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좀은  들뢰즈 가타리의 개념 가운데  가장  알려진   하나일 겁니다.  리좀이란 땅속 줄기 내지 뿌리줄기를 뜻합니다. 식물학적으로 보자면 땅속 줄기는좀  상위 범주이고  아래 뿌리 줄기,   줄기,  덩이줄기,  비늘 줄기, 덩이 뿌리 등이 있습니다. 하지만 철학적 개념으로서   리좀에서 그런 분류학적 구별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그것이 뿌리나 나무를 타겟으로 하는 개념이란 점입니다. 

 

뿌리는 중심이 되는 하나의 주축이 있으며 이로부터 잔뿌리가 차례로 뻗어 나가지요. 옥수수 처럼 수염 뿌리인 경우에는 주축은 없지만 잔뿌리가 하나의 중심에 모여 있습니다.  어느 것이든 확고한 중심이 있고 이로부터 가지를  나가는 형태를 취하고 있죠.  지하에 뿌리  만이 아니라 지상에 나뭇가지도 그렇습니다. 나무 줄기가 뿌리 위로 뻗어 나가고 그로부터 가지들이 분기 합니다. 원줄기가 하나의 확고한 중심 되는게 교목 이라면 여러 개의 줄기들이 지면에서 뻗어 나가는  관목이지만 어느 것이든 하나의 중심에서 갈라져 나갑니다.

 

반면  땅속 줄기나 뿌리 줄기는 중심이 없이 서로 얼기 설기 엮여 있습니다. 뿌리의 경우에는 중심으로부터하나씩 차례로 갈라지며 분기 하기에 잔뿌리 끼리는 연결되지 않습니다.  하나의 잔뿌리 에서 다른 잔뿌리로가려면 상위의 중심으로 올라 갔다가 가야 합니다. 나뭇가지도 그렇지요. 하지만 뿌리줄기는 그물처럼 서로간 연결되어 있습니다. 중심으로   없이 가지에서 가지로 잔뿌리 에서 잔뿌리로 직접   있습니다.  하나씩 차례로 분기하는 중심화된 다양 체가 뿌리나 나무라면 어떤 중심도 없이 가지들이 서로 이어진 다양체가 리좀입니다. 

 

 알려진 것처럼 핵전쟁이 발생했을 때를 염두에  통신망인 인터넷이  바로 이런 리좀적 연결망을 컨셉으로 만들어 졌지요. 수목형 유형의 통신망은 모든 가지들이 상위의 가지와 하나씩 빠짐없이 연결 되기에 어디서든 중간에 절단  곳이 하나만 생기면 중심으로 가는 통신이 두절됩니다. 그래서 어떤 절단이 발생해 중심의 도달할 경로가 끊어지지 않게 복수화  연결망을 채택해서 만든게 인터넷이죠.  이는 역으로 중심으로부터 하나씩 차례로 분화되는 연결망의 무능함을 보여줍니다. 이후 그러한 리좀적  연결 망이 갖는 강력한힘은 누구도 모를  없게 되었고 그것이 연결망의  시대라고 불리는 새로운 시대를 열었지요.  연결망 분석이 통계학 못지 않는 영향력을 갖게  것도 이와 상관적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리좀 이라는 개념은 이후도래할 세계에 대한  대한  지적 감각의 징후적 개념이었다 하겠습니다.  리좀 개념이  알려진 것은 이와무관하지 않을 겁니다. 

 

 인터넷이란 중심과의  통신 가능성을 최대한 확보하기 위해 중심으로  가는 경로를 복수화 했습니다.  중심으로 가는 길이 복수화된 연결망에서는 특권적 중심이 사라져 버립니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중심에 도달할  있는 연결 망은  중심 없는 연결망 이라는 역설을 보게 됩니다. 리좀이처럼 중심을 제거해버린 다양체 입니다. 

 

리좀과 달리 나무나 뿌리는 중심을 같습니다. 그런데 나무나 뿌리라는 말로 겨냥하고 있는 것은 수학이나 생물학 등에서 자주 보게되는 수용도 입니다.  수용도란 점과 선으로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 모든 경우의 수를표시하는 도식이죠. 가령 주사위 2개를 던져 둘다  6 나올 확률을 계산할  앞의  주사위의  눈이 나올 6가지 가지를 그리고 각각의 가지 끝마다 다시 여섯 개씩 가지를 치지요 그래서 나온 전체 갯수 가운데 6   나오는 가지의 수를 세서 확률을 구합니다. 인공지능이  찾기를  때도 이런 식으로 했었지요.  가지치기를 반복하여 그리고 각각의 경우마다 확률이나 비용 같은걸 계산했습니다.  이는 생물학을 비롯해 분류를  때도 흔히 사용합니다.  생물계를 세균, 고세균, 진핵생물  나누고,  진핵 생물을  원생 생물,  조류,  균류,  식물, 동물로 나두고 동물은  척추 동물과 무척추 동물로 나누고 하는 식으로 분류의 가지를 쳐나가지요. 진화의 역사도 이렇게 수용도를 그리며 분기되는 수용도로 그려집니다.  촘스키는 이를 언어에 대해 사용합니다.   모든 문장을 명사구와 동사구로 나누고 나누어진 각각의 구를 다시  둘로 나누지요.  어느 경우든  점에서 나무 가지가 펼쳐지고 각각의 끝점에서 다시 가지가 분기하는 모양으로 그려지는 수용도가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생명의 역사는 이런 수용도가 부당함을  보여 줍니다.  수용도로 표상되는 생물의 진화는 하나로부터 다른 가지들이 분화되어나온다는  가정하고 있습니다.  영장류에서 침팬지와 인간이 갈라져 나오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핵이 없는 생물이 분화되어 핵이 있는 생물이 나올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없던 핵이갑자기 생기는 기적을 가정 해야 하니까요. 이런게 돌연변이 라고 하면 돌연변이는 생물학적 기적의 다른 이름이 됩니다. 미토콘드리아  엽록체  대한 연구가 보여주는 것은 그런 세포 소기관은  미생물이 다른미생물을 잡아 먹었으나 소화시키는  실패함으로써 뜻하지 않게 시작된 공생의 산물이라는 겁니다. 다시말해 하나의 생물이 둘로 갈라지는  아니라  개의 다른 생물이 합쳐지며 세포 소기관을 가진 생물이 탄생한 겁니다. 다세포 생물  그렇습니다 단세포 생물이 아무리 갈라지고 분화되어 봐야 다른 단세포 생물이  다세포 생물이   없지요.  세포 생물들이 결합되어 하나처럼 살기 시작할  다세포 생물이 탄생합니다.  역시 분기가 아니라 접속을 통해 진화가 이루어졌음을  합니다.

 

이처럼 접속 내지 동맹을 통한 진화는 다른   아니라 다른 ,  사이에서도 발생합니다. 가령 지의류(이끼) 균류와 녹조류가 결합되어 탄생한 공생체 입니다.  인간 세포 안에 미토콘드리아는 인간이란 종이 알파 프로테오박테리아와  세균이 합체한 사건의 산물임을 증언하고 인간의 유전체 안에 있는 바이러스의  유전자는 그렇게 합체된 신체에 다시 바이러스가  합체한 사건의 증거 입니다.

 

들뢰즈 가타리는 난초와 말벌의 예를 통해 독자적 유기체로 개체와  생물 사이에서도 이런 접속과 동맹이존재함을 지적합니다. 난초는 꽃으로 말벌 암컷의 형태를 만들어 말벌을 불러들이고 꽃에 앉은 말벌의 꽃가루를 잔뜩 빨라 수정을 하지요.  이를 두고 말벌은 난초의 의태에 속한 것이니 일방적 이라 한다면 그건 말벌이나 생명체의 능력을 너무 졸로 보는 것입니다.  그저 속은 것에 불과하다면 기나긴 진화의 시간 동안 그런행동을 지속 했을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생각은 수정이나 섭식 만이 생명 활동의 목적 이라고 보기 때문에 발생하는 오해입니다. 오히려 말벌의 그런 행동이 오랜 세월 지속되고 있다면 그들 나름대로 거기서 어떤 이득을 얻고 있는건 아닐까 생각해야 합니다. 그들은 과연 거기서 어떤 이득을 얻고 있는 것일까  물어야 합니다.  가령 포르노가 수정이나 번식에 도움이 되지 않을  아니라 씨라는 소중한 자원을 낭비 함을 알면서도 그걸 즐기는 어떤 종을 보면   또한 그걸 즐기고 있는 것이라고   있지 않을까요. 사실 인간보다  리얼하게 즐기고 있다고   있지 않나요. 수용도의 모델은 순차적 분화의 가정으로 생명체  진화를 이해하려 합니다 반면 이러한 동맹으로 인해 발생하는 비평 행적 진화는 비약적 접속이 진화의 분기점일 가능성을 보게 합니다.  씨를 퍼트리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혈통적 분화 대신 혈통의 계보를 뒤흔드는 횡단적 소통이 사실은 생명의 역사를 이끌어온 것이라는 겁니다.  리좀이란 이런 점에서 생태의 본질과 역사에대한 근본적으로 새로운 생각과 잇닿아 있습니다. 마군 리스가 발견했고 전광우가 아메바를 연구하는 실험실에서 확인한 공생 진화는 리좀적 사유와 독립적으로 진행된 일종의 비평행적 진화의 사례라 하겠습니다.  유기체를 유전자의 생존기계로 다룬 이론이 씨뿌리기의 혈통주의를 미시적으로 확장 것이라면 리좀적 사유는 미생물과 유기체 사이,  종과   이를 넘나드는 횡단적 동맹주의를 모든 영역으로 확장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언어도 그렇습니다.  명사구와  동사구라는  개의 가지를 갖는 구조적 보편성 같은 것은 가령 추워 오늘밤 같은 단어 하나만으로 아주 다른 수많은 의미를 표현할  있다는 사실 만으로 쉽게 웃어넘길  있습니다.  거기서 같은 단어가 다른 의미를 갖게 만드는 것은 문법 구조가 아니라 어조이고 표정 이지요.  어떤어조,  어떤 표정이 접속 되는가에 따라 같은 단어도 다른 말이 되는 겁니다.문장이 명사구와 동사구로 분기하는게 아니라 단어와 어조,  표정 같은 이질적인 것이 접속함으 로써 의미가 생성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질적인 것들의 접속 이것은 바로 리좀을 규정하는 핵심적인 원리입니다.  어떤 선도 다른 선과 이어지며 선위에 어떤 점도 다른 점과 이어질  있다는  그것이 접속의   번째 원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접속이나동맹을 다룰 때에도 동질적인 것들 간의 동등한 층위에서 그렇게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정치적 동맹을 다룰때는 국가  혹은 부족간 등의 동등한 층위에서 다루고,  생물의 동맹을 다룰 때는 인간과 ,  악어와 악어새  동등한 수준에서 다루지요.  그러나 유기체인  우리는 우리 신체 내부에 미생물과 동맹을 맺고 있죠.  정치적 동맹 조차 국가와 부족 혹은 군대와 지형,  무장한 사람과   상이한 층위에서 발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언어적 기호와 표정의 동맹도 있습니다.  이처럼 접속하는 것들의 이질성이 리좀의 두번째 원리입니다. 

 

  원리라고는 하지만 철학이나 과학 정치 등에서 흔히 원리 라고 하는 것과는 아주 다른 원리입니다 흔히 원리 라고 하면 거기에는 모든 것의 기원이자 모든 것이 귀착되는  중심 모든 것을 규정하거나 규명하는 하나의원리 모든 것을 통일하는  근거 등의 의미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이를 철학에서는 흔히 일자라고 하지요.  그러나 접속이나 이질성  원리    거기에는 접속을 규제하는 통일성이나 구현  내용이 없습니다.  접속되는 것들을 통합하는 중심도 없습니다.  따라서 이는  원리라 하기 어렵습니다.  원리 아닌 원리인 거지요나아가 들뢰즈 가타리  이러한 일자를 제거함으로써 구성되는 다양 체가   이라고 정의합니다 이는 통일하고 규제하고 동질화하는 원리를 제거하는 것을 원리로 한다는 점에서 원리에 반하는 원리를 갖는다 하겠습니다

 

리좀을  N - 1 이라고 표기하는 것은 이런 의미를 표현하기 위함입니다 n개의 부분들로 이루어지는 다양체가 진정한 다양체가 되려면  다양체  부분이 다양성을 구성하는 힘을 제대로 가동 시키려면 일자를 제거해야 한다는 겁니다.    일자는 이데아 같은 초월적  모델일 수도 있고  같은 초월자 일수도 있으며 단일한 법칙이나 초월적 좌표계 어디에서나 발견되는 동질화  최소 단위  같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환원적 사유 안에서 환원의 거점이  유전자나 원자도

그렇습니다.  이러한 일자  제거할  비로서 부분마다 다르고 분할  때마다 달라지는 연속적 다양체가가능해집니다. 접속과 이질성에 이어 리좀의 세번째 원리가 다양체 라고 함은 이런 뜻입니다. 

 

이러한 다양체는 주체도 대상도 없고 의미도 모델도 없습니다.  알파 프로테오 박테리아와 고세균이 공생체를 이룰  잡아 먹었지만 먹는데 실패했으니 고세균이  주체가 아니며 잡아 먹혔으나 먹히지 않고 살아남았으니 박테리아 또한 대상이 아닙니다.  고세균이 주체 이고 박테리아가 대상이라면 먹이를 먹어 치운 고세균 있을  공생체는 없을 겁니다.  뜻하지 않은 사건을 통해 접속한 공생체가 있는 것이고 ,  새로운 개체에 말려 들어가간 박테리아와 고세균이 있는 겁니다. 난초와 말벌도 다르지 않습니다.  난초에게 말려 들어갈 말벌은 난초의  욕망을 대응하기에 주체가 아니며 또한 그의 욕망만 구현한  아니기에 그저 대상인 것만도 아닙니다. 서로를 맴도는 쌍둥이  처럼 하나의 배치로 말려 들어간 것들의 공동체가 있는거지요. 의미도그렇습니다.  실패한 섭식기계의  공생체가  박테리아는 먹이라는 의미를 벗어나,  고세균  또한 포식자란의미를  못합니다. 양자가 접속하여 출연한 사건은 차라리 포식 이라는 통상적 의미와 단절 하며 이루어지고 먹혔지만 살아남은 박테리아는 먹이라는 의미와 단절 하기에 동맹자가 됩니다.  이런 점에서 리좀은 의미화 하지 않는 단절을  하나의 원리로 합니다.  

 

말벌을 불러들이기 위해 난초 꽃이 말벌 암컷의 형상을 만드는 것을 모방이나 모사라고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겉으로 드러난 유사성 만을 보기에 그런 겁니다.  난초가 그런 모습을 만들  그것은 말벌을 흉내내기 위해서  아니라 말벌의 신체 활동을 자기 신체로 재영토화  하기 위한 겁니다.  말벌은 난초를 통해 자기 신체로부터 탈영토화  되어 다른 길로 이탈하게 됩니다.  현실 속에서 새로운 길을 찾기위해 자신에게 없는 것을 만들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아닌 다른 이의 삶에서 무언가를 배우고 모방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우리는 그저 모방 하는게 아니라  삶을 위한  길을 찾고 시험하고 있는 겁니다. 모사가 아니라  영토화탈영토화를 위한 지도 제작이 있는 것이라 함은 이런 뜻입니다.  이것이 리좀의 다섯번째 원리입니다.  이를달리 말하자면 지도를 만들며 난초와 말벌도 고세균과 박테리아도 그런 식으로 서로가 서로의 코드를 포획하여  잉여 가치를 이용하고 있다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모방 조차 사실은 애초의 코드를 탈코드화하는 것이고 모상을 코드의 여백을 이용해 해체하는 것입니다. 리좀의 6번째 원리가 모상의  해체를 뜻하는데칼코마니 이라 함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리좀은 모든  위에 군림하며 모든 것을 통일하는 일자  제거한 다양체 라고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모든 것을 초월적 일자로 환원하는서구의 오래된 초월성의 사유와 반대 편에 있습니다.  일자가 사라지면모든 것은 그것이 접속하는 다른 것에 의해 그때마다 다른 본성을 갖게 됩니다.  다양체는 외부에 의해 정의된 다는 말은 이런 뜻입니다. 그것은 추상적인 선에 의해  탈주선 내지 탈영토화의 선에 의해 정의 되며  선을 따라 가며 이루어지는 다른 다양체와 접속에 의해 다양체는  본성을 바꾸게 됩니다.  이는 내재성의 구도를 향해 사유를 개방합니다.  어떤 곳에 본성도 그것과 접속하는 것과의 관계에 내재적 이라는 의미에서 어떤 것도 자신이 접속하는 것의 원인인 동시에 그것에 의해 결국 자신이 규정한 이웃에 의해 규정되는 결과 라는 의미에서

 

 

 

 

 

 

 

배치란 사람과 사물, 동물 등 이질적인 것들이 결합된 다양체 입니다. 역으로 어떤 다양체의 특이성을 표현해주는 특지점들의 분포를 뜻하기도 합니다. 배치는 일단 기계와 인접한 개념으로 시작됩니다. 가타리는 구조화된 질서로부터의 절단으로 기계를 정의한 바 있습니다. 이는 유기체적 구조로부터 절단 된 것으로서의 부분 대상이나, 라캉이 말하는 대상 a와 가까이 있습니다. 물론 가타리는 구조화된 장안에 주체와 반대로 구조에서 벗어날 수 있는 탈열토화의 지점임을 강조합니다. 다른 한편 들뢰즈는 구조주의의 중요한 기여로 계열적 사고를 강조하며 수용하지만 구조적 동영성을 벗어나는 지점으로 밀고 갑니다. 이러한 사고가 만나는 지점에서 탄생한게 안티 오이디푸스의 기계 개념이죠.

기계는 이웃항과의 계열화 양상에 따라 특정한 규정성을 갖게 되지만 동시에 다른 이웃항과 계열화 되면 그 규정성에서 이탈하여 다른 규정성을 갖게 됩니다. 다른 기계가 된다는 말이죠. 이는 그때마다 그렇게 접속된 기계들의 복합체가 있음을 뜻합니다. 이것이 배치입니다. 가령 종이는 문자, 관료, 돈과 접속하여 세금을 기록하는 서류 기계로 작동합니다. 또 그것은 문자, 시인, 독자와 접속하여 시를 기록하는 기계로 작동합니다. 기록하는 기능을 한다는 점에서 비슷해 보이지만 전자에서 기록은 세금이라는 사물의 이름을 야기한다면 후자 에서 기록은 시정이라는 감응에 이름을 야기합니다. 이때 종이, 문자, 관료, 돈이 서로 접속된 복합체가 조세의 배치를 구성한다면 종이, 문자, 저자, 독자의 복합체는 문학의 배치를 구성합니다.

배치란 이처럼 복수의 기계들이 접속하여 만들어지는 다양체를 뜻합니다. 여기서 배치는 구조라고 부르는 것과 어쩌면 유사한 이론적 기능을 합니다. 그것은 상이하게 반복되는 특이성을 표현 하기 때문이죠. 문학이 배치 안에서라면 종이에 기록된 것은 숫자 나 그림 조차 작품이 됩니다. 그것이 과연 훌륭한 것인지는 별개 이지만 말입니다. 구조 개념과 다른게 있다면 배치란 구조와 달리 쉽게 다른 배치로 이행한다는 것입니다. 가령 문학의 배치에 돈을 하나 추가한다면 얼마나 팔리느냐가 기록되는 것을 규정하는 아주 다른 배치로 넘어갑니다.

또 하나의 다른점은 구조라는 개념은 계열화 되는 항들을 동질화 하는데 반해서 배치는 이질적인 것 그대로 계열화 한다는 것입니다. 가령 한 언어의 구조를 말하려면 소리는 음소라는 동질적 대상으로 환원해야 하고 문장의 의미는 형태소나 통사 같은 동질적 성분으로 환원해야 합니다. 반면 배치 개념은 단어와 표정, 손가락, 어조 같은 아주 이질적인 것들을 그대로 계열화하여 낭독의 배치, 욕설의 배치, 강의의 배치 등 상이한 배치들을 구별하고 해명할 수 있습니다.

기계와 배치 개념의 이러한 인접성 때문에 안티오이디프스에서 배치는 기계적 배치로 한정되어 사용됩니다. 즉 안티 오이디푸스에서는 언표 행위의 배치란 개념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대신 언표 행위의 집합적 대행자라는 개념이 사용될 뿐입니다. 반면 그 이후에 쓴 카프카 나 천의 고원등에서는 배치는 기계적 배치와 언표 행위의 배치로 구별되고 양자에 대해 모두 등가적인 의미로 사용되죠. 나아가 기계적, 언표 행위와 같은 관형어 없이 그 자체만으로 사용됩니다. 카프카의 마지막 장 제목의 배치란 무엇인가 ? 라는 점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 줍니다.

천의 고원은 한마디로 말해 배치에 대한 책입니다. 먼저 이 책의 각각의 고원은 언어와 기호, 유기체, 얼굴, 사회와 정치, 국가, 예술 등에서 발견되는 다양한 배치에 대한 분석입니다. 또한 그러한 영역에서 삶의 양상을 형성하는 욕망과 권력의 배치에 대한 분석이며 각각의 배치에서 영토화와 탈영토화의 선이 그려지는 양상에 대한 분석입니다. 혹은 그런양상 들을 형성하는 다양체로서의 무의식에 대한 분석이 고 하나의 배치에서 다른 배치로 이행하는 강도적 변이에 대한 분석입니다.

약간 각도를 바꾸어 보면 천의고원은 배치라는 중간을 통해 지층화 된 것을 영토화 하고 탈영토화 하는 운동에 대한 책이며 지층들로부터 탈 영토화 의 선을 밀고 나가 추상 기계와 일관성의 구도에 이르는 길을 찾는 책입니다. 개념에 대한 사전 인양 서술된 이 책의 결론에서 우리는 이러한 사회의 흐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구체적 규칙과 추상적인 기계들 라는 부제의 결론은 지층, 지층화에서 시작하여 배치로 이어집니다. 그 다음에 그 배치의 양상을 서술하는 리좀이란 개념을 통과한 뒤 일관성의 구도, 기관 없는 신체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거기에 탈영토화와 추상 기계가 부가 되면 끝나죠. 지층이 구체적 규칙의 가장 완고한 극 이라면 그 규칙이 추상화 되어 이루게 되는 강도 영의 순수 잠재성이 그 반대 극입니다. 추상기계가 그리고 절대적 탈영통화를 통해 도달하는 일관성이 구도가 거기에 있지요. 이러한 사유의 흐름은 대부분 고원이 지층화된 것들의 배치에서 시작하여 일관성의 구도로 마무리 된다는 사실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배치는 지층 들 사이에 있다는 점에서 간지층이 라는 말은 이런 의미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천의 고원에서 모든 배차가 4가성을 갖는다고 합니다. 먼저 기계적 배치와 언표 행위의 배치는 하나의 배치가 갖는 두성분 혹은 두 가지 속성을 표시합니다. 달리 말하면 이는 내용과 표현 이라는 성분인데 전자가 신체적인 것에 속한다면 후자는 비신체적인 것에 속합니다. 실체의 두 속성에 대한 스피노자의 개념과 대응하는 구별이죠. 다른 한편 모든 배치는 그에 속한 요소들을 결합하여 안정화하는 재영토화힘을 갖는 동시에 그로부터 이탈하여 다른 배치로 이행하는 탈 영토화의 첨점을 같습니다. 예컨대 내용과 표현 혹은 기계적 배치와 언표 행위의 배치라는 두 성분과 그 각각의 포함된 재영토화 하는 힘과 탈영토화에 첨점이 모든 배치의 포함된 4가성을 표현합니다.

예를 들어 학교는 강의실이 라는 분할된 공간, 교탁과 책걸상, 나이에 따라 동질화된 학생들 교과서 등이 결합된 기계적 배치로 구성 되죠. 또한 교사나 학생들의 언행을 규제하는 규칙들 교육에 대한 지식들 지위에 따른 발언권의 분배, 발언의 내용과 방식을 규정하는 규칙들 등으로 구성되는 언표 행위의 배치가 거기에 동시에 있습니다. 언표 행위의 배치는 신체적 기계적 성분들이 서로 부딪히고 조절 되는 양상을 규정하며, 기계적 배치는 그러한 언표 행위들이 물리적 유연성을 갖게 하는 조건이 됩니다. 다른 한편 교육의 중요성이나 교육방법, 시험이나 처벌의 유용성 같은 것은 상이한 기원을 갖는 이질적인 것들을 하나로 묶어 재영토화 합니다. 반면 교사, 학생 관계 만큼이나 학교에 중요한 요소인 학생과 학생의 관계는 가르치고 배우는 학교의 배치로부터 이탈할 수 있는 가능 지대를 형성합니다. 시험으로 환원되지 않는 관심이나 능력, 교육의 기능을 초과하는 처벌 등 도 그렇습니다. 이러한 요소들이 학교의 배치 안에 존재하는 탈영토화할 첨점이라고 하겠습니다. 여기에서 작동하는 탈영토화의 힘이 재영토화하는 힘을 초과할 때 학교의 배치는 다른 끝으로 이행하게 됩니다.

들뢰즈는 배치야 말로 현실적 최소 단위라고 말합니다. 최소한의 현실적 단위는 단어도 관념도 개념도 시니피앙도 아닌 배치입니다. 이는 문학과 관련해 한 말이므로 언표 행위의 배치에 직접 해당 되는 말이지만 기계적 배치도 다르지 않습니다. 요컨대 현실에서 활동하는 최소 단위는 주체도 개인도 사람도 생물도 아닌 배치입니다. 가령 학교에서 건물이나 책상이 독자적인 활동 단위가 아닌 것처럼 교사나 학생 교장 또한 독자적 활동 단위가 아닙니다. 사실 사람을 언제나 주체라고 보고 다른 요소들을 그의 도구라고 보는 인간 중심적 관념으로는 뭔 소리야 라고 할 얘기지요. 하지만 하나의 배치안에서 함께 작동하던 이웃 기계들 없이 집이나 카페 같은 곳에서 개인이 교사의 언행을 하게 된다면 또라이 아니면 꼰대가 됩니다. 현실에 존재하는 최소 단위가 배치 라고 한다는 것은 이러한 뜻입니다.

그럼 배치 안에서 사람이나 사물 등 각각의 기계는 대체 무엇이고 그들의 행동은 무엇이냐 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그 배치가 요구하는 바를 실행하면 대행자 입니다. 여기서 배치 라는 말이 프랑스어 앙자스망의 번역어 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장쓰는 대행사무소 나 중개소를 뜻 합니다. 누군가로 부터 부여받은 과제를 수행하는 대행자와 직결된 말이죠. 들뢰즈는 말년에 저작 다이얼로그에서 아장쓰 라는 동사 또한 이와 연결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는 영역본에서는 어셈블링 이라고 되어 있어서 에이전트와 결부된 의미가 살아나지 않습니다. 뭐뭐를 위해 말하거나 뭐뭐를 대신해 말하는 것이 대행 이지요. 혹은 과제를 부여한 누군가와 함께 말하고 함께 쓰는게 대행입니다. 연예인 에이전씨가 표방하는 게 이런 말이죠. 무역상 이나 대리점도 그렇습니다. 누군가를 위해 그가 부여한 과제를 위해 그를 대신해 일하지요. 그런 점에서 대행이란 중간에 있는 것이고 상이한 두 세계가 만나는 선 위에 있는 것입니다.

학교의 배치 안에서 교사나 교장은 모두 그 배치의 대행자 입니다. 책상이나 시험 시간표도 그렇죠. 학생을 위하여 교육을 위하여 그 배치가 부여한 과제를 나름대로 실행하는 대행자 입니다. 대행은 한 배치 안의 기계 사이에서도 일어 납니다. 글을 쓰려는 욕망을 위해 타자기를 다룰 때 타자기는 글을 쓰려는 작가의 의지를 대행합니다. 역으로 타자를 잘 다루려면 타자기에 자신의 손과 눈을 길들여야 합니다. 즉 타자기의 기계적 의지를 신체가 대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랬을 때 자신들이 타자기 같은 기계를 다른 작동자이지만 동시에 그 기계가 선택하여 다루는 재료 라고 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학교의 배치 안에서 교사는 교과서나, 시간표에 내장된 욕망을 대행하며 그런 방식으로 학생들을 위해 행동하는 대행자입니다. 학생들 또한 강의실이 나 시간표가 요구하는 바를 실행하는 충실한 대행자가 되길 요구 받습니다. 강의실이 나 시간표는 역으로 또한 학생들을 가르치려는 교사의 의지를 대행합니다.

이처럼 어떤 배치 안에서 각각의 기계는 이웃한 기계들의 대행자 입니다. 조금 더 강하게 말해 배치들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모두 그 배치의 부품이자 톱니바퀴 입니다. 하나의 톱니바퀴는 이웃한 톱니바퀴 의지를 다른 톱니바퀴에 전달하는 대행자입니다. 물론 대행이 항상 정확하게 이루어 지지 않습니다. 모든 기계는 고장 나면서 작동 하죠. 그렇게 삐걱 되면서 하나의 배치는 하나의 다양체 로써 작동합니다.

권력이란 이처럼 주어진 배치 안에서 이웃한 톱니 바퀴에게 대행을 요구하는 욕망이고 그에 따라 작동하는 복종을 통해 실현되는 의지 입니다. 그렇게 권력과 욕망은 다른 것이아닙니다. 권력에 대한 욕망은 없다 . 권력이 욕망이다. 배치안에서 각자는 이웃한 기계들에게 복종하는 대행자이고 노예입니다. 동시에 자신은 이웃한 기계들에게 대행을 즉 복종을 요구하는 주인입니다. 이처럼 이웃한 톱니, 선분의 작용의 맞추어 움직이도록 하는게 권력이란 점에서 권력은 선분적 이라고 합니다. 각각의 선분은 권력이다. 그것은 욕망의 형상인 동시에 하나의 권력이다. 각각의 선분은 기계 내지 기계의 부품이다.

이는 권력과 욕망에 대한 새로운 사유를 함축한다. 안티 오이디푸스에서는 기계적 배치를 통해 욕망을 다루긴 했지만 억압에 대한 욕망과 혁명적 욕망, 억압하려는 욕망과 억압 받으려는 욕망이라는 대립이 확실하게 있었습니다. 대중은 왜 자신에 대한 억압을 욕망 하는가? 라는 물음 자체가 이를 보여줍니다. 반면 권력이 선분적으로 작동한다는 말은 각 부품이 이웃 부품에 대해 특정 욕망을 대행하기를 요구하는 동시에 다른 이웃 부품의 욕망을 대행함을, 그의 명령을 따라 작동함을 뜻합니다. 모든 부품은 이웃 기계에게 명령하는 주인이면서 다른 기계의 명령을 실행하는 노예입니다. 어느 위치에 있는가에 따라 다른 기능을 할 뿐입니다. 억압은 억압하는자에게나 억압 받는 자에게나 욕망 권력의 이러저러한 배치, 기계들의 이러저러한 상태에서 연연한다. 억압이 기계에 의존하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이로써 욕망과 권력이 서로 내재적인 관계에 물려 들어가 있음이 분명해 집니다. 배치란 욕망과 권력의 내재적 장입니다. 그러나 욕망과 권력이 내재적 이란 말은 양자가 동일함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배치안에서 위상만이 아니라 작동하는 방식도 다릅니다. 권력은 하나의 배치 안에서 자신의 욕망을 다른 부품에게 대행하고 그것이 제대로 실행 되었나를 확인하는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이때 시작과 끝이 중요합니다. 선분 이란 두 끝점이 뚜렷한 선 이지요. 두끝점이 권력이 작동하는 지점입니다. 지금은 점심시간 이 아니라 수업시간이야. 이런 식으로 권력은 시작점에서 작동합니다. 시험이나 평가는 끝점에서 작동하는 권력을 가동시키는 데 끝에서 만이 아니라 중간으로서 소급 되며 작동 하죠. 아니 시험 어떻게 보려고 그래. 권력은 이로써 배치안 에서 재영토화하는 힘을 가동 시킵니다.

그러나 기계는 고장나며 작동 하죠. 충실한 부품이길 정지하고 명령의 수행 을 거부하며 심지어 그 배치에서 이탈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권력은 정지되고 권력에서 이탈한 욕망이 탈주선을 그리게 됩니다. 이것이 탈 영토화의 첨점에서 벌어지는 일입니다. 이 욕망은 다른 배치로 이행 하거나 새로운 배치를 창안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구성된 배치 또한 재영토화의 힘을 가동 시켜야 합니다. 즉 권력의 배치로써 작동하게 됩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욕망은 선분화된 권력을 흘러 넘치 외부로 흘러 간다는 사실입니다. 즉 새로운 배치를 창안 하는 것은 욕망이며 권력은 만들어진 배치 안에서만작동합니다. 배치는 권력의 배치이기 이전에 욕망의 배치 라는 명제, 권력보다 탈주선이 선행 한다는 명제는 이런 말입니다. 주어진 배치를 벗어나 새로운 배치를 만드는 것은 욕망이며 권력은 욕망이 만든 배치 안에서 그것을 유지하는 방식으로만 작동한다는 것입니다.

기계가 대행자 라는 개념도 이런 양면성이 있습니다. 배치는 이질적인 부품들이 결합되어 구성되고 작동합니다. 그렇기에 배치가 하나의 다양체로 작동하려면 이 이질적인 것들이 서로 협동하여 하나의 집합체로 작동하도록 해야 합니다. 배치는 공기능이고 공감이 며 공생입니다. 물론 이때 공감은 신체와 신체가 부딪침이고, 그 사이에서 발생하 갈등과 투쟁을 함축합니다. 따라서 대행한다면 요구되는 바를 그대로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대행자는 중간 입니다. 훌륭한 대행자는 주인의 욕망을 그대로 재현하는 대변자가 아니라 두부품 사이, 상이한 두 세계의 중간에서 간극이나 마찰을 조정하는 자이고 중간에서 주인의 요구 자체를 바꾸는 자입니다. 가령 광인을 대신 쓴다 함은 광인을 대변하며 쓰는게 아니라 차라리 광인으로부터 광끼 를 구해 내며 쓰는 것입니다. 광인의 입장을 수용하며 쓰는게 아니라 광인과 정상인의 중간에서 삶을 위해 긍정적인 어떤 것을 찾아내며 쓰는 것입니다. 요컨데 대행자는 이웃한 권력의 요구를 충실히 실행하는 자이지만 훌륭한 대행자란 이질적 부품들을 공감하고 공생하게 하는 자 이면서, 새로운 배치를 향한 이행의 성분을 동시에 가동하는 자라고 해야 합니다. 기계란 언제나 하나의 배치, 하나의 영토를 개방 하거나 폐쇄하는 특이한 열쇠라고 하는데, 이는 배치 안에서 대행자의 두극에 대한 문장 이기도 합니다.

 

 

 

안티 오이디푸스 이후 코드화는  영토화와 짝을 이루지만 동시에 대비되면서 그만큼 자주 사용되는 개념입니다.  코드란 암호나 부호, 규칙   뜻하는데 정보 통신이나 언어 활동과 결부되어 흔히 사용됩니다.  상대방이 하는 말을 알아 들을려면  말을 사용하는 코드를 알아야 합니다. 문법은 물론 소리와 단어들을 분절하는  규칙도 알아야 합니다. P F 구별하는 분절 규칙이 없기에 한국인은 Punk Funk 구별하기 쉽지 않습니다.  둘은 아주 다른 종류의 음악이지만 한국어로 표기하면 둘다 펑크가 됩니다. 말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이와 입술 사이로 바람 새는 소리를 뚜렷하게 내서 내가 지금 내는 소리가 f  시작하는 말임을 확실하게 하지 않으면 목청껏 Puck You  라고 해도 미국인은  소리야  겁니다.  한국어의  원래 f 발음이 없으니 평소대로 발음하면 Puck You  겁니다.  나중에야   소린지 알아 들은 상대방은 오히려 웃을겁니다. 그걸 욕이라고  거냐고. 욕을 하려해도 코드를 따라야 합니다. 

 

암호는 의미를 이해할  없도록 부여  것이지만 동시에 그것을 전송받은 상대가 해독할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은닉된 코드가 사용됩니다. 코드화 한다 함은 기호 사용 규칙을 이처럼 부호화  하는 것을 뜻합니다.  또한  규칙에 따라 기호를 사용하게 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주어진 기호 사용 규칙에서 벗어나는것을 탈코드화 라고 합니다. 그렇게 규칙에서 벗어난 기호들의 새로운 규칙을 만드는 것을 재코드화 하라고합니다.  주의할 것은 정해진 규칙에 따라 어떤 기호들을 다른 기호 들로 바꾸는 것을 코드화라고 바로  규칙에 의해  기호들을 원래 기호로 되돌리는 것을 탈코드화라고 하는 정보 이론이나 소통 이론의 통상적인어법과  다르다는 점입니다. 

 

A T G C  구성되는 유전자 정보와 단백질을 만드는 과정도 코드를 통해 작동합니다.   개의 뉴클레오티가 결합하여 아미노산의 코드를 형성하고  아미노산 분자들이  다른 코드에 따라 결합되어 단백질이 만들어집니다. 하지만 DNA  유전자 코드를 RNA 복사하고 전달하는 과정에서 스플라이싱(Splicing) 자리바꿈 인자 레트로바이러스  다양한 요인에 의해 탈코드화가 발생합니다. 유전 공학은 역전사 유전자를이용해 유전자 코드를 목적에 맞게 재코드화 하려는 기술입니다. 이처럼 의미화의 지층  아니라 유기체의지층에서도 코드화와 탈코드화와 재코드화는 일상적으로 일어납니다.  코드란 말은 법이나 규약  뜻하기도 하고 그처럼 명시적 이지 않은  규칙들  지칭합니다.  신분적인 코드,  직업적인 코드,  젠더적인 코드,  종교 의례나 식사매너,  식사나 의복,  요리를 규제하는 다양한 문화적 코드들이 있습니다.

 

만나고 헤어질 때의 예절,  교통신호나 스포츠  게임의 규칙도  코드입니다. 인간이 사는  어디나 코드가있습니다. 사회는  구성원들에게 주어진 규칙에

충실하게 복종할 것을 요구하고 강요합니다. 사회적 코드에  충실히 복종할   사회에서 요구하는 주체가됩니다.  사회적 코드는 이처럼 주체화의 지층을 구성하고 유지합니다.  그런데 사회적 코드는 사회를 상이한코드에 따르는 집단들로 분할하고  위계화  합니다. 자유인과 노예 귀족과 농민은 결코 인간 같은 하나의 범주로 묶일  없는 상이한 질의 집단 입니다.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의 엄격한 분화를 유지하는  카스트는 이런 코드화  집단의 불연속성과 위계성을  극단적으로 강화한 체제입니다. 

 

주체화는 이렇게 분할된 상이한 코드에 따라 상이한 주체들을 생산합니다.  이처럼 상이한 코드들의 실존은상이한 집단에 속한 이들에게 의문과 저항을 야기합니다.  신분에  반하는 투쟁 들이 역사적으로 반복되었던  것은  때문입니다.  투쟁의 양상이 아니어도 주어진 코드에서 이탈하려는  시도들도 끊임없이 발생합니다.  농노나 노예 신분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아 도망치는 흐름도 있고 공동체로부터 추방되어 표류하는 이들도있습니다.

 

젠더적 코드의 강요를 벗어나 다른 옷을 입고 다른 연인을 선택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주체화의 지층에서 이탈하는 탈주선을 그리는 것입니다.  이런 탈주선이  집합적인 유출의 흐름을 형성할  주어진 코드로 부터탈코드화  흐름이 형성됩니다.  탈코드화  흐름이 범람 하게 되면 신분,  직업,  젠더 등의 지층을 형성하고  코드들이 와해  됩니다.  가령 서구의 봉건 사회는 도시를 찾아 도망치는 탈코드화  흐름에 의해 또한엔클로저에 의해 토지를 잃고 부랑하게  농민 들의 탈코드화  흐름에 의해 해체 되게 됩니다. 그러나 이처럼 탈코드화된 흐름이 범람 하게 되면 사회나 질서 혹은 통치가 불가능하게 됩니다.  그래서 대게 다른 코드들로  흐름을 포획하려 하게 됩니다.  재코드화하는 시도들이 발생하는 겁니다. 코드화가 기존의 상이한코드들을 와해 시키고 탈코드화  흐름을 유출시켜 거대한 하나의 코드로 통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를초코드화 하라고 합니다. 

 

가령 중국 최초의 거대 제국인 진은 이전의 부족 집단들이  작은 국가들을 하나의 국가로 통합해 씁니다 이는 이전 사회의 코드  속했던 신분이나 직업에서 이탈하는 탈코드화된 흐름을 야기합니다.  제국의 국가는이들을 광산 이나 제련  제국적 필요에 따른 새로운 영토로 영토화 합니다.  영토화가 코드화가 아니라 탈코드화와 짝을 이루는 경우라 하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왕조는 도량형과 화폐, 문자와 역등을 통일 합니다. 이전의 코드들을 해체하고 새로운 하나의 코드로 초코드화  것입니다.  그런데  경우에는 신분이나직업 등의 새로운 집단의 분할과 위계가  도입되기에 이러한 초코드화는 여전히 하나의 코드화의  일종이라고 해야 합니다.

 

이와 달리 초코드화의  일종이지만 탈코드화  흐름을 다시 위계화된 집단으로 나누지  않고  집단에 상이한 코드를 부여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코드 없는 체계로 통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엔클로저로 인해 토지를 잃은 거대한 불황의 흐름이 출연하는데 이들은 직업이나 신분을 잃은 만큼  신분적 예속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토지로부터 탈영토화 되고 신분에서  코드화   잠재적 노동력의 흐름이 자본의 흐름  만날 자본주의가 탄생합니다. 자본주의는 이들을 다시 신분 으로 재코드화 하지 않습니다. 시장에서는 신분이 무언가는 전혀 중요하지 않죠.   상품을 얼마에  사겠다는  지만 중요합니다. 시장의 논리는 모든 이들에게이런 종류의 등가성을 부여합니다.  인간이란 보편적 범주가 이로부터 출연합니다. 이전에는 신분적 코드가무엇을 하고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행동해야하는지를 규제 했습니다.  코드가 사라지면 이런 규제가 불가능해집니다.  사회가 어떻게 가능한가?  라는 홉스의 질문은 이로부터 나온 겁니다.

 

자본주의는 신분에 따라 정해진 코드 대신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는 보편적 규칙의 체계를 수립합니다.  고용을 통해 직업을 얻어라.  노동을 통해 가치를 생산 하라. 노동을 하지 않으면 먹을  없다.  등가교환의 따라물건을 사고 팔라.  모든 가치의 척도는 돈이다 등등.  이전의 코드로 부터 이탈한 흐름 전체를 하나의 보편적규칙들의 체계로 통합했다는 점에서  또한 초코드와  일종입니다.

 

그러나 이전의 제국적 초코드화가 위계적 지위를 갖는 집단으로 사람들을 재분할하고  속한 집단에 따라 다른 규칙을 강요하던 것과는 확실히 다릅니다. 일종의 공리처럼 자명해 보이는 보편적 규칙들의 체계로 통합했다  점에서 이를 공리계화 라고 합니다.  하나의 지층 안에서 발생한 탈영토화 운동이 다시 어떤 영토로재영토화 되고  다시 탈코드화  흐름도 재코드화 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탈코드화란 기존의 코드를 대대적으로 부수어 없애기도 하지만 특정 요소를 살짝 바꾸는 것만으로도 가능한 경우가 많습니다. 유럽의 고전음악 에는 여러 형식의 코드들이 중첩되어 있습니다.  화성 조성의 코드, 대위법이나 소나타  학곡 형식의코드,  협주곡 이나 교향곡 등의 장르적 코드 등등 악보로 그려진 하나의 작품은 복수의 코드들이 중첩된 결과물 이죠. 연주와의 관계에서 보면 악보 또한 연주자의 행위를 반복하게 하는 일종의 규칙이란 점에서  하나의 코드라고   있겠습니다.  연주자는  악보 코드에 따라 연주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속도 내지 템포는 주어진 리듬 패턴이나 선율을 그대로    코드   있는 계기를 제공합니다.

 

안단테,  프레스토  템포 기호를 악보에 적어 두지만 사실 템포 자체는 연주할 때마다 달라집니다.  연주자가 자신의 해석을 강조하기 위해 크게 바꾸기도 합니다.  글렌 굴드는 느린건  느리게 빠른   빠르게 연주하여 자기 색깔을 만듭니다.  터치  악기 소리에 강도도 악보를 그대로   바꿀  있습니다.  째즈 뮤지션은 주제의 진행을 따르면서 선율을 바꿉니다. 이것들은 정해진 악보의 명령으로부터 이탈하는 유연성이나 탄력성을 가능하게 해주는 여백 이라 하겠습니다.   여백이 허용하는 가변성은 그것만으로도  코드와가능하게 해줍니다.  이러한 여백을 들뢰즈 가타리는 탈코드화의 여백 이라 합니다.  언어도 그렇습니다.  같은 문장이라도 읽거나 말할 때마다 우리는 다른 톤으로 읽거나  말하기 마련이죠.  그런데  톤을 비명 소리에 가깝게 크게 하거나 몽골인들의 후미 창법 처럼 아주 낮은 목소리로 발화하면 애초에 기호에  담겨있던 의미는 사라지고 비언어적인 소리  바뀝니다.

 

, 이건 동물의 소리야 !”   여기서 음성적 또는 의미화 하는 언어로 부터 벗어나는  코드화의 여백을 제공합니다.  그리고 이런 소리가 반복되며 어떤 새로운 규칙을 갖게 되면 다른 유형의 소리로 재코드화 됩니다.  스트라빈스키는 무용 음악 봄의 제전에서 악센트의 규칙성을 깨는 불규칙한 강박을 사용해서 서양음악의 박자 구조를 탈코드화 했죠. 메시아앙은 이렇게 탈코드화  박자를 비서구 음악의 리듬을 이용하여 새로운 리듬 선법으로  코드 합니다.

 

이처럼  탈코드화의 여백을 통해 발생하는 탈코드화와  재코드화를 코드변환이 라고 합니다. 이러한 코드 변환은 대게 어떤 코드의 사슬로 부터 일부를 떼어내 자신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이용하는 것입니다.  이를 들뢰즈 가타리는 코드의 잉여가치를 포획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모든 코드는  이상의 조각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조각들은 하나의 사슬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슬에 묶여 있기에 조각들은 자유롭게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탈코드화의 여백을 통해 일부 조각을 떼어내 다른 방식으로 사용할  있죠.  다른 코드 속에 넣어서  일부로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경우 떼어낸 조각은 애초에 갔던 가치와 다른 가치를 갖게 됩니다.   조각이 갖는 잠재성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애초에 갖던  가치 이상의 가치란 점에서 이를 잉여 가치라고 합니다.

 

이런 잉여가치는 애초에 속했던 코드안에서의 가치를 초과하는 잉여 가치란 점에서 코드의 잉여가치 입니다.  코드 변환을 통해 어떤 코드의 조각을 이용하는 것은 이러한 잉여가치를 자신의 이득을 위해 영유하는것입니다.  이를 잉여가치의 포획 이라고 합니다.  앞서 음악 연주자들은 자신의 음악적 해석이나 스타일을위해 작곡자가 악보나 이전 음악 속에 코드화 했던 소리들을 떼어내 코드의 잉여가치를 포획하는 것이라고하겠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애초에 맑스가 경제학적 개념으로 정의해 놓은 잉여 가치란 개념이 해석이라는 주관적개념으로 해소되는  아닌가 하고 반문   있습니다.  그렇진 않은데 먼저 경제학의 경우를 보자면 원격지 교역을 통해 상품을 팔아 얻는 이득이 바로 코드의 잉여가치 입니다.  상품의 사용 가치와 교환 가치는 사회마다 다르게 코드화 되어 있습니다. 소의 내장이나 뼈는 미국에선 먹지 않고 버리지만 한국에선 훌륭한 음식 재료지요.  러시아에서 사슴의 뿔은 별다른  모가 없지만 한국에선 귀한 약재죠.  이처럼 어떤 사회의 코드화  가치의 사슬로 부터 내장이나  같은 일부 조각을 떼어 내어 코드를 달리하는 사회속으로 이전 시키면 코드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잉여 가치를 포획할  있습니다. 원격지 교역에서 상인들이 얻은 이득은 이처럼 코드의 잉여 가치 경제적 형태를 보여 줍니다.  생명체의 생존에서도 코드의 잉여가치는 널리 발견 됩니다.  말벌의 형태를 모방하여 말벌을 유혹하고 그것을 이용해 수분하는 난초  이웃한 식물의 잎을 모방하는보킬라 트리폴리아타의 의태는 생명체가 자신의 생존을 위해 다른 개체들로부터 코드의 잉여가치를 포획하는 경우입니다. 

 

자궁속에 인간의 태아가 모체의 면역반응을 면할  있는 것은 인간의 유전체 안에 있는 ERV-3 라는 레트로바이러스의 유전자 코드 덕분입니다. 애초에 바이러스의 유전자 사슬에 속해있던 유전자 조각들을 포획해  코드의 잉여가치를 획득하는 것이죠.  생명의 자리란 탈지층화의 잉여가치를 뜻한다는 들뢰즈 가타리  말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있을 겁니다.

 

사실 인간의 유전체 안에는 유전자 보다 많은 바이러스나 미생물 유전자가 들어 있다고 하죠. 알파프로텍터박테리아나 고세균의 뜻하지 않은 공생은 동물이나 식물의 유전 형질 자체가 이질적인 미생물들의 유전자들을  코드와 하여 구성된 것임을 함축하합니다.  코드는 그에 고유한 탈코드와 과정으로부터 분리할  없다.  유전적 표류  없는 유전학  없다.  현대 돌연변이 이론은 코드가 필연적으로 개체군과 연관되어 있으며 본질적인 탈코드화의 여백을 갖는다는 것을 명쾌하게 보여주었다. 이는 코드들 간의 번역이 아니라 우리가 코드의 잉여가치 또는 방계적 소통이라고 부르는 단일한 현상과 관련된다.”

 

그런데 안티 오이디푸스에는 이와 약간 다른 뉘앙스로 코드의 잉여 가치 개념이 사용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가령 포틀레치나 쿨라 같은 의례화된 증여에서는 주고 받는 선물에 비평형성이 두드러집니다.  말하자면 받은 것보다 많은 것을 주는 자가 이기는 게임입니다. 이때 많은 것을 주는 자는 위신을 획득합니다. 이는 주고받은 선물의 비평형성을 만회하는 요소인 셈인데  책에선 이를 코드의 잉여가치 라고 합니다.  니체에 따르면 형벌의 기원에는 죄인이 끼친 손해만큼 고통을 주는 생각해보면 기이한 방정식이 있죠. 이는 죄인의 고통에서 눈이 없는 쾌감 때문에 가능한 것이며  쾌감이 바로 코드의 잉여가치 라고 말합니다. 이는 코드의 조각을 이용해 얻는 잉여가치 보다는 특정한 코드 안에서 선물이나 채무가 야기한 비평형성과 짝을 이루는 어떤 대가를 뜻합니다. 이는  다른 코드로 이행하는 데서 발생하는  아니라 주어진 코드 안에 있지만 명시되지 않은 어떤 이득입니다.  이러한 뉘앙스의  개념은 천의 고원  가면 사라지고 코드의 잉여가치는 어떤 코드의 조각을 다른 코드로 옮기는 코드 변환과 대응되는 개념으로 명확하게 한정됩니다.

 

 

 

탈영토화와 재영토화라는 개념은 안티오이디푸스에서 처음 등장하는데요. 이후 들뢰즈 가타리가 가장 빈번하게 사용하는 개념 중 하나가 됩니다. 영토, 영토성, 영토화라는 개념이 여기에 추가되어야 합니다. 언어적 형태를 보면 영토라는 말이 일차적 이지만 이 개념을 가동시킨 문제 설정에서 가장 중요하고 일차적인 것은 탈영토화 운동 입니다. 몇 개의 핵심개념에 대해 요약하듯이 서술하는 천의 고원 결론에서 그들이 탈영토화를 표제로 뽑은 것은 이 때문입니다.

 

짐작하시겠지만 영토, 영토성이란 개념은 원래 동물 행동학에서 나온 것입니다. 거주하고 먹이를 얻고 짝짓기를 하는 특정한 구역이 영토이고, 그 영토를 형성하고 방어하며 영토에서 영토로 이동하려는 상향이 영토성 이지요. 개나, 늑대, 새들이 영토를 표시하기 위해 분변을 배설 하거나 소리 또는 시각적 표지를 이용하는 것은 이미 잘 잘 알려진 일 입니다. 인간은 좀 더 강력해서 영토에 대해 배타적 처분권을 보장하는 법적 권리를 사용하고 울타리를 치거나 담장을 세워 침범을 저지하며 관문을 만들어 드나드는 사람들을 선별합니다. 그 안에 있는 이들에게 돈을 뜯어 내기도 하고요. 끔찍할 만큼 영토성이 강한 동물이죠. 

 

영토화란 원래 자신에게 속하지 않았던 것을 자신의 영토로 만드는 것이고 탈영토화는 자신이 영토로 삼고 있던 곳을 떠나는 것입니다. 탈주선의 작동 입니다. 재영토화란 영토가 아닌 곳을 새로운 영토로 삼는 것입니다. 영토를 찾아 나설때조차 떠나는 운동 없이는 영토란 있을 수 없기에 역설적이지만 가장 일차적인 것은 탈영토화 입니다. 고향을 떠나 본 적이 없는 사람에겐 고향이란 관념이 없듯이, 떠나고 이동하는 운동 없이는 영토란 관념도 없지요. 말하자면 영토란 영토화의 산물이고 영토화란 영토 아닌것을 영토화 하는 것입니다. 즉 영토화는 언제나 재영토화 입니다. 이는 주어져 있는 것을 떠나는 운동 즉 탈영토화 운동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탈영토화와 운동이 영토나 영토화 보다 일차적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운동의 양상이나 강도는 상이한 삶의 방식과 연결되어 있는데요. 예를 들면 사냥하는 동물이 그러하듯 수렵민은 자신이 사냥하는 영토를 같습니다. 채취 생활인 또한 영토를 갖겠지요. 영토의 범위는 사냥이나 채취를 위해 자신이 거주하는 곳에서 얼마나 멀리 이동 하는가가 결정합니다. 즉 탈영토화 운동이 영토의 크기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수렵하고 채취하는 사람들에게는 영토 자체가 욕망이나 생산의 직접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영토의 범위는 유연하고 가변적 입니다. 치명적인 재난 같은 특별한 상황이 아니라면 영토를 둘러싼 충돌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동물들이 그러하듯 통상적 상황이라면 서로 영토에 대해 존중하며 살아 갑니다. 목축을 하는 유목민도 그렇습니다. 계절이나 조건에 따라 이동을 하며 살기에 영토를 확보해 둘 이유가 없습니다. 이동을 위해 머물 뿐이니 재영토화 조차 탈영토화 운동의 일부라고 하겠습니다.

 

영토성이 급격하게 증가하게 된 것은 농경 생활과 더불어서 입니다. 토지가 노동의 직접적인 대상이자 생산물의 원천 이기에 생존 조건을 확보 한다고 하는 것은 곧 영토를 확보하는 것과 같은 말이 되기에 그렇습니다. 농경이 시작되면서 대지는 노동이 가해지는 대상이 되고 투입되는 생산요소가 등록될 뿐 아니라 그 자체가 생산물을 산출 하는 핵심적인 자산이 됩니다. 영유하거나 이용하는 대상이자 소유 대상으로의 토지가 이처럼 대지와 구별되게 되면서 영토는 인간들이 생산과 욕망이 집중되는 중요한 대상이 됩니다. 영토를 확보하고 영토를 지키는 것이 중요한 일이 되고 이를 위해 무장력을 조직하고 관리하는 사회기계가 출연합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를 영토기계 라고 명명 합니다. 이 영토기계는 사회의 첫 번째 형식이고 원시적 기계 형태이며 사회적 장을 덮는 거대한 기계입니다. 기관 없는 신체로서의 대지라는 표면에 탈 영토화와 재 영토화의 선을 따라 욕망하는 기계들이 복합체인 사회 기계가 세워지는 겁니다. 

 

사실 지구의 표면인 대지는 원래 그 누구의 영토도 아닙니다. 대지는 환경의 모태이고 누군가의 생존 조건이 될 잠재성을 뜻하지요. 주어진 환경을 떠나지 않는 한 대지는 없습니다. 그저 자신의 환경만 있을 뿐입니다. 대지란 어떤 다른 환경이 될 능력으로서 발견 되는데요. 따라서 자신의 환경을 떠나 어디론가 가려는 자들의 눈에만 대지는 대지로서 드러납니다. 탈영토화가 대지를 대지로 만드는 거지요. 그렇게 떠난 자들이 대지의 일부를 영토화 함으로써 영토가 탄생합니다. 즉 대지는 영토화의 장이자 전제 조건입니다. 

 

하지만 도시의 대지는 지진, 홍수 등을 통해서 영토화 된 생산의 장을 지우고 지구의 표면으로 되돌리기도 하는데요. 안티 오이디프스식으로 말하면 생산의 전제이자 생산하는 기계들을 지우는 반생산의 장이라는 점에서 기관 없는 신체라고 하겠습니다. 들뢰즈 가타리는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대지란 욕망과 생산의 원시적이고 야만적인 통일체이다. 왜냐하면 대지는 노동의 복수적이고 분할된 대상일 뿐 아니라 분할할 수 없는 단일한 실체로서 생산력을 향해 반격하여 그것을 자연적 내지 신적인 존재로 영유하는 충만한 신체이기 때문이다 라고 말입니다.

 

인간도 다른 생명체도 모두 대지라는 기관 없는 신체의 표면에서 생존하는 겁니다. 특히 인간은 그 생존 조건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대지의 표면에 금을 긋고 생산요소를 등록하며 소유권이라는 고체적 형식으로 분할하여 영토화 합니다. 하지만 종종 그 모두를 지우는 반생산이 발생하는 거지요. 최근 기후 위기는 인간이 생산능력을 무력화 하며,  지구의 표면으로 되돌리려는 반 생산이란 말을 실감하게 합니다. 

 

동물 행동학에서 기원한 탈영토와 개념은  행동이나 습속에 관한 좀더 일반적인 개념으로 확장됩니다. 단지 대지 위에서 벌어지는 글자 그대로 영토만이 아니라 어떤 크기와 방향을 갖고 진행되는 다양한 운동이나 흐름을 분석하고 서술하는 개념이 되는 것인데요. 예를 들면 인간이나 원숭이처럼 직립하는 동물의 앞다리는 대지로부터 탈영토와 되요. 도구로 재 영토와 될 때 손이 됩니다. 막대기에서 망치로 젓가락으로 펜으로,  손의  짝이 달라질 때마다 탈영토화와 재영토화의 운동이 발생합니다. 이런 저런 대상들을 향하지만 결국은 남근을 향해 움직이는 성욕의 운동, 신분적 코드에서 벗어났기에 무엇이든 해도 좋지만 결국은 돈을 향해 움직이는 자본주의적 욕망의 흐름은 결국은 일자로 귀착되는 탈영토화 운동을 보여줍니다. 대상을 한없이 바꾸는 욕망의 환유도, 자유라고 명명되는 개인의 선택도,  실은 새로운 초월자로 재영토화 되는 그저 바쁜 탈영토와 운동이 옆으로 간 것입니다. 

 

손과 도구에 대해서 언급 했습니다만 얼굴은 이와 약간 다른 유형의 탈영토화와 관련이 됩니다. 얼굴은 머리의 표면이란 점에서 애초에는 신체의 일부 였지만 그 표면에서 발생하는 표정이 표현 능력을 갖게 되면서 얼굴은 신체로부터 탈 영토화 됩니다. 머리로부터 얼굴이 탈영토화 되는 것과 대응하여 환경으로부터 탈영토화된 풍경이 탄생합니다. 환경이 생존의 신체적 조건인 반면 풍경은 환경을 표면에서 표정을 읽어낼 때 발생합니다. 풍경이란 환경이 얼굴화 된 것입니다. 

 

역으로 영화에서의 클로즈 업은 얼굴을 풍경화 하지요. 얼굴은 풍경이라는 상관 자를 갖는다는 말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입니다. 얼굴이 탈영토화 됨에 따라 손이나 발,  손가락 또한 표현 기계가 되지요.  손가락을 세워 욕을 할 때 손가락은 신체로부터 탈영토화 되어 표현 기계가 됩니다.  옷도 그렇습니다.  추위나 물리적 접촉으로부터 신체를 보호하는 것이 옷이지만 옷이 단추와 주머니 칼라 등을 이용해 표정을 갖게 될 때 의상이 됩니다.

 

손의 탈영통화는 언제나 그것에 의해 탈 영토와 되는 대상을 짝으로 갖는데요. 손이 앞 발이기를 그치고 나뭇가지를 들어 바나나를 딸 때, 나뭇가지는 나무의 일부 위기를 그치고 막대기가 됩니다. 나무로 부터 탈 영토화 되어서 도구로 재영토화 되는 것이죠. 이처럼 탈영토화는 언제나 이중적 입니다. 물론 이는 반대편에서 보면 이중적인 재영토화이기도 합니다. 나뭇가지는 막대기가 되면서 도구로 재영토화 되는 것이고 손 역시 막대기를 사용하면서 도구로 재영토화 되는 것이니까요. 그 막대기로 땅바닥에 글씨를 쓸 때에도 마찬가지로 이중적인 탈영토화와 재영토와 운동이 발생합니다.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포괄적 내지, 국제적 재영토화를 동반하지 않는 분열적 욕망의 탈영토화는 없다. 하나는 다른 하나의 이면이다" 라고했습니다. 이처럼 재영토화 되는 짝을 갖는 탈영토화를 상대적 탈영토화라고 합니다. 

 

손의 이러한 탈영토화는 신체 내지는 유기체의 지층 안에서 발생합니다. 반면 얼굴의 이탈 정도는 스피노자식으로 말하면 머리라는 신체로부터 기호라는 비신체적인 것으로 넘어가는 변용이고,  천의 고원식으로 말하면 유기체의 지층으로부터 의미화 내지 주체화의 지층으로 넘어가는 탈영토화 입니다. 즉 상이한 속성, 상이한 지층을 횡단하는 탈영토화 입니다. 이는 하나의 지층 안에서 진행되는 것보다 훨씬 감도가 높은 탈영토화 이지요. 이는 자신이 속해있던 지층 안에서는 어떠한 재영토화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절대적 탈영토화 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 세운 손가락도 의상도 그렇습니다. 

 

여기서 신체와 비신체 머리와 얼굴을 구별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머리를 통제하는 것이 자신의 신체라면 표정에 대한 통제는 위 아래를 따지고 예의를 요구하는 권력이란 점에서 양자는 아주 다르지요. 감시와 처벌에서 푸코가 제시한 신체의 정치학은 사실 신체 보다는 그로부터 탈영토화 된 표면의 통제를 겨냥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신체에 작용하는 권력은 신체적 능력을 생산하기에 생산적 이지만 신체 표면에 작용하는 권력은 명령에 길들인 표현 기계를 생산하기에 생산적 이라 하기 어려워 보입니다. 동일한 목표를 겨냥한 하나의 권력으로 보이지만 다른 목표를 겨냥한 다른 종류의 권력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탈영토화와 재영토화의 개념이 중요한 것은 이처럼 신체적인 것과 비신체적인 것 혹은 상이한 치층 사이를 횡단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속성을 달리하거나 지층을 달리하는 것으로 황단하며 하나의 배치로 묶어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무대와 좌석대 그리고 악기와 같이 신체 적인 것과 연주자나 가수들이 몸짓이나 표정, 선율이나 음색 같은 비 신체적인 것이 하나로 묶이며 공연의 배치가 만들어집니다. 물리적 기계와 표현 기계를 하나로 묶어 자신의 영토적 색채를 확연하게 만들어낼 때 탁월한 연주자가 출연합니다. 상이한 연속성을 갖는 성분들을 하나로 묶는 것이 영토화인데 이는 각 성분을 고집스러운 신체성이나 물리적인 소리로부터 탈영토화하여 자신의 소리로 재영토화 하는 것이지요. 요컨대 상이한 지층에 속하는 것을 하나의 배치로 묶어주는 것이 바로 탈영토화와 재영토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얼굴의 탈영토화는 하나의 지층 안에서는 절대적 탈영토화지만 재영토화를 동반하지 않는 탈영토화는 분명 아닙니다. 하나의 지층에서 다른지 층으로 횡단하는 탈영토화 이고, 다른 지층에서 재영토화 되는 탈영토화이죠. 그렇기에 절대적이란 말은 제한된 의미를 가질 뿐이고, 어쩌면 절대적이란 말에 대한 일종의 반어적 표현이라 해야 합니다. 사실 얼굴의 탈영토화는 탈영토화의 정도가 낮은 것들을 재영화화한 영토가 됩니다. 얼굴이 풍경화 된 표현기계가 됨에 따라 손이나 발 엉덩이 목덜미도 표정을 갖게 되고 자동차도 주전자도 얼굴화 됩니다.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들뢰즈 가타리가 말하는 가장 탈영토화 되지 않은 것이 가장 탈영토화 된 것 위에서 재 영토화 된다 는 말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있겠습니다.

 

두 가지 탈 영토화를 혼동 해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들뢰즈 가타리는 이렇게 씁니다. 이런 상대적 운동들을 절대적인 탈 영토와 절대적인 탈 주선 절대적인 표류의 가능성과 결코 혼동해서는 안된다. 상대적 운동들은 지층 내적 이거나 지층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인 반면 절대적 운동들은 일관성의 구도와 그 탈지층 화 에 관련된 것이다 라고 말입니다.이에 따르면 얼굴의 탈영토화는 지층 사이에서 발생하니 탈영토화 정도가 크다고 해도 상대적 운동에 속합니다. 

 

탈영토화는 어떠한 영토도 갖지 않는 탈영토화 운동입니다. 어떤 영토도 갖지 않지만 모든 영토로 열린 순수 잠재성을 향한 운동이고 모든 형식을 추상하여 일관성의 구도에 이르는 운동입니다. 강도 제로의 순수 잠재성의 수많은 규정 가능성으로 충만한 긍정적 기관 없는 신체에 이르는 운동 말이죠. 이는 현실에 없는 이상이나 이념이 아니라 언제나 실제하는 운동임을 그들은 강조합니다. 절대적 탈영토화는 애초부터 존재하며 일관상의 구도는 도처에 존재하고 항상 근원적 이며 항상 내재적이다. 기관 없는 신체가 일차적 이며 모든 기계를 근저에 항상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탈영화 된 것으로서 이 대지야 말로 절대적 촬영 토 하의 엄밀한 상관자이고 탈영토화 야말로 대지의창조자 라는 말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앞서 앞서 인용한 안티오디디푸스에서 대지와 영토에 대한 서술에서 그렇듯이 바립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