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의 철학이라고 요약되는 들뢰즈의 철학 가운데에 가장 이해하기 힘든 개념이 아마 이념일 것 입니다. 일단 이념이란 개념이 뜻하는 게 무엇인지 이해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난감한 것은 이념 개념을 포위한 역설적 궁지 입니다. 개념적 어려움은 이 궁지에 기인합니다. 따라서 이 궁지를 이해해야 이념의 개념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념이란 통상 종교나 정치 경제 법 등의 영역에서 주장이나 개념들이 하나의 전체를 이룰 때 사용됩니다. 왕정주의 이념, 시장주의 이념, 맑스주의 이념, 여성주의 이념, 기독교 이념 등등 명제나 개념들이 하나의 전체를 이룬다는 것은 하나의 근본적인 원리에 의해 통일 되어 있음을 뜻합니다. 이런 이유에서 이념은 흔히 자신과 대립되는 것에 대한 억압을 동반합니다.
역사속에는 이념의 이름으로 자행된 수많은 폭력들이 흘러 넘칩니다. 종교적 폭력, 정치적 폭력, 경제적 폭력, 문화적 폭력, 법적 폭력 등등 이념 덕에 잔인성은 양심이나 연민 곤혹 등에 기인하는 주저와 동요를 쉽게 넘어 섭니다. 이념이란 잔인성의 지혜인 셈입니다. 철학에서 이념은 여러 명제나 현상을 통일하는 원리의 지위를 갖습니다. 플라톤에게 이념이란 현실의 존재하는 것들의 완전하고 우월한 모델 입니다. 현실은 이념의 불완전한 복사본입니다. 그러니 인간은 이념에 대한 충실성을 통해 현실을 좀더 이념에 가깝게 만들어야 합니다. 시인처럼 이념에 반하는 방향으로 환영을 향해 가려는 자는 추방되어야 합니다. 칸트에게 이념은 모든 것을 하나의 원리 아래 통합하려는 이성에 초월적 성향이 산출하는 거대한 전체 입니다. 이는 필경 경험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영역을 넘어 버리기에 증명도 반증도 불가능한 판단으로 인도합니다.
이성이 그것을 넘는 순간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출연합니다. 따라서 이율 배반이나 역설 같은 문제가 출연하는 지점은 이성이 넘어서는 안될 한계를 표시합니다. 헤겔에게 이념이란 개념을 현실화하는 주체 입니다. 어떤 것의 존재 이유를 제시하는 강력한 원인입니다. 이념에 부합한다면 현실에 없는 것도 만들어 지고, 이념에 반한다면 현실적 권력을 가진것도 와해되고 소멸합니다. 정치적 이념이 그와 다른 체제를 정복하게 하고, 거기서 벗어난 사람들을 제거하게 만듭니다. 어느 경우든 이념은 모든 것을 하나의 원리 아래 통일하고 통합합니다. 그렇다면 이념이란 차이의 철학이 대결해야 할 첫번째 적 아닌가요. 차이만이 존재한다고 하든, 만들어 내는 차이를 사유의 방향으로 삼든, 이념이란 다른 것을 하나의 원리 아래 동일화 하거나 포섭하고 통합하는 것입니다. 차이와 반대 되는 입장입니다. 그런데 들뢰즈는 이념을 비난하기는 커녕 중심적인 개념으로 다룹니다. 왜 그럴까요 ?
모든 원리나 이념을 동일자라는 말로 비난하는 것만으로는 차이의 철학은 하나의 철학이 되지 못합니다. 차이의 철학이 단지 차이란 개념을 높이 들고, 애찬하는 게 아니라 동일성의 사유와 대결하는 하나의 철학이라면 그것은 사유 전체를 방향짓고 이런저런 명제나 개념을 통일하는 어떤 원리가 있어야 합니다. 차이라는 원리, 차이라는 이념이 있어야 합니다. 그 이념이 모든 개념들의 근저에 자리 잡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념이나 원리를 말하는 순간 차이 철학은 차이의 사유에 반하는 철학이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대단히 난감한 이율 배반이 차이 철학의 출발점에 있음을 보게 됩니다. 차이 철학은 그것이 철학인 이상 이념을 필요로 할 수 밖에 없지만, 동일 원리로 작용하는 모든 이념과 대결하고 분쇄해야 한다는 것, 이것이 차이 철학이 해결해야 할 첫 번째 문제입니다. 이것을 풀지 못하면 차이 철학은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습니다. 이걸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 까요
여기서 들뢰즈는 놀랍도록 탁월한 몇개의 아이디어를 통해 차이의 철학에 부합하는 이념의 개념을 구성합니다. 첫째 모든 것의 답이 되는 원리의 단일성이 아니라 모든 것에 반복하여 던져지는 물음의 일관성을 통해 사유를 방향짓고 철학적 통일성을 구성하는 것입니다. 이전의 모든 이념은 원리를 만능의 답으로 삼거나 답을 구하는 근거로 삼았습니다. 플라톤에게는 이데아가, 기독교에서는 신이, 맑스주의에선 계급이, 자유주의 경제학은 시장이 그랬습니다. 동일한 답이 항상 이미 준비 되어 있으니 이념은 동일자를 가동시키게 됩니다. 그 답과 일치하지 않는 모든 것이 비난이나 억압의 대상이 됩니다.
그러나 물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의 물음은 사유를 하나의 방향으로 향하게 하지만 정해진 답을 반복하는 하는 게 아니라 물음을 반복합니다. 물음을 던지며 확고한 답들을 지워 버립니다. 답이 지워지면 틀린 답도 없어 집니다. 물음은 답을 찾는 방향을 정하지만 억압할 대상을 갖지 않습니다. 물음을 통해 이념을 정리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 사람은 하이데거와 블랑쇼 입니다. 언젠가 하이데거는 말한 적이 있습니다. 진정한 철학자는 평생을 오직 하나의 물음과 대결한다. 존재 물음이 그 에게는 바로 그 물음 이었습니다. 블랑쇼는 하나의 물음이 반복되는 것은 그것이 불가능성을 향해 던져지기 때문임을 암시합니다. 그러는게 불가능하다며 물음 던지기를 포기하는 자는 사유를 포기한 자입니다. 사유하는 자는 불가능하기에 묻기를 영원히 반복하게 됩니다. 얻었던 답을 내려 놓고 다시 묻기를 반복합니다. 영혼 회귀와 반복이 이렇게 하여 물음과 하나로 엮어지게 됩니다. 덧붙이면 답의 불가능성은 사유의 무능력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초험적 경험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차이의 철학에게 차이를 원리로 삼는 것에 어려운 불가능성 이라 해야 할 저 역설적 궁지는 차이에 대한 물음을 반복하여 던지게 합니다. 어디서나 던지게 되는 그 물음이 차이의 철학에 하나의 방향을 부여하고 그 사유가 사용하는 개념들의 통일성을 제공합니다. 그러나 동일하게 반복되는 답과 달리 물음은 던져지는 대상이나 조건, 상황에 따라 다른 길로 인도합니다. 다른 답으로 인도 한다기보다는 다른 문제로 인도 합니다. 여기서 물음 문제란 개념으로 변환됩니다. 들뢰즈는 물음에 반복이 중요함을 강조하지만 물음이 차이 없이 동일하게 던져질 때 사유는 동일한 답들을 반복한다고 경고합니다. 차이 없는 물음의 반복은 별차이 없는 사유의 반복을 낳고 이러한 반복은 필연적인 답의 반복으로 간주되기 쉽습니다. 물음을 제대로 던진다는 것은 조건이나 대상에 따라 달라지는 문제를 발견하는 것, 상황에 따라 다르게 문제화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샤머니즘에 대해 서구적 사회는 쉽게 미신이라고 간주하여 배척합니다. 과학이라는 이름아래 동일자가 가동되는 것입니다. 차이의 철학은 샤머니즘에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요. 다양한 문화의 일종이라는 식의 단순한 인정이나 수용 혹은 샤먼에 대한 고지식한 믿음 , 그 건 배척과 대칭적인 또 하나의 동일자를 가동 시킵니다. 오히려 보통사람과 다르고, 양식과 충돌하는 샤먼의 특이한 현상을 들어내는 것은 무엇인지 ? 샤먼의 그 특이한 능력을 통해 어떤 일이 그들의 세계에 벌어지는 지 ?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다룰 것인지를 물어야 합니다. 차이에 대한 물음은 이처럼 샤머니즘을 풀어야 할 문제로 문제화 합니다. 샤머니즘이 아니라 예술에 대해서라면 분명 다르게 문제화 될 것입니다.
두번째 아이디어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거대한 원리나 거시적 모델이 아니라 어디에나 스며들어 있는 최소 크기의 미시적 보편자로 이념을 정의하는 것입니다. 하나의 거대한 이념은 자신의 모든 것을 통합하여야 합니다. 그러니 자기손에서 벗어나는 것은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있으면 없애 버립니다. 크기의 거대함은 전체 바깥에 있는것에 대한 권력의 거대함이 됩니다. 반면 어디에나 있기 마련인 최소크기의 보편자라면 최대 권력이 아니라 최소 차이를 가진 보편자라면 어떨까요. 심지어 어디나 있기 마련이라는 말로 흡연자의 권력을 행사하려 할 때 조차 그 자체로 최소 크기 힘만을 가질 뿐이니 동일화 하려는 거대한 힘을 행사하기는 어렵지 않을 까요
여기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 것은 미분이론 입니다. 미분은 변화와 운동의 수학입니다. 변화와 결부된 힘을 개선할때 사용하는 보편자가 바로 미분소 입니다. dx dy dt등으로 표기합니다. 미분소는 변화와 운동이 있는 것에 어디에나 사용되는 최소 크기를 표시합니다. 가령 dt는 t 이웃에 있는 점 to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갈때 t와 t0 사이의 거리를 뜻합니다. 한정된 t와 거기에 최대한 인접해 있는 점 t0 사이의 거리입니다. 더없이 작은 크기의 거리 입니다. 두점 사이의 최소 크기의 차이이기도 합니다. dt 는 dx든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혼자서는 아무런값도 어떤 규정도 갖지 않습니다. 보편자지만 그자체로는 어떤 규정성도 없으니 다른 규정들에 대해 동일한 권력을 행사할 수 없습니다. 다른것과 결합해서 상호관계에 들어 갈때에만 어떤 값의 규정성을 가질 수 있습니다. dx-dt=o xdx+dt=0는 dx와 dt의 상호관계를 표시합니다. 여기서 dx와 dt는 결합되어야만 규정성을 가집니다. dt분의 dx는 1, dt분의 dx는 마이너스 x분의 1이런식으로 말입니다. 결합되는 이웃이나 관계가 달라지면 다른 값을 갖게 됩니다. 이웃하는 항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진다는 말입니다. 그 자체로 미규정적인데 이웃항의 달라짐에 따라 수많은 규정 가능성을 갖는 보편자 입니다. 보편자 이지만 이웃하는 항이 자기 안에 들어오면 포섭하고 자기안에 안들어 오면 제거하는 보편자가 아니라 이웃한 항에 따라 자신이 달라지는 보편자 입니다. 초월적 보편자가 아니라 내재적 보편자 입니다.
다음으로 세번째 아이디어는 완성된 이상이나 완전한 원리가 아니라 완성 반대편에 있는 미분화된 배아의 이념에 자리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신이나 이성처럼 최대치로 완성된 현행성이 아니라 씨앗이나 수정란 같이 최소치로 접혀 있는 잠재성으로 이념을 정의하는 것입니다. 분화된 성채가 아니라 미 분화된 배아이기에 발생과정을 거치면서 각자의 조건에 따라 다른 개체가 될 겁니다. 가령 같은 어미에게서 나왔다고 해도 똑같은 두마리 세끼는 없습니다. 발생과정에 끼어드는 조건에 따라 다르게 개체화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잠재성은 외부 조건에 열려 있습니다. 현행화 될때도 차이화의 길을 가게 됩니다. 답이 될때 마다 다른 답이 되는 씨앗으로서의 문제 그게 이념입니다. 물론 미분화된 배아라고 하지만 아무거나분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닭의 알에서 거북이가 나올수는 없고 악어 알에서는 악어가 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배아로서의 잠재성은 규정성도 갖고 있습니다. 앞서 예를 들었던 xdx + dx =0와 dx-dt=3는 다른 규정을 갖습니다. 이웃하는 항과의 관계 즉 미분적 관계가 정해지면 그 규정성도 완결됩니다. 잠재성은 미규정성과 규정가능성에 더해 완결된 규정성을 갖는 다는 들뢰즈의 말은 이런 의미 입니다. 두번째 아이디어와 세번째 아이디어는 이렇게 결합됩니다.
또하나 주목할 것은 xdx + dx =0와 dx-dt=3 모두 답이 아니라 문제라는 사실 입니다. 보다 시피 풀어서 dx/dt 그것의 원시 함수를 구해야 할 문제 입니다. 이념이 문제라는 명제와 이념이 잠재성이라는 명제는 이처럼 연결되어 있습니다. 물음과 문제로서, 미시적 보편자로서, 잠재적 배아로서 이념 개념이라는 세 아이디어가 긴밀하게 결합되어 이념의 개념이 구성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이념의 개념이 거대한 이념의 개념과 다른지는 좀더 구체적인 예를 볼때 분명해집니다.
가령 생물학에 이념이라는 말로 흔히 떠올리게 되는 것은 유기체 입니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기관들의 유기적 통일체를 뜻합니다. 기관은 즉 오르간(organ) 도구라는 뜻입니다. 큐비에(Cuvier) 이를 바탕으로 동물 분류학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들뢰즈는 조르프 생틸레르를 빌어 최소 크기 잔뼈야 말로 동물학의 이념이라고 말합니다. 잔뼈 들의 결합을 통해 다양한 양상들의 동물들이 구성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념이란 상이한 개체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원리이고 또한 구조 입니다. 유기체도 잔뼈도 모든 동물들에게서 발견되는 공통의 구조라는 뜻입니다. 이념에 비추어 동물을 파악할때 큐비에는 기관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이상적 모델을 상정합니다. 초월적 모델입니다. 그러나 잔뼈는 동물의 모델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이웃한 잔뼈들과의 미분적 관계에 따라 다른 기관이나 다른 신체를 만듭니다. 그렇게 종이나 문 같은 벽을 넘는 변이의 연속성 속에서 신체를 구성합니다. 큐비에라면 원숭이와 문어는 문을 달리하기에 다른 신체 구조를 갖고 따라서 서로 넘나들 수 없는 불변성의 벽으로 분리되어 있다고 할 것입니다. 구조적 형태 완전성이라는 척도를 적용 해 더 진화된 것과 덜 진화된 것을 구별합니다. 있어야 할 다리가 하나 없거나 깔끔해야 할 날개가 찌그러져 있으면 기형이라고 간주합니다. 반면 생틸레르는 잔뼈라는 미시적 이념을 갖고 있었기에 길이나 형태를 넘나 들 수 있습니다. 가령 포유류의 목뼈와 척추 크기를 최소화 하고 팔다리의 수를 늘리는 방식으로 잔 뼈들이 결합한다면 포유류를 두종류를 나눌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잔뼈는 모든 동물을 구성할 수 있는 씨앗인 셈입니다. 모든 동물들이 있으니 보편적이지만 어떤 형태나 구조로 모델로 이상화 하거나 완성이라는 말로 굳건화 하지 않습니다. 기형이란 말로 배척의 권력을 작동 시키지도 않습니다. 모두가 변형의 연속적 가정속에 있으니 기형은 없습니다. 역으로 기형이라고 한다면 모두가 기형이라고 해야 합니다. 그러니 더 진화된것과 덜 진화된것을 구별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무의미 합니다. 각자가 처한 생물학적 환경에 적응해야 한다는 생물학적 문제에 대해 잔뼈란 이념이 만들어낸 상이한 답들이 있을 뿐입니다. 나중에 들뢰즈가 즐겨 언급하는 변형의 추상을 가동시키는 추상 동물, 추상 기계는 바로 이 미시적 이념 개념과 이어져 있습니다. 정말 놀랍고 매력적인 이념 개념 아닌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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