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이란 무엇인가 ? 반복이란 되풀이 되는 것입니다. 아니 되풀이 된다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똑닥 똑닥 시계소리가 반복됩니다. 매일 아침 해가 뜨기를 반복합니다. 매년 여름 장마가 반복됩니다. 하지만 매일 아침 해는 다르게 뜨고, 장마는 매년 다르게 옵니다. 같은 해가 뜨고 같은 장마가 온다고 하는 건 우리가 그렇게 이해하는 겁니다. 우리의 일상이 반복 입니다. 매일 세끼 밥을 먹고, 매번 비슷하게 걸으며 같은 이름을 부릅니다. 그런데 이건 사실 이해한 것이 아니라 외운 것입니다. 무슨 말일까요 ? 암기 없이 한다고요 . 그게 바로 잘 외웠다는 증거 입니다. 식사의 반복은 위장이 외운것이며, 능숙한 걸음은 다리가 외운것이고 , 이름은 귀와 혀가 외우고 있는 것입니다. 영혼 아닌 신체가, 의식 아닌 무의식이 외우고 있습니다. 외운줄도 모르고 외우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차이만이 존재하지만 우리는 그 차이 속에서 반복을 포착합니다. 계절이 돌아오고 별자리가 돌아오고 탄생과 죽음이 돌아 옵니다. 혈관으로 심장박동이 돌아오고, 빛에 대한 눈의 반응이, 소음 속에서 음악이 돌아 옵니다. 포착하는 영혼, 포착하는 신체가 있을 때만 반복은 발생합니다. 그러면 왜 영혼과 신체는 반복을 포착할까요 ? 그게 없으면 세상은 카오스의 것이고, 카오스 속에선 살아가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포착된 반복으로부터 카오스와 코스모스의 결합 즉 카오스모스가 나옵니다. 사실 반대로 말해야 합니다. 감지 가능한 빛의 자극이 먹이를 찾기위한 유리한 기회로 반복될때, 빛에 민감한 기관이 만들어 집니다. 진화입니다. 맛에 대한 쾌감이 반복될때 맛에 대한 미각이 형성됩니다. 습관의 반복 입니다. 신체를 형성하는 반복, 현재의 행동을 형성하는 반복입니다.

습관의 반복, 다음은 기억의 반복 입니다. 사실 습관도 기억입니다. 자극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급한 기억, 과거를 불러내지 않는 기억입니다. 자극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급한 기억, 현재 시제의 기억 입니다. 우리가 기억이라고 말하면 그건 과거 시제의 기억 입니다. 어제본 영화의 기억, 자주 보는 얼굴의 기억, 강의의 기억 입니다. 지금 내가 지각하는 것중에서 중요한 것만 선별하여 장기 기억으로 넘어 갑니다. 그렇게 기억된 것은 지각에 스며 듭니다. 그래서 처음 보는 것도 대개 아는 대로 보입니다. 현재의 모든 지각은 사실 과거의 기억에 맞춰 이뤄집니다. 현재 속에 이미 과거가 있습니다.

우리는 대 체 왜 기억할까요 ? 바로 반복하기 위해서 입니다. 맛있다고 기억되는 것을 다시 먹고, 좋았던 강의를 다시 듣고, 좋아하는 사람들 다시 만나기 위함 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매 순간 뭐하지 고민해야 합니다. 기억은 예측도 합니다. 음식을 많이 먹으면 배탈이 나고, 엄격한 교수의 강의를 들으면 고생을 하합니다. 작은 일로 화내면 친구는 곧 떠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기억이 없으면 삶이 고달픕니다. 생명체의 생존은 변화의 카오스속에서 반복을 포착할때 가능합니다. 우리는 반복을 통해 만든 카오스모스 속에서 살아 갑니다. 개인의 습관과 집단의 문화 법칙을 찾는 것을 반복을 찾는 행동입니다. 차이가 우주의 카오스에 속한다면 반복은 우리가 만들어 낸 코스모스 세계 입니다. 차이가 존재 그 자체에 속한다면, 반복은 포착하고 행동하는 우리의 능력 입니다.

철학용어로 차이는 즉자적이고 반복은 대자적입니다. 즉자란 사물이 직접 드러난 현상이나 체를 가리키며, 대자는 그 실체에 대한 객관화를 통해서 인식되는 행위이자 주체화되는 상태로서 개념화된 인식된 상태를 가리킵니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차이 뿐입니다. 모든 반복은 사실 차이의 반복 입니다. 해는 아침마다 뜨지만 매일 다르게 뜨고, 식당의 요리도 매번 똑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매번 반복속에서 차이를 잊습니다. 반복 속에서 차이를 같다고 오해 합니다. 차이의 반복을 차이 없는 반복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들뢰즈는 말합니다. 반복은 차이의 반복이며 반복은 차이의 다른 이름이라고 합니다.

반복은 능력입니다. 안다는 것은 대개 반복이 있음을 아는 것 입니다. 산다는 것은 반복을 통과하며 사는 것입니다. 반복속에 차이가 없으면 우리는 힘을 쓰지 않습니다. 차이가 없으면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이미 아는 것에 힘과 에너지를 쓰지 않습니다. 그래서 편합니다. 힘들다는 것은 힘과 에너지를 쓰는 겁니다. 반복속에 차이를 따라 가는 가는 겁니다 . 아무리 좋아하는 영화도 더이상 차이를 볼 수 없다면 우리는 더 보기 힘듭니다. 모네가 똑 같은 장소에서 수련이나, 성당을 계속해서 그렸던 것은 볼때마다 달라지는 빛을 감지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반복을 계속하게 하는 것은 그안에 있는 차이 입니다. 차이 없는 반복은 지루하고 이내 지쳐 버립니다. 차이 있는 반복은 영원히 계속될 수 있습니다.

차이를 지우는 반복이 있고, 차이를 살리고 차이를 집어 넣는 반복이 있습니다. 실험이란 다른 실험실에서 똑같이 반복 할 수 있도록 변수 관계를 엄격히 통제해서 반복하는 것입니다. 차이를 야기하는 변수를 지워 하나의 변수로 결과를 환원하는 것입니다. 반면 같은 인물을 그릴때도 다른 모습으로 그리는 화가는 반복속에 차이를 집어 넣습니다. 보편성을 추구하는 이들은 대개 차이를 지우는 반복을 지향하고, 특이성을 보려는 이들은 볼때마다 달라지는 차이를 지향합니다. 반복속에 차이를 주목하고 안 보이는 차이를 반복속에 불러들이는 이들은 익숙한 세계속에서 우주의 바람을 불러들이는자들입니다. 코스모스 속에 카오스의 바람을 불러 들이는자들입니다. 우주의 바람이 우리의 세계를 파 먹어 들어가면 우리는 달라진 세계에 살게 됩니다. 카오스의 바람을 통해 다른 코스모스를 향합니다.

들뢰즈 철학에서 반복은 단지 차이를 위한 조연이 아닙니다. 반복은 능력 입니다. 또한 영혼 회귀라 불리는 윤리적 선택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바위를 지고 올라가지만 결국 다시 떨어져 내리는 실패의 반복이 단지 시지프수의 운명 만은 아닙니다 . 들뢰즈는 묻습니다. 반복되는 실패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번 하고 바위를 들어 올릴 수 있는 다시 시작하기를 영원히 반복할 수 있는가 ? 혁명도, 사랑도 계산하는 순간 포기하지 않을 수 없는 압도적인 실패 확률에 갇히게 됩니다. 계산된 확률에 개의치 않고 다시 한번 반복하는 자가 넘어서는 자, 니체의 초인입니다. 영혼회귀, 반복의 짝이 차이입니다. 뜻 밖의 차이가 영혼회귀의 반복을 가능하게 합니다. 피로는 반복의 적입니다. 하지만 차이와 손잡은 반복은 피곤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짝과 함께 하는 여행이라면 누구라도 영원히 계속해서 함께 하고 싶은 것 아닐까요.

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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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란 무엇일까 ? 한마디로 같지 않음 이다. 같음의 반대이자 동일성의 반대말이다. 차이란 동일성의 뒷면이다. 차이 없는 동일성은 없고, 동일성 없는 차이는 없다라고 한다. 로마인 폴리니우스는 말했다. "세상에 똑같은 두장의 나뭇잎은 없다." 어떻게 똑같은 두장의 나뭇잎이 있을 수 있을까. 색이든 형태든 어딘가 다르다. 세상에 똑 같은 두사람은 없다. 쌍둥이도 똑 같지 않다. 또한 10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도 같지 않다. 얼굴도 생물학적으로 같지 않다. 6개월이 지나면 뼈속까지 신체의 거의 모든 세포가 바뀐다. 10년전의 나, 1년 아니 어제의 나와도 나는 다르다. 조금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같지 않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오직 차이 밖에 없다.

그럼 동일성은 어디에 있을까 ? 동일성은 정체성이라고도 번역되는 identity를 지시하는 말이다. 엄격하게 작년의 나와 어제의 나는 다르지만 ID카드를 통해서 동일한 나라고 주장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의 이름을 부를 수도 없고 , 사고를 냈을 때 책임을 물을 수도 없다. 그렇게 하려면 그 동안의 차이를 지워야만 한다. 오직 세상에는 차이만이 존재하지만, 차이를 지워 비슷한 것 몇개만 남길때, 필요한 것만 남기고 다른 차이는 모두 지울 때 동일성이 만들어 진다. 은행 나무에 있는 100장의 잎이 모두 다르지만, 필요한 특징만 남기고 차이를 모두 지울 대, ‘은행잎’ 이라는 하나의 말로 부를 수 있게 된다. 비슷한 것을 재 포착할 때 우리는 반복을 발견한다. 반복을 통해서 비슷한 일을 예측 한다. 예를 들어 어제도, 오늘도 해가 떴고 내일도 해가 뜰 것이다. 우리가 반복을 발견할 때 질서를 인식한다. 저별이 올해에도 저 자리에 있네, 작년 이 맘때도 저기 있었는데 ! 카오스에서 코스모스를 보게 된다. 그러나 모든 반복에는 차이가 숨어 있다. 매일 해가 뜬다지만, 매일 다르게 뜨고, 매년 장마가 오지만 매년 다르게 온다. 그 처럼 반복되는 것에서 차이를 지울 때, ‘아침’ 이나 ‘장마’의 동일성이 탄생한다. 모든 반복은 다른 반복, 차이의 반복인데, 그 반복되는 것에서 차이를 지워 차이 없는 반복으로 만들때 동일성이 탄생한다. 동일성은 사실 가상이다. 차이를 지워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가상이다.

동일성은 공유된다. 말하고 행동하는 데 필요한 것이 동일성이다. 공유된 동일성은 현실적인 힘을 가지며, 역으로 차이를 지우는 권력을 행사한다. 기존질서를 무너뜨린다는 불안, 내가 하는 것과 다른 것에 대한 불편함일 수 있다. 가령 남성으로 분류되는 사람이 ‘작은’일로 자주 울면 ‘사내 자식이 질질 짠다’고 비난 받게 되고, 20년 넘게 ‘울면 안돼!” 다짐하며 살다 보면 남다른 감수성은 ‘남성적’ 감수성이 되고 만다. 사랑의 동일성은 이성간의 호감에서 발생하는데 남자가 남자를 사랑한다고 ! 비운의 컴퓨터 천재 튜링은 화학적 거세 처분을 받았고 그 모육을 견디지 못해 자살한다. 여성이 여성을 좋아하는 걸 받이들일 때 조차, 펨과 부치로, 또 다시 여성과 남성이란 개념에 맞추어 동일화 한다. 사실 여성의 남성적인 면이 아니라 영성적인 면아, 혹은 아이같은 면이, 혹은 동물적 야성이나 식물적 포용력이 좋아서 그런 것인데... 민족, 학생, 부모의 동일성이 다 그렇다. ‘정상성’이란 차이를 지우려는 동일성의 권력이다.

그러나 동일성의 사유를 너무 졸로 보면 안된다. 그 사유 역시 차이를 구별하는 게 중요함을 압니다. 같은 인간이지만 한국인과 일본인이 다르고, 같은 동물이지만 인간과 개가 다르고, 같은 반려 동물이지만 개와 고양이가 다름을 알아야 한다. 이런 차이를 종차라고 한다. 종간의 창이, 종적인 차이라는 뜻이다. 종속과목강문계라는 분류학이 이러한 종차로부터 나온다.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 동성애자는 동성 파트너를 사랑하는 사람 이런 종차를 표시한다. 이는 사람 동물, 사람 이란 상위의 동일성안에서 인간, 동성애의 ‘종적’ 차이를 다루는 것이다. 그 동일성 안에 차이를 포섭하는 것이다. 종차 대신에 대립으로 다루기도 한다. 남성과 여성, 생명과 기계, 적과 동지의 대립 이다. 종차가 비슷한 것 나누어 묶는 방법이라면 대립은 차이를 최대한 벌리는 방버이다. 대립역시 차이를 동일성에 가둬 버린 결과를 가져온다. 남성과 여성의 대립이 나서는 순간, 여성 안에 있는 수많은 차이들은 지워지고, 적과 동지로 대립되는 순간 모든 이들은 둘중의 하나로 환원된다. 요컨데 동일성의 사유도 차이를 인정하고 개념화하지만, 모두 동일성의 보충물로 다룬다는 것이 한계이다.

차이를 동일성안에 가두는 이유는 차이만으로는 정신없는 무질서를 유발하기 때문일 것이다. 차이의 철학에 대한 가장 흔하고 가장 바보 같은 오해는 단지 차이만이 존재 한다고 주장하거나 차이만 예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차이의 철학은 차이를 동일성의 쫄따구 처지에서 해방시키려는 기획이다. 차이만이 존재한다라는 명제로는 이를 이룰 수 없다. 동일성의 굴레에서 차이를 해방시키는 것이다. ‘만들어진 차이’가 아니라 ‘만들어내는 차이’를 생각해야 한다. 어떤 사물이나 상태의 성질들 간 차이로 보는 것은 이미 존재하는 차이, 만들어진 차이를 보는 것이다. 비교에 의해서 동일성과 차이를 분류하는 것은 만들어진 차이를 비교에 의해 구별되는 인식론적 차이로 보는 것이다. A와 B의 마이너스 차이로 보는 것이다. A는 있으나 B는 없는 것 ..차이의 철학이 주목하는 것은 ‘만들어 내는 차이’, 어떤 것을 ‘다르게 만드는 차이’ 생성적 힘으로서의 차이고 ,비교 이전의 존재론적 차이다. 같은 사람을 다르게 만드는 차이 쌍둥이 마저 다르게만드는 차이가 있습니다. 수정란의 발생조건의 차이가 최소의 차이라면 누군가에게 다가온 인물은 결정적 인물은 최대한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사이에는 수많은 차이들이 있을 수 있다. 생각을 바꿔주는 책, 목소리를 증폭시키는 마이크도 차이를 만든다. 이런 차이 만들게 책이나 마이크에 결합시켜주는 것이 일종의 사건이다. 누군가 밖에서 온것과의 만남,접속을 통해서 A+B로 표시할 수 있는 A, B의 만남, 플러스로 표시되는 접속, 그것이 바로 만들어 내는 차이, 차이를 만드는 차이이다. 만들어내는 힘으로서의 차이에 주목한다. 차이의 철학은 세상속의 차이를 본다기 보다 차라리 차이에 의해 세상을 본다라고 말해야 할 것 같다.

모든 것은 차이에 의해 만들어 지고 변화하는 것으로 보려는 것이다. 들뢰즈가 미분의 수학을 끌어들여 변화하는 순간의 최소 차이, 변화를 만들어 내는 최소 차이인 미분적 차이를 보려는 것은 이때문이다. 모든 변화와 생성의 근저에 있는 최소 크기의 차이, 그게 바로 미분적 차이이다. 미분적 차이를 본다 함은 정지된 듯 보이는 것 속에서도 동일해 보이는 상태에서도 변화, 변화 시키려는 힘을 포착하는 것이다. 무한소 크기로 이웃한 두점을 ‘연결’하는 직선의 기울기인 미분계수, 미분적인 스케일에서의 이웃관계가 바로 미분적 관계이다. 들뢰즈는 이를 변화/생성을 사유하는 개념으로 발전 시킨다. 동일성도 변화도 모두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차이의 철학은 모든 존재자 속에 있는 생성의 힘이 차이임을 강조한다. 미분적 차이는 ‘만들어내는 차이’를 생성을 사유하는 근본적인 자리에 위치한다. 이로써 차이는 가장 ‘보편적인’개념이 된다. 가장 구체적인 지점, 한순간의 개체들 마저 다르게 만드는 차이이다. 강도가 바로 그런 사태를 나타낸다. 차이의 철학이 주목하는 개념이 강도이다. 쌍둥이를 다르게 만드는 발생조건의 작은 차이, 사실 강도적인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수정란 표면에 가해지는 자극의 강도를 떠올려 보면 이해가 쉽다. 모든 만남은 강도를 갖는데, 강도가 달라지면 그것만으로 아주 다른 만남이 된다. 호감의 강도가 어떤 문턱을 넘으면 헤어져도 굉장한 강한 감응으로 남을 수 있다. 격려의 손길로 어깨를 두드리는 일이 있지만 그 강도가 ‘도를 지나치면’ 격려하는 건지 때리는 건지 알 수 없게 된다. 강도는 동일해 보이는 것을 그 내부에서 초과하는 힘이다. 강도는 같다고 생각했던 걸 아주 다른 것으로 바꾸어 버리는 힘이다. 소설 <폭풍의언덕>에서 히스클리프처럼 사랑의 강도가 도를 넘으면 사랑인지 뭔지 알 수 없는 ‘미친 사랑’이 되기도 한다. 동일성의 권력을 초과하는 차이 그게 바로 강도이다. 익숙하고 상투적인 것을 괴물로 바꾸는 것, 그 괴물 같은 힘으로 세상을 바꾸는 것 그것이 바로 차이의 철학이 하려고 하는 것이다.

 

 

차이 vs. 동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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