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필요한 건 위로와 분노가 아니라 용기다 !
이 용기는 내가 자유로워 지기 위한 힘이다. 체념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며 운명에 맞서겠다는 정도의 힘이다. 이 힘이 아킬레스처럼 남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의 강력할 필요는 없다. '힘에 맞선 힘'이 바로 용기다. 용기가 있다면 우리는 운명에 맞서 싸울 수 있다. 그런데 이 용기는 절대로 혼자서 낼 수 없다. 용기는 어디서 나올까 ? 동료다. 동료로 부터 내 삶이 응원받을때 비로소 우리는 살아갈 용기를 낼 수 있다.
우리가 알던 삶은 끝났다고 작가는 이야기 한다. 우리 삶이 끝났음을 '설명'이나 '분석'의 방법은 부족하다고 이야기한다. 사회학적 언어가 아니라 삶에 밀착된 다른언어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우리 마음을 지배하는 격노, 냉소, 불안을 '이해'하기 위해서... 일상의 답답함을 벗어던보려고 벼르고 별러 여행을 떠나지만 막상 다녀오면 '피곤함'만 남는 이 기막힌 역설을 깨닫기 위해서 다른 언어를 요구한다. 이책에서는 "체험과 경험", "기대와 희망", "힘과 용기", "공감과 동감", "장소와 공간" 언어로 설명한다. 일상에서는 미미한 차이로 쓰이지만 이 차이가 삶의 의미와 무의미, 기쁨과 슬픔이 갈라지는 지점을 반영한다고 한다.
책의 구성은 1부 우리가 알던 삶은 끝났다. 2부 세상은 우리 편이 아니다. 3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계속된다로 되어 있다. 책에서 언급한 언어 중심으로 정리하여 보았다.
체험과 경험
경험은 카이로스의 시간이다. 카이로스란 배가 고파서 밥을 먹고, 밥을 먹어서 충만함을 느끼는 시간이다. 갑자기 여행이 너무 가고 싶어 배낭하나 들고 떠난 여행이 바로 카이로스의 시간이다. 경험은 만남이다. 우연한 만남에 열려 있고, 우연한 만남에 의해 결정된 시간인 것이다. 만남에 의해 시간이 정지되고 다시 재 정의 된다. 카이로스의 핵심은 미래를 향한 유예가 아니라 지금 이자리에서의 충만함이다. 경험의 시간은 시간의 긴박함이 아니라 충실함과 기쁨의 시간이다. 사유와 교훈의 시간이다. 경험의 시간인 지금 여기가 목표하는 것은 인간의 해방이다. 자유를 실천함으로써 인간은 억압과 예속으로부터 해방되는 시간인 것이다.
체험은 크로노스에 대한 보상이다. 크로노스란 스케줄이다. 배가 고파서 밥을 먹는 것이 아니라 밥때가 되었기 때문에 밥을 먹는다. 휴가가 닥쳤기 때문에 여행을 간다. 시간이란 곧 스켈줄인 시간이 크로노스다. 체험 여행에서 전수받고자 하는것은 경험이 아니라 정보다. 무한히 반복되는 지겨움에서 탈출하기 위해 우리는 미친듯이 논다. 폭탄주가 왜 만들어졌는가 가장 짧은 시간안에 가장 효과적으로 취하고 망가지기 위해서다. 시간이 돈인 사람들에게 폭탄주돌리기는 가장 최적화된 놀이다. 이처럼 크로노스는 초고속 열차처럼 앞으로 질주하는 시간과 다람쥐 쳇바퀴처럼 돌고 도는 시간의 절묘한 조합이다.
우리 삶에서 경험은 죽었다. 경험은 온통 체험으로 바뀌었다 체험은 경험을 소비로 전락시켰다. 경험은 희박하기 때문에 언제 나를 찾아 올지 모른는 소중한 경험의 방문을 깨어 기다려야 하지만 그대신 경험의 자리를 몽땅 체험으로 채워 넣는다. 나에게 삶의 지혜를 전수해주는 어른이 죽어 버렸고, 나는 내 후대에 내 삶을 경험으로 전수할 수 있는 언어를 잃어 버렸다. 어른이 될 기회가 영원희 봉쇄된 인생, 이것은 경험이 죽어버린 삶이다.(116p)
지혜의 자리를 대신 차지한 건 ‘정보’다. 지혜는 오래 묵을수록 더 가치가 있지보는 새로운 것일때만 의미가 있다. 그렇기에 정보가 살아 있기 위해서는 ‘실시간’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경험이 죽고 스펙터클이 된 체험만 소비하는 사회이다. 체험이 지배하는 삶이 공허 해진 이유가 바로 이때문이다. 매순간 순간 사라져가는 시간에 매몰되느라 순간은 짜릿할지 몰라도 그시간이 지나고 나면 남는 것이 하나도 없는 셈이다. (118p)
기대화 희망
기대가 작동할때 인간은 내일은 오늘보다 즐거움이 더 커지리라는 기대를 하며 오늘의 즐거움을 미루는 삶의 태도를 가지게 된다. 이것을 유예의 문화라고 부른다. 자본주의의 아비투스가 발생한다. 아비투스란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공유한 일종의 습관 같은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이 아비투스를 공유함으로써 동시대인이 된다.
유예의 문화에 기반을 둔 자본주의의 아비투스는 ‘가까운 미래’를 중심에 둔 삶의 태도다 과거에 연연하는 태도가 아니다 그렇다고 현재의 쾌락에 매몰된 태도도 아니다. 또한 언제 도래 할지 모르는 먼미래의 종말이나 구원에 목을 빼는 태도도 아니다. 오늘을 충실히 산다면 그 결과로서 주어질 곧 다가올 미래의 열매를 바라보고 살아가는 삶의 태도다. 바로 기대가 근대 자본주의 아비투스의 핵심을 이룬다. 기대를 하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을 견디고 미래를 바라 볼수 있다. 기대가 무너진 자리를 대신한 것은 통제할 수 없는 분도 격노다.
희망이란 불가능한 것을 상상함으로써 현재의 비루한 삶을 견디는 힘이다. 많은 부모들이 휴대폰에 자기 자식 이름 대신에 나의 희망이라고 적어 놓는다. 자식이 희망인 이유는 아이가 미래에 반드시 성공하리라고 믿기 때문이 아니다. 자식이 잘되면 좋겠지만 그러지 못하더라도 자식은 현재 이 비루한 나의 삶을 견디고 감수하면서 이어가게 해주는 존재 이기때문이다. 이부모들의 마음을 가장 잘 나타내는 말이 바로 언젠가는 이다.
신자유주의자가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그 어느 때보다 평등하다"고 비판한 적이 있다. 인간의 역사에서 불평등이 없었던 적은 없다. 그러나 희망이란 불가능한 것을 상상함으로써 가능하다. 인간의 상상력은 불평등르 그저 그대로 받아 들이고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다. 인간은 불가능한 평등을 상상함으로써 현실과 거리를 둘 수 있고 불평등한 현실을 바꿀수 있다. 이처럼 불가능한것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것의 한계를 확장하는 매우 ‘쓸모 있는” 역할을 한다.
우리는 희망을 잃고 오로지 기대하며 살아간다. 기대하는 마음은 언제나 조급함을 낳는다. 기대에는 내가 이렇게까지 열심히 하는데 왜 이루어지지 않을까 하는 조급한 마음이 깔려있다. 기대하는 마음에는 언제나 '실망하고 분노할 준비'가 단단히 자리한다. 기대란 시한부 종말론이다. 예언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실망하고 분노하고 절규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기대다.
힘과 용기
프랑스이 철학자 자끄 랑시에르는 ‘역사의 이름들’에서 어떤 사안을 안다는 것은 더이상 그것에 대해 사유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다 알고 있다고 냉소할 수록 우리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정치가 썩고 부패했고 꼼수라는 사실을 다 알기 때문에 더이상 우리는 정치가 무엇이고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는 생각하지 않게 된다.
증언은 이 앎에 대한 도전이다. 그러나 증언은 그리 녹록한 작업이 아니다. 무엇보다 증언을 하려면 스스로를 우리 사회의 권력이 작동하는 공간으로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권력에 의해 자신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를 말할 수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권력에 대해 증언한다는 것은 권력에 맞서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그 권력에 내가 얼마나 철저하게 무력할 수밖에 없었는가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것이 더 강력한 진실에 대한 용기다. 진실에 대한 용기란 자신의 비겁함으로 보이는 것을 사회에 대한 폭로로 돌리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시대와 사회에 대한 증언이 된다. 고백이 사람을 폭로하는 것이라면 증언은 사람을 옹호하고 사회를 폭로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 공정한 게임 따위는 없다. 성장하는 삶 따위는 불가능하다. 김진숙은 판타지로 사회를 가리는 멘토가 아니라. 김진숙은 사회를 폭로하는 시대의 증언자다. 그리고 김진숙과 같은 증언자가 있는 한 우리는 시대와의 대면을 외면할 수 없다. 고통을 외면할 수도 없고 망각할 수도 없다는 것 사회는 불가능하다는것 증언자는 이를 온몸으로 폭로한다. (185)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자본주의가 아니라는 사실을 온몸으로 폭로, 최철원에게 야구방망이 찜질을 당한 유씨다. 더많은 직장인들은 이 사건을 보고 자신들의 얼굴을, 매 맞은 몸을, 이 50대 노동자에게서 발견하기 때문에 분노했다고 말한다. 한 친구의 말처럼 직장 다니는 사람들의 영원한 술자리 안주거리야말로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 얼마나 비굴했는가를, 상사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자존심을 어디까지 내팽개쳤는지를 토로하는 것이 아닌가 (187)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돈으로 환산하는 체제다. 질적으로 아무리 다른 대상도 ‘돈’을 통해서 매개되고 교환된다. 그렇기 때문에 돈의 실체는 ‘폭력’이라는 말이 나온다. 모든 질적인 차이를 무시하고 양적으로 환산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모든 것을 돈으로 환산하는 자본주의지만 단 하나는 절대 돈으로 환산될 수 없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이것’이 돈으로 환산되는순간 자본주의의 가정이 무너진다. 바로 인격이다. 그리고 인격을 총체적으로 보증하는 인신이 이간의 몸이다. 자본주의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의지에 따른 사적인 계약관계라는 가상 위에 성립한 체제이기 때문이다. (188)
근대 자본주의 사회는 바로 자유를 약속했다. 마르크스는 자유의 핵심에는 굶어죽을 자유가 있다고 비판했지만 근대 사회는 인생을 각자의 손에 맡기는 잔인한 방식으로 땅과 신분제로부터 모두 해방시켜 각자의 삶이라는 허허벌판에 추방했다. 이 허허벌판에서 인간은 노동을 해야 하는 운명에 처해졌다. 노동은 곧 인간이 땅과 인생의 주인이 되기 위한 전제조건이었다. 아담이 맨몸으로 에덴에서 쫓겨났지만 자기 몸만틈은 이제 신의 것이 아닌 자신의 것이 되었듯이 농노들이 땅에서 쫓겨나 노동자가 되었을때 자기 것이라고 챙긴 유일한 재산이 바로 자신의 몸이었다. 이몸이 노동의 원천이 된다. 따라서 사람이 계약을 맺고 팔 수 있는 것은 노동이라는 ‘행위 능력’과 ‘시간’이지 결코 자기 자신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 노동 계약은 인신 계약이다. 최철원 매값 사건은 우리에게 사람의 인격과 신체에 값을 매기소 사고팔고 때로는 마음대로 처분하는 전근대적인 신분제도, 즉 인신구속 이라는 야만이야 말로 자본주의의 동력이라고 알려준다. 이런점에서 유씨는 한 철딱서니 없는 야만적 또라이의 희생자가 아니다. 그의 몸은 우리시대의 야만이 아닌, 야만의 우리시대에 대한 증언이다. (191)
누구나 이게 사는 건가 라는 질문을 던지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질문이 만들어 놓은 한계에 정면으로 부딪치기보다는 한계 내에서 굴욕적으로 사는 삶을 택한다. 우리 모두는 자유인으로 태어났다고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우리의 일상에서 우리는 우리가 노예임을 발견한다. (254)
말해야 할 바를 말하게 하고 말하고 싶은 바를 말하게 하며, 말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바를 말하게 하는 자유로움을 실천하는 단 한명의 스승이 필요하다. 스승의 역할은 말을 듣는 자가 어떤 순간에 타자의 담론을 더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는 상황에 놓이도록 만드는 것이다.(255)
공감과 동감
공감이야 말로 동시대인의 가장 중요한 정신적 능력이다. 자신의 아픔과 상처를 드러내는 언어가 같을때 우리는 이 친구에게 내가 공감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자신의 슬픔이 타인에게 나누어지지 못하고 피상적으로 공감된다고 느꼈을때 인간은 자기 연민에 빠지고 우을증을 겪게된다.
공부를 하는 목적은 동시대성을 깨닫고 당대에 나와 인식을 같이 하는 사람과 동료를 맺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파울로 프레이리는 <페다고지>에서 자기 내부에서 자유롭고자 하는 열망을 발견했을때, 피억압자는 이 열망을 동로들과도 공유해야만 현실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고 말한다. 공동의 성찰과 행동을 통해 현실에 관한 앎에 도달할때 우리는 영구적인 재 창조자가 된다. 그리고 공부는 사이비 참여가 아니라 헌신적인 개입이 된다. 공부하는 것이 동시대성을 사유하고 옆 자리 친구를 동료로 초대하고 더불어 용기를 내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동료를 만나야 할 공간에서 경쟁자를 만난다. 용기를 내야 할 순간에 비겁해야 살아 남을 수 있다. 내 삶을 같이 아파하고 공감하는 동료를 잃어버린 우리 삶은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것이 되어간다.
카톨릭 청년 단체의 페다고지가 보고 판단하고 행동하라 였다. 이 페다고지가 전혀 먹히지 않게 되었다. 현장의 비참함과 세상의 사악함을 맞다뜨린 사람들의 마음을 '분노'가 아니라 '공포'가 지배하기 때문이다. 분노하고 행동할때는 여럿이 함께하는 행동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을때다. 그런데 내 생각보다 적이 너무 거대할때 내 주변에서 나의 분노를 공유할 사람이 없을때 사람은 '분노'하기 보다는 '공포'를 느낀다. 그리고 혼자라도 살겠다는 방법을 찾기 마련이다. 동료가 있을때 마음은 공포가 아니라 분노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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