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도란 무엇인가 ? 들뢰즈 철학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개념 중 하나가 강도입니다. 차이의 철학에서 중요한 것은 만들어진 차이가 아니라 만들어낸 차인인데 강도가 바로 그것입니다. 존재로서의 차이가 아니라 생성으로서의 차이, 생성하는 힘으로서의 차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강도란 연장의 대립 개념입니다. 그러나 논리적인 외연이 아니라 물리적인 연장과 대립되는 개념입니다. 강도는 쉽게 말해 힘 입니다. 힘은 양입니다. 흔히 양이라고 하면 세거나 비교하기 위해 동질화된 상태를 전제 합니다. 그래서 베르그송은 질의 편을 들어주며 양에 대해 비판 했습니다.그러나 강도는 질 이전에 양입니다. 질을 결정하고 질의 변화를 주는 미시적인 양입니다. 파란색이라 해도 색소의 밀도가 달라지면 다른 파란색이 됩니다. 이때 밀도는 강도의 일종입니다. 그걸 보지 못하고 모두 파란색이라고 하는 것은 강도의 차이를 놓친 채 질에 대해 말하는 겁니다. 잉크가 퍼져 감에 따라 물의 색깔이 달라질때 그 색깔을 다르게 만드는 것은 색소의 밀도 입니다.

새로 글씨를 배우려면, 손가락 근육 각 부분의 강도들을, 강도의 분포를 변화시켜야 합니다. 강도 역시 양인 만큼 크기를 갖습니다. 그러나 크기를 가졌다고 모두 강도는 아닙니다. 직선의 길이나 면적 부피 같은 것은 크기를 갖지만 강도가 아니라 연장에 속합니다. 반면 속도나 밀도 온도는 모두 강도에 속하는 물리량입니다. 어떻게 다를까요 ? 온도가 25도인 방을 둘로 나누면 면적이나 부피는 반으로 줄지만 온도는 그대로 입니다. n으로 나무면 n분의 1로 줄어드는 게 연장이라면 나누어도 줄지 않는 게 강도양입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들뢰즈의 강도 개념을 이해하기에 충분하지 않습니다.

연장이란 늘이는 것 즉 확장을 뜻합니다. 열기가 고르게 퍼져 모든 부분이 동질화된 상태로 확장된 상태가 바로 연장입니다. 어떤 방에 온도가 25도라는 말은 방에 모든 부분이 25도라는 질을 갖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분할하면 각 부분이 25도라는 질적 특징을 동일하게 유지하며 분할 될 겁니다. 연장이 된 겁니다. 잉크가 골고루 퍼져 있는 상태도 그렇습니다. 이는 다른 밀도로 모여 있던 것들이 들뢰즈 개념으로 말하자면 접혀 있던 것들이 고르게 펼쳐진 상태를 뜻합니다. 어떤 영역의 온도나 밀도 같은 물리량 자체가 아니라 미분적 분포의 양상이 연장과 강도를 구별해 주는 것 입니다. 강도란 힘이지만 차이로서의 힘입니다. 붙어 있는 두방의 온도가 같으면 열이동은 발생하지 않습니다. 둘다 10도등 100도등 마찬가지 입니다. 그런데 한방은 10도 다른 한방은 20도라면 그 방사이엔 그 온도차이 만큼의 열의 이동이 발생합니다. 한방은 50도 또다른 방은 60도라면 동일한 강도의 열이동이 발생합니다. 두방의 온도 차이에 대응하는 강도의 운동이 발생합니다. 온도가 아니라 온도 차이가 중요합니다. 하나의 방안에서도 그렇습니다. 방한구석에 난로를 켜면 그 열기는 그보다 온도가 낮은 곳들로 퍼져 갑니다. 온도차가 있는 한 열의 이동이 발생합니다. 고르게 퍼져 온도 차가 없어지면 열의 이동은 더이상 발생하지 않습니다. 온도의 차이가 이동의 강도를 결정합니다. 즉 강도는 차이 입니다.

차이에 의해 작용하는 힘은 모두 강도 입니다. 같은 물체를 지면에서 들어 올리면 위치 에너지가 발생하는 데 높이 올릴 수록 더 커집니다. 이 역시 강도 입니다. 강도가 있다는 말은 차이만큼 접혀 들어가 있다는 말입니다. 강도가 커진다는 말은 온도나 밀도의 차이가 커진다는 말입니다. 강도는 힘이 있는 어디에나 존재 합니다. 스피노자 식으로 말하면 모든 양태가 공유하는 공통 개념인 셈입니다. 우리들이 사는 세상은 어디나 강도들로 가득차 있다는 점에서 강도들의 우주라고 하겠습니다. 강도를 만든다 함은 차이를 만드는 것입니다. 가령 목소리가 크다고 강도가 큰게 아닙니다. 꽥꽥 소리를 질러 대지만 귓가를 그냥 스쳐 가는 경우가 있고 아주 작은 목소리 인데 귀를 잡아 채고 가슴에 까지 들어와 꽂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소리를 잘 다루는 연주자는 크게 연주하는 이가 아니라 아주 작은 소리만으로도 듣는 이를 긴장시키는 연주자 입니다. 강도를 잘 다룬다 함은 차이를 그저 크게 하는 게 아니라 차이의 미묘한 변화를 잘 다루는 겁니다. 그것이 연주자의 강도적인 능력입니다.

그래서 같은 악보로 연주하는 곡이지만 잘하는 연주가 있고 못하는 연주가 있습니다. 같은 곡인데 어쩜 이리 다르지 싶은 연주가 있지요. 감나무에 빨간 감이 가득 달려 있는 것도 시선을 끌지만 마른 가지 끝에 하나 남은 감이 오히려 시선을 강하게 잡아 당깁니다. 강도로 포착한다 함은 대상이 무엇인지를 포착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을 둘러싼 어떤 힘들을 강도적 차이의 분포를 포착함을 뜻합니다. 가지 끝에 매달린 게 감이란 것 알아 보는게 아니라 그 감을 둘러싼 힘들이 만드는 대기를 포착하는 것입니다. 대기속에 스며든 힘들의 분포를 감지하는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마지막 출항 만이 옆에서 기다리고 있는 홀로 남은 감의고독함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대상의 세계에서 벗어나 감응의 세계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는 예술에선 특히 중요합니다. 대상을 정확히 재현하는게 아니라 대상을 둘러싼 힘들의 분포를, 그 분포가 만드는 강도적 분위기를 표현하는 것이 예술가의 능력입니다. 누군가의 얼굴을 정확히 재현하는 것은 그려진 사람이 누구인지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건 예술에 속하지 않습니다. 예술가는 그 사람을 둘러싼 분위기를 표현하기 위해 그 얼굴에서 배어 나오는 어떤 힘들을 표현하기 위해 얼굴속에 강도들을 접어 넣습니다. 렘브란트의 좌상이 훌륭한 것은 자기 얼굴을 정확히 그려서가 아니라 그 얼굴 인근에 그의 삶을 관통한 힘들을 탁월하게 접어 넣었기 때문입니다. 때론 베이컨의 그림처럼 그런 힘들로 인해 얼굴이 뭉개지기도 하고 누군지 알아 볼 수 없게 변형되기도 합니다.

그렇게 들뢰즈는 강도야 말로 감성적인 것이라고 합니다. 칸트가 말하는 감성이란 대상을 수용하는 능력 입니다. 그에게 감성적인 것이란 감성에 의해 적절하게 표상된 대상을 뜻합니다. 그러나 들뢰즈는 진정 감성적인 것이란 그런게 아니라 표상된 것에 의해 가려 포착하기 힘든 강도들이라고 합니다. 표상의 외부고 표상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강도는 감각할 수 있지만 감각밖에 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합니다. 눈에 보이긴 하는데 뭔지 알아 볼 수 없는 것이란 뜻입니다.

뭔지 모르겠는데도 감각 속으로 강밀하게 밀려 들어오는 것 말입니다. 그런점에서 강도란 감각 불가능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칸트라면 감성적 종합이란 대상을 정확히 표상하는 수용이라 하겠지만 들뢰즈라면 대상에서 배어나오는 표상 불가능한 강도를 포착하는 것이라고 할 겁니다. 사실 들뢰즈는 감성적 종합이 아니라 강도적 종합을 말합니다. 그에게는 인식론적 절차가 아니라 존재론적 생성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강도적 종합이란 어떤 대상을 둘러싸고 있는 강도적 힘들이 그 대상안으로 접혀 들어가는 것입니다. 발생중인 배아 속으로 그걸 둘러싼 환경의 힘들이 접혀 들어가며 종별성에서 벗어나는 개체화가 진행됩니다. 강도적 종합이 미분적 잠재성과 분화된 현행성 사이에 비대칭성을 접어 넣는 것입니다.

강도는 이념 개념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념 개념에서 설명했듯이 들뢰즈는 이념을 미분적인 것이라고 합니다. 미분적 관계는 이웃 관계 입니다. 최소 크기의 구성요소들 간에 이웃관계가 이념입니다. 이웃 관계란 뚜렷하게 구별된 항들이 서로 이웃하며 배열된 것입니다. 가령 하나의 유전자는 다른 유전자와 뚜렷하게 구별됩니다. 눈 유전자, 날개 유전자는 물론 어떤 병의 원이이 되는 유전자 들로 구별됩니다. 이것들이 펼쳐지면 어떤 종에 특정 형질이 됩니다. 날개 유전자 날개가 눈 유전자는 눈이 그러나 미분적 상태인 이념에서는 날개 유전자 임이 뚜렷해도 그것이 실제로 무엇이 될지는 애매 합니다. 발생 과정에서 진행되는 강도적 종합이 이 유전자에 없는 외부를 발생 중인 배아 안에 접어 넣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념은 애매하고 뚜렷하다고 합니다. 그 애매함 속에 다른 미래가 접혀 들어 있는 겁니다. 술취한 디오니 소스가 숨어 있는 겁니다.

이와 반대로 강도적인 것은 명료하고 모호합니다. 강도는 힘이고 힘은 힘간의 차이이니 강도는 강도들의 강도 입니다 .모든 강도에는 상이한 강도들이 섞여 있습니다. 강도를 포착한다는 말은 미시적 강도 하나하나를 식별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건 가능하지도 않지만 그걸 식별하려면 정작 중요한 걸 놓치게 됩니다. 모호하게뒤섞인 강도 들로 만들어진 감응의 되기를 말입니다. 강도들은 모호하게 섞여 있지만 그렇게 섞여서 만들어지는 명료함 같습니다. 여러 악기가 모호하게 섞여서 명료한 하나의 소리를 만드는 오케스트라 처럼 말입니다. 음악 얘기를 좀더 하면 악보가 어떻게 보면 이념적 잠재성을 표현한다면 그걸 실제 연주하는 것은 강도적 종합을 통해 현행화하는 것입니다.

악보는 음고와 음가를 갖는 음표 들이 하나하나 뚜렷하게 배열되어 있습니다. 예컨대 바흐의 평균율 피아노 곡집 일에 일번 푸가 악보는 누가 연주를 하던 벗어날 수 없는 규정성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연주자가 어떻게 연주하는가에 따라 다른 곡이 됩니다. 터치의 수직적 강도와 속도의 수평적 강도가 식별 불가능하게 섞여 하나의 명료한 소리를 만들어 냅니다. 굴렌골드의 강도적 종합은 당혹스러울 만큼 다른 곡으로 만듭니다. 존 루이스나 자크 루시에 같은 재즈 피아니스트는 변조의 폭이 더 큽니다. 음고와 음가도 바꾸까요. 그러니 곡의 이념인 악보는 뚜렷하지만 상이한 현행화의 열린 애매함을 갖고 있다 하겠습니다.

잠재성이란 애매함 속에 수많은 규정 가능성을 함축하고 있는 겁니다. 강도적 종합은 현행화로 예상된 지점에서 멀리 벗어나게 밀고 나갑니다. 잠재성은 강도적이고 현행성은 그렇지 않다고 하는 이도 있지만 차라리 반대로 말해야 합니다. 강도적 종합은 핸행화와 휠씬 가까이 있습니다. 반면 이념적 잠재성은 강도적 종합이전에 미분 관계이고, 강도 제로의 상태를 극한으로 갖습니다. 이처럼 강도 제로의 신체를 들뢰즈는 기관없는 신체라고 합니다. 이 신체의 표면에 이러저런 강도 들이 새겨지면서 그것은 분화된 신체가 됩니다. 현행화의 선을 따라 펼쳐 집니다. 그러나 그 펼쳐짐은 강도적 종합에 의해 외부가 접혀드는 펼쳐짐이기에 모두다 펼쳐져 연장이 되는 일은 없습니다. 강도적 분포가 달라지면 지금 이 신체도 다른 신체가 됩니다. 그러한 신체적 변환으로서의 되기가 가능한 것은 모든 분화 밑에 항상 그 기관 없는 신체 순수적 잠재성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상이한 강도적 종합에 열려 있는 잠재성이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다른 삶을 향한 규정 가능성이 모든 규정성 밑에 숨쉬고 있는 것입니다.

들뢰즈는 차이는 잡다가 아니라고 단언합니다. 잡다란 주어진 것으로 부터 차이입니다. 이미 만들어진 차이 입니다. 들뢰즈가 주목하는 것은 만들어 내는 차이 입니다. 강도가 바로 그것입니다. 어떤 존재자를 미분적 관계의 분화에서 벗어난 개체로 만들어 내는 것 그게 바로 강도적 종합입니다. 그래서 개체화하는 차이라고도 합니다. 거대한 존재의 바다에서 그때 그때의 파도를 존재자로 만들어낸 차이 그게 바로 강도로써의 차이 입니다. 강도란 그런점에서 존재론적 차이 입니다. 하이데거의 말대로 존재론적 차이가 존재와 존재자의 차이라고 한다면 말입니다.

 

 

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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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상적 어법에서와 유사하게 들뢰즈가 말하는 잠재성이란 아직 현행화되지 않은 능력입니다. 가령 반고흐는 30대 중반에야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그전에는 그림을 그릴 생각을 해보지도 않았고 자신에게 그런 능력이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해보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반 고흐 뿐일까요 어떤 사람도 그림이든 음악이든 본격 시작하기 전에는 그런 능력이 있는지도 모르지요. 시작하고 보면 이런 능력이 있었네 하지만 사실 그 전에도 그걸 잘 할 잠재적 능력이 있었음은 분명하지요. 본격 시작해서 펼쳐주는 것을 현행화라고 합니다. 현행성은 잠재성과 짝이 되는 개념이지요. 잠재성을 능력이라고 했지만 좋은 의미로 사용하는 능력만 그런건 아닙니다. 소설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는 선량한 신사인 지킬의 신체 안에 난폭하고 악마적인 인물 하이드가 숨어있다는 상상을 통해 쓰여졌지요. 이 역시 알지 못하던 어떤 잠재성을 인물로 형상화한 겁니다. 평소에 얌전하던 사람이 어느 순간 전사 같은 모습으로 바뀌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 입니다. 현행화 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잠재성은 현실적으로 존재합니다. 다만 있는 줄 모를 뿐이지요. 역으로 현행의 활동은 잠재성에 기입되고 그것을 변화시킵니다. 붓을 쓰고 펜을 쓰는 활동은 손이나 신체 감각과 관련된 새로운 능력을 형성합니다. 잠재성이란 그저 타고난 것만은 아니란 말입니다.

잠재성이란 지금 현행화 되지 않았지만 어떤 조건이 갖춰지면 현행화될 어떤 자질이나 능력입니다. 들뢰즈는 잠재성이 가능성과 달리 현실의 일부임을 강조합니다. 잠재성은 눈에 안보여도 있는 능력이지만 가능성은 눈에 보인다 싶을 때에도 상상이나 표상의 산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가능성이란 단지 불가능하다고 할 수 없는 모든 것입니다. 가령 가수 톰 웨이츠가 화가가 될거라는 말과 대통령이 될거라는 말은 비슷해 보이지만 실은 아주 다릅니다. 그는 지금 화가도 아니고 대통령도 아닙니다. 어떤 자질을 직접 확인한 바는 없지만 소리에 아주 민감한 감각을 가진 아티스트일 테니 그런 감각을 색과 형태로 표현하려고 한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겁니다. 유명한 화가로 성공할 지는 잘 모릅니다. 이는 단지 가능성일 뿐인 거죠. 물론 그가 대통령이 되는 것을 누구도 불가능하다고 할 수 없을 겁니다. 민주주의 제도 아래에서 누구에게나 충분히 가능한 일이니까요 그러나 실제로 톰 웨이츠가 대통령이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것 같습니다. 듣기 좋은 뻥을 잘치는 것도 아니고 마음에 없는 약속을 할 줄도 모르며, 많은 사람들이 호감을 가질 얼굴과는 거리가 좀 멀죠 그러니 대통령이 되려면 통상은 일어나기 힘든 어떤 특별한 일이나 변수를 끼워 넣어야 합니다. 가령 미국을 지배하려는 KGB의 음모라던가 톰 웨츠의 목소리에 반한 외계인의 개입이라던가 아니면 미국인들이 노래 하나에 미치는 기적 같은 사건 같은거 말이죠. 이경우에도 그가 대통령이 되는 것은 그의 잠재적 능력에 속한 것이 아니라 새로 끼워넣는 그 특별한 일에 기인한 겁니다.

현실성과 가능성이 있는 것이고 현실성안에 잠재성과 현행성이 있습니다. 안보이는 뜻밖의 잠재성 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령 달걀은 닭의 신체와 결코 같지 않지만 닭으로 현행화될 잠재성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모든 배아는 성체와는 다르지만 성체를 잠재성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이경우 잠재성은 뜻밖의 능력이나 자질이 아니라 충분히 현행화 되리라 예상되는 능력이나 자질을 뜻합니다. 달걀에서 닭 말고 나올 수 없으니 벗어날 수 없는 필연성 조차 갖는다고 해야 겠지요 . 잠재성에서 중요한 것은 뜻밖의 것이 아니냐, 예상 가능한 것이 아니냐가 아니라 지금 현행화 되지 않았지만 조건이 갖추어지면 현행화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니 잠재성 개념은 한 두 방향으로 열려있는 미래를 갖는다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생각지 못했던 방향으로 펼쳐지는 미래이고 다른 하나는 예상할 수 있고 심지어 벗어날 수 없는 미래 입니다. 달걀에겐 요리나 모욕의 도구가 될 미래와 닭이 될 미래가 모두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겁니다. 이것이 잠재성이란 말을 철학적으로 개념화하려고 할때 어렵지만 매력적인 지점이기도 합니다.

예상 밖의 미래를 생각한 것은 아니었지만 아리스토텔레스도 필연적으로 펼쳐질 잠재성과 그렇지 않은 잠재성을 구분하지요. 가령 달걀은 어미가 품으면 좋든 싫든 닭이 될 수 밖에 없는데, 건축가는 싫으면 집을 짓지 않을 수 있죠. 그는 후자를 인간적 잠재성이라고 합니다. 철학자 아감벤은 바로 이말을 받아서 진정한 잠재성이란 하지 않을 능력이라고 까지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너무나 인간적인 생각이지요. 잘 생각해 보면 인간의 배아도 모태에 자리 잡으면 자기 뜻과 상관없이 인간으로 태어날 수밖에 없으니 인간적 잠재성과 거리가 멉니다. 또 원숭이나 쥐도 짝짓기를 거부하고 사육장이나 실험실을 벗어나려 한다는 하지 않을 능력이 있음이 분명 합니다. 잠재성의 아주 다른 두 미래를 다루기 위해서 들뢰즈는 잠재성이 미규정성과 규정성에 모두 존재함을 강조합니다. 예컨대 유전자를 이루는 핵산들은 구성 성분이나 결합형태에 따라 아데닌 구아닌 티민 사이토신 등의 명확한 규정성을 같습니다. 나아가 아데닌은 티민과 구아닌은 사이토신과만 결합한다는 점에서 작동 방식도 명확히 규정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유전 메카니즘에 근간을 이루는 것이죠. 그런데 핵산 자체만으로는 어떤 유전 형질도 같지 않습니다. 규정성과 동시에 미규정성을 갖고 있는 거죠. 각각의 핵산은 다른 핵산 들과 어떤 이웃관계를 갖는가에 따라 다른 유전자가 됩니다. 이웃관계에 따라 달라지는 수많은 규정 가능성을 갖고 있는 겁니다. 미규정성이란 규정 가능성이 너무 많아서 하나의 규정성을 같지 않음을 뜻합니다. 규정성에 따른 미래를 갖지만 조건에 따라 달라지는 수많은 미래에 열려 있는 겁니다. 이는 유전자도 유기체도 다르지 않습니다. 같은 신체의 인간이 이웃관계에 따라 다정한 아버지에서, 고문 경관으로, 계산 빠른 투자가로 달라 집니다. 핵산들의 이웃관계가 유전자를 규정하고 유전자들의 성체의 종적 특성을 규정합니다.

들뢰즈는 이런 이웃관계를 미분적 관계라고 하지요. 핵산이나 유전자가 이처럼 이웃 관계를 가지며 배열되는 것을 들뢰즈는 미분화라고 명명합니다. 다른 한편 미분적 잠재성이 펼쳐지는 것을 분화라고 하지요. 미분화가 분화 될때 개체 잠재성을 표현한다면, 분화는 미분화된된 것이 펼쳐져 현행화 되는 겁니다. 미분적 잠재성과 분화된 현행성은 그 자체만으로 서로 대칭적 입니다. 미분과 적분이 서로 대칭적인것에 따릅니다. 유전자를 보면 유전 형질을 예측할 수 있고 유전 현질을 보면 관련 유전자가 있으리라고 추측할 수있지요. 이 말은 미분적 잠재성이 분화되는 것만 보면 현행성은 접혀 있던 잠재성이 펼쳐지는 결정성의 숙명을 면하기 어렵다는 말입니다. 실제 현행화 되는 과정은 이처럼 접힌 것이 펼쳐지는 분화 과정을 초과 합니다.

유전자가 단백질을 형성하는 양상은 세포등의 조건에따라 달라지고 ,배아가 자라고 발생하는 양상 또한 양수나 영양상태등 환경에 따라 달라집니다. 영원이라는 도룡뇽의 배아 표면에 특별한 자극을 가하면 머리가 둘달린 영원이 태어나기도 합니다. 또 배아가 모태에서 겪는 기아는 영양분의 흡수를 극대화하는 대개는 꺼져 있던 유전자를 가동시켜서 비만 신체를 만들기도 하지요. 환경이나 조건이 발생 과정에서 개체의 신체 안에 접혀 들어가는 겁니다. 이로 인해 쌍둥이 처럼 같은 유전자를 가진 배아들도 다른 개체의 길을 가게 됩니다. 괴물 같은 개체들이 탄생하기도 하구요. 뜻밖의 미래가 바로 거기서 도래 합니다. 개체의 발생 과정은 한편으론 유전자에 의해 규정된 잠재성에 분화 과정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유전자에 없는 미래가 도래한 과정이기도 합니다. 그런점에서 현행화는 모두 개체화인데 개체화는 언제나 분화를 초과합니다. 이를 들뢰즈는 초험적 원리라고 하는데요 미분화와 분화가 대칭적이라면, 미분화와 개체화는 비 대칭적 입니다. 도룡뇽의 유전자로는 두개의 머리를 예측할 수 없고 그 두개의 머리로부터 그에 상응하는 유전자를 추측할 수 없기 때문이죠. 외부 조건이 강도적인 차이가 분화 과정에 끼워들기 때문입니다. 외부 조건에 따른 강도적인 종합이 잠재성과 현행성 사이에 비대칭성을 끌어 들이는 겁니다. 어떤 외부와 만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의 글들을 보면 분화와 개체화를 동일시 하는 경우가 대단히 많은데요 그런데 실제로 들뢰즈는 미분화 된것이 펼쳐지는 분화와 강도적 종합에 의해 외부 조건이 접혀 지며 펼쳐지는 개체화를 분명히 구별하고 있습니다. 분화와 개체화라는 두가지 다른 현행화의 길이 있는 겁니다.

잠재성과 가능성이 구별되어야 하듯이 분화와 개체화도 구별 되어야 합니다. 분화와 개체화는 완결된 규정을 갖는 잠재성이 펼쳐질때에도 두가지 다른 양상으로 펼쳐질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인간적 잠재성은 하지 않을 능력이라고 자랑하지만 펼쳐지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대비는 사소한 차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펼쳐질 숙명을 피하는 길이 펼쳐 지길 거부하는 부정의 행위일 뿐이라면 그것은 선 결정된 숙명이라는 신의 심판을 벗어난 것이 아닙니다. 접힌채 그 심판에 갇혀 있는 거지요. 오히려 중요한 분기점은 접힌 것이 그대로 펼쳐지는 것과 뜻밖의 양상으로 펼쳐지는 것이 갈라지는 지점입니다. 가령 양철북의 오스카는 성장을 거부하지만 그것뿐이라면 거기서 끝나고 말았을 겁니다. 성장하지 않는 자식을 걱정하는 부모 이야기 말고 거기서 무슨 얘기가 나올 수 있을 까요. 거기서 중요한 것은 오히려 성인이 되는 것을 중단함으로써 기성의 성인과 다른 방식으로 살게 된다는 게 있습니다. 그걸 알게 되면 성장을 중단한다는 건 큰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스카는 다시 성장하겠다고 하지요 하지만 잠재성 개념이 갖는 힘, 숙명에 반하는 다른 미래는 현행화가 아니라 반대로 잠재와의 길을 따라 갈때 좀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잠재화한다는 것은 신체를 생물학적으로 되돌려 수정란 상태로 되돌아 가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신체를 다른 외부와 결합하거나 변형시켜 다른 신체를 만드는 현실적 생산입니다. 이미 발로 분화된 신체를 수정란으로 되돌릴 수는 없는 일이죠 하지만 발이 접속하는 외부를 땅에서 나뭇가지로 바꾸거나 돌맹이로 바꾸게 되면 발이 아닌 다른 것이 됩니다. 신체를 받치고 대지를 달리라는 신의 심판에서 벗어나서 나무를 타거나 도구를 사용하는 기계가 되는 거죠. 쿵후라 함은 무인의 손은 강도를 바꿔 칼이나 몽둥이로 변형시키지요. 이는 발이나 손이 갖고 있는 비 현행적인 잠재성 때문에 가능합니다. 지금의 현행성에서 잠재성을 거슬러 올라가 다른 현행성을 만들어 내는 겁니다. 톰 웨이츠가 목대신 손으로 마이크 대신 캔버스에 소리를 담으려 한다면 그는 잠재와의 선을 따라가고 있는 겁니다. 그런 잠재화의 극 단에 있는 것이 바로 기관 없는 신체 입니다. 기관들의 분화되기 이전의 신체를 뜻하죠 유기체의 기관이라는 정해진 숙명에서 벗어나 다른 기계로 신체를 변형한다는 것은 모두 기관없는 신체라 명명된 최대 잠재성을 통과하는 것입니다. 그 표면에 다른 힘과 욕망을 등록해서 다른 신체로 현행화 하는 거죠

 

 

잠재성과 현행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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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반복  (0) 2021.11.12

차이의 철학이라고 요약되는 들뢰즈의 철학 가운데에 가장 이해하기 힘든 개념이 아마 이념일 것 입니다. 일단 이념이란 개념이 뜻하는 게 무엇인지 이해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난감한 것은 이념 개념을 포위한 역설적 궁지 입니다. 개념적 어려움은 이 궁지에 기인합니다. 따라서 이 궁지를 이해해야 이념의 개념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념이란 통상 종교나 정치 경제 법 등의 영역에서 주장이나 개념들이 하나의 전체를 이룰 때 사용됩니다. 왕정주의 이념, 시장주의 이념, 맑스주의 이념, 여성주의 이념, 기독교 이념 등등 명제나 개념들이 하나의 전체를 이룬다는 것은 하나의 근본적인 원리에 의해 통일 되어 있음을 뜻합니다. 이런 이유에서 이념은 흔히 자신과 대립되는 것에 대한 억압을 동반합니다.

역사속에는 이념의 이름으로 자행된 수많은 폭력들이 흘러 넘칩니다. 종교적 폭력, 정치적 폭력, 경제적 폭력, 문화적 폭력, 법적 폭력 등등 이념 덕에 잔인성은 양심이나 연민 곤혹 등에 기인하는 주저와 동요를 쉽게 넘어 섭니다. 이념이란 잔인성의 지혜인 셈입니다. 철학에서 이념은 여러 명제나 현상을 통일하는 원리의 지위를 갖습니다. 플라톤에게 이념이란 현실의 존재하는 것들의 완전하고 우월한 모델 입니다. 현실은 이념의 불완전한 복사본입니다. 그러니 인간은 이념에 대한 충실성을 통해 현실을 좀더 이념에 가깝게 만들어야 합니다. 시인처럼 이념에 반하는 방향으로 환영을 향해 가려는 자는 추방되어야 합니다. 칸트에게 이념은 모든 것을 하나의 원리 아래 통합하려는 이성에 초월적 성향이 산출하는 거대한 전체 입니다. 이는 필경 경험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영역을 넘어 버리기에 증명도 반증도 불가능한 판단으로 인도합니다.

이성이 그것을 넘는 순간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출연합니다. 따라서 이율 배반이나 역설 같은 문제가 출연하는 지점은 이성이 넘어서는 안될 한계를 표시합니다. 헤겔에게 이념이란 개념을 현실화하는 주체 입니다. 어떤 것의 존재 이유를 제시하는 강력한 원인입니다. 이념에 부합한다면 현실에 없는 것도 만들어 지고, 이념에 반한다면 현실적 권력을 가진것도 와해되고 소멸합니다. 정치적 이념이 그와 다른 체제를 정복하게 하고, 거기서 벗어난 사람들을 제거하게 만듭니다. 어느 경우든 이념은 모든 것을 하나의 원리 아래 통일하고 통합합니다. 그렇다면 이념이란 차이의 철학이 대결해야 할 첫번째 적 아닌가요. 차이만이 존재한다고 하든, 만들어 내는 차이를 사유의 방향으로 삼든, 이념이란 다른 것을 하나의 원리 아래 동일화 하거나 포섭하고 통합하는 것입니다. 차이와 반대 되는 입장입니다. 그런데 들뢰즈는 이념을 비난하기는 커녕 중심적인 개념으로 다룹니다. 왜 그럴까요 ?

모든 원리나 이념을 동일자라는 말로 비난하는 것만으로는 차이의 철학은 하나의 철학이 되지 못합니다. 차이의 철학이 단지 차이란 개념을 높이 들고, 애찬하는 게 아니라 동일성의 사유와 대결하는 하나의 철학이라면 그것은 사유 전체를 방향짓고 이런저런 명제나 개념을 통일하는 어떤 원리가 있어야 합니다. 차이라는 원리, 차이라는 이념이 있어야 합니다. 그 이념이 모든 개념들의 근저에 자리 잡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념이나 원리를 말하는 순간  차이 철학은 차이의 사유에 반하는 철학이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대단히 난감한 이율 배반이 차이 철학의 출발점에 있음을 보게 됩니다. 차이 철학은 그것이 철학인 이상 이념을 필요로 할 수 밖에 없지만, 동일 원리로 작용하는 모든 이념과 대결하고 분쇄해야 한다는 것, 이것이 차이 철학이 해결해야 할 첫 번째 문제입니다. 이것을 풀지 못하면 차이 철학은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습니다. 이걸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 까요

여기서 들뢰즈는 놀랍도록 탁월한 몇개의 아이디어를 통해 차이의 철학에 부합하는 이념의 개념을 구성합니다. 첫째 모든 것의 답이 되는 원리의 단일성이 아니라 모든 것에 반복하여 던져지는 물음의 일관성을 통해 사유를 방향짓고 철학적 통일성을 구성하는 것입니다. 이전의 모든 이념은 원리를 만능의 답으로 삼거나 답을 구하는 근거로 삼았습니다. 플라톤에게는 이데아가, 기독교에서는 신이, 맑스주의에선 계급이, 자유주의 경제학은 시장이 그랬습니다. 동일한 답이 항상 이미 준비 되어 있으니 이념은 동일자를 가동시키게 됩니다. 그 답과 일치하지 않는 모든 것이 비난이나 억압의 대상이 됩니다.

그러나 물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의 물음은 사유를 하나의 방향으로 향하게 하지만 정해진 답을 반복하는 하는 게 아니라 물음을 반복합니다. 물음을 던지며 확고한 답들을 지워 버립니다. 답이 지워지면 틀린 답도 없어 집니다. 물음은 답을 찾는 방향을 정하지만 억압할 대상을 갖지 않습니다. 물음을 통해 이념을 정리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 사람은 하이데거와 블랑쇼 입니다. 언젠가 하이데거는 말한 적이 있습니다. 진정한 철학자는 평생을 오직 하나의 물음과 대결한다. 존재 물음이 그 에게는 바로 그 물음 이었습니다. 블랑쇼는 하나의 물음이 반복되는 것은 그것이 불가능성을 향해 던져지기 때문임을 암시합니다. 그러는게 불가능하다며 물음 던지기를 포기하는 자는 사유를 포기한 자입니다. 사유하는 자는 불가능하기에 묻기를 영원히 반복하게 됩니다. 얻었던 답을 내려 놓고 다시 묻기를 반복합니다. 영혼 회귀와 반복이 이렇게 하여 물음과 하나로 엮어지게 됩니다. 덧붙이면 답의 불가능성은 사유의 무능력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초험적 경험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차이의 철학에게 차이를 원리로 삼는 것에 어려운 불가능성 이라 해야 할 저 역설적 궁지는 차이에 대한 물음을 반복하여 던지게 합니다. 어디서나 던지게 되는 그 물음이 차이의 철학에 하나의 방향을 부여하고 그 사유가 사용하는 개념들의 통일성을 제공합니다. 그러나 동일하게 반복되는 답과 달리 물음은 던져지는 대상이나 조건, 상황에 따라 다른 길로 인도합니다. 다른 답으로 인도 한다기보다는 다른 문제로 인도 합니다. 여기서 물음 문제란 개념으로 변환됩니다. 들뢰즈는 물음에 반복이 중요함을 강조하지만 물음이 차이 없이 동일하게 던져질 때 사유는 동일한 답들을 반복한다고 경고합니다. 차이 없는 물음의 반복은 별차이 없는 사유의 반복을 낳고 이러한 반복은 필연적인 답의 반복으로 간주되기 쉽습니다. 물음을 제대로 던진다는 것은 조건이나 대상에 따라 달라지는 문제를 발견하는 것, 상황에 따라 다르게 문제화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샤머니즘에 대해 서구적 사회는 쉽게 미신이라고 간주하여 배척합니다. 과학이라는 이름아래 동일자가 가동되는 것입니다. 차이의 철학은 샤머니즘에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요. 다양한 문화의 일종이라는 식의 단순한 인정이나 수용 혹은 샤먼에 대한 고지식한 믿음 , 그 건 배척과 대칭적인 또 하나의 동일자를 가동 시킵니다. 오히려 보통사람과 다르고, 양식과 충돌하는 샤먼의 특이한 현상을 들어내는 것은 무엇인지 ? 샤먼의 그 특이한 능력을 통해 어떤 일이 그들의 세계에 벌어지는 지 ?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다룰 것인지를 물어야 합니다. 차이에 대한 물음은 이처럼 샤머니즘을 풀어야 할 문제로 문제화 합니다. 샤머니즘이 아니라 예술에 대해서라면 분명 다르게 문제화 될 것입니다.

두번째 아이디어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거대한 원리나 거시적 모델이 아니라 어디에나 스며들어 있는 최소 크기의 미시적 보편자로 이념을 정의하는 것입니다. 하나의 거대한 이념은 자신의 모든 것을 통합하여야 합니다. 그러니 자기손에서 벗어나는 것은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있으면 없애 버립니다. 크기의 거대함은 전체 바깥에 있는것에 대한 권력의 거대함이 됩니다. 반면 어디에나 있기 마련인 최소크기의 보편자라면 최대 권력이 아니라 최소 차이를 가진 보편자라면 어떨까요. 심지어 어디나 있기 마련이라는 말로 흡연자의 권력을 행사하려 할 때 조차 그 자체로 최소 크기 힘만을 가질 뿐이니 동일화 하려는 거대한 힘을 행사하기는 어렵지 않을 까요

여기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 것은 미분이론 입니다. 미분은 변화와 운동의 수학입니다. 변화와 결부된 힘을 개선할때 사용하는 보편자가 바로 미분소 입니다. dx dy dt등으로 표기합니다. 미분소는 변화와 운동이 있는 것에 어디에나 사용되는 최소 크기를 표시합니다. 가령 dt는 t 이웃에 있는 점 to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갈때 t와 t0 사이의 거리를 뜻합니다. 한정된 t와 거기에 최대한 인접해 있는 점 t0 사이의 거리입니다. 더없이 작은 크기의 거리 입니다. 두점 사이의 최소 크기의 차이이기도 합니다. dt 는 dx든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혼자서는 아무런값도 어떤 규정도 갖지 않습니다. 보편자지만 그자체로는 어떤 규정성도 없으니 다른 규정들에 대해 동일한 권력을 행사할 수 없습니다. 다른것과 결합해서 상호관계에 들어 갈때에만 어떤 값의 규정성을 가질 수 있습니다. dx-dt=o xdx+dt=0는 dx와 dt의 상호관계를 표시합니다. 여기서 dx와 dt는 결합되어야만 규정성을 가집니다. dt분의 dx는 1, dt분의 dx는 마이너스 x분의 1이런식으로 말입니다. 결합되는 이웃이나 관계가 달라지면 다른 값을 갖게 됩니다. 이웃하는 항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진다는 말입니다. 그 자체로 미규정적인데 이웃항의 달라짐에 따라 수많은 규정 가능성을 갖는 보편자 입니다. 보편자 이지만 이웃하는 항이 자기 안에 들어오면 포섭하고 자기안에 안들어 오면 제거하는 보편자가 아니라 이웃한 항에 따라 자신이 달라지는 보편자 입니다. 초월적 보편자가 아니라 내재적 보편자 입니다.

다음으로 세번째 아이디어는 완성된 이상이나 완전한 원리가 아니라 완성 반대편에 있는 미분화된 배아의 이념에 자리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신이나 이성처럼 최대치로 완성된 현행성이 아니라 씨앗이나 수정란 같이 최소치로 접혀 있는 잠재성으로 이념을 정의하는 것입니다. 분화된 성채가 아니라 미 분화된 배아이기에 발생과정을 거치면서 각자의 조건에 따라 다른 개체가 될 겁니다. 가령 같은 어미에게서 나왔다고 해도 똑같은 두마리 세끼는 없습니다. 발생과정에 끼어드는 조건에 따라 다르게 개체화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잠재성은 외부 조건에 열려 있습니다. 현행화 될때도 차이화의 길을 가게 됩니다. 답이 될때 마다 다른 답이 되는 씨앗으로서의 문제 그게 이념입니다. 물론 미분화된 배아라고 하지만 아무거나분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닭의 알에서 거북이가 나올수는 없고 악어 알에서는 악어가 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배아로서의 잠재성은 규정성도 갖고 있습니다. 앞서 예를 들었던 xdx + dx =0와 dx-dt=3는 다른 규정을 갖습니다. 이웃하는 항과의 관계 즉 미분적 관계가 정해지면 그 규정성도 완결됩니다. 잠재성은 미규정성과 규정가능성에 더해 완결된 규정성을 갖는 다는 들뢰즈의 말은 이런 의미 입니다. 두번째 아이디어와 세번째 아이디어는 이렇게 결합됩니다.

또하나 주목할 것은 xdx + dx =0와 dx-dt=3 모두 답이 아니라 문제라는 사실 입니다. 보다 시피 풀어서 dx/dt 그것의 원시 함수를 구해야 할 문제 입니다. 이념이 문제라는 명제와 이념이 잠재성이라는 명제는 이처럼 연결되어 있습니다. 물음과 문제로서, 미시적 보편자로서, 잠재적 배아로서 이념 개념이라는 세 아이디어가 긴밀하게 결합되어 이념의 개념이 구성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이념의 개념이 거대한 이념의 개념과 다른지는 좀더 구체적인 예를 볼때 분명해집니다.

가령 생물학에 이념이라는 말로 흔히 떠올리게 되는 것은 유기체 입니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기관들의 유기적 통일체를 뜻합니다. 기관은 즉 오르간(organ)  도구라는 뜻입니다. 큐비에(Cuvier) 이를 바탕으로 동물 분류학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들뢰즈는 조르프 생틸레르를 빌어 최소 크기 잔뼈야 말로 동물학의 이념이라고 말합니다. 잔뼈 들의 결합을 통해 다양한 양상들의 동물들이 구성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념이란 상이한 개체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원리이고 또한 구조 입니다. 유기체도 잔뼈도 모든 동물들에게서 발견되는 공통의 구조라는 뜻입니다. 이념에 비추어 동물을 파악할때 큐비에는 기관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이상적 모델을 상정합니다. 초월적 모델입니다. 그러나 잔뼈는 동물의 모델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이웃한 잔뼈들과의 미분적 관계에 따라 다른 기관이나 다른 신체를 만듭니다. 그렇게 종이나 문 같은 벽을 넘는 변이의 연속성 속에서 신체를 구성합니다. 큐비에라면 원숭이와 문어는 문을 달리하기에 다른 신체 구조를 갖고 따라서 서로 넘나들 수 없는 불변성의 벽으로 분리되어 있다고 할 것입니다. 구조적 형태 완전성이라는 척도를 적용 해 더 진화된 것과 덜 진화된 것을 구별합니다. 있어야 할 다리가 하나 없거나 깔끔해야 할 날개가 찌그러져 있으면 기형이라고 간주합니다. 반면 생틸레르는 잔뼈라는 미시적 이념을 갖고 있었기에 길이나 형태를 넘나 들 수 있습니다. 가령 포유류의 목뼈와 척추 크기를 최소화 하고 팔다리의 수를 늘리는 방식으로 잔 뼈들이 결합한다면 포유류를 두종류를 나눌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잔뼈는 모든 동물을 구성할 수 있는 씨앗인 셈입니다. 모든 동물들이 있으니 보편적이지만 어떤 형태나 구조로 모델로 이상화 하거나 완성이라는 말로 굳건화 하지 않습니다. 기형이란 말로 배척의 권력을 작동 시키지도 않습니다. 모두가 변형의 연속적 가정속에 있으니 기형은 없습니다. 역으로 기형이라고 한다면 모두가 기형이라고 해야 합니다. 그러니 더 진화된것과 덜 진화된것을 구별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무의미 합니다. 각자가 처한 생물학적 환경에 적응해야 한다는 생물학적 문제에 대해 잔뼈란 이념이 만들어낸 상이한 답들이 있을 뿐입니다. 나중에 들뢰즈가 즐겨 언급하는 변형의 추상을 가동시키는 추상 동물, 추상 기계는 바로 이 미시적 이념 개념과 이어져 있습니다. 정말 놀랍고 매력적인 이념 개념 아닌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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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험적 경험이란 무엇인가?  초험적 경험이란 경험을 넘어선 경험 입니다. 쉽게 말하면 통상적 경험을 넘어선 경험입니다. 어렵게 말하면 불가능성의 경험입니다. 사유를 하지 않을 수 없게 강요하는 것인데 이는 이게 뭐지, 곤혼스러움을 야기 할뿐 그게 뭔지 도저히 사유할 수 없는 어떤 것을 말합니다.  사유 불가능성의 경험을 야기합니다. 뭔가 보거나 들었는데 뭔지 알 수 없는 것으로 감각 불가능성의 경험을 야기합니다. 요컨데 사유할 수 없는 것을 사유하도록 강요하는 사태와 만나는 경험, 감각 밖에 될 수 없는 감각 불가능한 것과 만나는 경험 입니다.

예를 들어보죠. 1910년대초 화가 칸덴스키의 경험이 그런 경우 입니다. 어딘가 외출했다가 자기 아들리에로 되돌아 왔다는데 아주 낯선 그림이 있더랍니다. 자기 아들리에니 자기 그림 밖에 없을 터인데 처음 보는 그림이었다는 겁니다. 더욱 당혹스러웠던 것은 그게 대체 무엇을 그린 건지 전혀 알 수 없었다고 해요. 그러나 분방한 형태와 색채가 아주 아름다웠기에 홀린 듯 그 그림을 한참 보았다지요. 나중에 보니 자신이 그린 그림인데 어쩌다 옆으로 돌려 놓은 거 였다고 합니다. 이 일로 인해 그는 구체적 형상을 제거해도 아름다운 그림이 가능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이후 구상을 떠나 추상화를 그리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추상화가 탄생한 겁니다. 바로 이런 것이 초험적 경험 입니다. 분명히 눈에 보이기는 하는데 그게 먼지 전혀 알 수 없는 경험, 감각만 될 수 있을 뿐 뭔지 감각 불가능한 것의 경험 입니다.  이 경험으로 인해 칸덴스키는 그림에 대한 발상이나 감각을 바꾸게 되었고, 덕분에 추상화 창시자 중 한사람이 됩니다. 그림이 뭔지 쉽게 알아 봤으면 그림을 바로 세우는 것으로 끝났을 텐데. 알아보지 못했기에 그림에 대한 발상과 감각을 바꾸게 된 겁니다. 추상화의 창시자라는 역사적 인물이 된 거죠. 초험적 경험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죠

칸덴스키가 감각과 결부된 초험적 경험의 사례를 보여준다면 중국의 선사들은 사유 불가능한 것을 사유하도록 강요하는 경우를 잘 보여 줍니다. 가령 어느 스님이 운문스님에게 찾아와 불도를 물었답니다. 부처란 대체 무엇 입니까 ? “뒷간 똥 막대기다” 물었던 스님의 표정이 상상이 가지 않습니까 ? 헉 이게 무슨 소리야. 부처가 뒷 간 똥 막대기라니 다른 선승도 그렇습니다. 달마 대사가 멀리 중국에까지 온 이유가 무엇이냐고, 무엇을 가르치러 온것이냐고 묻는 물음에 조주스님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뜰 앞의 잣나무’ 이말을 듣고 그냥 웃어넘기면 아주 흔한 통상적 경험이 됩니다. 농담이나 말도 안되는 소리를 듣는 흔한 경험이 되고 맙니다. 물음에 절심함이 없을때 이렇게 되죠. 물음이 절실 했다면, 이런 답을 듣고 먼소리야 하고 그냥 웃어 넘길 수 없습니다. 깨달음을 얻은 고승이 물은 사람에게 불도의 요체를 한마디로 깨우쳐 주려고 한 대답이니까요. 그러나 불도에 대해 자신이 알고 있는 이론이나 사유를 다 동원해도 답을 얻을 수 없을 겁니다. 사유해야 하는데 사유할 수 없는 사태를 만나게 되는 거죠. 그러니 사실 대답은 불도에 대해 물었던 사람이 갖고 있던 모든 답을 와해 시키는 대답이고 그 대신 하나의 커다란 의문을 주는 대답입니다.

절실함이란 강도입니다. 물음이 절실했다면 대체 왜 저리 말했을까 ? 하는 의문이 더 없는 강도로 밀려 들어 왔을 겁니다 . 그래서 초험적 경험에서 강도가 중요합니다. 들뢰즈가 사유를 강제하는 폭력이라는 말까지 사용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선사들은 사유를 강제 하기 위해 말 그대로 폭력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몽둥이질을 하기도 합니다. 강도가 없으면 사유 불가능한 것을 그냥 무의미한 말이야 하고 쉽게 흘려 보내지요. 반면 강도적 절심함이 있었다면 사유 불가능한 어떤 것이 사유 속으로 강하게 밀고 들어 올 겁니다. 의문을 낳게 됩니다. 이게 뭐지 왜 그랬을까 ? 부처가 대체 뭐라는 거야. 그 의문과 더불어 비로서 사유가 시작됩니다. 선사들은 그 의문에 자신을 맡기라고 가르칩니다. 의문만 남기고 자신은 사라질때까지...

들뢰즈가 물음이나 문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때문입니다. 답들이 전부 무력화 되었을때 사유는 비로소 시작됩니다. 이미 답을 갖고 있으면 사유할 필요가 없죠. 있는 답들을 돌려 원하는 답을 찾아 내면 됩니다. 상식에 따라 사유할 때 우리는 사유하지 않습니다. 상식이 사유할 뿐이죠. 사유해야 하지만 사유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사유하기 시작합니다. 불가능성에 행사하는 폭력이 바로 초험적 경험의 요체입니다. 사유 능력을 정지 시키는 폭력적 침입이야 말로 우리로 하여금 진정 사유하게 하는 힘입니다. 초험적 경험은 차이의 철학에서 아주 중요한 개념입니다. 통상적으로 우리가 아는 것, 익숙한 것 안에서 따라 이루어 집니다. 이상하다 싶은 차이를 지워 익숙한 것 안에 통념이나 상식을 제공하는 동일성 안에서 감각하고 생각합니다. 낯선 것은 별거 아닌 것 , 오차나 오류 농담이나 헛 소리로 간주하여 흘러 보냅니다. 초험적 경험이란 그 낯 섦이 지울 수 없이 강력해서 익숙한 감각이나 생각을 와해 시키는 경험입니다.

감각과 사유의 무능력 지대로 떠밀고 들어가는 강도적 경험 입니다. 감각 능력과 사유 능력의 불일치가 드러나며 적어도 둘중 하나를 바꾸게 하는 경험 입니다. 이런 경험을 숭고라는 개념으로 설명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신이나 거대한 산이나 폭포 등 경험대상이 통상의 경험으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해서 제대로 표상할 수 없는 경우 발생하는 것이 숭고지요. 확실히 이런 경험도 초험적 경험에 속합니다. 그러나 초험적 경험에는 이런 경험 만 있는게 아닙니다. 앞서 칸덴스키의 경험은 숭고와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운문이나 조주의 대답은 숭고 하긴 커녕 숭고한 것을 박살냅니다. 부처나 불법 처럼 숭고하다고 믿던 것을 똥통에 빠뜨려 버립니다. 숭고라는 개념에 더 나쁜 것은 초험성을 초월성으로 오인하게 한다는 점입니다. 숭고는 초험적 경험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위대하고 거대한 것으로 인도 합니다. 초월자에게 우리를 맡기도록 유도합니다. 특이한 경험을 했다며 신에게 귀의하는 경우를 보신적이 있지요. 그런데 초월자는 신이든 자연이든 사실 대단히 익숙한 관여 입니다. 이해할 없는 것을 모두 그에게 귀속 시켜 이해 했다고 설명되었다고 믿게 해주는 관여 입니다.

익숙한 감각이나 사회에서 벗어난 최소한 경험을 나의 감각과 사유를 크게 바꿔 버릴 좋은 기회를 익숙한 관여 안에 다시 귀속 시키는 겁니다. 초월자는 그렇게 초험적 경험을 망쳐 놓습니다. 숭고 또한 초험적 경험을 망쳐 놓습니다. 초험적 경험을 위해선 임재 선사의 말을 기억하는게 좋습니다. “부처를 만나거든 부처를 죽여라” 초험성에 대한 또하나의 오해는 선험성과 동일 시 하는 것입니다. 선험적이라는 것은 경험에 앞서 경험이 가능하려면 선행 되어야 하는 조건이며,  칸트의 개념입니다. 지금 저기 있는 동물이 고양이 임을 알려면 시간과 공간이라는 형식이 있어야 합니다 . 지금 저기라는 시공간적 조건을 바꿔 어제 거기로 바꾸면 고양이를 보았다는 말을 할 수 없게 되지요. 고양이를 만난다는 경험은 언제 어디서라는 특정한 시공간적 조건속에서만 가능합니다. 더불어 동물, 식물 고양이 개같은 개념들도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경험이 가능하려면 모든 경험에 앞서 존재하는 조건이 선험적 인 것입니다. 이는 따로 경험되지 않고 경험에 좌우되지 않기에 경험을 넘어서고 있다라고 초험적이라고 합니다. 시간이나 공간을 따로 경험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칸트에게 초험적인 것은 경에 앞서 존재하는 경험의 가능 조건을 뜻하고 선험적인 것과 같은 의미를 갖습니다. 이는 경험에 좌우되지 않고 누구든 경험이 가능하려면 있어야 하기에 모두에게 동일한 형식입니다. 모든 이들의 경험에 통일성을 부여하는 형식이지요. 여기서 칸트는 진리의 가능성을 찾고자 했습니다.

들뢰즈 역시 경험이 가능하려면 이런 선험적 조건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초험적인 것에 대한 발견을 칸트의 위대한 업적이라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앞서 보았듯이 들뢰즈에게 초험적인 경험은 이런 선험적 조건 안에서의 경험이 아니라 그것을 와해 시켜 더이상 작동하지 못하게 하는 경험입니다. 사유와 감각의 가능 조건이 아니라 가능 조건을 깨고 뭔지 알 수 없는 어둠을 경험 속으로 불러 들이는 것입니다. 사유 능력이 아니라 사유의 무능력과 연결된 개념 입니다. 그렇기에 사실 들뢰즈의 초험성은 칸트의 초험성과 상반된다고 해야 오히려 적절합니다. 초월성과 선험성, 이는 들뢰즈가 말하는 초험적 경험을 망치는 두개의 적입니다. 비슷해 보이기에 더 치명적입니다. 숭고와 초월성의 사유에서 중요한 것이 거대한 외연적 크기라면 초험성의 사유에서 중요한 것은 강도 입니다. 감각과 사유안으로 밀고 들어오는 강도, 초월자 마저 깨부스는 강도,  선험성에서 중요한 것이 경험을 가능하게 해주는 능력이라면 초험성에 중요한 것은 경험의 불가능성 이 어둠속에 밀어 넣는 무능력 입니다. 어둠의 대지속으로 흩어져 다른 감각과 사유의 거름이 되어 지는 익숙한 것,  알던 것, 판단하게 해주던 것들이 와해 될 때 지금 만난 것에 대한 진정한 경험이 가능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사유와 감각의 불가능성을 강조하는 초험적 경험주의야 말로 진정한 경험주의를 가능하게 해줍니다. 칸트의 선험적이  모든 경험을 지배하는 원리라면 들뢰즈의 초험성은 경험 이전에 모든 원리를 깨부스기에,  경험에게 모든 것을 지배할 권리는 주는 원리 입니다. 경험을 동일화 하는 형식이나 원리를 제거해서 경험속에서 차이가 그 힘을 행사하게 해주는 경험, 그것이 초험적 경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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