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렌 컬레의 이야기 중에 우물가의 일화가 있다. 두 살때 눈과 귀가 먼 헬렌켈러를 가르치던 설리번 선생은 한 편지에서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적었다.

우리는 펌프로 갔다. 기거서 나는 펌프질을 하며 헬렌에게 컵을 입구의 아래쪽에 대고 있도록 했다. 찬물을 길어 컵을 채웠을때 나는 헬렌이 내민 손바닥에 w-a-t-e-r(물)이라는 글자를 썼다. 손바닥 위로 떨어져 흐르는 물의 차가운 느낌, 그것과 연관된 '물'이라는 단어는 헬렌을 놀라움으로 갑자기 멈추어 서게 했던 것 같다. 아이는 컵을 내려 놓고는 마치 뿌리박은 듯 우뚝 서 있었다. 아이는 이 물이라는 단어를 여러번 반복하여 썼다. 그러고는 웅크리고 앉아 땅을 만지작거리며 그 이름이 무언지를 물었다. 그리고 펌프와 울타리에 대해서도 물었다. 그 다음에는 자기 몸을 돌이켜서 내 이름을 물었다. 나는 아이에게 내 이름을 써주었다. 

이일화가 주용한 것은 이미 설리번이 헬렌컬러에게 'w-a-t-e-r(물)" 이라는 단어를 설명해주었다는 데 있다. 설리번은 그전에 물 담긴 컵을 가져와 ' 이것이 컵이며 그안에 든것이 물"이라고 설명해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러던 헬렌켈러가 우물가에서 최초로 지적 반응을 보인 것이다. 헬렌 켈러는 왜 '우물'에서 최초로 반응을 보였을까 ? 거기에는 압도적인 양의 차이가 있었다. 우물가에서 많은 양의 물이 헬렌 켈러에게 마구 튀었을때, 물에 대한 감촉은 극대화 되었다. 그것은 조그만 컴데 담긴 물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때 설리번이 '이것이 물이다!'라고 알려 주었고, 헬렌 켈러는 이축축하고 차가운 감촉을 갖는 것을 일컫는 무언가가 있음을 비로서 감지했다. 그후, 헬렌켈러는 연쇄적으로 지적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것을 일컫는 것이 있다면 다른 것을 일컫는 것도 있음을 직감한 것이다.  이것은 헬렌 켈러가 처음으로 지적 설계로 발걸음을 내딛는 매우 감종적인 장면이다.  설리번은 그전부터 늘 헬렌 컬러 곁에 있었다. 헬렌 컬러 역시 늘 자신의 주위에 누군가 맴돈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지적으로 '인식'되지 않았다. 헬렌컬러는 그너갸 누구인지, 왜 늘 옆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 헬렌 켈러에게 설리번은 자신을 방해하고 귀찮게 하는 존재일 뿐이었다. 그런 설리번이 처음으로 지적으로 인식된것이다. 

이이야기는 지식과 현실의 관계를 잘 보여준다. 우물가에 헬렌켈러의 손을 흠뻑 전신 액체가 '물'이라 불린다는 것은 '지식'이었다. 그 지식이 체감되기 위해서는 현실과의 연관성이 풍부해야 했다. 우리의 지식도 마찬가지다. 많은 사람들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칸드, 사르트를 '안다'. 그러나 그들의 철학이 실생활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모른다' 그것은 안개에 휩싸인 것처럼 사람들의 기억속을 떠돌 뿐이다. 그것은 '생기없는 관념'이다. 자신이 아는 지식이 '생기없는 지식'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항상 그것이 현실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 자문해야 한다. (인문내공 -박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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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포스토 월리스는 2005년 케니언대학의 졸업 강연 내용을 옮겨 놓은 책이다. 내용이 짧다. 도서관에서 발견하고 바로 읽은 책이다. 쉬운 문장으로 짧게 썼지만 타성에 젖어 사는 우리들를 돌아 보게 하는 내용이다.   

너무나 당연한 현실이고 근본적인, 우리 주위 환히 보이는 곳에 있지만 그래서 오히려 잘 보이지 않는 숨어 있는 현실, 매일 끊임없이 그 존재를 스스로 깨우쳐주지 않으면 발견하지 못하는 그런 현실, 그런 현실을 알고 살아가는 각성에 관한 이야기입니다.(139p)

생각하는 법을 배운다는 말이 진정으로 뜻하는 바는 어떻게 생각하는가와 무엇을 생각하는가에 대해서 선택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이 말은 의식이 확실하고 정신을 바짝차린, 각 성된 상태가 되어 자신이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하는 대상을 선택하며, 자신의 체험을 통해 의미를 구성할때 그방법을 자기가 선택한다는 뜻입니다.(60p)

우리에게 허락된 것은 무엇을 믿고 숭배하느냐에 대한 선태권일 뿐입니다.(109p) 

진실로 중요한 자유는 집중하고 자각하고 있는 상태, 자제심과 노력, 그리고 타인에 대하여 짐심으로 걱정하고 그들을 위해 희생을 감수하는 능력을 수반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매일매일 몇번이고 반복적으로 사소하고 하찮은 대단치 않은 방법으로 말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자유입니다.생각하는 법을 배운다는 것은 바로 이것입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에게 남는 것이라고는 무의식 상태, 디폴트 세팅, 그리고 극심한 생존경쟁 밖에 없습니다. - 전에는 자기 것이었던 무한한 무엇인가를 잃어버린것은 아닌가 하는 끊이지 않는 고통밖에 남지 않는 것이지요(13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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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의 지식여행 나의 4번째, 하이데거(제프 콜린스)이다. 하이데거의 철학과 저작을 하룻밤에 습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이라는 책을 써서 세계적인 반향을 일으켰으며 존재의 철학자로 알려졌다. 이 책을 읽기전 내가 알 고 있는 서양의 존재의 관련 사항은 플라톤의 이데아론, 아리스텔레스의 형상/질료 였다. 감각에 의해 지각되는 것은 실재가 아니라 이성에 의하여 지각되는 보편자(개념)만이 실재로 보았던 것이다. 하이데거 책이라는 개체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책이라는 보편자의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생각이었다. 이는 변하지 않는 것만이 앎의 대상이며, 변하는 것은 진리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공리를 반영하는 것이다. 즉 현실세계의 실재는 우리가 아는 순간에 이미 변해버리기 때문에 영원히 알수 없다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향후에 이는 보편적인 것은 '오직 이름 뿐'이며 "인식주체의 경험이 지식의 근거라'라는 근대철학의 경험주의 반대에 부딪힌다. 이런 새각을 가지고 이 책을 읽게 되었다. 하이데거의 존재 의미, 개념 차이점을 이해하고 자 하였다. 책 및 참고자료에서 주요 관련 내용을 발췌 정리하였다.           

하이데거는 모든 경험주의, 실증주의적 철학들과 유사한 종류의 과학적 사고에 대해 깊이 회의했습니다. 존재를 사유하고 말하는 것은 신비와 시적언어에 친숙해지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했다. 존재자와 존재 구분했다. 존재자는 정의하거나 규정할 수 없는 특징을 갖고 있는 것들, 존재자는 존재하는 것이다. 세계속의 여러 사물들뿐만아니라 사건, 관계나 과정을 포함한다. 과학과 상식의 대상으로 연구할 수 있다. 존재는 이런 사물들의 존재(이런 사물들이 있다는 사실), 그 자체를 의미한다. 존재자적 기술은 어떤 존재자에 대한 기술을 의미하며 존재론적 기술은 어떤 존재자의 존재에 관련된 기술이며 하이데거는 존재 그자체와 존재론적 진술을 자신의 관심분야로 생각했습니다. 서구 과학과 철학은 "개별적인 실체,  특징, 그것 사이의 관계에 대한 지식 등"을 축적하려고 노력 하였다. 하지만 존재는 감각을 통한 이해, 특징짓기, 처분 가능성, 상품화, 측정 등이 불가능한다. 존재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다루거나 생각하는 방식들에 대해 강하가 저항한다고 한다. 존재는 존재자의 의미에 대한 물음이라고 할 수 있다. 존재자의 원인과 근거에 대한 물음이 에네르게이아(목적을 실현한 상태, 아리스토텔레스)라면  존재자의 원인을 왜 에네르게이아에서 찾았는가라는 물음을 묻는것 같다. 

존재자는 실체와 속성의 두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실체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으로 확인이 가능하고 다른 실체와 구별된다. 이것 저것으로 대답할 수 잇다. 실체 이외의 다른 범주는 이런 실체의 속성들이다. 속성은 실체가 가지고 있는 일종의 성질 혹은 특징이다. 존재는 실체도 속성도 아니다. 실체의 개념은 존재의 기초로 유지 되었다. 실체는 여러 다른(물리적, 수학적, 논리적, 심리적, 형이상학적인) 양태의 실재를 설명하지 못한다. 

데카르트는 주체와 대상의 구분을 제안했다. 생각하는 주체는 의식을 갖고 있는 합리적인 정신과 동일시되었고 추론의 과정은 주체를 넘어선 외부 세계의 대상에 대한 확실한 지식을 제공했다. 철학은 이제 정신과 이 정신의 추론양식, 그리고 정신과 대상(우리가 추론하는 정신 밖의 사물, 주체와 대상)의 관계를 설명해야 했다. 후설은 경험주의와 실증주의에 기초한 여러 과학에 명확히 반대 입장을 갖고 의식 연구-실험으로 얻어진, 심리학의 개별적인 사실에는 없는 인간 정신의 보편적 진리를 제안했다.

현상학은 현실세계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다. 현상학은 현상에 대한 학문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무엇이 됐는 자기를 나타내는 모든 것을 그 자체에서 그리고 다른 것으로부터가 아니라 그 자체로부터 보게 해주는 방법을 일컫는다. 현상학의 유일한 과제는 이 세계의 의미(서람들이 어던 감각에 의하여 이 세계가 정말로 존재한다고 받아들이는가)를 명료하는 것이다. 현실세계는 존재한다. 그러나 현실 세계가 존재한다는 감각을 생성하기 위해서는 초월적 자아가 그렇게 구성할 필요가 있다. 자아는 존재 의미의 기초이며 존재의미가 기본적으로 설립할 수 있는 자리이다. 초월적 자아가 절대적 존재이다. 의식은  그 자체의 대상을 드러낸다(비록 현실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어떻게 의식 내의 사물을 인식하는가는  존재의 의미룰 생각하는데 결정적이다. 궁극적인 존재는 순수의식으로서 자아이다. 

일상의 생활세계가 거기에 항상 있다면 그것은 일차적입니다. 그세계가 누군가를 위해 거기에 먼저 존해해야 한다. 그다음에야 추상적인 계산이나 초월적인 자아에 대한 이론화 등이 가능하다.  

현존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인간의 삶으로서 존재하는 존재자이다. 저마다 우리 자신의 존재자 그것을 우리는 "나는 존재한다"라는 근본적인 단오속에서 확인 할 수있다. 현존재는 거기에 있음이며, 다양한 존재 방식을 나타낸다. 현존재는 그때마다 그 자신의 것이고 독자의 것으로 구체화 되어 있다. 나자신은 대개의 경우 평균적으로 보면 나의 현재가 아니라 타인으로 존재한다. 현존재는 타인들의 요구에 종속이 되어 존재한다. 현존재는 나로서 존재하는 동시에 타인과 더불어 있음으로 존재한다.  공공의 세계에서 대중 교통수단을 사용하고, 정보 매체(신문)을 이용하면서 타인은 모두 같은 타인인 셈이다. 이러한 서로 함께 있음은 고유한 현존재를 완전히 타인들의 존재 양식속으로 해체해 버린다.

일상성 속에서 현존재는 타인들 속에 용해되고 타인들이 된다. 그리고 그 타인들 역시도 용해되어 버린다. 타인들은 이제 현존재의 일부이다. 이러한 눈에 안 띔과 확정할 수 없음 속에서 '그들'은 본래적인 독재를 펼친다. 우리는 남들이 즐기는 것처럼 즐기며 좋아 한다. 우리는 남들이 보고 판단하는 것처럼 읽고 보며 문학과 예술에 대해 판단한다. 남들이 격분하는 것에는 우리도 격분한다. 그들은 우리모두 인데 이 '그들'이 일상성의 존재 양식을 지정해 주고 있다. 

시간이란 자연계의 시간이고 천구의 운동과 자연의 변화를 통해 읽을 수 있다.(아리스토텔레스), 신에 의해 주어지고 질서 지워진 시간은 유한하고 종말론적입니다. 결국 시간은 끝이 있죠(그리스도교), 시간은 합리적인 관찰자의 정신에 의해 이해된 것입니다.(데카르트). 과거, 현재, 미래를 포함한 지속으로 표현하다. 지속은 흐름속에 존재하는 경험을 포함하고 있다. (베그로송) 지속은 측정을 거부한다. 지속에는 고정된 규칙이나 기준이 없다. 지속속에서 시간 속 경험은 과거의 경험이 되고 따라서 질적으로 다른 것이 된다. 경험이 기억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미래의 경험, 하직 존재 않음 은 질적으로 다른것이 되어 존재 한다. 그것이 상상 또는 투시 이다

하이데거의  시간의식은 보유, 주의, 선견을 통해 미래, 과거, 현재가 연결된 전체로 존재한다. 선적인 시간 구조를 전복시킨다. 보유, 주의, 선견을 음악 선율에 들어남으로 설명할 수 있다. 보유: 더이상 울리지 않는 음들을 기억속에 유지해야 한다. 주의 : 소리가 날때마다, 그음의 첫인상에 주의하는 것이 분명하다. 선견:청자는 예상듣기 를 통해 다음에 어떤 음이 올지에 대해서 예측해야 한다. 이세가지가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 핵심이다.

현존재는 시간속에 존재한다. 현존재의 지평은 시간이다. 현존재는 이미 세계속에 존재하고 과거로부터 받은 것과 교섭한다.  현재를 미래의 가능성으로 기획 투사함으로써 현존재는 항상 그 자신을 앞선다. 현존재의 존재는 기획투사로서의 아직 아님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 이순간 거기에 전체로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현존재는 손안에 있음과 그들의 세계속의 특정한 지금 속에서 생겨나 배려와 대결하면서 현재의 세계에 사로잡혀있다. 

본래적 존재는 죽음을 향한 현존재를 포함, 분열된 현존재의 존재를 통일시키는 것이다. 그 본래적 존재를 실천적인 세계에 빠져들지 않고 그들의 세계에 좌우되지 않고 인식해야 한다. 그러므로 본래성은 일상세계와 그들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비본래적인 존재는 현 존재가 세계속에서 편암함이 주는 유혹을 받아 들이는 것이다. 거기서 현존재는 자신의 안전을 확보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가능성들은 문을 닫고 현존재의 전체성은 봉쇄된다. 

존재자는 현존재에 의해 열어 밝혀진다. 이런저런 사물을 열어 밝히는 것은 그것들을 특수한 방식으로 드러내고 마주치고 경험하고 또는 알게되는 것이다. 현존재는 존재자에 대해 자신을 열어 밝히는 존재이다 현존재는 그 자체가 열어 밝힘이고 일종의 비어 있는 터이며 존재자는 그곳에서 열어 밝혀진다. 진리는 존재자가 시간적으로 열어 밝혀진 모습이다. 존재자는 언제나 스스로의 죽음 가능성 때문에 마음을 졸이며 살아가는 사람에게만 드러나다. 그로써 존재와 시간의 관계는 드러남으로서의 진리를 통해 파악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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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 지식영행 사르트르 편이다. 사르트르를 선택한 이유는 특별히 없었다. 과거 경험속에 실존주의 철학이 유행을 했고 많이 들어 보아서 선택한 것 같다. 카뮈 편에서 간단히 사르트르에 대해서 언급이 되었다. 같은 시대를 살았으며 자주 비교의 대상으로 오른는 것 같다. 카뮈와 마찬가지로 소설을 통해 철학을 이야기 한 작가이다.  

이책을 통해 사르트르에 대해 개략으로 이해 하였다. 사르트를 이야기하면 실존주의를 빼놓고 이야기 할 수 없을 것이다. 이책에서 실존주의는 경험을 바라보는 하나의 방식이며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가능한 모든 결론을 도출하려는 시도라고 이야기 한다. 실존이란 지금 여기에 있는 자신이 중요하다 의미이다. 본질은 이미 정해진 상황이다. 실존은 본질에 우선한다. 인간은 무용한 정력이다. 그러나 인간은 자유롭도록 운영지어졌다. 우리는 자유롭다는 것을 알고, 자유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종종 자유를 박탈당했을때 안도감을 느낀다. 진정으로 자유롭고 싶다면 자유로울때 느껴지는 불안 극복을 이야기 한다.  

 사르트의 소설 "구토"의 소개이다. 구토의 주인공인 로강탱은 존재하는 모든 것은 아무 이유 없이 태어나서, 연약함 속에 존재를 이어가다가 죽는 거야라고 생각한다. 구토는 토하고 싶은 욕구라는 측면에서 과도함의 산물이다. 우주속에 너무나 많은 것이 존재 한다. 이러한 과도함에 구토를 느낀다. 주변을 둘러싼 옷갖 사물들 뿐아니라 그 자신안에서도 너무 많은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들은 똑같은 필연성의 결여와 우연성의 그리고 주변 사물들에게 느끼는 근본적인 부조리를 지니며 그때문에 구토를 느끼며 삶을 포기 하려 한다. 

그러나 로강탱은 음악에서 안도를 느낀다. 구토를 일으키는 과잉과 부조리함이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한곡의 음악은 우연적이고 우발적인 물리적 존재의 세계를 초월하여 존재한다.음악은 현실적 사물들의 일상 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든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 다는 의미에서 존재를 뛰어 넘는다.

"존재와 무"에서 인간은 자유로우며 자유를 알고 주장하고 생각하고 예측하고 선택하는 것과 같은 인간 고유의 활동을 가능케해 주는 경험의 특징이라고 표현한다. 우리 모두 현재 있는 그대로의 우리 자신을 완전히 의식하는 동시에 절대적으로 현재 있는 그대로의 우리 자신이 되고 싶어 한다. 우리는 늘 우리 자신에 대해 갖는 의식 때문에 온전하게 우리 자신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그저 우리 자신의 연기를 하는 것 뿐이며, 이는 문제에 대처하는 부정직하거나 비본래적 방식이다. 우리는 결단을 내리고,사물에 의미를 부여하고,세상에 대한 책임을 지닌 주체로 해석해야 함을 주장한다. "자유의 길"에서 우리는 늘 스스로를 인식하고 사실이 아닌 것을 상상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의 상황에서 한 발 물러나서 상황을 평가하고 무엇을 해야할 지 결정할 자유를 가진다고 이야기 한다.

 사르트르의 정치적 문건에서 가장 자주 등하는 주장 중 하나는 모든 구성원이 똑같이 똑같은 수준의 자유를 누릴 수 없는 한 어떤 사회도 자유롭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노동계급의 자유가 중산계급의 자유보다 훨씬제한되어 있으므로 인간의 자유를 증진하고자 하는 작가의 최우선 과제는 사회주의를 건설하려고 노력한다고 이야기 한다. 노동계급은 오직 공산당을 통해서만 계급으로서 자기 인식을 달성한다. 노동계급이 당의 지침을 따르기를 거부한다면 변증법적 이성 비판에서 부르는 반복성이라는 상태에 빠지게 된다. 사르트르는 공산주의에 공감하지만 당원은 아니었다. 실존주의야 말로 마르크스 주의가 건조하고 추상적인 이론으로 흐르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사르트르를 이야기할때 "비버"라 블리는 "시몬 드 보브아르"를 빼놓고 이야가 할 수 없다.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사실상 평생에 반려자가 된다. 사랑은 구조속에서 주어진 것으로 가정되는 둘이 활홀한 하나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희생적인 것이라는 관념에 대한 거부. 사랑은 동일자를 타자의 제단에 올려 놓는 것이 결코 아니다...오히려 사랑은 둘이 있다는 후 사건적인 조건 아래 이루어지는 세계의 경험 또는 상활의 경험들이다.(바디우) 둘의 경험으로서의 사랑은 "자유'라고 하는 인간의 근본적 숙명과 함께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사르트르와 시몬드 보브아르는 사랑에 있어서 자유를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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