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이성이란 무엇인가 ? 특이성이란 특이점들의 분포라고 들뢰즈는 정의 합니다. 특이점이란 미분이론에서 온 수학적 개념인데 미분 불가능한 점을 뜻합니다. 하지만 특이성은 효소 특이성과 같은 생화학적 개념이기도 하고, 특이점 또한 어떤 힘의 장에서 힘이 방사되는 점처럼 물리학적 개념이기도 합니다. 개성을 표현하는 독특성이나 고유성 같은 개념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흔한데 들뢰즈는 특이성을 전개체적 비인격적인 것이라고 말할뿐아니라 고유성과도 대비 합니다. 특이성은 또한 특수성이 아닙니다. 특이성은 모든 전칭적인 보편성, 일반성과 대비되지만 반복 가능성으로 인해 아주 다른 종류의 보편성을 함축하기도 합니다. 이를 이해하려면 자연학적 개념으로서의 특이성으로 부터 시작하는 것이 필요 합니다.

먼저 수학에서 특이점이란 미분 불가능한 점인데 가령 삼각형의 꼭지점 같은 첨점이나 끈어진 곡선의 첨점이 바로 그런 점입니다. 미분 가능하다는 말은 한점에서 곡선이 연속이고 좌 미분계수와 우 미분 계수가 같다를 뜻합니다. 쉽게 말하면 미분계수가 하나만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가령 양쪽 각이 45도인 이등변 삼각형 밑변을 x축에 놓으면 상부의 첨점에서 우미분 계수는 1인데 좌 미분 계수는 -1입니다. 미분계수가 둘인거죠. 단지 둘만은 아닙니다. 알다시피 미분계수란 곡선상 한점에서의 접선의 기울기 이기에 그 첨점을 지나는 접선은 무한히 많아서 1과 -1사이의 모든 값이 미분 계수가 됩니다. 이처럼 하나가 아닌경우 수학에서는 미분 계수가 없다고 합니다. 없어서 없는 것이 아니라 너무 많아서 없다고 합니다.

물리학에서 특이점은 힘이 방사되는 점입니다. 가령 자석과 쇳가루를 이용하는 실험에서 흔히 보듯이 자석이 있는 점이 그 자기장의 특이점 입니다. 자석들 수나 위치등 분포를 바꾸면 자기장이 크게 달라 집니다. 자기장의 특이성이 달라 지는 겁니다. 중력장에서는 지구나 태양처럼 중력을 갖는 물질들이 특이점 입니다. 기상학에선 저기압나 고기압의 중심이 바로 특이점 입니다. 이 특이점의 분포가 그날의 기상의 특이성을 결정한다고 합니다. 일기예보는 이 기상적 특이성에 통해 이루어 집니다. 한랭전선, 대륙풍, 집중호우, 마른 장마 같은 개념이 그겁니다. 이는 모두 특이점들의 분포 양상으로 인해 반복되는 기상의 특이성을 표현하는 개념입니다. 원자의 구조도 특이점인 입자들의 분포로 서술됩니다.

특이점은 어떤 힘이 방사되는 지점입니다. 물론 힘에는 당기는 힘이 있으면, 밀치는 힘이 있고 관성적 힘이 있으면 벗어나는 힘도 있습니다. 여러 양상의 힘이 있습니다. 입자들은 전자기력, 강한 핵력, 약한 핵력, 중력 등 상이한 유형의 힘을 방사합니다. 같은 전자도 이웃하는 입자들에 따라 당기기도 하고 밀치기도 합니다. 이런 힘들에 따라 특이점들은 결합하기도 하고 분해 되기도 합니다. 결합이나 분해에 의해 특이점들은 하나의 특이성에서 다른 특이성으로 이행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특이성은 특이점들의 이웃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특이성을 갖는 어떤 사물은 다른 특이적 사물과 결합되면 다음 층위에서 다시 특위성을 구성합니다. 즉 그 특이성이 특이점이 됩니다. 가령 시토신이라는 핵산은 이웃관계에 따라 다른 아미노산이 됩니다. 즉 세린이 되기도 하고 프롤린이 되기도 하고 알라닌이 되기도 합니다. 이 아미노산들은 다른 아미노산과 결합하여 단백질을 만듭니다. 이웃하는 아미노산이 달라지면 다른 단백질이 됩니다. 세린은 규정된 특이성을 갖는 아미노산이지만 단백질의 특이성을 형성할때에는 하나의 특이점으로 참여하는 것입니다.

 

특이점은 특이성을 구성하지만 역으로 자신이 구성하는 특이성에 의해 다른 본성을 갖게 됩니다. 산소 원자는 산소 분자에 참여하여 불을 내는 성질의 특이성을 구성하기도 하지만 물분자에 참여 하여 불을 끄는 성질의 특이성을 구성하기도 합니다. 주의해야 할 것은 특이성이란 불을 내고 불을 끄는 이런 개개의 성질을 지칭하는 게 아니라 이런 성질들이 발생하는 모태라는 점입니다. 어떤 효소의 촉매적 성질이 아니라 촉매 반응을 가능하게 해주는 모태가 효소 특이성 입니다. 그렇다고 특이성이 특이점을 일방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집단이나 복합체의 특이성은 특이점이 하나라도 추가되거나 빠지면 다른 것이 됩니다. 같은 산소 원자로 이루어진 복합체이지만 산소 분자와 오존 분자는 아주 다른 특이성을 갖습니다. 사람들의 관계에서도 특이점과 특이성의 이런 관계는 동일합니다. 하나의 동일한 개인이 어떤 축구팀의 특이점이 되기도 하고 가족이나 록밴드의 그것이 되기도 합니다. 심지어 어떤 축구팀에 들어가면 수비수들을 빠르게 불러들이는 특이점이 되지만 다른 축구팀에 들어가면 답답하고 소심한 플레이를 만드는 특이점이 되기도 합니다. 아시다시피 이는 팀을 구성하는 다른 특이점들과의 관계로 인해 야기 되는 것입니다. 즉 내가 한집단에서 어떤 특이점이 되는 가는 내가 참여한 집단의 특이성에 의해 규정됩니다. 물론 내가 빠저버리면 크게 달라지는 게 그 특이성이니 그 특이성은 내가 만드는 것임은 분명합니다. 내가 빠져도 집단의 특이성이 변하지 않는다면 나는 특이점이 아니라 보통점입니다. 참여는 해도 특이성을 구성하지는 못하는 겁니다. 삼각형에서는 세개의 꼭지점 말곤 모두 보통점입니다. 덧 붙이면 극대점, 극소점, 변곡점 같은 점들은 미분 가능한 점이지만 곡선의 특징을 두드러지게 보여 준다는 점에서 특징점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특이적 집단은 전체지만 특이점에 의해 본성이 만들어 지고 달라지는 전체이니 전체라하기에 불충분합니다. 전체성 없는 전체, 일자 없는 다양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심이나 전체가 통합력이나 지배력을 갖는 유기체적 집단이 확고한 안정성을 갖는다면 상이한 특이점의 힘들이 살아있는 이런 집단은 준 안전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전자에서는 전체를 통합하는 중심만이 특이점입니다. 반면에 후자에게는 상이한 힘을 갖는 복수의 특이점이 있는 겁니다.

전자가 내부적 안정성이 강하다면 후자는 외부적 가변성이 크다고 하겠습니다. 특이점이 드나들때 마다 달라지니까요.  이는 특이점들이 분리되면서 복합체 내 집단이 해체되기 쉽다는 뜻을 함축합니다. 특이점은 인력과 척력을 모두 갖기에 때에 따라서는 다른 특이점을 끌어들이는 업 트랙터가 되고 또 어떤 때에는 서로 멀어지고 밀쳐내는 반발점이 되기도 하는 겁니다. 록 밴드들이 쉽게 해체되는것이나 멤버 구성원 하나가 달라지면 밴드 색체 전체가 달라지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늑대의 무리도 그렇다고 합니다. 이런 이유로 인해 들뢰즈와 가타리가 밴드나 무리라는 집단 형태를 유기체와 대비하여 긍정합니다.

특이점과 특이성의 관계는 기묘한 면이 있습니다. 특이점이 특이성을 구성하지만 구성된 특이성이 각 특이점의 본성을 규정하는 방식으로만 하니까요. 이는 특이점이 미규정성을 갖는다는 점에 기인합니다. 특이성을 갖는 복합체도 미규정을 갖기에 다시 특이점이 될 수 있습니다. 단순한 특이점도 특이성을 갖는 복합체도 규정성과 더불어 규정가능성들로 충만한 미규정성을 갖고 있는 겁니다. 들뢰즈가 말하는 잠재성 개념이 미규정성, 규정가능성, 규정성을 모두 갖고 있음을 안다면 특이성 개념이 잠재성 개념과 대응함을 알 수 있을 겁니다. 또한 들뢰즈는 의미란 사건이고 특이성이라고 정의 합니다.

차이 철학의 다른 개념이 그렇듯이 특이성 개념 또한 기존의 익숙한 개념들과 대결 하고 있습니다. 가장 먼저 타격을 가하는 것은 전층적인 보편성과 그것의 짝인 특수성 개념입니다. 전통적인 보편성 개념은 모든 것의 공통된 어떤 특질을 그 내용으로 합니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 모든 인간은 사고 능력이 있다. 모든 인간은 눈이 둘이다 등등.. 보편성 개념이 착목하는 것은 이처럼 모든 인간에게 있는 이런 특징입니다 . 인간의 동일성을 정의해주는 게 이런 겁니다. 그러나 이런 것 만큼 뻔하고 평범한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니체는 보편성 만큼 별 볼일 없는게 없다고 한적이 있습니다. 특수성은 보편과 개별의 통일로 정의되는데 보편자가 개별자를 관통하는 특수한 양상을 뜻합니다. 개별자를 보편자가 포섭하는 방법 입니다.

반면 특이성은 누구에게나 있는 이 평범한 보편성이 아니라 흔히 보기 힘든 면을 보려 합니다. 알다시피 특이하다는 말은 평범하다 통상적이다라는 말과 대비됩니다. 이런거야 말로 정령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란 말입니다. 심지어 당연해 보이는 보편성 조차 남다른 특이성으로 보려 할때 주목할 이유가 발생합니다. 모든 사물은 땅에 떨어진다는 얘기는 보편성을 갖지만 아무리 힘 주어 말해도 주목하는 이는 없을 겁니다. 그러나 이를 중력이라는 특이한 힘으로 개념화 했을때 사태는 아주 달라집니다.

뉴턴의 업적이라고 부르는 중력의 보편성입니다. 그 특이한 힘의 매력에 이끌려 여기에도 저기에도 사용해보려는 게 보편성으로 나아가게 한 거 아닐까요. 실제로 중력 개념의 발전 과정이 그랬습니다. 애초에 자석의 특이한 힘에 매혹된 마술사들의 비밀스러운 전승이 있었습니다. 1269년 자석을 자르거나 구형으로 깍는 실험을 했던 패트롤 페르그누스도 그 중 한명입니다. 이런 관심은 지구가 거대한 자석이라는 주장으로 이어졌죠. 케플러가 이런 자석의 철학에 영향을 크게 받았음은 잘 알려진 사실 입니다. 갈릴레이는 이를 아주 싫어 햇습니다. 물론 뉴턴은 자기력은 열을 가하면 사라지기에 태양이 자기력을 가질까 의심했습니다. 그러나 직접 접촉 없이 당기는 별의 중력이란 발상은 자석의 특이한 힘에 대한 마술적 관심으로 부터 나온 것임은 분명합니다. 이와 달리 중력을 가속도와 연결 했을때 중력 개념은 다른 특이성의 장을 펼치게 됩니다.

사실 특이성 개념은 전칭적 보편성 개념을 비판하지만 다른 종류의 보편성 개념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자석의 특이성은 모든 돌의 평범한 보평성과 대비 됩니다 그렇지만 직접 접촉 없이 밀고 당기는 돌이라면 어떤 것이든 해당되는 것이기에 조건적 보편성을 갖습니다. 모든 시토신(사이토신)이 세린을 만들지는 않지만 양쪽에 우라실과 접속한 시토신이라면 어떤 것이든 세린을 만듭니다. 결국 핵심은 평범한 공통성을 모아서 전칭적 보편성을 구성하는 가 아니면 특이성을 통해 조건적 보편성을 구성하는 가의 차이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다음으로 들뢰즈는 특이성이란 비인칭적이고 전 개체적 임을 강조 합니다. 특이성은 개개인의 인격과 독립적일 뿐만 아니라 나라는 통합된 인칭적 주어와 무관하다는 점에서 비인칭 적입니다. 가령 나의 면역 특이성은 사실 내가 아니라 면역 세포에게 속합니다. 내 세포를 공격하는 자가면혁 질환이나 내게 필요한 음식에 반응하는 알레르기는 이를 잘보여 줍니다. 나란 주어 이하에 속하니 비 인칭적이고 나란 개체 이전에 속하니 전 개체적입니다. 스피노자 사유의 특이성은 단지 스피노자 개인에 속한 게 아닙니다. 그런 유형의 사고가 나타나면 언제나 우리는 스피노자적 이라고 부르는게 그걸 보여줍니다. 그래서 들뢰즈는 아이들은 스피노자 주의자라고, 스피노자를 읽지 않아도 스피노자주의가 될 수 있다고 한적이 있습니다.  반면 생각은 페미니즘적인데 손과 발은 가부장적인 사람도 있습니다. 상반되는 특이성이 한 개인의 인격안에 분열된채 공존하고 있는 겁니다. 따라서 특이성은 개체나 인격에 속하지 않습니다.

특이성이 대결하려는 또하나의 개념은 고유성입니다. 누군가에게만 고유하게 있는것 누군가 만이 갖고 있는 소유물 그게 고유성 입니다. 개인에게 고유한 것을 강조하려는 이들은 고유명사의 개별성을 강조하지만 인간에게 고유한 것을 강조하려는 이는 모든 인간이 갖는 인간만의 독특성을 강조합니다. 인간만의 독특성은 사실은 인간 모두가 갖는 보편성 가운데 일부를 자의적으로 선별한 겁니다. 눈이 둘이라는 동물은 맣으니 그건 빼고 생각하는 동물이나 언어를 사용하는 동물은 없는 것 같으니 그게 인간 고유의 본성이라고 하는 식입니다. 왜 그걸 선택하는 가 통념적으로 자명해 보이고 그래서 남들이 쉽게 동의해 주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이 갖는 성질은 사실 무한히 많습니다. 그러니 인간만의 고유성 처럼 자의적인 것도 없습니다. 무한히 많은 것중 하나일뿐이니까요 더 본질적인 문제는 이러한 고유한 본성이 실은 인간 아닌것에 대한 인간들의 나르시스적 편견을 보여준다는 점입니다. 생각 언어 노동 도구 놀이 등 인간의 고유성이라고 생각했던 것들 대부분을 다른 동물, 나아가 식물 또한 갖고 있으니까요.

다른 이에게 없는 개인적 차이를 뜻하기에 고유명사야 말로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습니다. 고유명사가 마치 차이 개념의 정수라도 되는 듯이 그러나 유행하는 옷을 입으며 개성을 추구한다 하지만 실은 남다를 것 없는 평범하고 정상적인 이들이 대부분 입니다. 고유 명사는 나만의 것이라는 착각속에 있는 평범성을 보여 줄 뿐입니다. 자신은 알지 못한채 남들과 공유하고 있는 즉자적 보편성에 다른 이름입니다. 게다가 고유명사는 인간말고는 안중에 없는 좁은 시야 안에 갇혀 있습니다. 고유 명사가 차이 철학의 관심대상이라고 생각하는 분이라면 ‘차이는 잡다가 아니다’라는 들뢰즈의 말을 상기하는 게 좋습니다. 평범한 모든 것은 개별적이든 누군가에게 고유하든 차이 철학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언제나 중요한 것은 특이한 것입니다. 개인에게 고유하지 않고 특정한 사람들에게 공통된 것이라 해도 특이성은 중요합니다. 고유명사 가운데 소멸의 시간속에 살아 남은 것은 모두 어떤 특이성 때문입니다. 플라톤, 스피노자, 막스 모두 사유의 특이성 때문에 지금까지 소멸하지 않은 고유명사 들입니다. 스파르타쿠스도 마리앙뚜아네트도 혹은 스탈린이나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도 잊혀지지 않는 특이성으로 인해 아마도 오랜 시간 지워지지 않을 이름입니다. 따라서 고유명사 역시 다시 정의 해야 합니다. 고유명사란 비인격적 특이성의 이름이다라고. 어떤 고유명사로 표현되는 특이성을 누군가가 보여준다면 그이름은 다시 불려 나옵니다. 그런점에서 특이성은 영원성을 갖습니다. 반복될때 마다 불려 나올테니까요. 그러나 같은 이름으로 불려 나온다 해도 불려 나올때마다 다른 양상으로 불려 나올 겁니다. 모든 반복이 차이의 반복이듯이 말입니다.

특이점이 힘을 방사하듯 특이성도 힘을 방사 합니다. 우리의 시선이나 마음을 잡아 끄는 어트렉터 입니다. 자신이 소유한 고유성을 자랑하고 그것의 권리를 주장하는 이들이 있지만 자신이 알지 못했던 특이성에 매혹되어 자기를 떠나 휘말려 드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휘말려 특이성의 장에 끌려들어갈때 우리는 다시 특이성의 표현이 되어 다른 이들을 끌어 당기게 됩니다. 특이성 그것은바로 매혹과 휘말림의 힘이 작용하는 장의 이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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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이란 무엇인가 ? 들뢰즈 철학에서 사건은 아주 다른 두가지 맥락에서 사용됩니다. 하나는 삶이나 세계의 곡절과 결부된 사건의 개념이고, 다른 하나는 기호의 의미와 결부된 사건의 개념입니다. 들뢰즈가 명시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전자를 다시 두개의 개념으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한 개인의 삶에서 그 이전과 이후를 결코 동일할 수 없게 만드는 변곡점이 그것입니다. “그것은 나의 삶에서 하나의 사건이었다” 라고 하게 하는 계기가 그것입니다. 조에 부스케(Joe Bousquet)가 총상을 입은 사건, 에이 허브가 모비빅을 만난 사건 같은게 그것이죠. 들뢰즈가 직접 사용한 개념은 아니지만 실존적 사건이라고 명명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와 달리 아주 다른 두개의 세계로 분기되는 분기점으로서 사건이 다른 하나 입니다. 성경에서 아담이 사과를 딴 사건이 그렇습니다. 그것은 아담이 사과를 딴 세계와 따지 않은 세계가 분리되는 분기점 이지요. 주어진 세계와 공존 가능하지 않은 새로운 세계가 거기서 시작됩니다. 물론 이 역시 두개의 세계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사건 전후의 세계가 분리되는 것이란 점에서 실존적 사건과 유사합니다. 하지만 한개인의 삶이 아니라 세계가 달라지는 변곡점이라는 점에서는 그와 다릅니다. 아담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삶에도 변곡점이 되니까요. 이를 편의상 ‘세계 간 사건’이라고 해도 좋을 듯합니다.

세계란 ‘영혼 안으로 접혀진 주름’이라는 들뢰즈의 라이프니치식의 어법을 따라 이렇게 말해도 좋겠습니다. 실존적 사건이 하나의 영혼안에 새로운 세계가 출현하는 사건이라면, 세계간 사건은 기존의 영혼들 사이에서 새로운 세계가 탄생하는 사건입니다. 기존의 영혼들과 공존하지 않은 새로운 주름들을 접어너어 새로운 영혼들이 탄생하는 사건이라 해도 좋겠습니다. 이 두사건 사이에는 또하나의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세계간 사건은 개인이나 집단이 그 사건 인근에 있다면 좋든 싫든 그 효과에서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반면 실존적 사건은 그것의 존재를 긍정하는 가의 여부가 없었으면 좋았을 사고와 있어서 좋았던 사건을 구별해 줍니다. 들뢰즈가 인용하는 시인 조에 부스케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애초에 총상은 평생을 침대에 누워서 보낼 수 밖에 없게 한 불행한 사고 였지요. 그러나 그로 인해 그는 존재의 심층을 사유하는 탁월한 시인이 됩니다. 그 시인의 삶을 긍정할 수 있게 되자 그를 병상에 눕게 했던 그 사고는 긍정적 삶의 시점으로써 긍정하게 됩니다. 있어서 좋았던 긍정적 변곡점이 된 것입니다. 니체라면 이를 ‘과거에 대한 원한’과 대비하여 ‘과거의 구원’이라 했을 겁니다. 현행의 삶에 대한 긍정이 지나간 과거를 구원한 것입니다.

이들과 달리 특이성과 짝지어져 있는 사건의 개념이 있습니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이 사건 개념은 앞서와 같이 무언가를 크게 바꾸어 놓는 대단한 사건이 아니라 최소 크기의 작은 사건이고, 유래 없는 사건이 아니라 흔히 반복되는 일상적인 사건이란 점입니다. 거창하게 사용되는 사건이라는 말과 다른 결을 갖는 사건의 개념이 입니다. 이러한 사건 개념은 삶을 급습한 최대 크기의 사건인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사건 개념이나 존재의 공백 에서 발생하는 바디유의 유래 없는 사건 개념과 대비해도 좋을 겁니다. 미리 말해 두자면 들뢰즈는 사건을 생성으로서 정의하려 합니다. 생성이 매 순간 어디서나 발생하는 것이라면 생성으로서의 사건 또한 흔치 않은 것 뿐 아니라 일상적인 것을 담아 내야 합니다. 아니 일상적인 것마저 유별난 것, 특이한 것을 통해 정의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일상적인 사건조차 특이성을 통해 정의하려 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들뢰즈는 놀랍게도 이작은 사건 개념을 영원회귀의 윤리적 선택으로 밀고 갑니다.

의미의 논리에서 들뢰즈가 집중적으로 천착하는 것은 바로 이 작은 사건 개념입니다. 여기서 기호나 말의 의미란 사건이고 사건이란 특이성 즉 특이점이 되는 사실들의 계열화로 정의됩니다. 가령 날아가는 축구공을 보고 축구공이라고 한다면 맞는 말이지만 단순한 동어 반복에 불과 합니다. 역으로 축구공의 의미를 ‘저기 날아가는 저 사물’이라고 할 수도 있을 텐데. 이런게 재현적 관점에서 말하는 의미의 개념입니다. 하지만 날아가는 축구공을 아무리 집중해서 보고 그 의미를 새기고 또 새겨도 축구 경기를 보고 있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날아 가는 공만 보고 있는 겁니다. 날아가는 공의 의미를 전혀 모른체 말입니다.

날아가는 공의 의미를 알려면 그공과 접속된 이웃항을 보아야 합니다. 공의 앞뒤에 있는 선수 말입니다. 공을 찬 사람이 한국 선수였고 그 공을 받은 사람이 한국 선수였다면, 날아 가는 공의 의미는 패스 입니다. 그러나 그 공을 받은 사람이 독일 선수 였다면 즉 한국 선수, 공, 독일 선수로 계열화 되었디면, 그 공의 의미는 패스 미스가 됩니다. 만약 공 뒤에 이어진 것이 골대 였다면 공에 의미는 슛이 될 것이고, 골대의 안쪽 이었다면 공의 의미는 골인이 될 것입니다. 그 골대 앞에 장갑을 낀 한국 선수가 있다면 맞습니다. 자살 골 입니다.

이런 것이 의미로서의 사건 입니다. 축구 경기라면 매번의 발길질 마다 사건이 발생한다 해도 좋겠습니다. 그 사건을 알아보는 것이 바로 날아다니는 공의 의미를 아는 것입니다. 이 의미들의 차이를 알아볼 수 있을 때 우리는 공을 보는게 아니라 축구 경기를 보게 되는 것이지요 축구 경기를 하는 것도 마찬 가지 입니다. 축구를 한다 함은 그런 사건들을 연이어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축구경기란 패스, 슛, 골인 등 작은 사건들이 모여 만들어지는 또 다른 사건 입니다.

축구공이 물리적 실체라면 의미란 그것의 표면에 달라 붙는 이웃항에 따라 발생하는 사건입니다. 똑같은 물리적 실체인 공이 이웃하는 항에 따라 이렇게 다른 의미를 갖습니다. 사실들이 신체적인 것이라면, 사건은 신체적인 것이 아니라 신체의 표면에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건은 신체의 표면 효과라고 합니다. 즉 의미란 현상학자들의 말처럼 주체의 의도나, 지향성의 사물도 아니고, 실재론 자들의 말처럼 지칭 된 사물에 속한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사물의 계열화로 발생하는 표면 효과 입니다. 주관성과 실재성 사이에서 물질의 표면에서 발생하는 사건 입니다.

사건은 특이성에 의해 정의됩니다. 패스 , 패스 미스, 슛, 골인, 자살골은 모두 다른 특이성들을 표시하는 말입니다. 이 특이성은 공과 선수, 골대 등이 계열화 되는 양상에 의해 정의됩니다. 공과 선수, 골대는 일종의 특이점에 해당됩니다. 의미란 사건이고 사건이란 특이성이다라는 말은 정확히 이런 뜻 입니다.

그런데 좀더 정확히 쓰려면 이렇게 써야 합니다. “이념적 사건이란 무엇인가 ? 그것은 특이성이다.” 즉 들뢰즈가 말하는 사건이란 이념적 사건이란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번엔 이념적 사건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물어야 합니다. 이 개념이야 말로 들뢰즈 사건 개념의 내부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여기서 사건에 추가된 이념이란 개념은 차아와 반복에서 제시된 이념의 개념입니다. 이 이념의 개념은 이미 서술한 바있듯이 모든 것을 통합하는 통상적인 거대한 이념 개념과 반대로 물음과 문제로서의 이념, 최소 크기의 미분적인 이념, 잠재성을 으로서의 이념입니다. 이 때 잠재성은 미 규정성, 규정 가능성, 완결된 규정을 가지며 외부적 조건과 결합하며 현행화 됩니다.

의미의 논리에서는 이러한 이념 개념을 사건 개념과 결합하여 이념적 사건 개념을 발전 시킵니다. 또 하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러한 이념 개념이 이전 철학에서는 일반성이나 보편성이 수행하던 통일성의 기능을 수행한다는 사실 입니다. 다시 축구 이야기로 돌아 갑시다. 패스나, 패스 미스 등의 사건이 특이성으로 정의되는 방식은 이웃 관계를 뜻하는 미분적 관계에 의해서 였지요. 그런데 이렇게 정의되는 패스나 패스 미스는 단지 특정 상황에서 이례적인 사건이 아니라 축구 경기이면 어디서나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사건입니다. 물론 상황마다 다르게 현행화 되겠지만 일종의 보편성을 가지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때 마다 다른 축구 경기를 만들어 가는 미시적 씨앗입니다. 축구 경기의 원자 들이지요. 그런 점에서 특이성이란 물리적으로 구체화된 특정 시합과 다른 층위에 속합니다. 현생성이 아니라 잠재성에 속하지요. 패스, 패스 미스, 슛, 골인 등 공을 둘러싼 특이성들은 축구경기를 구성하는 최저 크기의 의미 단위입니다. 언어학의 음운론에서 음소, 의미론에서 형태소와 비교되는 의미의 최소 분절 단위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완결된 규정을 갖는 최소 의미 단위이지요. 이러한 의미 단위가 결합되어 상호 관계를 맺으면서 좀 더 큰 스케일의 사건이 만들어 집니다. 축구 경기를 한다 함은 이 작은 사건들을 어떻게 집중할 것인지를 묻는 것입니다. 공을 차려고 할때마다 혹은 전술이나 전략을 세울때마다 특이적 사건들을 문제화 하는 겁니다.

“사건의 양상은 문제이다” 가령 한 번의 공격은 어떻게 패스를 연결하여, 골인으로 이어지는 슈팅을 할것인가 하는 대한 문제를 묻고 그 답을 구하는 것입니다. 한번의 경기는 이런 공격과 수비를 어떻게 편성 할 것인가 ? 하는 문제를 던지고 그 답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를 풀기 위해선 상대편과 자신의 전력을 분석해야 하고, 그 날의 구체적인 조건을 고려하여 답을 구해야 합니다. 물론 최소 크기의 수준에서도 사건은 문제 입니다. 패스를 한다는 것은 어디로, 어떻게 패스 할 것인가를 스스로 묻고 답하는 것이니까요

이 최소 크기의 사건이 바로 이념적 사건입니다. 그런데 패스나 슛은 미시적 사건이지만 사실 최소 크기라 하기 어렵습니다. 그것은 물론 이어진 다른 패스나 슛 같은 다른 사건들과 아직 결합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미 규정적이지만 그 자체로 충분히 완결된 규정을 갖습니다. 패스는 슛이 아니고 패스미스도 아니까요. 하지만 최소 크기의 사건으로 순수 잠재성 쪽으로 좀더 거슬러 올라 가자면 발 앞에 공으로 패스를 할 것인지, 슛을 할 것인지를 아직 결정하지 않은 순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즉 패스 인지, 슛 인지 규정되지 않은 미 규정성으로 이웃한 어떤 발들과도 계열화 되지 않은 공으로 거슬러 가야 합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그것은 공이라는 사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공이 아니라 공과 이웃항에 관계 짓는 사건으로 올라가는 겁니다. 패스나 슛은 물론 경기장 밖으로 차거나 심판의 얼굴을 향해 차는 등 공의 표면에 가할 어떤 힘들이 거기에 있습니다.

모든 사건들을 만들어 내는 사건 화의 힘이 거기에 있습니다. 이는 힘의 크기와 방향에 따라 달라 질 수많은 규정 가능성으로 그토록 수많은 사건들에 열린 미규정적 사건이라 해도 좋을 겁니다. 모든 사건들의 배아라고 해도 좋을 사건, 순수 잠재성으로서의 사건 입니다. 어떤 사물도 포함하지 않는 공과 이웃한 항 사이에 빈공간이 거기 있습니다. 이처럼 아직 어떤 규정성도 갖지 않은 그러나 모든 사건, 모든 이웃항을 향해 열린 이 순수 잠재성을 들뢰즈는 하나의 단일한 사건이라고 명명합니다. 모든 사건들을 소통시키는 하나의 단일한 사건이라고, 들뢰즈가 일부러 대문자로 표기하는 이 순수 사건은 어떤 사물도 포함하지 않는 사건입니다.

모든 이웃항 사이에 있는 잠재적인 사건 입니다. 미 분소 만큼 작은 최소 크기의 사건이지요. 모든 규정성을 향해 열어둔 미 규정성의 빈칸이 모든 의미의 사건으로 열린 무의미가 거기 있습니다. 이는 두 사물뿐아니라 사물의 두상태 사이의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더 큰상태와 더 작은 상태 사이에서 발생하는 커지다 같은 사건이 그것입니다. 의미의 논리의 첫 부분에서 말하는 순수 생성이란 두 상태 사이에서 발생하는 최소 크기의 순수 사건을 뜻합니다.

이 사건은 모든 크기와 방향의 힘을 표시하도록 해 주지만 자신은 어떤 규정성도 갖지 않는 미분 이론의 미분속 dx와 닮았습니다. 공에 가해질 힘의 크기와 방향공의 착지점의 이동속도 등과 서로 미분적으로 관계 지어질때 이 미분소적 사건은 구체적인 상호 규정속으로 들어 갑니다. 그 규정은 이 상황을 골로 연결하려면 어디로 어떻게 차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던져 집니다. 그리고 공의 무게와 바람, 공의 경로에 끼어들 상대 선수의 위치와 속도 등 구체적인 조건이 고려되면 패스는 물리적으로 현행화 되게 됩니다. 현행적 현실로 유효화 된다고 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공을 찬 순간 공은 아직 가 닿지 않은 착지점을 이미 그 표면으로 당기고 있습니다. 이미 물리적인 사건이 된 것 입니디다.

공을 찰때 마다 선수는 ‘어떤 사건’ 이라는 문제를 던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문제는 하나의 물음을 뜻하기도 합니다. ‘어떻게 공을 찰 것인가 ?’ 이는 각 선수들이 공을 차려 할때마다 던져야할 하나의 동일한 물음 입니다. 물론 이물음은 따로 던져지지 않습니다. 언제나 공을 둘러싼 선수들의 분포, 골대의 위치, 이동할 수 있는 빈공간 등의 조건 속에서 던져지기에 언제나 문제로서 던져 집니다. 그래도 패스, 슛등의 이념적 사건 이전에 미규정의 최소 사건이 있듯이 구체적 조건 속에서 던지는 문제 이전에 항상 던져야 할 하나의 동일한 물음이 있음은 분명합니다.

이 물음이 던져 질때 아직 차지 않은 공은 수많은 사건들의 가능성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어떻게 찰 것인가 ? 하는 물음은 어떠한 사건을 향해 찰것 인가 하는 물음 이기도 합니다. 발길질에 의해 공과 이어질 수많은 착지 점들의 집합을 들뢰즈는 우발점이라고 명명합니다. 수많은 규정가능한 사건들 전체가 우발점이란 집합의 원소인 것입니다. 우발점의 원소들에 둘러싸인 하나의 단일한 사건은 그 모든 사건들의 잠재적인 배아 입니다.

현행화된 사건은 확정된 규정을 가질 뿐만 아니라 대개는 성공과 실패, 좋다와 나쁘다 등의 평가 마저 갖습니다. 어렵게 이어진 패스는 박수를 받고, 골로 이어진 멋진 슛은 갈채를 받지만 미숙한 패스 미스느 야유를 받고 파올은 비난을 받습니다. 그래도 축구는 게속되고 그래도 새로운 사건을 향한 발길질은 계속됩니다. 멋진 패스를 실패로 끝내 안타까운 슛이었지만 ‘다시한번’ 하며 골을 향해 달려 갑니다. 우발점 속에서는 우리 의식이 포착할 수 없는 최소 시간이 포함되어 있기에 문제를 풀기 위해 선수가 찬 공은 뜻하지 않은 가능성들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렇기에 탁월한 선수는 실패의 가능성이 크다 해도 확률을 가로 질러 사건의 새로운 반복을 향해 달려 갑니다. 공 주위를 둘러싼 우발점을 향해 순수 잠재성으로 사건을 향해 주사위를 던지는 겁니다.

축구 뿐이겠습니까. 사랑도 그렇고 혁명도 그렇습니다. 성공할 확률에 개의치 않고 새로운 사건화의 우발성을 향해 주사위를 던지는 것, 그것이 영원회귀의 주사위 놀이 입니다. 아무것도 발생하지 않는 사건을 들뢰즈가 반복하여 말하는 것은 이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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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이란 무엇인가 ? 들뢰즈의 철학에서 표현이란 개념은 2번 나타납니다. 한번은  <스피노자와 표현문제>  및 그와 같은 시기에 쓰인  <차이와 반복>과 <의미의 논리>에서,  다른 한번은 가타리와 함께 쓴 <천의 고원>에서 입니다.  순화해서  말하는 게 되겠지만 초기에 표현 개념은 재현 개념가 대비 되고, 천의 고원에서 그것은 흔히 내용의 짝이라고 간주되는 형식개념을 대체합니다. 여기서는 초기에 표현 개념을 다루고 후자는 이중 분절의 개념을 다룰때 다시 언급하겠습니다.  표현 개념은 들뢰즈의 철학에서 매우 중요하지만 그의 유명한 개념들 처럼 표면에서 사유를 선도하기 보다는 뒤에서 그 사유를 방향짓는 연출자 같은 위상을 갖습니다. 특히 <의미의 논리>는  전체적으로 이표현 개념에 의해 직조되고 있으나 이 개념은 심지어 감추어져 있다는 느낌마저 줍니다. 화려한 문장으로 펼치며  드러내기 보다는 간결한 문장에 접어 넣으며 감추는 그의 스타일을 생각나게 합니다. 표현 개념이 면밀하게 천착되는 것은 <스피노자와  표현문제>이지만 스피노자의 개념이 생소할 것이기에 예를 통해 표현 개념에 다가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표현 개념의 이해를 위해 들뢰즈는 둔스 스코트(Duns Scotus)가 들었던 예를 다시 사용합니다.  금성을 표현하는 두가지 명칭이 그것입니다.  새벽에 동쪽 하늘에 보이는 금성은 샛별이라고 하고,  초저녁 서쪽하늘에 보이는 금성은 개밥바라기고 합니다. 하나의  동일한 별이 두개의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겁니다. 중국에서도 마찬가지여서 가령 시경에서는 ‘동쪽에 개명이 있고, 서쪽에 장경이 있다’고 쓰고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관찰되는 시간과 위치가 달라서 두개의 다른별로 오인된 것일까요.  그건 아닙니다.  다들 같은 별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다른 이름으로 불린 것은 해뜨기 전 마치 떠오르는 해의 전조처럼 보일때와 해진 직후 무언가 끝났음에 증표 처럼 보일때의 감흥이 다르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 다른 감흥이 다른 이름, 다른 기호로 표현된 것일 겁니다.  이중 어떤 이름이 금성의 본질에 부합하는 표현일까요  어리석은 질문이죠.  둘다 금성의 본질에 부합하는 표현입니다. 샛별은 새로운 하루의 시작을 표현하기에 적합하고,  개 밥그릇에 시선을 주는 것을 뜻하는 개밥바라기는 하루가 끝나며 시작되는 휴식의 시간을 표현하기에 적합합니다.  샛별의 시선을 빛으로, 별로,  바라는 것으로 잡아끄는 힘으로 표현한다면  개밥바라기는 목적 바깥의 것,  개 밥그릇이라는 주변적이고 소소한 것에 시선을 주는 여유를 표현하니까요.
 
떠 오름과  가라 앉음 이라 해도 좋을 겁니다. 두표현 모두 표현되어야 할 것을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샛별이 찬사를 위해서 자주 쓰이는 반면 개밥바라기는 잘 쓰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개밥바라기라는 표현이 샛별 보다 열등하다거나 부적절하다고 할 순 없습니다. 표현되어야 할 것을 적절히 표현하는 것이라면 모든 표현은 동등한 가치를 갖는다고 해야 합니다. 이를 표현적 가치라고 합시다. 그러나 모든 표현이 동등한 가치를 갖는 다는 말은 아닙니다.  누군가를 처음 사랑하게 되었을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사랑해요 그대는 나의 첫 사랑이에요’ 라고 말하는 것과 ‘그대가 내 목소매를 잡고 물고기를 넣었어요. 내 가슴이 두마리의  하얀 송어가 되었어요’ 라고 말하는 것을 두고 같은 가치를 갖는다고 할 순 없습니다. 
 
각각의 표현은 표현되어야 할 것을 얼마나 적절히 표현하고 있는 지에 따라 다른 가치를 갖습니다.  이 말은 재현적 가치와 대비 됩니다.  재현이란 어떤 대상을 최대한 정확하게 묘사할 것을 요구 합니다. 그러니 원본과 가장 비슷한 것이 최고의 가치를 가지며 재현의 정도에 따라 좋고 나쁨의 서열이 있습니다. 가령 스피커에 대해 평가를 할때 원음을 얼마나 정확하게 재생하는 가를 기준으로 삼는 것을 흔히 보게 됩니다. 이 경우 스피커는 재현 능력에 따라 가치를 평가 받게 됩니다. 재현적  가치에 따라 등급의 우열이 발생합니다. 그러나 원음의 모방을 가치의 척도로 삼기에 아무리 비싸고 좋은 스피커로도 이류, 삼류의 소리 불완전하고 열등한 소리를 듣게 됩니다. 재현주의자의 값비싼 불행 입니다. 

 

 

표현주의자는 다르게 봅니다. 소리란 진동이고 악기마다 다른 방식으로 진동을 만듭니다.  첼로가 현을 문질러 진동을 만든다면 스피커는 종이를 울려 진동을 만듭니다.  악기들과 다른 음향적 표현 능력을 갖는 것이지 그보다 못한 표현 능력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스피커의 가치는 원음을 최대한 유사하게 재현 하는 지가 아니라 종이에 울림이 갖는 표현 능력을 이용해 얼마나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지에 따라 평가해야 합니다. 악기에 없는 방식으로 멋진 소리를 만들어내는 스피커가 있다면 악기와 다름 없는 독자적 지위를 얻었다고 평가해야 합니다. 이런게 표현적 가치입니다. 재현적 가치는 원본이나 모델을 모두 재현의 척도로 삼기에 초월적이라면, 표현적 가치는 표현하는 것이나 표현 능력을 각자의 척도로 삼기에 내재적 입니다. 
 
다시 금성 얘기를 하면 금성이라 하나의 별을 두고 샛별과 개밥바라기라는 상이한 표현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의 동일한 사물이지만 다른 표현을 통해 의미가 표현되고 있습니다. 금성을 주어로 다시 말하자면 금성은 저 두표현을 통해 상이한 양상으로 자신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표현은 두개로 제한될 이유가 없습니다.  자기를 표현하는 수많은 표현들이 가능하고, 그 표현은 표현하려는 바에 부합하는 한 각각 독자적 가치를 갖습니다.  들뢰즈는 이처럼 자신을 표현하는 것과 표현 그것을 통해 표현되는 것의 삼항을 하나로 묶어 표현의 삼항성이라고 명명 합니다. 이 삼항성은 기호와 의미, 기표와 기의 같은 기호의 이항성과 대비 됩니다. 이는 원본과 모사, 재현과 재현되는 것이라는 재현의 이항성과 상응 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는 두개의 항에 하나를 덧 붙이는게 아닙니다.  삼항성 속에서 기호와 의미의 개념은 물론 그것을 통해 포착하려는 것이 달라지게 됩니다. 

 

 

첫째 표현으로서의 기호,  재현적 관점에 따르면 재현적 기원은 아무리 많아도 많다고 할 수 없습니다. 기호들이 원본을 재현해야 하는 한 기호들의 의미는 오직 하나일뿐이기 때문입니다.  그하나를 가장 충실히 재현하는 것이 승자가 됩니다. 반면  하나를 표현하는 다른 기호들 역시 하나의 주위를 돌지만 표현하려는 바가 다른 한, 상이한 기호들 각각 이 독자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샛별이 선호 된다고 샛별에게 승자의 지위를 줄 순 없다는 말입니다. 표현적 차이 모두가 긍정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표현되는 것으로서의 의미,  재현적 기호에서 재현되는 것은 원본입니다.  즉 기호가 지시하는 대상이나  말하려는 의도가 기호의 의미 입니다.  그러나 표현적 기호에서 중요한 것은 지시체나 의도가 아닙니다. 샛별도 개밥바라기도 모두 금성을 의미한다고 한다면 그 말의 차이를 모르는  것이라고 그말의 의미를 모르는 것이라고 해야 합니다. 첫사랑에 대한 앞서 두문장이 동일한 의도를 표시하니,  동일한 의미라고 한다면 그 문장을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첫 사랑을 전하려는 의도만이 아니라 목소매로 집어 넣었을때의 놀라움,  송어가 된 가슴에 설렘과 생동이 표현되고 있는 것이니까요 다른 의미가 표현 되고 있는 겁니다.  표현이 달라지는 만큼 표현된게 달라진 겁니다.  따라서 표현에서는 무엇을 표시하는 가가 아니라 어떻게  표현하는 가가 중요합니다.  

 

의미란 이처럼 다른 표현에 의해 다르게 표현되는 것 모두 입니다.  같은 지시체를 갖지만 강아지와 개새깨는 다른 의미를 갖습니다. 심지어 같은 단어 조차 조건과 맥락에 따라 아주 다른 의미를 갖습니다. 가령 늑대란 말은 양과 대비 될땐 약자를 위협하는 악을 개와 대비 될때 길들여지지 않는 야생성을 여성과 짝이 되면 음흉함을 보름달과 연결 될땐 광기나 괴물 성을 의미합니다. 재현적 기호로서의 늑대란 어느 경우나 뾰족한 두귀를 가진 잿빛 동물을 상기 시킬 뿐이지만 표현적 기호로써의 늑대는 이 모든 의미들을 그때 마다 다르게 불러 냅니다. 

 

셋째 자기를 표현하는 것, 삼항적인 기호개념에서 이는 지시체를 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는 표현적 잠재성을 뜻합니다.  금성은  샛별이나 개밥바라기 말고 다른 표현을 가질 수 있습니다. 늑대  역시 접속하는 이웃이  달라지면 앞서와  다른 의미들을 가질수 있습니다. 그 이웃이 정해지지 않은 늑대란 말은  무의미 하다 해야 합니다. 이웃에 따라 달라질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겁니다. 의미가 없다기 보다는 너무 많은 의미가 자기를 표현하는 것 안에 접혀들어가 있는 겁니다. 표현 개념의 역량은 늑대 보다는 늑대 인간이나 흡혈귀 혹은 곰으로 변신하는 신화속의 인간처럼 혼합과 변이가 문제가 되는 경우에 좀더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동물 되기라는 나중에 개념이 이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재현적 관점에서 보면 가령 늑대 인간은 그에 상응하는 지시체를 갖지 않습니다.  거짓이란 의미에서 허구적 존재자고 은유적 상상의 산물일뿐입니다. 물론 재현적 사고는 여기서도 모방과 재현의 관념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모방이란 개념을 따라 신체를 분할 하며 훑어 내려갈 겁니다. 머리는 늑대와 비슷하고 몸은 인간과 비슷하고 만약 그 늑대 입에 두갈래의 혀가 있다면 다시 머리를 분할해 늑대를 모방한 것과 뱀을 모방한 것으로 나눌 것입니다.  지각의 유사성이 자신이 알고 있는 개념과 동일한 것에 이를 때까지 내려가는 겁니다. 이럼으로써 어떤 허구적 대상도 모두 모방으로 설명할 겁니다. 사실 이렇게 보면 모방 아닌게 어디 있을 까요  외계인의 비행접시도 우리 식탁의 접시를 모방한게될겁니다. 그리고 그걸 하나의 유기체로 통합하여 늑대 같은 인간이라면 인간의 일종으로 유비할 겁니다.  잔혹하다거나 악하다 같은 대립적인 술어를  그 괴물같은 인간에게 할애 할 겁니다.  ‘개념의 동일성, 지각의 유사성,  판단의 유비,  술어의 대립’은 재현의 사중 굴레라고 들뢰즈는 말합니다. 

 

표현적 관점에서 보면 늑대 인간이란 그말로 자신을 표현하는 어떤 개체를 표현하는 말입니다. 인간인지늑대 인지 모를 평범하지 않은  어떤 특이성의 표현입니다. 인간과 동물을 구별하는 선을 가로지르는 어떤 특이한 힘과 감응이 그 말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저건 짐승의 소리야  제니스 조플린(Janis Joplin) 노래를 듣고 누군가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허구가 아니라 자신이 들은 실제 소리를 표현하는 말입니다.  소리의 감흥이나 들은사람의 지각 관념에 따라 늑대 소리 살쾡이 소리 라고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표현들로 인간의 목소리도 아니고 늑대 소리도 아닌 어떤 소리가 자기를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거기에 늑대나 여우는 없지만 늑대 란 말로 표현된 특이한 소리는 실제하고 있는 겁니다. 늑대 인간도 마찬가지 입니다.  거기에 늑대는 없지만 늑대 인간 이라 불릴만한 무엇은 있습니다. 샤먼의 언행이나 신화에 등장하는 인간과 인간 아닌것에 혼합물은 대개 이런 힘과 감흥의 표현입니다. 
 
늑대의 소리로 노래하는 사람, 늑대처럼 빠르게 움직이는 사람은 허구가 아니라 실제 입니다. 늑대 인간도 그렇습니다. 그 말은 신체를 관통하는 힘들의 강도적 분포를 표현하는 것이기에  충분히 물리적이고 현실적인 진실성을 갖습니다.  늑대와 인간 이란 말의 표상에 가려 보이지 않는 늑대도 아니고 인간도 아닌 어떤 실제가 거기 있는 겁니다. 그 말에서 중요한 것은 늑대와 인간이 결합된 이미지를 표상하는 게 아니라 그 말로 표현된 어떤 힘과 감흥을 포착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단지 허구적 상상의 산물로 간주하는 순간 그것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사라지고 맙니다. 표현과 표현된 것을 기호와 의미라고 했지만 이때 기호는 언어적인 기표가 아니고 의미는 기의가 아닙니다. 늑대 인간은 기호지만 그것은 단지 의미나 상징이 아니라 신체성을 갖는 실재를 표현합니다.  표현적 관점에 선다함은 비유나 은유에서 조차 그것으로 표현된 현실의  강도적 상태를 포착하려 함을 뜻합니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안티 오이디프스>에서 은유는 없다고 반복하여 말하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표현으로서의 기호와 그 의미는 의미론 이전에 존재론에 속합니다.  들뢰즈가 표현 개념을 이렇게 다듬은 것은 스피노자의 철학을 통해서 였다는 사실이 이를 잘 보여 줍니다. 

 

거기서 삼항성은 실체와 속성 양태 같은 개념들과 관련 된것입니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신 즉 실체는 상이한 속성들로 자신을 표현합니다. 사유와 연장 쉽게 말해 정신성과 물질성은 신이 자신을 표현하는 상이한 표현 들입니다. 이 표현들을 통해 신의 본질이 각이한  방식으로 표현됩니다. 이는 속성과 양태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로 해당됩니다. 속성은 수많은 양태들을 통해 자신을 표현합니다.  양태들 각각은 속성의 상이한 표현입니다.  이표현을 통해 속성이 양태화 하는 작용이 즉 양태를 생산하는 작용이 표현됩니다.  스피노자의 신은 자연을 뜻합니다. 그러니 이러한 표현 개념은  다양한 양태로 존재하는 자연의 존재론에 속한다 해야 합니다 .기호의 의미마저  실제로 다루려는 입장과 강한 연속성이 있다고 보이지 않나요 

 

 

 

금성 vs. 개밥바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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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체란 무엇언가 ? 다양성과 관련된 개념이라 하겠지요. 물론입니다. 차이의 철학은 다양성을 위한 철학이다. 맞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맞지 않다 해야 합니다. 다양성이란 말이 상식에 따른 말이라면 더욱 더 그렇습니다. 다양체란 말은 다양성이란 말에 대한 위화감으로 부터 탄생했기 때문입니다. 다양체란 차라리 ‘어떤 다양성인가’ 라는 물음이 다양성에 대한 통념을 지운 자리에 나타나는 개념 입니다.

일단 전체성이나 단일성과 대비되는 다양성의 관념이 있습니다. 전체주의 비판이 근거로 삼는 것이 이것이죠. ‘당이 결정하면 우리는 한다’ 누가 봐도 전체주의적이라 할 이 슬로건은 레닌의 민주 집중제 이론으로 부터 도출된 겁니다. 하지만 그 이론도 의견의 다양성, 토론이나 논제의 자유를 말합니다. 다만 토론이나 논쟁 이후의 결정에 대해서는 복종할 것을 요구할 뿐이죠.

반대로 자유주의는 다양성의 보장을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고들 합니다. 그러나 자유주의 자라도 다수가 모여 뭘 하려면 결정을 해야지요. 이를 위해 토론을 하고 투표를 합니다. 다수의 지지를 얻은 것인 결론으로 결정 되죠. 패자의 미덕은 그 결정에 승복하고 따르는 겁니다. 토론과 복종이라는 레닌의 주장과 얼마나 다른 가요. 공산당 중앙 역시 표결로 결정합니다. 대중이 표결을 직접 참여하는가 여부가 양자를 갈라 주지도 못합니다. 대표 선출에 표결로 결정하는 대의제를 만들어 낸 것은 자유주의자들 이었죠.

더욱 난감한 건 의견을 모을 것도 없이 각자 자기 뜻대로 하는데도 놀라운 통일성을 보여주는 경우 입니다. 검은 색 옷이 유행할때 핫한 거리에 나가 보세요. 개성에 민감한 분들이 모두 검은 색의 비슷한 옷을 입고 다니죠. 욕망의 다양성을 말하지만 다들 비슷한 상품을 선망하고, 취향의 고유성을 주장하지만 남들 보는 드라마를 보고, 남들이 듣는 노래를 듣습니다. 심지어 자기 세계를 추구한다는 예술가도 유행하는 사조에 따라 그리고 만듭니다. 합의도 승복의 서약도 없는 이 놀라운 통일성은 다양성 보다는 획일성에 더 가까이 있습니다.

남들과 달리 유행의 첨단에서 유행을 만들어 가는 분들은 어떤가요. 남들과의 차이를 만들며 치고 나가지만 그건 ‘당신들도 남다른 걸 추구해’ 라는 명령어를 담고 있지 않습니다. ‘멋있지 어서 다들 따라하셔’ 그들의 명령어지요. 그 경우 차이란 동일화를 선동하는 변덕스러운 미끼에 불과 합니다 유행을 선도하는 이런 분들 예전엔 궁정 사회의 중심인 왕의 수족 이었는데, 지금은 자본가의 수족 아니 자본가 자체가 된 분들이죠.

차이 철학을 비판하는 이들이 큰 약점이라 생각하는지 자주 언급하는 말이 있습니다. ‘자본가야 말로 차이를 좋아한다.’ 자본가야 말로 끝없이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 돈을 벌려 한다는 겁니다. 이로써 차이의 철학이 자본주의 이데올로기 임을 증명했다고 생각하는 듯 합니다 . 그러나 자본가의 새상품은 대중적인 소비, 대중들의 추종을 전제로 만드는 겁니다. 자본가의 모범을 보고 대중들이 각자의 차이를 만드는 길로 간다면 ‘오마이 갓’. 세상에서 생산은 중단 됩니다. 그들의 관심은 차이가 아니라 대중의 구매력이고, 대중의 추동 다시 말해 대중의 동일화 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끊임없이 차이를 만들려 하지만 대중들은 쉽게 추종할 것인가 여부를 척도로 삼아 만듭니다. 이런 것이 바로 자본가들이 좋아하는 차이 이지요. 대중이 쉽게 따라올 것 같지 않은 차이는 아무리 멋지고 좋은 것이라도 내치고 묵살하지요. 이런게 차이의 철학에 속한다고 생각하시나요.

다양한 의견들을 하나의 결정으로 통합하려는 방법을 철학자들은 다자와 일자의 통일이라고 합니다. 어느 경우든 차이나 다양성은 지배적인 하나로 귀착 됩니다. 이런 통일속에서 다양성은 사실 하나의 신하들 뿐입니다. ‘일자는 다자고, 다자는 일자다’ 라는 변증법적 명제에 대해 정작 중요한 것은 잡지 못하는 성긴 그물이라고 들뢰즈는 비판합니다. 정작 강하게 말하자면 통일 이라는 말을 미끼로 다자들을 일자에게 잡아 바치는 나쁜 그물입니다. 다양체는 다양성을 사유하려는 개념이지만 그러기 위해서라도 이런 종류의 다양성과 결별하려는 개념입니다.

다양체 개념으로 들어가려면 또 하나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다양체는 주어진 것들의 다양성이 아니라 만들어 가는 차이의 작용과 관련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두개의 영어 단어를 비교하는 것도좋을 것 같습니다. 다이버시티(diversity)와 버라이어티(variety)가 그것입니다. 알다시시피 버라이어티는 베리(vary)라는 동사로 부터 파생된 말입니다. 반면 다이버시티는 동사적 뉘앙스가 없는 명사인데, 다이벌스(diverse)라는 말로부터 파생된 말입니다. 이 다이벌스라는 말에대해 대해 들뢰즈는 ‘차이는 다이벌스가 아니다’라고 명시적으로 말합니다. 다이벌스라는 말은 주어진 것이 풍부함을 뜻하는 말인데 차이의 철학의 관심사는 이처럼 만들어진 차이의 풍부함이 아니라 현재 상태를 어느새 다르게 만드는 차이이기 때문이죠. 이런점에서 보면 동사적 의미를 함축하는 버라이어티가 다이버시티(diversity) 보다 다양체와 휠씬 가까이 있습니다.

다양체란 말에서 중요한 것은 다른 의견이나 성질이 얼마나 많이 있느냐가 아니라 어떤 것이 변이 즉 베리에션(variation)의 과정중에 있느냐 하는 겁니다. 많은 것이 나열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라도 그것이 변화속에 있는가, 멈춰있는가가 바로 문제라는 겁니다. 이를 철학적으로 부각시켰던 철학자는 베르그송 이었습니다. 그는 양적 다양체와 질적 다양체, 연장적 다양체와 지속적 다양체를 대비하여 구별 합니다. 종소리를 들으며 몇번째 치고 있는지 셀때 우리는치는 소리에 공간적 간격을 도입해서 소리의 지속을 분리합니다. 치는 소리는 크든 작든, 높든 낮, 횟수만 세워집니다. 음질이나 음향의 변화도 무시 됩니다. 동질화 된 채 숫자만 세워주는 거죠. 그래서 이를 양적 다양체라고 합니다.

반면 바흐의 푸가를 들을때 우리는 소리들을 분리하는 게 아니라 지나간 소리도 끌어당겨 결합하여 듣습니다. 다른 음고와 음가를 갖는 소리들이 서로 수축되어 하나로 결합될 때 소리는 선율이 됩니다. 여기선 소리의 횟수가 아니라 소리가 모여 만든 선율의 질이 중요하지요. 그래서 질적 다양체라고 합니다. 하나의 연주 자체가 다양성이 살아 있는 다양체인 겁니다. 질적 다양체에서 소리의 강약이나, 소리 하나의 길이 음색은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지속적으로 변합니다. 이 변화에 의해, 그변화를 만드는 연주자의 능력에 의해, 다른 다양체가 됩니다. 곡도 소리도 모두 지속적 다양체 입니다. 고저 장단과 상관없이 동질화된 다양체는 연장적 다양체 입니다. 변화 양상이 삭제되서 동질적 부분들의 연장이 된 다양체란 뜻이지요. 반면 지속적 다양체는 상이한 것들이 지속적으로 달라지면서 섞이기에 분할 할 수 없을 뿐만아니라 분할 하면 각부분이 결코 동질적일 수 없는 다양체 입니다. 하지만 질과 양, 공간과 시간의 대비는 들뢰즈에겐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가 보기엔 질이란 강도들의 분포에 의해 만들어지기 때문이죠. 공간 또한 연장적 공간만 있는 게 아니라 강도적 공간도 있습니다. 수정란의 표면이 그렇죠 . 이렇듯 양적이면서 강도적인 공간까지 다루기 위해 들뢰즈는 리만의 다양체 개념을 도입합니다.

리만의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일반화 하여 다양체 이론을 착안했습니다. 데카르트 좌표계로 표시되는 유클리드 공간은 어디서나 동질적이지요. 길이나 면적 20은 10은 2배, 5의 4배 입니다. 둘로 나누면 동일한 10자리 도형 둘이, 4로 나누면 동일 한 5짜리 도형 4개가 나옵니다. 동일한 단위를 척도로하는 좌표계는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동질적 연장으로 만듭니다.  이를 기준으로 공간안에서 도형이나 입체의 길이, 면적, 부피 등이 계산되고 비교 됩니다. 그런데 휘어진 공간인 경우엔 이게 잘 통하지 않지요. 지구본에 그린 정사각형 면적을 평면에 그린 것과 같은 방법으론 계산할 수 없지요. 공간이 휘어진 정도를 곡률이라고 하는데 곡률이 달라지면 좌표 축도 휘어진 정도가 달라집니다. 곡률이 커지면 직선적 좌표계에서 계산한 것과 편차가 더 커집니다. 좀더 난감한 경우는 곡률이 일정하지 않은 경우 일겁니다. 이런 공간에서 계산을 하려면 미시적인 스케일로 달라 지도록 계산의 척도를 바꿔야 합니다. 즉 계산의 척도 자체가 연속적으로 달라집니다. 여기선 미분적인 스케일의 미시적 척도를 사용합니다. 들뢰즈는 리만의 용어를 약간 바꿔서 유클리드 공간 처럼 하나의 척도를 가지며, 모든 부분이 동질적인 다양체를 이산적 다양체라고 합니다. 반면 미시적 척도가 연속적으로 달라지는 다양체를 연속적 다양체라고 합니다. 척도가 그대로인 체, 수나 종류가 늘어날 뿐 이라면 아무리 많아도 그건 모두 척도 안에 갇혀 있습니다. 그게 그거 인 다양성 입니다. 화폐라는 척도에 메어 있는 한 친절함도 상품의 일종 즉 서비스 일 뿐이죠. 선택의 척도가 동일하다면 선택지가 3개든 300개든 동일한 결과에 귀착 됩니다.

질적으로 다른 선택지들이 있다고 해도 그 질이 더 이상 변하지 않는다면 그것 역시 이미 주어진 것 안에 갇힌 선택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분할 할때 마다 달라지고 더하거나 뺄때 마다 척도가 달라져야 한다는 겁니다. 선택할 때마다 변화가 발생하는 것, 선택 자체가 변화를 만드는 겁니다. 말단에서의 변화가 중심으로 치고 들어가고 척도 마저 바꾸는 것, 모든 변화가 척도 자체를 잠식하는 것, 이것이 다양체 개념이 겨냥하는 겁니다. 여러분은 어떤 다양체 안에서 선택하고 욕망하고 결정하고 있나요. 이것을 물어야 한다는 겁니다.

들뢰즈의 다양체 개념은 동질화될 수 없는 변화의 지속적 다양체와 척도 자체가 연속적인 다양체가 만나는 지점에서 탄생합니다. 이 다양체 개념에서 강도는 매우 중요 합니다. 강도의 변화가 슬그머니 척도를 바꾸고 본성 마저 바꿀 수 있기 때문이죠. 연주자가 만드는 소리의 강도가 정해진 악보의 곡을 아주 다른 곡으로 만들지요. 요리에 섞여 든 짠맛 쓴맛 등의 강도가 훌륭한 요리와 끔찍한 요리의 차이를 만들어 냅니다. 아주 빠른 속도 즉 강도는 운동하는 비행체안에 시간 척도를 느리게 가도록 바꿉니다. 상대성 원리란 중력과 가속도가 같다고 하는 가정을 뜻하는데 중력을 가속도라는 강도로 제정의 하는 겁니다. 그런데 중력이 큰별이나 블랙홀은 공간을 휘어지게 만듭니다. 강도가 척도를 바꾸고 연장적 공간을 강도적 공간으로 바꾸는 겁니다. 동질화된 연장적 다양체로 부터 다수를 일절 복속 시키는 중심화된 다양체에서 벗어날때 다양성은 진정한 다양성이 됩니다. 즉 다이버시티는 진정한 멀티플리시티(multiplicity)되는 거죠. 이를 위해 들뢰즈는 일자를 미분적 크기로 축소하거나 아니면 아예 제거하자고 합니다. 이념이라는 미시적 일자를 통해 다양한 양상으로 구성되는 다양체 혹은 단일한 중심이 일절을 제거하여 무언가 더해지거나 뺄 때 마다 전체가 달라지는 리좀적 다양체가 그겁니다. 들뢰즈는 모든 것을 이런 다양체 개념 통해 사유하고자 합니다. 모든 것은 다양체다. 심지어 다자도 다양체다. 일자도 다양체다. 우주는 다양체고 지구도 다양체 입니다. 우리의 신체도 다양체입니다.

조프루아 샌틸레르(Geoffroy Saint Hilaire) 가 동물들의 신체를 미시적 잔뼈들로 구성된 다양체라고 보았다면 린 마굴리스(Lynn Margulis) 은 모든 생물이란 박테리아적 기원을 갖는 미생물들의 다양체라고 할 겁니다. 앙토네 아르토라(Antonin Artaud)면 신체의 표면과 심층을 오가는 힘들을 강도적 다양체라고 했을 겁니다. 우리의 영혼 또한 다양체 입니다. 읽는 책에 따라 뜻밖의 경험에 의해, 만나는 사람에 의해 판단기준이나 사고 방식이 달라지며 어떤 판단을 산출하는 다양체 입니다. 무의식도 다양체고 책도 다양체이며 문화도 정치도 다양체입니다. 이제 다양체란 일자와 다자의 통일이라 해도 좋습니다.그때 일자란 다자들을 하나로 묶어 전체로 만들어주는 거대한 숨은 실세가 아니라 차라리 상이한 다자들 속에 스며들어 각각의 힘과 방향을 규정하는 미시적 벡터입니다. 모든 다자들이 모여 만들어 내는 하나의 전체가 아니라 다자들 사이를 오가며 그것을 연결하며 소통시키는 리좀적 연결망입니다. 그 다자들이 모이고 흩어지는 흐름의 장입니다. 이질적인 다자들을 하나로 묶어서 서로 공명하며 하나처럼 작동하게 할 때 조차 각자가 갖는 이질성을 제거 하지 않는 일관성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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