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도란 무엇인가 ? 들뢰즈 철학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개념 중 하나가 강도입니다. 차이의 철학에서 중요한 것은 만들어진 차이가 아니라 만들어낸 차인인데 강도가 바로 그것입니다. 존재로서의 차이가 아니라 생성으로서의 차이, 생성하는 힘으로서의 차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강도란 연장의 대립 개념입니다. 그러나 논리적인 외연이 아니라 물리적인 연장과 대립되는 개념입니다. 강도는 쉽게 말해 힘 입니다. 힘은 양입니다. 흔히 양이라고 하면 세거나 비교하기 위해 동질화된 상태를 전제 합니다. 그래서 베르그송은 질의 편을 들어주며 양에 대해 비판 했습니다.그러나 강도는 질 이전에 양입니다. 질을 결정하고 질의 변화를 주는 미시적인 양입니다. 파란색이라 해도 색소의 밀도가 달라지면 다른 파란색이 됩니다. 이때 밀도는 강도의 일종입니다. 그걸 보지 못하고 모두 파란색이라고 하는 것은 강도의 차이를 놓친 채 질에 대해 말하는 겁니다. 잉크가 퍼져 감에 따라 물의 색깔이 달라질때 그 색깔을 다르게 만드는 것은 색소의 밀도 입니다.
새로 글씨를 배우려면, 손가락 근육 각 부분의 강도들을, 강도의 분포를 변화시켜야 합니다. 강도 역시 양인 만큼 크기를 갖습니다. 그러나 크기를 가졌다고 모두 강도는 아닙니다. 직선의 길이나 면적 부피 같은 것은 크기를 갖지만 강도가 아니라 연장에 속합니다. 반면 속도나 밀도 온도는 모두 강도에 속하는 물리량입니다. 어떻게 다를까요 ? 온도가 25도인 방을 둘로 나누면 면적이나 부피는 반으로 줄지만 온도는 그대로 입니다. n으로 나무면 n분의 1로 줄어드는 게 연장이라면 나누어도 줄지 않는 게 강도양입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들뢰즈의 강도 개념을 이해하기에 충분하지 않습니다.
연장이란 늘이는 것 즉 확장을 뜻합니다. 열기가 고르게 퍼져 모든 부분이 동질화된 상태로 확장된 상태가 바로 연장입니다. 어떤 방에 온도가 25도라는 말은 방에 모든 부분이 25도라는 질을 갖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분할하면 각 부분이 25도라는 질적 특징을 동일하게 유지하며 분할 될 겁니다. 연장이 된 겁니다. 잉크가 골고루 퍼져 있는 상태도 그렇습니다. 이는 다른 밀도로 모여 있던 것들이 들뢰즈 개념으로 말하자면 접혀 있던 것들이 고르게 펼쳐진 상태를 뜻합니다. 어떤 영역의 온도나 밀도 같은 물리량 자체가 아니라 미분적 분포의 양상이 연장과 강도를 구별해 주는 것 입니다. 강도란 힘이지만 차이로서의 힘입니다. 붙어 있는 두방의 온도가 같으면 열이동은 발생하지 않습니다. 둘다 10도등 100도등 마찬가지 입니다. 그런데 한방은 10도 다른 한방은 20도라면 그 방사이엔 그 온도차이 만큼의 열의 이동이 발생합니다. 한방은 50도 또다른 방은 60도라면 동일한 강도의 열이동이 발생합니다. 두방의 온도 차이에 대응하는 강도의 운동이 발생합니다. 온도가 아니라 온도 차이가 중요합니다. 하나의 방안에서도 그렇습니다. 방한구석에 난로를 켜면 그 열기는 그보다 온도가 낮은 곳들로 퍼져 갑니다. 온도차가 있는 한 열의 이동이 발생합니다. 고르게 퍼져 온도 차가 없어지면 열의 이동은 더이상 발생하지 않습니다. 온도의 차이가 이동의 강도를 결정합니다. 즉 강도는 차이 입니다.
차이에 의해 작용하는 힘은 모두 강도 입니다. 같은 물체를 지면에서 들어 올리면 위치 에너지가 발생하는 데 높이 올릴 수록 더 커집니다. 이 역시 강도 입니다. 강도가 있다는 말은 차이만큼 접혀 들어가 있다는 말입니다. 강도가 커진다는 말은 온도나 밀도의 차이가 커진다는 말입니다. 강도는 힘이 있는 어디에나 존재 합니다. 스피노자 식으로 말하면 모든 양태가 공유하는 공통 개념인 셈입니다. 우리들이 사는 세상은 어디나 강도들로 가득차 있다는 점에서 강도들의 우주라고 하겠습니다. 강도를 만든다 함은 차이를 만드는 것입니다. 가령 목소리가 크다고 강도가 큰게 아닙니다. 꽥꽥 소리를 질러 대지만 귓가를 그냥 스쳐 가는 경우가 있고 아주 작은 목소리 인데 귀를 잡아 채고 가슴에 까지 들어와 꽂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소리를 잘 다루는 연주자는 크게 연주하는 이가 아니라 아주 작은 소리만으로도 듣는 이를 긴장시키는 연주자 입니다. 강도를 잘 다룬다 함은 차이를 그저 크게 하는 게 아니라 차이의 미묘한 변화를 잘 다루는 겁니다. 그것이 연주자의 강도적인 능력입니다.
그래서 같은 악보로 연주하는 곡이지만 잘하는 연주가 있고 못하는 연주가 있습니다. 같은 곡인데 어쩜 이리 다르지 싶은 연주가 있지요. 감나무에 빨간 감이 가득 달려 있는 것도 시선을 끌지만 마른 가지 끝에 하나 남은 감이 오히려 시선을 강하게 잡아 당깁니다. 강도로 포착한다 함은 대상이 무엇인지를 포착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을 둘러싼 어떤 힘들을 강도적 차이의 분포를 포착함을 뜻합니다. 가지 끝에 매달린 게 감이란 것 알아 보는게 아니라 그 감을 둘러싼 힘들이 만드는 대기를 포착하는 것입니다. 대기속에 스며든 힘들의 분포를 감지하는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마지막 출항 만이 옆에서 기다리고 있는 홀로 남은 감의고독함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대상의 세계에서 벗어나 감응의 세계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는 예술에선 특히 중요합니다. 대상을 정확히 재현하는게 아니라 대상을 둘러싼 힘들의 분포를, 그 분포가 만드는 강도적 분위기를 표현하는 것이 예술가의 능력입니다. 누군가의 얼굴을 정확히 재현하는 것은 그려진 사람이 누구인지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건 예술에 속하지 않습니다. 예술가는 그 사람을 둘러싼 분위기를 표현하기 위해 그 얼굴에서 배어 나오는 어떤 힘들을 표현하기 위해 얼굴속에 강도들을 접어 넣습니다. 렘브란트의 좌상이 훌륭한 것은 자기 얼굴을 정확히 그려서가 아니라 그 얼굴 인근에 그의 삶을 관통한 힘들을 탁월하게 접어 넣었기 때문입니다. 때론 베이컨의 그림처럼 그런 힘들로 인해 얼굴이 뭉개지기도 하고 누군지 알아 볼 수 없게 변형되기도 합니다.
그렇게 들뢰즈는 강도야 말로 감성적인 것이라고 합니다. 칸트가 말하는 감성이란 대상을 수용하는 능력 입니다. 그에게 감성적인 것이란 감성에 의해 적절하게 표상된 대상을 뜻합니다. 그러나 들뢰즈는 진정 감성적인 것이란 그런게 아니라 표상된 것에 의해 가려 포착하기 힘든 강도들이라고 합니다. 표상의 외부고 표상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강도는 감각할 수 있지만 감각밖에 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합니다. 눈에 보이긴 하는데 뭔지 알아 볼 수 없는 것이란 뜻입니다.
뭔지 모르겠는데도 감각 속으로 강밀하게 밀려 들어오는 것 말입니다. 그런점에서 강도란 감각 불가능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칸트라면 감성적 종합이란 대상을 정확히 표상하는 수용이라 하겠지만 들뢰즈라면 대상에서 배어나오는 표상 불가능한 강도를 포착하는 것이라고 할 겁니다. 사실 들뢰즈는 감성적 종합이 아니라 강도적 종합을 말합니다. 그에게는 인식론적 절차가 아니라 존재론적 생성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강도적 종합이란 어떤 대상을 둘러싸고 있는 강도적 힘들이 그 대상안으로 접혀 들어가는 것입니다. 발생중인 배아 속으로 그걸 둘러싼 환경의 힘들이 접혀 들어가며 종별성에서 벗어나는 개체화가 진행됩니다. 강도적 종합이 미분적 잠재성과 분화된 현행성 사이에 비대칭성을 접어 넣는 것입니다.
강도는 이념 개념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념 개념에서 설명했듯이 들뢰즈는 이념을 미분적인 것이라고 합니다. 미분적 관계는 이웃 관계 입니다. 최소 크기의 구성요소들 간에 이웃관계가 이념입니다. 이웃 관계란 뚜렷하게 구별된 항들이 서로 이웃하며 배열된 것입니다. 가령 하나의 유전자는 다른 유전자와 뚜렷하게 구별됩니다. 눈 유전자, 날개 유전자는 물론 어떤 병의 원이이 되는 유전자 들로 구별됩니다. 이것들이 펼쳐지면 어떤 종에 특정 형질이 됩니다. 날개 유전자 날개가 눈 유전자는 눈이 그러나 미분적 상태인 이념에서는 날개 유전자 임이 뚜렷해도 그것이 실제로 무엇이 될지는 애매 합니다. 발생 과정에서 진행되는 강도적 종합이 이 유전자에 없는 외부를 발생 중인 배아 안에 접어 넣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념은 애매하고 뚜렷하다고 합니다. 그 애매함 속에 다른 미래가 접혀 들어 있는 겁니다. 술취한 디오니 소스가 숨어 있는 겁니다.
이와 반대로 강도적인 것은 명료하고 모호합니다. 강도는 힘이고 힘은 힘간의 차이이니 강도는 강도들의 강도 입니다 .모든 강도에는 상이한 강도들이 섞여 있습니다. 강도를 포착한다는 말은 미시적 강도 하나하나를 식별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건 가능하지도 않지만 그걸 식별하려면 정작 중요한 걸 놓치게 됩니다. 모호하게뒤섞인 강도 들로 만들어진 감응의 되기를 말입니다. 강도들은 모호하게 섞여 있지만 그렇게 섞여서 만들어지는 명료함 같습니다. 여러 악기가 모호하게 섞여서 명료한 하나의 소리를 만드는 오케스트라 처럼 말입니다. 음악 얘기를 좀더 하면 악보가 어떻게 보면 이념적 잠재성을 표현한다면 그걸 실제 연주하는 것은 강도적 종합을 통해 현행화하는 것입니다.
악보는 음고와 음가를 갖는 음표 들이 하나하나 뚜렷하게 배열되어 있습니다. 예컨대 바흐의 평균율 피아노 곡집 일에 일번 푸가 악보는 누가 연주를 하던 벗어날 수 없는 규정성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연주자가 어떻게 연주하는가에 따라 다른 곡이 됩니다. 터치의 수직적 강도와 속도의 수평적 강도가 식별 불가능하게 섞여 하나의 명료한 소리를 만들어 냅니다. 굴렌골드의 강도적 종합은 당혹스러울 만큼 다른 곡으로 만듭니다. 존 루이스나 자크 루시에 같은 재즈 피아니스트는 변조의 폭이 더 큽니다. 음고와 음가도 바꾸까요. 그러니 곡의 이념인 악보는 뚜렷하지만 상이한 현행화의 열린 애매함을 갖고 있다 하겠습니다.
잠재성이란 애매함 속에 수많은 규정 가능성을 함축하고 있는 겁니다. 강도적 종합은 현행화로 예상된 지점에서 멀리 벗어나게 밀고 나갑니다. 잠재성은 강도적이고 현행성은 그렇지 않다고 하는 이도 있지만 차라리 반대로 말해야 합니다. 강도적 종합은 핸행화와 휠씬 가까이 있습니다. 반면 이념적 잠재성은 강도적 종합이전에 미분 관계이고, 강도 제로의 상태를 극한으로 갖습니다. 이처럼 강도 제로의 신체를 들뢰즈는 기관없는 신체라고 합니다. 이 신체의 표면에 이러저런 강도 들이 새겨지면서 그것은 분화된 신체가 됩니다. 현행화의 선을 따라 펼쳐 집니다. 그러나 그 펼쳐짐은 강도적 종합에 의해 외부가 접혀드는 펼쳐짐이기에 모두다 펼쳐져 연장이 되는 일은 없습니다. 강도적 분포가 달라지면 지금 이 신체도 다른 신체가 됩니다. 그러한 신체적 변환으로서의 되기가 가능한 것은 모든 분화 밑에 항상 그 기관 없는 신체 순수적 잠재성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상이한 강도적 종합에 열려 있는 잠재성이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다른 삶을 향한 규정 가능성이 모든 규정성 밑에 숨쉬고 있는 것입니다.
들뢰즈는 차이는 잡다가 아니라고 단언합니다. 잡다란 주어진 것으로 부터 차이입니다. 이미 만들어진 차이 입니다. 들뢰즈가 주목하는 것은 만들어 내는 차이 입니다. 강도가 바로 그것입니다. 어떤 존재자를 미분적 관계의 분화에서 벗어난 개체로 만들어 내는 것 그게 바로 강도적 종합입니다. 그래서 개체화하는 차이라고도 합니다. 거대한 존재의 바다에서 그때 그때의 파도를 존재자로 만들어낸 차이 그게 바로 강도로써의 차이 입니다. 강도란 그런점에서 존재론적 차이 입니다. 하이데거의 말대로 존재론적 차이가 존재와 존재자의 차이라고 한다면 말입니다.
'들뢰즈_가타리 > 개념어(DTG)' 카테고리의 다른 글
8. 표현(Expression) (0) | 2021.11.18 |
---|---|
7. 다양체(Multiplicity) (0) | 2021.11.17 |
5. 잠재성과 현행성 (0) | 2021.11.15 |
4. 이념 (0) | 2021.11.14 |
3. 초험적 경험 (0) | 2021.11.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