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현이란 무엇인가 ? 들뢰즈의 철학에서 표현이란 개념은 2번 나타납니다. 한번은  <스피노자와 표현문제>  및 그와 같은 시기에 쓰인  <차이와 반복>과 <의미의 논리>에서,  다른 한번은 가타리와 함께 쓴 <천의 고원>에서 입니다.  순화해서  말하는 게 되겠지만 초기에 표현 개념은 재현 개념가 대비 되고, 천의 고원에서 그것은 흔히 내용의 짝이라고 간주되는 형식개념을 대체합니다. 여기서는 초기에 표현 개념을 다루고 후자는 이중 분절의 개념을 다룰때 다시 언급하겠습니다.  표현 개념은 들뢰즈의 철학에서 매우 중요하지만 그의 유명한 개념들 처럼 표면에서 사유를 선도하기 보다는 뒤에서 그 사유를 방향짓는 연출자 같은 위상을 갖습니다. 특히 <의미의 논리>는  전체적으로 이표현 개념에 의해 직조되고 있으나 이 개념은 심지어 감추어져 있다는 느낌마저 줍니다. 화려한 문장으로 펼치며  드러내기 보다는 간결한 문장에 접어 넣으며 감추는 그의 스타일을 생각나게 합니다. 표현 개념이 면밀하게 천착되는 것은 <스피노자와  표현문제>이지만 스피노자의 개념이 생소할 것이기에 예를 통해 표현 개념에 다가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표현 개념의 이해를 위해 들뢰즈는 둔스 스코트(Duns Scotus)가 들었던 예를 다시 사용합니다.  금성을 표현하는 두가지 명칭이 그것입니다.  새벽에 동쪽 하늘에 보이는 금성은 샛별이라고 하고,  초저녁 서쪽하늘에 보이는 금성은 개밥바라기고 합니다. 하나의  동일한 별이 두개의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겁니다. 중국에서도 마찬가지여서 가령 시경에서는 ‘동쪽에 개명이 있고, 서쪽에 장경이 있다’고 쓰고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관찰되는 시간과 위치가 달라서 두개의 다른별로 오인된 것일까요.  그건 아닙니다.  다들 같은 별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다른 이름으로 불린 것은 해뜨기 전 마치 떠오르는 해의 전조처럼 보일때와 해진 직후 무언가 끝났음에 증표 처럼 보일때의 감흥이 다르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 다른 감흥이 다른 이름, 다른 기호로 표현된 것일 겁니다.  이중 어떤 이름이 금성의 본질에 부합하는 표현일까요  어리석은 질문이죠.  둘다 금성의 본질에 부합하는 표현입니다. 샛별은 새로운 하루의 시작을 표현하기에 적합하고,  개 밥그릇에 시선을 주는 것을 뜻하는 개밥바라기는 하루가 끝나며 시작되는 휴식의 시간을 표현하기에 적합합니다.  샛별의 시선을 빛으로, 별로,  바라는 것으로 잡아끄는 힘으로 표현한다면  개밥바라기는 목적 바깥의 것,  개 밥그릇이라는 주변적이고 소소한 것에 시선을 주는 여유를 표현하니까요.
 
떠 오름과  가라 앉음 이라 해도 좋을 겁니다. 두표현 모두 표현되어야 할 것을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샛별이 찬사를 위해서 자주 쓰이는 반면 개밥바라기는 잘 쓰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개밥바라기라는 표현이 샛별 보다 열등하다거나 부적절하다고 할 순 없습니다. 표현되어야 할 것을 적절히 표현하는 것이라면 모든 표현은 동등한 가치를 갖는다고 해야 합니다. 이를 표현적 가치라고 합시다. 그러나 모든 표현이 동등한 가치를 갖는 다는 말은 아닙니다.  누군가를 처음 사랑하게 되었을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사랑해요 그대는 나의 첫 사랑이에요’ 라고 말하는 것과 ‘그대가 내 목소매를 잡고 물고기를 넣었어요. 내 가슴이 두마리의  하얀 송어가 되었어요’ 라고 말하는 것을 두고 같은 가치를 갖는다고 할 순 없습니다. 
 
각각의 표현은 표현되어야 할 것을 얼마나 적절히 표현하고 있는 지에 따라 다른 가치를 갖습니다.  이 말은 재현적 가치와 대비 됩니다.  재현이란 어떤 대상을 최대한 정확하게 묘사할 것을 요구 합니다. 그러니 원본과 가장 비슷한 것이 최고의 가치를 가지며 재현의 정도에 따라 좋고 나쁨의 서열이 있습니다. 가령 스피커에 대해 평가를 할때 원음을 얼마나 정확하게 재생하는 가를 기준으로 삼는 것을 흔히 보게 됩니다. 이 경우 스피커는 재현 능력에 따라 가치를 평가 받게 됩니다. 재현적  가치에 따라 등급의 우열이 발생합니다. 그러나 원음의 모방을 가치의 척도로 삼기에 아무리 비싸고 좋은 스피커로도 이류, 삼류의 소리 불완전하고 열등한 소리를 듣게 됩니다. 재현주의자의 값비싼 불행 입니다. 

 

 

표현주의자는 다르게 봅니다. 소리란 진동이고 악기마다 다른 방식으로 진동을 만듭니다.  첼로가 현을 문질러 진동을 만든다면 스피커는 종이를 울려 진동을 만듭니다.  악기들과 다른 음향적 표현 능력을 갖는 것이지 그보다 못한 표현 능력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스피커의 가치는 원음을 최대한 유사하게 재현 하는 지가 아니라 종이에 울림이 갖는 표현 능력을 이용해 얼마나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지에 따라 평가해야 합니다. 악기에 없는 방식으로 멋진 소리를 만들어내는 스피커가 있다면 악기와 다름 없는 독자적 지위를 얻었다고 평가해야 합니다. 이런게 표현적 가치입니다. 재현적 가치는 원본이나 모델을 모두 재현의 척도로 삼기에 초월적이라면, 표현적 가치는 표현하는 것이나 표현 능력을 각자의 척도로 삼기에 내재적 입니다. 
 
다시 금성 얘기를 하면 금성이라 하나의 별을 두고 샛별과 개밥바라기라는 상이한 표현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의 동일한 사물이지만 다른 표현을 통해 의미가 표현되고 있습니다. 금성을 주어로 다시 말하자면 금성은 저 두표현을 통해 상이한 양상으로 자신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표현은 두개로 제한될 이유가 없습니다.  자기를 표현하는 수많은 표현들이 가능하고, 그 표현은 표현하려는 바에 부합하는 한 각각 독자적 가치를 갖습니다.  들뢰즈는 이처럼 자신을 표현하는 것과 표현 그것을 통해 표현되는 것의 삼항을 하나로 묶어 표현의 삼항성이라고 명명 합니다. 이 삼항성은 기호와 의미, 기표와 기의 같은 기호의 이항성과 대비 됩니다. 이는 원본과 모사, 재현과 재현되는 것이라는 재현의 이항성과 상응 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는 두개의 항에 하나를 덧 붙이는게 아닙니다.  삼항성 속에서 기호와 의미의 개념은 물론 그것을 통해 포착하려는 것이 달라지게 됩니다. 

 

 

첫째 표현으로서의 기호,  재현적 관점에 따르면 재현적 기원은 아무리 많아도 많다고 할 수 없습니다. 기호들이 원본을 재현해야 하는 한 기호들의 의미는 오직 하나일뿐이기 때문입니다.  그하나를 가장 충실히 재현하는 것이 승자가 됩니다. 반면  하나를 표현하는 다른 기호들 역시 하나의 주위를 돌지만 표현하려는 바가 다른 한, 상이한 기호들 각각 이 독자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샛별이 선호 된다고 샛별에게 승자의 지위를 줄 순 없다는 말입니다. 표현적 차이 모두가 긍정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표현되는 것으로서의 의미,  재현적 기호에서 재현되는 것은 원본입니다.  즉 기호가 지시하는 대상이나  말하려는 의도가 기호의 의미 입니다.  그러나 표현적 기호에서 중요한 것은 지시체나 의도가 아닙니다. 샛별도 개밥바라기도 모두 금성을 의미한다고 한다면 그 말의 차이를 모르는  것이라고 그말의 의미를 모르는 것이라고 해야 합니다. 첫사랑에 대한 앞서 두문장이 동일한 의도를 표시하니,  동일한 의미라고 한다면 그 문장을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첫 사랑을 전하려는 의도만이 아니라 목소매로 집어 넣었을때의 놀라움,  송어가 된 가슴에 설렘과 생동이 표현되고 있는 것이니까요 다른 의미가 표현 되고 있는 겁니다.  표현이 달라지는 만큼 표현된게 달라진 겁니다.  따라서 표현에서는 무엇을 표시하는 가가 아니라 어떻게  표현하는 가가 중요합니다.  

 

의미란 이처럼 다른 표현에 의해 다르게 표현되는 것 모두 입니다.  같은 지시체를 갖지만 강아지와 개새깨는 다른 의미를 갖습니다. 심지어 같은 단어 조차 조건과 맥락에 따라 아주 다른 의미를 갖습니다. 가령 늑대란 말은 양과 대비 될땐 약자를 위협하는 악을 개와 대비 될때 길들여지지 않는 야생성을 여성과 짝이 되면 음흉함을 보름달과 연결 될땐 광기나 괴물 성을 의미합니다. 재현적 기호로서의 늑대란 어느 경우나 뾰족한 두귀를 가진 잿빛 동물을 상기 시킬 뿐이지만 표현적 기호로써의 늑대는 이 모든 의미들을 그때 마다 다르게 불러 냅니다. 

 

셋째 자기를 표현하는 것, 삼항적인 기호개념에서 이는 지시체를 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는 표현적 잠재성을 뜻합니다.  금성은  샛별이나 개밥바라기 말고 다른 표현을 가질 수 있습니다. 늑대  역시 접속하는 이웃이  달라지면 앞서와  다른 의미들을 가질수 있습니다. 그 이웃이 정해지지 않은 늑대란 말은  무의미 하다 해야 합니다. 이웃에 따라 달라질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겁니다. 의미가 없다기 보다는 너무 많은 의미가 자기를 표현하는 것 안에 접혀들어가 있는 겁니다. 표현 개념의 역량은 늑대 보다는 늑대 인간이나 흡혈귀 혹은 곰으로 변신하는 신화속의 인간처럼 혼합과 변이가 문제가 되는 경우에 좀더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동물 되기라는 나중에 개념이 이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재현적 관점에서 보면 가령 늑대 인간은 그에 상응하는 지시체를 갖지 않습니다.  거짓이란 의미에서 허구적 존재자고 은유적 상상의 산물일뿐입니다. 물론 재현적 사고는 여기서도 모방과 재현의 관념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모방이란 개념을 따라 신체를 분할 하며 훑어 내려갈 겁니다. 머리는 늑대와 비슷하고 몸은 인간과 비슷하고 만약 그 늑대 입에 두갈래의 혀가 있다면 다시 머리를 분할해 늑대를 모방한 것과 뱀을 모방한 것으로 나눌 것입니다.  지각의 유사성이 자신이 알고 있는 개념과 동일한 것에 이를 때까지 내려가는 겁니다. 이럼으로써 어떤 허구적 대상도 모두 모방으로 설명할 겁니다. 사실 이렇게 보면 모방 아닌게 어디 있을 까요  외계인의 비행접시도 우리 식탁의 접시를 모방한게될겁니다. 그리고 그걸 하나의 유기체로 통합하여 늑대 같은 인간이라면 인간의 일종으로 유비할 겁니다.  잔혹하다거나 악하다 같은 대립적인 술어를  그 괴물같은 인간에게 할애 할 겁니다.  ‘개념의 동일성, 지각의 유사성,  판단의 유비,  술어의 대립’은 재현의 사중 굴레라고 들뢰즈는 말합니다. 

 

표현적 관점에서 보면 늑대 인간이란 그말로 자신을 표현하는 어떤 개체를 표현하는 말입니다. 인간인지늑대 인지 모를 평범하지 않은  어떤 특이성의 표현입니다. 인간과 동물을 구별하는 선을 가로지르는 어떤 특이한 힘과 감응이 그 말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저건 짐승의 소리야  제니스 조플린(Janis Joplin) 노래를 듣고 누군가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허구가 아니라 자신이 들은 실제 소리를 표현하는 말입니다.  소리의 감흥이나 들은사람의 지각 관념에 따라 늑대 소리 살쾡이 소리 라고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표현들로 인간의 목소리도 아니고 늑대 소리도 아닌 어떤 소리가 자기를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거기에 늑대나 여우는 없지만 늑대 란 말로 표현된 특이한 소리는 실제하고 있는 겁니다. 늑대 인간도 마찬가지 입니다.  거기에 늑대는 없지만 늑대 인간 이라 불릴만한 무엇은 있습니다. 샤먼의 언행이나 신화에 등장하는 인간과 인간 아닌것에 혼합물은 대개 이런 힘과 감흥의 표현입니다. 
 
늑대의 소리로 노래하는 사람, 늑대처럼 빠르게 움직이는 사람은 허구가 아니라 실제 입니다. 늑대 인간도 그렇습니다. 그 말은 신체를 관통하는 힘들의 강도적 분포를 표현하는 것이기에  충분히 물리적이고 현실적인 진실성을 갖습니다.  늑대와 인간 이란 말의 표상에 가려 보이지 않는 늑대도 아니고 인간도 아닌 어떤 실제가 거기 있는 겁니다. 그 말에서 중요한 것은 늑대와 인간이 결합된 이미지를 표상하는 게 아니라 그 말로 표현된 어떤 힘과 감흥을 포착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단지 허구적 상상의 산물로 간주하는 순간 그것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사라지고 맙니다. 표현과 표현된 것을 기호와 의미라고 했지만 이때 기호는 언어적인 기표가 아니고 의미는 기의가 아닙니다. 늑대 인간은 기호지만 그것은 단지 의미나 상징이 아니라 신체성을 갖는 실재를 표현합니다.  표현적 관점에 선다함은 비유나 은유에서 조차 그것으로 표현된 현실의  강도적 상태를 포착하려 함을 뜻합니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안티 오이디프스>에서 은유는 없다고 반복하여 말하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표현으로서의 기호와 그 의미는 의미론 이전에 존재론에 속합니다.  들뢰즈가 표현 개념을 이렇게 다듬은 것은 스피노자의 철학을 통해서 였다는 사실이 이를 잘 보여 줍니다. 

 

거기서 삼항성은 실체와 속성 양태 같은 개념들과 관련 된것입니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신 즉 실체는 상이한 속성들로 자신을 표현합니다. 사유와 연장 쉽게 말해 정신성과 물질성은 신이 자신을 표현하는 상이한 표현 들입니다. 이 표현들을 통해 신의 본질이 각이한  방식으로 표현됩니다. 이는 속성과 양태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로 해당됩니다. 속성은 수많은 양태들을 통해 자신을 표현합니다.  양태들 각각은 속성의 상이한 표현입니다.  이표현을 통해 속성이 양태화 하는 작용이 즉 양태를 생산하는 작용이 표현됩니다.  스피노자의 신은 자연을 뜻합니다. 그러니 이러한 표현 개념은  다양한 양태로 존재하는 자연의 존재론에 속한다 해야 합니다 .기호의 의미마저  실제로 다루려는 입장과 강한 연속성이 있다고 보이지 않나요 

 

 

 

금성 vs. 개밥바리기

 

'들뢰즈_가타리 > 개념어(DTG)' 카테고리의 다른 글

10. 특이점과 특이성(Singular Point & Singularity)  (0) 2021.11.21
9. 사건(event)  (0) 2021.11.19
7. 다양체(Multiplicity)  (0) 2021.11.17
6. 강도(Intensity)  (0) 2021.11.16
5. 잠재성과 현행성  (0) 2021.11.15

+ Recent posts