 자신들이 더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상품과 욕구 사이의 관계를 정당화하는 전문가에게 씌워진 면죄부를 벗겨내지 않는 한, 세계 경제에서 보편적으로 확산되는 시장 의존을 효과적으로 비판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전해들은 어떤 여인의 일은 지금의 상황을 잘 보여준다. 이미 두 번 출산을 경험이 있는 여인은 출산을 앞두고 그다지 두려움이 없었다. 셋째를 낳기 위해 병원에 누워있는데 태아가 나오는 걸 느꼈다. 간호사를 부르자 침대로 오지 않고 어디론가 급히 달려갔다. 간호사는 살균 수건으로 아기의 머리를 자궁 속으로 억지로 밀어 넣으면서 산모에게 힘을 주지 말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레비 박사님께서 아직 오시지 않았기"때문이다.

 

  지금은 전문가의 관리가 아니라 대중의 결단과 정치 행동이 필요할 때다. 현대 사회에서는 부자든 가난한 자든 서로 다른 두 갈래 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 밖에 없다. 첫째는 좀 더 안전하고 싸고 쉽게 공급할 수 있는 상품을 개발하는 길이다. 또 다른 길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눈으로 필요와 만족 사이의 관계에 접근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선택은 생산물의 외양만 바꿔서 시장 의존 경제를 그대로 가져갈 것인가, 아니면 상품에 대한 의존 그 자체를 낮출 것인가이다. 두 번째 길로 간다면 개인과 공동체 모두 현대에 적합한 도구를 새로 만들기 위해 사회 구조를 다시 상상하고 설계하는 모험이 뒤따를 것이다. 그 대신 사람들이 자신의 필요를 직접 만족시키는 비율은 더 늘어날 것이다. 

 

상품이 최대한 많아지는게 곧 기술의 진보라는 최신 추세를 대변한다. 정부관료나 복지기술자, 국민의 평등을 강조하는 이들이 한목소리로 긴축경제를 외친다. 이들의 긴축경제란 제트기 대신 버스를 더 많이 만들자는 것이다. 즉 분배가 번거로운 상품들 대신 '사회적' 상품을 더 많이 만들자는 이야기 이다. 노동시간을 평등하게 분배하기 위해 주당 노동시간을 과감히 20시간으로 줄이자는 것이다. 마오와 카스트로와 케네디도 그랬던 것처럼 실업자를 재교육하고 공공 사업을 더 많이 벌이자는 것이다. 산업사회는 사회주의를 내새우건 합리성과 효율성을 강조하건 이미 문화는 새로운 상태로 들어섰다. 인간이 욕구를 만족시킨다는 게 상품에 귀속된 필요를 반복적으로 해소하는 것으로 타락한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대안은 기껏 상품을 조금 덜 생산하고, 분배를 좀 더 공장하게 하고, 이기심을 덜 생기게 할 뿐이다. 한 사회에서 필요한 게 무엇인지를 결정하는 일에 대중을 상징적으로 참여시키는 결정권이 시장의 화폐에서 국회의 정치가에게 이전될 뿐이다. 이렇게 되면 산업 생산으로 환경에 가해지는 충격은 약해질지 모른다. 하지만 상품중에서도 서비스, 특히 사회적 관리라는 서비스는 재화가 생산되는 양보다 훨씬 증가할 것이 분명하다. 현대의 정부 관료들은 이런 긴축경제가 생태적으로는 가능하지만 동시에 산업 생산을 사회 중심에 놓도록 사회를 통제하는 데 드는 비용을 감당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린 상태이다.

 

상품 의존도를 낮추는 두 번째 길은 시장이 절대적으로 지배하는 이 시대의 막을 내리는 길이다. 사회적으로 절제의 윤리를 키워 인간이 스스로 행동하고 이를 통해 필요를 만족시키는 시대를 여는 길이다. 앞서 말한 '긴축경제'에서 긴축은 제도적으로 생산성을 높이고 그것을 개인이 받아들이도록 선포한 법령이다. 지금부터 이야기하는 절제는 대중이 자신과 이웃의 만족을 위해, 권력이 생산하는 상품의 최대 생산량을 파악하고 제한하는 사회적 차원의 미덕을 의미한다. 이러한 공생의 절제는 한 사회로 하여금 인간을 무력화하는 풍요로부터 개인의 사용가치를 보호하도록 영감을 불어넣는다. 그러한 사회적 보호하에서라면 비로소 현대적 도구 사용의 확산을 강조하는, 특색있는 문화들이 다양하게 싹틀 수 있을 것이다. 함께하는 절제는 어떤 요구든 과다한 사용을 절제하기 때문에 도구의 소유자라고 해도 권력을 함부로 쓸 수 없게 된다. 자전거를 공동으로 소유하든 개인이 소유하든 본질적으로 도구로서 자전거에 깃들어 있는 공생의 속성은 변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상품은 설계자가 만든 필요를 충족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 선택에서 상품은 마치 천연자원이나 도구처럼 사람들이 저마다 속한 공동체가 자립하도록 사용가치를 만드는 데 쓰일 것이다. 이 길로 가기 위해서는 가치를 바라보는 태도에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있어야 한다. 현대 경제의 중심에 일반 소비재와 전문직 서비스가 있다. 전문가는 인간의 모든 필요가 오로지 이 중심으로 연결되게 한다. 반대로, 지금 살펴본 사회적 개입을 통해서는 사람이 스스로 창조하고 평가하는 사용 가치가 경제의 중심에 들어서게 된다. 최근 들어 사람들 속에서는 자신이 바라는 것을 스스로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이 사라지고 있는 게 사실이다. 스스로 무언가를 해보려는 이들은 세계 어디서나 부당한 차별에 부딪히기 때문이다. 이 차별 탓에 목표를 세우고 필요한 걸 결정하는 자신감을 빼앗겼다. 그러나 이러한 차별과 박탈에 분노하는 소수의 사람이 점점 늘고있다.

 

 

2. 전문가의 제국

 

   분노한 소수 집단은 자신들이 땅에 뿌리박고 살아온 문화적 삶이 위협당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그들은 자신이 쓸모 없는 것이 되지 않도록 맞서 싸우겠다고 결심한다. 상품에 귀속되는 필요가 급속히 증가하여 전에 볼 수 없던 새로운 의존과 새로운 현대화된 가난(제도적으로 박탈된 창조력과 무기력)이 생겨나면서, 오늘의 산업사회는 제도적으로 낙인 찍힌 다수의 사람이 상호 의존하면서 뭉치는 특징을 보인다. 

  날려보내야 할 이 20세기 중반 시대를 나는 '인간을 불구로 만든 전문가의 시대'로 부르자고 제안한다. 이 명칭은 교육자, 의사, 사회사업가, 과학자 등 서비스 제공자들이 그동안 아무런 지탄도 받지 않고 해온 반사회적 기능을 드러낸다. 동시에 이 이름은 지금까지 그들의 고객이 되어 자신을 갖가지 구속에 가두고 살아온 시민의 안일함을 고발한다.

 

인간을 불구로 만드는 전문가의 시대

  전문가권력이 인간을 무력하게 만든다고 말하면, 그들의 희생자는 평생 학생, 환자, 소비자로 살도록 관리자와 공모한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다는 걸 깨닫게 된다. 60년대를 '문제 해결사'들이 모두의 위에 섰던 시대라고 말하면, 대중을 기만했던 학계 엘리트의 오만한 속임수와 함께 그들에게 희생된 대중의 어리석은 탐욕이 동시에 드러난다. 

 

이런 식으로 사회적 상상과 문화적 가치를 생성하는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추면 단순한 고발과 비판을 넘어서 하나의 전략이 나온다. 사람들은 낭비적이고, 비합리적이며, 인간을 마비시키는 상품을 재분배하는 전문가를 넘어설 필요성을 느낀다. 이 전략은 전문성이라고 하는 것의 허울을 벗겨내는 것이다. 전문가가 대중으로부터 받는 신뢰가 산업 시스템의 아킬레스건이다. 

 

  전문가 권력을 분석하는 것이 사회를 다시 세우는 열쇠라고 제안할 때마다 그런 현상을 산업사회로부터의 회복의 핵심요소로 삼는건 위험한 오류라는 이야기를 들어왔다. 가난한 사람이 학교와 병원 등 훈련된 보호자를 필요로 할 때 과학적으로 육성된 인력의 신뢰를 저버리게 하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 아닌가?, 대중의 '진정한' 필요를 정의하고 충족시켜야 하는 과업을 수행하는 데 가장 유능한 지도자로 급진 사회적 전문가들이 뽑혀야 하지 않는가? 

 

이런 질문에 답변해야 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자신의 논리를 앞세워, 서비스에 초점을 맞춘 산업 복지 시스템이 인간을 무력하게 만드는 데 어떤 영향을 미치는 지 대중이 분석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불신하게 한다. 어떤 정치 체제에서든 똑같다. 사람들은 법률과 환경, 사회에서 일어난 변화를 거쳐 강제로 '보살핌'의 소비자가 되면 자율성을 빼앗긴다. 

  엘리트들은 수입을 잃을까 봐 방어를 하지만, 시장 의존 사회가 새로운 형태로 바뀌고 서비스가 좀 더 많은 사람에게 두루 배분되면 권력과 지위를 회복할 것이다.

 

현대의 다른 이름들

  미래의 역사가는 전문가의 시대를 정치 소멸의 시대라 부를 것이다. 유권자들이 대학교수의 지도를 받으며 자신의 필요를 법률로 제정할 권력과 누가 무엇이 필요한지를 결정할 권한, 그리고 그 필요를 충족하는 수단에 대한 독점권을 기술 관료에게 위임한 시대라고 말할 것이다. 이 시대는 학교의 시대로 기억될 것이다. 인생의 3분의 1은 무엇을 처방받아야 할지 배우고, 나머지는 습관을 관리하는 저명한 전문가의 고객으로 살았던 시대이다. 

 

슬프게도 이 시대는 다음과 같이 기억될 가능성이 높다. 모든 세대가 삶을 빈곤하게 만드는 풍요를 광적으로 쫓느라 자유를 모두 양도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고, 정치를 역사상 최초로 복지수령자의 불만을 조직하는 것으로 바꾼 다음에는 전문가 전체주의로 덮어버린 시대였다고.

 

전문가의 표식

  우리가 우선 마주해야할 사실은 필요를 만들고, 조정하고, 충족시키며 이 시대를 지배하는 전문가 집단이 새로운 종류의 카르텔이라는 점이다. 새로운 전문가들은 전문성으로 인간의 필요를 정의하고 충족시키면서 사람들에게 보살핌이라는 걸 제공하고 봉사하는 사람처럼 행세한다. 

 

새롭게 생겨난 전문가는 사기꾼과 잘 구별해야 한다. 교육자는 학교에서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를 정하고 학교 밖에서 배우는 것은 쓸모없다고 못 박을 수 있다. 이런식의 독점으로 전문가는 독재자처럼 얼핏 폭력단과 비슷해 보인다. 폭력단은 이익을 얻기 위해 공급을 조절하여 생필품을 독점한다. 그러나 오늘날 전문가는 합법적으로 권력을 확보하여 자신들이 필요를 만들고 제공하도록 법을 제정한다. 그들은 현대 국가를 지주회사로 만들었다. 이 지주회사에 딸린 기업들은 자체적으로 승인한 사업을 벌인다.

 

역사적으로 일에 대한 법적인 규제는 수많은 형태가 있었다. 중세의 길드나 노동조합등 동업 조합에는 전문가가 있어서 누가, 어떻게 일을 할지 결정했다. 그러나 이 전문가는 오늘날의 의사와 같은 전문가와 달랐다. 현대의 위세를 떨치는 전문가는  그 어떤 시대의 전문가보다 훨씬 나아간다. 자신들이 무엇을 만들지, 누구를 위할 것인지, 어떻게 운영할지를 결정한다. 전문가들이 갖고 있는 특별하고 소통될 수 없는 지식은 물건을 만드는 방법 뿐만 아니라 그들의 서비스가 왜 필요한지에 관한 지식이다.

 

이 시대의 전문가는 내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를 말해주는 사람이다. 그들은 사람을 처방할 권리를 요구한다. 그들은 무엇이 좋은지 광고하고 무엇이 옳은지 선포한다. 전문가임을 알 수 있는 표식은 개인을 고객으로 정의하는 권위이며 그 고객에게 필요를 결정해주는 권위이고, 새로운 사회적 역할을 알려주는 처방을 하는 권위이다. 현대의 전문가는 돈으로 받을 수 없는 것을 파는 사람이 아니라, 돈을 받고 팔아야 할 것과 무료로 제공해서는 안 될 것을 결정하는 사람이다.

 

전문가는 마치 중세의 사제들처럼 엘리트에게 이익을 챙겨주는 대가로 그들의 동의를 얻어 권력을 잡는다. 전문가는 지배자의 선거구마다 특별하고 현실적인 이득을 해석하고 보장하며 공급한다. 전문가의 권력은 옳고 그름과 필요를 처방하는 특권이 전문화된 형태이다. 

 

민주주의가 위축되다

  전통적 직업인이 권력을 휘두르는 전문가로 변신한 것은 교회의 제도화 과정과 맞먹는다. 의사가 생명 공학자로, 선생이 지식 기술자로, 장의사가 사망 기술자로 변신한 모습은 직종연합이라기 보다는 국가의 지원을 받는 성직자 집단에 더 가깝다. 사회가 이렇게 막강한 전문가를 용인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정치적 사건이다. 전문가가 생겨날 때마다 새로운 위계질서가 만들어지고, 고객이 될 사람과 쫓겨날 사람이 가려지며, 추가 에산이 책정된다. 매번 그러한 전문가에게 합법성이 주어진다는 것은 입법부, 사법부 그리고 행정부가 수행하는 고유한 성격과 독립성이 훼손되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 문제를 해결할 권한이 보통 사람들이 투표로 선출한 대리인의 손에서 스스로 임명장을 수여하는 엘리트의 손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최근 의학이 단순 직종 이상으로 영향력을 가지면서 자신들이 공공 규범을 세우겠다며 입법권을 침해한다. 의사란 질병이 무엇 때문에 생겨나는지를 찾아내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시대 의료 전문가는 사회가 어떤 질병을 용납해서는 안되는지를 결정한다. 이제 의사는 치료해서는 안 될 사람을 골라 낙인을 찍는다. 치료 대신 대중을 교정하고 환자를 어떻게 할 지 무엇을 줄 지 결정한다.

 

민주주의에서 법을 제정하고, 집행하고 정의를 실행하는 권력은 시민들 스스로에게서 나와야 한다. 하지만 중요 권력을 견제할 시민의 힘은 제약당하고 약화되다가 전문가 집단이 교회처럼 막강해지고부터는 아예 소멸되었다. 국회가 전문가의 견해를 바탕으로 결정을 내리면 정부는 국민을 위한 정부일지는 모르나, 국민에 의한 정부는 결코 아니다. 

 

공공정책을 결정할 때는 전문증거 배제 법칙(사실 인정의 기초가 되는 사실을 체험자 자신이 직접 공판정에서 진술하는 대신에 다른 형태로 간접적으로 법원에 보고하는 증거이다. 법원은 그 증거능력을 원칙적으로 부정하고있다)에 근거해야 시민의 자유가 보장된다. 시민이 직접 볼 수 있고 해석할 수 있는 것만이 법 제정의 근거가 된다. 어떤 견해나 신념, 추론이나 설득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과 어긋나면 정책에 반영할 수 없다. 엘리트 전문가들은 이 법칙을 야금야금 허물다가 급기야 거꾸로 뒤집어버렸다.

 

  전문가가 제시한 사실이나 지식을 대중이 활용하는 것과 전문가들이 집단으로 규범적 판단을 내리는 것은 다르다. 예를 들어 총기 전문가가 법원에 나와 총탄이 어느 총에서 나왔는지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그들의 기술을 배심원에게 전수하는 것이다. 이런것과 달리 오늘날 막강한 전문가들은 법원이나 국회에서 사실에 기반을 둔 증거가 기술이 아니라 자기 동료의 입장을 말한다. 전문증거 배제 법칙을 유보하라고 요구하며 법치를 훼손한다. 그리하여 민주주의는 곧바로 위축된다. 

  

필요의 역사

  전문가가 우리에게 필요라며 끼워넣는것을 우리가 결핍으로 느끼지 않았다면, 그들이 인간을 불구로 만드는 막강한 힘을 휘두르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현상이 그동안 분석되지 않은 것은 오염된 언어로 가려졌기 때문이다. 

 

상식의 근간인 말이 전문가가 통제하는 전문용어로 오염되었다. 말이 그렇게 침탈되어 일상 언어는 고갈되고 전문용어로 변질되는 사이, 사회는 변질되어 급여를 받고 고용되지 않으면 그 사람의 가치가 박탈되는 특수한 형태가 만들어졌다. 계획과 태도, 법률에서 전문가 지배를 약화시킬 변화를 일구려면 그들의 지배를 숨기는 잘못된 이름들에 더욱 민감해야 한다.

 

내가 말을 배우던 시기에 '문제'란 말은 수학 교과서에서나 있었다. '해결'은 화학이나 법률 용어였다. '내게 문제가 있어요', '나는 필요를 가지고 있어요'라는 말은 우스꽝스럽게 들렸다. 내가 십대가 되고 히틀러가 해결을 찾고 있을 무렵, '사회 문제'라는 말이 퍼져갔다. 사회사업가들이 '필요'를 표준화 하는 법을 배우자, 전에 없던  '문제아'들이 가난한 사람들 속에서 발견되었다. '필요'는 전문가의 살을 찌워주고 힘을 길러주는 사료가 되었다. 가난은 현대화 되었다. 관리를 위해 가난은 경험하는 것에서 측정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가난한 사람은 무언가가 필요한 사람이 되었다. 

 

생산력이 급속히 증가하면서 인간의 욕구는 얕아지고 주변 상황에 쉽게 휘둘린다. 가공된 필요를 충족하는 소비품이 높이 쌓여갈수록 소비자들은 수시로 자극하는 욕구에 둔감해진다. 자신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누군가로부터 배워야 하는 사회는 개인이 만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행동하거나 결정할 수 없는 문화에서 나온다. 이런 문화에서 소비자는 스스로 배우기보다 만들어진 필요에 적응할 수밖에 없다. 사람을 데려다 필요를 배우는데 유능한 학생으로 만드는 사회에서는 스스로 경험한 만족에 기반해 자신의 욕구를 만드는 능력은 보기 드물어진다. 

  명사가 된 '필요'는 전문가의 형태를 갖고 태어난다. 자신에게 부여된 필요를 무시하거나 확신하지 못하는 인간은 사회가 용납할 수 없는 반사회적 인간이 된다. 

 

내가 태어났을 무렵만해도 병원에 가는 사람은 아주 부자이거나 건강 염려증이 있는 사람이었다. 의사라고 해서 손자 배를 만져주는 할머니보다 나을 게 없었다. 의학에서 최초로 필요의 변종이 생겨난 것은 설파제와 항생제가 보급되면서이다. 이 약품덕에 전염병 예방 사업이 부상했고 약은 점점 더 많이 처방되었다. 의사는 환자 역할을 배당하는 독점권을 갖게되었다. 하지만 시험과 약물 등 기술이 점점 발전하고 비용도 낮아지면서 사람들이 의사를 찾을 필요가 적어지자 역설적인 상황이 일어났다. 과학으로 단순해진 그런 기술을 마음대로 쓰지 못하게 하는 법규가 만들어지고, 의사의 처방 목록에 올라갔다.

 

3. 산업사회의 환상

  자신이 선호하는 것을 스스로 정의하고 만족하는 대신 교육된 필요를 채워야 하는 이러한 지배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현대의 대성당인 병원과 학교로, 복지시설로 거대한 무리를 지어 이동한다. 가족의 건강을 보살피던 가정은 아파트로 변했고 이제 이곳에서는 아이가 태어날 수도 없고, 아플 수도 없으며, 죽음을 맞을 수도 없다. 이 세계는 복지 수령자로 변한 시민들의 유토피아가 되었다.

 

부자들은 상품 속에 든 필요에 중독되고 가난한 사람들은 필요가 만든 환상에 마비된다. 어느정도 수준을 넘어가면 의학은 무기력과 질병을 만들고 교육은 인간을 파괴하는 노동 분업을 만든다. 

 

  전 세계 모든 나라의 1인당 국민소득이 쿠바의 평균수준이 되면 그때부터 의학, 교육, 교통이 오히려 생산성을 갉아먹는 한계점에 도달한다. 이 반생산성은 생산 과정에 자본 투입이 결정적 임계점을 지날 때 시작된다.

 

  현대의 주요 제도에는 애초에 만들고 투자했던 목적을 뒤엎는 힘이 생겨났다. 저명한 전문가들이 지배하게 된 현대의 제도적 도구는 이 역설적인 반생산성을 주로 생산하게 되었다. 이 반생산성은 체계적으로 시민 전체를 무력하게 만든다. 애초부터 자동차를 중심으로 건설된 도시는 보행에 부적합하므로, 자동차를 마냥 늘린다고 사람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든 조건을 극복할 수 없다. 인간의 자율적인 행동은 상품이 늘고 치료가 과다해지며 마비되었다. 이 만족감의 상실은 어쩌다 이 사회와 맞지않아 생긴 현상이 아니다. 애초에 상품을 만들어 바꾸려 했던 그런 결과는 사용가치를 생산할 수 없는 무력감이 생긴 데서 비롯한 것이다. 자동차, 의사, 학교, 관리자는 소비자에게 참기 힘들 정도로 괴로운 것이 되었다. 상품을 통해 가치를 얻는 이는 서비스 제공자뿐이다.

 

  후기 산업사회가 인간을 불구로 만드는 거대한 서비스 전달 체제로 합쳐지고 있는데도, 왜 저항은 일어나지 않는가? 그 이유는 체제가 환상을 만들어내는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이 운영하는 제도는 마치 강력한 의례처럼 제도의 관리자들이 약속하는 것에 믿음을 갖게 만든다. 학교는 교사한테 배우는 것이 '더 좋은 것'이며 의무교육 덕에 더 많은 가난한 아이들이 글을 읽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 변호사는 세금을 덜 내는 도움 뿐만 아니라, 법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신념을 심어준다. 현대의 주요 제도에서 갈수록 더 비중을 차지하는 기능은 다음 세 환상을 만들고 유지하며, 인간을 전문가가 구원해야 하는 고객으로 바꾼다. 

 

포화와 마비

  인간을 노예로 만드는 첫 번째 환상은 인간은 소비자로 태어났고, 어떤 목표를 세우든 상품과 재화를 구매해야 원하는 걸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이 환상을 갖는 것은 경제에서 사용가치가 기여하는 비중을 알지 못하도록 배우기 때문이다. 자연이 인류에게 지속해서 끼친 공헌과 개인이 시장 밖에서 만드는 사용가치를 측정하는 나라는 없다. 그러나 인간이 생산하는 사용가치가 제한 없이 무한정 거래될 때 모든 경제 체제는 즉시 붕괴한다. 예를 들어 집에서 누리는 모든 것에 돈을 지불해야 한다면? 잠자리를 할 때마다 대가를 줘야 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사람이 팔 수 없는 일을 하고, 그런 물건을 만드는 것은 공기처럼 측정할 수는 없지만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소중한 것이다. 

 

사회 모든 영역에서 개인이 생산하는 가치와 표준적으로 생산되는 가치가 혼동되고 있다. 전문가의 지휘 아래 사용가치가 해체되고 쓸모없어지다가 마침내 그 고유한 본성마저 없어지고 말았다. 

 

필수품이나 상품이 쓸모 있으려면 혼동해선 안 될 다음의 두 경계를 넘어선 안된다. 첫째, 어떤 시스템에서든지 필요가 만들어지는 속도가 상품이 생산되는 속도를 앞지르면 소비자 행렬은 조만간 그 시스템의 작동을 멈춘다. 둘째, 상품에 대한 의존이 곧 필요가 되어버리면 지금까지 그와 비슷한 물건을 자율적으로 생산하던 방식은 마비된다. 상품이 어느 정도를 넘으면 포화 아니면 마비가 될 수밖에 없다. 포화와 마비는 결과는 서로 다르지만, 양쪽 모두 상품 생산량이 급증하기 때문에 생긴다. 포화는 상품이 제대로 기능하는지를 측정하는 것으로, 맨해튼에 그 많은 자동차가 있는데 왜 대중교통이 쓸모없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포화는 사람들이 어째서 제대로 탈 수 도 없는 자동차를 구매하고 보험에 들려고 그렇게 열심히 일하는지 자동차에 의존하며 두 발로 걷기조차 어렵게 되었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기업과 전문가가 만든 상품에 어느 정도를 넘어 지나치게 의존하다 보면 자기 안에 있던 잠재력이 파괴된다. 상품은 어느 한계 안에서만 인간이 만들고 직접 해왔던 것을 대신할 수 있다. 오직 이 범위 안에서 교환가치가 사용가치를 만족스럽게 대신할 수 있다. 이 한계선을 지나 상품 생산이 증가하면 소비자에게 필요를 끼워 넣은 전문가에게만 이익이 되고 소비자는 조금 더 부자가 된 것 같지만 마음은 늘 현혹되고 충동적으로 된다.

 

시장의존이 반생산성으로 이어지는 근본적인 이유는 상품의 근원적 독점과 인간의 필요 사이에 형성된 관계에서 찾아야 한다. 근원적 독점은 일반적으로 쓰는 독점의 의미를 넘어선다. 상업적 독점은 한 회사의 위스키나 자동차만 사도록 시장을 독점한다. 산업 부문의 카르텔은 자유를 훨씬 더 규제한다. 예를 들어 자동차 엔진을 전부 내연기관만 쓰도록 대중교통 체계를 독점할 수 있다. 그러나 상업적 독점에서는 위스키 대신 럼주로, 카르텔에서는 자동차 대신 자전거를 구매하여 독점 구조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근원적 독점'은 이와 다른 점을 드러내는 용어이다. 사람들이 참여하거나, 참여하고 싶어하는 의미 있는 활동을 기업의 상품과 전문가의 서비스가 대체해버린 것이다. 이 독점은 전문가가 만드는 것에 유리하도록 인간의 자율적 행동을 마비시킨다. 근원적 독점에서는 태양광 에너지, 풍력 발전으로 바퀴를 굴려도 초고속 교통은 유지된다. 교육받는 시간이 길어질 수록 스스로 답을 찾고 탐구하려는 시간과 능력은 줄어든다. 모든 분야에서 어느 지점을 지나 상품이 생산되면 인간 행동에 적합한 환경의 질은 떨어진다. '반생산성'은 상품이 사용가치를 대체하면서, 상품이 원래 사람에게 제공하기로 했던 만족 대신 그 반대인 부정 가치를 만들어 인간을 무력하게 하는 모든 상황을 지칭한다.

 

산업적 도구와 자율적 도구

  인간이 도구를 능숙하게 사용하여 자신의 필요를 만들지 못할 때 더 이상 인간으로서 인식될 수 없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 도구는 거의 사용자의 만족을 위한 노동집약적인 것이었고, 주로 집안에서 일하는데 쓰였다. 인류는 오랫동안 교환이 목적이 아닌 사용가치를 얻기위해 노동을 했다. 그런데 현대의 기술 진보는 줄곧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도구를 발전시키는 쪽으로 적용되었다. 팔 팔리는 상품을 생산하는 도구를 만드는 쪽으로 발전해온 것이다. 인간의 욕구와 소비는 수십 배가 증가했지만, 도구를 다루며 얻는 만족감은 드물다. 인간은 자신이 몸을 갖고 태어난 이유인 삶을 살기를 멈추었다. 

 

  도구가 시장 지향적인 제도를 위해 쓰이다 보면 공생의 조건을 아무런 위험 없이 파괴할 수 있다는 환상은 '삶의 활기'까지 소멸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그 과정에서 기술적 진보를, 보다 전문적인 지배를 허가하는 상품 생산 기술의 한 종류로 여기게 되기 때문이다. 이 환상은 목적을 좀 더 효율적으로 달성하는 도구에 대해 복잡하고 다루기 어려운 게 당연하다는 생각을 퍼뜨린다. 현대의 도구는 고도로 훈련된 전문적인 운영자가 있고 그 사람에게만 안심하고 맡길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긴다. 하지만 사실은 정반대이다. 그리고 정반대가 되어야 한다. 기술이 다양해지고 세분화될수록, 사용자가 복잡하게 생각할 일은 줄게 마련이다.고객쪽에서 기술자에게 특별한 신임을 줄 필요가 적어지는 것이다. 사회적 관점에서 앞으로는 좀 더 많은 사람이 능력과 효율성을 발휘하는 도구가 생겨날 때를 '기술 진보'라 불러야 한다. 특히 사용자를 좀 더 자율적으로 생산하는 데 도구가 사용될 때 '기술 진보'라 불러야 한다. 

 

  진보를 옹호하는 이들은 마찬가지로 공학은 무엇보다 산업 효율성을 높이는 데 기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기술 개발과 연구는 천문학적 예산이 들어간다. 단, 그 연구로 관련 전문가의 힘이 더 커지거나, 연구 결과가 군사적 용도로 쓰이게 된다. 그런 경우만 빼면 기술 연구의 결과는 오로지 산업 도구를 만드는데로만 응용되어, 그렇잖아도 거대한 기계를 더 복잡하고 다루기 어렵게 만든다. 이렇게 과학자나 공학자에게 치우쳐 있기 때문에 주류 흐름은 더 강화된다. 즉 자율적 행동을 해야 할 필요는 배제되고 상품을 구매할 필요는 커진다. 자율적 도구는 전문가의 감독이 아예 필요 없거나 최소로 하여 개인이 사용가치를 만드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게 한다. 이런 자율적 도구를 지금은 양 극단의 사람이 이용한다. 자전거를 주로 이용하는 두 부류는 아시아의 돈 없는 노동자이거나 미국과 유럽의 부유한 학생 또는 교수들이다. 

 

자유와 권리

 사람을 무능하게 만드는 환상은 성장에 한계를 긋기 위해서도 전문가에게 기대야 한다는 것이다. 언제든 명령에 따라 필요를 갖도록 사회화된 인구 전체가 지금까지 해온 일이 필요 없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최적의 생산을 위해 분산화를 중앙에서 계획하는 일은 70년대 말에 가장 선망 받는 직업이 됐다. 그러나 아직도 인식되지 않는 점은, 전문가가 선포하는 한계를 통해 구원될 수 있다는 이 새로운 환상이 자유와 권리를 혼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율적 생산과 타율적 생산이 상승효과를 내려면 자유와 권리가 사회적으로 균형을 이뤄야 한다. 자유는 사용가치를 생산하도록 사람을 보호하고, 권리는 상품에 접근할 기회를 보장한다. 상품이 사용가치의 가능성을 소멸시키고 인간을 빈곤하게 만드는 부를 생산할 수 있는 것처럼 전문가가 정의하는 권리는 자유를 소멸시키고 인간이 권리에 짓눌려 숨이 막히는 독재체제를 세울 수 있다.

 

자유와 권리를 혼동하는 모습은 전문가가 건강을 대하는 태도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건강에는 두 영역이 있다. 자유와 권리의 영역이다. 건강은 사람이 자신의 몸 상태와 자기 몸에 직접 영향을 끼치는 주변 환경을 스스로 조절하는 자율의 영역이다. 다시 말해 건강은 얼마나 자유롭게 사느냐와 같은 말이다. 따라서 보건 정책에 관여하는 사람은 자유로서의 건강을 공평하게 분배해야 한다. 하지만 전문가가 관리하는 건강은 어느 단계를 넘어서면 아무리 공정하게 분배하더라도 자유로서의 건강은 질식된다. 이렇게 근본적인 의미에서 건강은 자유를 얼마나 지켜내느냐의 문제이다.

 

시민의 자유는 내가 하고 싶다고 해서 다른 사람을 강요하지 않는 것이다. 동시에 자유를 보장해야 하는 국가는 권리가 없으면 자유를 누릴 수 없으므로 구성원 모두가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동등한 권리를 법으로 보장해야 한다. 권리는 평등에 의미와 현실성을 부여하고, 자유는 해방에 대한 가능성과 그림을 보여준다. 이 세번째 환상의 정확한 본질은 사회적으로 권리 추구를 지원하면 자동으로 자유가 보장된다는 믿음을 갖게 하는 것이다. 실제로 전문가가 권리를 정의할 권한을 갖게 되면서 시민의 자유는 사라져버렸다.

 

 

4. 쓸모 있는 실업을 할 권리

  지금은 전문적으로 보증되어 필요가 생겨나는 대로 이내 권리로 전환된다. 매번 권리를 법으로 제정하기 위해 전문가들이 정치적 압력을 행사할 때마다 새로운 상품과 새로운 직업이 생겨난다. 새로운 상품이 나오면 그전까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던 행위는 하찮은 것이 되어 버린다. 새로운 직업으로 그동안 어딘가에 고용되지 않고도 해오던 일은 불법이 된다. 어떤 것이 좋은 것이고 어떤 것이 옳은 것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판단하는 전문가의 권력은 '보통' 사람이 자신의 판단으로 살아가려는 소망과 의지,  능력을 빼앗는다.

 

현재 미국 법학 대학원에 다니는 학생이 모두 졸업하면 변호사 숫자는 기존보다 50퍼센트 더 증가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법률 서비스가 의료 서비스를 보완하고, 법률보험은 현재의 의료보험처럼 필수품이 될 것이다. 시민이 변호사를 찾을 권리가 법적으로 제도화되면, 동네 술집에서 다툼이 생겼을 때 누군가 나서서 말린다면 교양 없고 반사회적인 짓을 하는 꼴이 된다. 집에서 아이 낳는 행위, 디트로이트에서는 전기 기술자의 배선공사를 거친 주택에 입주할 권리가 모든 시민에게 법으로 보장되자, 누구든 마은대로 자기 집의 벽에 콘센트를 설치하는 일이 불법이 되었다. 직장 밖에서 일하거나 전문가의 지시 없이 의미 있는 일을 할 자유는 하나씩 사라지고 있다. 아마도 지금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특권은 직장에 다니지 않고도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자유일 것이다. 이런 자유는 대다수 보통 사람에겐 점점 더 불가능한 일이 되고 있다. 

 

  소비자가 보살핌과 상품에 대한 권리를 요구할수록 그 권리는 기업과 전문가의 권리가 된다. 그들이 만든 상품으로 고용되지 않고도 일을 할 수 있는 환경을 하나씩 지워버린다. 그리하여 비고용 상태에서도 시간과 권한을 자신과 이웃에게 의미 있게 쓰도록 공정하게 분배하라는 투쟁은 어쩔 수 없이 무력화되었다. 그런 행위는 고용수준과 국민총생산을 떨어뜨린다. 노동은 더이상 노동자가 느낄 수 있는 가치의 창조가 아니라, 주로 사회적 관계인 직업을 의미한다. 무직은 이웃에게 의미 있는 일을 하기 위한 자유라기보다는 슬픈 게으름이 되었다.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키우며 동네일에 관여하는 활동적인 여성은 '노동'하는 여성과 차별된다. 이 '노동'하는 여성이 하는 일이 사회에 쓸모가 없거나 해를 끼치는지는 고려되지 않는다. 조직의 위계 질서 밖에서 전문가의 측정 기준을 벗어나는 인간의 행동은 상품 의존 사회를 위협한다. 전문가의 효율적인 측정에서 벗어나 만들어진 사용가치는 상품에 대한 필요만 줄이는게 아니라 그 상품을 만들고 상품 구매에 필요한 월급을 주는 일자리를 줄이기 때문이다. 

 

시장 의존 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만족을 얻기 위해 들이는 노력이나 그 노력에서 흘러나오는 기쁨이 아니라 노동력을 자본과 결합시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일을 하여 어든 만족이 아니라 직장과 배경, 직책등의 지위가 되었다. 선진국에서는 이제 자율적이면서 의미 있는 일을 하기 위한 조건으로 실업을 선택한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생산에 필요한 도구는 직장에서만 얻도록 사회의 기반시설이 고도로 조직되었다. 그리고 사용가치의 창출을 억누르는 상품 생산의 근원적 독점은 국가가 장악하면서 더 엄격해졌다. 상품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사회에서, 실업자는 빈곤층으로 떨어지거나 사회의 부양을 받으며 살아야 한다. 

 

국가가 부유해질수록 일자리를 분배하고 노동시장의 크기를 위협할지 모를 쓸모있는 실업을 막는 게 시급해진다. 물론 정반대의 길도 있다. 절망하던 노동자들이 대중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 조직되어, 상품 생산으로 이어지는 활동을 벗어나 쓸모를 발휘하는 사회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다시 강조하자면, 우리 사회의 대안은 평범한 사람들이 전문가가 끼워넣는 필요에 부딪힐 때마다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부정하는 능력에 달려있다.

 

5. 적들의 반격

  오늘날 전문가 권력은 분명히 위협받고 있다. 그들이 만들어 내는 반생산성이 명백한 증거이다. 사람들은 전문가의 패권 때문에 자신들이 정치에 참여할 권리를 박탈당했다는 걸 알기 시작했다. 한편에서 이 시대를 넘어서도록 우리를 인도할 지 모를 법률 제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기존의 자격증 심사 위원회를 소비자 대표로 구성된 기구고 대체하라는 요구, 자격증 없이도 일을 할 수 있는권리에 대한 요구, 영리 목적 의사를 고객이 평가하도록 지원하는 공공기관을 설립하라는 요구 등이 터져나오고 있다. 이런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전문 기관들은 다음 세 가지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자신을 채찍질하는 창녀 

 

로마클럽(1968년 이탈리아 사업가 아우렐리오 페체이의 제창으로 지구의 유한성이라는 문제의식을 가진 유럽의 경영자, 과학자, 교육자 등이 로마에 모여 회의를 가진 데서 붙여진 명칭이다. 《성장의 한계》라는 보고서를 발표, 제로성장의 실현을 주장하여 주목을 받았다.)이 대표적이다. 자동차 회사들은 전문가들에게 연구 비용을 지급하고, 산업 시스템을 강화하기 위해 생산을 중단해야 할 산업 분야가 무엇인지 조사하게 했다. 변호사와 치과의사들은 이전과 달리 자신들의 전문성과 도덕성, 그리고 수임료를 스스로 평가하겠다고 약속한다. 

 

전문가들의 자체 감시는 사람 잡는 외과의사든 뻔뻔한 사기꾼이든 형편없이 무능한 전문가를 가려주므로 원칙적으로는 유용하다. 하지만 우리가 누차 보았듯이 전문가의 자기 규제는 오로지 무능한 전문가를 보호하고 대중이 서비스에 더 의존하도록 만든다. 이 '비판적 의가', '급진적 변호사', '공공 건축가'들은 자신들보다 변화에 둔감한 동료들부터 고객을 가로채는 것이다. 과거의 직업인들은 가난한 이드의 교육, 윤리, 그리고 직업훈련을 책임지겠다고 약속하면서 자신들의 서비스에 대한 필요를 팔고 다녔다. 그들의 방식은 전문가 영역이 확장되는 것을 막기는 하지만, 그 영역 안에서 사람들의 의존은 더 심해진다. 전문가에게는 대중을 위해 봉사할 권리가 있다는 개념은 매우 최근에 생긴 것이다. 그렇게 집단의 권리를 확고히 하고 합법화하는 전문가의 몸부림은 사회에 가장 억압적인 위협 요소가 되었다.

 

장사꾼들의 동맹

  두 번째 대응 전략은 인간 문제의 다면적 특성에 더욱 충실하기 위해 다양한 전문가를 조직하고 조율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실제 무엇을 의미하는지 캐나다의 사례를 보면 알 수 있다. 캐나다 보건장관은 의사들에게 많은 돈을 투자한다고 사망률과 질병률이 낮아지는 것이 아니라고 국민을 설득했다. 대부분의 사망 원인인 교통사고, 의사들이 손쓸 수 없는 심장병과 폐암, 자살 살인등 이 모든 것이 의사의 영역을 벗어난 현상이다. 보건 장관은 정책을 전면 개편하고 기존 의료계에 대한 지원을 줄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환자들을 보호하고 회복시키고 위로하는 임무를, 온갖 새로운 전문가가 맞게 되었다. 이제부터는 건축가들도 캐나다인의 건강을 향상할 임무가 자신들에게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미국의 의약 처방도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미국에서는 수년간 종합 질병 처벙에 막대한 예산을 썼지만 뚜렷한 효력이 나타나지 않았다. 1950년 직장인은 1년에 2주치 급여를 병원비로 지출했다. 1976년에는 7주까지 올라갔다. 이렇게 많은 노력과 비용을 들였지만 지난 백년간 미국 성인 남성의 평균 수명은 눈에 띌만큼 연장되지 않았다. 

  질병 치료가 향상되는 곳은 사람들이 건강한 방식으로 생활하고 특히 건강한 식사를 하는 곳이다. 미약하지만 예방접봉이나 항생제 등은 특정한 질병을 약화시키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그런 처방이 효력이 있다고 해서 전문가의 서비스를 받는 게 당연해지는 것은 아니다. 

 

고객을 전문가로 만들라

  세 번째 전략은 최근의 유행한 진보의 흐름이기도 하다. 60년대 개발 숭배자들은 고객이 전문가가 되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열변을 토했다. 1965년 이후 미국에서만 환자 스스로 병을 고치는 방법에 관한 책이 2,700여 종이나 쏟아졌다. 

  새로운 전문가가 출현했다. 그들의 목표는 고객을 모두 전문가로 만드는 것이다. 지난 가을 맥시코로 몰려갔던 미국의 빌딩 전문가들이 이 새로운 운동의 사례일 것이다. 2년 전 보스턴의 건축 교수가 맥시코로 휴가를 오게 되었다. 공항 주변에는 지난 20년 동안 신도시가 생겨났다. 건축가였던 내 친구는 그 교수를 마중나갔고 공항 주변의 농부들이 얼마나 창의적인지 소개해 주었다. 농부들은 가지고 있는 것만을 활용해 어떤 건축학 교제에도 나오지 않는 독특한 구조로 저마다 다른 집을 수천여 채 지었다. 교수와 동료들은 이 곳의 사진을 수백 통 찍어가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분석했다.. 그리고 새로이 등장한 미국의 공동체 건축 전문가들은 그해 말 멕시코로 몰려가 주민들에게 문제와 필요, 해결을 가르치느라 분주해졌다.

 

6. 현대의 자급

  전문가가 공인해주는 필요와 결핍, 가난의 반대는 현대의 자급 자립이다. 지금은 '자급 경제'라는 말을 시장 의존 사회의 언저리에서 공동체가 생존해가는 것을 통칭할 때 쓰게 되었다. 이 공동체의 사람들은 전통적 도구를 이용해 필요한 것을 만들고, 과거로 부터 이어져왔지만 입증되지 않은 사회 조직 안에서 살아간다. 나는 현대의 자급에 대하여 말함으로써 이 용어를 다시 살려내자고 제안하는 바이다. 이 사회에서는 정치적 수단을 통해 전문적 필요 생산자들에 의해 측정되지도 않고 그들이 측정할 수도 없는 사용가치를 만드는 데 도구와 기술이 주로 쓰이도록 사회 기반시설을 보호한다. 그리하여 시장 의존을 줄이는 데 성공한 사회이다. 나는 다른 책에서 그런 도구에 대해 '공생의 도구'라는 말을 제안 했다. 나는 정치적 행동으로 일구어낸 '함께하는 절제'로 그런 기술을 공평하고 자유롭게 사용할 때, 현대화된 가난을 뒤집을 수 있다고 말했다. 

 

  자율적 도구로 현대 사회를 재편하는 것은 사회 정의를 세우는 저항에서 강조점을 이동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새로운 종류의 분배를 들고 참여적 정의를 일궈야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산업사회에서 개인은 극단적인 전문화로 훈련된다. 그들은 자기 욕구를 표현하지도 못하고 만족시키지도 못하는 불능 상태가 되어버린다. 그들은 처방을 내리는 관리자와 상품에 의존한다. 총칭하여 이 상품을 분배 받을 권리는 윤리와 정치, 법률 분야로까지 퍼진다. 귀속된 필요에 대한 권리가 강조되면 스스로 배우거나 치유하고 이동할 자유는 위축되다가 끝내는 부서지기 쉬운 사치품이 되어버린다. 이후에 도래할 함께 사는 사회에서는 그 반대가 실현될 것이다. 개인이 자유를 행사하도록 권리를 보장하는 게 급진 기술에 기반한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관심사가 될 것이며, 과학과 기술은 사용가치를 좀 더 효율적으로 만드는 데 사용될 것이다.

 

  그렇게 자유가 공정하게 분배되어도 천연자원과 도구, 공공시설에 대한 권리가 공평하게 분배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다. 식량과 원료, 공기, 삶의 공간은 전문가가 만드는 필요와 상관없이 분배되지 않으면 망치나 일자리보다도 공정하게 분배될 수 없다. 모두에게 평등하게 최대치가 배분되어야 한다. 효율적인 도구가 공평하게 보장되는 사회는 그 자유의 바탕이 되는 상품과 자원이 모두에게 공평하게 분배되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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